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서신

[스크랩] 로마서 강해 2

공 상희 2009. 5. 6. 14:10

 

로마서 강해 2

 

 

마틴 로이드존스

 

 

 

 

 

 

성경: 롬4:9-17절

 

 

 


4장 9~17절 :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 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 오직 믿음(9~17)


사도 바울은 이미 1절과 5절에서 유대인들이 행위가 구원의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는 반론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이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과 시편 32편이 역시 이 교리를 어떻게 뒷받침하고 있는가를 계속 증명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대목에서 바울은 두 가지의 더 심각한 반대를 대처하고 있는데, 첫 번째 반대 는 9~12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행위가 그렇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필수적인 것이긴 하다는 주장을 논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는 13~16절까지로서, 거기서 그는 똑같은 방식으로 유대인들처럼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이 아브라함을 받는 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은 할례받기 전까지만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실 동안에도 해당된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참으로 완강하며 교활한 불신앙의 특징은 그들의 주장이 꺾이게 되면 또 다른 주장이 즉시 고개를 쳐든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언제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구원에 합당한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공격하며, 인간 측에서 아무런 할 일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며, 자신에게 어떠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주장합니다. 그리고 구원이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라는 교리를 듣고 분개합니다.


① 구약적 지식이 없이는 신약의 논증, 특히 바울 서신의 논증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② 그래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할례를 받았을 때가 아니라, 무 할례 가운데서 라는 것은 이 논증의 가장 핵심적인 사안입니다.


  ?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는 14년 전에 받았던 칭의에 대한 보증, 즉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라”(요6:27; 엡1:13~14 )는 뜻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의가 전가 된 것이 진짜임을 보증하는 표로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입니다.(11절)


  ? 아브라함 이전에도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람들은 아벨과 에녹, 노아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방법을 뚜렷하고 노골적으로 확증시킨 최초의 경우는 아브라함에게서 이었습니다. 전에는 그것이 법률적인 방식으로서는 선언되지 않았습니다.

 

 

 


③ 12절에서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역시 할례에 속한 자들 중에서 믿는 사람들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과 같이 무 할례자들 중에서도 동일한 신앙을 가진 믿음의 동행자들의 조상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④ 13절의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는 말씀은 아브라함의 역사 가운데 있었던 진술입니다.


  ? “약속” 이란 의미는 창15:7 에 확실히 나타나 있는데, 그것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곳은 창22:16~18 로써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고 하신 말씀으로 사도바울이 18절에서 말한 약속이 이 약속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포착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이 약속이 율법이 모세에게 주어지기 430년 전이라는 것입니다.(갈3:17 참조)


  ? 그리고 “후손” 이라는 말은 갈3:16 에 우리를 위해 이 말에 대한 정의를 내려놓았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또한 이 말씀에서 창17:7,8 과 같은 구절에 대한 참된 의미와 이해를 얻게 됩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말씀 또한 긍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서, 그리스도는 “후손” 이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만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후손” 이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⑤ 우리가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를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고, 그럼으로써 약속에 따라 상속인이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팔레스틴 땅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것은 엡2:12,13과 엡3:5,6 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2. 전능자의 은혜로 보증된 구원(13~17)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바울의 세 번째 논증 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의 신앙에 대항하여 반대하며,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율법에 대한 구약의 교훈을 묵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그들의 반응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 특별한 문제점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맺어진 약속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① 13절에 그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맺어진 것은 율법의 중개를 통해서가 아니고 믿음의 의를 통해서라는 명확한 진술이 있는데, 그 역사는 아브라함의 사적을 다룬 창세기의 여러 장들 가운데서 발견됩니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했을 때 어떤 의미로든 율법을 염두에 두고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순전히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며, 그것은 순전한 은혜이며 순수한 약속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행하고 행치 않아야 할 것에 관한 특별한 조건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적으로 언약의 문제로 다루었습니다.


  ? 언약이 하나님에 의해 아브라함에게 맺어진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율법은 430년 후에야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② 사도 바울은 14,15절에서 율법 자체의 본질에 근거하여 또 다른 주장을 합니다.


  ? 만일 그 약속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맺어진 것이라면, 믿음이 발붙일 틈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어떤 일은 명하고 다른 일은 금함으로서, 항상 우리의 행위와 행동과 품행과 소행 등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을 내세우는 순간 우리는 행위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믿음은 전혀 소용없는 것이 됩니다.


  ? 만일 율법을 내세우면 “그 언약 역시 쓸모없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율법을 지키는 조건으로 언약을 맺으셨다면 그것은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그 언약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 율법은 언제나 진노를 이루는 것이며, 진노는 축복의 약속과 정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진노는 심판을 의미하며, 약속은 기업과 생명과 기쁨과 영광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언약이 율법의 중보를 통해서 맺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우리들 모두를 할 말이 없게 만들고 절망하게 하며, 우리 모두를 정죄합니다. 그러므로 언약이 율법의 중보를 통해서였다면 단 한 사람도 유익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③ 언약은 율법의 중보를 통해서 오지 않았음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13~15 절에서 표현했으며, 사도 바울은 이제 16,17 절에서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들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함이니라.”


  ? 행위와 은혜는 서로 반대되는 말로서 서로 혼합시킬 수 없으며, 만일 행위를 은혜의 체제 속으로 끌어넣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며, 그것은 별개의 것으로 결코 이 둘이 함께 취급될 수 없습니다.


  ? 율법 아래에서는 언제나 행위와 공로의 문제로서 그것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게 되지만, 은혜는 전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서 어떤 공로도 요구도 달라고 소리하는 것도 전혀 없습니다.


  ? 믿음의 길만이 전적으로 은혜로 이끌어 주며, 그러므로 모든 영광이 하나님과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증합니다. 구원에 있어서 영광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므로, 만일 믿음 외에 어떤 것을 끌어 들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깎아 내리는 것이 됩니다.


  ? 구원이 믿음으로 되어야 하는 이유는 믿음이 은혜가 역사하는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④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완전하였을 때 실수하였고 타락하였는데, 아담은 죄로부터 자유로웠으며,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을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산 안에서 조차, 그의 성품 안에 죄가 없는 조건에서 조차 타락하였다면, 죄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속해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⑤ 전능하신 분외에는 성도의 견인을 보충할 자가 없으며, 그분 외에는 우리를 궁극적인 구원과 영화에 이르게 할 자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교활한 죄인이라도 소망이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계획하시고 목회하신 바를 결단코 이루십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것이며,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 약속은 모든 후손에게 “확실한” 것입니다.

 

 

 

 


성경: 롬4:18-25절

 

 

 


4장 18~25절 :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1. 믿음의 본질(18)


사도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알게 될 것이지만 23,24절에서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함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고 한 것과 같이 칭의에 대한 진리를 보여 주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진정한 목표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사도가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해서 여기서 말하는 바는 언제나 믿음에 속한 것과 믿음의 모든 측면인데, 그가 믿음에 관해 말하는 것이 칭의에 대한 것 뿐 아니라 생활과 전쟁, 난관의 극복 등 신앙 행위의 전체 영역에서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그의 믿음이 그로 하여금 정확히 무엇을 행하게 했느냐가 관건일 것입니다.


① 그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에게 맺었던 언약의 놀라운 말씀을 믿게 했습니다.


  ? 육신으로 죽어있던 몸을 통해 주어질 자손에 대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그 언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된 이 약속을 분명하게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이 내 때를 바라고 즐거워했고 그를 보고 기뻐했느니라.” 는 말씀의 뜻이 그 점을 함축합니다.


  ? 아브라함은 뚜렷하게는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행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 즉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보내서 구원하실 것이며 그 아들은 육신을 따라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또한 이삭을 통해서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그분을 세우실 것”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신 뜻을 알았던 것입니다.


 


②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엄청난 말씀을 의지하여 믿도록 하였습니다. 믿음은 증명을 요구하지 않으며 증명거리도 찾지 않습니다. 어느 의미에선 믿음은 그러한 증거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족하고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참 믿음이란 언제나 그 안에 확신의 요소를 가진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 믿음은 앎이며, 지식의 요소가 있어서 “완전히 설복되어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 믿음은 지각을 함유하고 있으며, 그것은 가슴 속에서 전인격으로 일어나고 완전히 확신함에 거합니다. 이것은 매우 참되고 본질적인 신앙의 요소입니다.


 

 


③ 참 신앙인도 의심의 공격을 받을 수 있지만 그들은 언제나 의심을 극복하고 그 의심에 바른 대답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 자체가 불신앙이 아니라, 그 의심을 바른 것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의심이 증폭되어 그것을 따르는 것이 불신앙인 것입니다.

 
④ 불신앙의 요소는 언제나 어려움만을 바라보게 되고 상황과 조건만을 따지는 지성적인 판단에 의지를 합니다.


 

 


2.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18~22)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강하게 하였다는 말씀으로 그것이 믿음을 강하게 하는 비결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우리 자신을 강하게 할 수 있으며, 우리의 믿음도 강하여 진다는 말입니다.

 


① 아브라함의 두드러진 신앙의 비결은 바로 자기 몸과 사라의 나이에서 오는 어려움만을 보지 않았고 또한 약속의 대상에 머뭇거리지 않았으며, 그 두 가지 것에 낙심치 않고 대신 하나님을 바라고 우러러 보았던 것이 바로 신앙의 참 비결입니다.

 


②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모든 영광스러운 “속성”을 숙고해 보고 명상함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관한 진리를 깨달음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를 경배함으로서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빛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위탁함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 영원성 ? 편만성(무소부재) ? 전능성 ? 의, 공평, 진리, 거룩, 불변성, 영존성 ?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마음(목적)을 바꾸시지 않는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동일하신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가장 확실하게 이루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믿었으며, 그것에 대하여 명상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③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서, 믿음은 하나님을 순전하게 믿는 것을 말하는데,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직 그만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없고 그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만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없습니다.

 


④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더 하나님을 바라보며 더 크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아는 것이며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그분을 신뢰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것은 신앙의 가장 중요한 동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을 적용시키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에게만 관심을 두고 하나님에 대하여 얘기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덕을 세웁니다.


 

 


3. 우리의 칭의를 위한 부활(23~25)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점을 지적한 사도 바울은 이제 23~25절에서 그것은 어떤 인간도 생각해 낼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라는 것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그는 이 위대한 이신칭의의 논증을 매듭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 관한 진술이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돼서는 안 되며, 아브라함에게 진리였던 것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진리입니다.

이것만이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이며 다른 길은 없다는 요지입니다.

이제 의롭다 함을 얻는 이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바울의 답변을 듣게 될 것입니다.



① 하나님을 믿고 영화롭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믿음으로서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언제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위대한 거룩한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싶어 하는 믿음입니다.



② 그 믿음은 특별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단순히 일반적인 하나님 신앙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특수한 신앙입니다.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인 부활을 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기독교의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하는 것도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되며 우리의 죄는 그저 우리 가운데 있게 됩니다.

 


③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정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죄에 대한 심판의 차원에서 정죄를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는데, 만일 하나님께서 살리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죄책에 대한 심판을 담당하실 수 없었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그의 아들이 사역을 완성시켰으며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고 선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분명하게 보는 것은 그의 부활 안에서 입니다.

 

 

 

 

 

성경: 롬5:1-2절

 

 

 


5장 1~2절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1. 하나님과 화평의 양면성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평을 가진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에 대해 이루어진 그것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나 사람, 그 어느 편에서도 화평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사람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공로의 결과로서만 모든 원수됨의 원인이 처리되어 하나님이 사람과 화평 하는 것처럼 사람도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양편의 이런 화해가 있어서 거기에 “하나님과 더불은 화평” 이 존재케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의 공로로 인하여 죄와 타락으로 인해 깨졌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가 다시 정립된 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는 본문 말씀의 의미입니다.


①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기대하고 있거나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있고 , 이미 얻었고 , 그것을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용서를 받을 것과 천국에 들어갈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소유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화평은 사람의 마음을 쉬게 합니다.


그것은 그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된 이 하나님의 길이 정말 모든 절실함을 채워주는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이 길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와 의와 거룩을 충족시키는가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신 것을 봐서 나까지도 의롭다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리고 심령이 만족하게 되며,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송사에 대하여 분명하게 답변 할 수 있게 되어 평화를 고수하게 됩니다.


? 마귀의 송사에 대해서도 같은 확고함으로 대답해 나갈 수 있는데, 마귀는 우리를 참소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평화를 깨버리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희미하게라도 믿는 사람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이길 수 있습니다.(계12:11)


? 우리가 죄에 빠졌을 지라도, 혹은 갑작스런 시험이 덮쳐오더라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제사장이 계시니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완전한 믿음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넘어질 수가 없습니다.

 

 

 

 

② 거짓 화평의 특징은


? 믿음을 단순히 신념이나 진리에 대한 지적인 동조로 생각하고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 이런 사람들은 주로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에 의지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믿음을 의지하고 자신을 세뇌하고, 자신들의 믿음을 바라보고 그것을 신뢰할 공로로 봅니다.


? 그들은 사죄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의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아 죄의 용서에만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활에 태만하고 거룩을 구하지 않습니다.


? 그들은 죄에 빠질 때에 그것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죄를 가렸다고 하여 너무나 빠르고 쉽게 그리고 너무나 가볍게 자신을 치료합니다.

 

 

 

 

③ 참 화평을 가진 사람은 결코 자기가 화평을 가졌음을 감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가 진정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자기를 주목하시고 그의 은혜로 자기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 그들은 겸손하며,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낮아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 하나님과 우리 주님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언제나 솟아나는 사람들로 기도와 찬양과 감사가 끊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것 중 무엇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그리고 그는 언제나 자기의 생활에 조심하는데, 행위에 의지하게 되거나 자신을 의롭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이루신 일 때문에 자기의 감사하는 마음을 그리스도께 보여주길 원하여 모든 생활에 조심하는 사람입니다.

 

 

 

 

2. 하나님께 나아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주님 안에서 이기 때문입니다.

 

①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이며, 성화를 이루는 것은 하나의 진행 과정입니다. 우리는 주의 은혜와 지식 가운데서 자라나 점차적으로 성화되는 것입니다.


② 우리가 죄에 거할 때가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갈 권리와 나아감을 얻지 못했지만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소개장”을 얻었으며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③ 우리는 모두 본성적으로 하나님께 반역자이며, 하나님 뜻 앞에 우리의 뜻을 주장하고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것 앞에 우리의 좋아하는 것을 주장하였고, 우리는 그를 몰랐으며 그를 욕했고 그를 잊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심판과 보복 밖에는 받을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법적으로 가장 엄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이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시는 대신 용서하시고, 축복하시고, 은총을 부어 주시는데, 그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은혜를 요구하지 못하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값없이 그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모든 축복은 모두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④ 우리의 기도 생활의 특징은 우리가 이 들어감을 얻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총애와 웃음 띤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꺼이 축복하시고, 우리가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의 복락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쓰신다는 것,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었다는 것은 바로 우리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넘치는 위대하고 값진 약속들에 둘러 싸여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된 것입니다.


⑤ 바울이 “서 있는 것”으로 묘사한 것은 신앙의 절대적인 확신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앞으로 주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 은혜 안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3. 소망 안에서의 자랑과 기쁨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란 말씀을 살펴볼 것인데,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의 지위를 자랑하고 “소망으로” 내다보는 이 “하나님의 영광” 을 자랑하고 기뻐 어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는 확신과 확증을 가지고 그것을 내다보고 있으며, 그것에 대한 전망, 바로 그것이 그가 산다는 것 자체를 가슴 벅차게 하는 것입니다.


① 사도 바울은 복스러운 비전, 즉 하나님의 모습을 사모 하고 있었는데, 이는 우리 믿음의 궁극적인 종국이요 모든 것의 최종적인 목표로서, 이 목표는 끝내 우리들이 서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모습을 우러러 볼 수 있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예 : 스데반, 다메섹 도상의 사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변화산상에서 목격했던 주님의 모습]


② 우리 자신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인데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 그 앞에서 견딜 수 있기 위해서 그것은 없어서는 안 될 중대한 것으로 이것은 다시 구원의 최종적 일부로서 우리는 이것을 소망하게 됩니다. 확실하게 이미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이 영광은 우리 속에서 이미 시작 되었는데, 우리를 의롭다 하신 분께서 우리를 영화시키기로 미리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안심할 수가 있습니다.


③ 우리가 하늘을 향해 가는 중에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고후3:18)


④ 우리가 말하는 이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인데 우리는 이것들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이 영광을 포착하기만 하면 우리는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자랑한다.” 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 롬5:3-5절

 

 

 


5장 3~5절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1. 환난과 믿음


사도는 우리에게 이신칭의의 결과로서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 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둘째 로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는 것입니다.


셋째 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는 더 나아가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우리를 기다리는 그 영광을 받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또 다른 증거로서 우리의 믿음이 시험과 고통과 문제와 생활의 고초를 당해 낼 수 있는 면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던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라고 세상에서 그들이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과 동일합니다.

 

① 기독교는 단순한 금욕주의에 불과하지 않으며, 닥쳐온 어떤 환난을 단순히 견뎌내고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환난을 즐거워하고, 자랑합니다. 그것은 그로인해 주어질 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② 그리스도인의 반응은 시험을 참아내는 것만이 아니고, 그것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며, 시험 가운데서도 행복한 것이며, 그것 때문에 그 사실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실상 우리의 소망을 촉진시키고 더해준다는 사실 때문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2~14) 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③ 그리스도인은 시련과 환난이 올 때 처음에는 고민하고 불안해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환난을 처리하기 위해 전진하며, 우리에게 주어질 그러한 영광들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목적과 방법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것을 믿는 믿음의 행사로서 그것을 즐거워하고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④ 환난이 닥쳐오면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그를 더 멀리 떠나게 만드는 조건이 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환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더 그리스도께 밀착되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진정한 평화를 누리며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많은 축복들 때문에 기뻐하며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부끄럽게 하지 않는 소망(5)


사도는 3~4절에서 우리가 당하는 시험과 환난이 그 소망을 요동케 하기는커녕 그것을 더욱 확신케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5절에서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에서 알아야 할 것은 다가올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① 소망 때문에 그는 부끄럼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는 말인데, 진정으로 이 소망을 얻은 것을 아는 사람은 이러한 시련들과 환난들을 극복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자랑할 것이고 그것을 영예롭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소망은 결코 낭패를 당하게 하지 않을뿐더러 우리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게 합니다. 그것이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한다.” 는 뜻입니다.

 

②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라고 사도는 그 이유를 댑니다. 부은바 됨” 이란 말씀은 흘러넘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으며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속에 붓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렇게 해 주심으로 그것을 받은 사람마다 환난 중에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흘러넘쳐 난다면 거기에 대해서 일말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넘치는 확신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③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확신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 바가 되었다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오순절 날에 이러한 일이 있었고 오늘 날에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충만함 속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3. 성령과 확신(5)


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성령님이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장막입니다.

 

② 우리가 계속 믿음을 가지고 나가 끝내 하나님 앞에 확실히 선다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이 증거합니다. 성령께서는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일하시고, “뜻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성령은 나를 끊임없이 감화하고 끌어주고 책망하고 말씀의 맛과 그것을 열망하는 마음을 줍니다. 그분은 나를 권능으로 붙잡고 계시며, 언제나 우리 안에 계셔서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십니다.

