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달설교

[스크랩] 어버이 주일 설교자료집1탄

공 상희 2009. 5. 6. 14:18
출처 카페 > 빛교회 최정남목사 / 미라클
원본 http://cafe.naver.com/jj007789/4310

건강한 가정/고전7:3-
2001-11-21 22:58:49   read : 746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부부가 뜻이 맞지 않아서 이 혼을 했습니다. 남편은 몇년 후 불행하게도 성품이 나쁜 여자와 재혼을 해서 그 여자와 똑 같이 나쁜 남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내도 나쁜 남자를 만나서 재혼을 했는데 그 나쁜 남 자는 그 여자를 만나서 이상하게도 결혼생활을 하면서 그 여자처럼 착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것을 시사해줍니다. 즉 결혼의 행복이라는 것은 내가 어떤사람을 만나느냐에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행복을 지향하는 가정은 많지만 참으로행복한 가정은 많지 않습니다. 바을 사도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성도의 가 정생활에 대해서 많은 것을 들려 주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고린 도전서 5장에서 파괴 되어진 가정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고, 6장에서는 왜 가정이 파괴되었는가의 원인을 강조하고 있으며, 7장에서는 어렇게 하면 가정이 파괴되지 않고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을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 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중요한 교훈은 결혼이란 마음과 마음 으로 하는것이 아 니라 육체와 육체로, 몸과 몸으로 하는것이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 은 밥을 먹고 아이를 낳고 함께 사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하 여 삶으로 말마암아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 결혼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생활, 성공적인 가정생활, 그리고 건강한 가정생활을 영위 할때 하나님 앞에 영 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행복한 가정 생활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1절, 2절을 보면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니 음 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의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의 남편을 두라"는 말씀을 봅니다. 그리고 본문 9절에서는 '만일 절제 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 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중에서 유의할것은 '너희의 쓴말에 대 하여는..."이라고 시작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평소에 바울 사도에 게 가정문제,결혼문제, 성문제 등 모든 문제에 대하여 편지로 물어보았음을 의미합니다. 그 러므로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의문점에 대하여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 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함이 좋으니"라는 말씀에서 "좋다" 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서 '칼론' 이라는 말로써 '편리하다, 유익하다'의 의미 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아니함이 삶에 편리하다는 이 말씀은 결혼을 반대하는 말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이 당면하고 있었던 당시의 특수성에 비추어서 어쩔수 없이 독신생활의 유익한 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 다.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다 보면 환난을 당하게 되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런 환난을 당하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가정을 가지고 서 아들 딸 낳고 살다보면 환난을 당하고 여러 가지 가정적인 고통이 있기 때문에 이런 환난을 피하면서 살아가려면 독신생활이 결혼 생활보다는 유익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고, 때문에 본문 1절에서 남자 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당시의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쾌락적 영지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금욕적, 영 지주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라는 말은 '나스태큐'라는 말로 영과 육을 분리하여 영 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하는 사상입니다. 반대로 쾌락적 영지주의란 영과 육체라는 것은 별개이므로 육체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영과 육체는 떨어져 있기 때문에 절대로 영혼은 육 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상인 것입니다. 이런 쾌락적 영지주의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음행을 하며 죄를 범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금욕적 영지주의 자들은 육체는 악하고 저급하기 때문에 육체적인 정욕을 발산하는 것은 악한 것이므로 철저 하게 성적인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결혼생활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주장했습 니다. 바울은 이런 두 종류의 영지주의가 자기가 개척한 고린도교회 안에 들어오고 있는것 을 보고 잘못된 사상을 시정하고 바른 결혼생활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고린도전서를 쓴 것 입니다. 특별히 쾌락적 영지주의자들을 위하여 고린 도전서 6장의 말씀을, 금욕적 영지 주의 자들의 잘못된 결혼관을 고쳐주기 위하여 7장1절에서 7절의 말씀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만고불변의 법칙 입니다. 남자로든 여자로든 태어났으면 반드시 나이가 들고 결혼해야 하는것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만고불변의 법칙인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 보면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만들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4절에도 보면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 럽히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위의 말씀은 결혼은 만고불변의 법칙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이라는 사 실을 교훈함으로써 결혼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인 모형을 우리에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인 관계의 행복과 불행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것이 결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인 관계를 가르쳐 주는 영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두가지 중요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1. 행복이 상대적 관계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 상대적인 관계라는 것은 대등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3절을 유의해 보면 남자와 여자라는 말이 자주 나오고 남편과 아내라는 말이 계속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결혼생활의 행복이 다른데 있는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대등한 관계에서 출발 할 때에 행복해 질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최초로 여자를 만들때에 남자의 머리 를 잘라서 만드시지 아니한 것은 남자를 지배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 입니다. 또 남자의 발가락을 잘라거 만들지 아니한 것은 여자가 남자의 종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이 유에서 라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상대적인 관계라고 하는 것은 서로의 위치와 입 장을 이해해 준다는 뜻이 있고, 서로 평등한 존재로 인정해 준다는 뜻입니다.

독자 여러분. 남자와 여자를 가만히 살펴보면 우선 남성, 여성으로 성별이 다릅니다

가치관이 다르고 생활방식과 관념이 다릅니다. 서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남자와 여 자가 만난다고 하는 것은 화합하기 보다는 도리어 갈등을 갖고 깨어지기가 더 쉬운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방적인 태도로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주장만을 펼 때에는 행복한 가 정이 될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문 4절을 보면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느니라” 고 하는 말씀 은 상당히 의미가 깊은 말 입니다. 이 말씀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지나치게 자기 주장만을 하는 것은 가정을 파괴하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다 가정의 일원입니다. 남편도, 아내도 모두 가정의 일원인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가정의 일 원이라고 할 것 같으면 남편과 아내는 자신들의 강한 개성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리고, 상대방의 의견과 뜻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아내와 자기 남편의 개성을 존중하지 못 하게 된다면 가정은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남자는 자기 아내를 꼭 자기 스타 일로 바꾸어서 교육을 시킵니다. 어떤 부인은 남편을 자기의 스페이스에 맞추어서 살도록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가정생활은 이성이 만나는 공동생활의 기초입 니다.

그러므로 자기위주의 생각이나 행동을 저버리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히고 존중하는데서 행 복이 생긴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구상에서, 역사 속에서, 나에게 가장 합당한 사람을 뽑아서 만나게 해 주신 것이니까 서로 존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토레이 박사는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를 높여 귀하게 여긴다면 그분께서도 당신 을 높이실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당신이 하찮게 여긴다면 그분도 당신을 하찮게 여길 것이 다” 라고 했습니다.

주님과 나의 관계를 아야기 한 것입니다. 이말을 남편과 아내, 자식과 부모간의 관계로도 생 각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행복은 서로의 의무를 다하는 데서 얻어집니다.

3절에 보면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니 라”는 말씀은 부부의 성적인 의무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생활은 서로간에 지켜야 할 신성한 의무이지 일방적인 발산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성생활에서 균등한 책임과 균등한 기쁨을 누려야 한다는 사실 입니다. 그러 나 이 말씀은 성생활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의 각자 의무를 강조하는 것입 니다.

의무감을 다하기 위해서는 첫째, 마땅한 호의감을 가져야 합니다. 즉 상대방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둘째, 책임감을 다해야 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책임, 남 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책임을 서로가 다할 때 가정의 행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가정의 행복은 상호보완적이며 상대적이며, 인격적이며, 수 평적이며, 협조적인 관계를 이룰때 가능 합니다. 위의 모든 조건을 잘 지키며 서로의 의무를 다할 때 온전한 행복을 누리는 가정이 될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와 사랑을 감사 드리며 기도 드리옵나이다. 우리의 심령과 생 활에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시고 은혜와 사랑으로 역사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가정의 행복을 이루는 조건들을 모두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 성도들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 건강한 가정, 주 안에서 온전한 가정이 되도록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네 부모를 공경하라/엡6:1-4
2001-11-21 23:00:50   read : 770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나이가 어릴 적에는 자녀였지만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면서 부모가 되었습니 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자녀이면서도 부모로서의 위치에 있고, 아직 나아가 어린 사람이 라도 언젠가는 부모의 위치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버이 주일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고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매우 의미 깊은 주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복되고 귀한 주일에 아버지 어머니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새기며, 주 안에서 더욱 순종하고 공경하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노래 가사에도 있습니다만,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은 그 어느 것에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나 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손 발이 다 닿도록 고생하시 므로 우리 우리들을 기르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기르는 일은 그 무엇보다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어린아이 보는 것이 얼마 나 어려운지 노동을 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은 물론, 가슴을 조이고 애가 타는 순간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부모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과정 과정들을 거쳐서 자녀들을 성인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여기까지 있기까지는 부모님의 희생과 그만한 대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경제적인 면만 해도 그렇습니다. 한 어린이가 성년이 되기까지는 억대가 넘는 돈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아이를 갖기로 결심할 때부터 부모는 이미 자신들의 희생을 각오한 것입 니다. 만약 내가 없었더라면 부모님이 그때 그 순간 얼마나 편안하셨겠습니까?... 아무런 이유없이 한 밤중에 칭얼거리고 우는 바람에 피곤하고 졸려 죽겠는데, 이웃사람 다 깨울까봐 들춰 업 고 어두운 골목길을 서성일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저도 어릴 적에 어지간이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별 이유도 없이 울었어요.... 그때마다 어 머니는 포대기로 나를 업으시고 동네 골목길을 서성이셨습니다. 한참을 서성이다가 잠이 들 었는가 싶어서 내려 놓으시면 나는 또 울었습니다. 깜짝 놀라 다시 얼른 업고 서성이다가 온 밤을 지새우면... 벌써 아침이 밝아 옵니다. 다리는 아프고 어깨는 쑤시고... 그러고도 아 무런 불평도 없이 아침밥을 지으셨습니다.

내 부모님이 아니시면 누가 나를 이렇게 키우겠습니까?.... 프랑스에서는 여인들이 아기를 낳 지 않으려고 해서 인구가 자꾸만 줄기 때문에 아이를 낳으면 보상금도 준다고 합니다. 왜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합니까?... 희생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죠. 그러나 자신만 편히 살려고 출산을 기피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르는 또 하나의 죄 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출가한 딸이 아이와 함께 정성스레 마련한 선물을 들고 친정엘 갔습니다. 어머니는 손주들과 딸을 끌어 안으시면서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하십니다. 딸은 어머니께 자랑스레 선물을 내어놓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선물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고 야윈 듯한 딸의 얼굴을 보시며 "아니, 네 얼굴이 왜 이 모양이 되었니? 어디 아픈게 아니야? 아범하고 사이는 좋으냐?" 하면서 계속 해서 물으십니다. 요즘에 봄을 타서 그렇다고, 아무 일이 없다고 해도 계속해서 물어보시며 걱정을 하십니다. 바로 이런 것이 부모님의 마음이죠...

그러나 자식들은 부모님의 이런 마음을 알아줄리 없습니다. 나이가 많아 늙어지면 서로 몰 라라 하고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저 집에서 이 집으로 자꾸만 밀어냅니다. 혹 할머니는 손주들 봐주고 살림살이 도와주니까 조금은 쓸모가 있을지 모르지만 할아버지 는 뫼시기를 꺼려합니다. 게다가 병이라도 들면 자식들에게 버림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서울 강남에 있는 고속버스 터미널에는 하루에도 수 백대의 버스가 지방을 오가기 때문에 대합실이 무척이나 혼잡합니다. 또한 서울역에도 수없이 많은 기차들이 오가면서 대합실은 매우 혼잡합니다. 그런데 이런 대합실에는 종종 나이 많은 어른들이 버려지곤 한다고 합니 다. 버려진 어느 노인의 말씀이 자식들이 터미널에 모시고 와서는 노인들의 주민등록증을 가지 고 자기들만 얼른 돌아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마 체면은 있어서 신원이 밝혀지는 것이 부 끄러웠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런데도 그 노인은 자식들에 대해서 질문을 하니까, 緘口無言(함구무언)... 입은 있으나 말 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에게 버림을 당하면서도 그 못난 자식들을 감싸는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실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버려진 노인들은 잠실에 있는 롯데 월드에서도 종종 일어난다고 하고, 또 언젠가 TV 에서도 방영된 바 있지만 효도관광을 명목으로 노인들을 제주도로 여행을 보내드리고는 그 사이에 자기들은 부모 몰래... 아예 찾을 수 도 없게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요즘 어른들은 정말 효를 받아보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부모를 공경하 지 않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시대는 모성애와 부성애를 상실한 시대입니다. 부모인데도 부모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모인데도 도저히 부모같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버리는가 하면 자식을 심하게 구타한 나머지 이웃사람의 신고로 겨우 구조를 받은 아이들을 봅니다. 경찰에 불려와서도 전혀 잘못을 했다는 반성의 기미조차 없 습니다.

요즘에는 부모가 자녀를 학대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가정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에 있어서 얼마전에 TV에서 보도가 되었습니다만,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함 그 자체였습니다. 온 몸에 매를 맞은 흔적으로 시커멓게 멍이 들고, 심지어는 불구가 되고, 사망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습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부모로부터 매를 맞은 아동들은 다음 세대에 또다시 대물림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져서 앞으로 이 사회에 더 큰 문제로 작용할 우려를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아동학대 사례가 증가하면서 해마다 최소한 2천명 이상의 아이들이 사망하고, 14만 2천명이 중상을 입는 등 국민의 보건을 위협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자녀들을 구타하는 부모들의 말을 들어보면, "내 자식 내가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참견이 냐?"고 말을 합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자녀들을 마치 자신의 소유인 것으로 여기는데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어느 사회학자는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옛날에는 모든 지식이 부모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주로 농경사회가 되다 보니까 살아가는 삶의 지혜와 기술의 습득도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했습니다. 또한 부모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아야만 살 수 있었습니다. 평생을 머슴살이를 해도 제 힘으 로는 논, 밭 몇 뙈기 사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명예와 신분도 부모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양반 자식은 양반으로, 상놈 자식 은 상놈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니 옛날에는 자연적으로 효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 다는 것입니다. 즉, 부모가 절대적인 의존의 대상이었습니다. 부모를 떠나면 당장 생활의 어려움을 느낍니 다. 부모에게서 쫓겨나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농경사회가 지나가고, 산업화 사회, 정보화 시대, 디지털 시대로 발전 하면서 자식들이 모두들 직장을 따라서 고향을 떠나고 부모를 떠나서 각자 각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사회와 학교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얻기 때문에 옛날처럼 부모님의 덕을 볼 일이 별로 없고, 그래서 효도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곧잘 하시는 얘기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더라도 돈 좀 가지고 있어야 효도를 받는다!" 그런 말을 합니다. "자식들에게 받기보다는 조금씩 주면서 살아야 자식도 나를 위한다!" 하는 얘기를 종종 듣 습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이야기입니까?... 근본적으로 순수한 효의 개념, 그 자체가 타락한 시대입니 다.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인 개념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효라고 하는 것이 있을 곳 이 없습니다.

여러분,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간혹 모성애를 말하기도 하지만 동물의 세계에도 모성애는 있습니다. 모든 동물들이 어렸을 때에는 그 어미를 따릅니다. 어떤 때는 굉장히 강한 모성애가 동물의 세계에 있는 것을 봅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사랑하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다른 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동물은 새끼 때 사랑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호랑이도 자기 새끼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조금 크면 물어버립니다. 새끼도 자기가 필요할 때에는 애미를 따르지만 어느 정도 크면 떠 나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동물입니다.

결국 인간의 인간됨이라고 하는 것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부모를 공경하고, 또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높이 더 깊이 사랑하는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이 시대는 '버리는데'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부모를 버립니다. 유명 메이커가 이니라고 멀쩡한 옷을 그냥 버리고, 볼펜이나 노트같은 학용품은 물론이고, 멀쩡한 도시락이나 가방들도 그냥 버립니다. 또 입맛에 안 맞다고 음식도 그냥 내다 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버리는 것을 조사해 보니까, 우리나라가 지난해 소비한 의류 지출은 자그마치 14조 8천억원이었고, 버려진 음식물은 한 해에 15조원이었으며, 버려지는 아이들로 인하여 해외 입양이 급격히 늘어서 93년에 2천 290명이던 것이 98년 부터는 8천명이 넘어 섰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버리고, 물건을 버리고, 양심을 버리고, 신앙을 버립니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버 림증'이라는 무슨 중병을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은 음악이나 예술, 문학, 미술... 어느 분야든지 사랑이라는 말과 주제를 가장 많이 사 용하고 있지만 모두들 자기만을 사랑하며, 물질만을 사랑하고, 쾌락만을 사랑하는 사랑을 하 고 있습니다. 이는 본질에서 벗어난 사랑을 하기 때문인데, 진정한 사랑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한 결 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말세의 징조라고 하셨습니다. 딤후3:1-5절 말씀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 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변질입니다. 사랑의 타락이요, 사랑의 오염이며, 말세에 나타나는 징조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진정한 사랑을 맛보지 못한 인간들이 저지르는... '말세적 사랑'이 반영된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옳다 는 말은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효는 선행도 공로도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공경이라는 말씀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 습니다.

인간 관계의 사랑은 세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보다 못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는 긍휼히 여기는 사랑인데, 아 래를 내려다보는 사랑입니다. 또 하나는 친구의 사랑과 같이 나와 같은 위치에서 수평적으로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나보다 상대방을 더 높이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관계인데, 이를 '공 경한다'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이 세 가지의 사랑가운데, 부모를 향해서는 공경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노인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한다든지 친구와 같이 수평적인 관 계의 사랑은 효도가 아닙니다. 효는 먼저 존경이 앞서야 합니다. 높이는 마음, 존경과 순종 을 겸한 사랑이 공경입니다.

'공경하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카베드'는 '무겁다' '존귀하다' '많다'는 뜻을 지닌 능동형이 요,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5계명은 무겁게 취급해야 할 중량급 계명이요, 높고 귀하게 여겨야 할 존귀한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계명은 누가 시키기 전에 스스로 지켜야 할 계명이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절대 명령인 것입니다.

잠3:9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서의 "공경하라" 는 말씀도 본문과 똑같은 '카베드' 로 되어 있어서 부모의 공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똑같이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루터(M. Luther)는 말하기를,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다!" 그런 말을 했습 니다.

예수님께서는 요일4: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 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 랑할 수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또한 막3:35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 고 말씀하시므로 새로운 부모에 대한 정의를 내리셨습니다. 즉 참된 기독교적인 효도는 무엇이냐?... 내 육신의 부모를 초월해서 남의 부모도 공경할 수 있어야 참된 효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이상과 현실은 있지만 과거가 없습니다. 화려한 꽃은 있지만 그것을 지탱할 만한 뿌리가 없습니다. 또한 젊은이들은 지식은 많으나 지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지혜를 존귀히 여기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 지혜를 높이 평 가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효도입니다. 그러므로 잠1:8절 말씀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 하고 말씀합니다. 잠13:1절 말씀에서는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했고, 잠15:5절에서도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 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하고 말씀했습니다.

젊은이들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그것은 나만 가진 고통이요 나만 가진 눈물이라고 울부 짖습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오는 것일까?..."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에게 물 어보면 일찌기 그와 같은 체험을 다 겪어 왔습니다. 왜 젊은이들이 실패의 쓴잔을 마시며 눈물을 흘립니까?... 그것은 지혜자의 말을 듣지 아니 한 결과입니다. 노인들의 지혜를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부모님은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한없이 주고 주고 또 주고... 그러고도 줄 것이 없어서 아쉬워합니다. 이것을 '내리 사랑'이라고 합니다. 부모님에게는 언제나 자식이 어린아이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육십이 넘은 아들을 출근시키 면서도 "길 조심해라!", "사람 조심해라!", "차 조심해라!" 하고 당부하십니다.

부모는 적어도 자식에게 향한 마음만은 선한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을 자식들은 높이 존경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하면서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자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약속있는 첫 계명'이라는 말은 십계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1계명부터 4계명까지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요, 두 번째는 5계명에서부터 10계명까지 인간에게 대한 계명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대한 계명중에 첫 번째로 말씀하신 것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는 말씀 이었습니다. 즉, 인간에게 말씀하신 계명 중에 첫 번째의 계명이면서... 이 계명을 지키면 이러 이러한 복 을 주겠다는 축복을 약속으로 하고 있는 계명입니다. 그래서 약속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특히 모든 계명은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지만, 제 5계명만은 '하라!'는 적극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효도에 대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교훈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잠23:25절에는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나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가르쳤으며, 잠30:17 절에는 "아비를 조롱하며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 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좀 부족해도 효도를 극진히 하면 복을 받습니다.

그 약속의 첫 번째 축복은 장수의 복입니다. 오래 산다고 했습니다. 출20:12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 명이 길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네 생명이 길리라" 하고 말씀했는데, '길리라'는 말씀은 히브리어로 '야아리쿤'이라 는 말인데, '길게 하여 주다' '연장시키다' 라는 사역 능동형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무슨 뜻인가 하면, 사람의 '생명'은 자연적으로 길어지거나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길어 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의지로 장수하게 하신다는 뜻 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나님이 생명을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생명의 연장 뿐만이 아니라, 그 생명이 다하기까지 그 삶이 복되고 형통할 것이라는 보장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되는 복, 형통의 복도 받는 다고 했습니다. 신5:16절 말씀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했습니다.

또한 성경을 살펴보면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는 지혜와 명철을 얻는 다고 했고, 명예와 영광이 주어지며, 그 가정과 자녀에게도 복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성공과 가정의 축복을 원하신다면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효도하는 가정은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부부간에 사랑이 깊습니다. 또한 자녀 교육을 위해 서도 효도를 해야 합니다. 효도하는 가운데 훌륭한 자녀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TV에서 '이것이 인생이다' 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어느 목사님의 가정에 있 었던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이 목사님에게 장모님이 계셨는데, 그만 치매에 걸리셔서 모시고 있던 아들네가 너무 힘이 들어서 모시기가 어렵다고 해서 장모님을 모셔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모님이 치매 증세가 너무 심해서 아이들의 책이며 공책들을 다 찢어 놓고, 청 소해 놓으면 금새 방을 어질러 놓고, 대소변을 아무렇게나 보고, 음식도 분별없이 드시고... 너무 너무 모시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한 2년 동안은 장모님 때문에 부부간의 사이도 안좋아지고, 아이들도 다 싫어하고, 가정의 분위기가 안좋고... 너무 힘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의 어머니도 내 어머니지..." 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보살피고 최선을 다해 서 보살펴 드렸습니다. 나중에는 아이들도 이해가 되어서 할머니를 사랑하고, 모든 가족들이 협력을 해서 정성스럽 게 모십니다. 목욕도 자주 씻겨 드리고, 맛있는 것도 사다 드리고, 가끔 외출도 해서 바람도 쐬여 드리고... 얼마나 정성스레 모시는지 장모님 때문에 가족간에 사랑이 더욱 돈독해 졌습 니다. 장모님의 곁에 같이 누워서 "어머니 사랑해요!" 하면서 꼭 안아드리기도 합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의 마음과 정성이 너무 고마워서 남편을 더 사랑하게 되고, 아이들도 더 사랑하게 되어서 이 가정은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이 가정의 특징을 보니까, 서로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남 편은 아내에게, 또 장모님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자주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장모님 때문에 부부간에 사랑이 식어지고 가정의 화목이 깨어 졌는데, 이제는 오히려 장모님 때문에 가정에 행복이 넘치게 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민족은 여러가지 아름다운 문화 유산들 중에서 특별히 효를 강조하고 자랑해 왔습니 다. 효가 모든 행위의 기본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이것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사회 법도가 근본적으로 무너지고 가치관 의 혼란이 오게 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부모님께 대한 바른 효도를 실천함으로 우 리의 가정과 이 나라와 온 세계 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놀라운 축복을 이어 가실 수 있 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잊어서는 안될 사랑/엡6:1-9
2001-11-21 23:02:21   read : 471

효를 기반으로 하는 대가족 제도에서 부부간의 삶을 기반으로 하는 핵가족 제도로 변천하는 세대 속에 사는 우리에게 특별히 1년 중 한 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정해서 지키면서 어버이 들의 사랑을 되새겨 보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대학에서 삼강 오륜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한 학생이 삼강은 한강 낙동강 섬진강이라고 했다는데 이 말은 오늘의 도덕교육의 부재 현상을 나타내는 말인 줄로 압니다.

효를 생활의 이념으로 하여 부모님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던 미풍 양속은 점점 사라지고 있 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부모님들이 가정의 변두리로 밀려 나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자신들은 비록 변두리로 밀려가면서도 자식들은 변두리로 밀어 넣으려 하지 않 습니다. 언제나 부모님들은 자신들의 삶의 중심에 자녀들을 품고 살아갑니다. 자식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자식을 위해서 대신 수모를 당하십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가나 안 여인이 자기의 딸을 고치려고 개 취급을 받는 것을 보십시오. 그에 반해 자식들의 부모 에 대한 존경심은 날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비록 자식들이 부모에 대한 사랑은 변했을지라 도,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 부모님의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잊어서는 안될 사랑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 고자 합니다.

⑴,자식을 위한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을 잊으면 안됩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특히 어머님의 사랑은 주는 사랑입니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 은 너무나 크고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는 우리를 태 중에 품으시고 당신의 피와 살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영양을 공급하여 우리를 자라게 했습니다. 태 중 에서의 양육이 다 될 무렵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생명과 바꾸는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 를 낳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핏덩어리 같은 생명을 보살피기 위해 밤잠을 못 주무시고 돌봅 니다. 혹시 자식들이 아프면 어머님들은 자신이 대신 앓았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간호를 합니다. 그리고 부드럽고 영양 있는 음식은 모두 자식에게 돌려주고 자신들은 부스 러기를 드시면서도 만족해하십니다. 자라서 학교에 가게 되면 혹시 다른 얘들에게 뒤질세라 자신은 못 입고 못 먹으면서도 자식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어떤 어머니는 자식 이 자라서 군에 입대했는데 마침 겨울인지라 어머니의 생각엔 아들이 얼마나 추운데서 고생 할까? 생각하면서 따뜻한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추운 밖에 나가 한 두 시간을 앉아 있다가 들어가곤 한답니다. 무엇이나 좋은 것이 생기면 자기는 쓰지 않고 자식에게 주려는 것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며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어떤 부모님도 "내가 이만큼 했으면 부 모로써 할 일을 다했다"고 하는 부모님은 없을 것입니다. 언제나 부족하게 생각하여 더 주 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것이 부모님들이십니다. 그러니 어찌 그런 부모님의 사랑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럴 때 어머니의 마음을 노래하면서 회상해 봄이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에 주름이 가득 땅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사람의 마음속엔 온 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 생명 붙어 있을 동안 늘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효도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⑵,자식을 위한 부모님의 끊임없는 기도를 잊으면 안됩니다. 자식이 잘 되고 바른길 가기 위해서 애쓰고 기도하는 이는, 다른 분이 아닙니다.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는 부모님이시며 그중 어머니의 기도는 잊지 못할 사랑이십니다. 물론 우 리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어머님이십니다. 내가 성공할 때 가장 기뻐하는 이가 어머니 시며, 내가 실패할 때 가장 가슴 아파하는 이도 어머님이십니다. 솔직히 말해서 인간 사회에서는 남이 잘 될 때 기뻐하기보다는 속으로 시 기하기 쉽고 남이 안될 때 가슴아파 하기보다는 속으로 시원해 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녀의 성공을 위해서 언제나 진실 되게 기도하십니다. 자녀들 하나님 앞 에서 바르게 양육하기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는 어머니의 진실하신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훌륭한 영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히11:23 "믿음으로 모세 가 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 하였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훌륭한 아이를 낳았으면서도 맘대로 기를 수가 없어 서 안타까워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 생활을 할 때 그 민족이 날로 번성함을 보고 두려워한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얘기를 낳을 때 여자아이는 살려 두지만 남자아이 는 모두다 강물에 빠뜨려 죽이라는 무서운 칙령을 내렸습니다. 바로 그와 같이 어려운 때에 모세가 났으니 그 엄마가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그렇지만 모세의 어머니는 석 달 동안 을 숨겨서 아이를 길렀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겠습니까? 모세가 모세 되기까 지는 그의 어머니 요게벳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어머니의 기도를 생각할 때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나는 간절히 기도하여 사무엘을 낳았고 젖을 뗀 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 성막이 있는 실로 에 있게 하고 어머니 한나는 아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은 그 배후에서 어머니가 눈물어린 기도를 했었기 때문입니다. 어거 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는 너무 유명합니다. 그의 아들 어거스틴이 그처럼 방탕 생활 을 할 때 너무 마음이 아파서 아들의 영혼을 위하여 얼마나 눈물을 흘려 가면서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랬는데도 아들이 아무런 변화가 없자 하루는 존경하는 암부로시우스 감독을 찾 아가서 호소했더니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를 가진 자식은 망하는 법이 없다"고 격려해 주 었습니다. 그래서 힘을 다시 얻어 계속 기도하여 종래는 그가 세상을 얼마 전에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어머 니 모니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 어거스 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난다고 조금도 섭섭히 생각지 말라 나는 기도를 이루었으니 한이 없다. 내 시체를 어디에다 장사지낼까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네게 한가지 부 탁하는 것은 네가 제단에 나가서 기도할 때마다 나를 기억해 다오" 이 한마디를 남기고 세 상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어머니가 여러분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시는가를 기억하십니 까? 나 항상 거스려도 다 용서하시고 날 웃게 하시려고 어머니 우시네 집 떠나 나 먼 곳에서 나 방황하여도 어머니의 기도 음성 귓가에 들리네 어머니 크신 사랑 뉘 감히 알리오 안다고 하는 것이 모르는 것이요 갚는다고 장담해도 못 갚을 것이니 내 평생 기도 중에 어머니 부르리.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머니가 세 상을 떠나신 후에라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런 어머니의 기도를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 겠습니까?

⑶,부모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됨을 잊지맙시다. 종교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 본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명해도 잘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 즉 우리는 어머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 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어머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사랑 중에 어머니가 자식에 대하여 베푸는 사랑보다 더 큰사랑이 없습니다.

일본의 전설에 의하면 어느 홀 어머님을 모시고 있는 아들이 자라서 어떤 여자를 사귀게 되었고 결혼까지 약속한 단계에 이르렀는데 그 약혼녀에게 무서운 병이 걸려 죽게 되었습니 다. 더욱이 이병은 고치는 약이 매우 귀하기 때문에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사람 의 간을 먹여야 병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자기의 애인을 살리려는 욕심에서 그만 어머니를 살해하고 어머니의 간을 꺼내 가지고 자기의 애인이 있는 곳으로 빨리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너무 빨리 뛰어가고 있는 아들에게 어머니의 혼이 나타나서 "애야 너무 빨리 뛰어가다가 넘어질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답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고 전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 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자기를 팔 유다 까지도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할 베드로의 발도 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다고 하는데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자신에게 못을 박았던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해서 그러니 저희들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전 생활은 자여에게 산 모 범이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처럼 어머니께서는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본을, 교회에 나가는 본을, 봉사하는 본을, 헌금하는 본을,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본을 보여 주셨는데 이런 모습들은 자녀들에게 영원한 본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의 유명한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의 현재 생활 전부와 또한 내가 장차 바라는 장래 생활의 전부는 오직 천사와 같은 나의 어머니에게 빚진 자로다" 이처럼 믿음의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천사와 같은 인상을 심어 주게 됩니다. 디모데가 젊어서 하나 님의 귀한 일꾼이 된 것도 그 어머니 유니게의 사랑과 믿음에 있어서 본이 됨이었고 디모데 는 어머니의 본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순종이란 들을 준비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혹시 부모님의 말씀을 귓가로 듣지 않 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님의 말씀을 망령들어서 그런다고 생각하고 계십니 까?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물질 이전에 그 중심에서부터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 교는 구원의 종교이면서 도덕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된 것은 첫째 는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 부모님의 덕분입니다. 부모님이 안 계셨으면 우리가 여기에 있 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으신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부모 님에게 우리의 효성을 지극하게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보이는 부모를 섬기지 않으면서 보 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께 마음을 주십시오 / 어버이주일 낮예배
2001-12-06 16:41:50   read : 1075

잠언 23장 15-26절

저는 옛날에 명절 때마다 가장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부모님 살아 생전에 효도할 일은 다 제쳐놓고 있다가
돌아가신 다음에 제사 드리느라 야단을 하는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유교를 잘 믿어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20대 중반에 공자의 논어를 읽고
그러한 모습은 공자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논어 선진편 11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날 계로가 제사를 통해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나 공자가 말했습니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그러자 계로가 한번 더 질문을 했습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그 장면을 보면 공자는 살아 생전에 부모님을 잘 섬길 것을 얘기했지
죽은 다음에 제사를 통해 조상을 섬기는 것은 공자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에도 우리 나라 샤머니즘과 연합된 이상한 기독교가 있듯이
우리 나라 유교도 원래 유교와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특히 제사 문제는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세히 보면 아주 계산적입니다.
부모들이 돈이 있으면 자녀들 사이에 충성 경쟁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쯤이면 그 충성경쟁이 가열됩니다.
일전에 있었던 모 재벌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런데 반대로 부모들이 돈이 없으면 정말 찬밥 신세입니다.
게다가 생활력까지 떨어져 귀찮은 존재가 되면 구석방으로 내몹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부모가 죽으면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언제 구석방으로 내몰았느냐는 듯이
다시 죽은 부모에 대해서 열심히 제사를 드립니다.

어렸을 때 큰집에서 그런 모습을 보고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논어를 보고 그 이유를 대략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공자가 제사를 통해 귀신을 섬기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것은 유교의 전통이 아니라
무엇인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제사에는 조상의 덕을 기리는 순수한 마음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드릴 때 내면적인 다른 마음,
특별히 2가지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1) 하나는 죽어 귀신이 된 조상으로부터 은덕을 입고자 하는 마음과
2) 또 하나는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세상에서 부모님 말을 듣지 않고
구석방으로 내몬 것에 대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자세히 보면 조상 제사까지도
자기의 복을 위한 도구로 삼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어찌 귀신을 섬길 수가 있느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죽기 전에 구석방으로 몰아놓고
죽은 후에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제사상을 차려 놓은 다음에
제사상 앞의 귀신으로 화려하게 부활시키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자, 그런 모습과
순수하게 부모의 생전의 삶과 교훈을 기억하고 나누면서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추도예배와 어느 것이 좋다고 여기십니까?
우리 말고 돌아가신 부모님 입장에서도 추도예배를 원할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돌아가신 후에 제사를 잘 드리려고 하지 말고
살아생전에 사심 없이 부모님을 기쁘게 하려는 자세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효도를 하는 문제에서 다음 문제를 항상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 첫째는 누구를 위한 효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정말 부모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정직해야 합니다.
만약 그 효도의 목적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2) 둘째는 언제 효도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부모님 돌아가신 다음에 본격적으로 효자 노릇 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이 물려줄 것이 많을 때 효도 경쟁을 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없을 때 효도하는 것이 더욱 뜻깊은 효도가 될 것입니다.

3) 셋째는 어떻게 효도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어떻게 효도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우리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효도를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의 핵심 포인트는 25절 말씀입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효도의 기본은 부모님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부모님을 즐겁게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부모님을 즐겁게 하는 네 가지 권면을 합니다.

1. 지혜로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15절).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24절 말씀 후반부를 보십시오.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자식이 지혜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부모가 즐겁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마음이란 무슨 마음일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지혜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로 인도할지니라."
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의로운 마음이 바로 지혜로운 마음입니다.

24절 말씀도 그런 말씀입니다.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이 말씀도 의로움이 지혜임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모습을 보이면 부모들은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부모은 자식이 무엇이 많은 것보다 바른 길을 가는 것을 더 원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바른 길을 가는 것은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지혜에 관한 유명한 정의가 나와 있습니다.
시편 90편 12절인데, 그 구절에서 모세가 이런 기도를 합니다.(구약 869쪽)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이 구절에서는 날을 계수하는 것이 지혜라고 말합니다.
날을 계수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우리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바른 길을 땀흘려 가심으로 부모님을 즐겁게 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2. 정직한 입술을 가져야 합니다(16절).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부모님에게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말을 하지 말고
부모님에게는 오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어떤 불효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저를 낳아서 이렇게 고생시킵니까?"
"부모님이 저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것은 최대의 거짓말이고, 최대의 불효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것을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부모님이 우리를 키워준 것에 대한 최대한의 고마움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부모가 원망스러워도 그것을 잊으면 절대 되지 않습니다.

사실상 사람처럼 부모의 신세를 지는 존재가 있습니까?
동물들은 낳으면 거의 스스로 자라고 걷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30세까지는 키워야 사람 구실을 할까 말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원래 신세를 많이 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네 살 이전은 기억을 못합니다.
그런데 정말 고마운 일은 그때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머리가 조금 컸다고 그것을 잊으면 되겠습니까?
머리가 커서는 안되고 그 머리에 옳은 생각이 들어가야 합니다.

