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바벨탑에서 배운다 (창 11:1-9)

공 상희 2009. 10. 1. 13:21

바벨탑에서 배운다 (창 11:1-9)


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이 시간에 “바벨탑에서 배운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일은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높아져 그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마귀를 보세요.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반역하다가 얼마나 비참한 운명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모든 것이 순탄하고 행복할 텐데 어리석은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길을 걸어가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누구나 다를 것이 없는 인간의 죄악 된 본성입니다. 이것을 무너뜨릴 분은 우리 하나님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본문의 바벨탑 사건은 노아 홍수 이후 인간이 번성할 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제 2의 대홍수를 막고 하나의 세계적인 왕국을 건설하여 자기 이름을 내고 세계에 흩어짐을 면하려는 어리석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반역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지금도 사람들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발상을 바꾸어 바벨탑을 뒤집어 놓고 보면  여기에서 주는 힌트가 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성경은 우리 신앙을 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덕을 세우라는 말씀이 있는데 덕을 세운다는 말은 원어로 “오이코도메”(oikodome), 이 말은 ‘집’이라는 뜻의 “오이코스”(oikos)와 ‘세운다’는 뜻의 “데모”(demo)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건물을 세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집을 세우는데 기초조차도 닦지 못한 채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쌓다가 중단하고 쌓다가 또 중단합니다. 혹은 쌓아 올리다가 허물어지고 또 허물어집니다. 주님을 믿는 지는 오래 됐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여기저기 허물어져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지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의 집을 세우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단할 수 없는 축조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견고한 신앙을 축조하는 원리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견고한 신앙을 축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말씀의 감화를 받아야 합니다.

1절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당시 사람들은 모두 노아의 자손들로서 한 언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이 하나였기 때문에 언어의 소통에 지장 없음은 물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바벨탑을 쌓은 니므롯은 특이한 사냥꾼이라 했듯 사람을 포섭하고 규합하여 전쟁하는 신출귀몰한 사람이었습니다. 악한 자이지만 사람들은 그의 능력에 매료되어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처럼 영의 세계에도 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리와 세상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우리는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의 소리는 사람의 생각이나 사탄의 소리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듣는가가 중요합니다. 듣는 그것이 인격과 사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한 종류의 소리만 있어야 합니다. 세상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신앙은 관심 밖으로 밀려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 성경을 묵상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간증을 듣고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충만해야 합니다. 말씀 충만은 동기를 부여합니다. 믿음의 불이 타오르게 합니다. 말씀은 도전과 자극을 줍니다. 니므롯은 선동의 명수요 전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의 말에서 동기부여를 받고 목숨 걸고 따랐습니다. 이처럼 말씀이 꽉 차 있을 때 비로소 신앙의 건축을 향해 전진할 수 있습니다.

2. 깊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6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했습니다. 그들은 민족도 하나였습니다.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물보다 진한 동질성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이런 생명적인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이 친 아버지시니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으며 경외하게 됩니다. 남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또 성령이 함께 하실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11:2에 성령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라 했어요. 그러므로 성령으로 된 것이 아니면 다 불타고 무너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3:13에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불은 시험입니다. 시험이 오면 신령한 것으로 세우지 않는 것은 다 불타고 맙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은혜의 깊은 곳으로 이끌어줍니다. 얼마나 깊은 기도를 하느냐가 영적 깊이의 척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줄을 붙잡고 깊이 나아가십시오. 우리 심령을 놀랍게 변화시켜 줍니다. 성령의 체험이라면 깊이 하도록 놔두세요. 밤새 울고 울다가 다음날에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만이 참된 신앙이 가능하게 됩니다.