 

 

 

 

 

성경: 롬5:6-11절

 

 

 


5장 6~11절 :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1.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6~8)


자기가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커다란 확신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함으로 인해 아무것도 그것을 요동케 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사랑보다, 우리의 구원이 최종적으로 확실하다는 것보다 더 큰 확신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①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해주는 데 있어서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구절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구절의 말씀은 요3:16이 본문의 주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말씀을 떠나서는 칭의의 방법이나 방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자신을 화해시켰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근거로 우리에게 구원과 용서를 허락하시도록 호소하고 간청한 데 대해 하는 수 없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행하신 일로서 창세전에 사람이 창조되기 전, 세계가 시작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 권위 있고, 영광스러운 구원의 길을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 구원이란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있으며 구원이 위대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라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의 사랑은 감정에 끌리기 쉽고 변덕스러우나,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하고 영원합니다.

 

 

 

 

③ “우리가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에서 이때가 언제이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특별한 시점은 역사상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때가 찬” 정확한 시기는 어느 때인지 살펴보겠습니다.


  ?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율법을 그때까지 약 1,400년 동안 소유해 왔던 것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육체가 하나도 없음” 이 입증되도록 이 기나긴 시간이 사용된 것입니다.

 

  ? 이 “기약한 때”에는 헬라 철학도 율법과 똑같은 기회를 충분히 누려봤던 시점입니다.

사상사의 저 위대한 전성시대와 궁극적인 실재에 관한 연구시대가 막 지나갔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자신을 구원할 모든 기회를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 역시 같은 방식으로 로마 문명과 법률, 문화도 그들 나름대로의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이집트의 거대한 문명도, 앗수르, 바벨론, 중국문명도 그러했습니다. 세상은 자신을 구할 모든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 그러나 사람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 바로 이 “기약한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두셨는데, 바로 이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시작하는 것도 여기서부터 입니다.

 

④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도다.” 라는 이 말씀은 주님의 생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주검을 강조하는 말로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나타내는 방식입니다.


  ? 그리스도의 교훈이나 이적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닙니다.


  ? 그분의 주검이 경건치 않은 자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 십자가형은 가까이만 해도 수치스럽고 모욕적이며 불명예스러운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참으로 아는 데는 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상의 확증입니다.

 

 

 

 

 

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측량해 보는 또 다른 방식은 주님께서 그 일을 위해서 해 준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가 얼마나 깊은가를 재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용한 “힘이 없는”, “연약함”, “경건치 않은”, “죄인들” 이라는 이 어휘들에서 우리는 어떤 영적 능력도 전혀 가지지 못한 “전적 무능력” 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땅히 알아야 할 때도 알지 못했습니다.


? 우리는 연약하고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를 깨달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본래 영적 이해에 있어서 전혀 무능합니다.


? 이 상태는 죄와 허물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 사람의 의는 더러운 넝마와 같고 더러운 배설물과 같이 해로운 것으로서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에 자연인으로서는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 그리고 우리는 본질상 율법에서 요구하는 의를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⑥ “그 영광을 주님께 돌리려 함” 이란 말은 ? 주님을 자랑한다는 것이며, ? 그렇게 된 것은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안 결과인데, 우리가 영적인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전혀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결과라는 것입니다. 본성은 죄로 오염되었고 부패하였고 어리석어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 결과 본래대로는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⑦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영구한 사랑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로 전락한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을 뿐 아니라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놀랍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탄 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6~11)


우리는 지금 하나님 백성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위대한 증거와 또한 모든 되어진 일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을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두 방면에서 관찰 할 수가 있는데, 즉 되어진 일과 그 되어진 일의 혜택을 받는 장본인들의 경우에서 말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측량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의 너무나도 넓은 사랑으로 인도되어질 것입니다.

 

 

 

 

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무엇인가가 있었는데, 죄의 결과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불경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이 손상되었습니다.


?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로 인식되지 못할 만큼 손상되어 더 이상 하나님을 닮지 않게 된 것입니다.


?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주신 바 사람의 진실한 신성성과 모든 것 위에 뛰어난 영광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자기의 형상을 사람에게 부여하심으로써 사람을 영예롭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 그것은 흐트러지고 사람은 경건치 않게 된 것입니다.

 

 

 

 

② 이제 7,8절의 “ 의 를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 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에서 말하는 ? 의인은 정직한 사람, 율법을 지키는 사람, 계명을 영예롭게 하는 사람, 규칙과 법률을 복종하는 사람, 행동에 있어서 아주 바른 사람을 말합니다.


? 선인은 의인처럼 모든 일을 바르게 행하는 사람이며 더 나아가 사랑에 의하여 통제받는 사람이며, 그는 십리를 동행하여 주며, 겉옷을 요구하면 속옷까지 주는 사람입니다.


[예 : 한 사람이 바른 박자와 바른 연주법으로 피아노를 옳게 연주했습니다. 그러나 똑 같은 악보로 연주하는 또 다른 연주자는 여기에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는 연주에 생명을 불어 넣고 있으므로 사람들을 감동케 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매우 옳았지만 둘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그 묘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인과 선인의 차이입니다.]


? 우리의 서 있는 자리는 의인도 선인도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랑스럽지도 못하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참 모습은 죄인들로 의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의인이나 선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③ 우리는 이렇게 전적으로 대가없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얻게 된 구원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④ 그래서 이 사람들이 자기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을 바라고 즐거워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그들이 자기들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이해하고 포착할 때에 그것을 기뻐하리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3. 더욱 더(9~10)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자신의 선언을 기초로 해서 하나의 논증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데 이 두절 속에 있는 논증은 성경 가운데 나와 있는 구원의 확신이나 최종성에 관한 가장 강력한 논증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초월하는 확신의 방법이 단 하나 있는데, 그것은 5절에서 언급하였던 성령 자신의 직접적인 증거입니다.(롬8:16)


이제 “더욱”이라는 말로서 시작한 그의 권위 있는 추론을 끌어낸 사도 바울의 논증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커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고 우리의 죄가 용서 받은 사실에 감사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버림을 받지 않을까라는 불안한 생각을 가질 수 있으나 바울은 이미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많은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① 바울은 “이제 우리가 그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이라고 말하는데,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이 포함되는 법률적이고 법정적인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셔서 우리를 의로 여긴다고 선언하시는 것이 됩니다.

 

② 칭의는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칭의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편으로 그것을 제정하심으로서 가능케 된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책의 문제는 해결 되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는 이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피로서 가능케 된 것입니다.

 

③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거듭남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때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거듭남은 회심의 순간에 동시에 이루어지지만 의롭다 칭함이 먼저 있은 후에 거듭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재판을 받은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결단코 다시 정죄함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④ 우리에게 성화와 영화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는 한 과정으로 남아 있지만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불의한 때에 그러한 조건에 관계없이 이미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되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이 복음이 우리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4.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발전 된 논증(10)


지금 이 순간에도 사도의 관심은 오직 우리가 구원과 구원의 최종성에 관해 확신하는 것이며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으며, 영원토록 안전하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위대한 논증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에서 발전시켜 왔습니다.

 

①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관해 무엇인가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상태나 조건이나 신분이나 관계는 원수 사이에서 되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 화목을 얻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우리의 어떠한 조건 여하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되어 우리가 얻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을 멈추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복종하고 그를 경배하기 원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화목을 얻게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②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 되는 것은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의 피를 인하여”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필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사 십자가의 치욕과 고난과 수치를 당케 하셨을 리 만무합니다.


그것은 ?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롬3:26).


? 하나님께서는 사랑도 되시지만 공의의 속성이 있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전존재로서 행하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이시면서 동시에 언제나 공의로 행하십니다.


? 하나님은 거룩이시오, 빛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는 두려움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화목제물이 그렇게 필수적이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른다고 덮어두실 수 없으며, 그 죄를 벌하시겠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는 죄를 벌하셔야만 하고 그래서 분노하셔서 독생자 안에서 죄를 형벌하심으로써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으며, 그의 공의는 만족되어 우리를 보실 수 있는 것입니다.

 

 

 

 

③ 이제 우리가 죄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꼭 죄에 빠질 것이지만,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

 

④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는 본문에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누리게 될 영광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참조 : 시편 33편, 34편, 103편, 눅1:46~47; 빌3:1; 4:4]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우리는 애통하는 것이나, 슬픔이나, 죄나, 수치가 없는 나라에 살게 될 것인데, 그때 우리는 육신마저 완전히 영화롭게 되고 죄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 롬5:12-21절

 

 

 

5장 12~21절 :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1. 새로운 대목의 서론적 강해(12~2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의 생명 속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구원이 용서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전체 지위와 입장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는 ? 원죄의 교리이며 ? 창세기 1~3장의 역사성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언약과 계약을 통해서 사람을 다루신다고 가르치는 ‘언약신학’의 차원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2. 우리와 아담의 관계(12)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는 문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때 하나의 문제가 저절로 떠오르게 되는데, 만일 우리 모두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정확히 말해서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며, 우리는 아담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문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며, 죄는 모든 사람에게 미친 죽음의 원인” 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① 히브리서 7장 9~10절에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에 레위는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이 죄를 지을 때에 아담의 허리, 즉 아담의 행동에 따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②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자연적인” 머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전체 인류의 총수이며 대표로 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나는 너와 언약을 맺음으로 네가 누릴 모든 복락은 너의 자손들에게 미칠 것이고, 네게 임할지 모르는 어떤 심판도 너의 자손들에게 임할 것이다. 네가 행동할 때 단 너 혼자만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너를 인류의 총수와 대표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하는 것은 네 자손들 모두를 통째로 끌어갈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우리의 연대적 머리요 대표라는 것입니다. [예 : 십계명 가운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아버지의 죄를 자손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한다.” 는 말씀, 기타 성경 가운데서 자주 발견됨]


③ 모든 사람들과 아담의 관계는


? 우리는 아담 안에서의 우리의 타락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하여 말하며,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 즉 오실자의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 아담은 인류와 인간성의 머리라고 하는 양편에 다 해당됩니다.


? 아담과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있으므로 각자는 언약적 머리입니다.


 

 


3.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15)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아담의 허리에 있었습니다. 아담은 우리 모두의 조상이요, 시조로서 모든 민족이 그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아담과의 관계는 육신적인 계통과 육신적인 전승에 기초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육신적인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다시 나지 않고서는 육신적인 혈통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할 수 없습니다.


① 본문에서 “범죄” 란 낱말과 “은사” 란 낱말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 “범죄” 는 아담의 범죄이며, 그가 저지른 불순종함으로서 인류가 타락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 그런 행위의 결과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었다.” 고 함으로서, 범죄와 죄책은 사망을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말은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왔고 사망은 언제나 죄에 대한 심판의 일부분으로서 주어집니다.


? 그러므로 사망은 우리가 번 일종의 노임과 같습니다.


? “그러나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라는 말씀에서 은사 는 “범죄” 와 완벽한 대조를 강조하여 값없는 선물로서 우리의 삯과 관계없이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② 그리고 “더욱(더욱더: much more)” 이란 말은 모든 것에 더하여 라는 의미입니다.


더욱”이란 말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아담과 우리의 연관은 필연적으로 모두 죽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 이 말은 사망과 생명 사이의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사망은 확실하게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생명만큼 능력이 있지는 못합니다.


?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불멸의 생명으로 존재하는 영생, 즉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계시는 한 분이 계시는데, 그것이 사망보다 “더욱더” 크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망이 확실하다면 생명은 “더욱더” 확실하여 우리는 더 이상 사망 아래 있지 않는다는 생명의 능력을 체험적으로 “더욱더” 라고 하는 것입니다.


? 그리고 또 다른 의미로서 만일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가져왔다면 그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은 “더욱더”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더 기뻐하는 것입니다.


? 구원의 축복이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잃은 것보다 “더욱더” 많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멸망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죽게까지 하셔서,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더” 크다는 말입니다.


? 사망은 끝이며 종말이라서 열매를 내지 못하며, 아무것도 상상해 낼 수 없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생명으로 인도하여 넘치게 되고 발전하고 번성하고 계속 증가하는 바로 생명의 본질입니다. 그 씨는 충일된 생명으로 이 은혜가 항상 흘러넘칩니다.

 

 

 


③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되었으며, 무죄 상태에 있었고 그는 죄를 짓지 않았으며 그의 본성은 죄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거기엔 그 상태에 부정적인 것이 있는데,


? 그것은 범죄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 그리고 그에게 없는 것이 또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④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담의 신분보다 더 나은 신분으로 옮겨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중의 일원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담에게 부족했던 타락의 가능성이 제거되고 아담이 가지지 못했던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게 되었으니 분명 아담의 신분보다 더 나은 신분으로 옮겨 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한 범죄와 많은 범죄(16~17)


① 이제 본문이 지적하는 “한 범죄” 와 “많은 범죄” 에 대하여 살펴보면, 한쪽에서는 아담의 한 범죄가 정죄에 이르렀고 다른 쪽에서는 “많은 범죄” 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행동에 의해 장악됩니다. 심판은 한 죄의 결과인 아담의 한 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진 유죄 선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가 다른 쪽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그러므로 한편에선 아담의 불순종이 우리에게 심판을 가져오게 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② 다음에 살펴볼 것은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나니” 라는 말씀입니다. 사망은 모든 사람을 이기고 모든 육체를 장악한 정복자로서 왔습니다. 그래서 전 인류는 아담 한사람의 죄의 결과로 사망의 폭군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일생이 매여 종노릇하게 되어, 그들은 언제나 죽음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내세와 죽은 다음과 무덤의 소망을 전혀 가질 수 없으므로 죽음에 대한 공포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영광 안에 있는 생명에 관해 알지 못하며 이 세상의 생명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장 가공할 일은 죽음입니다.


③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할 것이라.” 는 말씀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것” 의 반대입니다. 이 사실은 참으로 엄청난 차이입니다. 우리 주님의 역사의 결과로 “생명 안에서의 왕 노릇” 함으로서 사망이 더 이상 우리 위에 왕 노릇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정복된 죽음 위에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5.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인의 확신(18~19)


로마서 5~6장의 대 주제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한 원리는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개별적으로 우리를 다루시기도 하지만 우리를 연대적으로 또한 한 총체의 한 부분들로 취급하시기도 한다는 겁니다. 아담이 한 일이 그의 백성들을 위해 확실한 결과를 가져왔듯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도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 확실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백성으로 속해 있으며 아담이 우리의 연대적 머리였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백성의 연대적인 머리요 대표라는 개념을 붙잡아야 합니다. 바울의 논증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인류를 이러한 연대적인 방식으로 취급하셨다는 것입니다.


①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스런 사람으로 여겨진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인정되어 죄인의 신분인 옛 신분과 인연은 끊어지고,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② 우리는 이제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 생명과 영생의 세계와 그 영토에 속한 사람입니다.


③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요, 이제 내가 죄지을 때 다시 율법을 거역하여 죄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죄수의 행위가 아니라 자녀의 잘못된 행위인 것입니다.


④ 그러므로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에 관련된 것으로서 진노의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신분입니다. 


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실패하고 실수하는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자신을 죄인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6. 율법의 기능(20~21)


사도 바울은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못 박아 두었으며,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했으며, 이제 거기서 더 나아가 12절로 시작하는 문단에서는 율법이 우리를 정죄조차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유대인들이 율법이 의롭게도 하지 못하고 정죄조차 하지 않는다면, 율법은 어떤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율법이 주어진 목적이 무엇이냐고 반문해 올 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답변 하고 있습니다.


그 의문이 떠오른 것은 바울이 13~14절에서 사실상 이 점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악하여 율법이 모세를 통하여 공표되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며”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사망이 왕 노릇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맨 처음 정죄함을 받은 것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님이 분명한데, 정죄란 이미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① “가입했다(따라 들어왔다)” 는 그 말은 율법은 첨가적인 것으로 하나의 특별한 기능을 위해서 때가 차매 들어온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 구원의 근본적인 것처럼 근본적이지 않고 그저 들어온 일이요, 첨가되어 따라 들어온 것입니다.


② 율법은 구원의 방도로써 의도된 것이 결코 아니며, 의롭게 되는 것도 불가능하고, 생명을 주는 일에도 불가능합니다. 율법은 범죄를 더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세 가지 방식으로 죄를 증가시킬 목적으로 주어졌습니다.


? 율법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법전화 시켜 죄를 규정하고 죄의 진정한 본질을 깊이대로 이해하고 알도록 도와주며, 무지와 어둠을 재는 척도가 됩니다.


? 죄에 대한 자각을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나 지적 정보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그릇됨을 알게 합니다.


? 그로 인해 후회하게 합니다. 죄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반역한 행동입니다.

 

 

 


③ 율법은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의 면전으로 데려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거나 그를 위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 의해 모욕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은 자기만족에 빠져있는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지 않았다고 하거나 성자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가 없었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은 없습니다.


④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주어졌으며 우리를 구원할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절망감을 느끼기까지 죄 가운데 있는 우리 자신을 알게 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7. 흘러넘치는 은혜(20~21)


우리는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 는 첫째 진술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거기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고 말합니다.


① 여기서 “넘쳤다.” 는 말씀은 “흘러 넘쳤다” 는 개념을 전달해 주며, 이 말은 사실 “삼켰다.”는 말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가 죄의 효력을 없애버리는 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삼켜 버리고 훨씬 위로 초월하여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는 훨씬 넉넉하여 죄의 효력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고도 남습니다.



② 21절은 어떻게 해서 “죄가 더 심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고 말하는 것이 진리인가 하는 것을 설명해 줌과 동시에 그것은 로마서 처음부터 이 지점까지의 모든 내용에 대한 결정적인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목적은 죄가 더해짐에 따라 은혜는 더욱더 넘쳐 그 죄를 삼켜버린다는 것입니다. 죄가 어떻든지 또는 죄가 과거에 인류에게 행한 일이 어떻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행한 일은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같은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자연법칙” 이라 부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연 안에서 놓으신 법으로서 존재하며, 이 법칙은 너무나도 정확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발명하여 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와 같은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전체적인 목적을 향해 유도되어지며, 그 몸의 일원들이 됩니다. 이 위대한 목표는 그의 무한한 은혜 안에 있으며 우리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리 자신을 개체로 보지 않고 목적과 계획안에서 은혜의 왕 노릇을 보아야 합니다.


④ 은혜는 단지 우리를 돕거나 보조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성취되어집니다. 그것만이 유효적인 우리의 구원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은혜의 힘이란 찾는 것과 살리는 것과 중생시키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지하는 힘” 입니다. 은혜의 제지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심하기 전까지도 그들 가운데 나타나는데 그들이 구원이 불가할 정도로까지 자신들을 내버려 두지 못하도록 합니다. 또한 성령을 훼방하도록 절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제하는 은혜의 능력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필요합니다. 그가 유혹에 둘러싸여 있게 될 때 또 그 마음 가운데서부터 나오는 시험 등에서 필요합니다.


⑤ 그리고 우리의 불멸의 영혼을 상하게 하고 위태롭게 할 것들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 그 은혜의 능력에 대해 감사합시다.


⑥ 또한 성도를 성화하는데 역사하시는 은혜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육체 안에 거하고 있는 죄에 대항하여 나타나는 은혜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귀의 세력을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또한 우리를 깨끗이 할 수 있는데 그 능력만이 우리의 정결을 지킬 수 있습니다.


⑦ 죄는 언제나 빼앗아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건강, 행복,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것들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나 은혜는 나누어 주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미약하고 보잘 것 없이 주는 것이란 도무지 찾아 볼 수 없이 국왕답게 흘러넘치도록 주시는데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받지 못하고 있거나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면 그것은 우리의 수치입니다.


