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강해 2
언약교회 박길현 목사
[ 19:19-37 ] 규례를 지키라
[ 20:01-27 ] 종교적 기질 아닌 말씀
[ 21:01-24 ] 제사장의 위치
[ 22:01-09 ] 성물을 욕되게 말라
[ 22:17-25 ] 씨없는 짐승
[ 22:26-33 ] 백성된 신분
[ 23:37-38 ] 이스라엘의 절기들
[ 24:01-23 ] 등불, 떡, 그 이름 훼방(구출사건 그 이후)
[ 25:01-07 ] 안식년
[ 25:08-13 ] 희년
[ 26:01-13 ] 정상적인 희년의 생활상
[ 26:14-46 ] 왜 정상적인 희년 공동체 생활이 안될까
[ 27:01-34 ] 서원
lv191937 LEV. 19:19-37 언약교회, 박길현
규례를 지키라
19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20무릇 아직 속량도 되지 못하고 해방도 되지 못하고 정혼한 씨종과 사람이 행음하면 두 사람이 형벌은 받으려니와 그들이 죽임을 당치 아니할 것은 그 여인은 아직 해방되지 못하였음이라 21그 남자는 그 속건 제물 곧 속건제 수양을 회막문 여호와께로 끌어 올 것이요 22제사장은 그의 범한 죄를 위하여 그 속건제의 수양으로 여호와 앞에 속죄할 것이요 그리하면 그의 범한 죄의 사함을 받으리라 23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24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양할 것이며 25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26너희는 무엇이든지 피 채 먹지 말며 복술을 하지 말며 술수를 행치 말며 27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치 말며 28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29네 딸을 더럽혀 기생이 되게 말라 음풍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할까 하노라 30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31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32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33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34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35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36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37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나의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기독 신앙을 바로 파악하는 데는 이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볼 것이냐를 생각해 보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기독 신앙은 삶의 전 영역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을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변했기 때문에 그 신앙이 그 삶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자원해서 신앙의 삶을 살려고 발버둥 치는 자임을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인이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게 되는가? 근본적으로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파악하게 되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신자의 눈에 세상은 밝고 아름답게 비칠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은 거짓이요, 껍데기 밑에는 이교적 정신이 기초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로 신앙인의 눈에는 이것이 보여야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현상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감을 눈앞에 두고 당시에 행해지던 사회생활을 가지고 교훈하시던 하나님의 교훈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에 주셨던 말씀이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약 4000년전이나 지금이나 인간 세상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19: 종류를 혼합하지 말라. 다른 종류의 육축을 교합시키지 말라. - 이 말씀은 생물학적 법칙 이야기가 아닙니다. 종교적 교훈을 위한 것입니이다. 즉 이스라엘과 가나안인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요 다른 소속을 가진 사람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각각 하늘과 땅의 소속을 가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두 재료로 짠 옷 입지 말라."
-성질이 다른 소속의 사람들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 소속된 자와 땅에 소속된 자가 섞이지 말아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20: 정혼된 여종이 아직 속량 되지 못했을 경우에 아직 주인된 자가 음행할 경우를 말합니다.
-여종은 아직 주인의 소유다.(소유물) -"노리개"(당시 사회로 볼 때) -법 이란 시대마다 바뀌는 것 ; 대세에 따라.
-죽이지는 않지만(왜냐하면 자기것, 종상태 이니까), 허물이 있다. - 정혼한 종이라면 종이라도 지켜 주는 것이 도리며 사랑이기 때문에
-당시 세상은 얼마든지 그런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사랑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고 있다.
23-25: 철저히 더럽혀진 땅(23) 여호와가 거룩하게 하심으로 거룩하게 되는 땅(24), 은혜의 열매를 먹고사는 땅임을 알라. -처음부터 이것을 잊지 않도록.
26-28: 가나안의 이방 종교적 풍속 금지 -피채 먹는 것(생명 경시) : 여호와 형상 경시(창9:6)
-이방인들이 이런 생각 가질 리 없다.
복술 - 점, 손금, 관상, 사주팔자 -구름의 움직임, 새 비행, 별점, 화투 등 -운명론이 들어 있다. -하나님 없는 것, 자연의 일부 : 자연 법칙 속의 일부인 인간 -어쩔 수 없다는 것.
머리 가를 둥글게 깎는 것 ; 머리 꼭대기 부분만 남기고 빡빡 밀어 버리고 사는 광야인들이 있었다.(렘 9:26, 25:23, 44:32) -젊은이들, 수염 끝 손상치 말라. ; 이방인은 밀어 버리고 살았다. -이스라엘은 길렀다.
죽은 자 위해 살벰 ; 살베어 피 바침으로 귀신을 달래어서 죽은 고인을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게 하는 의미로
몸에 무늬 놓는 것 ; "소유 중시" - 폭력 집단. ; 폭력 신 믿는 자들
29: 신창으로 제공 - 근친상간의 죄 - 지금도 윤락가에 딸 팔아먹는 자가 있다.
31: 신접자와 박수 - 저승 세계와 통한다는 자들 ; 영매
35: 저울 속임 : 재판, 도량형, 저울추 속임 - 자기 위해서, 욕심을 위해서 사는 인간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교적, 귀신 섬기는 정신 즉 욕망과 욕심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이 세상 - 근본은 욕망이 지배하고 있다. 귀신의 정신에 사로잡혀 있다.
- 편리를 위한 상품 - 판촉을 위한 광고로 자극
- 자동차 경쟁 - 오염, 연료의 고갈 가속화, 대기 오염으로 환경 파괴 - 죽어 나는 세상
- 집장사 경쟁 - 땅 죽이고 시멘트의 세상을 만들어 간다.
-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세상
- 이방적 정신, 우상 숭배의 정신 : 자기 욕망으로 망해 가는 세상이다.
세상이 이런 세상임을 직시하는 눈을 가진 것이 사람이 바뀌어 있다는 증거다. 세상에서 이것을 볼 수 있는 자가 신자이다. ; 과학 때문이 아니라 신앙으로 사람이 되어지고 보니 세상의 진짜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로 보고 있는 자인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살고 있는가?
lv200127 LEV. 20:1-27 언약교회, 박길현
종교적 기질 아닌 말씀
(레20:1-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무릇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우거한 타국인이든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 본 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그 사람과 그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무릇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히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 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였은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누구든지 그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누구든지 그 자부와 동침하거든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하였음이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둣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누구든지 아내와 그 장모를 아울러 취하면 악행인즉 그와 그들을 함께 불사를지니 이는 너희 중에 악행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너희는 그 짐승도 죽일 것이며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하여 교합하거든 너는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이들을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누구든지 그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을 취하여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 그 민족 앞에서 그들이 끊어질지니 그가 그 자매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그 죄를 당하리라 누구든지 경도하는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남자는 그 여인의 근원을 드러내었고 여인은 자기의 피 근원을 드러내었음인즉 둘 다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너의 이모나 고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 이는 골육지친의 하체인즉 그들이 그 죄를 당하리라 누구든지 백숙모와 동침하면 그 백숙부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이 그 죄를 당하여 무자히 죽으리라 누구든지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이 무자하리라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좇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너희는 짐승의 정하고 부정함과 새의 정하고 부정함을 구별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부정한 것으로 구별한 짐승이나 새나 땅에 기는 곤충으로 인하여 너희 몸을 더럽히지 말라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지난 주일은 얼마나 이교적인 정신, 우상 숭배 정신 즉 인간의 자기 욕망에서 비롯된 정신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가를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이 바른 기독 신앙을 가진 자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말하는 욕망의 세계로 세상을 보라는 말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도 없이 인간이 자기 마음을 다스려 욕망을 버려서 부처가 되는 세계를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의 세상을 마귀가 지배하고 마침내는 이 세상이 망하고 불에 타서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 보고 하나님이 새로이 창조하시는 새 세계를 소망하자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읽은 20장은 11장에서 19장까지의 내용들 가운데서도 핵심되는 내용을 반복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몰렉을 섬기는 일(18:21) 신접자와 박수 추종에 대해서(19:31), 부모 대적하는 자에 대하여(19:3), 여러 가지 간음에 대하여(20:10-21, 18: ), 새와 짐승과 곤충의 정하고 부정함(20:25,11: )에 대하여 본 20장은 간략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11장에서 19장의 내용을 압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내용들을 압축하는 것이 본 20장의 목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압축하여 핵심적인 몇몇 사항들을 제시하는 것은 근본적인 인간의 심성이 어떠하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본문의 서두로 돌아가 봅시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을 놓지를 못하고 계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고 하십니다. 못내 안심할 수 없어서 또 다시 말씀하십니다. 인간이란 하나님이 안심할 수 있을 만큼 믿을 만한 존재가 못됩니다. '걱정 마십시오. 말씀대로 잘 따르고 순종하겠습니다.'라고 장담할 수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런 장담, 자신감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잘 믿습니다. 그래도 주안에 있습니다.'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오늘 우리에게 안심하지 못하고 계실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타락한 후의 인간의 기질이란 믿을 수 없고 웃기기 짝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바람난 아내를 집에 데려다 놓았더니 몇 날이 못되어 또 나가고 말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호세아) 집에서 살림 사는 것이 성미에 맞지 않고 오히려 마시고 노래 부르고 즐기고 그렇게 해서 스트레스도 풀고 쉽게 돈도 벌고 하는데 길들여져 있으니 집안 살림은 도무지 성미에 맞지 않아서 다시 뛰쳐나가는 것입니다. 그 본성이 그런 세계를 그리워하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약 환자가 마약을 찾고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말입니다. 인간도 이러한 기질 속에 무엇엔가 그리워하고 있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종교적 욕망입니다.
종교적 욕망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만 이 종교적 욕망이 하나님에 의해 이끌림을 받지 않고 자기의 사사로운 욕망과 마귀에 의해 이끌림을 받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봅시다. 2-3절의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몰렉이란 암몬 족속의 우상인데 놋쇠로 제조된 송아지 머리의 우상입니다. 이 우상은 불로 달구어져 있는데(우상의 손과 팔이 후라이팬 역할을 한 것 같다.) 그것을 섬기는 자는 그 자녀를 우상의 손에서 태워 죽인 것 같습니다. -우상의 제물로서 생각을 하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여호와의 성소에도 찾아옵니다. 몰렉도 섬기고 여호와도 섬긴다고 하는 행위를 보여 줍니다. 성탄 때에 교회에, 석탄일에는 절에 가는 식이다. 몰렉도 "왕"이라고 하고 여호와도 "왕"이라고 하니 양쪽 다 섬겨 덕보자는 심산인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자녀를 태워 바치면서까지 이런 일을 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1) 이런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없습니다. 막연한 종교심입니다.(요즘도 이런 사람이 많다. -갔다 오면 불안하지 않고 안심)
2) 종교적 목적을 위해서 자식까지도 불태워 바치는 무섭고도 맹신적인 마음입니다. 얼마나 집요한가? -(명태 몇 마리 놓고 촛불 켜 놓는 것은 유가 아니다.)
