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강해 2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32강) 열왕기상 12:16-24 이스라엘의 분열
<본문>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르호보암이 그 왕이 되었더라 르호보암왕이 역군의 감독 아도니람을 보내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저를 돌로 쳐 죽인지라 르호보암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더라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의 돌아왔다 함을 듣고 보내어 저를 공회로 청하여다가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으니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좇는 자가 없으니라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를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 팔만이라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솔로몬의 아들 유다 왕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 온 족속과 또 그 남은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저희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좇아 돌아갔더라(열왕기상 12:16-24)
<설교>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분열된 것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백성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선정을 베풀기를 거부한 르호보암일까요? 아니면 백성으로서 전적으로 왕에게 복종하지 않고 자신들의 요구 조건이 거부되었다고 해서 르호보암에게 등을 돌린 이스라엘 백성들일까요? 어찌 생각하면 르호보암의 책임이 큰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고 어찌 보면 백성들에게도 그 원인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양쪽 모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왕과 백성 모두 똑같은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의 인간은 모두가 죄 가운데서 태어난 똑같은 존재들입니다. 어느 누가 더 낫고 못 낫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행동을 보면 잘한 자와 못한 자의 구별이 보이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 속마음은 어느 누가 낫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악한 심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모두가 구원 받지 못할 악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처지 속에서 ‘나는 너보다 더 낫다’라거나 ‘네가 문제다’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생각을 조금이나마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은연중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상대방에 비해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의를 바라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국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의 의를 감춰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부친 솔로몬보다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하고 전갈로 다스리겠다고 선포한 것은, 왕의 권세를 더욱 굳게 확립하여 왕의 왕 됨을 나타내는 것에만 관심을 둘 뿐,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역할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백성들의 고역과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하겠다는 선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나타내고 가르치는 역할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왕이라면 왕은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했어야 합니다. 즉 멍에를 무겁게 했을 때 백성들이 당할 고통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자신의 왕권 확립에만 관심을 두었고, 그것이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지 않은 인간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르호보암의 이런 악함이 우리 모두에게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나 자신의 유익을 먼저 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르호보암의 이러한 악함은 솔로몬에게서도 그리고 다윗에게서도 고스란히 나타났습니다. 솔로몬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건축에 힘을 썼지만 그로 인해 백성들의 고역만 더해졌을 뿐이고, 다윗은 또한 밧세바와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죽임으로써 역시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악함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악함으로 인해서 나로 인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부르는 사람은 많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과연 나로 인한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애통해 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타인을 생각할 것 없이 우리 자신은 과연 예수님에 대해 이런 마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저와 여러분을 놓지 않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은혜가 참으로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억울하게 당하는 입장에만 있었던 것일까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백성들은 솔로몬을 멍에를 무겁게 하고 고역만 가중케 한 왕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덕분으로 풍요롭게 살아왔던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인간의 악한 습성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받은 고통만 기억하려고 할 뿐, 타인으로부터 얻은 유익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누군가로부터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그 은혜를 점점 잊게 되면 섭섭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만 떠오르게 되고 결국 원망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라고 하면서 다윗과의 관계까지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관계까지 무시 해버리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의 관계에 참여되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편한 삶이 더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왕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르호보암에게 등을 돌린 것인데, 사실 백성이 왕의 말에 순종을 하는 것이지 왕이 백성들의 말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아님을 생각한다면 백성들은 왕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도외시 한 채 오직 자신들의 요구사항만 고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나에게 누구신가?’ 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나의 요구사항만 고집하면서 내 뜻대로 되어 지지 않을 때 원망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면서도 조그마한 어려움이라도 있게 되면 그동안 살아온 것이 은혜였음을 잊어버린 채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라고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왕이 자신들을 힘들게 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왕으로 섬길 수가 있느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왕이 자신들을 잘 대해주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왕으로 섬긴다고 했지 않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사고방식은 힘에는 힘으로 대항한다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18절을 보면 “르호보암왕이 역군의 감독 아도니람을 보내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저를 돌로 쳐 죽인지라 르호보암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르호보암의 힘에 자기들 역시 힘으로 대항하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힘으로 누르겠다는 르호보암이나 르호보암에 힘으로 대항해서 따로 분리하겠다는 백성들 모두 똑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군사를 모아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이스라엘을 회복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를 보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24절)는 말을 고하게 합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분열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한 솔로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분열을 통해서 왜 자신들이 분열되었는가를 살펴야 했던 것이고 모든 원인이 자신들의 악함에 있음을 깨닫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잘났는가를 보시지 않습니다. 누가 잘못했고 누가 잘했는가를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다윗의 마음을 원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안다면, 신자는 하나님 앞에 다윗의 마음이 되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나의 악함을 깨닫게 되고 애통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결코 누구의 탓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악함의 결과로 바라볼 뿐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 앞에 나온 심령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상한 심령에서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것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약자를 자신의 힘으로 지배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힘에는 힘으로 대항하는 것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한 심령의 만남인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인간세계에서 분열은 악한 심령의 충돌의 결과입니다. 서로가 자신의 유익을 구하며 타인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고, 힘에는 힘으로 대항하고자 하는 속성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분열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성경이 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똘똘 뭉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연히 하나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서로가 상한 심령을 내어 놓는 관계를 뜻하는 것이고, 서로가 상한 심령을 내어 놓는 관계에서는 르호보암과 백성들과 같은 충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을 받음으로써 죄에서 건짐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 예수 안이기 때문에 그러한 관계에서는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섬김을 내어 놓게 되기 때문에 충돌과 분열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분열이 있고 충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아담의 악한 속성을 그대로 내어 놓는 결과인 것이지 누가 더 잘했고 못했고의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모든 문제를 인간의 상식이나 힘의 논리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어떤 문제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놓은 것이 다윗의 마음, 즉 상한 심령인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탓 내 탓 할 것이 없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똑같은 인간들이 모여서 서로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그러한 자신의 악함을 내어 놓고 예수님의 피 앞에서 상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33강) 열왕기상 12:25-33 여로보암의 불안
<본문>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 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 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제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열왕기상 12:25-33)
<설교>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굳게 세우시고 그 뜻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을 상대로 일을 추진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대로 자신의 뜻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평가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곡해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신앙이 아닌 종교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로보암에게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의 모습이 오늘 현대 교회에,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서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솔로몬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하였습니다.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백성들은 르호보암을 왕으로 섬기기를 거절하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워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남쪽 유다 지파만이 여전히 르호보암을 왕으로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에게 한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을 왕으로 섬기는 백성들의 신앙문제입니다.
