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서신

[스크랩] 로마서 강해 3

공 상희 2009. 5. 6. 14:10

 

로마서 강해 3

 

 

마틴 로이드존스

 

 

 

 

 

 

 

성경: 롬8:16절

 

 

 


8장 16절 :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 성령의 인격성


사도는 16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 또는 아들들임을 확신할 수 있는 몇 가지 근거들을 밝히는데 있어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 그 다음 단계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 그 다음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되고,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영을 받았음을 아는 것에 관한 적극적인 단계였습니다. ? 그러나 양자의 영이 없어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 하지만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기를 추구하고 탐내야 하며, 그것을 누리려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16절에 있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게 되었는데, 본문은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곳에서나 발견되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관한 진술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진술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 우리가 위대한 구원을 누린다는 입장에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① 성경의 모든 곳에서는 성령님을 하나의 인격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님은 복되신 삼위일체의 제 삼위 되시는 분이십니다.


② 그러나 우리는 본문의 주제에 따라 우리 주님께서 “보혜사”로 언급하신 말씀으로 족해야 합니다.


③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성령의 인격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격으로서 우리와 함께 증거하신다는 것입니다.


④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더불어 행하시고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세례, 혹은 인침


우리는 요한복음 7장에 있는 진술로 돌아가게 되면 거기서 성령이 오실 것에 대한 예언을 발견하고 또한 성도들에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예언을 보게 됩니다. ? 그들은 완전한 만족을 알게 될 것이며, ? 그들은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의 수단이 될 것입니다. ? 롬5:5에서는 “넘치도록 부어주심”을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풍부하게 넘치도록 주실 것을 암시합니다. ? 그것은 오순절 날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기사 속에서도 같은 강조점이 발견됩니다.


① 성령님 자신의 행동들로 인하여 우리는 확신 할 수 있는데, ? 우리의 이지와 마음과 영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여 우리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게 합니다. ?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는 양자의 영과는 다를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하여 부가적인 것으로 양자의 영을 초월합니다. 그것은 사랑을 하는 것과 그 대상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듣는 것과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 우리의 삶과 체험에 적용시키는 성령에 있는 진술로부터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③ 성령의 세례를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보다 더 큰 확신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을 주시는 것은 성령의 절대적인 주권입니다. 그것은 음성으로 올 수도 있고, 어떠한 기적적인 방법으로 올 수도 있으며, 성경의 특별한 구절이 책 속에서 튀어나와 개별적인 메시지를 새겨주는 등등 너무나 다양한 방법으로 주어지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3. 사도행전에 있는 믿음과 체험


본문에서 가능한 최고의 확신 형태인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시는 이 성령의 증거에 관해서, 이것을 성령의 평범한 사역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중생할 때에 일어난다고 주장하지만, “성령의 세례”는 무의식적으로 중생할 때에 일어나는 일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인치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①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그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시는 성령의 증거를 체험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알지 못할 수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② 성령의 세례가 체험적인 것이라는 증거는 사도행전 2장에서 나타납니다. ? 만약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세례와 인침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또한 그가 믿어 중생하는 순간 성령의 이 증거를 받았다면 사도들은 오순절 날이 이르기까지 중생치 않았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들이 이미 중생했음을 매우 명백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요15:3; 17:9,25) ? 또한 구속 받은 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성취로서 오순절 날에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③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지만 성령을 받지 못하였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안수한 이후에야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같은 일들이 고넬료와 그의 가정에서도 일어났습니다.


④ 엡1:13~14의 진술에서 성령의 인침을 받는 것이 별개임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믿음 다음에 성령의 인침을 받았으니 믿음과 동시에 주어지는 성령과는 구별이 됩니다. 누구든지 자동적으로 예외 없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말아야 됩니다.

 

 

 

 

4. 성령의 증거의 본질과 효능들


우리는 성령께서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 “증거하심” 또는 성령의 “인침”이 언제나 회심할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회심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거의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① 만일 이러한 일이 사람이 회심할 때 즉각적으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면, 또한 이 성령의 증거나 성령의 인침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구원의 확신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② 요6:27에서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를 인치셨다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 일어난 두 가지 일은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그 위에 내리시고, 한 음성이 하늘로부터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언급하신 인침이었습니다. ?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 거기서 주님께 일어난 일이나 성령께서 그 위에 내려오신 것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는 하등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 그는 영원부터 하나님의 아들로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 그러므로 성령님께서는 언제나 그 안에 있었고 태초부터 그 안에 계셨습니다. ? 그러나 인침을 받으신 것은 세례를 받으실 때였습니다. ? 그러므로 그것이 중생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③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시는 성령 증거의 본질은 ? 첫째는 체험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 그것은 큰 기쁨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인도하는 체험입니다. ? 성령의 증거는 은사나 현상을 동반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아무런 현상 없이도 이 은사와 인침을 볼 수 있습니다.) ? 이 체험은 언제나 구별되고 유별납니다.  이것은 일상적인 삶의 체험에도 해당 되는데, 깊은 느낌의 정도의 수준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 이 체험이 영구적이지 않는 것은 성령님이 인격이시기 때문인데, 일시적으로 왔다고 갈 수도 있고, 오랜 동안 사용하다가 성령을 근심시키고, 소멸하는 죄로 인하여 상실될 수도 있습니다. ? 그런데 이 체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를 부정하는 어떤 특별한 행위를 한 사람에게 일어나기 쉽다는 것이 문헌에서 보아 매우 분명히 나타납니다.

 

5. 또 다른 간증들 [ 제 5권 455~478페이지 참조]

 

7. 성경적 보상


우리는 우리에게 제공된 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한 부요”에 속한 모든 것을 누리기 위해서 언제나 열심히 사모해야 합니다.


확실성을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사랑의 특성입니다. ? 사랑은 줄 뿐 아니라 역시 요구도 합니다. ? 사랑하는 관계에 있어서 어떠한 머뭇거림, 의심 의문들은 비참으로 인도합니다. ? 사랑은 확신을 요구합니다. ?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는 그의 자녀들입니다. ? 그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 그러므로 다른 것은 제외하더라도 자녀가 자기 하늘 아버지의 사랑의 절대적 확실성과 확신을 사모하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①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눅11:11~13)


②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습니다.(요7:37~39)


③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로서 우리는 다만 그것을 사모하고 간구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체험이 우리에게 주어질 가능성을 믿고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마7:7)고 말하는 그 가르침을 믿는 것입니다.


④ 그러면 이 축복이 어떻게 오는지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 첫째로 이 체험의 성격과 본질에 관해서 명심하도록 해야 합니다. ㉮ 우리가 알았듯이 그리스도인 이면서도 이 성령의 증거를 가지지 않을 수 있으나 그 속에 성령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 요한복음7장 37~39절과 14장의 말씀은 후에 성취된 은혜로운 약속입니다. ㉰ 그것을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 우리는 옳은 일을 추구해야 합니다. ? 최선을 다해서 그를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 최선을 다해서 거룩해지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 기록된 말씀 가운데서 부지런히 찾아야 합니다. ? 이 약속을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 롬8:17-18절

 

 

 


8장 17~18절 :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 구원의 궁극적 목적


8장의 전체 목적은 우리가 앞에서 보아 왔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충만한 확신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 속의 의를 위해서 역사하는 새로운 영, 자기들의 몸까지도 포함하는 궁극적인 영화를 역시 보증해 주는 새로운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그들 속에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보다 더한 것은 성령께서 친히 그들의 영과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자유자이며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는 것을 증거하여 주시는 체험을 가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이 지식은 어째서 우리가 시련과 고난을 당해야 되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한 체험들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기는커녕 믿음을 강하게 하며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①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은 용서함을 받는 것이 시초에 불과한 것이며, 심지어 성화도 끝이 아니라 영화가 끝입니다. ?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와 표적은 영화입니다. ? 영화는 죄와 악의 모든 영향과 국면에서 완전하고 철저하게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하며, ? 몸과 혼과 영혼이 다 함께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②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지음 받았습니다. 우리는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져 모든 피조물들 위에 높이 있었으며, 모든 것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했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에게 속한 존엄이라는 영광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의 결과로 우리가 전에 가졌던 원래의 지위를 상실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가장 본질적인 비극입니다.


③ 사람은 처음 존재했던 영광을 지니고 있으므로 인해 그 영광을 향해 노력에 노력을 더하지만 결코 그것을 회복시키지 못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성취하고, 경쟁사회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까지 올라 있다고 할지라도 불안하고,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 영광에 미달되기 때문입니다.


④ 타락한 인간은 이제 만물의 영장이 아닙니다. 인간의 놀라운 기술적인 모든 진보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을 증거하지 못합니다. ? 그것은 다만 큰 우주의 점과 같은 작은 일면을 건드리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 무엇보다도 사람이 피조물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기는커녕 피조물들에 의해서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인간은 원래 영장이요 통제자로서의 지위를 지명 받았는데 이제는 자기가 다스려야 할 피조물의 희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 죄의 결과로 바로 이러한 영광의 일부를 상실한 것입니다.


⑤ 구원이란 인간을 타락한 곳에서 회복하는 것이고, 타락한 데서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사람은 끊임없이 그리고 완전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 가고 있습니다. ? 아담은 사람으로서 완전하였으나, 그의 완전함은 영화에 이르지 못했고 발전을 위한 여지가 있었습니다. ? 그런데 우리는 전에 아담이 처하여 있던 곳으로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아담이 계속해서 무죄 상태와 순종 상태에 있었더라면 도달했을 지점보다 훨씬 초월하는 지점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물로서 값없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 우리는 그 영화의 첫 열매에 속한 것을 맛볼 특권이 허락되어 그것에 대한 맛을 조금 보고 있습니다. ? 우리가 아직 영화롭게 되지는 못했지만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알고 있고, 그것을 멀리서 보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예비하고 있습니다. ? 우리의 영화는 전 우주를 포함하게 될 더욱 장대하고 더 큰 영화의 일부분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 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개인의 구원에 절대적인 확실성과 확신에 대한 증거들을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성도의 고난의 의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또 앞으로 그리스도의 장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①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 고난을 보고 놀라지 않아야 되며, 결코 놀라 넘어지지 않아야 됩니다.


② 우리는 고난에 대하여 요동되지도 말아야 하고 또한 넘어지지도 않아야 합니다.


③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사자의 밥으로 던져지고, 불 가운데 던져졌지만 불평하거나 원망하기는커녕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는 것을 가치 있게 여김으로써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순교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④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신비하고 비밀스런 능력을 가지고 고난을 기쁘게, 심지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것을 보더라도 구원의 영광이 어떠함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⑤ 기독교는 주어진 환경이나, 넘치는 환난과 고통으로부터 결코 도피하지 않고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발판으로 삼습니다.


⑥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메시아가 나타날 때가 임박하고 있다는 소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 그들은 자기들의 세대를 준비 기간으로 간주하고, 임박할 또 다른 세대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 우리는 현세를 살고 있으나 그 현세만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 우리는 시간을 넘어 있는 어떠한 것을 알고있으며 그것을 고대하고 있는데, 우리가 시련과 환난 가운데서도 할 수 있는 것은 이 가르침에 비추어볼 때에만 가능합니다.


⑦ 우리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들어 보이신 것은 “장차 올 영광”이었습니다.(요14:1)


⑧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무서운 핍박이나, 또는 혹독한 원수들을 만나게 될 때, 그리고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사형에 처해질 때와, 그들의 집들이 파괴되고 재산이 강탈당할 때에, 그들은 서로 만나서 나누는 말은 “주께서 임하시느니라(Maratha-마라나타).”였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었던 모든 일은 언제나 바로 그 사건에 비추어서 생각되었습니다.


⑨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게 될 것이며, 그것에 동참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실상을 보게 될 것이며, 그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 있게 될 것입니다.

 

 

 

 


성경: 롬8:17절

 

 

 


8장 17절 :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 약속을 따른 후사들


사도는 16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려야 하는 확신과 확실성의 형태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본문에서는 그 말씀을 더욱 확대시키고 있는데, 우리는 다른 곳에서 발견하는 사도의 교훈을 통해서 그 대답을 끌어 낼 수가 있습니다.


① 사도가 성령을 우리에게 “인치는” 자로 언급한 것은 일반적으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확신시킬 수 있는 기업에 대한 “보증”을 주신다는 사실에 연관되어 있습니다.(고후1:22; 엡1:13~14) ? 그는 성령을 “보증” 하는 분으로 언급할 때는 언제나 성령을 “인치는” 분으로 언급한다는 것이 사도의 생각과 편지에 있어서 하나의 확증된 법칙 같아 보입니다. ? 아들이 되는 것은 즉각적으로 기업을 물려받는다는 개념을 내포합니다. ? 두 가지 일은 서로 불가분해적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에게 인쳐 주시는 분으로 강조한 다음에 바울은 계속해서 바로 기업의 보증자로 나타냈던 것입니다.


② “자녀이면”라는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지위를 나타내 줍니다. ?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요1:12) ?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되었습니다.(벧후1:18) ?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아 우리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③ “후사”라는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위대한 기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미래에 성도들에게 주어질 영광스러운 장래의 약속, 소망, 기업에 관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④ 우리는 이 기업의 약속을 오래 참음으로 소망하고 있습니다.[참조: 엡2:11~12,19; 갈3:28~29; 엡1:10,11,13; 3:2,5; 마25:34; 행26:17~18; 엡1:15~18; 골1:12; 3:4,24,7; 벧전1:3~5,13; 3:2~3]


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의 기업의 보증”을 받았는데, 장차 그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복되신 하나님의 날이 도래할 것을 고대하며 기다리며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날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날이요,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날이요, 우리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이고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2. 하나님의 후사들의 특권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들로서 이 위대한 기업을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이중적인 방식으로 그 기업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요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고 합니다.


① 후사권(상속권)은 사람에게 매우 특별한 지위를 부여합니다. ? 많은 자녀들 중에 장자만이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 장자는 언제나 특이하고 특수한 지위를 가지고 ? 특별한 관심과 대접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들이 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이 특별한 축복과 특권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② 이 축복과 특권들은 ? 절대적으로 안전하고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이끌어 가심에 있어서 변치 않으시고 자녀를 통해 이루실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이루실 것입니다. 그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의 운명이 달려 있어서 결코 변하지 않는 안전함 가운데 기업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우리의 기업은 빼앗길 수가 없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마저도 하나님을 향유하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③ 이제 우리와 그리스도와 가진 관계 때문에 이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누리고 계신 모든 것들을 우리도 다 누릴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계3:21)


④ 그리스도께서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을 유일하게 들으신 분입니다. ? 반면 우리는 많은 일들 속에서 너무나도 자주 하나님을 불쾌하게 합니다. ? 그러나 여기에 결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시지 않는 분이 계신데, 바로 그분에게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 이 모든 약속들은 그에 대해서 한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적으로 우리의 지위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 모든 약속들은 그에 대해서 성취될 것이며, ? 우리는 그와 연합되어 있어서 그의 일부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3. 영광을 위한 준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스러운 지위를 부여받았고, 그의 기업을 물려받을 후사들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될 것이라고 합니다.


①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복음 약속들의 진리에 어떤 의심을 일으키기는커녕 우리가 그 약속에 참예한다는 사실을 강화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우리의 그와 하나 됨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해당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고, ? 그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며, ? 그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힌바 되었으니,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 그는 우리의 머리요, 우리는 그의 몸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 속한 일들에 대하여 동참자들입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와 함께한 후사라는 것이 사도의 주장이며, ? 그것은 고난에 대하여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③ 주님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으셨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고난을 받으셨는데, 마찬가지로 우리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움과 고난을 받게 됩니다.


④ 어두움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빛이시며, 우리 또한 세상의 빛으로 보냄을 받았으니, 세상이 우리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미움을 받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⑥ 그러나 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능히 참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기업의 영광 때문입니다.


⑦ 하나님께서 이 영광을 준비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 이 환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 그 환난을 통해서 온전케 하시며, 하나님께 합당하게 쓰이게 될 그릇을 준비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히2:10) ?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의 독생자와 “함께한 후사”라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주어질 기업의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성경: 롬8:18-23절

 

 

 


8장 18~23절 :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1.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


사도 바울은 단순히 현재의 고난이 우리가 죽게 될 때 끝날 것임을 안다고만 말하지 않고 있으며 그는 이 생에서의 삶과 오는 세대에서 있게 될 삶 사이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과 고통과 난제들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전체 세계에 나타나게 될 이 영광스러운 상태에 비추어 살펴보는 것입니다.


① 본문에서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구절을 살펴보면, 가치의 평가에서 전에 상당히 귀한 어떤 의미가 있던 것이 이제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교해 볼 때에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가지고 있던 귀한 시계가, 황금 시계에 비추어볼 때 너무나 가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② 그것은 잠시 받은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에 비교할 때, 우리가 지금 감당하고 있는 짐이 무겁다 할지라도 장차 우리의 것이 될 영광의 무게와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고난을 받을 때에 가나안을 바라보고 견디어 낸 것처럼 우리 또한 이 소망을 붙들고 능히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③ 여기서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의도는 ? 모든 피조물들이 장차 올 영광을 열심을 가지고 기대하며, 목을 길게 빼고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여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고대하지 않습니다. ? 여기에선 기독교인도 배제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 오히려 비이성적인 피조물, 생물이나 무생물, 유기체나 무기체 같은 것들, 즉 동물들과 채소, 꽃, 강물과 언덕 땅 덩어리와 같은 것들, 즉 하나님의 창조의 부분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매우 기대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이 영광은 너무나도 커서 모든 피조물들이 목을 길게 빼고 그것을 갈망하며 그것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④ 인간의 죄가 모든 피조물이 현재 놓여 있는 상태를 가져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조물들도 그 썩어짐의 종노릇한 떼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입니다.(21절)


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였고, “만물의 주가 타락했을 때” 그의 당하는 형벌의 일부가 그가 영장 노릇을 하던 피조물에게 주어져 허무한데 굴복하게 되고 썩어짐에 종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열심히 기대하며 열렬한 기대감을 가지고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2. 피조물의 고대하는 것


① 본문은 현재 세상의 비참한 상태는 타락의 결과로 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② 본문은 아담의 역사성 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를 거부하고서는 기독교 신앙의 교리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③ 진화론의 차원에서 보게 된다면, 인간이나 피조물이나 우주 전체에 대해서 어떠한 소망도 없습니다. 열역학 제 2법칙으로 밝혀지듯이 모든 우주가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④ 오직 한 가지 밖에 없는 소망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목적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뿐 아니라 피조물과 온 우주에 대한 오직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성품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⑤ 본문에서 사도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시는 바로 그 때에 피조물에게 구원의 소망도 주셨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 창세기 3장의 역사가 성경적 구원의 교리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신 그 말씀이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 그것은 피조물의 구원의 소망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⑥ 바울은 피조물 전체가 무엇인가 더 나은 것에로 탄생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현 시점의 피조물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피조물은 피조물이 알고 있는바 자기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더 좋은 것을 산출하려는 시도 속에서 해산의 고통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⑦ 구속 받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피조물들도 역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 그 영광에 대한 전망이 너무나도 영광스럽기 때문인데, 그 영광은 주님의 영광입니다. ? 그런데 그것이 우리 속에서 나타나게 될 것인데, 곧 구속받은 자들에게 입니다. ? 그리고 피조물 자체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자연도 무엇인가 이점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다. ? 하물며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있어야 하며, 우리가 어떠한 조건에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장차 올 영광의 빛 속에서 놓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


우리는 세상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닌 자들과 외적인 모양과 환경에 있어서 구별을 할 수가 없지만 “양자”라는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온전한 신분과 지위로 들어가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사람들이 주님을 한 사람으로만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영광이 감추어지고 가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오시게 ? 때에 그 영광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게 됩니다. 역시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의 사실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든 베일을 벗고 나타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① 우리의 몸이 부활하여 영화롭게 변화될 것입니다(고전15:39~54).


② 우리의 몸이 주님의 영광의 형상으로 변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를 것입니다(고후3:18; 빌3;20~21).


③ 우리는 부활하여 주님을 공중에서 영접하게 되어,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살전4;16,17)


④ 부활한 몸이 참 몸이며, 그 몸만이 영화롭고 신령합니다.(눅24:38~43)


⑤ 모든 방면에서 완전하고 철저하게 될 것이고, 육체적으로도 완벽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완벽한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며, 모든 궁핍이 충만하게 채워질 것이고, 우리로 비참과 불행과 고통과 슬픔을 겪게 하였던 것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계21:2~4)


⑥ 우리가 의의 면류관과 창세로부터 우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딤후4:8; 마25:34)


⑦ 천사들도 우리에게 복종케 될 것이라고 합니다.(히2:5)


⑧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되고(계7:15), 세상을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고전6:1~3)


⑨ 장차 오게 될 다시 찾아 얻어진 낙원은 사11:6~9; 55:13; 66:22~24; 35장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⑩ 이렇게 제시된 완벽한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는 천사들이 흠모하는 그런 상태로,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영화롭게 될 것이고, ? 만물을 다스리는 영광이 주어질 것입니다. ?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러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거나, 그것을 믿는 믿음이 적거나, 현실적으로 자신의 앞에 확연하게 드러나 있지 않아서 현실감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말 할 수 없는 영광으로 예배되어 있습니다. ? 우리는 머리를 들고 가슴을 펴고 믿음을 가지고 장차올 영광을 주시하여야 합니다. ?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말씀을 생각하며, 이 세상은 지나가 버리고 잠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 우리는 요동될 수 없는 나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자녀들을 위해서 창세전부터 예비한 그 나라에 우리가 속해 있는 것입니다.

 

 

 

 


성경: 롬8:24-27절

 

 

 

8장 24~27절 :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1. 구원의 과거, 현재, 미래(24,25)


우리는 모두 고통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고 듣는 것들 때문에 실제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마음속에서 상심을 하고 있고,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째서 그런 일을 허락하시는가?”라고 질문합니다.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발견하는 오직 유일한 길은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가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이 시간 세계, 그리고 죄와 수치로 가득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 동안 속으로 탄식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①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이 말씀은 소망으로 인하여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소망 안에서 구원을 얻었다” 고 해석해야 합니다.


②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라는 말씀에서 소망이 의미하는 바를 알기 위해서는 믿음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 그것은 믿음이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것들을 우리가 신뢰할 근거와 이유들을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믿음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단번에 영원토록 어떠한 일을 이미 행하셨다는 것을 확신시켜 줍니다. 또한 그가 아직도 더 많은 것을 행하실 것을 확신시켜 줍니다.  ?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구원의 실상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 믿음은 소망을 유발시킵니다. ? 소망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고대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 믿음은 우리에게 있는 일들에 관하여 확신을 주고,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기다리면서 고대하고 서 있게 합니다. ? 소망은 믿음보다 더 강한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한 단계 더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 소망은 내내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참 기독교의 척도입니다.


③ 우리는 소망 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바라는 것들, 즉 소망하는 것들의 영역 속으로 인도하여 줍니다.


④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입장이며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다른 말로 해서 소망의 재료가 되는 그것을 진정으로 “볼 수 있다”든지 “충분하게 받았다”는 생각을 제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 소망이 어떤 약속의 차원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이 오기까지 기다릴 준비를 합니다.[예 : 휴일이나 휴가, 유언에 의해 상속될 어떠한 것] ? 우리가 그것을 즉각적으로 누릴 수는 없지만 그 소유권이 인정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 우리에게 어떤 날이 오기까지 그것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내 자신과 그 사실 사이를 화목 시켜야 되며, 그것이 오기까지 참음으로 살아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⑥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상황을 제거하는데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하며,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덧입고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영광을 향하여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⑦ 그리스도인은 소망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만일 소망을 가지지 않았다면 참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연단을 이루게 되고 연단은 더 나아가서 다시 소망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 방식으로 인내는 소망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⑧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참아내는 것이며, 그들 앞에 있는 문제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인데, 그것은 소망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2. 성령의 더 많은 역사(26,27)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소망을 방편으로 해서 시련과 환난들을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 왔습니다. ? 이제는 본문에서 소망이 우리를 도와서 그 시련을 대처하도록 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도 역시 우리를 돕고 우리를 이끌어 주어서 특별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고 주장합니다. ? 이 인생의 순례 길에서, 믿음의 싸움에서, 환난과 절망 가운데서 또한 여러 가지 묘사할 수 있는 면들 가운데서 우리는 기도할 충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 성령은 우리에게 부가적인 도움을 주고 계시는데, 우리가 단순히 “소망”과 확신으로 인도하는 믿음만 가지는 것을 원치 않고, 기도의 생활과 관련하여 성령의 역사로 제공되는 이보다 더 많은 도움을 가져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① 8장의 전체 목적은 우리의 최종적인 영화가 우리의 최종적인 영화가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받는 순간부터 절대적으로 보증되었음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순간 하나님의 성령이 그 안에 들어와 계시며, 그 성령께서 이 거룩케 하시는 역사를 행하시는 것입니다. ? 성령께서는 마음을 조명하시고 또 인도하사 우리에게 율법을 즐거워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최종적인 영화를 예비케 하십니다. ? 그것이 절대적으로 보증되어 있습니다.


②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주십니다.(14) ? 그러나 그보다 더 나아가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십니다. ? 이것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확신의 형태입니다. ? 이런 모든 방식으로써 성령께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영화에 대한 보증이 되신 것입니다. ? 우리에게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도 그것에 대한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③ 우리가 우리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어떻게 하면 늘 가까이서 접촉하는 방식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방식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할 때 우리에게 기도보다 더 위안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대화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④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돕습니다. ? 연약함은 일차적으로 힘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 그런데 연약함과 죄악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도할 수 있습니다. ? 연약함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 연약함을 아담의 원죄로 주어진 것입니다. ? 아담의 타락한 이래 세상의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연약에 싸여” 있습니다. ? 그것은 타락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는 여러 가지 제한들 중의 하나입니다. ? 연약함 들은 몸에서 야기될 수도 있는데, 약함과 피곤함과 질병과 아픔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 연약함은 우리의 몸의 다양한 조건들과 기능에 영향을 주는 것인데, 다른 말로 해서 여러 시련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⑤ 연약함은 우리가 합당히 기도해야 할 바를 정확히 알지 못하여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게 합니다. ? 그것은 우리에게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우리가 잘못된 것을 위해서 기도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 신명기 3장 23~26절에 있는 말씀 속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께서 모세로 침묵하게 하시고 그러한 간구를 더 이상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오지 못하게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 허락되지 않는 잘못된 기도는 고린도 후서 12장 1~10절의 말씀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될지,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를 모를 때에 그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여 주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긴다고 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 또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순종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 우리는 믿음에 충만한 확신과 소망의 온전한 확신과 거룩한 담대함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지성소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정확히 간구하고 어떠한 축복을 구하느냐하는 것입니다. ?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해가 될 수도 있고, 내가 이것저것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다시는 그런 일로 내게 고하지 말라고 하시며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 우리는 그러한 어려움과 당황함에 대한 어떠한 체험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데, 그 문제에 대하여 영광스러운 해답으로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알리 운바 되어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우리의 궁극적인 영화의 한 과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3. 성령의 탄식하는 중보기도


우리는 기도에 관련해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존전에 생각 없이 마구 뛰어 나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연약함 때문에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 연약함이란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 그것은 우리의 죄성과 죄악적인 조건에서 결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주어진 순간에 어떻게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해서 죄를 저질렀다고 느껴서는 안 됩니다.  ? 우리가 이 연약함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 연약함은 우리가 결국 하나님의 자녀이며,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이 확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더욱더 증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① 성령께서는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서 특별한 일을 하십니다. ?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가 할 모든 일을 대신하여 다 져주시지 않고 돕는다고 하는 점인데, 그 말씀은 보조적인 역할로서 우리의 짐을 들어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 그 방편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 그것은 가령 우리가 매를 맞고 있는 자리에 있다고 할 때에 그 매를 대신하여 맞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매질을 하고 있는 그 상전에게 무진 애를 쓰며, 탄원함을 통해서 그 사람을 위해서 친히 간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②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라는 말씀은 우리가 가진 느낌을 표현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도는 우리가 그러한 당혹함에 빠진 나머지 스스로를 표현해 낼 수 없고 우리의 원하는 것을 나타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말 할 수 없는 탄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것은 주님의 탄식이 아닙니다. ? 성령께서는 지식이 부족한 일이 없으므로 탄식 하지 않으시며, 탄식할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 탄식은 우리 속에 있으며, 이 말로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탄식하는 것은 우리인데,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 인한 것입니다. ?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알지 못하여 탄식하는 것을 위하여 친히 성령께서 간구하여 주시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바울 사도가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는 말을 할 때에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알아보면, 우리가 연약함으로 마땅히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여 기도하기를 두려워하거나, 잘못된 기도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당황해 할 때에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의 대변자로서 오셔서 대신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간구들을 형성시켜 주시고,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기도를 알지 못할 때에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④ 이 탄식은 우리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완벽한 구원에 대한 절대적인 증거일 뿐 아니라 하나의 보증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서만 이러한 역사를 행하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으로 탄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뿐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4. 기도의 비밀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면서도 성령을 통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기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지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는 우리가 그에게 구하기 전에 우리가 어떤 필요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지를 알고 계시지만, 그래도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빌2:13) ? 우리가 기도와 그 의미를 이해하든지 못하든지 기도하라는 분명한 명령이 있기 때문에 기도는 우리의 임무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정하실 뿐만 아니라 목적에 이르는 수단들도 정하시며, 궁극적인 결과에만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어떻게 산출되어 나올까에 대한 관심을 가지십니다. ?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뜻의 일부로서 많은 열매들이 이차적인 요인들을 통해서 산출되도록 놀랍게 질서 지워 놓으셨습니다. ? 기도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궁극적인 영광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정하시고 결정하신 방편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그 목적에 인도하실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이런 식으로 하기로 결정하셨던 것입니다. ? 삼위일체의 제2위격이신 우리 복되신 주님께서도 지상에 계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주로서 완벽하게 되는 하나의 일부였다면, 우리의 경우에는 얼마나 더욱 더 그것이 필요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① 기도는 대주재요 천지와 만물들을 다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에라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경배하고 그를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스스로 상기하며 모든 영광과 찬미를 다 그에게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가르침입니다.


② 그 간구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③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 앞에 제시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아뢰어야 합니다. 성경을 인용하고 하나님의 약속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④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 우리의 최고의 바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뜻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이루어지든지, 우리의 다른 경로나 개인적으로 더 좋아하는 경로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할 용의가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 그런 다음에 우리의 간구 내용들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것을 주장한다든지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것을 요청해서는 안 됩니다. ? 또한 하나님께 어떠한 것을 요청하거나 명령조로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 하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 심지어 우리가 매우 사랑하는 어떤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도 마구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만 자기의 요구나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죄인의 탄식을 좋아하십니다.


⑥ 믿음의 기도는 우리 스스로에게 “그것을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설득하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⑦ 절대적인 확신은 성령님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어떤 기도를 넣으시고 우리 생각에 어떤 기도를 하게 하십니다. ? 그는 우리에게 기도를 주시고 그것을 주시면서 그것이 응답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그것은 보통의 체험이 아니며 그것은 때때로 일어납니다. ?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자주 일어나야 하는 체험입니다.

 

 

 

 

 

성경: 롬8:28-30절

 

 

 

 

8장 28~30절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1.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의 위안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과 사랑하지 않는 자들 사이에 놀라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우리에게 제시되는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 좋은 일, 나쁜 일, 시련, 환난, 고난, 질병, 우연한 사고, 절망과 실패까지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하여 궁극적으로 우리의 유익을 이룰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되어지고, 하나님에 의해서 통제되고 채용됨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것들이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2. 모든 것을 선하게 이용하심


모든”이라는 말은 환난과 핍박과 시련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내포하는 용어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이 우리가 죄로 떨어져 실패하는 것과 우리가 실족하여 뒤로 미끄러지는 것까지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이든지 그러한 진술은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죄로 떨어진다든지 뒤로 넘어져 미끄러져 내려간다는 것은 언제나 나쁜 것인데도 그러한 상태에서조차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진 관계 때문에 우리의 궁극적인 선을 이루어 줄 수 있으며, 우리의 궁극적인 영화를 산출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역설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까지도 사용하셔서 우리의 선을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방식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 하나님께서 죄를 바꾸어 그의 유익이 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 동시에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게 될 때 우리가 얼마나 악한 것을 행하였는가를 알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를 용서할 용의가 있음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탕자의 비유에서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지고 타락해도 그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 그것은 결국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역설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다양한 측면의 은혜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의 실패마저도 결국 우리의 유익이 될 수가 있습니다.


①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허용하십니다.


②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일들을 우리에게 보내실 수도 있는데, 그러나 언제나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부터 복락을 철수해 가시는데, 그것은 어떤 연단의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얼굴을 우리로부터 돌리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④ 사람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영혼의 메마름과 황무함과 무미건조함에 대한 체험마저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더 소원케 만들며, 우리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을 추구하게 만들고 갈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⑤ 우리는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만일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시는 방식 가운데 하나라면 나는 만족할 것이며, 나는 이런 식으로 어둠 속에서 계속 간다고 할지라도 기꺼이 갈 용의가 있다. 내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고 계신 것을 아는 한 그러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⑥ 이 모든 것들은 우리로 선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식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면제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지 않았습니다.  욥의 메시지에서도 어려운 시련을 당하기 전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는 욥을 보아서  우리가 알듯이 우리의 시련 또한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⑦ 그러므로 우리의 시련과 환난은 하나님께서 더 새롭고, 더 깊은 방식으로 그들에게 자신을 보여 주시는 방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유효적인 부르심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것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았으면 우리도 그를 사랑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절대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① 본문에서 “부르심을 입은”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주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부르심이요, 다른 하나는 효과적인 부르심, 즉 유효적인 부르심입니다.


② 복음이 진정으로 전파되는 것을 들었던 사람은 어느 사람이든지 “복음의 부르심”을 들은 사람입니다. 어쨌든 이 부르심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응답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같은 교회당 안에서 또 같은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동일한 부르심을 듣고도 아주 다르게 반응하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③ 복음의 부르심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효과가 약속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즉 성도가 된 사람들에게 이 위대한 약속이 주어진 것입니다.


④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의 뜻대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뛰어 들어오셔서 우리의 삶을 방해하셨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⑤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알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행하셨다는 것을 알며, 우리의 삶에 뛰어 들어오셔서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고 우리를 붙잡고 계심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⑥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어느 의미에서 자신의 삶이 이전의 삶과 비교했을 때에 어떤 상태로 치닫게 되든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셨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⑦ 우리가 고난을 당한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이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을 우리의 가장 비참한 상태에서도 적용시키고,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⑧ “합력하여 선”이라는 약속에는 “그 뜻대로”라는 위대한 문구 속에서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목적에 이르게 하는 수단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며 내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에 들어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리이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그 선하신 목적을 그의 뜻대로 우리에게 반드시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⑨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환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지금 처해 있는 환경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성도들 각각에게 가장 선한 것을 이루시기 위한 과정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또한 그 약속의 말씀을 굳게 잡고 처한 환경에 대하여 감사함으로 찬송하며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음


하나님의 뜻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해당되며, 적용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이며, 미리 정하신 자들이고, 또한 의롭다하신 자들이며, 영화롭게 된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입니다.


① 그런데 이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합니다.


②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복락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음으로서 그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뜻합니다. ? 그런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 이 닮음은 원형에서 파생되는 닮음입니다. ? 원어에서는 그 말이 같은 모양을 취한다는 의미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의 본질 속에 그를 닮은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전 인격 속에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③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형상은 마지막 아담의 형상으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 신성에 연합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 충만한 인성을 본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④ 우리는 거듭남을 통해 이 새 본성의 씨앗을 받았으며, 우리는 그로부터 새 인성의 일부를 받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낳고, 그는 머리요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입니다.


⑤ 성령께서 이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만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 입니다. 이 역사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이며 우리가 아버지와 자녀들 간의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⑥ 우리는 영과 몸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됩니다. 그 아들은 신인이 되셨는데, 그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이십니다. 그는 사람의 아들로서 이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되셨습니다.


⑦ 우리는 그 몸의 지체로서 하나님의 역사가 완성될 때에 우리는 바로 그 형상을 완전히 본받게 될 것입니다.

 

 

 

 

5.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의 영광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장엄한 목적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아들 자신에 대한 말씀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① “그로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서 사도가 사용하고 있는 “맏아들”은 언제나 가장 탁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자의 영광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라.”는 사실에서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우리는 복되신 삼위일체의 영예와 영광이 우리의 궁극적이고 온전한 구원에 수반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이보다 더 위안을 주는 것이나 확신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③ 구원의 주요한 목적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그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 그런데 만일 형제가 하나도 없고, 따르는 자가 하나도 없으면 그에게 영광도 없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궁정을 떠나 땅에 오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장사를 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살아나셨지만, 그런데도 보이는 결과는 하나도 없고, 거기에는 하등의 영광이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④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실패할 수가 없는 것이며 잘못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목적하신 모든 일은 반드시 성공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목적에 들어 있다면 우리의 궁극적인 영화는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과 함께 영화롭게 될 것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은 그의 영예와 영광에 기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⑤ “미리 아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고정시켰고 그들을 위하여 어떠한 일들을 정하셨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말입니다.


⑥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 사이에는 매우 작은 차이 밖에는 없어서 그 말들이 함께 쓰이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⑦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이라는 말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 관한 이 일들을 결정하셨다”고 풀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⑧ 하나님께서 이러한 식으로 영원 전에 우리를 “아셨고”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되고”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며, 끝내 영화롭게 되도록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6. 구원의 사슬 속의 중간 고리


우리가 성경을 공부함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것은, 그 말씀 가운데 있는 용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구원의 확신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확신이 부족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부족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과, 이해가 모자란 것을 의미할 뿐이며, 구원에 있어서 진리가 되는 것은 오직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곧 우리가 전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위해서 하신 그리스도의 일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① 본문에서 사용된 “미리 정하심”이란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을 미리 아셨고, 그들을 어떠한 한계 내에(범주 안에), 즉 어떠한 원 안에다가 놓으신 것입니다. ? 이 사람들을 특별한 뜻과 목적과 목표를 위하여 따로 세워두신 것이며, ?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특별한 운명을 그려 놓았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② “미리 정하심”이란 말씀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위해서 정하신 하나의 목표이며 목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③ 이제 세 번째 용어인 “부르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신 유효적인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미리 아셨고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서 그들을 미리 정하셨으며, 이 유효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 이 부르심이 없다면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 그런데 놀라운 일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다 믿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온 세상에 그리스도인이 적은 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사람들을 위해서 미리 정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로써 우리를 살리시고 성령의 효과 있는 부르심으로서 우리를 각성시키는 일이 없다면 단 하나의 국면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혼에 역사하며, 우리의 영혼 속에 새 생명의 씨를 넣었고, 새로운 정의를 넣어주신 결과로 하여 우리는 진리를 보기 시작하였고 더 나아가서 진리를 소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우리가 전에는 미련하게 여겼던 것을 보배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고, 부끄럽게 느꼈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우리는 그것을 즐거워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④ 이제 우리가 생각할 다음 용어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말씀인데, 이 용어는 언제나 믿음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상태에 있는 이들은 믿음을 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어떠한 행위나 공로를 떠나서 그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일을 아니할 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5) ?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 관하여 선언하신 선언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하심을 얻습니다. ?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데, 믿음은 구원에 있어서 도구로서 사용이 됩니다. ? 칭의는 죄 용서함을 받는 것보다 훨씬 크며, 그에 첨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책이 전혀 없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완벽한 의를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켜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⑤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고”라는 말씀은 16~17절에서 그것을 다루었으나 다시 한번 다룹니다. ? 영화는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의 일부이기 때문에 반드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 그 영화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몸도 포함이 됩니다. ? 우리들이 죄와 악의 모든 영향과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결과들로부터 완벽하게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는 이 생에서는 영화롭게 되지 않습니다. ? 우리에게 부활의 아침이 오기까지는 몸은 영화롭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 우리는 현재 영의 차원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몸의 구속도 반드시 받게 될 것입니다. ?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사도 바울은 과거에 일어난 일로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 이것은 칭의만큼 영화도 확실한 것임을 확신시켜 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에서 이미 그렇게 이루어 진 것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7. 성도의 견인 교리의 난제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우리를 위하여 확증하여 주신 하나님의 뜻이 근본적인 진리가 됩니다. ? 또한 창세전에 영원 전에 계획된 단계들 모두가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을 위해서 이 궁극적인 구원을 계획하셨으며, 이 최종적인 영화를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 그는 단순히 처음의 몇 단계들만을 계획한 것이 아닙니다. ? 그런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담대한 진술은 우리로 하여금 이 점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 그들이 궁극적인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위대한 사실로 말미암아 보장되는 것입니다.


