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문 서

고난의 학교 (시 119:66-71)

공 상희 2010. 2. 20. 11:58

고난의 학교 (시 119:66-71)


이 시간에 “고난의 학교”라는 제목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생긴 이래 인간은 왜 사느냐 하는 질문보다 더 심각하고 처절한 질문은 인간에게 왜 고통이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끊임없이 현실로 도전해 오는 문제이며 이것은 벗어날 수 없는 절박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셨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 마음의 쉼과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석주 시인이 쓴 '대추 한 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소개해 드리면 "대추가 저절로 붉어 질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 둥글어 질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린 몇 밤, 저 안에 땡볕 한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나무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대추에 비유한 장석주의 인생시입니다. 대추 한 알이 탄생하는 과정도 그러한데 어찌 우리 인생 고난이 없겠습니까?

 

고난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난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다윗은 고난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가리켜 흔히 변장된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변장하고 찾아오니 축복인지 모릅니다. 성경은 시편 기자를 통하여 고난이 왜 축복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한 마디로 고난은 하나님이 내신 학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난의 광야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럼 고난은 무엇을 배우는 학교일까요?


1. 고난은 신앙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66-67절에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했습니다. 여기 “내게 가르치소서” 그랬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고난은 신앙을 가르치는 학교라는 것입니다.


히5:8을 보면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배운 지식만이 내 심령 깊이 깨닫는 산지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도 모르고 인생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왜 그럴까요? 그것은 부족함을 느끼지 못해서, 달리 말하면 고난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다인 줄 알고 구세주의 필요성도 모르고 하나님을 섬겨야 함도 모릅니다. 죄가 무서운 것도 모릅니다. 고난이 없다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나와도 절실하게 신앙생활하지 않을 것입니다.

 

카프만 부인의 “광야의 샘”이란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누에고치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마침 여러 마리의 누에고치가 나비로 탈바꿈을 하는 중이었다. 너무도 작은 구멍을 통해 나오려고 애쓰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불가능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마리, 두 마리, 그토록 작은 구멍을 통해 천신만고 애쓰더니 결국은 빠져 나와서 공중으로 훨훨 날아올랐다. 나는 마침 또 나오려고 애쓰는 고치를 발견하고 가위로 그 구멍을 넓게 잘라 주었다.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보다 더욱 사랑과 자비가 많다고 자족하면서 혼자 웃었다. 내가 넓게 열어준 구멍으로 나비는 쉽게 나왔으나 문제가 생겼다. 공중으로 솟아 오르려고 몇 번 시도하면서도 결국 오르지 못하고 땅바닥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앗차!! 나는 깨달았다. 작은 구멍에서 고통하며 힘쓰면서 나와야 그 몸의 영양분을 날개 끝까지 공급하게 되고, 날개가 나올 심하게 마찰되면서 날아오를 만큼 강건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고난이 주어지는가 잘 가르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2. 고난은 겸손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69절에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교만한 자가 자기를 대적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험 들지 않도록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붙잡았습니다. 교만의 시험이 오면 꼭 징계가 따릅니다. 이 교만 속에 수많은 실변의 고통을 당하면서 깨닫는 진리는 교만하면 나는 죽는다. 교만하면 나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다면 이 진리를 어떻게 깨닫겠습니까?


바울의 몸에 질고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이 가시 역시 교만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실수록 더 고난의 연단을 주십니다.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습니다. 주석가 이상근 박사는 일생 엄지발가락 끝에서 이름 모를 고름이 나왔답니다. 혹시 이상한 병은 아닐까? 그러나 그 아픔 때문에 일생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다 큰 종이 되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항상 생사기로의 경각 상태로 일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오장육부 어느 한 곳 성한 데가 없었습니다. 항상 죽느냐 사느냐 그런 상황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너무 심각해서 강단에 서도 교인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날마다 기도하며 살았고 그 덕분에 성령의 큰 권능을 받았다고 합니다. 고난은 겸손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경기도 남양주에 가면 풀무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지금 풀무원 식품이 유명한데 풀무는 쇠를 녹여 제련하는 용광로를 뜻합니다. 바로 이 풀무의 정신에 따라 학교도 있고 농장도 있고 회사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훌륭한 인재들이 나오고 풀무원 식품은 누구나 인정해 주는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풀무가 무엇입니까? 고난입니다. 사48:10에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하셨습니다. 풀무 속에서 쇠붙이가 녹을 때 불순물이 다 제거되고 순수한 것만 남게 됩니다. 이처럼 고난을 통해서 참 신자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학교에서 배운 야곱이 참 신자가 되고, 광야의 학교에서 배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고, 탕자가 고난의 학교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고난을 은혜로 받느냐? 불만불평으로 받느냐에 따라 그 인생은 달라지게 됩니다.

