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없으면 고전13:1-3 (요약) 아무리 귀한 은사도 사랑으로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사랑이 없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1절). 즉 사람의 방언처럼 알아듣기 쉽고 천사의 말처럼 귀한 진리일지라도 울리는 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또 사랑이 없으면 귀한 능력도 무가치하다(2절). 사랑 없는 예언은 받지 않은 것만 못하고 귀한 지식과 믿음도 사용하지 않으니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3절). 왜냐하면 좋은 일도 자원함이 아닌 억지로 할 때 시험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 이 시간에 함께 나눌 말씀은 “사랑론”입니다. 이 사랑론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를 성경을 통하여 살펴 보고자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사랑장인데 그러나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고전 13장은 12장 은사장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를 가르쳐 주는 곳이 고전13장입니다. 그럼 먼저 은사란 무엇일까요? 고전 12장의 9가지도 은사입니다. 여기에는 말씀 지혜 지식 믿음 병고침 능력 예언 영분별 방언 통역 등이 있습니다. 혹은 은사란 롬 12장을 보면 섬김 가르침 권위 구제 다스림 긍휼 베풂도 은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중 한 가지라도 잘 하실 수 있다면 그 방면에 은사를 받으신 줄 아시기 바랍니다. 엡4:11에도 은사가 나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러한 직분도 은사입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가 서로 예수님의 몸된 지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모두 은사를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 어느 한 부분 은혜롭지 않거나 신령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 은사가 얼마나 나타났느냐 하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그 차이만 다를 뿐 모든 성도들은 모두 은사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은사충만하도록 힘써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 귀한 은사를 어떻게 감당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그 답을 한 마디로 사랑이라고 교훈합니다. 이 사랑의 진리를 모른다면 그것은 어린이나 강도에게 칼을 맡기는 것이나 같습니다. 저는 뛰어난 은사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 은사로 인해서 큰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이는 차라리 받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 때문이었느냐? 사랑의 유무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깊이 의미가 있습니다. 1. 사랑이 없으면 아름다운 결과를 맺지 못합니다. 1절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그랬습니다. 여기 사람의 방언은 세상 나라의 온갖 언어를 뜻합니다. 우리나라 말도 중요하지만 세상 여러 나라의 언어를 구사한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의 방언이란 각국어라는 뜻만이 아니라 아동 청년 장년 노년 특수 각계각층의 언어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그들의 심리에 맞는 용어나 자료로서 가르친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청소년들이 쓰는 용어를 일반 장년들은 모릅니다. 아이들이 “짱입니다요” 그러는데 우리 장년들 짱이 무엇입니까? 얼짱이 뭡니까? 얼굴이 최고라는 말입니다. 이런 용어 씀이 바람직하느냐를 떠나 이것을 알지 못하면 그들과 대화가 안 됩니다. 얼마 전 일본에서는 개가 짓는 소리를 연구해서 개 말까지 풀이한 적도 있습니다만 세계의 온갖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아주 귀한 일입니다. 이 언어로 복음이 전파될 때 알아듣지 못한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알아듣기 쉽게 잘 말씀한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듯 아무 결과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천사의 말이란 예수님의 아름다운 복음입니다. 이 천사의 말이란 기쁜 소식이요, 구원의 소식이요, 의문에 대한 해답입니다. 성경을 연구하여 감추인 놀라운 하늘의 비밀을 드러낸다면 그것이 천사의 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역시 참으로 귀한 은사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됩니다. 그것만으로는 누구도 감동시킬 수 없고 결과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란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어 들으려면 듣고 지키려면 지키고 은혜를 받든지 안 받든지 알아서 하라는 식이 되면 마음으로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 사랑한다면 그 말씀이 각인의 심령에 떨어져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맺도록 눈물로 기도할 것이고 그 사랑의 말씀을 아무도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관계가 아주 중요합니다. 서로 관계가 나쁘면 천사의 말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랑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2. 사랑이 없으면 귀한 능력이 있어도 무가치합니다. 2절에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그랬습니다. 바울은 사랑의 중요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은사의 귀한 면을 부각시킵니다. 여기 예언하는 능력이 나옵니다만 예언 얼마나 귀합니까? 