26,27절을 보면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여로보암의 염려가 무엇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이 있는 다윗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물론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 제사를 드린 후에 다시 북쪽으로 돌아와서 변함없이 여로보암을 왕으로 섬긴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고 불안해 할 것도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이고 또 백성들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여로보암으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다윗의 집을 출입하다보면 결국 백성들의 마음이 다시 르호보암에게로 기울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르호보암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상황까지 상상하는 여로보암의 마음에 불안감이 없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자신의 왕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백성들을 다윗의 집으로 가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윗의 집에 가지 않고서도 백성들이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줘야 했던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취한 조치는 28,29절에서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라고 말한 것처럼, 신의 형상을 만든 것입니다. 성전에만 신이 있다고 여겼던 백성들에게 신을 만들어 제공함으로써 일단 성전에까지 가지 않아도 신을 만날 수 있고 신 앞에 나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31,32절에서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고 말하는 것처럼, 제사를 드릴 성전을 대체할 산당을 만들고, 제사를 드리는데 있어서 없으면 안되는 제사장을 레위 지파가 아닌 보통 백성들 중에서 세우고, 절기를 지내는 날짜도 유다와 비슷하게 정하여 세워서 신이라 하며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으로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의 성전까지 가지 않아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줌으로써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도대체 뭡니까? 분명 여로보암이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절기의 날짜를 임의로 변경할 수 없음도 알 것입니다. 레위 지파가 아니고서는 제사장이 될 수 없음도 알 것입니다. 제사는 성전에서만 드려져야 한다는 것도 알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이 시킨 대로 제사하고 분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여로보암이나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든 하나님의 말씀이든 그 모든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백성들이 여로보암이 만든 종교를 쉽게 따라가는 것은, 그동안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것이 아니라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관계성에서 이스라엘이 신으로 인정하는 하나님을 함께 신으로 인정하는 것에 불과했음을 알게 합니다. 즉 기독교를 믿는 집안에 태어난 사람이 내 집안이 신으로 믿는 하나님을 자연히 신으로 인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여로보암이 행한 것이나, 여로보암이 행한 일을 받아들이는 백성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인간에게서 어떤 폐단이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폐단이란 신앙이 종교화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고,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대로 되어짐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는 자기의 뜻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미련한 나의 생각보다 더 높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내 뜻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사라져야 할 악한 것에 불과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종교화 되어버리면 가장 먼저 하나님의 생각이나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뜻만 남게 됩니다.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신을 하나 꿰차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들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보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인위적으로 종교를 만들어 내고 있는 여로보암에게서 지금 우리들의 현실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자신을 왕으로 섬기는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기를 원했다면, 즉 그들의 생명을 생각했다면 그들이 비록 다윗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가 제사를 드리도록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로보암 자신도 생명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생명의 문제 또한 도외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섬기는 백성으로 붙들어 놓는 것에만 관심을 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여로보암과 같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장 귀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목사라면 성도들을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는 신자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문제 때문이라면 교인들이 자신보다 복음을 더 선명하게 증거하는 교회로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의 현실은 생명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명의 문제 때문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온통 자신을 위해 신을 하나 꿰찬 사람들이 모여서 종교놀이하고 있는 모습만 난무할 뿐입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두려움은 내 교인들이 다른 교회로 가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관심과 마음이 생명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도들이 이러한 심정으로 복음을 전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목사라고 하는 자리를 굳게 지키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서 사람을 자신의 교회에 붙들어 놓고, 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여로보암과 같은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교회의 경쟁도 무엇입니까? 서로 내 교인 뺏기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목사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저 교회는 이런 것 하고 저런 것 하면서 재미있던데’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들이 목사로 하여금 패배감과 상실감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은 자기 교회의 교인이 다른 교회의 이런 저런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유사 종교를 하나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어왔던 종교와 비슷한 종교를 하나 만들어 내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자신에게 붙들어 놓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인간의 존재를 보지 않은 결과인 것입니다.
고전 3:21-23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는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 사람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사람이 자랑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도 결국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편에서 세상을 보면 큰 교회도, 자신의 위치도, 자신의 업적도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구역과 자리와 영역 싸움에 몰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랑거리에 손상을 입지 않기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해 살아가기 때문에 목사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유사 복음을 만들어 내게 되고, 교인들 역시 자신을 위해 살기 때문에 진리냐 진리가 아니냐에 관심이 없이 다만 신앙의 겉모습만 유지하는 것으로 자신을 신자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씀이 전하는 그대로 증거해야 합니다. 인간의 욕망과 인간의 뜻에 서서 인간이 선호하는 말을 증거 하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설사 교회를 떠난다고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주님 편에 서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 속에 생명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34강) 열왕기상 13:1-10 하나님의 사람
<본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여로보암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하나님의 사람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찌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열왕기상 13:1-10)
<설교>
결국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만나는 제사를 자신의 왕의 지위를 지키는 수단과 방법으로 이용을 한 것인데, 이러한 여로보암의 악함이 오늘날 현대인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지금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참된 제사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즉 제사 의식이 그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들을 하나님의 관계에 붙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제사 의식만 행하도록 하면 되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어디서 제사하든 제사 의식만 있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여기고, 마음대로 산당과 제사장을 세워서 제사하도록 하였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을 위해 제사를 이용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지금도 예배당에 나와 예배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예배라는 의식이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또 알 필요도 없다고 여기고 단지 예배 의식에 자기 열심과 성의를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빠지지 않고 예배 의식에 동참했다는 것으로 자기 믿음을 확인하게 되고 자기 스스로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렸다는 것으로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죽은 자에 불과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감사와 기쁨과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로 내 속에 넘치는 것 때문에,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이 곧 나 자신임을 자각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식에 참여한 것으로 믿는 자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여겨 버리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 무엇에도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고, 굴복할 수 없도록 만드는 강한 능력에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겨우 예배의식이라는 것으로 자신의 신자 됨을 확인하는 수준이라면 결국 자신의 유리함을 위해 양보와, 타협과, 포기와, 굴복을 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종교의 수준인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이 만든 종교에 열심이었습니다. 1절에서 “보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만든 제단에 나와서 열심히 하나님께 분향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성의를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목사가 교인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의 종교에 대해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그 날에 그가 징조를 들어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2,3절)고 경고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즉 선지자가 경고한 것은 장차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는 왕이 등장할 것인데 그 왕이 여로보암이 세운 산당 제사장을 여로보암이 만든 제단 위에서 제물로 바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로보암이 만든 모든 것이 무너질 것에 대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경고는 여로보암의 분노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 여로보암은 경고를 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잡으라고 하지만 그 편 손이 말라버리는 재앙을 받게 될 뿐입니다(4절).
이처럼 여로보암에게 나타나 경고를 하는 선지자를 보고 있노라면 성경에 등장하는 참된 선지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의 이익을 두고 계산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에게 나타난 선지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선지자가 만약 자신을 생각했다면 본문과 같은 그러한 경고를 서슴없이 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말이 분명 여로보암을 분노하게 할 것임을 알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에게 어떤 해가 돌아올지 알 수 없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경고를 했다는 것은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본문의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여로보암이 분노할 것을 두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에 대해서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해야 할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사람을 원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만약 주저함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이 아니겠습니까?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을 잡으라고 한 것은 당연한 모습입니다. 여로보암은 지금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느닷없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작자가 등장을 해서 자신이 세운 산당과 제사장을 부인하고 있으니 분노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을 잡으라고 하나, 결국 자신이 손이 말라버리게 된 것입니다. 손이 말랐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가리키며 잡으라고 지시했을 때 편 손이 그대로 굳어버렸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여로보암은 자신의 손을 다시 거둘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말한 징조대로 제단이 갈라지며 재가 제단에서 쏟아지게 되자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6절)고 청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구하자 다시 손이 전과 같이 회복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본 여로보암은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7절)고 청하게 됩니다. 여로보암이 이러한 청을 한 것은, 자신의 손이 회복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와 같은 선의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람을 뭔가 뛰어난 능력이 있는 자로 여기고 그를 잘 대해줌으로써 자기편에 붙들어놓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제사를 자신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으로 삼은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로보암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어떤 인간도 그 속이 하나님으로 다스림 받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대 교회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보십니까?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까? 아니면 큰 교회, 큰 예배당만 보이고 그것이 부러울 뿐입니까? 저에게는 하나님조차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면서도 그것을 신앙으로 여기고 있는 종교꾼들의 악함이 보입니다. 물론 자기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한 인간으로써 누가 과연 자신의 이익을 완전히 포기한 채 하나님만 바라보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교회는 자기 이익을 포기한 채 하나님만 섬기는 인간의 모임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정도로 완악한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로 일컬으시며 나를 붙들어 고쳐 가시는 그 긍휼과 자비하심에 모든 마음을 뺏긴 신자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악함은 자신이 종교 의식에 열심이라는 것으로 자신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로 여기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악한 것으로 규정되는 것이고, 누구든 자신의 종교 열심을 폄하하고 부정하면 용납하지 않고 분노하는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청함에 대해 하나님의 사람은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8,9절)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의 사람의 입장에 있다고 할 때 과연 이와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일단 장차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혜택을 포기합니다.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을 청한 것은 분명한 호의입니다. 한마디로 스카우트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적절히 연봉을 정하여 여로보암 밑에서 편한 일생을 보낼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왕의 집 절반을 준다고 해도 들어가지 않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낳겠다고 단호한 말로 거절을 해버립니다. 이러한 거절이 또 다시 여로보암을 분노케 할 수 있다는 것도 계산하지 않을 채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처럼 단호한 거절을 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는 것 이 하나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러한 행동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대로 행하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산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내게 어떤 이익이 돌아오고, 어떤 불이익이 올 수 있는가?’ 계산을 함으로써 신앙이 사라지고 타협과 양보와 굴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실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까? 무엇을 생각하고 은석교회로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까? 이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은, 죄인된 나를 용서하시고 날마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함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목사에게 기대할 것도, 오직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복음을 복음 그대로만 전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목사 또한 교인을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어야 합니다. 목사는 항상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복음을 말하면서 복음을 이용해서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을 계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만 전하면 복음을 원하는 교인들이 은석교회로 오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그것이 바로 복음을 수단으로 하여 사람을 모으고자 하는 악함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렀다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바라볼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으니 나는 천국 간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내게 어떤 이익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길로만 걸어갈 뿐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하십니까?
