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전-계시록

오순절 방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행 2:5-13)

공 상희 2009. 6. 9. 15:35

오순절 방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행 2:5-13)

본문은 오순절 성령 강림 시 방언의 역사를 본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보기에는 갈릴리 사람이 분명한데 언어는 천하 각국의 말을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분명 무식한 사람들이 확실한데 어떤 유식한 언어학자들보다 더 유능한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큰일을 예언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 듣고 경외감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한 부류는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했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소란할 만큼 놀랐다는 것입니다.

6절에 “큰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 듣고 소동하여” 이 말씀 가운데는 사람들이 놀랐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웬만큼 놀란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소동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7절에 “놀라 기이히 여겨”의 ‘놀라’라는 말은 ‘엑시스탄토’라는 말로서 ‘정신이 나가다’, ‘미치다’는 뜻입니다. 지금 난 어떤 세계를 보고 있는고 하며 놀라도 크게 놀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이히 여겨”라는 말은 헬라어로 ‘다우마조’의 미완료과거중간태형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놀라움과 신기함이 배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께서 주관하셔서 그 모임을 이끌어 가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방언은 과거나 지금이나 사람을 어떤 면으로든 놀라게 합니다.

방언의 놀라움이란 무엇일까요?

1.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놀랍니다.

고전14:22에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반신반의했던 사람에게 방언이 임할 때 하나님 살아계신 것이 진짜라고 믿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방언의 여러 기능 중의 하나인 표적적인 기능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도 임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믿음이 부족해도 열정적인 예배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방언을 주십니다. 그 이유는 방언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학생들도 보면 하기수련회 때마다 방언을 체험케 하신 것을 봅니다. 학생들에게 이런 것이 필요한 이유는 이 때 신앙과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확실한 신앙이 심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아주 중요한 때이기 때문에 체험적인 믿음이 필요로 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주심은 먼저 표적을 주셔서 온전한 믿음을 갖도록 하시기 위함이요, 또 그 방언을 통해서 더 장성한 믿음으로 자라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어떤 분이 예수를 믿고 난 다음 방언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나 유창하게 나오는지 진짜인가? 가짜인가? 겁이 나더랍니다. 이 분이 하나있는 동생의 구원을 위해서 늘 기도했는데 이태리 로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동생에게 무슨 일로 전화를 하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방언이 나오더랍니다. 엉겁결에 된 일이라 중지도 못시키고 방언이 끝났는데 동생이 연방 놀라면서 “누님! 뭐라구요? 뭐라구요?” 하면서 놀라더랍니다. 그래서 “얘야 미안하다. 그걸 방언이라고 하는데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냥 성령 받고 난 다음 내 입에서 나오는데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너에게 전화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전화에 방언이 나왔다. 미안하다.”

그러니까 “아니 미안할 것 없어요. 누님이 분명한 이태리 말로써 나보고 뭐라고 말씀했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너희 죄를 용서하고 너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니 더 지체하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 분명하게 이태리어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누님은 이태리어를 한글자도 모르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태리어를 이렇게 잘합니까?” 그래서 “내가 이태리어를 어찌 알 수가 있겠느냐? 그걸 방언이라고 한단다. 성령께서 나를 통하여서 방언으로 말한 것인데 나는 못 알아들어도 네가 알아들었으니 좋구나.” 그일 후로 동생이 그 누님께 일어난 기적을 보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간증입니다. 이렇게 방언은 하는 자에게도 듣는 자에게도 믿음을 주는 표적이 됩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놀랍니다.

고전14:4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그랬습니다. 자기 덕을 세운다는 것은 방언하는 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영적으로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남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회중 앞에는 유익을 끼치지 못하지만 자신에게만큼은 참으로 유익한 도구가 됩니다.