① 우리는 성경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본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지 못하면 더 이상 논의해 볼 만한 가치가 없으므로 그것에 대하여 거부해야 합니다.


②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성경의 교훈에 복종하고 싶어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난제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애정을 두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애정을 두시지 않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가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 그들은 그것을 이해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 물론 우리도 그것을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시고 절대적인 분이신데 반해 우리는 유한할 뿐만 아니라 죄 있는 사람들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고 놀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 우리는 그런 것을 이해하는 입장에 있지 않고, 우리는 모든 것을 알도록 지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것들을 보여주시기를 기뻐하신 것들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여주시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알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신29:29)


③ 믿음이란 성경이 계시로 그에게 보여주시지 않으면 그것을 몰라도 만족할 용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 알기를 원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는 자세는 믿음과 정 반대의 태도입니다. ? 어린 아이같이 되는 것입니다. ? 이러한 문제는 높고 무한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하여 나와 같이 유한하고 작고 죄 있는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들려주시는 것뿐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모르는 채로 만족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④ 자기 스스로 구원을 받을 만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 왜냐하면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지옥에 가도록 내버려 두시고 영원한 멸망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할지라도 누구도 불평을 토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공의를 완전하게 시행하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그 가운데서 한 영혼만이 구원을 얻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절대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 편에서는 한 사람도 구원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으로 인하여 놀라움으로, 또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에 서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8. 성경해석의 원리들


① 우리는 특별한 성구들을 연구하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지켜야할 첫 번째 원리는 성경만을 가지고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 두 번째로는 성경과 성경을 비교하여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난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③ 세 번째로는 성경 중에서 위대한 궁극적인 진술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④ 네 번째 원리는 우리에게 어렵고 불분명하게 보이는 진술들을 다룰 때에는 성경으로 시작하여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따로 독립된 본문을 기초하여서 교리를 세우고 진리의 체계를 세우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⑤ 다섯 번째는 특별한 구절이나 문단을 다룰 때에 언제나 상세한 부분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정확히 무엇이 말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문맥을 숙고해야 합니다.


⑥ 성경이 개인들을 향하여 쓰이고 있는지 교회를 향하여 쓰이고 있는지를 확인하여야 합니다.


⑦ 우리들 개인들의 구원 문제를 다루는지, 아니면 우리의 일이나 사역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다루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 가령 사역자로서는 실패한 자이지만 여전히 구원 받은 채로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또한 요15:1~11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구원의 문제보다도 교회 안에서의 직무나 역할에 관계된 또 다른 메시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문맥이나 본문에 있는 용어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 롬8:31-39절

 

 

 

 

8장 31~39절 :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1.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31)


사도 바울은 여기서 새로운 항목을 시작하며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다음에 8장의 마지막 절까지 이르도록 각 항목마다 질문하고 또 그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경우에서 그가 말해왔던 것에 관하여 여섯 가지의 질문과 의문들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않겠느냐? ?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 누가 정죄하리요?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첫 번째 질문인 우리들이 그 영화롭게 되는 지점에 이르는 길을 막고서는 선이 있을 수 있겠는가? 라는 도전을 시험하여 보아야 합니다.


① 하나님께서 구원과 관련된 모든 것을 행하셨는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하셨기 때문에 구원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② 그러므로 어떤 세력이 우리들이 그 목표지점에 이르는 것을 불가능하게 박탈해 버릴 수가 없습니다.


③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만 관심을 가지시고 계시며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가지십니다. 우리들을 대적하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편이시며, 우리들을 위해서 역사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④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어떤 세력일 지라도 그 일을 무마시킬 수 없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끊어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일이 성취됨의 확실성(32)


이제 우리는 두 번째 도전을 다루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 적어진다거나 또 여리게 된다거나 하여 결국에는 완전히 없어져 버리는 일이 있는가 하는 것인데,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① 이미 우리를 위해서 최고의 일을 하신 하나님께서 도저히 그가 큰 일을 하실 때에 가지고 계셨던 궁극적인 목표에 우리를 인도하기 위하여 그보다 더 적은 일을 못하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② 우리의 구원의 확신을 여러 사실들에 기초하여 주고 있으며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들을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③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죽음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④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정하시고 계획하신 일입니다. ? 갈보리 언덕에서의 죽음을 명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 거기서 죽으신 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서 어떠한 것도 하나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 아끼기는커녕 그는 우리가 받을 저주를 그가 받으셨으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충만한 진노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에 의하여 내어주신바 되었습니다. ? 하나님께서 주님께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실 때, 그를 외면하심으로 주님은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분리될 것을 아셨고, 하나님께서 죄를 향하여 내리시는 진노로 인하여 주님의 영혼은 고통을 받으며 슬프셨던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 아들에게 죄를 향하여 쏟아 부으실 모든 진노의 잔을 그에게 다 부으셨던 것입니다. ? 그는 자기 아들을 상하게 하셨고, 곤욕을 내리셨으며, 괴로움을 주셨고, 슬픔을 당하게 하셨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사랑으로부터 분리시켜 철저하게 외면하셨습니다. ? 이것이 우리에게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바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3. 하나님의 택하심(33,34)


이제 세 번째 도전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물리치신 다든지, 우리가 정죄를 받은 상태로 다시 떨어질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떠한 사람이든지 간에 우리를 고소할 자가 없으며,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가 정죄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증명할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① 인간이 하나님과의 가진 관계는 법적인 문건입니다.[에덴의 행위언약으로부터 시작되었음]


② 인간과 관계를 주도하는 율법을 만들고 제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③ 하나님은 율법을 제정하신 분일뿐 아니라 재판자도 되십니다.


④ 사람을 송사하는 어떠한 송사라도 율법의 차원에서 행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송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상태와 조건과 하나님과의 규정하기 위하여 친히 주신 율법의 차원에서 행해져야 합니다.[마귀포함] ? 사람은 법이 정해 놓은 선을 넘은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 우리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법이 무엇을 말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 우리는 그 법을 따라서 살아야 하며, 그것을 따라서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 영적인 면에서도 모든 것들은 여러 문제에 대하여 영향을 미칩니다.


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가 없다고 선언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정죄를 받아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면제해 주시고 더 나아가 의롭다고 칭해주시니, ? 그것은 죄를 용서하는 것보다 더 큰 것입니다. ?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4. 우리의 대 제사장(34)


이제 사도 바울은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에 관한 이 진술들은 각각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시는 그의 직무에 관하여 말하는 진술임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목적은 우리들이 그가 우리를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를 상기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 세상에 오시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이 진술은 성도들의 최종적인 견인을 말하는 논증에 있어서 큰 도움을 줍니다.


① 구약의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씩 성막이나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것은 대제사장에게만 허락이 되었으니, 대제사장은 모든 백성들의 죄를 지고 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참조 : 히브리서 9장 7~12절]


② 대제사장이 하는 주요한 일은 우리 주님 자신이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행하실 일에 대한 예표입니다. ?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기 전에 그 일을 먼저 해야 했던 것입니다. ? 그래서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 그는 제물이면서도 대제사장입니다. ? 그는 자기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늘로 들어가 하늘의 성소에 계신 하나님의 존전에 나가셔서 자기의 피를 드린 것입니다.


③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드리시고 그의 피를 흘리사 그것을 가지시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리신 것입니다. 곧 하늘의 가장 거룩한 곳, 하나님 자신이 영원한 영광 중에 거하시는 곳에 계시는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④ 주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심으로서 우리들에게 중재가 되시며 이러한 일은 정해진 때가 오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인데, ? 그 때에는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것이며, ? 그의 원수들이 결국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 마귀와 그의 모든 추종자들이 다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 모든 악, 죄, 하나님을 반대하는 모든 것이 궁극적인 멸망의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 그리고 그 날에 주님은 그의 영광스러운 위대한 나라를 선포하실 것입니다. ? 그러면 우리는 그 나라에 영원토록 거하게 될 것입니다. ? 그것이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5. 넉넉히 이기느니라.(35~39)


8장의 전체의 논증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입은 사람들은 궁극적인 영화의 지점에까지 도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우리들이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를 생각하는 데서 나온 마지막 도전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다른 도전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가진 태도라는 차원에서 주어진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약화 될 수 없듯, 하나님의 사랑이 적어지지 않는 다는 것 또한 진리이며, 또한 심판하는 권세를 위임받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중보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영화는 절대적으로 확실하며, 우리가 시련들과 환난들과 고통들로 인하여 실패하고 실족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떨어지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①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하여 그 사랑은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②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붙잡아 주시기 때문에 그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습니다.


③ 어떠한 환경도, 어떠한 위협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것을 넉넉히 이김으로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④ 우리는 우리의 자격이나 우리의 주어진 환경, 우리의 어떠함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떨어져 나간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으나 실상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안전한 것입니다.


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눈을 우리 자신에게 두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과, 그로 인하여 주어질 영광스러운 승리를 누려야 할 것입니다.

 

 

 

 


성경: 롬9:1-5절

 

 

 

 

9장 1~5절 :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1. 고뇌에 대한 엄숙한 표현(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여기서 그가 진술하려는 것의 진실성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 중에는 율법의 미세한 부분에 속한 것들에 대한 토론이 있었고, 그들은 그러기를 좋아했습니다. 너는 하늘로 맹세하느냐, 땅으로 맹세하느냐, 아니면 제단이나 제단의 예물로 맹세하느냐 등의 문제로 논란이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들이 말하고 있는 것의 진실성을 확증시켜주기 위해서 이러한 유의 맹세를 하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서신서들에서 나타난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보면 바울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합니다.


① 바울은 본문에서 매우 심각하고 매우 엄숙한 진술을 하고 있음을 그들이 인식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②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임재 속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사도는 다시 자신의 최선의 진지함에 대하여 모든 정직함을 가지고 말하고 있음을 자신의 양심이 증거한다고 합니다. ? 화인 맞은 양심을 자신이 이끌어 갑니다. ?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 속에 넣어주신 양심을 통해서 말씀이 내면적인 모니터가 됩니다. ? 그들은 양심이 판단하는 것을 거스려 반대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④ 그런데 바울은 덧붙여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라고 말합니다. ? 양심은 증거자이고 우리가 항상 그 양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양심은 실수할 수가 있으므로 빛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 일반적으로 양심은 정죄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 그렇지만 양심 자체는 완전하지 못하여 훈련을 받고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 양심이 정죄했던 많은 것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 양심은 더 이상 그것들을 정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 그래서 양심은 빛을 받아야 하고 수련을 받아야 합니다. ? 양심에 빛을 비춰주어 깨우치게 하는 것은 성령과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그 직접적인 가르치심에 의해서 빛을 받아 깨우침을 받은 양심은 양심이 처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⑤ 그는 이 진술을 하면서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을 뿐 더러 성령의 비췸을 받은 그의 양심도 그 점에 아멘이라고 화답하고 있습니다. 양심이 찬동한다는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지위입니다.


⑥ 당시에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민족의 원수, 또는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고, 멸시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돈을 바라고 그러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새로운 종교가 유대교를 말살시키고 로마의 상전들과 이방인들에게 인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변심하여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비난한 것입니다.


⑦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 잘못된 소문에 대하여 자기의 결백을 드러내고 있는 방식으로 “내 자신이 저주를.......원하는 바로라” 라는 말씀을 하였는데, 그것은 자신이 희생당함으로 자기의 민족과 친척들이 어떻게든 도움을 입게 된다면 그러기라도 했으면 좋을 정도로 그것에 대하여 큰 관심과 그러한 소원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⑧ 본문의 말씀은 출애굽기 32:30~32의 모세의 기도와 병행합니다.

 

 

 

 

2. 하나님께 대한 유대인의 관계(4~5)


사도 바울은 여기 두 구절 속에서 자신이 끊임없는 마음의 슬픔이 어째서 일어났는지, 어째서 그가 “골육의 친척”을 위해 그렇게 큰마음의 부담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상세한 이유들을 제시해 나갑니다. 그는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다루시는지를 아주 심오하게 이해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전체 의도와 체계와 계획을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구약시대에 그들의 조건이 무엇이었는지를 상세하게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의도에 비추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가진 그들의 관계 때문에 항상 누려왔던 독특한 특권들을 소개합니다.


① 본문의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저희는”이란 말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않았다는(요1:11)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사도가 유대인이라거나 히브리인들이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 유대인이라는 말은 이방인들과 대조시키기 위해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말로서 적대세력으로서의 이방인의 반명제로 사용됩니다. ?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를 쓰는 사람들을 구별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즉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서 다른 민족들과 섞여 있는 사람들은 히브리어를 잊어버려 히브리어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히브리인이라는 말에서 제외 되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 사람이란 말은 야곱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됨으로서 다른 나라는 전혀 해당이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가까이에서 다스리는 백성들을 나타낼 때 사용되어집니다.


③ 4절의 “양자됨”은 8:14~15의 양자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 거듭난 사람들,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씀이고, 9:4의 양자됨을 누린다는 것은 속해 있었던 위치를 말하는 것입니다.[예 : 출4:22~23; 신14:1; 렘31:9; 호11:1; 마8:11,12]


④ 이제 “영광과”라는 어휘는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당신의 자신에 속한 영광스러운 성품 중에서 어떤 것을 보여 주셨다는 뜻으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예 : 출16:10; 29:43; 33:18; 40:34; 왕상8:10,11]


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러한 것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며 과거에 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그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특권들을 차지하는 영역 속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3. 언약에 대한 성경의 개념


이제 우리는 “언약들”이라는 단어에 이르게 되는데 이 언약이라는 단어는 신구약성경에서 다 사용되고 있습니다.


① 성경에서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스스로 행하시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언약이라 할 때 그것은 언제나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② 바울이 여기서 “언약들”이라고 복수를 쓰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이 여러 번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 어떤 언약을 맺으신 다음에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다른 언약을 맺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 어떤 언약을 갱신할 때 그 전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언약을 다시 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 오직 하나의 진실한 언약만이 있을 뿐입니다. ?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되풀이하실 때마다 어떤 특별한 측면을 강조하시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본래의 언약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 백성들의 생각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특별히 백성들로부터 어떤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서 그 위대한 한 언약을 계속 되풀이해서 말씀하시고 반복하여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 참조 성구 : 창9:8~11,12~15; 15:18; 17:1; 22:15~18; 출2:24~25; 3:16~17; 6:2~7;  ? 갈3:16의 사도의 논증에서 그 대목의 전체 요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근본적인 언약이 바로 그것이었다고 논증하는데, 모세를 통해서 되풀이된 그 언약은 처음의 언약을 폐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율법의 국면을 밝혀 준 것이라는 것입니다. ? 구약의 마지막 위대한 언약인 삼하7:8~17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다윗에게 되풀이되고 강조된 이 언약이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는데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눅1:30으로 돌아가 보면, 다윗에게 주었던 언약이 다시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③ 결국 사도는 과거 자기 선조들에게 한 언약들을 가리켜 말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 이제 우리는 그 언약들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 이제 우리는 그 안으로 들여졌고, 하나님의 옛 언약들을 이행하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동일하신 하나님으로서 친히 맹세하셨습니다. ? 그 성품과 그 주권이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바로 그것입니다.


④ 이제 바울이 “율법을 세우신 것”이라고 하는 말은 율법을 주신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 여기서 그는 율법이 그들에게 주어진 방식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들리는 음성으로 이 백성들에게 가까이 임하셨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출19장, 신4:32~36]


⑤ 이 모든 진술 속에서 그는 이 백성들이 모든 방면에서 절대적으로 특이했음을 보여주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시고 다른 어떤 민족에 대해서도 하지 않으신 방식으로 친히 맹세하셨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옛 백성들에게 행하신 일을 보고 그저 놀랄 뿐입니다. ?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메시야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백성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4. 예배의 참된 방식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직접 대하셨고, 그들에게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고, 하나님의 방식과 그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한 계획과 의도를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성막의 예배를 통해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방식이 그 성막의 예배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① 그 점은 너무나도 중요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이 간교하게 그것을 고치려고 들 때는 매우 끔찍한 방식으로 교훈을 얻곤 했습니다.(고라, 다단, 온과 아비람은 이스라엘 중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무섭게 심판을 받았습니다.)


②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결정하시고 계시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한 바대로 행하지 말고 하나님의 방식을 지켜야 합니다. ? 그때나 지금이나 그 점은 매우 중요한데, 그 길은 오직 하나 뿐인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는 길입니다. ? 다른 길은 결코 없습니다.


③ “약속들”이라는 말씀은 이 위대한 구원의 계획과 체계로부터 결과 되는 특별한 축복들을 지칭합니다. ? 약속들은 메시야 시대의 복락들과 영광들을 지칭합니다. ? 우리는 메시야와 그 통치에 속한 모든 자에게 주어지게 될 상세한 축복들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 이제 우리는 메시야의 통치가 이미 그 백성들, 곧 교회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 이 약속들 중에 어느 것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 나머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이 이루어질 날이 올 것인데, 그것이 바로 “약속들”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5. 만물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


5절의 마지막 부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송영입니다.


① 그는 만유 위에 계신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요1:18)


② 그는 모든 피조물의 머리가 되십니다.(고전11:3; 15:28; 골1:15~17;)


③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하나님과 같은 형상과 모양을 취하고 계십니다.(고후4:4; 골1:15; 빌2:6,9; 히1:3; 고전3:5~6; 고후3:16,17; 행4:24,29; 5:3,4; 마1:23; 요1:1~3; 20:27~28)


④ 그는 당신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또한 하나님 자신입니다.(행20:28; 딛1:3; 2:13,14; 빌2:5~8; 살후1:12; 딤후4:18; 벧후3:18; 계5:13)

 


 

 

 

성경: 롬9:6-13절

 

 

 

9장 6~13절 :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 바울은 반론을 다루기 시작함(6~7)


우리는 이제 여기서 로마서의 새로운 세목에 접어들게 됩니다. 1~5절까지는 주제를 소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제 바울은 여기서 실제로 자기와 자기 가르침에 대항하여 제기된 반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포기하시고, 당신이 그 백성들에게 하신 약속을 저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하나님의 목적이 실패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목적이 실패하거나 변동되는 것이 있을 수 없으며 어느 것도 그것을 방해하거나 좌절 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9장은 하나님을 변호하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방식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리를 전제해 놓고, 큰 진술을 하고, 그것을 입증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증하고 확증하며, 그런 다음에 그 모든 것을 함께 모아 끝에서 다시 한번 마무리 짓는 것이 바울의 설교 방식입니다.


①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런 효력 없이 끝난 것 같지 않다는 뜻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목적을 뜻합니다. ? 그것이 약속이든, 유업이든, 어떤 규례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다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진술하고 제안하신 것입니다. ? 그것은 언약들과 약속들과 우리가 함께 살펴본 다른 모든 것들을 포함합니다. ?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과거에 폐하여지지 않았으며, 지금도 효력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사도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유대인들의 조건과 상태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관하여 어떤 변화도 실패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② 이스라엘에게서 난 모든 자들이 참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2:28,29에서 그것을 말한 바 있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에게서 니라.”


③ 같은 방식으로 4:11~13의 말씀 속에서 그 문제에 대한 하나의 빛을 던져 주었는데, 그는 거기서 아브라함의 전체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④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변화무쌍한 역사를 통해서 부단하게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과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 그들이 바벨론으로 붙잡혀 간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 자기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이니 자기들에게 전혀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주제넘게 생각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항상 그들을 축복하셔야만 한다는 식으로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항상 복을 주지 아니하셨을 때 그들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마치 하나님께서 약속을 배반한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 그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에게서 난 모든 사람들이 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⑤ 사복음서에서도 우리 주님께서 유대인들과 여러 논쟁과 토론에 대해 할애한 시간과 지면이 얼마나 많은지를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들은 자기들이 유대인들이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는 사실이 그 자체로 자기들을 구원한다고 단정하고 있었으며, ? 새로운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시면서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약속하셨을 때에 바리새인들은 화를 냈던 것입니다. ?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죽으셔야 했던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자기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⑥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 국가에 속하여 있다고 해서 모두다 구원을 받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⑦ 부모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⑧ 세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⑨ 그런 모든 조건 속에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목적과 약속들은 결코 폐하여지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의 자녀들(6~9)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는 전제를 해 놓은 다음 이제 그것이 이스라엘 자손들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명백하게 입증 될 수 있음을 밝혀 나갑니다.


① “”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그것을 두 번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 육신적인 혈통을 나타냅니다. ? 두 번째로 사용할 때는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누구를 통해서 시행되느냐는 의미에서 사용 되었습니다. ? 이삭과 이스마엘은 육신적으로는 둘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연약과 약속의 특별한 관계에서의 씨는 이삭뿐입니다. ? 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데,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가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씀과 정확히 병행을 이루는 요점입니다. ?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났지만 얼마만이 참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는 것이 바울의 첫 번째 요점입니다.


② “자녀”라는 말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 이삭과 이스마엘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녀들이었지만 그들이 다 자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 상식적인 면에서 “자녀”라는 말은 한 아버지의 후손이라는 뜻으로 사용 되지만 특별하게 영적인 의미에서, 신령하고 언약적인 면에서는 이삭만이 자녀입니다. ? 이 약속과 언약의 문제에 있어서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이 그의 자녀들입니다.


③ 그래서 “칭하셨으니”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떠나 보내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그것이었습니다.(창21:10~21) ? 이 말은 “여긴다.” “간주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으나 여기서 사용된 “칭하셨으니”라는 말은 더욱 강한 뜻이 있습니다. ? 헬라어에서 가능한 의미를 찾아보면 “부르심”이라는 말인데, 그 부르심이라는 말에는 칭함을 포함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 그것은 “존재하도록 부르신다.” 라는 뜻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들을 마치 있는 것처럼 부르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주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케 하시는데,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들을 존재하도록 부르신다는 것이 됩니다.


④ 이제 8절의 “”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한다면 “이것이 뜻하는 바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창하리라는 진술이 뜻하는 바는 이것이다.”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⑤ 그는 “자녀”라는 차원에서 먼저 그 문제를 다루는데,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라고 합니다. ? 육신의 자녀도 있고 하나님의 자녀도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 육신의  자녀가 다 하나님의 자녀도, 약속의 자녀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 오직 약속의 자녀만이 씨로 여기심을 받고, 그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 하나님의 자녀, 참된 씨, 영적인 씨라는 말은 다 같은 뜻입니다.


⑥ “여기심을 받는다.”는 말은 7절의 “칭하리라”는 말과 다른 뜻입니다. ? 이 말씀에는 “존재하도록 부르신다.”는 뜻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 하나의 산술적인 어휘로서 “계산에 넣어 생각되다.”라는 뜻입니다. ? 말하자면 어느 수에서 빼어 다른 것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 따라서 그 말은 자녀로 “계산되다.” “간주되다.” “고려되다.” “여기심을 받는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⑦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 “약속”에 속한 것입니다. ?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육신과 그 활동의 결과로 말미암아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활동의 결과로 나온 자들입니다. ? 이삭의 탄생은 하나님의 이적으로 가능하게 된 것인데, 그 이적 또한 정상적인 임신의 기한인 “명년 이 기한에”라는 표현을 보듯이 정당한 기한이 소요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적은 자연 법칙을 깨뜨리거나 무시하거나,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 법칙의 법에 능력을 가하여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이삭이 태어난 것은 약속 때문이었는데,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약속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약속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 아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 그 이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생산하신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미 정하셨기 때문에, 그가 행하시고 그 이적을 이루신 것입니다.


⑧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서, 이삭으로 말미암아 그 목적을 이루시려고 당신 자신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삭을 존재케 하신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아니라 약속으로 말미암아 생산되고 약속을 따라 난 약속의 자녀들만이 “”입니다.


⑨ 하나님의 목적은 야곱과 에서를 통해서 알 수 있듯 선택의 과정을 통해서 이행되어 나가는 것인데,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선택의 원리에 따라 되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한다는 것입니다. ?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서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택하지 아니하셨습니다. ? 그 두 사람이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신 것입니다. ?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독립적인 행동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방식이고 우리가 분명하게 영화롭게 될 확실한 방식입니다. ? 하나님의 권속에 속한 사람은 모두 다 그 일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3. 택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10~13)


① 하나님의 약속과 뜻은 어떤 사람들에게만 해당됩니다.


② 하나님의 목적과 약속이 해당되는 이 사람들의 현재 신분은 바로 그들의 출생에서부터 간섭하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③ 이 선택이나 선별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나가고 있으며, 언제나 이루어져 왔고, 언제나 이루어질 것입니다.


④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 이 선별과 선택을 방편으로 하여 그 뜻을 이루십니다. 그 한 가지 이유란 그 방식만이 당신의 뜻과 계획을 확실하고 틀림없이 이행시켜 궁극적인 열매를 맺게 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그 뜻을 이루어 나가고 계십니다. ? 하나님의 선택은 절대적으로 누구에게 구애받지 아니하는 주권적인 것입니다. ?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의 어떤 것에 전혀 매이지 않는 선택입니다. ?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에도, 우리 속에 있는 어떤 것에도 결코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 오직 한 가지 요점에 의해서만 결정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영원한 뜻에 의해서만 결정됩니다.


⑥ 하나님께서는 사람 자체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죄악된 상태를 미워하십니다. 사람의 죄악된 자세, 그리고 죄악된 자세가 가져오는 모든 것을 미워하십니다.


⑦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 타락한 족속 중에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받도록 선택하신 것이 아니며, 사람을 뽑아 그들을 개선시키려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를 산출하는 것입니다. ? 그것은 영적인 탄생으로 말미암아 탄생되는 새로운 백성들, 영적인 백성들입니다. ? 이 사람들이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예비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삭의 경우에서 그 점을 확증했습니다.


⑧ 하나님께서 우리를 육신적인 본성의 과정을 통해서 이 세상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이 “새로운 인류”의 구분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정확히 똑같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는 언제나 달랐습니다. ?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우리 자신도 몰랐습니다. ? 또한 다른 어느 누구도 몰랐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 이 “”의 생산을 보증하셨습니다. ? 그래서 결국 완전하고 새로운 인류인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하고 철저한 한 인류가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 그리스도는 머리이시며, 우리는 몸입니다. ? 그는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시며, 전적으로 새로운 분으로서, 두 번째 사람이요 마지막 아담입니다. ?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식입니다.

 

 

 

 

 

성경: 롬9:14-24절

 

 

 

 

9장 14~24절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1. 두 가지 반론과 그에 대한 답변(14~18)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시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실 작정을 하시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는 그들을 미워하십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벌써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처럼 사도가 두 진술을 하였기 때문에 14절에서 두 가지 반론이 제기 되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것은 두 가지 방면에 불의한 것처럼 보이는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신 것이 하나님 편에서의 불의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사람들은 미워하시고 저주하시는 하나님의 행사가 온당치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15~18절에서 두 경우를 거론합니다.


①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는 사도바울은 이 진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 방식대로 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불의하다고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 생각해 보면 그 일 자체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최종적인 것을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언제나 정당하고 의롭기 때문입니다.


② 바울은 사실상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만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쉽게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공의의 차원에서 다룬다면 우리 모두는 영원토록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 어느 누구에도 소망이 없습니다. ? 그것은 온 세상이 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긍휼을 베푸시는 것을 불의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 모두가 저주 가운데 있는데 그 가운데서 몇 명을 구출해 주었다고 해서 그것을 불의하다고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모순이며, 또한 모두 다 구원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그것을 불의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③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들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 하나님은 항상 지혜로우십니다. ? 항상 참되십니다. ? 항상 거룩하십니다. ? 언제나 능력이 충만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심에 있어서 항상 공의로우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매우 의도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시지 않으시고 구별하여 어떤 사람들에게만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④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심을 따라 자신의 주권적으로 정하신 뜻에 따라 자신이 기뻐하시는 방법과 분량대로 그 선하심을 나누어 주실 절대적인 자유권한을 가지고 계시는데, 자신의 지혜로 정한 그 뜻에 따라서 행하시며, 자신의 거룩한 뜻에 따라 정하신 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⑤ 마20:1~15의 포도원 비유는 본문의 완벽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마음을 강퍅케 하시는 방식(17~18)


①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말씀하시되”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② “너를 세웠다”라는 말씀이 원어에서 전달되는 의미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거나 어떤 사건이 무대에 나타나도록 허용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그것은 “내가 너를 단번에 제거해 버리지 않고, 이 목적을 위해서 내가 너를 세웠고, 네가 있는 그곳에 있게 하였다.”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출8:15; 4:21에서 나타난 진술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강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완강케 하였습니다. ? 바울이 확증하고 있는 요점은 하나님께서 바로가 그 특별한 시점에 거기 있도록 정하사 그 바로를 통하여 그 하나님의 능력과 이름을 온 세계에 알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 창45:7,8; 5:20의 요셉의 고백 참조 ? 시105:23; 요12:37~41; 행2:22~23; 4:27~28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되어진 것입니다. ?  고후5:19; 사53:6; 고후5:21와 같이 행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 그러나 살후2:11~12; 벧전2:8; 유1:4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죄를 지으시거나 사람의 마음속에 악한 심정을 창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 하나님께서는 악을 지으시지도 않고 그 악을 사람의 심령 속에 넣지도 않으며, 다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위대한 목적을 위해서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결코 바로를 불신자로 만들지 않으셨는데, 그가 이미 불신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신앙을 심화시키사, 당신의 능력과 영광을 보여 주시는 위대한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 바로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대적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더욱 악하게 하신다는 교훈입니다.


③ 하나님께서 마음을 강퍅케 하심에 있어, 롬 1:24,26,28에서 한 가지 방식을 소개 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음을 강퍅케 하시는 하나님의 여러 방식들 중에 하나님께서 제어하시는 작용을 거두는 방식입니다. ? 세상이 죄에 빠져 있으나 하나님은 그 죄에 어떤 한계와 제한을 두십니다. ?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은 전적인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지옥이 되었을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그 제어하시는 작용을 철회하시는 순간에 거기에는 강퍅해지는 일이 있습니다. ? 햇빛이 비취지 않으면 땅은 굳어지고 얼어붙게 되지만 햇빛이 다시 나올 때 그 얼었던 것이 녹습니다. ? 햇빛을 거두면 굳게 되는 일이 나타나듯이 하나님께서 마음을 그런 식으로 굳게 하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상실한 마음대로 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 그들을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그 모든 것을 다 거두어 버립니다.


④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강퍅케 하시는 두 번째 방식은 롬7:5,8~10에서 나타납니다. ? 한 사람의 죄인에게 율법이 나타납니다. ? 율법이 그에게 와서 그 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고 그 죄를 비난합니다. ? 그 율법이 그 사람을 격동시키고, 그 사람은 더욱더 큰 죄인이 됩니다. ? 죄 짓지 말라고 말하는 율법이 그로 하여금 그 죄를 더욱 더 짓도록 부추깁니다. ? 율법이 그의 정욕과 그의 소욕에 불을 붙입니다. ? 도덕적인 교육은 오히려 그를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보다는 죄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됨으로서 더욱 범죄하게 합니다. ?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하고 그것이 나쁘다고 말함으로서 그 일을 하도록 충동질하여 그들을 끌어들여 더욱 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 사람들이 성과 도덕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스스로 선해지려고 노력하는 사실을 발견하지만, 그런데 나중에 그들은 책들을 읽은 후에 그 전보다 더 악해졌다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 그것은 바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악 때문입니다.


⑤ 이제 세 번째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어 주심으로서 입니다. 거룩하신 우리 주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는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하여금 그 전보다 열배 더 악하게 만들었습니다.


⑥ 네 번째 방식은 하나님께서 사람들 속에 있는 소욕을 더 격동시키시는데, 요셉의 형들의 경우에 그러했습니다.(창50:20)


⑦ 다섯 번째는 하나님께서 사단을 사용하시기까지 한다는 말씀을 여러 번 듣게 되는데, 욥의 경우에도 그랬습니다.[참조 : 고전5:5] ? 하나님께서는 때로 당신이 모든 제어하는 수단을 다 거두심으로서 사람을 완강케 하시며, 사단에게 넘겨주시기도 하십니다.(롬9장) ?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마음을 완강케 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어 결국 모든 일이 절대적으로 절망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 그런 다음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나타나십니다. ? 만일 하나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그 일을 하셨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일을 했다고 말할 준비가 늘 되어 있을 것입니다. ? 그 마음을 완강케 하신 것은 그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서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3. 토기장이와 진흙(18~2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인 뜻을 하나님 자신의 방식대로 이루실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계시며, 그가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때에 언제라도 하실 수 있는 권한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①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위해서 바로의 마음을 완강케 하셨습니다.


② 출애굽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대하고 표적적인 권능과 그 주권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바로 속에 있는 그 완고함과 저항감과 악을 증가시키신 것입니다.


③ 물론 바로는 대단한 독재자였고, 대단한 힘을 보유한 황제였으며, 큰 군사를 가지고 있는 왕으로서 그 당시 세계를 정복하고 있는 정복자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④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철저하게 낮아져 결국 자기 뜻과는 정 반대로 손을 들고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가도록 허락해야 할 정도로 낮아진 것입니다.


⑤  바로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⑥ 이제 본문의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라는 말씀에서 “지음 받은 물건”은 흥미 있는 어휘입니다. ? 오늘날 플라스틱이라고 쓰이는 말은 여기서 사용된 원어 “프리스마”에서 나온 말입니다. ? “프리스마”라는 말은 “지음을 받은 물건”, “물질로 합성하여 만든 존재”를 말합니다. ? 여기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바로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손으로 다루시고 만져서 모양 지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바르게 부각시켜 주기 위해서 또 다른 비교 용법을 쓰고 있습니다. ? “토기장이와 진흙” 또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의 대조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지음을 받은 물건과 지은 자 사이의 대조입니다. ? 사도는 바로 이 질문에서 악한 정신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들의 공평치 못하다는 불평을 기각시키기 위하여 피조물이 되는 사람이 조물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거스려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⑦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어야 합니다. ? 어린 아이처럼 되어야 하며,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만 진리를 보여 주십니다. ? 우리 주님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하나님을 힐문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심령이 바르게 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4.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의 무모함(19~24)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셨다는 의미는 어떤 것은 요긴하게, 어떤 것은 덜 요긴하게 쓰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귀하게 창조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천하게 창조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어휘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게 하는데, 바울이 “합성된 물질”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 “창조함을 받은 것”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① 사도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상징어는 창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 창조함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창조하는 것을 뜻합니다. ? 여기서 우리는 여러 합성적인 물질로 시작하게 되는데 그것은 진흙 한 덩이입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실 때 사람에 대하여 가진 관계는 마치 진흙 한 덩이에 대해서 토기장이가 가진 입장과 같다는 것입니다. ? 토기장이는 진흙을 창조하지 않았고, 이미 창조된 진흙으로부터 시작합니다.


② 이 문제는 본래의 창조와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 그것은 원 창조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창조한 것일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그 모양을 따라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 그것은 “천히 쓸”이라는 말의 정 반대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전체의 피조물들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천한 것을 창조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를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 더구나 태초에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 이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 대해서 행하시는 일에 대한 기사입니다. ? 진흙 덩이는 “인성”이 아니라 “타락한 인성”입니다. ? 아담과 하와의 원죄의 결과로 나타난 인성입니다.


③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어떤 사람은 존귀함에 처하기로, 또 다른 사람은 비천함에 처하기로 결정하셨는지에 대한 대답을 요구한다면, ? 그것은 “나는 모른다.” 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질문할 하등의 권한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 그것은 궁극적인 신비입니다. ? 우리가 말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고, 그 일을 하실 권한을 갖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 만일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행하실 권한을 갖고 계신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화를 자초하는 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왜냐하면 나를 지으신 자와 다투려고 애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④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에 대하여 아담 안에서 책임을 져야 하며, 우리나라의 여러 활동들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담이 행한 일을 우리도 했기 때문입니다. ? 우리 스스로도 그 일을 했습니다. ? 아담이 우리를 대표로해서 범죄함으로서 우리는 모두 범죄한 것입니다. ? 모든 사람들은 일부러 죄를 짓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 우리가 죄를 지으라고 강압하는 이가 없지만 그 죄를 짓고 싶어 합니다. ? 우리가 양심을 거스르고 율법을 어기고 나갔습니다. ? 그러나 우리의 범죄나, 의도적으로 범죄한 그 모든 것들보다 더 큰 것은 복음을 거부하고 복음의 선물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 만일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 그러나 정죄를 받았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 책임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⑤ 이 문제는 커다란 신비요, 하나님의 영원한 뜻의 비밀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어떤 원리에서 하시는지 모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다만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씀입니다. ? 그들이 둘 다 그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 이 신비로운 일은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은 그 비밀스러운 진리를 거부하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낍니다. ? 그러나 구원 받은 자들은 이 교리가 믿어지고, 그것에 대한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구원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5. 진노의 능력을 나타내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19~24)


여기에 멸망의 무리, 타락한 인간의 무리가 있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으며,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셔서 영광의 그릇으로 만드실 계획을 세우셨고 나머지 사람들은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들 권을 세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인간에 대하여 하고 싶은 대로 하실 권한이 있고, 사람의 편에서는 그것에 대하여 반대하거나 불평을 할 수 있는 어떤 권리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강퍅케 하셔서 심판하시고,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긍휼을 베푸시고 구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하나님께서 권능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고 알리시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②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심에 죄인들을 멸망시키심으로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스러운 존재와 성품에 속한 이러한 국면들을 드러내시며, 당신의 진노의 능력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③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멸망 받도록 예비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은혜에 반응하지 못함으로서 더욱더 죄악적이 된 것입니다.


④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즉시 멸하지 아니하시고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 패역과 그 거만과 그 불순종을 참아내신 것입니다. 한동안 그 일을 관용하셨고, 모세와 아론을 그에게 보내어 그의 마음을 다시 설득하셨습니다. 그런 일을 여러 번 계속하였지만, 끝내 바로와 그 군대는 홍해에서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한동안의 시기가 지난 다음의 일입니다.


