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적극적인 감사의 삶
본문 : 눅19:1-10
뇌성마비 장애아로 태어나서 유명한 시인이 된 [송명희]라는 시인을 잘 아실 것입니다.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11실에 독학으로 한글을 공부하였고 하루 5시간씩 기도하며 성경 30여 번 통독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시를 기록하게 되었고, 저서 24권과 작사 찬양이 100여곡 발표되고, 기독신문 칼럼을 십 년이 넘도록 연재 집필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학교, 방송출연 등 1천 오백여 회 간증집회 활동으로 점점 더 몸은 쇠약해져가고 이제는 거동이 힘들 정도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홈페이지를 보면 투병 중에 있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오른 팔을 목에 끼고 엎드려서 성경을 하루 종일 읽고 왼발로 종이를 누르고 엎어져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려니 왼쪽 목이 항상 아팠다. 목에 몽우리가 생기고 잠을 못 잘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기도와 자제력으로 이길 수 있었다."그런데 이러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고백의 시를 우리에게 선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를 통해 진정한 감사를 알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흔히 복음송이라 불리우는 <나>라는 제목의 찬양입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네 /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 공평하신 하나님이 /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
여러분, 감사란 내가 찾아야하는 것입니다. 없는 것 속에서 있는 것을 찾아야합니다. 부족한 것 중에서도 넉넉한 것을 찾는데서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란 찾으면 찾을수록 많아지는 것입니다.
남편 때문에 늘 한숨을 입에 달고 다니는 어느 여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1년 365일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같이 술이 만취되어 늦게 귀가하는 술고래형이었습니다. 남자들에게는 이 술이라고 하는 것이 참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술을 마시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지혜를 모아 놓은 <탈무드>에 보면 술에 대한 기원이 나와 있습니다. 이 세상 최초의 인간이 포도나무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악마가 찾아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 때 인간이 대답하기를 "지금 근사한 식물을 키우고 있다"고 말하지요. 신기해하는 악마에게 인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이 식물에는 아주 달콤하고 맛있는 열매가 열리는데, 익은 다음 그 즙을 내어 마시면 아주 행복해진다네."악마는 자기도 꼭 한몫 끼워 달라고 애원하고는, <양>과 <사자>와 <원숭이>와 <돼지>를 죽여서 그 피를 거름으로 뿌립니다. 포도주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 처음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술 마시는 사람 잘 보세요. 처음 마시기 시작할 때에는 양같이 온순하고, 조금 더 마시면 사자처럼 사납게 되고, 조금 더 마시면 원숭이처럼 노래부르며 춤추고, 더 많이 마시게 되면 토하고 뒹굴고 하여 돼지처럼 추하게 됩니다. 거의 매일 이런 모습의 남편을 봐야하는 그 집사님의 고충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그렇다고 정말 그러는지 안 그러는지 실험해보려고 술을 마셔보지는 마십시오. 꼭 실험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확인해 보려고 하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아무튼 이 여집사님의 평소 기도제목이 나도 남편문제로 인해 감사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날도 인사불성이 되어 집 앞에 쓰러진 남편을 힘들게 끌어다가 겨우 눕혔습니다. 그 부인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하려고 하니 자기 신세가 처량하여 하나님께 기구한 자기의 팔자타령만 나옵니다. "하나님, 나는 왜 허구 많은 남자 중에 이런 남자와 결혼해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합니까?" 이 한 마디하고 나니까 어느새 먼저 눈물이 주루룩 흐르더니 쌓였던 불쌍한 자기신세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함께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울었을까.. 순간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나고, 감사기도가 속히 응답된다는 설교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감사조건을 찾으려고 노력해도 눈앞에 보이는 건 고주망태가 된 한 남자 외에는 더 이상의 감사조건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내 뱉듯 푸념합니다. "하나님, 감사조건 없는 것을 감사드립니다."그러면서 옆에서 코 골며 자는 남편을 쳐다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감사의 조건들이 막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들어보세요. 그래도 남편 없는 과부보다는 낫고, 저러다가도 언젠가는 좋은 남편이 될지도 모를 가능성이 있어서 감사하고, 저토록 술에 취했어도 다른 데 안가고 집을 찾아오니 감사하고, 토요일은 술을 더 많이 마셔서, 주일 날 집 지켜줘서 감사하고, 주일 날 계속 자니 교회 나오는 데 불편하지 않아 감사하고...그 집사님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해서 기쁨으로 감사하며 기도하느라고 밤을 새웠습니다. 새벽에 갈증을 느낀 남편이 잠을 깨고 보니 부인이 방구석에 앉아 빙그레 웃으며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놀란 남편은 "여보, 한 밤 중에 잠은 안자고 미친 사람처럼 뭐 하는 거야. 뭐가 좋아서 그렇게 싱글싱글 웃는 거야?"이 여집사님이 와락 남편을 끌어안으면서 "여보,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그래요."하면서 이제껏 자기가 기도했던 감사조건을 남편에게 모두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에게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보, 내가 예수 믿는 게 그렇게 소원이면, 오늘부터 예수 믿어 줄게 "하더랍니다. 10년 동안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던 소원이 단 하루 밤의 감사기도로 이루어 졌다고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감사란 삶을 변화시킵니다. 감사란 생명을 구원합니다. 감사란 사랑을 회복시킵니다. 감사란 하면 할수록 그 가치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 긍정적인 사람이 있고 부정적인 사람이 있듯이 아주 좋은 여건에서도 불평 불만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 보기에는 그렇게 좋은 여건은 아닌데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이것은 환경의 차이가 아닙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생각의 차이입니다. 원래 참된 감사는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영어에서 Think(생각하다)와 Thank(감사하다)는 같은 어원에서 출발했습니다. 감사와 생각은 그 근원, 뿌리가 같다는 얘깁니다. 생각이 없으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생각하느냐,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감사하게 됩니다. 어느 각도에서 생각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 못합니다. 얻은 것을 생각하고 내가 받은 것을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환경과 세상에 의존하기보다도 우리의 마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삭개오라는 사람은 독특한 성격의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정치적 상황에서 대세를 잘 이용하여 세상을 잘 요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부자입니다. 권력 있죠. 