⑧ 그리고 은혜의 왕 노릇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우리에게 지시하신 어떤 특정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행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의 보호하심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잘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피곤하고, 안 되고, 슬픔과 절망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⑨ 은혜의 승리로 인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시고, 영광스러운 완성 가운데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이렇듯 은혜의 통치는 우리를 점도 티도 흠도 없이 될 최종적인 완성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질 “새 하늘” 과 “새 땅” 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백성들인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실 것과 우리가 그와 함께 있음으로 인하여 그것이 영광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확실히 인도해 가실 영광입니다.

 

 

 

 

 

성경: 롬6:1-4절

 

 

 


6장 1-4절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1. 서   론


로마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6장에서 시작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6장을 1~14절과 15~23절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에서는 다소 순수하게 교리적인 방식으로 율법폐기론의 위험 문제 전체를 다루고 있으며, 두 번째 부분은 반 율법주의로 유도하는 그릇된 추론의 어리석음 교리적인 방식으로 보여준 다음에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에서 그것이 전혀 어리석고 이치에 맞지 아니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2. 우리의 신분(1~2)


① 본문의 “우리” 라는 말에서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계속 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 즉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의 입장을 말합니다.


?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독특하고 특수한 지위, 현재 우리가 처한 우리의 존재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서 다시 살게 된 우리의 지위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죄 가운데 거할 수 없다는 논지입니다.


? “우리” 라는 말은 죄에 대하여 죽어 있는 우리의 현재 상태와 상황입니다.

 

 

 

 

② 우리가 거듭나고 의롭다 함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죄의 왕 노릇에 대하여 완전히 죽게 되고, 죄의 영토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의 결과로서 우리가 이런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죄의 왕 노릇과 죄의 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이제 우리는 죄의 체계와 통치와 왕 노릇과 그 나라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 은혜의 나라로 옮겨져 은혜의 통치아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아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져(골1:13) 흑암과 마귀와 지옥의 권세와 그 나라에 속해 있었으나 이제 그로부터 건져내져서 더 이상 그들의 지배아래 있지 않고 은혜라는 다른 통치 밑에 있는 것입니다.

 

④ 우리는 이전의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3:20; 엡2:19)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아담 안에 있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는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진 하늘의 시민입니다.

 

⑤ 이제 우리에게 보증 된 것은 온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이 내게 절대적으로 또 확실하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내가 죄의 통치에 대하여 죽고 은혜의 왕 노릇에 대하여 살아났습니다. 산다는 것은 계속해서 거주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모든 목표인 죄와 죄의 역사와 죄에 속한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권세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감히 죄에 계속하여 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⑥ 우리는 은혜의 통치와 왕 노릇 아래 있으므로 죄에 계속 거주하거나 죄의 삶을 살 수없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라는 말에서 범하는 것은 계속 산다는 의미로 썼습니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하나니” 그런 다음에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4~36) 이것이 아들이 관계하는 곳에 있는 절대적인 자유입니다.

 

⑦ 사람이 죄의 개별적인 행동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계속해서 죄의 체계 가운데서 거주하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 우리는 법적으로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며, 지위에 있어서 완전히 해방이 되었는데도 느낌으로는 여전히 노예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전의 삶의 내제된 기억들 때문인데, 그것은 마치 어린 아들이 자기를 가르치던 종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 우리는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지위와 신분이 옮겨졌지만 옛 습관과 옛 영향으로 인하여 해방된 노예들이 빠졌던 것처럼 우리도 그것을 잊고 마귀의 말을 따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를 피하고, 저항하고, 대적해야 합니다(약4:7)

 

 

 

 

3. 그리스도와의 연합(3~4)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에 대하여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 질문할 수가 있습니다. 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로서, 연합의 교리를 설명해 나갑니다.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연합의 교리는 기독교 진리 가운데서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심오하며, 가장 극적이고, 가장 위안을 주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이처럼 큰 확신과 위안을 주는 교리체계는 없습니다.

 

① “세례 받은” 이란 어휘의 정확한 의미는


? 세례란 생명과 연합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을 인치는 것으로서 이미 성취된 사실을 인정하고 봉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죄의 생활을 뉘우치고 동시에 새 삶의 길을 서약한다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이 홍해를 지날 때에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간접적인 의미에서 모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서의 구속적이고 구원하는 효과를 믿는 우리의 믿음의 표라고 해석합니다.


? 더 깊은 영적 실재, 곧 우리와 그리스도가 죽음과 장사에서 연합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눈에 보이게 나타난 규례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장사하는 표로 물 아래로 내려가고, 부활하는 표로 물 위로 다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일어난 일을 극적으로 그려주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이 지적하는 “세례” 는 물세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세례를 가리킨다고 할 것입니다.

 

 

 

 

②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야기 할 때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친히 죄의 체계와 영역과 통치로부터 결별하는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같이 죽음으로서 죄의 체계와 관계와 통치에 대한 관계를 끝낸 것입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을 통하여 그의 장사지냄도 우리는 함께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장례를 지냈다는 것은 죽은 사실을 확실하게 증거하는 최종적인 행위로서 완전히 끝난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왕 노릇과 통치와 그 체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전혀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백성들입니다.

 

? 죽으심과 장사 지냄에 연합된 우리는 이제 그의 부활하심에도 함께 연합되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영역, 새로운 관계에서 살아나 새 생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죽음 전에 처하여 있던 모든 것이 영원히 끝났다고 선포  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광으로 다시 영화롭게 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결과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시는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롬6:5-11절

 

 

 


6장 5~11절 :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여길지어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음(5~6)


우리가 도달하였던 사도의 논증 요점은 우리가 죄에 더 거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새 생명, 새 체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5절의 말씀은 3,4절에서 말한 것을 반복하고 요약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좀더 진전된 면이 있습니다.

 

① 우리의 죽음과 부활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현재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마음으로 이 구별을 하라고 “본받아”라는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② “그의 부활을 본받아”라는 말은 “새 생명”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죄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바뀐 것입니다.

 

③ 이 진술은 더 나아가 우리의 미래에 있을 몸의 영화까지도 포함하고 있으며, 우리의 지상 생활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서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그가 영화롭게 된 것과 같이 우리의 몸이 영화되는 날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빌3:20) 우리가 그의 죽음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그의 부활을 본받아서 연합한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영적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국면에서 그렇게 될 날은 확실하게 장래에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흠이나 주름 잡힌 것이 없게 될 것이며, 티나 부끄러운 것이 없게 되어 완전해지고 영화롭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고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보게 될 것입니다.

 

④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세례 받게 하시며,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십니다. 우리가 말씀에서 그것을 발견하므로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아는 것은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전혀 체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이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믿은 대로 그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⑤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죄 안에 있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아 정죄함이 결코 없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느낌이 무엇이든, 마귀가 무어라고 말하든지 믿음은 그 약속을 알고 붙잡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영광스러운 체험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말씀을 믿게 된다면 그것이 진리라는 증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2. 자유함을 입음(6~7)


사도 바울은 이제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로부터 두 가지의 추론을 끌어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죄의 몸이 멸하는 것과 ?우리가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① 먼저 “죄의 몸이 멸하여”라는 말씀을 다른 말로 표현 한다면, “죄의 몸이 효력을 잃고, 꼼짝 못하게 하고 무능하게 하기 위하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죄의 몸이란 죄의 전체 덩어리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된 형용적인 용어입니다.


? 죄는 어찌나 크고 어찌나 변화무쌍하게 나타나든지, 또한 어찌나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요리하든지 그것을 하나의 몸으로 비교한 것입니다.


? 사도는 죄를 어떤 크고 유기체적이고 권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고 몸이 살해되고 멸해지는 것 같은 살육이 필요한 무엇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② 그러나 여기서 사용한 “”이란 말은 사실 그대로의 “”, 즉 현재 육체적인 상태에 있는 우리 안에 거하는 죄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12절의 “너희는 죄로 죽을 몸 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 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에서 사용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몸”이란 말이 사용된 구절 : 롬6:6,11,12,13; 7:16,17,18,20; 8:10,11,12,13,23; 12:1,2]

 

③ 죄의 몸 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 죄가 여전히 왕 노릇하며 다스리지만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하지는 않고 단지 나의 몸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④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죄는 그를 지배하는 완전한 지배력을 얻었으며, 그로 인하여 죄는 생명을 지배했으며, 전체적인 몸, 정신 그리고 영을 지배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여전히 그렇습니다.

 

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되었고,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죄의 세력과 왕 노릇에 대하여 단절 되었으며 죄는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 죄는 죽은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할 수 없으며 시험을 할 수도 없고, 선고를 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는 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해당하는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공허한 채로 있지 않고 죄의 영역 밖으로 나와서 다른 영역으로 옮겨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에 더 큰 위안을 주는 것입니다.


? 아직도 우리는 죄와 관련이 있으며 우리의 몸과 상당히 관련이 있지만,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혀’졌습니다.


? 우리는 그와 함께 죽었고 장사되었으며, 그와 더불어 살아났으며, 그와 함께 올라가 하늘 보좌에 앉혀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전혀 새로운 사람입니다.


? 아직도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전에 나의 인격성 전체를 지배하였던 죄가 지금 나의 몸의 지체를 주관하고 있을 따름이요,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 영 안에 있는 나, 영혼으로서의 나, 나의 인격으로서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계실 때에 그는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았습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와서 자연적인 본능과 우리 몸의 여러 가지 강한 욕구와 충동과 힘을 따라서 우리를 시험할 수 있습니다.


? 죄는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도 몸에게 그 세력을 행하고 있습니다.


인간 자체는 구원 받았는데, 그의 몸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하였으며,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롬8:23)고 하였던 것입니다.


? 구원의 목표는 우리로부터 죄와 그 효력에서 완전하게 제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이라도, 아담이 타락 전에 가졌고, 우리 복되신 주님 자신 속에서 보인바 된 상태로 더욱 더 가까워지는 것이고,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동안 몸 안에 계실 때의 그 상태에 더 가까이 접근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영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있으며 하늘 보좌에서 그와 함께 앉힌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우리는 그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가 아직 지배하는 몸에서까지 구원받기 위한 것입니다.

 

 

 

 

3.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10~11)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체제에서 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 그는 한때 잠깐 동안 죄와 사망의 체제에 자발적으로 오셔서 계셨던 적이 있습니다.


?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계시지 않습니다.


그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원한 영광을 되찾으시고 그가 나오셨던 체제 속으로 다시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의 체제에서만 살아계십니다.(딤전3:16)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입니다.


? 어느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주님에 관한 진리를 알려 주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진리인 것이 우리에게도 역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도는 우리들이 그 진리를 꼭 붙잡고, 인식하고, 적용하기 시작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11절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전에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세 가지 원리들이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리인 것은 우리들에게도 진리가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삶, 즉 체험적인 삶은 언제나 진리를 깨닫고, 교리의 이해로부터 연유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문제가 됩니다.


? 그리고 본문에서는 거룩한 삶과 성화의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① “여기다”라는 말의 의미는 “자기 자신을 무엇으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이 번역을 다르게 한다면 “네가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하라.” 또는 “생각하라, 너희 앞에 가져다 놓아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 관한 이 진리를 생각하고 너희 앞에 가져다 놓으십시오. 다르게 번역하면 “결론짓다.”, “미루어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② “너희 자신”이라는 표현은 나의 존재, 나라는 총제를 의미하는 말로서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나라는 존재, 하나님께로 돌아온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나의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③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은


?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셔서 죄 체제에 있지 않으며 우리도 그러합니다.


? 죄에 대하여 죽으라는 강권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 하나의 세력으로서 죄가 죽었다고 여기라는 것도 아닙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가 죄와 사망에 대하여 가졌던 관계에 관한 진리는 우리가 죄와 사망에 대하여 가진 관계에서도 진리라고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④ 우리는 죄와 사망의 영역 가운데서 살지 않고 다른 영역에 속하여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체험이 아니라 나의 서 있는 위치이며, 나의 지위요, 나의 신분입니다. 이것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체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여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줍니다.

 

 

 

 

4.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11)


우리 주님은 아주 잠시 동안 죄와 사망 아래 스스로 들어오셨지만 이제 더 이상 사망의 체제와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는 단번에 죽으시고 다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또한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그것은 영역 체제의 변화입니다. 주님은 예전에 잠시 계셨던 영역으로부터 떠나셔서 하나님의 영역과 체제에서, 하나님과 함께 창세전부터 가지셨던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들도 우리 자신을 “이와 같이.......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으로 여겨야”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체제와 하나님의 영역과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체제 가운데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①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과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게 된 것은 진리입니다. 또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호의를 받는 지위에 있습니다. 그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모든 것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② 죄인은 하나님의 호의를 받지 못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으니 하나님의 호의를 받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 살고 있으며 우리가 그분의 존전에 나아감을 얻었음을 의미합니다.

 

③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서, 그분의 사랑을 받는 자들로서, 그분의 아주 특별한 관심을 받는 자들로서(요17:23)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죄 안에 있는 비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축복에서 끊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④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그의 계획을 내 안에서 이루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보시고 우리가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만드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서 그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느 날은 구원을 받고, 또 어느 날은 구원받지 못하고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 아래 있든지, 죄와 사단의 지배 아래 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일이 중단되어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⑥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를 지었거나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고의로 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고 있으면 죄가 우리를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하여 우리가 구원 받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의심케 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⑦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를 짓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법적인 범법은 아닐 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상처를 주는 일이 되며, 하나님의 은혜에 배은망덕 하는 행위입니다. 자녀들의 죄는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사랑의 징계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징계는 그분 앞에 거룩하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되어 질 것입니다.

 

⑧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다음으로는 ?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감사해서 일 것이며, ? 하나님과의 교제 하는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그렇게 할 것입니다. ? 그리고 이치에 맞는 자신의 삶을 위해서인데, 우리가 속한 위치와 지위에 걸 맞는 삶을 살기 위함이 될 것입니다.[왕자가 거지처럼 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삶입니다.]

 

 

 

 

 

성경: 롬6:12-14절

 

 

 


6장 12~14절 :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1. 신약의 성결 교훈 방식(12~14)


사도는 아직도 그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거짓된 도전을 다루고 있는데, 1절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는 도전에 대하여 여기까지 순전히 교리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말하였으나 이제 그는 보다 실천적인 노선을 따라서 그것을 말하여 나갑니다.

 

① 교리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언제나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복 되신 주님께서는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요13:17)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실천이나 행동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이지를 즐겁게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② 이 실천적인 대목은 앞에서 알아 본 교리의 나타남이요, 그 교리로부터 나온 추론인데, 해석에 있어서 교리와 실천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③ 그리스도인과 죄의 관계에 대하여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데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해석이 옳은지 아닌지를 아는데 도움을 줍니다.


? 사도 바울은 여기서 “너희의 ‘죽은 몸’ 이 아니라 ‘죽을 몸’ 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 여기서 말하는 “”은 우리의 죄 짓기 쉬운 본성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몸, 즉 육신적인 몸입니다.


? 우리의 영혼을 지적한 말이 아니라는 것은 “죽을 몸”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습니다.


? 죄는 여전히 우리의 몸에 남아 있으나 그 몸은 잠시 후에 죽을 몸으로 영원하지 못하고 일시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몸에 남아 있는 죄 또한 그 운명을 같이하게 됩니다.


? 그리고 사도는 우리의 죽을 몸과 장차 영화될 몸을 대조시키고 있으며, 우리의 낮은 몸, 비천한 몸, 죽을 몸과 장차 주님께서 “그의 영광의 몸과 같은 몸”으로 변하게 할 것 사이의 대조를 보이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죽을 몸”에 있는 동안에 우리는 죄로 골치를 앓게 될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죄의 영토와 죄의 체제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에 죄는 오직 몸에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이 영화롭게 되고 죄가 완전히 끊어지고 영원토록 없어질 날이 반드시 오게 됩니다.

 

? 죄가 단지 우리 몸에만 남아 있지만 그것을 억제 하지 못하면 그것이 우리 몸에 왕 노릇하여 우리 몸을 지배할 것입니다. 죄는 그리스도인 안에서 주도적이고 지배적인 역할을 하려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다시는 그리스도인을 주장하지 못하지만 잠시 동안은 그리스도인의 몸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죄는 구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우리의 영혼을 파멸시키지는 못합니다. 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우리의 죽을 몸에 남아 있어서 우리를 괴롭히는 일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④ “그러므로” 란 말로서 우리를 성결과 성화에 관한 신학적 교리로 우리들을 안내하여 줍니다.


? 성화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며


? 영단번에 이루어지는 갑작스런 구원의 체험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 우리는 죄에 대하여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서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성화로 가는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나 지옥의 형벌이 무서워서 성화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내 안에서 마귀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그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완전하게 하셨던,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우리를 그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믿고 알고 깨닫기 때문에 성화를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모든 모욕과 고통을 감당하신 이유가 우리의 죄를 제거하기 위하신 조치였음을 아는 것이 우리의 성화의 동기가 되며, 그것이 우리의 성화되는 방식이 됩니다.


? 그리고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권속이고, 하나님의 자녀이며, 모두가 하늘의 가정에 속한 거룩한 사람들로서 죄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그 나라와 가정을 불명예스럽게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옛 사람이 죽고 매장 되었으며 이제 새로운 신분과 지위가 주어져 하늘나라의 왕자와 공주가 되었는데, 죄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우리의 신분과 지위에 맞지 않는 이치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를 하나님께 드림(13)


이제 우리가 배운 것처럼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는 말씀에서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로 우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해야 할 뿐 아니라 죄에게 왕 노릇하게 할 어떤 도모를 해서도 어떤 식으로든지 죄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의 명령, 하나의 권면으로 다시 한번 부닥쳐 있는 사실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임으로서 그것에 대한 연구를 다시 재개하게 합니다.

 

① 이제 본문에서 “너희 ‘지체’를.......드리지 말라”는 이 말씀은 우리의 의지를 향하여 주어지고 있는데, 이 “지체”라는 말씀은 몸의 한 부분을 지칭하는 말로서 육체적인 몸의 여러 활동들, 즉 인간의 기능을 묘사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전체로서의 몸에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몸의 활동 가운데서 어떤 간단한 부분이라도 우리를 대적하는 세력인 죄에게 내어주어서는 안 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또는 너희 지체를 죄의 병기로 드리지 말라.” 여기에 아주 흥미로운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 죄는 큰 권능이요,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함에 있어서 자기의 나라를 확장시키고, 그의 보좌를 명백히 하고 그가 혈안이 되어 있는 사망과 혼돈을 불러오기 위하여 어떤 수단들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기서 말하는 바는 “너희에게 있는 어떤 것이든지 죄에 대하여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 우리는 몸의 어떤 기능이든지 죄의 도구로 이용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에너지, 말과 욕구, 마음과 생각, 우리의 상상이나 감정,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부분들이고 우리 인격의 표현인데, 어떤 것이라도 죄의 이용물이 되어서도 죄를 위해서 쓰여서도 안 됩니다.

 

 

 

 

③ 이제 사도는 적극적으로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합니다.


? 자신을 하나님께 봉사하는데 내어 주어야 합니다.


? 자신을 그의 뜻에 맡겨야 합니다.


?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상기함(12~14)


사도 바울의 성결과 성화에 관련한 신약 교훈의 첫 번째 특징은 우리 자신부터 출발하지 않는 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이요, 도구요, 병기라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개인의 성결과 성화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언제나 성결 교리와 성화교리를 나타낼 때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실 1~11절까지에서 이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①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자로서 우리가 새 생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죄인의 신분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은 그 자신의 힘과 능력 밖에는 가진 것이 없으나, 우리는 새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그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죽을 몸 안에 있는 죄와 우리 밖에 있는 죄를 저항할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담대하게 죄를 저항해야 합니다.