- 밤 12시에 팔공산 갓바위에 올라가서 절하고 내려오기를 내기하듯이 하는 사람도 있다 지만)
-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집착성을 가지고 있다.
- 이런 식의 행위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지는 않는가?
- 각종 금식,(아침 금식, ~일 금식) 철야 기도, 갚기식 헌금(십일조, 예물 헌금) 그래서 집까지 바쳐 버리고 가정이 파산되지 않던가?
우리는 그렇지 않는데 하고 희희낙락할지도 모릅니다. 왜 무엇인가 해야만이 열심이 나는 것 같은가?
- 성경 읽기 (아예 차원 높은 체 하면서 참여도 안할지 모르지만) 기도 해야 전도 대회하고,
- 주님 만한 분 믿는 것 때문에 이런 것들이 되어져야 하지 않는가? 자연스럽게 되어져야 하지 않는가?
특히 은사 집회를 찾아 헤매는 경향 : 병고침 -신통력을 찾는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난 후 기도해야지! - 낫기 위해 신통력을 구한다.
예언 - 행불행,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 -말씀(안에 있다.)
축복 - 축복기도 받고 싶어하는 마음 - 예수 안에 받았다.
- 왜 이런데 그렇게 기를 쓰는가?
- 하나님이 그들만의 하나님이며, 제사장이 그들만인가?
- 하나님을 진정 믿으면 신뢰하고 기도하라.
이와 같은 집요한 마음의 경향성을 "음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5) 6절에도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 라고 했다. 음란을 추구하듯이 무당과 박수를 추종한다. 무엇인가 안다고 하면 기를 쓰고 추종한다. - 불신자는 물론 신자라고 해도 소위 기독교 예언자(예수 무당)라는 자들에게 이렇게 기를 쓰지 않는가?
종교적 음란성입니다. - 이런 자들을 하나님이 끊어 버리신다.(3,5,6)
2.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까?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규례"와 "법도" 즉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마음을 바치고 지성이면 감천이니 정성을 바쳐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 하지 말고 안다는 자를 추종하지 말고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예수님 사랑하면서 사랑하고 안할 것 안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사랑하는 생활이요 순종이요 행동입니다. 너무 내면적으로 내면화시키지 맙시다. 마 7:7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 12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롬 12:3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숨은 것을 알아내고, 문제 해결을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하신 말씀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신앙이다. 고로 신령한 자를 추구하고 알려고 하기 보다 기록된 말씀을 순종하여 행합시다.
3. 말씀 중에 계신다는 하나님은 순종하여 사는 그 현장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이 시행되는 곳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기질을 따라가려고 하지 말고 말씀 따라 행동합시다.(약 2:14 -26)
그 외 의 것 : 자유다. 직장, 직업, 결혼 배우자, 이사, 차를 산다. 대학을 간다. - 자유로 해라. 자기 좋은 대로하라.
결론
신앙이란 영통자, 영능자를 추구하는 심리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이다. 주님도 표적을 행하셨지만 자기 믿게 하기 위한 것(표적)이었습니다. -주님 알자는 능력이나 영통을 추구하지 말고 십자가를 지고 가라. 이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나머지는 죽이든 살리든 주님이 하십니다.
lv210124 LEV. 21:1-24 언약교회, 박길현
제사장의 위치
지난 주일에는 인간 욕망이 종교의 탈을 쓰고 나타난 종교적 인간의 본성을 추종하지 말고 주신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신비함, 능력, 영통자, 영능자를 찾고 자기의 미래의 행불행을 알아보려는 심성 자체가 종교의 탈을 쓴 인간의 욕망임을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음란하듯 추종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경향에 관심하며 호기심을 가지는 인간의 성격을 거부하고,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신앙이며, 여기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21장은 제사장의 신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직무를 맡은 제사장에 대한 가르침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제사장이라는 사람들 전체가 어떻해야 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고하여 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론 자손인 제사장들은 명심하고 들어야 할 내용들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제사장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 지를 먼저 봅시다. 4절에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인즉"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어른이란 말은 즉 주인이란 말입니다. 제사장이 백성의 주인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입니다만 제사장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레위기 9장에 보면 제사장의 취임식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9:22에 보면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흔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백성을 향하여 제사장이 손을 들어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가 끝이 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그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고 백성을 받으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3-24에는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살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백성중에 계시면서 제사를 받으셨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여호와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제사장이 제사의 사역에 수종을 잘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사장이 제사 사역을 잘 수종들고 잘 수종 들었다는 표시로 백성을 축복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져서 살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생명과 사망을 책임진 주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4장에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19)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 받은 복은 불신 세상에서 신앙의 사람을 이루게 되는 복입니다. 이러한 복이 제사장이 축복함으로 이루어지는 복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제사장의 축복을 받아야만 신앙의 백성으로 살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레위기에서 제사장을 백성의 주인이라고(어른)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생각해 보면 주인인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잘 하면 백성은 살고, 잘못하면 백성은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 전체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들을 보십니다. 제사장들이 바로 서면 백성의 죄가 묻혀지고 생명을 얻습니다. 민16장에 보면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염병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모세가 아론을 시켜서 향로를 가지고 급히 달려가게 해서 아론이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쳤다고 했습니다.(민 16:47-48) 이와 같이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생명을 쥐고 있는 중보자 즉 주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위치에 있는 제사장들은 어떠해야 합니까?
첫째로 제사장들은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을 이스라엘 온 백성 대신 구별해서 자기를 섬기는 사람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며 또 백성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4,6,7,8,15,23들에서 강조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 그들을 구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저주와 죄악의 상징인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며(1-4:죄를 가까이 말라.) 이방인들의 흉내도 내지 말아야 하며(5-6:불신자처럼 되지 말며) 부정한 여자와 결혼도 하지 말고(7-8:기생, 부정한 여인[자신을 남에게 거리낌없이 준다.], 이혼 당한 여인 -제사장의 아내였던 과부와 결혼은 허용되었다.[겔 44:22]), 처녀에게만 장가를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그렇다고 요사이 목사가 상처하고 처녀 장가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에 이러한 일들을 통해 제사장들의 거룩을 제사장 자신들과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것에 불과합니다. 특히 직무수행중에 있는 제사장은 부모가 죽어도 그 시체에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으며, 성소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둘째로, 건전한 자여야 했습니다.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17- )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12가지의 결격 사유만 기록해 놓았지만 후에 유대인들은 이것을 142가지로 확대시켰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제사장은 온전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런 성경들을 들어서 요즈음 없는 자 절뚝발이등 지체가 불완전하다고 해서 목사 못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원해서 받아들이면 얼마든지 됩니다.(교회가 벗어나지 못해서 탈이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러한 제사장들이(건전, 건강한) 하나님 앞에서 제사 드리는 직무를 잘 수행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 제사장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 제사장으로부터 나지 아니한 제사장 예수님이 자기를 단번에 드려 제사 드리는 직무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는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므로 제사도 필요 없고 인간 제사장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목사, 장로도 기름 부어 세웠다고 하지만) 대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대제사장 예수를 보시고 만족해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예수 안에서 제사장 된 성도들이 중요합니다.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란 의식을 가져야 하고 구별된 정신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세상과 다름 : 세상을 떠나는 것 : 초월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온전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온전함이란 무엇입니까? 건강한 육체, bodybuilding입니까? 경건은 온전함입니다. 육체의 모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경건의 온전함을 보여 주어야 -못난 것, 작은 것, 지체 부자유등 때문에 멸시하지 않고 받지 않고, 주눅도 들지 않고, 예수 믿음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합니다.
우리들을 생각해 봅시다.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옷, 먹을 것, 살 곳, 다 있지 않습니까? 히 13:5-6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노라."
좀 이렇게 됩시다. 담대합시다. 즐거워합시다. 과연 주께서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을 믿고 담대하고 즐거워합시다. 이것이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lv220109 LEV. 22:1-9 언약교회, 박길현
성물을 욕되게 말라.
