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부활절

부활의 4대 축복 (요20:21-23)

공 상희 2010. 4. 14. 12:08

부활의 4대 축복 (요20:21-23)


이 시간에 “부활의 축복”이라는 제목입니다. 부활이란 다시 사심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두려워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찾는 자에게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놀라운 복을 주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받은 복은 무엇일까요?


1. 평강의 축복입니다.


요20:19에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축복하셨습니다. 21절에도 또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축복하셨습니다. 공포로 가득찬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부활의 주님을 찾는 자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시면 평강이 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혔고 제자들마저 잡아 죽이려고 생명을 찾고 있으니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임하시면 평강 임함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사람이 충격을 받으면 그 충격이 오래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육체 치료보다 정신치료가 더 문제입니다. 세상에 정신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울 고독 공포 절망 불안 배반 상처 억울 낙심 불면 악몽 정죄 답답함 슬픔,, 이것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임하시면 평강이 옵니다.

어떤 사람이 심장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는 손 쓸 수가 없습니다. 이제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안정된 생활을 하십시오." 그 후 1년이 지났습니다. 사형선고 받은 환자가 일하려 한다는 말을 의사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불러들여 정밀검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1년 전에 발견했던 증상들은 조금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의사가 물었습니다. "그 동안 대체 무엇을 하였습니까?" 환자가 대답하였습니다. "뭐 할 것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읽는 도중 그리스도께서 내 구주이신 것을 발견하였으며 하나님의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그 후 건강이 좋아지더니 지금은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이 놀라운 평강이 여러분에게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2. 사명의 축복입니다.


21절 하반 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명을 위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받아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임하시기 전에는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1:4에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시면서 8절에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나에게 부활의 예수가 나타나야 주님이 하신 일을 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노라"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신 첫 번째 선교사였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십니다. 요17:18에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다고 하셨습니다.


사도라는 뜻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도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부활을 증거 할 자여야 합니다. 행1:22에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나 사도가 아닙니다. 부활을 증거 할 수 있는 자여야 합니다. 부활의 복음과 아울러 살아계신 예수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복음의 말씀과 표적으로 다시 사신 예수를 증거 할 수 있어야 사도입니다. 좁게는 예수님의 제자만이 사도입니다. 그러나 넓게는 부활의 예수를 만난 그를 세상에 나타낼 수 있는 자가 사도입니다. 이보다 더 귀한 일군은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찾는 자에게 이 귀한 사명을 주십니다.


3. 생명의 축복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22절), 요1:16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했습니다. 그런데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혹은 에스겔서 37장에 생기가 사방에서 불어와서 마른 뼈들이 여호와의 군대가 된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 모습은 우리 영혼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군대 삼아 주실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생기를 받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한 것처럼 우리 영혼이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됩니다. 이 성령의 바람이 불면 불수록 크면 클수록 더욱 변화합니다. 고후3:18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했습니다.


성령님이 얼마나 귀합니까? 성령이 모세에게 임하자 모세는 수백 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이 다윗에게 임하자 모든 원수를 이기고 왕 중의 왕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베드로에게 임하자 하루에 3,000명을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이 에디슨에게 임하자 천여 가지의 발명품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귀한 것은 성령의 역사로 죄인이 회개하는 것이고 영광의 백성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찾을 때 이런 은혜를 받습니다.


4. 사함의 축복입니다.


 

23절에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참으로 난해한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는 죄 사하는 권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니 예수님만이 죄 사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죄를 사하라 그러니 난해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사제가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건 자기들에게 맞추어 너무 함부로 한 해석입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회개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자에게 사함을 선언하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이 선언적 의미가 맞습니다. 그래서 진실로 회개하는 자에게 “예수 이름으로 여러분의 죄가 다 사함 받기를 축원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본 절을 이 선언으로만 보기에는 실재성 즉 선언해야 사함이 된다는 건지 혹은 활용도에 있어서 좀 빈약한 해석입니다. 사실 누구에게 그가 회개의 모습을 보인다고 깊은 내막도 모르면서 예수 이름으로 사함 받으라 외친다는 것도 막연한 일입니다. 실재 죄사함을 선언 얼마나 활용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사하라”는 말씀의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답이 나옵니다. 이 사건은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실 때 일어날 일입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큰 권능과 권세가 있어도 죄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함께 하신 것만큼 주님께서 친히 죄사하심의 역사를 일으키신단 말씀입니다.


예수 이름만 들먹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곁에만 있어도 은혜가 임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며 회개가 나옵니다. 회개운동이 일어납니다. 죄인이 통곡하며 애통합니다.


그러므로 이건 우리가 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신 성도의 가는 곳마다 주님이 친히 역사하심으로 죄 사함의 운동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실재로 주님이 함께 하는 사역에는 무수한 죄인들이 회개하며 새사람 되는 이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실 때 나타나는 죄 사함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어떤 가운데 계십니까? 부활의 주님이 오시면 평안해집니다. 주님이 오시면 강건해집니다. 주님이 오시면 사명자가 됩니다. 주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를 통해서 죄인들이 통곡하며 회개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 얼마나 바로 섬기고 있는지 이 말씀으로 자기를 돌아보십시다. 좀 더 참 믿음에 나아갑시다. 이 시간 모든 것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 온전히 나타나 여러분에게 놀라운 선물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