⑤ 하나님께서 그 악인들을 즉각 멸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하심의 속성 때문입니다.(겔18:23) ? 그들이 전혀 핑계를 대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 그들이 심판을 받게 될 때에 그 심판이 더 두드러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 그 나타나심이 지연 되는 이유는 그 강림이 더욱더 놀랍고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함입니다.(살후2:8; 살후1:4~10)


⑥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성품의 어떤 국면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심판하심으로써 자신의 진노와 능력을 보여 주시며, 동시에 긍휼을 베푸시는 방식으로 당신의 긍휼히 여기심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구원 받기로 되어 있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실 때에는 “그의 영광의 부요함”을 보여 주십니다. ?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속하시는 일을 통해서 드러내 보이신 영광의 기이함에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온전히 사로잡히게 되고, 심지어 하늘에 있는 정사들과 권세자들마저 깜짝 놀랄 일입니다.(엡3:10) ?그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시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우리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⑦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우리 마음에 주셔서 보이셨고,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나타내셔서 알게 하심으로서 우리가 핑계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진노의 그릇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준비된 것입니다. ? 그들 스스로 멸망에 합당한 자들로 자처한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 준비하신 긍휼의 그릇들이 있습니다. ?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이 그 궁극적인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미리 예비 되었다고 사도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를 영원한 파멸에 던져도 아무런 잘못이 없으신 그 전능하시고 영구하신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개인적으로 우리를 생각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으로서 주어져, 이것을 생각할 때에는 누구나 자기 존재의 깊은 데서부터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⑧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 우리는 태어날 때가 이르러 부모를 통해서 태어나게 하시되 야곱을 태어나게 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 우리는 시간 세계 속에서 실제적으로 부르심을 받는 지점에 이르게 되지만 우리는 영원 전부터 예비 되었습니다. ? 우리는 태어나되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이 보일 수 있고 죄의 삶을 살며, 심지어 복음을 거스르고, 거부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생각들을 입으로 발설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되었습니다. ? 우리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깊이 깨닫게 되는 때가 일어나게 됩니다. ? 우리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처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 ? 그것이 시간 세계의 한 시점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 그러나 창세전에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기로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 우리는 우리들 속에 이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⑨ 어떤 사람이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은 놀랍고 기이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 그러나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놀랍고 기이한 일입니다. ?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 외에는 그 어느 것도 그 일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 우리가 살펴온 하나님의 이 영원한 성품 외에는 그 일이 존재하도록 할 수가 없었습니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하는 것뿐입니다. ? 영광스러운 구원의 목적 속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신바 된 그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과 또한 가장 탁월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서 나타나신 영광의 부요함을 찬송합니다.

 

 

 

 

 

성경: 롬9:25-33절

 

 

 

 

9장 25~33 :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1. 이방인들을 받아들일 것이 예언됨(25~26)


구원은 어떤 방도를 통해서든지 유대인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육신적인 자녀라 할지라도 그 사실 자체가 그들을 자동적으로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출생이 어떠하며, 우리가 어떤 민족에 속해 있으며, 또한 어떤 조건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일 때문에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일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 동등하게 택하셨음을 입증해 왔습니다.”


이제 사도는 그 모든 것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 점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호세아 선지자에 의해서 쓰여진 성경을 통해 보여 주려합니다.


① 모든 인류가 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은 본질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떨어져 있다고 하며, 하나님의 언약과 그 약속에 대해서 어떤 관련도 맺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매춘 행위를 하는 여자와 결혼 해야만 했고, 그 대단한 묘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도 않고, 관계 되지도 않고 하나님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밖에 있어서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던 것이 우리의 위치였던 것입니다. ? 하나님의 빛과 복락과 생명에서 온전히 닫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②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하는 자라 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넘어서는 말씀입니다. ? 우리는 이제 그와 약혼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 성경에서 바로 그 상징적인 어법이 자주 사용됩니다. ? 그 말이 표현하는 모든 것을 다 수반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교회입니다. ? 존엄과 지위의 방식뿐만 아니라 특별한 권고와 관심과 인도하심의 방식을 통해서 그러합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옴으로서 일어난 변화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며, “사랑을 받지 못하더니, 이제는 사랑하심을 받은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선고(25~29)


구원에 있어서 오직 유일한 요소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과, 그렇게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우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이방인들을 택하시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련하여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자기들이 유대인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이 잘 되어 있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들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 중에서도 가장 큰 비극입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더니,” 우리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혈통에서 나셨으며 유다 지파에서 나셨지만, 그를 배척하고 거절한 사람들은 바로 자기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그 진상을 알려 주어야만 했습니다.


① 그는 말하기를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라고 말합니다. ? 바울은 “이사야가 말하되”, 라든지 “이사야가 예언하되”라고 말하지 않고 “외치되”라고 말합니다. ? 이 어휘는 매우 깊고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 뜻은 격정에 겨워 외치는 것, 깊은 감정을 표현하는 큰 소리의 외침입니다. ? 이 말의 원 뜻은 새가 매우 큰 압박 하에서 날카로운 비명을 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 롬8:5~17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는 말씀에서 “부르짖다.”라는 어휘와 같습니다. ? 사람이 양자의 영을 소유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기 아버지인 것을 알게 되어 자기 존재의 깊은 곳에서 이 외침을 길어내게 되는데, 그 외침과 같은 의미입니다. ? 그것은 마치 사랑하는 자기 아버지를 오랫동안 보지 못하던 어린아이가 아버지가 나타나자 그 아버지 품으로 소리치며 뛰어가 아버지를 보는 행복감에 젖어 있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 이사야는 그 예언의 말씀을 접할 때에 놀랍고, 충격적이었으며, 끔찍하고 무서운 메시지이기 때문에 슬픔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 했던 것입니다. ? 그것은 그 자신도 유대인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자손의 한 지체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는 그 말씀 때문에 도저히 자신을 가눌 수가 없었고, 하나님의 그 메시지가 주어졌을 때에 정말로 하기 싫은 그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울부짖으며 말했던 것입니다.


② 이사야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너희가 바다의 모래같이 많은 수를 이루겠다고 하셨을 지라도, 너희 중에서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 물론 그 남은 자란 남겨진 자를 뜻합니다. ?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아주 적은 부류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 구원 받을 사람은 유대인 중에서 적은 소수에 불과하리라는 것입니다. ? 28절에서는 그 문제를 조금 더 진전시켜 큰 무리가 버림받고, 심판받아 멸망당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던 자들의 대부분이 버림받고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③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바를 언제나 즉각적으로 이루시지는 않습니다. ? 사람들은 그 점에 대하여 눈이 멀어 있습니다. ?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즉시 행동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전혀 행동하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 홍수 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일으켜 설교하게 하셨는데, 사람들의 죄악성에 대하여 경고하고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며, 세상은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 사람들은 처음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나, 수개월이 지나고, 수년을 경과하게 되었는데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그들은 비웃고, 조롱하면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면서 혼인을 했습니다. ? 그러다가 결국 홍수가 왔고 그들 모두는 멸망당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 우리는 언제일지 모르나 반드시 되어질 일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에 따라 지체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어째서 그러시는지에 대한 하나의 안목을 이미 받았습니다.


④ 하나님의 진노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가나 가루를 부수어 냅니다.


⑤ 이사야의 예언에서 인용한 그 말씀은 사도가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적절한 말씀입니다. ?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무조건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약속들은 자동적으로 역사하는 법이 없습니다. ?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인이니 내 자녀도 응당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 ?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든지, 어떠한 상태에 있는 그 조건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30~33)


사도행전에서 보면, 전도자들이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설교 했을 때에, 유대인들은 그것을 배척하였고, 이방인들은 즐거워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사도 바울이 자기가 내린 결론을 통해서 우리 앞에 제시한 그 진술의 처음 절반이 그것인데, 그러나 31절에서는 비극적이고 서글픈 대조를 만나게 됩니다.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사도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던 요점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의 심장을 아프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의의 법을 추구하며 열심히 부지런히 그 일을 해왔지만 그 의의 법에 이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① 유대인의 특징은 이 의의 문제에 대해서 대단히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큰 열심으로 그 의를 좇아 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의의 법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세의 법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법을 지키는 것만이 의로 통하는 지름길일 뿐만 아니라 의를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② 그들은 부지런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고 애를 써 왔으며,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서 그 일을 해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의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③ 율법을 소유한다는 것 그 자체가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게 만들지 않으며 율법에 복종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④ 그러나 율법의 요구에 완전히 만족을 줄 수 있었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⑤ 우리는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의가 전가됨으로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⑥ 그러나 그 믿음조차도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에게 보내주신 성령님의 인도로 말미암습니다.


⑦ 구원에 있어서 믿음은 구원으로 이르게 하는 한 통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으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구원이 우리에게 성취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정하심과 부르심(30~33)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씀 자체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하심과 하나님의 행동의 결과라는 사실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떨어져 나올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일단 거듭나기만 했다면, 구원에서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① 어떤 사람이든지 안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입니다. 또 자기를 밖에 두게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의도적인 거절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②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로 인하여 스스로 자신을 자랑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나의 구원이 있게 한 복음을 자랑하고, 그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도무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③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의 지혜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결단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시지 않은 것에 대하여 알려고 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며, 억지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저주받을 짓이라는 것을 성경에서는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시고 계시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믿음으로서, 그 말씀에 순복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④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것이 성도들의 소원이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 즉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대하여 인간의 이성으로 파헤쳐 나가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이며, 멸망의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⑤ 구원하시는 이는 오직 그 분 뿐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 속에 있는 새로운 마음의 첫 번째 조짐입니다. ?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일들이 미련하게 보입니다. ? 그러한 것들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믿는 다는 뜻은 우리가 신령한 사람, 즉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의 죽음은 계획되고 예언됨(30~33)


여러 민족들로 이루어진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인들은 교회 밖에 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러나 그들은 소수의 남은 자에 불과합니다.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인들은 교회 밖에 있으며,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째서” 그러하느냐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으며, 그에 대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①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주어지는 의 대신에 그들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②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 하나님께서 친히 제시하신 방식이 거침돌이 되어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 그들은 선지자들과 선지자들의 글을 자랑하였지만 그들을 정죄한 것은 바로 그들이 자랑하던 선지자들의 글이었습니다. ? 기록된 것을 보면 그들이 “눈 먼”것으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 그 눈 먼 것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메시야에게 걸려 넘어졌습니다. ?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통해서 메시야 안에서 영광스럽게 제공하신 구원을 받지 못하고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③ 유대인들이 우리 복되신 주님께 행한 소행은 오래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된 바입니다. 그러므로 그 점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이 있었던 것입니다.


④ “내가 시온에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두었노니”라는 말씀은 시118:22의 진리와 정확히 같은 사상입니다. ?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또 유대 민족 전체를 정죄하실 때 인용하여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 그 다음 말씀으로 교회가 유대인들로부터 취함을 받아 이방인들에게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셨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방식 자체가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는데,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영광의 메시야가 구유에서 태어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 주께서 지상에 계셔서 행하실 때 낮아지신 상태로 계셨고, 그가 전혀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리새인들과 모든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습니다. ? 동정녀 탄생과 같은 이적적인 성경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 주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것과 하나님과 동등 된 자로 자신을 내세우셨으며, 그 권위를 가지고 말하노라고 외치셨을 때에 그것이 바리새인들을 격노케 하였습니다. ? 그런데 그들을 가장 무섭게 넘어지도록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자신을 세우지 않으셨고, 어떤 군대를 끌어 모으지도 않았으며, 로마 정복자들을 향해서 전쟁을 선포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넘어지게 했던 사건은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입니다.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하시며, 병든 자를 고치시고 소경을 보게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다의 물결을 잔잔케 하시는 분이 언약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실패와 수치를 드러내는 일을 함으로서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걸쳐 넘어지게 하는 끔찍한 원천이었고, 부딪히게 하는 반석이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그보다 더 심한 것은 그의 죽으심을 통해 나온 교훈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거침돌이었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 그것이 그들에게 거치는 반석과 거침돌이 되는 이유는 지성의 교만과 도덕적인 교만, 선행의 교만, 성취의 교만, 이해의 교만 등입니다. ? 그러한 넘어짐의 비극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법으로 제시하신 복음을 믿지 못함으로서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⑥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8)는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그의 생명과 가르치심, 그러나 특별히 십자가 위에서의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이 오직 유일한 터가 되어서, 그 위에서만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함을 받는 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선포하는 메시지입니다.


⑦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 우리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 오직 유일한 터가 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그는 반석이며, 오직 유일한 기초석입니다.


⑧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만을 의지하든지, 아니면 그분이 우리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⑨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고 죄사함을 얻고 회복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어서, 궁극적으로 영광을 소유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치시는 일이 있어야 했습니다. ?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께 간구하여, 긍휼과 인애로써 우리를 하감하여 주시기를 원해야 합니다. ?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총명의 눈을 여셔서 그러한 것들을 명료하게 보게 하시되,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감동을 받아 놀람과 사랑과 찬미의 의식으로 충만해 질 정도로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주실 것을 간구해야 합니다.

 

 

 

 

 

성경: 롬10:1-4절

 

 

 


10장 1~4절 :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1. 기도와 복음전도(1~2)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자기 동족들인 유대인들에 대하여 정말 애정 어린 관심을 보이며, 그런 후에 그들에 대한 자기 마음의 진정한 소원이 무엇인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4절에 가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이 교회 밖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상기하게 만듭니다. 유대인들이 교회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구원의 방식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방식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그것은 다 율법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와 잘못된 해석의 결과입니다.


① 사도 바울은 자기의 동족들에게 욕을 먹고, 핍박을 받았으며, 그들은 여러 번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시도하였으며, 그를 미워하였습니다. ? 또한 그를 아주 혐오스러운 사람으로 생각하여 온갖 비방을 퍼부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그들이 아무리 사악하게 굴어도 참아냈으며, 동족들에 대하여 원한을 전혀 품지 않았습니다. ? 오히려 그들의 구원의 문제를 놓고 크게 근심했으며, 마음으로 간절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 그래서 그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② 사도는 우리에게 그의 위대한 사랑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줍니다. ? 그러나 사도가 거듭나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는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바리새인이요 유대 민족주의자였습니다. ? 비록 그에게 유대인들이 그런 식으로 대하였지만 바울은 그들에게서 무언가 칭찬할 것이 없는지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 그래서 그는 여기서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다.”고 찬사를 보내는 것입니다.


③ 사도는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것 때문에 공격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논리를 세우기 위하여 그들을 공격하는 것도 아닙니다. ? 유대인들의 입장은 아주 그릇되어 있었습니다. ? 그들은 성경을 오해하였고, 성경에 대하여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 그래서 사도는 그들의 소경됨과 그릇됨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 그의 큰 바람은 오직 그들에게 더 나은 길인 복된 소식을 알리고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④ 우리는 사람들 자신들과 그들의 마음의 눈을 가리고 있는 이 세상 신 사이를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우리가 불신자들을 보고 조바심이 나고 괴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지만, 그 감정에 압도당하면, 그들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 바울은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3~4)고 말했습니다. ? 불신자들이 마귀의 희생물이 되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는 최선을 다해서 진리를 나타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마귀의 활동에 억제를 당하지도 않고 자기 감정에 휩싸이지도 않습니다. ? 그들을 도와야 할 입장에 있는 우리들이 스스로 감정에 압도당하여 그릇된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항상 자신을 조절하여야 합니다.


⑤ 우리는 복음 전도에 있어서 언제나 생각하고 있어야 할 것은 만일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때문이며, 그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면 그것은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⑥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모르기 때문에 그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 우리가 모든 이들의 구원을 소원하고 기도해야 하고, 설교자가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제시하고 믿으라고 강권해야 하는 것은 바로 누가 선택받고 안 받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나는 알지 못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제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⑦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나 그 어떤 일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선택한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눅1:37)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우리를 방편으로 해서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실 뜻을 정하셨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 모든 것을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2. 참된 열심(1~2)


우리는 이 부분에서 참된 열심과 거짓된 열심이 묘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1절에서는 참된 열심을, 2절에서는 거짓된 열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열심과 진지함은 그 자체로는 중립적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가장 탁월한 지위에 올라가서는 안 됩니다.


①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가지면서도 비극적으로 그릇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이단의 열심 있는 멤버가 된다든지, 또는 사람의 기질상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마23:13; 갈4:17~18; 행26:9~11; 빌3:5~6; 딤후3:6; 4:3]


② 거짓된 열심은 ? 어떤 다른 사람을 보고 나온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 열심을 일으키는 자극이 다른 사람들로 인한 것이라면 그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 우리의 됨됨이보다도 어떤 일을 행하는 것에 더 큰 강조점을 두고 있다면 그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 거짓된 열심 속에서는 진리보다 행동이 우선합니다. ? 방식과 조직, 구조가 매우 탁월한 위치에 있다면 거짓된 열심일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 육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 자신을 검증하려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며, 가르침을 받지 않는 양상을 띠게 됩니다. ? 환상주의를 조심해야 합니다. ? 균형의 결핍과, 자신의 상태(주변 환경, 건강 등등)를 돌아보지 않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③ 참된 열심의 특징들은 ? 주변 사람들의 어떠한 조건들이나, 그들에게 뒤지기 싫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서 참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하나님께로 향한 열심입니다. ? 언제나 “존재”(됨됨이)가 은혜 또는 거룩함으로 자랐기 때문에 오는 열심이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 언제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파생물, 또는 복음에 순종함으로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 보여주기 위한 외면적인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통제되는 열심입니다. ? 결코 사람이나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께로 향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참된 열심을 유발시키는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는 것입니다. ? 그래서 참된 열심은 실패에 대하여 낙심하거나, 성공에 대하여 흥분하지 않습니다.

 

 

 

 

3.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3)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었지만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은 완전하고 정확한 지식을 뜻하는 말입니다.


① 그런데 우리도 정확한 지식을 좇지 못하고 자신의 선입견이나, 자신의 기준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그것에 대하여 열심을 품고, 달려 나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천성적인 성품이나 멋진 모습이나 교양적인 세련됨을 참된 기독교 은혜로 오인하고 있습니다.(지식, 도덕, 상냥함) ? 사람이 경건해 보인다는 사실이 그들이 믿는 바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합니다.(경건한 유대인, 경건한 마호멧 교도, 경건한 불교도, 진실한 유교도) ? 그러나 이런 차원에서 말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객관적은 표준들을 포기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으로 판단하고 분변하는 것처럼 위험천만한 것은 없습니다. ? 더 중요한 것은 사도가 바로 이 시점에서 가르치는 바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여기서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구원의 방식에 관한 신약 성경 전체를 말살하는 것입니다.


② 우리는 항상 복음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갈1:8절)


③ 사도 바울은 이 “지식”이라는 말을 통해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몰랐습니다. ?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에 대한 구약의 가르침을 오해하였습니다. ? 율법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정확한 지식을 갖지 못했습니다. ? 그로 인하여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진리를 배반하고 부인하는 길에 서게 된 것입니다.

 

 

 

 

4. 하나님의 구원방식(3)


이 시점에서 사도 바울이 지식의 부족에 대하여 강조하는 것은 ? 당시의 유대인들의 조건을 설명해 주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그러합니다. ? 지식의 결핍문제는 여러 세기를 지나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주요한 거침돌이 되고 있으며, 본성적으로 바리새적인 사람들에게 특히 그러합니다. ? 그 점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나, 오늘날의 교회의 어리석은 성향 때문인데, 그것은 복음주의적인 사람들에게까지 해를 끼칩니다. ?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구원의 오직 유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① 본문에서 사도가 “자기 의”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는 도덕성이나 선함이나 인자함이 아닙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12:29~31)입니다. ? 인간의 죄에 대한 거짓된 관점을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 하지만 우리가 행위로서 하나님의 요구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 자신의 어떠한 행위의 노력들과 자신이 이룬 어떠한 선행들의 결과로 자신의 의라고 내세우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마23:5~7) ? 유대인들이 그렇게 힘쓰고 애를 써 노고를 아끼지 않음으로 자신들을 기쁘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하나님은 전혀 기쁘시게 하지 못했습니다. ? 그들은 자신의 의를 세웠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 그들은 마치 경기에 돌입하는 사람들과 같이 자기 일을 해냈고, 그 일로 대단히 기뻐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결국 자기가 해낸 일은 단 하나의 표적도 맞추지 못한 사람, 즉 경기의 규칙을 주의 깊게 읽어 보지 못하여 퇴장당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②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언제나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6~17) 바울이 그 때문에 그처럼 복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의를 제공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해서 이삭을 대신하여 제물을 준비하셨듯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주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 의를 값없는 선물로 주십니다.(엡2:4~9) ? 자신의 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의에 복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③ 하나님의 방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5. 그리스도, 율법의 완성(4)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율법을 지키는 차원에서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의라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율법의 의로운 요구의 차원에서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그것은 그릇된 것이며, 과녁을 맞히지 못한 것입니다.


①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에 만족을 시킨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②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모든 필요를 완성하심으로서 율법을 마치신 것입니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율법과 작별을 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은 영속성이 있으며, 여전히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합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율법을 폐기한 것이 아닙니다. ?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의 표준이 더 낮아진 것이 아닙니다. ? 복음은 율법의 요구에 관해서 일을 더 쉽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요구에 복종하셨습니다. ? 그런 의미에서 성육신은 율법의 성취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 율법의 요구가 완성되었다는 것은 부활이 증거합니다.


③ 그리스도께서만이 의를 위한 율법의 마침이 되십니다. ? 율법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잠잠케 하며 심판 아래 있게 한다고 말함으로서 다른 어느 누구도 그 율법의 마침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풍성하게 증거합니다. ? 모든 사람들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은 완전하였지만 율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 만일 하나님께서 다른 아담을 창조하셨다면, 그도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실패했을 것입니다. ? 구원에 오직 유일한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셔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④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우리의 옛 사람”은 갈보리 언덕 위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습니다. ? 이제 더 이상 율법이 우리로부터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우리를 정죄하는 차원에서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 우리는 절대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였습니다. ?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었고 “그 앞에 기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으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영역 안에서 부활하였습니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우리는 절대적이며 영원히 안전합니다. ? 율법의 요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인데,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 율법의 마침이 되어 주셨습니다. 

 

 

 

 

 

성경: 롬10:5-10절

 

 

 

 

10장 5~10절 :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 하나님의 분명한 요구


유대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목적의 일환으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복음을 크게 환영하면서 받아들이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언뜻 보면 하나님의 목적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유대인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목적은 폐하여지지 않았음을 바울은 말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 내면적인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목적에 들어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문제라고 말하게 되었고 그것을 상세하게 확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은혜로 되어진 일이며, 구원을 받지 못하면 그것을 믿으라고 제안된 복음을 거부하였기 때문인 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정교하게 진술해야만 했는데, 이제 10장에서 유대인의 입장에 있어서 이 비극적인 실수를 보다 더 확장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① 우리가 여기서 지적하는 첫 번째 요점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을 주시는 것이 바로 표준입니다. ?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가 있느냐는 것이 관건입니다. ? 그것에 대한 분명한 출발점은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에 “이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요구 조건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하나님의 날을 지키는 것입니다. ? 그 다음에는 여러 가지 하지 말라는 금령입니다. ? 마지막 계명은 네 이웃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출20:17) ? 우리의 복되신 주님은 그 율법을 보다 더 상세하게 해석해 주셨는데 그것은 산상수훈입니다. ? 그들의 잘못된 점은 어떤 것을 하고자 할 때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덤벼드는데 있는데, 실제 성경의 요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② 두 번째 요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 율법을 단순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행해야 하는 것입니다.(롬2:13) ? 그런데 그 율법은 전체로 지켜야 합니다.(약2:10~11)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통해서 총체적인 충성과 전인적 헌신을 요구하십니다.(막12;29~31) ? 이것들을 행하는 자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시는데, 그 요구를 충족시킬 사람은 예수님 말고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 우리 주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마음에 품은 것 자체도 죄라고 하셨습니다.(마5:17) ?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인 순종, 100% 완전히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 우리가 율법의 그 높고 불가능한 요구를 행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율법의 요구를 참아낼 수 없다고 느끼게 되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고 울부짖게 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구원하려 하거나, 자신들을 의롭게 하나님 앞에 세우려는 노력을 멈추게 되고 믿음의 의가 말하는 바를 청종하며 즐거워하고 감사합니다.

 

 

 

 

2. 오직 믿음으로


유대인들은 모세를 통해서 주시는 율법을 지키는 차원에서 생각하였고, 복음은 믿음의 방식을 말합니다.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아내려고 하거나 아니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언제나 그 두 귀로 앞에 사람이 서 있습니다.


① 사도는 이 두 가지 길을 의인화시켜 두 설교자를 세워놓고 말합니다. ? 자기 자신의 작은 기준을 세워놓고 그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선한 생활이면 만족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되면 자기들은 그것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설교자는 우리를 율법에 관하여 전적인 무능과 소망 없는 상태로 내어줍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에게 두 번째 설교자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첫 번째 설교자의 말을 듣고 소망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상태에 빠져들었으니, 이제는 두 번째 설교자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라고 하는 말을 청종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 그처럼 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함을 받는 놀라운 구원의 비밀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② 율법의 방편으로 해서 의에 도달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라고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 “네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라는 식으로 시작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높은 데서 끌어내리려는 시도를 하려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아니면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시도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③ 사도 바울은 여기서 모세의 어법을 빌려서 복음 설교를 하는데,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 여기서 구원의 방식이 무엇임을 아는 일이 전혀 어려움이 없으며, 오늘날 어느 누구도 복음을 몰랐다고 핑계 댈 수 없는 것은 그 복음이 명백하게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복음을 알기 위하여 진리를 탐사하려고 “하늘에 올라가고자 하거나, 음부에 내려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진리를 얻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가거나 진리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심연의 깊은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 우리가 있는 곳에서 그 진리를 얻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 구원은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④ 구원의 길은 우리에게 어떤 노력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공급되었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해 하늘이나 음부로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 그것을 발견해 내려고 노력하고 힘쓸 필요도 없고 그를 붙잡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 주님은 멀리 계시면서도 바로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 그것을 아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이 정말 단순하게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이해하기에 불가능한 노력을 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 우리의 구원은 이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리는 것을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지성적인 이해도, 행위를 통해서도 아니며, 전파된 말씀을 단순히 믿는 것을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주님(9~10)


기독교 신앙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 경우의 믿음이 아니라면 그런 사람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기독교 신앙이란 있을 수 없으며, 그를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모두 다 그분에게 달려있으며 그분에게만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시작이요 마지막이며,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십니다.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고전3:11)이십니다.


①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는 말씀은 엄청나고 대단한 진술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함께 언급하면서 예수님이 주시라고 할 때, 그 진술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전체를 요약하는 것으로서 “”는 여호와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주님이시라는 말을 할 때에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신약의 주요한 진술들은 ? 골1:15에서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의 장자”라고 함 ?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으로 모든 만물들보다 앞서 존재하심을 증거 ? 골1:19; 2:9에서 모든 신적 속성과 능력들 전부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증거 ? 요1:3; 히1:2; 골1;16,17에서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증거(심지어 천사들까지)


③ 복음의 전체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다시 온 우주를 큰 연합의 상태로 회복시키려고 그 일을 하셨고, 바로 이 예수님을 통해서 그 일을 궁극적으로 완전하게 하시려 하셨습니다. ? 그리하여 예수님이 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이 영화롭게 되고 통일된 우주를 완전한 상태대로 하나님 아버지께 되돌려 드릴 것입니다. ?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온 우주를 그 예수님을 위해서 지으셨고, 그것을 예수님에게 주셨습니다. ?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그 우주를 만드셨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으셨습니다. ? 바로 그것을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4. 부활과 칭의의 성취(9~10)


우리가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의 내용에 있어서 첫 번째 요소는 예수님은 주님이시라는 우리의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두 번째 요소를 생각해야 합니다.


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의 내용은 ?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입니다.(딤후2:17~18; 고전15:17) ?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주님이시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심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롬1:3~4) ?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들을 더 제공하고 있습니다.[행2:23~24, 25~28, 29~37; 3:12~15; 17:18] ? 바로 이 부활의 사건이 예수께서 영광의 주가 되심을 선포합니다.


② 그 영광의 주께서 죽으셔야만 했던 것은 죄에 대한 율법의 요구를 우리를 대신하여 들어 주셔야 했기 때문이며, 그분이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셔야 했던 것은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롬4:25) ? 그리스도께서 만약에 부활하시지 못하였더라면 우리에게는 구원도 없습니다. ?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죄를 용서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의 의를 전가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칭의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죄를 용서 받았다고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 완전하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야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에게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성령의 오심에 대한 모든 약속들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 성령의 오심,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을 증거합니다.

 

 

 

 

5. 그리스도의 승리(9~10)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믿는 것은 다른 여러 가지에 대한 믿음을 수반하는 것임을 숙고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 여러 가지 것들 중에 ?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영광의 주가 되심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것과 ? 그 점은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 그의 죽으심이 충분하고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여기 지상에서 목적하신 일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 또한 그것은 우리의 모든 원수들이 정복되었다는 것을 공표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 부활은 우리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정복하셨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① 우리가 인간으로서 당하는 모든 고통은 마귀가 하는 일의 결과입니다. ? 구원은 바로 이러한 일들이 무산되었고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부활을 믿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최종적이고 완벽한 구원을 위해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완성되었다는 큰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② 우리 주님께서 지금 영광 중에 어떠한 지위를 차지하고 계시며, 그것이 나를 위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가 주님의 부활의 의미의 일부입니다. ? 주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영광 중에 계십니다.(히1:3; 4:14; 9:24) ? 하늘과 땅의 권세가 다 예수님의 것이며, 그분은 영원토록 통치하실 것입니다. 또한 당신의 원수들이 그 발등상 되기까지 기다리며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엡1:19~21; 히1:13; 눅1:33)


③ 우리 주님께서는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행1:10~11; 마 24,25장; 막 13장; 눅 21장; 요5:27; 행17:31) ? 부활은 하나님께서 친히 전 인류를 향하여 주신 분명하고 확증적인 지식이었습니다. ? 곧 세상을 마지막으로 심판하실 것이며, 그 세상에 살았던 모든 자들에 대한 최종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지식을 부활을 통해서 알려 주신 것입니다. ? 그 때에 우리 주님은 눈에 보이는 육체를 가지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1차적인 목적은 심판을 행사하시기 위함이고, 그 다음은 그의 대적들을 파멸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의 성도들에게는 상급보다도 더 귀한 주님 자신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살후1장) ?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뿐 아니라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일을 위한 보증도 됩니다. ? 하나님께서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것이고, 나를 영화롭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영화롭게 하시되 나의 모든 형질에 있어서 죄의 잔재가 하나도 없는 상태로 완벽하게 구원해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6. 믿음과 신앙고백의 역할(9~10)


예수께서 주시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믿는 것이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우리의 믿음의 기초와 근거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이라는 것과 믿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가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효력을 발생하게 되는 하나의 경로나 통로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마음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위험들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① 성경에서 “마음”이라는 말이 나타나는 대 다수의 경우는 그 “인격의 중심”, 즉 “인격의 가장 내밀한 좌소”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는 말씀은 그 사람의 감정만이나 그 사람의 지성만이 아닌, 그 사람 인격 전체, 그의 존재의 모든 것을 다 포함한 총체성으로 믿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② 만일 자신의 의지나 지성적인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입술로 고백하는 행위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구원에 관련된 모든 교리를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해 있다고 하는 가르침을 부정하게 됩니다. ?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는 본질적인 가르침을 부정하게 됩니다. ?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엡2:8)이라는 말씀을 부인하게 됩니다.


③ 신앙의 열쇠는 마음속에 있습니다. ? 또한 불신앙의 열쇠도 마음에 있습니다. ? 그리고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구성하고 있는 신앙도 마음에 있습니다. ? 이 마음은 사람의 전 인격을 동반한 총체적인 것을 말합니다.


④ 우리가 가장 삼가야 하는 일은 지성적인 불신자들에게 맞추기 위해서 우리의 메시지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 그들이 새로운 마음을 가지기 전에는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들에게 복음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회심하고 있는 지성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지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들을 다루셨기 때문입니다.


⑤ 또한 우리가 교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 교리가 복되신 주님을 감추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 주님만이 우리의 구주이시며, 그분만이 구원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⑥ 영원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총체적인 인격이 수반된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이 바울의 논증입니다.


⑦ 이제 우리는 다른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의 영역에 대하여 살펴보면 ? 롬6:17에서 “마음으로 순종하여” 라고 말합니다. ? 겔36:25~27에서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네 신을 너희 속에 두어”라고 말합니다. ? 마13:13~15에서 우리 주님께서 마음이 조건에 작용하는 것에 엄청난 강조점을 두고 계신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 눅8:15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씨를 뿌리는 비유에서 “뿌리”를 가지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하시며, 마음에 뿌리가 없다면 믿음은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 바울의 유럽 전도에 있어서 첫 번째로 얻은 회심자인 루디아의 경우에도 그녀의 마음을 주께서 여심으로서 가능했습니다.(행16:13~14) ? 벧전1:21~22에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 막12:28~30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씀은 믿는 시늉만 해서는 안 되고 존재 전체를 다 드려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7.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받을 만한 믿음(9~10)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은 마음이 수반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다음 단계에 오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회개입니다. 그러나 뉘우침 자체는 회개가 아닙니다. 뉘우침은 회개를 불러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뉘우침만 있고 회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 진리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하고 비참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으며 심지어 진리에 대하여 대적할 수도 있습니다.


① 회개는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 자기의 이지의 사고를 바꾸는 것입니다. ? 의견이나 사고방식, 관점에 있어서 변화가 있기 전에는 진정한 믿음이나 참된 회개는 있을 수 없습니다. ? 언제나 회개는 슬픔의 요소가 있으며, 그 마음의 느낌은 필연적으로 함께 수반됩니다. ?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전체 입장과 태도가 잘못되었음과 그 모든 잘못에 대한 죄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경건한 슬픔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을 갖게 되면 반드시 이 슬픔에 대한 무엇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거룩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서글프게 한 것에 대한 슬픔이며, 그처럼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그런 악한 방식으로 대응한 슬픔을 가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가집니다. ? 더 나아가서 분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에 대하여 의분 감을 가지게 됩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배역한 비참한 죄인들임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입니다.


② 구원받는 믿음이란 성령께서 마음속에 일으키신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입니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마음에 의뢰하는 것입니다. ?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의뢰하는 것입니다. ? 진리에 전적으로 자신을 온전히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③ 그러나 그 구원받을 믿음은 하나님의 성령의 선물입니다. ? 성령께서 영혼과 마음속에서 역사함으로 그러한 믿음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 그것이 없이 구원함을 얻을 믿음이라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8. 구원의 확신(9~10)


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14장


2항 :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은 말씀 속에서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위 때문에 그 말씀에 계시된 것은 무엇이든지 참이라고 믿는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그 말씀의 대목이 내포하는 내용에 따라서 달리 행동한다. 명령에는 복종하고, 거룩한 위협에는 두려워 떨며, 이생과 금생을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들은 받아들인다. 그러나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원리적인 행위들은 은혜 언약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과 거룩하게 되는 것과 영생을 위해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영접하고 받아들이고 의뢰하는 것들이다.


3항 : 이 믿음은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 약한 믿음도 있고, 강한 믿음도 있다. 또한 믿음은 자주 많은 방편에서 공략을 받을 수도 있고 약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승리를 얻는다. 많은 방면에서 자라나서 우리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한 확신에 이르게 된다.


②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18장


  외식 자들이나 다른 중생치 못한 사람들이 거짓된 소망과 육신적인 주제 넘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고 구원을 받은 자리에 있다고 허망하게 자신들을 속일 수 있다. 그들의 소망은 결국 없어질 소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고 그를 진지하게 사랑하며, 그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행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을 때 자기들의 은혜의 상태 속에 있음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다. 그 소망이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 확신은 단순히 추측이나 낭패당할 소망에 기초한 주제넘은 확신이 아니다. 오히려 구원의 약속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한 분명한 믿음의 확신이요, 이 약속이 증거하고 있는 그 은혜의 내면적인 증거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 영으로 더불어 친히 증거하시는 양자의 영이신 성령의 증거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로 받을 기업에 대한 보증으로서, 구속의 날까지 그 성령의 보증으로 인침 받는다.

 

이 실수 없는 확신은 믿음의 진수에 속한 것은 아니다. 참된 신자라 할지라도 그 확신을 오랫동안 가지지 못할 수도 있고, 많은 난제들과 갈등을 겪은 후에야 그 확신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서 값없이 받은 것들을 알 수 있게 되면, 신자는 어떤 특이한 계시가 없어도 일반적인 방편을 바르게 사용함으로써 그 확신에 이를 수 있다.

 

참된 신자들이 확신을 가진 다음에도 여러 가지 방면에서 흔들릴 수 있고, 그 구원의 확신이 감소 될 수 있고 중단 될 수도 있다. 곧 구원의 확신을 견지하는 데 열심을 내지 못하거나, 어떤 특별한 죄에 빠져서 양심에 상처를 내거나 성령을 근심시킴으로, 어떤 갑작스러운 또한 격렬한 시험을 받음으로 하나님께서 당신 얼굴빛을 거두시고 어둠 속에서 행하여 아무 빛도 보지 못할 정도로 만드사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는 승리로 인하여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참된 신자들이 하나님의 씨앗이나 믿음의 생명력을 전적으로 상실하여 그리스도나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나, 마음의 긴장과 의미에 대한 양심적인 의식 등에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 구원의 확신이 적당할 때 다시 생겨날 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형제에 대한 사랑, 마음의 진지함과 의무를 양심적으로 의식하는 것 등을 통해서 확신이 다시 생겨날 동안 전적으로 절망감에 빠지지 않도록 지탱함을 받는다.

 

 

 

 

9. 믿음의 고백(9~10)


구원 받을 만한 믿음에는 세 가지 국면이 항상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참된 내용이 있어야 하고, 마음, 그리고 동등하게 입으로 고백하는 것도 수반되어야 합니다.


① 약2:20,21의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그저 말로만 “예, 좋습니다.”라고 하고는 그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 믿음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22절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신 일을 행하기 위해 진행해 나감으로써 그의 믿음을 증거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요점인데, 행함이 “믿음을 온전케” 한다. 즉 믿음의 실상을 궁극적으로 증거하는 것은 행함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행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지적인 찬동,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신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② 누구든지 성령으로 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거듭나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사고방식과 이지를 갖게 된 사람뿐입니다. ? 그러므로 인격 전체를 수반하여 예수는 주시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인 밖에 없습니다.

 

 

 

 

10. 믿음의 강권하는 힘(9~10)


① 진리의 본질 자체가 필연적으로 우리가 입으로 예수를 시인하게 만듭니다. ? 우리가 진실로 복음을 믿고 그 복음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서 그 복음의 능력에 속한 것을 느꼈고, 요3:16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면 그것을 표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배격하였고, 범죄하여서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심판 밖에는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위대하시고 영원하신 사랑 속에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표현하기 마련입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영원 전부터 누리시던 영광을 제쳐 놓으시고 자신이 만드신 피조물로 태어나셔서 갖은 고난과 핍박과 시험과 능욕들을 참고 견디신 것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가만히 침묵할 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② 우리는 회심하기 전에 이생과 이 세상이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 그것을 위해 살았고 그에게 있어 죽음은 생각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 그러나 이제 우리의 인생에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고, 이제 전혀 새로운 입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그러니 마음으로부터 그 기쁜 소식은 입 밖으로 튀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그러나 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진리가 ‘강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것입니다.(고후5:10~15)


③ 사람들이 예수님이 주가 되심과 그의 부활하신 사실을 분명히 믿게 될 때, 그것이 그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들의 삶 속에 나타난 그러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④ 만일 “예수님이 주님”이시라고 고백한다면 ? 성경의 말씀에 전적으로 지배를 받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 주님께서 내 행동을 통제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행위입니다. ?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 속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배려가 됩니다. ? 다른 사람이 와서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고 묻는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 진실로 주님을 시인하고 있는 것입니다.(이것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까지라도 고백할 수 있는 순교의 신앙을 가리킵니다.)