(35강) 열왕기상 13:11-19 선지자의 실패
<본문>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저에게 고하고 또 그가 왕에게 고한 말씀도 저희가 그 아비에게 고한지라 그 아비가 저희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저가 그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저가 타고 하나님의 사람의 뒤를 좇아 가서 상수리나무 아래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뇨 대답하되 그러하다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 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라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이에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가서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열왕기상 13:11-19)
<설교>
왕의 집 절반을 준다고 해도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은, 그 어떤 재물의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의 신앙이라면 분명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왕에게 그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권세에도 굴하지 않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답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신앙에 대한 인간의 착각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속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인간에게서 그 어떤 위대하고 대단한 신앙의 모습이 비춰진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이 지닌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에게 신앙의 흔적이 있을 때, 그 흔적을 도구 삼아 자신의 신앙을 대단한 것으로 높이기를 좋아합니다. 기도를 하든 무엇을 하든, ‘이런 행동을 하는 내가 대단하지 않는가? 이렇게 하는 나의 신앙이 좋지 않는가?’라고 하면서 신앙을 마치 자신의 노력과 의지에 의한 생산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깁니다. 이로 인해서 결국 사람이 참으로 연약한 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에게 속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인간은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섰다고 여기는 것이야 말로 이미 넘어진 상태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의 실패에서도 그러한 인간의 실체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의 권세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분노할 것을 짐작하였으면서도 그러한 것에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람이 참으로 가벼운 문제로 여겨질 수 있는 것에 의해 실패해 버리는 것입니다.
11절의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저에게 고하고 또 그가 왕에게 고한 말씀도 저희가 그 아비에게 고한지라”는 말씀을 보면 벧엘에 거하고 있던 한 늙은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등장하여 여로보암 왕에게 선포했던 말씀에 대해 듣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어느 길로 갔는가를 묻고 나귀를 타고 그를 뒤쫓아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만난 늙은 선지자는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15절)고 말합니다.
이런 경우 우리의 상식은 이미 여로보암의 초대를 거절한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 선지자의 초대에 응하겠는가라는 답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이런 우리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 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라”(16,17절)고 말하면서 늙은 선지자의 초대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실체는 다음의 문제로 인해서 발각되게 됩니다.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18절)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선지자의 이 말 한마디에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 버리고 늙은 선지자와 함께 돌아가서 떡을 먹고 물을 마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의 이러한 변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여로보암의 청도 단호하게 거절했던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늙은 선지자의 거짓된 말 한마디에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는가?라는 의아심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늙은 선지자는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는 말로 접근을 합니다. 자신도 선지자라는 사실을 내세워서 자신이 하는 말도 하나님과 연관이 있음을 믿게 하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물론 11절에서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라고 밝히고 있는 만큼 자신을 선지자라고 한 것을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늙은 선지자는 착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하는 것처럼, 한번 선지자면 계속 선지자라고 여긴 것입니다. 선지자라는 것은, 어떤 직책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할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대로 선포하는 자가 선지자인 만큼, 선지자는 말씀을 받아서 선포하는 자로 살아갈 때 선지자인 것이지 말씀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떠났다면 그것은 선지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늙은 선지자는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에서 떠난 만큼 선지자로 불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선지자라고 일컫는 것은, 과거에 선지자이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선지자인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즉 선지자를 말씀과의 관계에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늙은 선지자가 자신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말도 하나님께 받은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선지자의 말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버리는 실패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늙은 선지자의 말은 하나님의 사람이 받은 말씀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늙은 선지자는 천사가 이르기를 하나님의 사람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분명 전혀 다른 말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 선지자를 따라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이 받은 말씀과 전혀 다르다면, 상대방의 말을 거짓된 것으로 여기고 따르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을 버린 것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보다 늙은 선지자의 말을 더 따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을 받은 자의 입장에서는 그리 반가운 내용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 거리를 여행하고 피곤한 상태에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는 것은, 말 그대로 말씀을 위해서 자기 한 몸은 버릴 것을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이 천사에게 받은 말이라며 전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사람을 편한 길로 이끌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받은 말씀을 고집하면 여전히 힘든 길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말을 버리고 늙은 선지자가 받은 말을 따르면 편안함이라는 갈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편안함이 있는 길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실패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사람을 좋게 하고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내용으로 되어있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속에는 내 편을 들어주고 나를 좋게 해주는 말씀을 기대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도 목사다’라고 하면서 사람을 좋게 하는 내용의 말을 전한다면 과연 그 마음이 어디로 기울어질까요? 비록 들어오던 말과는 다르지만, ‘저 사람도 목사가 아닌가?’라는 생각에 의해서 내 마음에 드는 말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증거 할 때 목사인 것입니다. 즉 말씀을 떠나서 자신의 말을 한다면 그것은 목사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인가 목사가 아닌가는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인가로 살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이러한 살핌에 대해서는 아주 소홀히 해 버립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흔들림이 없는 굳건한 반석으로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다면 단지 목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실수하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의 속에 굳건한 반석으로 세워져 있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의 모든 것을 걸어도 좋을만한 보배로운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말씀 때문이라면 그 어떤 두려움과 위험의 길도 마다하지 않을 만한 가치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십자가의 은혜요 피의 공로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쉬지 않고 증거되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하심을 발견해야 합니다.
