♣한성진목사

청지기의 관문(벧전4:9-11)

공 상희 2010. 9. 10. 17:04
청지기의 관문(벧전4:9-11)

이 시간에는 ‘청지기의 세 관문’이라는 제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하나님 나라의 보물을 맡은 귀한 청지기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 보물들은 권력과 지혜와 부요와 하늘의 은사와 양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등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싫어 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중요한 직책을 가지려면 통과해야 하는 여러 관문들이 있는데 이것은 중요한 직책이거나 경쟁이 심할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귀한 것을 맡기시기 전에 과연 합당한지 시험하시기 위해서 여러 개의 관문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이 관문들을 잘 통과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청지기의 사무를 맡겨 주십니다. 얼마나 가슴 설레이는 말씀입니까? 이 말씀 듣고 모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귀한 청지기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그 관문은 과연 무엇일까요?

1. 믿음의 관문입니다.

즉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것들을 맡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약1:17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했고, 고후9:8에도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주님의 청지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관문 통과에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수르광야에 들어온지 사흘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물도 양식도 주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 물이 발견되었지만 그 물은 독이 든 쓴물이었습니다. 수백만 백성들에 아이들은 보채고 수많은 짐승들이 굶주렸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것이 바로 믿음의 관문임을 아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먹여 주시겠다고 하시자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하며 의심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민11:22-23)고 하시면서 온 지면에 있는 메추라기를 바람으로 몰아 이스라엘 진에 넘치도록 공급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의 관문을 잘 통과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말씀 사역자에게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한 주간 내내 준비했지만 강단에 올라설 때까지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혹은 물질사역자에게 물질을 주시지 않고, 능력사역자에게 능력을 주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해도 주시지 않을 때는 이 믿음의 관문 통과의 시험인줄 알고 끝까지 믿고 의심하지 말고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치 물 위를 믿음으로 걸었던 베드로처럼 온전히 믿음에 서야 합니다. 3,000명의 고아의 아버지 죠오지 뮬러처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지출만 있지 공급이 없는 청지기라면 어느 누가 할 수있겠습니까?

2. 충성의 관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족치 않는 작은 일로 그 충성심을 시험하십니다. 마25:21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큰 것을 좋아하지 작은 것에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부터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큰 것을 맡기십니다.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삼기 전에 먼저 보디발의 집에 종살이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그 집에서 처음에는 힘든 막노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남의 일처럼 하지 않고 자기 일처럼 착실하고 충성되이 하자 주인은 가정총무를 맡겼습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 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도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러자 간수가 그를 감옥의 죄수들을 관리하는 직책을 주었고, 그 직책에 충성하고 있었을 때 그가 애굽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 줌을 통하여 거대한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의 관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큰 것을 주시면 큰 일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에게 주신 작은 것 하나라도 주님의 뜻대로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큰 것을 맡기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작은 것들을 통해서 시험해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서 하는가를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한 두명 모이는 곳에도 부흥회 가게 하시고, 나도 쓰기에 부족한 돈이지만 구제하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신 것에 충성하기보다는 남과 비교하고 더 많은 것만 달라고 탐욕만 부립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이래서는 충성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벗으로 삼으시고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며 하늘의 별과 해변의 모래와 같은 자손의 복을 주시기 전에 바로 아들을 가지고 이 시험하셨습니다. 100세에 얻은 그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 번제로 태워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고 아침 일찍 일어나 그 일을 실행했습니다. 멀리 사흘 길을 가서 모리아산에 이르러 그 곳에 아들을 눕혀놓고 칼로 찌르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 사자의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내가 이제야 네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시면서 큰 복을 주시지 않았습니가? 우리 성도들도 다 이 충성의 관문에서 합격하시기를 바랍니다.

3. 겸손의 관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벧전4:10-11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했습니다.

내가 한 것으로 알면 큰 일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를 쓰셔서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또 내 힘도 내 마음도 내 생각도 아닙니다. 주님이 힘 주시고 마음 주시고 생각주셔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도구의식 청지기 의식이라는 겸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마음 놓고 사용하실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은 대개 하나님께서 큰 것을 맡기실 때 교만하기 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겸손하지 않으면 결코 큰 것을 맡기시지 않습니다. 이미 맡기신 것도 교만해지면 빼앗으십니다. 그 예로 사울이 겸손할 때는 그를 왕으로 세웠지만 자기 뜻대로 하려하자 그 자리를 빼앗으셨음이 좋은 예입니다.

우리는 영광을 얻을 때가 위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영광을 얻지 못했을 때는 사울의 사랑을 독차지 했지만 물매돌로 골리앗을 죽여 블레셋을 물리쳤을 때 백성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했을 때 그 때가 위기였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다윗은 생명을 찾는 사울의 시기를 받아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영광을 나타냈을 때 교만의 시험은 우리를 죽이려고 쫓아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과 사울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이 겸손의 관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의 관문에서 영광을 주시면서 시험하십니다. 그 때 겸손해야지 내가 잘해서 그런줄 알면 낭패입니다. 그것이 전부인양 날뛰면 하나님께서는 주신 것 마저도 거두십니다. 그러나 겸손하고 겸손하고 또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귀하고 더 큰 것을 주시고 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낮추어졌을 때 노해서는 안됩니다. 옷로비 사건으로 증인들 중에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은 반대로 누군가는 참말을 하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누군가는 혐의가 없거나 아니면 혐의가 미미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혐의가 없는데도 온 나라에 창피를 당할 만큼 낮추어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야고보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선을 행했어도 정죄 당하고 매를 맞고 죽게 되어도 나의 낮아짐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의 점수를 많이 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큰 것을 주시기 전에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버리셨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낮추어 시험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것을 주시기 위한 시험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매일 우리를 시험해 보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온갖 모함이며, 있는 일 없는 일, 침소봉대, 장점까지도 약점으로 바꾸며, 정신적 물리적 법적 무슨 일이라도 다 하지만 그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자리에 설 망정 예수님을 못 박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두 이 겸손의 관문에서도 합격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참된 모본이신 예수님을 본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믿음과 충성과 겸손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을 가지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시고 죄인를 섬기시는데 충성하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이 다 소유하셨어도 한 번도 교만해 보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여 만유로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귀한 청지기로 쓰시기 위해서 그 합당성 여부를 위해서 여러 관문에서 우리를 시험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관문에서 합격하시기를 바랍니다. 충성의 관문에서 합격하시기를 바랍니다. 겸손의 관문에서 합격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쓰시는 도구가 되어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이 우리를 통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여야 하겠습니다. 이 귀한 청지기의 축복을 사모하시고 붙드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