사람들이 기독교 무당이 되어 길흉이나 말해 주고 실용적으로 사용해서 문제이지 신앙을 영적으로 잘 지적해서 지도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은 귀한 것입니다. 마치 종합병원의 진료카드와 같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책임 있게 말씀 혹은 은사적 상담을 통해서 지도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을 실시하는 교회들도 있는데 참으로 유익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별 것을 가졌어도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아무도 그 사람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성도들은 은사적 상담을 아는 사람에게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비밀이 드러날 것 같으니까. 그러나 예언하는 사람이 어머니와 같이 사랑하고 따뜻하며 잘 덮어주고 따독거려 준다면 어느 누구도 그를 피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예언 은사가 아무리 뛰어나도 성도들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도망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에요. 사랑이 없으면 귀한 것을 가졌어도 부흥의 장애요소가 되요. 또 여기 지식이 나옵니다. 모든 지식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문도 다 풀어줄 수 있고 어떤 문제도 척척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물론 가정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 지식도 하나님께서 은사로 부어주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이디어 뱅크 정보 은행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 역시 귀한 일입니다. 전에 노회 군목부에서 전방시찰 가면서 차 안에서 사과를 먹어야 하는데 씻을 물도 없고 칼도 없습니다. 그 때 제가 사과 먹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과를 조금 입으로 떼어서 그것으로 문지르라 하니 문지르고 화장지로 닦으니 깨끗이 씻어졌습니다. 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번은 해외 선교지를 순방 갔는데 여러 사람이 배탈이 나서 고생할 때 제가 숯가루를 먹였더니 모두 좋아졌습니다. 여러분 아무 것도 아닌 지식이지만 지식이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한 지식일지라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무용지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주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뛰어난 지식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가르쳐 주어도 믿지 않고 무시들을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르쳐 주어도 듣지 않으면 얼마나 속상합니까? 이렇게 늘 속상한 사람은 이제는 죽어가도 놔 둬버립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귀한 지식도 무용지물입니다. 쓰레기통에 내던질망정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멸망으로 가는 영혼을 건지는 것이니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이 귀한 복음을 가졌어도 사랑 없이는 그 복음이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다면 무시를 당하고 핍박을 당해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그 어떤 지식을 가졌어도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은 역시 사랑이 없다면 그 귀한 믿음을 생명 바쳐 봉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없는 자의 손에 그 무엇을 들려준다 한들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모두 다 사장시키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이란 귀한 것입니다. 3.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3절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 모든 것으로 구제함과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더 큰 희생이 있을까요? 그런데 이런 희생을 하고서도 사랑이 없다면 큰 문제가 생겨나고 말 것입니다. 그 문제란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이고 그 유익 없음이란 그것으로 인해 내가 시험 들고 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네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하실 때 그가 얼마나 근심했습니까? 그가 주님을 사랑하는 맘도 없고 이웃을 사랑하는 맘도 없이 그의 재산을 구재하기 위해 내놓았다면 마치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크게 시험에 들었을 것입니다. 사랑 없으면 해 놓고도 시험에 듭니다. 물질도 그러한데 자기 목숨이라면 얼마나 더 시험에 들까요? 선교사로 자기 일생을 바치는 것도 그래요. 사랑이 넘쳐서 스스로 하려고 할 때 그게 은혜가 되지 억압에 의해 간다면 하루도 감당하지 못하고 불평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를 의해 쓰지 않고 주를 위해서 쓰겠다는 것이니 가장 귀하고 귀한 일이지만 주님을 사랑함이 없다면 아무 은혜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다면 나에게 아무 유익이 없고 아니 한만 못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시기에 우리 위해 독생자를 주셨어도 후회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결실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어떤 능력도 무가치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일도 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도 구하지만 그 은사를 잘 감당할 사랑을 구하십시다. 그래서 가장 귀히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