무엇으로도 빠져나올 수 없는 멸망의 자리에서 발견한 십자가의 은혜와 피의 공로야 말로 세상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고 포기할 수 없고 양보할 수 없는 귀한 보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외치는 것도 바로 십자가의 은혜요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면, 오직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담긴 것만을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이 안되어 있지만, 짐작해 보자면 여로보암 앞에서도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대접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겠나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대접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보내는 것보다는 대접을 하고 보내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으로 자기 멋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만들어 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늙은 선지자나 하나님의 사람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실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를 우리도 역시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를 엄밀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을 사자에게 붙이시고 하나님의 사람은 죽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을 어긴 자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말씀을 어긴다고 해서 사자에게 죽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더욱 가볍게 여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을 사자에게 붙였다는 것은,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어긴 자의 운명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라 할지라도 십자가의 은혜를 훼방하는 말에 대해서는 엄중한 경계를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목사의 말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고 받아들인다면 그 역시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경계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씀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그 속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은 이론도 지식도 아닙니다. 연약한 우리를 붙드는 강력한 힘으로 존재하는 것이 말씀이며, 우리의 가슴에 살아 역사함으로써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항상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 하게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신자의 실패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36강) 열왕기상 13:20-34 여로보암 집의 죄
<본문>
저희가 상 앞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저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한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 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와서 말한지라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붙이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 이에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안장을 지우매 저가 가서 본즉 그 시체가 길에 버린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섰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떠들어 나귀에 실어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곧 그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그를 위하여 슬피 울며 가로되 오호라 나의 형제여 하니라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저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열왕기상 13:20-34)
<설교>
악을 행하여도 신은 잠잠할 뿐이고, 착한 자가 애매하게 고통을 받아도 신은 역시 잠잠할 뿐입니다.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증거를 볼 수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교회 안에서도 팽배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는 척하면서도 그 속은 세상과 똑같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무시한 채 하나님은 자신에게 전혀 위협거리가 안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말은 부정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마음속 깊이 믿고 또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선지자의 실패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로보암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 없이 선포했던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가 나도 선지자라며 거짓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늙은 선지자에게 속아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버려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실패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가 잘못했다고 생각합니까? 늙은 선지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늙은 선지자가 거짓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으니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 역시 늙은 선지자의 거짓된 말로 인해서 자신이 받은 말씀을 버렸으니 그 역시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둘 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온전치 못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다면 누구에게 내려야 할까요? 두말할 것 없이 둘 모두에게 내려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을 뛰어 넘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먼저 20절을 보면 “저희가 상 앞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거짓된 말로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늙은 선지자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선지자에게 임할 수가 있는가?'라는 의구심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의 사고방식에는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보실 때 정직하고 바른 사람이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논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즉 말씀을 받은 자가 정직하고 의로운 자라야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이 권위가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착각인 것입니다. 어떤 착각인가하면 말씀의 권위가 말씀을 전하는 자에 의해서 높여진다고 여기는 착각입니다. 아주 대단한 착각이고 또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오류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말씀의 권위가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달렸다면,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말씀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시각에는 누구도 말씀을 맡길만한 의로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것은, 그가 잘못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를 도구로 삼아 말씀을 나타내시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때문에 누구든 말씀을 전하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의 의로움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늙은 선지자를 세워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저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한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 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21,22절)는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이 경고대로 길을 가다가 사자를 만나 물려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짓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늙은 선지자는 아무 일 없이 멀쩡합니다. 이것은 또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도무지 우리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 역시도 세상에 속한 우리의 사고방식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이 범죄 했음을 보여주기 위해 그를 죽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즉 말씀을 어기고 떡을 먹고 물을 마신 죄를 묻기 위해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늙은 선지자도 죽어야 공평하지 않습니까? 결국 역시 문제는 우리의 사고방식입니다. 선과 악을 바라보는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든 것을 육신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육신에 이로운 것은 선한 것이고 이롭지 못한 것은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죽음을 좋지 않은 것으로, 불행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나이가 들어 노쇠해져 죽었다면 정상적인 죽음으로 여기지만 일찍 죽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고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좋지 않은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 세상의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가령 비행기 사고가 나서 모든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로 인해서 그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하게 된 기독교인이 있다고 합시다. 과연 그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살려주신 것으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죽었는데 나는 극적으로 그 비행기를 타지 않게 되어 살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자신을 특별히 사랑하는 증표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행기에 타고 있던 기독교인들은 모두 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아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입니까? 또한 세상에서 일찍 죽은 자는 죄가 크기 때문이고, 오래 생존하다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착하기 때문입니까? 이러한 생각이 죽음은 좋지 않은 것, 생존은 좋은 것이라는 기준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은 사자에게 물려 죽고, 늙은 선지자는 멀쩡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람만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늙은 선지자는 심판을 받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잘못된 사고방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24절을 보면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고 말합니다. 사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고 그 시체를 먹지 않고 나귀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사자가 배가 고파서 하나님의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하나님의 일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기 위한 것일까요? 선지자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선지자를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서 말씀의 권위가 어떠한가를 선포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생각해야 합니다. 즉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자는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말씀을 업신여기고 있는 늙은 선지자와 북쪽 이스라엘이 곧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을 보고 늙은 선지자는 자신이 곧 말씀을 업신여긴 자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늙은 선지자가 26절에서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붙이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고 말하는 것도, ‘말씀을 어기더니 꼴좋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말씀을 어긴 자의 그 끝이 어떠함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말씀을 업신여긴 자로서 사자에게 죽은 하나님의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았기에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떠들어 나귀에 실어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곧 그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그를 위하여 슬피 울며 가로되 오호라 나의 형제여 하니라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저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29-31절)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도 말씀을 업신여긴 자로서 부끄러워하고 하나님의 사람과 같은 운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늙은 선지자가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32절)는 말을 하는 것도, 말씀의 권위를 목격을 하고 말씀의 신실함을 알게 된 결과인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게 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본문 마지막에 보면 전혀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여로보암입니다. 33-34절을 보면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고 말합니다.
여로보암은 레위 족속 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삼았습니다. 말씀을 어기지 않는 것 보다는 말씀을 어기더라도 자신의 나라와 왕의 지위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여로보암에게 말씀을 어긴 자의 끝이 어떠한가를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심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 있고 신실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에서 말씀을 어긴 자의 끝이 어떠한가를 전혀 보지 않습니다. 다만 제사장을 세워서 자신의 나라만 유지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서 선지자를 죽이신 것이 말씀을 어긴 자의 끝이 어떠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면, 결국 이 내용들은 우리의 끝이 어떠함을 보여주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어기며 살아가는 너희의 끝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어긴 자의 끝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현장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항상 말씀을 업신여기며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살아간 우리의 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심판을 받아야 할 자가 나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말씀을 어기며 살아가는 것으로 애통함과 회개가 없다면 그것은 곧 여로보암처럼 말씀을 가볍게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굳게 세우시는 분임을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심으로 증거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알게 된 늙은 선지자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사자에게 죽은 선지자와 자신이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에 속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도 애통함이 없다는 것은 말씀을 가볍게 보는 증거입니다. 때문에 말씀을 어기고 벗어나 살아가면서도 애통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말씀을 어기는 인간의 끝과 세상의 끝을 보여주고 경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애통하는 마음으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께 나오기를 소망하기보다는 세상 속에 자신을 굳게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말씀을 어기면서도 애통함이 없는 것, 성경은 이것이 죄가 된다고 말합니다.
(37강) 열왕기상 14:1-16 변장하는 사람
<본문>
그 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 여로보암이 그 아내에게 이르되 청컨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으로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저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고한 사람이니라 그대의 손에 떡 열과 과자와 꿀 한 병을 가지고 그에게로 가라 저가 그대에게 이 아이의 어떻게 될 것을 알게 하리라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대로 하여 일어나 실로로 가서 아히야의 집에 이르니 아히야는 나이로 인하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더라 여호와께서 아히야에게 이르시되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 아들이 병듦을 인하여 네게 물으러 오나니 너는 이리이리 대답하라 저가 들어올 때에 다른 사람인체 함이니라 저가 문으로 들어올 때에 아히야가 그 발소리를 듣고 말하되 여로보암의 처여 들어오라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체 하느뇨 내가 명령을 받아 흉한 일로 네게 고하리니 가서 여로보암에게 고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너를 백성 중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게 하고 나라를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내어 네게 주었거늘 너는 내 종 다윗이 나의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좇으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음과 같지 아니하고 너의 이전 사람들보다도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만들어 나의 노를 격발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을 쓸어 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 버릴찌라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하셨나니 너는 일어나 네 집으로 가라 네 발이 성에 들어갈 때에 그 아이가 죽을찌라 온 이스라엘이 저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서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위에 한 왕을 일으키신즉 저가 그 날에 여로보암의 집을 끊어 버리리라 어느 때냐 곧 이제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쳐서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 같이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그 열조에게 주신 이 좋은 땅에서 뽑아 저희를 하수 밖으로 흩으시리니 저희가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여호와를 진노케 하였음이니라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버리시리니 이는 저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였음이니라 하니라(열왕기상 14:1-16)
<설교>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여로보암도 르호보암도 아니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믿는다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의 관심은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산당을 세우고 제사장을 세우고 제사를 드렸지만 그 모두는 이스라엘의 믿음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도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을 사자에게 죽게 하심으로써 말씀대로 행하지 않은 자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여전히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누구든 자원만 하면 그가 보통 사람이라고 해도 제사장을 삼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씀은 말씀대로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신자는 언제나 말씀에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하고, 말씀이 계시하는 진리의 길을 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즉 참된 교회라면 목사든 신자든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말씀이야 어떻든 내가 다스리는 나라가 부강해지면 된다는 것은 결국 여로보암과 같은 죄만 만들어 낼 뿐입니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만들었든 만들지 못했든, 그는 자신이 만든 종교 체제로 이스라엘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그 죄가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를 보면, 교회가 부흥만 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분위기입니다. 무엇을 하든 교회 부흥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고, 교회가 부흥만 되면 모든 것이 옳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말씀도 교회 부흥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외면해 버립니다. 이러한 것이 말씀을 외면한 여로보암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처럼 말씀을 외면하고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않는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이 듭니다. 이 일은 13:34절의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는 내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를 병들게 함으로써 여로보암의 집이 하나님 앞에 끊어져 멸망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비야가 병들고 죽게 되는 것은 아비야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아비인 여로보암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13절에서 “온 이스라엘이 저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서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고 말한 것처럼 여로보암 집에서 여호와를 향한 선한 뜻을 품고 산 사람은 아비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아비야를 병들게 하시고 죽게 하시는 것은 아비야의 죽음을 통해서 지금 여로보암 집이 하나님 앞에 어떤 상태인가를 보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여로보암은 자신이 어떤 상태인가를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아비야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선지자에게 그 아내를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로보암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것으로 인해 여로보암 집이 끊어져 멸망 받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물로 하나님께 선한 뜻을 품고 살았던 아비야를 병들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병든 아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로보암의 이러한 어리석음과 상관없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도 내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살피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식이 장래 어떻게 될 것인지, 내가 하는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관심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보지 않는 여로보암의 어리석음은 선지자 아히야에게 아내를 보내는 일에서도 드러납니다.