 

②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행동할 것을 교훈하고 있으므로 인하여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에 종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고 성령으로 다시 나는 순간 능력을 받습니다.

 

③ 우리는 모든 다른 것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언제나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살아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이 처음부터 끝까지의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죄인 중 괴수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해야 합니다.” 우리의 제일 큰 관심은 심지어 자신의 성결도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에 와야 합니다.

 

④ 인류는 두 신분만이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든지 은혜 아래 있든지 입니다. 율법아래 있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나 공로나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전에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언제나 사람에게 와서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죄에서 구원할 수 없고 단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 밖에 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하며(히7:19),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일 뿐입니다.

 

⑤ 그런데 우리는 은혜의 왕 노릇 안에 있어서 은혜의 승리를 누리게 됩니다.


은혜의 모든 목적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든지 마귀의 역사들을 지워버리고 멸하는 것으로서 은혜에 대한 모든 것은 영광스러운 목적을 위해 계획된 것입니다.


? 우리는 이 목적 때문에 우리는 다시 났으며 새롭게 되어  새로운 본성을 받았습니다.


? 그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의 권능을 두시고 새 언약 아래에서 우리를 다루어 가십니다.


? 이 모든 것들은 완전한 계획 가운데서 우리를 위해 수행되었습니다. 우리는 정욕을 인하여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으며, 생명과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우리에게 복주신 모든 하늘에 속한 것으로 제공되었습니다.


? 은혜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므로 결단코 정복될 수 없는 영원한 것인데, 그것이 우리에게 신령한 복으로 주어졌다는 것이 우리의 성결과 성화에 대한 촉진제가 됩니다.

 

 

 

 

 

성경: 롬6:15-19절

 

 

 


6장 15~19절 :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오.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1. 생명으로 설명된 소유권(15~16)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의 성화를 보증합니다. 그러므로 성화를 하나의 분리되고 부수적인 체험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칭의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의미하며, 그것이 우리 죄에서의 구원과 최종적인 영화를 보증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롬8:30에서 그는 그것을 이렇게 진술하는데, “의롭다 하신 자를 또한 영화롭게 하시고”, 그것은 이미 일어난 것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①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 알지 못하느냐”는 말에서 “드리다”란 말의 의미는 “선물하다”, “넘겨주다”라는 뜻입니다. 다음 용어는 “종들”이라는 단어인데, 종으로 섬기는 데는 자원의 요소가 있으나 노예제도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번역은 잘 된 번역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사도가 사용하고 쓴 어휘는 종이 아니라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② 사도는 여기에서 죄의 반대로 순종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사망의 반대는 생명임에도 그는 의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순종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은 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이며, 순종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영위케 하였던 의의 생활로 인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③ 우리가 자신을 어떤 권세에 대한 노예로 드린다면 우리가 그 세력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노예 소유주의 권세가 지닌 특징은 그것이 전체적이고 독재적인 권세라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을 그러한 세력에 넘겨준다면 나는 그 세력의 노예에 불과하며, 더 이상 자유인이 아닙니다.

 
④ 세상은 두 전제주의적 세력만이 존재하는데, 죄는 마귀에게 속하여 그 결과 사망에 이르게 하고, 순종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의 속성인 의를 산출합니다.

 

⑤ 우리는 어느 세력이든 서로 충돌되고 배제됨으로 한 세력의 노예로서만 존재하게 됩니다.

 

⑥ 우리는 결국 우리가 행하는 바에 따라 우리의 주인이 누구이며, 우리의 지위가 무엇인가를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은혜 아래 있으니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⑦ 본성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거듭나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본성은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순종과 의와 거룩한 삶에서 스스로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죄를 계속 짓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믿음과 순종(17)


이 구절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려주는 신약성경의 가장 분명한 정의들 가운데 하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본 바와 같이 우리를 소유하고 싶어 하고 삶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두 세력이 있는데 두 세력의 모두에 속해 있을 수 없고 한 세력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에 의해서 누구의 노예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전의 어떠한 조건과 관계없이 모두 완전히 새로운 지위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도는 성경 가운데서 발견되는 것 가운데 가장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하나 던져주고 있습니다.

 

① 그리스도인은 큰 변화를 이룩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죄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었으며 아무도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어떤 큰 변화를 가져와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인격 전체에 영향을 주는 변화입니다.


? 마음과 이지와 의지 전체가 감동되는 변화입니다.


? 이 변화는 너무 커서 소유권의 완전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죄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의와 순종과 하나님 편에 속한 모든 것의 종이 되는 신분의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②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는데, 우리는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언제나 노예입니다. 그들이 죄의 종으로 태어났고, 두 번째 출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됩니다.


? 인류는 자신을 스스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나 도덕적인 품행의 결과로도 구원을 창출해 낼 수 없습니다.


? 우리는 죄와 허물로 인해 절망적이고, 죽어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늘 보좌에 앉히셨습니다.(6,7절)

우리를 인도하여 이 새 틀에 부은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 그래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고 오직 하나님께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철저하고 절대적인 노예였으며 사단의 노예요, 움직일 수도 없고, 강하게 무장된 그것을 이겨낼 수도 없지만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그 일을 하심으로서 우리를 건져내어 이 새 틀에 넣어 새롭게 출생시키신 것입니다. 나는 그 틀에서 나올 것이며 그리스도를 닮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나를 그의 틀에 넣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나를 지어가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것이 변화가 일어나는 방식이며 그것이 이루어져 나가는 방식입니다.

 

 

 

 

③ 우리에게 일어난 큰 변화를 증거하는 방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 이 “교훈의 본”과 이 틀에 들어간 결과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 그것은 마음과 의지와 이지가 함께 동반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순종입니다.


?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순종합니다.


?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종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 믿음은 어느 것이든지 쓸모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으로 순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순종을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를 찬양하기 위하여 살아갑니다.


? 구원 받은 사람은 이 깊은 변화를 겪은 사람으로서 “회개할 것”과 “죄를 떠나 임박할 진노를 피할 것”과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순종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는 단순히 그의 의지로만 그렇게 하지 않고 온 마음이 그것에 속해 있습니다.


?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원한 노예요, 행복한 노예입니다. 따라서 그의 최상의 욕망은 하나님과 우리 죄 때문에 세상에 오셨던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찬양하며 사는 것입니다.

 

 

 

 

3. 새 생명의 원리(18)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생명의 씨앗을 넣으시는데, 그것은 의의 씨앗입니다. 그것이 우리 속에서 일하시는데, 그로인하여 우리가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점 없고 흠 없게 되기까지 그 과정은 계속되어 나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 일을 행하십니다.

 

 

 

 

4. 영적 분별력(19)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과 요청을 말해 나가기 위해서 예화와 유추를 사용해 왔던 방식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16절에서 이런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노예제도로부터 하나의 예화를 빌려 계속 사용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는 말씀의 의미는 평범한 사람의 생활에서 취한 친숙한 예화를 사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노예제도에 대한 예화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들을 알아봅시다.

 

① 주제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말하고 노예제도라는 친숙한 사실에서 예화를 든 것은 너희가 모두 노예제도에 대하여 친숙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 강조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말씀을 분명하게 하고,


? 그 뜻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② 알기 어려운 것을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되는(벧후3:15,16) 것을 막고 진리를 안전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그들을 보호하여 지키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방편으로든지 죄가 그들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데, 은혜 아래 있으니 어떠한 행동을 해도 된다는 식의 말을 함으로서 죄를 짓는 길에서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③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는 말씀의 또 다른 의미는 예화의 한계를 말해 줍니다.


? 예화를 사용함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하는 성도들을 돕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예화는 진리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이지 그것이 진리가 될 수는 없으므로 완벽하지 않습니다.


? 예화는 너무 심하게 표현되지 않아야 할 것은 그로 인하여 진리를 왜곡된 자리에 놓게 될 우려가 있으며, 낮은 자리에 놓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④ 사도 바울이 예화를 사용한 이유는 그들의 육신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말씀은 그들이 진리를 이해하는데 이지와 지력이 약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육신은 죄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부패되고 통제 받는 사람의 모든 기능을 의미합니다.


? 그러므로 사람이 부족한 것은 영적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이 타락하고 죄가 들어온 순간에 사람은 영적 판단력과 이해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 영적 통찰력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세상의 어떤 지혜자라도 하나님의 진리에 도달 할 수 없는 미련한 자에 불과합니다.


? 음악, 예술, 과학, 정치학 그와 같은 모든 것들은 한 영역에 속해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영적 분별을 더해 주지는 못합니다.

영적 분별력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 소개될 수 있는 영역에 속해 있으며, 그 영역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의 결과로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5. 하나님의 합당한 요구들(19)


우리가 알았듯이 사도는 여기서 예화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이 의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노예인 것을 보여주기를 계속합니다.


너희가 전에 죄의 세계에 너희의 지체들을 드린 것같이 이제는 같은 지체를 의의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요점은 그리스도인이 될 때 새로운 지체나 새로운 기능들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① 사람이 회심 전에 가진 재능과 힘과 성향의 문제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천성적인 능력들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과 여전히 같습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새 사람들 일 지라도 모두 같아 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성질과 기능을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단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을 새로운 방향으로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성도들의 개성이 묵살되어서는 안 됩니다.


? 기독교가 만드는 차이란, 그의 능력과 기능과 성질들을 전보다 더 좋고 더 부지런한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전에 비교적 느렸던 사람은 이제 조금 덜 느려질 것입니다. 그는 결코 재빠른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 개인들에게 주셨던 기능과 능력과 지체들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계십니다.


?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개성을 제멋대로 굴게 해서는 안 되며, 또한 우리의 개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가 그것을 옛 생명에 적용하였던 것과 같이 새 생명에도 적용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 그것은 마치 군대에 입대하는 사람이 자신의 모든 능력과 기능과 성질들을 그의 지휘자와 그의 나라를 섬기기 위하여 바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② 두 번째 원리로는 그것이 하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인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옛 생명에서 너희는 너희 지체들을 사용함으로 능동적으로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옛 생명에서 능동적이었던 것같이 새 생명에서도 능동적이 되어라. 너희는 죄 짓는데 수동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저절로 행해졌던 것이 아니라 너희가 그것을 좋아하고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너희는 너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그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 저희 자신이 이런 일을 해야 한다. 너희는 너희의 기능과 지체와 너희의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무엇을 행하며 우리의 기능들을 사용함으로서 하나의 결과를 내라는 명령이고 권면이며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③ 이것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어날지 모르는 것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것을 기초한 명령입니다.

 

④ 네 번째 원리로는 신약의 성화 방식과 방법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지위와 위치를 깨닫게 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너희다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으므로 “너희다워라”는 것입니다.

 

⑤ 사도 바울은 이 요구가 전적으로 이치에 맞는 일이니 우리 앞에 놓인 마땅한 이치에 따라 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과 이루신 모든 일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면 우리의 삶의 방식은 그 이치에 맞는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노예로 순종하는 것은 우리가 전에 죄에 대하여 순종하였던 것보다 훨씬 더 커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롬6:20-23절

 

 

 


6장 20~23절 :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1. 거룩한 삶을 위한 논증들(20~21)


사도는 본문에서 19절의 권면과 명령을 뒷받침해 주는 이유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그런 권면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말해 온 것에 비추어서 이치에 매우 타당하다는 것을 알고 이해하기에 필요한 몇몇 이유들을 제시함으로써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① 불신자들의 삶이 ? 도덕적인 교육을 많이 받고 선한 사람이라서 세상 사람들은 참으로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성경에서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하며 심지어 배설물과 같다고 합니다. ?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않습니다.(롬10:3) 그들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것이 되어 심한 미움을 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며 그것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②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어떤 개념이든지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부족을 예민하게 깨닫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에 온유와 겸손은 물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표준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의 작은 도덕적 규칙을 높이고 복종하므로 그러한 사람들은 의에 대하여 완전히 외인이며 하나님의 의의 영역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 밖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세 가지를 말합니다.


③ 첫 번째 그들의 삶은 열매가 없는 삶으로서 전혀 유익함이 없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삶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신자에 관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참조 : 전1:2,3; 2:11; 3:9; 5:16] ? 그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기쁨과 행복감을 가지고 살더라도 그것은 얼마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참 기쁨과 참 행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그들은 진정한 만족을 가지고 살아가지 못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우주를 담고도 모자랄 정도로 크게 만들어져서 예수 그리스도로 채우지 않으면 결코 채워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그들은 영원을 향한 소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성장은 물론 영원한 세계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④ 두 번째 그들의 삶은 수치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 그것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밤이 맞도록 술을 먹는 사람은 다음날 아침 자기가 어리석었고 그렇게 행동한데 대하여 부끄럽다고 느끼고, 좀처럼 자신을 용서할 수 없으며, 양심의 가책과 역겨움을 느낍니다. ? 그러나 그보다 더 악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수치감을 잃기까지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죄 속에 어찌나 가라앉았던지 수치감마저 없어져 부끄러움이 없습니다.(렘8:12)


⑤ 이제 우리는 21절을 끝맺는 진술을 살펴보아야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 마지막은 사망이라.”고 하였는데, 사망은 언제나 죄의 마지막입니다. ? 이 교훈은 육적인 죽음은 물론 영적인 죽음도 포함됩니다. ? 영적인 기능은 본래 사람의 가장 뛰어난 것이었고,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었지만 사람이 죄를 짓는 순간 그는 하나님과의 접촉점을 잃어버렸고 하나님께 대하여 죽게 된 것입니다. ?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살후1:9)

 

 

 

 

2. 그리스도인의 자유(22~23)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 관한 진리를 요약한 장엄한 진술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는 본문의 말씀은 명령과 권면이지만 더욱더 흘러넘치는 복음의 특징 중에 있는 일부입니다. 그는 우리가 무엇을 행할 것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렇게 행할 이유들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명령,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명령을 내리시는 것으로 끝마치지 않으시고 그것을 청종하고 순종해야 할 이유를 제공하십니다.


① 우리는 이미 20,21절에서 옛 삶은 쓸모없고, 열매 없고, 헛되며, 아무것도 내지 못하고, 결국 죽음밖에 가져오지 못하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영원히 분리된 무가치한 생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여기서 다시 거론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심오한 변화를 겪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이것을 전에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또 다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도 바울이 그렇게 했고 그것은 너무도 영광스러운 기쁨이 되는 사안이기 때문에 거듭 할수록 더 감격스럽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이 변화는 완전하여 무엇을 조금 첨가해야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 그리고 이 변화는 우리가 결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렘13:23) 그러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부터 자유케 되었고 하나님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둠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② 우리의 변화의 본질을 살펴보면 “죄에게서 해방”되어 자유케 되었습니다. ? 우리는 더 이상 죄의 통치 아래 있지 않으며, 그의 영역 안에 있지 않고 죄의 영토와 관할 지역 밖으로 인도 되었습니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상전이 아니고 귀찮게 구는 조건일 뿐입니다. ?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는 것은 전적으로 들을 필요가 없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어리석었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③ 우리는 하나님께 노예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새로운 주인에게 속해 있고, 새 영토에 있으며, 새 나라에 있습니다. 이 위대한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 스스로를 위해 살 아무런 권리가 없으며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할 권리가 없습니다. ? 또한 우리는 죄를 지을 권리도 없습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우리 상전이시며, 주인이 비난하고 미워하시는 것을 행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은 마치 적과 내통하고 있는 군인과 같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분을 섬겨야 하며, 그의 영광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있어서는 안 되며, 자신은 열심히 소멸되어야 합니다. ? 우리의 문제나 기분의 상태, 우리의 유혹과 싸움과 난제들을 생각하는 대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우리의 전체적인 태도의 변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④ 우리의 첫 번째 변화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결과를 가져오며, 그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것은 영생입니다.


⑤ 죄의 삯은 둘째 사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분리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의 덕과 사랑스럽고 고상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감화에서 영원히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 죄의 경우에 있어서 그 단계들은 불순종, 불의, 부정과 불법이라고 말합니다. 죄의 종 노예는 언제나 불법에서 불법의 노선을 따라갑니다. 에덴동산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 그 반대편의 단계들은 복음 아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순종에 이르게 되고, 그 순종은 의에 이르게 되며, 의는 거룩함에 이르게 됩니다.


⑥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입니다.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17:3) ? 그것이 영생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 그것이 참된 삶입니다. ? 사망은 그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⑦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 성화로서 “점과 티도 주름잡힌 것이나 그런 것들이 없이” 될 것입니다.


⑧ 우리가 장차 올 영광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마에 씌워줄 “의의 면류관”에 참여할 것에 열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는 이 축복과 영광을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 롬7:1-4절

 

 

 


7장 1~4절 :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장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니라.

 

 

 

 

1. 보편적인 율법의 간접적인 접근


본문의 대 제목은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 즉 그리스도인의 율법에서의 자유, 특별히 왜 우리가 성화를 안전케 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있어야 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7장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첫 번째 대목에서는 전체 주제를 진술하며, 그 나머지 두 대목에서는 그가 강하게 주장한 것의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① “형제들”이란 말은 유대인들만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유대인들만을 이야기 할 때에는 “골육의 친척”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서 그 점을 명백하게 합니다.


② 여기서 말하는 “”이란 말은 단순히 율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한 모든 인간 사회에 해당하는 법을 말합니다.


③ 그 다음에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살 동안”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단순히 우리가 살 동안만 법이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의미입니다. ? 살아 있는 동안은 법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 어느 나라에 살든지 그 나라의 법에 복종해야 합니다. ? 그 법은 살아 있는 동안에만 적용되어 우리가 죽는 순간 그 법이 그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는 순간 법은 그에게 어떤 일도 할 수 없고 법의 효력은 그에게 관한한 무효화되고 면제됩니다.


④ 바울의 예증


  ? 첫 번째 예증은 한 남자에게 시집간 여자는 그 남자의 권위 아래 있어서, 그녀는 자신의 남편의 권세와 통치 아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에 대하여 불신자가 가지는 관계를 나타내 주는데, 율법은 남편이고 불신자는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남편이 살이 있는 동안에는 여자는 그 남편의 권위와 세력과 통제 아래 있다고 역설하는 것입니다.