3. 예수 안의 부푼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부픈 꿈의 땅을 만났습니다. 2절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시날 땅은 바벨론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넓고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홍수 이후 산지라든지 협소한 곳에 살다 넓은 평원을 찾으니 얼마나 꿈이 부풀었겠습니까? 노아의 홍수로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땅이 만들어 졌던 것입니다. 이 평지는 자신들의 뜻을 펼칠 광활한 무대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에게도 무대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안에서 영원히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죽으셨으나 다시 사셔서 승천하여 높은 보좌에 앉으신 그 영광스런 우리 주님 안에 바로 우리가 있습니다.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 것이요 주와 함께 참으면 주와 함께 왕 노릇하는 이 비전을 발견한 자는 신앙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골2:3에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하셨고 이어 6절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라”고 권면합니다. 예수 안에 숨긴 이 엄청난 보배를 보는 자만이 결코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주신 이 엄청난 복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우리는 그 안에 정착하며 우리의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4. 능치 못함이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 보세요. 얼마나 사고방식이 열려 있는지 모릅니다. 3절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그들이 시날 평지에 바벨탑을 쌓으려 할 때 재료가 가장 문제였습니다. 탑을 쌓으려면 돌이 있어야 하는데 평지다 보니 돌이 없습니다.

또 접착재료로 진흙은 홍수가 나면 다 허물어지고 맙니다. 진흙밖에 없는 시날 땅에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운다는 것 미친 망상이 아니고는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콘크리트로 지어도 철근이 모자라면 주저앉고 마는데 진흙만 가지고 하늘 꼭대기 닿는 탑을 세우려는 것은 이것은 해서는 안 될 망상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할 수 있다는 사고를 가졌고 드디어 재료를 고안해 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고 진흙 대신 아스팔트 역청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벽돌이 없던 그 시대에 벽돌이란 상상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 자재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를 모방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창조와 모방을 다하여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대개 창조적인 생각은 극소수가 가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국민 전체가 서로서로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 가지고 신앙을 건설해 나가야 합니다. 신앙에 난제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못해도 하나님은 하신다는 믿음 가져야 합니다. 진흙밖에 없듯 내 안에 육성만 가득하고 조그만 시험에도 진흙처럼 허물어진다 해도 하나님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흙을 이겨 불로 굽든 성령으로 가능하다는 교훈입니다. 진흙 대신 역청을 썼듯 주님이 이루신 십자가와 보혈 공로로 이미 이겼다는 믿음입니다.

5. 생명 바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4절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다시 대 홍수가 나면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저 살기 위한 주택이 아니었습니다. 사치스런 그런 상징적인 건축물도 아니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흥하느냐 망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흩어짐의 불안감도 컸습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미지의 땅에 흩어지면 다시는 보지 못하므로 보느냐 못 보느냐 하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더구나 그런 거대한 공사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오늘 같이 도구가 발달한 시대에도 터널 하나 뚫는 데도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북한에서는 댐 하나 막는데 군대를 동원하다가 수천 명이 죽고 식량난까지 겹쳐서 수만 명이 죽었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목숨 걸고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목숨을 거는 사람 앞에 그 일을 막을 자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그런 각오로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살고 죽는 것이 여기에 달렸다, 흥하고 망하는 것이 여기에 달렸다는 각오로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우리 가족이 모두 천국 가서 사느냐 아니면 영원히 보지 못하게 갈라져 흩어지느냐 신앙에 달렸다는 생각으로 해야 합니다. 신앙은 오락도 취미도 아닙니다. 사활이 달린 문제입니다. 이 각오가 없으면 신앙의 집이 지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 이름을 내려 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늘 꼭대기 닿도록 쌓아야 합니다. 신앙의 최고봉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 우리들도 그 사랑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 합니다. 내 목숨 버리는 자만이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자만이 진정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시는 죄악의 바벨탑 있습니까? 다 헐어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탑을 세우십시다. 저 하늘 꼭대기에 닿도록 세우십시다. 믿는 자에게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령으로 기도로 믿음으로 목숨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온 세상에 복음을 전도하면서 가장 아름다운 불멸의 신앙의 탑을 세워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