2-3절을 보면 “여로보암이 그 아내에게 이르되 청컨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으로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저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고한 사람이니라 그대의 손에 떡 열과 과자와 꿀 한 병을 가지고 그에게로 가라 저가 그대에게 이 아이의 어떻게 될 것을 알게 하리라” 는 말을 합니다.
여로보암은 왜 자신이 직접 선지자를 찾아가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고 아내를 보내면서도 왜 변장을 시켜서 자신의 아내임을 감추려고 하는 것일까요? 아히야는 11장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빼앗아 여로보암에게 줄 것임을 예언했던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여로보암이 아내를 아히야에게 보내는 것은,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 능력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신이 직접 가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지금 자신이 아히야가 권고한 말씀에 순종하는 길에서 멀어져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내를 보내면서도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아보지 못하게 변장을 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신의 아내임을 알게 되면 분명 좋은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변장을 합니다. 변장하는 것이 인간의 주특기입니다. 자신에게 약점이 되고, 불리할 수 있는 모습은 감추고 유리한 거짓된 모습으로 타인 앞에 나서고자 합니다. 윤리와 도덕도 변장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인격과 도덕을 갖춤으로써 자신의 악을 가리고 선한 자로 세상에 나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조폭의 두목이 교도소에서 믿음을 가졌다거나, 출소한 후에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들려오지만 얼마 후에 또 들리는 것은 또 다른 일로 인해 구속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도 좋은 일도 자신을 가리는 변장의 일환이었을 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변장이 그들에게만 있는 일이겠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자신을 가리는 것은 인간의 주특기임으로 모든 사람들이 변장을 하면서 살아감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목사도 신자도 서로에게 자신의 신앙이 좋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꾸며대는 거짓된 행동들이 곧 변장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에 오직 한분에게는 인간의 그 어떤 변장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서도 그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로보암의 아내가 변장을 하였고, 더군다나 선지자 아히야는 나이로 인해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때문에 변장을 한 여로보암의 아내를 도저히 알아 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히야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 여로보암의 아내가 변장을 하여 아비야가 어떻게 될 것을 물으러온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그에게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아히야 선지자는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다윗의 길을 좇지 아니한 여로보암의 악에 대해 책망을 하고 아이가 죽을 것에 대해 예언을 합니다(6-12). 결국 여로보암이 아무리 자신을 감추려고 해도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런 분임을 알았다면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 최선일까요? 그것은 자신을 가리지 않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자신을 가리지 않는다면 나타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을 어기고, 악을 행하며, 순종치 아니한 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에게 있을 것을 회개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여로보암은 이것을 아비야가 병든 것에서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말씀에 순종치 않으며 악한 길로 가고 있는 자신의 현재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찾지를 않습니다. 아비야가 병든 일에서도 아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만 알고자 할 뿐이지 하나님이 아비야를 통하여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떠함을 보이고 계심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여로보암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위에 한 왕을 일으키신즉 저가 그 날에 여로보암의 집을 끊어 버리리라 어느 때냐 곧 이제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쳐서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 같이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그 열조에게 주신 이 좋은 땅에서 뽑아 저희를 하수 밖으로 흩으시리니 저희가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여호와를 진노케 하였음이니라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버리시리니 이는 저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였음이니라 하니라”(14-16)는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장래를 아비야의 죽음에 담아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한 뜻을 품고 살았던 아비야의 죽음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셨던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받아야 할 우리의 실체를 보게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자신의 구원을 바라볼 뿐,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신의 본 모습을 보지 않습니다. 마치 자신만큼은 말씀에 순종하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 것처럼 불의의 길을 가는 자신을 인정하지도 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변장술에 능한 사람들이 변장된 자신의 모습만 바라볼 뿐, 변장된 모습 안에 감추어진 실체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하면서도 회개가 없고 애통이 없는 것입니다. 회개도 애통함도 없으니, 그 입에서 나오는 은혜도 거짓된 것일 뿐이고 따라서 은혜로 맺어지는 열매도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있다면 다만 인간의 노력에 의한 도덕적 실천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으로 철저히 자신을 감추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스스로 교회라고 하는 모임은 많되 참된 교회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변장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의로 여기는 옷을 입어서 자신을 가리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속을 보시는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어떠한 자인가를 낱낱이 파악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참으로 고집스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사자에게 죽고, 늙은 선지자가 죽은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하고 자신이 죽거든 그 뼈 옆에 자신의 뼈를 두라고 유언을 하면서 자신이 말씀을 가볍게 여긴 죽어야 할 자임을 깨닫는 사건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되어 진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가 십자가 앞에 나온다는 것은 그러한 고집이 꺾이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저주 아래 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씀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지독한 고집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저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 죽으셨노라며 십자가를 즐길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변장을 지우고 정직한 자신의 모습 그대로 선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변장한 모습으로 세상을 활보하면서 자신의 본모습을 세상이 보지 못한다는 것으로 안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말씀 앞에 정직한 그가 신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고 회개와 애통함으로 주님께 나오는 그가 신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신자를 기뻐하십니다. 회개와 애통함이 곧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38강) 열왕기상 14:21-31 유다의 죄
<본문>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 왕이 되었으니 르호보암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사십일세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빼신 성 예루살렘에서 십 칠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사람이더라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열조의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으니 이는 저희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음이라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르호보암왕 제 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몰수히 빼앗고 또 솔로몬의 만든 금방패를 다 빼앗은지라 르호보암왕이 그 대신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왕궁 문을 지키는 시위대 장관의 손에 맡기매 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마다 시위하는 자가 그 방패를 들고 갔다가 시위소로 도로 가져갔더라 르호보암의 남은 사적과 무릇 그 행한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으니라 르호보암이 그 열조와 함께 자니 그 열조와 함께 다윗성에 장사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사람이더라 그 아들 아비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열왕기상 14:21-31)
<설교>
그런데 만약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 한 사람이 먼저 죽든지 아니면 환란을 당하든지 하면 대개 ‘하나님을 잘 믿어도 별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여호와께 선한 뜻을 품고 살았던 사람을 죽이실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선한 사람은 잘살게 하시고, 어려움도 없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정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신자라면 아비의 죄 때문에 선한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자는 그 가문이 끊어지는 심판이 오늘 이 순간에도 벌어질 것이라는 거울로 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을 바라보는 바른 시각인 것입니다. 제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을 향한 말씀이라고 얘기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옛날에 있었던 얘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내용으로 삼으며 말씀으로 항상 자신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유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 왕이 되었으니 르호보암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사십일세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빼신 성 예루살렘에서 십 칠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사람이더라”고 말합니다. 유다가 다윗의 계통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음을 생각한다면 유다에 대한 얘기를 먼저 언급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은데 성경은 유다보다는 북쪽 이스라엘, 즉 여로보암에 대한 얘기를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에게 있었던 일을 먼저 언급함으로써 유다를 경계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마음대로 보통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우고 산당을 만들어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었으나 하나님의 사람 역시 늙은 선지자로 인해 말씀을 어기고 되고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병이 들어 죽게 됩니다. 이 일들이 유다에게 경계가 되게 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먼저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하나님의 경계하심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도 죄악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22,23절을 보면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열조의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으니 이는 저희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음이라”고 말합니다.