  ? 두 번째 예증은 그 결혼관계가 가진 여러 특징을 밝혀 줍니다. “남편이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그 남편에게 매인 바 되나”라는 말씀은 남편 있는 여인은 영구히 남편에게 법으로 매인 바 되지만 이 관계는 죽음으로서 끊어진다는 것입니다.(이혼은 불의한 혼인에 불과함)


  ? 세 번째로 바울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갈 가능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 예증을 택했던 것입니다. ㉮ 남편이 죽게 되면 그의 법에서 벗어나 해방되며, 풀려나 다른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 남편이 있는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못하며, 제멋대로 다른 남자와 관계한다면 그 여자는 음녀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벗어나 자유케 되어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 이 점을 상술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르는 모든 일이 율법을 무시한 것이 아님을 이해토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한 편으로 제쳐놓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이루는 것입니다. ㉱ 남편의 죽음은 매임을 종식시켜 여인을 자유롭게 하였기 때문에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은 전혀 잘못이 없는 합법적인 일입니다. 그러므로 법은 지켜진 것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히려 함입니다. ㉮ 우리가 율법과 결혼한 이상은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기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할 때만 입니다. 이와 같이 첫 번째 관계는 해소되어야 합니다. ㉯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께 열매를 맺으려고 한다면 율법의 능력과 지배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일은 죽음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관계가 죽음에 의해서 끊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법적인 끊어짐이 아니라 음행적인 관계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옛 관계로부터 벗어난 사람이 하나님께 열매를 맺으려 한다면 먼저 새로운 관계로 들어와야 됩니다. ㉱ 전체 과정이 율법을 명예롭게 하고 있어야 하며 또한 율법과 전적으로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며, 그것은 도리어 율법을 완성시킨 것입니다. ㉲ 그런데 여기서 여자의 죽음이 거론되는 것은 율법에 관한한 어느 쪽이 죽느냐가 문제가 되지 않고, 오직 죽음만이 그 옛 관계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⑤ 복음은 율법을 폐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율법을 세우는 일을 하며, 완성시키는 일을 합니다. ? 사실 구원의 전체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율법을 다 지켜낼 수가 없었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다 지키게 되었고, 지켜야 할 것이며,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새 언약을 누리고 있습니다.[참조 : 렘31장의 말씀을 인용한 히8장; 10:9] ?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께 대해서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혼하게 되어 매이게 되고, 또 그 안에서 발견되고, 또 그 안에 감추인 바 된 것은 우리가 거룩케 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서 우리로 말미암아 역사하고 있는 그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를 들을 수 있게 합니다.

 

 

 

 

2. 그리스도인에 대한 보편적 정의(4)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한 위대한 기본 정의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동시에 또한 필연적으로 본문은 그리스도인 삶의 숭고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① 본문은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 바울이 죽었다가 살았다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죽음과 부활을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롭게 태어나는 거듭남을 수반하며, ? 그것은 자연적인 것을 훨씬 초월한 영적인 것인데, 이전의 상태에서 전혀 새롭게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② 두 번째 진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가진 관계가 예전처럼 율법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지금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③ 세 번째 진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삶에 있어서 전적으로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열매를 맺어 드리기 위한 목적입니다.


④ 네 번째 일반적 진리는 그리스도인이란 전적으로 새로운 능력, 새로운 권능이 우리의 생명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어 드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4가지의 철저한 시금석이 있습니다. ? 그들에게는 새 생명이 있는데, 갓난아기라도 생명이 있어서, 그들은 신령한 젖을 사모합니다. ?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자녀로서 나아갑니다. 자신이 비록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율법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 배반하고 있음을 의식하게 됩니다. ? 그들은 새로운 목적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을 수행하는데 합당치 못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 때문에 살아있고, 활기 있는 방식, 즉 새로운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들에게는 새로운 능력과 새로운 힘이 주어졌는데, 그들이 매우 약하고 많은 실패를 경험했을 지라도 그 안에 무엇인가 예전에 없었던 것이 역사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로 죄에 대한 대항이요 죄를 점점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저 점점 죄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소원일 수도 있습니다.


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과 이루신 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 그리스도께서 무흠하신 상태에서 태어 나셔야 했고, ? 율법을 충족시키시는 삶을 사셔야 했으며, ? 죄인들을 대속하시기 위해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 또한 용서 받은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부활하셔야만 했고, ?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의를 전가해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완벽한 복음 안에서 구속의 은총을 다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와의 연합(4)


이제 우리는 두 번째 동인을 접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새 생명을 가질 수 있기 전에 어떤 일들이 그리스도께 있어야 했던 것처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어떤 일들이 역시 우리에게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우리는 역시 죄와 사망에 대해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② 그리스도의 죽음을 요구한 것은 율법이었고, 율법은 그에 대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그가 율법을 완전히 이루신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그가 다시 사시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③ 율법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에 그에게 완전한 형벌을 부과하였기 때문에 율법 자체는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을 율법의 형벌적인 요구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완벽하게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율법은 이제 나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④ 바울의 전체 요점은 하나님께서 옛 남편인 율법으로부터 합법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법적인 처사였으며, ? 그는 십자가 위에서 율법에 의해서 요구된 정당하고 완전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높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 이처럼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마다 정당하고 거룩하고 의롭습니다. ? 또한 율법이 그런 방식으로 높여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유롭게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요, 그의 영원한 거룩한 성품인 까닭에 율법을 높이는 것입니다. ?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지 않고 도리어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시집갔을 때, 또 다시 자신으로 하여금 율법과 결혼하여 있었을 동안에 느꼈던 느낌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남편에게 충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도 옛 남편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그 자체가 새 남편에 대한 큰 모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⑤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혼하여 연합되었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그에 마땅한 삶, 빛 가운데서 살며, 끊임없이 즐거워하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  우리는 그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그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합니다. ? 이 관계는 영원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게 되었으니, 그분이 영원하신 것처럼 우리도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4.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소유(4)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시집간 것입니다. 그런 지위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이 특권과 지위는 결코 박탈당하지 않습니다.


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며 그에게 속한 사람으로 이름을 바꾼 사람들입니다(시편 45편). ? 그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입니다. ? 하늘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신 이름입니다. ? 그 이름은 그와 결혼한 우리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② 우리는 그의 이름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그의 서 있는 위치에도 함께 동참합니다. 우리는 그와 연합하였으므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보시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보십니다. 그로 하여금 우리를 위하게 하시고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신 것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③ 우리는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 때문에 그리스도의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존전에 들어가 알현할 이런 권리를 가지는 것보다 더 큰 특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하는 자로 영접을 받을 것입니다.


④ 그리스도인들은 천사들의 섬김을 받는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참조 : 히1:13~14; 마18:10]


⑤ 우리는 반드시 그와 함께 왕 노릇할 그날이 올 것입니다.


⑥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누리는 특권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⑦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결혼하게 된 목적은 죄 용서와 보호하심을 받는 것만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안전만을 위해서만 결혼하는 신부는 매우 가련한 신부입니다.


그 목적은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는 것입니다. ? 그 열매는 거룩합니다. ? 거룩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것입니다. ? 거룩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영위되고,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키 위해서 영위되는 삶입니다. ? 그리고 열매는 성령의 9가지 열매입니다. ? 우리가 그러한 열매를 맺히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결혼한 것입니다.

 

 

 

 


성경: 롬7:5-6절

 

 

 


7장 5~6절 :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1. 정욕과 탐심(5~6)


이 두 구절은 한 진술을 이루며 함께 진행되고 있으며, 5절은 그 진술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6절은 긍정적인 면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① “육신” 안에 있었다고 말하는 바울의 의도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 여기서 바울은 인류 전체를 관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고 있는 말로 생각해야 합니다. ?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육체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몸을 의미할 수는 없습니다. ? 그래서 이 말은 영 안에 있는 생명의 반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의 현제 상태는 영 안에 있습니다. ? 롬8:4 이후에서 이점에 관하여 다시 대하게 될 것인데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다시 8절에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러므로 “육신 안에”의 분명한 의미는 “영 안에”있는 것의 반대입니다. ? 요3:6절의 우리 주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발견됩니다. ? 본문의 육신 안에 라는 말의 주요한 의미는 바로 육신 안에 있는 것과 영 안에 있는 것을 대조시킬 뿐만 아니라, 영 안에 있는 것과 율법 안에 있는 것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② 모든 인류는 두 조건 중 하나에 속해 있는데 그들이 육신 안에 아니면 율법 아래 있든지, 성령 안에 아니면 은혜 아래 있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③ 여기서 말하는 육체라는 말에는 특별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 악한 죄의 원리에 지배를 받음과 동시에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 죄의 정욕이라는 말인데, 우리가 육신 안에 있을 때에 이 정욕과 탐욕과 죄에 대한 애정이 우리 속에 있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 그것들은 우리가 나면서부터 우리 모든 사람 각자 속에 있습니다. ?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분별해야 할 것은 몸의 욕구들을 필연적인 죄악으로 보는 거짓된 금욕주의입니다. ? 자연적인 욕구들 그 자체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욕구들을 주신 것은 세상을 사람들로 가득 채우려고 하는 번식의 목적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 또한 다른 모든 본능들, 즉 먹고 싶은 욕망이나 사회성 같은 본능들은 인간의 복락과 이 세상에서의 삶을 향유케 하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 바울이 죄의 정욕이라고 하는 말은 근본적으로는 선하지만 타락으로 인하여 죄의 결과로 악의 통로가 되는 자연적인 욕구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자연적인 욕구들을 가진 인간을 만드셨는데, 타락하기 전에는 인간이 그 욕구들을 통제하여 균형이 있었지만, 죄를 짓는 순간 그 균형은 깨어지고 자기의 욕구를 통제하는 대신 오히려 욕구들이 인간을 조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 이러한 욕구들은 이지와 이해와 의의 관점에 의해서 지배되고 통제되는 동안이나 하나님의 관계에 의해서 조정되는 동안은 결코 선하고 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순서를 바꾸고 이러한 충동과 정욕과 탐욕에 지배를 받게 될 때 인간은 죄의 상태에 빠지게 되고 그는 육신 안에 있는 것입니다.

 

 

 

 

2. 구원의 목표(6)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이제는”이라는 말을 대하게 됩니다. 그 말은 우리가 처해있던 참담한 현실을 단번에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반전시켜줌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으로 감사하며 찬양하는 조건으로 인도해 줍니다.


① 우리는 이제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 그것은 얽매었던 것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우리는 그것에 의하여 얽매어 있었고 그것에 의하여 지배받고 있었는데,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에 의해 얽매여 있었습니다. ? 그는 율법에 의하여 붙잡힘을 당하고 있으며 지배받고 있으며, 율법과 결혼 관계에 있었습니다. ? 율법은 그를 통제하고, 그의 행동 전체를 주관해 왔습니다. ? 그러나 더 이상은 우리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데, 그것은 우리가 구원 받았고 전에 이 지배와 이 폭군적 권세를 가지고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던 율법으로부터 죽었기 때문입니다.


② 이제는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게 된 그것이 바울에게는 그처럼 행복한 일이라서 즐거워하며, “이제는”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③ 그러나 바울은 더욱 강조하고 싶어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섬김의 대상과 목적과 목표입니다. 구원의 위대하고 장엄한 목적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참조 : 엡1:4; 살전4:3]


④ 구원은 죄로부터 거룩함에로의 옮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전체 요지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것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그 앞에 거룩하고 책망할 것이 없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⑤ 이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그 의미는 “노예로 산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로 부르기를 즐겼습니다. 그의 섬김은 완전히 자원하는 섬김으로서 섬김의 대상에게 노예가 되는 것보다 더 훌륭한 방법은 없습니다.


⑥ 그런데 이 섬김은 의문의 묵은 것, 즉 옛 것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 그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 아니 옛 성품을 가지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조차 없습니다. ?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 의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⑦ 영의 새로운 것은 성령 안에서 영위하는 삶입니다. ? 이제 우리는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의 삶은 완전히 새로운 삶인데 그러한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그와 결혼한 결과로 인해서 우리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본질적으로 성령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3. 영광에로의 전진(6)


우리는 여기 본문 에서 새 생명과 옛 생명의 대조를 대하고 있습니다.


새 생명은 성령 안에서 삶을 영위하게 되고, 옛 생명은 율법 아래서 육체적인 삶을 살게 되는데 그들의 삶의 방식은 차이가 있습니다.


① 첫 번째 차이 : 옛 율법은 사람의 밖에 있었으며, 육안으로 볼 수 있도록 돌에다 쓴 것인데, 이제는 성령으로 쓸 것이며,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 심비에 쓰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전에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우리 밖에 있는 어떤 표준과 본에 일치하려고 노력하였었으나 이제 그리스도인에게 그 표준은 밖에 있는 것은 물론 우리 안에도 있어서, 말씀 속에서 그 표준을 읽게 된 것입니다.


② 두 번째 차이 : 성령 안에 있는 새 생명이 뜻하는 바는 우리가 이제 전에 가지지 못했던 이해를 가졌습니다. ? 율법과 그 목적에 대한 것과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율법에 해당되는 모든 것에 대한 이해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 옛 시대 아래 있는 사람들은 수건이 그 마음에 덥혔다고(고후3:3)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주 율법을 낭독하는 것을 듣고, 율법을 연구하여 강론하고 주해하느라고 그들의 생애 전체를 바친다고 해도 율법의 참된 의미를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여 유전들을 만들어냈습니다. ? 그러나 사람이 주께로 돌아오는 순간에, 수건은 벗겨지고 그는 보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의 전체 입장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③ 세 번째 차이 : 사람이 단순히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과 율법의 정신에 관심을 가지는 것과 중대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은 모두 율법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거기에 내포된 정신이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 예를 들어서 율법의 “탐내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함으로 어떤 일들을 삼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상상으로, 마음으로 생각으로 하고 싶어 하고 있는 그 자체가 탐욕이며, 그것이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 그러나 성령의 권속에 들어오는 순간 즉시 그것을 알게 되고, 그의 모든 전에 행하던 도덕성이 더러운 옷과 같으며 배설물과 분토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 그로 인하여 그들은 그처럼 자랑하였던 옛 의는 이제 전혀 무가치한 것이 됩니다.


④ 네 번째 차이 : 새 삶의 방식에는 전적으로 새로운 요인을 갖게 되어 선하고 의로운 삶에 대한 새로운 동기를 가졌다는데 있습니다. 옛 동기는 하나님을 무서워하여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으며, 자기 보존, 자기 이익 추구는 그러한 과정을 밟게 됩니다. 오늘날도 지옥이 무섭고 하나님이 무섭고 심판이 두렵기 때문에서만 선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일 하나님과의 영적인 체계를 무시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끝나는 것이 사실이라고 판명되기만 한다면 그들의 행실은 달라질 것입니다.


⑤ 이 영 안에 있는 새 삶에 오게 될 때의 그 차이가 얼마나 큽니까! 그리스도인들로서 이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싶어 하는 우리 안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것은 더 이상 지옥을 두려워해서가 아니고 ? 우리 스스로를 만족시키려 해서도 아니고 ? 우리 자신의 표준에 이르려고 하기 때문도 아니고 ? 더 이상 자기 보존에 관심이 없는 것은 구원받은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나타내는 방식이 그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 롬7:7-15절

 

 

 


7장 7~15절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 율법의 정당성(7)


6장에서 사도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말로써 도덕적인 국면을 거론하여 그것을 다루었는데, 여기 7장에서는 다른 문제, 소위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①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라고 질문을 하고 나서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답변을 합니다. 그럴 수 없다는 말은 “천만에요”, 또 “생각할 수조차 없다”는 뜻인데 후자의 번역이 더 좋을 듯합니다.


②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다.”는 말씀은 율법이 죄를 자기에게 명확하게 해주기까지는 죄의 참된 본질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죄의 본질과 성격과 의미를 옳게 이해케 한 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 중생하지 못한 자들은 죄의 진상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 자연인들도 도덕적인 규례를 가지고 있고 어떤 일들은 옳고 그르다는 것을 믿지만 그것이 죄를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 죄의 진정한 본질과 성격을 이해하게 되면 그는 자기 영혼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고 구세주를 추구하게 됩니다. ? 그러므로 구세주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죄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사람의 마음과 양심에 그러한 이해를 가져다주는 것은 율법의 독특한 기능입니다.


③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 “탐심”의 의미는 금지된 어떤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욕망, 즉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어떤 것을 바라고 갈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탐심”이라는 말은 말할 것도 없이 제 10계명을 의미하는데,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과 외향적인 행동 사이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탐심의 개념이 다른 계명들 속에서도 역시 내포되어 있습니다. ? 외적인 행동들의 차원에서 죄를 생각했던 바리새인들도 실제 율법이 사람의 내면적인 면에서 요구하는 것들이 있음을 “탐심”이라는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이미 그 사람에 대하여 마음속에서 살인을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실제적으로 간음행위를 하지 않았다 해도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관하여 질문을 받으셨을 때에 첫째 되는 큰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 그것이 율법이며, 근채와 박하와 회향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같은 세밀한 규례들까지도 율법입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은 영적인 것이요 율법은 인간의 마음과 하나님께 대한 궁극적인 태도와 관련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의 의미입니다.


④ “내가 율법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의하여 조명을 받기까지는 내 안에 있는 탐심과 욕심의 힘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말씀 중에 “안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안다”, “느낌과 체험의 결과로 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상 율법이 그를 밝혀주기까지는 죄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가지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⑤ 율법은 죄의 의미와, 그 안에 있는 탐심의 능력의 결과인 죄의 조건을 알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죄 짓고 싶어 하는 욕심 자체로도 죄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죄의 권세(8)


바울은 본문에서 “”라는 말을 단순히 죄의 행위들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타락한 인간 본성 안에 역사하는 하나의 원리와 하나의 세력으로서 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①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기회를 타서”라고 번역된 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 “한 곳을 출발점으로 하다.”는 그 말은 여행을 출발한 곳, 그러므로 죄가 계명을 출발 지점으로 하여 라고 할 수 있지만, ? 군사 작전의 차원에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준비하고 있는 본영이 되는데, 그곳에서 부대를 훈련시키고 포병을 정렬시키고 무장을 점검하고 작전을 개시하는 것과 같은데, ? 그보다 더 좋은 의미는 “죄가 계명을 지레받침대로 하여”라고 하는 표현이 더욱 적합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죄가 율법을 지렛대로 삼아 우리의 저항을 제거시키고 목표하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② 여기서 바울은 특별히 탐내지 말라는 개념을 가진 10계명을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말하기를 이제 일어난 일은 죄가 탐냄을 금지한 이 계명을 들어서, 또한 죄가 율법을 지렛대로 사용하여, 또는 군사작전의 본거지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속에서 무엇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 여기서 “이루다”는 말은 매우 강력한 “강력하게 역사하다.”라는 의미입니다. ? 또한 확실한 결론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 그리고 어떤 것을 성취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내 안에서 강력하게 이루어지게 한다.”, “내 속에서 권능 있게 이루다.”, “내 안에서 마지막 결과를 얻고야 만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③ 죄가 역사하는 첫 번째 방식 : 죄는 먼저 내 안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고 그것을 증폭시켜, 결국 행위로서 나타나도록 우리를 인도해 갑니다. ? 죄는 소극적이어서 선한 성품이 결여 된 것이 아니라, 너무 적극적이고 강력하여 사람들을 들어 던질 수 있습니다. ? 죄는 노예의 상전으로 사람들을 절대적으로 조종합니다. ? 죄는 하나님의 율법마저도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는 지렛목으로 사용할 정도로 강합니다. ? 죄는 성공하고, 강력하게 이루어냅니다. 또한 성취하고 그가 하고 싶어 하는 바를 완성합니다. ? 죄가 율법을 지렛대로 , 작전기지로,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죄가 우리 안에 있는 반역의 요소를 우리 속에서 일으킴으로서 입니다.[롬8:7]


④ 죄가 역사하는 두 번째 방식 : 죄는 인간의 가장 세밀한 생각들이 하나님 앞에 드러난다는 개념과 악한 생각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외적인 행실들만큼 책임을 져야 할 것임을 혐오하게 합니다. ? 율법에 대하여 불공평하고 불공정하게 취급당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 그러한 것들로 상황을 악화시켜 화나게 하고 악한 성질을 부리도록 만들며, 노하게 합니다. ? 그런 상태에서 그 전보다 더욱 많은 죄를 짓게 합니다.