때로 부모의 사랑이 표현이나 방법으로 자녀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부모의 마음 중심은 언제나 선한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입술에서는 항상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뉘앙스, 고마움의 표현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처럼 감사가 넘치는 우리의 언어생활은 부모님을 즐겁게 만듭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17절).

17-18절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을 경외해야 장래가 있고 소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대로 부모님들은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고 살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사람이 잘되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을 아는 부모들은
자녀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볼 때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진실하게 믿는 부모들이 무엇을 가장 원합니까?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을 원합니다.
부모의 그러한 소원은 얼마나 훌륭한 소원이지 모르겠습니다.
자녀를 향한 우리의 소원은 바로 이런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이고,
하나님을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믿는 부모들이 자녀가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불 때
가장 기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4. 부모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26절).

부모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말입니까?
2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우리가 부모님께 마음을 드린다는 것은
부모님의 길을 즐거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모님의 길을 즐거워한다는 말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요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가 자녀 중심적 사상입니다.
부모의 말이 도대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21장 17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리고 신명기 21장 18-21절 말씀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으면 성읍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이라."
성경은 이처럼 효를 무섭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에 효가 없어서 안 믿는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훈보다 무서운 효에 대한 교훈이 있겠습니까?
골로새서 3장 20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순종을 하는데 모든 일에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순종에도 차원이 있습니다.

1) 첫째 차원의 순종은 노예적 순종습니다. 1차원적 순종입니다.
상대가 무서워서 억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할 수밖에 없어서 순종하는 것이 바로 노예적 순종입니다.

2) 둘째 차원의 순종은 계산적 순종입니다.
순종하면 내게 돌아오는 이득이 있다는 것 때문에 순종합니다.
사회학자들은 우리 나라의 효 사상에 이것이 많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효 자체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군왕에게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 효도를 가르쳤다는 말도 있습니다.
다른 계산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저의가 있다는 말입니다.
별로 바람직하지 않는 순종의 모습입니다.

3) 셋째, 절대적 순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 절대적 순종입니다.
절대적으로 순종하라는 말은 좋은 일에만 순종하지 말고,
어처구니없는 일에도 순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서 제일 효도한 사람은 이삭입니다.
모리아 산상에서 120세가 넘은 부모 아브라함이
20세가 넘은 아들을 죽이려고 했을 때 그는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없이 죽음의 제단 위에 눕습니다. 이것이 절대적 순종입니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절대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8절 말씀에 주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1절에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주는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죽음의 잔 앞에서 주님은 순종합니다. 이것이 절대적 순종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순종은 이런 순종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내리기 전에
여러 가지를 보시지만 부모에게 순종하는가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보십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큰 축복을 얻습니다.
축복은 어디에서 옵니까?
대개 인내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인내와 가장 밀접한 것이 바로 부모님께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을 자세히 보십시오.
인내와 순종을 배웠기 때문에 어느 공동체에 가서도 잘 붙어있습니다.
그리고 순종하고 헌신하니까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공동체에서 가장 축복 받는 사람이 됩니다.

에베소서 6장 2-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성경은 복의 원리에 대해서 분명히 말합니다.
보약을 먹어야 잘되고 장수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효자가 되어야 잘되고 건강하고, 장수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효도해야 일이 잘되고 장수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불효하는 가정에는 절대로 참된 의미의 복이 없습니다.
불효하는 사람은 본인도 복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효하면서 만사가 복되기를 바라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복 받기를 원한다면 부모님께 효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축복이 목적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에서
부모님께 마음을 드리고 부모님을 즐겁게 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큰 일은 못해도 불효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효자가 되는 것은 최대의 성공일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성공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힘/고전13:1-13
2001-12-08 23:47:45   read : 112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모든 만물이 살아 움직이고 새 생명 이 힘있게 살아나는 생명의 계절입 니다. 모든 꽃들이 피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날씨나 하나 하나의 일 들이 문화 행사를 하기에 너무 좋고 또 우리의 삶을 가슴을 펴게 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자연 을 마음껏 사랑하며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계절입니다. 5월은 계 절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우리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축복의 계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 버이 주일이 있고, 어린이 주일이 있고, 어린이날이 있고 우리를 가르 쳐 주는 스승의 날도 5월에 있습니 다. 여러분, 가정이 얼마나 귀합니 까? 우리는 모두 좋은 가정을 원하 고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가정의 귀 중함은 아무리 말해도 부족할 정도 로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만드시고 새 둥지처럼 가정 을 에덴동산에 만들어 주시고 행복 하게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 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에 주시는 모든 보화를 가정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가정을 위함 이고 사업하는 것도 가정을 위함이 고 정치도 국가도 가정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전 나라가 다 빌딩이라도 가정이 무너지면 집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공해도 가정을 잃어버리면 그는 실패자인 것입니다. 가정은 참으로 가장 소중 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선물이 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가정을 바로 잡아야 되고, 바로 일으켜야 되고 우리의 모든 가정이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할 줄로 믿 습니다. 가정에서 귀한 것은 사랑입 니다. 사랑의 울타리, 사랑의 집을 짓고, 사랑의 음식을 먹고, 사랑하는 자와 만나서 사랑의 품안에서 자녀 들이 자라나고, 부모님을 섬기고, 부 부간에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이 가정입니다. 사랑은 가정의 전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 면 숨을 쉬어도 죽은 것이고, 제아 무리 아름답게 꾸며도 사랑이 없으 면 그것은 그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성경은 두 가지 로 크게 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또 하나는 인간에 의 해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랑이 있 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로부 터 내리는 거룩하고 영원한 사랑이 고 인간에 의한 사랑은 인간 사이에 만들어지는 세상의 사랑, 육적인 사 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의 사랑이라 말하고 이 세상 의 사랑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대표적으로 에로스적인 사랑이 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정을 어떻 게, 무엇으로 꾸며야 합니까? 하나 님의 사랑으로 꾸미고 하나님의 사 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에로스적인 사랑 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 무 의미가 없고 웃기는 이야기로 들 릴지 몰라도 그렇지 않습니다. 가정 이 귀하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 랑이 있어야 귀하게 되고, 가정을 영원히 무너지지 아니하는 아름다운 가정으로 꾸미기를 원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꾸며야 그 가정은 아름다 운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고통 을 당하는 이유는 가정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정이 이렇게 무 너지고, 가정이 형편없이 흔들리고 파도가 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을 외면한 데에 있는 것입니다.
폴란드의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 니다. '최대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 이고 그 다음은 개의 사랑이고 그 다음은 연인의 사랑이다' 이렇게 말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사랑 은 이 땅에서 최고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날이 있었는데 하도 아버지가 불쌍해서 지금은 어버이 주일로 만들었지요. 아버지 어머니 를 같이 했지만 그래도 사랑! 하면 다 모두 마음에 느끼는 것은 어머니 의 사랑을 우리가 경험하고 또 그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참 사랑을 알아서 내가 또 그 참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 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땅에 있는 사랑 으로는 최대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높은 지위에 있는 것입니 다. 대통령이라도 어머니 앞에 무릎 을 꿇고 절을 하는 것은 어머니의 힘이 아니예요. 사랑의 힘이예요. 어 머니의 지성이 아니예요. 어머니의 사랑이에요.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 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 더 높은 것 같아♪ 푸른 하늘 그 보다 더 높 은 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에 어머니의 사랑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 다. 있어도 많이 변했다고 생각합니 다. 우리가 경험했던 어머니의 사랑 은 이미 서서히 자리를 옮겨가고 찾 기가 어렵습니다. 1월부터 3월까지 IMF로 인하여 버려진 아이만 3089 명이에요. 아이를 버립니다. 휴지통 에서, 쓰레기통에서 수많은 아이를 찾아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버려 도 어머니는 안 버리는데 어머니들 의 생각이 바뀌어졌습니다. 어머니 의 가슴이 변했습니다. 이혼해도 아 이들을 안 기르겠다는 거예요. 아무 리 애들이 어머니를 붙잡고 이혼하 지 말라고 해도 지금 그런 말을 듣 는 분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 머니의 사랑이 과거와 다릅니다. 최 고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이지만 우리는 지금 최고의 사랑을 찾지 못 해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개의 사랑이에요. 사 람 사랑하는 것보다 개사랑하는 것 을 더 좋아하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 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 사랑하다가 개만 못한 것을 경험하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개 기르는 시대가 옵니다. 개하고 살아 갑니다. 개가 열 배나 낫다는 거예 요. 개는 먹이를 주는 주인은 물지 도 않고 또 은혜를 배반하지도 않아 요. 개는 항상 주인을 위해 충성하 고 그 자리에서 지켜주고 주인의 말 을 잘 따릅니다. 사람이 그렇게 지 금 해주고 있습니까? 그렇게 못한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많은 사람들은 개를 사랑하는 시대가 옵 니다. 개와 함께 자고, 개와 함께 먹 고, 개와 함께 여행하고, 그래서 여 행할 때도 비행기에 개를 가득 싣고 주인과 함께 떠납니다. 개와 함께 목욕도 합니다. 개 메뉴에 관심을 가지고 개의 식탁을 준비하느라고 슈퍼를 드나들고, 유명한 미용사를 찾아서 가장 잘하는 곳으로 개를 데 리고갑니다. 개를 아름답게 꾸미는 데 모든 시간, 모든 관심, 모든 돈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겪어보니 까 개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전에 는 우리가 욕을 할 때
"저 '개' 뭐"
하고 아주 개자만 붙이면 나쁜 욕 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만 못 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어 떤 목사님 네 분이 보신탕 집에 갔 어요. 미국 가서도 한국 사람은 보 신탕을 버리지를 못해요. 여름에 땀 날 때 보신탕 드시러 갔어요. 종업 원이 와서 주문을 합니다.
"선생님 무엇을 잡수시겠어요?"
하니까
"보 신탕 집에 왔는데 개 말고 뭐 있 나?"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를 알고 그 다음에는 다른 분을 향해서
"선 생님도 개예요?"

"선생님도 개예 요?"
"선생님도 개예요?"
그러니까 세 분 목사님이 다 개가 된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개들은 천 년 만년 전의 개들처럼 변치 않습니 다.
오늘 우리의 가정이 위기를 만나 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 입니까? 중요한 것은 사랑 때문이라 는 것입니다. 무슨 사랑이냐? 아가 페의 사랑이 아닌 연인의 사랑, 에 로스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그전에 는 가정에서 어떤 사랑을 우선하는 것보다 책임을 우선하였습니다. 우 리 부모들은 지금보다 사랑을 안해 도 끝까지 잘 살았던 것은 부모로서 의 책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정 에서의 부모의 책임, 자식으로서의 책임을 더 귀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은 우리의 가정들이 무너져가고 있 습니다. 그것이 바로 잘못된 사랑 때문입니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동 물적인 사랑입니다. 육적인 사랑입 니다. 보이는 사랑입니다. 보이지만 않으면 변하는 거예요. 흔들리는 것 입니다. 성적인 사랑입니다. 쾌락적 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 바로 이것 이 에로스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 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눈물만 나는 거예요. 사랑의 열매, 사랑의 종착역은 눈물이라는 거예 요. 그러나 사랑이 그렇습니까? 하 나님의 사랑,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 은 오히려 구원의 씨앗이요. 행복의 씨앗이요. 기쁨의 씨앗이요. 우리 가 정을 축복하는 축복의 씨앗이 됩니 다. 아가페의 사랑은 절대로 상처와 아픔과 눈물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가페의 사 랑으로 우리 가정을 다시 찾아야 되 고 든든하게 일으켜 세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찬사를 받으면 서 결혼한 사람이 찰스 왕자입니다. 다이애나와 함께 결혼한 그 결혼식 은 온 세계에 공개가 되었습니다. 직접 생중계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우리 나라를 다녀가신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녀가 4남매입니다. 그러나 찰스 왕자를 비롯해서 지금 세 명이 이혼을 했고 마지막 에드워드만 남 아 있습니다. 제일 화려한 결혼식, 제일 돈 많은 결혼식, 제일 선물이 많은 결혼식, 전 세계의 대통령과 지도자들이 와서 축하 해준 결혼식, 전부 집을 다이아몬드로 꾸밀 정도 로 온갖 좋은 것들로 다 꾸몄지만 이 가정은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졌 습니다. 무너질 뿐만 아니라 만신창 이가 되었고 헤어져서도 전 세계에 어마어마한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유리알처럼 다 깨어져 버린 이 가정이 무엇 때문입니까? 돈이 없습니까 권력이 없습니까? 여 러분의 집을 아무리 잘 꾸며도 지금 이 찰스 왕자와 같이 꾸밀 수가 없 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지 만 가정을 잃어버린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에로스적인 사랑입니다. 동물적인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민족과 우리의 가는 앞날에, 위 기를 만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의 가정을 어떠한 사랑 으로 집을 짓고 어떠한 사랑의 이불 속에서 잠을 자야 하겠습니까? 어떤 사랑으로 음식을 먹으면서 어떻게 우리 가정을 지켜야 할 것입니까? 그 왕자의 가정이 무너졌다면 우리 의 집들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아가페 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 만 영원하고, 이 사랑만 참되고, 이 사랑만 힘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냅니다. 사랑의 힘보 다 더 큰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에 로스적인 사랑은 하루를 넘기기도 어렵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원 래는 성을 전혀 모르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언제부터 알게 되느냐? 결혼 이 가까워지면서 알게 됩니다. 하나 님께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해서 신비 한 만남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보전하고 또 우리에게 가정을 이룩 하기 위해서 성의 눈을 서서히 뜨게 해 줍니다.결혼이 가까와져 눈을 뜨 면서 몸과 마음이 절정에 이르게 됩 니다. 그래서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서서히 성은 멀어지게 되어 있고 약 하게 되어 있고 연세가 많아지면 그 쪽 면으로는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 가서 제일 어렸을 때처럼 모르게 되 어 있습니다. 멀리 떠나게 되어 있 습니다. 가정에 대한 고마움과 그 자녀들이 잘 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만족을 더 큰 만족으로 여기 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현대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에 로스적인 사랑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래서 지금은 60이 넘어서 이혼하 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부인을 볼 때 성적으로 보는 거예 요. 그 때는 그렇게 보면 안되는 나 이인 데 50대 60대가 되어도 이혼을 많이 하는 것은 아내를 성적으로 보 고 남편을 성적으로 보는 거예요. 아내가 남편을 보니 별 볼일 없다라 는 거예요. 그래서 엉뚱한 짓들을 하는 거예요. 남자들도 마찬가지입 니다. 60, 70이 되었으면 이제는 손 자, 손녀들을 봐 주면서 만족하며 살아야 하는 데...... 인생의 마지막 그 열매를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함 으로 살아야 하는데 항상 결혼할 때 와 같이 펄펄 뛰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찾아낸 것이 비아그라예요. 여러분, 약해져야 될 때 그걸 먹으 니까 그만 나자빠져서 죽는 거예요. 연세 많아 가지고 그래 죽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린아이 에게 그렇게 해보세요 어린아이가 견디지를 못합니다. 사람은 순진할 때는 순진하게 만들어 가야 하는데 이것을 끝까지 에로스적으로 가려고 하는데 가정의 위기가 있고 인격이 파괴되고 사회가 온통 혼란해지고 가정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서 생기는 이 분진이 온 사 회를 앞을 못보게 흩뜨려 놓는 거예 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하 나님의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 나님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은 사 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을 모르 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 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 이미지는 하 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오직 하나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왜 힘이 있습니 까?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 라가 온 세계를 통치하고 우리가 하 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 도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 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 가에 못 박혀 죽이기까지 우리를 구 원하려고 그 아들을 보내어 주셨습 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큰 거예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 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 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 신 사랑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 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오늘 우리의 가정에 에로스적인 사랑만 있다면 그 가정은 불안한 가 정입니다.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살 아간다면 그 가정은 믿을 수 없는 가정입니다. 가정을 넘어뜨리는 그 많고 많은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온 세계의 인류와 이 모든 만물을 사랑으로 통 치하시는데 여러분 무슨 힘으로 이 세상을 승리하고 여러분의 가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 님 아버지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 다. 육적인 관계에서도 자식이 부모 를 닮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 의 사랑이 우리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 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 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전 달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이어받 는 것입니다. 육의 혈통을 이어 받 듯이, 성품을 이어받고 얼굴 외모를 이어받듯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도 하나님을 믿고 그 아들 예수 그 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오게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결심이 아닙 니다. 노력해서 사랑하는 게 아닙니 다.
"여보 우리가 서로 변치 말고 사랑합시다"
아무리 가도 역시 그 사랑은 필레오의 사랑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위로부터 우리에게 주시 는 사랑은 성령으로 주어지는 것입 니다. 기도해야 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오는 성령의 은사요 열매 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에 게 주시는 하나님의 최대의 선물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힘이 있습니다. 신명기 5:10에 보면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
고 하셨고, 사사기 5 : 31에는
"주를 사 랑하는 자는 해가 힘있게 솟음 같 다"
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도 에로 스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기분 좋으 면 '아멘' 하고, 조금 괴로우면 '싫 어'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참 사 랑, 영원한 사랑, 거룩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으 로 사랑해야 참되고 영원하고 아름 다운 열매를 맺고 부부간에도 좋은 관계가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 까? 오늘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말씀을 통하여 사랑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처음에는 사랑의 가 치가 나옵니다. 사랑이 얼마나 가치 가 있느냐?
첫째, 1절에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 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했습니다. 땅에 있는 말, 하늘에 있는 말을 다해도 사랑 이 없으면 시끄럽게 울리는 꽹과리 가 되고 그런 말은 피곤할 뿐이에 요.
둘째,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을 알고 모든 지식이 있어도 사 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예 언이 있어서 국가의 흥망성쇠를 알 고 개인의 미래, 장래를 다 알고 온 갖 비밀을 다 알고 많은 지식이 있 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 라는 것입니다.
셋째,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 니요"
믿음이 얼마나 있는지 산을 옮길 수 있어요. 그래도 사랑이 없 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넷째,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 으로 구제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도망 다니는 신 창원도 구제를 하고 깡패들도 구제 를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이 사랑입니까? 여러분, 남을 도 와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 까? 그게 다 필레오의 사랑, 즉 땅 에 있는 원시인들부터 하던 일이에 요. 그건 인간의 정에서 나오는 거 예요. 내가 나를 위해서, 기분 좋아 서 그를 도와주고, 내 만족하려고, 내 이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므로 참 사랑이 아닙니다. 아가페의 사랑 이 아니예요. 참 사랑은 그렇지 않 습니다.
다섯째,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회 참여를 부르짖고 정 의를 부르짖고 뭔가 내 몸을 분신한 다 하고 감옥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그건 다 알고 보면 흑막이 있는 거 예요. 자기가 뭔가를 이용해서 감투 를 쓰려는 것이고 자기를 위한 일인 거예요. 이런 사랑은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떤 집단이나 단체, 또는 어느 기 구든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은 다 어 떤 이기적인 목적으로 만나기 때문 이예요. 안 맞으면 배반을 하지요. 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 사 랑이 없었을 때에는 잘 살았는데 오 늘 이 잘못된 사랑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이렇게 무너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어 야 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이어야 합 니다. 그 사랑만 영원한 것입니다. 그 사랑만 참된 것입니다. 그 사랑 만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가페의 사랑은 어떤 사 랑입니까? 오늘 본문에 열 다섯 가 지가 나옵니다.
1)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예수님 이 참듯이, 욥이 참듯이, 아브라함이 참듯이 아가페의 사랑은 오래 참습 니다. 2) 온유합니다. 부드럽습니다. 친절합니다. 인자하다는 말입니다. 3) 투기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자 기 잘난 것을 과시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자기가 잘났다는 거예요. 내 가 최고라는 거예요. 이것은 동물적 인 사랑입니다. 오늘 가정에서도 여 러분이 행복하시려면 내가 남편보다 잘 났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떨쳐버 려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들면 이 미 병든 것입니다. 남편의 훌륭한 것만 눈에 보이고 나는 오히려 너무 부족한 것만 느껴지는 가정이라면 그것이 아가페의 사랑인 줄로 믿습 니다. 내 잘난 것 있으면 남편의 그 늘에 숨겨버리고, 전혀 보이지 아니 할 때에 그 가정은 아가페의 사랑으 로 행복하게 됩니다. 오늘 왜 많은 사람들이 '나는 잘났는데 왜 저 사 람은 못났느냐, 나는 이렇게 잘하는 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못하느냐, 나는 이렇게 예쁜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못났느냐, 나는 이렇게 많이 배웠는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못 배웠느냐' 전부 자기 잘난 거예요. 자기는 올라가는데 다른 사람은 다 아래에 있는 거예요. 그것은 아가페 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는 파괴적이 고 일시적이고 에로스적인 사랑입니 다. 모두 그 사랑이 좋아서 밤낮으 로 찾아다니고 그 사랑을 얻으려고 생명 걸고 달려드는 것이 안목의 정 욕과 육신의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 에로스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4)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고 했 습니다. 자랑이라는 말은 장담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큰 소리 치지 않는다 말예요. 5) 교만치 아니하며 6)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무례라는 말을 헬라 원어에 보면 맵씨가 없다 는 말입니다. 사랑은 참 맵씨가 있 습니다. 사랑은 아주 아름답게 꾸며 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 게 거칠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자들 에게도 그런 말이 있잖아요. 마음씨, 솜씨, 맵씨, 얼굴 씨는 없습니다. 그 런데 현대인들은 아무것도 할 줄 몰 라요. 솜씨가 없고 마음씨도 맵씨도 없어요. 얼굴씨 하나만 가지고 얼굴 만 꾸미려고 해요. 그건 안되는 거 예요. 우리가 어렸을 때는 가정 주 부, 다시 말해 건강하게 가정을 지 키는 어머니들하고 기생들은 전혀 달랐어요. 딱 보면 금방 드러났어요. '아, 술집 아줌마구나' '기생이구나' 겉모습이 금방 드러났어요. 보면 알 아요.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전부 여기에 매어 달리는 거예요. 왜 이렇게 되었어요? 전부 다 동물 적인,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만족하 려고 보이는 것만 좇아가고 다른 것 은 다 버렸어요. 그래서 요사이는 남편이 부인에게 맞아서 병원에 입 원하고 매일 두들겨 맞는 남편이 그 렇게 많다는 이야기가 통계에 나왔 습니다. 나는 그걸 어떻게 때리는가 생각을 해봤어요. 꿇어 앉혀 놓고 때리나, 세워 놓고 주먹으로 때릴까, 태권도를 하는지 어떤 방법으로 때 려서 남편이 맞을까 하고 생각해 봤 어요. 어떻게 하는 건지 그것이 이 해가 안가요. 여러분, 무례히 행하 는 거예요. 이것이 사랑이 아니예요. 남자도 무례하고, 여자도 무례하고 그러면서 행복을 바라는 거예요. 사 랑은 정말 얼마나 조용하고 아름다 운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힘있 는 것이 사랑인지 모릅니다.
7)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이기적인 사랑은 참사랑이 아닙니 다. 8) 성내지 아니하며, 해를 받을 때 성질이 팍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 다. 조금만 어려우면 금방 얼굴에 드러나는 것, 사랑이 아니예요. 어머 니는 안 그렇잖아요? 9)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10) 불의를 기뻐하 지 아니합니다. 11) 진리를 기뻐합 니다. 12) 모든 것을 참습니다. 13) 모든 것을 믿어요. 아멘, 아멘 믿어 져요. 교회에 나와도, 기도해도 에로 스의 사랑으로 교회 다니는 분이 많 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있으면 믿 어집니다. 14) 모든 것을 바래요. 미 래를 바라보면 소망이 넘쳐요. 그러 나 에로스적인 사랑은 불안해요. 자 꾸 보험 들고 자기 개인을 향해서 뭔가 불안해요. 확실하지 않아요. 내 일이 어떻게 될지 항상 긴장하고 불 안해요. 여러분, 어머니의 사랑을 받 으면서 불안한 일이 있습니까? 사랑 은 불안한 법이 없어요. 이것이 인 간적인, 동물적인, 일시적인, 순간적 인, 쾌락적인, 육적인, 성적인 사랑 이기 때문에 불안한 거예요. 참사랑 은 항상 소망이 넘치는 거예요. 15)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 그랬어요. 이것은 적극적인 인내라고 말합니 다.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이것 이 사랑의 힘인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사 랑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 문에 가정을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 가정을 향하 여 수많은 환난, 시험이 닥쳐도 가 정을 넘어뜨릴 수 없는 것은 아가페 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이렇게 잘살고 풍부한데 도 가정이 고무풍선처럼 펑펑 터지 는 것은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기 때 문입니다.
마지막입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첫째, 8절을 보면
"사랑은 언제까지 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며 예언도 폐 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나"
예, 다 폐하지요. 방언을 언제까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까지 우리 가 지식을 가질 거예요? 다 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잠간일지라도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천국에 가서도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랑하는 이 사랑으로 하늘 나라의 삶을 살아가 는 것입니다. 둘째, 9절과 10에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 로 예언하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사 랑은 온전합니다. 다른 것은 다 부 분적입니다. 알아도 부분적으로 알 고 가져도 부분적으로 갖는 것입니 다. 사랑은 다 가진 것입니다. 사랑 은 다 아는 것입니다. 셋째, 11절을 보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 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 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지금 사랑의 가치를 말하고 있습니 다. 얼마나 사랑이 중요한가를 말하 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의 뜻은 인간적인 에로스의 사랑과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비교하면 애와 어 른과 같다는 거예요. 애들도 사랑하 지요. 소꿉장난하고 사랑하지만 일 순간 울고 버리는 거예요. 일순간 잊어버리는 것이 이 어린아이의 사 랑이에요. 장성한 사랑, 건강한 사 랑, 힘있는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 에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사랑의 풍년이 들고 사랑밖에 없는 것 같지 만 다 모든 만남이 어린아이의 만남 이에요. 그런 사랑 때문에 모두 어 제의 사랑이 다르고 오늘의 사랑이 다른 거예요.
넷째, 12절에
"우리가 이제는 거 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 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 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신앙생활도 사 랑이 없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20 년 교회를 나와도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해요. 옛날 그 구리 거울 처럼 말이죠. 하나님이 계신 것이 희미해요. 하나님께서 나를 택한 것 이 희미해요. 설교를 들어도 구원받 은 것이 희미해요. 왜? 사랑이 없기 때문이에요. 사랑이 내 안에 거할 때 확실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희미한 것이 다 떠나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1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 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 일은 사랑이라"
마지막 다섯 번째는 사랑은 제일이라는 거예요. 믿음도 물론 귀하고 소망도 귀하지만 사랑 은 최고라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사랑은 제일입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온전합 니다. 사랑은 장성합니다. 사랑은 확 실합니다. 사랑은 최고입니다. 사랑 은 첫째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이 내 안에 거하고 여러분 가정에도 그 사랑의 집을 지어서 영원히 주와 함께 복되 시기를 바랍니다.