유다 역시 여로보암과 같은 길을 갑니다. 여로보암의 길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신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보이셨으나 유다는 하나님의 경고에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누가 더 많은 죄를 범하는 가로 경쟁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25-28절에서 “르호보암왕 제 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몰수히 빼앗고 또 솔로몬의 만든 금방패를 다 빼앗은지라 르호보암왕이 그 대신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왕궁 문을 지키는 시위대 장관의 손에 맡기매 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마다 시위하는 자가 그 방패를 들고 갔다가 시위소로 도로 가져갔더라”는 말을 하는 것은, 유다도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이 깊은 죄로 인해 썩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보실 때 르호보암이냐 여로보암이냐, 유다냐 이스라엘이냐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말씀을 행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다윗언약에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살아난 자로서 긍휼을 바라보고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높이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말씀에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긍휼에 관심이 없었기에 자기 마음대로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세우고 산당을 만들어 제사를 행했던 것이고, 유다 역시도 긍휼에 관심이 없었기에 수많은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즉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도 이스라엘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똑같이 심판을 받을 존재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 경쟁하며 싸웁니다. 30절에서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으니라”고 말하는 것은, 두 나라가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두 나라가 아무리 경쟁하고 서로 잘났다고 싸운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둘 다 썩은 나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누가 말씀 아래 있느냐? 입니다. 유다가 크냐 이스라엘이 크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더 부강한 나라인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다도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고 말합니다. 가증한 일을 본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증한 일이 가증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증한 일이 가증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행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른 것보다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믿는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였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쫓아낸 민족들의 악한 행위를 본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며 그대로 성취되어짐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가는 길이 곧 망하는 길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과 유다가 걸었던 길,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결과가 주어졌던가에 대해 소홀 한다면 우리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길을 걷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마음대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생각한다면 두말할 것 없이 세상이 부러워하는 가치 있는 인생을 만드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서 생각한다면 말씀이 있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헛되지 않음을 말씀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은연중 말씀을 무시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이라는 것도, 말씀의 성취라는 것도, 말씀의 신실함이라는 것도 무시하면서 말씀이 나를 인도해 주기를 원하는 것도 그냥 생각일 뿐 실제의 삶은 내 마음대로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날마다 말씀으로 인해 경고를 받으면서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말씀에 있기 때문에 말씀을 벗어난 자의 운명이 어떤 것인가를 살피면서 말씀이 삶의 중심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말씀대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으로 한 삶을 뜻합니다. 언약 안에서의 삶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곧 긍휼과 자비로써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을 뜻함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긍휼과 자비를 증거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면서 우상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우상을 섬기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보이는 것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긍휼과 자비하심이 나를 영원한 생명에 있게 하심을 믿으면서 그것으로 감사한다면 보이는 것은 모두 헛된 것으로 비춰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경고하시고 책망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긍휼과 자비를 떠나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임을 알게 하셔서 헛된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영원한 것을 소망하는 인생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말씀을 여러분 속에 굳게 세우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돈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인생이 되기를 원해야 합니다. 돈이 나를 굳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굳게 세운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를 받으면서 자신의 길을 살펴야 합니다. 과연 말씀을 따라가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나의 길을 가는 것인지를 살피면서 주님 오실 때까지 영생이 있는 길을 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힘써 걸어가야 할 인생입니다.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고 참되고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9강) 열왕기상 15:1-15 구별
<본문>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왕 제 십팔년에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고 예루살렘에서 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아비얌이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 마음이 그 조상 다윗의 마음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으니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사는 날 동안 전쟁이 있었더니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 아비얌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아비얌이 그 열조와 함께 자니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이스라엘왕 여로보암 제 이십년에 아사가 유다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사십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아사가 그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 열조의 지은 모든 우상을 없이 하고 또 그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서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 오직 산당은 없이 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 저가 그 부친의 구별한 것과 자기의 구별한 것을 여호와의 전에 받들어 드렸으니 곧 은과 금과 기명들이더라(열왕기상 15:1-15)
<설교>
이런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만약 갓바위에 가서 7일 불공을 드리면 뭐든 원하는 대로 성취된다면, 그리고 실제 모든 사람이 갓바위에서 불공을 드려 소원성취를 이루고 있다면 갓바위에 대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내가 갓바위에 가서 불공을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도 아니고, 이번 문제만 해결하고 다시는 안가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갓바위에서 소원성취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예전처럼 갓바위에 대해 관심이 없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 자기 문제를 초월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상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상 숭배는 자기 문제를 초월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누구도 우상숭배를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때문에 갓바위에 가지 않고 마리아상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제사 지내지 않는 것으로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상의 문제는 그토록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그들의 마음을 붙들고 놓지 않았던 강력한 세력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역시 우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불안해하신 적은 없습니까? 그리고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할 것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하신 적은 없습니까? 이 행동은 종교적 행동을 초월하여 모든 행동을 포함합니다. 즉 기독교적 행동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있을 수가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교회를 나간다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예배가 우상이고 교회가 우상이며 하나님이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문제를 위해 취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종인 목사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목사의 말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 받을 것이 염려되어 목사의 말에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목사가 우상인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행위의 중심에 자기가 들어있는 이것이 우상임을 생각한다면 앞서 말한 대로 우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상에 대해 이런 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대하면 신자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왕 르호보암을 이어서 그 아들 아비얌이 왕이 됩니다. 3절을 보면 아비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아비얌이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 마음이 그 조상 다윗의 마음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나” 아비얌이 행한 부친의 모든 죄는 14:23-24절에서 말한 대로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 남색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민족의 가증한 일을 이스라엘이 본받아 행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악이 되었고, 아비얌이 부친의 악함을 그대로 본받아 행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얌 후에 그 아들 아사가 왕이 됩니다. 아사는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왕이었습니다(11절). 아사의 정직한 행함은 12-15절에서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 열조의 지은 모든 우상을 없이 하고 또 그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서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 오직 산당은 없이 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 저가 그 부친의 구별한 것과 자기의 구별한 것을 여호와의 전에 받들어 드렸으니 곧 은과 금과 기명들이더라”고 말하는 것처럼, 남색하는 자를 쫓아내고 모든 우상을 없앴으며 심지어 우상을 만든 태후의 위를 폐할 정도로 철저히 우상을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사의 정직한 행함이었으며, 이런 아사의 마음을 두고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내용을 대하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똑같이 우상을 섬기는 악을 행했으나 하나님은 이들을 다르게 대하신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뭔가 일관성이 없고 공평하지 못한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14:8,9절을 보면 “나라를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내어 네게 주었거늘 너는 내 종 다윗이 나의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좇으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음과 같지 아니하고 너의 이전 사람들보다도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만들어 나의 노를 격발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라고 말씀하시며 여로보암의 악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10절부터 보면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리시고 아예 이스라엘을 버리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똑같이 악을 행한 유다의 아비얌에 대해서는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으니”(15:4)라고 말씀합니다. 똑같은 악을 행했음에도 한쪽은 버리시고, 한쪽은 더욱 견고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절을 보면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라고 말씀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한 르호보암이나 아비얌도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악을 행한 자에 대해 전혀 다른 조치를 취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윗에게 하신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있는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하여 각각 다르게 대하시는 것이고 이것을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다윗 언약을 중심으로 사랑할 자와 버릴 자로 구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서 르호보암이나 아비얌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들만이 아니라 유다의 여러 악한 왕들이 예수님의 족보, 즉 생명의 족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여로보암의 집과 동일하게 버림을 받아야 할 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 생명책에 기록된 것입니다.