 

 

 

 

 

성경: 롬10:11-13절

 

 

 


10장 11~13절 :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 복음의 진수(11)


본문은 사28:16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으로 이사야의 위대한 메시야 예언들 중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사야를 “복음전도적 선지자”라고 부르는데, 그의 긴 책 속의 여러 부분들에서 그는 분명히 복음을 정말 영광스럽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① 바울이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입증하려고 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예고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 복음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다는 것인데,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말하였습니다. ? 구원은 사람이 무엇을 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하신 길을 보여 주겠고, 그 길을 놓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피함이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우리 스스로 활용함으로써만 우리에게 오는 무엇입니다.


③ 구원은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구원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④ 우리가 믿는 “”는 바로 하나님께서 “시온에 놓겠다.”고 하신  “이 연단되고 보배로운 돌”인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놓으신 돌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⑤ 하나님께서 이 연단되고 보배로운 돌을 시온에 두지 아니하셨다면 결코 구원은 없을 것입니다. ? 우리는 결코 그 일을 해낼 수 없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셨고, 우리가 하는 일이란 그 분을 믿는 것입니다. ? 우리가 그분을 믿는다면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영원토록 멸망 받을 것입니다.

 

 

 

 

2. 구원의 확실성


우리는 구원이 “저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곧 하나님께서 연단하신 보배로운 돌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① 바울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강조하는데 그 말씀의 뜻은 ? 저를 믿는 자는 결코 거절함을 받지 않는다는(거부함을 당하지 않는다.) 것입니다. ? 9~10절과 연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눅12:8~9) ? 주님께서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시13:5) ? 주께서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를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고 모두 다 행하실 것이라는 말씀인데, 우리의 구원을 반대하며 거스르는 여러 요인들(율법, 마귀와 그의 세력, 죽음까지)로부터 절대적으로 안전하게 영원히 보장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뢰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② “그를 믿고” 그의 능력과 완전하심을 믿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우리 속에 있는 그 어느 것에도 달려 있지 않고 온전히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 그 구원은 어느 누구에게나 가능한 구원입니다. ? 그러나 “누구든지”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에 한정이 됩니다.


③ 이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다”고 하면서 그는 다시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합니다. ? “믿음”은 구원의 방도이며, 그것은 모든 것을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구원이 자신들만을 위한 것으로 알았고, 이방인들과 동등하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도 이방인과 똑 같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엡2:3) ? 모든 사람이 정죄를 당하는 입장에 있다면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차이가 없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 유대인들은 복음을 믿지 않는 것과,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제시된다는 사실을 반대함으로써 두 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복음을 믿고 자랑했어야 했는데, 그것은 그 복음을 예언하던 모든 선지자들이 그 복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방인들이 그 복음을 믿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괴로워하거나 놀래거나 그것 때문에 넘어지지 않아야 하고 오히려 그것을 예언의 성취임을 믿고 즐거워했어야 합니다.


④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하나님이신데, 그들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으로 한정하였습니다. ?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우선적으로 직접 다루셨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 그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과 전혀 관계를 가지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어느 한 지역의 신으로 국한 시켜서는 안 됩니다. ? 하나님께서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며, “천지 만물들을 주재하시는 분”이십니다.


⑤ 그리고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인류 전체에게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은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그것은 하나의 잠정적인 차별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계시를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 이 족속을 한 특별한 임무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지 유대인만이 구원받는다는 개념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있고 아담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하나님이셨습니다. ?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3. 하나님의 위대하심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과, 그 점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능하시고 은혜에 있어서 너무나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주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것도 가져올 필요가 전혀 없으며, 우리는 처음부터 가지고 나갈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하심 때문에 그러한 것이 불필요합니다.


구원을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조금도 문제가 없다고 말하며, 그것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요청되는 오직 한 가지 요점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를 부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① 구원의 방식은 “주님을 부르는 것”인데, 이 방식은 신약 시대에 와서 새롭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 전에 예언된 방식입니다.(욜2:32; 사28:16)


② 베드로는 벧전 1:10~12에서 욜2:29~30까지의 말씀을 인용하여, ? 모든 유의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될 것과 어떤 예외적인 사람들만이 아니라 종들, 하인들, 젊은이들, 노인들, 아들과 딸들, 그 모든 사람이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 이 풍성함에 관련하여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 사도가 입증하려고 하는 전체 요점이 그것이며, 그것이 이 복음 세대의 위대한 특징입니다.


③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제반적인 어떠한 조건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필요한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 혈통이나, 종족의 배경과 같은 것은 정말로 분토와 같은 것입니다. ? 자신의 육체적인 자랑거리나, 인품이나, 학식과 같은 것들은 정말로 주님 앞에 내 세울 수가 없는 배설물들과 같은 것들입니다. ? 그것들은 정말로 언급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입니다.


④ 그렇다면, 이 “부름”이란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 자기들이 빠져 나올 수 없는 절망적인 위치에 있음을 인식하는 부름입니다. ? 자기들에게 전적으로 소망이 없음을 인식한 부름입니다. ? 자기들이 전적으로 무능한 위치에 있음을 인식한 부름입니다. ? 이것은 참으로 처절한 부르짖음입니다.


⑤ 구원을 얻기 위한 다른 어떤 길도 없습니다. 만일 그런 길이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일이 없었을 것이며, 그가 결코 십자가에서 죽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뿐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어집니다. ? 이 오직 유일한 복음은 구약이나 신약에 똑 같이 적용이 됩니다. ? 구원에 관하여 구약에서 제시된 그 길이 신약에 와서 다른 길로 바뀐 것이 아니라 똑 같이 한 길로 이어져 있는 길입니다. ? 어떤 다른 길로도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습니다. ? 구약의 광야에 있던 교회는 바로 신약에 있는 교회와 동일한 교회입니다. ?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하나님과 한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과, 하나님의 변하시지 않는 성품을 알아야 합니다. ? 구약은 오실 메시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을 받는 것이고, 신약은 오신 메시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롬10:14-17절

 

 

 


10장 14~17절 :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식


사도는 9장 초두에서 유대인의 입장이라는 전체 문제를 거론하였는데, 그들은 선지자들을 조상으로 두고 있었고,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교회 안에 가장 먼저 들어와 있어야 하는 그들이 왜 복음을 거절하고 교회 밖에 있게 되었는지, 그런데 성경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아서 “오직 유일하시고 참되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던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을 준비가 더 되어 있었고, 하나님 나라에 몰려 들어오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9장에서 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10장에서는 그 문제를 다루되, 높은 신학적인 차원에서라기보다는 보다 실제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① 유대인들이 심각한 오해를 갖고 있는 두 가지 사항은 ? 구원의 방식에 있어서 자기들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의롭게 세울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 바울과 다른 사람들이 개처럼 여기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참으로 참람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② 이 난제에 대하여 바울은 ?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을 것임을 확증하였습니다. ? “누구든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모두에게 해당되지만 그 전파되는 복음을 모든 사람이 다 믿지는 않습니다. ? 그러므로 본문의 “누구든지”에 들어가게 되는 사람들에게만 이 말씀이 유효하게 됩니다. ? 바울은 16~17절에서 바로 이 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③ 구원은 주님의 이름을 부름의 결과입니다. ?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으면 주님을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 그들이 믿도록 만드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입니다. ? 그런데 그 복음은 전파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전파가 됩니다.


④ 전도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성취해 나가시는 일의 관례적인 방식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권능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원하기만 하신다면 땅에서 즉각적으로 어느 순간에 솟아오르게 하실 수 있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지혜로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땅을 갈도록 하셨습니다. ? 흙을 잘게 부수고 거기에 씨를 파종하여 싹이 나게 하는 방식을 취하도록 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 일을 이루어 나가도록 하셨는데, 복음의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⑤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사람을 보내신 것은 포로 된 자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전하게 하려는 이유 때문입니다. ? 전도자는 사실상 교회를 통해서 파송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전도자(설교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 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을 선출하여 파송을 하고, 또 개인적인 소명을 받은자는 교회에 가서 그 소명을 확인하고 파송을 받습니다. ? 개인적인 소명을 받지 못한 사람 가운데서도 훌륭한 전도자(설교자)들이 교회에 의해서 배출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 개인이 소명을 느끼고 교회의 인도를 받아 그를 불러 동시에 그 소명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인데, 주님께서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는 비극적인 위험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신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 사도들마저 항상 자신들을 교회에 복종시켰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부족함을 알았기 때문이며,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감당할 수가 없음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 그러나 파송 받는 사람은 교회가 자기를 파송하도록 해야 할 것이지 자기 스스로 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최상의 사랑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사랑하는 나라로 옮기시기 위해서 전도의 방식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의 말씀 중에서 “좋은 일”에 대한 것을 알아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기쁜 소식이 되는 “좋은 일”에 대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① 우리가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어 왔다고 할지라도, 처음 이 “좋은 일”의 선포를 들으면서 가졌던 것과 같은 그 기쁨을 이 순간에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의 터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② 좋은 일이란 메시지는 우리가 어떠한 세력으로부터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제공하심으로서 우리에게 미친 그 위대한 좋은 소식을 전해 듣는 것입니다.


③ 소망이 전혀 없었던 진노의 자녀들이었던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다. ?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 우리는 총애를 받을 만한 어떤 공로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심판과 지옥 밖에는 받을 자격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④ 복음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롬1:17)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이 세상에서 들어왔던 일 들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며,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선한 뉴스입니다.


⑤ 우리는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이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되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주신 좋은 일들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⑥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소식의 내용입니다.


⑦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으며, 우리의 몸이 영화롭게 되는데 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좋은 일입니다.

 

 

 

 

3. 믿음이 산출되는 방식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지만 그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치 않았지만, 그 점이 복음을 무효로 만들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로 향한 믿음은 어떻게 나오는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17절의 말씀을 한글 개역 성경에서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하는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결과로 말미암는다는 뜻입니다.


① 우리가 참다운 자세로 듣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바로 그 들음이 믿음을 산출하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지 않는 한 이러한 참된 들음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행16:13~14) ? 설교가 자신을 향해서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설교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 말씀이 나를 위한 것이고 이 말이 정말 대단히 중요한 말이라고 느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되게 듣는 일 속에서 일어납니다. ? 온전한 의미의 청종은 모든 인격의 기능들 전체가 그 일에 쏠려 있게 되는 것이며, 온 힘을 기울여 듣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나 자신에게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② 믿음을 산출하는 데 있어서 두 번째 요소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되십니다. ? 그것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는 구원의 전체 메시지입니다.


③ 믿음은 항상 그 메시지와 연관되어 있는데, 성령께서 그 이지와 마음에 그 메시지를 적용시켜서 믿음을 산출하십니다. ?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강력하게 임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게 될 때만 믿음을 갖게 됩니다. ? 씨가 말씀 안에 있고 성령께서 그 씨를 심으시고 적용하십니다. ?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그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시고 심으심으로 믿음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 복음을 설교 할 때,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말씀을 듣게 되면,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며, 그 말씀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순종의 시금석(16~17)


우리는 이 두 구절을 생각하면서, 메시지를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는 결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요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생명 있는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내 외적인 귀뿐만 아니라 내적인 귀로 정말 그 복음을 들었는지, 그래서 그것이 내게 믿음을 산출하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① 우리가 항상 복음을 듣는 문제에 있어서 참된 들음, 즉 생명 있는 들음인지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 볼 때에 “순종”에 이르렀는지, 아니면 순종치 않았는지가 관건이 됩니다. ? 순종은 권세와 권위 아래서 들음으로 복종하고 듣는 바에 자신을 온전히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 참된 믿음에는 순종의 요소가 있습니다.


② 진리에 대해서 찬동할 수는 있으나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③ 청종은 행동의 일부이고, 순종의 행동입니다. ? 복음이 살아 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들리는 순간 우리는 여러 단계를 거쳐서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데 까지 나아갑니다. ? 우리가 주님께만 자신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되고 주님을 떠나서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전혀 없다는 것을 시인하게 됩니다. ? 그래서 그분에게 복종하고 그분의 멍에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 그리고 그들은 세상을 버리고 또는 자신의 가정으로부터 축출 당할 고통을 받거나, 그로 인한 환난을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자신을 교회에 가입시킵니다. ? 그 뿐만 아니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그 교훈과 함께 계속 진행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일관성 있는 자세를 견지합니다.


④ 순종은 회개를 내포합니다. ? 회개는 죄를 깨닫고 미워하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죄 지었음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이며, 우리의 본성이 죄악적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 회개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 복음을 참으로 들었을 때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⑤ 순종이 없다면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 참된 믿음은 항상 행위를 유발합니다. ?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그 자체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 참된 믿음은 항상 능동적이며 항상 역사합니다. ? 참된 믿음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 참된 믿음은 결코 단순한 지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⑥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순종 속에는 주님의 인격을 믿는 것과 그의 속죄 희생적인 죽음을 믿는 것과 그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 또 하늘에 올라가심 등에 대한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⑦ 우리 마음속 깊이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소원이 일어나고, 인위적인 노력과 의지로 하는 어떠한 것들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반응하는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5. 기쁨의 시금석


우리는 우리가 정말 복음을 진정한 의미에서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주어진 첫 번째로 순종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두 번째 방법은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①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는 순간 기쁨으로 충만했는데, 어찌나 기뻐하였던지 그들이 술에 취하였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며, 그것은 분명한 환희였고 행복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그런 방식으로 드러난 것입니다.(행2:13)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② 행3:8에서 치료를 받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걷고 뛰면서 기뻐하였습니다.


③ 행8:39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는 진리를 알았고 세례를 받아, 기쁨으로 그 길을 갔습니다.


④ 행16:34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의 온 집이 하나님을 믿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⑤ 빌4:4에서 기뻐하라는 말을 듣게 되고 벧전1:8에서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합니다.


⑥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순교를 당할 때에도 여전히 기뻐하고 있었고, 그로 인하여 고대 세계를 흔들어 놨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라도 기뻐하였습니다.


⑦ 종교 개혁 시대나 참된 부흥이 일어나는 기간에 있어서 나타나는 큰 특징은 능력과 그 기쁨의 요소가 돌아오는 데 있다는 것이 아주 잘 알려져 있습니다. 부흥이 있을 때 큰 기쁨도 함께 합니다.


⑧ 오늘 날에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니 기쁨에 찬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주목하게 되는데,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인들로서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우울한 모습을 보이고 불행해 보이면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지 않고 복음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다는 사실이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체험이나 구원의 복음의 전파입장에서 그 문제는 아주 긴박합니다.


⑨ 우리의 기쁨은 죄를 용서 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서도 기인하지만, 그것 보다 더 큰 것은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이 너무나도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에게 영원토록 있게 될 좋은 일에 대한 기쁜 소식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인데, 그것은 주님의 기쁨이며 성령의 기쁨입니다.

 

 

 

 

 

성경: 롬10:18-21절

 

 

 


10장 18~21절 :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1. 복음의 보편성과 활용성


이제 10장의 결론 부분에 이르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로마서 10장 전체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는 명료하게 이 전체 비극이 바로 유대인들이 넘어지게 하는 돌에 넘어진 결과라고 지적해 왔습니다.(9:32) 특히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그 진리에 그들이 넘어진 것입니다. 사도는 결론적으로 유대인들과 사람들이 왜 복음을 순종치 않는지에 대하여 답하고 있습니다.


① 유대인들의 대다수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은 복음을 듣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어느 곳에서나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 세상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에 대해서 핑계 댈 수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물들을 통해서 증거하고 계시며, 자신에 대하여 나타내시고 설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복음은 보편적으로 전파되고 있는데, 감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알 수가 있습니다. ? 복음은 구약에도 나타나 있는데,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와 그 구원을 보지 못하는 것은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 태양이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계에 선포하듯이 복음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부르심을 받고 세우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전도자들을 통해서 모든 지역 모든 사람에게 들려지도록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② 두 번째로 그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은 복음에 관한 가르침이 분명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복음은 과거에 유대인들이 알았던 모든 것에 대하여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알려진바 그대로의 구원의 방식이라는데 있습니다. 유대인들 또한 그 구원의 방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 성경에는 유대인들이 구원의 방식의 본질이 그들에게 분명하게 밝혀져 있으며, 또한 복음을 거절하게 될 것도 확실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 그들은 오직 참 유일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숭배한 유일한 민족이었는데 그들은 바로 그 점만을 의지했습니다. ? 자기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율법이 자기들에게 주어졌으며, 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이므로 그들 자신은 구원을 받고, 다른 모든 족속들은 다 멸망 받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행위만을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 그들은 민족의 차원에서 구원을 생각했으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음을 자랑했습니다. ? 그러나 사도는 이사야 65장 1~2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은 다른 족속인 이방인들이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제 자기 백성들이 나간 자리에 다른 민족들을 데리고 오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③ 그들이 복음을 순종치 못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설득 당할 수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고 하나님의 은혜 외에 그 어떤 것에도 달려 있지 않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뜻으로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민족의 혈통이나 지식이나 탐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 부르심을 입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습니다.(마22:14) 택함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의 결과로 부르심을 받은자들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모든 것을 완전히 다 무너뜨리심으로서, 복음이 항상 유대인들에게 거쳐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과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 이유는 구원에 대하여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고,(고전1:25~27,31) 영광이 전적으로 주님께 돌려지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 “불순종”은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을 뿐더러, 전혀 설득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진리에 감동을 받고 설득을 당하게 자신들을 내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 “거스려 말하는 것”은 대적하여 말하고, 충돌하여 말하는 것을 뜻하는데, 그들은 설득당하지 않으려 했고, 더 나아가서 대적하여 말하였습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잘 청종하고 도움을 받고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질문들을 던지는 사람들입니다. ? 세상에 빛이 왔으나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였습니다.(요3:19) 자기들의 지식수준에 기준하여 행함으로서 모든 것을 밝혀주는 진리의 빛까지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 그들은 지성이 문제가 아니라 교만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항상 교만한 마음에 있습니다.


④ 최종적인 증거는 “내가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으로 이 말씀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전적으로 핑계 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고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고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제시된 것은 은혜의 복음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손과 발을 펴실 뿐만 아니라 종일토록 그 일을 하시는데, 단순하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죄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 만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계속 부단하게 자신의 자세를 견지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 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겼고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함으로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복락을 거두셨습니다. ?  그 때에 그들은 다시 돌이켜 울면서 회개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복을 주신 것입니다. ? 그런 다음 잠시 후에 그들은 또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렸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돌아오시곤 하셨습니다. ? “종일토록” 그것이 구약 성경 전체의 이야기입니다.


⑤ 사도들은 구약 성경에서 자신을 적용시켜서 유대인들이 빠졌던 그 실수를 번복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 구원은 신약 성경에서나 구약 성경에서나 여전히 동일하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 하나님의 목적은 창세기 처음부터 요한계시록 끝까지 줄곧 하나로 전개되어 있습니다. ?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달려 계신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의존하지 않으시며, 심지어 자기 백성들마저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모든 교회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다 배도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이행해 나가실 것입니다.

 

 

 

 

성경; 롬11:1-10절

11장 1~10절 :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마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1. 서   론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적인 의지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인데, 우리가 어떠한 행위를 함으로서나 우리가 원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정죄의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구원을 거부하는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10장에서 사도는 이점을 과제로 삼아 상세하게 풀어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항상 믿음으로 말미암았고 다른 길은 절대로 없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목적은 현재에도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지금은 주로 유대인들보다는 이방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의 맹목과 그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무능 때문입니다.


이제 11장에서 사도는 미래를 바라보며 유대인과 이방인에 관한 하나님의 이 크고 놀라운 목적이 어떻게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유대인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유대인들이 소외되었다면 항상 소외된 채로 있을 것인가? 구원과 관련된 유대인의 끝이 이것인가?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종결되었는가? 사도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의 완성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이 11장의 배경이고 9~10장의 요약입니다.

 

 

 

 

2. 전적으로 배제되지 않은 이스라엘(1~4)


이 단락에서 사도는 이스라엘의 배제가 전적인 배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실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는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대답합니다.


① 자신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씨로서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완전히 관계를 끊지 않으셨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라고 덧붙여 말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여기서 “미리 아신”이라는 단어에서 하나님의 예정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셨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애정을 쏟으셨으며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이 민족을 조성하시고 준비하셨습니다. ? 아모스 3:2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에게 “너희만 알았다.”고 하시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에 관해서만 알고 계셨다는 뜻이 아닌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땅의 모든 족속에 관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들이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 그들은 다른 민족과 다르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특별한 민족으로 준비하셨으며,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 만드셨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 맹세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이 민족을 조성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뒤집어 버리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을 보시며,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3. 남은 자에 대한 소망


① “나도 이스라엘인이요”라는 이 말은 사도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전적으로 배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② 사도는 다시 “너희는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함으로서 자신이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기를 바랍니다.


③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이란 열왕기상 19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홀로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맞서 싸웠고, 그들을 격퇴시켰습니다. ? 이 일이 있을 후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려는 의도를 듣고 살기 위해 도망치던 중에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께 탄원을 드리고 있는 엘리야를 봅니다. ? 그의 기도는 요컨대,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제단을 헐어 버립니다. 이제 저만 남았고 그들은 나까지 죽이려고 위협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 백성에게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며, 그들을 왜 벌하지 않으십니까?”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의를 행하시기를 청했습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라고 지적하셨습니다. ? 따라서 사도의 목적은 자신만이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면서 엘리야 시대와 자신의 시대 사이의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의 배교가 있었지만 남은 자가 7천명이 있었습니다. ? 사도는 지금도 정확하게 똑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데, “나는 이스라엘인이며,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나 혼자만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엘리야는 자신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결론이며, 자신이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자기 혼자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④ 우리가 이 남은 자의 교리로 위로를 얻으면서 “우리는 아무 일도 안 해도 된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서는 안 됩니다. ? 결코 그렇지가 않으며, 우리는 다른 사람의 눈을 열어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 우리는 그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이 그 진리를 믿고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데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4. 그릇된 방법으로 의를 구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같이 의로워지기를 원하여, 그 의를 열렬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구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얻은 특권자가 있다고 하며, 그들은 택하심을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① 사도는 계속하여 “남은 자들”, 즉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민족 전체가 완악하여 졌다고 합니다. ? 완악한 마음과 보지 못하는 눈 때문에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 그들은 혼미한 심령으로 인하여 보고 듣고 이해하는 고도의 기능이 상실되어 무능한 상태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 이스라엘은 모세와 이사야의 시대에도 그랬듯이, 여전히 복음을 거부하고 있습니다.(사29:10; 신29:4) ? 은혜의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을 제외한 모든 자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② 여기서 중요한 것은 “”, “올무”, “거치는 것”이 아니라 “보응”이라는 단어입니다. ? 보응은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악한 행동에 대한 보답임을 의미합니다. ?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자신들의 고집과 완고함의 결과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 다윗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있는 유익들이 오히려 그들에게 징계와 방해물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 밥상은 물질적 축복과 영적인 축복을 상징합니다. ? 그런데 다윗은 그들의 악한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께 하나님의 축복들을 저주로 바꾸시라고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본문에서 사도가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는 원칙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축복들 자체가 우리에게 저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 밥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물질적 은사와 축복들을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가장 풍요한 축복, 바로 그 축복을 의미합니다. ? 두려운 것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들을 잘못된 방법으로 보거나 또는 남용한다면 그 축복들이 우리에게 저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주의 자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면서 살기보다는 전통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경 지식을 자랑하지만 성령을 상실했기 때문에, 영적인 풍요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풍요도 즐기기 때문에 무시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오늘날의 물질적 풍요 자체가 타락으로 이어지는 무서운 저주로 변하는 것처럼 풍요로운 사회가 항상 갖고 있는 위험은 만족하여 게을러지는데 있습니다.


④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 길 밖에 없으니 오직 믿음입니다. ? 그러나 이스라엘의 비극은 그들이 “믿음으로 구하지 않은 것”입니다. ? 만일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다거나 교인이라거나, 큰 교회에 다니는 것, 또는 자신의 선행에 의지한다면 그는 분명히 유대인들과 같습니다. ? 그들은 외인들이며, 눈이 가리어져 있는 자들이며, 구하고 있는 것을 얻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절대로 얻지 못할 것입니다. ?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뿐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단순한 믿음 외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⑤ 유대인들의 비극은 바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얻지를 못한 것입니다. ? 우리는 이 큰 교훈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임도 알았습니다. ? 사람은 갓난아기이든, 늙어 죽음의 자리에 있든지 모두가 다 죄인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⑥ 이제 우리는 심판에 의한 완악함 이라는 두 번째 교훈으로 나아갑니다. ? 죄는 항상 강퍅함을 낳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는 어떤 일을 처음 할 때는 무척 주저하지만, 그러나 일단 그 일을 하면, 두 번째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에서 강퍅해지는 과정의 한 부분을 알 수가 있습니다. ? 마음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만일 우리가 진리에 순종하고 반응하지 않으면, 진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 강퍅해 질 것입니다. ? 죄는 이미 존재하고 있고 그 죄는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만들어 진 것으로서 심판에 의한 완악함의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그 완악함을 확대시키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현미경을 대어서 정상적으로 사람들에게 명백하게 보이지 않은 일을 확대함으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⑦ 복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살펴보면, 성경과 수많은 번역서와 모든 종류의 교훈, 복음 적인 노력들을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달라지는 것이 없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 다윗이 “저희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한 말처럼 우리의 밥상이 저주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바로 저주가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가난은 무서운 것이지만, 풍요는 영적인 의미에서 더욱 위험합니다. 밥상은 매우 자주 우리의 저주가 되고 있습니다. ? 우리 중에는 여러 해 동안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고, 설교하면서, 성도들에게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강권해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 부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 교리에 의해 위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밤에 편안한 잠자리에도 들지 못할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케도 하시고 성령을 거두어 가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에 굴복합니다.

 

 

 

 

5. 저주의 시편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시편 69편을 인용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저주 시편들 중의 하나입니다. 저주는 죄인들에게 어떤 악한 일이 일어나야 한다고 하나님께 표현하는 간절한 열망입니다. 시편에는 이런 종류의 다른 시편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시58,109,137편이 이런 저주의 시편입니다. 우리가 시편 69편에 대해서 말하고 하는 내용은 그 시편들에도 적용이 됩니다.


① 시편 69편은 다윗이 기록했습니다. ? 다윗은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비범한 인내심을 가지고 모든 일을 참았던 사람입니다. ? 그는 사울 왕을 여러 차례 아주 쉽게 죽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 그는 사울에 의해 모욕과 속임을 당했어도 그를 향하여 조금도 복수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하여 비통해 했고, 슬퍼할 만큼 관대하고 도량이 넓은 사람입니다. ? 압살롬이 왕국을 빼앗아 버리고 그를 죽이려고 했을 때에도 다윗은 그것을 참고 압살롬을 용서해 주라고 했으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너무나도 슬퍼하였습니다.  ? 다윗에게 대항하여 싸웠던 아마사가 뉘우쳤을 때에 다윗은 그를 용서했을 뿐 아니라 격려도 해 주었으며 그의 죽음 앞에서는 슬픔에 잠기고 고통스러워하였습니다. ? 따라서 시 69편은 다윗의 악한 복수심의 성품과 관련해서 해석할 수 없는데, 다윗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② 이 저주의 시편들에 나오는 말들은 절대로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 다윗은 개인적인 복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 다윗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고난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대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대적들이 자신에게 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 다윗은 하나님의 대적들이 하나님에게 행하고 있는 일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 다윗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열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 그러므로 그는 개인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대적들에 해하여 느끼는 것은 절대로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이 있으며 하나님과 공감과 관련이 있습니다.


③ 그 예로 시 104편 마지막 부분의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 지로다.” 그리고 이어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라고 말합니다. ? 이 말은 성령 충만하고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고, 창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완전하심의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말입니다. ? 이 사람이 이 어두운 면을 바라보며 “이들을 완전히 제거하소서. 그리하여 조화와 완전함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외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 이 말은 시편 69편 및 유사한 다른 시편들에 나오는 말과 정확하게 동일합니다.


④ 시 69편의 말씀은 신적인 영감을 가지고 다윗은 오시기로 예정되어 있는 앞선 전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 예수님을 거절하는 세계를, 특히 “그를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하고 외치는 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야유를 퍼붓는 유대인들을 앞서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 이것은 복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느끼면서 이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보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⑤ 우리는 처벌이 취하는 특별한 형태에 의해 실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 심지어 어린아이의 죽음일 지라도 사실 영원의 관점에서 본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의 사람이 이해 할 수 있도록 낮추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사고 형태로 계시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사고의 형태는 변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다윗과 같은 옛 사람들의 폭력적인 생활 형태에 관하여 우리의 삶의 형태가 더 낫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 더군다나 오늘날의 원자폭탄의 시대는 다윗과 같은 옛 사람들을 비평할 자격이 없습니다. 표현의 형식이 달라진 것이지 그 야만성에 관하여는 20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더욱 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⑥ 우리를 축복하시는 주님께서는 처벌에 관련하여 구약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직접 여러 곳에서 영원한 처벌을 가르치셨습니다. ⑦ 이 처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그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⑧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궁극적인 증거는 갈보리 십자가상에서 있었던 우리 주님의 죽으심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큰 증거인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의 가장 큰 증거이기도 합니다.

 

 

 

 

 

성경: 롬11:11-15절

 

 

 

 

11장 11~15절 :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 배제되지 않은 이스라엘


사도바울은 첫 번째 단락에서 모든 유대인들이 버림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한 다음, 이어서 유대 민족 전체가 궁극적으로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도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입증하고 설명하려고 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만일 유대인이 궁극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즉 넘어진 것이 아니고 단지 실족하기만 했다고 한다면, 사도가 유대인에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에게 일어난 일이 첫째로는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목적의 한 부분이고, 둘째로는 유대인을 위한 것이며, 세 번째로는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축복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① 왜 유대인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사도의 대답은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에게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야를 거부하는 죄악된 행동의 결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도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도되는 것을 불만스러워했으며, 믿지 않는 유대인은 이 사실에 격렬하게 분노했습니다.


② 두 번째 대답은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라고 말합니다. ? 유대인들의 복음에 대한 거절은 복음으로 하여금 이방인을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 그러나  이방인에게 나타난 복음의 결과를 보았을 때, 유대인들은 시기가 났고 그로 인해 그들은 이미 거절했던 복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③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했고 그리하여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전달되었고,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 받는 복음의 축복들을 보게 될 때, 결국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되돌아 올 것입니다. ? 이것이 사도가 실족함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말하는 세 번째 대답입니다. ? 유대인들의 실족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으로, 축복으로 그리고 교회 안으로 다시 인도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④ 이스라엘 민족이 실족한 것은 단지 일시적인 과정일 뿐입니다. ? 그들은 넘어지지 않았고 단지 실족했을 뿐입니다. ? 먼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 복음의 축복으로 인해 부요해진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자극하여 시기 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미래의 어떤 시점에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거절했던 복음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유대인의 실패와 이방인의 부요


우리는 사도가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완전하게 버리신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며 제시하는 세 가지 이유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거절에 의해 구원이 이방인에게 주어졌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구원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시기 나게 하셨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 번째 이유로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 이리요.” 라는 말씀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①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배제됨으로 인하여 우리가 축복을 받았다면, 유대인들이 다시 돌아올 때에 이방인인 우리가 쫓겨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우려하는 것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유대인들이 충만하게 될 때 우리의 축복은 훨씬 클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②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큰 축복을 잠시 동안 상실하여, 매우 초라한 상태로 떨어진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③ 유대인의 실패 때문에 복음의 부요함이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 우리가 기뻐해야 하고 여기에 비추어서 우리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은 복음이 얼마나 부요한 것인지를 실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참조 : 엡2:7의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 ?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가난뱅이처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이웃들이 기독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 우리가 만일 부요함으로 즐거워하고 왕자처럼 살고 있다면, 그것을 보고 있는 이웃들이 시기가 일어날 것입니다. ? 우리는 이 부요함을 소유해야 합니다.


④ 만일 유대인 전체가 처음에 복음을 믿었다면, 복음의 메시지가 이방인에게 전해지는 데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의 할례를 얼마나 끈질기게 주장했는지 보았습니다. ? 아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긴 논쟁이 있었을 것입니다. ? 참되게 믿는 유대인들의 수는 감소되었고 지금 그 수는 적습니다. ? 그러나 장래에는 매우 많아질 것입니다. ? 그러므로 사도가 주장하는 바는 만일 이 현재의 상태와 조건이 이방인들에게 축복의 수단이 되었다면, 믿는 유대인들의 수가 대다수가 될 때 이방인들의 축복은 훨씬 더 클 것이라는 것입니다.

 

 

 

 

3. 유대민족에 대한 올바른 관점(11~12)


이 두 구절은 성경과 우리의 삶의 신령한 일들과 관련된 그리고 모든 인류와 관련된 중대하고 근본적인 말씀입니다.


① 진리들은 유대 민족과 관련이 있습니다. ? 유대인의 상태와 복음에 대한 거부가 예언되었던 일입니다. ? 이 예언의 활동은 초자연적인 수단으로 성경 가르침 전체에 있어서 기본입니다. ? 하나님께서 한 민족으로 유대인을 보존하시겠다고 설명하셨는데, 많은 민족들이 유대인들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전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현존한다는 것은 위대한 기적들 중의 하나입니다. ? 개인적인 유대인들과 민족으로서의 유대인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들에 대하여 큰 연민을 느껴야 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②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방법들과 관련된 매우 중대한 진리를 가르쳐주는 “근본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과 관련되어 행해진 바로 이 일에 대해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시고 계시는 일을 알고 계십니다. ? 또한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갖고 계셔서 우연하거나 아무렇게, 또는 다른 사람이 행동한 결과로서의 행동을 하지 않으십니다.


③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은 예상 할 수 없이 매우 기묘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흔히 직접적으로 역사하시지 않고 간접적으로 역사하십니다. ? 우리는 모두 항상 영적 생활에서 즉각적인 해결책이나 빠른 축복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역사의 특징은 간접적이며, 먼 길로 돌아가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 그것은 자연 세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때에 가장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 때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과 완전히 모순 되게 그들을 내쳐버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 그러나 완전히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잠시 동안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이 위대한 원리를 깨닫는 것은 극히 중요합니다.


④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 우리를 잊으신 것 같고, 우리에게 완전히 남처럼 대하는 것처럼 느끼게 될 때가 있습니다. ? 우리가 예상 했던 것과 정 반대의 일을 허락하실 때도 있습니다.(악인의 번성)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물 위에 계시어 처음과 끝을 다 보고 계십니다. ? 간혹 이 사실은 우리가 실감하기에 너무 어렵지만, 하늘이 어두우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신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 구름 뒤에 하나님의 얼굴이 있기 때문입니다. ? 불신은 항상 눈이 멀어 있어서 보지 못하며, 특히 먼 곳을 보지 못하므로 함부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 하나님의 일의 해석자는 하나님이시며, 비록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우리가 깨달을 수 없지만 결국 확실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 위에와 모든 일 배후에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은 생각을 함부로 내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⑤ 이 예언은 지나간 교회사를 놀랍게 밝혀 주는데, 우리가 역사를 되돌아볼 때에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을 보게 됩니다. ? 오늘날 대중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공적 교회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우리가 완전히 소망이 없다고 간주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들려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다시 이 방법으로 역사하실 지도 모릅니다. ? 교회 안의 혼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편협하고 국한 된 삶을 살면서 자신들 주위에 장벽을 쌓는 경향, 그리고 외부인들을 향한 그들의 태도가 그런 징후들입니다. 만일 복음이 그렇게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⑥ 복음주의 성도들인 우리가 형식적인 성도들과 변절한 교회들에 대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데, 그들이 비록 진리를 부정하는 변절한 교회일 지라도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아직 다다르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빠르게 그 위치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교회들과 개인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 교회는 회당과 분리해야 했듯이 그들과 분리되어야 합니다. ? 우리가 분리해야 하지만 우리의 가장 간절한 바람은 그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일으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⑦ 이 두 구절은 우리에게 겸손, 특별히 겸손한 생각을 요구합니다. ? 우리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에 결론을 빨리 내리는 경향을 주의해야 합니다. ? 우리가 무지한 것을 깨닫고 만유위에 계신 분을 생각하여 겸손해야 합니다. ? 우리는 인간의 역사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 교회가 인간과 인간의 재능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에 의지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은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 또한 그 무엇도 하나님의 목적을 저지할 수 없습니다. ?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전능을 믿어야 합니다.

 

 

 

 

4. 바울의 직분은 이방인의 사도


사도는 주로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교회인 로마 교회에 자기가 유대인들에게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갖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에 있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교회에 대해 자기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보개하고 있습니다.


①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구원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방인을 위한 특별한 위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가 자기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이유입니다.


② 사도가 “내가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라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는 것은 자신이 그 일에 전심전력으로, 끈기 있게, 또한 자신을 희생하며 몰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의 지위가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증거하기 위해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③ 사도가 자기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그 직분으로 인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과 관련된 위대한 진리를 이방인들에게 온전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④ 사도는 유대인에게 일어나는 일이 궁극적으로는 이방인들에게 가장 큰 축복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이 사실을 이방인들이 알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방인들을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완전하게 세움으로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이고,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지만 그렇다고 유대인을 망각했다거나 그들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 관심은 사도가 유대인으로부터 분명하게 돌아선 시기가 있는데 사도행전 13장에서 “이제부터 내가 이방인에게로 가리라.”고 말합니다.? 그는 유대인을 잊어버리거나 관심이 없다거나, 그들에게 흥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시기 나게 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 사도의 이방인 전도는 유대인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그리고 그는 이방인들도 이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기를 원했습니다. ? 그는 이방인의 사도였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은 항상 그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⑥ 이제 사도는 15절에서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만일 유대인 대다수가 쫓겨남으로 이방인들이 이 큰 축복을 받았다면, 유대인들이 하나님 안으로 들어올 때 그 축복은 얼마나 크겠는가.”라는 논증입니다. ?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죽었던 사람들, 그들이 생명으로 나오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 이 말씀은 과장법이지만 매우 강력한 말씀입니다. ? 현제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었다면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상태가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 그것은 마치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과 같을 것인데, 유대민족이 돌아오는 일이 너무 놀랍고 너무 영광스러워서 우리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 외에는 비교될만한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지금 부요한데 유대인들의 충만함이 더해지면 그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 전에 받은 축복과 기쁨에 비교하여 이 기쁨은 너무 압도적이며 너무 뛰어나고 너무도 엄청나서 마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이 일을 고대해야 하는데, 이 일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갖고 있는 영광스러운 소망의 일부분입니다. ? 그러나 그때 갑자기 이 일이 일어날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확인되는 것을 발견하고 영광스러운 기쁨의 감정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 교회는 분명하게 환희와 경탄과 영광의 상태가 될 것입니다.