돈 있지요. 부족함이 없는 듯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종교적 고민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등진 것 같은, 죄를 짓고 사는 것 같은 그런 고민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많은 동족들이 반 민족주의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고 로마 사람의 힘을 빌어서 자기 권력과 자기 부를 취하고 있으니까 그 마음속에 민족을 배반한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큰 세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만나러 나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누구처럼 병 고치려고 예수를 만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려하는 생각은 독특합니다. 그는 소문에 예수님의 좋지 못한 별명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별명을 가진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열둘 중에 하나가 세관에 앉은 현장에서 불러서 제자를 삼은 [마태]입니다. 자기도 세리인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온 세계 사람들이 다 천대하고 온 이스라엘이 미워하는 죄인의 대명사 세리를 불러서 제자를 삼았단 말인가? 그런 분이 누구냐고 그 분을 보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환경적 요소가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보는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키가 작은 신체적 열세도 있었고, 많은 사람이 밀어닥치는데 도저히 예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체면이고 뭐고 불구하고 뽕나무로 기어올라갔고 지나가는 일행 속에 있는 예수님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이 중요한 시간을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상황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셨나 보십시오. 성경의 표현은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그랬습니다. 이상하게 됐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우러러 본 게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셨다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요 개별적으로 개인적으로 보아주신 겁니다. 얼굴과 얼굴, 눈과 눈이 마주치는 시간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시간입니까? 많은 사람을 죽 둘러보듯이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명하여 한 사람, 삭개오를 집중적으로 보신 겁니다. 그리고 보셨다는 것은 삭개오의 마음을 읽었다는 말입니다. 주고받는 말이 없어도 왜 저 사람이 뽕나무에 올라갔는지, 왜 나를 보려고 하는지 그 마음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이 사실에 이미 삭개오는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감사해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 나를 개별적으로 만나주시고, 사랑하신 은총적 기회가 있습니다. 때로 사람들 때문에 섭섭해하지 마십시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속상해 할 것 없습니다. 무시당하고 산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믿음 없는 생각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궁극적 관심을 알고 계십니다. 나의 고민까지도 알고 계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여기에 감격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 체면이 서야 감사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명예가 회복되어야만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우리에게 감사가 없는 것입니까? 현실 속에서 주님과의 감격 있는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얼굴을 바라보시면서 개별적으로 은총적 기회를 주시건만 외면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감사도, 감격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삭개오를 통하여 감사하는 삶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란 먼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제 보십시다. 이 사람의 감사가 무엇입니까? 삭개오는 바로 이 시간, 이 은혜 가운데서 "즐거워했다""그랬습니다. 감사는 기뻐하는데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 감사란 감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기쁜 얼굴로 고맙다고 해야지요. 고맙다는 말도 억지로 하는 건 정말 고마운 것이 아닙니다. 기쁨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은혜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응답이거든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 삭개오가 즐거워한 것이 무엇 때문이냐 하는 것입니다. 물질을 얻었다는 것도 아니고 권세를 얻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만나 주시고 우리 집에 오신다는 것 때문에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기쁨 중에 가장 만족한 기쁨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오늘도 우리 집에 유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기쁨이 없습니까? 왜 즐거움이 없습니까? 혹시 우리가 그 주님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 하나의 감사방법은 마음이 열리는 것입니다. 즉, 변화입니다. 감사란 변화입니다. 마음의 변화입니다. 생각의 변화입니다.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나아가 행동의 변화입니다. 삭개오의 마음이 열리면서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삭개오가 지금 예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는 말입니다.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습니다."변화가 있어야 감사할 수 도 있는 것입니다. 깨달은 것과 마음만으로는 안 됩니다. 실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불교인입니다. 인간 삶의 마땅한 도리만 알고 있으면 유교인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알면 기독교인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신앙인 입니다. 감격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또한 감격이 간증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오늘 삭개오에게서도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하는 실천적 고백이 나오고 있습니다. 기뻐하며 베풀 수 있는 마음에 진정한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일미칠근(一米七斤)]이란 말이 있습니다. "쌀 한 톨의 무게가 일곱 근"이란 뜻입니다. 곡식 한 톨을 얻기 위해 쏟는 농부들의 노고의 가치가 이토록 무겁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쌀 한 톨 같은 작은 사건에 담겨진 하나님의 깊은 뜻을 생각해야할 계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대할 때 언제나 감사의 정신을 바탕에 깔고 보아야 합니다. 저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믿음, 소망, 사랑, 세 덕목에 필적할 또 하나의 정신은 감사다. 감사는 신앙의 수준을 헤아리는 척도"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추수를 통해 우리에게 감사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추수로 인한 감사뿐만이 아니라 이 기회에 가장 근본적인 감사의 정신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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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감사하라 시136:1-26절, 304.307.308장. 