어버이의 즐거움/잠23:19-25
2001-12-08 23:48:44   read : 406

몇 해 전에 신문에 기고되었던 내 용입니다. 한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스물아홉살에 그는 열네시간을 기 다려서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라고 말합니다. 그 부인이 산실에 들어가서 산고를 치르고 있을 때, 그는 문 밖에서 무려 열네시간을 기 다렸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려서 아 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리고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다 하 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른일곱살에 그 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들어가서 우등상장을 타왔을 때 그 걸 액자를 만들어서 방에 걸어놓고 쳐다 볼 때마다 그렇게 행복해했다, 누렇게 바래질 때까지. 마흔 여덟 살에 자식이 대학을 입학한다고 입 학시험을 치르게 될 때, 이 아버지 는 직장에 나가기는 했지만은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이렇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초조할 수가 없 었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초조한 시간으로 기억된다하는 얘기입니다. 쉰세살에 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아 버지 내의를 하나 사왔을 때, 쓸데 없는데 돈을 썼다고 일단 나무랐지 만은 밤이 늦도록 내의를 입어보고 또 입어보고 만져보면서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예순한살에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놈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웃 음을 짓고있는데, 나는 멀찍이 서서 나이 들었지만은 처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마음입니다. 그저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 있 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귀한 것 입니다.
유명한 기독교인인 맥아더 장군, 그의 '아들을 위한 기도'라고 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제가 이 시간 에 다 소개하지는 않습니다만은
"A Father's Prayer"
by MacArthur 라 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 첫마디가
"Build me a son"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내게 이런 아들을 주십시 오."라고 말이 시작되고 긴 기도문 이 있고 맨 마지막 말이 인상적입니 다.
"그리하여 나, 그의 아버지는, '내가 세상을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 다' 라고 속삭이게 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Then I, his father, will dare to whisper, 'I have not lived in vain"
아주 유 명한 이야기입니다. 난 늘 이게 기억 이 됩니다.
"그리하여 나로 '한 생 을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다' 라고 하게 해 주십시오."
보람과 의미가 바로 그 자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것만이 어쩌면 남는 일이기 때문 에, 그가 세계를 위하여 위대한 일 을 많이 했지만은 그건 그렇고 내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보 고 나는 세상을 헛되이 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 니다. 그것이 바로 어버이의 마음 입니다.
한국사람은 역시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적 효의 개념이 있습니다. 이 것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다분히 유교적 사상을 배경으로 해서 우리 가 젖었으니깐 그 속에서 가지는 생 각입니다만은 소위 한국적 효가 무 엇인가 한번 정리해 보십시다. 한 국사람으로서 우리 문화 속에서 생 각하는 효도, 첫째가 부모님을 장수 하도록 모시는 겁니다. 이유야 어 쨌든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자식에 게 있겠습니까만은 부모가 일찍 세 상을 떠나게 되면 그건 자식 탓이 요, 그래서 자식은 죄인이 됩니다. 내가 잘못 모셨고, 내가 속을 썩여 드렸고 내가 어쨌고…… 그래서 장 례식에 가 보면 제일 많이 우는 자 식이 불효자예요. 나 때문에 돌아 가셨다고 가슴을 치는 거예요. 그 래서 그 상복이라고 하는 것은 죄인 의 옷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님을 오래 살도록 모셔야 효자지 어쨌든 일찍 돌아가셨다면은 자녀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 됩니다. 그것이 바 로 한국사람의 효의 기본개념입니 다.
두번째는 편안하게 모시는 겁니 다. 그저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또 거처하는 곳, 평안하게 특별 히 마음을, 마음을 평안하게 모셔야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모 들이 이제 자식의 눈치를 봅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어른들이 자식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하 고 싶지 않은 게 있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말 세 마디가 있는데, 첫 째가 뭐냐 하면은 어떤 일이든지 아 프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발 안 아팠으면 좋겠는데 자꾸 아프 거든요. 아프다고 하면 자녀들이 귀찮을 까봐, 자녀들이 걱정할 까봐 아프다는 말하는 거 그렇게 싫다는 거예요. 어떻게든지 안 하고 싶은 데 그러세요. 이것이 부모님의 마 음이에요. 자식을 괴롭힐까봐……. 두 번째는 외롭다는 말을 하고싶지 않아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 해요. 그러나 사실은 외로워요. 자 식이 아무리 많아도 외로운 건 외로 운 거죠. 그러나 내가 외롭다고 하 면 저들이 뭔가 어머니를 잘못 모셔 서 외롭다고 하지나 않나, 할까봐 그 말을 하고싶지 않은 거예요. 외 롭지만은 외롭다고 못 하는 게 부모 의 마음이에요. 세 번째는 배고프 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또 어 느 때 좀 궁진해서 뭘 잡숫고 싶어 도 혹시라도 귀찮게 여기지나 않을 까 해서 배고프다는 말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세 가지가 하고싶지 않은 말이요 조심스러운 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부모님입 니다. 이제 이 분의 마음속에 슬픔 을 드리고, 고통을 드리는 것은 불 효입니다.
또 한국적 효도의 세 번째 개념은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겁니다. 그 래서 대를 이어가는 것이에요. 요 새 세계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비혼 이요, 둘째가 불임입니다. 바로 며 칠 전에는 로마 카톨릭 교황까지도 나서서 제발 자식들 낳으라고 아주 사정을 하드만요. 자꾸 인구가 주 니까요. 바로 이것이 망조입니다. 효도요? 누구든 좌우간 시집, 장가 안 갔으면 불효요. 부모님의 마음 을 아프게 했으니까. 또 갔으면 또 이제 뭐 어찌 못 낳는 거는 할 수가 없을지 몰라도 자식을 안 낳는 거 그거 불효입니다. 그런 줄이나 알 고 사세요. 그런데 이게 문제라고 요. 부모님의 마음은 그저 이유 불 문이야. 자기가 한평생 고생했어도 그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서 아들, 딸 낳고서 그 손자, 손녀를 품에 안 겨드리는 거 이보다 더 큰 효도는 없어요. 그리고 무슨 공부 많이 해 가지고 큰 일하겠다고 밖으로 나도 는 거 부모님의 마음 반갑지 않아 요. 효도는 시집가야되요. 그리고 가서 자식을 낳아 이게 효도라는 거, 이게 한국적 효입니다. 또 하나 는 가문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거 지요. 그래 옛날에는 과거를 보는 일이 있었지요. 가서 과거에 급제 하면 효자요, 허구헌 날 낙방하면 불효자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 도 안 돼. 가문의 명예를 높여야지 요. 그래서 오늘도 자식들이 공부 를 잘하고 하면은 그 아버지 어머니 는 그거 자랑하고 싶어서 그저 실례 가 안 될 정도로 돌아다니면서
"우 리 아들이 공부……. 어디 가서 뭘……", 그러지 않습니까? 이게 효도라는 거예요. 그런데
"제 아들 이요 삼수했는데 두고 봐야 알겠어 요."
이거는 불효라고요 이렇게 되 면은 그러니까 가문은 명예는 높여 드리는 것이 그것이 바로 효도입니 다. 이렇게 네 가지 개념으로 집약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은 부모님 을 즐겁게 하라. 즐겁게 해 드려라. 그리고 내 자신이 부모님의 길을 즐 거워하라. 기쁘게 해 드리라고 말 합니다. 역시 기쁘게 해 드리는 것 이 효도일 것입니다. 이런 웃지 못 할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옛 날 이조 시대에 어느 임금님이 서울 을 떠나서 개성을 좀 방문하게 됐습 니다. 개성에 거우동을 하게 됐는 데 온 방에 방을 부치고 소문이 나 니깐 어느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 는 나이 많은 어머니가 그 아들에게 요청을 하는 겁니다.
"내가 나라 임금의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한 번 도 임금님의 얼굴을, 용안을 뵙지를 못 했는데 죽기 전에 임금님의 용안 을 멀리서라도 좀 뵙고 그리고 죽었 으면 좋겠다. 그게 내 마지막 소원 이다."
그랬어요. 그래서 이 아들은 왕이 오시는 그 날을 기다렸다가 오 십리길을 어머니를 업고 거기 길가 에 나가 섰습니다. 그래서 임금님 이 지나갈 때에 잘 보이도록 이렇게 해 드렸어요. 임금님은 멀리서 이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돌아온 다음에
"그 때에 그 어 머니를 업고있던 그 사람 좀 불러들 여라."
그리고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나서
"너는 효자다."
그래서 금 백냥과, 쌀 한 섬을 상으로 주었답 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불효자 한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서 어머니가 원치도 않는다는 걸 억지로, 강제로 업고 나가서 또 그 길가에 나가서 왕을 뵈었다는 겁니다. 왕은 역시 또 불러서 상을
"금 백냥을 주라"
그랬는데 신하들이 말하기를
"임금 님이여, 그놈을 불효자랍니다. 효도 가 아니고 남이 그렇게 해서 돈 받 았다는 말을 듣고 이거 상 받으려고 어머니를 억지로 업고 나가서 그렇 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고로 상을 줄 것이 아니라 벌을 줘야 될 것 같 습니다."
임금님 하시는 말씀이
"효도는 흉내만 내도 좋은 거야. 그런고로 상주라."
그랬어요.
"흉내 내었더라도 좋은 거니 줘라"
결국 은 이 사람이 그 뒤에 뉘우치고 진 짜 효자가 되었답니다. 괜찮은 이 야기이지요. 여러분 효도는 흉내만 내도 괜찮은 거예요.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 다.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라고요. 존재의 가치를. 그의 지혜, 그의 경 험, 그의 사랑 그리고 그 깊은 잔소 리 속에 그 많은 잔소리 속에 중요 한 교훈이 있음을 인정하라는 겁니 다. 부모는 구제의 대상이 아닙니 다. 측은히 여기던가 불쌍히 여기 는 마음은 효가 아닙니다. 부모는 공경하는 겁니다. 존경이 없는 사 랑은 결코 효도일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귀찮게 여겨도 안됩니다. 일 본 동경에서 모였던 국제 심포지움 에서 이런 통계가 나왔습니다. 거 동이 어렵게 된 부모를 어떻게 하면 좋으냐?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학 생들을 상대로 조사를 해 보았는데 결과가 이렇게 나옵니다.
"양로원 에 보내야 됩니다."
그게 일본이 24%, 영국이 25%, 미국이 19%, 중 국이 9%, 한국은 0.4%. 한국, 소망 이 있습니다. 거동하기 어려운 부 모는 양로원으로 보내라. 이게 일반 적으로 25%입니다만은 한국만은 아 직도 0.4%. 그래도 한국은 아직도 효에 관한 한 모범 국가입니다. 그 래서는 않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 는 오래 살겠다고 보약을 먹고 운동 을 하고 발광을 합니다만은 그러나 여러분 잊지마세요. 성경은 오래 사는 비결 오직 딱 하나 가르쳐 줬 어요. 그것은 효도하라 그랬어요. 부모 박대하면서 오래 살길 바라지 마세요. 그건 비성서적이요. 사업 에 성공하겠다고 몸부림을 치나? 부모님 마음 슬프게 하면서 사업 잘 되리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저는 40년 목회 하면서 수없이 보아왔습 니다. 오래 사는 집, 거기에는 나이 많은 어머니가 계세요. 아주 성공 한 사람은 비록 잘못도 많지만은 그 분은 효자예요. 이건 확실합니다. 여러분 불효하면서 잘 되고, 불효하 면서 건강하고, 불효하면서 오래 살 고…… 기대하지 마세요. 효가 장 수와 형통에 철저한 비결이에요. 약속 있는 계명입니다. 제가 뉴욕 에 갔을 때에 제가 잘 아는 친구 분 이 계세요. 거기에 한번 오랜만에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나이 많은 어머니가 계세요. 제가 이 서 울에 있을 때에 그 분, 그 어머니를 가까이 지났거든요. 잘 아는 터이 라서 가자마자 어머니 어디계시냐고 그러니까 아 저 골방에 계신데 뵙지 말라고, 냄새나고 그런다고 그래요. 그런데 제가 거기서 이야기하고 있 는 동안에 어머니가 자꾸 보고싶어 서 문을 열어요. 문을 여니까 또, 가서
"어머니 가만히 계세요."
문을 꽝 닫잖아요. 그걸 내가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웬만하면 내가 분위기를 위해서 그 냥 있으려고 했는데 안되겠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서 어머니를 뵜더 니요, 그 어머니가요 얼마나 슬피 우는지요. 내가 곽목사님 온다는 말을 듣고 뵙고 싶었는데 아이들이 나를 못 만나게 했다고…… 그러면 서 우는 어머니를 보았어요. 여러 분 이렇게 업신여겨도 되는 겁니까? 어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할 작정이 요. 구제 대상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지 마세요. 높이 존경하고 그 지혜와 경험과 그 거룩한 본을 우리 가 존중해야되요. 어느 사람은 논 문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스 라엘 나라가 강한 이유? 오직 하 나,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기 때문이 요. 그리고 전승을 중요하게 여겨 무슨 말하다가도
"이거는 조상 적부 터 내려오는 전승이요, Tradition"
하면 꼼짝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 에 강하고 그러기 때문에 지혜롭다 는 것이에요.
또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 니다. 효할 수 있는 길은 의인이 되 야 하는 거예요. 의롭게 살아야 됩 니다. 부모님의 마음이라는 것은 깊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높은 도덕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들이 잔소리가 많고 그들이 간섭 이 많은 이유도 사실은 다 그 깊은 곳에 심리적 이유가 있습니다.
"나 는 선하지 못했다 그러나 너는 선하 라. 나는 공부를 열심히 못했다 너 만은 좀 열심히 해다오."
보상적 심 리가 있어요. 또 나는 의롭지 못했 다 그러나 너는 의로워야 한다는 거 예요. 그래서 부모님의 마음은 언 제나 선한 것이예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잔소리도 많고 조 금은 지나칠 때도 있어요. 말씀은 다 안하고 있지만은 그런 후회가 많 아요. 과거의 후회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랬다만은 너는 제발 이래다 오."
이것이 부모님의 마음이요. 그 런고로 효의 지름길은 내가 의롭게 사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보상해 드려야 하니까요.
또 하나는 지혜로운 자가 되야 한 다고 성경 말씀은 증거하고 있습니 다. 그래서 오늘 20절로부터 보면 은
"술을 즐기는 자와 사귀지 마라. 게으른 자와 사귀지 말라. 단정히 행하고 지혜로운 자가 되라."
그리 고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듣는 지혜를 가져야 되요. 청종하는 지 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를 잘 믿는 것, 그리 스도인으로 성실하게 사는 것이 효 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소원은 우리가 오래 사는 것이에요. 그런 고로 신앙생활 잘해서 영생의 기업 을 얻으면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 드 리는 거예요. 우리가 지혜롭게 살 아서 모든 일에 실수없이 행하면 부 모님께 직접적으로 효도하는 일이 된다는 말입니다.
또 한가지는 오늘 성경이 증거하 시는 것은
"내 길을 즐거워하라."
그럽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길은 부모님의 길, 그의 선 택, 그의 철학, 그의 이상, 그의 살 아온 생을 내가 기뻐해야 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 은 마음속에 지금 무언가 잘못 살았 다고하는 그런 후회가 있습니다만은 자식의 행위를 통하여,
"아닙니다. 부모님은 잘 살았습니다. 성공적으 로 살았습니다. 훌륭하게 살았습니 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예요. 뭐 그따위로 살았느냐고 말하지 말고요. 훌륭하게 살았다고 하는 그런 말을 듣고싶은 거예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 컨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 브라함 링컨 자신도 초등학교 좀 다 니다 말 정도예요. 학문이 없는 사 람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까 그 고고하고 지식 많고 귀족들이 아브라함 링컨을 헐뜯기 위해서 그 반대파에서 끝까지 괴롭히는 거예 요. 대통령이 되고 처음으로 상원 에 나가서 연설을 할 때, 어느 국회 의원이 그랬답니다.
"당신 같이 무 식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모시게 된 것이 우리의 다시없는 불행이라 고……"
이런 모욕을 주고 또,
"당 신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 이요 그런 사람의 아들, 그런 천한 사람의 아들을 우리가 대통령으로 모시게 됐다"고 해놓고 구두를 벗어 서 들고, 이 구두도 당신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거라고 그랬어요. 아 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대단히 감사 합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아버지를 기억나게 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저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직업에 충실했고 구두를 잘 만드는 분이셨 습니다. 내가 어깨 넘어로 배운바 가 있으니 당신 구두가 고장나거든 가져오시오 내가 수리해 드리겠습니 다."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여러분
"내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입 니다."
떳떳하게 자랑을 합니다. 이것이 효도라는 거예요.
"내 아버 지는 머슴이었습니다. 내 아버지는 머슴이요, 나는 그 아들입니다."
자 랑할 수 있어야 되요. 아버지의 직 업, 아버지의 선택, 아버지의 삶, 어 머니의 살아온 생에 대하여
"잘 하 셨습니다. 훌륭하셨습니다. 그 하 시던 일을 나는 존경합니다. 나 거 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 하려 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효도 예요. 부모님으로 하여금 살아온 생에 대하여 후회하게 만들어서는 안돼는 거예요. 그걸 자랑하게 만 들 수 있도록 부끄러운 일생을 자식 이 보상해 주어야 됩니다. 이보다 더 큰 효도는 없어요.
여러분 효가 복 그 자체입니다. 효가 있는 가정이 복됩니다. 효가 복의 근본입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여러분, 자녀교육을 바로 하고 싶습니까? 효도하세요. 그리 고 내버려둬도 자녀들은 저절로 훌 륭하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부모 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내 자식 잘 되기를 바라지 마세요. 그런 일 은 없어요. 그런고로 부모님을 즐 겁게 합시다. 효는 문화의 유산이 아닙니다. 효는 이 나라의 단순한 도덕이 아닙니다. 이건 성경적 진 리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이 크나큰 원리와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가정의 관계를 정립합시다/엡5:31-6:9
2001-12-08 23:49:40   read : 113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출발을 합니다. 그래서 이 관계가 바로 되면 행복하고 이 관계가 제대로 되지 못하면 불행해 지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정은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 도 있습니다. 사실은 부부 사이는 너와 나. 남남이 아닙니까? 하나의 부부라는 관계를 맺게 되어 이 관계 속에서 출발하는 부부, 또 부모와 자식으로, 한 가정을 이루고 우리 직장에서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이 런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립이 라고 하는 건 무슨 뜻이 있냐하면 옛날 제가 시골에 살아서 보기도 했 고 알기도 하였지만 마당에서 솥을 걸고 음식을 만들 때 둥그렇게 쇠로 띠를 두르고 그 다음에 다리 세 개 를 세우지 않아요? 그렇게 하고 그 위에다가 솥을 올려놓는 거예요. 그 렇게 하고 마음대로 불을 때서 음식 을 만듭니다. 그 세 발이 정확한 위 치에 든든히 서 있을 때 그걸 정립 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그 중에 다 리 하나가 약하거나 없거나 하면 반 드시 넘어지고 쏟아지게 됩니다. 그 세 다리가 대립하여 제자리에서 제 구실을 해 줄 때 이것을 정립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해마다 5월 첫 주일은 가정 주일로 지키는 날입 니다.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 상고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부부의 관계를 정립합시 다(5:31-33).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 에 온갖 좋은 것들을 다 갖추어 놓 았습니다. 그리고 남자 아담을 만들 었는데, 그렇게 좋은 동산에 남자 하나가 다니면서 외롭게 지내고 있 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너무 좋 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 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잠들었 을 때 갈빗대를 뽑아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로 끌어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혼 자 사는 것은 안 좋다. 그리고는 여 자를 아담 남자에게 이끌어 오시니 라는 말씀은 아담에게 가장 적합한 여자를 끌어다가 짝을 지어 주셨다 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나에게 두고 생각해 보면 김창인이라고 하 는 남자에게 김기옥이라고 하는 여 자를 이끌어 오시니. 이 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자면 이 세상에 많은 여자가 있는데 하나님 이 여자 하나를 꼭 집어서 나에게 짝을 지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러니까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면 좋습니다. 김창인이라고 하는 사람 에게 가장 적합한 여자는 바로 이 여자다 하여 짝을 지어 준 것입니 다. 여러분에게는 이 여자가 이 세 상 그 많은 여자 중에서 가장 나에 게 적합한 여자이기에 하나님이 골 라 주셨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여 자와 짝 지어 진 것이 그렇게 복되 고 기쁨이 되는 겁니다. 또 그 여자 에게는 이 남자가 좋다 하고 짝을 지어 주셨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 여 한 몸을 이룰지니라 라고 말씀하 십니다. 그러니까 남자가 부모 떠나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혼하게 되 면 부모는 내 보내라 그런 뜻이기도 합니다. 즉 간섭하지 말라는 말씀입 니다. 지금까지는 결혼하기 전에 아 들이 월급을 타 오게 되면 전부 어 머니한테 갖다 바치지 않았어요? 결 혼해서 제 마누라를 맞이하게 되면 이제는 관여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이걸 자꾸 관여를 하다 보니까 시어 머니와 며느리가 문제가 심각해 져 서 고부간의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 니까? 일단 내 아들이지만 장가를 보내면 남의 남편이 됩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자기 남편이 벌어 온 것 이나 쓸 일이지 남의 남편이 벌어 온 것을 왜 가로채서 쓰려 합니까? 아들에게는 엄연히 제 아내가 있는 데 말입니다. 제발 그렇게 하지 마 십시오. 서양 사람들은 결혼 시켜 놓으면 절대 간섭 안하고 알아서 생 활하도록 합니다. 한 집안에 살지라 도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부간의 갈등이 없는 것입니다. 그 리고 그 다음에 결혼하게 되면 부모 를 떠나 라는 말씀은 경제적으로 독 립하고 자립해서 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 라고 하셨습니다. 이둘 사이에 시어 머니가 끼어 들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이에 올케가 끼어 드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 둘이 한 몸이 되라 고 하셨는데 여러분 천년을 함께 살 아보세요. 한 몸 됩니까? 내가 밥 먹었다고 아내가 배부르냐는 말입니 다. 똑같이 함께 먹어야 되지 않습 니까? 그런데 어떻게 한 몸이에요? 그러나 이것은 한 몸처럼 살아가라 는 뜻입니다. 한 몸이라는 것은 목 표가 하나 아닙니까? 삶의 방법이 하나가 아닙니까? 또 주머니가 하나 아닙니까? 믿음이 하나입니다. 빨리 하나가 될 때 두 부부는 행복해 진 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 정의 제도. 즉, 부부로 짝을 이뤄 복 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셨다. 이 것이 부부라는 얘기입니다. 이 부부 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은 이상과 같 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1절부 터 33절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 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 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 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 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고 하였습 니다. 그러면 부부가 하나 되는 비 결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여자 하와를 만들어 남자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그 때 하는 말이 이는 내 살 중의 살이 요 내 뼈 중에 뼈로다. 즉 나와 불 가분의 관계. 내 살이요 내 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내 사랑하기 를 내 몸처럼 아끼고 귀히 여기고 사랑해 주라. 그런 말이 아닙니까? 우리는 내 살을 얼마나 귀히 여깁니 까? 조금 찢어져서 피만 나오면 야 단입니다. 그 다음에는 뼈가 상할까 봐 얼마나 신경을 쓰고 귀히 여깁니 까? 아내를 꼭 쥐면 터질세라 건드 리면 깨질세라 그렇게 내 몸처럼 아 끼고 사랑해 주는데 하나되는 비결 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로는 아내는 남편을 경외하라고 하 였는데 경외라고 하는 말은 신하가 임금에게 쓰는 말입니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쓰는 말입 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아내가 남편을 그렇게 경외하라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남편 알기를 왕같이 알라. 남편 알기를 하늘 같 이 알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 알기를 발바닥처럼 여겨보십시 오. 그렇게 되면 하나일 수도 없고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래서 사랑과 경외가 하나되는 비결입니다. 이것 이 바로 부부관계를 바로 정립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부부간의 관계가 사랑과 경외로 정립이 될 때 행복한 부부가 됨을 명심하셔서 여러분들의 부부 사이의 좋은 관계가 되어지기 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부자의 관계를 정립합 시다(6:1 ∼ 4). 부부간에는 뒤틀리 면 헤어진다고 하지만 부자 관계는 헤어질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자 사이가 뒤틀려서 평생 원수 같 이 지낸다면 이것은 좋지 않은 부부 보다 더 심각한 겁니다. 그래서 부 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바로 되야 되 는 겁니다. 그때 그 가문이 서게 되 는 겁니다. 그러면 본문으로 돌아가 서 1절부터 4절까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 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 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 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 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자녀들아 부모를 공경하라. 돈 벌어 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할 때만 잘 공경하라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나이 많아 돈 한 푼 못 벌고 오히려 자녀에게 신세를 질 때도 똑같이 공경하라는 말씀입 니다. 만약에 여러분들 가운데 부모 가 주책부리는 그런 분 없어요? 주 책 부리면 내가 기저귀 차고 오줌 똥 못 가리고 밤새도록 울고 보채며 자기만 위해달라고 하던 그때처럼 부모가 주책을 부립디까? 내가 부모 에게 주책 부린 것은 생각도 안하고 열 배나 더한 주책 부린 주제에 부 모가 조금 그런다고 꼴 보기 싫다하 고 모시기를 싫어하는 자식.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실 복이 무엇 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이 땅 위에 태어났고 존재하는 자체가 부 모의 은혜 아닙니까? 핏덩어리를 내 다 버렸으면 어떻게 했을 겁니까? 나를 낳아 주셨고 또 이만큼 키워 주셨고, 가난해서 공부를 못 시켜 고학해서 내가 성공했을 망정, 여러 분 그것이 전부 다는 아니지 않습니 까? 고학해서 공부했다는 것보다 그 동안에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큽니 까? 가난한 부모일 지라도 조금도 차별하지 말고 공경하라는 겁니다. 즉 부자인 부모에게만 아니라 가난 한 부모에게도 공경하라는 겁니다. 건강한 부모가 아니라 병든 부모에 게도 공경하라는 겁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축복이 약속 됐다는 것인데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되리라 했으 면 되는 것 아닙니까? 장수하면 그 것도 축복이 아닙니까? 더 이상 복 이 어디 있습니까? 복이란 복은 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함과 동시에 부 모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고 본문은 말합니다. 한마디로 믿음 을 잘 키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부모는 학교 교육에서 일 등 하면 부모로서 할 일 다했다고 할 지 모르지만 우리 믿는 부모는 그게 아닙니다. 학교에서 일등 하면 더 좋습니다. 회사에서 일등 하면 더 좋습니다. 그러나 그 것보다도 내 아들 딸 들을 믿음으로 키웠다는 것이 더 큰 성공이요, 기쁨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해도 좋고 못 해도 좋 습니다. 믿음으로 키웠다면 믿음의 부모는 정말 최선을 다 한 부모입니 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녀들을 꼭 믿음으로 키워야 됩니다. 그래서 여 러분 공경과 믿음으로 키우는 양육. 이 두 가지가 바로 될 때 부자 관계 는 바로 되고 정립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그 가정에 행복이 있고 그 가문에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 분들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좋은 관계를 정립해서 약속된 축복을 받 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상하 관계를 정립합 시다.(5∼9) 5절부터 9절까지
"종들 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 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 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 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 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 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옛날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에 편지 할 때에는 종의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이 있었고 상 전이 있었습니다. 즉 주종 관계입니 다. 다시 말하면 계급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계급 제 도가 엄격했는데 계급이라는 것은 사람 위에 사람이 있고 사람 아래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 늘날에는 민주국가에서는 계급이라 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계급 이라는 것은 없지만 계층이라는 것 은 있습니다. 그래서 계층이라는 것 은 일을 할때 위에서 일 하는 사람 이 있고 아래서 일하는 사람이 있다 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의 관계일 뿐이지 사람 자체가 위아래 라는 말 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 이 직장에 나가서 일 할 때 처음에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일을 할 때 계 장도 있고 과장도 있고 부장도 있고 이사도 있고 사장도 있고 그러지 않 습니다. 모두 평사원이라면 일을 못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위해서 위가 있고 아래가 있습니다. 그래야 제대로 일이 돌아가고 일을 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니 라"
하면 일을 못 하는 겁니다. 이 까닭에 이것은 사람 자체가
"위"라 는 말은 아닙니다. 일에 위아래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입니다. 옛날의 종의 제도가 있어서 주종관계의 조 화를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오 늘날 우리는 계층간의 조화를 말한 다고 보시면 됩니다. 본문에 보면 종들은 상전 섬기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하였습니다. 종들은 주 인을 꼴 보기 싫은 존재로 여기지 말고 예수님이라 생각하라는 뜻입니 다.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를 생각 해서 섬기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상전들아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은 만약에 내가 예수님의 입장 이라면 즉, 예수님이 내 입장이라면 종들에게 어떻게 했을까? 그렇게 생 각하고 종에게 하라는 겁니다. 그렇 게 하면 그 행한대로 하늘의 아버지 께 받는다는 말씀도 첨부하고 있습 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한 마디 로 요약하면 종이나 상전이나 예수 님을 표준 하라는 뜻입니다. 즉 예 수께 하듯 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얼마나 상하 관계가 좋겠습니 까? 예를 들어 직장에 나가 아랫사 람에게 예수님이라면 내가 어떻게 할까? 그 결과는 뻔하지 않습니까? 또 아랫사람이라면 즉 예수님이 그 위치에 계시다면 내가 어떻게 할까? 를 생각하고 처신할 때 상하 관계가 잘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 회사는 정말 복 된 회사요, 가정에서도 윗 어른이 있고 아랫사람이 서로 그리 스도께 대하듯 하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 자체가 위, 아래는 아 니지만 그리스도를 대하는 마음으로 윗사람을 대하고 아랫사람을 대하면 얼마나 상하 관계가 아름다우냐는 말입니다. 이런 가정에 행복이 있고, 이런 사회가 복되고 잘 되는 것입니 다. 여러분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이런 상하 관계를 바로 정립하여 복된 가정과 잘되는 집안 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좋은 관계/엡6:1-4
2001-12-08 23:50:53   read : 207

오늘은 참 좋은 날 입니다. 모처럼 온 가족이 함께, 또 한자리에서, 그리고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가장 많이 희생된 것이 가정 입니다. 모두 뿔뿔히 흩어져 버렸습니다. 서로 만날 수가 없습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까 형제애도 멀어져 버렸고, 부모에게도 마음이 멀어진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모처럼 이렇게 함께 모여서, 한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니까 어떻습니까. 오늘은 다른것 생각하지 말고 가정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특히 부모만을 생각해 보고, 자녀들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어떤 관계 입니까. 세상에 이 보다 더 좋은 관계, 더 좋은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은 다음의 몇가지를 꼭 생각해 보시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부모는 나의 생명의 전수자다" 하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 부모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요. 생각이 이쯤되면 부모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부모님은 참 고마운 분 입니다.

저는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다는 것만도 축복이고, 행복이고, 기쁨이라고 생각 합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이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없어봐야 부모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게 됩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이름이 아버지고, 어머니라는 이름 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얼마나 정답고 소중한 이름 입니까.

연산군은 어머니 없이 자랐습니다.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는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어린 연산이 하루는 밖에 나가서 놀다 들어 왔습니다. 아버지 성종이 어린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밖에 나가서 무엇을 보고 놀았으냐" 그 때 어린 연산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송아지가

어미소를 따라 가면서 엄마 하고 부르며 따라가는 그 모습이 그렇게도 부러웠습니다", 그 말에 성종은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관계 입니까.

그래서 성경은 말씀 하시기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첫째 가는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마땅히 공경 받아야 할 대상 입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 입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모 공경함을 율법에 못을 박아 놓으신 것이며 그것이 이 세상에소 복을 받는 일이라는 것을 밝히 말씀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그거이 가장 기본적이 도리이며 축복의 삶입니다.



두번째는 "자식은 상급" 이라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아무리 존귀한 존재라고 해도 혼자서는 존귀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있기 때문에 존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자식은 "상급" 이라고 했고 "열매" 라고 했습니다. 자식은 분명 상급 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힘이고, 열매 입니다. 자식이 있어야 어딘지 모르게 힘이 있고, 든든하고, 안정이 됩니다. 그래서 모두 힘이 들어도 자식을 낳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부모님들이 자식을 자랑하는 것을 들어 보십시요. 옛날에는 여편네 자랑을 왼병신이라고 했고 자식 자랑은 반병신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생각해서 여편네 자랑은 왼병신일런지 모르지만 자식 자랑은 병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견하게 여기고,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 입니다. 그게 부모의 솔직한 마음 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아내는 남의 아내가 예뻐 보이고 자식은 자기 자식이 최고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들의 하결같은 마음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귀하고 소중한 자식을 귀여워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있어서는 그만큼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 는 것 입니다.



여러분, 이 두 관계는 좋은 관계로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는 이 관계가 수난을 당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외면 합니다. 어떤 자식들은 부모를 버리기 까지 합니다. 또 어떤 부모는 자식을 버리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아주 슬픈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어떤 관계인데 이렇게 까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이 관계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관계 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두가지 점에 유념해야 합니다.



첫째는 자식은 부모 공경으로 할 일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이 가장 값이 주어지고 권위가 생기는 것은 부모를 알고, 부모를 공경할줄 아는데서 발생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을 했고, 잘 살고, 출세를 했다고 해도 이것이 잘 않되어 있으면 그것은 출세도 아니고, 성공도 아닙니다. 사람은 이 관계가 잘 되어야 떳떳하고 그 권위를 인정 받게 됩니다.

여러분, 김대통령을 보십시요. 다른 것은 잘 모르겠는데 그분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만큼은 이름난 분 입니다. 그분은 타고난 것 같습니다. 다른 것

다 잘하고 이것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분이 복을 받는 것이고, 사람들이 그분을 좋아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권위 입니다.

자녀들은 이것을 잘 해야 복을 받습니다. 이것이 잘 않되면 아무리 오늘 잘 살아도 그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오늘만 날 입니까. 먼 훗날 까지 내다 보면 불효자는 복을 받지 못 합니다. 오늘에 심지 않은 사람은 내일에 가서 거둘 것이 없다는 것은 성경이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인생의 질서 속에 제시된 대원칙은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복의 근원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 하기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생의 질서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질서이기 때문 입니다.

부모, 이것이 보통 단어 입니까.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경쟁세상에 나가서 노심초사 하시는 아버지, 또 아이 다섯을 낳고 여섯을 낳은 어머니, 그것도 부족해서 여덟을 낳고 열을 낳은 어머니, 열번째 낳은 아이는 젓을 먹일 때 등에서 내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때 쯤에는 어머니의 젓이 사정 없이 늘어져서 등에 엎힌 아이에게 직접 입에 물려줘도 충분할 만큼 늘어져 있습니다. 그 말은 몸이 몹시도 망가져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속이 모두 비어 있다는 말 입니다. 알맹이는 모두 빼 내 주고 자신은 빈껍데기만 가지고 사신다는 말 입니다.

이것이 부모입니다. 부모라는 존재는 자식에게 이같은 본재입니다. 그래서 잠언 23:22절을 보면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잠23:22)고 했습니다. 또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첫째가는 계명이요 네가 잘 되고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그 고마우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부모는 삶으로 권위를 지켜야 합니다.



효가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고 해도 그 효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들은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않됩니다. 옛날에는 자식들에게 명령만 하면 들어 먹혔는데 오늘은 그게 잘 않됩니다. 오늘은 민주화 시대가 되다 보니까 대통령의 권위도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이제는 명령해서 될 세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모님들도 오늘 권위를 지키려면 다음의 몇가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부모님들은 먼저 이 시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자꾸만 고부간에, 자식간에 불화가 잦은 것은 부모님들이 이 시대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지금은 20세기가 지나고 21세기의 문턱에 와 있는 시대 입니다. 옛날 시집살이 하던 그 때를 생각하고 자꾸만 고집 피우지 마십시요. 그것은 지혜스럽지 못한 행동 입니다. 아들이나 며느리는 이 시대에서 교육을 받았고,이 시대의 물을 마시고 큰 사람들 입니다. 내 마음에 들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또 노년에 이르게 되면 분별력이 상실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노년에 이르게 되면 쉽게 노여워 하고, 서운해 하고, 자기 고정관념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 고집만 늘어나고, 이해력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자식들에게 쓸데 없이 서운한 마음만 많아 지게 됩니다. 그래서 불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구시대의 고정관념을 빨리 이 시대에 맞게 고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식들 하고 싸우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고, 또 서운한 것을 극복하고 살 수가 있습니다.

어떤 권사님이 아들 딸이 살고 있는 미국엘 갔습니다. 결혼해서 살고 있

는 아들 집에 가서 밥을 먹는데 며느리가 밥상을 가져오더니 시어머니 하고 겸상을 해서 밥을 먹고 앉아 있고 아들은 밥상 옆에서 아이 우유병을 들고 앉아서 젓을 먹이고 앉아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까 기가 막힙니다. 이 자식을 어떻게 키워서 미국에 보냈는데 오늘 와 보니까 이 모양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속에서 솟아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참는데 그것을 참느라고 예수님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것을 생각하면서 참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날이 밝자 마자 기분이 나빠서 딸네 집으로 갔습니다. 저녁 때 밥상이 들어 오는데 딸은 어머니하고 겸상을 해서 밥을 먹고 앉아 있고 사위는 밥상 옆에서 아이 젓을 먹이고 앉아 있습니다. 이 장모님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까 얼마나 보기에 흐뭇했던지 전날 기분 나빴던 것 그 저녁에 다 풀었다고 합니다. 이 권사님은 그런 생각가지고 살면 마음 편안할 날 하루도 없습니다. 그분의 이 시대를 너무나 모르시는 분 입니다. 그것은 그 사회에서 지극히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 시대, 그 사회를 알면 화낼 일 전혀 없는 일 입니다.

또 사람이 노년에 이르게 되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말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병 입니다. 말이 많다보면 할 말만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말이나 마구 해 댑니다. 눈치도 없습니다.이미 조금 전에 한 말을 또 합니다. 좋은 말이 아니고 푼수 없는 말씀도 자꾸 하십니다. 그것이 노년의 현상입니다. 사람이 노년이 되면 이렇게 말씀이 많아 집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어떤 노인학자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연구를 했는데 이런 이유에서라고 합니다. 사람이 노인이 되면 몸에 있는 모든 힘이 모두 입으로 모인다고 합니다. 노인은 무릎에도, 허리에도, 가슴에도 힘이 없어지고 입만 힘이 있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이 많다는 것은 아직 힘이 있다는 증거 입니다.

젊은이들은 바로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이 말씀이라도 많아야지 그것 조차도 없어지면 그것은 거의 끝나간다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말씀이 너무 많으셔" 그것은 좋은 징조 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힘이 있으시다 그 말 입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이 어느 날 갑자기 말씀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고 합시다. 그것은 가실 때가 다 되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면 곧 돌아 가십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젊은 며느리들이 유념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늙으신 부모님으로 하여금 이웃에 죽이 잘 맞는 할머니가 계시거든 두 며느리 끼리 짜고 두 노인을 자주 만나게 해서 하루 종일 이야기를 많이 하게 해 드리십시요. 그러면 건강을 오래 유지해서 오래 사실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말씀이라도 많은 부모님이라도 계시면 좋겠습니다. 요즘에는 부모님이 그립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도 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허전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나이가 들고, 늙어 갈수록 분별력을 잃지 말고 권위를 지켜 살아야 합니다. 오늘 가족들이 자꾸만 분산되고, 집안에 자꾸만 갈등이 생기는 것은 부모 책임 입니다. 부모가 권위를 잃어서 구심점이 상실되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모두 늙습니다. 노인을 무시하면 않됩니다. 노인은 힘이 없고, 능력도 없고, 분별력도 없기 때문에 업신여기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노인들의 그 움푹 패인 주름살을 깊이 들여다 보십시요. 그 속에 지혜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 속에 경륜과 역사가 들어 있습니다. 오늘 젊은이들에게는 힘도있고 패기도 있어 좋긴 하지만 이같은 지혜와 경륜과 역사가 부족 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실패를 하고 경솔한 행동을 하고 그럽니다.

다만 오늘을 사시는 노부모님들은 노년의 삶에 권위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해도 다 큰 자식에게는 부모도 예의가 있어야 하고, 체통을 지켜야 하고, 권위를 스스로 지켜야 합니다. 앙드레 지드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아름답게 죽는 일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노년의 삶을 더 세련되게, 경건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유산이 따로 없습니다. 좋은 집을 물려 주는 것만 유산이라고들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노년의 삶을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볼 때 "나도 아버지 처럼은 돼야지" 생각하게 하는 이것 보다 더 좋은 유산은 없습니다. 며느리가 볼 때 "나도 어머니의 신앙 반만이라도 따라 가야지" 이 보다 더 큰 권위는 없습니다. 이것이 유산 중에서 가장 좋은 유산인 것입니다.

여러분, 참 인생의 깊이나 무게는 노년에 가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값을 잃은 노년의 삶은 젊어서 아무리 화려했고, 성공했고, 빛이 났어도 초라한 법 입니다. 그렇지만 젊어서 한때 방탕을 했던 사람도 노년에 가서 성숙한 인생을 살게 되면 젊었을 때의 방탕도 미담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권위 있는 인생 입니다. 그런 부모는 젊은 자식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탁해졌어도 그런 부모는 무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년의 삶은 경건해야 합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을 맞이 해서 부모와 자녀들에 대해서 생각 해 보았습니다. 부모는 공경의 대상 입니다. 부모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 보다도 우선해서 공경 받아야 할 존재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도 분부하신 것입니다. 성경이 힘주어 강조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부모는 자녀들에게 있어서 권위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권위를 상실하게 되면 가정이 산산이 분산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노년의삶이 초라해 집니다. 부끄러워 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강조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적용되는 말씀 입니다. 이 관계는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변치 않는 관계이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가정과 천국의 신비/엡5:31-33
2001-12-08 23:51:54   read : 199

왜 부모를 떠나는가? 그것은 부모를 떠나서 또 하나의 새로운 관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는 세상을 떠나서 예수를 만나는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이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서 관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만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그래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면 내가 그의 신부가 됩니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종의 관계, 아들의 관계, 신부의 관계가 있는데 이 세 관계는 다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내가 종이 되어서 일하게 됩니다. 이 관계는 일의 관계입니다. 충성하고, 섬기는 관계며,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도 듣고 충성된 종으로서 상도 받고, 면류관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면 내가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또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됨의 권세를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를 받아서 천국에 가는 유업을 받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고 사랑을 나누면서 교제하고, 행복을 얻는 관계입니다. 종으로 일할 때는 삯을 받고 칭찬을 받으며 아들로 믿게 될 때는 거기에서 유업을 받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신랑 신부의 관계가 되면 사랑의 관계를 형성해서 행복하고, 교제하면서 인격적인 만남을 이룹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명령의 관계고, 순종의 관계며, 일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보호의 관계이며, 돌봄의 관계이며, 유업을 받는 관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신랑 신부의 관계는 일대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이 관계는 철저하게 서로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여기에서만 진정한 행복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성장의 단계를 보면 처음에 하나님을 만날 때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만나서 주인에게서 무엇을 얻습니다. 또 도움을 받습니다. 조금 더 은혜를 받으면 내가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는 위대한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마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성숙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전부가 되어서 마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고 교제하듯이 하나님과 교제하므로 행복을 얻고 만족을 얻으며 기쁘게 살아가는 관계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연합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은 주인과 종의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종이고, 모세도 종이며, 여호수아, 이사야 모두 종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연합하듯이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격적으로 성숙하면 신랑 신부의 관계로 일생을 살 듯이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 때 우리의 심령속에 하늘의 천국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1-33절)

먼저, 둘이 한 몸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연합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연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연합은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통을 상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형상을 따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고 창세기 1장 27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자 혼자만의 형상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만날 때 하나님의 형상이 내게 온전히 나타나게 됩니다.

남녀의 연합은 결국 신비한 비밀인데 천국의 즐거움, 기쁨을 땅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 남녀의 연합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신비하게 봐야 합니다. 부부의 만남은 남녀의 성적인 만남이며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지으시고 우리의 성이 그 인격을 표현하는 도구라면 부부는 인격적으로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일대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우리가 회사에 가서 사장과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권위상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보호자의 입장에서 자녀는 약한 존재로 섭니다.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일대일의 존재는 안됩니다. 빈부, 학력, 인물, 모든 것에서 비교되는 차등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부부는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나는 유일한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대일의 인격으로 만나는 것은 부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 앞에 있는 아내는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다 받고 있습니다. 남편도 그 아내 앞에서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존엄성이 깨질 때는 그 가정은 이름만 남게 됩니다.

마이크 메이슨이라는 사람이 쓴「결혼의 신비」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가정생활의 고전적인 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듯 진정한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됨의 신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됨의 신비에 이르듯이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님과 하나됨의 신비를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이런 해석을 내렸습니다. '부부의 관계로 경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과 헌신으로 하나되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4-25절에 보면 부부가 연합하기 위해서 옷을 벗었다고 했습니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 전 존재를 진실하게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또 연합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최상의 헌신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의 만남은 진실과 헌신입니다. 이 이상의 헌신이 없습니다. 이 이상의 진실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자기 존재를 벌거벗은 존재로 진실하게 내놓아야 되며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듯 헌신하는 것은 이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고전 7:3-4절에 보면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는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연합을 위해서 자기 존재를 내어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함께 잠을 자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자고 남편은 건너방에서 따로 자는 것, 이것은 성서적인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집안에 서재를 꾸며놓고 혼자 거기에서 연구하고 잠자는 것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연구했으면 잘 때는 같이 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건강상의 이유나 특별한 기도를 위해서라면 허락을 받고 하라고 성서가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 여 집사님이 12시에 철야하러 왔어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오셨느냐고 했더니 아이 대학 진학을 위해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어서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백일기도는 새벽에 해도 됩니다. 자식 대학가는 것 가는대로 내버려두어야지 백일기도 한다고 떨어질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격을 세워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실력없는 것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서 주무시죠." 자야 할 자리에 가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라고 제가 집으로 보내드린 일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부부는 서로 존경과 사랑으로 연합해야 됩니다.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3절)

인생이 육체가 연합되었다고 그것으로 일생을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도 쇠합니다. 정욕도 갑니다. 육체의 연합도 식어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견고한 연합만이 일생을 강한 끈으로 연합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고 혼자 웃었습니다. "아내가 예뻐보일 때..." 이런 제목의 글인데 20대 후반은 남편을 위해서 예쁜 아기 낳아줄 때 아내가 예뻐보이고, 30대 후반은 좋은 집에 못산다고 불평하지 않고 잘 참아주는 아내를 볼 때 예뻐보이고, 40대 후반은 "당신 건강해요. 건강해야 되요" 하면서 보약 다려줄 때 예뻐보이고, 50대 후반은 "당신은 참 훌륭한 사람이야"라고 칭찬해 줄 때 아주 예뻐보이고, 60대 후반은 '당신과 살아온 생은 참 행복한 삶이었다'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싱긋이 웃어줄 때 예뻐보이고, 70대 후반은 조용히 "우리가 죽거든 양지바른 곳에 함께 묻힙시다." 하면서 주름잡힌 얼굴로 쳐다볼 때 아주 예뻐보이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 공통점이 있었는데 남자는 늙어서까지 여자에게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달라는 당부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남편을 존경해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자존감을 지켜줄 때 남자들은 아내가 가장 예뻐보인다고 합니다. 아무리 예쁜 여자도 남편을 무시하면 정이 뚝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날로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남편을 자꾸 세워주면 어떤 여자도 포근한 가운데 예뻐보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남편도 훌륭한 가문의 남자였고 부인도 명문대학을 나온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남편은 그 부인에게서 포근함도 느끼지 못하고 항상 지적만 당하면서 기죽어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지지리도 못난 여자와 눈이 맞아가지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 부인이 목사님에게 상담하기를 "목사님, 정말로 자존심이 상합니다. 잘난 여자와 도망갔으면 이렇게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겠습니다. 천하에 못생기고, 배운 것도 없고, 가문도 형편없는 여자와 도망갔으니 너무 창피합니다." 할 때 목사님이 "나라도 도망가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부인이 너무 똑똑하고 완벽해서 남편이 거기 붙어있을 수가 없어서 도망갔습니다.