⑦ 우리가 복음의 진리와 복음의 능력의 감동적인 예증을 볼 때, 우리는 말 그대로 천국으로 올라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일이 이 백성 전체에게 일어나 그들이 민족적으로 교회에 들어올 때, 진실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 같을 것입니다.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던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할 때, 사도는 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⑧ 그들이 민족적으로 집단적으로 들어올 때 그 일은 너무 놀라워서 우리는 거의 참을 수 없이 놀라워서 우리는 거의 참을 수 없이 경탄과 사랑과 찬양 가운데 넋을 잃을 것입니다. 교회는 영광스럽고 승리감으로 넘칠 것이고, 말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 롬11:16-22절

 

 

 

 

11장 16~22절 :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또한 가지 얼마나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찌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1. 교회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우리는 본문에서 교회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위치에 대한 가장 중요한 말씀을 보게 됩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이방인들이 교회와 유대인과 관련하여, 그리고 구원의 문제와 관련된 자신들의 위치를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부분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격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와 교회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각각의 위치와 위치에 대한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①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하니 떡덩이도 그러하고”라는 말씀은 민수기 15:17~21에서 정확히 거론하고 있습니다. ? 제사장들은 곡식 가루의 일부를 취하여 떡을 만들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 이곳의 가르침은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로 드려진 떡을 만든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하므로 나머지 전부가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 표본을 추출한 것이 거룩하다면 전체가 다 거룩하다는 의미입니다. ? 이것이 구약 시대의 가르침이었는데, 사도는 이 가르침을 가지고 예화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는 말씀은 뿌리와 가지의 관계는 필연적이고 유기적이라서 뿌리와 관련된 사실은 무엇이든지 필연적으로 가지에 대해서도 적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③ 사도의 논증은 처음 익은 곡식가루로 만든 떡 중에 조금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께서 전체를 동일하게 보신다고 말씀하셨고, 뿌리의 성질이 가지들의 성질을 결정한다는 논증입니다. ? 이 두 가지 예화는 동일한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 그런데 두 번째 예화는 첫 번째 예화의 요점을 더 명확하게 나타냅니다.


④ 본문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족장들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말합니다. ? 그들은 유대 민족의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들은 유대 민족의 뿌리입니다. ? 그들은 처음 익은 곡식 가루, 즉 새로 생겨난 그 위대한 민족의 떡덩이입니다.


⑤ 뿌리가 거룩한 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는 주장에서 이 뿌리는 아브라함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아브라함이 바로 유대 민족의 뿌리입니다. ? 아브라함은 조상이며 아브라함이라는 광산에서 유대 민족이라는 반석이 캐내어졌던 것입니다.

 

 

 

 

2. 감람나무의 의미(17)


본문에서 사도는 감람나무라는 말을 하는데, 참 감람나무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참 감람나무가 유대민족이라고 한다면,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 자동적으로 유대인이 됨으로서 이방신자들로 인하여 유대 민족이 활기를 되찾게 될 터인데, 활기를 되찾기는커녕, 오히려 떠나 버림으로 이방인 신자들이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전체적인 주장입니다. 또한 유대 민족은 우리가 받는 뿌리의 진액도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실족하고 타락하여 쫓겨났습니다. 우리는 유대 민족에게서 양분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① 참 감람나무는 자연적인 민족이 아니라 영적인 민족으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 이삭과 이스마엘은 모두 아브라함에게서 나왔지만 이삭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 야곱과 에서는 한 부모에게서 나왔지만 야곱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 야곱의 후손들도 모두가 이스라엘에 속해 있지만 그들 전부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선택 받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 신약에 와서는 이방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감람나무, 즉 하나님의 백성에 접붙여졌고, 그 접붙임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 그리스도에 속한 이방인 성도들은 이제 참 감람나무,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속해 있으므로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계승자들입니다.(갈3:29)


②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하나입니다. ? 그들은 구약 성경에서도 신약 성경에서도 하나입니다. ? 감람나무 비유로 이 사실을 매우 명확하게 증명합니다. ? 감람나무는 신약 시대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때부터 존재하였고 그 때부터 계속 존재해 왔습니다. ? 하나님의 백성, 구속받은 사람들이 갈보리 후에 우리 주님의 승천 후에 또는 오순절 후에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그 전에도 존재합니다. ? 감람나무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몇몇 가지들은 꺾여졌고, 몇몇 가지들은 접붙여졌지만 감람나무는 여전히 하나입니다. ? 그러므로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하나입니다. ? 구약과 신약의 구속 받은 사람들 간에 특정한 차이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전혀 없습니다.


③ 구원의 방법은 오직 하나이며 언제나 동일합니다. ? 그것은 믿음의 의한 방법 외에 구원의 방법은 전혀, 절대로 없습니다. ? 이 감람나무와 우리의 관계만이 유일하게 우리를 구원합니다. ? 우리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은 항상 믿음으로 말미암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활동으로 말미암습니다. ?  구원은 이 감람나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 밖에 아무것도 구원 할 수 없습니다. ?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감람나무의 “뿌리의 진액”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 여기에 영생,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생명을 주셨습니다. ? 구약의 성도들도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있으며,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우리는 믿음의 자녀들이므로 아브라함의 자녀들입니다. ? 그들은 감람나무의 뿌리의 진액을 받았고, 우리도 정확하게 그것을 받고 있습니다.

 

 

 

 

3. 자긍의 위험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이방인 성도들에게 유대인과 이방인의 위치를 명확하게 설명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는 수백 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이 교회의 외인들이 된 반면에,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갖고 있지 않았고 이교도의 신앙 관습 및 거기에 수반하는 모든 것에 흠뻑 빠져 있던 이방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온 이 중대하고 특이한 현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① 감람나무 비유에서 감람나무는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데 그러나 그 뿌리는 아브라함을 넘어 노아와 아벨, 심지어 아담과 하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감람나무가 아브라함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은 아브라함의 소명에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 묘사되고, 신약에 와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묘사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② 사도는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 그 가지들은 현재 교회 밖에 있는 대 다수의 유대민족입니다. ?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감람나무의 원 가지들 이었지만 꺾여졌습니다. ? 그러나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 교회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유대인보다 낫고 교회가 우리의 것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사도는 그들이 나무가 아니라 단지 외부로부터 그 나무에 접붙임이 되었을 뿐이며,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감람나무의 뿌리의 진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 그들은 이방인들이 접붙여지기 위하여 본래의 가지들이 꺾여졌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 사실이 분명하게 이방인들의 우월성을 나타낸다고 주장 했지만 그들이 우월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꺾여진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 유대인들은 원 가지들이었고 하나님 자신의 백성이었지만, 그들의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③ 사도는 이제 “만일 하나님께서 원 가지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면, 너희도 아끼지 아니하실까 주의하라”고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원가지들이었고 하나님 자신의 백성이었지만 그들의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셨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본래 자신의 백성이 아니었고, 특별한 방법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버린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 이것은 마치 자신의 사업과 전통을 이어 주기를 기대하는 아들을 가진 사람이 그 아들에게 사랑을 아낌없이 주었고,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지만, 불행하게도 그 아들은 질이 나쁜 인물로 성장하여, 그의 아버지를 욕되게 하고 아버지의 의지에 반하는 모든 일을 행함으로 아버지는 자신의 목적이 어긋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아들을 버리고 하인이나 잘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의 아들을 데려다가 양자로 삼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 아버지가 친 아들을 악한 행동 때문에 버렸다면, 너희가 악한 행동을 할 때 더 쉽게 버릴 것이 아니냐는 논리인 것입니다.

 

 

 

 

4. 하나님을 아는 지식


우리가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교만이라는 가장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겸손과 경계와  또한 두려움의 지속적인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가 이 점에 대해 우리를 가르치는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특성과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은 우리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입니다.


①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되면, 그것은 ? 하나님을 무시하는 경향으로 나타납니다. ? 성경에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으로 받아들입니다. ? 죄에 대한 잘못된 견해나 죄를 지은 인간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됩니다.


②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물론 같은 방식으로 그릇된 속죄관으로 이어집니다. ? 모든 진리들은 서로 밀착되어 있는데, 이것이 성경 진리의 특이한 점입니다. ? 성경은 완벽한 통일체입니다. ? 만일 우리가 어떤 한 점에서 심각하게 잘못되면 그 잘못은 나머지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처음부터 끝가지 완전히 잘못되는 것입니다.


③ 우리가 실천의 영역에 이를 때,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음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복음 전도의 문제를 본다면, 복음 전도란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복음 전도는 일종의 일반적인 웃음거리와 여흥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 복음 전도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 복음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친교로 인도하여 우리로 하나님과의 친교를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④ 모든 동기는 자기의 선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⑤ 하나님께서는 행하실 때에 하나님 전체로 행하신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부분적으로 행하시지 않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모든 속성들에 따라 행하십니다. ?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정확하게 동시에 활동하십니다. ?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항상 함께 드러납니다. ?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가 함께 드러나듯,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도 함께 드러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들 중 어느 하나도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실 수 없습니다.

 

 

 

 

5. 타락하는 경향이 있는 제도들


우리는 우리에 대한 말씀을 적용하고, 항상 진리를 적용해야 합니다. 또한 성경은 설교되고 항상 적용되어야 합니다.


① 성경의 역사의 목적은 중대한 가르침, 즉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근본적이며 영원한 원리를 예증하는 것이므로 성경의 역사를 그 자체만으로 보거나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 우리가 성경의 역사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역사를 통해 가르쳐지는 중요한 원리들이 항상 지속적이며 영원한 원리들이기 때문인데, 이것이 성경이 절대로 시대에 뒤쳐지지 않고 항상 현대적인 이유입니다. ?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항상 자신에 대입하여 “나는 유대인” “나는 바리새인”  “나는 서기관”이라고 말하며, 이 내용은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어야 합니다. ? 성경은 항상 현대적인데,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동일하시고 인간도 항상 똑같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항상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② 성경은 이런 교훈들을 예증적인 방법으로 말씀하시므로 성경은 개인이나 민족에 의해 예증되는 위대한 교리서입니다. ? 그 중에서도 유대 민족이 최고의 예증이 되는데, 이 예증은 너무나 뚜렷하고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유대인들과 정확하게 동일한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유대인들을 바라보며 비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유대인들은 자신의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인데 우리도 역시 동일한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③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잘못을 행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타락하기 시작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즉시 그들을 처리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며, 항상 즉시 행동하지 않으시는데, 그것을 가리켜 유예의 원리라고 합니다. ? 눅13:6~9 ? 마21:33~46 ? 마23:34~36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지자들을 보내시며 이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시고 즉시 내리치지 않으시고 마지막에 치십니다. 따라서 모든 일이 특별한 한 세대에게 일어납니다. ? 우리 주님께서도 갸롯 유다를 참을성 있게 대하심을 알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유다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꾸민 음모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유다를 끝까지 친구라고 부르신 사실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이렇게 계속 인내로 기다리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롬11:23-32절

 

 

 

 

11장 23~32절 :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함과 같으니라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1. 비밀을 알리는 사도(25~27)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옛 백성을 완전히 버리셨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과 자신들에게 무엇인가 선천적으로 탁월한 것이 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을 받았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고 있으므로, 그 문제 때문에 기독교회라고 칭하는 하나님 나라의 특별한 형태와 유대인들의 관계에 대한 전체적인 의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대한 대답으로 다섯 가지 논증을 펼칩니다. ?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며 사도라는 사실이 증거한다고 합니다. ? 교회 안에 유대인 중의 남은 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을 받은 족장들의 자손들임을 밝혀줍니다. ?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돌아가는 데 있어 어려움이 전혀 없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 즉 이방인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일을 행하셨다는 논증입니다.


이 논증을 마친 다음 사도는 직접적인 주장을 하기 시작하는데, 지금까지 그는 이스라엘이 회복할 가능성과 가망성이 있다는 증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① 사도는 이런 문제를 자신이 사도이고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으니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하지 않고 언제나 논리를 사용하여 풀어 갑니다.


② 사도는 이 일이 절대로 구약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방인들에게 가르치고 또한 증명 하는데, 자신의 사견으로 하지 않고 성경을 기초로 해서 풀어 나갑니다.


③ 진리를 긍정적인 면에서만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면에서도 풀어줌으로서 깨달아 알게 하기를 원합니다.


④ 사도는 완전히 잘못된 말을 하고 자신들의 자격에 대해 자긍함으로 스스로 어리석어지는 일을 그치기를 원합니다.


⑤ 사도는 “비밀”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인간의 자연적인 이해력에 숨겨졌지만 하나님께서 무한하신 은혜로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을 나타냅니다. ? 비밀은 최선을 다해도 인간의 이해로는 도달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분명하고 명확하게 알리시기를 원하신 것을 나타냅니다.[참조: 마11:25~26; 고전2:6~8; 15:51; 엡1:9~10; 3:2~4; 롬16:25~26]? 비밀이 과거에는 단지 암시만 되었으나 지금은 명백하고 완전한 계시라는 것입니다. ? 우리도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이 비밀을 보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할 수도 있는데, 유대인들은 그 예언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 비밀을 보여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 이와 같이 기독교는 타 종교와는 다르게 소문을 내고, 알리고, 드러내고, 선포합니다.

 

 

 

 

2.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예언(25~27)


우리는 바울 사도가 예언이라고 선언하는 이 중요한 말씀을 살펴보고 있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에 그리고 기독교회에 유대인의 복귀에 대한 바울의 절대적인 확신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그의 예언의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① 이스라엘의 문제는 맹목으로 이어지는 “완악함”인데, 성경에 나오는 말씀들에 의하면 이 완악함은 불신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히3:8~11)


②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는 말씀에서 사도는 시간적인 기간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완악함의 강도가 아닌 완악함의 기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일시적으로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③ 이제 우리는 “된 것이라.”는 어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에서 이 완악함은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 롬9:17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바로를 다루시는 방법에서 설명이 되며, 그것은 정확하고 적절한 사례입니다. ?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강퍅케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으로,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 사람들이 이처럼 심오한 진리를 보잘 것 없는 이해력으로 반박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 우리 주님께서는 마13:10과 마11:25에서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 유대인들에게 심판의 완악함을 내리시는 분이신 것처럼 미래 언젠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다시 접붙이실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 완악하게 하심과 회복시키심은 모두 항상 하나님의 행동입니다.(롬11:26) ? 하나님께서는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데,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는 능력을 갖고 게십니다.


④ “충만함”이라는 말은 전체로 간주되는 이방인들을 의미하며, “들어오기”라는 말은 이방인들이 인도되고 신성한 삶에 접붙여져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시작한다는 전체적인 개념을 전달합니다. ? 이 단어는 “거둬들이다.”라는 개념도 전달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크고 영원한 계획을 가지시고, 구속을 받는 사람들의 수를 알고 계시고, 이방인들 중에서 들어오는 보충할 사람들이 있는데, 사도는 바로 그들이 들어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 보충되는 사람들이 모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⑤ “온 이스라엘”은 대 다수의 유대인, 전체로서의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 유대인 조상들을 가진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집착하는 유대인들이 전체적으로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 그 때에 완악함이 제거되고 그들은 복음을 믿고 교회로 들어올 것입니다. ? 12절에 “저희의 충만함”이라는 말로 설명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온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대다수의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3. 이스라엘의 구원(28~32)


여기서 바울이 관심을 두고 있는 문제는 “온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본문의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언약이 이것이라.”라는 말씀은 사59:20~21; 27:9; 렘31: 31~34; 시14:7의 말씀에서 여러 어구를 택하여 그 어구들의 총체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① 우리 주님의 첫 번째 강림은 사도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일을 이루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지 않으신 단 한 가지 일이 있다면 바로 그것입니다.


② 우리 주님의 첫 번째 강림은 결코 야곱에게서 경건치 못함을 돌이키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결과가 어떤 면에서 야곱, 즉 유대인들의 불신과 경건치 못함을 더욱 악화시켜, 일시적으로 그들이 버림을 받고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당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③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영적인 의미로 구원자께서 유대 민족에게 이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사 그들에게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실 것이고 그들을 믿음과 구원으로 인도하시어 교회의 구성원들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④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 큰 일을 행하실 때, 즉 그들의 죄과를 없이하시고, 은혜와 회개의 영을 그들에게 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믿음의 선물을 주심으로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시고 교회에 들어오게 하실 때, 또는 그들을 감람나무에 다시 접붙이실 때 그 언약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4. 온 이스라엘에 대한 해석의 확증


① “원수 된 자”라는 표현은 그들이 원수로 간주되고 있고 원수로 취급받고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② 사도는 동시에 이 동일한 사람들에 대해 “사랑을 입은 자”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그들이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로 간주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③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들은 지금 동시에 원수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말은 분명히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은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있으며 그들이 엄청나고도 풍요로운 축복들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 사용되는 “택하심”이라는 말은 “선택의 원리”입니다.


④ 유대인들은 교회 밖에 있고 아직까지도 버림을 받았으며 또한 여전히 원수로 간주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하신 선택의 관점으로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그들을 사랑을 입은 자로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 그 이유는 그들 자신 때문이 아니고 그들의 “조상들” 때문입니다. ? 우리는 이 증언의 양면에서 완벽한 대비를 봅니다. ? 복음의 전파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원수들”인데,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입니다. ? 반면에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사랑을 입은 자”인데, 그것은 그들의 “조상들” 때문입니다.


⑤ 조상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입니다. ? 유대인의 조상들은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입었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을 이 민족과 국가의 뿌리와 처음 익은 곡식가루로 구별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들을 일시적으로 원수로 간주하시지만, 여전히 그들은 당신의 백성으로 사랑하시고 계시다는 것이 사실임을 설명하는 기본적인 이유를 사도가 29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이방인과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유대인들을 두 가지 방법으로 바라보신다고 선언합니다. ? 하나님께서 복음 경륜의 관점에서 유대인들을 보실 때 그들은 “원수”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조상들에게 계시하신 택하심의 목적의 관점으로 보실 때 그들은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① 검은 구름이 우리들을 뒤덮을 때면, 우리들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오직 “검은 구름”만을 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검은 구름의 섭리 뒤에 자비로운 은혜를 숨기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검은 구름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계를 끊으셨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잘 이해할 수 있는데, 이것은 자녀를 둔 모든 부모들의 전형적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녀가 잘못된 행동을 한다면 부모들은 자녀에게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고 성난 얼굴을 보이게 되는데, 자녀들은 자신이 한 행동 때문에 부모가 자신에게 냉혹하고 관계를 끊었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마음아파하거나 반항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녀가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그 “무서운” 얼굴은 일시적이고, 부모가 화를 낼 때조차도 여전히 자녀에 대한 사랑이 부모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②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시는 일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사와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 그리고 선택의 목적은 변할 수 없습니다.


③ “전에”라는 말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때를 나타냅니다.


④ “순종하다”라는 단어는 롬1:5; 10:16의 믿음에 대한 부분을 묘사하면서 사용했습니다. ? 단어는 믿음이란 단지 지식적인 것이 아니며 행동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며, 마음뿐만 아니라 의지도 수반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 만일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 복종할 것입니다. ? 여기서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과거에 그들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던 때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방인들이 과거에 모든 면에 있어서 불경건한 생활을 했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시기 전까지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어서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습니다. ? 그들은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⑤ 그러나 이제 그들이 “긍휼”을 입었다고 합니다. ? 그리스도인은 긍휼을 얻은 사람입니다. ? 긍휼은 하나님의 연민입니다. ?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의 긍휼의 결과입니다. ?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완전히 불순종하였지만 긍휼을 얻었다고 합니다. ? 이 긍휼이 용서와 새 생명으로의 접붙임과 그 밖에 사도가 말한 모든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 이 모든 것이 긍휼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 하나님께서는 긍휼하신 아버지이십니다.


⑥ 교회가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고, 대다수의 유대민족은 복음을 거부하고 있어서 교회 밖에 있고 불순종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유대인의 불순종을 이용하시어 이방인을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하신 것과 같이 유대인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기 위해 이방인들의 믿음을 이용하셔서 유대인들을 시기 나게 하실 것입니다.


⑦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일과 앞으로 행하실 일을 이용하여 유대인들의 눈을 열리게 하시고 그들을 순종과 복종의 자리, 복음을 즐거워하는 자리로 인도하실 것인데,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날 때 이 일은 모든 교회에 영향을 끼칠 것이며,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크고 영원하신 목적의 핵심입니다.


⑧ 하나님께서는 이 불신과 불순종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탈출하지 못하게  가두어 놓으셨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입니다. 이 두 집단들에게 정확하게 동일한 방법으로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⑨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절망과 무능력을 강조하셨는데, 그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크고 영원하신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고 또한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의 결과라는 사실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6.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


예언은 미래에 관한 지식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과거의 지식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데 관심을 갖고 있으나 예언은 미래를 자세하게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① 예언은 앞으로 일어날 큰 사건들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해 주지만 그 사건들이 일어나는 형태, 세부 내용, 또한 결과들은 사건에 의해서만 배울 수 있으며 성취된 다음에 회고해 볼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예언이 얼마나 놀라운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② 예언을 해석하는데 있어 가장 큰 위험은 항상 있지 않은 내용을 본문에 “삽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곳저곳에서 찾아 맞추려고 하는 경향 때문이며, 그리고 찾는 것이 없을 때에는 매우 교활한 방법으로 자신의 의도를 집어넣습니다.


③ 예언이 말하지 않은 바를 주목하고 그 이상 넘어가지 않는 것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④ 우리가 성경에서 예언의 말씀을 대할 때에 항상 이 세 가지를 명심하여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7. 바울의 역사 철학


성경은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을 맺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아래 있으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언은 바로 이 사실을 암시합니다. 만일 사도가 유대 민족이 언젠가 복음을 믿어 교회의 지체들이 될 것이라고 기록했다면 불가능하거나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일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날까요?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면서 자신의 목적과 정 반대로 보이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 이스라엘 민족이 복음을 거절하는 일이 하나님에 의해 허용되었습니다. ? 만일 하나님께서 허용하지 않으셨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 그러나 비록 하나님께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셨지만, 이 말은 그 허용된 일들이 사람들의 통제 밖에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 중대한 원리는 이런 일들도 언제나 여전히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 욥기 1장에는 마귀가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제시됩니다. ? 마귀는 큰 능력을 갖고 있지만 자유 행위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욥을 다룰 수 없었습니다. ? 우리의 왜소한 지혜로 이 일을 이해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 가운데 악과 죄를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악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 악을 허용하시고 악을 지배하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악을 취하실 수도 있고, 자신의 뜻에 굴복시킬 수도 있고, 자신의 위대하고 놀라운 목적을 위해 사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② 하나님께서 확실히 실행될 큰 계획과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 그 가운데 택하심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입니다. ? 성경은 우리에게 “때와 시기”는 하나님에게 속해 있고 모든 일이 하나님의 완벽한 시간표에 따라 일어난다고 말씀하십니다. ? “때가 차매”라는 말은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지정된 시간,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시간을 말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갖고 계시고 처음부터 끝을 다 아시고, 때와 시기와 모든 것을 아신다는 중요한 사실에 굳게 의지해야 합니다. ? 우리는 이런 일을 알지 못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는 이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 비록 우리가 그 때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우리에게 큰 위로와 위안이 됩니다. ?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배하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나님의 계획을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③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하기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안심할 수가 있습니다.


④ 우리가 이 모든 사실에서 개인적으로 얻을 수 있는 위로는 절대로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위로가 우리에게 있어 가장 놀라운 축복입니다. ? 하나님께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방법으로 역사하시며 여러 가지 일들을 허락하시지만 모든 일이 절망적으로 보일 때까지 우리를 가두셨다가, 아무 소망이 없어 보이는 그 때에 갑자기 역사하십니다. ? 우리의 외적인 어떠한 상황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이 위대한 설계와 계획과 목적을 보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지배하시고, 실패하실 수 없으시고 그 목적은 영원히 확실하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롬11:33-36절

 

 

 


11장 33~36절 :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1. 바울의 위대한 송영


이제 우리는 로마서 11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위대한 송영에 이르렀습니다. 이 송영이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놀랍고, 고귀한 말씀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제 이 송영의 내용을 나누어 보면 ? 첫 번째 부분은 사도가 이 영광스러운 구원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깊음과 부요함을 특별히 언급하며 찬양하는 부분입니다. ? 두 번째 부분은 이 모든 일의 비교할 데가 없는 특성을 강조하며 그리고 ? 세 번째 부분은 구원이 전혀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힙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원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영광, 바로 그러하신 분이기 때문에 마땅히 경배를 받아야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①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란 말씀은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와 부요함이 깊다는 의미”입니다. ? “부요함”이라는 용어는 “은혜”와 “긍휼” 사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무한하게 깊은 곳으로부터 무한하게 높은 곳까지 두루 바라보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생각 할 수 있는 유일하고 최상의 방법은 바로 “깊음”이라는 단어뿐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언제나 최상의 언어로 표현을 해야 하는데, 그러나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언어라 할지라도 그분의 영광을 온전히 표현 할 수는 없습니다.


②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부요함입니다. ? 부요는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 은혜란 분수에 넘치는 호의를 말합니다. ? 은혜란 형벌, 징계, 영원한 저주와 고통 밖에 받지 못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의미합니다. ? 따라서 이 모든 축복들로 이끌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③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세 가지를 나타내는 두 번째 용어는 “지혜”입니다. ? 지혜는 어떤 상황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 사람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만일 지혜가 부족하다면 그 지식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하나님에게 죄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셔야 한다는 열망을 일으키시고,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로 말미암습니다. ?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모든 구원의 계획을 고안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④ 그 다음에 지식이 나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식의 부요함이여!” ?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전지 하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어날 수 있는 일들과 모든 가능성을 예비한 구원 계획을 세우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그 사실에 대하여 감사드려야 합니다. ?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으로 인해 모든 면에서 완전하여 하나님의 계획은 틀어질 수 없습니다. ?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자들인 우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하게 실행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2. 하나님의 판단과 길


이 송영을 네 개의 주요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하였는데,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의 깊이를 강조하는 첫 번째 단락을 살펴보았고, 이제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두 번째 단락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계획과 구원에 대한 완전한 불가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말로 이 사실을 제시합니다.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 말은 하나님의 깊음과 심오함의 범주를 나타내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측량치 못하다.”라는 말은 “헤아릴 수 없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으로서는 전혀 헤아릴 수 없고 측량치 못할 것을 말합니다.


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의 지혜나 지식으로 토론이나 논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혜와 지식에 한계가 있고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는 무한하기 때문에 도저히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어지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알게 되는 것입니다.


② 육의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가 없으나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때가 이르러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③ 신약 성경에서 비추어지는 우리 주님의 설교 모습은 논의나 토론을 통해서 진리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말씀을 강해하셔서 일방적으로 선포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④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 세상에서 아무리 더럽고 추하고, 혹은 강퍅하게 살아왔던 사람일 지라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며, 그 복음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 우리는 그들이 언제 어느 때에 그 복음을 받아들일지 모릅니다. ? 또한 그들이 영원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 그렇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판단과 길이 깊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목적은 당연히 사람에게 의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람은 이 사실을 아는데 매우 우둔하고 또한 이 사실을 인정함에 있어서는 더욱 우둔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그리고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실이 자각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① 사도는 성경을 인용할 때에 70인역을 사용하지만 여기서 욥기 41:11의 말씀을 인용할 때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히브리 성경을 직접 번역했습니다. 이것이 원문의 정확한 번역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성경의 영감에 대한 또 하나의 논증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② 이 두 인용문이 사실을 말할 뿐만 아니라 신령한 풍자와 신령한 비웃음도 말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 우리는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 성경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라고 말합니다. 감히 “내가 주의 마음을 안다.”고 말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우리가 이 말씀을 겸손하게 읽어야 합니다. ? 우리는 “부요함의 깊음”, “지혜의 깊음”, “지식의 깊음”에 대하여 살펴보았데,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라는 말씀 속에 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③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 즉 영원불멸하시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다가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오직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습니다. ? 또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지합니다. ?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 하나님의 길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 인간은 자신의 우주를 질서 있게 한답시고 바쁘게 노력하고 있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 실행되고 있고 마침내 완성될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위대한 계획과 목적을 인간이 모른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합니다.


④ “아멘”의 의미는 ? 자신이 아무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 우리가 지금 우리가 된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우리가 변명을 그치고 핑계를 그치는 것,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정당화하는 일을 그치는 것을 나타냅니다. ?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반항을 그만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 나는 전무이고 하나님께서는 전부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단지 미천한 죄인일 뿐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 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과 긍휼에 빚지고 있으므로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나의 입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 이제 나는 기꺼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나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생명을 바쳐서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롬12:1-2절

 

 

 

 

12장 1~2절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 성경적 성화의 특징들


이제 우리는 12장 처음 두 구절을 대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지배하는 위대한 원리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① 바울은 형제들에게 명령을 하지 않고 “내가 너희에게 간절히 간청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신약 성경의 특징입니다. ? 모세는 명령을 했지만, 사도는 권합니다. ? 교회를 주장하거나, 교회에 명령하거나, 교회에 억제를 가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②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도록 설득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우리는 행실과 행동과 품행을 크게 강조하는 것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것은 동기의 문제인데, 그리스도인이 기계적으로 순종한다고 해서 그것이 선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양식을 따르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라고 하기 때문에 한다는 식으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 지성적인 이유 없이 행동하지 말아야 하는데, 어째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어떤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의 행동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기계적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③ 칭의가 뜻하는 바는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실패를 당신의 아들에게 짊어지우시고 우리의 죄 때문에 그 아들에게 벌을 내리셨다는 뜻입니다. ? 그 의에 비추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롭고 값없이 용서하시며, 우리를 당신 자신과 화해시키신 것입니다.  ?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 ? 그러므로 사람들이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교리를 이해하지 않는 한 결단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④ 우리는 아담 안에 있었고, 아담 안에서 실패하였으나 우리가 아담 안에 있었던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습니다. ?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우리의 마음에 두셨습니다.(롬8:14) ?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거듭났으며, 새로운 성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들 속에 계셔서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고 게십니다. ?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선한 삶을 영위하고 싶어 하며 바로 그러한 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행실은 항상 우리의 교리에서 영위됩니다. ? 그들은 복음에 합당하게(걸맞게) 생활을 합니다.(빌1:27) ? 그들의 행실은 어째서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구원의 목적에 맞는 삶을 살고자 노력합니다. ?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필연적으로 교리에 비추어 항상 존재하는데, 아는 지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데 까지 나아갑니다. ?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려고 노력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영광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⑥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화해만 하거나 죄의 용서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거듭났습니다.” ?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 또 새로운 피조물이고, 새로운 관망이 우리 속에 있으며,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습니다. ? 이것이 행실과 품행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⑦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동기는 ? 첫 번째 동기는 지성적인 것입니다. 그 삶은 이지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단순히 자기들의 느낌과 충동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이해로 통제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고 또한 자기들이 그에 합당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므로”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 두 번째 동기는 마음에 호소하는 문제입니다. 복음의 호소는 단순히 지성만을 향하지 않고 항상 정서들을 수반합니다. 시편 116:12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 시편130:3~4에서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로 인식하고 감사를 표시하고자 합니다. ? 우리가 이 위대한 동기를 실행해야 할 때 인식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 전체, 우리의 몸과 영혼과 혼을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⑧ 롬11장의 “드리다”라는 말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처분에 남김없이 내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 우리는 자원하는 심령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넘겨드리는 것입니다. ? 왜냐하면 우리를 향해 행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서 최상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2. 살아 있고 거룩한 제사들


우리는 “너희 몸을 드리라”에 나오는 이 위대한 말 “드리다”란 단어를 전에 살펴보았는데, 이 말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때에 사용되는 전문적인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노예로서 드리라는 것입니다.


① 바울은 우리의 “”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육체적인 틀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큰 싸움을 하는데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함으로 우리에게 그처럼 자비하셨던 하나님의 열망을 헤아리는 이 열심을 내도록 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몸을 드려야 합니까? ? 그것은 우리의 이지뿐만이 아니라, 전인이 수반되어 몸(육체적인 형질)도 구원받아야 하는데, 몸의 구속이 최종적인 구원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아담의 타락은 영, 혼, 몸의 전체적인 타락) ? 우리 형제의 각 지체들의 상호 관계나 연합성을 우리가 알아야 하기 때문인데, 몸은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멸시하거나 죽으면 썩어질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 몸은 우리의 영혼이 행동하는 도구이기 때문인데,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영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영혼은 전체의 인격상 우리 각자의 존재하는 몸, 육체적인 체질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며, 몸이 없이 영혼만 있을 수 없고 영혼 없이 몸만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 몸이 결국 유혹과 죄의 주요한 원천 중의 하나이기 때문인데, 만일 우리가 몸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죄악 가운데 거하게 된다면 그 사람의 영혼이 고통을 받게 되며, 죄는 몸의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모든 거듭난 사람들의 몸을 장악하려고 위협하므로 우리의 몸이 죄와의 싸움의 가장 큰 전쟁의 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 물론 이것은 타락의 결과인데, 구속받은 사람들 안에 있는 죄의 가장 중요한 좌소가 몸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죄로 우리의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않아야 합니다.(롬6:12; 7:5; 8:12~12)


② 우리가 거듭나 구속함을 받은 지금에도 육체와 마음의 소욕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엡2:1~2; 민33:55) 그래서 사도는 여기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함으로 그것에 대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엡2:3; 약3:5~6; 벧전2:11) ? 내 몸을 산제사로 드려야 하는 이유는 나의 존재 전체, 내 몸의 모든 지체를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고전6:20) ? 우리는 영혼은 물론이고 몸으로도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③ 몸을 제사로 드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끊어서 자신의 죽은 몸을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 그냥 항상 앉아만 있는 생명이 없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 우리는 항상 살아 있어야 하는데 우리 주님 자신이 친히 산돌인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이 성전 안에서 산돌들입니다. ? 주님은 하나의 머릿돌이신데,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 우리는 몸을 매일같이 시간 시간마다 계속 자기의 살아 있는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죽은 짐승과 산 사람 사이의 차이입니다. ? 우리는 몸을 위해서 살지 않으며, 몸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 그렇다고 몸을 함부로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진 성령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자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자이며,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니기 때문에 살아있는 행동으로서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④ “거룩한”이란 말은 “구별하다”는 뜻을 가지며 “흠이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 몸을 부단히 흠 없고 점 없이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는 자유로운 상태로 하나님께 몸을 드려야 합니다. ? 자신의 몸을 매일 같이 드릴 때 거기에 달콤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날 정도의 조건으로 몸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 올려질 때 하나님께서 드리는 제물을 받으시기에 매우 만족해하시는 그러한 조건을 항상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이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서만 사용합니다.


⑤ 본문에서 사용된 “예배”라는 말씀은 빌립보서 3:3의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는 말씀에서 사용한 “봉사하며”라고 번역된 말씀과 동일한 헬라어로서 예배와 봉사는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어들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행위로서 내 삶 전체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조 : 주제 설교 中 예배의 목적, 예배의 방법]

 

 

 

 

3.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세상 정신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주장하는 원리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제 우리는 “이 세상”의 통제를 받거나, 그 세상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① 신약 성경에서 “세상”이란 말을 통해서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 가장 우선적으로는 하나님과 무관하게 생각되거나 조직되거나 영위되는 삶으로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도 않고 하나님께 통제를 받거나 지배를 당하지 않는 삶을 나타내기 위해 쓰입니다. ? 세상이라는 말은 타락의 결과로 마귀에 의해서 주도되는 삶과 행동의 방식을 말합니다.(고후4:3~4) ? “육체”라는 용어에 함축되어 있는데, 이 세상적인 사고방식과 세상적인 유의 삶을 나타내는 말로 쓰입니다. 세상은 육체를 따르며 사망에 이르게 하며 영의 생각은 성령을 따라 행하고 생명과 평안이 됩니다.


② 그들에게 그리스도인다운 행실, 즉 기독교적 행실을 요구할 수가 없는데, 그것은 마귀와 그 세력들이 이 세상의 삶인 정치, 예술, 쾌락과 같은 것들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엡2:2; 6:12)


③ 세상의 생각은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2:15~16)


④ 세상이 기독교적인 행실을 할 수 없듯이, 우리는 세상의 사고방식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습니다. ?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이기 때문이며, 우리는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 그리고 우리의 사고와 관념, 우리의 실제, 우리의 모든 것들이 위로부터 주어진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속에서만 가지는 계시의 통제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4. 이 세상을 본받지 않음


교회가 세상의 사고방식을 기독교적으로 만들 수도 없지만, 이 세상의 정신에 의해서 주도 되어서도 안 됩니다. ? 그러므로 교회가 신학에 대한 사고방식, 복음 전도와 그 교회의 윤리에 대한 사고방식을 세상의 정신이나 세상의 관점에 따라서 나오도록 허락해서 하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것입니다. ? 로마 교회가 갈릴레오를 대적한 태도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경만으로 자기들의 사고방식을 결정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조합시킨 관점에서 사고방식을 결정함으로서, 천문학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을 반대한 것입니다. ? 새로운 천문학이 로마교회가 우주에 관해서 항상 가르쳐 왔던 것과 합치 되지 않기 때문에 그 새로운 천문학을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 우리는 항상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의 지배를 받아서, 만일 성경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우리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견해이며, 우리는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① 세상의 사고방식에 복종하지는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등하게 새로운 것은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전통주의자들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한 전통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전통주의를 조심해야 하는데, 우리 주님이 그들을 대하셨던 반응들에서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 그리고 우리 자신의 선입관이나 전통에 조정되지 말아야 합니다. ? 성경적인 사고방식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금방 우리 자신은 하나님께서 복잡하고 어려운 시대에서 행하고 계시는 어떤 새로운 일을 거부하는 데로 빠져들게 됩니다. ? 우리는 두려움의 정신의 지배를 받지 말아야 하는데, 자기 자신이 언제나 옳아야 한다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면 자신을 위험한 입장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 우리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상태 그대로로 다루되 모든 방편을 다 동원하여서 주님을 아는 지식을 그들에게 인식시키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 변화를 위해서 변화를 추구하지 말아야 함은 그것이 세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변화가 다 그릇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행사를 비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에는 결함이 있다고 생각되더라도 하나님께서 높이시려고 준비하신 것을 비평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② 우리는 자신의 심령을 주시함으로서 세상적인 방식들을 거절하는 일에 매우 분명한 태도를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된 정신을 발전시켜 나가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③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는 말씀을 오해하여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 세상을 본받지 않을 유일한 방식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과격한 반응입니다.(은둔주의 뒤에는 심각한 기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 은혜 아래 있는 것보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의 원칙만을 생각하고 그 정신을 생각하지 못함으로 어떤 법칙이나 규례들을 좋아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러한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 직접 행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조장하거나 그것을 통해 어떠한 이득을 취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어떠한 인간 전통이나 선입관에 의한 규례를 세워 놓는 것은 성경적인 사고방식을 멈추게 합니다.


④  한편 이러한 권면을 전혀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인데, 그것은 무 율법주의(도덕 폐기론)의 위험입니다. ? 세상을 본받으면서도 복음주의에 관심을 가지는 척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인위적인 어떤 행위들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것이 죄악적인 것으로 분명하게 판명이 났으면,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조차 하지 말고, 거부해야 합니다.? 자신 속에 세상과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어떤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세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행에 지배를 받지 말아야 하는데, 세상의 유행과 외향과 허식만큼 세상을 보다 더 우습게 보이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극단을 피해야 하며 심지어 세상을 따르지 않는 정신에 있어서도 과격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과시하거나 어떤 분야에서 두드러진 부분을 뽐내지 말아야 합니다. ? 만일 우리 자신이 세대를 본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도록 사람들이 알도록 과시하고 있다면, 그것 또한 사실상 교묘한 방식으로 세대를 본받고 있는 것입니다.


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합니다.(빌1:27) ?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괴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선보다 해를 더 끼치게 됩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절제하는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 그들은 우리 복되신 주님 자신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면서 행하실 때 아무도 몰라보게 행하셨습니다.