오늘은 추수감사주일 입니다. 한 해 동안 우리들을 지켜 주시고 사랑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절의 기원에 대해서 살펴보면 영국왕 헨리 8세때 영국 국교를 믿지 않고 다른 교파를 믿는 사람들을 탄압하고 옥에 집어넣고 핍박을 가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마음놓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바로 할까 하고 염려하던 중 청교도 102명이 모여 의논하던 중에 콜롬버스(Columbus)가 발견한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가고자 의논하고 1620년 9월 16일 영국을 출발하여. 65일간을 항해하여 동년 11월 21일 포리머스(Plymouth)에 도착했습니다. 한해 겨울을 지나고 나니까 총 44명명이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변변치 않은 농사였지만, 수확을 거두어 놓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원주민 인디안(Indian)들을 초대해 놓고 칠면조 고기를 먹으며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미국에는 매월 셋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국경일로 정하여 온 국민이 큰 명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미국이 그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바로 하나님께 감사함을 잊지 않는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가 방글라데시라고 하는데, 대부분이 모슬렘교도들이고 그 다음이 힌두교도 들인데 이 나라는 감사를 잘 모르는 백성입니다. "감사" 의 뜻에 합당한 단어도 없고 누가 무엇을 주고 동정을 해도,"네가 나를 구제함으로써 알라 신에게 복을 받게되니까 내가 너한테 고맙다고 할 필요가 없다" 는 식의 사고 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소위 무신론을 주장하면서 많은 목사님과 신자들을 잡아죽이고 옥에 가도고 핍박했고, 교회를 파괴했습니다. 그 결과 현재 북한의 실정이 어떠합니까? 백성을 굶주려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를 잊지 않고, 사람에게도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사람은 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면서 우리 가정은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에 추수감사주일의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성도들은 없습니까? 내 자신은 농사를 짓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 곡식의 열매를 주시지 않는다면 오늘의 우리 가정이 있겠습니까? 또한 추수감사주일은 단순히 농사에만 국한시켜 말하지 말고 1년 동안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 경건하게 추수감사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어떠한 분에게 감사를 드려야 합니까? 막연하게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라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하면서 의미 없게 보내면 인됩니다. 우리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인지를 본문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어떠한 분에게 감사를 드려야 합니까?(2-25절) 교회에 오래 다니는 사람들 중에 실수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 이냐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간다는 점입니다 . 물론 습관을 좇아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생각 없이, 교회 마당만 밟고 갑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이 외롭고 쓸쓸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까? 우리들은 어떤 분명한 경배의 대상이 있습니다. 섬김의 대상이 있고, 영광을 돌려야하고 감사하고 순종해야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 대상이 잘 못될 때에 교회는 언제나 분쟁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어떤 분에게 감사와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물론 그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떠한 하나님으로 섬기며 감사할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모든 신과 모든 주에 뛰어나시고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유일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2-4절), 시136:2절에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했습니다. 2절에서부터 26절까지 후렴처럼 따라오는 것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합니다. 마치 한쪽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라고 하면, 또 다른 한 편에서 온 회 중들이 합창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3절에서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고 했고, 4절에서는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영원하고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대등하게 견줄 만한 신이 없습니다. 오직 유일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들의 감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둘째, 하늘과 땅과 바다와 해달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5-9절), 하나님은 지혜로 하늘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해로 낮을 주관케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곡식의 열매를 주시기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대자연을 보고 감탄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정교하며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들에 곡식과 양식이 무엇이기에 우리 인간이 그것을 섭취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곡식의 열매들을 주셨습니다. 그런 열매들을 통하여 우리들의 생명을 지탱하게 해 줍니다. 물론 그런 양식은 우리들의 생명을 영원히 보장해주지는 못합니다. 즉 우리들의 생명을 위해서 곡식의 열매는 없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그 양식은 우리 인간의 생명을 영원히 지켜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우리들에게 주신 양식은 우리들의 생명을 위해서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지 말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깊으신 섭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들 주변에 많은 곡식들과 열매와 과일들은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창조하신 결과라는 점입니다. 그런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연을 보고 곡식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죽은 조상의 은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조상에게 햇곡식으로 상을 차려 제사를 지내며 거기에 절을 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오직 감사와 경배를 받으셔야 하는 분은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서 홍해와 광야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10-16절) 시편기자는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회고하면서 고난과 가난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양을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어두운 과거를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 민족은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가난과 질병, 사신 우상과 게으름, 양반과 상놈의 벽으로 인한 갈등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 민족의 과거를 기억해 보면 어두운 그림자뿐입니다. 