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체험하며 사는가? (행 18:24-19:7)
이 시간에 “성령을 체험하며 사는가?”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교인들의 믿음의 수준을 살펴보면 여러 수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세례도 받고 나름대로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데 아직 성령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볼로와 에베소 제자가 보여주는 모습이 그런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도 받았지만 아직 성령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아볼로 목사도 많고 에베소 제자들도 많습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예수를 전하면서도 성령을 잘 모릅니다. 성령에 대한 누림이 없거나 적습니다. 이 아볼로 목사 중에는 신학적으로 성령에 소극적이거나 부정하는 사람도 있고, 성령을 온전히 믿고 강조하지만 실재 누리는 일에 대해서는 등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후자가 더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에 아볼로 사건을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런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는 열심히 전하지만 부분적으로라도 성령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몇 가지 살펴볼 교훈이 있습니다.
1.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해도 복음을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24절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알렉산드리아는 애굽 나일강 삼각주 지대의 큰 도시입니다. 그곳 출신 아볼로가 학문도 많고 성경도 능통하고 웅변도 잘해서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예수에 관해서는 잘 전했지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의 복음 그리고 성령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잘 해석하여 예수를 말한다고 해도 예수의 복음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살고 함께 하늘에 앉혀진 이 사실을 믿음으로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5절에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19:4에 나와 있는 대로 이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회개의 세례는 죄인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자임을 깨닫게 하여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와 합하여 세례 받는 신약의 세례와는 구별 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처럼 성경을 알아도 복음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2. 복음을 알아도 성령을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3-4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세례 요한은 예수까지는 전했습니다. 예수가 복음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예수를 믿었지만 성령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 복음의 내용을 자세히 알면 어떨까요? 복음을 잘 알아도 성령 충만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19:5에 바울에게 예수의 복음을 자세히 듣고 세례까지 받았지만 그 순간까지는 성령에 대해서 나타난 것이 없었습니다. 6절에 바울이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성령 세례를 예수 믿음으로 받는 것인가 안수해서 받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만 사도행전은 나타난 현상대로만 기록한 역사서이기 때문에 이 구절을 신학적인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너히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복음을 받긴 받았으나 잘 이해하지 못한 그들에게 한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장로교 교리로 보면 예수를 믿음으로 중생하는 것이니까 예수 믿을 때 성령을 받은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더욱 충만한 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 중생했어도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성령에 대해서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하지 않는 것은 성령을 사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예배와 기도와 찬송과 순종 등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내용은 알고 보면 간단합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잘 경외하면서 성령 충만 받는 것입니다. 이 속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가 다 들어있습니다. 예수 복음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 이 두 가지가 잘 되어야 성령 충만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는 믿는데 하나님 경외함이 부족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 경외는 잘하는데 예수의 복음을 잘 알지 못합니다.
두 가지가 다 잘 되어야 합니다. 두 가지 중 한 가지라도 잘못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이 충실한 고넬료는 예수 복음을 듣고도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는 아는 데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이 부족해서 안 됩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잘 경외하여 성령 충만 받으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복음도 강조하고 성령 충만도 강조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전하면서 성령을 부정하는 이 세대를 향한 성령님의 맘 아파하심을 느낍니다. 왜 예수를 전하면서도 성령을 등한시 하거나 부정하는지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성부 하나님은 믿었지만 성자 예수를 배척한 것 같이 지금 사람들이 성부 성자는 인정하는데 성령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은사만 인정하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말씀의 은사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진정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면 성경에 쓰인 은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도 보면 성령을 활발하게 인정하는 교회나 교단은 날로 부흥하지만 성령을 일부라도 제한하는 교단이나 교회는 부흥 되지 않고 그 교단이 많은 지역은 아직도 한 자리 숫자에 머물 정도로 복음화율이 낮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최고 보수고 정통이라고 합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성령을 강조하는 교단은 수억으로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등한하고 예배에 소리가 없는 얌전한 교단은 성장할 줄 모릅니다.
예배의 소리도 중요합니다. 만약 여의도교회에 발성기도가 사라지고 오산리기도원에 사람이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그 날은 그 교회가 사라지는 날이 될 것입니다. 더 이상 기적도 없고 변화도 없고 영향력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 크게 가리고 시험 들다 사분오열 되어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 개성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발성과 묵상 두 가지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시험 가운데 처했을 때 부르짖기 시작하자 상황이 변했습니다. 아무리 예수 복음을 알아도 성령을 제한하면 구원의 충만함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우리는 겸손한 사람들을 봅니다.
26절을 보면 아볼로의 겸손이 나타납니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내가 모르는 것을 배울 줄 아는 겸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6절에 바울에게 안수 받는 제자들의 겸손을 봅니다. 여기 제자라고 하면 사실 목회자들입니다. 이들이 사도에게 안수를 받았습니다. 아무에게나 분별없이 안수 받아서는 안 되지만 정당한 안수도 겸손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유능하고 높은 위치에 있는 종들에게 안수 받으시면 더 충만함을 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자신의 믿음 형태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령에 대해서 무관심했다면 회개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수를 구주로 확실히 믿을 뿐 아니라 성령을 시인하고 하나님 잘 경외하여 성령으로 충만하여 영육 간에 더욱 성장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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