 

 

 

 

5.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


이 두 구절에서 사도는 많은 방면에서 신약 성경 어디서든지 성화에 대해 가르치는 바를 가장 주목할 만하게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성화의 문제는 신약에서 하나의 위대한 주제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 성도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이러한 유의 삶을 살라고 촉구하면서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러 동기들과 이유들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때문에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말씀에서 “변화를 받는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 마태복음 17:1~2의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라는 말씀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서 “변형되사”라고 한 말은 본문의 “변화 받아”라는 말과 정확히 같은 말이며, 같은 개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변화산상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셨고, 그러한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당신의 내면적인 본질과 존재에 대한 어떤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 고린도후서 3:18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말씀에서도 정확히 같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 이 말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계속 변화되어나가야 한다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영광에 속한 무엇이 우리 속에서 나타나야하며, 사람들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우리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②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이미 변화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의 중심과 사고방식에 따라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부자연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 우리가 가면을 벗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전 행실을 단순하게 수정하거나 개선하는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을 더 이상하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가 거듭났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제 그 마음과 사고방식과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이해의 영역에서 생각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은 삶의 어떤 특별한 난제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총체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행실을 고치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성품의 변화를 요구하셨습니다. ? 다른 말로 한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행실은 마지막 산물이지 첫 번째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품의 변화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어떠한 사람인지 인식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③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을 변화를 받아” 이 권면은 먼저 어떤 특별한 난제들을 거론하지 말고 이 일에 대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애를 쓰거나, 그 문제를 해결 지으려고 애를 씀으로 자신의 삶을 여러 조각으로 나눠서 다루는 식으로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우리의 사고방식을 먼저 바르게 하고 그 전체 관점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 언제나 전체로부터 시작한 다음에 그 입장에서 부분들을 맞추어 나가라는 말입니다.


④ “다시 새롭게”라고 한다는 것은 ? 우리가 한때 지금은 더 이상 가지지 않은 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 우리가 그 참된 마음을 상실했다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무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그러니 상실했던 그 마음을 되찾는 것이 필요하고, 상실된 그 조건이 회복될 필요가 있습니다. ? 마음을 다시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다는 것은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 다소 사람 사울은 명석한 두뇌를 가진 매우 뛰어난 지성인이었지만, 심령이 변화 될 필요가 있었듯이, 세상에는 명석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그것을 수완으로 하여 무가치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두뇌는 하나의 수단이며, 기능의 국면에서 도구에 불과합니다. ? 한 사람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음의 정신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열쇠가 되는 요점은 바로 그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⑤ 사람의 행실을 다룰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요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거듭남입니다. ? 그래서 기독교의 이름으로 기독교 교훈을 세상의 문제에 적용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 기독교는 항상 내면적인 상태를 문제 삼습니다. ? 그것은 심령의 변화, 내면적 존재의 발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 사과나 복숭아의 열매들의 모형과 실제 과일의 차이는 나무의 내면적인 생명으로부터 왔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입니다. ?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세상에서 가장 도덕적인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단순히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생명과 상관이 없는 모형과 생명으로부터 나온 실체라는 본질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6. 영원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이제 우리가 가진 새로운 주의에 비추어서 숙고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행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소극적이거나, 작거나, 어떤 두려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일 그런 인상을 끼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매우 큰 누를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독특하여 우리에게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생각하고 그에 합당한 존재가 되라고 하며, 우리가 어떠한 사람임을 인식하여 우리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라고 합니다. 그것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① 바울은 “너희는 거듭났으니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말하는데 이 말씀은 실제로 어떤 상태를 뜻하는 것인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 우리는 그저 우리 체험이나 우리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활동하심에만 내맡긴 상태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성령께서는 우리를 돕고 가르치셔서 우리에게 제시된 진리와 친숙하게 합니다. ?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안내 하는 바에 따라 이 가르침을 함께 이지와 이해력을 함께 사용하면서 노력합니다. ? 우리가 진리에 익숙하여 져서 그것을 알았고, 또한 포착하고, 이해했으니 이제 그것을 부단히 적용해 나갑니다. ? 우리 모두는 습관의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방향으로 나가는 일에 너무나 익숙하여 있고, 거듭났다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 우리의 마음이 옛날에 자신이 걸었던 그 길로 미끄러져 돌아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추스르고 다른 방향으로 그 마음의 생각을 돌려야 합니다.


② 우리는 이제 다른 사람을 볼 때 새로운 방식으로 보아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나기는 했지만 사람들에 대해서 늘 하던 방식대로 반응을 나타내는 경우가 흔합니다. ? 그 말은 다른 사람들이 행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옛 방식대로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 예를 들어 우리는 그 사람들을 아주 어려운 자들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 그들이 있는 그 모습대로 보아야 합니다. ?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면 사단의 노예들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에 그들을 보고 안됐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 우리 주님께서도 수많은 군중들을 둘러보시면서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함”을 보시고, 연민으로 가득 찼습니다.(마9:36) ? 우리가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보아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더 이상 본능적으로 대꾸하지 말아야 합니다.


③ 새로운 사고방식의 통제를 받는 한 매우 예리한 방식으로 허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인데, 시간은 너무 짧고, 영원한 세계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미 자신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계신 그대로 뵈올 때에 우리 마음의 주도적 느낌이 부끄럼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이 되겠습니까?


④ 우리 주님께서 정결하시니 나 자신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7. 그리스도인의 행동 목표


이제 2절의 마지막 어구인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숙고할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① 기독교 윤리의 목표는 내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전체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키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구원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걸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② 여기서 사도는 우리를 그 수준을 높여, 이 위대한 가르침의 본질적인 특성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 성경은 바로 그것에 관해서 존재하는 책인데, 성경은 인간 존재에 관한 다른 관점을 우리가 가져야 함을 일러 주고 있습니다. ? 그런데 우리의 모든 고통거리는 그릇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사람은 지상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로서 존재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동반자로 존재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을 위해서 만드신 것은 사람이 계속 하나님과 교통하고 교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③ 우리 주님께서는 첫째 되고 제일가는 계명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30~31)라고 요약해 주셨습니다. ? 우리 주님께서는 그 표준을 아주 크게 높이셨습니다. ? 그 말씀은 사실상 “너희가 삶을 영위해야 하는 마땅한 방식은 너의 존재 전체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되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되도록 살아야 한다.”라는 말씀입니다. ? 또 베드로 전서 1:16에서는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실천적인 방식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에 대한 개념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가 마땅히 거룩해야 된다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약1:25)을 단순한 규칙이나 금기사항이나 계약조건으로 격하시켜서는 안 됩니다.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그렇게 하신 것은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벧전2:9)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영위하는 방식입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 우리 주님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고 하셨습니다.


④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지옥에 가지 않는 것도, 술 취하지 않는 것도, 음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⑤ “분별하다.”라는 말의 내용은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는 것에 대해서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가 그렇게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의 역사와 합력할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엡5:8,10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정확히 같은 개념입니다. ? 빌1:9~10에서도 역시 같은 단어를 만나게 되는데,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입니다. ? 그러므로 사도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관한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이 점은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 우리 구원의 결과로 마음이 새롭게 되어 우리가 해낼 수 있게 된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⑥ 사람들의 궁극적인 표준은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거룩이어야 합니다. ?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며, 그 마음을 새롭게 하는 과정에 용기를 가지고 모든 일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전체 태도가 바뀌게 됩니다. ? 하나님의 뜻이 선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정말 그 뜻이 선한 뜻임을 검증하게 될 것입니다. ? “우리가 알거니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인뿐입니다.


⑦ 우리가 고통에 빠져 있거나 환난 당한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환난을 당하나 그 원인을 알지 못하고,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소망이 없는 병이 들어 아팠어도, 거기에다 다른 수많은 난제들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 우리는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이 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하나님께 의지하여 바라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고후 1:9~10) ? 우리가 죽음의 문턱에 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여전히 선합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을 언제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정말 선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압니다. ? 우리는 항상 사실상 “내가 환난을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 롬12:3-6절

 

 

 


12장 3~6절 :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1.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들(3~5)


여기서 사도는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은사를 행사하는 남녀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어떤 방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모이는 사람들이며, 바로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들이 함께 모이는 것은 그들이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사도는 교회의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은사의 표준 문제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그것은 아주 큰 골칫거리였음에 틀림없을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나 또 다른 사도들이 편지 쓰기를 그저 좋아하는 문학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그러기에 너무나 바빴지만 그들이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서신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의 지체들의 삶의 현장 속에서 떠오르는 여러 가지 조건들 때문에 편지를 써야 했으며, 성령의 은사의 나타남의 주제를 여러 경우에서 다루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많은 국면에서 고린도전서의 위대한 주제입니다. 이 문제는 로마에 있는 교회나 다른 여러 교회들 속에서도 일어났습니다.


① 진리는 하나입니다. 교회가 고린도에 있든지, 로마에 있든지, 기독교는 하나이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났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성이나 그들의 배경이나 그들의 문화가 어떠하다 할지라도 같은 종류의 난제가 항상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② 은사들이 항상 다툼을 일으키고 분쟁을 가져오고 있음은 자기주장이나, 자기의 유익을 위해 도용함으로 인한 것입니다. ? 하나님의 신령한 은사들이 교회의 유익을 망가지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처럼 우리의 본질적 죄악성을 입증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자기주장을 해서는 안 될 것과, 자신의 유익을 위해 교회를 이용해서는 안 될 것을 알게 됩니다. ? 은사를 받은자는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는 겸손으로 그 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 은사가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의 어떤 자격을 나타내 주는 것이 아님을 항상 명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에 그 부작용은 교회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는 것은 물론 자신 또한 큰 징계가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③ 세상의 철학은 자기 자신을 믿고 신뢰하라고 하지만, 복음은 언제나 겸손하라고 요구하며, 심지어 자기희생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 우리가 겸손하지 못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을 끼치기 보다는 해로움을 더 끼칠 수가 있습니다. ? 어떠한 지식도, 능력도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두 은혜와 믿음에 속해 있습니다. ? 그것은 그들이 결코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니(엡2:8~9),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을 결코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④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로서 존재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 그리고 맡은 자리에서 자신이 받은 은사를 가지고 자기의 역량을 다하여 몸을 조화롭게 해야 합니다. ? 교회의 지체는 따로 떨어져 나와서 독립된 하나의 개체를 허용하지 않으며, 교회를 떠나서는 생명이 없고, 교회를 떠나서 행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⑤ 첫 번째 원리로서 모든 것이 은혜에 속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믿음의 분량”이란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대로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는 것인데, 그것은 ?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삶에 들어오도록 인도한 믿음이 아닙니다. ?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믿음은 모든 사람 안에서 동일하지만 본문의 “믿음의 분량”은 그것과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 그것은 고전 12:9에서 “믿음의 은사”와도 구별이 되는데, 은사로 주어진 믿음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인 반면, “믿음의 분량”은 모든 개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바울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라는 말씀은 우리 각자의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어떤 특별한 은사가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성령님께서는 그 믿음의 분량에 따라 각 사람에게 은사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⑥ 이 말씀은 엡 4:7의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는 표현처럼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천성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 물론 우리는 천성적인 선물들을 받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성령을 받을 때에 우리의 천성적인 재능들은 더 예리해지고 고양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전에 받지 못했던 새로운 신령한 선물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지는 유의 선물을 말합니다. ? 우리는 믿음으로 그러한 유의 은사들을 개발할 수 있고 증폭시킬 수 있으나 그것을 창출하거나 산출해 내지 못합니다. ? 우리가 받은 은사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정해 주신 분량대로 이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사도의 가르침의 전체 요점입니다.


⑦ 은사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니 우리가 결코 자랑할 것이 전혀 아닙니다. ? 우리는 어떤 은사들의 중요성을 과대평가 하지 말아야 합니다. ? 그러나 은사를 작다고 하여 결코 낮게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 과대평가하여 거만해지는 것과 낮게 과소평가하여 무시하는 것 모두가 동등하게 나쁩니다. ? 크고 작은 은사들이 모두 교회 안에서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 은사가 교회 안에 있다는 그 자체가 참으로 놀라운 특권이며, 그 가운데 우리가 어떤 은사든지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특권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 진정으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눈 속에서 바라보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여기에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은사를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나누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⑧ 두 번째 원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 몸은 유기적인 연합체로서 하나입니다. 그것이 하나가 되게 한 것은 성령님입니다. ? 그 몸은 여러 가지 기능과 능력과 기질로 다양성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다른 지체들은 다른 역할들을 감당하게 됩니다. ? 우리는 모두 같은 일을 하지 않고 기능에 따라 자기의 고유 영역에서 각기 다른 일들을 해 나갑니다. ? 그러나 몸의 어떤 기능들도 각기 독립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 각 지체는 항상 몸의 전체로서 작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 각 지체, 개개 지체의 역할, 그 몸의 각 개개 부분이 항상 머리의 뜻과 조정에 복종하고 굴복해야 합니다. ? 한 지체의 실패는 전체 몸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몸의 육체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 결과적으로 몸의 어떤 한 지체이든지 고통을 받게 되면 전체 몸이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교회와 교회의 지체 의식(4~5)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는데, 교회는 인간적인 제도가 아니라, 신령한 사회, 초자연적인 사회, 즉 영적인 단체를 말합니다.


① 그리스도 교회의 지체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 있는 관계를 가진 사람들로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통제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거하시고 그의 생명과 충만이 교회 안에 있으며, 교회 안에서 교회로 말미암아 역사하고 계십니다. ? 교회는 여러 부분과 많은 기능들이 있지만 몸은 하나밖에 없는데, 한 머리에 한 몸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게 될 때에 교회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 한 몸을 이루게 되는데, 그것은 새로운 탄생으로서 시작되며, 새 생명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일을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② 이렇게 유기적인 하나의 몸을 이룬 교회의 제일 되는 임무는 복음을 전하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리는 것입니다. 만일 선구자들이 이 좋은 소식의 전령 자들이라면 교회 전체도 그러한 것입니다. ? 그러나 교회를 통해서 교회로 말미암아 우리가 태어났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 우리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활동에 대하여는 교회가 하지만 우리를 낳는 것은 교회의 행동 자체가 아닙니다. ? 그 일은 하나님의 결정 방식에 따라서 된 것입니다.


③ 몸의 특성은 여러 기관들과 부분들이 항상 일하고 있으며 전체 몸으로 하여금 그 기능들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 모든 것은 머리의 통제를 받아 머리로부터 출발하게 되므로 교회의 활동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에 속합니다. ? 참된 부흥은 조직이나 활동들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성령의 작용, 교회 전체의 생명 있는 활동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그 마음이 충격을 받고 뒤집어지는 일들로 인하여 이루어집니다.


④ 자기의 영적 생명에 대하여 과도한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도 가지지 않고 행동하는 행위나, 또 자기의 영적 생명에 대해서 과도하게 염려함으로 그것에 너무 심혈을 기울인 나머지 다른 것을 위해서는 시간을 전혀 쓰지 못하는 두 극단은 영적인 우울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항상 준비되어 있는지 영적으로 점검하고, 영적으로 바른 위치에 있는지를 늘 살펴서 즉각 순종할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주님께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에 즉각 반응하고 그렇게 민감한 모습을 보이기를 원한다면, 머리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내려오는 살아 있는 활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⑤ 교회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데, 자기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모든 교회 활동은 그 머리와 일치되어야 합니다. ? 교회의 생명과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일들 가운데 하나라는 이유는 숫자에 의존하지 않고 성경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부분의 일보다 전체를 더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에 만족해야 합니다. ? 몸 안에서 우리가 활동하는 것을 만족해야 합니다. ? 몸이 우리에게 어떤 기회를 주든지 그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 부분이 머리뿐만 아니라 서로 연관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 그리고 전체의 조화로운 작용 가운데서, 자신의 부분에 만족해야 합니다. ? 자신이 처음부터 자기의 몫을 결정하지 않으며,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습니다. ? 사실 자신이 몸 안에 있는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영적 은사들의 본질(6)


우리는 세상적인 삶의 방식인 자아를 중심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우리 자신과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관계에 비추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들로서 이 눈에 보이는 교회 형태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성공을 보기 위해서 불타는 열심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우리는 그 성공을 위한 매우 간절한 염려를 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섬기되 자신을 드려 섬기고 자신이 그 일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온 힘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저 은혜만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기도하지 않거나, 교회의 생활과 교회의 기능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을 잘못입니다.


②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데, 사도는 사랑을 따라 구하되 신령한 것을 사모하고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합니다.(고전14:1) ? 은사들은 다른 어떤 의미에서 더 낫고 못한 것이 없는데, 전체의 문제를 개인적인 즐거움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말고 교회의 유익과 교회를 세우는 차원에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이 은사를 저 은사보다 더 낫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 더 좋은 은사를 사모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사랑을 따라”구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더 좋은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면서도 언제나 자기에게 주어지는 은사로 만족해야 합니다. ㉮ 모든 은사는 주님의 영광과 그의 찬미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주어진 은사에 만족해야 합니다. ㉯ 한 가지 은사만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지는 모든 은사는 한 가지만일 수 없습니다. ㉰ 신령한 은사를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사람의 권한이 아니라 성령의 특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 속에서 그러한 은사를 산출하려고 어떤 노력을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최선의 일은 “사모하고 간절하게 탐하는 것 뿐”이며, 그 이상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③ 예언은 하나의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예언의 기능과 임무입니다. ? 예언은 자신이 받은 것 이상을 넘어가지 말아야 하며, 뒤로 감추어 있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 그리고 자신의 믿음의 차원에서 옳다고 여기는 것으로 자신을 통제하고 조정해야 합니다. ?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 예언적 발언은 자신이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차서대로 해야 합니다.

 

 

 

 


성경: 롬12:6-8절

 

 


12장 6~8절 :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1. 목회 사역의 다양성


본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우리들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활용하는 문제에 관해서 사도가 전제해 왔던 교훈을 그 자신이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① 우리는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사용하되 온전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교회의 유익을 끼치는 방향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각 사람의 의무입니다.


② 많은 방면에서 그 은사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 예를 들면 일을 요령 있게 처리하는 사람은 행정적인 수완을 발휘해야 하는 일에서 그러한 은사가 필요합니다. ? 자신이 교사나 설교자나 다른 어떤 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 그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 은사를 받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어떤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바로 그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조화롭게 작용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 그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③ 보조원이나 안내인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그 섬김을 통해서 돕는 모든 다른 사람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 그들로 인하여 다른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그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됩니다. ? 만일 그들이 섬김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면 교회를 처음 찾는 사람들에게 설교자의 메시지를 자기들 마음 깊숙이 받아들이기에 매우 어려운 인상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 성령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능히 이 처음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주는 보조원 역할을 하게 하시되 교회 전체 생활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일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④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직접적인 영감이나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책을 읽으라는 권면을 받습니다.(딤전4:14~16) ? 디모데는 “연구하여”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자신을 준비하라는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 교사는 예언의 은사를 가진 어떤 사람과 전적으로 다른 범주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책을 읽는 능력뿐만 아니라 읽는 것을 이해하고 추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 교사는 그런 식으로 얻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은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⑤ 권위(권면)의 은사는 예언이나 가르침과 분명히 다른 은사입니다. ? 가르침은 이지에 호소하고 권면은 마음과 의지를 다룹니다. ? 가르침은 지식을 주고 진리를 제시하는데, 그 다음으로 권면을 통해서 진리를 부각시켜 줍니다. ? 권면할 때 용기를 북돋아 주거나, 책망하거나, 일깨워 주거나, 자극을 주거나, 적용하도록 요청하거나, 기도하도록 요청합니다.


⑥ 다음의 은사는 “구제” 하는 자인데,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 이 일은 개인적인 것으로서 자기들의 풍성한 데서 자기의 것으로 주는 것을 말합니다. ? 구제함에는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마6:1~4) ? “성실함”은 눈이 하나만 있다는 뜻인데 그것은 곧 동기가 순전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형태나 모양으로든지 자신을 강화시키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구제하고, 교회와 동료 지체들의 유익을 위해서 구제해야 합니다.


⑦ 그 다음으로 “다스리는 자”인데, 그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고전12:28) ? 교회에서 어떤 형태로든 다스리거나 주관하는 일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 교회 지체들의 유익들과 영적이고 외적인 유익들을 주관하는 자들입니다. ? 부지런함과 간절함으로 그리고 열심히 해야 합니다.


⑧ “긍휼을 베푸는 자”에서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고난당하며 침체당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도 특별한 은사입니다.


⑨ 이러한 은사들을 받은 사람들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기쁨으로 그 일들을 해내야 할 것입니다.

 

 

 

 

2. 성령의 자유로우신 역사


우리는 본문의 대목을 읽을 때에 우리가 그 대목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해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교회는 항상 그 일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하며, 말씀을 떠나서 언제나 자기 자신을 개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생활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많은 큰 문제들은 교회가 그러한 일을 하기를 망각하였다는 사실에 기인하였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우리가 늘상 해 왔던 익숙해 온 양식을 계속 진행해 나가거나, 우리의 성장 배경이 되어 왔던 것을 계속 아무 생각 없이 답습해 나갈 위험이 항상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잘못된 것인데, 다른 것은 고사하고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비지성적인 일이며 영적이지 못한 일입니다.


① 고전 14:26은 본문과 상응하는 구절들이 있는데, 거기서 우리는 교회가 예배로 모일 때 한 사람이 한 찬송시를 제출하고, 또 다른 사람은 예언하고, 또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일을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읽게 됩니다. ? 또 골3:16에서도 시와 찬미와 노래로 부르며 서로 화답하였다고 말합니다. ? 교회의 예배가 자유롭고 즉흥적인 예배였으며,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이러한 자유로움과 즉흥 요소가 너무 명백하게 드러나서 심지어는 어느 정도의 무질서가 나타나기에 이르렀고, 그래서 사도가 그들에게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말해야 했던 것입니다.(고전14:40) ?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어떠한 한정된 형식에 매이게 되면 무질서할 수 없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통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어떤 교회에서 야기 되었던 무질서에 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의 예배가 자유롭고 즉흥적인 것이었다는 증거가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② 신약과 구약의 가르침은 서로 일치하고 서로 부응하기 때문에, 신약과 구약 성경이 모두 필요로 한데도 불구하고 신약의 경륜과 구약의 경륜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 신약과 구약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시고, 또한 그 둘에 나오는 은혜도 같은 것이고, 구원도 같습니다. ? 구약과 신약 성경 사이에는 동일성과 연속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차이가 있습니다. ? 그러나 그것은 정도의 차이지 종류의 차이는 아닙니다. ? 예를 들자면, “세례 요한”과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 사이의 차이점은 하나님과 가진 관계의 차이나 하나님 앞에서의 입장의 차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례 요한의 이해의 차이입니다. ? 구약의 경륜에 속한 사람들은 명확하게 알지 못하였으나, 그리스도인들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사람”들로 구원의 확신이라는 위대한 정신에 충만한 사람들입니다.(벧전1:8)


③ 구약과 신약의 핵심적인 차이는 필연적으로 또 다른 형태의 예배를 가져오게 됩니다. ? 구약의 예배 형식은 세밀한 부분까지도 형식을 갖추어야 했고, 정확하게 모든 것이 처방으로 주어진 상태에서 드려져야 하는 외면적인 예배였습니다. ? 신약은 내면적인 예배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유롭고 비형식적인 것입니다. ? 우리 주님께서는 배에 앉으시거나 산기슭에 앉으셔서 설교하시기 시작하셨으며, 집에서도, 어느 곳에서나 설교하셨습니다. ? 외적인 영역에서 살아 있고 생명이 있는 신령한 예배 형태로 옮겨진 것을 발견합니다. ?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요, 제사장들로 이루어진 나라의 백성들입니다.”(벧전2:9)


④ 신약의 영적인 예배는 그 예배가 점잖으냐. 점잖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 속에 성령의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입니다. ? 예배 가운데 성령께서 갑자기 끼어드실 기회가 있어야 합니다. ? 성령의 자유로움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 그리스도 교회 안에 영성이 낮은 조건이 처해 있으면, 언제나 형식을 사용하는 대로 이어져, 예배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고정된 예배 형식의 형태로 나아가는 것을 지난 역사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⑤ 사람이 복음적이 되면 될 수록 자유로움을 더 원합니다. ? 고정된 기도의 형식에서 탈피하여 자유롭게 기도합니다. ? 심령 전체를 자유롭게 하여 자신을 표현합니다. ? 그것은 찬송을 부르는 것에도 해당 됩니다. ? 성령이 역사하시고 그 감동의 물결을 일으키시는 위대한 모든 시대에는 항상 복음적인 찬송시나 곡조들이 작곡되거나 작시되는 일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 노래를 부르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성령의 참된 역사가 있을 때 나타나는 위대한 특징들 중 하나였습니다. ? 우리는 자유롭게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우리의 눈을 밝혀 달라고 구하며 우리를 인도하고 안내해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 우리의 믿음이나 교회 정치뿐만 아니라 예배 형태 전체를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해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 각자에게 복을 주시고, 모인 우리 전체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성경: 롬12:9-21절

 

 

 

 

 12장 9~21절 :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이웃(9~21)


기독교는 하나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먼저 “방식”의 사람들로 불렸는데, 그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생각했으며, 특별한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였고, 또한 특별한 방식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교리로부터 시작하여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약2:20)


①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바로 이 대목이 제일 대목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대목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입니다. ?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인 삶 전체를 아름답고 완벽하게 요약하고 있으며, 나아가 율법의 전체를 함축합니다. ? 만일 우리가 두 원리에 대해서 바르기만 하다면 우리는 결코 그릇될 수 없습니다. ?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 위선적인 모습을 취해서는 안 되며, 정직해야 합니다. ? 그것은 존재의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단순히 세련됨이나 상냥함 정도가 아니며, 감상적이거나 약한 것이 아닙니다. ?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계명이 즐거움이 되고(시119:143), 율법을 사랑하게 되어 율법을 지키는 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② 그리스도인의 삶의 동기는 자신을 즐겁게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그 사랑은 가식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평판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된 영역 속에 있어야 하는데, 어떤 인상을 남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그러한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 사랑을 창조합니다. ? 우리는 진리의 빛에 비추어서 우리의 사랑을 점검하여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다면 그 사랑은 가식이 없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를 통해서 행하신 일의 차원에서 그 모든 것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그 영역의 높이까지 이를 수 있도록 고양시킴으로 우리 악을 내려다보고 그것을 미워하고 혐오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명들을 상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형벌을 받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상기하고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해서 그처럼 많은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함으로서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시해야 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신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 이 세상에서 완전한 승화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나 바로 그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에게 권면과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2. 형제 사랑과 자아(9~11)


10절에서 사도는 “형제 사랑으로 피차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하고”라고 말합니다. 이 번역을 다르게 한다면 “피차 형제 사랑 가운데서 뜨겁게 사랑하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① “우애하고”라는 말씀은 마치 그들이 혈육으로 형제 된 자들처럼 그 형제들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대면하라는 뜻입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듭난 사람이며, 새로운 성품을 가지고 새 생명으로 시작한 생활에 들어왔으며,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역시 그것이 해당됩니다. ? 그러므로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권속입니다. ? 우리 주님은 그 점에 대하여 막10:29~30에서 언급하시고 계시는데, 그 말씀은 “너희가 형제들과 자매들과 아버지들과 어머니들과 남편들과 아내들을 얻게 될 것을 생각하라. 너희가 잃은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너희의 것이 되었다. 너희가 전에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게 될 것이다.” ? 그것은 우리가 놀라운 하나님의 권속이 되어 들어왔고, 이제 그 하나님의 가정 안에서 새로운 관계들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② 우리는 동일한 몸의 지체들일뿐만 아니라 같은 가족의 일원들이기 때문에 어떤 때에나, 어떤 상황에서, 어떤 형제자매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게 되면, 그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유의 일을 행하고 있는 우리의 혈연의 친척들을 대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이 조화롭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③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친척에 대해서 느끼는 것보다 동료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더 가까운 친근감을 느껴야 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있는 일입니다. 새로운 본성이 우리 속에 있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같은 하나님의 권속이기 때문에 우리가 시간 세계에 있는 동안에만 그 관계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그 관계가 지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④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여”라는 말씀은 존경심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먼저 하라는 뜻으로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 마땅히 드려야 하는 존경심을 항상 먼저 나타내라는 뜻입니다.

 

 

 

 

3. 게으름의 원인들(11)


본문에서 사도는 우리가 가진 소명에 대한 태도, 즉 어떻게 우리가 일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떤 정신으로 일을 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① 게으름의 주요한 원인은 기질적이고 체질적인 경우일 수도 있는데, 태어날 때부터 활력이 넘치고 능동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느리고 무기력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그것은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태어난 것 때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 때로 어떤 특별한 기질이 민족성에 속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 또한 기후에 따라 따스한 기온은 기운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고 차가운 기온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 기후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더 활력이 넘치게 합니다.


② 마귀의 공격에 의해서 나태하고 게으른 그리스도인들을 산출할 수 있는데, 그것을 마귀는 매우 기뻐합니다. ? 마귀는 많은 방면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귀신이 들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 게으름과 일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산출할 수도 있습니다. ? 침울한 정신이나 고통을 야기 시킬 수도 있습니다. ? 좌절감을 통해서 게으름을 산출하기도 하는데, 낙담하게 하여 게으름에 빠지고 일에 온전한 마음을 쏟을 수 없게 합니다.


③ 우리는 자신을 깨우쳐야 합니다. ? 그것은 자신의 본성에 없는 것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일깨울 수 있는데, 그렇게 할 필요가 있고, 이것은 삶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고 큰 교훈중 하나입니다. ? 태생이 힘이 넘치는 사람같이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깨우쳐서 자신답게 역할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 우리의 심령도 연습을 하고 사용할 때 가장 최선의 상태에 있기 마련입니다. ? 기독교는 본성을 배제시키지 않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적 수준에서 출발할 때에, 우리가 그렇게 하게 될 때 자신이 실질적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 우리는 자신의 기질을 바꿀 수 없으며, “열심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있는 그대로 해야 하며,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본성적인 의미에 있어서 심령이 열심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상태에서 열심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④ 사도는 우리에게 “성령 안에서 열심을 품으라.”고 합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무기력하고 나태하고 게으르고 소극적인 마음이 아니라 절제와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 성령은 능력과 힘의 영이십니다. ? 본성적인 능력의 차원에서 우리 자신을 생각하면 안 되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은사를 상기해야 하며,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성적인 기질을 극복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는 위대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4. 우리의 부르심의 소망(11~12)


우리는 우리의 속에 계시는 성령님을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성령을 소멸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심령에 있어서 열심을 품어 나태함에 빠지지 않게 하여야 하며, 또한 그 부지런함으로 “주를 섬겨야” 합니다.


① “주를 섬기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 우리는 값으로 산 노예로서 주인을 섬겨야 할 것을 말합니다. ? 노예는 자신을 위해서 어느 것도 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의 상전을 위하여서 행합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 이 신비로운 몸의 지체들이니 사람이 이 몸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영예로운 일은 있을 수 없고,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하여 그리스도의 위대한 일의 어떤 부분을 함께 나누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 보다 큰 영예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②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를 방해하거나 우리를 주저앉게 만드는 모든 것을 우리로부터 제거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 우리는 언제나 멈추어 서서 우리의 실패 속에 주님도 수반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가 게으르고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사적인 개인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한 몸임을 항상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 또한 우리는 주님의 눈이 항상 우리를 감찰하시고 계심을 상기해야 합니다.

 

 

 

 

5. 인내 어린 견딤(12)


본문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골3:2)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해야” 합니다.(롬5:2) 그리고 두 번째 권면은 “환난 중에 참으며”라는 말씀인데,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① “환난”은 일들이 무겁게 내리누르되 거의 부서뜨릴 정도까지 압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환난과 시련이 여러 방면에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환경들의 결과로 일어날 수도 있고, 시험을 통해서도 오며, 어떤 때는 핍박을 통해서도 옵니다.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시험하려고 보내지는 것입니다. ? 많은 유의 환난이 우리의 심령을 짓눌러 대고, 생각을 압박하고, 마음을 눌러댑니다. ?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우리를 부수어 내고, 납작하게 만들려 하며, 나뒹굴어 낮아지게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정도는 달라도 반드시 시련을 견뎌내야 합니다.


② 우리는 환난을 보고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 그 환난에지지 말아야 합니다. ? 만일 환난과 시련이 나를 넘어지게 내버려 둔다면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족한 것입니다. ? 우리는 결코 불평이나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 시련이 닥쳐오게 되면 붕괴되어 버리는 날씨 좋은 날에만 그리스도인처럼 되지 말아야 합니다.


③ 환난이 닥쳐오고 시련이 오게 되었을 때 참아 견뎌내는 인내심을 가지고 환난 중에 견고하라고 합니다. ? 환난을 당했을 때에 놀라지 말라고 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없는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우리의 복되신 주님이시오 상전이신 구주께 일어난 바로 그 일임을 인식하게 될 때 환난 중에서도 능히 인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주님을 그렇게 대적하였기 때문입니다. ? 환난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가르치도록 해야 합니다. 환난이 오는 순간 우리는 낮아지게 되고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며 자신의 교만과 이기심을 발견합니다. 또 자신 속에 있는 패역한 정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환난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배워야 합니다. ? 환난과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과 거기 하늘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영광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 환난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우리를 유익하게 만들 것이고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기조차 하게 될 것입니다.


④ “환난 중에 참으며”라는 말씀에 이어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권면들의 연관성을 알아야 합니다. ?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다가올 세상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들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상기하도록 해줍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합니다. ? 환난과 소망과 기도는 항상 함께 갑니다. ?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고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하는 것은 기도는 낙심에 대한 오직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입니다.(눅18:1) ? 이 세상은 마귀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으니,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항상 서 있을 오직 유일한 방식은 기도 밖에 없기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고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⑤ 우리가 만약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가 게으르기 때문이며, 영적으로 죽어 있거나, 영적 갈등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영적 무지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 기도는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 기도는 전적으로 영적인 것으로 말을 통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는 것을 뜻합니다.(히4:16) ? 기도는 하나님의 면전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갖는 것이고, 하나님과 가까이 한다는 것입니다.(약4:8) ?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 예를 든다면, 어느 밤중에 어린 아이와 함께 걷고 있고, 그 어린아이가 무서운 마음이 들 때는 평소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아버지가 거기 여전히 자기와 함께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그에게 놀라운 위안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린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기도와 다른 어떤 것을 해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기도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 기도는 하나님께 늘 가까이 하고 싶은 느낌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녀에게 있어서 본능적인 것입니다. ? 참된 기도는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통입니다. ? 우리는 늘 주님과 교제를 유지해야 하며, 할 수 있는 한 자주 놀라운 느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끊임없이 주님께서 여기에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6. 청지기 정신(13)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생활 속에서 슬프게 낙담하게 될 것이고, 금방 고통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경고하셨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대비시키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 개인적인 환난을 대처해 나가는지 그 방식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더 나아가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며, 우리의 모든 동료 성도들도 정확히 같은 조건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인식해야 함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 동료 성도들이 같은 난제를 대처해 나가도록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도와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① “공급하라”는 말씀은 “나눠 주는 것”을 뜻하며, 그 쓸 것이 필요한 성도들과 교제에 들어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 그들의 짐이 자기들의 짐인 것처럼 여기라는 것입니다. ? 그들이 당하는 그 어려운 고초에 함께 참여하고 실제로 그것을 스스로 느끼라는 것입니다. ? 그들이 당한 그 곤란 속에 우리가 참여하여 그들과 동반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② 피는 물보다 진하고 성령은 피보다 진하다고 합니다. ?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들도 함께 고통을 받습니다.(고전12:26) ? 그러므로 고통을 당하는 형제들을 보게 되면 우리도 그 형제와 함께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몸으로서 연계되어 있어서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다른 지체들과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여전히 보유하고 있지만, 궁핍에 처한 형제들이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눠 가질 권한이 있다고 생각해야 하고 그들이 자신에게 속한 것만큼 그 형제자매에게도 소속되어 있다고 느껴야 합니다.


③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들입니다. ? 청지기는 달라는 대로 누구에게나 다 주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 청지기는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평가해야 합니다. ? 또한 계산하고, 그 일에 돈을 쓸 가치가 있는지를 평가하고 나중에 모두 합산해 보아야 합니다. ?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아무런 계산도 하지 않고 다 비워 준다면, 그는 나쁜 청지기입니다. ?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을 죄 가운데 계속 거하도록 도와주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그리고 정말 바른 사람이 왔을 때에는 그 사람에게 줄 것이 없게 됩니다. ? 청지기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임을 알아야 합니다.


④ 우리는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궁핍에 처한 형제들과 동반자가 되고, 교제해야 합니다. ? 그리고 난 다음 외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주님께”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 일을 통해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가 섬기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7. 악한 대접에 대응하는 법(14~15)


하나님과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영광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우리 속에서 보는 바를 통해서 그 영광을 판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칭의, 성화, 영화에 대해서는 학식 있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은 유의 삶을 영위한다면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복음에서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진리들은 너무나 서로 연관되어 있고, 고여 있어서 우리의 위대한 구원이 가르쳐 주는 바를 복정하지 않으면, 그 구원의 은택을 도저히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을 구하고, 체험을 하고 싶어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그 복을 가장 쉽게 얻는 길은 일상에서 실천적 의무를 감당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가장 위대한 복락들을 당신의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복에 관해서 진실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순종의 길을 밟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복락을 향유하도록 유도하는 지름길입니다.


① 가장 훌륭한 형태의 복음 전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일상적인 삶과 직업 생활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수세기에 걸쳐 하나님께서 행하신 방식입니다. 이론적인 기독교는 개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용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②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형태나 모양으로든지 핍박을 받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 세상은 참된 그리스도인만을 핍박합니다. ? 우리가 어떤 핍박도 받지 않는 교회의 지체일 수도 있지만, 만일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로서 속에 새로운 성품을 가지고 있다면 바로 그 새로운 성품 때문에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 그처럼 세상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핍박함으로서 우리에게 큰 공헌을 하며 큰 선을 끼쳐주고 있습니다. ? 우리 주님께서 받으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절대적인 증거가 됩니다.(요15:18~19) ? 그러나 핍박이 항상 같은 식으로 오는 것은 아니며, 매우 교묘한 방식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③ 그러나 우리는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데, 가장 좋은 최고의 방식은 그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구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주하지 않고 그 반대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십사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핍박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와 같이 다루시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입니다. ? 죄와 죄인의 차이를 구분 져서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고, 무지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사람이 영적인 진리에 대해서 소경이고, 그의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방식들을 대적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의 핍박자는 사단의 노예가 되어서 이와 같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사람은 그것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합니다.


③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안 됐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그들의 구원을 소원하게 됩니다. ? 우리 복되신 주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가 우리의 복되신 선생이신 주님의 높이까지 올라가는 것을 지향해야 합니다.