그런 어두운 터널을 지나오면서 우리 민족은 찬란한 햇살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맞이했습니다.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난에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놀음과 게으름에서 벗어났습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민족을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민족과 함께 해 주셨고 우리들의 가정과 함께 해 주셨습니다. 쌀 밥 먹는 것을 최고로 행운으로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합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지켜 주시고 우리 가정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더 이상 교만하지 말고 감사합시다 추수감사주일 봉투에 적당히 넣고 그것으로 감사했다고 말하지 맙시다. 우리들의 생명을 드린들 어찌 그 은혜와 사랑으로 다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한 것입니다. 넷째, 군왕들의 생사를 주관하여 역사를 홀로 주관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17-20)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인류의 전쟁과 역사와 평화를 주관하십니다. 모든 인류의 역사가 하나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 하나님께 감사하며 의지할 때, 우리 민족이 살길이 열립니다. 우리 가정의 살길이 열립니다. 착각하지 맙시다. 우리들의 힘으로 이 역사가 움직인 것 같이 착각하면 안됩니다. 세상의 모든 왕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프로그램에 의해서 움직일 뿐입니다. 모든 역사의 배후에서 섭리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는 추수감사주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섯째, 기업을 주시고 보호하시며 식물을 주셔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21-25절) 우리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25절 말씀에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했습니다. 식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은 식물이 너무나 풍부하기 때문에 그 심각성과 감사를 잃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기 잡는 배 밑바닥에서 3일 동안 물만 마시고 우리 나라로 몰래 들어오려다 붙잡힌 광경을 텔레비젼을 통해서 보셨을 것입니다. 무려 10년 동안 번 돈으로 우리 나라에 오는 경비를 충당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그런데 붙잡혀 다시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뒷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나라에 와서 돈을 벌기 위한 희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너졌습니다.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과연 우리 민족이 이렇게 복을 받았습니다. 지금 세계 각처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어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너무나 많이 먹어 살이 쪄서 빼야 한다고 난리들입니다. 복에 겨운 줄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식물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아무렇게 먹고 많은 음식들을 버립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먹을 음식 남겨서 버리면 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 만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립시다, 우리민족 대다수 사람들이 감사하지 않고 흥청거릴 때 우리들만이라도 회개하며 감사하며 신앙회복 운동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2,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본문에 "인자" 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말한 단어입니다. 이것은 언약 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언약을 맺으셔서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자비를 찬양할 수 없습니다.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감사를 받아 주셨다는 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감사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된 우리 인간의 감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인 인간의 감사는 또 다른 형태의 죄의 몸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 인간들 중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자가는 죄악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의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의 감사를 우리 하나님은 받아 주십니다. 이 얼마나 벅찬 감사입니까? 결국 어떤 자들만이 추수감사주일을 지킬 자격이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인 인자하심을 덧입은 자들만이 추수감사주일을 지킬 자격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 안에서 살려는 눈물의 기도가 있습니까? 있다면 여러분은 추수감사주일을 지킬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본 문 : 창세기 4 ; 1 - 7
제 목 :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감사의 제물
찬 송 : 40, 75, 307, 310, 312, 453, (489)
※ 본문 중에 인용된 성구는 개정개역판을 사용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은총이 충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무엇을 어떻게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또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감사가 될 수 있으며 또 온전한 축복이 되는 감사가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이 열납하시는 감사의 제물』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에 대하여 그 유래를 생각할 때
1620년 청교도들이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의 분리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박해를 견디다 못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네덜란드로 도피를 하였으나 그곳에서도 아르미니우스 파의 반대에 부딪쳐 그들은 1620년 12월에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미 매사추세츠 주에 상륙하여 익숙지 못한 기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인디안 으로부터 배워서 가꾼 옥수수와 호박 등을 처음 수확하였을 때에 그 고마움을 기념하기 위하여 11월 넷째 목요일을 추수감사 제로 지켜왔습니다. 