지난 시간에는 백성의 주인되는 제사장의 위치를 생각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생사를 하나님 앞에서 쥐고 있는 자요, 제사장의 축복으로라야 이스라엘이 산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제사장은 거룩한 생활을 유지 해야 하며(시체, 이방 풍속, 부정한 여인과의 결혼 등을 하지 않는 것 통해 거룩을 배움) 온전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즉 불완전한 자는 제사장 사역에 봉사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서 제사장 신분의 온전함을 이해시키고자 했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제사장된 우리들이 세상과는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고, 세상을 두려워 말고 담대하고 온전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학벌, 빈부 귀천, 권세, 권력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이어서 오늘의 말씀은 성물은 제사장이라도 거룩한 자라야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물(聖物)이란 말이 나왔으니 생각해 봐야 할 문제는 우리 한국 교회가 성물이라는 말에 대하여 아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당, 강대상, 마이크, 가운, 의자 등등 교회에서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면서 사용되는 것들은 성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한다고 하면 특별한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 말하는 성물은 제물을 말합니다. 여러 가지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나오는 제물들 중 번제는 온전히 불살라 드렸지만 그 외에 소제와 화목제와 속죄제와 속건제는 모두가 제사장 가족들이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제사장 가족이란 제물을 먹고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좀더 생각해 보면 번제는 온전히 태워 드리는 제사이니 제사장의 음식으로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만, 나머지 제사들에서 제사장 가족이 먹을 음식이 남습니다. 이 제사의 제물들은 안수하고 드려진 제물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제물들을 먹는 것은 사실은 제물 드린 자의 주검(시체)을 먹는 것과 같은 것이 됩니다. 제사장 자신들이 드린 것은 자기들의 주검을, 백성들이 드린 것이면 백성들의 주검을 먹는 셈입니다. 안수란 드리는 자와 제물이 같다(일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백성들이 드리는 제물이라고 할지라도 그 제물은 제사장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에 온 백성들이 다 제사장이고 이들 중에서 대표로 봉사하도록 위임을 받은 사람들이 제사장들이기 때문에 하여튼 제사장들이 먹는 음식은 제사장들의 시체 곧 자기들의 시체(주검)를 먹는 셈이 됩니다. 그러니 제사장 가족이란 자기들의 주검 곧 이스라엘의 주검을 음식으로 먹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물을 "성물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죽은 자들입니다. 언제 죽었습니까? 애굽을 나올 때 홍해에서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예수를 믿을 때 예수와 함께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그 후에 잘못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이미 죽은 자인데 죽었다는 것을 잊었으니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거룩 하라." 또는 "스스로 구별하라."라는 뜻은 바로 "죽은 자들임을 알라.", "죽은 자인 줄 알거든 죽은 자로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해서 죽은 자입니까? 부정에서 죽은 자요, 죄악에서 죽은 자 라는 말입니다. 문둥환자, 유출병 환자, 시체로 부정하게 된다, 설정 한자, 부정한 사람이나 동물들에 접촉한 것 (4-5) 이런 것들은 죄악과 부정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이미 홍해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들과 알게 든지 모르게 든지 가까이 했으니 "죽은 자"임을 잊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으로 돌아갔다는 말이요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십자가를 잊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헌신이 아니겠습니까?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거룩이요, 죽은 자로 행동하는 것이 바로 거룩인데, 우리는 이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내일의 세상을 위해 염려하고, 세상 것을 더 움켜쥐려고 몸부림치지 않습니까? 평균이 93점이면 95점 맞았으면 좋았을걸! 같은 값이면 좀더 예쁘고 똑똑했으면! 같은 값이면 부자로 떵떵 울리고 살아 봤으며! . 이런 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주소요 상태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도 여전히 홍해를 더 기억해야 했고, 죽었음을 생각하면서 날마다 죽은 시체를 먹는 생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무엇을 먹고살지?"가 아닙니다. 이와는 반대로 "오늘도 죽음을 먹어야지.", "어떻게 죽을까?", "무엇하면서 죽을까?" 하는 결심을 하는 사람들이 "거룩한 자들", "성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침에 눈을 뜨면 사는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먹는 것이 주검인데 죽는 것이 내 삶이구나라고 생각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 바로 이스라엘이요 제사장이요 거룩한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불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3절은 "그 몸이 부정하고도 이스라엘 자손이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에 가까이 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지리라."했고 9절에는 "그들은 나의 명을 지킬 것이라. 그것을 속되게 하면 그로 인하여 죄를 짓고 그 가운데서 죽을까 하노라.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물을 먹는 뜻을 알지 못하는 것 즉 홍해에서 죽었고,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무시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죽음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죽음이란 요즘 말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는 뜻이요 불신자라는 말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성물 즉 죽음과 하나님의 성호(이름)가 동일한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2) 그러므로 성물을 구별하지 못하고 욕되게 하면 바로 죽음이요, 불신자로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성물은 바로 여호와 성호를 뜻하기 때문입니다.(죽으시는 여호와) 이것은 우리 한국 교회에 심각한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예수님이 내 대신 죄를 지고 죽어 주셨으니깐 내 죄는 사함을 받았다. 아이구 좋아라. 나는 이제 천당에 영생 무궁토록 살게 되었네."라고 생각합니다. 이 속에 숨어 있는 가장 무서운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안다는 말은 "내가 잘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 세상이 좋은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희망이 없는 망할 세상이더구나."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참신앙이 시작하는 것이요 중생입니다. 왜냐하면 육의 세계가 아닌 영의 세계, 하늘의 세계를 비로소 알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이라야 성물을 먹고 거룩하게 살수가 있습니다. 비로소 세상이 눈 아래로 보이며 하늘 나라가 바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아름다움, 미스 코리아의 미, 미스터 코리아의 육체미, 건강미, 부귀의 매력, 자식의 후광, 학벌의 매력, 세상 지위의 힘 등이 눈 아래로 보여 집니다. 대신에 하늘 나라가 바라보이고, 내가 갈곳이 저기로구나 하는 생각에 그곳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히 거기서 주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지요!
저는 근자에 베드로 전(후)서를 공부하면서 참으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서신이 제시하는 주제는 한마디로 성도가 세상에서 나그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베드로 전서 1:1-2은 나그네가 바로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임을 보여 줍니다. 히브리서도 마찬가지로 성도를 "땅에 사는 외국인과 나그네"(히 11:13)라고 했습니다. 땅에 사는 성도의 참모습을 보여 주는 말입니다.
여러분 성도가 땅에서 "나그네요 외국인"입니다. 여기가 내 집이 아니요 내 땅, 내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란 고향집에 가기까지는 안식이 없습니다. 길 가다가 넘어져 죽을 수도 있고,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나그네가 가는 길이 고난이지요. 이 세상이 고난의 세상입니다. 여기에 인내가 필요하고 고난의 떡과 성물 즉 주검이라는 음식이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하늘나라를 향해 가며, 거기에만 소망을 두고 더욱 달려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길을 가다가 넘어져 죽으면 어떻습니까? 나사로처럼 거지가 되어 문전 걸식을 한들 그것이 불행입니까? 남처럼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천대를 받으며 산들 그것이 욕되는 일입니까? 평생 혼자서 살다가 죽는다 한들 그것이 불행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불행도 아니요 비극도 아닙니다. 주님의 나라가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 백성들은 이런 가운데 처한다 하더라도 평화가 있고 기쁨이 있고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고 동료 의식과 우정을 가지고 서로 힘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복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이런 복음이라야 전도가 될 수 있고 가난한 나라에 선교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아프리카의 기아로 죽어 가는 세계에, 방글라데시의 난민촌에 우리가 무슨 복음을 전해 줄 수 있습니까? 돈과 부면 해결된다는 식의 복음입니까? 이런 복음으로서는 이 세상 즉 애굽에서 잘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만들지만 거기서 나오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참된 복음이면 굶어 죽어 가는 자들에게도 밥대신 천국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죽어도 주님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으니 겁내지 말고 죽음을 맞으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모든 인간의 비극 속에서도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누가 이런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성물을 욕되게 하지 않는 사람, 이 세상의(자아와 애굽인 이 세상) 주검을 양식으로 먹고 있는 제사장들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함께 여러분은 이런 제사장들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함께 날마다 성물을 거룩하게 먹는 사람들이 되도록 합시다. 아멘!
lv221725 LEV. 22:17-25 언약교회, 박길현
씨없는 짐승
씨없는 수박이 먹기는 좋고, 씨없는 감이 먹기는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 인간이 조작해 낸 병신이요 불완전한 것들입니다. 실상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씨가 없어서는 끝장이 나는 셈입니다. 씨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는 우리는 "성물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을 생각했었습니다. 성물도 제사장 가족들이 먹는 제물인데 이것을 먹는다는 것은 사실 자기 자신의 주검(시체)을 먹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홍해에서 죽은 자라는 것을 아는 것이 거룩이요, 부정과 죄악과 육정에서 죽은 자임을 아는 것이 거룩인데 이 사실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중에서 제사장을 뽑아서 제물의 시체를 먹고살게 하심으로 이것을 잊지 않게 하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자, 무시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죽음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바로 아는 자라야 세상이 아래로 보이고 천당이 크게 보이므로 참으로 나그네 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다는 것과 이런 복음이라야 세상의 비극에서 참 전도의 복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선교도 돈신(세상신)이 아닌 죽은 자의 복음을 선교해야 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지난주의 말씀이 성물을 제사장 가족 중에라도 어떤 자만이 먹을 수 있는가에 대한 말씀이라면 오늘의 말씀은 어떤 성물이라야 진짜 성물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두 가지 제사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번제와(18) 화목제(21)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원제란 말은 서원 했기 때문에 서원한 대로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낙헌제란 스스로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번제 중에서도 서원으로 드리는 것도 있고, 스스로 자원하여 드리는 것도 있고, 화목제 중에서도 서원으로 인해 드리는 것이 있고 자원하여 드리는 것도 있습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되 서원을 갚기 위해 드리는 제사는 서원제, 스스로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를 낙헌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서원을 갚기 위해 드리든지 혹은 스스로 자원하여 드리든지 간에 번제와 화목제 두 가지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약속대로 잘 되어 가는 상태하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출 24장에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약속을 맺으면서 확인하는 도장을 찍듯이 할 때 사용한 제사가 번제와 화목제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잘 지키면서 애굽 사람과 다르게 거룩한 생활을 하고 하나님 백성 역할을 잘 할 때면 번제와 화목제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거룩한 생활하는 것이 곧 번제와 같은 것이요 화목제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번제는 헌신을 뜻하고, 화목제는 하나님과 함께 식탁을 같이 하는 한 식구로 살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과 동창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백성 노릇 잘하기만 하면 그 자체가 자신들을 번제와 화목제로 드리는 것과 같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와 화목제로도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충분히 표현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제사를 말씀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정상적인 관계가 잘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드리는 제사의 제물은 물론 흠없고 온전한 것이어야 합니다.(19,21-22) 마치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제사장 가족들이 흠없고 온전한 사람들이어야 하듯이, 제물 역시도 흠없고 온전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눈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괴혈병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못 먹어서 영양실조로 몸에 피부병 같은 것이 덕지덕지 난 상태의 것)"들을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22) 지체가 더하거나 덜한 것은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로는 받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23) 이것도 온전한 것이 원칙이지만 자원하여 드리는 것이니까 가난하거나 혹은 특수한 경우에는 비정상적인 것도 그 자원하는 마음을 봐서 받아 주시겠다는 의도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후에 선지자들은 이런 것을 가져오면서 하나님께 정성 없는 것에 대해서 무섭도록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드리며,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애굽인으로서는 죽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온전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것이 오해를 하게 될 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법도를 존중하며 지키며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치 교통 신호를 지키는 것이 교통법을 존중하듯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번제물이요 화목제물입니다.
자. 그러면 일단 번제물과 화목제물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의 상태가 중요합니다. 즉 참된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것 없는 제물은 껍데기요 형식에 불과하기 때문에 참된 신앙의 행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경외합니까? 이제 죽어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갈 것이니 여한 없고, 이 진리 위해 생애를 바치고, 생명을 바치다가 초라하게 생애를 마친다고 할지라도 감사하겠습니까? 목회자들 아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은 목회자와 평신도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저에게와 똑같이 여러분에게도 묻습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한 분뿐입니까? 하나님만이 아니고 세상도 적당히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믿다가 쫄딱 망하고 고생고생하고 사는 한이 있어도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르겠습니까? 망해도 사랑하고, 가다가 죽어도 사랑하고 예수 빼 버리면 나는 시체야! 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매맞고 죽을 뻔하고 갇히고 하면서 갖은 고생을 해도 그래도 예수를 전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이 다 없어지고 자기도 없어진다 해도 그래도 예수가 좋아!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억만금도 필요 없이 예수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말로가 아니라 실제로 예수에 미쳐 있는 마음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믿음을 가지시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기도할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제발 여러분은 이런 사람이 되십시오. 이것이 흠없고, 온전한 제물이요 믿음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아직 흠있고 온전하지 못한 믿음입니다. 이방인이든지 이스라엘이든지 제물을 드리는 자는 이러한 제물을 가져야 하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여러분은 아직도 주님을 바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직 주님을 바로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희미한 그림자를, 옷 조각 하나를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자만하지 마십시오. 주님에 대해 푹빠진 상태가 아니거든 자만하지 말고 바로 알도록 하십시오.