방언의 유익에 관해서 정리된 글을 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1. 내 영에 영적인 것을 믿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2. 세상적으로 오염되는 것을 막아준다. 3.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기도하게 해준다. 4. 영적인 새 힘을 준다. 5. 혀가 제어된다. 6.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7. 100% 하나님 뜻대로 기도하게 해준다. 8. 육신적인 기도를 제거 시킨다. 9. 중보 기도에 유용하다. 10.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심을 입는다. 11. 악하고 잘못된 습관을 끊는데 유익을 준다. 12. 균형 잡힌 인격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다. 13. 세상과 마귀적인 생각을 소멸시킨다. 14.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이 좋아지고 예민해지고 가까이 하게 하고 열심을 내게 한다. 15. 눌린 영에서 해방된다. 16.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도록 영감을 유지시킨다. 17. 성령의 능력을 가져다준다. 18. 영적인 것에 민감하고 영적인 것의 터치가 쉽게 되고, 터치 되면 방언기도 한 것만큼 반응이 온다. 19. 내 영이 강화 되어 혼과 육을 지배한다. 20. 내 혼과 육이 내영이 나타내는 통로요 도구가 된다. 21. 혼의 영과 성령의 것이 담겨지게 된다. 22. 영의 좋은 것을 쉽게 알게 되고 쉽게 받게 된다. 23. 영의 좋은 것의 갈증을 느끼게 한다. 24. 하나님의 것을 힘 있게 끌어당기는 능력이 온다. 25. 세상이 영향 받는 육신의 감정을 통제한다. 26. 영의 힘을 주기 때문에 영으로 말할 때 능력 있게 말할 수 있게 된다. 27. 성령이 말하게 하심의 축복이 온다. 28. 보는 것의 대해서 자극을 받지 않게 된다. 29. 방언 기도는 영안을 열기 위한 역할이며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이렇게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방언을 사모하고 또 열심히 기도생활에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3. 방언 속에 담긴 내용에 놀라게 됩니다.

11-12절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당시 기적은 120명의 제자들이 했던 방언은 통역 없이도 모여든 사람들에게 정확히 그 뜻이 들려졌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통역을 통해서 그 뜻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은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고 놀랐습니다.

방언은 그 뜻을 모르고 해도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뜻을 모르고 하면 영은 강건해지지만 깨닫지 못하니 마음의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 달리 말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통역하여 그 의미를 알고 나면 사람들은 그 방언에 담긴 내용에 놀라게 됩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비밀기도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도움의 말씀이 되기 때문입니다. 원래 기도란 하나님께 드리는 소원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받는 것도 있는 것처럼 방언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위로해주실 때 감격과 눈물이 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전14:13에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그랬습니다. 의미 모르는 방언도 좋습니다. 그러나 의미를 알고 하는 방언은 더욱 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방언과 통역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4. 따르는 핍박에 놀라게 됩니다.

13절에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오순절에 임한 이상스럽고 소란스런 방언사건을 보고서 일부 어떤 사람들이 비웃는 내용입니다. 성령이 임했어도 방언하지 않았다면 이런 핍박은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방언으로 오는 핍박은 초대교회 때부터였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성령의 은사 가운데 방언처럼 박해를 받은 은사는 없습니다. 고전 9장에는 9가지 은사가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씀은사, 지혜은사, 능력은사, 믿음은사,,, 이런 것들은 시인하면서 방언만은 시인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취해왔습니다. 그것은 부흥의 현장에서 방언이 강조되었기에 나타난 역반응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신학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면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신학적 추세는 방언을 인정하는 편이 더 강합니다. 교역자들 중에도 방언하지 못하는 분보다 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조직신학 담당 교수인 차영배 박사가 방언하는 사람들 손들라고 하니까 선듯 들지를 않았습니다. 그러자 재차 왜 그걸 숨기느냐고 호통치자 200명이 다 되는 우리 반원들 가운데 불과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손을 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방언을 체험하고도 신비주의자라는 핍박이 두려워 숨기려고 합니다. 반면 방언을 반대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목소리가 정통신학의 이름으로 전체를 대신할만큼 큽니다.


물론 방언이라고 다 같은 방언은 아닙니다. 악령의 방언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악령 방언은 마땅히 절제해야 하고 그쳐져야 합니다. 다른 종교인들도 방언을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모두 악령 방언이니 관심 쓸 필요도 없습니다. 요즘 기독교 신앙을 박해하는 안티들이 타종교도 방언한다고 기독교 신앙을 격하시키려고 하지만 논할 가치도 없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악령의 방언이나 인간의 심리현상에서 오는 방언이라면 그것은 절제하고 물리쳐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는 방언 가운데도 간혹 악령의 역사로 임한 것이 있어 물리치기를 힘쓰는데 이방종교인의 방언에 관심 가질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약 악령으로 인한 방언을 물리치지 않고 허용하게 된다면 그는 결국 귀신에 사로잡혀 무당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 방언이었지만 사람들의 인식 부족으로 방언은 많은 핍박을 당해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소란하다, 혹은 내용을 모른다, 혹은 꼬래비 은사다 하여 방언을 소홀히 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꼬래비는 없습니다. 모두 다 귀한 것입니다. 어느 한 가지 소홀히 한다면 우리 영적 생활에는 큰 구멍이 생기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방언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거기에는 긍정과 부정의 반응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사람들의 반응에도 긍정과 부정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방언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라는 것입니다. 우리 만큼은 부정하지 마십시다. 우리 만큼은 몰라 소동하지 않고 체험하고 활용하여 기뻐 놀라십시다. 모두 방언을 사모하셔서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주시는 은혜와 그 내용에 놀라고 큰 유익을 얻으시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