⑤ 죄가 역사하는 세 번째 방식 : 나의 마음에 전에 없던 사념들을 집어넣습니다.  ? 전에 알지 못했던 일들이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기 때문에 유혹할 수 없었으나 그러나 어떠한 책을 통해서 내 안에서 요동하기 시작하고 호기심이 생기게 됩니다. ? 호기심이 발생하였을 때에 그것들에 대한 지적인 충족을 위해 몰입하고 스스로 그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 먼저는 상상을 통해서 그 모든 일을 행하고 즐깁니다. ? 그것이 죄가 역사하는 방식입니다.

 

 

 

 

3. 율법에 대한 반응들(9)


본문에 와서 혼돈을 주는 요소들이 있는데, 그것은 죄의 죽음과 살아남이라는 표현입니다.


① 율법이 없을 때에 죄가 죽은 것이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죄를 인식하지 못함으로서, 그것이 활동함에도 불구하고 인식하지 못하여 죽은 것처럼 그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② 율법이 이르매 죄가 살아났다는 표현은, 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태에서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니 죄가 살아있다는 것과 활동하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③ 내가 죽었다는 것은 죄가 나를 주장하는 것을 강하게 표현한 것으로, 죄로 인하여 나의 존재는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영혼을 지칭하는 것으로 죄를 인식함으로서 우리를 지배하는 죄로 인하여 우리의 영적 생명이 죽어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④ 율법이 와서 한 일은 우리들 가운데 역사하는 죄를 확연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또 그를 이길 수 없음을 인하여, 절망하고, 결국 자신을 죄 가운데서 구원시켜 줄 메시아를 대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율법과 생명(10~11)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통해서 사람들이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만일 사람들이 그 계명을 지켰다면, 또한 어느 누구도 그 일이 가능하였다면, “생명”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 하나님께서 계명, 율법, 도덕법을 주셨을 때, 그는 그의 보시기에 매우 좋은 생활 방식을 그려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방식이며, 바울이 이 시점에서 말하는 바입니다. ? 여기에 우리로 하여금 거룩이 무엇이며 행복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생명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습니다. ? [참조 : 롬10:5; 출19:5; 레18:5; 신6:25; 눅10장] ? 그것은 분명히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었는데, 그것이 죄가 율법을 방편으로 하여 한 일 때문에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①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나를 속였다고 합니다. ? 완전한 방법으로 나를 속인 것입니다. ? 약한 방법으로가 아니고 나를 철저하게 속였습니다. ? 그리고 절대적으로 속인 것입니다. ? 우리는 죄가 가공할 힘이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무섭게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② 우리가 도덕 교육과 모든 심리학과 엄청난 수의 협회나 기관이나 교육기관이 더 선하고 훌륭한 인간들과 보다 선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고심하였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죄는 계속되고 더욱 넘칩니다. 그것은 우리를 속이는 죄의 본성 때문인데,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인 것입니다. ? 율법을 잘못 사용하도록 속입니다.(딤전1:8) ? 우리 스스로 실패 감을 가지게 하여 절망적이 되도록 유도합니다. ? 율법에 대한 적대감을 주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고 계시다고 느끼게 합니다. 마귀가 하와에게 사용한 전술이 바로 그러합니다. ? 율법의 요구는 우리에게 부당하며, 불의하다고 느끼게 합니다.(좁고, 편협하다는 생각을 줌) ? 스스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으며 그 밖에 다른 것은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고 확신시킵니다. ? 어떤 본능들을 자극하고 충동질합니다. ? 자기표현 이라는 명목 하에 본능의 주인 노릇을 하게하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라고 합니다. ? 죄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고, 훌륭하게 보이게 속입니다. ?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 결과들에 관한 어떤 생각들도 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우리를 기만하는데, 그것은 그 결과들을 왜곡시킵니다.

 

 

 

 

5. 열쇠가 되는 구절(14~15)


① 기독교적인 관점은 율법이 신령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문자가 아니라 문자와는 대조되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영적이지 못한 관점은 율법을 단순히 외적 행동에만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한 영적인 관점은 율법이 행동뿐만 아니라 동기와 욕망과 상상(느낌)에 관해서도 똑같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②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육신이 팔려 죄 아래 있을 때에는 자기가 왜 그것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여 이런 일을 할 때에 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자신의 견해와 정 반대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하는 일을 단순히 설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미워하고 혐오한다는 것입니다.


③ 15절의 말씀은 “중생한 사람은 율법이 신령하기 때문에 그것을 존중하고 그것을 지키기를 원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라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성경: 7:16-25절

 

 

 


7장 16~25절 :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1. 이원성의 미묘한 묘사(16~20)


① 이미 우리는 율법이 신령한 줄 안다고 그가 말한 바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한다.”라는 말을 다시 함으로서 우리가 또한 그것이 선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 율법이 그 자체로 그의 실제 삶 가운데서 실행한 일에 대해서 결코 책임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는 사실상 “나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은 내 죄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 그리고 나는 마음으로는 율법에 동의하고 율법이 선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율법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하여 책임이 없음이 명백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그가 말하는 것은 “나는 율법에 동의하고 율법이 말하는 것을 인정하며, 그것이 금하는 것을 또한 찬성한다. 그러므로 나는 죄를 미워한다. 나는 죄짓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고 왜 죄를 짓는 것인가라는 문제가 바울이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 말씀이 그에 대한 답입니다. ? 첫 번째 나오는 “”는 전체 인격, 말하고 있는 사람, 행동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 두 번째 “”는 율법의 영적 성격을 인식할 수 있게 된 그의 한 지체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 바울은 여기서 사람의 인격을 이중적으로 분리합니다. ? 그러므로 “”는 율법이 이르게 된 “”와, 율법이 영적임을 알 수 있는 “”로 나로 분리가 됩니다. ? 이 이원성은 중생치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발견되지 않는데, 그들의 전인격은 양심이 말하는 것을 알고 찬동하기 때문에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하나입니다. ? 그들은 자기 양심으로 고통을 받지만, 중생한 사람은 양심의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 이원성은 영과 육의 분리 하여 죄가 몸에만 속해 있어서 죄를 지어도 육체에만 영향이 있고 영혼에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는 이원론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나의 전 인격으로서의 육신 안에 가지고 있는 두 성향, 성령의 법과 육신의 법으로 나뉘는 이원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③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두 번째 구절을 살펴보면 ? 죄는 우리 속에 거처를 정하고 거주하며 어떤 것입니다. ? 죄는 처음부터 우리 속에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죄 아래 잉태되었고 불의 속에서 조성되었기 때문에 우리 존재의 일부입니다. ? 죄는 사람의 의지력보다 월등하게 강력합니다. 심지어 율법의 신령한 특징을 실제로 아는 사람보다도 더 강력합니다.


④ 17절의 “내 속에서”라는 말씀은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말에서 “”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은 성령의 영향을 받지 아니할 때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18절의 끝에 있는 “”는 자기 속에 있는 두 “”들에 대하여 인식하고 말할 수 있는 “”입니다.


⑤ 19,20절은 15절을 정확히 반복한 것입니다.


⑥ 바울은 하나의 고백을 하고 있는데, 그는 사실상 “나에 대한 진상이 그러하다. 그것은 내가 내 자신 속에서 발견한 약점이고 내가 알고 있는 무능함이며 나의 쓸모없는 투쟁이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⑦ 바울이 여기서 죄의 가공할 능력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데 죄가 우리 속에 거주하고 있어서 우리가 율법의 참된 본질을 알게 되고 죄의 진정한 본질을 알게 될 때 우리를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⑧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영적인 성격을 분명히 알고, 율법이 하나님의 것이며 또한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 때마저도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를 원합니다. 율법이 그처럼 본질적으로 완전히 선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을 죄에서 구원할 수가 없었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할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어진 것은 오직 사람들이 죄의 죄 됨을 알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2. 속사람과 지체들(21~23)


바울은 율법에 관한 진리와, 율법이 무엇을 하려고 의도되었으며, 특별히 율법이 어떠한  일을 할 수 없는지를 보여주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율법의 위대함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깎아내리고 있지 않습니다.


① 바울은 18~20절에서 왜 자기가 원치 않는데도 불구하고 악한 행동을 하느냐는 것이었다면, 21~23절은 왜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느냐는 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이 사람에 있어서 잘못된 것은 두 가지인데, 자신이 하기를 원치 않는 일을 행하는 것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그 이중적인 면입니다. ? 왜 자기가 하지 않아야 할 악한 일을 행하는 가에 대하여 그는 그것을 행하는 것은 더 이상 자기가 아니라 자기 속에 거하는 죄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② 바울은 이제 다른 측면을 다루면서 왜 자기가 그렇게도 원하는 것을 할 수가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로 시작합니다. ? 여기서 “한 법”이라고 말한 것은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 바울은 자신의 속에 하나의 원리가 있는 것을 느끼고 그것은 너무나도 줄기차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하나의 명백한 행동의 법칙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깨달은 바는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마다 예외 없이 악이 나와 함께 있는데, 이것은 법칙이 자연 속에서 역사하는 것처럼 내 속에서도 작용하는 어떤 것으로, 그것은 마치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오는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악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는 내가 선을 행하려고 하는 순간 악이 거기에 있어서 완강히 반대를 하고 나서는 것을 뜻합니다.


③ “왜냐하면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라는 말씀을 살펴보면 ? “즐거워하다”는 말씀은 시편 기자의 의중에 있는 것을 마음속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시편 1편 “여호와의 법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는 선한 사람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 “속사람”은 마음이고, 이해하는 능력이며, 이성의 장소이며,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자연인 안에 있는 마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점점 후패하는 겉 사람의 반대로서 성령에 의해서 조명될 수 있는 사람의 일부분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④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싶어 하지만 다른 법이 모든 힘을 동원해서 그가 하려는 일을 방해합니다. 그리하여 정반대의 일을 하게끔 만드는 것인데, 그것을 “죄의 법”(23절)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이 죄의 법이 하는 첫 번째 일은 신령한 율법관을 향하여 싸움을 거는 것이고 율법을 즐거워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고 싶어 하는 욕망을 꺾는 것입니다. ? 더 나아가서 지체 속에 있는 마음의 법과 싸울 뿐 아니라,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본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 사로잡아 온다는 것은 죄수로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 만일 우리의 본성의 악한 원리가 우세하여 악한 생각을 자극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런 한도에서 그것은 정복했고 우리는 패배하여 포로가 된 것입니다.


⑤ 23절의 첫 번째 부분에서 그는 우리에게 그 싸움의 결과를 보여 주고 있는데, 그 싸움의 결과는 자기 자신이 사로잡히고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 그것은 자기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나의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 그로 인하여 바울은 괴로워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 자기는 올라가기 보다는 내려가고 승리하기 보다는 더 많은 패배를 당한다고 느끼며 죄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절규하는 것입니다. ? “사망의 몸”은 “죄의 몸”이며, “속사람”과 반대 되는 개념으로 바울이 그러한 부분에서 구원 받기를 원합니다.

 

 

 

 

3. 유사한 구절들과의 비교(25)


여기서 우리는 매우 미묘하고 복잡한 진술 중 마지막 진술을 대하게 되는데, 본문에 대하여 찰스 핫지는 강하고 갑작스런 감사의 감정으로의 전환이라 하였습니다.


① 우리는 사도 바울이 문체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웠으며 성령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문학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으며, 기교를 부리거나 웅변을 위한 웅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② 사도 바울은 시시 때때로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과 그 영광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형식에 매이지 않고 탄사를 발하며 주님을 향하여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③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말하였던 바울은 갑자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나온 진술이며 파격적인 문장이지 그가 주장하고 있는 논증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닙니다.


③ 그것은 그가 다음에 말하고 있는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는 말씀에서 그 사실이 증명이 됩니다.


④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는 말씀은 로마서 8장 16~26절의 주제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망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 그는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밖에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 바울은 여기서 보이는 것들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 밖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 만일 우리가 성경에 있는 “탄식하다.”라는 말을 들어서 자기 속에 있는 죄와의 싸움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 주님 또한 자기 속에 있는 죄와 싸웠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런 사설을 배격합니다.? 요한복음 11장 33절과 35절에서 우리 주님이 우신 것과 심령의 깊은 곳에서 탄식하셨던 것은 지체 속에 있는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죄가 행한 모든 일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⑤ 바울은 어떤 종류의 사람을 기술하고 있으며, 그는 깊은 죄책감을 체험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거룩함을 알게 된 사람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는 전적으로 정죄 받았다고 느끼며 자기의 약함을 알게 되고 그의 완전한 실패를 의식하게 되지만 그는 더 이상을 알지 못합니다. ? 그는 율법을 자기 힘으로 지키려고 노력하였지만 자기는 그럴 수 없음을 깨닫게 되어 스스로 정죄 받았다고 느끼며 죄책감 아래 있는 것입니다. ? 그는 복음에 관한 진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로 말미암은 구원에 관한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며 이해 할 수도 없습니다.


⑥ 그러나 바울은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내어 놓습니다. ? 모든 것이 잘 되었고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 ? 율법은 마치 남편이 죽은 여인과 같고,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다. ? 이제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시집을 가게 되어, 그분의 생명과 능력이 충만한 너희로부터 자녀를 생산할 것이고, 너희로 잉태케 하여 자기의 생명을 너희 속에 넣을 것이다. ? 그리고 너희는 하나님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 너희는 더 이상 이러한 일을 율법 아래서 추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 너희는 너희가 매였던 그것으로부터 벗어났으며, 의문의 묵은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게 될 것이다. ? 이것이 바울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메시지입니다.


⑦ 이제 우리 받은 은혜를 나누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만 잘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 축복과 결실케 하는 강물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보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롬8:1-2절

 

 

 


8장 1~2절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1. 개  요(1)


우리는 이제 위대한 로마서 8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로마서 8장은 성경 해석의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장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성경의 어느 부분은 더 위대하고 어느 부분은 덜 위대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성도들에게 더욱더 많은 감동을 주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치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은 빛나는 보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로마서는 가장 빛나고 가장 반짝이며 찬란한 보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로마서 가운데 가장 빛나는 보석들이 덩어리 채 박혀 있는 곳이 8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① 본문의 초두에서 “그러므로”라는 말을 접하게 됩니다. ? 새로운 장이나 새로운 대목이나 성경의 새로운 부분을 시작할 때마다 다른 부분들과 연결짓는 것에 관해서 분명하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 성경을 해석할 때에 한 구절이나 한 본문을 뽑아내어 문맥에 상관없이 해석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 “그러므로”라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즉시 다른 노선에 들어서게 하는데 그것은 하나의 연결시키는 고리가 되는 것입니다. ? 바울은 하나의 표본으로서 그가 전에 말한 어떤 것으로부터의 추론을 연역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맨 먼저 그 말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발견해야 합니다.


② “그러므로”라는 말은 7장의 끝과 관련 되어진 것이 아니라 5장의 전체와 관련이 있습니다. ? 5장이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모든 자들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이었습니다. ? 일단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으면 어떤 의미에서 이미 영화롭게 된 것입니다. ? 시련과 환란과 고난이 우리로부터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 왜냐하면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③ 8장의 대 주제는 성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안전성, 성도의 최종적 보전에 관한 절대적 확신성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이고 완전하고 철저한 구원에 관한 절대적 확실성입니다.


④ 5장에서와 마찬가지로 8장에서도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이며 완전한 구원을 확신케 하는 것이고, 절대적으로 보증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고 좌절시킬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2. 더 이상 정죄 받지 아니함(1~2)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더 이상 어떤 정죄함도 없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참으로 복되고 위대한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8장 처음부터 이 복된 소식을 대하게 됩니다.


① 이 위대한 논증은 칭의에 관한 논증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 “정죄함이 없다.” 이 말씀에는 아니라는 말이 두 번 사용하여 강조함으로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 이 말은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완벽하여 그리스도인이 완전히 어떤 정죄의 영역에서도 벗어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고, 또다시 죄를 지을 때 다시 정죄로 들어가서 다시 회개하여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들이 단번에 처리되어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정죄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경건치 않을 때 그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우리가 다시는 정죄 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점이나 티 혹은 그러한 것들이 없는” 완벽한 영화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일해 나가실 것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근거가 되고 또한 우리의 최종적인 확신에 대한 기초입니다. ? 우리가 이제 정죄함을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이며, 그의 몸의 부분이며,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입니다.” ? 그리스도의 것이 무엇이든지 다 우리의 것일 뿐 아니라 아무것도 그것에서 우리를 떨어지게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완전하신 하나님의 이 생명에 대하여 살아나셨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므로 말미암아 나는 결국 완전해 질 것이고 영화롭게 될 것인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 점을 보증합니다.


③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무것도 우리를 밖으로 끌어낼 수 없으며, 지옥도, 사단도 어떤 다른 권세들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④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그리스도의 밖으로 쫓겨나는 것이 아니며, 정죄 아래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또한 역시 정죄함도 없습니다.


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가 죄를 지은 것은 율법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범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에 정죄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정죄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율법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⑥ 죄 지은 불신자는 정죄함을 받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심판을 받게 되지만, 그리스도인이 범죄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 안에서 주어지는 징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⑦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 보다는 내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나라의 법을 어기는 편이 나을 것이며, 내가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지위와 관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높은 기준을 가지게 된 것이고 죄를 지으면 더 많은 범죄를 나에게 한 것이며, 또한 더 밉고, 가증스러운 것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성경: 롬8:3-4절

 

 

 


8장 3~4절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 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1. 율법이 할 수 없는 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확신을 가져야 되며 그것을 즐겨야 됩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 복된 확신을 어떻게 가지며 어떻게 누릴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며 그런 다음에 왜 율법이 그렇게 할 수 없었던가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을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말하며 그 모든 것이 우리 안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지를 말합니다.


먼저 우리는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일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① 율법의 임무는 죄를 폭로하고 정죄하는 것인데,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죄를 위한 희생입니다. ? 죄를 위한 희생은 바울이 즐거워하는 복음입니다. ?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신 일, 곧 화목 제물로 세우신 그 아들의 희생으로 인해서 우리를 위해서 확증하신 구원의 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 그러므로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의가 우리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② 율법은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 그것은 의의 길을 지시하는 것이고 생명의 길을 지적해 주는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 첫 번째 국면은 정죄와 죄책과 심판으로부터 구원 받을 필요성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그래서 죄책과 심판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를 알고 바라게 됩니다. ㉰ 구원은 내게 용서함을 주고 지옥에서 나를 구원해 줍니다. ㉱ 그런데 그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적극적인 의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은 것만으로 하나님의 면전에 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그 뿐만 아니라 정죄하는 일도 합니다. 사실 우리의 정죄는 우리가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③ 율법의 요구는 궁극적으로 “생명”입니다. ?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이 영원토록 살게 할 수 있는 것은 율법의 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 율법은 생명의 길을 지시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생명을 가져다주는데 완전히 실패합니다.

 

 

 

 

2. 구원의 보증이신 그리스도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온 결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죄를 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요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심이니라.”는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러한 개념을 제거시키는 것은 매우 그릇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① 이제 우리는 왜 율법이 의가 우리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을 할 수 없을까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율법은 자동적으로 역사하지 않으며, 수행을 목적으로 우리와 우리의 노력에 맡겨집니다. 그러므로 약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습니다.[예 : 밭을 가꾸는 일을 하다가 땅이 파기 힘든 부분을 만나서 괭이질을 하지만 괭이의 자루가 부러져 더 이상 쓸 수가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괭이의 날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 나무로 된 손잡이에 문제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


② 어떻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이며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그분의 계획이며 목적입니다. ? 사람은 전적으로 무능하며 전적으로 무력하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 그것은 이미 창세전에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 구원은 영광의 주님이시며, 영원하신 성자 안에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를 보내신 것입니다. ?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에 의해서 보증된 확실한 것입니다. ? 그 보증은 이중적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며 영원하신 아들이신 그분 안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실패할 수 없으며 확실히 실패하지 않습니다. ? 율법은 사람을 구원할 의도나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 율법이 사람을 구원 할 수 없음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으며,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로 하나님의 무한하고 영원한 지혜와 사랑 안에서 계획하시고 고안하셨던 그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3.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습니다. 베들레헴의 그 갓난아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독생자이시지만 이 세상에 오셔서 살게 되신 것입니다.