그런데 24절에 와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불알이 상했거나 치었거나 터졌거나 베임을 당한 것은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 이스라엘 땅에서는 이런 일을 행치도 말지며 이방인에게서도 이런 것을 받아 하나님의 식물로 드리지 말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생식 불가능한 것은 절대로 제물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잡아서 제사 드릴 것인데 생식 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죽어서 제물이 되면 그뿐인데 생식 가, 불가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창조의 축복을 못 누리는 것이니까 결함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는 창조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사가 드리는 사람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제사를 드리는 자는 이스라엘이든 이방이든 구속에 참여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즉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아야 하고, 멀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이르러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그렇게 합니까? "씨" 즉 자손을 통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수컷을 들먹이고 있습니다 (19)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잘못될 수도, 광야에서 죽을 수도 있고, 다른 나라에 잡혀 갈 수도 있고 나라가 망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나라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누구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씨로 오실 한 분을 통해서- 이것은 이미 창 3:15에서, 아브라함에게서 약속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정상적인 상태속에서 이 씨를 통해 약속의 후손이 오시고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건강한 숫 짐승의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식 불가능한 짐승은 "결점"이 있고 "흠"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25) 즉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 할 수 없는 것을 상징하는 결정적인 "흠"이요 "결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씨없는 인간 즉 예수 없는 사람은 없겠지요? 신앙의 모양은 있고 껍데기는 있는데 예수 없는 사람이 없어야지요. 예수만 있는 사람만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통해 이미 온전한 제물이 된 줄 압니다. 즉 예수 안에 있고 예수 때문에 천당에 참여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더 알아 가도록 하십시오. 자기 사랑,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진리 사랑, 예수 사랑하도록 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자가 되십시오.!
lv222633 LEV. 22:26-33 언약교회, 박길현
백성된 신분
(레22:26-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칠 일 동안 그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제 팔 일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열납되리라 암소나 암양을 무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동일에 잡지 말지니라 너희가 여호와께 감사 희생을 드리거든 너희가 열납되도록 드릴지며 그 제물은 당일에 먹고 이튿날까지 두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희는 나의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희는 나의 성호를 욕되게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니라
22장 끝부분을 읽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누구에게 주시는 말씀인지 생각해 봅시다. 모세에게 이르시는 말씀이지만(26) 실제로 말씀을 받는 자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31-33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두고 하시는 말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33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내었다.'고 말씀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주시는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이란 어떤 사람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사람됨이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의 사람됨에 대한 이야기와 지난 시간에 생각했던 이야기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지난 시간에 생각했던 내용을 돌이켜 봅시다. 22장 앞부분에서 성물을 제사장의 식구들이라도 건전하고 부정하지 않는 자라야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는 이 성물이 흠없고 온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서원을 갚기 위해서 혹은 자원해서 드리는 번제나 화목 제물은 흠이 없고 온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신앙, 즉 예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하고 예수가 전부가 되기 때문에 예수만 사랑하는 신앙, 예수 때문에 어렵고 고달파도 내버릴래야 내버릴 수 없는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도 따라 가야지"라고 하면서 감사하면서 따라가는 신앙 이것이 흠없고 온전한 신앙이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씨있는 제물이요 생명 있는 신앙이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성물과 제사장과 백성들이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번제와 화목 제물과 그것을 먹는 제사장 가족들이 거룩하고 온전해야 한다는 것은 그 제물들을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이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물을 거룩하고 흠없는 제사장이 먹어야 한다는 것과 그 성물들은 흠없고 온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물 같이, 그것을 먹는 제사장들 같이, 바로 온 백성 너희들이 흠없고 온전해야 하며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흠없고 온전하고 거룩한 백성, 애굽 사람들과 다른 이스라엘 백성이 어떠한 백성들입니까?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오늘 성경 본문은 몇 가지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십니다.
먼저 27절을 봅시다.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칠일 동안 그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제 8일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열납되리라." 이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의 무엇을 이야기 해 준다는 말입니까? 왜 제 8일 이후라야 열납될 수 있는 제물이 된다고 하십니까? 8일이 안된 것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것이라서 그럴까요? 아니면 아직 핏덩이 같은 것이니 제물이 될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에 만약 이런 것을 드린다면 제사를 모독하는 것이 될까 봐서 그럴까요? 주석가들은(Calvin, 누르체등) 이런 저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8일에 관심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 사역을 하시고 '보기 좋게 잘 만들었다. 이상 무' 하고 도장을 찍은 것이 제 7일 안식일입니다. 그 이후 세상은 하나님의 안식 속에서 잘 진행되었습니다. 날짜는 지나가도 계속 안식 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잘 받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타락이 있자 하나님은 이상이 생긴 이 세상에서 다시 일을 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일이 무엇일까요? 구속하시는 일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일이 어느 날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해 오시는 과정에서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은 사건을 기억할 것입니다.(창21:4) 하나님이 준 아들이기 때문에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하늘 아이라는 표로써 행한 것이 아브라함의 할례입니다. 이삭도 8일 만에 할례 받은 것은 사람의 자식을 낳을 수가 없고 하나님이 낳게 해 주시는 사람만 낳는다는 뜻으로 한 것이 이삭의 할례입니다. 이런 연유로 해서 이스라엘은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란 하나님이 나게 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는 말이며 그 표시가 할례입니다. 그러므로 8일이란 비록 육신으로 난자지만 육신은 병신이 되고 죽고 하늘 사람이 되는 날, 요즘 말로서 중생의 날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날이 8일입니다. 그러니 앞에서 말했던 번제와 화목제와 서로 상통합니다. 번제는 헌신을 뜻하고 화목제는 하나님이 밥상 공동체 식구가 됨을 보여주니 바로 이 제사들이 할례와 같은 뜻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나는 바로 할례 받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식구입니다.'라고 하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제 8일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열납 되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물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 자신을 대신 하는 것이니 제 8일 이후 즉 할례하여 하나님 백성이 된 이후에 라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뜻으로 수소나 양이나 염소를 난지 8일 이후로부터 제물로 받으신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은 제물을 드리면서 "나는 할례 받은 백성이야,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야, 내 주인이 하나님이요, 내 왕도 하나님이요, 나에게 밥을 먹여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야,"를 되새기면서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이 의식을 늘 되새기십시오. 일하면서 이것을 기억하시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교회 올 때도 이 마음이 있으면 지각 않고 빨리 와질 수가 있습니다. 인간 목사만 생각하면 가까이 있어도 늑장이 부려 집니다만 하나님께 바쳐진 자기를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면 헌신하는 마음이 생겨 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밥줄이고 생명이지 내 건강, 수완, 계획과 계산이 생명이 못됨을 믿고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짚고 넘어 가야 할 것은 이런 믿음은 말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말은 되는데 생활은 안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아와 자기 세계 속에 앉아서 주님과 동행할 엄두를 못내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기도하여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야 합니다. 기도하십시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십시오.'(히12:12)
이런 생활을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생활입니다. 28절에 "암소나 암양을 무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동일에 잡지 말지니라."고 하십니다. 잔인한 애굽인의 정신(출23:19, 신22:6-7) 과는 다른 자비의 정신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29-30의 말씀은 감사 희생을 당일에 먹고 이튿날까지 두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7:15, 19:5-6) 이 말씀은 가난한 이웃을 초청해서 많이 나누어 먹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나눔이 필요한 사람이 없습니까? 무엇을 나눌 수 있는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남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는 합니다만 신자는 자기만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기도 훈련이 필요하겠지요? 남의 입장을 좀 생각해 보는 생각을 굴리는 습관 훈련이 필요하겠지요? 타락성이 지배하기 때문에 이것이 필요합니다. 자기 중심에서 자기를 열고 남쪽으로 열려진 마음을 갖도록 기도합시다. 잘 안되지만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훈련도 하게 되는 것이 정상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습니까? 이러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사는 것이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며 행하는 것입니다.(31)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에 맞게 사는 것입니다.(32a)
32 "너희는 나의 성호를 욕되게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
-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사는 성도들에게서 영광 받지 세상 사람에게서 영광 받지 않는 분입니다.
33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니라"
- 우리를 하나님 자녀 삼으신 목적이 밝혀져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되려고 세상에서 불러내었습니다."
우리를 성도 삼으신 하나님의 목적을 잊지 맙시다.
중생의 사람, 하늘 사람으로서 은혜 입었으니 은혜를 나누는 사람이 신자임을 잊지 맙시다. ; 말, 행동, 삶으로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목적입니다.
lv233738 LEV. 23:37-38 언약교회, 박길현
이스라엘의 절기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절기들을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절기들을 지키도록 명령하신 전체적인 뜻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안식일은 창조후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정하셨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 안에서 선하게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 지키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제 애굽 바로의 백성이 아니라 여호와께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노예로서 노동으로 인한 수고의 생활이었지만 이제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이루신 큰 구원을 즐거워하며 함께 모여 예배하는 날로 알라는 말씀입니다. 노예의 수고에서 쉬게 되는 것이 안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 안식일은 아니지만 주의 날의 모임은 귀합니다. 영원한 안식을 보여 주는 모임이기 때문에 이날을 귀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과 구별을 보여주는 날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유월절은 가만히 앉아서 고기와 떡을 먹는 동안 양의 피 때문에 애굽을 심판하던 천사가 이미 죽었구나 생각하고 지나갔기 때문에 심판을 면한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즉 "별수 없는 죄인들"인데 다른 이의 희생 때문에 살게 된 것을 깨닫게 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7일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으라고 한 것은 누룩을 넣어 부풀릴 틈도 없이 황급히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을 잊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애굽인과 똑같은 죄인들인데 죽지 않고 비행기로 실려서 나오듯이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잡혀 출애굽을 하게 된 것을 잊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실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9-14) 초실절이란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가서 제사장이 그 단을 흔들어 여호와께 바치면서 번제와 소제와 전제의 포도주로 제사 드리는 날입니다. 이날은 유월절 이후 첫 안식일 이튿날이라고 했으니 무교절 둘째 날인 정월 16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6,11) 이것은 광야 생활을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거쳐서 가나안 땅에 도착해 가나안 땅의 곡식을 먹게 된 것을 보여 주는 절기입니다. 첫 곡식을 거두어 먹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약속의 땅에서 나는 곡식을 거두어 먹고살게 되었습니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무사히 가나안 땅에 도착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그리던 약속의 땅에 들어 왔습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나안 땅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될 것을 약속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셔서 무사히 도착하게 하셨던 그 하나님이 앞으로도 이 땅을 차지하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첫단을 드리면서 감사와 약속을 함께 확인하는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 부활했으니 나도 부활할 것을 확신합니다라고 하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첫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50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에 오순절 또는 칠칠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절기는 수확을 공식적으로 마무리 짓는 추수 감사절과 같은 성격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곡식을 거두게 되었으니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모두 함께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손으로 주시는 식물을 함께 먹는 한 식구라는 것을 확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은혜의 풍성함은 가난한 자와 나그네까지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22절에 보니까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빈부 귀천이 없는 화목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7월 1일 나팔절이 있습니다.(23-25) 글자 그대로 나팔을 부는 절기인데 이 나팔은 기쁨과 평화를 만방에 선포하는 뜻으로 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먹을 것을 주시고 평화를 누리게 하신 것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요 산성이라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지니라고 했습니다.