 

고난이 인생을 명품으로 만듭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향수는 '프랑스 제 사낼'입니다. 그 유명한 향수는 병든 고래의 몸에서 짠 기름을 원료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즉 아픔과 고통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우황청심환은 강심제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황은 병든 소의 몸에서 만들어집니다. 병들지 않은 소에 몸에는 우황이 없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공명 좋은 바이올린은 로키산맥의 높고 깊은 계곡에서 자란 나무로 만든 바이올린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고난과 역경의 학교를 졸업하면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축복이 옵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의 시119:71절에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으며, 롬8: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3. 고난은 열심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70절에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했습니다. 마음이 비둔하다는 것은 열심히 없다는 뜻입니다. 안일과 게으름의 마음입니다. 사람이 너무 편안하면 움직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편하면 더 편해지려고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어느 한가한 날 시골길을 걷고 있는데 한 농부가 늙은 말을 몰아 쟁기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늙은 말 엉덩이에 파리가 붙어 파리가 말을 여간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링컨이 파리를 쫓아버리려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 때 농부가 말했습니다. “그만 두세요. 그 파리 때문에 이 늙은 말이 그나마 움직이고 있답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이 주는 유익입니다.


안일과 게으름은 신앙의 가장 큰 적입니다. 게으름과 안일이 자기 영혼을 죽입니다. 신앙의 뜨거움이 없으면 그 신앙은 죽게 됩니다. 그래서 계3:16에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하시면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나요?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목장에서는 양들 사이에 염소를 한 마리씩 넣어 놓는답니다. 양들은 정이 많아서 서로 뭉치면 눌려 죽는데 염소는 양들이 서로 사랑하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걸 보면 염소가 머리로 받아서 다 흩어놓는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잠시 방심하면 우리 영혼이 죽으니까 속상할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자, 기도하자, 기도하면 평안해집니다.


그래서 히12:12-13에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하였습니다. 징계 받을 때 더 열심 내야 합니다. 더 예배해야 합니다. 더 기도해야 합니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더 전도해야 합니다. 사람은 머리는 시원해야 하나 배는 따뜻해야 좋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은 뜨거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 고난의 학교에 입학시키신 것입니다.


4. 고난은 위대한 일을 이루는 학교입니다.


71절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했습니다. 욥도 그랬습니다. 욥23:10에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이처럼 고난은 우리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위대한 인물 치고 고난을 겪지 않았던 사람이 없어요. 위대한 소설도 고난 가운데 쓰여 졌고, 베토벤의 “운명”이라든지 헨델의 “메시야” 등도 다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진 베스트셀러 존 번연의 천로역정도 고난 속에서 쓰여졌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가 제한되었던 때 나라의 허락을 받지 않고 설교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12년이나 갇혀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사랑하는 아내가 죽고 자녀들은 가난한 살림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이 비참한 상황 속에 부르짖는 번연에게 자꾸만 글을 쓰라는 감동이 밀려왔고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존 번연이 그 사람 이야기를 쓴 것이 바로 천로역정입니다. 방황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꼭 읽어봐야 할 책 중의 책입니다.

 

고대 희랍의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솜씨 좋은 어느 조각가가 파르테논 신전에 장치할 석상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대리석을 정으로 쪼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대리석을 파나가고 있던 조각가의 귀에 신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자세히 들으니 그것은 대리석이 내는 신음소리였습니다. 조각가가 "왜 신음소리를 내는가?" 하고 물으니 대리석은 "당신이 지금 나를 날카로운 정으로 쪼고 있지 않습니까? 내 몸에 붙은 살점이 이렇게 쪼개져 나가 버려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조각가는 크게 노한소리로 꾸짖기를 "어리석은 대리석아 내가 너의 몸을 다듬지 않는다면 너 같은 뭉뚝한 주재에 어떻게 파르테논과  같은 거룩한 신전에 올려 져 후에 사람들에게 존경과 찬양을 받을 수 있겠느냐" 하고 책망했다고 합니다.

야곱도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 뼈가 위골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지요. 진주도 조개 속에 이물질이 들어갔을 때 그 이물질로 인해 쓰리고 상처 날 때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고난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고난이 없으면 하늘의 상도 없습니다. 신앙하다가 사명 감당하다가 고난 받을 때 상이 큽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큰 상 주시려는 것으로 알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고난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맙시다. 우리 모두 고난의 은총을 감사하고 고난을 통해서 더욱 아름다운 믿음을 배워 환난을 면제 받고 하나님 기뻐하실 더욱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