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설교

성탄절의 참 정신과 회복

공 상희 2009. 12. 7. 17:10

성탄절의 참 정신과 회복
김영찬 목사 [성경본문] 눅 1:26-33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1. 성탄절을 맞는 마음가짐

금년에도 성탄절은 찾아 왔습니다. 이제 각 교회들은 어린이 주일학교로부터 중.고등부 등의 기관을 통해서 성탄절 전야제 행사를 할 것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예수님을 주제로 준비하고 발표를 할겁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용히 침묵하고 묵상하면서 성탄절을 맞이하기보다는 행사를 위한 행사로 진행이 되어 마치 즐거운 오락 시간을 보는 듯한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성탄(聖誕)'이란 '거룩한 탄생'을 말합니다. '거룩한 탄생'은 일반적인 인간의 탄생과는 본질부터 다릅니다. 아기 예수의 거룩한 탄생은 부패하고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한 분명하고도 뚜렷한 목적이 있는 계획된 탄생입니다.
구원의 방법은 예수님이 죄인 된 우리들을 위해 희생의 어린양이 되시어 대신 '죽음'으로서 살리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은 대속(代贖)을 위한 죽음을 전제로 한 탄생이기에 성탄절을 즐거운 행사로만 이끌어 가는 것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듯 합니다.

물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에게 구원의 주(主)로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으니 너무 너무 고맙고 감사한 일이며 또한 영광스러운 일이니만큼 예수님의 탄생을 얼마든지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갖은 수치와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위한 탄생이라면 우리는 잠시라도 아기 예수의 탄생 앞에 동방박사들처럼 경건한 예의를 갖추고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조용히 묵상하며 침묵하는 시간으로 성탄절을 맞이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성탄절은 우리에게 '기쁨'과 '침묵'을 동시에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그 기쁨을 무엇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이며, 또한 어떠한 방법으로 침묵을 할 것인가를 아기 예수의 탄생 분위기와 탄생의 목적을 염두에 두면서 함께 연구해야 할 숙제일 것입니다.

2. 성탄과 성육신(Incarnation)

아기 예수 탄생의 정신은 성육신(成肉身)의 의미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성육신'이란 영(靈)으로 존재하시는 신(神;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肉身)을 입고 인간이 되심을 뜻합니다.
왜 창조주의 신(神)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백성의 마음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동산인 낙원을 잃어버리고 이기적인 사단의 속성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인간의 죄의 체질에 맞도록 왜곡하고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을 우상화(偶像化)하고 있어서 자기 백성을 일깨우고 회개와 거듭남으로 재창조하기 위해 부득불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와 자연 만물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얼굴이요 언어요 행동이셨고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무형(無形)으로 존재하신 '말씀의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덧입고 유형(有形)의 하나님 즉 '아기 예수'로 이 세상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 '말씀' 안에는 '생명'이 있는데 그 생명은 우주와 자연 만물과 인간을 지으신 후 그것들을 자라게 하는 능력이요 에너지요 영양분이며, 이미 부패하고 타락하여 죽게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새로이 공급하게 될 영혼의 새 생명입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헌혈을 받은 피(血)를 공급하는 혈액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삶으로 보이는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생명과 빛은 곧 아기 예수님이시며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공생애로 보이신 섬김과 나눔의 삶, 사랑과 봉사의 삶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전 생애 자체가 우리들의 생명이요 빛이었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아기 예수는 생명의 양식이 무엇이며, 구원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그 분의 전 생애를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의 성탄의 정신은 성육신의 삶 속에 깊이 묻어 있습니다.