또 7월 9일 저녁부터 10일 저녁까지 안식하는 속죄일이 있습니다. 이 날을 대속죄일이라고도 합니다. 대 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을 위해 속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요 속죄함을 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29-30) 물론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또 다시 제사 드릴 것은 없습니다만,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반성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거듭 자신을 돌아보고 죄인됨을 깨닫는 중에 십자가의 용서를 바라보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신자들이 뻔뻔스러워지지 않도록 마음을 정리하는 일입니다. 속죄가 이루어졌으니 나는 괜찮다는 식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속죄함을 받았어도 본성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됨을 보고 부끄러워 할 줄 아는데서 또한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끝으로 초막절을 지키라고 합니다. 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만 이것은 7월 15일에서 일주일 동안 나뭇가지와 종려가지와 버들가지 등을 가지고 초막을 짓고 그 초막에 거하면서 즐거워하면서(40) 애굽에서 나오던 때에 초막 생활을 했던 것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때는 초막 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편안한 집에서 안정되게 살게 되었다는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흔히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을 종종 합니다만 옛날을 잊어버리고 현재의 평화와 안정이 하나님의 은혜 인줄 모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즈음 쌀밥 먹고 배부르니 개떡 먹고 송기 떡 먹던 일을 잊어버리고 마구 허비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성격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좋은 집에서 안식을 누리며 사는 것은 광야의 초막 생활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요,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 만큼 풍성하기 때문에 오늘의 안식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일곱 가지의 이스라엘의 절기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절기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애굽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능력으로 된 것이요, 약속의 땅에 도착한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이요, 농사짓고 수확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축복하심 때문이며, 평화를 누리고 속죄가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낮아지시고 희생하시는 때문이며,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예배 처소에서 예배하게 된 것도 주님의 인도하심과 성실하심 때문인 줄 알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7월은 농사짓는 달력으로 치면 연말에 해당되는 기간입니다. 이 연말은 1달 내내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들을 지키며 보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였고, 은혜로 정착하여 살게 된 것을 연중 절기들을 통하여 기억하도록 하는 중에서 특히 연말에 가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다스림 때문에 평화와 속죄가 있고 안락한 집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거듭 확인하고 신앙을 다짐하기 위함입니다. '새해에도 하나님 의지해서 살아야지', '하나님 아니면 우리가 있을 수가 없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마음이 하나님과 끊어져서는 살 수 없는 민족입니다. 오늘날 믿는 신자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의 노력과 계산과 수완으로 사는 줄로 생각하고 있고, 그러한 의식으로 가득차 있는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여러분은 기억하십시오. 주께서 붙들지 않으면 한 호흡이라도 할 수 없으며, 한 걸음이라도 걸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자기를 믿지 말고 자기 삶의 방식을 믿지 마십시오. 조그마한 실핏줄 하나라도 터지만 그날로 끝장이 나고, 조그마한 염증이나 이상이 생겨도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는 인간인줄 아십시오.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와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속에 내 신앙이 있고, 내 생명과 존재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멀찍한 마음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구원 속에,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lv240123 LEV. 24:1-23 언약교회, 박길현
등불, 떡, 그 이름 훼방(구출 사건 그 이후)
지난주에 우리는 23장에서 여러 가지 절기들을 생각하면서 한 가지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절기들이 가르쳐 주는 한가지 공통적인 목적은 '구원을 잊지 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기에 구원을 잊지 않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잊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이하고, 하나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즉 성도가 바로 이런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24장에서는 등불을 켜는 기름과 떡과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한 사건이 나옵니다. 이렇게 볼 때 23장의 절기들과 25장의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24장의 등불, 떡 이야기 등은 이것들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23장과 25장사이에 24장을 집어넣어 놓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뒤의 이야기들과 무슨 연관이 있어서 집어넣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비록 24장이 뚱딴지같은 이야기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앞뒤의 이야기들과 서로 연관이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 앞의 23장의 이야기를 다시 기억합시다. "구원을 잊지 마라.", "구원받은 자임을 잊지 마라." 이것이 23장의 이야기였다면, 오늘 24장의 등불과 떡 이야기와 여호와 이름 훼방하는 것이 23장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 이야기인지 이제부터 생각해 봅시다.
23장에서 '구원을 잊지 마라.'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너희들은 이제부터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원이란 '건져 내 놓고 난 후에 옛날 그대로 살아라.'고 하면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구원하신 하나님이 건져 낸 후에(즉 애굽에서 탈취해 낸후) 그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도 남아 있는 애굽적인 모습, 사고 방식, 습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생활등 모든 면에 걸쳐서 내버리게 하고 그것에 대해서 죽었다고 고백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것이 구원의 작업에 포함되는 것입니다.(예 : 돈 많고 똑똑하고 잘난 남자, 총명하고 예쁜 여자 등을 찾는 것과 같은 욕심 즉 애굽적 모습들)
이러한 것들을 버리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사실 얼마나 이런 것에 매력을 느끼고 있고 애착을 갖고 있는지! -안그래야지 하면서도 애착과 매력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인줄 아십니까? 우리 모두 젊은 사람들이니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길가다가 혹은 T.V등에서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나타나면 매력을 안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이구 이 세상 형적이요, 썩어질 껍데기들"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자기의 미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어른들도 이러니 아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서태지와 아이들 공연이었습니까? 아이들이 죽고 야단했던 일,- 울고 오줌을 싸고 졸도를 하는 일들은 당연한 현상이지요, 젊은 아이들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우상이요 하나님이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다자란 어른들 역시 애굽적 인간성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여러분은 자신에게서 느끼시겠지요?
그러나 구원은 이런 면을 없애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주님을 믿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자들에게는 이 극복이 가능하며 더 좋은 것으로 풍성해지며 참 사랑으로 채워진 사람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오늘 24장입니다.
24장에서 먼저 나오는 이야기는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잘 공급하는 일을 백성들로 하여금 하게 하고 아론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서 항상 등잔불을 정리하라.'(3)고 합니다. 밤내내 살피면서 등잔불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를 잘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 다 그만두고 대관절 등잔불을 왜 꺼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어두우면 보지 못해서 혹은 어두움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불을 켜 두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소를 섬기는 제사장과 이스라엘을 위한 조처임이 분명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불같이 밝은 눈으로 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을 비추시며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말한다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면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죄악의 길로 빠지지 않도록 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악의 일이 무엇이고, 무엇이 죄악의 길이 아닌지는 뻔합니다. 십자가 정신과 반대되는 길은 죄악의 길입니다. 이 죄악의 길에 빠지지 않고 밝은 길로 가도록,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가도록 믿고 의지하면서 주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자에게는 주님이 성령으로 힘을 주십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은 이런 세계도 익혀야 합니다. 그 다음에 떡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열두덩이의 떡은 물론 이스라엘12지파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떡이 8절에는 '매 안식일에 여호와 앞에 진설하는 떡이면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매 안식일에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기리면서 이스라엘이 모두가 모인 식탁 교제, 하나님이 나누어주시는 떡을 온 백성이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한 하나님의 식구요 한 하나님의 가족임을 되새기는 것이 바로 안식일의 떡 12덩이가 보여 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일 떡을 먹고 영원한 안식 속에서 살고 있지만 주일날 모임은 하나님의 한 식구임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몸인 말씀을 함께 나누어 먹고 그것으로 만족해하고 배불러 하면서 한 하나님 나라의 형제 자매임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귀중히 여기는 것은 곧 천당을 귀중히 여기고 구원을 귀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이것보다 더 귀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주일날의 모임은 주후 4세기에 예배 의식이 되었습니다만 역사적 전통이라고 해서 가벼이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로 하늘 시대를 여신 것을 생각하면서 기쁨으로 자유롭게 모인다는 것은 천국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요, 따라서 이것보다 더 귀중하고 좋은 것이 신자에게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 주일에 벌어졌을 때는 우리가 그것을 처리해야 하겠지만(예 ; 병, 죽음, 시험, 주일의 일직 등) 그렇지 않은 일상적인 일에서는 어떤 일보다 주일의 모임을 귀중히 여겨야 하고, 최고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천국을 좋아한다는 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세상 사람과 다른 천국 백성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구원된 생활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죄되는 일이 아니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쟁이도 우리나 똑같군"하는 인상보다는 "다르구나"하는 점을 보여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당 백성, 거룩한 백성 됨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1절에 보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여호와 이름을 찔렀다. 찔러 보니 별 것 없네, 별 것 없다. 별 힘도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안식일이라는 한 날이 없어지고 예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지만 "예수 믿는 자들 건드려 보니 별 것 없구만, 믿음의 깡아리도 없고 힘도 없구만."하는 인상을 주어서 하나님이 별 힘도 없는 분으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불도 화도 내리는 분이 아닌가 보지.'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은 두려우신 분이요, 경외해야 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천당 이상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주일 의식을 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유만 생각하면서 훼방하고 저주하는 짓들을 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구원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건져내기만 하시고 팽개쳐 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계속해서 자기의 목적을 향해서 인도하시고, 먹이시고, 깨뜨리시고 죽게 하시면서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기억하고 구원 안에 있으라. 즉 "예수 안에 "있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행동하고 함께 먹고 함께 살면서 애굽인의 때를 벗어 가고 있는 사람들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새 생활을 익혀 가고 그 귀중성을 배워 가고 있는 사람들임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문제는 다릅니다. 애굽에서 나오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별 것 없다. 별일 없다고 하는 자리에 빠질 위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을 신뢰하고, 여호와의 상에서 배부름을 누리도록 정신을 차리십시오.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으면서도,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애굽인의 모습을 벗어버리십시오 십자가 정신을 생각하고 성령의 인도를 잘 받으십시오. 주님 안에서 배불러 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lv250107 LEV. 25:1-7 언약교회, 박길현
