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人子)로 오신 예수님
마14:22-33절, 109.113115장.
오늘은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그 아기 예수의 탄생을 거룩한 탄생으로 보고 "성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은 그 날을 기념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기념 예배"라고 하는데 무엇을 기념해야 하겠습니까? 아기 예수의 탄생 자체를 기념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탄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의미를 기념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1.인자로 오신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세상에 오셨습니까? 교회로 하여금 풍성한 잔치 상을 받으려고 오신 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남의 "말" 밥통을 빌려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까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오셨다고 합니다.
또한 죽으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축하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더라면 우리들은 오늘의 성탄절 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성탄절을 보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동방박사들이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와서
경배하고 축하했지 않느냐 할지 모르지만, 그 사건(事件)은 그 아기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계시적인 사건, 혹은 표적적 사건이었지 오늘날 우리들이 축하하고 예물을 드리는 그런 사건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주"라고 하기도 하고 "그리스도"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할 때 이런 칭호를 붙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이런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을 별명처럼 붙인 칭호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자"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한문식 표현입니다. 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더 정확히 표현해서 "그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볼 것 같으면 "인자의 온 것은"이라는 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록자 마가는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상야릇하게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로 자신을 표현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틀렸습니다. 오히려 이런 말의 정 반대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자라 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오해해서 듣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차라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의 다른 이름인,
"인자", 즉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로 자신을 지칭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려서 이 인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에 해당된 칭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어떤 오해 때문에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아들에 해당된 인자를 말을 사용했으며,
또한 그 인자라는 말을 사용하시므로 유대인들에게 어떤 효과를 보기 위해서(계시하시기 위해서) 인자라고 했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느냐 면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주는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서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 혹은 메시아(왕)을 보내주실 것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를 어떻게 이해했느냐 면 자기 민족을 위해서 정치적, 경제적 안정과 풍요를 가져다 줄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조상과 약속해 주신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다고 한다면 다른 민족에게 고통과, 억압을 받고 있는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것이요, 다윗에게 주었던 그런 풍요를 다시 주실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로마의 식민지로 지내고 있는 그들을 해방시켜주실
그런 하나님의 아들을 기대하고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런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풍요와 경제적인 안정, 로마로부터의 정치적인 해방을 시켜 주기 위해서 예수 님은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오해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또 다른 구약성경의 의미인 "인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그 인자라는 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은 구약성경의 말씀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의 의미인 인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2.다니엘서의 인자(그 사람의 아들)입니다. 단7:13-14절에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방언 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영원한 권세가 구름을 타고 온 인자 같은 이에게 주어집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사람과 같은 분이 구름을 타고 왔다는 것은 그분이 인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구름이 나타난 현상은 하나님이 나타난 현상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영원한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하나님의 계시자로 오셨습니다. 그 계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속하셔서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롬5: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님을 통한 구속으로 우리들에게 나타났습니다.
3.구속 주로 오셨습니다.-구속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죄인은 언제나 죽어야 한다는 원리입니 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죄를 (선악과 열매를 따먹는 행위가 왜 죄가 되었습니까?) 범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 심판을 받습니다. 저주의 형벌을 받습니다. 그런 죄인인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 대신 누군가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을 구속이라고 합니다.
내 대신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을 받으신 분이 바로 예수 님이십니다. 예수 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의 형벌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느냐고 하나님께 기도했지 않습니까? 예수 님은 우리 대신 희생을 당하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 막10:45절 말씀입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입니다. 아기 예수 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희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희생을 우리가 축하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런 희생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을 기념할 때 우리가 통회자복 해야 하겠습니까?
4.유대인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오해한 한국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 님을 믿는 것을 마치 유 대인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경제적인 풍요와 축복으로 연결시켜 설명하려고 하는 우리는 통회 자복해야 합니다.
마치 예수 님은 우리들의 병을 고쳐 주시고 경제적인 안정과 정치적인 안정만을 위해서 희생하러 오신 메시아(왕)처럼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라고 하면서 예수 님이 오신 목적과 의미를 호도 하려는 사탄의 장난이 우리에게 많이 있습니다.
출40:34절에 모세가 회막을 하나님께서 주신 설계도대로 짓고 나자 그 위에 구름이 임합니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라고 합니다. 회막에 구름이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했다는 말은 장차 오실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위에 여호와의 영광이 임할 것을 예언적으로 약속해 주신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예수 님으로 말미암아 임하시고 나타납니다. 그 예수 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계시해 주었던 사실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 예수 님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고 우리 자신을 자랑하거나 의지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들을 위한 잔치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찬송가 404장인 "하 나님의 사랑은 말로다 형용 못하네"라는 가사 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우리들에게 주신,
소중한 사랑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언어라는 형태로 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을 늘 위로하고 위안을 주곤합니다. 이 고통 많은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위로와 등불이 되어 줍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 역시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들 역시 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통해서 위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 역시 동일한 이 말씀을 통하여 인생의 방향을 설정 받고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6.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보통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을 때 그 하나님의 말 씀에 대한 개념 정립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 놓고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고 처음서부터 인간을 위한, 인간에 관한 말씀으로 전달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을 볼 것 같으면, 구약성경에 나타난 여러 인물들을 통하여, 각종 사건을 통하여,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 여호와 자신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인물들이나 사건 자체에 멎어져 버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이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한 왕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증거 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베풀어주신다고 합니다. 흑 암의 결박에서 놓임을 받을 것입니다.