남편을 존경한다고 하는 것은 아내가 순종해 준다는 얘기입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헬라어 원어를 보면 '아래에서 받들어 준다, 잘 들어준다'는 말입니다. 잘나고 똑똑한 것이 있어도 남편 앞에서만은 감추어야 됩니다. 다른 곳에 가서는 똑똑한 것을 아무리 나타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만은 '똑' 소리가 싹 사라지고 '덕' 소리만 나야 됩니다.

여자가 너무 똑똑해서 남편에게서 '똑' 소리가 나면 남편이 그때부터 기가 죽습니다. 하늘은 높고 넓어서 땅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땅을 품어야 되는데 하늘이 좁아지면 땅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품어야만 되기 때문에 품을 곳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친구 목사가 있는데 친구 목사는 외모가 외소하고 부인은 헤비급입니다. 그래서 밤에 잘 때 부인은 쑥 올라오고 남편은 쑥 내려갑니다. 그 친구가 나한테 와서 하는 말이"우리 식구는 얼마나 태산처럼 헤비급인지 안을 수가 없어" 그래요. 그래서 제가 "자네가 하늘인데 하늘이 안아야지 땅이 안아서야 되겠어 땅이 안으면 거꾸로 되어서 뒤집어지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언제나 여자는 땅처럼 남편은 하늘처럼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의 신비입니다. 혹시 이 가운데 똑똑한 부인 있습니까 너무 똑똑한 척 하지 마십시오. 똑똑한 척은 세상에 나가서 하십시오. 가정에서는 똑 소리를 죽이십시오.

우리는 다윗과 미갈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됩니다. 다윗은 서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미갈은 사울 왕의 딸로 왕가의 공주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차이가 너무 많습니다. 가문, 교육, 배경, 인생관, 취미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정략적으로 다윗과 미갈을 결혼시켰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난 후에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너무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고 기뻐 뛰노느라고 옷이 벗어지는 줄도 몰랐습니다. 삼하 6장 16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라고 했습니다.

미갈이 이것을 보고 남편을 업신여겼습니다. '저 사람은 원래 출신이 그런 사람이야 왕 이 체통도 없이 벌거벗고 춤을 춰' 하면서 아니꼬운 눈초리로 멸시하면서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집에 들어올 때 멸시하는 투로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정색을 하고 입을 엽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삼하 6:21-22)

이 말이 떨어지면서부터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별거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남남이 되어버린 것이죠. 다윗이 아내 미갈로부터 자존심이 상처를 받은 후로는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별거를 하게 되었고 다윗은 후에 밧세바를 만나게 됩니다. 다윗 왕가의 비극이 뭡니까? 바로 아내가 남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데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여자가 20년 길러놓은 남자를 다른 남자가 20분만에 망칠 수 있다. 그러므로 남편을 세워주어야 한다."

아내에게 순종을 명령하신 것은 남편을 세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것은 자기 존재가 주님을 만난 천사같이 되라는 말입니다.

한문으로 지아비 부(夫)자는 하늘 천(天)에서 조금 솟은 것입니다. 이 말은 남편을 하늘보다 높이 받들라는 말입니다.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면 자기도 하늘처럼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자는 순종함으로 행복합니다. 순종함으로 자기 존재가 올라갑니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왕노릇 하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만은 왕으로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회사에 가서는 멸시 당하고, 무시 당해도 가정에서만은 높은 자리에 세워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므로 연합하라고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자기를 희생한다는 말은 자기 이기심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살면서 날마다 자기를 별세시켜야 합니다. 자기 희생이란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했을 때 여자가 잘못했을지라도 남자가 먼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머리됨의 원리입니다. "그래도 내가 남자인데..." 하면서 목에 힘주고 있으면 머리됨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교인들과 함께 기도원에 가는데 우리 식구와 무슨 얘기를 하다가 제 자존심에 상처가 와서 마구 화를 냈습니다. 원래 제가 제 집 식구를 사랑하다가 존경하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한신교회를 개척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제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가 저를 설득해서 개척하자고 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위대하고 또 나를 복되게 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단계를 넘어서 존경하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으로 존경스럽게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추켜 세워주어서 그랬는지 자기도 모르게 우쭐거리면서 매사에 집에서도 무슨 얘기가 나오면 잘못한 것은 다 나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어떤 때는 속이 아려도 너무 존경해서 제가 참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기도원에 가면서 무슨 얘기가 나왔는데 내가 안했는데 잘못을 돌려요. 그래서 제가 화를 냈더니 운전하는데 마구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논두렁 길을 가는데 사고 나겠어요. 그렇다고 내가 자존심이 있지 잘못했다는 말은 못하겠어요. 그래도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자동차를 세우라고 하고는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여종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이 종을 용서하소서. 제가 오래 참지 못하고 화낸 것을 용서하여 주소서." 먼저 기도를 하고 나니까 잘못했다고 말하기가 쉬워요. 그래서 "여보, 내가 잘못했소" 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자동차가 제대로 가요.

그렇게 하고 기도원에 가서 설교를 하니까 설교가 잘되요. 아내는 연약한 그릇인데 괴롭혀놓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 내가 어떻게 설교하겠습니까

제가 그때 느낀 것은 남자는 자존심상 잘못했다는 말을 하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잘못한 것 없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죽지 않습니까 잘못은 다 우리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내가 잘못했다." 그럽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을 보면서 격에 맞지 않는 말을 해도 남편이 옆에서 참고 들어주면서 같이 가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정생활은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사는 것입니다.

미국의 컬럼비아 바이블 컬러지 학장이었던 맥컬리킨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의 부인이 침해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곁에 있으면 안정감을 가지고 편안히 있고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집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불안해서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학장직을 여러해 더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장직을 사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 나는 아내의 곁으로 돌아간다. 42년전 결혼서약을 할 때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아내를 돌볼 것을 이미 약속한 것이기에 나는 그 서약을 지키고 싶다. 내 아내가 40년동안 나를 돌보아 주었기에 이제는 내가 그 사람의 빚을 갚기 위해 아내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랑과 기쁨 때문에 나는 그의 곁으로 간다."

그가 학장직을 사임하고 이 선언을 하면서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학장으로 있을 때보다 더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학장직을 몇 년동안 수행하는 것보다 자기 아내의 침해를 곁에서 돕기 위해서 가정으로 돌아간 위대함이 전 세계 남편들에게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만남이며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신비를 몸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될 때 남편은 예수님처럼 위대하게 되며 아내는 예수와 함께 사는 위대한 천사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사도 바울이 결혼을 말하다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게 된 것은 부부의 연합은 결국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목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천국의 모형이며, 가정생활은 천국 생활을 연습하는 것이 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종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고 천국가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가는 문턱까지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땅에서 충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는 아들도, 종도 없고 신부만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날 때 주님의 영광이 내 영광이며, 주님의 영화로운 인격이 내 인격이며, 주님의 찬란한 빛이 내 빛이 되어 일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듯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를 머리와 몸으로 비유한 것은 나눌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몸은 생명의 관계입니다. 신랑이 머리요, 신부가 몸이 되는 것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나, 어떤 위험이라도 갈라놓을 수 없는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준 것입니다. 부부의 연합은 참으로 천국을 이루는 신비이며, 이것은 행복을 얻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실 때 내가 그 품속에서 안식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종을 거느리고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삼고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신부를 만날 때만 하나님은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므로 하나님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종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아들 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전부로 삼고 하나님이 나의 신랑이 될 때 하나님은 행복해 하십니다.

하나님의 행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내가 행복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마십시오.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게 되면 주님이 나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오 주님이시여, 나를 신부 삼아 행복하소서." 이것이 바로 신앙의 극치입니다.

우리가 가정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비의 경지에 이르러서 천국을 끌어 땅으로 안고 땅의 삶이 천국으로 이어가는 위대한 신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힘 고전13:1-13
2002-01-29 11:14:13   read : 295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모든 만물이 살아 움직이고 새 생명 이 힘있게 살아나는 생명의 계절입 니다. 모든 꽃들이 피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날씨나 하나 하나의 일 들이 문화 행사를 하기에 너무 좋고 또 우리의 삶을 가슴을 펴게 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자연 을 마음껏 사랑하며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계절입니다. 5월은 계 절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우리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축복의 계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 버이 주일이 있고, 어린이 주일이 있고, 어린이날이 있고 우리를 가르 쳐 주는 스승의 날도 5월에 있습니 다. 여러분, 가정이 얼마나 귀합니 까? 우리는 모두 좋은 가정을 원하 고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가정의 귀 중함은 아무리 말해도 부족할 정도 로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만드시고 새 둥지처럼 가정 을 에덴동산에 만들어 주시고 행복 하게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 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에 주시는 모든 보화를 가정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가정을 위함 이고 사업하는 것도 가정을 위함이 고 정치도 국가도 가정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전 나라가 다 빌딩이라도 가정이 무너지면 집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공해도 가정을 잃어버리면 그는 실패자인 것입니다. 가정은 참으로 가장 소중 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선물이 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가정을 바로 잡아야 되고, 바로 일으켜야 되고 우리의 모든 가정이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할 줄로 믿 습니다. 가정에서 귀한 것은 사랑입 니다. 사랑의 울타리, 사랑의 집을 짓고, 사랑의 음식을 먹고, 사랑하는 자와 만나서 사랑의 품안에서 자녀 들이 자라나고, 부모님을 섬기고, 부 부간에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이 가정입니다. 사랑은 가정의 전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 면 숨을 쉬어도 죽은 것이고, 제아 무리 아름답게 꾸며도 사랑이 없으 면 그것은 그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성경은 두 가지 로 크게 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또 하나는 인간에 의 해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랑이 있 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로부 터 내리는 거룩하고 영원한 사랑이 고 인간에 의한 사랑은 인간 사이에 만들어지는 세상의 사랑, 육적인 사 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의 사랑이라 말하고 이 세상 의 사랑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대표적으로 에로스적인 사랑이 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정을 어떻 게, 무엇으로 꾸며야 합니까? 하나 님의 사랑으로 꾸미고 하나님의 사 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에로스적인 사랑 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 무 의미가 없고 웃기는 이야기로 들 릴지 몰라도 그렇지 않습니다. 가정 이 귀하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 랑이 있어야 귀하게 되고, 가정을 영원히 무너지지 아니하는 아름다운 가정으로 꾸미기를 원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꾸며야 그 가정은 아름다 운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고통 을 당하는 이유는 가정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정이 이렇게 무 너지고, 가정이 형편없이 흔들리고 파도가 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을 외면한 데에 있는 것입니다.
폴란드의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 니다. '최대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 이고 그 다음은 개의 사랑이고 그 다음은 연인의 사랑이다' 이렇게 말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사랑 은 이 땅에서 최고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날이 있었는데 하도 아버지가 불쌍해서 지금은 어버이 주일로 만들었지요. 아버지 어머니 를 같이 했지만 그래도 사랑! 하면 다 모두 마음에 느끼는 것은 어머니 의 사랑을 우리가 경험하고 또 그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참 사랑을 알아서 내가 또 그 참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 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땅에 있는 사랑 으로는 최대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높은 지위에 있는 것입니 다. 대통령이라도 어머니 앞에 무릎 을 꿇고 절을 하는 것은 어머니의 힘이 아니예요. 사랑의 힘이예요. 어 머니의 지성이 아니예요. 어머니의 사랑이에요.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 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 더 높은 것 같아♪ 푸른 하늘 그 보다 더 높 은 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에 어머니의 사랑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 다. 있어도 많이 변했다고 생각합니 다. 우리가 경험했던 어머니의 사랑 은 이미 서서히 자리를 옮겨가고 찾 기가 어렵습니다. 1월부터 3월까지 IMF로 인하여 버려진 아이만 3089 명이에요. 아이를 버립니다. 휴지통 에서, 쓰레기통에서 수많은 아이를 찾아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버려 도 어머니는 안 버리는데 어머니들 의 생각이 바뀌어졌습니다. 어머니 의 가슴이 변했습니다. 이혼해도 아 이들을 안 기르겠다는 거예요. 아무 리 애들이 어머니를 붙잡고 이혼하 지 말라고 해도 지금 그런 말을 듣 는 분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 머니의 사랑이 과거와 다릅니다. 최 고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이지만 우리는 지금 최고의 사랑을 찾지 못 해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개의 사랑이에요. 사 람 사랑하는 것보다 개사랑하는 것 을 더 좋아하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 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 사랑하다가 개만 못한 것을 경험하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개 기르는 시대가 옵니다. 개하고 살아 갑니다. 개가 열 배나 낫다는 거예 요. 개는 먹이를 주는 주인은 물지 도 않고 또 은혜를 배반하지도 않아 요. 개는 항상 주인을 위해 충성하 고 그 자리에서 지켜주고 주인의 말 을 잘 따릅니다. 사람이 그렇게 지 금 해주고 있습니까? 그렇게 못한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많은 사람들은 개를 사랑하는 시대가 옵 니다. 개와 함께 자고, 개와 함께 먹 고, 개와 함께 여행하고, 그래서 여 행할 때도 비행기에 개를 가득 싣고 주인과 함께 떠납니다. 개와 함께 목욕도 합니다. 개 메뉴에 관심을 가지고 개의 식탁을 준비하느라고 슈퍼를 드나들고, 유명한 미용사를 찾아서 가장 잘하는 곳으로 개를 데 리고갑니다. 개를 아름답게 꾸미는 데 모든 시간, 모든 관심, 모든 돈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겪어보니 까 개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전에 는 우리가 욕을 할 때
"저 '개' 뭐"
하고 아주 개자만 붙이면 나쁜 욕 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만 못 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어 떤 목사님 네 분이 보신탕 집에 갔 어요. 미국 가서도 한국 사람은 보 신탕을 버리지를 못해요. 여름에 땀 날 때 보신탕 드시러 갔어요. 종업 원이 와서 주문을 합니다.
"선생님 무엇을 잡수시겠어요?"
하니까
"보 신탕 집에 왔는데 개 말고 뭐 있 나?"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를 알고 그 다음에는 다른 분을 향해서
"선 생님도 개예요?"

"선생님도 개예 요?"
"선생님도 개예요?"
그러니까 세 분 목사님이 다 개가 된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개들은 천 년 만년 전의 개들처럼 변치 않습니 다.
오늘 우리의 가정이 위기를 만나 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 입니까? 중요한 것은 사랑 때문이라 는 것입니다. 무슨 사랑이냐? 아가 페의 사랑이 아닌 연인의 사랑, 에 로스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그전에 는 가정에서 어떤 사랑을 우선하는 것보다 책임을 우선하였습니다. 우 리 부모들은 지금보다 사랑을 안해 도 끝까지 잘 살았던 것은 부모로서 의 책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정 에서의 부모의 책임, 자식으로서의 책임을 더 귀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은 우리의 가정들이 무너져가고 있 습니다. 그것이 바로 잘못된 사랑 때문입니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동 물적인 사랑입니다. 육적인 사랑입 니다. 보이는 사랑입니다. 보이지만 않으면 변하는 거예요. 흔들리는 것 입니다. 성적인 사랑입니다. 쾌락적 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 바로 이것 이 에로스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 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눈물만 나는 거예요. 사랑의 열매, 사랑의 종착역은 눈물이라는 거예 요. 그러나 사랑이 그렇습니까? 하 나님의 사랑,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 은 오히려 구원의 씨앗이요. 행복의 씨앗이요. 기쁨의 씨앗이요. 우리 가 정을 축복하는 축복의 씨앗이 됩니 다. 아가페의 사랑은 절대로 상처와 아픔과 눈물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가페의 사 랑으로 우리 가정을 다시 찾아야 되 고 든든하게 일으켜 세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찬사를 받으면 서 결혼한 사람이 찰스 왕자입니다. 다이애나와 함께 결혼한 그 결혼식 은 온 세계에 공개가 되었습니다. 직접 생중계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우리 나라를 다녀가신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녀가 4남매입니다. 그러나 찰스 왕자를 비롯해서 지금 세 명이 이혼을 했고 마지막 에드워드만 남 아 있습니다. 제일 화려한 결혼식, 제일 돈 많은 결혼식, 제일 선물이 많은 결혼식, 전 세계의 대통령과 지도자들이 와서 축하 해준 결혼식, 전부 집을 다이아몬드로 꾸밀 정도 로 온갖 좋은 것들로 다 꾸몄지만 이 가정은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졌 습니다. 무너질 뿐만 아니라 만신창 이가 되었고 헤어져서도 전 세계에 어마어마한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유리알처럼 다 깨어져 버린 이 가정이 무엇 때문입니까? 돈이 없습니까 권력이 없습니까? 여 러분의 집을 아무리 잘 꾸며도 지금 이 찰스 왕자와 같이 꾸밀 수가 없 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지 만 가정을 잃어버린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에로스적인 사랑입니다. 동물적인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민족과 우리의 가는 앞날에, 위 기를 만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의 가정을 어떠한 사랑 으로 집을 짓고 어떠한 사랑의 이불 속에서 잠을 자야 하겠습니까? 어떤 사랑으로 음식을 먹으면서 어떻게 우리 가정을 지켜야 할 것입니까? 그 왕자의 가정이 무너졌다면 우리 의 집들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아가페 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 만 영원하고, 이 사랑만 참되고, 이 사랑만 힘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냅니다. 사랑의 힘보 다 더 큰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에 로스적인 사랑은 하루를 넘기기도 어렵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원 래는 성을 전혀 모르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언제부터 알게 되느냐? 결혼 이 가까워지면서 알게 됩니다. 하나 님께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해서 신비 한 만남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보전하고 또 우리에게 가정을 이룩 하기 위해서 성의 눈을 서서히 뜨게 해 줍니다.결혼이 가까와져 눈을 뜨 면서 몸과 마음이 절정에 이르게 됩 니다. 그래서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서서히 성은 멀어지게 되어 있고 약 하게 되어 있고 연세가 많아지면 그 쪽 면으로는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 가서 제일 어렸을 때처럼 모르게 되 어 있습니다. 멀리 떠나게 되어 있 습니다. 가정에 대한 고마움과 그 자녀들이 잘 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만족을 더 큰 만족으로 여기 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현대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에 로스적인 사랑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래서 지금은 60이 넘어서 이혼하 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부인을 볼 때 성적으로 보는 거예 요. 그 때는 그렇게 보면 안되는 나 이인 데 50대 60대가 되어도 이혼을 많이 하는 것은 아내를 성적으로 보 고 남편을 성적으로 보는 거예요. 아내가 남편을 보니 별 볼일 없다라 는 거예요. 그래서 엉뚱한 짓들을 하는 거예요. 남자들도 마찬가지입 니다. 60, 70이 되었으면 이제는 손 자, 손녀들을 봐 주면서 만족하며 살아야 하는 데...... 인생의 마지막 그 열매를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함 으로 살아야 하는데 항상 결혼할 때 와 같이 펄펄 뛰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찾아낸 것이 비아그라예요. 여러분, 약해져야 될 때 그걸 먹으 니까 그만 나자빠져서 죽는 거예요. 연세 많아 가지고 그래 죽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린아이 에게 그렇게 해보세요 어린아이가 견디지를 못합니다. 사람은 순진할 때는 순진하게 만들어 가야 하는데 이것을 끝까지 에로스적으로 가려고 하는데 가정의 위기가 있고 인격이 파괴되고 사회가 온통 혼란해지고 가정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서 생기는 이 분진이 온 사 회를 앞을 못보게 흩뜨려 놓는 거예 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하 나님의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 나님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은 사 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을 모르 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 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 이미지는 하 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오직 하나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왜 힘이 있습니 까?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 라가 온 세계를 통치하고 우리가 하 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 도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 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 가에 못 박혀 죽이기까지 우리를 구 원하려고 그 아들을 보내어 주셨습 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큰 거예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 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 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 신 사랑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 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오늘 우리의 가정에 에로스적인 사랑만 있다면 그 가정은 불안한 가 정입니다.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살 아간다면 그 가정은 믿을 수 없는 가정입니다. 가정을 넘어뜨리는 그 많고 많은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온 세계의 인류와 이 모든 만물을 사랑으로 통 치하시는데 여러분 무슨 힘으로 이 세상을 승리하고 여러분의 가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 님 아버지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 다. 육적인 관계에서도 자식이 부모 를 닮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 의 사랑이 우리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 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 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전 달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이어받 는 것입니다. 육의 혈통을 이어 받 듯이, 성품을 이어받고 얼굴 외모를 이어받듯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도 하나님을 믿고 그 아들 예수 그 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오게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결심이 아닙 니다. 노력해서 사랑하는 게 아닙니 다.
"여보 우리가 서로 변치 말고 사랑합시다"
아무리 가도 역시 그 사랑은 필레오의 사랑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위로부터 우리에게 주시 는 사랑은 성령으로 주어지는 것입 니다. 기도해야 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오는 성령의 은사요 열매 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에 게 주시는 하나님의 최대의 선물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힘이 있습니다. 신명기 5:10에 보면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
고 하셨고, 사사기 5 : 31에는
"주를 사 랑하는 자는 해가 힘있게 솟음 같 다"
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도 에로 스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기분 좋으 면 '아멘' 하고, 조금 괴로우면 '싫 어'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참 사 랑, 영원한 사랑, 거룩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으 로 사랑해야 참되고 영원하고 아름 다운 열매를 맺고 부부간에도 좋은 관계가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 까? 오늘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말씀을 통하여 사랑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처음에는 사랑의 가 치가 나옵니다. 사랑이 얼마나 가치 가 있느냐?
첫째, 1절에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 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했습니다. 땅에 있는 말, 하늘에 있는 말을 다해도 사랑 이 없으면 시끄럽게 울리는 꽹과리 가 되고 그런 말은 피곤할 뿐이에 요.
둘째,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을 알고 모든 지식이 있어도 사 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예 언이 있어서 국가의 흥망성쇠를 알 고 개인의 미래, 장래를 다 알고 온 갖 비밀을 다 알고 많은 지식이 있 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 라는 것입니다.
셋째,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 니요"
믿음이 얼마나 있는지 산을 옮길 수 있어요. 그래도 사랑이 없 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넷째,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 으로 구제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도망 다니는 신 창원도 구제를 하고 깡패들도 구제 를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이 사랑입니까? 여러분, 남을 도 와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 까? 그게 다 필레오의 사랑, 즉 땅 에 있는 원시인들부터 하던 일이에 요. 그건 인간의 정에서 나오는 거 예요. 내가 나를 위해서, 기분 좋아 서 그를 도와주고, 내 만족하려고, 내 이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므로 참 사랑이 아닙니다. 아가페의 사랑 이 아니예요. 참 사랑은 그렇지 않 습니다.
다섯째,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회 참여를 부르짖고 정 의를 부르짖고 뭔가 내 몸을 분신한 다 하고 감옥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그건 다 알고 보면 흑막이 있는 거 예요. 자기가 뭔가를 이용해서 감투 를 쓰려는 것이고 자기를 위한 일인 거예요. 이런 사랑은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떤 집단이나 단체, 또는 어느 기 구든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은 다 어 떤 이기적인 목적으로 만나기 때문 이예요. 안 맞으면 배반을 하지요. 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 사 랑이 없었을 때에는 잘 살았는데 오 늘 이 잘못된 사랑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이렇게 무너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어 야 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이어야 합 니다. 그 사랑만 영원한 것입니다. 그 사랑만 참된 것입니다. 그 사랑 만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가페의 사랑은 어떤 사 랑입니까? 오늘 본문에 열 다섯 가 지가 나옵니다.
1)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예수님 이 참듯이, 욥이 참듯이, 아브라함이 참듯이 아가페의 사랑은 오래 참습 니다. 2) 온유합니다. 부드럽습니다. 친절합니다. 인자하다는 말입니다. 3) 투기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자 기 잘난 것을 과시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자기가 잘났다는 거예요. 내 가 최고라는 거예요. 이것은 동물적 인 사랑입니다. 오늘 가정에서도 여 러분이 행복하시려면 내가 남편보다 잘 났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떨쳐버 려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들면 이 미 병든 것입니다. 남편의 훌륭한 것만 눈에 보이고 나는 오히려 너무 부족한 것만 느껴지는 가정이라면 그것이 아가페의 사랑인 줄로 믿습 니다. 내 잘난 것 있으면 남편의 그 늘에 숨겨버리고, 전혀 보이지 아니 할 때에 그 가정은 아가페의 사랑으 로 행복하게 됩니다. 오늘 왜 많은 사람들이 '나는 잘났는데 왜 저 사 람은 못났느냐, 나는 이렇게 잘하는 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못하느냐, 나는 이렇게 예쁜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못났느냐, 나는 이렇게 많이 배웠는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못 배웠느냐' 전부 자기 잘난 거예요. 자기는 올라가는데 다른 사람은 다 아래에 있는 거예요. 그것은 아가페 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는 파괴적이 고 일시적이고 에로스적인 사랑입니 다. 모두 그 사랑이 좋아서 밤낮으 로 찾아다니고 그 사랑을 얻으려고 생명 걸고 달려드는 것이 안목의 정 욕과 육신의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 에로스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4)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고 했 습니다. 자랑이라는 말은 장담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큰 소리 치지 않는다 말예요. 5) 교만치 아니하며 6)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무례라는 말을 헬라 원어에 보면 맵씨가 없다 는 말입니다. 사랑은 참 맵씨가 있 습니다. 사랑은 아주 아름답게 꾸며 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 게 거칠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자들 에게도 그런 말이 있잖아요. 마음씨, 솜씨, 맵씨, 얼굴 씨는 없습니다. 그 런데 현대인들은 아무것도 할 줄 몰 라요. 솜씨가 없고 마음씨도 맵씨도 없어요. 얼굴씨 하나만 가지고 얼굴 만 꾸미려고 해요. 그건 안되는 거 예요. 우리가 어렸을 때는 가정 주 부, 다시 말해 건강하게 가정을 지 키는 어머니들하고 기생들은 전혀 달랐어요. 딱 보면 금방 드러났어요. '아, 술집 아줌마구나' '기생이구나' 겉모습이 금방 드러났어요. 보면 알 아요.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전부 여기에 매어 달리는 거예요. 왜 이렇게 되었어요? 전부 다 동물 적인,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만족하 려고 보이는 것만 좇아가고 다른 것 은 다 버렸어요. 그래서 요사이는 남편이 부인에게 맞아서 병원에 입 원하고 매일 두들겨 맞는 남편이 그 렇게 많다는 이야기가 통계에 나왔 습니다. 나는 그걸 어떻게 때리는가 생각을 해봤어요. 꿇어 앉혀 놓고 때리나, 세워 놓고 주먹으로 때릴까, 태권도를 하는지 어떤 방법으로 때 려서 남편이 맞을까 하고 생각해 봤 어요. 어떻게 하는 건지 그것이 이 해가 안가요. 여러분, 무례히 행하 는 거예요. 이것이 사랑이 아니예요. 남자도 무례하고, 여자도 무례하고 그러면서 행복을 바라는 거예요. 사 랑은 정말 얼마나 조용하고 아름다 운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힘있 는 것이 사랑인지 모릅니다.
7)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이기적인 사랑은 참사랑이 아닙니 다. 8) 성내지 아니하며, 해를 받을 때 성질이 팍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 다. 조금만 어려우면 금방 얼굴에 드러나는 것, 사랑이 아니예요. 어머 니는 안 그렇잖아요? 9)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10) 불의를 기뻐하 지 아니합니다. 11) 진리를 기뻐합 니다. 12) 모든 것을 참습니다. 13) 모든 것을 믿어요. 아멘, 아멘 믿어 져요. 교회에 나와도, 기도해도 에로 스의 사랑으로 교회 다니는 분이 많 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있으면 믿 어집니다. 14) 모든 것을 바래요. 미 래를 바라보면 소망이 넘쳐요. 그러 나 에로스적인 사랑은 불안해요. 자 꾸 보험 들고 자기 개인을 향해서 뭔가 불안해요. 확실하지 않아요. 내 일이 어떻게 될지 항상 긴장하고 불 안해요. 여러분, 어머니의 사랑을 받 으면서 불안한 일이 있습니까? 사랑 은 불안한 법이 없어요. 이것이 인 간적인, 동물적인, 일시적인, 순간적 인, 쾌락적인, 육적인, 성적인 사랑 이기 때문에 불안한 거예요. 참사랑 은 항상 소망이 넘치는 거예요. 15)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 그랬어요. 이것은 적극적인 인내라고 말합니 다.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이것 이 사랑의 힘인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사 랑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 문에 가정을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 가정을 향하 여 수많은 환난, 시험이 닥쳐도 가 정을 넘어뜨릴 수 없는 것은 아가페 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이렇게 잘살고 풍부한데 도 가정이 고무풍선처럼 펑펑 터지 는 것은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기 때 문입니다.
마지막입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첫째, 8절을 보면
"사랑은 언제까지 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며 예언도 폐 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나"
예, 다 폐하지요. 방언을 언제까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까지 우리 가 지식을 가질 거예요? 다 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잠간일지라도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천국에 가서도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랑하는 이 사랑으로 하늘 나라의 삶을 살아가 는 것입니다. 둘째, 9절과 10에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 로 예언하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사 랑은 온전합니다. 다른 것은 다 부 분적입니다. 알아도 부분적으로 알 고 가져도 부분적으로 갖는 것입니 다. 사랑은 다 가진 것입니다. 사랑 은 다 아는 것입니다. 셋째, 11절을 보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 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 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지금 사랑의 가치를 말하고 있습니 다. 얼마나 사랑이 중요한가를 말하 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의 뜻은 인간적인 에로스의 사랑과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비교하면 애와 어 른과 같다는 거예요. 애들도 사랑하 지요. 소꿉장난하고 사랑하지만 일 순간 울고 버리는 거예요. 일순간 잊어버리는 것이 이 어린아이의 사 랑이에요. 장성한 사랑, 건강한 사 랑, 힘있는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 에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사랑의 풍년이 들고 사랑밖에 없는 것 같지 만 다 모든 만남이 어린아이의 만남 이에요. 그런 사랑 때문에 모두 어 제의 사랑이 다르고 오늘의 사랑이 다른 거예요.
넷째, 12절에
"우리가 이제는 거 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 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 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신앙생활도 사 랑이 없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20 년 교회를 나와도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해요. 옛날 그 구리 거울 처럼 말이죠. 하나님이 계신 것이 희미해요. 하나님께서 나를 택한 것 이 희미해요. 설교를 들어도 구원받 은 것이 희미해요. 왜? 사랑이 없기 때문이에요. 사랑이 내 안에 거할 때 확실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희미한 것이 다 떠나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1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 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 일은 사랑이라"
마지막 다섯 번째는 사랑은 제일이라는 거예요. 믿음도 물론 귀하고 소망도 귀하지만 사랑 은 최고라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사랑은 제일입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온전합 니다. 사랑은 장성합니다. 사랑은 확 실합니다. 사랑은 최고입니다. 사랑 은 첫째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이 내 안에 거하고 여러분 가정에도 그 사랑의 집을 지어서 영원히 주와 함께 복되 시기를 바랍니다.