안식년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합니까? 교회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신자들이 방황하고 있고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 교회에 꾸준히 나가면서도 목사의 심방도 받지 않겠다 또는 등록을 하지 않고 무명으로 다니겠다는 사람들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며 그 추세는 점차 증가해 가고 있습니다. 서울의 경우에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만 대구 역시도 점차로 따라가고 있는 양상을 보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교회는 우후죽순처럼 많은데 교회다운 교회가 없으므로 교회다운 교회를 그리워하며 찾아 헤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다니던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판단이 되면 언제든 미련 없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교인들을 탓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할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이기만 하면 어디 간들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다운 교회를 찾아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의식하면서 오늘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지난 주일에는 구원해 내신 하나님이 계속해서 자기 백성을 성령으로 인도하며 한 가족으로서의 배부른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한 일을 계속해 가신다는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하나님도 별수 없네"라는 소리를 듣게 만드는 신앙의 유약함에 빠지지 않도록 신앙의 깡아리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은 24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으로 인도 받고, 하나님의 한 식구로서 살아가되 가나안 땅에서 사는 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바로 알아야 된다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첫 번째로 말씀하시는 것이 안식년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2절 끝에 보니까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고 했고 4절은 "제 칠 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고 했습니다. 7년째마다 농사를 짓지 말고 땅을 쉬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은 7이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 점을 다시 한번 잠시 생각하고 지나갑시다. 제 7일 안식일, 유월절 이후 7주 다음날인 오순절, 제 7월 절기의 달, 제 7년째 안식년 등 7을 반복하여 강조하시는 의도가 어디에 있을까요? 창2장의 "하나님의 안식"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최초의 안식일이라면, 애굽에서 구원되어 하나님의 백성 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 출애굽한 백성들이 지키는 안식일이요, 기타 절기들이라는 것을 23장에서 생각했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7이란 숫자의 반복은 "너희들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7이라는 숫자 자체가 무슨 마술적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7이라는 숫자가 가지고 있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소속을 잊지 마십시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이것을 거듭 강조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으로 들어 가게 될 가나안이 천당이 아니라 애굽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끄집어내어 훈련시켜 다시 애굽에 들어가게 하는 일을 왜 하십니까? 그것은 출애굽과 광야 생활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철저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영락없이 또 애굽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 거듭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은 잘 살아도 신앙, 못살아도 신앙이지 환경 때문에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이렇게 확실하게 모셔야 불에 가도 물에 가도 신앙인으로 남고, 불교 구덩이 속에, 공산주의 속에 가도 신앙인으로 살아 남는 것입니다. 평생을 믿는다고 못하고 찬송 한번 못하고 살아도 신앙 가지고 살고 있는 신자들이 중공과 북한에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바로 신앙이요, 이 신앙을 위해서 출애굽과 광야 생활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말씀이 지나치게 주변으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만 이제 안식년으로 돌아가서 생각합시다.
오늘 레25장의 안식년에 대한 말씀은 출23:10-11과는 달리 그 초점이 "땅의 안식"에 있습니다. "땅에 안식할 권리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가 그 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땅은 안식을 통하여 여호와께 속했음을 보여 줍니다. 즉 "여호와가 이 땅의 주인이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 땅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년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일을 통하여 백성들은 '내가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나그네요 우거하는자.'(23)일 뿐임을 철저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거기서 살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어여쁘게 봐 주시기 때문에'(23下) 살고 있다는 것을 안식년을 통하여 되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안식년에는 '저절로 난 것을 거두지도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 열매를 거두지도 말라.'고(5) 하십니다. 안식년에 난 소출은 사람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소유주인데 은혜로 거저 사람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소출(곡식, 포도 등의 생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백성도 종도 품꾼도 객도 먹을 수 있고 집짐승도 들짐승도 다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너 왜 그것을 따먹었느냐? 이놈의 염소가 왜 뜯어먹느냐?"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생명 있는 것들이 먹고살면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이 드러날 뿐입니다. "은혜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땅의 주인인 하나님이 누구나 먹여 살려 주십니다. 땅 때문에, 농사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해가 안식년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오늘날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하시겠지요? 이 이야기가 바로 오늘날 교회에 대한 이야기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요 예수님이 주인이시며,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이 마음대로 먹고 살아가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인간이 주권을 또는 왕권을 주장하는 곳이 아닙니다. 목사도 장로도 성도들도 모두 주인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껏 먹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하늘의 양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곳,(비빔밥, 잡초 아닌)이 교회입니다. 배고픈 자와 배부른 자가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살아가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있는 사람은 후히 내어놓을 줄 알고, 고프고 학비가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 소위 달동네 사람들은 '내 사정이 이러니 좀 나누어 먹읍시다.'라고 부끄러움 없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우리 형편이 이런데 서로 도와서 같이 살도록 합시다. 라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면을 생각해 보면 목사도 교회가 작을 때는 벌어 가면서 설교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작은 교회가 마치 목사 밥벌이하는 곳 같은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저도 이런 점을 생각하면서 고심하고 있습니다. 함께 먹고 나누는 것은 경제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외로운 사람에게는 친구가 되어 주고, 병약한 자에게 손발과 희망이 되어 주며, 말씀이 약한 자에게는 말씀을 나누어주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기도해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즉 무엇이든지 가진 자가 필요한 자에게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손익 계산, 앞뒤 따지지 말고 거져 줄줄도 알고 거주 받을 줄도 아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존심이나 계산들을 시체로 여기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로 가든지 물고기 모양만 그리면 고락을 나누는 생활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방랑 전도 생활이 가능했습니다. 먼저는 가까운 자기 교회 안에서 믿는 형제, 자매들간에 이것이 시행되는 것이 원리입니다. 불신 이방인은 해를 끼치고 사기를 치는 것이 많아서 신중해야 하겠지만, 먼저 교회 안에서 유무 상통, 동고동락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러한 교회를 목표로 하고 나아가도록 합시다. 하나님만이 주인 되심을 높이는 교회 되도록 합시다.
lv250813 LEV. 25:8-13 언약교회, 박길현
희년
지난 주일에는 안식년에 대해서 생각했었습니다. 이스라엘 안식년의 유무 상통하는 모습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교회에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교회 상을 향하여 가야하며, 또 이러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오늘 희년에 대한 말씀도 역시 교회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자유 하지 못하게 하며 얽어매어 놓아 성숙된 신앙인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지 못하며 계급 사회와 같이 계층이 생기며 어깨에 힘을 주는 자가 있는 반면 힘빠진 자가 있고 지배하는 자가 있는 반면 지배받는 자가 있으며, 힘센 교회가 있어서 힘을 쓰는 반면 힘이 없어 주눅이 들어 있는 군소 교회들이 한숨을 쉬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생각해 볼 때 희년에 대한 말씀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부각되어 옵니다.
희년이란 안식년이 일곱 번 반복된 후에 오는 50년째 되는 자유의 해를 말합니다. 이 해는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합니다. 그렇게 되면 머슴이 되어 있던 사람도 자유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그 동안 가난 때문에 팔아먹었던 기업 즉 토지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고, 지배하는 자도 없고 지배받는 자도 없는 평등한 사회가 회복되는 해입니다.(10) 그러므로 글자 그대로 희년(禧年) 즉 기쁨의 해인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자기가 잘못해서(노름하고, 술퍼마시고, . ) 가난하게 되기도 하지만, 아무리 알뜰하게 열심히 살아 보려고 해도 제대로 풀리지 않아 가난을 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구나 타락한 인간이 사는 이스라엘 사회요 오늘의 세상인지라 욕심을 가지고 재주를 부려서라도 재산을 지키며 모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순진해서 빼앗기기만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이유 때문에 기업까지도 팔아먹고 형제 된 동족까지 팔려 머슴살이를 해야 되는지(25, 39- )는 확실히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가난하게 되어 머슴살이 신세가 되면 자연히 주종 관계가 형성이 되고 한편은 지배하는 자가 되고 한편은 지배받는 자가 되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많아지면 그 사회는 계급 사회가 되기 마련입니다. 지배하는 자는 그들끼리 모이고, 지배받는 자는 그들끼리 모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반목과 질시가 있을 수 있고 불평 불만이 있게 되고 마침내는 싸움이 일어나게 되고, 이렇게 되면 평화는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이렇게 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인간들의 사회인지라 하나님은 안식년을 주시고 또 희년 제도를 주셨습니다. 희년만 되면 아무리 엉망이 되었다가도 본래의 기업으로 즉 똑같이 구원받은 똑같은 사람들로 돌아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해를 기쁨의 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여러분! 가난해져서 머슴살이, 종살이하며 눌려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이 날을 기다리겠습니까? 저는 먹을 것이 없어서 부잣집에 머슴살이하면서 문간방에서 자면서 살던 사람들을 더러 보면서 자랐습니다. 건강하고 힘이 좋은 사람이라야 부잣집 머슴을 살 수 있습니다. 1년에 나락으로 세금을 여남포씩(20가마니) 받아서 이것 모아서 논 사고 장가가서 살게 되는 사람도 혹 있지요. 이스라엘에서도 이런 식의 생활을 했던 가난한 사람들은 희년을 유일한 희망으로 하고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행히 무를 수 있는 부한 친척이라도 있어서 물러 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도 못한 경우에는 희년밖에 기달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년은 이런 사람들에게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구원자라는 것을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42,52) 하나님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와서 각기 기업을 분배받은 상태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을 보면서, 주인 되었던 자도 자기가 주인과 지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고 머슴살이하는 사람도 하나님이 출애굽 당시에도 구원자였지만 지금도 여전히 궁극적인 구원자라는 사실을 재삼 되새기며 하나님만이 주인 되심을 고백하고 의뢰하게 하기 위해서 이런 제도를 두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제도들이 존중되는 사회라면 그래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회요 희망이 있는 사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 선지자서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은 이러한 제도가 무시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애굽과 같은 사회가 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5:8에는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라고 했고, 미가2:1-2은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니 그들이 사람과 그 집사람과 그 산업을 학대하도다." 또한 2:9에는 "내 백성의 부녀들을 너희가 그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영히 빼앗는도다 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라고 한 말씀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희년을 무시했고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심을 무시하는 사회가 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죄악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했지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로 오셔서 희년을 선포하셨고 또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영원한 희년을 주셨습니다.(눅4:18-19) 즉 복음이 바로 희년이요 자유의 해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자유를 얻었고 기업 즉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 왔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똑같이 은혜로 죄사함을 받았고 똑같이 구원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은혜를 덜 받고 더 받은 사람도 없고 성령을 덜 받고 더 받은 사람도 없고, 상급을 덜 받고 더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똑같이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요 천국입니다. 덜 배우고 더 배운 것이 상관이 없는 곳, 돈과 명예와 세상 권세 가지고 참여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상관없는 곳이 교회입니다. 똑같은 은혜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차별이 없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들이 이렇지 못합니다. 당회장이 부교역자들을 쓰다가 버리는 소모품 취급합니다. 장로가 되면 출세한 듯 생각하고, 일체 봉사하는 자리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대접받을 생각합니다. 더 낮게 내려갈 생각을 해야 정상인데 말입니다. 장립 집사나 권사가 되면 그것도 감투라 생각하고 제법 세도를 부리려고 합니다. 이런 식이니 말할 것도 없이 그 교회는 계급 사회가 되고 층층이 나누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식의 정신은 교회와 교회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숫자가 많고 돈이 많이 모이면 힘있는 교회라고 가슴 뿌듯해 하고, 거기 목사, 장로 되면 큰 영광을 얻은 듯하고 수의 힘, 돈의 힘을 가지고 일을 해 보려고 합니다. 가관인 것은 목사들이 이런 것을 축복 받은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면서 애굽이 되어 가고 있는데도 눈에 크게, 많게 보이는 것이 복받은 증거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작은 교회는 열등감속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도 애굽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교회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온 세계의 교회가 다 하나의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 뿐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네 교회", "내 교회"도 없고 "큰 교회", "작은 교회"도 없습니다. 많이 모이면 그대로 주님의 교회의 한 부분일 뿐이고 적게 모여도 그대로 주님의 교회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두 세 사람이라도 참 주님의 백성이 있다면 그것도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적인 기준과 사고 방식을 가지고 세고 통계를 내고 그것을 가지고 크다 작다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가면 보내고 오면 받고 주님이 하는 대로 따르면서 세상 정신이 아니라 진리만이 지배하도록 해야 할 곳이 교회입니다. 진리 지배가 안되는 곳은 이미 애굽입니다. 우리는 모든 세상적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도록 합시다. 자유를 누립시다. 죄와 저주에서의 자유뿐만 아니라 교회 속에 들어와 있는 세상적 사고 방식을 벗어 던집시다. "적다."는 의식을 내버리십시오. "큰 교회"에 대한 환상도 내 버리십시오. 화려한 건물과 많은 사람 많은 헌금이 모이는 곳이 축복 받은 교회란 생각을 버리십시오. 겉모양이야 어떠하든 진리가 바르게 선포되고 사람들이 그 진리를 따라가려고 애쓰는 모습을 가진 것을 보거든 그곳이 주님이 계시는 주님의 교회임을 확신하십시오. 주님은 그 공동체에 함께 계십니다.