그것이 1884년 한국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전해지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추수감사절의 유래요 역사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시내 광야에 머물 때 모세를 명하여 계명들을 주셨는데 그 때에 3대 절기를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출23:14-16)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이와 같은 명령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만 먹고 살았기 때문에 이 절기를 지키지 못하다가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가 첫 농사를 지은 때부터 맥추절도 지키고 수장절, 오늘의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17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창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초로 농경을 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바로 아담의 직업(가업)은 농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업은 아담의 장남인 가인이 이어 받아서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곡식도 심고 채소도 심고하여 열심히 일하며 농산물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는 “세월이 지난 후에…”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신없이 아들 딸 낳고 농사지으면서 살다보니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고 한 말씀의 그 세월이 얼마가 지났느냐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가인과 아벨이 성인이 되어 자기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아 상당한 년 수가 지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각각 자기가 노력하여 얻은 것 중에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는데 이것이 바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 하시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 치 않으셨기 때문에 급기야는 가인은 자기의 성질을 참지 못하여 안색이 변하고 분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가인은 결국 아우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열납 하시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치 않으셨을까요? 하는 의문에 부딪치게 됩니다. 하나님이 두 사람의 제물을 모두 받으시면 이와 같은 살인 사건도 나지 않았을 것인데 왜 그랬을까?
아마도 이 의문점은 영원히 미제로서 남아 있을 것이며 그 어떤 해석도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해석과 주석과 학설들이 있습니다.
① 어떤 주석에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워 주기 위하여 가죽옷을 해 입히셨습니다. 그것은 곳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실 구원 사업을 예고해 준 것으로 아벨은 이 뜻을 잘 알아서 양을 잡아 드렸고 가인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의 생각대로 땅의 소산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② 또 어떤 이는 땅의 농산물은 수고와 땀으로 거둔 “행위”의 제물이요, 양의 새끼와 그 기름은 “믿음”의 제물이니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고 한 바울의 말과 같이 하나님은 “행위” 보다 “믿음”을 택하셨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또 다른 의문을 가져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가인은 처음부터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치는 자 였습니다. 농사짓는 자가 농산물로 드리고, 양치는 자가 양으로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채식보다 육식이 좋아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가인은 부친 아담의 가업을 이어 받아서 농사짓는 사람이 되었는데 아벨은 왜 양치는 자가 되었을 까요?
창3:9절에 의하면 사람들은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육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벨의 양을 치는 것은 먹기 위해서 기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아벨은 왜 양을 치는 사람이 되었는가? 그 대답은 아담과 해와가 입은 가죽옷 밖에 없습니다. 즉 가인은 식생활을 해결하기 위하여 아담의 가업을 이어받아 농사짓는 자가 되었고 아벨은 입을 것을 위하여 양을 기르고 그 가죽을 벗기고 그것으로 곡식을 바꾸어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양 새끼 밖에는 바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양 새끼로 제물을 바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 가지 결론에 닿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열납 하시고 가인의 제물은 열납치 않으신 이유가 그 제물이 양이냐 곡식이냐에 있지 않고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오늘 추수감사절 예배에 함께 은혜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그 드리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잠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드리는 제사와 제물을 받으실 때 제물의 종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제물을 드리느냐 하는 것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농산물이기 때문에 안 받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양이기 때문에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정성과 마음과 뜻과 믿음과 나아가서는 그의 인격과 신앙까지를 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와 자신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사람의 육신이 살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 의, 식, 주(衣食住)라면 영이 살기 위한 필수적인 것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이요 목적은 아닙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의 제물이 열납 되지 않은 것을 알자 그의 낯빛이 변하였습니다. 그는 왜 자기의 제물을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았는가 하는 자기반성보다는 동생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과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동생이 없었다면 자신의 제물이 열납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제물이 열납 되지 않은 이유를 동생 때문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신앙은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신앙과 믿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였습니다.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미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마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2.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무엇을 제물로 드리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옛부터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무슨 제물을 가지고 갈 것인가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신들이 모두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무당들은 돼지 머리를 제물로 드립니다. 또 떡을 해서 드리는 종교도 있습니다. 구약에 기록된 모압 사람들이 섬기던 몰록이라는 신은 갓난아기를 산채로 불에 던져 태워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송아지나 정결한 어린양이나 비둘기로 제물을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시기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출23:15) 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나름대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는“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고 하였습니다.