어버이의 즐거움 잠23:19-25
2002-01-29 11:15:08   read : 813

몇 해 전에 신문에 기고되었던 내 용입니다. 한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스물아홉살에 그는 열네시간을 기 다려서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라고 말합니다. 그 부인이 산실에 들어가서 산고를 치르고 있을 때, 그는 문 밖에서 무려 열네시간을 기 다렸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려서 아 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리고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다 하 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른일곱살에 그 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들어가서 우등상장을 타왔을 때 그 걸 액자를 만들어서 방에 걸어놓고 쳐다 볼 때마다 그렇게 행복해했다, 누렇게 바래질 때까지. 마흔 여덟 살에 자식이 대학을 입학한다고 입 학시험을 치르게 될 때, 이 아버지 는 직장에 나가기는 했지만은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이렇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초조할 수가 없 었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초조한 시간으로 기억된다하는 얘기입니다. 쉰세살에 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아 버지 내의를 하나 사왔을 때, 쓸데 없는데 돈을 썼다고 일단 나무랐지 만은 밤이 늦도록 내의를 입어보고 또 입어보고 만져보면서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예순한살에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놈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웃 음을 짓고있는데, 나는 멀찍이 서서 나이 들었지만은 처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마음입니다. 그저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 있 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귀한 것 입니다.
유명한 기독교인인 맥아더 장군, 그의 '아들을 위한 기도'라고 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제가 이 시간 에 다 소개하지는 않습니다만은
"A Father's Prayer"
by MacArthur 라 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 첫마디가
"Build me a son"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내게 이런 아들을 주십시 오."라고 말이 시작되고 긴 기도문 이 있고 맨 마지막 말이 인상적입니 다.
"그리하여 나, 그의 아버지는, '내가 세상을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 다' 라고 속삭이게 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Then I, his father, will dare to whisper, 'I have not lived in vain"
아주 유 명한 이야기입니다. 난 늘 이게 기억 이 됩니다.
"그리하여 나로 '한 생 을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다' 라고 하게 해 주십시오."
보람과 의미가 바로 그 자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것만이 어쩌면 남는 일이기 때문 에, 그가 세계를 위하여 위대한 일 을 많이 했지만은 그건 그렇고 내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보 고 나는 세상을 헛되이 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 니다. 그것이 바로 어버이의 마음 입니다.
한국사람은 역시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적 효의 개념이 있습니다. 이 것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다분히 유교적 사상을 배경으로 해서 우리 가 젖었으니깐 그 속에서 가지는 생 각입니다만은 소위 한국적 효가 무 엇인가 한번 정리해 보십시다. 한 국사람으로서 우리 문화 속에서 생 각하는 효도, 첫째가 부모님을 장수 하도록 모시는 겁니다. 이유야 어 쨌든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자식에 게 있겠습니까만은 부모가 일찍 세 상을 떠나게 되면 그건 자식 탓이 요, 그래서 자식은 죄인이 됩니다. 내가 잘못 모셨고, 내가 속을 썩여 드렸고 내가 어쨌고…… 그래서 장 례식에 가 보면 제일 많이 우는 자 식이 불효자예요. 나 때문에 돌아 가셨다고 가슴을 치는 거예요. 그 래서 그 상복이라고 하는 것은 죄인 의 옷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님을 오래 살도록 모셔야 효자지 어쨌든 일찍 돌아가셨다면은 자녀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 됩니다. 그것이 바 로 한국사람의 효의 기본개념입니 다.
두번째는 편안하게 모시는 겁니 다. 그저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또 거처하는 곳, 평안하게 특별 히 마음을, 마음을 평안하게 모셔야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모 들이 이제 자식의 눈치를 봅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어른들이 자식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하 고 싶지 않은 게 있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말 세 마디가 있는데, 첫 째가 뭐냐 하면은 어떤 일이든지 아 프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발 안 아팠으면 좋겠는데 자꾸 아프 거든요. 아프다고 하면 자녀들이 귀찮을 까봐, 자녀들이 걱정할 까봐 아프다는 말하는 거 그렇게 싫다는 거예요. 어떻게든지 안 하고 싶은 데 그러세요. 이것이 부모님의 마 음이에요. 자식을 괴롭힐까봐……. 두 번째는 외롭다는 말을 하고싶지 않아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 해요. 그러나 사실은 외로워요. 자 식이 아무리 많아도 외로운 건 외로 운 거죠. 그러나 내가 외롭다고 하 면 저들이 뭔가 어머니를 잘못 모셔 서 외롭다고 하지나 않나, 할까봐 그 말을 하고싶지 않은 거예요. 외 롭지만은 외롭다고 못 하는 게 부모 의 마음이에요. 세 번째는 배고프 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또 어 느 때 좀 궁진해서 뭘 잡숫고 싶어 도 혹시라도 귀찮게 여기지나 않을 까 해서 배고프다는 말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세 가지가 하고싶지 않은 말이요 조심스러운 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부모님입 니다. 이제 이 분의 마음속에 슬픔 을 드리고, 고통을 드리는 것은 불 효입니다.
또 한국적 효도의 세 번째 개념은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겁니다. 그 래서 대를 이어가는 것이에요. 요 새 세계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비혼 이요, 둘째가 불임입니다. 바로 며 칠 전에는 로마 카톨릭 교황까지도 나서서 제발 자식들 낳으라고 아주 사정을 하드만요. 자꾸 인구가 주 니까요. 바로 이것이 망조입니다. 효도요? 누구든 좌우간 시집, 장가 안 갔으면 불효요. 부모님의 마음 을 아프게 했으니까. 또 갔으면 또 이제 뭐 어찌 못 낳는 거는 할 수가 없을지 몰라도 자식을 안 낳는 거 그거 불효입니다. 그런 줄이나 알 고 사세요. 그런데 이게 문제라고 요. 부모님의 마음은 그저 이유 불 문이야. 자기가 한평생 고생했어도 그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서 아들, 딸 낳고서 그 손자, 손녀를 품에 안 겨드리는 거 이보다 더 큰 효도는 없어요. 그리고 무슨 공부 많이 해 가지고 큰 일하겠다고 밖으로 나도 는 거 부모님의 마음 반갑지 않아 요. 효도는 시집가야되요. 그리고 가서 자식을 낳아 이게 효도라는 거, 이게 한국적 효입니다. 또 하나 는 가문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거 지요. 그래 옛날에는 과거를 보는 일이 있었지요. 가서 과거에 급제 하면 효자요, 허구헌 날 낙방하면 불효자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 도 안 돼. 가문의 명예를 높여야지 요. 그래서 오늘도 자식들이 공부 를 잘하고 하면은 그 아버지 어머니 는 그거 자랑하고 싶어서 그저 실례 가 안 될 정도로 돌아다니면서
"우 리 아들이 공부……. 어디 가서 뭘……", 그러지 않습니까? 이게 효도라는 거예요. 그런데
"제 아들 이요 삼수했는데 두고 봐야 알겠어 요."
이거는 불효라고요 이렇게 되 면은 그러니까 가문은 명예는 높여 드리는 것이 그것이 바로 효도입니 다. 이렇게 네 가지 개념으로 집약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은 부모님 을 즐겁게 하라. 즐겁게 해 드려라. 그리고 내 자신이 부모님의 길을 즐 거워하라. 기쁘게 해 드리라고 말 합니다. 역시 기쁘게 해 드리는 것 이 효도일 것입니다. 이런 웃지 못 할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옛 날 이조 시대에 어느 임금님이 서울 을 떠나서 개성을 좀 방문하게 됐습 니다. 개성에 거우동을 하게 됐는 데 온 방에 방을 부치고 소문이 나 니깐 어느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 는 나이 많은 어머니가 그 아들에게 요청을 하는 겁니다.
"내가 나라 임금의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한 번 도 임금님의 얼굴을, 용안을 뵙지를 못 했는데 죽기 전에 임금님의 용안 을 멀리서라도 좀 뵙고 그리고 죽었 으면 좋겠다. 그게 내 마지막 소원 이다."
그랬어요. 그래서 이 아들은 왕이 오시는 그 날을 기다렸다가 오 십리길을 어머니를 업고 거기 길가 에 나가 섰습니다. 그래서 임금님 이 지나갈 때에 잘 보이도록 이렇게 해 드렸어요. 임금님은 멀리서 이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돌아온 다음에
"그 때에 그 어 머니를 업고있던 그 사람 좀 불러들 여라."
그리고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나서
"너는 효자다."
그래서 금 백냥과, 쌀 한 섬을 상으로 주었답 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불효자 한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서 어머니가 원치도 않는다는 걸 억지로, 강제로 업고 나가서 또 그 길가에 나가서 왕을 뵈었다는 겁니다. 왕은 역시 또 불러서 상을
"금 백냥을 주라"
그랬는데 신하들이 말하기를
"임금 님이여, 그놈을 불효자랍니다. 효도 가 아니고 남이 그렇게 해서 돈 받 았다는 말을 듣고 이거 상 받으려고 어머니를 억지로 업고 나가서 그렇 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고로 상을 줄 것이 아니라 벌을 줘야 될 것 같 습니다."
임금님 하시는 말씀이
"효도는 흉내만 내도 좋은 거야. 그런고로 상주라."
그랬어요.
"흉내 내었더라도 좋은 거니 줘라"
결국 은 이 사람이 그 뒤에 뉘우치고 진 짜 효자가 되었답니다. 괜찮은 이 야기이지요. 여러분 효도는 흉내만 내도 괜찮은 거예요.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 다.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라고요. 존재의 가치를. 그의 지혜, 그의 경 험, 그의 사랑 그리고 그 깊은 잔소 리 속에 그 많은 잔소리 속에 중요 한 교훈이 있음을 인정하라는 겁니 다. 부모는 구제의 대상이 아닙니 다. 측은히 여기던가 불쌍히 여기 는 마음은 효가 아닙니다. 부모는 공경하는 겁니다. 존경이 없는 사 랑은 결코 효도일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귀찮게 여겨도 안됩니다. 일 본 동경에서 모였던 국제 심포지움 에서 이런 통계가 나왔습니다. 거 동이 어렵게 된 부모를 어떻게 하면 좋으냐?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학 생들을 상대로 조사를 해 보았는데 결과가 이렇게 나옵니다.
"양로원 에 보내야 됩니다."
그게 일본이 24%, 영국이 25%, 미국이 19%, 중 국이 9%, 한국은 0.4%. 한국, 소망 이 있습니다. 거동하기 어려운 부 모는 양로원으로 보내라. 이게 일반 적으로 25%입니다만은 한국만은 아 직도 0.4%. 그래도 한국은 아직도 효에 관한 한 모범 국가입니다. 그 래서는 않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 는 오래 살겠다고 보약을 먹고 운동 을 하고 발광을 합니다만은 그러나 여러분 잊지마세요. 성경은 오래 사는 비결 오직 딱 하나 가르쳐 줬 어요. 그것은 효도하라 그랬어요. 부모 박대하면서 오래 살길 바라지 마세요. 그건 비성서적이요. 사업 에 성공하겠다고 몸부림을 치나? 부모님 마음 슬프게 하면서 사업 잘 되리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저는 40년 목회 하면서 수없이 보아왔습 니다. 오래 사는 집, 거기에는 나이 많은 어머니가 계세요. 아주 성공 한 사람은 비록 잘못도 많지만은 그 분은 효자예요. 이건 확실합니다. 여러분 불효하면서 잘 되고, 불효하 면서 건강하고, 불효하면서 오래 살 고…… 기대하지 마세요. 효가 장 수와 형통에 철저한 비결이에요. 약속 있는 계명입니다. 제가 뉴욕 에 갔을 때에 제가 잘 아는 친구 분 이 계세요. 거기에 한번 오랜만에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나이 많은 어머니가 계세요. 제가 이 서 울에 있을 때에 그 분, 그 어머니를 가까이 지났거든요. 잘 아는 터이 라서 가자마자 어머니 어디계시냐고 그러니까 아 저 골방에 계신데 뵙지 말라고, 냄새나고 그런다고 그래요. 그런데 제가 거기서 이야기하고 있 는 동안에 어머니가 자꾸 보고싶어 서 문을 열어요. 문을 여니까 또, 가서
"어머니 가만히 계세요."
문을 꽝 닫잖아요. 그걸 내가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웬만하면 내가 분위기를 위해서 그 냥 있으려고 했는데 안되겠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서 어머니를 뵜더 니요, 그 어머니가요 얼마나 슬피 우는지요. 내가 곽목사님 온다는 말을 듣고 뵙고 싶었는데 아이들이 나를 못 만나게 했다고…… 그러면 서 우는 어머니를 보았어요. 여러 분 이렇게 업신여겨도 되는 겁니까? 어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할 작정이 요. 구제 대상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지 마세요. 높이 존경하고 그 지혜와 경험과 그 거룩한 본을 우리 가 존중해야되요. 어느 사람은 논 문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스 라엘 나라가 강한 이유? 오직 하 나,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기 때문이 요. 그리고 전승을 중요하게 여겨 무슨 말하다가도
"이거는 조상 적부 터 내려오는 전승이요, Tradition"
하면 꼼짝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 에 강하고 그러기 때문에 지혜롭다 는 것이에요.
또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 니다. 효할 수 있는 길은 의인이 되 야 하는 거예요. 의롭게 살아야 됩 니다. 부모님의 마음이라는 것은 깊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높은 도덕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들이 잔소리가 많고 그들이 간섭 이 많은 이유도 사실은 다 그 깊은 곳에 심리적 이유가 있습니다.
"나 는 선하지 못했다 그러나 너는 선하 라. 나는 공부를 열심히 못했다 너 만은 좀 열심히 해다오."
보상적 심 리가 있어요. 또 나는 의롭지 못했 다 그러나 너는 의로워야 한다는 거 예요. 그래서 부모님의 마음은 언 제나 선한 것이예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잔소리도 많고 조 금은 지나칠 때도 있어요. 말씀은 다 안하고 있지만은 그런 후회가 많 아요. 과거의 후회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랬다만은 너는 제발 이래다 오."
이것이 부모님의 마음이요. 그 런고로 효의 지름길은 내가 의롭게 사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보상해 드려야 하니까요.
또 하나는 지혜로운 자가 되야 한 다고 성경 말씀은 증거하고 있습니 다. 그래서 오늘 20절로부터 보면 은
"술을 즐기는 자와 사귀지 마라. 게으른 자와 사귀지 말라. 단정히 행하고 지혜로운 자가 되라."
그리 고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듣는 지혜를 가져야 되요. 청종하는 지 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를 잘 믿는 것, 그리 스도인으로 성실하게 사는 것이 효 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소원은 우리가 오래 사는 것이에요. 그런 고로 신앙생활 잘해서 영생의 기업 을 얻으면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 드 리는 거예요. 우리가 지혜롭게 살 아서 모든 일에 실수없이 행하면 부 모님께 직접적으로 효도하는 일이 된다는 말입니다.
또 한가지는 오늘 성경이 증거하 시는 것은
"내 길을 즐거워하라."
그럽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길은 부모님의 길, 그의 선 택, 그의 철학, 그의 이상, 그의 살 아온 생을 내가 기뻐해야 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 은 마음속에 지금 무언가 잘못 살았 다고하는 그런 후회가 있습니다만은 자식의 행위를 통하여,
"아닙니다. 부모님은 잘 살았습니다. 성공적으 로 살았습니다. 훌륭하게 살았습니 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예요. 뭐 그따위로 살았느냐고 말하지 말고요. 훌륭하게 살았다고 하는 그런 말을 듣고싶은 거예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 컨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 브라함 링컨 자신도 초등학교 좀 다 니다 말 정도예요. 학문이 없는 사 람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까 그 고고하고 지식 많고 귀족들이 아브라함 링컨을 헐뜯기 위해서 그 반대파에서 끝까지 괴롭히는 거예 요. 대통령이 되고 처음으로 상원 에 나가서 연설을 할 때, 어느 국회 의원이 그랬답니다.
"당신 같이 무 식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모시게 된 것이 우리의 다시없는 불행이라 고……"
이런 모욕을 주고 또,
"당 신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 이요 그런 사람의 아들, 그런 천한 사람의 아들을 우리가 대통령으로 모시게 됐다"고 해놓고 구두를 벗어 서 들고, 이 구두도 당신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거라고 그랬어요. 아 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대단히 감사 합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아버지를 기억나게 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저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직업에 충실했고 구두를 잘 만드는 분이셨 습니다. 내가 어깨 넘어로 배운바 가 있으니 당신 구두가 고장나거든 가져오시오 내가 수리해 드리겠습니 다."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여러분
"내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입 니다."
떳떳하게 자랑을 합니다. 이것이 효도라는 거예요.
"내 아버 지는 머슴이었습니다. 내 아버지는 머슴이요, 나는 그 아들입니다."
자 랑할 수 있어야 되요. 아버지의 직 업, 아버지의 선택, 아버지의 삶, 어 머니의 살아온 생에 대하여
"잘 하 셨습니다. 훌륭하셨습니다. 그 하 시던 일을 나는 존경합니다. 나 거 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 하려 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효도 예요. 부모님으로 하여금 살아온 생에 대하여 후회하게 만들어서는 안돼는 거예요. 그걸 자랑하게 만 들 수 있도록 부끄러운 일생을 자식 이 보상해 주어야 됩니다. 이보다 더 큰 효도는 없어요.
여러분 효가 복 그 자체입니다. 효가 있는 가정이 복됩니다. 효가 복의 근본입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여러분, 자녀교육을 바로 하고 싶습니까? 효도하세요. 그리 고 내버려둬도 자녀들은 저절로 훌 륭하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부모 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내 자식 잘 되기를 바라지 마세요. 그런 일 은 없어요. 그런고로 부모님을 즐 겁게 합시다. 효는 문화의 유산이 아닙니다. 효는 이 나라의 단순한 도덕이 아닙니다. 이건 성경적 진 리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이 크나큰 원리와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가정의 관계를 정립합시다 엡5:31-6:9
2002-01-29 11:16:05   read : 214

31절 :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 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 체가 될지니 32절 :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 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절 :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 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1절 :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 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절 :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 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절 :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 수하리라 4절 :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 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5절 :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 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 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6절 : 눈가림만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7절 :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 라 8절 :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 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 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9절 :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 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 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출발을 합니다. 그래서 이 관계가 바로 되면 행복하고 이 관계가 제대로 되지 못하면 불행해 지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정은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 도 있습니다. 사실은 부부 사이는 너와 나. 남남이 아닙니까? 하나의 부부라는 관계를 맺게 되어 이 관계 속에서 출발하는 부부, 또 부모와 자식으로, 한 가정을 이루고 우리 직장에서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이 런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립이 라고 하는 건 무슨 뜻이 있냐하면 옛날 제가 시골에 살아서 보기도 했 고 알기도 하였지만 마당에서 솥을 걸고 음식을 만들 때 둥그렇게 쇠로 띠를 두르고 그 다음에 다리 세 개 를 세우지 않아요? 그렇게 하고 그 위에다가 솥을 올려놓는 거예요. 그 렇게 하고 마음대로 불을 때서 음식 을 만듭니다. 그 세 발이 정확한 위 치에 든든히 서 있을 때 그걸 정립 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그 중에 다 리 하나가 약하거나 없거나 하면 반 드시 넘어지고 쏟아지게 됩니다. 그 세 다리가 대립하여 제자리에서 제 구실을 해 줄 때 이것을 정립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해마다 5월 첫 주일은 가정 주일로 지키는 날입 니다.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 상고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부부의 관계를 정립합시 다(5:31-33).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 에 온갖 좋은 것들을 다 갖추어 놓 았습니다. 그리고 남자 아담을 만들 었는데, 그렇게 좋은 동산에 남자 하나가 다니면서 외롭게 지내고 있 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너무 좋 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 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잠들었 을 때 갈빗대를 뽑아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로 끌어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혼 자 사는 것은 안 좋다. 그리고는 여 자를 아담 남자에게 이끌어 오시니 라는 말씀은 아담에게 가장 적합한 여자를 끌어다가 짝을 지어 주셨다 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나에게 두고 생각해 보면 김창인이라고 하 는 남자에게 김기옥이라고 하는 여 자를 이끌어 오시니. 이 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자면 이 세상에 많은 여자가 있는데 하나님 이 여자 하나를 꼭 집어서 나에게 짝을 지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러니까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면 좋습니다. 김창인이라고 하는 사람 에게 가장 적합한 여자는 바로 이 여자다 하여 짝을 지어 준 것입니 다. 여러분에게는 이 여자가 이 세 상 그 많은 여자 중에서 가장 나에 게 적합한 여자이기에 하나님이 골 라 주셨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여 자와 짝 지어 진 것이 그렇게 복되 고 기쁨이 되는 겁니다. 또 그 여자 에게는 이 남자가 좋다 하고 짝을 지어 주셨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 여 한 몸을 이룰지니라 라고 말씀하 십니다. 그러니까 남자가 부모 떠나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혼하게 되 면 부모는 내 보내라 그런 뜻이기도 합니다. 즉 간섭하지 말라는 말씀입 니다. 지금까지는 결혼하기 전에 아 들이 월급을 타 오게 되면 전부 어 머니한테 갖다 바치지 않았어요? 결 혼해서 제 마누라를 맞이하게 되면 이제는 관여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이걸 자꾸 관여를 하다 보니까 시어 머니와 며느리가 문제가 심각해 져 서 고부간의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 니까? 일단 내 아들이지만 장가를 보내면 남의 남편이 됩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자기 남편이 벌어 온 것 이나 쓸 일이지 남의 남편이 벌어 온 것을 왜 가로채서 쓰려 합니까? 아들에게는 엄연히 제 아내가 있는 데 말입니다. 제발 그렇게 하지 마 십시오. 서양 사람들은 결혼 시켜 놓으면 절대 간섭 안하고 알아서 생 활하도록 합니다. 한 집안에 살지라 도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부간의 갈등이 없는 것입니다. 그 리고 그 다음에 결혼하게 되면 부모 를 떠나 라는 말씀은 경제적으로 독 립하고 자립해서 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 라고 하셨습니다. 이둘 사이에 시어 머니가 끼어 들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이에 올케가 끼어 드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 둘이 한 몸이 되라 고 하셨는데 여러분 천년을 함께 살 아보세요. 한 몸 됩니까? 내가 밥 먹었다고 아내가 배부르냐는 말입니 다. 똑같이 함께 먹어야 되지 않습 니까? 그런데 어떻게 한 몸이에요? 그러나 이것은 한 몸처럼 살아가라 는 뜻입니다. 한 몸이라는 것은 목 표가 하나 아닙니까? 삶의 방법이 하나가 아닙니까? 또 주머니가 하나 아닙니까? 믿음이 하나입니다. 빨리 하나가 될 때 두 부부는 행복해 진 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 정의 제도. 즉, 부부로 짝을 이뤄 복 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셨다. 이 것이 부부라는 얘기입니다. 이 부부 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은 이상과 같 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1절부 터 33절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 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 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 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 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고 하였습 니다. 그러면 부부가 하나 되는 비 결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여자 하와를 만들어 남자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그 때 하는 말이 이는 내 살 중의 살이 요 내 뼈 중에 뼈로다. 즉 나와 불 가분의 관계. 내 살이요 내 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내 사랑하기 를 내 몸처럼 아끼고 귀히 여기고 사랑해 주라. 그런 말이 아닙니까? 우리는 내 살을 얼마나 귀히 여깁니 까? 조금 찢어져서 피만 나오면 야 단입니다. 그 다음에는 뼈가 상할까 봐 얼마나 신경을 쓰고 귀히 여깁니 까? 아내를 꼭 쥐면 터질세라 건드 리면 깨질세라 그렇게 내 몸처럼 아 끼고 사랑해 주는데 하나되는 비결 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로는 아내는 남편을 경외하라고 하 였는데 경외라고 하는 말은 신하가 임금에게 쓰는 말입니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쓰는 말입 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아내가 남편을 그렇게 경외하라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남편 알기를 왕같이 알라. 남편 알기를 하늘 같 이 알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 알기를 발바닥처럼 여겨보십시 오. 그렇게 되면 하나일 수도 없고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래서 사랑과 경외가 하나되는 비결입니다. 이것 이 바로 부부관계를 바로 정립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부부간의 관계가 사랑과 경외로 정립이 될 때 행복한 부부가 됨을 명심하셔서 여러분들의 부부 사이의 좋은 관계가 되어지기 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부자의 관계를 정립합 시다(6:1 ∼ 4). 부부간에는 뒤틀리 면 헤어진다고 하지만 부자 관계는 헤어질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자 사이가 뒤틀려서 평생 원수 같 이 지낸다면 이것은 좋지 않은 부부 보다 더 심각한 겁니다. 그래서 부 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바로 되야 되 는 겁니다. 그때 그 가문이 서게 되 는 겁니다. 그러면 본문으로 돌아가 서 1절부터 4절까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 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 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 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 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자녀들아 부모를 공경하라. 돈 벌어 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할 때만 잘 공경하라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나이 많아 돈 한 푼 못 벌고 오히려 자녀에게 신세를 질 때도 똑같이 공경하라는 말씀입 니다. 만약에 여러분들 가운데 부모 가 주책부리는 그런 분 없어요? 주 책 부리면 내가 기저귀 차고 오줌 똥 못 가리고 밤새도록 울고 보채며 자기만 위해달라고 하던 그때처럼 부모가 주책을 부립디까? 내가 부모 에게 주책 부린 것은 생각도 안하고 열 배나 더한 주책 부린 주제에 부 모가 조금 그런다고 꼴 보기 싫다하 고 모시기를 싫어하는 자식.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실 복이 무엇 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이 땅 위에 태어났고 존재하는 자체가 부 모의 은혜 아닙니까? 핏덩어리를 내 다 버렸으면 어떻게 했을 겁니까? 나를 낳아 주셨고 또 이만큼 키워 주셨고, 가난해서 공부를 못 시켜 고학해서 내가 성공했을 망정, 여러 분 그것이 전부 다는 아니지 않습니 까? 고학해서 공부했다는 것보다 그 동안에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큽니 까? 가난한 부모일 지라도 조금도 차별하지 말고 공경하라는 겁니다. 즉 부자인 부모에게만 아니라 가난 한 부모에게도 공경하라는 겁니다. 건강한 부모가 아니라 병든 부모에 게도 공경하라는 겁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축복이 약속 됐다는 것인데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되리라 했으 면 되는 것 아닙니까? 장수하면 그 것도 축복이 아닙니까? 더 이상 복 이 어디 있습니까? 복이란 복은 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함과 동시에 부 모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고 본문은 말합니다. 한마디로 믿음 을 잘 키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부모는 학교 교육에서 일 등 하면 부모로서 할 일 다했다고 할 지 모르지만 우리 믿는 부모는 그게 아닙니다. 학교에서 일등 하면 더 좋습니다. 회사에서 일등 하면 더 좋습니다. 그러나 그 것보다도 내 아들 딸 들을 믿음으로 키웠다는 것이 더 큰 성공이요, 기쁨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해도 좋고 못 해도 좋 습니다. 믿음으로 키웠다면 믿음의 부모는 정말 최선을 다 한 부모입니 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녀들을 꼭 믿음으로 키워야 됩니다. 그래서 여 러분 공경과 믿음으로 키우는 양육. 이 두 가지가 바로 될 때 부자 관계 는 바로 되고 정립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그 가정에 행복이 있고 그 가문에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 분들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좋은 관계를 정립해서 약속된 축복을 받 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상하 관계를 정립합 시다.(5∼9) 5절부터 9절까지
"종들 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 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 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 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 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 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옛날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에 편지 할 때에는 종의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이 있었고 상 전이 있었습니다. 즉 주종 관계입니 다. 다시 말하면 계급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계급 제 도가 엄격했는데 계급이라는 것은 사람 위에 사람이 있고 사람 아래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 늘날에는 민주국가에서는 계급이라 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계급 이라는 것은 없지만 계층이라는 것 은 있습니다. 그래서 계층이라는 것 은 일을 할때 위에서 일 하는 사람 이 있고 아래서 일하는 사람이 있다 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의 관계일 뿐이지 사람 자체가 위아래 라는 말 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 이 직장에 나가서 일 할 때 처음에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일을 할 때 계 장도 있고 과장도 있고 부장도 있고 이사도 있고 사장도 있고 그러지 않 습니다. 모두 평사원이라면 일을 못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위해서 위가 있고 아래가 있습니다. 그래야 제대로 일이 돌아가고 일을 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니 라"
하면 일을 못 하는 겁니다. 이 까닭에 이것은 사람 자체가
"위"라 는 말은 아닙니다. 일에 위아래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입니다. 옛날의 종의 제도가 있어서 주종관계의 조 화를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오 늘날 우리는 계층간의 조화를 말한 다고 보시면 됩니다. 본문에 보면 종들은 상전 섬기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하였습니다. 종들은 주 인을 꼴 보기 싫은 존재로 여기지 말고 예수님이라 생각하라는 뜻입니 다.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를 생각 해서 섬기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상전들아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은 만약에 내가 예수님의 입장 이라면 즉, 예수님이 내 입장이라면 종들에게 어떻게 했을까? 그렇게 생 각하고 종에게 하라는 겁니다. 그렇 게 하면 그 행한대로 하늘의 아버지 께 받는다는 말씀도 첨부하고 있습 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한 마디 로 요약하면 종이나 상전이나 예수 님을 표준 하라는 뜻입니다. 즉 예 수께 하듯 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얼마나 상하 관계가 좋겠습니 까? 예를 들어 직장에 나가 아랫사 람에게 예수님이라면 내가 어떻게 할까? 그 결과는 뻔하지 않습니까? 또 아랫사람이라면 즉 예수님이 그 위치에 계시다면 내가 어떻게 할까? 를 생각하고 처신할 때 상하 관계가 잘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 회사는 정말 복 된 회사요, 가정에서도 윗 어른이 있고 아랫사람이 서로 그리 스도께 대하듯 하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 자체가 위, 아래는 아 니지만 그리스도를 대하는 마음으로 윗사람을 대하고 아랫사람을 대하면 얼마나 상하 관계가 아름다우냐는 말입니다. 이런 가정에 행복이 있고, 이런 사회가 복되고 잘 되는 것입니 다. 여러분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이런 상하 관계를 바로 정립하여 복된 가정과 잘되는 집안 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좋은 관계 엡6:1-4
2002-01-29 11:18:15   read : 459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 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오늘은 참 좋은 날 입니다.
모처럼 온 가족이 함께, 또 한자리에서, 그리고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가장 많이 희생된 것이 가정 입니다. 모두 뿔뿔히 흩어져 버렸습니다. 서로 만날 수가 없습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까 형제애도 멀어져 버렸고, 부모에게도 마음이 멀어진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모처럼 이렇게 함께 모여서, 한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니까 어떻습니까. 오늘은 다른것 생각하지 말고 가정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특히 부모만을 생각해 보고, 자녀들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어떤 관계 입니까. 세상에 이 보다 더 좋은 관계, 더 좋은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은 다음의 몇가지를 꼭 생각해 보시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부모는 나의 생명의 전수자다" 하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 부모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요. 생각이 이쯤되면 부모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부모님은 참 고마운 분 입니다.

저는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다는 것만도 축복이고, 행복이고, 기쁨이라고 생각 합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이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없어봐야 부모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게 됩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이름이 아버지고, 어머니라는 이름 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얼마나 정답고 소중한 이름 입니까.

연산군은 어머니 없이 자랐습니다.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는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어린 연산이 하루는 밖에 나가서 놀다 들어 왔습니다. 아버지 성종이 어린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밖에 나가서 무엇을 보고 놀았으냐" 그 때 어린 연산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송아지가

어미소를 따라 가면서 엄마 하고 부르며 따라가는 그 모습이 그렇게도 부러웠습니다", 그 말에 성종은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관계 입니까.

그래서 성경은 말씀 하시기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첫째 가는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마땅히 공경 받아야 할 대상 입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 입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모 공경함을 율법에 못을 박아 놓으신 것이며 그것이 이 세상에소 복을 받는 일이라는 것을 밝히 말씀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그거이 가장 기본적이 도리이며 축복의 삶입니다.



두번째는 "자식은 상급" 이라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아무리 존귀한 존재라고 해도 혼자서는 존귀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있기 때문에 존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자식은 "상급" 이라고 했고 "열매" 라고 했습니다. 자식은 분명 상급 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힘이고, 열매 입니다. 자식이 있어야 어딘지 모르게 힘이 있고, 든든하고, 안정이 됩니다. 그래서 모두 힘이 들어도 자식을 낳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부모님들이 자식을 자랑하는 것을 들어 보십시요. 옛날에는 여편네 자랑을 왼병신이라고 했고 자식 자랑은 반병신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생각해서 여편네 자랑은 왼병신일런지 모르지만 자식 자랑은 병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견하게 여기고,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 입니다. 그게 부모의 솔직한 마음 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아내는 남의 아내가 예뻐 보이고 자식은 자기 자식이 최고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들의 하결같은 마음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귀하고 소중한 자식을 귀여워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있어서는 그만큼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 는 것 입니다.



여러분, 이 두 관계는 좋은 관계로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는 이 관계가 수난을 당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외면 합니다. 어떤 자식들은 부모를 버리기 까지 합니다. 또 어떤 부모는 자식을 버리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아주 슬픈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어떤 관계인데 이렇게 까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이 관계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관계 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두가지 점에 유념해야 합니다.



첫째는 자식은 부모 공경으로 할 일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이 가장 값이 주어지고 권위가 생기는 것은 부모를 알고, 부모를 공경할줄 아는데서 발생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을 했고, 잘 살고, 출세를 했다고 해도 이것이 잘 않되어 있으면 그것은 출세도 아니고, 성공도 아닙니다. 사람은 이 관계가 잘 되어야 떳떳하고 그 권위를 인정 받게 됩니다.

여러분, 김대통령을 보십시요. 다른 것은 잘 모르겠는데 그분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만큼은 이름난 분 입니다. 그분은 타고난 것 같습니다. 다른 것

다 잘하고 이것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분이 복을 받는 것이고, 사람들이 그분을 좋아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권위 입니다.

자녀들은 이것을 잘 해야 복을 받습니다. 이것이 잘 않되면 아무리 오늘 잘 살아도 그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오늘만 날 입니까. 먼 훗날 까지 내다 보면 불효자는 복을 받지 못 합니다. 오늘에 심지 않은 사람은 내일에 가서 거둘 것이 없다는 것은 성경이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인생의 질서 속에 제시된 대원칙은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복의 근원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 하기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생의 질서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질서이기 때문 입니다.

부모, 이것이 보통 단어 입니까.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경쟁세상에 나가서 노심초사 하시는 아버지, 또 아이 다섯을 낳고 여섯을 낳은 어머니, 그것도 부족해서 여덟을 낳고 열을 낳은 어머니, 열번째 낳은 아이는 젓을 먹일 때 등에서 내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때 쯤에는 어머니의 젓이 사정 없이 늘어져서 등에 엎힌 아이에게 직접 입에 물려줘도 충분할 만큼 늘어져 있습니다. 그 말은 몸이 몹시도 망가져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속이 모두 비어 있다는 말 입니다. 알맹이는 모두 빼 내 주고 자신은 빈껍데기만 가지고 사신다는 말 입니다.

이것이 부모입니다. 부모라는 존재는 자식에게 이같은 본재입니다. 그래서 잠언 23:22절을 보면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잠23:22)고 했습니다. 또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첫째가는 계명이요 네가 잘 되고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그 고마우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부모는 삶으로 권위를 지켜야 합니다.



효가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고 해도 그 효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들은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않됩니다. 옛날에는 자식들에게 명령만 하면 들어 먹혔는데 오늘은 그게 잘 않됩니다. 오늘은 민주화 시대가 되다 보니까 대통령의 권위도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이제는 명령해서 될 세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모님들도 오늘 권위를 지키려면 다음의 몇가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부모님들은 먼저 이 시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자꾸만 고부간에, 자식간에 불화가 잦은 것은 부모님들이 이 시대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지금은 20세기가 지나고 21세기의 문턱에 와 있는 시대 입니다. 옛날 시집살이 하던 그 때를 생각하고 자꾸만 고집 피우지 마십시요. 그것은 지혜스럽지 못한 행동 입니다. 아들이나 며느리는 이 시대에서 교육을 받았고,이 시대의 물을 마시고 큰 사람들 입니다. 내 마음에 들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또 노년에 이르게 되면 분별력이 상실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노년에 이르게 되면 쉽게 노여워 하고, 서운해 하고, 자기 고정관념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 고집만 늘어나고, 이해력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자식들에게 쓸데 없이 서운한 마음만 많아 지게 됩니다. 그래서 불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구시대의 고정관념을 빨리 이 시대에 맞게 고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식들 하고 싸우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고, 또 서운한 것을 극복하고 살 수가 있습니다.

어떤 권사님이 아들 딸이 살고 있는 미국엘 갔습니다. 결혼해서 살고 있

는 아들 집에 가서 밥을 먹는데 며느리가 밥상을 가져오더니 시어머니 하고 겸상을 해서 밥을 먹고 앉아 있고 아들은 밥상 옆에서 아이 우유병을 들고 앉아서 젓을 먹이고 앉아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까 기가 막힙니다. 이 자식을 어떻게 키워서 미국에 보냈는데 오늘 와 보니까 이 모양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속에서 솟아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참는데 그것을 참느라고 예수님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것을 생각하면서 참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날이 밝자 마자 기분이 나빠서 딸네 집으로 갔습니다. 저녁 때 밥상이 들어 오는데 딸은 어머니하고 겸상을 해서 밥을 먹고 앉아 있고 사위는 밥상 옆에서 아이 젓을 먹이고 앉아 있습니다. 이 장모님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까 얼마나 보기에 흐뭇했던지 전날 기분 나빴던 것 그 저녁에 다 풀었다고 합니다. 이 권사님은 그런 생각가지고 살면 마음 편안할 날 하루도 없습니다. 그분의 이 시대를 너무나 모르시는 분 입니다. 그것은 그 사회에서 지극히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 시대, 그 사회를 알면 화낼 일 전혀 없는 일 입니다.

또 사람이 노년에 이르게 되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말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병 입니다. 말이 많다보면 할 말만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말이나 마구 해 댑니다. 눈치도 없습니다.이미 조금 전에 한 말을 또 합니다. 좋은 말이 아니고 푼수 없는 말씀도 자꾸 하십니다. 그것이 노년의 현상입니다. 사람이 노년이 되면 이렇게 말씀이 많아 집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어떤 노인학자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연구를 했는데 이런 이유에서라고 합니다. 사람이 노인이 되면 몸에 있는 모든 힘이 모두 입으로 모인다고 합니다. 노인은 무릎에도, 허리에도, 가슴에도 힘이 없어지고 입만 힘이 있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이 많다는 것은 아직 힘이 있다는 증거 입니다.

젊은이들은 바로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이 말씀이라도 많아야지 그것 조차도 없어지면 그것은 거의 끝나간다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말씀이 너무 많으셔" 그것은 좋은 징조 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힘이 있으시다 그 말 입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이 어느 날 갑자기 말씀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고 합시다. 그것은 가실 때가 다 되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면 곧 돌아 가십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젊은 며느리들이 유념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늙으신 부모님으로 하여금 이웃에 죽이 잘 맞는 할머니가 계시거든 두 며느리 끼리 짜고 두 노인을 자주 만나게 해서 하루 종일 이야기를 많이 하게 해 드리십시요. 그러면 건강을 오래 유지해서 오래 사실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말씀이라도 많은 부모님이라도 계시면 좋겠습니다. 요즘에는 부모님이 그립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도 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허전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나이가 들고, 늙어 갈수록 분별력을 잃지 말고 권위를 지켜 살아야 합니다. 오늘 가족들이 자꾸만 분산되고, 집안에 자꾸만 갈등이 생기는 것은 부모 책임 입니다. 부모가 권위를 잃어서 구심점이 상실되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모두 늙습니다. 노인을 무시하면 않됩니다. 노인은 힘이 없고, 능력도 없고, 분별력도 없기 때문에 업신여기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노인들의 그 움푹 패인 주름살을 깊이 들여다 보십시요. 그 속에 지혜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 속에 경륜과 역사가 들어 있습니다. 오늘 젊은이들에게는 힘도있고 패기도 있어 좋긴 하지만 이같은 지혜와 경륜과 역사가 부족 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실패를 하고 경솔한 행동을 하고 그럽니다.

다만 오늘을 사시는 노부모님들은 노년의 삶에 권위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해도 다 큰 자식에게는 부모도 예의가 있어야 하고, 체통을 지켜야 하고, 권위를 스스로 지켜야 합니다. 앙드레 지드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아름답게 죽는 일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노년의 삶을 더 세련되게, 경건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유산이 따로 없습니다. 좋은 집을 물려 주는 것만 유산이라고들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노년의 삶을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볼 때 "나도 아버지 처럼은 돼야지" 생각하게 하는 이것 보다 더 좋은 유산은 없습니다. 며느리가 볼 때 "나도 어머니의 신앙 반만이라도 따라 가야지" 이 보다 더 큰 권위는 없습니다. 이것이 유산 중에서 가장 좋은 유산인 것입니다.