lv260113 LEV. 26:1-13 언약교회, 박길현
정상적인 희년의 생활상
지난주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궁극적(최후의) 희망인 희년에 대하여 생각했었습니다. 희년은 자유가 선포되는 해요 따라서 모든 매였던 것에서 벗어나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해며, 잃었던 기업 토지를 되찾게 되는 해라는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이러한 희년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었으므로 예수 안에 있는 교회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도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애굽적인 계급이 없고 높낮이가 없으며 지배하는 자와 지배 받는 자가 없는 곳 상석과 말석이 없는 곳이 교회라고 했었습니다. 대신에 다같이 섬기는 자들만 있고, 형제 자매 의식을 가진 자들만 있는 곳이 교회요, 정치와 인간 재주와 기능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만 되는 곳이 교회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평등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만 왕으로 높이는 곳이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구약의 말로 바꾸면 안식년 또는 희년을 지키는 공동체 이스라엘이라는 말입니다
레위기 26-27장은 이러한 희년 공동체 사회가 가진 특성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26장에는 희년 공동체의 정상적인 상태일 때의 경우와 비정상적일 때의 경우를 말하고 있고 27장은 이 공동체 사람들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가를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으로 레위기는 끝이 납니다. 레위기를 삶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는가를 배운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먼저 희년 공동체가 정상적인 상태일 경우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상적인 희년 공동체
먼저 여호와만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회입니다.(26:1) 여호와만 하나님으로 섬긴다는 것은 자기를 하나님께 맡겨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길흉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맡겨 버리게 되므로 스스로 신경을 쓰고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예 자기 자신을 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상이 왜 생겨납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하고 잘 되게 해 보려고 하는데서 생겨납니다. 목상이나 주상, 석상들을 만드는 것은(천하 대장군, 지하 여장군) "자기를 위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러한 욕망이 인간에게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희년 공동체의 사람들은 이러한 욕망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자신을 맡깁니다.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다스림에 자신을 맡깁니다. 하나님이 유일하신 구원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말씀을 이해하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먼저 "내가 잘 되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좋게 하려고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뜻을 이루시려고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기가 그 뜻에 항복하고 복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이루어 주는 분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사람의 뜻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뜻을 이루고, 내가 잘 되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다는 의식은 버려야 합니다. 이는 예수를 우상식으로 생각하는 발상이기 때문입니다. 희년 공동체는 이러한 유의 우상적 요소도 거부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둘째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의 성소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구원을 지키며 성령 안에서 생활 즉 교회 생활, 신자로서의 생활을 귀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통해 받은 구원을 세상 사람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성령 안에서의 생활을 세상이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소중한 것인 줄 모른다면 아직도 구원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 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공부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고, 사업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 인줄 알고 지키도록 하십시오.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는 공동체가 당연히 보여 주어야 할 성격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사실은 믿음 생활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 잘하면 다른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본문도 더 길게 다른 명령들을 반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3절 이하부터는 이러한 공동체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를 보여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표적이 비를 적기에 내리는 일입니다.(4) 팔레스틴에서 비는 생사가 달린 일입니다. 애굽에서 물이 흔해서(돈이 흔해서) 비가 귀한 줄 모르지만, 팔레스틴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땅은 바위 같이 굳어져서 죽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왕상17:1 ; 반 사막 지대 비슷하다.) 하나님이 눈을 돌리시면 살 수 없는 땅이 팔레스틴입니다. 반면 하나님이 비를 적시에 주시면 얼마든지 풍성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부드럽게 내리는 이른 비는 10/11월에 내려서 땅을 갈고 씨를 뿌리기에 알맞도록 해 줍니다. 이어서 12월 중순에서 3월 중순까지 부는 겨울 바람은 비를 함께 몰고 옵니다. 그래서 우물을 채우고 샘이 넘쳐 나게 만듭니다. 지중해성 기후의 특징이지요. 그리고 4월에 오는 늦은 비는 곡식 이삭을 패게 하고 열매가 영글게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는 여름의 강렬한 열기를 이길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러니 적시에 하나님이 비를 주시기만 하면 최대의 풍작을 허락하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신11:14, 렘5:24, 호6:3)
반면에 비가 오지 않을 경우는 기근과 비참함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한다면 곡식이 아주 풍성하여 4/5월의 타작과 추수(기쁨의 때 ; 시4:7, 사9:3)가 장막 절기가 있는 때 8/9월의 포도 수확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하십니다.(5) 그리고 포도 수확은 10/11월의 파종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1년 내내 먹을 것을 풍성히 거둘 수 있으니 걱정 없이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묵은 곡식을 다 못 먹고 또 새 곡식을 먹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10)
이러한 땅에 하나님이 평화를 주시고, 짐승과 전쟁과 모든 대적을 몰아 내시며 당할 자가 없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장막이 세워지고, 여호와께서 그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그들 가운데서 다스리시겠다고 하십니다.(11-12)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생명이요 전부가 되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호와는 노예의 빗장목 때문에 바로 서서 걷지도 못하던 자들을 건져내어 바로 서서 걷는 자유인이 되게 하신 분입니다.(13) 희년 공동체는 이런 하나님이 함께 계시며 다스리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무엇이 겁이 납니까? 망하는 것이 겁이 납니까? 죽는 것이 겁이 납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오로지 관심 해야 할 것은 여호와의 규례와 계명에 충실하는 것뿐입니다. 여호와만을 신뢰하고, 구원 곧 성령으로 사는 삶을 생명으로 생각하고 지키는 일 뿐입니다. 이것을 세상에 빼앗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어떤 것 때문에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것은 우리의 소관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마6:33)
이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굳게 서십시오.
lv261446 LEV. 26:14-46 언약교회, 박길현
왜 정상적인 희년 공동체 생활이 안될까?