(말1:7-8)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고 하신 말씀과 같이 가인의 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열납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잠16:25)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감사가 있을 수 없고 혹 헌금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믿음이 크면 감사도 크고, 반대로 믿음이 적으면 감사도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항상 믿음이 충만하여 하나님 기뻐하시는 온전한 감사를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3. 하나님이 기쁘게 열납 하시고 축복하신 제물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의 제물을 축복하셨습니다.
창22장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의 독자 이삭을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셨을 때 주저하지 않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서 모리아 산을 향해 출발을 하였습니다. 3일 동안을 걸어서 모리아 산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이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창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22:16-18)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우리가 추상적으로 그냥 생각하기는 아들을 드리는 것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은 그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장작을 쪼갤 때에 그 마음은 쪼개지는 장작보다 더 갈기갈기 찢어졌고, 3일간 황량한 광야 길을 걸어갈 때 아브라함의 마음은 광야보다 더 삭막하였으며, 제단 위에 이삭을 결박하여 들어 올려놓을 때 25살의 청년 이삭의 무게보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더 무거웠고 이삭이 장작을 지고 고갯길을 오르면서 “나무와 불과 칼은 준비되었는데 번제할 양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을 때 이삭을 찔러 죽이려고 들고 가는 그 칼이 마치 자기의 목을 찌르는 것과 같이 아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여호와이레」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아들 이삭에게 대답을 하였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그 말대로 하나님은 수양 한 마리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창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창22:16-18)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2) 하나님은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축복하셨습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그 제물을 받으시고 솔로몬에게 축복을 하셨습니다.
(왕상3:4-5)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하나님의 이 말씀에 솔로몬은 대답하기를
(왕상3:7-9)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3:10-13)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3) 예수님은 성전에서 두 렙돈을 헌금하는 여인을 축복하셨습니다.
막12:42절과 눅21:2절 의 말씀을 보면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연보궤에 넣었는데 예수님은 그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면서 그 어떤 사람보다 많이 하였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막12:42-44)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사1:11-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그러므로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이 시간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뻐하시는 참된 제사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들은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식과 외식에 치우쳐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 죄를 용서받고는 다시 나가 또 죄를 짓고 그러고는 또 다시 제물을 드리는 이와 같은 외식을 책망하셨습니다.
(사66:3-4)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감사로 제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시50:14,23)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잠21:3)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고 말씀하셨고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12:33) 라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림으로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시고 하늘 문을 열어 쌓을 곳이 없도록 축복하시는 놀라운 축복의 절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본 문 : 창세기 4 : 8 - 12
제 목 : 가인의 제물과 하나님의 은총
찬 송 : 71, 348, 351, 353, 354.
※ 본문 중에 인용된 성구는 개정개역판을 사용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이 저녁 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와 은총과 축복을 내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아 멘!>
믿음대로 이루어집니다. 큰 믿음을 가지면 큰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믿음 있는 자를 축복하셨고 믿음 있는 자를 칭찬하시고 믿음 있는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오늘 낮 시간에는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감사의 제물』이라는 제목으로 가인과 아벨의 제사 중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열납 하신 것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가인의 제물을 왜 하나님이 열납 하지 않으셨으며, 그 가인에게 하나님은 어떤 책망을 내리시고, 또 반면에 어떤 은총을 내리셨는가, 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물을 열납 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가 되자 농사를 짓는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제사 드렸고. 양을 치는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제사 드렸습니다(3-4절). 그런데 제사의 결과, 아벨의 제물은 여호와께 열납 된 반면, 가인의 제물은 열납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열납하시는 증거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는 성경 레9:24, 삿6:21, 왕상18:38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벨의 제물은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태워져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 반면, 가인의 제물은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혹자들은 제물의 차이에서 그 이유를 찾고자 합니다. 곧 아벨의 제물은 피 있는 생축의 제물이었기에 열납 되었고, 가인의 제물은 피 없는 땅의 소산이었기에 열납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른 해석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인과 아벨의 제물은 각각 그들의 천직(天職)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마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유를 히브리서에 기록된 대로 '믿음'의 차이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곧 아벨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으로 감사의 화목제물을 정성껏 드린 반면, 가인은 아무런 믿음이나 성의 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제물을 열납 하시기전에 그 제물을 드리는 자의 인격과 그의 정성이나 감사와 믿음까지를 먼저 감찰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 되었고, 가인의 제물은 거절되었던 것입니다.