아비얌의 아들 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왕으로 등장을 하는 것은, 4절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시기 위해 아사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사가 행한 일은 우상을 쫓아낸 것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견고함은 국가의 발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 집이 아무리 발전하고 부강하게 된다고 해도 그들은 이미 버림 받은 집입니다. 그렇다면 부강하게 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반면에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비록 악을 행한다고 해도 하나님에 의해 견고하게 세움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들을 견고하게 함을 기억하고 버림받아 마땅한 자신들을 돌아보며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정직하게 행하는 것이고, 우상을 쫓아내는 것이 됩니다. 즉 자기 문제를 초월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문제에 집착을 하는 것은, 자신이 어떤 힘에 둘려 싸여 있는가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존재라는 것이 어떤 은혜이며 사랑인가를 미처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별이나, 은혜를 타인보다 더 높아지고 잘되는 것에서 확인하려고 하지만 그 모두는 여전히 자신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자는, 자신의 높음과 잘됨에서 구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될 수 없는 자신을 위해 예수님이 피 흘리신 것에서 구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구별이 큰 감사로 남는다면 어떤 일이 주어진다고 해도 나를 구별하신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초월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상은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모든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지극히 신앙적인 행동으로 보인다고 해도,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우상으로 규정될 뿐입니다. 12절에 보면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 열조의 지은 모든 우상을 없이 하고”라고 말합니다. 이상한 것은 우상과 함께 남색하는 것이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르호보암의 악을 말할 때도 우상과 함께 남색을 언급합니다.
남색은 남자끼리 동침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윤리와 도덕적인 문제처럼 보이는데 왜 우상과 함께 언급하면서 악으로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남색을 이방인의 풍습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쫓아내신 이방인의 풍습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에 우상과 함께 악한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자는 세상과 구별된 존재라는 것을 아십니까? 구별되었기에 다르게 대접받고 있음을 아십니까? 구별되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우리의 악을 짊어지고 영원히 버림받은 자리에서 헤어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 곧 구별의 증거입니다. 우리의 모든 악을 예수님의 의로 덮으시고 생명에 들어가게 하신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 구별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구별된 신자로서 이방인처럼 자신을 위해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야 말로 우상을 섬기는 것이며 여호와께 정직하지 못한 것이고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왜 자기 문제에 매여서는 안되는 존재인가를 이스라엘과 유다를 구별하여 대하시는 것에서 생각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하여 세우셨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구별하셨다는 것 자체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아무리 잘된다고 해도 하나님이 버리시기로 작정한 존재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살아가는 것이 부러운 것입니다.
신자는 어떤 처지에 있다고 해도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고 거룩한 자입니다. 모든 악함도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생명의 길로 인도 받으며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기쁘지 않습니까? 기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기쁘다는 고백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별하심에서 크신 은혜를 발견하시고 버림받아 마땅한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설사 내가 망한다고 해도 예수님의 은혜로 감사할 수 있기를 소원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정직히 행하는 것입니다.
(40강) 열왕기상 15:16-24 인간의 한계
<본문>
아사와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전쟁이 있으니라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한지라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남은 은금을 몰수히 취하여 그 신복의 손에 붙여 다메섹에 거한 아람 왕 헤시온의 손자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에게 보내며 가로되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가 있고 내 부친과 당신의 부친 사이에도 있었느니라 내가 당신에게 은금 예물을 보내었으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서 저로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벤하닷이 아사왕의 말을 듣고 그 군대장관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성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벧마아가와 긴네렛 온 땅과 납달리 온 땅을 쳤더니 바아사가 듣고 라마 건축하는 일을 그치고 디르사에 거하니라 이에 아사왕이 온 유다에 영을 내려 한 사람도 모면하지 못하게 하여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으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아사의 남은 사적과 모든 권세와 무릇 그 행한 일과 성읍을 건축한 것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저가 늙을 때에 발에 병이 있었더라 아사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열조와 함께 그 조상 다윗의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열왕기상 15:16-24)
<설교>
신자가 천국을 얘기하는 것이 얼핏 세상보다 천국을 좋아하는 믿음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자기만 챙기기에 급급한 것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을 얘기하지도 소망하지도 말라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말한다고 해서 마치 자신이 천국만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교회 밖에서는 내 생계에 급급해 하며 살아가며, 교회 안에서는 또한 나의 구원을 위해 살면서, 오직 자기 생각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신자는 항상 자신의 믿음에 대해 살피고 경계하면서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말씀 드리는 것처럼 자기 믿음에 대해 안심하지도 말고, 자신감을 갖지도 말고,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주께서 끝까지 붙들어 인도하지 않으시면 믿음으로 끝날 수 없는 것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사 왕이 믿음에 있어서 인간은 결코 한결 같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시간에 아사 왕의 믿음에 대해 들으셨을 것입니다. 유다의 아사 왕은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왕입니다. 그는 남색 하는 자를 그 땅에서 내어 쫓아 버리고, 열조가 만든 모든 우상들을 없애 버립니다. 심지어는 아세라 우상을 만든 태후의 위를 폐하여 버릴 정도로 철저한 개혁을 행한 왕입니다. 14절을 보면 아사 왕에 대해 “오직 산당은 없이 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라고 평가합니다. 비록 산당까지 없애지는 않았지만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사 왕은 분명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쫓아낸 믿음이라면 다른 모든 삶 역시 믿음으로 살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그것이 곧 큰 착각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은 아사와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전쟁이 있었다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17절을 보면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바아사가 유다를 침공한 이유는 백성들이 유다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사 왕이 우상을 쫓아 낸 후 유다는 평화를 누립니다. 이 소문은 북쪽 이스라엘에까지 들리게 되고, 북 이스라엘의 백성 중에는 평화를 누리는 유다로 도망치는 사람이 많았던 것입니다(대하 15:9) 그래서 바아사는 예루살렘과 가까운 거리에 있던 라마를 점령하고 거기에 요새를 건축함으로써 백성들이 유다로 가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산당을 만들고 멋대로 제사장을 세운 이유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바아사의 공격에 대해 아사는 어떻게 대처를 합니까? 앞서 말한 대로 아사는 개혁을 일으킨 왕이며, 여호와 앞에 온전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믿음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흔들림이 없이 대처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짐작해 볼 수 있는 아사의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사 왕은 전혀 뜻밖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8-19절을 보면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남은 은금을 몰수히 취하여 그 신복의 손에 붙여 다메섹에 거한 아람 왕 헤시온의 손자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에게 보내며 가로되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가 있고 내 부친과 당신의 부친 사이에도 있었느니라 내가 당신에게 은금 예물을 보내었으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서 저로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아사 왕은 하나님이 아닌 아람 왕을 의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사 왕은 르호보암 당시 애굽의 시삭에게 약탈당하고 남은 보물들을 몽땅 모아서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바아사와 맺은 약조(동맹관계)를 깨뜨리고 북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그들이 라마에서 물러가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결국 벤하닷은 아사 왕의 요청을 수락하여 바아사를 공격하게 되고, 바아사는 라마 건축하는 것을 중지하고 물러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사가 비록 자신이 의도한 대로 바아사는 물리쳤지만, 하나님을 의지한 믿음이 아니라 힘이 센 아람을 의지한 결과일 뿐입니다. 따라서 결과만을 가지고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하 16:7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는 구절을 보면 아사 왕은 선견자 하나니로부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을 의지한 것에 대해 책망을 받습니다.