(레26:14-46)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치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진대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파종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너희가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 배나 더 징치할지라 내가 너희의 세력을 인한 교만을 꺾고 너희 하늘로 철과 같게 하며 너희 땅으로 놋과 같게 하리니 너희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나를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진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 자녀를 움키고 너희 육축을 멸하며 너희 수효를 감소케 할지라 너희 도로가 황폐하리라 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를 대항할진대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 배나 더 칠지라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너희의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붙일 것이며 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 배나 더 징책하리니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 너희 안식시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대적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으로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같이 서로 천답하여 넘어지리니 너희가 대적을 당할 힘이 없을 것이요 너희가 열방 중에서 망하리니 너희 대적의 땅이 너희를 삼킬 것이라 너희 남은 자가 너희 대적의 땅에서 자기의 죄로 인하여 쇠잔하며 그 열조의 죄로 인하여 그 열조같이 쇠잔하리라 그들이 자기 죄와 그 열조의 죄와 및 그들이 나를 거스린 허물을 자복하고 또 자기들이 나를 대항하였으므로 나도 그들을 대항하여 그 대적의 땅으로 끌어 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 죄악의 형벌을 순히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 그들이 나의 법도를 싫어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이 없을 때에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으로 형벌을 순히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대적의 땅에 거할 때에 내가 싫어 버리지 아니하며 미워하지 아니하며 아주 멸하지 아니하여 나의 그들과 세운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열방의 목전에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그들의 열조와 맺은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자기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모세로 세우신 규례와 법도와 율법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을까요? 나는 하나님을 잘 믿을 텐데 너 때문에 못믿겠어 라고 남을 탓할 수 있을까요? 또는 부자가 되면 잘 믿을 것인데 돈이 없어 믿을 수가 없어 라고 핑계를 댈 수 있을까요? 어떤 류의 핑계도 댈 수 없는 것이 인간임을 오늘 본문은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도 다짐을 하면서 복을 주고 보호해 주며 번성케 하고 창대케 하며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했는데도 오늘 성경은 26장 끝까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가다가 매를 맞고 또 맞으면서(18,21,23,28) 마침내 자식의 고기를 먹는(29) 비참한 처지에까지 갔다가 결국 망해서 다른 나라에 잡혀가 죽고 종살이하게 되는 것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때에야 비로소 깨닫고 형벌을 순순히 받을 것이며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불쌍히 여기실 것을 말씀하십니다.(45)
"이렇게 되지 않도록 아예 잘하든지 아니면 조금 징계 할 때에 돌이키면 되었을 터인데 왜 이렇게까지 갔나? 병신, 바보 같은 새끼들" 하면서 욕하기 쉽겠지만, 이스라엘의 이 사실은 사람이 그만큼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믿는데 자만심을 가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심성을 성경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게 청종치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여기 "청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청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듣는다."는 말과 "이행한다."는 두 가지 말이 우리말에서는 "청종"이란 한 단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만 어쨌든 이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듣는다."(청聽)는 말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든지 말씀만 하십시오.'라는 태도입니다. "종(從)"이란 "이행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청종'이란 말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가 명령만 떨어지면 순종하여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이러한 태도를 갖추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하여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믿는다고 하면서 "네야 말해라 나는 내 볼일 볼란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주의를 기울이고 순종하여 행하려고 하는 태도가 없는 것은 아닙니까? 여사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바로 말씀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하셔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셨고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순종하여 행하려고 하는 태도가 바로 하나님을 청종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라고 한다면 마땅히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순종하여 행하려고 하는 태도를 가져야 정상입니다. 안해도 된다는 생각은 비 정상적인 태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태도를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한 주간을 지나면서 말씀을 보고 강의 준비를 하면서 제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 자신에게서 청종하려는 태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회개했습니다. 시간을 잘못 사용한다든지, 기도를 등한히 한다든지, 다른 일 바쁘다고 말씀을 뒤로 미룬다든지, 가정에서 가정 예배를 보지 못하고 있는것등을 생각하면서 그 원인이 저와 제 가족들이 "청종하는" 태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이 두려우신 하나님께 청종하려는 마음이 부족했구나." 라고 회개하면서 뉘우쳤습니다. 지식적으로 알고 남을 비판하기는 잘했지만 참으로 내 자신이 진정 하나님을 '청종'하려는 태도가 부족한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두려웠는지요.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성경을 대하고 읽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자세도 아무렇게나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정좌를 하고 긴장을 하여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정상이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교인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 안에서 자유를 얻었다."라고 하는 사실을 남용하고 또는 오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일수록 더 하나님을 청종하려고 하는 태도가 있어야 정상인데 오히려 더 풀어지고 나태해지는 것은 예수 안의 자유를 잘못 알고 있고, 내가 잘못 가르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해하고 있는 복음의 원리를 '새로이 정리해야 하겠구나. 그리고 다시 가르쳐야 하겠구나'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청종"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곧 멸시하며 싫어하는 마음과 연결됩니다.(15) 그리하여 언약 곧 믿음을 배반하는 자리에 빠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망하는 자리까지 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혹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잘 안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청종하는 자세가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청종하는 자세가 희미한 것은 ①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말도 되고 또는 ②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모시는 마음이 희미하다는 말도 됩니다. 즉 높으신 어른이 내 앞에 계신다는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신앙으로 빠지는 첫단계 내지는 바로 불신앙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막연한 신앙 상태 내지 지식적으로 인정하는 상태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류의 상태로서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네 마음이 딴 곳에 있구나(비둘기 마음이 콩밭에 있듯이) 나를 보는 듯 마는 듯 하는구나 멸시하는구나 다른 것을 그리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구나. 너는 실제로 나를 믿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죄악에서 회개합시다. 그 상태에서 나옵시다.
하나님을 청종하는 자세를 가집시다.
하나님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존하신 영광으로 여러분 앞에 계십니다.(11) 그분 앞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가다듬으십시오. 여러분의 옷깃을 여미십시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이런 마음으로 삼가 말씀을 대면하고, 삼가 기도하십시오. 그분의 함께 계심을 잊지 말고 삼가 주의하고 순종할 자세를 갖추십시오. 구체적으로 이야기합시다. 어렵고, 고달프고, 쪼들릴 때 기도하고 맡길 생각을 먼저 합니까? 짜증과 신경질과 걱정 근심이 앞섭니까? 이럴 때 신뢰하며 맡길 수 있는 마음이 생기기전에 하나님을 바로 믿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자만심을 버리십시오. 여기서 깨어나 참으로 돌이킬 때에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레미야나 아모스 같은 선지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진흙 구덩이에 던져져서 죽을 뻔하고 매맞고 핍박을 당하면서도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사자굴과 풀무불속에 들어 갈 수 있었습니까? 청종하는 자세가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성도들과 로마의 지하에서 살다가 간 성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에게 공통적인 것은 "말씀하십시오. 죽기까지 따르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즈음도 이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생애를 바쳐 청종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자신을 나타내시며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청종하는 신앙 자세를 가지도록 합시다.
lv270134 LEV. 27:1-34 언약교회, 박길현
서원
지난 시간에는 희년 공동체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은혜로 얻은 땅에서 은혜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망하게 되는 이유가 여호와를 청종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못한 것이 가장 근본적인 이유라는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오늘의 말씀도 이것과 다소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하였다가 무르는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1-8)은 정가된 대로 돈을 내여야 무를 수 있고, 짐승(생축)이면 좋고 나쁘고 간에 바꾸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며, 부정한 짐승을 무를 때에는 정한 가격대로 돈을 내되 도로 무르려면 정한 가격에 1/5을 더 하여 제사장에게 내고 무르게 했습니다.(9-13) 집도 드리려고 했다가 무를 때는 정한 가격에 1/5을 더 하여 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14-15) 이런 식으로 기업으로 받은 밭에 대하여도 드리는 법과 무르는 법을 가르치고 있고(16-25) 1/10조 속하는 법(30-31) 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장정이라면 50세겔, 여자는 30세겔(14g×50 = 700g, 420g)을 바치는 등의 말씀이 바로 무르는 이야기입니다. 주의할 것은 사람 드린다는 말씀을 오해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2) 이것은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헌신하기로 작정한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헌신 봉사하기로 서원했다가 못하게 될 경우 장정 남자는 50세겔, 여자는 30세겔을 지불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또 28절의 말씀도 인신 제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받아 죽게 되는 범죄의 경우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전쟁에 나가서 원수를 완전하게 진멸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경우와 범치 못할 간음을 했다든지 우상을 섬기자고 백성을 유혹하든지(레 20, 신 13:13-16)하는 경우에는 사람을 죽이고 물건은 태우고 진멸하라는 경우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방 나라에는 사람을 제물로 우상에게 바치는 일이 행해졌지만 이스라엘 하나님은 그러한 일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오히려 하나님은 얼마나 인격적인 분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원했던 것을 취소하도록 허락하시는 분이시며, 심지어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 성물까지도 사람이 그 물건을 꼭 갖고 싶어 할 때는 그것을 가지게 하고 대신 돈을 바치도록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요즈음 우리가 떼를 쓰고 이루어 달라고 졸라댈 때, 우리의 뜻을 세워 놓고 이루게 해 달라고 졸라댈 때 허락하시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격적인 분이라면 그냥 허락하실 것이지 왜 돈으로 꼭 대체 하라고 하실까요? 그 이유가 27장에는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26장과 연결해서 살펴볼 때 하나님을 청종하는 자세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청종하는 자세를 잃었기 때문에 형벌을 받아 남의 나라에 가서라도 마음이 낮아져서 그 형벌을 순히 받으면(26:41) 하나님이 조상들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시겠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으면서 26:46에는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자기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모세로 세우신 규례와 법도와 율법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27:34에도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동일한 시기에 비슷한 필요에 의해서 보충해서 설명하고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서원했던 것 무를 경우 대체금을 내도록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육을 위해서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특별히 청종의 자세와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27장의 무르는 경우 혹은 하나님의 것을 가지는 경우 대체금을 바치라는 말씀은 좀더 적극적인 의미로 표현하면 여호와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을 교육하기 위함이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 참 신자가 되어야 여호와를 떠나지 않게 되며 멸망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에서도 "여호와께서 그냥 좀 해주시지 꼭 대가를 지불해야 하느냐?" 싶은 일들이 수 없이 있습니다. -안 섬겼다고- 그러나 약속했는데 안했다고 벌하시는가? 라고 생각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대가의 지불은 예수님이 다하셨습니다.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교육적인 뜻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경외하는 참신자 되게 하시는 사랑의 의도가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레위기 마지막 장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너희는 경외하는 참신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거룩이 유지 될 수가 있고, 하나님과 함께 생활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장막을 쳐도 밥을 먹어도 행진을 하고 전쟁을 하면서 여행을 해도 밥을 짓고, 죽을 끓이고, 아이들을 키우고,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신자가 되어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모세, 다윗, 다니엘, 예수님, 바울 등 성경속 모든 신앙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저는 이번 주간에 일제 식민 통치 때에 일본 천황을 신으로 섬기지 않으려고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중 최근에야 밝혀진 이야기들을 좀 읽을 수 있었습니다. 호기심에서 책을 사서는 길을 걸으면서도 읽었는데 그때에 대부분의 목사, 장로, 평신도 등의 사람들이 예수를 버리고 일본 신에 항복을 했는데 그들의 공통적 특징이 여호와를 바라보는 눈이 없었고 경외하는 마음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소수의 목사, 장로, 평신도 등이 감옥에서 고난을 받았는데 추위와 모기, 빈데, 배고픔, 고문 등의 괴로움 속에서도 이겨내었습니다. 그 중에는 청년, 처녀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소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세상보다는(일본의 세력보다는) 하나님 아버지를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약해져서 유혹을 받고 넘어질 것 같아도 그때마다 기도하면서 의지하니까 주님이 힘을 주셔서 극복하게 하셨습니다. 경외하는 자는 말씀 의지하면서 기도하고 주님께 의뢰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밖에서 잘 지내고 설교도 하고 살았지만 주님 의뢰하고, 경외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인격적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참 신앙을 가지자는 말씀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그분을 의뢰하는 생활을 하십시다. 말씀에서 하나님의 인격을 뵙고 기도하면서 의뢰하는 사람이 됩시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세상 두려워 말고 의지하고 기도합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을 새롭게 합시다. 여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생활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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