여러분, 참 인생의 깊이나 무게는 노년에 가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값을 잃은 노년의 삶은 젊어서 아무리 화려했고, 성공했고, 빛이 났어도 초라한 법 입니다. 그렇지만 젊어서 한때 방탕을 했던 사람도 노년에 가서 성숙한 인생을 살게 되면 젊었을 때의 방탕도 미담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권위 있는 인생 입니다. 그런 부모는 젊은 자식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탁해졌어도 그런 부모는 무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년의 삶은 경건해야 합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을 맞이 해서 부모와 자녀들에 대해서 생각 해 보았습니다. 부모는 공경의 대상 입니다. 부모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 보다도 우선해서 공경 받아야 할 존재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도 분부하신 것입니다. 성경이 힘주어 강조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부모는 자녀들에게 있어서 권위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권위를 상실하게 되면 가정이 산산이 분산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노년의삶이 초라해 집니다. 부끄러워 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강조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적용되는 말씀 입니다. 이 관계는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변치 않는 관계이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가정과 천국의 신비 엡5:31-33
2002-01-29 11:19:15   read : 412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31-32절)

왜 부모를 떠나는가? 그것은 부모를 떠나서 또 하나의 새로운 관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는 세상을 떠나서 예수를 만나는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이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서 관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만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그래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면 내가 그의 신부가 됩니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종의 관계, 아들의 관계, 신부의 관계가 있는데 이 세 관계는 다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내가 종이 되어서 일하게 됩니다. 이 관계는 일의 관계입니다. 충성하고, 섬기는 관계며,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도 듣고 충성된 종으로서 상도 받고, 면류관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면 내가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또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됨의 권세를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를 받아서 천국에 가는 유업을 받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고 사랑을 나누면서 교제하고, 행복을 얻는 관계입니다. 종으로 일할 때는 삯을 받고 칭찬을 받으며 아들로 믿게 될 때는 거기에서 유업을 받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신랑 신부의 관계가 되면 사랑의 관계를 형성해서 행복하고, 교제하면서 인격적인 만남을 이룹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명령의 관계고, 순종의 관계며, 일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보호의 관계이며, 돌봄의 관계이며, 유업을 받는 관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신랑 신부의 관계는 일대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이 관계는 철저하게 서로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여기에서만 진정한 행복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성장의 단계를 보면 처음에 하나님을 만날 때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만나서 주인에게서 무엇을 얻습니다. 또 도움을 받습니다. 조금 더 은혜를 받으면 내가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는 위대한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마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성숙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전부가 되어서 마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고 교제하듯이 하나님과 교제하므로 행복을 얻고 만족을 얻으며 기쁘게 살아가는 관계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연합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은 주인과 종의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종이고, 모세도 종이며, 여호수아, 이사야 모두 종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연합하듯이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격적으로 성숙하면 신랑 신부의 관계로 일생을 살 듯이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 때 우리의 심령속에 하늘의 천국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1-33절)

먼저, 둘이 한 몸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연합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연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연합은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통을 상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형상을 따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고 창세기 1장 27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자 혼자만의 형상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만날 때 하나님의 형상이 내게 온전히 나타나게 됩니다.

남녀의 연합은 결국 신비한 비밀인데 천국의 즐거움, 기쁨을 땅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 남녀의 연합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신비하게 봐야 합니다. 부부의 만남은 남녀의 성적인 만남이며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지으시고 우리의 성이 그 인격을 표현하는 도구라면 부부는 인격적으로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일대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우리가 회사에 가서 사장과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권위상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보호자의 입장에서 자녀는 약한 존재로 섭니다.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일대일의 존재는 안됩니다. 빈부, 학력, 인물, 모든 것에서 비교되는 차등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부부는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나는 유일한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대일의 인격으로 만나는 것은 부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 앞에 있는 아내는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다 받고 있습니다. 남편도 그 아내 앞에서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존엄성이 깨질 때는 그 가정은 이름만 남게 됩니다.

마이크 메이슨이라는 사람이 쓴「결혼의 신비」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가정생활의 고전적인 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듯 진정한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됨의 신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됨의 신비에 이르듯이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님과 하나됨의 신비를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이런 해석을 내렸습니다. '부부의 관계로 경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과 헌신으로 하나되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4-25절에 보면 부부가 연합하기 위해서 옷을 벗었다고 했습니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 전 존재를 진실하게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또 연합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최상의 헌신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의 만남은 진실과 헌신입니다. 이 이상의 헌신이 없습니다. 이 이상의 진실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자기 존재를 벌거벗은 존재로 진실하게 내놓아야 되며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듯 헌신하는 것은 이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고전 7:3-4절에 보면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는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연합을 위해서 자기 존재를 내어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함께 잠을 자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자고 남편은 건너방에서 따로 자는 것, 이것은 성서적인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집안에 서재를 꾸며놓고 혼자 거기에서 연구하고 잠자는 것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연구했으면 잘 때는 같이 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건강상의 이유나 특별한 기도를 위해서라면 허락을 받고 하라고 성서가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 여 집사님이 12시에 철야하러 왔어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오셨느냐고 했더니 아이 대학 진학을 위해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어서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백일기도는 새벽에 해도 됩니다. 자식 대학가는 것 가는대로 내버려두어야지 백일기도 한다고 떨어질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격을 세워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실력없는 것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서 주무시죠." 자야 할 자리에 가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라고 제가 집으로 보내드린 일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부부는 서로 존경과 사랑으로 연합해야 됩니다.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3절)

인생이 육체가 연합되었다고 그것으로 일생을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도 쇠합니다. 정욕도 갑니다. 육체의 연합도 식어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견고한 연합만이 일생을 강한 끈으로 연합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고 혼자 웃었습니다. "아내가 예뻐보일 때..." 이런 제목의 글인데 20대 후반은 남편을 위해서 예쁜 아기 낳아줄 때 아내가 예뻐보이고, 30대 후반은 좋은 집에 못산다고 불평하지 않고 잘 참아주는 아내를 볼 때 예뻐보이고, 40대 후반은 "당신 건강해요. 건강해야 되요" 하면서 보약 다려줄 때 예뻐보이고, 50대 후반은 "당신은 참 훌륭한 사람이야"라고 칭찬해 줄 때 아주 예뻐보이고, 60대 후반은 '당신과 살아온 생은 참 행복한 삶이었다'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싱긋이 웃어줄 때 예뻐보이고, 70대 후반은 조용히 "우리가 죽거든 양지바른 곳에 함께 묻힙시다." 하면서 주름잡힌 얼굴로 쳐다볼 때 아주 예뻐보이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 공통점이 있었는데 남자는 늙어서까지 여자에게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달라는 당부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남편을 존경해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자존감을 지켜줄 때 남자들은 아내가 가장 예뻐보인다고 합니다. 아무리 예쁜 여자도 남편을 무시하면 정이 뚝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날로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남편을 자꾸 세워주면 어떤 여자도 포근한 가운데 예뻐보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남편도 훌륭한 가문의 남자였고 부인도 명문대학을 나온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남편은 그 부인에게서 포근함도 느끼지 못하고 항상 지적만 당하면서 기죽어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지지리도 못난 여자와 눈이 맞아가지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 부인이 목사님에게 상담하기를 "목사님, 정말로 자존심이 상합니다. 잘난 여자와 도망갔으면 이렇게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겠습니다. 천하에 못생기고, 배운 것도 없고, 가문도 형편없는 여자와 도망갔으니 너무 창피합니다." 할 때 목사님이 "나라도 도망가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부인이 너무 똑똑하고 완벽해서 남편이 거기 붙어있을 수가 없어서 도망갔습니다.

남편을 존경한다고 하는 것은 아내가 순종해 준다는 얘기입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헬라어 원어를 보면 '아래에서 받들어 준다, 잘 들어준다'는 말입니다. 잘나고 똑똑한 것이 있어도 남편 앞에서만은 감추어야 됩니다. 다른 곳에 가서는 똑똑한 것을 아무리 나타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만은 '똑' 소리가 싹 사라지고 '덕' 소리만 나야 됩니다.

여자가 너무 똑똑해서 남편에게서 '똑' 소리가 나면 남편이 그때부터 기가 죽습니다. 하늘은 높고 넓어서 땅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땅을 품어야 되는데 하늘이 좁아지면 땅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품어야만 되기 때문에 품을 곳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친구 목사가 있는데 친구 목사는 외모가 외소하고 부인은 헤비급입니다. 그래서 밤에 잘 때 부인은 쑥 올라오고 남편은 쑥 내려갑니다. 그 친구가 나한테 와서 하는 말이"우리 식구는 얼마나 태산처럼 헤비급인지 안을 수가 없어" 그래요. 그래서 제가 "자네가 하늘인데 하늘이 안아야지 땅이 안아서야 되겠어 땅이 안으면 거꾸로 되어서 뒤집어지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언제나 여자는 땅처럼 남편은 하늘처럼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의 신비입니다. 혹시 이 가운데 똑똑한 부인 있습니까 너무 똑똑한 척 하지 마십시오. 똑똑한 척은 세상에 나가서 하십시오. 가정에서는 똑 소리를 죽이십시오.

우리는 다윗과 미갈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됩니다. 다윗은 서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미갈은 사울 왕의 딸로 왕가의 공주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차이가 너무 많습니다. 가문, 교육, 배경, 인생관, 취미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정략적으로 다윗과 미갈을 결혼시켰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난 후에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너무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고 기뻐 뛰노느라고 옷이 벗어지는 줄도 몰랐습니다. 삼하 6장 16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라고 했습니다.

미갈이 이것을 보고 남편을 업신여겼습니다. '저 사람은 원래 출신이 그런 사람이야 왕 이 체통도 없이 벌거벗고 춤을 춰' 하면서 아니꼬운 눈초리로 멸시하면서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집에 들어올 때 멸시하는 투로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정색을 하고 입을 엽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삼하 6:21-22)

이 말이 떨어지면서부터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별거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남남이 되어버린 것이죠. 다윗이 아내 미갈로부터 자존심이 상처를 받은 후로는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별거를 하게 되었고 다윗은 후에 밧세바를 만나게 됩니다. 다윗 왕가의 비극이 뭡니까? 바로 아내가 남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데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여자가 20년 길러놓은 남자를 다른 남자가 20분만에 망칠 수 있다. 그러므로 남편을 세워주어야 한다."

아내에게 순종을 명령하신 것은 남편을 세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것은 자기 존재가 주님을 만난 천사같이 되라는 말입니다.

한문으로 지아비 부(夫)자는 하늘 천(天)에서 조금 솟은 것입니다. 이 말은 남편을 하늘보다 높이 받들라는 말입니다.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면 자기도 하늘처럼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자는 순종함으로 행복합니다. 순종함으로 자기 존재가 올라갑니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왕노릇 하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만은 왕으로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회사에 가서는 멸시 당하고, 무시 당해도 가정에서만은 높은 자리에 세워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므로 연합하라고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자기를 희생한다는 말은 자기 이기심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살면서 날마다 자기를 별세시켜야 합니다. 자기 희생이란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했을 때 여자가 잘못했을지라도 남자가 먼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머리됨의 원리입니다. "그래도 내가 남자인데..." 하면서 목에 힘주고 있으면 머리됨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교인들과 함께 기도원에 가는데 우리 식구와 무슨 얘기를 하다가 제 자존심에 상처가 와서 마구 화를 냈습니다. 원래 제가 제 집 식구를 사랑하다가 존경하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한신교회를 개척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제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가 저를 설득해서 개척하자고 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위대하고 또 나를 복되게 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단계를 넘어서 존경하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으로 존경스럽게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추켜 세워주어서 그랬는지 자기도 모르게 우쭐거리면서 매사에 집에서도 무슨 얘기가 나오면 잘못한 것은 다 나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어떤 때는 속이 아려도 너무 존경해서 제가 참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기도원에 가면서 무슨 얘기가 나왔는데 내가 안했는데 잘못을 돌려요. 그래서 제가 화를 냈더니 운전하는데 마구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논두렁 길을 가는데 사고 나겠어요. 그렇다고 내가 자존심이 있지 잘못했다는 말은 못하겠어요. 그래도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자동차를 세우라고 하고는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여종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이 종을 용서하소서. 제가 오래 참지 못하고 화낸 것을 용서하여 주소서." 먼저 기도를 하고 나니까 잘못했다고 말하기가 쉬워요. 그래서 "여보, 내가 잘못했소" 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자동차가 제대로 가요.

그렇게 하고 기도원에 가서 설교를 하니까 설교가 잘되요. 아내는 연약한 그릇인데 괴롭혀놓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 내가 어떻게 설교하겠습니까

제가 그때 느낀 것은 남자는 자존심상 잘못했다는 말을 하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잘못한 것 없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죽지 않습니까 잘못은 다 우리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내가 잘못했다." 그럽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을 보면서 격에 맞지 않는 말을 해도 남편이 옆에서 참고 들어주면서 같이 가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정생활은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사는 것입니다.

미국의 컬럼비아 바이블 컬러지 학장이었던 맥컬리킨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의 부인이 침해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곁에 있으면 안정감을 가지고 편안히 있고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집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불안해서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학장직을 여러해 더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장직을 사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 나는 아내의 곁으로 돌아간다. 42년전 결혼서약을 할 때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아내를 돌볼 것을 이미 약속한 것이기에 나는 그 서약을 지키고 싶다. 내 아내가 40년동안 나를 돌보아 주었기에 이제는 내가 그 사람의 빚을 갚기 위해 아내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랑과 기쁨 때문에 나는 그의 곁으로 간다."

그가 학장직을 사임하고 이 선언을 하면서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학장으로 있을 때보다 더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학장직을 몇 년동안 수행하는 것보다 자기 아내의 침해를 곁에서 돕기 위해서 가정으로 돌아간 위대함이 전 세계 남편들에게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만남이며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신비를 몸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될 때 남편은 예수님처럼 위대하게 되며 아내는 예수와 함께 사는 위대한 천사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사도 바울이 결혼을 말하다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게 된 것은 부부의 연합은 결국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목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천국의 모형이며, 가정생활은 천국 생활을 연습하는 것이 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종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고 천국가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가는 문턱까지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땅에서 충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는 아들도, 종도 없고 신부만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날 때 주님의 영광이 내 영광이며, 주님의 영화로운 인격이 내 인격이며, 주님의 찬란한 빛이 내 빛이 되어 일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듯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를 머리와 몸으로 비유한 것은 나눌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몸은 생명의 관계입니다. 신랑이 머리요, 신부가 몸이 되는 것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나, 어떤 위험이라도 갈라놓을 수 없는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준 것입니다. 부부의 연합은 참으로 천국을 이루는 신비이며, 이것은 행복을 얻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실 때 내가 그 품속에서 안식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종을 거느리고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삼고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신부를 만날 때만 하나님은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므로 하나님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종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아들 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전부로 삼고 하나님이 나의 신랑이 될 때 하나님은 행복해 하십니다.

하나님의 행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내가 행복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마십시오.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게 되면 주님이 나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오 주님이시여, 나를 신부 삼아 행복하소서." 이것이 바로 신앙의 극치입니다.

우리가 가정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비의 경지에 이르러서 천국을 끌어 땅으로 안고 땅의 삶이 천국으로 이어가는 위대한 신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5:31-33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31-32절)

왜 부모를 떠나는가? 그것은 부모를 떠나서 또 하나의 새로운 관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는 세상을 떠나서 예수를 만나는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이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서 관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만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그래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면 내가 그의 신부가 됩니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종의 관계, 아들의 관계, 신부의 관계가 있는데 이 세 관계는 다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내가 종이 되어서 일하게 됩니다. 이 관계는 일의 관계입니다. 충성하고, 섬기는 관계며,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도 듣고 충성된 종으로서 상도 받고, 면류관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면 내가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또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됨의 권세를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를 받아서 천국에 가는 유업을 받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고 사랑을 나누면서 교제하고, 행복을 얻는 관계입니다. 종으로 일할 때는 삯을 받고 칭찬을 받으며 아들로 믿게 될 때는 거기에서 유업을 받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신랑 신부의 관계가 되면 사랑의 관계를 형성해서 행복하고, 교제하면서 인격적인 만남을 이룹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명령의 관계고, 순종의 관계며, 일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보호의 관계이며, 돌봄의 관계이며, 유업을 받는 관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신랑 신부의 관계는 일대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이 관계는 철저하게 서로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여기에서만 진정한 행복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성장의 단계를 보면 처음에 하나님을 만날 때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만나서 주인에게서 무엇을 얻습니다. 또 도움을 받습니다. 조금 더 은혜를 받으면 내가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는 위대한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마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성숙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전부가 되어서 마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고 교제하듯이 하나님과 교제하므로 행복을 얻고 만족을 얻으며 기쁘게 살아가는 관계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연합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은 주인과 종의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종이고, 모세도 종이며, 여호수아, 이사야 모두 종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연합하듯이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격적으로 성숙하면 신랑 신부의 관계로 일생을 살 듯이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 때 우리의 심령속에 하늘의 천국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1-33절)

먼저, 둘이 한 몸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연합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연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연합은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통을 상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형상을 따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고 창세기 1장 27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자 혼자만의 형상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만날 때 하나님의 형상이 내게 온전히 나타나게 됩니다.

남녀의 연합은 결국 신비한 비밀인데 천국의 즐거움, 기쁨을 땅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 남녀의 연합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신비하게 봐야 합니다. 부부의 만남은 남녀의 성적인 만남이며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지으시고 우리의 성이 그 인격을 표현하는 도구라면 부부는 인격적으로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일대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우리가 회사에 가서 사장과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권위상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보호자의 입장에서 자녀는 약한 존재로 섭니다.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일대일의 존재는 안됩니다. 빈부, 학력, 인물, 모든 것에서 비교되는 차등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부부는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나는 유일한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대일의 인격으로 만나는 것은 부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 앞에 있는 아내는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다 받고 있습니다. 남편도 그 아내 앞에서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존엄성이 깨질 때는 그 가정은 이름만 남게 됩니다.

마이크 메이슨이라는 사람이 쓴「결혼의 신비」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가정생활의 고전적인 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듯 진정한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됨의 신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됨의 신비에 이르듯이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님과 하나됨의 신비를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이런 해석을 내렸습니다. '부부의 관계로 경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과 헌신으로 하나되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4-25절에 보면 부부가 연합하기 위해서 옷을 벗었다고 했습니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 전 존재를 진실하게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또 연합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최상의 헌신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의 만남은 진실과 헌신입니다. 이 이상의 헌신이 없습니다. 이 이상의 진실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자기 존재를 벌거벗은 존재로 진실하게 내놓아야 되며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듯 헌신하는 것은 이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고전 7:3-4절에 보면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는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연합을 위해서 자기 존재를 내어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함께 잠을 자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자고 남편은 건너방에서 따로 자는 것, 이것은 성서적인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집안에 서재를 꾸며놓고 혼자 거기에서 연구하고 잠자는 것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연구했으면 잘 때는 같이 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건강상의 이유나 특별한 기도를 위해서라면 허락을 받고 하라고 성서가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 여 집사님이 12시에 철야하러 왔어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오셨느냐고 했더니 아이 대학 진학을 위해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어서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백일기도는 새벽에 해도 됩니다. 자식 대학가는 것 가는대로 내버려두어야지 백일기도 한다고 떨어질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격을 세워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실력없는 것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서 주무시죠." 자야 할 자리에 가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라고 제가 집으로 보내드린 일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부부는 서로 존경과 사랑으로 연합해야 됩니다.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3절)

인생이 육체가 연합되었다고 그것으로 일생을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도 쇠합니다. 정욕도 갑니다. 육체의 연합도 식어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견고한 연합만이 일생을 강한 끈으로 연합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고 혼자 웃었습니다. "아내가 예뻐보일 때..." 이런 제목의 글인데 20대 후반은 남편을 위해서 예쁜 아기 낳아줄 때 아내가 예뻐보이고, 30대 후반은 좋은 집에 못산다고 불평하지 않고 잘 참아주는 아내를 볼 때 예뻐보이고, 40대 후반은 "당신 건강해요. 건강해야 되요" 하면서 보약 다려줄 때 예뻐보이고, 50대 후반은 "당신은 참 훌륭한 사람이야"라고 칭찬해 줄 때 아주 예뻐보이고, 60대 후반은 '당신과 살아온 생은 참 행복한 삶이었다'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싱긋이 웃어줄 때 예뻐보이고, 70대 후반은 조용히 "우리가 죽거든 양지바른 곳에 함께 묻힙시다." 하면서 주름잡힌 얼굴로 쳐다볼 때 아주 예뻐보이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 공통점이 있었는데 남자는 늙어서까지 여자에게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달라는 당부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남편을 존경해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자존감을 지켜줄 때 남자들은 아내가 가장 예뻐보인다고 합니다. 아무리 예쁜 여자도 남편을 무시하면 정이 뚝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날로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남편을 자꾸 세워주면 어떤 여자도 포근한 가운데 예뻐보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남편도 훌륭한 가문의 남자였고 부인도 명문대학을 나온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남편은 그 부인에게서 포근함도 느끼지 못하고 항상 지적만 당하면서 기죽어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지지리도 못난 여자와 눈이 맞아가지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 부인이 목사님에게 상담하기를 "목사님, 정말로 자존심이 상합니다. 잘난 여자와 도망갔으면 이렇게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겠습니다. 천하에 못생기고, 배운 것도 없고, 가문도 형편없는 여자와 도망갔으니 너무 창피합니다." 할 때 목사님이 "나라도 도망가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부인이 너무 똑똑하고 완벽해서 남편이 거기 붙어있을 수가 없어서 도망갔습니다.

남편을 존경한다고 하는 것은 아내가 순종해 준다는 얘기입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헬라어 원어를 보면 '아래에서 받들어 준다, 잘 들어준다'는 말입니다. 잘나고 똑똑한 것이 있어도 남편 앞에서만은 감추어야 됩니다. 다른 곳에 가서는 똑똑한 것을 아무리 나타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만은 '똑' 소리가 싹 사라지고 '덕' 소리만 나야 됩니다.

여자가 너무 똑똑해서 남편에게서 '똑' 소리가 나면 남편이 그때부터 기가 죽습니다. 하늘은 높고 넓어서 땅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땅을 품어야 되는데 하늘이 좁아지면 땅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품어야만 되기 때문에 품을 곳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친구 목사가 있는데 친구 목사는 외모가 외소하고 부인은 헤비급입니다. 그래서 밤에 잘 때 부인은 쑥 올라오고 남편은 쑥 내려갑니다. 그 친구가 나한테 와서 하는 말이"우리 식구는 얼마나 태산처럼 헤비급인지 안을 수가 없어" 그래요. 그래서 제가 "자네가 하늘인데 하늘이 안아야지 땅이 안아서야 되겠어 땅이 안으면 거꾸로 되어서 뒤집어지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언제나 여자는 땅처럼 남편은 하늘처럼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의 신비입니다. 혹시 이 가운데 똑똑한 부인 있습니까 너무 똑똑한 척 하지 마십시오. 똑똑한 척은 세상에 나가서 하십시오. 가정에서는 똑 소리를 죽이십시오.

우리는 다윗과 미갈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됩니다. 다윗은 서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미갈은 사울 왕의 딸로 왕가의 공주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차이가 너무 많습니다. 가문, 교육, 배경, 인생관, 취미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정략적으로 다윗과 미갈을 결혼시켰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난 후에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너무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고 기뻐 뛰노느라고 옷이 벗어지는 줄도 몰랐습니다. 삼하 6장 16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라고 했습니다.

미갈이 이것을 보고 남편을 업신여겼습니다. '저 사람은 원래 출신이 그런 사람이야 왕 이 체통도 없이 벌거벗고 춤을 춰' 하면서 아니꼬운 눈초리로 멸시하면서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집에 들어올 때 멸시하는 투로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정색을 하고 입을 엽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삼하 6:21-22)

이 말이 떨어지면서부터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별거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남남이 되어버린 것이죠. 다윗이 아내 미갈로부터 자존심이 상처를 받은 후로는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별거를 하게 되었고 다윗은 후에 밧세바를 만나게 됩니다. 다윗 왕가의 비극이 뭡니까? 바로 아내가 남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데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여자가 20년 길러놓은 남자를 다른 남자가 20분만에 망칠 수 있다. 그러므로 남편을 세워주어야 한다."

아내에게 순종을 명령하신 것은 남편을 세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것은 자기 존재가 주님을 만난 천사같이 되라는 말입니다.

한문으로 지아비 부(夫)자는 하늘 천(天)에서 조금 솟은 것입니다. 이 말은 남편을 하늘보다 높이 받들라는 말입니다.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면 자기도 하늘처럼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자는 순종함으로 행복합니다. 순종함으로 자기 존재가 올라갑니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왕노릇 하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만은 왕으로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회사에 가서는 멸시 당하고, 무시 당해도 가정에서만은 높은 자리에 세워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므로 연합하라고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자기를 희생한다는 말은 자기 이기심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살면서 날마다 자기를 별세시켜야 합니다. 자기 희생이란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했을 때 여자가 잘못했을지라도 남자가 먼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머리됨의 원리입니다. "그래도 내가 남자인데..." 하면서 목에 힘주고 있으면 머리됨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교인들과 함께 기도원에 가는데 우리 식구와 무슨 얘기를 하다가 제 자존심에 상처가 와서 마구 화를 냈습니다. 원래 제가 제 집 식구를 사랑하다가 존경하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한신교회를 개척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제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가 저를 설득해서 개척하자고 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위대하고 또 나를 복되게 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단계를 넘어서 존경하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으로 존경스럽게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추켜 세워주어서 그랬는지 자기도 모르게 우쭐거리면서 매사에 집에서도 무슨 얘기가 나오면 잘못한 것은 다 나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어떤 때는 속이 아려도 너무 존경해서 제가 참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기도원에 가면서 무슨 얘기가 나왔는데 내가 안했는데 잘못을 돌려요. 그래서 제가 화를 냈더니 운전하는데 마구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논두렁 길을 가는데 사고 나겠어요. 그렇다고 내가 자존심이 있지 잘못했다는 말은 못하겠어요. 그래도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자동차를 세우라고 하고는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여종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이 종을 용서하소서. 제가 오래 참지 못하고 화낸 것을 용서하여 주소서." 먼저 기도를 하고 나니까 잘못했다고 말하기가 쉬워요. 그래서 "여보, 내가 잘못했소" 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자동차가 제대로 가요.

그렇게 하고 기도원에 가서 설교를 하니까 설교가 잘되요. 아내는 연약한 그릇인데 괴롭혀놓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 내가 어떻게 설교하겠습니까

제가 그때 느낀 것은 남자는 자존심상 잘못했다는 말을 하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잘못한 것 없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죽지 않습니까 잘못은 다 우리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내가 잘못했다." 그럽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을 보면서 격에 맞지 않는 말을 해도 남편이 옆에서 참고 들어주면서 같이 가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정생활은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사는 것입니다.

미국의 컬럼비아 바이블 컬러지 학장이었던 맥컬리킨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의 부인이 침해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곁에 있으면 안정감을 가지고 편안히 있고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집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불안해서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학장직을 여러해 더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장직을 사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 나는 아내의 곁으로 돌아간다. 42년전 결혼서약을 할 때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아내를 돌볼 것을 이미 약속한 것이기에 나는 그 서약을 지키고 싶다. 내 아내가 40년동안 나를 돌보아 주었기에 이제는 내가 그 사람의 빚을 갚기 위해 아내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랑과 기쁨 때문에 나는 그의 곁으로 간다."

그가 학장직을 사임하고 이 선언을 하면서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학장으로 있을 때보다 더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학장직을 몇 년동안 수행하는 것보다 자기 아내의 침해를 곁에서 돕기 위해서 가정으로 돌아간 위대함이 전 세계 남편들에게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만남이며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신비를 몸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될 때 남편은 예수님처럼 위대하게 되며 아내는 예수와 함께 사는 위대한 천사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사도 바울이 결혼을 말하다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게 된 것은 부부의 연합은 결국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목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천국의 모형이며, 가정생활은 천국 생활을 연습하는 것이 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종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고 천국가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가는 문턱까지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땅에서 충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는 아들도, 종도 없고 신부만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날 때 주님의 영광이 내 영광이며, 주님의 영화로운 인격이 내 인격이며, 주님의 찬란한 빛이 내 빛이 되어 일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듯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를 머리와 몸으로 비유한 것은 나눌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몸은 생명의 관계입니다. 신랑이 머리요, 신부가 몸이 되는 것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나, 어떤 위험이라도 갈라놓을 수 없는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준 것입니다. 부부의 연합은 참으로 천국을 이루는 신비이며, 이것은 행복을 얻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실 때 내가 그 품속에서 안식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종을 거느리고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삼고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신부를 만날 때만 하나님은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므로 하나님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종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아들 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전부로 삼고 하나님이 나의 신랑이 될 때 하나님은 행복해 하십니다.

하나님의 행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내가 행복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마십시오.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게 되면 주님이 나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오 주님이시여, 나를 신부 삼아 행복하소서." 이것이 바로 신앙의 극치입니다.

우리가 가정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비의 경지에 이르러서 천국을 끌어 땅으로 안고 땅의 삶이 천국으로 이어가는 위대한 신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버이의 마음/사1:2-9
2004-09-17 11:55:53   read : 309

언제 불러도 또는 들어도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양주동씨 작사 “어머니의 마음”을 한번 불러 봅시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러 주시고 /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위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사람의 마음 속엔 온 가지 소원 /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녀 위하여 / 살과 뼈를 깍아서 바친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오리 /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 없어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생이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수적이다"
이 말씀은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대화에서 산출되고, 고독에서는 참된 인생을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고독 자체가 병리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적 존재요, 정신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영적이요 정신적인 교류가 끊어질 때에 그 인격은 파멸에 이르게 되며 파국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흡수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뜻이 내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벽 없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앞에 내 마음이 열려야 하고 또 내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소통되고 뜻이 흡수되어야 합니다.
목사와 교인들과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 앞에 내 마음이 열려야 하고 목사의 마음이 성도들 앞에 열려야 합니다.
교회 목회행정에 관계된 일에 있어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으면 그것이 중요한 부분들이라면 목사님과 대화를 하십시오.
뒤에서 여러 사람들과 말을 만들면 은혜스럽지 못합니다.
목사가 생각했던 것과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 떠돌고 흘려 들어오면 유익 되지 않습니다.
견히 오해하면 나중에 여러분이 화를 입습니다.
저는 성도들을 향해서 내 마음을 열어 놓았습니다.
열린 목회입니다.
심지 어떤 분들은 저에게 할 말 안 할말 다합니다.
저는 그게 좋습니다.
이 목사의 목회철학과 목회 방향을 안다면 사사건건 시비 걸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엽시다.
내 마음부터 먼저 엽시다.
다시 한번 더 말씀을 드립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앞에 내 마음이 열려야 하고 또 내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소통되고 뜻이 흡수되어야 합니다.

흔히 '세상에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누구와도 소통이 안됩니다.
이미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내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고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 단절될 때, 이것은 죽음의 상태입니다.
정신적인 파국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소통을 '대화'라고 표현하며 최고의 대화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우리는 수평적인 대화를 종종 내세웁니다.
수평적 관계에 서서 서로 이해해보겠다는 것입니다 마는, 우선 되어야 할 것은 수직적 대화입니다.
그 방법에서도, 윗사람을 믿고 존경할 줄 아는, 그래서 윗사람을 향하여 마음을 여는 것이 선행해야 합니다.
이 세대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른들을 향하여 어버이를 향하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것이 대화의 첫째 요건입니다.
네가 마음을 열고 존경과 사랑으로 마음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아랫사람에 대하여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머니의 등에 업힌 어린아이를 보십시다.
때때로 떼를 쓰고 울면서 어머니의 등짝을 마구 두들겨대는 아이를 볼 수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떼거지입니다.
어머니가 화가 나서 당장에라도 내동댕이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아이에게는 적어도 어머니가 나를 내버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아무리 떼를 써도 어머니는 나를 사랑한다는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멋대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재롱을 부립니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나름대로 자유를 누립니다. 이것이 정신적 자유입니다.
내 마음이 막힘 없이 수용되고 내 믿음이 어디에라도 전달됩니다.
내 마음이 저 사람에게, 저 사람의 뜻이 나에게 받아들여지고 수용될 때에 그만큼 넓은 정신적 영역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믿어지지 않고 아무도 믿을 수 없다면 이것은 스스로 완전히 종이 되고 감옥에 갇힌 결과가 됩니다.
아무런 자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고합니다. 그리고 응답을 듣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 바른 응답 이런 관계 안에서 '나'라는 존재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알면서 비로소 나를 알게 됩니다.
아버지를 알고야 내가 아들 됨을 알게 됩니다.

칼뱅이 이에 대하여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이는 사람에 대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야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상대방을 알고 마음이 소통되고 뜻에 만남이 있고 지식이 서로 나누어질 때에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자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이라 함은 사실상 무한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요, 순종에서 바른 대화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십니다.
만나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초월적인 하나님이요 창조주 하나님이요 율법의 하나님이시며 무서운 심판주 하나님이십니다.
헬라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아주 멀리 계셔서 우리의 지식이 미치지 못하고 손이 닿지 않으며 도저히 가까이할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대하여 가르쳐주셨다고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자,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분으로 오셨음을 믿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은 하늘 높은 곳에 팔짱이나 끼고 앉아서 죄인들이 구원받아 하늘로 올라오기만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는 사람, 죄 가운데에 살면서도 죄인 줄 모르고 사는 사람, 멸망으로 치닫는 사람들을 위하여 몸소 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한 비유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마는 탕자의 비유만은 예외입니다.
탕자 비유에서만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탕자의 돌아옴을 기다리는 아버지로 나타납니다.
그 밖의 다른 비유들은 모두가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그리고 있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으시고, 잃어버린 동전 하나를 끝까지 찾으시는 하나님
이 찾으심 속에는 용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저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에 찾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부르기 때문에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감히 하나님을 부르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인 자를 찾아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 하나님에 대한 종합적이고 상징적인 한마디의 표현이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지극히 동양적이고 히브리적인 표현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관념이 부정적인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개념을 바로 정립하기 어렵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아주 좋지 못한 성품의 아버지 슬하에서 양육된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할 때에도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중 한 예로 마르틴 루터를 들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아버지는 광부였는데, 자식을 좀 심하게 때리는 편이었다고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매질하는 모든 경우가 다 정당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느 때에는 별반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때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루터의 아버지는 유독 매질이 심한 편이었나 봅니다.
루터는 '하나님 아버지'라 하지말고 '하나님 어머니'라 하자고 제안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할 때에는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서 기분이 썩 좋지 않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아버지에 대한 개념은 중요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한 아버지의 개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아버지는 사랑의 아버지요, 인자한 아버지요,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십니다.
특별히 이 아버지는 대화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성경 전체를 통하여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찾아오시려고 부탁하시는 아버지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호6:6절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시는 아버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간절히 부탁하십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가지는 소원이 있다면 자신의 마음을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목양자로서 저도 여러분에게 가지는 소원이 있다면 이 목회자의 마음을 알아 주었으면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깊은 뜻을 깨닫는 것이 효도입니다.
동양의 사고 개념으로는 효와 신앙은 하나입니다.
부모님께 대한 효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고백은 수직적 관계의 맥락에서 동질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 믿어 주기를 바라고 순종하기를 바라고 따라주기를 바라고 닮아주기를 바라며 기업을 이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이 효입니다.
효란 뜻을 받들어드리는 것입니다.
효도관광 몇 번으로 효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효는 물질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봅시다.
문자 그대로 깊이 묵상해보십시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2-4절)."
탄식과 책망의 말씀입니다.

소도 저를 먹이는 주인을 알아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너무나 답답하여 한 말씀하십니다.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는 구유를 아는데 내 자식들은 나를 모른다. 패역한 자식이로다.'
서양사람들이 개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도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들이 개를 대우하는 것을 보면 심사가 편치 못할 지경입니다.
사람도 받기 어려운 대접을 개한테 베풉니다.
옷을 해 입히고 침대며 베개까지 마련해주거나, 미장원이며 목욕탕이며 병원에 데려가는 것은 예사입니다. 그뿐입니까?
유산까지 개 몫으로 남겨줍니다.
묘비를 세우고 무덤을 만들어주는 일도 그렇게 새삼스런 일이 못됩니다.
음식도 특별히 따로 장만해 먹이지 않습니까?
개한테 지나친 처사가 아니냐, 그보다 못한 사람도 얼마나 많으냐고 항변이라도 하면 그들의 답변은 언제나 같습니다.
"개는 절대로 배신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키워보면 배신하고 원수 삼고 돌아서서 물기까지 하지만, 개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 할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만도 못한 사람, 소만도 못한 사람, 스승을 배반하고 부모를 배격하는 짐승만도 못한 자에 대하여 탄식하십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부성적 사랑이라는 생명의 뿌리를 주고 있습니다.
부성은 보호하는 것이요, 양육하는 것이요, 기업을 주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사랑이요, 가장 깊은 사랑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본문을 깊이 읽어볼 것입니다.