 

 

 

 

8. 같은 마음을 가지라(15~16)


우리는 이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는 권면을 대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떠오르는 문제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과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 중에, 언뜻 보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더 쉬워 보인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을 점검해 보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우는 자들로 함께 우는 것은 다소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다른 사람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에 같은 감정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 예외적인 사람입니다. ? 아무리 악한 사람일 지라도 어떤 사람이 울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떤 모종의 반응을 느낍니다. ? 거의 모든 사람들 안에는 우는 것에 대해서 반응하는 경향을 가진 어떤 것이 있는데, 말하자면 우리도 함께 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 사람이 운 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것을 뜻하며, 그 사람이 낙담의 상태에 빠져있는 것을 말하며, 이렇게 낮아져 있는 사람에 대하여 동정심을 가지는 편은 훨씬 더 단순합니다. ? 상대방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속에서 일어나는 동정의 요소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람을 우리와 경쟁하는 상대에서 제외시키게 됩니다. ? 그리고 우리는 더 나은 입장에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② 어떤 사람이 즐거워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성공이나 행운을 만나게 되었거나, 어떤 좋은 일로 인해 그 사람이 들 떠 있는 느낌을 가지게 되어 매우 즐거워합니다. ? 자아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 상대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이 있습니다. ? 모든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자아, 교만의 문제라는 궁극적인 문제가 있기 마련인데, 기뻐하는 사람 앞에서는 질투와 시기심이 일어납니다. ? 그러므로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은 부자연스럽습니다. ?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큰 난제는 질투심과 시기심의 문제입니다. ?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이 도달 할 수 있는 최고의 덕은 시기심을 배제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 그런데 바울은 동료 그리스도인이 즐거워할 때 적극적으로 함께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웃이 즐거워하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③ 몸은 하나이며, 유기체이기 때문에 몸의 한 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지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됩니다.

 

 

 

 

9. 참된 지혜를 구하라(16)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 생각하고 항상 자신에게 말합니다. 지식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를 뽐내고 자랑하며 스스로 지혜롭게 여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사도의 권면을 지키지 못한 결과로 교회 안에서 그런 일들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생의 자랑이며, 세상정신, 세상적으로 생각하는 육체의 자랑으로서 모든 죄 가운데 가장 큰 지적인 교만의 죄입니다. 그 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가장 큰 은사를 남용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지적인 교만의 죄는 마귀가 저지른 죄인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이지와 총명에 의해서 자기의 이지가 높다는 생각으로 교만하게 되고, 자기의 지혜를 하나님의 지혜보다 더 높게 여기게 됨으로서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① 이 지적인 교만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 형태는 지식이며 또 다른 형태는 지혜입니다. ? 지혜와 지식은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둘이 같지는 않습니다. ? 지식은 정보, 어떤 사물에 대한 것을 아는 것, 어떤 사물을 발견하는 것, 어떤 유의 사실들을 작고 크든 간에 모아 확보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지혜는 지식을 사용하고 적용하는 능력과 수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거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지혜가 없어 선하고 가치 있는 목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추진해 나가는 능력이나 수완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 반면 지혜는 있는데, 지식이 없으므로 바른 길로 가지 못하고, 허황되고 잘못된 것에 속아, 그 길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② 사도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말합니다. ? 스스로 자신이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은 정당하지 못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 사람의 지혜는 한계가 있어서, 최고의 지점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지혜의 끝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위대한 학자는 겸비하다는 것을 항상 발견하게 됩니다. ? 설 아는 것이야 말로 위험천만한 일인데, 설 아는 것이 머리를 쳐들고 모든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 사람들이 알면 알수록 자기들이 모르는 것을 더 인식하게 됨으로, 학자가 위대해지면 위대해질수록 그 사람이 거의 필연적으로 더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③ 우리는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든지, 또는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 지식과 지혜를 우리 스스로 산출한 것이 아니니 뽐낼 것이 전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많은 사실들을 습득할 수 있는 일종의 지성을 갖추고 있어서 무엇이든지 금방 배우는 학생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산출한 것은 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④ 지식은 교만하게 합니다. ? 교만은 마음을 부풀립니다. ? 마음을 부풀게 만드는 것은 바람과 같아서, 견고하거나 진정한 것이 아닙니다. ? 그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 사랑이 덕을 세우지만 지식은 더 교만하게 만듭니다. ? 그것이 대단해 보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허풍선에 불과합니다.


⑤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부풀어 오르거나 거만하게 들뜨지 않으며, 무례한 방식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혜를 자랑하고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균형을 잃게 만들어 무례한 일들을 행합니다. ?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으나 자기의 지성을 자랑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고 칭찬 받기를 구하며 갈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 사랑은 쉽게 성내지 아니하지만 거짓된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쉽게 성냅니다. ?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고,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게 됩니다.


⑥ 우리는 위대한 사도의 이 권계를 지켜야 할 이유를 다른 성경에서 찾아보면 잠16:18; 고전10:12; 갈6:3; 약3:1; 마7:1~2; 11:29; 12:20; 요12:49~50등에서도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그 외에 여러 곳에서 더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⑦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않도록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길은 참된 지혜와 거짓된 지혜 사이의 차이를 배우서, 거짓된 것은 물리치고, 참된 것은 추구해야 합니다. ? 참된 지혜는 위, 곧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거짓된 지혜는 세상으로부터 옵니다. ? 아래로부터 난 지혜는 세상적이며, 영리하지만 인간 이상을 올라가지는 못합니다. 그 지혜는 정욕적인 동물적 본성의 한 부분입니다. ? 더 나아가 이 지혜는 마귀 적이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 이 지혜는 악한 영들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고, 악한 영들은 매우 영리합니다. 심지어 광명의 천사로 과장할 수도 있습니다. ?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지혜로 교만하게 되면 세상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참된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옴으로서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⑧ 참된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로 오직 지혜로우신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기 때문에 여러 특성들을 나타냅니다. ? 그 지혜는 순결합니다. ? 그리고 항상 화평합니다. ? 그 지혜가 항상 온유함과 겸손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양순한 사람입니다. ? 그 지혜는 자신을 제어하고 생각을 통제하고 자신들에 관한 다른 모든 것을 조정합니다. ? 그들은 사랑스럽고 화평을 만듭니다. ? 지혜는 이론적이지 않고 항상 실천과 행실과 일상 삶을 통해서 그것을 드러냅니다.

 

 

 

 

10. 할 수 있으면 모든 이들과 화평 하라(17~18)


우리는 실천 생활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를 해롭게 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해야 한다고 하며,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합니다. 또한 교회의 지체들은 항상 마음과 사고방식에서 하나를 이루는 특성을 견고하게 세워야 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매우 실천적인 차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참된 지혜를 가진 자들은 항상 화평케 하는 자들이며, 이 화평케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위로부터 난 생명을 가지고 처신합니다.


①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라는 말씀은 부정적인 국면에서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본성적인 본능대로 스스로 되받아 치거나 스스로 복수하지 않아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도모하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앙갚음을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니 우리는 선한 것들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 말하는 “”의 개념은 고유하게 선한  것을 묘사하는데, 내면적이고 고유한 본래적 선함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뜻합니다. ? 그러므로 앙갚음을 하거나 보복을 하는 대신 모든 사람이 보는 자리에서 분명히 선한 것들을 생각해 내고, 공급하고, 산출하고, 그 증거가 있게 하라는 말입니다. ? 이것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하여 우리가 처신해야 하는 방식입니다.


②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악을 행하면 그것을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삶 전체의 맥락 속에 놓아야 합니다. ?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보아서는 안 되고, 흐름을 통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 자신의 본능이나 느낌에 따라서 행동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평판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기도 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명예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이제 속하게 된 그 하늘의 가문의 평판이 걸린 문제이므로 독단적으로 홀로 떨어진 사람으로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③ 어떤 사람이 우리를 향해서 악한 방식으로 행동할 때, 우리는 세상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로부터 알게 해야 합니다. [예 : 스데반의 순교 장면(행6:15)]


④ “할 수 있거든” 이라는 ? 이 말씀에는 할 수 없는 상황들도 있다는 것을 내포 하고 있습니다. ? “너희로서는” 이라는 말씀은 너희가 결코 고통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너희 때문에 투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너희 됨됨이와 너희가 행하는 일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 그러므로 이 문제는 오직 문제가 네 자신, 즉 너희에게 통제 권한이 주어져 있다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 어떤 댓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 화평의 조건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 그러나 두려움에 빠져 화평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면 진리를 어그러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⑤ 우리는 화평을 위해서라 할지라도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 타협해서는 안 되며, 진리를 말하는 일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고,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진리는 선포되어져야 합니다. ? 진리가 선포될 때에 교회의 어떤 지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자신도 고통에 빠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침이 될 만한 메시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리이라면 선포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 우리는 다른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는 인내하고, 할 수만 있으면 도움을 주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고집을 부리거나 양보를 하지 않는 자세를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가 진리를 역설하고 선포하는 방식은 오직 사랑 안에서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오직 진리 자체로 말미암아 되어져야지 전파하는 사람의 어떠함으로 인해 상처를 받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 ?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개인적인 이슈로 삼아서는 안 되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싸우거나 우리 자신의 관점 또는 자신의 평판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속에서 심판, 또는 중재자처럼 활동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한 어떤 행동을 결정할 권한을 스스로 가지지 말아야 하며,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평강이 그 일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지, 고통을 당하든지,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든지 오직 한 가지 관심만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평강이 존재하도록 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의 은택을 충만하게 누리기를 원해야 하며, 하나님의 평강이 모든 일에 있어서 심판이 되게 해야 합니다.

 

 

 

 

11.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라(19~20)


성경에서 부단히 만나게 될 놀라운 원리들은 언제나 우리가 처해 있는 위치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우리의 수준을 높여 갑니다. 또한 소극적인 데서부터 시작하여 적극적인 부분으로 점진적으로 넘어갑니다.


① 만일 우리가 복수심에 빠져 들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어떠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매우 비참하게 만들 것입니다. ? 싸우는 교회, 분쟁하는 교회보다 더 나쁜 것은 없습니다. ? 그것은 역사에서 너무나 확증 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② “선한 것을 도모하라.”는 표현의 의미는 즉각적으로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③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적극적인 진술을 대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이 분노하지 말고 오히려 전체에서 일어나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자리를 내주고 진노하심에 활동할 자유로운 범위를 내주고, 또 그 하나님의 진노하심 위에 허용하고, 그것을 위한 길을 예비하고, 그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그것을 맡기라는 뜻입니다.


④ “갚으리라.”는 다음의 말이 단순합니다. 그 말은 “돌려주다” 또는 “도로 주다” 또는 “되갚다”는 뜻입니다. 복수는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니며 그것은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 모두 죄로 말미암아 불의하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판단은 부정확하며, 그러한 일을 하기에 우리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 우리는 자신이나 자신의 입장이나 자신의 조건에 대해서 매우 그릇된 판단을 하는 재판장들입니다. ? 또 우리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매우 그릇된 판단을 합니다. ? 죄의 결과로 우리는 다 자기 중심적이고, 언제나 자기 방어적이라서 우리 자신만을 보호하려고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 우리는 전체 입장을 보지 못하여 참된 판단에 이를 수가 없는 편협 된 재판장들이기 때문입니다.


⑤ 원수를 갚는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 우리는 개인적인 복수를 하려고 들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는 그 원수가 개인적으로 해를 당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지 말아야 합니다. ? 마음으로도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심이 입증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되기를 바라는 것이 옳으며, 그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나타날 ㅅ ㅜ있기를 간절히 바라야 합니다. ? 하나님의 모든 대적들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시며, 궁극적으로 자신의 옳으심을 나타내시며, 그 통치와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그 권위를 보여 주실 것에 대하여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⑥ 저주의 시편들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앙갚음을 소원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입장과 영예와 영광의 차원에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것을 볼 때 그 시편 기자들은 슬펐던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며, 거만하게 말하는 것을 볼 때에 주님을 향한 열심에 의해서 주님의 이름을 위한 열심히 쓴 것입니다. 시편기자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의 입장에서 쓴 것입니다.


⑦ 요한 계시록은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하나님의 보수하심에 대한 위대한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수들과 하나님의 복음을 배척한 사람들, 그 신적인 음성을 멸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의 독생자 안에서 제공하신 사랑의 위대한 선물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진노하시고 보응하십니다.

 

 

 

 

12. 악에게 지지 말라(20~2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우리가 원수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 원수에게 적극적으로 좋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본질적인 기독교입니다.


①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이 말씀은 잠언 25:22의 하반 절에서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고 결말짓고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은 실제로 머리에 핀 숯을 놓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며, 또는 그것이 하늘로부터 벼락을 내리게 하는 것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수치감과 양심의 가책과 고통을 느끼게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② 여기서 사도는 사람들에게 지지 말라고 하지 않고, “악에게 지지 말고”라고 말하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나게 한 배후에 무엇이 있는 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 만일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행한 일로 혈기를 부리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가 아니라 마귀에게 진 것이 됩니다. ? 또한 우리가 분내고 성내고 열을 내는 것은 이미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 우리가 자제력을 잃고 그릇된 것을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그 그릇된 것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면, 마귀는 이미 이긴 셈이고 우리는 진 것입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합니다.(골3:15) 결코 그 평강을 상실하지 말아야 합니다.


③ 우리가 승리를 얻을 때마다 그것이 복음을 드러내며, 다른 사람들을 얻는데 도움을 주고, 다른 사람들을 흑암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는데 도움을 줍니다.


④ 우리가 큰 전쟁에 가담한 한 병사임을 스스로 상기시키고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있으며, 전사들과 권세자들을 대항하여 씨름하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그 나라를 위한 일이며, 그 나라를 위해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그 싸움을 싸울 때에 육신적이고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전투 방식을 포기하고, 오직 신령한 방식으로서만 이 전투에 임해야 합니다.

 

 

 

 


성경: 롬13:1-7절

 

 

 

 

 13장 1~7절 :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1. 위에 있는 권세들의 의미


이 대목은 그리스도인과 정부, 또는 국가의 관계에 관련 있는 문제들을 위한 일종의 표준 구호입니다.


① 여기서 “권세들”로 번역된 헬라어는 “권위자들”이란 뜻으로 이 권세들은 우리를 다스릴 위치에 있는, 정부 권세를 부여받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위에 있는 권세들”은 최상의 권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 포괄적인 범주에 속한 우리 위에 세움 받은 어떤 존엄과 권위를 가진 자를 말합니다. ? 높이 있어 우리를 다스리는 사람, 지위에 있어서 우리보다 높은 사람은 누구라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 선한 권세이든, 악한 권세이든, 단순히 우리를 다스리는 권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② 디도서 3:1의 말씀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경우에서 “권세들”이라는 말씀이 복수로 사용될 때에는 천사의 권세를 가리킵니다.[예 : 고전15:24; 엡1:20~21; 3;10; 6:12; 골1:16; 2:10,15; 벧전3:20]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지상 정부들과 권위자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③ “굴복하라.”는 표현에는 맹목적인 순종이라는 의미가 없으며, 자신을 주장하기보다는 그들이 주장하도록 허락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며,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권세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들을 그들 아래 놓아야 합니다. ?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름이니, 그에 대한 심판을 스스로 자초하게 됩니다. ? 관원들과 권세들은 우리가 굴복하기만 하면 결코 우리를 대적하지 않는데, 만일 우리가 선하다면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은 그들은 악을 다스리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위에 있는 권세들, 국가는 실제로 하나님의 종들로서, 우리의 적극적인 선을 위하는 쪽으로 기능하고, 우리가 그릇되었다면 우리를 징벌하는 쪽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④ “사자”라는 말이 두 번 나타나는데, 그 단어는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는 종을 의미하며, “”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주신 권위와 권세를 나타냅니다. 필요하다면 비행에 대한 형벌로 목숨을 취하는 권한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⑤ 5절에서부터 그 논리가 아주 단순해지는데,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에 이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해야 할 두 가지 이유를 가지게 된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 굴복하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양심의 칼 때문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하는 권세들에 대한 예의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어떤 권세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⑥ 6절의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이 말씀은 “세금을 납부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금을 납부한다는 것은 국가의 권위와 권세를 인식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며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국가와 기능들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세금을 납부하는데, 왜냐하면 나라를 세우신 이가 우리 하나님이심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⑦ 사도는 7절에서 최종 권면을 하고 있는데,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여기서 “주라”는 단어의 뜻은 실제로 우리가 빚진 어떤 것을 되돌려 주는 것을 뜻하는데, 이 권세들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금을 바칠 때 어떤 것을 물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⑧ 7절에서 “두려움”이라는 말이 나올 때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쓰여진 것입니다. ? 나라의 권위자들을 두려워하라고 권면한 것이 아닙니다. ? 그들을 존중하고 굴복하라고는 했지만 두려워하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쓸 때에는 왕, 황제, 의회, 행정관, 시 당국자들, 아니면 권세를 잡은 어느 누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 그러나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는 말을 할 때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은 세상


① 우리는 영적인 의미에서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지만, 실제적으로는 다른 모든 의미에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 우리는 자연 질서 속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 그것은 이 세계가 모두 하나님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완전히 포기하셨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 세상을 회복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며, 그 세상의 본래의 조건으로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상태로 회복시키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 세계를 포기하셔서 마귀에게 넘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개인적인 구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주의 주도되십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통치하고 계시며, 만물이 다 주님의 손에, 그 권세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정말 기이한 방식으로 이미 세계를 통제하고 계십니다.


② 하나님께서는 정부가 존재하고 법이 있고 질서가 있게 하셨습니다.


③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와 정부를 인정하고, 그 형태가 어떠하든지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헌법으로 정한 권위가 있어야 함을 인정합니다. 그런 원칙이 세워진 상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실제적으로 자기 나라의 정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자기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④ 국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하는데, 두 가지 측면에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 악과 그 악의 나타냄을 제어하고, 질서로 통제합니다. ? 그리고 모든 이들의 복락을 촉진합니다. ? 이와 같이 악한 자를 제어하거나 처벌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들을 칭찬하도록 세움을 받은 것이 국가입니다. ? 국가가 질서와 평안을 지키는 참된 기능을 이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좋은 일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스스로 이러한 일을 행하고, 법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은 일을 하도록 격려할 때에 국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칭찬하고 그리스도인들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⑤ 국가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따라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또한 그 역할도 그리스도인들은 해야 합니다. 만일 법 자체가 우리에게 체계의 변화의 가능성을 허락한다면, 분명히 우리는 그 법을 활용하여 그 일을 수행할 권한이 있습니다.

 

 

 

 

3. 국가와 그리스도인의 관계


①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해야 하되, 어떤 방식으로든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들에 순종하지 못하게 가기 이전까지만 복종해야 합니다.


②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와 그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행16:19~40)


③ 그리스도인들은 국가나 그 어떤 형태의 국가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④ 그리스도인은 국가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 국가의 중요한 기능은 악을 통제하고 제한시키고 그 나타남을 막는 것입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국가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는 고작해야 잠시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⑤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에 대해 가진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초연한 것인데, ? 그들은 국가 안에 조재하고 있으며 국가에 복속하며 국가의 법과 법칙을 지킵니다. ? 또한 국가의 훌륭한 시민들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초연함이 있습니다. ? 그들은 국가 속에서 길을 잃거나, 그 속에 사로잡혀 들어가 그 국가 때문에 흥분하거나 감격하거나, 그 문제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다툴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이들이 아닙니다. ? 그것은 그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4. 전쟁의 명분


① 다른 나라와 전쟁이 있을 경우 그리스도인도 한 시민으로서 자기 국가를 인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국가 안에서 시민이요, 이생의 삶 속에 수반되어 있으며, 국가의 정치나 경제 등등의 문제에 수반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그런 것들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② 국가 내에 모반이나 혁명이 있을 경우, 그런 싸움에 참여하는 것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반드시 그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극단적인 경우에 있어서는 그러한 모반이 정당할 수 있습니다.


③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전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고 계십니다. ? 또 어떤 경우에는 전체 족속들을 다 멸절하라고 명하기도 하셨으며, 순종하지 않은 일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은 사람들이 구약에 여럿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싸우라고 명령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그런 수고에 복을 주셨습니다.


④ 행정관이 국가 안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제지하고 벌을 주기 위해 존재 하듯이 국가의 외적인 관계에 대해서 역시 같은 일을 하라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 다른 국가가 그 국가의 생활을 해롭게 하거나 무너뜨리려고 시도한다면, 그 국가의 시민들의 유익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전쟁은 언제나 마지막 선택이어야 합니다. ? 국가가 전쟁을 감행해야 하는 경우에 정당한 사유가 있어야 하는데, 오직 악을 제어할 목적으로만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교회와 원리들


① 주님의 나라는 더 이상 지상의 국가적인 개념과는 같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요18:36) 교회와 국가는 신약의 가르침 속에서 볼 때에 전적으로 다른 구별된 영역입니다.


② 교회의 최상의 임무는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라고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전령들입니다.

 

 

 

 


성경: 롬13:8-10절

 

 

 

 

 13장 8~10절 :  피차 사랑의 빛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 그리스도인의 이웃 사랑


사도 바울은 롬1:11에서 자신은 복음에 빚진 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의 효력이 너무나 강력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궁핍을 바라 볼 때에 마치 자기는 그것을 자기 혼자만 가지고 있을 권리가 하나도 없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사람들이 자기에게 마치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이 받은 구원의 은혜가 너무 커서 자신만이 누려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했고,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 빚을 진 것과 같이 생각하여 그것을 갚아야 한다는 열정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바 은혜와 신령한 은사들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 했던 것이 바로 그러한 사유입니다.


이제 그는 본문에서 그러한 심정으로 권면을 하고 있는데, “사랑의 빚 외에는 빚을 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① 본문에서 이 문제들이 하나님의 율법의 한 부분이라고 설정해 놓은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 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그런 다음에 그는 이 원리를 최종적으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항상 율법의 문자에만 관심을 가지지 말고 율법의 정신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② 도덕주의자들의 궁극적인 실패는 자기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 반면 복음의 영광은 내 행동 자체보다 인격으로서의 나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는데 있습니다. ? 우리가 단순히 도덕적으로, 기계적으로, 윤리적으로 바르다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않고, 복음은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인격적인 삶 속에 계신 그리스도에 속한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충만한 인격을 갖추는 데로 인도하기를 원합니다. ? 바울의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방식과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 전부에 해당되는 것을 다 종합하여 놀랍게 진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③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듯이 증거가 없는 사랑은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사랑은 단순한 하나의 감상이 아니라 가장 실천적이고 세상에서 가장 능동적인 것입니다. ? 만일 사랑이 능동적이지 못하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 그 사랑이 생명이 있어서 능동적이라면, 그로 인하여 사랑의 실천이 개시되기 마련입니다. ? 사랑은 대상이 누구든지(하나님, 부모, 자녀, 이웃) 자신의 것을 다 주고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 그 사랑이 클수록 그것은 더욱 간절합니다.


④ 그런데 새로운 성품이 없이는 이웃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 그런데 우리는 우리 속에 성령을 모시고 있습니다. ? 그 성령께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 우리는 사랑을 필요로 하며 그것을 얻기를 원합니다. ? 그런데 그것은 성령께서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게 될 때에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 되는 방식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오해하였습니다. 이 가르침은 율법 자체가 말하는 순서를 뒤 바꾼 것이며,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 대하여도 그 순서를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①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어떤 존재인지 아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들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새로운 성품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 그로 인하여 거듭난 성도들은 자기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②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적인 관계에 조정을 받지 않고, 친척들마저도 친척 자체로 뿐만 아니라 영혼으로 보게 됩니다. ? 모든 본성적인 생각의 방식을 초월하는 사고방식으로 그리스도인에 관한 한 모든 인간적인 부분은 폐지가 됩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들을 다르게 볼 뿐만 아니라 자기 이웃들도 다르게 보는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자기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이나 우리 자신이 동등하게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에만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이웃에 대하여도 그런 사랑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그처럼 이웃을 볼 때에 그 영혼에 대하여 동정심을 가지게 되어 그들을 도와주고 그들이 자신이 구원받은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구원받도록 돕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③ “살인하지 말라.......” 그처럼 바울이 부정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사랑은 이러한 것들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면 네 이웃에게 해가 되는 일을 조금도 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사랑하고 있다면 그 명령들을 어기는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는 말로 마무리 짓는 것입니다.


④ 본문에서 말하는 우리의 이웃은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 이웃 사랑에 대한 우리 주님께서 주신 대답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 강도를 만나 폭행당한 사람을 알지 못하지만 그도 역시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 이러한 사랑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들을 사랑하지 아니하셨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였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요일4:11) ? 우리는 사랑에 관해서 말만하지 말고, 또 기계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지켜 나가지 말고 온전한 심령으로 지켜 나가야 합니다.

 

 

 

 

 

성경: 롬13:11-14절

 

 

 

 

13장 11~14절 :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1. 그릇된 신앙관들


본문을 시작한 “또한”이라는 접속사의 의미는 “더구나”, “부연하여”, “그 위에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앞에서 언급했던 진술을 보다 더 연장시켜 더 높은 수준의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① 사도 바울의 접근 방식은 행실에 대한 전체 문제를 다루는 신약의 방식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 위하여, 이러한 도덕적인 권면을 따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 우리가 이와 같이 살아 가야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인 것이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 그것은 우리가 행위로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 먼저 믿음이 따르고, 그 믿음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행위가 그 신분에 맞는 행실로 나타나는 것인데, 이를 테면 열매 없는 나무가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처럼, 행실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이 여기에 적용이 될 것입니다. ?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은 뒤에 그에 걸맞은 행실이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는 어떤 면에서 믿음의 열매라고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② 믿음이 온 후에 우리는 선한 행실이라는 열매로 나타나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성화가 믿음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 성화의 동기는 가장 먼저 심판의 두려움에 의해 주어집니다. ? 그러나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의 양심으로 인하여 하는 것입니다. ?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조명 받은 양심을 가지고 있어서 옳은 것이 무엇임을 이해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뜻하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지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더욱 전진하여 진보한 상태에서는 주님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 안에서 살아가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인하여 성화를 이루어 가게 됩니다.

 

 

 

 

2. 때와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점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언제나 교리와 진리의 결과요 적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12장 1~2절에서 시작했던 호소를 강화시키고 있는데,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멸하도록 하라.” 바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렇게 해야 할 큰 이치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데, “또한 ... 이 모든 것을 하되 특히 ... 에 비추어서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① 성경은 두 역사의 타입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 하나님의 궁극적인 통제 아래서 허용하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역사”가 있습니다. ? 두 번째 유형의 역사는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의 역사로서 이 유형의 역사는 허용하시는 역사가 아니라 산출하시는 역사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역사, 구속의 역사라고 합니다. ? 허용의 역사는 하나의 배경에 불과하며 하나님께서 설치해 놓은 무대에 불과합니다. ? 구속사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역사로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목적을 이루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 하나님께서는 항상 먼저 일하시는 최상의 동작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전체의 역사를 창세전에 계획하셨고, 이 시간 세계 속에서 그것을 사건들로 구체화시키고 계십니다. 그 역사는 미리 정하신 목적을 향해서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③ 하나님께서 산출하시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시간의 요소는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가장 우선적이고 본질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 세상은 무지함 속에서도 바른 일을 시행하는데, 세계가 역사를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 in the year of our Lord)로 나누는 것입니다. ? 세상은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하고, 그것을 믿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은 그 구분법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 항상 시간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차원에서 나누고 있는 성경은 시간을 세 등분으로 구분합니다. ㉮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의 시간 ㉯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세상에 사시고 시간 세계에서 떠나 영광으로 돌아가신 때 ㉰ 다시 최종적으로 오시는 때로 나눕니다.


④ 그리스도께서 오심은 때가 찼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역사관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고, 과학의 발전과 혼인과 재산의 취득, 전쟁과 같은 것에 의해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 우리는 진정으로 문제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인 독생자의 인격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행하신 것입니다. ?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고, 가르치셨으며,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셔서 마지막 원수를 정복하셨고, 그리고 하늘로 올라 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그의 원수가 발등상 되기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마지막 시기, 이 세계 역사의 마지막 국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 시간과 역사에 관해서 그러한 관점을 취하면 또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인생에 대한 매우 분명한 관점을 어떤 방식으로 가져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세상 너머의 내세와 그 내세의 삶에 대해 매우 분명한 관점을 가져야 하는데,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바로 이 점에 대한 이해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3. 삶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기로 규정하고 우리의 지상 생활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면에서 참으로 보배로운 요점입니다.


① “”과 “어두움”이라는 두 단어에서 우리는 세상이 바로 그 “”과 같다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말해 나갑니다. ?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인생을 오늘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인생의 “”, “어두움”이라는 관점을 가집니다. ?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선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것들은 “어두운”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인생 전체를 “어두움”으로 봅니다. ?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외인”, “나그네”로 여기며 삽니다. ? 성경 전체의 교훈은 세상을 언제나 “어두움”으로 규정합니다.(요3:19; 8:12; 12:36; 고전4:5; 골1:10~13; 벧전2:9; 요일1:5~7; 2:8~9; 행26:16~18)


② 인류는 인생과 삶의 전체 목적에 관하여 무지한 어두움에 처하여 있습니다. ? 죽음은 헤아리기 어려운 어두움에 불과한 것이며, “소망도 없이 무덤”을 기뻐하는 것과 같은 양상입니다. ? 그들에게는 죽을 때 모든 것이 붕괴되어 보이며, 그것이 마지막 어두움입니다. ?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알기만 한다면 일초라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 영혼과 죽음 너머에 있는 모든 것과, 심판에 관해서도 동일하게 무지합니다.


③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빛에 속하여 있으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행인이라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며, 세상과 육체와 마귀를 대적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 이 세상에 관한 우리의 관점은 어둡고 망할 세상입니다. ?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서 정죄를 받을 세상입니다. ? 정치가들에 의해서라도 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며, 그들은 단지 표면에 파장만 일으킬 뿐입니다. ? 그들은 진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13:14)라는 말씀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 우리가 세상만을 바라본다면,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 우리에게는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영원한 도성의 문이 우리 앞에 열려 있음을 압니다.


④ 장차 오는 세상에서는 모든 천사들이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받은 우리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 구원은 우리가 말하는 장차 오는 세상입니다. ? 우리의 소망의 기업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 우리가 아직 그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믿음이 있고, 그 말할 수 없는 영광과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완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일 그러한 것들에 비추어서 일상의 삶을 영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4. 이미와 아직은


우리는 우리 속에 일어난 변화로 인하여 시간과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과 내세에 관하여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① 바울은 그 점을 다시 두 단어로 표현하는데, ? 그 첫 번째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에 관하여 구원이”라는 뜻인데, “우리”라는 단어는 그 모든 것을 매우 잘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 두 번째는 “우리가” 인데,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벋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여기에서 “우리가”라는 단어는 다른 사람들과 우리를 구별시키는 단어입니다. ? 그래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교회와 세상 사이에는 예리하고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② 우리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그들의 행실이 아니라 그들의 성품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은 거듭나 새로운 성품을 받았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 그리스도인은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비 그리스도인보다 전적으로 선해야 함은 마땅한 것입니다. ? 우리는 영적 출생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느 사람도 하나님의 권속이 될 수는 없습니다.


③ 우리의 품격은 하늘에 있습니다. ? 우리가 속한 곳은 하늘입니다. ? 그 하늘이 우리의 본향입니다. ? 우리가 잠시 동안 그 하늘로부터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여러 나라들의 시민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 그러나 비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지상 나라의 시민들입니다.


④ 우리는 영화롭게 될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광은 우리를 위해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절대로 진리입니다. ?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그 영광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들을 들여다 볼 때 함께 체험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 “하늘을 미리 맛봄”은 세상적인 즐거움이 아닙니다. ? 세상적은 즐거움이 아무리 정화되고 최고도에 달한다 할지라도 그런 맛을 내지 못합니다. ? 그러나 “영광이 이 땅 아래서 시작되었습니다. 영광이 이미 우리를 위해서 출발을 한 것입니다. ”

 

 

 

 

5. 성화의 방식


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딛2:14)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로 선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죽으신 전체 목적이었습니다.


② 주님께서 모든 것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시 섬길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③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 하나님은 빛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 빛에 거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빛은 어둠과 함께 할 수가 없으며, 빛은 어두움을 쫓아내기 때문에 우리는 빛으로서 어둠이 조금이라도 섞일  수가 없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품위에 맞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 우리는 도덕을 지키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살고, 또한 도덕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나오는 것 자체가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키신 우리 주님의 의로움이 우리의 행위에 묻어 나오는 것입니다.


④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에서 “깰 때”라는 말은 잠에서 일어날 바로 그 시간 속에 있다는 뜻인데, “자다가”는 말을 단순히 느슨해져 있는 조건을 뜻하는 것입니다. ?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일깨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축 늘어진 상태나, 잠들어 있는 것 같은 상태나, 무기력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들을 분발시켜야 합니다. ? 그들은 그것을 스스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 : 눅21:34~36; 막13:33,37; 고전15:34; 16:13~14; 엡5:14; 살전5:6~8; 벧후1:5; 딤후1:6) ? 자신을 흔들어 깨운 다음에 우리는 자신을 향하여 소리쳐야 하며, 자신의 영혼이 정말로 살아 있고 항상 경계하는 상태에 있도록 해야 합니다.(고후13:5) ? 우리는 각자 “정말 우리가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시간을 쓰는 방식을 복음이 결정하는가? 복음이 내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요인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이해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에 대하여 각성하는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적 싸움을 위해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저 습관적으로 행해 나가고, 어떤 추진력에 의해서 이끌려가는 무기력한 삶에서 깨어나,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에 참여하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 성경을 읽되,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 성경을 이해하도록 돕는 책들도 읽어야 합니다. ? 그러나 책을 읽는 것만을 의지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 영적인 사람들,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성령 충만하게 되었던 사람들의 전기를 통해서 그들의 삶에 대해서 탐사하고 우리 자신을 검증해야 합니다. ?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메시지로 받아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⑥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말씀은 “잠에서 깨라”는 것이며, 그리고 해야 할 일은 옷을 단정히 차려 입는 것인데, 우리가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합니까? ?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라고 말합니다. 그 옷을 계속 입고 있지 말고 벗어 버려야 합니다. ? 이것은 영 단번에 벗어 버리고 다시 주워 입지 말라는 것입니다. ?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벗어야 합니까? 그것은 어둠의 일입니다.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에 부끄러운 말이라.” 이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참조 : 골3:9; 엡4:22; 갈5:19~21; 엡5:11]


⑦ 바울은 더 적극적인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빛의 갑옷을 입자.” 라고 말합니다. ? 여기서 “입자”는 뜻은 영 단번에 입자는 뜻입니다. ? “빛의 갑옷”이라는 말씀은 “빛의 무기”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은 번역입니다. ? 그것은 빛, 곧 낮에 속한 사람들인 우리들에게 적당한 복장이기 때문입니다. ? 낮에 속해 있는 방식으로 행하자는 말입니다. ?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빛의 자녀에 합당하게 단정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⑧ 방탕과 술 취함, 그리고 음란과 호색, 또한 쟁투와 시기, 이 모든 것들은 육에 속한 것들로 우리는 육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의 성품을 가진 새로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것들과 별개입니다. ? 그것들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성품입니다. ? 전에는 우리도 그러했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 그런데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자신의 참 모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옛 모습과 습관들로 인해 자신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옛 모습을 답습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언제나 신의 성품의 참예한 자로서 그런 모습들은 거짓된 나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 사탄은 항상 우리의 옛 모습을 들추어내고 그것이 우리의 참 모습이라고 거짓말을 하는데, 우리는 결코 속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서 우리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고, 하늘에 속한 성품이 주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옛 기억을 떠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가 사는 방식은 언제나 우리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하늘에 속한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 우리가 죄 가운데 있던 기억들로부터 벗어나 더 이상 그 옛 모습대로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⑨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를 의존하여 삶을 영위하셨습니다. ? 우리도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를 의존하여 삶을 영위하신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주님을 의존하여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표현은 주님이 머리가 되시며 모든 양분과 다른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옴을 인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 우리는 주님과 그 생명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어두움의 세상과 죄악의 세상, 즉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맞서 싸워야 하는 우리는 결코 그들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 그래서 그들을 이겨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주님을 의뢰하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실 때에 그것들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롬14:1-6절

 

 

 

 

14장 1~6절 :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 여기지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썼는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1.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관계들(1)


① “믿음이 연약한 자”란 믿음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갈피를 못 잡는 사람들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구적으로 약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기에는 약한 사람, 즉 그 순간 그 시점에 이르기까지 그 믿음에 있어서 약하거나 미약했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② 그들은 믿음 안에 있었으며, 거듭난 사람들이고, 교회의 지체들이며, 마땅히 교회 지체들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삶과 생활의 세부적인 국면에 이르렀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의 입장에서 옛 율법적인 사고방식,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사고방식으로 물러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 차원에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③ 유대인들은 율법 안에서 양육되어 그리스도인이 될 때 가장 난제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방식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 곧 믿음의 차원으로 줄곧 생각하는 데에 실패하는 것인데, 구원에 관한 진리를 믿는 것과 그  진리를 자신들의 행실과 일상의 삶, 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적용시켜 나가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믿더라도 특별한 논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는 행위를 의지해서 뒤로 물러가 넘어지는 위험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 가운데서” 진행해 나가는 성향을 말하는 것입니다.(갈3:3)


④ 믿음이 약한 자와 강한 자를 나누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고 믿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 중생은 전적이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생사입니다. ? 거듭남에 있어서 우리가 감당할 역할은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거듭남의 문제에 있어서 조금의 차이도 가지고 오지 않습니다. ? 우리가 이제까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행실을 보였느냐 하는 것이 거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 거듭남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동등하고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일에 있어서도 다 동등합니다. ? 우리 모두는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며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길 밖에 없지만 체험에 있어서는 모두가 다를 수 있습니다. ? 우리가 거듭날 때 생명의 씨앗이 우리에게 심겨지고, 그 씨앗 자체에는 전혀 차이가 없지만, 그 씨앗에 일어나는 일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미음에 있어서 약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⑤ 그 차이를 야기 시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 천성적인 재능에 의해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자로, 또 어떤 이는 권면하는 자로 쓰임을 받습니다. ?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관련하여 기질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기질에 따라서 염려를 많이 하는 성도일 수도 있고, 열성적인 성도일 수도 있습니다. ? 부지런함과 철저함이라는 문제가 우리에게 생명으로 주어진 우리 속에 심겨진 씨앗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성적인데서 기인하여, 부지런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고,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면서, 영적인 교훈과 가르침에 따라 그 마음을 새롭게 하고 그 행실들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새롭게 함으로서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다. ? 기독교적인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는 신앙생활은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약한 자들을 환영할 우리의 의무(1~4)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약성경에서 분명히 금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른 것 때문에 우리는 그 문제들을 “주변적인” 문제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것들이 금지되어 있으면 그것을 논의할 필요도 없이 금지하면 되는 것이며, 계명으로 주어졌다면 그대로 명령을 수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하여 분명한 계명을 갖지 못한 문제, 금지 조항이 전혀 없는 문제로 인하여 사도바울은 이런 문제들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구원을 위해 본질적인 것들은 아니지만 그에 관한 우리의 사고방식에서 옳고 분명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도가 “믿음이 연약한 자들과 믿음이 강한 자들”로 나누어 부르는 차원에서 그 점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은 여기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연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보다는, 믿음에 대한 이해 능력이 어떠하고, 복음의 교훈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① 믿음에 있어서 연약한 자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로 인하여 과민한 상태에 있는데, 더 강한 형제가 더 약한 형제의 이러한 조건을 절대로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 연약한 자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여 그것을 제거하려고 한다거나, 또는 만날 때마다 그 문제를 계속 언급하게 된다면 연약한 자는 더욱더 악화 될 것입니다. ? 연약한 자의 고통 거리를 재미거리로 만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강한 자에게는 웃음거리가 될지 모르지만 약한 자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일 수가 있는데, 그것을 아무런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하여 재미거리로 만드는 일은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 더 약한 사람들을 힘으로 제압하려거나 자신의 의견을 은근히 주입시키려고 하는 것은 선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 그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며, 우리가 도우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 그 형제를 받되,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받으신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받아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영접함을 받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받아야 합니다.