아기 예수는 가장 비천한 여인의 몸에 잉태되어 가장 비천한 말구유간에서 탄생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기 시절부터 사단의 시기 속에서 비천한 곳으로 피난을 다녀야만 했고,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비천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자신을 비우기 위해서 40일간의 금식을 하셨으며 따르는 무리들에게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가난한 마음과 슬퍼할 줄 아는 마음, 온유한 마음과 옳은 일을 사모하는 마음, 자비의 마음과 청결한 마음 그리고 평화를 위해 일 하는 마음과 주님을 위해 박해도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사람이 될 것을 힘주어 강조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곧 예수님의 제자요 구원을 얻을 자의 모습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인격과 마음으로 한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와 종교 지도자들은 돈과 명예를 더 좋아했고 종교의식을 전통과 관습에 의해 형식적으로 행하는 위선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중세기 때의 가톨릭이 그러했으며 오늘의 현대 교회가 또한 그 전철을 밟아가고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부(富)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기복(祈福)을 추구하며 종교적 의식은 형식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사람 앞에 공적(功績)을 자랑하고 칭찬 듣는 것을 위해서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는가 하면 그것이 성취될 때에 하나님의 좋은 사역자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자신이 하는 사역과 사업과 기도에만 관심이 있을 뿐, 다른 사람의 일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목회자와 교인들의 현주소입니다.
도무지 자신을 비우는 마음과 청빈(淸貧)의 삶은 찾아 볼 수가 없고, 온유함과 겸손함 그리고 섬김과 나눔의 모습이 결여된 채 그리스도인의 모양만 갖춘 '붕어빵 그리스도인'들만 가득할 뿐입니다.
참으로 성탄의 참 정신은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성육신의 삶의 모습도 역시 사랑과 봉사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눈앞의 탄생만을 보고 오락을 즐기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기뻐하기보다는 기쁨을 감사로 대신 하면서 아울러 참회와 침묵으로 성탄절을 맞아함이 더욱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3. 성탄절 정신의 회복

오늘의 현대 교회는 교회와 세상을 분리시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靈)적인 것은 모두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것들이고 그 외 일상 생활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육(肉)적인 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교회당에만 제한하시고 교회 밖에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실까요?

예수님은 청년으로 성장을 하시면서 공생애를 위한 준비를 충분히 하신 후 성탄의 목적을 드러내기 시작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왜곡하고 우상화하면서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며 사는 종교 지도자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지에서의 깨우침과 가난한 마음의 회복을 의미하는 메시지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로부터 시작하시면서 불치의 환자들을 고치시고, 폭풍을 잔잔케 하시며,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들을 행하시면서 자신이 곧 하나님이심을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창녀나 세리와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외롭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찾아 친구가 되어 주시며, 심지어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심으로 성탄의 목적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시면서 죄인들의 '종'으로서의 삶을 사셨으며, 불치의 환자들과 불우한 이웃들을 찾을 만큼 긍휼과 자비가 많으신 분이셨으며, 구원의 길을 여시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시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실 만큼 희생 정신이 강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탄(聖誕)의 정신은 성육신(成肉身)의 삶으로부터 찾아야 합니다.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은 가난한 마음으로 항상 자신을 비우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지극히 겸손 하셨으며, 친절함과 자비의 정신이 풍성하셨으며, 또한 희생 정신이 남다르셨습니다.
이와 같은 성육신의 삶이 곧 성탄의 정신이라면 현대 교회는 성탄절의 정신과는 너무 멀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성탄의 의미가 성육신의 삶에 있다면 매년 12월 25일 한 날에만 성탄절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1년 365일이 성탄절이 되어야 옳을 것입니다.

어느 말씀의 나눔 시간에 한 자매가 성육신의 실천은 자신의 아파트 평수를 줄이는 것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고백을 하여 참석자들에게 깊은 도전과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 현대인들은 돈과 문명의 기계를 소유하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고 있으며, 자신의 인기와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나머지 다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권력을 남용하여 사회의 질서를 깨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각계의 지도층들과 일반 국민과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이기(利己)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세상의 흐름이요 대세(大勢)입니다.
더욱 가슴아픈 일은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들마저 세속화되어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 신도들에게도 신뢰를 잃었으며 교회가 사회의 비난과 조롱 속에 갇혀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아기 예수의 거룩한 성탄을 맞이하면서 교회가 거듭나야 합니다. 내적으로는 물질의 소유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더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할 것이며, 채우고 쌓기보다는 나눔과 비움을 배워야 할 것이며, 권위를 앞세워 군림하기보다는 겸손히 섬길 줄 아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모든 불우한 이웃들과 외국인 노동자들 등과 함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나눌 줄 아는 사랑과 자비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전야제 행사나 새벽 송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하지말고 소리 없이 불우한 이웃들을 찾아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위로하며 도움을 주는 성탄절과 일상(日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는 긍휼과 자비가 있는 곳에 계시기 때문이며, 하나님 나라는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