① 본문에서 첫 번째 일은 우리로 하여금 성육신이 하나의 사실이었음을 상기시켜 주는데, 그분은 문자 그대로 인간의 몸을 가지셨고 인간의 영혼을 가지셨으며, 성육신은 하나의 사실이요 실제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참조 : 요1:14; 갈4:4; 빌2:7; 딤전3:16; 히2:14; 10:5]


② 초대 교회 시대에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는 실제 몸을 입지 않았고 단지 허깨비이며, 유령의 몸이었다고 가르침으로 성육신이 참된 사실이라고 말하려고 고심하였으며, 요한일서가 쓰여진 첫 번째 목적은 그러한 심각하게 잘못된 교훈들을 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③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요셉이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마1:18,20)


? 그리고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임에 분명하지만 마리아 또한 죄인의 신분이었고, 만약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았다면 지옥에 떨어질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 마리아에게는 죄가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사실을 유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성경도 하나님도 모르는 자들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거룩하신 예수님을 잉태하게 하였기 때문에 마리아를 “성모”라고 하여 추앙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 예수님의 잉태는 마리아의 난자를 빌려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탯줄만 사용된 것입니다. ? 왜 이런 주장을 하느냐고 한다면 저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만일 마리아의 난자에 의해서 예수님의 생명이 탄생하셨다면 당연히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할 수가 있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불행하게도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실 수가 없습니다. ? 왜냐하면 마리아의 원죄가 예수님께 유전 되어야 할 것인데, 성경에서는 너무도 분명하게 그것을 부정하며, 예수님께서는 원죄와 자범죄가 없는 유일하신 분으로서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충족시키신 유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고후5:21; 히7:26; 벧전1:19)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엄밀히 따진다면 마리아와 육체적인 연결 고리는 오직 생명이 유지되고 자라나게 할 수 있는 영양의 공급원인 탯줄밖에는 없습니다. 심하게 말한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인큐베이터의 역할 밖에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 그렇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육신적이든 영적이든 친 부모가 될 수가 없고 예수님을 양육한 유모나 양 부모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큐베이터를 부모라고 할 수가 없듯이 마리아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 그러나 그를 낳고 기른 상징적인 어머니가 될 수가 있고 그것을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신 것이지 그를 육체적이거나 영적인 어머니로서 대접하신 것은 결단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④ 하나님께서 첫 사람을 만드셨을 때, 그를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 아담의 인성은 죄의 본성이 아니었습니다. ? 첫 사람은 완전히 모든 방면에서 죄와 관계가 없었습니다. ? 그러므로 두 번째 사람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죄가 있었다고 말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첫 사람보다 못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고, 덜 완벽하고 덜 완전한 인물로 만드는 것이니 그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⑤ 그러면 왜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야 했습니까? ? 율법을 지키고 높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하려면 율법을 지켜야 하고 율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그것에 능동적으로 순종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에 실패 하였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러한 일들을 하기 위하여 우리의 대표자로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 우리의 죄가 처리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모양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수 없으므로 그는 인간의 대표자가 되기 위해서 인간이어야 했으며 “새 인간”의 시작이 되기 위해서도 인간이어야 했습니다. 또한 죄가 육신 안에서 범하여졌던 것처럼 그것은 육신 안에서 처벌받아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육신 안에서 우리를 정죄한 것입니다.] ? 새로운 본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벧후1:4)가 되었는데 그것이 가능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스스로 인성을 취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는 길 뿐입니다.] ? 그가 “긍휼이 풍성한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신 자이시고, 참 인간으로 이 세상에서 사셨으며 세상의 악과 시험의 능력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를 강하게 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산에 오를 수 있게 하셨고, 그분의 면전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 마귀를 영원토록 침묵시키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인간을 정복함으로서 사실상 하나님을 희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이 택하신 이 방법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셨다면 마귀는 결코 침묵하지 않을 것이며, 위대한 영적 권능이 하늘로부터 역사했다면 마귀는 공평치 못하다고 소리쳤을 것이지만, 마귀는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을 정복하였지만, 두 번째 아담에게 참패를 당하였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⑥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것은 “죄를 인하여” 입니다. ? 죄를 인하여 라는 말은 죄를 위한 희생제물, 즉 속죄제물을 뜻합니다(레4:3; 신8:8; 시39:6). ? 신약성경은 전반에 걸쳐서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오신 주요 목적은 속죄제물이 되심으로서 우리를 죄와 정죄에서 구원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고후5:21; 히2:9; 벧전1:18~19; 롬3:24~26). ?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속죄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⑦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몸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몸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 그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계실 때 육신 안에 계셨습니다. 우리의 죄는 그 안에서 심판받았습니다. ?  그는 죄가 심판당하고 이런 방식으로 정죄함을 받게 하기 위해서 지상에 오셨습니다. ? 죄에 대한 심판이 그에게 내려졌으며 그에게 떨어졌습니다. ? 이점은 복음의 핵심이요 중심이며 영광입니다.


⑧ “율법의 요구(의)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 율법의 의로운 요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속에서 만족되었기 때문에 율법이 더 이상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죄로부터 제거 되어야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교훈을 지킬 뿐만 아니라 율법이 선고한 심판을 담당하시고 죄와 죄인에게 내려져야 할 요구를 담당하셔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도에 대해서 무능하게 된 것입니다. ?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고, 이제 그리스도께 시집을 가서 그와 함께 연합을 이루었으므로 우리의 섬기는 방식도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 거룩과 확신


하나님께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셨습니다. 또한 그가 하신 것으로 인하여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아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열쇠가 되는 또 다른 구절을 가지게 됩니다.


① 첫 번째 말은 “행하라”는 것입니다. ? 그것은 그 사람이 그의 삶, 생각, 판단, 느낌들, 그가 관심을 두는 목적, 목표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어떤 원리들을 뜻 하는데, 그 모든 것을 영을 좇아 행하라는 것입니다. ? 그들의 삶의 방식과 양식, 예배와 모든 삶의 방식이 모세의 법에서 가르쳐지는 규례에 의하여 지배되고 통제되지 않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② 두 번째 말은 “육신”이라는 말인데 ? 이 말은 성령 안에 있는 생명과 대조를 이루어 쓰이고 있습니다. ? 악한 행동이나 죄 있는 행위를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복음에서 가르치는 바와 정 반대 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음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 본질상 우리는 모두 “육신 안에” 있어서 육신을 따라 행하는데 그것은 자연인의 영역입니다. ?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적으로 다른 영역인 성령의 영역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속해있고, 그것으로 옮겨졌으며,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행하고 있는 영역입니다. 그들의 실제적인 행동과 행실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됩니다.


③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죄와 육신을 따라서 행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은혜의 영역과 통치 아래 있습니다.


 

 

 

 

성경: 롬8:5-8절

 

 

 


8장 5~8절 :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이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1.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


로마서 8장의 전체 목적은 실제적으로 1절의 말씀인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의 의도를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자는데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성령의 범주 내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하시는 자는 누구든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① 1~4절까지 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본문에서는 우리 속에서 완전한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근본적인 변화를 겪지 않고 성령의 영역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율법의 요구”가 그 사람 속에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② 본문에서는 분명하게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들을 비교하고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 성령을 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고, ? 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 육신을 좇는다는 말은 타락된 인간 본성을 말하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인격 속에서 역사하기 전의 인간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③ “육신을 따라서”라는 말은 “육신 아래 있는”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 사도가 여기서 사용한 어휘는 다른 어떤 것 “아래 있다”는 개념이며, 특별히 권위 아래 있는 개념을 전달해 주는 말입니다. ? 그래서 비 그리스도인들은 습관적으로 태어난 본성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아담과 연합되어 아담의 죄 때문에 이와 같이 태어난 것입니다. ? 우리가 물려받은 이 타락한 인간 본성의 지배와 세력 하에 태어났습니다. ? 육신을 좇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 그러한 사람의 생각은 온전히 육신의 일만을 생각합니다. 그들의 관심과 행동과 행실이 어느 영역 중에 어느 위치에 있다고 할지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들은 본질상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 육신의 일들은 하나님이 없는 삶의 모든 국면들을 의미하며 하나님께 제외된 삶 속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 그들의 마침은 멸망입니다.(빌3:19)


④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는 진술은 자연인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 그들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습니다.(엡2:1) 육신은 살아있어 존재하지만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것입니다. ? 영적인 사망은 하나님의 생명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도덕적인 사람일 지라도, 세상에서 가장 문화적이며 유능하고 교양이 있어서 결코 술 취하거나 음행 등의 죄를 짓지 않을 지라도 그들의 모든 생각 속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에 대하여 죽어있으며 하나님이 전혀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활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 생명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런데 그들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게 되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복종치 않을뿐더러 할 수도 없습니다. ?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전적으로 반대함으로서 “원수 된 자”의 자리에 있습니다. ? 그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떠나 있으며 영적인 일이나 영적인 선을 행할 수 없는, 영적인 일에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입니다. ?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하나님을 미워하며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합니다. 그 이상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런 것들이 어리석게 보이고 깨달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성격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데, 그 부차적인 증거들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안전하되 영원히 안전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이 그에게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의 확신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확신이 부족하면 기쁨도 부족하게 되고 기쁨이 부족하면 우리의 삶도 빈곤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을 깨우치시고 확신을 갖게 하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대한 기쁨과 모든 것에 대한 경이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놀라움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① 그리스도인은 영을 좇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삶은 언제나 성령의 지배와 통제와 규제를 통해서,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②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합니다. 영의 일들은 성령께서 언제나 관심을 집중시키는 일들로서 ? 하나님의 일들이며, ?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며 감추어져 있던 비밀들입니다. ? 그들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 그들은 영혼에 기울이는 관심이 최상의 관점이기 때문에 자기의 죄성을 깨닫고 그 점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는 죄가 자기 영혼에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를 알고, 자기의 연약을 알고, 이런 일들을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 영의 일들은 하나님께 대한 영혼의 관계, 즉 죄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떠난 영혼, 영혼의 수치와 어리석음과 연약과 무능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언제나 그곳에 있습니다. ? 그들은 자신의 영혼에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세상 전체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관점과는 다르며, 어떠한 현상이나 현실에 대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 그들은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데, 그것은 성령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보다 부지런하고 철저하게 기도하고 싶어 합니다. ?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즐거움에 동참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과의 교제를 즐거워합니다.


③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안에서 살아 있으며, 그의 생명이 그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으며, 그것이 구원의 확신과 궁극적 확실성에 대한 기초가 됩니다.


④ 비 그리스도인에 관한 비극은 그들이 모든 노력을 다 쏟아서 선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은 그들이 하는 일은 죽은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행실 속에는 아무런 생명이 없습니다. ? 실제로 조화는 살아있는 꽃보다 더 아름답게 보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생명이 없으며 변화가 없습니다. 조화와 생화는 죽은 행실과 살아 있는 행실 차이를 예증해 줍니다. ? “생명”은 아무리 작더라도 그것이 존재하기만 하면 그 생명은 드러나게 되며 그것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이며 그가 영의 일들을 계속 생각함으로 그 생명이 갈수록 자라납니다. 그가 처음에 갓난아기로 시작할 지라도 계속해서 성숙하고 발전하게 되어 장성한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은혜 안에서 자라며 주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자라납니다. 생명은 결코 고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전의 요소가 있기 마련입니다.


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들에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함을 알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더 큰 지식을 갈망하며 더 깊은 지식에 목말라합니다.

 

 

 

 

3.  평안과 의


그리스도인은 영의 일들을 생각하는 사람이며, 그것은 그가 살아 있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이니라.”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살아있으며, 자기 속에 새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요, 새 창조물입니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았으며, 전에 지니지 못했던 권능과 능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요 새 창조물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의미에서 살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는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① 그리스도인은 “생명과 평안”을 가지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개념을 가진 사람으로서 가장 먼저 회개에 이르게 되어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법에 고통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의 영광과 탁월성을 알고 그것을 지키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그것이 평안의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그 싸움은 끝나고 평안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에게 먼저 일어나는 것은 그가 자기의 옛 삶을 특징짓는 불안감을 제거하는 것이며, 불안감은 언제나 죄악된 삶이 가지는 주요한 특징입니다.


② 죄 된 삶은 불만족의 삶입니다. 그들은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③ 그리스도인은 그가 찾을 수 없는 것을 위해서 쓸데없이 찾고 추구하였던 일을 끝내게 됩니다. ? 비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만족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평강과 기쁨, 진리를 얻으려고 하지만 그들은 얻지 못합니다. ? 사람의 마음은 우주보다도 더 크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채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만족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채우지 않는 마음은 언제나 공허합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으로 자신이 “순례자요 나그네”라는 것과 이생에서 우리는 약속된 땅의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하나님의 본향을 향해 순례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세상의 상태에 관해서 고민하지 않습니다. ? 세상 사람들은 죄와 악과 마귀가 다스리기 때문에 언제나 죽음을 향해서 나가고 있고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너머에 자신을 기다리는 무엇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어떠한 상태에 대하여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 그들은 생명과 평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④ 그리스도인의 성품에는 내적 조화가 있습니다. ?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도 평화를 누립니다. 그것은 “서로 짐을 지라 이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느니라.”는 말씀가운데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들의 평화의 법입니다. ? 그들은 의롭다 하는 선언을 받은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찬송을 드러내기 위해서 의도된 사람이며, 그의 생활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칭송을 나타내며 증명하는 사람들입니다. ? 성령님께서 그 일을 우리 안에서 이루실 것이며, 결국 흠도, 티도, 주름잡힌 것이나, 그런 것들이 없도록 하여 하나님 앞에 서서 거룩하고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성경: 롬8:9-11절

 

 

 


8장 9~11절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 성령과 모든 그리스도인(9~11)


사도 바울은 최종적이고 완벽한 구원에 대하여 확신을 주고, 이것이 그들에게 일어났던 것에 기초하여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자들에게 해당 되는 진리임을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 다음에 9절에서 늘 하던 습관대로 그 모든 것을 다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런 다음에 10,11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위치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12,13절에 가서 9~11절을 기초하여 그들에게 호소와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① 그는 먼저 “그런즉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나니”라고 하고 ? 9절에서는 “그러나 너희는 육신에 있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그것이 너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다는 말씀입니다. ? 그런 다음 그 점을 확실케 하기 위해 결정적인 진술을 첨가하는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 다음으로 이어 지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이라는 표현은 어떤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증거하였던 진리를 강조하여 단정 짓는 말입니다. ? 여기서 우리가 혼동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씀으로, 이 용어는 상호 교차되어 사용될 수 있는 것들로서 성령을 가리킵니다. ?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의 교리로서, 이 용어를 상호 교대 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삼위의 하나님께서 각 위가 동등함을 확증해 줍니다.


② 그리스도의 영을 붙잡으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을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계시게 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 그리스도의 영은 더 이상 육신과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 안에만 거하시고 있습니다. ? 오직 성령으로 중생한 자들에게 있으며, 중생하였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며, 그의 속죄 사역과 사도의 메시지 전부를 믿는 이들 속에서만 거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 성령은 주님 자신의 약속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을 믿지 않거나 속죄 사역의 다른 일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전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지 못한 사람입니다. ? 간디와  같이 훌륭한 사람일 지라도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간디는 불가지론자] ? 선하고 고상하고 친절하며 신사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은 결코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 그리스도의 영을 모신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신다는 것이며, 우리는 더 이상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겉사람과 속사람(10,11)


여기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바는 기본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진리로서, 그것은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과거에 육신에 속해 있어서 죄의 왕 노릇 아래에서 영적으로는 죽어 있었습니다. ? 그러나 현재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들어와 영의 일들을 생각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리고 우리의 장래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 궁극적이고 장엄한 결말이 될 것입니다.


①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현재 우리의 몸은 있는 그대로인데 “몸이 죽었다”고 합니다. ? 여기서 분명한 것은 우리의 장래에 어떠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몸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6:12의 말씀에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라는 말씀과 개념이 정확히 같은데, 그것은 사망의 씨앗이 우리 몸에 있다는 의미로서 말하자면 몸은 사망의 처소라는 것입니다. ? 모든 사람들의 몸에는 사망과 부패의 본질이 있고 그 부패 과정이 점점 증가하고 자라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기 시작하는 순간에 우리는 역시 죽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한 사람의 위치입니다. ? 몸은 도덕적인 의미에서도 역시 죽어 있는데 몸은 죄가 가장 용이하게 사용하는 도구로서 죄의 처소가 됩니다. 몸은 죄에게 기회와 때를 제공하며 죄가 몸속에 남아 있습니다. ? 아담의 죄는 죽음을 가져왔고, 전체가 죽었으며, 영적인 죽음을 경험했고, 동시에 육체적인 죽음의 씨앗이 심겨졌습니다. 그래서 몸이 죽은 것은 죄 때문입니다.


② 한편 “그 사람의 몸은 죽었으나 반면에 그의 영은 살았다”고 합니다. ? 영이 앞으로 살아날 것이라고 하지 않고 현재 살아있다고 하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 그들은 다시 태어났으며, 그 속에는 하나님의 씨앗이 있습니다.(요일3:9) ? 그들은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입니다.(벧후1:4) ?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③ 그리스도인의 “몸은 죄로 인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은 그리스도의 의를 인해서 살았습니다.” 곧 “의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라는 용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④ 이제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고, 변함이 없으며, 영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의 변수에 의해서 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확정적으로 이루어진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가다가 종착점에 가서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을 누리며, 그 가운데서 성화를 이루고 영화를 이루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흠도 티도, 주름잡힌 것도 없는 온전히 거룩함으로 설 수 있는 조건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3. 영화로운 몸의 본질(11)


8장의 목표는 우리에게 최종적이고 완벽한 구원에 관한 확신과 확실성을 보여 주려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이 8장의 최초의 진술이었으며, 마지막 진술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 그것이 결론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맨 처음부터 한 단계 한 단계, 차근차근히 그 결론을 목표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① 본문에서 사도는 우리 몸의 부활과 영화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에 관한 바로 이 구절이 그것을 요구합니다. ? 성령이 우리 몸속에 실제적으로 내주하신 그분이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처럼 우리도 살리실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이미 영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그리고 우리는 역시 몸의 영역에서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이제 우리는 “살린다.”는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이 말은 매우 강한 말로서 우리가 살게 될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 우리의 몸은 사망의 씨앗을 가지고 있어서 곧 죽게 될 것인데, 그 몸들이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 그것은 우리 영이 이미 살아있기 때문에 장래 어느 날 내 몸도 역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③ 그 사실을 보증하는 것은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것입니다. 마귀는 내 죽을 몸을 사용하고, 몸의 지체들을 동원하여 나를 넘어뜨릴 수 있고, 우리는 이 사악한 것들을 제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는 나에게 내가 이런 일에 대해서 행복해 질 수 있으며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는 성령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구속을 보증하고, 엡1:13,14에서 약속의 성령의 인치심과 기업에 보증으로 인하여 우리를 훨씬 더 강하게 해 줍니다. ? 이점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으로 실제 묘사될 수 있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하셨으므로 중도에 그만 두실 리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 성령께서는 실제적으로 우리의 죽을 몸에 거하고 계십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일컫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몸을 그 안에 거하는 성령에 합당하게 만들 것입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와 함께 죽었으며, 또한 우리도 그와 함께 부활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인(고전15:23)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 몸의 부활을 떠나서는 죄와 타락과 그 모든 귀추들로부터의 완벽한 구원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④ 우리의 몸은 부활 할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여전히 내 주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여전히 땅에 있다면 우리의 혈과 육의 놀라운 이적이 일어나서 그 몸이 영화로운 몸이 될 것입니다. ?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 롬8:12-13절

 

 

 


8장 12~13절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 성화의 실제


사도 바울은 언제나 먼저 교리를 설정해 놓고 그 다음에 “그러므로”라는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적용해 나갑니다. 다른 말로 해서 앞에서 진술한 것을 기초로 하나의 권면과 호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①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그러므로”라는 용어는 “형제들아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는 말씀을 전제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이러한 이해를 기초한 우리 측의 행동에 대한 요구가 있는데, “그러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입니다. 이 일은 계속적이고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어떤 행동을 지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의 행실을 계속해서 죽이고 있어야 하며 계속해서 그 일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③ 우리가 영의 영역에서 살아있다는 것과 죄에 대하여 죽고 죄와 율법의 영역과 육신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 즉 우리는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으며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명령이며, 성화를 가르치는 바울의 방식입니다.