② 이러한 문제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우리의 행동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 이 주변적인 문제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 이러한 논점들에 대한 관점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서로 자녀로 받고 서로 존중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아무리 잘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연약하거나 부족한 부분에 대하여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강한 형제들은 언제나 자신은 모든 지식을 다 섭렵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위험에 빠지기 쉬운데, 기독교의 신앙이란 결코 완전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완전하고 철저한 지식에 도달하지는 못했는데, 어떤 사람은 조금 덜하고, 어떤 사람들은 조금 더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더 나아갔으니 우리는 부지런히 완전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에 지식을 더해가야 합니다.


③ 강한 형제가 더 약한 형제의 주장을 찬동하지는 않지만 결코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약한 형제의 주저함을 판단하는 생각을 표현하지 말아야 하는데서 그치지 말고,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이러한 “주변의 문제”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토론을 하게 될 경우에는 더더욱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 ? 토론 자체를 위해서 토론하지 말아야 합니다.(자신의 주장을 위해 면박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의 논쟁을 하기 위해서 서로 논쟁하는 공회를 세워서도 안 됩니다.) ? 유희나 즐거움만을 위해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있는 어떤 것에 관한 토론을 해서는 안 됩니다. ? 자신을 과시할 목적으로 토론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 이런 문제들을 나쁜 분위기나 절제되지 않은 방식으로 토론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 토론과 논쟁 사이를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토론은 좋은 교육 방식이지만, 논쟁은 그릇된 것입니다.) ㉮ 이기려고 애를 쓰고 자기의 옳음을 입증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논쟁입니다. ㉯ 논쟁의 결과는 그것의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더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 다른 사람의 입장을 더 굳게 해주고, 더 고집을 부리게 함으로서 자기의 입장을 더욱 방어하려고 결심하게 합니다. ㉱ 결국 어떤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는 그 정신은 쌍방 모두에게 잘못된 것으로 언제나 선 보다는 해를 더 끼치는 것이 논쟁입니다. ? 우리의 소원은 항상 진리에 대한 더 바른 이해를 얻고 서로 도와주려는 것이어야 합니다. ? 우리는 토론을 위해 가르침의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교사의 임무는 항상 가르침 받는 자들의 입장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 자기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의 수준을 평가해야 합니다.(어린아이인지, 성인들인지 평가해야 합니다.) ㉯  어린이들과 갓난아이들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질문들에 대답할 준비를 항상 하고 있어야 하며, 자신의 말을 거듭 되풀이 할 용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 모범의 가치를 잊지 말고 그 가치를 절하 하지 말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너무 많은 것을 법칙으로 세워 놓지 말고 오히려 그들에게 이치상 설명하며, 다른 방식을 시도해 볼 준비와 다른 방식의 기회를 줄 용의가 있어야 합니다.) ㉲ 무엇보다도 가르침의 진수는 가르침 받는 사람들에게 사랑어린 관심을 나타내는데 있습니다.


④ 특별한 음식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것은 계명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보편적인 가르침을 적용하여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 아직 우리는 결론들에 이르는 단계에 있지 않고 해석의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 우리는 성급히 결론에 이르지 말고 먼저 해석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 이교도들은 이교 신전으로부터 우상에게 고기를 제물로 드렸고 신전에서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 중에는 “푸주간”이라고 불리는 고기 시장에서 팔리곤 했는데, 유대인들은 그러한 고기가 우상숭배와 연관되어 그 고기는 더럽혀 졌다고 생각함으로 그 고기를 먹는 것을 삼갔던 것입니다. ? 이방인들도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는 일에 관하여 생각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그 고기를 먹는 것은 다시 한번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느껴서 그 고기가 이교도의 신전에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 모르므로 모든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 어떤 사람은 모든 종류의 음식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습니다. ? 사도 바울은 그 뿐만 아니라, 딤전4:1~8의 대목에서 혼인을 금하고 또한 사람들에게 식물(고기)을 먹지 말라고 명하는 어떤 교훈을 다루고 있는데, 당시 1세기에 매우 인기 있었던 개념들을 이상하게 혼합하는 것들이 인기가 있었는데, 그것들은 신비주의나 금욕주의, 그리고 종교 철학, 어떤 의미에서 마술까지도 호기심 어리게 혼합하였습니다. ?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특별한 문제들과 함께 모든 유의 그리스도인에게 영향을 미치기 쉬운 이 이단적인 가르침을 포함시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 그래서 바울은 채식주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며, 약한 자들의 결심에 대하여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를 누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신 그 자유에 견고히 선 상태에서 주를 위한 열심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로 종결 되어지는 것은 무엇이든 가능하지만, 개인의 어떠한 목적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들이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하나님과 무관한 일들은 금해야 합니다.

 

 

 

 

3. 율법주의의 실례들(1~4)


너무 유약한 형제들은 구원의 중추적인 진리를 믿기는 하지만 그것을 매우 구체적으로 상세한 부분에 적용시킬 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믿은 것들을 부인하게 됩니다.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는데, 그래서 주님께서 하늘 높은 곳에 승천하셨을 때 사도들과 선지자들, 복음을 전하는 자들 뿐 아니라 목회자들과 교사들을 주신 것입니다.


① 사람이 고기를 먹느냐, 채소를 먹느냐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 사람들이 규칙과 규례들을 만들어내고 성경을 통해 그 정당성을 입증할 수 없는 사항을 고안해 내는 위험은 항상 존재합니다. ? 그 가르침과 목적이 선하다고 할지라도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교리들과 합치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율법주의의 도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성경에서 특수하게 지적되지 않은 어떤 상세한 요점들에 지나친 탁월성을 부여하여, 지키게 하고, 자기들이 정한 규칙을 어기는 것을 비난하거나 억압하는 것들은 모두 율법주의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세워 놓은 표준을 가직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경향에 빠질 수 있음을 조심해야 합니다.(바리새인들이 그것에 대한 좋은 예입니다.) ? 누가복음 9:49~50에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자기들의 그룹에 들지 않았고 모든 방면에서 자기들을 닮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그가 전혀 제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워놓은 기준을 거부하셨습니다. ? 교회의 역사는 사람들이 자주 그릇된 이유 때문에 분열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서로의 인식의 차이, 작은 규례들, 또는 교회 연합이나 종교 연합, 등등) ? 성경의 전체 강조점은 정신에 주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모든 일을 사랑의 정신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에 의해 정해진 규례와 같은 것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② 그리스도인들은 거침돌을 피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고, 디도에게는 결코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것에 대한 답은 사도행전 16:1~3과 갈라디아서 2:3~5에 정확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 그 원리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유대인들인 것처럼 율법에 순응하고 모든 것을 행할 필요는 없지만 꼭 지켜야 할 것들을 제시하는 것은 유대인 성도들의 신앙의 양심을 위한 차원에서 제시된 결정이라는 것입니다.(행15:19~20) ?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이 하는 일에 대하여 이해를 하지 못하여, 바울이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유대인들의 규모를 지키지 말라고 한다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행21:21) ? 그래서 야고보와 교회 장로들이 바울에게 제안하고 바울은 받아 들여 유대인 성도들의 오해를 풀어 준 것입니다.(행21:23~24,26) ? 바울은 자신을 반대하는 과격한 사람들의 반응으로 인하여, 그들의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한 교회의 요구인 자신의 머리를 깎는 것이 좋을 리가 없었고, 서원을 하는 의식 법을 행하므로, 이방인들이 억지로 의식 법에 순종하도록 강요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유대인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는 아무래도 좋다고 여기는 규칙들을 들어 준 것입니다. ? 바울은 여전히 복음에 입각하여 절대적인 자세를 견지했고, 자기가 이방인들에게 가르친 것과 자신의 믿음 위에 굳건히 서 있었지만 예루살렘 안에 있는 소동이나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머리를 깎고 서원도 할 수가 있었습니다. ? 그는 평안을 위해서 그렇게 했으며, 복음의 확산을 위해서 그리고 정말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 바울은 위대하고 분명한 원리들을 전제해 놓은 상태에서 어떤 사람이 “모든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 아래 들어가게 하는 것이 옳으냐고 한다면, ‘천만에요!’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할 수 있는 한 소요를 피하고, 아무래도 좋은 어떤 일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지키라고 요구하자.”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③ 이 모든 것에 대한 최종적인 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다면, 누가 그를 거부한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 누구든지 믿음을 고백하며 “내가 죄인인 줄을 알고, 자신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자신의 행위는 쓸모없음을 고백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나와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만 의뢰하며, 그 사실에 대하여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믿고 의지한다.”고 말한다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받으신 것입니다. ? 거기에 덧붙여 그들이 기독교회에 가입하고 싶다는 뜻을 표명하고 세상의 부류를 떠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부류 속에 들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시 분명히 하나님께서 저들을 받으셨다는 증거입니다. ? 그런 다음에 그들의 보편적인 행실과 행동을 거기에 덧 붙여 보아야 합니다. ? 그들의 행실이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어떤 일들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자기들의 신앙고백과 일관성 있는 삶을 영위하고, 신약의 가르침에 따르고 있다면, 그들 또한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다고 말할 권한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 우리가 그릇될 수도 있고 오도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관심은 우리가 그릇되게 사람들을 배제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복음 적인 사람들이 계속해서 서로 나뉘며, 분열의 조건 속에 처하면서, 또 철저한 실패와 온 땅에 잊혀지기에 마땅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모두 동등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하나님께서 동등하게 자기들을 받으셨음을 압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신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 위대한 원리들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을 점검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1~4)


사도는 여기서 “주변의 문제들”에 대해 관용을 보이라고 호소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관하여 첫 번째 해답은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음이니라.”라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는 두 번째 해답으로 나아가는데 그것은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는 이중적인 진술입니다.


① 하인들의 행동이 어떠해야 함을 결정하는 권한과 특권은 주인이 가지고 있으니, 그가 하는 일에 대해서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상전이십니다. ? 우리의 서고 넘어지는 것이 다 주님께 있습니다. ? 주님께서 우리에게 뭘 할 것인지 지시할 권한을 갖고 계시며 우리를 판단하는 권한도 주님이 갖고 계십니다. ? 우리는 징계하는 권한도 바로 주님, 그 주님만이 갖고 계십니다.


② 주의 계명이 있을 때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주의 계명이 없을 때에는 판단을 표명하는 데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 왜냐하면 주님께서 판단자이시기 때문입니다. ? 자신의 관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서로 정죄하지는 말라, 그런 일은 분명히 그대들의 특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우리는 영적인 탐정들이나 영적인 재판장으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 우리 주님께서는 상상 설교에서 매우 실제적인 바로 그 위험을 다루고 계십니다. ?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마7:1~5) ? 야고보는 자신을 재판장으로 세우면 자신의 기준에 따라 자신이 판단을 받으리라고 경고합니다.(약3:1~2) ? 우리 주님만이 우리의 상전이시고, 그분만이 사람들에 대한 마지막 판단을 최종적으로 선고할 특권과 권리를 가지십니다.


④ 약한 형제가 두려움의 영에 지배를 받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약한 형제는 여러 규칙과 규례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 자신을 위해서 울타리를 치는데 너무 관심을 기울이고, 실패할까 무서워 자신을 방어하느라고 율법주의자가 되는 지점까지 나아갑니다. ? 그로 인하여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식으로 뒤로 물러가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 진리를 부인하게 됩니다. ? 이 모든 것은 과민한 이해 때문입니다. ? 우상에게 드려진 이러한 고기를 먹거나 모세 율법이 금하는 고기들을 먹는 것은 가공할 만큼 위험한 일이며, 그 일을 한 사람은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고, 그는 믿음에 있어서 파산 당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는 공포스러워하는 것입니다. ? 그들이 과민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끌림 받은 이 구원의 충만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서게 하실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형제에 대해서 과민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전혀 있습니다.

 

 

 

 

5. 안식일과 주의 날(1~6)


이방인들이 객관적인 외적 방식으로 유대인들과 같은 율법을 갖지는 않았음에도, 같은 율법이 그들의 마음에 기록되었다고 말 할 때 도덕법의 보편성을 매우 분명하게 지적한 것입니다.(롬2:15)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도덕법을 주셨을 때, 그것은 전체 인류의 마음속에 이미 기록되었던 것을 외적 형식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사도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는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문제가 있는데, 안식일로 어느 날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든지 주간의 첫 날을 지켜야 하는 거라는 것입니다.


① 행20:7에서는 “안식 후 첫날” 모였다고 되어 있고, 고전16:1~2에서는 매주일 첫 날에 모였다는 증거가 있고,  또한 계1:9~10에서 사도 요한에게 주어졌던 큰 계시가 주의 날, 주간의 첫날에 주어졌습니다.


②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주간의 첫날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바꾼 것은 어떤 초자연적인 조명 또는 어떤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가 어떠하다 할지라도 그 변화는 정말 온전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③ 찬미를 드리며 송축할 위대한 날이 주간의 첫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그 첫날은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④ 첫 창조 때, 7일에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마치고 쉬셨습니다. 지금은 우리 주님께서 말하자면 새로운 창조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출발하셨고 이 “새 창조” 를 하셨습니다. 그러니 주간의 첫날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이야말로 처음 창조의 7일에 부응하는 날입니다.

 

 

 

 

 

성경: 롬14:5-12절

 

 

 

 

14장 5~12절 :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 주님을 섬기는 일의 동기화(5~9)


주변의 문제들” 또는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한 해답은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떤 형식들을 부과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이유를 가지고 지성적인 이해로 자신의 양심을 청종하고 그 양심이 깨우침을 받고 그 양심의 소리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6절에서 또 다른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①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무엇인지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문제에 있어서 관용과 이해를 보이는 더 높은 동기가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이 주제들 모두의 관계는 다 주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② 우리가 어떤 방식을 결정하는 정신은 어떤 의미에서 그 결정 자체보다 더 중요한데, 사도는 여기서 이것을 순전히 지성적인 차원에서만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물론 우리는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는 말아야 합니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어느 한 결정에 이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 앞에 옳은 것을 행하고 있다는 사고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요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③ 어느 날을 특별한 날로 여기는 것도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며, 고기를 먹거나, 먹지 않는 문제 또한 “주님을 위하여” 하는 일이 될 때에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 고기를 먹는 문제에 있어서 그것이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라 할지라도 우상은 전혀 신이 아니라 사람들이 상상으로 고안해낸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할 때에 그 사람은 자유롭게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약한 형제를 비난하지 말고 오히려 그 형제가 행하는 것을 지켜보고 알라는 것입니다. ? 또 그 고기를 먹는 자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있다는 매우 훌륭한 증거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 마찬가지로 약한 형제가 고기를 먹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서로에게 자신이 행하는 일에 대하여 그와 같이 행하지 않음으로 감사하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행위입니다. ? 서로의 행하는 바가 자신과 같지 않을 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그가 행하는 일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고 싶은 완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주를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신앙의 상태에서 최선의 선택으로 고기를 먹든지, 채소를 먹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④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이 말씀은 어떤 한 사람, 어떤 한 그리스도인도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목적을 섬기지 말아야 하며,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거나 자기 자신의 이해를 따라 살거나 자기 자신의 성향을 따라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 그리스도인은 항상 주님과의 관계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이익이나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거나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 우리는 죽는 것까지도 주님께 지배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자살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삶의 근본입니다.


[예화 : 휫필드는 천상의 마음을 가진 젊은이로 25세 때에 하나님 사랑의 기이한 나타남을 체험하고 하나님과 비상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열심히 설교했고, 자신의 힘 이상으로 이 일을 했지만 그것을 즐겼고 그 일에 흠뻑 빠져 있기조차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테넨트 가문의 식구들과 휫필드가 함께 식사를 했는데, 거기서 자기의 황홀경에 빠져 자기는 즉시 하늘에 가서 주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에게 가장 큰 바람이라고 말했을 때 나이 많은 윌리암은 그에게 “젊은이 그대의 임무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지 그대가 언제 죽을지에 대해 관심 두는 것이 아닐세, 그 일에 대해 흥미를 가져서는 안 돼요. 그저 주님을 섬기고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파하며 이 특권을 누리는 일을 계속하면 되는 거요. 다른 문제들은 온전히 주님께 맡겨야 해요. 무슨 권리로 ‘내가 거기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거요. 주님께서 그대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어떻게 압니까? 무슨 권세로 자신의 소원을 주님의 마음과 생각 속에 집어넣는단 말이요?”라고 날카롭게 질책했다고 합니다.]


⑤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주님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 정확히 같은 것이 죽음에도 적용이 됩니다. ? 죽음도 “유익”입니다. ?만일 내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 만일 죽는다면 그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더 좋은 것”입니다. ? 그러니 내가 살아 있다면 그것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내가 죽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가 되십니다.

 

 

 

 

2. 주님의 주 되심(9)


만일 우리가 다른 어떤 것을 배우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우리가 믿는 진리로부터 파생된다는 위대한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이나 행실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위대한 가르침으로부터 연유되거나 파생되어 나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교리에서 시작하여 실천적인 삶의 대목으로 계속 나아갑니다. 또 만일 그가 실천적인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할지라도 다시 교리로 돌아갑니다. 실천과 교리는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원 주위를 돌고 있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① 14장의 주제는 고기를 먹는 것이 옳은가, 어떤 특별한 절기들을 지키는 것이 옳으냐의 매우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지만 바울은 6절에서 그 논증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려 사실상 문제되는 것은 동기와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 우리의 행동이 주를 위한 것인가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대한 가장 높고 깊은 교리들 중 하나는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② 9절에서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 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하는데 “이를 위하여”라는 말은 “이 목적을 위하여” 또는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결과로 당신의 백성들의 주가 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그 백성들이 살아 있거나 죽거나 간에 상관이 없이 주님은 언제나 그 백성들의 주가 되십니다. ? 주님께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결정하실 뿐만 아니라 극들을 인도하시고 모든 일 속에서 그들을 주장하십니다. ? 그것은 우리 주님의 영원한 권위입니다.(마28:18)


③ “이를 위하여” 이 목적과 이 목표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는데, 그러니 우리 주님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결과로서만 그 지위를 차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등 되실 뿐만 아니라 동등하게 전능하신 분입니다. ? 만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다면, 주님께서 죽으시거나 다시 사신 일이 없었다면 사망의 주가 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 우리 주님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자원하여 자기 비하의 기간을 거치셨습니다. ?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본질적인 부분은 주님께서 죽음에 복종하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 율법 자체가 죽음을 요구하고 죽음이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주님께서 율법 아래 나셨기 때문에 당분간은 죽음의 주가 아니라 죽음 아래 복종하시는 분이셨습니다. ? 그러나 이제 죽으시고, 또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를 사망의 속박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 인류를 대적하는 원수는 사망인데(고전15:26,55~57), 그 마지막 원수를 우리 주님께서 이기신 것입니다. ? 우리 주님은 죽음을 이기셨고 죽음을 관통해 나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죽음을 이긴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였으되, 우리를 위해서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때문에 사망이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를 더 이상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④ 주님께서 죽은 자와 산 자의 “”가 되시는 것은 마귀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를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일이 부가적으로 따라 온 것입니다. ? 마귀가 사망의 권세를 가진다고 하지만 사망을 조정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때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 그것은 욥기 1장에서 증거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허용하심으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때로 마귀를 사용하사 죽음을 산출하고 초래하신다는 점이 분명해 집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귀를 사용하셔서 그 일을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 마귀는 우리가 살거나 죽거나 결정할 어떤 고유의 권한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 마귀가 가지고 있는 “사망의 세력”은 “영향력” 또는 “권위”라는 뜻으로 우리에게 사망을 가지고 왔고, 그 사망의 속박과 지배 하에 있는 입장에 처하게 만드는 자가 마귀라는 뜻입니다. ? 마귀가 사망의 궁극적인 주장자가 아니라, 죄의 결과로 들어오게 된 사망에 이르도록 한 자가 마귀입니다. ? 그런 의미에서 마귀는 이런 종류의 권위를 가진 것입니다.


⑤ 우리 주님은 사망과 지옥, 모든 것을 주관하는 완벽한 통제력을 갖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기셨고, 정복자이십니다.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확보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와 같이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3. 재판장이 아니라 형제임(10~12)


사도 바울은 그의 논증에서 두 가지 주요 논점을 다루고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우리 모두가 다 함께 형제들이라는 사실입니다. 14장 이전에서 그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하고, 여기서는 우리가 서로 형제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께서는 생명과 사망을 주관하시는 주가 되실 분 아니라 당신의 백성들을 주관하시는 주님도 되십니다. 이 점은 당신이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결과로 말미암아 된 일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셨으니 우리는 모두 다 함께 형제들입니다.


① 하나님께서 성자에게 한 백성들을 주셨는데, 그들은 한 백성들일 뿐만 아니라 형제들이요, 자녀들이요, 모두 다 연관된 자들입니다.(히2:10~13) 그리스도께서 사시되 당신의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하나 사셨습니다. 특히 당신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심으로써 우리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②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육체에 속한 것들을 생각지” 않고 영적인 일들을 생각합니다. ? 성령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 그런 다음 그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 바로 그 때문에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5; 13:15)고 말합니다. ? 이 모든 것이 로마서 14장 바로 이 시점에서 말하는바 속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견해나 판단은 다를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이 문제들에 대한 견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서로가 어떤 관계인가를 이해하는 문제인데, 우리가 함께 형제 됨을 인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③ 이런 주변의 문제들 속에서 우리는 다 함께 형제들이며 한 주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 이 원리는 강한 자와 약한 자 양편에 다 적용이 됩니다. ? 믿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더 약한 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잘못을 더 잘 저지릅니다.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사실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 그리고 믿음이 강한 자에게 형제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하여 멸시하지 말라고 합니다. ? 서로 멸시하고 판단하는 것은 형제가 가질 마음이 아니며, 참된 형제애의 특성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고,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고 도와주려고 결심하며, 서로 바르게 길을 인도하려 애쓰는 것입니다.


④ 바울은 이제 10절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모든 일이 교회 생활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윤리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주시니 재판장도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 우리 주님께서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의 결과 중 하나는 주님이 재판장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요5:20~22) ? 우리 모두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며, 모든 무릎이 주님 앞에 꿇게 되고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게 될 것입니다. ? 심판 때에 온 세상이 하나님이 재판장이심을 아뢰고 고백하게 될 것이며, 그의 심판은 거슬러 어떠한 불평의 근거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이사야45장의 논증을 완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러한 것에 비추어 보면 우리 중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재판장 노릇을 하려는 것처럼 괴이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 더군다나 특별히 형제인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⑤ 우리 주님께서 재판장이심을 역설한 후 바울은 심판의 성격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 심판은 우주적일 것인데, 우리 주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다 판단하실 것입니다.(요5:28~29; 행17:31) ? 성도들의 심판이 있을 것인데, 그 심판은 구원과 관련이 되어 있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미 그 심판을 통과했기 때문에 그것은 상급의 심판이 될 것입니다.(눅12:40~48; 고전3:9~15; 고후5:9~11; 벧전4:17~18; 요일2:28) ?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 보좌 앞에 여전히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악 간에 행한 것을 직고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손실의 고통을 느끼거나 부끄러움을 알게 되는 일이 가능합니다. ? 그래서 최종적인 결론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 그러나 교회가 권징을 시행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악명 높은 공적 범죄를 자행한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을 출교처분 했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판단권이 있습니다. 교회는 순결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성경: 롬14:13-19절

 

 

 

 

14장 13~19절 :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1. 바울의 간접적인 접근방식의 완성(13~15)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날 때 항상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항은 그것이 한 가족에 속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문제를 그 가족의 차원에서 논의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특별한 문제들에 접근할 때마다 그 합당한 무게에 걸맞게 의견을 제시하고 그 각 논점들은 그 가족 속에 집어넣고, 그 맥락 속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믿음의 이해에 있어서 더 약한 사람들도 있고 더 강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① 다른 형제는 반대편의 지도자도 아니고 경쟁 상대도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싸우는 사람이 아님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거침이 될 만한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② 주님께서는 잡히시기 직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요15:1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그들이야말로 주님의 사람들임을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3:35) 이 점은 교회에서 항상 견지해야 할 통제원칙입니다. 이 원칙에서 떠나면 우리는 틀림없이 우리의 결정들에 있어서 잘못되어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것을 논의하든지 우리는 형제이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③ 우리가 어떤 음식물을 먹든지, 더 이상 유대인의 의식법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일을 중단해야 합니다. ?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고,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7:15) ? 또한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행10:15) ? 또한 고전10:26~28에서도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 딛1:15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④ 레위기의 율법 안에 있는 구분을 그 사물들 자체에 의존하여 정해진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구분을 해야겠다고 하신 것은 당신의 백성을 훈련시키고 다스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도록 한 것은 그 돼지고기에 그릇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그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 금지된 것들 그 자체 속에 깨끗지 못한 무엇이 있기 때문에 금지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며, 오늘날 그 모든 것을 다 먹는 것은 사도가 가르친 그 원리에 준하여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의식 법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이제 다 종식되었습니다. ? 우리는 어떤 일을 하지 않으려 할 때 그 일 자체가 악하고 그르다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됩니다. ? 더 나아가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해도 그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시104:15) ? 담배를 피우는 문제도 똑같은데, 담배는 사람이 산출한 것이 아니며, 땅의 한 부분인데, 우리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주의 것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시24:1)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일들에 탐닉하지 않아야 한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려 한다면 바른 이유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 점을 명백히 해야 합니다. ? 그러한 것들 자체가 그릇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남용하는 것이 그릇된 것입니다. ? 성도 무절제하게 사용하고 남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붙잡아야 할 원리입니다.


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라도 어느 것이나 항상 먹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는 것은 그것이 속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속되기 때문입니다.

 

 

 

 

2. 죄에 대한 다른 회의감을 가진 자들(13~16)


성경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이 몸을 어떻게 다스리고 통제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가르침으로 풍성합니다. 어떻게 먹어야 하고, 어떻게 마셔야 하며, 성의 선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선물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형제에게도 거침돌이 되거나 넘어지게 하는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① 형제로 하여금 자기 양심과 싸우게 만드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② 형제의 양심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 양심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③ 실제로 자기 양심을 대항하여 어떤 일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양심은 그런 행동이 그르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3. 그 자체로 선한 행실들의 정당성 여부(14~16)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적용해야 할 위대한 원칙은 결단코 자신만 생각해서는 안 되며, 항상 우리의 동료 그리스도인 형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행동이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특히 그 형제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약한 형제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① 그 자체로는 선하고 우리들에게도 선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해가 되는,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너는 죄를 저지르고 잘 못을 범하고 있어”라고 말하게 만드는 어떤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② 새로운 회심 자들은 즉각적으로 그들의 문화적 배경이나 사고방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합니다. 오래 전에 복음이 전파되어 기독교 전통이 보편화 된 나라에서 양육 받던 사람들의 풍습이나 습관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은 매우 큰 시험이요 위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풍습이나 습관에서는 전혀 해가 없고 합법적인 많은 현상들이 다른 전통이나 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 볼 때에는 정말 끔찍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③ 사도는 양심에 순종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너무나도 중요하게 간주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선한 양심, 또는 거리낌 없는 양심에 따라 행동할 때에 그들은 양심에 의해서 정죄를 받지 않는 하나의 조건이 됩니다. ? 양심은 우리를 정죄하는데, 우리가 양심을 대항하여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양심은 양심의 선고를 내리지만 그 양심이 우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양심에 반하여 행동할 때 우리는 “나쁜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 화인 맞은 양심은 더 이상 어느 것도 느끼지 못하는 양심이 마비된 것을 말합니다. ? 이것은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로 주어지는데, 안타깝게도 의도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도덕적인 표준도 인정하지 않으므로 자신의 양심을 화인 맞게 하는 것입니다. ? 양심은 항상 작용하는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항상 양심에 주의 깊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양심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그 사실에 호소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평안하기 위해서 단순히 법적인 문제에 호소하지 못하도록 지켜 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4. 성도의 궁극적 견인의 정당 논리(14~16)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양심은 오류와 거짓된 영성에 빠지지 않게 우리를 지켜 주는 가장 큰 안전 책입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을 집중해야 될 두 번째 문제는 성도의 궁극적인 견인에 대한 전체적인 문제입니다.


① “망하다”라는 단어의 뜻은 형제를 끝내 멸망으로 인도할 길목에 놓는 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과 10장에는 어떤 하나님의 자녀도 멸망하거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되는 일이 결코 있을 수 없음을 확증하는 진술들이 있습니다. ? 우리는 성경에서 언뜻 모순 되게 보이는 대목들을 다룸에 있어서 항상 성경은 스스로 모순을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합니다. ? 성경은 어떤 모순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모순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 언뜻 보기에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조화시키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② 성경은 어느 곳에서나 영혼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마16:26) ? 그 영혼들의 궁극적인 운명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 만일 영혼의 운명이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크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 만일 그렇다면, 단 한 사람도 끝내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이라도 낙오 되거나 떨어져 나가는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결국 그 말은 마귀가 하나님을 물리치고 승리자가 된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마귀가 와서 사람을 유혹하였고 사람이 그 마귀의 말을 듣고 넘어졌으며, 모든 고통은 마귀로부터 야기 된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귀보다 강하시기 때문에 마귀로부터 자신의 백성들을 구해 내셨고, 또한 결단코 마귀에게 도로 내어주시는 일은 없습니다. ? 단지 실족하여 넘어지는 일은 있을 수가 있어도 영원히 망하는 일이란 도무지 있을 수가 없습니다. ? 거듭남이란 하나님의 행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④ 낙심이란 하나님의 자녀가 불순종할 때 일어나는 것으로 한 가족 내의 자녀들이 육신의 부모에게 불순종하여 가족을 불명예스럽게 하고, 그 가문의 이름을 더럽힐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하늘 아버지께 불순종할 수 있고,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거나 결코 그리스도인이 된 적이 없었다는 식으로 생각될 만큼 행동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낙심한 사람들은 항상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무리 멀리 벗어났다 할지라도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죄를 짓고 있는 동안에는 참 비참하고, 그들은 일종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으나 그러면서도 정죄 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⑤ 첫 번째 창조와 새로운 창조 사이의 차이점, 즉 대표로서의 아담과, 대표로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점은 아담은 넘어질 수 있었고 넘어졌다는 것이며, 우리는 모두 그 귀추를 함께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행하신 일은 완전히 다릅니다. 거기에는 실패 할 수도 없었고, 실패하지도 않은 어떤 것이 존재합니다. ? 아담은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넘어졌습니다. ? 만일 하나님께서 또 다른 아담을 창조하셨다면, 그 또한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도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혜를 따라서 하시지 않고 당신의 지혜를 따라서 행동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실패의 모험을 무릅쓰지 않으셨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실패할 수 없는 어떤 일을 하신 것입니다. ? 그 방법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은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 여기에 많은 형제들의 맏아들이 계시며, 여기에 새로운 인류의 머리가 계십니다.  여기에 실패할 수도 없었고 실패하지도 않은 어떤 것이 존재합니다.


⑥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방식을 그의 아들 안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구원이 떨어질 수도 없고 떨어지지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예가 수반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⑦ 진리 자체는 결코 편의에 따라 조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진리는 영원합니다. ? 진리는 고정되어 있습니다. ? 진리는 확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 편의에 따라 조정하는 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 편의를 따라 조정하는 일은 우리가 그것을 제시하는 방식 속에 있는 것뿐으로 우리가 본질적이지 않은 주변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을 때만 존재합니다.

 

 

 

 

5.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감사의 법칙들(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우리는 이제 이 전체 문제를 주관하는 어떤 보편적인 원칙들을 설정해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① 원칙은 진리의 여러 부분들과 대목들은 그 자체로가 아니라 전체와의 관계에서만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지체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어떤 특별한 부분이나 지체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항상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 점을 인식하는데 실패하게 될 때에 교회의 여러 방면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② 개별적으로 각각 따로 떼어서 생각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데, 여러 운동들의 결함이 그것입니다. 예언운동, 성결운동과 같은 운동들은 특별한 것들을 내세움으로서 전체로서 생각되어야 할 부분까지도 그 자체에 모두 포함시킴으로서 전체적인 균형을 잃고 탈선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③ 진리의 개별적인 국면이나 어떤 특별한 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항상 다른 교훈들과 일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전체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일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 진리에는 서로 모순 되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진리의 모든 부분들이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되 마치 몸 안에 있는 손과 발이나 다른 어떤 지체가 서로 모순 되거나 충돌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 예화 : 중세 초기에 살았던 매우 경건하고 헌신적인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최고의 야심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는데, 그녀는 이론적인 기독교에 대해서는 조금도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다만 믿음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얼마 뒤 그녀는 자기 남편들과 자녀들, 가정을 버려두고 하나님을 위한 전임 봉사사역에 종사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이 확신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는데, 그녀가 집을 떠날 때면 어린 자녀들이 울고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큰 희생적 봉사를 기꺼이 계속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이라는 식으로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그와 같은 경우에 있어서 문제는 그 여자가 한 국면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의 다른 교훈을 망각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최고의 임무는 자기 가족을 돌보고 자기 어린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것은 남자를 보필하고, 둘이 한 몸을 이루어 자녀를 낳고, 그 자녀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여자의 크고 영광스러운 역할입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그 여자는 다른 부르심의 확신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과 사회의 근본적인 법칙 중 하나와 충돌하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것입니다.] ? 사람들이 한 교리, 한 진리를 따로 떼어놓고, 동일하게 확실한 다른 어떤 교훈과 충돌한다는 걸 알지 못할 때에 많은 부작용을 낳습니다.(가족은 하나의 근본적인 단위로서 어떤 분열도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④ 우리는 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그것을 중요하게 여겨 중심에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 부분들은 그 자리가 있으니 결코 인위적으로 중심의 자리에 갖다 놓아서는 안 됩니다. 한 부분이 너무 강조되거나 너무 집중되어 큰 것인 중심의 영광을 감소시키게 해서는 안 됩니다. ? 초대 교회 가운데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보는 것으로 이해되어, 먹고 마시는 것이 중심적인 논점이 되었는데, 이런 분쟁은 하나님의 나라 자체를 모질게 짓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나의 임금이심을 자신에게 상기시키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또한 내 안에 계심을 상기시켜야 합니다. ? 나의 최대의 관심은 먹거나 마시거나 어떤 날들을 지키거나 이것저것 다른 것을 행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오직 그 임금께서 내 마음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이 내 최대의 관심이어야 합니다.

 

 

 

 

6. 하나님 나라 시민의 생각(17~19)


우리가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주도적인 생각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천과 관련하여 항상 이 나라에 속한 백성들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①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하나의 어떤 결심을 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긴바 되어,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된 탁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②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 왕국에 부속되어 그 왕에게 통치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③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모든 나라와 다르기 때문에 세상 나라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④ 이 나라의 본질에 비추어서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점은 그리스도인 삶에서 큰 문제입니다. ? 고전 3:1,3 ? 고전 1:20? 고전 6:1~3 ? 고전 2:16 ? 빌 2:5 ?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전혀 민주적이지 않고 또한 군주적이거나 소수에 의한 과두 정치적이지도 않습니다. ? 교회 안에서 매우 열심 있는 방식으로 기도하는 영적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교회 회의에 나오게 될 때 마귀가 된다는 것을 가끔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일관성 있게 끌고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말하는 것은 “이것은 사업 문제이다.” “나는 내 권리와 내 의견을 가지고 있다.” “어째서 그것을 포기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라고 하며 흥분하고 열을 냅니다. ?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그 법을 알아야 하는데, 옛 방식, 육적인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가서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하는 모든 일, 특히 교회 영역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은 이 전체의 빛, 즉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비추어서 숙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⑤ 하나님의 나라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고 그 나라에는 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 그러나 우리는 전체에 대한 인상, 큰 것에 대한 인상을 끼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 아니면 여러 부분들에 대한 인상만을 끼치고 있는지, 예를 들어 도덕성은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인데 그것을 마치 전부인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인은 어떠어떠한 일들은 하지 않는 사람, 혹은 어떠어떠한 일들만 하는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인상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⑥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항상 우리 마음의 첫 면에 간직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사고방식 전체를 통제하고 조정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들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합니다. ?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행하는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의의 선언을 받은 사람들이고, 의롭다 하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받는 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 그들은 이전에 육체 안에 있었으나 지금은 성령 안에 있고, 이제 의의 영역에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 우리의 방식은 이제 새로운 틀, 즉  가르침의 틀 안에 부어짐을 받고 인도하여 맞추어진 새로운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는 변혁이 일어난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음은 여전히 상세한 어떤 행실과 윤리적인 자질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속한 영역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특별한 행위의 차원에서 우선적으로 행동해 모든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이 속한 나라, 그 나라의 임금에 맞추는 차원에서 행실의 모든 문제를 바라봅니다.(벧전1:16) ? 그리스도인들은 일차적으로 상세한 국면에서 의의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심오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앞에 옳게 되는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 의의 영역, 의의 통치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의라고 규정지을 수 있습니다.

 

 

 

 

7. 평강을 망치는 병적 섬세함(17)


하나님 나라 자체나 그 나라 안에서의 삶의 진정한 성격과 본질을 생각할 때는 “”라는 용어를 생각하였고, 이제는 “평강”이라는 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평강은 “”로부터 직접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전가된 의로움을 얻었으니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합니다.


① 우리가 평강과 안식에 있어서 부족하게 되면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보편적으로 그릇된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 이런 사람들은 그릇된 일을 할 것을 걱정하고 겁을 낸 나머지 항상 안달하며, 생각이나 마음 전체 속에서 항상 쉼이 없습니다. ? 반대와 비평을 받을 것이라고 항상 생각하여 자기가 만난 어느 누구와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않으려 하며, 이런 저런 문제에 대해서 싸우려 듭니다. ? 비판은 자기 방어구조의 한 부분으로 자기의 입장에 관해서 너무 두려움을 가지거나 걱정하는 나머지 비판적인 태도와 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 이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모습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말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상세한 것들에 너무 지나치게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에 대해서도 다시 두려움의 조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②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 자신의 권리, 자신의 요구 사항, 자신의 즐거움, 자신의 행복에 집중현상을 보이고, 그것이 모든 다툼과 분쟁의 원천이 됩니다. ? 자기 보호와 자기 방어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 남편과 아내 사이나 부모와 자녀, 상전과 일꾼, 여러 나라들 사이 역시 그러합니다. 항상 “나 자신”이요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을 거절합니다. ?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 같다. 너희는 저 바깥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정확히 똑 같이 행동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들여오신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답변만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④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벌하려고 자기 삶의 상세한 국면들을 정밀하게 살피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⑤ 구원은 사람들에게 그 안에 있는 평강을 줍니다. 우리 복되신 주님께서는 이 내면적 평강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특히 당신의 지상 생애가 끝나갈 무렵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⑥ 우리의 마음이 안식하므로, 더 이상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겁을 내거나 신경질적이거나 비평적인 상태에 있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형벌이 있는 두려움”을 버렸으며 우리는 생명의 위대함과 영광, 그 생명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진지함을 인식하기 때문에 안식할 수 있습니다.


⑦ 일단 우리가 내면적인 평강을 가지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대한 끊임없는 병적 걱정으로부터도 건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고전 4:3) 그것이 평강의 궁극적인 핵심입니다. ? 우리 자신 속에 안식을 가지되, 자기 자신도 자신을 판단치 아니하는 정도로 안식을 가지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⑧ 하나님의 나라는 평강입니다.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화평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큰 특성입니다. ? 그들의 하늘 아버지는 평강의 하나님이시며, 그들은 그 평화를 나누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 그리고 그들은 아버지와 같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⑨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의 왕”일 뿐만 아니라 또한 “평강의 왕”이십니다.(사9:6) 그리고 우리는 평강의 왕에게 속하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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