호세아 6:1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욥5:17절에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 시나니....”
하나님의 공의로운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공의로운 사랑에는 진노가 있습니다.
의로운 사랑이기 때문에 징계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 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5-6절)"
'어찌하여 더 맞으려고 하느냐?'
이미 맞았습니다.
그로 인해 상처가 났습니다.
흐르는 피를 아직 싸매지도 못했습니다.
보십시오. 그런데 이 상처가 낫기도 전에 또 패역한 짓을 합니다.
또 때려야 하겠는데 때릴 곳이 없습니다.
이로 인하여, 맞을 자가 아니라 때릴 자가 눈물을 흘립니다.
'어째서 더 맞을 짓을 하느냐?' 애가 끊어집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때로 우리도 부득이 자녀를 때려놓고 잠든 아이의 상처를 몰래 어루만지며 울지 않습니까?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공의로운 사랑이기에 징계할 수밖에 없으나 그 징계 속에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중국 한나라에 한배교라는 유명한 효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자녀들의 잘못을 매로 다스렸는데, 아들이 장성한 후에도 잘못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종아리를 쳤습니다.
어느 날, 이 어머니가 아들을 세워놓고 매를 때렸는데, 한번도 울지 않던 아들이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너는 그동안에 한번도 울지 않더니 왜 우느냐?"
"전에 어머니가 저를 때리실 때는 종아리가 아프더니 이제는 조금도 아프지 않습니다. 어머니께서 기력이 쇠잔해지신 탓이려니, 마음이 아픕니다."
맞는 내 다리가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때리는 어버이의 마음이 아픈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효(孝)의 마음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고 괴로워합니다.
벌을 받는다,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징계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 매를 더 맞으려 하느냐, 그만큼 맞았으면 되지 않았느냐?'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마7:11절에서 이런 부모의 마음을 잘 지적해 주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녀에게 줄 줄 알거든……" 아이러니칼한 말씀입니다.
비록 악한 자일지라도 자식한테 향하는 마음은 선하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악하게만 살았다 할지라도 자식을 향하는 마음만은 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부모라도 자식으로부터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
자식은 그 부모에 대하여 성공을 했느니 못했느니, 선하다느니 악하다느니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식을 향한 마음만은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내가 악하니 너희도 악해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실패했으니 너도 실패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향하는 마음, 자식에게 주고자 하는 마음만은 지극히 선한 것입니다.
또한 부모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뚜렷한 목표가 있습니다.
시련을 주실 때에도 확실한 목표가 있습니다.

출19:4절은 독수리 날개로 보호함같이 저를 보호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절대적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참으로 미묘해서 질투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동생을 칭찬하면 형이 별로 기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남편을 칭찬하면 아내가, 신부를 칭찬하면 신랑이 왠지 좋지 않은 기색을 띠는 그러한 세대입니다 마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질투가 없고 시기가 없습니다.
자식의 기쁨이 내 기쁨이요, 자녀의 즐거움이 내 즐거움입니다.
깨끗한 사랑입니다.
또한 부모 사랑에는 자기 희생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자식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다윗왕입니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도 전에 왕위 찬탈을 위한 모반을 일으킵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과 대적하여 싸우지 않고 왕궁을 떠나 피난을 합니다.
도망 다니는 아버지를 아들은 끝까지 추격합니다마는, 하나님은 다윗을 긍휼히 여기셔서 압살롬과 그 일당은 요압의 손에 죽고 맙니다.
이렇듯 천하에 몹쓸 패역한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다윗왕은 몹시도 애통해합니다.
삼하18:33절에는 다윗의 애끊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자기 희생의 깊은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내게 향하신 구체적인 사랑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내게 진노하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깊은 뜻을 알고, 그 뜻으로 돌아서고,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버이를 알고 그를 공경할 것입니다.

세상 떠난 후에 후회말고 살아 생전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효도하는 길이요, 최선을 다하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부모님을 기억하시며 진심으로 공경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내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라며, 세상 사람들에게는 부모님 공경의 거룩한 빛을 드러내시는 성도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인생/시39:4-9
2004-11-03 14:47:34   read : 138

인생이 무엇입니까? 한 인간이 살아온 발자취입니다. 지금까지 여
러분이 살아온 그것이 바로 당신의 인생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오셨습니까? 당신의 삶의 족적이 무엇입니까? 지금 남아 있는 것
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대개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자라서 결혼했
고 자식을 낳아 길러서 결혼시키고 손자 손녀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만큼 늙었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육신이 안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병든 몸만 남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디입니
까?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 읽어드린 말씀 가운데 4절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기
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
함을 알게 하소서" 이 것은 다윗의 기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이
기도 합니다. 우리도 알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나의 종말이 언
제인지, 즉 몇 살에 죽을는지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
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갈 연수의 날들이 어떠한 날인지, 행복한 날들
인지, 불행한 날들인지, 평안한 날인지 고달픈 날인지 알고 싶습니
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연약함을 알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
니다. 사실은 인생의 종말을 알고 인생의 앞날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는 그것을 아는 것이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미약
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5절에서 고백합니다. 자
신의 날이 손넓이 만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온 몸에 비하면 손넓
이는 얼마나 짧고 적은 것입니까? 심히 작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
의 일생이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마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입니다. 작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방만한 우주에 비하
면 인간이란 정말 보잘 것 없는 미약하고 작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
고 있는 지구도 다른 혹성이나 별에 비하면 정말 적습니다. 여러분!
태양의 크기가 지구의 직경에 비해 109배됩니다. 태양을 채우려면 지
구를 130만개를 넣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 사는 인생들 정말 보잘 것
없습니다. 다만 인생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였고 천하보
다 귀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위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인생들이 나름대로 든든히 섰다고, 남보다 앞섰다고 하는 날도 보면
허된 것뿐이더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대장을 무너뜨리고 블레
셋과 싸워 이기고 왕자리에 올라앉아 보았지만 그것은 극히 짧은 것이
고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도 남은 날 수를 모릅니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
명하게 아는 것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가장 정확한 사실입니다. 인생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후에
는 심판이 있다고 히스기야 9장에 말씀하셨습니다.
죽은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면 이제 남은 세월 동안 무엇을 위
해 사시렵니까? 이제 와서 어떤 할머님들은 남편에게 내 인생을 물어
내라고 떼를 씁니다. 내가 당신께 시집와서 아들 낳아 대를 이어주고
지금까지 고생하며 살림을 살았는데 내 인생 물려내라고 합니다. 그러
나 물어줄 남편이 어디 있습니까? 살아 계시기라도 하면 떼라고 써보
지만 무엇을 했는지 모르지만 어느 날 갑자기 먼저 훌쩍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가야할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내차례 입니다. 그런
데 문제는 "어디로 갑니까?"

"내가 어디로 가지?" 갈길이 없습니다. 갈 집이 없습니다. 서산으
로 넘어가는 해는 왜 그렇게도 빨리 가는지. 중천에 떠 있는 해는 천
천히 가는 것 같았는데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석양은 얼마나 빨리 숨
어버리는지 모릅니다. 인생의 해가 서쪽하늘에서 빨리 떨어지는 석양
처럼 되어버린 우리 어머님 아버님, 인생의 속도가 젊을 때만큼이나
천천히 간다면 뭐라도 해볼 것인데 이제 남은 세월이 얼마나 빨리 가
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흔히들 이야기합니다. 인생의 속도가 30대일
때는 시속 30km, 40대는 40km, 50대는 50km, 60대는 60km, 70대는
70km, 80대는 80km속도로 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입니
다. 사실 태양의 속도는 창조 때나 수천 년 전이나 예수님 탄생할 때
나 이씨 조선 때나 오늘이나 똑같습니다. 그리고 아침이나 점심이나
저녁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석양에 떨어지는 해의 속도
는 왠지 빠른 것처럼 느껴집니다.
태양은 지면 역시 이튿날 새벽 다시 떠오른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가는 인생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세상을 떠나면 영원
히 이 땅에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인생은 어디로 갑니까?
영원한 집, 아니면 지옥으로 갑니다. 요한복음14:6 "예수께서 가라사
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 예수님도 요한복음14:12절에서 "내가 아버
지께로 간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6:28절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
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 세상은 나
그네길 나는 다만 나그네 우리주님 머지 않아 다시 오실 때 천사들은
하늘에서 날오라고 부르니 나는요 이땅에 있을 마음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말씀에 보면 다윗은 오직 자신의 소망
은 주님께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소망이 장수에 있는 것도 아니
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며, 권세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망은 자식 잘되는 데 있지 않고, 부귀영화를 누리는데 두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영원
이 있기 때문입니다. 8절에 고백합니다.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
며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
습니다.
우리 인생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 두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죄사
함이 있습니다.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형통함
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든지 인생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사는 믿음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
기 위해 오늘 여러분의 자녀들이 부모님을 초청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좋은 효도가 어떤 것인지 말입니다.
그러므로 효도도 살아 계실 때 해야 합니다. 자식 사랑도 살아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이웃사랑도 살아 계실 때 해야 합니다. 선한 일도 살
아 있을 때 해야 합니다. 힘이 있고 능력이 있을 때 해야 합니다. 그
래서 오늘 우리교회에서는 어버이 주일을 맞아 자녀 된 도리로서 무엇
이 가장 큰 효도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게도 살기가 좋고 경
치가 아름답다고 하는 유럽이나 호주, 중국 사천성이나 미국의 그랜드
캐년이나 관광을 시켜 드리면 좋으련만 이제는 보내드려도 연세가 많
아 관광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관광도 젊을 때 해야지 연
세가 많으면 가보고 싶어도 못갑니다. 지금까지 관광을 하지 못한 것
은 지금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자식된 도리로 관광을 시켜 드리려
고 해보지만 잘 안됩니다. 그러나 후회하고 있을 수 없어서 죽어도
갈 수 있는 아름다운 관광지, 아니 관광지가 아니라 죽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천국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모님을 초청하기로 했습니
다.
오늘 초청받아 오신 부모님들이여! 자녀들이 하도 강권하기 때문
에 '오늘 한 번만 나가주자' 하고 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만이 아니라 이제 세상 떠날 때까지 나오십시오. 왜냐하면 이 길
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이 영생의 길이요 천국 가는 길이
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자녀들의 권유로 처음 교회에 나
오신 여러분! 여러분들도 감사하게 생각하십이오. 왜냐하면, 어버이날
에 즈음해 대학문화신문이 취업정보사이트 파워잡과 함께 대학생 606
명을 대상으로 ‘부모에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것은 무엇인
가’라는 질문을 던진 결과 ‘재력’을 꼽은 답변이 44%로 압도적 1위
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대학생의 절반 가량이 부자 아빠를 앙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약 절만 가까이가 부모가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
는 것,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을 만큼 부자로 사는 부모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부자로 돈을 물려
주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예수 믿고 하나님을 섬기다
가 천국가시는 것을 원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할렐루
야!

한편 부모가 계시는 자녀들이여!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고 옷을
사드리고 음식을 사드리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고 어느 때든지 마
음만 먹으면 할 수 있습니다. 꼭 어버이날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면 천국가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좋은 집에 모시지 못하고 좋은 환경에서 편안하게
모시지 못했다 할지라도 세상을 떠나신 후에 영원히 살 수 있는 천국
으로 인도하신다면 그보다 더 좋은 효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배달
해 주는 책임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꽃배달을 해드리
는 것보다도, 선물을 배달해 드리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배달은 믿음
을 배달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뉴스에 보니 오월 가정의 달
을 맞아 꽃배달이 많은데 배달사고가 많다고 했습니다. 배달을 제대
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복음을 배달해야 할 책임이
있는데 중간에 포기하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배달사고입니다. 이런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앞에 말씀드린 내용의 조사에서 어버이날 꼭 해드리고 싶은
선물이 무엇인가? 라고 물었을 때에 33%가 ‘용돈’이었고, 28%가‘여
행’이라고 답했습니다. 부모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로는 56%가 '사랑
합니다'이고, 14%가 '열심히 살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자녀
된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부모님들이 금년에 가장 받고 싶어한 선
물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한 조사에서 나타났는데 1위가 휴대폰이
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동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났습니다.
휴대폰을 선물하세요. 저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아이들에게는 휴
대폰을 사주면서도 부모님에게는 사드리지 못한 것이 은근히 죄책감
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번에 저희 집에서 모시려고 부산에 전화
를 했는데도 연락이 닿지 않아서 이리저리 소문을 내어보니 서울에 가
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휴대폰을 사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
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휴대폰이 없는 성도님 휴대폰을 선물로 받고 싶
습니까? 자녀들이여 잘 들으세요. 당신의 부모님들이 휴대폰이 필요하
답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신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휴
대폰보다도 더 좋은 선물을 하신 것입니다. 이 목사는 휴대폰보다 더
좋은 것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휴대폰은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요금
이 많이 나오지만 제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요금이 필요 없는 것입니
다. 휴대폰은 안 터지는 장소가 있지만 아무리 깊은 지하라도 다 통하
는 것이 있습니다. 휴대폰은 항상 갖고 다녀야 하고 충전을 시켜야 하
지만 갖고 다닐 필요도 없고 충전을 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 있습니
다. 휴대폰은 늘 새로운 모델이 나와서 교체가 필요하지만 이것은 새
로운 모델이 나오지 않고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가에게 주어진 특권인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들
에게 줄 수 없는 것까지도 줄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휴대폰보다
더 좋은 것을 드리려고 오늘 초청한 자녀들의 마음을 예쁘게 보시고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시면 여러분이 할 수 없는 모든 것
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휴대폰은 전파방해를 받습니
다. 그러나 기도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습니다.

나의 종말과 인생의 상황이 어떤지를 잘 모르며 살아가는 성도 여
러분! 혹시라도 여러분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쓸데없는 일에 분
주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 6절 말씀,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
지 알지 못하나이다"
그림자 같이 다닌다는 것은 허상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림자
는 실체가 사라지면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이 그림자 같다는 것
은 그림자가 실체가 아니라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허상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왜 허상인가 하면 헛된 일에 분주하게 다녔기 때
문입니다. 그리고 누가 취할는지도 모를 재물을 쌓기 위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안 되는 그것에 생명을 걸 이유가 없습니다. 안타까운 것
은 어버이날을 앞두고 전라도 한 어머니가 돈 30만원 때문에 농약을
먹고 자살했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그동안 용돈을 모으고 어버
이 날이라고 며칠 전에 아들이 와서 용돈을 준 것을 합쳐서 30만원이
든 지갑을 장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지갑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 자책감을 가진 것입니다. 자녀들이 어려운 가운데서 준 돈이
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남편에게 '그것이 어떤 돈인데' 남편이 잊어버
리라고 해도 하루 종일 그것이 어떤 돈인데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런
데 그만 약을 먹고 병원에 옮겼으나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지갑이 파출소로 돌아와서 전하러 가니 숨이 끊어졌습니
다. 여러분! 돈에 생명을 걸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 나고 돈이 나왔
지 돈 나고 사람 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효도하려고 했던 아
들의 용돈이 어머니의 생명을 끊게 만든 결과를 가져오는 이런 지혜롭
지 못한 생각을 하지 마세요. 이것이 왜 발생했는가 하면 세상이 온
통 돈으로 가치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느 부잣집에 바보 같은 종이 하나 있었습니다. 주인은 어
리석기 짝이 없는 그 종은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종은 주인에
게 충성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주인의 말이면 무조건 잘 따랐습니다.
그런 점이 맘에 들어 주인은 그 종을 계속 데리고 있었습니다. 심부름
을 잘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인은 그 종을 볼 때마다 '저렇게 어리
석을 수 있을까?' 하고 혀를 차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은
종을 불러서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너보다 어리석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보면 이 지팡이를 주라”
수년이 지나도록 그 종은 자신보다 더 바보 같은 사람을 찾지 못했습
니다. 그래서 지팡이를 계속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주인이 심
한 중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죽을병이었습니다. 그 종은 불치의 병
에 걸린 주인을 극진히 간호했습니다.
한 번은 주인이 종을 불러 놀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을 흘리
는 주인에게 그 종은 울지 말라고 달랬습니다. 그 때 주인은 말하기
를 “나는 아무래도 멀리 영영 떠나야 될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종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한 번 가면 못
오는 곳에 라고 했습니다. 종은 다시 주인에게 가지 말라고 졸랐습니
다. 주인은 가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종은 다시 “꼭 가신다면
무엇을 준비할까요" 라고 물었다. 주인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대답
하였습니다.
그때 종은 밖으로 나가더니 그 지팡이를 가지고 와서 주인에게 주면
서 이 지팡이를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평소 하루 동안 외출해도 많은 준비를 시켰던 주인이 영영 올 수 없
는 곳으로 간다면서 아무 준비도 없이 간다는 그 말에 그 종은 주인이
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영원히 가는 그 길을 준비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 바보의 지팡이의 주인이 혹시 나 자신은 아닌가요? 어리
석은 인생 길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 가는 인생이 되
십시오. 천국은 반드시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부
모님이 늘 계시지 않습니다. 곧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후회 없는 인
생이 되기 위해서라도 부모님을 잘 섬기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
니다.


어머니의 믿음/딤후1:1-14
2005-01-26 14:59:06   read : 143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 부모를 잊어버리고 그 은혜를 생각지 아니 하겠습니까만 이렇게 특별히 하루를 정한 것은 부모님을 생각하고 그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존경하고 효도(孝道)를 하는 것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더도 덜도 말고 중추절만 같아여라! 는 말과 같이 우리 부모님들도 자녀들이 1년 내내 항상 오늘과 같이 부모를 생각하고 섬기는 마음을 가진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내 부모의 은혜나 내 부모만 생각지 말고 모든 다른 이의 부모도 생각해야 합니다. 옛 글에도 내 어머니를 어머니로 해서 다른 사람의 어머니도 내 어머니로 생각하는 배려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부모님 되신 분들은 이와 같은 날을 당해서 더욱 좋은 부모로서의 은혜를 받기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생활을 해야 될 줄 압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아마 우리 생각에는 사도 바울이 생전의 마지막으로 쓴 편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인간적인 사도 바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사랑하며 보고 싶어 할 때에『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5절에 계속해서『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外祖母)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먼저 여기서 디모데의 거짓 없는 믿음은 원인이 있습니다. 본래 외조모 로이스의 마음속에 이 믿음이 있었고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이 믿음이 있었고 이제 보니 그같이『거짓 없는 믿음이 네 속에도 있는 것을 확신하노라』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삼대(三代)의 믿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삼대를 계속해서 내려왔습니다. 먼저 어머니의 믿음이 딸에게 미쳤고, 그 딸이 어머니가 될 때에 그 어머니의 믿음이 아들 디모데에게 미친 것입니다. 사실 거짓이 없는 어머니의 믿음은 삼대뿐 아니고 수 천대에 이르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 있는 것과 같이『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복을 주시되 수 천대까지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속에 있는 거짓 없는 참된 믿음은 딸에게 미치고 아들에게 미치고 손자에게 미치고 계계승승(繼繼承承)해서 수 천대에 미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이와 같은 어머니의 믿음, 믿음의 부모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런 어머니의 믿음, 혹은 믿음의 어머니를 생각하게 될 때에 구약을 펴게 되면 유명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를 연상하게 됩니다. 한나는 오랫동안 성태(成胎)하지 못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으로 수모(受侮)도 많이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간절히 하나님께『자기에게도 아들을 허락하여 달라고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던지 그 때 제사장으로 있던 엘리가 가만히 보니 정신없이 기도하는 것 같아서『술이 취한 줄로 오해했다』고 했습니다.『내가 술에 취한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후에 이 여인 한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일년 좀 남짓해서 귀한 옥동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아기를 가정에서 잘 기르다가 젓을 뗀 후에는 다시 그 아기를 데리고 멀리 실로 라고 하는 곳에 있는 하나님의 성막(聖幕)에 가서 엘리 제사장 앞에서 하는 말이『내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좋은 아들을 내게 주셨습니다. 내가 본래 하나님의 약조대로 이 아이를 하나님께 바칩니다. 또 온전히 이 아기의 평생을 하나님께 바칩니다.』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믿음의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이라는 점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 개인 개인의 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보다도 이 아들과 딸을 길러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것이 믿음 있는 어머니의 첫째 생각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믿음의 어머니가 그 다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 아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바란다고 하면 어떻게 이 아이를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고 가르칠 수 있을까? 염려하며 언제나 애쓰는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애들이 말을 배우자마자 곧 가르쳐 주는 유명한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명기 6장 4절에서 9절에 있는 말씀인데『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든지 행할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는 것입니다.(쉐마)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은 애기들이 말을 시작할 때부터 먼저『하나님은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니라 너희들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구약에 있는 다른 유명한 어머니를 연상하게 됩니다. 이 어머니는 유명하지만 그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는 모세의 어머니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숨겨져 있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우리가 잘 압니다. 모세의 형 아론도 우리가 잘 압니다. 그 까닭은 출애굽기 1장에는 모세의 부모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6장에 내려가서 나타납니다.
☛모세의 어머니의 이름은 요게벳입니다. 히브리 11장을 보면『믿음으로 모세의 부모가 아기를 낳은 다음에 그 용모가 아름다움을 보고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석 달 동안을 숨겨서 길렀다』고 했습니다. 아마 모세의 어머니처럼 아기를 낳은 다음에 안타까워한 여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아들을 낳았는데 그 때 애급의 법률은『누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들을 낳으면 나일강에 던지라』는 그런 엄한 칙령(勅令)이 있는 때였습니다. 내놓고 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귀한 아기를 주셨는데 나일강에 던지라고는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까? 히브리 기자는『믿음으로써 바로도 두려워하지 않고 석 달 동안 감추어서 길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래도 아기가 점점 크는데 그냥 계속해서 기를 수 없으니까 갈대로 상자를 잘 만들어 그 속을 역청으로 칠해서 물이 못 들어오게 하고 그 속에 강보를 펴고 그 아기를 누여서 나일강 갈대밭에다 갖다 놓았습니다. 그 아기를 나일강에 갖다 놓을 적에 모세의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어머니야말로 그 애기의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께 위탁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 요게벳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바로의 딸이 그 곳으로 목욕을 하려 나오게 되었고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발견하여 돌보게 되었습니다. 그것뿐 아닙니다. 요게벳이 그 후에 유모로서 자기가 기르게 되지 않았습니까?
젖을 뗀 다음에는 물론 애굽의 궁전에서 자랐지만 그 후에도 유모로서 종종 접촉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로서 교육한 사실이 출애굽기에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 후에 모세의 마음속에 있던 애국심과 신앙심을 보아서 어렸을 때에 얼마나 요게벳이 모세에게 자기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이야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했던 모든 약속의 이야기들을 모세에게 가르쳐 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모세는 모세가 된 것입니다.

어머니의 믿음은 어떻게 하면 꼭 아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기르고 바로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데 나타납니다. 자연히 양육과 교육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의 믿음과 교육을 생각할 때 우리 교회 역사에 있어서 주후 2,3세기에 산 유명한 교부(敎父) 오리겐의 어머니를 연상하게 됩니다.
☛오리겐은 날 때부터 천재로서 매우 총명하였습니다. 말을 배우자마자 세 살 적부터 시편과 산상보훈을 다 외고 7,8세 되었을 때는 성경의 대부분을 그저 머리 속에 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별명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재주가 있지만 혼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의 덕입니다.
어떻게 어렸을 적부터 믿음이 있었던지 17세 때 큰 핍박이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가 로마 관원에게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수감(收監)중에 있는 자기 아버지에게 그 때 17세의 아들이 편지하기를『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키세요. 그리고 믿음을 위해 생명을 바치기 바랍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합니다』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수감 중에 있는 자기 아버지에게『믿음을 지키라』고 격려했습니다. 나중에 순교했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순교하겠다고 자기 아버지가 순교한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그 때 어머님의 말씀이 내가 네 믿음은 알지마는 순교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때가 있는데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순교하게 되면 하려니와 순교를 자청(自請)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어머니의 제재로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18세 때에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유명한 신학교의 대리 교장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에게 이와 같은 철저한 교육을 받은 오리겐입니다. 그 후에 온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큰일을 하였는지 이것은 교회 역사를 읽는 사람은 다 기억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믿음을 생각하게 되면 자연히 어머니의 기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기를 하나님 앞에 바칠뿐더러 믿음의 어머니의 입술에는 아기와 가정을 위해서 중단 없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기도를 생각하게 될 때에는 주후 4,5세기에 걸쳐서 산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를 연상하게 됩니다. 이 어거스틴은 아버지는 신앙 없고 방탕한 사람이었으나 자기 어머니 모니카는 믿음이 독실하고 총명하고 애정이 깊은 아주 경건한 부인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머리가 좋아서 이 학교, 저 학교에서 매우 공부 잘한 수재였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당시에 젊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수사학, 철학, 문학 모든 학문을 잘 배워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고 사실 수사학 선생으로 여러 곳에서 초청을 받게 된 그런 학문적 기반을 닦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말하면 어거스틴은 방탕한 성질을 아버지에게서 받았습니다. 이렇게 재주가 있어서 공부는 잘하고 다른 사람을 잘 가르치지마는 그 행실은 부족했습니다. 자기 어머니가 그렇게 기도하고 권면 하지마는 예수는 믿지 아니 했습니다.

오히려 그 때 이단인 마니교를 따라 다니며 어머니의 마음을 더 상하게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이 아들이 회개하게 해달라고 아무리 기도했지만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아들이 30세 남짓해서는 북 아프리카 지방을 떠나서 이제는 이렇게 북 아프리카에만 있을 것이 아니고 로마로 가서 내 이름을 날리고 활약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향해서 가려고 합니다.
☛그 때 청년들이 흔히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 모니카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이 곳 자기 어머니 앞에서도 항상 실수하는 청년이 호화롭고 죄악이 많은 로마 도시에 가서 어떤 깊은 죄에 빠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로마에 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로마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마음이 너무 상해서 자기 목사님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내가 아들을 위해서 지금까지 기도하고 특히 로마에 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종래 이 아들이 로마에 가니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 목사가 하는 말이『그렇게 많은 기도를 받은 사람이 그냥 죄 가운데 있을 수는 없으니까 과히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격려의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혼자 보내기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어머니가 로마로 따라갔습니다. 로마에서 얼마 있었고 그 당시 좀 북편의 밀란 이라는 큰 도시가 있었는데 밀란에 가게 되니까 거기 또 따라가는 등 같이 다닙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밀란 이란 곳에 그 당시 유명한 암브로스라는 목사요 설교가 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거기서 암브로스의 명성을 듣고 그의 설교를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그 예배당에 한 두 번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암브로스의 설교와 그와의 접촉을 통해서 어거스틴의 마음이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33세 때에 밀란 교외에서 고요히 서재에 앉아 있으려니까 어떤 아이의 소리인지는 모르지만『어서 책을 펴서 읽으라』는 소리가 골목에서 들려서 이상한 감동을 받은 그가 우연히 성경을 찾아 펴서 읽으니까 그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고 로마서 13장 13-14절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어거스틴은 그 성경 구절을 받은 다음부터 온전히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온전히 회개한 후에 그 다음 부활절에 세례를 받고 너무 기뻐서 내가 이제는 여기 있을 필요가 없고 본 고향에 돌아가서 좀더 공부해서 내가 앞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멀리 북 아프리카를 향해서 모자(母子)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를 좀 지나서 작은 어떤 촌에서 자기 어머니가 병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어머니가『내가 여기서 세상을 떠난다고 조금도 섭섭해 말라 나는 내 기도를 이루었으니 나는 한이 없다』『내 시체를 어디 장례 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고『내가 네게 한 가지 부탁하는 것은 네가 제단에 나가서 기도할 때마다 나를 기억해 달라』는 이말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가시고기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이것이 부모의 삶입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머니가 세상 떠난 후에라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제가 나이는 많지 않지만 이런 예(例)는 많이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기도의 어머니는 그의 전 생활이 자녀에게 산 모범이 됩니다. 어머니의 기도의 모습, 어머니의 교회 나가는 모습, 어머니가 가정에서 가정예배 보는 그 모습, 어머니가 하나님께 헌금을 하는 모습,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그 모습, 다른 사람에게 친절히 하는 그 모든 모습을 자녀들에게 영원히 산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 유명한 설교가 헨리워드 비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이가 이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나는 한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철학자, 과학자가 전부 모여서 기독교를 반대하고, 또 한편에 경건한 어머니의 모습이 있다고 하면 내 어머니 한 분이 이 모든 사람을 다 대적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힘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미국의 유명한 대통령 링컨이『나의 현재 생활 전부와 또한 내가 장차 바라는 장래 생활의 전부도 오직 천사 같은 나의 어머니에게 빚진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천사와 같은 어머니, 믿음의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천사와 같은 인상(印象)을 주게 됩니다.

오늘 날 우리는 떠올리기도 싫은 가혹한 부모와 자녀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금의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1)로이스와 유니게와 같이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고
2)여기 앉은 부모님들은 천사와 같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고
3)여기 앉은 자녀들은 모두 디모데와 같은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믿음의 터 위에 세워지는 건강한 가정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성의 자아 실현/롬16:1-4
2005-02-11 14:02:35   read : 42

언어는 문화와 사고 방식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한 시대와 집단이 사용하는 어휘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 시대의 사고방식과 문화적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한자는 아직도 우리말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순수한 우리말 어휘가 많이 부족하기도 하고 특히 경어체를 구사하는 관습 때문에 한자 없는 우리의 언어 생활이란 상상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자는 고조선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여졌습니다. 중국 문화는 유교 문화로서 철저한 남성 중심 문화지요. 그래서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한자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성비하적인 어휘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노비'(奴婢)라고 말할 때 쓰는 종 '노'자 (여자 종을 말합니다)와 종 '비' (남자 종을 말합니다) 자는 모두 계집 녀 변으로 되어 있습니다. 종으로서 비천하고 복종적인 삶을 함축하고 있는 말에 계집 '녀'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간악하다고 말할 때 쓰는 침범할 '간' 또는 간음할 '간' 역시 계집 '녀' 변으로 되어 있습니다. 망령들었다고 말할 때 쓰는 거짓 '망' 또는 허망할 '망' 자 역시 계집 '녀' 변으로 되어 있습니다. '간음' 또는 '간통했다' 라고 말할 때 쓰는 간사할 '간' 또는 간음할 '간' 자는 계집 '녀'자 세 개가 쌓여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계집 '녀' 자가 들어가 있는 말은 부도덕하고 비천한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아들 '자'(子) 자는 도덕적이거나 삶에 유익한 것을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됩니다. 효도할 '효' (孝) 자 보세요. 아들 '자' 위에 늙을 '노' 자가 올려져서 효도할 '효'가 됩니다. 학교, 학문 할 때 쓰는 배울 '학' 자 역시 아들 '자' 자가 들어 있습니다. 손자 손녀 할 때 쓰는 말로 자손 '손' (孫), 또는 이을 '손' 자에도 아들 '자' 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전통과 가문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손'자에 아들 '자'자가 들어가 있는 것이지요. 존재, 생존이라고 말 할 때 쓰는 있을 '존'(存) 자 역시 아들 '자' 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의 일상 언어 생활 속에는 여성 비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화폐에 넣는 인물 가운데 특별히 여성을 고르라면 누구를 고르겠느냐는 설문 조사가 있었습니다. 1등이 선덕 여왕이었고, 2등은 신사임당이었답니다. 신사임당은 흔히 현모 양처를 대표하는 인물이지요.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에 잘 맞는 모범적인 여성이라는 겁니다.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이 어떻습니까? 남성 중심적이지요. 여성을 비하하고 여성을 그저 남자와 자식의 종속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가치관 아닙니까? 그런 전통적 가치관에 신사임당이 가장 모범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사임당을 조금 깊이 연구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임당은 1504년 연산군 10년에 강릉 오죽헌에서 아버지 신영화와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고 자라났습니다.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서 7살 때 안견의 그림을 본떠 그리기도 했고, 시문, 경전, 서예, 자수 등에도 탁월했다고 합니다. 19살 때인 1522년 이원수와 결혼해서 4남 3녀를 두었는데, 그 중 셋째 아들이 율곡 이이입니다.

신사임당은 결혼 후에도 그림과 시문 등에 뛰어난 재주를 보이는데, 숙종 때 사람 송상기는 신사임당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집에 사임당의 풀벌레 그림 한 폭이 있는데, 여름에 마당 가운데로 내다가 볕을 쬐는데 닭이 와서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했다." 또 그녀가 지은 사친(思親)이라는 시는 친정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시로 당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는 시로 평가됩니다.

그녀는 조선의 남성중심주의에 대해서도 <동계만록>이라는 책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이 죽으면 다시 장가가지 말라고 중국 <예기>의 교훈을 들면서 말합니다. 일곱 남매 자식이 있으니 다시 장가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라고 말해요. 또 남편이 당시 영의정의 문하에 가서 많이 소일하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권했다고 합니다. "저 영의정이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를 탐하니 어찌 오래갈 수가 있겠소. 그가 비록 같은 덕수 이씨 문중이요, 당신에게는 오촌 아저씨가 되지만 옳지 못한 분입니다. 그러니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마시오." 남편이 정말 아내의 말을 따라 그 집에 발을 끊었는데, 얼마 후 영의정이 화를 당하게 되었을 때 그녀의 남편에게는 아무 화가 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공부하러 서울길을 떠났다가 세 번이나 되돌아오는 우유부단함을 보였을 때 남편을 독려해 결국 학문에 매진토록 한 것은 많이 알려진 일화이기도 합니다.

보통 신사임당은 아들 율곡 이이를 잘 키운 자녀 교육의 대표적인 모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신사임당의 자녀 교육은, 오늘 우리가 하는 것처럼, 자신을 모두 희생하면서 자녀에게 100% 자기의 온 삶을 쏟아 붓는 그런 '자아상실형 교육'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어미로서 자기 스스로에게도 최선을 다하는 '자아실현형 교육'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머니들, 자아상실형이십니까, 자아실현형이십니까? 오늘 설교의 제목이 여성의 자아 실현입니다. 자아 실현. 신사임당은 비록 48살 젊은 나이로 죽지만 율곡 이이를 키워낸 훌륭한 어머니로서, 또 자기 스스로에게는 예술적, 학문적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자아 실현형 인격체로서 우리 한국 여인들에게 귀중한 로울 모델이라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 이렇게 자기를 완성시킨 자기 실현형 여인 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 16장에서 사도 바울은 두 명의 여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에서는 뵈뵈라는 여인이고, 3절과 4절에서는 브리스가라는 여인입니다. 두 여인의 공통점은 사도 바울의 사역을 도우면서 복음 안에서 자기를 완성시켜 나간 자아 실현형 여인이었다는 겁니다. 로마서가 기록되었을 당시는 지독한 남성 중심 사회였습니다. 여자는 심지어 사람 수에도 포함시키지 그런 않는 시대였어요. 그런 속에서 뵈뵈와 브리스가는 여인으로서 자기를 완성시켜나가며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간 그런 아름다움 여인들이었습니다.

먼저 뵈뵈를 보시겠습니다. 뵈뵈는 본문 1절에 겐그레아 교회 출신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뵈뵈를 소개하면서 3가지 호칭을 그녀에게 붙이고 있습니다.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이라고, 일군 (diakonos)이라는 호칭을 쓰고, 또 우리 자매 뵈뵈라고 하면서, 자매(adelphi)라는 호칭을 씁니다. 또 2절 마지막 부분에,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하면서, 보호자(prostatis)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뵈뵈를 떠올릴 때마다, 교회의 일군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자매로, 또 바울 개인을 위해서는 보호자로 그녀를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 세 가지 호칭 중 교회의 일군이라는 호칭과 사도 바울의 보호자라는 호칭에 대해서 좀더 부연 설명 드리겠습니다. 자매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뵈뵈를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이라 부르고 있어요. 일군, 교회의 일군이라는 겁니다. 일군이라는 말, diakonos라는 말은, 고린도전서 3:5절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과 아볼로를 지칭할 때 diakonos라고 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diakonos라고 말합니다. 그밖에도 바울 서신 여러 곳에서 자기 자신 뿐 아니라 많은 동역자들에게 diakonos 라는 말합니다. 즉, 사도 바울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거의 같은 수준의 중요성과 수고로써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diakonos라고 부르고 있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뵈뵈의 중요성, 뵈뵈의 수고, 또는 뵈뵈의 리더쉽은 사도 바울과 거의 같다는 거예요. 단지 사도 바울은 순회 설교자로서 여러 이방 교회들을 다니며 사역했지만, 뵈뵈는 한 교회, 겐그레아 한 교회 내에서 사도 바울처럼 일하는 리더라는 겁니다. 뵈뵈는 이렇게 교회 안에서 리더쉽과 헌신적 수고를 통해 자기를 완성시켜나간 자아 실현형 여인이었습니다.