2. 성경에는 제물을 드리고도 저주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낮 시간에는 하나님이 축복하신 제물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는 제물을 드리고도 축복은커녕 책망과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입니다.
(레10:1-3)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나답과 아비후는 비록 아론의 아들 일지라고 하나님 앞에 잘못된 불을 드리고 잘못된 제물을 드리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하였습니다.
(2) 사울 왕이 드린 번제의 경우입니다.
삼상13장을 보면 이스라엘 나라와 불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났는데 불레셋 나라는 병거가 삼만 이요. 마병이 육천이요. 해변의 모래 같이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이스라엘 나라를 침략해 왔습니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싸워보기도 전에 겁을 먹고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기도 하고 또는 도망을 가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백성들과 군사들은 흩어지고 있는데 온다고 하던 사무엘 선지자는 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왕은 번제물을 가져오라고 하여 자기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을 꾸짖었습니다.
(삼상13:13-14)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비록 왕이라고 할지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지자요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사울왕은 자신이 왕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결국 사울왕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도 책망과 저주를 받았습니다.
(3) 예수님은 십일조와 헌금을 많이 드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금의 경우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들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밭을 팔아서 거액의 헌금을 드렸습니다. 바나바보다도 더 많은 액수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저주를 받아야 하고 멸망을 받아야 합니까? 절반을 감추고 성령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그 부부는 성령을 속인 죄로 둘 다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로 멸망을 받았습니다.
3. 하나님은 가인에게 세 가지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1) “네가 안색이 변함은 어쩐 일이냐?” 고 물으셨습니다.
가인의 태도를 한번 보십시오. 동생의 제물은 열납 되고, 자신의 제물은 열납 되지 않자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5절) 얼굴색이 변하는 것은 분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왜 자기의 제물이 열납 되지 않았는가를 생각하고 잘못된 것을 회개하여야 하는데 반성하고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분노와 시기심만 불타올랐던 것입니다. 바로 이 분노가 동생을 살해한 근본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살인에 대해 교훈 하실 때. 무엇보다 형제를 미워하거나 시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21-22).
(요일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엡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고 하였습니다.
(2) “네 아무 아벨이 어디 있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찾아와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담에게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직접 본인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와 묻는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의 질문에, 가인의 대답은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이니까? "라고 반항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 남편이 어디 있느냐?", "네 아들은 어디 있느냐?", "네 부모는 어디 있느냐?", "네 이웃은 어디 있느냐?"고 우리를 향하여 묻고 계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의 구원은 믿는 아내에게 그 책임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녀에 대한 책임도 그 부모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책임을 감당치 못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가인에 물으셨듯이 우리에게도 준엄하게 물으시고 그것에 대한 심판 또한 준엄한 심판을 내리실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3)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네가 지금 무엇을 하느냐"고 하나님은 물으셨습니다. 마25장에 보면 달란트 맡는 종들의 얘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달란트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구원받은 자와 지옥 갈 사람을 갈라서 오른 편과 왼쪽에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4-36)
주님의 이와 같은 말씀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25:37-39) 하고 겸손히 자신들의 한일이 없다고 하자 주님은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였느냐?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였느냐?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하였느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옥에 갇히고 병든 자에게 무엇을 하였느냐, 나라와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하였느냐, 고 물으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묻고 계시는데 우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한번 반성해 보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버리고 하나님 안에 거하여 늘 책임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4. 하나님은 가인이 비록 살인자일지라도 그에게 긍휼과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가인의 경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죄인을 어떻게 심판하시고 또 어떤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먼저 가인에게 권면의 말씀을 주셨습니다.(4:6-7절)
사람들은 남이 자기보다 잘될 때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되고 심지어는 시기와 질투를 하는 것이 사람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가인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 되지 않은 이유를 자신에게 있는 것임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며, 또 반성도 하지 않고 시기와 분노로 그의 안색이 변한 것입니다.
가인이 그 동생을 시기하여 낯빛이 붉어질 때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고 하시며 가인을 권면 하셨습니다.
노아 시대에 죄악이 관영하여 세상에 간악한 사람뿐임으로 하나님은 의인인 노아를 명하여 방주를 짓게 하시고 뭇 백성에게 권면 하시기를
(창6:12-13)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권면의 말씀을 청종 하여 방주에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는 그들의 자유였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가족은 하나님의 권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청종 하여 구원을 얻었으나 모든 인생들은 청종치 않다가 하나님의 홍수 심판에 의해 다 죽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면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는 복이 있는 자입니다.