 

 

 

 

2. 죄의 본성과 우리의 새 지위


사도의 교훈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에 빚진 자들이 아니요, 은혜와 자비에 빚진 자들임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해당되는 사실에 비추어서 우리가 육신에 빚진 자들이 아니요, 따라서 육신을 따라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비논리적인 것이며, 일관성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것은 하나의 이해와 논리에 호소하는 것이며, 이치에 맞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 그래서 육신 안에서 계속 살아가는 도덕적인 방식은 그리스도인을 우습게 만듭니다. ? 우리는 성령의 영역으로 옮겨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 나라의 관습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② 이제 더 이상 “육신”이 우리에게 어떠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더 이상 육신에 있지 않을뿐더러, 육신의 지배를 받지도 않는 새로운 관할권에 속하여 새로운 지위가 주어진 사람들입니다. ?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으며, 죄의 권세와 죄가 지배하고 관할하는 그 아래 있었으나 이제 그 위치에서 벗어나 은혜 아래 있으며 은혜의 왕 노릇 아래 있습니다. ? 그래서 옛 권세 아래 있을 때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예화 : 미국 남북 전쟁이 끝난 후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으나 자유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유를 누리지 못한 노예가 참으로 많았던 사실]


③ 우리가 한 때 몸과 마음과 영이 온전히 죄 아래 있었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렇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 우리의 위치란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 우리의 자유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 다만 죄가 우리의 “죽을 몸” 속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 이제 우리는 죄와 육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인 영에 대해서 살고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성령의 영역에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④ 육신을 따라 산다는 것은 너희가 다시 사망의 영역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우리의 몸은 사망의 영역에 속해 있지만 영은 의를 인해서 사는 것이니 생명의 영역에 속해 있으므로 ? 우리의 몸도 구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죄 가운데 거하지 않아야 합니다. ? 현재의 입장은 잠깐뿐이니 몸에게 결코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⑤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슬프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성령과 육체는 서로 대적합니다. ?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⑥ 우리는 주어진 이유들 때문에 육신을 따라서 살지 말아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 사람에게 일어난 첫 번째 일은 죄를 깨닫게 되고 자기가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자신이 죄의 주관 아래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인식합니다. ? 그리스도인은 중생한 사람이요,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이며, 새 본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 그는 하나님의 가정의 양자가 되었고 새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는 은혜의 새 영역에 있는 것입니다. ? 그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가 죽을 때 영광 중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을 믿습니다. ? 그가 이것에 대한 증거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그 사람 속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 그는 자기 몸과 그 밖의 모든 것이 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해방될 것을 알며, 또한 거룩하고 흠이 없이 의롭고 영화로운 몸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압니다. ?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러한 사실들 때문에 성령을 통해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⑦ 본문에서 가리키는 “너희”라는 말을 구원받은 성도를 가리킨다고 하면, 우리는 구원에 대하여 불안할 수밖에 없고 틀림없이 우리는 구원을 잃어버리게 될 것인데,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말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수단과 목적입니다.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육신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그런 유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 육신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 그러므로 우리에게 해당하지 않는 유의 삶을 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 그것은 경고이며, 비 그리스도인이 처한 상황을 회화적인 형식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해당하지 않는 이치에 맞지 않는 그러한 유의 삶을 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⑧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곧 사도는 아주 분명하게 성화의 방식은 그리스도인들인 우리 자신에 관한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실제화 하는 방식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⑨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들과 신약성경 전체 가운데서 나타나는 교훈들은 롬12:1,2; 8:11; 고전6:13,14; 9:24; 고후6;14; 7:1; 갈5:16; 엡4:1; 빌2:12,13; 3;16~20; 골3:1~10; 살전4:1~5; 딤전6:11~16; 딤후2:19; 딛2:11; 히12:1; 약1:22~27; 4:7,8; 벧전1:13; 2:11; 3:10,11; 4:1; 5:8,9; 요일2:3~6; 계22:12~15에서 나타납니다.

 

 

 

 

3. 성장의 원리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인 바 된 자들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결코 무능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연합하였기 때문에 우리 속에 어떤 것도 막지 못할 역사하는 권능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엡1:18~20)


②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자라나야 되고 발전해야 되고 성숙해져야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③ 그리스도인은 죄에 떨어질 때도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예화 : 등산하는 사람이 넘어졌을 때, 그 자리에서 털고 일어서서 곧장 위로 향해서 올라가는 것]


④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나를 이해하고 사로잡고 그의 소유로 선택하신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⑤ 우리는 하늘의 연병장에 서 있는 군병과도  같습니다. ?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고, ?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입니다. ?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우리는 세상의 빛들로 선택된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 몸을 죽이는 일


그리스도인이 비록 중생하였지만 죄가 아직도 그의 죽을, 또한 죽어가는 몸에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은 죄와 오염의 도구요 처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 몸들이 구원받을 날이 있을 것이고 그 때까지 죄는 몸 안에 있을 것입니다.


악한자가 그리스도인을 향해 큰소리치며 때때로 위협도 할 수 있지만 ?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그를 만질 수도 없고 통제하지도 못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에 대한 신약의 전형적인 진술들입니다. ? 우리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우리 속에 있는 능력을 사용하고 행사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적인 지위를 알아야 합니다.[3번의 성장의 원리 참조]


이제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여 우리의 몸을 죽이는 일을 해야 하는데, 이 일은 “영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임을 스스로 명심하며 성령의 조명된 마음을 가지고서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① 그리스도인은 죄를 삼가 함에 있어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벧전2:11). 그것을 멈추고, 즉각적으로 하지 말고 또한 다시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②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엡5:11,12)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삼가야 할 뿐 아니라 그러한 일들을 행하고 그러한 삶의 방식을 택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③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고전9:27)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상을 받기 위해서 절제하고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 눅21:34에 있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 점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대하게 됩니다. ? 주님의 말씀은 만일 사람이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다른 어떤 것으로 자기의 몸을 탐닉시킨다면 그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가 더욱더 어려우며 몸의 행실을 죽이기가 더욱 힘들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모든 장애 요소들을 피하고 규칙적이고 절제 있는 삶을 모든 방면에서 이끌어 나가라는 것입니다.


④ 사도 바울은 롬13:14에서 최대의 진술을 하고 있는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만일 몸의 행실을 죽이고자 한다면 “육신을 위해서 어떤 일이든지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시편 1편의 말씀처럼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자리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⑤ 우리는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죄의 첫 번째 동기와 첫 번째 충동과 유혹을 처리해야 합니다. ? 그것이 나타나는 순간 그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는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 죄의 충동은 미약하게 정욕을 불러일으키고 탐심을 추스르는데 바로 그 시점에서 그것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 ? 만약 그 충동과 유혹을 억누르기만 한다면 그것은 더욱더 강하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⑥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에 넘어진다면, 우리 스스로 너무 쉽고 빠르게 치료하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는 고후7장에서 나아가서 바울이 “회개를 이루는 경건한 근신”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 읽어 보아야 합니다. ? 그리고 그것을 되새겨보고, 분석하고, 파헤쳐보고,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고, 또한 그것을 미워하며 스스로 다짐을 해야 합니다. ? 그렇다고 해서 절망과 침체의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기까지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⑦ 죄를 짓는데 있어서 가장 무서운 국면은 우리가 실패해 있고 실족했고 비참해졌으며 해방 받을 필요성이 있다는 면보다는 하나님께 대하여 실수하였고 하나님을 잘못 나타냈다는데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영광과 그의 찬송과 그의 덕과 그의 훌륭함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할 방식으로 행동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나 우리들이나 같다. 어디에 차이점이 있는가”라고 물을 것인데, 그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통로로 우리를 택하셨다는 사실을 알며 또한 그 자신의 능력과 그의 기이한 길을 알리는 방편으로 우리를 택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때에 우리는 죄의 문제를 처리하는데 더욱더 진보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 롬8:14-15절

 

 

 


8장 14~15절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 양자로 받아들임과 중생(14)


우리는 이 문단에서 양자교리를 다루게 되는데,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아바 아버지”라 불러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인식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가 성화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게 되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면서 실패만 하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게 되고, 승리의 삶을 살지 못함으로서 구원의 확신까지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고, 더군다나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로 받아들여졌고,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영광스러운 지위를 생각하게 된다면, 성화의 문제는 자연적으로 해결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성화를 촉진시키기 위해서 역사하고 있으며 우리로 죄가 아직도 거하는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우리를 궁극적으로 영화로 인도합니다.


① 모든 사람이 전부 하나님의 아들들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②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인식을 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출발해야 합니다.


③ 우리는 어떠한 사람도 본질상 하나님의 자녀나 아들이 아니며, 아담의 자녀들이고 그것이 우리의 혈통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 결과적으로 우리는 진노의 자녀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법적인 조치를 하심으로서 우리가 그의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2. 증가하는 죄 의식(15)


사도의 주장은 성령께서 다시 종의 영을 주지 않고 오히려 양자의 영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종의 영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에 대한 표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라는 부정적인 요소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① 죄는 그 양이 아니라 죄의 정도를 깨닫고 용서의 정도를 아울러 깨닫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② 진리를 적용하고 그 진리에 정직하게 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③ 진리의 영이요, 성결의 영인 성령께서는 언제나 죄의식과 죄책감을 산출하는데,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밝혀 보여주는 것입니다. ? 그는 하나님의 성격을 열어 보여주십니다. ?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여주시고 동시에 율법 속에 언제나 영성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 스스로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 이처럼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틀림없이 “나는 불의하나 주의 이름은 의롭고 거룩해, 나는 죄와 더러움 가득 찼으나 주님의 진리와 은혜로 충만해” 이렇게 말하도록 합니다.


④ 모든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그들의 이해가 더 컸음을 역사에서 발견합니다.


⑤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실상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3. 우리의 아들 됨에 대한 확신(14)


사도는 여기서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우리가 비록 이 땅에서 살고 있고 또한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사실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자녀들이라는 영광스러운 진리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노의 자녀이었으며 아담의 자손이었지만,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가정에 양자로 받아들여졌으며, 그보다 더한 것은 우리가 다시 났으며, 새 생명을 받았고, 새 성품을 받아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라는 것입니다.


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과 비슷하게 닮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께서는 아들들인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배려를 가지고 계시는데, 우리의 머리칼 하나까지도 세신바 될 정도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③ 아버지는 자녀를 위해서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데, 자녀는 성숙해지기까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 그래서 그 자녀의 유익과 장래를 마음에 두시고 그를 위해서 어떤 일을 계획하셔야만 합니다. ? 우리의 구원 전체가 아버지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계획의 결과이며 우리를 영화롭게 할 그의 계획의 열매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목표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인도하시고 지도하시는데, 환경을 통해서 연단하시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징계도 하십니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④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둘러싸여 있으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데, 우리는 단지 나중에야 그것을 깨닫습니다.


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받으실 준비가 되어있고 우리의 말을 듣고 축복해 주실 차비를 하시고 계십니다. ? 더 나아가 그는 우리가 받기를 희망하는 것보다 더 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우리 주님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버지께서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의 존전에 나아갈 때 이것을 깨닫고 확신함을 가지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 우리는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야 하지만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⑥ 14~17절까지에서 우리는 다섯 가지의 요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 모든 사람이 아들이 아니라는 것과, ?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아들이라는 것이며, ? 그 자격에는 어떤 특별한 사실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우리의 이 아들 됨을 확신할 수 있는가 하는 실제적인 문제를 접하게 됩니다. ? 우리가 양자됨으로 인해서 따라온 결과들과 귀추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⑦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우리가 아들 됨을 확신할 수 있는가 하는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성령님은 아들들을 운전하지 않으며 그가 하시는 일은 우리의 의지를 설득시켜서 하나님을 확신시키고, 그 확신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합니다. ? 성령님의 하시는 일은 조명하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성령의 인도와 지도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삶의 중요한 방향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최대의 바람이 된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4. 영적 사고방식(14)


우리는 사도가 세 가지의 이유를 들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중의 한 가지가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영을 우리 속에 두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의 요소가 남아 있어 성령을 거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성령께서 그 육체에 대하여 대적하시고 계십니다.


①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육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신령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②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의 최고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더 큰 지식을 소원하게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더 크게 바라게 됩니다.


④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언제나 하나님을 위한 자기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늘 염려하고, 자신의 사랑이 약하고 연약해서 늘 걱정입니다. 또한 우리 속에서 위대하고 불타오르는 거룩한 욕망이 있어야 함도 압니다.


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더욱더 깨닫게 됩니다. 성령은 빛과 진리와 거룩의 영이므로 그가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실 때 언제나 이 방향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⑥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죄를 짓는 순간 슬픔을 느낍니다. ? 하나님의 율법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였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치게 하고 슬프게 했고 손상시켰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그보다 더 비참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⑦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점점 더 죄와 악과 유혹이 접근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예민해지기 때문에 더욱더 조심하게 됩니다.


⑧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자기 속에 의와 거룩을 사모하며 갈망하고 있는 것을 의식합니다. 그는 항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⑨ 진정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그러한 느낌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며,  죄의 어떠한 요소들을 억제하려 하여 육체의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⑩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는 사람들입니다.

 

 

 

 

5. 경건한 두려움과 무서운 두려움(15)


종의 영은 양자의 영보다 언제나 선행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종의 영을 받지도 않고 양자의 영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은 두려워하는 종의 영에서 구원을 받아, 더 이상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다시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끝나 버렸고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시는 양자의 영에 의해서 그 자리가 채워진 것입니다.


① 하나님은 거룩한 아버지 이십니다. ?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깨닫고 경외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분을 대할 때에 늘 조심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결코 의심하지 않습니다. ? 우리가 경외심을 갖는 것은 그 관계를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분에 대하여 알기 때문입니다.


② 우리가 종의 영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어떤 낙담과 낙심을 맛보지 않게 될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 그들이 실족한 자의 느낌과 조건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아무리 그가 악한 상태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그는 다시 두려워하는 종의 아래로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 그는 언제나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즉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거역이나, 죄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 그가 죄에 빠져있을 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③ 사단이 목표로 하고 괴로움을 주어 고통을 받는 그리스도인, 즉 우리 주님을 광야에서 시험했던 자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그 최대의 무기들을 가지고 와서 공격하지만, 마귀마저도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우리를 심각하고 호되게 공격할 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마귀를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로 증명됩니다. ? 성령 훼방 죄에 대한 두려움도 종의 영이 아닌 것은 용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미 성령 훼방 죄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증거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성령 훼방 죄를 짓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 버렸다고 하는 생각이 드는 것 또한 종의 영이 아니라 그는 깨어진 교제가 다시 회복되는 것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느낌입니다. 이런 저런 모양으로 그 사랑하는 자가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게 하는 범죄를 했던 것입니다.

 

 

 

 

6. 우리가 양자라는 의식(15)


본문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서 우리가 벗어났음을 상기케 하는 두 번째 부분과 아울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세 번째 증거이기도 합니다.


①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가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② 성령께서는 우리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우리가 양자라고 하는 지식을 깨닫게 합니다.


③ 이것은 다른 말로 “양자의 영”이라고 합니다. ?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인 양자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 로마 사회에서 양자를 받아들이려면 반드시 법적인 문서를 통해서 그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 그 신분 이양이 법적으로 이행되어서 그 양자로 받아들여진 사람은 자기가 진정한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새로운 성품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진리 안에서 진실로 양자로 말미암아 하나님 가정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④ 양자의 영을 가진 사람은 ? 확실히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고, ? 하나님을 기뻐하며, ?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하나님과 교제를 즐거워합니다. ? 그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영원토록 그를 더욱더 알기를 원합니다.


⑤ 양자의 영을 가진 사람은 ? 예배 의식에서 기계적이고 냉랭한 방식으로 하지 않고, ? 아름답고 품위 있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가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자발적인 친근감으로 예배합니다. ? 어린 아이는 뛰어들고 아버지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집니다. 그는 아무도 가지지 아니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 그것은 논리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이며 말보다 더 깊은 것을 알고 있는 천성적인 확신입니다. ? 확신에 덧붙여 거기에는 따스함과 애정과 즐거움과 행복이 있습니다. ? 이것이 바로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 그러나 이것은 결코 “경건한 두려움”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⑥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양자의 영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필수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양자의 영에 대해서 조금밖에 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⑦ 구원의 확신은 구원의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도 그 확신에 대한 부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의지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만 주어지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사람 중에도 구원의 확신이 부족할 수가 있습니다.

 

 

 

 

7. 양자의 영을 받는 방식


이제 우리는 양자의 영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는 문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설득시키는 문제도 아니고 성경에서 이끌어내는 추론도 아니며, 다만 속에 있는 절규적인 느낌이요, 성령에 의해서 부어지는 어떤 것이며, 그리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는 어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에게 양자의 영이 어떻게 받아지는가 하는 것을 물어야 합니다.


①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 그런데 이 선물을 받은 사람이 적은 이유는 갈급해 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만일 사람이 죄 가운데 산다면 갈급함이 없는 것입니다. ? 세상의 물을 마시는 것은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하고 진정한 갈급함에 대한 예리한 날을 무디게 할 것입니다.


② 은사를 주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요한복음 7장에 있는 그리스도 자신의 초대의 말씀이나 세례 요한의 말씀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주는 자임을 말하였습니다. ? 베드로는 오순절 날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한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중심입니다.


③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세례를 받는 이 체험을 목이 갈한 사람이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하셨습니다. 물을 마시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으며, 누가 가르쳐 줄 것도 없이 목이 마른 사람은 입을 열고 마시기만 하는 것처럼, 성령의 세례를 받음에 있어서 주님에게 그를 갈급해하고 원하고 있음을 고백하며 성령께서 내게 임하게 하셔서 성령께서 나로 충만케 하시기를 바란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치 공기 속에서 내가 숨을 쉬듯이 이 놀라운 주님의 성령을 받게 해 달라고 아뢰는 것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④ 그것은 성령은 우리가 받기로 결정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주어질 때에 받게 되는 것인데, 성령은 주님에게 주어지셨으며 그래서 주님은 그 성령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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