그 메시아가 오시는 날에는 이스라엘에게 소망이 되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신약은 그 약속하신 메시아가 왔다고 합니다. 마태라는 기자는 여기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 스리스도가 구약에 예언된 그 메시아라고 합니다.
더 정확히 표현해서 마태를 통하여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계시하고 선포(宣布)한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한 본문 말씀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취급되어져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나 제자들의 심리적인 마음을 분석해서 거기에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본문을 추적하면 본문의 의미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자신을 그렇게 나타내어 보여주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7.본문의 내용 줄거리입니다. 예수 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병 이어의 기적을 일으 키신 다음 그 많은 군중들을 보내는 동안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먼저 건너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따로 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제자들을 태운 배가 얼마쯤 갔을 때 풍랑이 거슬러 불어 왔습니다.
그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고난을 당하더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가까이 오신 예수 님을 보고 제자들은 예수 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무어라고 했습니까? 26절에 보시면 "유령이라"했습니다.
예수 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유령이라고, 할 정도이고 보면 아직도 그들은 무엇인가 정리되어 있지 않는 믿음 약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령인줄 알고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 님께서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하십니다.
이때 베드로는 만일 당신이 주님이시라면 나를 명령해서 예수 님께서 계신 곳으로 오라고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간청대로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 님을 보지 않고 바람이 부는 물결을 보자 그만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소리지르며 살려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예수 님은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 님께서 배에 오르시게 되고 바람은 그쳤습니다. 그때 제자들과 베드로는 예수 님을 가리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 말씀의 내용 줄거리입니다.
8,표적으로 증거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물 위을 걸으신 예수 님의 이 같은 사건(事件)은 놀라운 기적 혹은 표적(標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표적 적 사건을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 사건이 기록되기 전에 행해졌던 오병이어의 기적적인 사건을 확인해 봄으로서 오늘의 본문 사건과 더불어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마14:13-21절의 오병이어의 사건을 동일하게 취급한 요한복음에서는 그 의미가 좀 자세히 확대되어 기록되고 있습니다. 요6:14절에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선지자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요6:26절에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 님이야말로 구약이 예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알게 하기 위한 표적적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표적이란 그 사건이 지시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것을 지시해 주고 알게 해 준 사건이라고 합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표적적 사건으로서 이분이야말로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요, 참 만나이신 예수 님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군중들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때문에 예수 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자기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예수 님을 따르게 되었다고 예수 님께서 지금 책망하고 계십니다.
동일하게 오늘 우리가 택한 본문 역시 이런 동일선상에서 놓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 님이야말로 구약이 예언하고 있는 그 선지자였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였습니다. 이 예수 님이야말로 우리들의 유일한 소망이요, 위로자이시며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과 저주로부터 구원을 받게 하신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들의 기대이시며 위로자이시며 생명의 구주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생명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려고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풍랑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제자들을 설득시키고 베드로를 설득시키시는 그 자상하심을 보십시오.
유령이라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셔서 믿음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혹 우리 성도 님들 가운데 내가 하나님을 잘 믿었는데 왜 나에게 이런 고통과 환난이 닥쳐오느냐고 불평하며 좌절하는 성도 님들이 안 계십니까?
근심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믿음 없는 행동입니다. 우리들에게 어떻게 믿음을 주시고 신뢰를 주시고 우리들과 동행해 주시고 평강을 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이런 훈련을 잘 받은 베드로는 이런 일이 있는 다음에 어떻게 그의 믿음이 성장되고 변화되어가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마16:15-17절에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베드로를 끝까지 설득시키시고 인도하시고 섭리하셔서 우리 주님이 요구하신 수준까지 끌어올리시고야 마는 주님의 주님 되심이 잘 증거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 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이심을 표적 적인 사건을 통하여 알게 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사건은 다른 사건이 아니라 계시적 사건이었다는 겁니다. 예수 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바다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지 않아도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 주시고 마태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聖經)을 오늘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읽고 믿게 해 주셨습니다. 내가 그 당시의 그 사건(事件)을 두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血肉)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는 말씀대로 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서야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사실을 믿도록 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된 백성임을 확실히 믿습니다.
9.말씀을 정리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된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24절에 "고난을 당하더라"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는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실은 현실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적인 고난의 현장 속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그러시면서 손을 내밀어 우리들을 붙잡아 주십니다. 내가 주님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과거(過去)를 되돌아 볼 때 우리들은 과연 주님을 주님으로 믿는 자였습니까?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믿지 못해 불신하는 공범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그냥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우리들과 동행해 주셔서 임마누엘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주님을 잘 섬겼고 교회를 잘 봉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고 하소연하는 성도 님들은 안 계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 나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며 훈련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 속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들을 몰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에 비해서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먼 훗날 왜 그때 그런 고통 가운데서 나를 훈련시켜 주셨는지 분명히 깨닫게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모진 고난과 풍랑 속에서 훈련을 받고 난 이후에 예수 님의 제자들의 입 속에서 터져 나왔던 고백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였습니다. 마14:33절에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만백성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우리의 구속 주로 오신 주님을 강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하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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