(2) 하나님은 가인에게 책벌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범죄한 인생은 반드시 책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가 범죄한 때 열 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민족적 범행이 있을 때 이방인 바벨론이나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결코 죄 없다고 하지 않으신다(출20:7)고 하셨고
(민14: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고 엄중하게 경고를 하셨습니다.
이처럼 언제나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인이 범죄 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묵과하신 것이 아니라 벌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피 값으로 가인에게 무거운 벌을 내리시기를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4:12)고 했습니다.
4장 15절 말씀에 "가인에게 표를 주시니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이 가인에 무슨 표를 주었습니까? 가인에게는 전과자라는 표, 살인자라는 표, 죄인이라는 표를 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무슨 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주님의 보혈로써 인침 받은 구원의 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못하면 사탄 마귀의 666이라는 멸망과 저주의 인을 맞아 지옥을 들어가게 됩니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아 멘!>
(3) 하나님은 가인에게 벌을 내리심과 동시에 용서도 해 주셨습니다.(4:12-15절)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인생들이 회개하면 사랑으로 용서하시기를 마지않습니다. 니느웨성이 범죄하여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요나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왕으로부터 온 백성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여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은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 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창4:13-14)라고 했습니다.
가인의 자책하는 비애의 소리가 여호와께 상달될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창4:15)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인에게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4장에는 가인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는데 가인 이후 6대까지만 기록이 있고 그 후로는 아무 데도 가인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4장 이후에서는 가인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끊어진 것입니다.
(창4:16-22)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 였더라”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관용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뭇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죗값으로 예수님을 제물로 받으시고 온 인류 만 백성의 죄를 사유하신 것입니다.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잠21:3)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여러분들은 진정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아벨의 제물을 드렸습니까? 아니면 드리고도 책벌과 저주를 받은 가인의 제물을 드렸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말씀하셨고,
(잠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말1:13절 말씀에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을 번폐스럽다고 아무렇게나 성의 없이 드리는 제물을 책망을 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무슨 말씀이 필요하겠습니까?
구약 시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직접 통치하시던 시대에도 형식과 외식으로 드리는 제사와 제물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후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물며 오늘날이야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시대이건 간에 하나님께 잘못 드리는 제사나 제물은 하나님이 결단코 열납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열납 하지 않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상당한 벌을 내리셨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들도 이와 같은 말씀들을 마음 판에 세기면서(잠3:3,7:3) 아벨과 같이 진실 되고 온전한 제물을 드려 하나님이 열납 하실 뿐만 아니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감사의 원칙 "
눅 17:11-19
서론
감사는 은혜를 베풀고 보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받은 사람이 베푼 사람에게 보답을 하는 것인데 그것도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보답하는 것은 감사의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잠언 저자는 말하기를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말며 외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말지니라"하였습니다(잠 27:2). 이는 어떤 사람의 업적과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데 자기 칭찬과 자랑은 교만의 일종이 되는 것입니다. 랍비들은 어떤 사람에 관한 평가를 할 때 그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하는 제삼자가 주는 정보에 의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칭찬이 진정한 칭찬이며 성도는 그 칭찬만을 사모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요 12:43).
1. 감사는 자원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본문 15-16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하였습니다. 감사하는 자의 수효는 언제나 적으니 이것이 인류의 어두운 면이라는 것입니다. 열 사람이 은혜를 받았는데 스스로 찾아와서 은혜를 보답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히 엎드려 감사하였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 감사가 아름다운 것이고 원칙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보다 더 많은 은혜를 받고도 교만하여 스스로 감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2. 감사는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본문 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이 감사한 것은 자신의 불치의 병을 고침받았기 때문이지 그 무엇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감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감사가 감사의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신분을 말씀하실 때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하였습니다(본문 18). 당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게 개와 같은 취급을 받고 사는 낮은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많은 사람들은 감사보다는 대가성이 있는 뇌물의 성격이 높은 것입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 그러면 당신은 실망하지 아니할 것이다"하였습니다.
3. 진정한 감사는 손해가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본문 18-19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하였습니다. 불치병 환자가 육신의 병 고침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였는데 그는 영혼까지도 구원을 받는 복을 받았습니다. 가룟유다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람이라 육신만 망하지 않고 영혼까지도 영원히 멸망을 받았지만 이방인이고 한센병자인 이 사람은 감사하여 영혼까지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결론
금년 우리 성도들도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스스로 은혜를 보답하는 차원에서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원칙에서 감사하고 육신적인 은혜만 받을 것이 아니고 영적인 은혜를 더욱 풍성히 받는 놀라운 기적적인 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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