또 다른 호칭으로, 사도 바울은 뵈뵈를 나의 보호자라 부르고 있습니다. 보호자, prostatis는 로마시대 귀족이 평민을 법률적으로 또 사회 경제적으로 보호할 때 그런 귀족을 prostatis, 보호자라 합니다. 즉, 뵈뵈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고 재정적으로도 상당한 부를 소유한 사람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House Church였습니다. 마가의 집이 부잣집이어서 그 집에서 초대 교회가 시작되었듯이, 고린도 바로 옆에 있던 도시인 겐그레아 교회 역시 뵈뵈의 집에서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자기 집을 교회 모임 장소로 Open하고 교회의 재정적 필요를 담당하며, 사역자인 바울의 보호자로서 역할을 다했던 여인 뵈뵈였습니다. 바울은 그녀를 얼마나 신뢰했으면 로마서를 그녀 손에 들려서 로마 교회로 보냈습니다.

만일 뵈뵈가 없었다면 사도 바울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로마서를 전달하는 것이 여의치 못했을 것이고, 그만한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초대교회가 안고 있었던 경제적 핍절, 사회 법률적 고통 등 여러 어려움을 당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뵈뵈는 여인의 몸으로 이런 어려움들을 손수 담당하면서 교회를 세워나가고 사역자를 도왔습니다. 그러했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마무리하면서 여인 뵈뵈를 가장 먼저 소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자 성도님들, 뵈뵈처럼, 가정과 교회를 위해 일군으로 또 보호자로 자기를 완성시켜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사도 바울은 브리스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브리스가는 아굴라의 아내였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로마 교회의 최초 교인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로마 시내의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유대인들의 큰 반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유대인들과 쟁론이 벌어졌는데 그것이 소동으로 번질 정도였습니다. 할 수 없이 로마 정부는 주후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주축 멤버들을 로마 밖으로 추방시킵니다. 그때 브리스가와 아굴라도 추방되어서 고린도로 넘어오는데, 이때 고린도에서 바울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아굴라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사도행전 18장에 의하면 바울이 그 집에 유하면서 그 천막 만드는 일을 함께 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1년 반 머문 뒤, 에베소로 들어가는데, 에베소에서도 저들은 자기 집을 예배 처소로 개방해서 에베소 교회가 시작되게 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 있어서 특이한 것은, 언제나 부인 브리스가가 먼저 소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렇지만, 사도행전 18장과 디모데후서 4장에 이들 부부의 이름이 나오는데, 모두 브리스가와 아굴라라고 소개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라고 하지 않아요. 남성 중심 사회인데, 이 부부는 언제나 부인의 이름이 남편 이름보다 앞에 나오고 있습니다. 성서 학자들에 따라 그 이유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브리스가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천막 기술자에 불과했던 남편 아굴라보다 부유층 출신이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또 다른 하나는, 교회 사역에 있어서 부인 브리스가가 언제나 남편 아굴라보다 더 열심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부부를 떠올리면 언제나 부인이 먼저 떠오르게 되고 그러다 보니 부인 이름이 앞에 나온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도 그런 부부들 계시지요. 성서 학자들도 이 두 번째 이유를 더 타당하다고 인정합니다.

어찌되었든, 브리스가는 부유층 출신으로서 교회에 상당히 열심인 여인이었습니다. 6세기 경 로마의 한 교회는 교회 이름을 브리스가 교회라고 짓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여인으로서 자기를 완성시켜 나갔던 브리스가였습니다. 바울은 저에 대하여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를 위해 생명이라도 바칠 각오로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는 여자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 가정과 교회를 위해 뵈뵈와 브리스가가 되십시오. 자기 목이라도 내어놓을 수 있는 헌신과 열심으로 교회와 가정을 세우고 보호하시기 바랍니다. 세우는 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십시오. 허물고 무너뜨리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헐뜯고 해 끼치는 방해자가 되지 마십시오.
세상에 여자로서 자기를 완성시켜나가는 방법 많이 있습니다. 여성의 자아 실현을 위한 강좌, 서적, 모임 등 많지요. 오늘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교회와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서 자아 실현을 이루어나가십시오. 뵈뵈 처럼, 브리스가 처럼, 2천년이 넘도록 로마서는 그 여인들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가장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십시오.

오늘 우리 시대 속에 자아 실현을 훌륭히 이룬 여성으로 맹인 강영우 박사의 부인 석은옥 여사가 있습니다. 1991년 미국 여성 명사 인명 사전에 그 이름이 등재될 정도로 여성으로서 자기의 삶을 훌륭히 살아낸 현대의 신사임당이라 할 수 있는 여인입니다. 그분에 대해 한선애라는 분이 쓴 "진실된 사랑"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 읽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지난 2월 열린 신앙 간증회 중 여전도회 주최로 강영우 박사 사모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맹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훌륭하게 사회 생활과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강 박사님 뒤에서 사모님의 힘이 얼마나 컸는지 강조 안 해도 모두들 이해가 될 것이다. 처음 대화 모임에 갈 때의 기대는 단지 훌륭한 일을 한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의 봉사와 희생을 어떻게 강조(?)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 등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분을 뵙고 여러 말씀을 들으며 나의 편협한 마음이 너무나 부끄러웠음을 고백한다. (중략)
자기 희생이나 어떤 사명감 같은 느낌이 아니라 '사랑했기에 결혼했노라'는 말씀은 깊이 새겨 보아야 할 이야기인 것 같다. 흔히 우리들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때 상대방의 단점은 애써 감추고 좋은 점만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요즘의 결혼 풍습을 보면 학벌, 재산, 건강 등 눈에 보이는 조건만을 사랑하고 상대방의 문제점들은 관심조차 보이지 않다가 살면서 부딪히면 이겨 내지 못하고 이혼하는 사례를 여럿 볼 수가 있다. 하지만 그 분은 박사님의 보이지 않는 눈도, 그로 인한 앞날의 불확실함도, 불우해진 가정 환경도, 모두 사랑했기에, 살면서 생기는 여러 어려움까지도 모두 이겨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사랑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인 것 같다. 우리 인간들의 모든 죄까지도 사랑하셨기에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이다.
사모님의 '사랑하였기에'란 말 한마디는 어떤 훌륭한 분의 장황한 웅변보다도 더 값진 교훈으로 남았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자신의 희생을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끝없는 사랑을 강조하신 것이다.

맹인 강영우라는 남자를 위한 봉사나 희생 이전에 사랑이라는 이유로 그 어떤 장점 단점도 초월했습니다.
그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한 그 사랑, 그 사랑이 한 여인의 삶을 완전하게, 완전한 자기 실현의 삶으로 살게 한 것입니다.
Mother's Day를 보내시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 가정에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이 흘러 넘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
2005-02-15 15:18:23   read : 287

성경에는 명령문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 양을 치라 등등 우리에게 익숙한 대부분의 말씀들이 전부 명령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명령문이 많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 모든 명령에 어느 만큼 복종하느냐 하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신앙 수준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신앙에 대해서 눈 높이를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너희의 책임은 회당에 모이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회당 출석은 꼭 해야 한다.”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사람들은 신앙 생활을 교회 나가는 것으로 국한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말씀입니다만 실제로 저는 “교회 잘 다닌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교회 잘 다닌다”는 얘기는 “잘 다니지는 않지만 보통 수준으로는 다닌다”는 말도 성립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학생 중에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있고 잘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는 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는 교회 잘 다니는 사람과 잘 다니지는 않지만 보통 수준으로는 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출석하는 사람과 정상적으로 출석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신앙 생활은 교회에서 배운 내용을 어느 만큼 자기 생활에 적용시키느냐로 따지는 것이지, 교회 나오면 백 점이고 안 나오면 빵 점으로 채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1년 내내 교회 예배를 안 빼먹은 것은 신앙 생활 잘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출석을 정상적으로 한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여부는 다시 따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일단 교회 출석으로만 신앙을 따집니다.
거기서 더 열심을 부리면 그 다음에는 어느 만큼 열심히 기도하는지, 어느 만큼 열심히 성경 읽는지, 어느 만큼 열심히 봉사하는지, 어느 만큼 열심히 전도하는지 등등 주로 종교적인 형태로 신앙을 따집니다.
하지만 성경에 있는 수두룩한 명령문들은 꼭 그렇게 종교적인 형태로만 국한되어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세금을 꼬박꼬박 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세금을 내는 것이 신앙 생활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세금이야 꼬박꼬박 내건 말건 교회 출석만 정상적으로 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봉사 열심히 하고, 성경 열심히 읽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네 이웃을 비방하지 말라,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어른을 공경하라, 남편에게 복종하라, 아내를 사랑하라는 얘기는 어떻습니까?
신앙 생활이라기보다 오히려 바른 생활 교육 같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라면 굳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적용시킬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이상한 일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교회 안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종교 행위로 나타나지 않고 생활로 나타나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은근히 부담감을 갖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책임이 교회 출석하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하는 것이라고 해도 버거운데, 그것만 다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멀었다는 뜻으로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달리 생각하면 오히려 일석이조일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세금 꼬박꼬박 내고, 열심으로 어른을 공경하고, 정성껏 불쌍한 사람을 돌보고, 말할 때마다 주의하여 선한 말만 해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착한 사람으로 인정은 받을지언정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지는 못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살면 누구나 감당해야 할 일을 하면서 그것을 신앙 생활로까지 인정받습니다.

어떤 고아가 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백 점을 맞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백 점을 맞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일입니다.
성적표에도 백 점으로 기록될 것이고, 나중에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효도는 아닙니다.
단지 자기만 열심히 한 것이고, 자기만 기분 좋은 것으로 끝납니다.
부모가 있는 학생은 어떻습니까?
부모가 있는 학생도 백 점을 맞으면 물론 기분 좋습니다.
자기만 기분 좋은 것이 아니라 부모도 같이 기분이 좋습니다.
효도로 치면 단연 으뜸입니다. 효도 중에 그만한 효도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그것을 신앙 생활까지 인정받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 사업, 살림살이, 연애, 공부 등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단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 점수를 딸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신앙은 종교 행위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생활로 이어져야 한다는 얘기는 부담이 되는 얘기가 아니라 오히려 신바람 나는 이야기입니다.
말 그대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효심으로만 따집니다만 교회에서는 신앙의 한 척도로 부모 공경을 얘기합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효성이 없는 것 이전에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를 제대로 공경하면 효도도 물론 효도입니다만 신앙 생활도 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신앙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앙이 제일 중요하다는 얘기는 세속적인 일보다 신앙적인 일이 상대적으로 우선 순위를 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우리의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잘못 정리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변두리 과목’이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내신성적이라는 말은 없었고 예비고사와 본고사가 있을 때였는데, 본고사 과목인 국, 영, 수는 주요 과목이고, 나머지 국사, 세계사, 정치경제, 지리, 사회문화, 생물, 기술 등은 일반 과목입니다.
그리고 예비고사 과목에 들어가지 않는 과목들 - 음악, 미술, 불어, 교련 등을 가리켜서 변두리 과목이라고 했습니다.
음악, 미술은 못해도 대학 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또 국사나 세계사를 잘하는 것보다는 국, 영, 수를 잘하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제일 중요하다는 얘기를 마치 변두리 과목보다는 일반 과목이 중요하고 일반 과목보다는 국, 영, 수가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청년이 저한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 “목사님, 저는 아직도 예수님보다 제 여자 친구가 좋습니다. 예수님과 여자 친구 중에 택하라고 하면 목사님께는 죄송합니다만 저는 제 여자 친구를 택하겠습니다.”
그 청년 얘기가 왜 잘못 되었는지 아시겠습니까?
“어떻게 자기 여자 친구를 감히 예수님보다 앞세우느냐? 당연히 예수님이 우선이고 여자 친구는 그 다음이라야 한다.”가 아닙니다.
신앙을 잘못 적용해서 틀렸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신앙은 그렇게 옹색한 것이 아닙니다.
대학 진학을 앞둔 고등학생에게는 미술이나 음악보다 국사나 세계사가 중요하고 국사나 세계사보다 영어나 수학이 중요합니다만,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여자 친구가 중요하냐? 예수가 중요하냐?”라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다른 것보다 상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먼저 택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청년의 경우에 “교제를 하되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교제를 하고 있느냐?”를 따져야지, “여자 친구가 중요하냐, 예수가 중요하냐?” 하고 따지는 것은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집안 일보다는 교회 일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모시고 있는 시어머니 식사를 챙겨드릴 틈도 없이 교회 봉사를 하면 효도보다 신앙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잘한 일이 아니라 부모님을 모시는 방법이 성경적이 아니어서 틀린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교회 봉사가 먼저냐, 시어머니 식사가 먼저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어머니를 모시는 방법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가?”가 기준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십계명 중에 다섯 번째 계명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말이 있으면 “네 자식을 사랑하라”라는 말도 있을 법한데, 그런 말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일은 굳이 계명으로 정하지 않아도 모두가 다 알아서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있는 본성입니다.
하지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다릅니다.
계명으로 정해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십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어려운지를 물어보면 아마 사람마다 다르게 대답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오늘 본문이 가장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른 계명들과 오늘 본문을 비교해 보십시오.
다른 아홉 가지 계명에는 “이 계명을 지키면 어떻게 하겠다”라는 반대 급부가 없는데 유독 오늘 본문에만 반대 급부가 있습니다.
다른 계명들에는 단지 우리가 지켜야 할 내용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너희가 살인하지 않으면 내가 그런 사람에게 기름진 땅을 나눠주겠다.”,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지 않으면 내가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아내로 맞게 해주겠다.”, “도적질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않으면 내가 돈으로 보상해 주겠다.”가 아닙니다.
그냥 “살인하지 말찌니라”, “간음하지 말찌니라”, “도적질하지 말찌니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유독 오늘 본문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라고, 부모를 공경하면 어떤 보상이 있는지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집에서 어린애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라고만 얘기하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해라, 이번에 성적이 오르면 인라인스케이트를 사주마.”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이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 것 같은데 그것이 제대로 안 된다는 명백한 반증입니다.

애들이 집에서 엄마에게 야단을 맞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엄마에게 야단맞았다고 하면서 시무룩하게 지냅니다.
애들이 야단맞을 일을 하는 것은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차피 애들은 야단맞으면서 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고등학생쯤 되면 엄마에게 야단맞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는 “엄마에게 야단 맞았다”고 하지 않고 “엄마와 싸웠다”고 합니다.
“엄마와 싸웠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엄마에게 야단맞을 일을 한 주제에 부모의 권위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패륜아라는 뜻입니다.
감히 부모를 상대로 싸웠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인간의 탈을 쓰고는 차마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아직 철이 없을 때는 그것을 모릅니다.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까지도 굴복시켜서 자기 고집을 세우는 것이 잘하는 일인 줄 압니다.

몇 년 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3개월 동안 아버지 병 수발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조금씩조금씩 돌아가시는 것을 3개월 동안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 3개월 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부끄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고2가 되면 수학여행을 가곤 했습니다.
고1만 마치면 모든 학생들의 관심이 수학여행에 집중됩니다.
제 딸이 마침 고1인데, 제 딸에게 물어보니까 일주일에 수업이 36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고1 때는 55시간이었습니다.
토요일에만 다섯 시간이었고 월, 화, 수, 목, 금요일은 전부 열 시간씩이었습니다.
교실 한쪽에 시간표가 붙어 있는데 그 시간표를 보면 점심 시간이 지나도 아직도 다섯 시간이나 남아 있습니다.
정말 아찔합니다.
게다가 월요일마다 주초고사를 보았고 토요일마다 주말고사를 보았습니다.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꼬박 1년간 그렇게 생활하다가 2학년이 되면 유일한 탈출구가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수학여행입니다.
수학여행을 가면 그 기간 동안에는 공부에서 해방될 수 있으니, 그 사실만으로 모두에게 커다란 매력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간다는 가정통지문을 나눠주기에 아무 생각 없이 집에 갖다 드렸습니다.
간혹 집안이 어려운 학생들은 경제 사정 때문에 수학여행을 포기하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수학여행을 안 간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엉뚱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 “좋다. 수학여행을 보내줄 테니 그 대신 갔다 와서 공부 열심히 하겠다는 약속을 해라.”
“예, 알겠습니다” 하고 갔다오면 되는데 공연한 오기가 발동했습니다.
제 형이 저보다 4살 많은데 형이 수학여행을 갈 때도 아버지께서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 때 형은 선선히 약속을 하고는 수학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두고두고 잔소리를 들었습니다.
건수만 있으면 “수학 여행만 보내주면 공부 열심히 한다고 약속해 놓고 뭐 하느냐?”는 구박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형이 남보다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법 잘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수학 여행을 갔다 오고 나서는 걸핏하면 잔소리를 듣는 것을 제가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 알겠습니다. 수학여행 보내주면 갔다 와서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고분고분 말씀드리는 대신 “알았습니다. 그러면 수학여행 안 가겠습니다.” 하고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옆에 있던 어머니는 애가 타셨습니다.
그 날부터 날이면 날마다 제 방에 오셔서 저를 채근하셨습니다.
“남들은 다 가는데 혼자만 안 가면 어떻게 하느냐? 아버지께 갔다 와서 열심히 공부한다고 말씀드리고 다녀와라.”
아무리 말씀하셔도 저는 수학 여행 안 가고 대신 공부 안 하겠다는데 왜 그러냐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수학여행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왔습니다.
내일이면 출발입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완강했습니다.
어머니만 홀로 애를 태우시면서 하루에도 서너 차례씩 제 방을 드나드셨습니다.
출발 당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학교에 안 가도 되는 속상함을 감추면서 억지로 이불 뒤집어쓰고 늦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미리 챙겨 둔 여행 가방을 내미셨습니다.
어제 아버지께서 학교에 가서 돈을 내고 왔으니까 얼른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 될 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내심 바라던 대로 일이 진행된 것입니다만 “안 간다는데 왜 그러느냐?”고 마지막으로 심통을 부리고는 못 이기는 척하고 가방을 받아 들고 수학여행을 가 줬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통쾌하게(?) 이긴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자식이 있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는 저도 결혼해서 가정을 갖고 있는 가장이고 한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저는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물론 철이 없던 그 당시에는 아버지한테 본때를 보였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신났습니다.
“나도 고집이 있는 사람인데 날 뭘로 알고……” 하는 패륜적인 발상으로 너무도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만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슴 아픈 기억이 되었습니다.
철이 없던 시절에는 제가 잘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두고두고 후회가 되는 엄청난 불효를 저지른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자식은 자기 스스로 자기편이 되어서 부모와 싸웁니다.
자기 생각에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자식편이 되어서 자식과 싸웁니다.
부모 생각에는 자식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자식편이고 자식도 자식편이니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싸우면 늘 자식이 이깁니다.
그리고 자식은 그것이 잘하는 것인 줄 압니다.
적어도 철이 들기 전까지는 그렇게 압니다.
어떤 집 애가 부모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얘기는, 그 집 부모가 전에는 애를 사랑하지 않다가 그때부터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집 애가 전에는 철이 없었는데 이제 비로소 철이 들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바른생활 교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하시려는 내용이 담긴 책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하셨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어라”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거라” 하는 한가한 타령(?)을 늘어놓을 틈이 없는 책입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왜 한가한 타령이겠습니까만, 한가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만큼 성경은 진지하고 시급하고 심각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성경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이 땅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 하늘에 닿아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까마귀를 가리켜서 반포조(反哺鳥)라고 합니다.
어미가 늙으면 새끼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주기 때문에 생긴 별명입니다.
효도를 미덕으로 알고 있는 인간이 보기에는 상당히 훈훈한 모습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까마귀에게 효성에 대한 감각이 있을 리는 없습니다.
단지 본능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뿐입니다.
효성은 사람에게만 있는 고급스러운 감정입니다.
효성이 깊은 사람은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심지어는 나라에서 표창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땅에 속한 일에 불과합니다.
고작해야 부모 없는 천애 고아가 열심히 노력해서 백 점 맞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효도하는 것은 효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향기로운 예배로 열납하십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효도도 우리에게만 있는 특권인 셈입니다.
여러분은 이 특권을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다같이 어버이 은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마칩니다.

낳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사람의 마음속엔 온 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저희로 하여금 어버이주일로 지키게 하셨사옵나이다.

저희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자랄 수 있도록

저희에게 어버이를 허락하셨사오니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이 땅에 있는 모든 어버이들에게 크신 은총을 더하여 주옵시고

모든 자녀들에게 부모님을 보다 더 잘 공경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자녀들을 향한 어버이들의 모든 기도에 응답하여 주옵시고

병고에 시달리는 어버이가 있사오면 하루속히 건강이 회복되게 하옵시고

혹 아직까지 주님을 알지 못하는 어버이가 있사오면

속히 주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있도록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날로 가정이 파괴되어 가는 이 험악한 세상 속에서

오직 주님의 은총으로 저희 가정이 보호되기를 소망하옵나이다.

사랑과 평안이 넘치는 가정이 되게 하옵시고

가족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칭찬을 받을 수 있게 하옵소서.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은총이 날로 더하여 가는 가정이 되게 하옵시고

정녕 그런 가정에서 더욱더 아버지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마음/눅15:11-32
2005-02-17 09:30:05   read : 333

I. 아버지 이야기

인터넷에 답답한 남편 스타일, 피곤한 아내 스타일 글이 실려 있습니다. 제가 남편된 사람이니 답답한 남편 스타일만 몇 가지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민속박문관형 - 옛날 타령이나 하며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각주를 달아놓았습니다. 민속촌에 살지 왜 나왔어.

나무꾼형 - 아내는 부모형제도 없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 줄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당신도 딸의 아버지란 사실이란 잊지 마시오.

한국은행형 - 콩나물값 얼마? 목욕비 얼마? 일일이 신청해서 쓰게하는 남편. 부부관계도 하청업자 대하듯 합니다. 요새 인건비나 알고 사시는지요?

백화점형 - 요구조건이 많은 사람입니다. 늘 아내가 나를 위해 뭘 해 줄 것인가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 내가 아내를 위해 뭘 해 줄 것인가 좀 생각해 보시오.

성형외과형(짜집기형) - 요리는 누구처럼, 살림은 누구처럼, 자식교육은 누구처럼, 잠자리는 누구처럼. 아내를 뜯어 고쳐서 살려는 사람. 각주를 이렇게 달아놓았습니다. 너부터 고쳐!

결론은 요구가 많은 사람은 어린아이요, 내가 타인을 늘 고려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버이 같은 아버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란 뜻이겠지요. 오늘 설교의 제목이 「아버지 마음」입니다.

한 아이가 쓴 동시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 아빠는 왜 안경을 쓰실까? 나를 더 자세히 보려고 안경을 쓰시겠지..."

"우리 아빠는 왜 키가 크실까? 내가 어디 있나 찾으시려고 키가 크시겠지."

한자어 어버이 친(親)자는 나무목(木)에 설립(立)을 붙이고 볼견(見)을 옆에 붙이면 어버이 친(親)자가 됩니다. 자녀를 찾기 위해서, 자녀를 보살피기 위해서, 나무 위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고 있는 모습 - 그것이 어버지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집나간 자식을 기다리며 지붕위에 올라가 긴 목을 뽑아 멀리 살피는 한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가장 긴 비유, 가장 많이 알려진 비유, 듣는 이들에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비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 탕자의 비유로 회개와 전도 메시지를 위해 집나간 자식에게 초점을 맞춰볼 수는 있지만 성경의 본래 의도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리기 위한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잃은 양의 비유 - 잃은 양의 비유라기 보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이야기입니다.

잃은 돈의 비유 - 잃은 돈의 비유라기 보다 잃은 돈을 찾는 여인의 심정의 마음입니다. 잃은 아들의 비유 - 잃은 아들의 비유라기 보다는 잃은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본문은 사복음서 가운데 누가에만 기록된 특수 자료입니다. 누가 신학 전체틀에서 본문을 이해해야 합니다. 누가 복음의 주제는 「연약한 사함, 소외된 자, 잃은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어디에도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죄인을 일컬어 "탕자"라 부는 말이 없습니다. "The Lost" 잃은 자입니다. 행여 아버지가 집 떠난 아들을 보고 마음속으로라도 "탕자같은 자식" 이라고 생각한 흔적도 근거도 누가복음 아니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떤 이야기든지 우리가 주인공을 알려면 그 얘기의 결론을 보면 압니다.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소설 한 권을 읽어도, 아니 만화 한 편을 보더라도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엑스트라는 칼만 지나가면 윽하고 쓰러져 죽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총 몇 번 맞아도 다시 나물캐는 아가씨가 치료하고 다시 살아나 끝까지 마무리를 장식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마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때문에 본문의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본문의 주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이 땅의 죄인들을 향한 아버지 마음이 어떠한가에 대해 알려줍니다. 이 땅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특별히 공동체의 리더들이 어떤 마음으로 교회와 지체들을 섬겨야 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아라!"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하니까 여성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이 누가복음의 저자가 가부장적인 선입견에 묶여 있다고 비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의 신학을 모르는 소리입니다. 누가만큼 여성의 권익을 부각시킨 사람도 없고, 누가만큼 당시 소외계층, 약자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저자도 없었습니다. 누가는 오히려 누가복음 15장 세 가지 비유를 선택하면서도 남자와 여자를 적정하게 안배시켜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잃은 돈을 찾는 부인의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어서 아버지 마음이라기 보다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부르는게 좋겠다고 느끼시는 분이 계시면 그렇게 이해해도 아무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II. 아버지 됨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일컫고 있습니다. 교회를 가족으로 하나님은 이해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일컬어 교장이라고 부르는 곳이 없습니다. 교회는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학교를 일컬어 사장님이라 부르는 곳도 없습니다. 교회는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축복의 통로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이드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떠한가? 내 삶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신관이 결정된다."

루터는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루터 신학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진노의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프랑스 역사상 69명의 왕이 집권하는 동안 특별히 백성들로부터 존경받은 세 명의 왕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세 왕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친부모 밑에서 사랑받고 자란 왕이란 것입니다. 그들의 통치 스타일은 한결같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섬기고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무서운 저주가 있다면 아버지 마음을 잃은 사람들이 많아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북한 공산 사회를 보십시오. 부모를 떠나 탁아소에서 총싸움하며 자란 아이,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무시무시해지고 포악해 져만 가고 있습니까? 그 사회가 얼마나 황폐되어져만 가고 있습니까?

심리학자는 어버이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감정 가운데 거절 감정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 버림받았다는 느낌은 인간이 경험한 가장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거절감정이 내 안에서 치유받지 못하면 인생을 풀어가는 모든 키가 거절 감정, 상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작은 일에도 쉽게 마음이 상해합니다. 자신이 용납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극한의 비난과 적개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원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평범한 대화에서도 분노를 드러냅니다. 때로 애정에 굶주려 합니다. 조금만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집착증을 드러냅니다. 쉽게 이단에 빠지기도 합니다. 친밀한 관계에서도 감정의 기복이 심해집니다. 때로 일에 몰두하여 성공하기도 하고 봉사 사업을 크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질적 이유 때문이 아니고 인정과 존경 욕구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작은 실수에도 야단과 저주를 퍼부어 댑니다. 화를 쏟아 냅니다. 쉽게 실망합니다. 또 다른 거절 감정을 자녀들에게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거절의 신화를 가정속에 이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 모두 아버지는 되었지만 아버지 마음을 배우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위기가 있다면 가정의 위기요, 가정의 위기가 있다면 곧 아버지 됨의 위기가 있습니다. 오늘 전세계 화두는 아버지를 살리자! 아버지의 마음을 새롭게 하자는 것입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아버지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

4살쯤 되면, 우리 아버지는 전지전능하다고 믿습니다.

12살이 되면 우리 아버지는 아는 것이 많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15살쯤 되면 아버지는 구식이야,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느낍니다.

21살쯤 되면 아버지는 골동품이야 차라리 없는게 낫다고 말합니다.

27살쯤 되면 제법 아는 것도 있고 판단이 옳을 때도 있다고 가끔은 느낍니다.

32살쯤 되면 인생의 문제를 내 아버지와 의논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50세가 되면 아버지는 참 훌륭했다고 말합니다.

60세이 넘어서면 내 아버지는 내 인생의 미래를 모두 알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만 못하다고 느끼게 된답니다.

III. 타락 : 아버지를 떠남

첫 얘기를 낳아 길러본 얘기 엄마들이 친정 어머니에게 전화 걸어 하는 말이 있지요? "엄마, 내가 애낳아 길러 보니 엄마 맘 알겠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요. 아버지 마음을 배우고 나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자식 키우는 부모를 보십시요. 그토록 손해보는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그 많은 시간, 그 많은 정성, 그 많은 돈을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마음입니다.

이런 부모의 사랑을 자식들이 깨닫고 마냥 감사해 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처럼 자식들은 부모곁을 떠나겠답니다. 하나님 곁을 떠나겠다는 인생의 몸부림, 그 자식 붙들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 이것이 성경에 도도히 흐르는 이야기요 인류 역사속에 흐르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에덴 동산의 풍요로움도 모자라서 선악과 먹겠답니다. 이것이 타락의 본질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곁을 떠나서 혼자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피해서 나 혼자 일어서 보겠다고 하는 것, 하나님 없이 살려는 몸부림, 이것이 타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요." 죽기도 전에 유산을 요구합니다. 처리할 권리까지 요구합니다. 이는 중동사회의 전통에 의하면 아버지 없이 사는게 낫겠다는 선언입니다.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결국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먼나라입니다. 먼나라가 어디입니까? 무조건적인 사랑이 전혀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과는 먼 나라였습니다. 평화가 없는 먼 나라였습니다. 신비해 보이고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가족공동체를 파괴하고 자신을 파괴하는 나라였습니다.

오늘도 사탄은 우리를 속입니다. 먼나라로 가라! 아버지를 떠나 뭔가를 보여줘라. 이것이 사탄의 목소리입니다. 너는 아버지 없이 얼마든지 살 수 있어. 너는 하나님 처럼될 거야. 선악과 먹어. 먹지마 먹지마, 하지마 하지마, 지겹지 않니?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어. 아버지 곁을 떠나! 이것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그때, 그 자식 재산 다 잃을 것 알면서도 아버지는 속아줍니다. 아니 믿어 주기로 작정합니다. 왜요? 자식은 재산보다 크기 때문에. 재산을 버리고 아들을 얻겠다는 거지요. 이것이 하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그 자식을 공부나 성적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 자식의 능력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 관계로 만나는 것입니다.

들은 얘기입니다.

이북에서 피난 나와서 알뜰하게 재산을 모아 자수 성가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큰 빌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있는 자식이 성장하면서 사업을 한다고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합니다. 몇 번 어머니가 안된다고 해도 빌딩이 있는 것을 아니까 막무가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할 수 없이 사업 자금을 만들어 주었는데 사업이 잘못되어서 마침내 빌딩까지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그 자식이 하는 사업이 안될 것 모르셨습니까?" "알았지요." "그런데 왜 돈을 만들어 주셨습니까?" "왜 빌딩 팔도록 허락해 주었습니까?" "줘야지요. 안 주면 원수가 되니까요. 망할 것 알면서도, 준 것 망해서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 보면 그 자식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그 자식은 나를 빌딩 주인으로밖에 안 보였습니다. 돈 많은 과부로 밖에 안 보였습니다. 그런데 빌딩 다 팔아 치우고 나니 이제는 그 아들이 아들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그 아들 나를 어머니로 받아 준 것입니다. 나는 재산 잃고 아들을 얻었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이요 하늘이 준 마음 아니겠습니까?

IV. 아버지 마음 : 영혼의 안식처

아버지를 떠나 많은 재산을 들고 먼 나라로 갔던 그 아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문 13절입니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시골 풋내기 정도야 유혹감, 먹이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다 빼앗은 다음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사정없이 폐기처분해 버리고 맙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일에 지쳤을때, 17절 "스스로 돌이켜"

무슨 얘기입니까?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제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미리 각본을 써 봅니다. 아들은 아버지도 세상 사람들처럼 그거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건적으로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좀처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그날부터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내 아들은 반드시 돌아온다. 날마다 동네 어귀에 나가 동구밖을 살핍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아들을 향하여 20절에서 "측은히"여긴다고 했습니다. 측은히 영어 성경에 compassion - com 함께, passion 느낀다. 아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아버지. 아들의 실패를 나의 실패로 받아 주는 아버지. 아들의 연약함을 함께 아파하는 아버지. compassion! 그 아버지의 용서와 치유, 사랑은 끝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품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집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저는 어릴때 개구장이였습니다. 소 먹이러 산에 올라갔다가 기마전을 합니다. 제가 올라서서 기마전을 하다가 땅에 굴러 떨어졌습니다. 팔이 뚝 부러졌지요. 울고 집에 내려왔는데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래야 쑥쑥 자란다. 팔 부러지고 나면 더 튼튼해 진다." 어머니가 얼마나 잔인하게 여겨졌는지. 그날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할머니가 내 팔 붙들고 흐느껴 웁니다. 조용히 눈을 뜨고 보니 어머니는 벽을 향하여 나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내 어머니의 마음이요 내 아버지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버이라면, 공동체의 리더라면, 돌아오는 아들의 안식처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들이 돌아올 생각을 한 것은 단순히 배가 고파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아들이 돌아오며 찾은 것은 단순히 양식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본문 17절부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아버지"라는 단어입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아버지께 가서, 아버지여, 아버지께,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의 품, 아버지의 마음을 찾아온 것입니다.

아버지는 버림받은 아들의 쉼터였습니다. 영혼의 안식처였습니다.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집이었습니다.

V. 아버지 마음으로!

아버지 가슴에 못 박고 간 자식, 아버지 말 안듣고 자기 맘대로 하다 결국 망해버린 못난 자식, 그 보라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이게 인간의 심보이지요.

그러나 보십시요. 아버지는 무조건 받아 줍니다. 무조건 용서합니다. 이놈아, 이 꼴이 뭐냐? 나무라지 않습니다. 어디 가서 뭘 했냐?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삶 - 묻지 않아도 너무나 뻔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웠는지 물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열 마디 말보다 한마디 포옹으로 모든 것을 녹여 버립니다. 용서를 빌어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돌아온 아들 때문에 기쁨에 겨워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보십시요. 세상 문제가 다 해결되어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잃은 돈을 다 찾아 기뻐하는 것 아닙니다. 경기가 좋아져서 기뻐하는 것 아닙니다. 통일 소식이 있어서 기뻐하는 것 아닙니다. 건강이 온전해져서 기뻐하는 것 아닙니다.

비록 상처투성이지만 아들이 돌아왔으니 기뻐하는 것입니다.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온전해 졌으니 기뻐하는 것입니다. 잃은 줄 알았던 자식, 죽은 줄 알았던 자식, 돌아왔으니 마냥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 마음입니다.

빌 하이블스는 교회를 섬기면서 나는 균형잡힌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 줄로 알았다. 성도들이 균형잡힌 인격을 가지면 나는 건강한 신앙인줄로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잃은 자를 향하여 구원해야 될 그 사람들을 향하여 사탄에게 빼앗긴 그 잃은 영혼들을 찾으려 할 때는 오히려 균형 감각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교회가 건강한 교회임을 알았다. 울안에 99마리 양보다 한 마리 잃은 양을 향하여 오늘도 눈물 짖는 아버지 마음, 그 마음을 가진 사람이 건강한 인격이요 신앙이요 건강한 교회임을 알았다고 얘기했습니다.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아버지 마음을 나누며 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마음을 가진 리더! 아버지 마음을 가진 어버이, 아버지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을 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볼 때도 아버지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젊고 많이 배운 자식들이 늙어가는 내 부모를 바라볼 때도 아버지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셀리더들이 셀가족을 대할 때 아버지 마음으로, 셀가족 모두 리더를 따를 때 아버지 마음으로, 교회가 성도들을 대할 때도 아버지 마음으로, 성도들이 교회를 바라볼 때도 아버지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의 가장 작은 약점, 허물이 보이면 쉽게 비판하는 사람, 마냥 불편스러워하는 사람, 아직 아버지 마음을 얻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철환 씨의 <연탄길>이란 책이 있습니다.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작은 이야기들을 묶은 책입니다. 읽는 이들에게 짠~ 하는 감동을 주는 책인데, 그 가운데 "아버지의 우산"이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 시절 달동네에 살던 사람이 어른이 되어 회상하는 글입니다.

아버지는 고물장사를 하며 고생했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푸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철사조각, 유리조각 줍고 신문지나 모아오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마냥 창피하게 여겨졌습니다. 아버지는 다행히 돈을 조금 모아 식당을 차렸지요. 그런데 실패하고 맙니다. 어머니와 우유 배달을 하다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로 부상당해 깁스를 하고 집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었습니다. 시험공부를 해야하는데 물이 툭툭 튀며 짜증스러웠습니다. 물방울을 받아도 더 이상 양동이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화가 났는지 휑하니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났는데도 아프신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이골목 저골목을 찾다가 돌아오는데 지붕위에 시커먼 물체를 발견합니다. 허덕대며 우산을 쓰고 그 아들을 위해서 지붕을 수리하고 우산을 받쳐들고 있는 비를 맞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합니다. 그 아버지를 생각하며 오늘도 눈물 짖는다는 겁니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오 주님! 이 땅에 상처난 아버지의 마음들을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안에 아버지의 마음들이 회복되어지고 넘쳐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 당신 아버지의 마음을 부어 주시옵소서.


출처 : 미라클
글쓴이 : 최정남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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