그리고 선견자로부터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9절)는 경고를 듣게 되고, 선견자의 경고에 대해 아사는 노하여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어 버리고, 그때 아사가 몇 백성을 또 학대하는 악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과연 이것이 우상을 쫓아내고 남색하는 자를 쫓아내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한 아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인간임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그 어떤 인간도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우리의 믿음에 대해 절대로 자신감을 가져서는 안되고 항상 주의하고 살피며 자신에 대해 말씀을 근거로 하여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믿음 위에 서 있다면, 그것은 나같은 자를 주께서 붙들어 인도하신 결과라는 것을 항상 상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을 때 우리의 끝은 우리가 생각하고 원하는 그것이 아닐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아사 왕의 믿음은 왜 처음과 나중이 이토록 다를까요? 역대하 16:8절을 보면 선견자가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붙이셨나이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구스 사람이 아사 왕을 공격했던 일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대하 14장을 보면 구스 사람 세라가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승을 거느리고 아사를 공격합니다. 그때 아사의 군대는 58만이었습니다. 숫적으로 열세였던 것입니다. 아사는 여호와께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게 되고, 여호와가 구스 사람을 쳐서 패하게 하심으로 아사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이처럼 전쟁에서 여호와를 의지함으로써 승리한 경험이 있는 아사가 왜 바아사의 공격에 대해서는 같은 믿음을 보여주지 못하고 아람 왕을 의지해서 바아사를 물리치고자 했던 것입니까?
그 이유는 역대하 15:19절의 “이 때부터 아사왕 삼십 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 는 구절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전쟁이 없이 평화로운 시절을 지낸 것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화로운 시절을 지내면서 여호와께 부르짖을 필요가 없었고, 여호와의 도움을 구할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여호와는 그들의 의식에만 존재하는 분이었을 뿐, 이미 아사의 마음에서는 멀어진 분이었던 것입니다. 즉 오랜 평화가 아사에게는 믿음의 큰 적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지 않고 도움을 구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 세월들이 아사의 마음에서 여호와를 지워버리게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자가 날마다 자신을 경계해야 할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아사의 남은 사적과 모든 권세와 무릇 그 행한 일과 성읍을 건축한 것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저가 늙을 때에 발에 병이 있었더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도 대하 16:12절에서는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 구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고 말합니다. 발에 중한 병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허물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원들을 찾아 병을 낫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사는 시작은 좋았으나 그의 끝은 좋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아사의 얘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얘기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아사가 간 길에 서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사는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도움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바라본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오랜 평화를 누리면서 아사는 인간의 연약함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오랜 평화가 여호와가 함께 하신 결과라는 것을 세월이 흘러가면서 희미하게 되고, 결국 그 마음에서 지워져 버린 것입니다. 때문에 바아사의 공격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이 잊고 살았던 것을 다시 회복하기보다는, 인간의 힘을 이용하여 눈앞의 난관을 해결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모습만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어제의 믿음으로 오늘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과거의 믿음을 지금의 믿음의 근거로 삼으면 안됩니다. 믿음 근거에 자신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전에 이런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이다’는 말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날마다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싸움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특히 환경이 평온함으로써 싸움을 잊어버립니다. 부르짖을 일이 없고 여호와께 구할 일이 없음으로 싸움을 잊은 채 교회만 왕래할 뿐입니다. 결국 여호와를 신앙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호와를 마음에서 지워 버린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평온한 세월일수록 자신의 연약함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루하루 여호와의 함께 하심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어려움이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우리의 잠자는 마음을 깨우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변하는 존재들입니다.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수시로 다른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붙들고 계시고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변하지 않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같은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영원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변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부탁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평온하다고 자고하지 마시고, 평온할 때일수록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주를 향한 마음이 변치 말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여러분의 끝을 주께 부탁하는 겸손으로 사시라는 것입니다.
(41강) 열왕기상 16:1-14 여로보암의 길
<본문>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에게 임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가라사대 내가 너를 진토에서 들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여 저희 죄로 나의 노를 격동하였은즉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더라 바아사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과 권세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바아사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디르사에 장사되고 그 아들 엘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선지자 예후에게 임하사 바아사와 그 집을 꾸짖으심은 저가 여로보암의 집을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모든 악을 행하며 그 손의 소위로 여호와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며 또 그 집을 쳤음이더라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륙년에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디르사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년을 위에 있으니라 엘라가 디르사에 있어 궁내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마시고 취할 때에 그 신복 곧 병거 절반을 통솔한 장관 시므리가 왕을 모반하여 들어가서 저를 쳐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 곧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칠년이라 시므리가 왕이 되어 그 위에 오를 때에 바아사의 온 집을 죽이되 남자는 그 족속이든지 그 친구든지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바아사의 온 집을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후로 바아사를 꾸짖어 하신 말씀 같이 되었으니 이는 바아사의 모든 죄와 그 아들 엘라의 죄를 인함이라 저희가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여 그 헛된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엘라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이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열왕기상 16:1-14)
<설교>
이들은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입니다. 자신들이 가는 길의 마지막에 대해 알려줘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실제 겪어보지 못했기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공통적인 반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망하는 길로 달려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 앞에 펼쳐 놓으면서 무엇이 죽는 길이고 무엇이 사는 길인가를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조차도 믿지 않습니다. 단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옛날 얘기 정도로 치부해버릴 뿐,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을 진심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받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망하는 길로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그들과 같은 길을 간다면 우리 역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애당초 성경을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현장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들을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주관해 가시는 현장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아무 활동도 하지 않으시고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일하셨던 것과 동일한 능력과 열심으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능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세상은 한순간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음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망하는 길로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2절에서 “내가 너를 진토에서 들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여 저희 죄로 나의 노를 격동하였은즉”라고 말하는 것처럼, 여로보암의 길로 행한 사람들입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19절에서도 “이는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함을 인함이라 저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고 말하면서 여로보암의 길을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고 망하는 길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북쪽 이스라엘에서 왕위에 오른 사람들의 악을 말하고 심판을 말할 때, 하나같이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여로보암의 길을 간다는 것은 분명 망하는 길이고 죽는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11,12절에서 “시므리가 왕이 되어 그 위에 오를 때에 바아사의 온 집을 죽이되 남자는 그 족속이든지 그 친구든지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바아사의 온 집을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후로 바아사를 꾸짖어 하신 말씀 같이 되었으니”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바아사는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3절)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멸망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도대체 여로보암의 길이 어떤 길이기에 하나님은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을 모두 심판하시는 것이며, 왕위에 오른 사람들이 여로보암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길을 갔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길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여로보암의 행적을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12:19절을 보면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은 다윗의 집을 배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염려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스라엘의 신이라고 하고, 산당을 만들고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세워서 독자적으로 제사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서 그 행위에 대해 경고하였지만 여로보암은 자신의 행위를 그치지 않습니다. 결국 13:33,34절에서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고 말한 것처럼, 여로보암의 집은 멸망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여로보암의 악한 길은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 자원만 하면 제사장을 삼아 제사를 주관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것을 멸망의 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우리가 볼 때 여로보암의 행위는 단지 종교의식에 대한 문제일 뿐, 멸망의 길로 여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자신의 죄가 노출 될 것을 염려하여 우리아를 죽입니다. 이런 행위에 비한다면 여로보암의 행위는 얼마든지 가볍게 넘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범죄보다는 여로보암의 행위를 더 악한 것으로 규정합니다. 심지어는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는 모든 자를 심판해 버리십니다. 여로보암과 같은 길에 있는 자는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로보암의 악은 무엇일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우상을 섬기고 아무나 제사장으로 세운 것이 여로보암의 악이라고 여겨지겠지만 그것은 피상적 시각일 뿐입니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산당을 만들고 보통 사람으로 아무나 제사장을 세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백성으로 하여금 다윗의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즉 여로보암의 죄는 단순히 우상을 섬겼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다윗의 집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는 것은, 다윗의 집을 배반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다윗의 길이 아닌 자신의 길로 행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왕상 15:11절을 보면 “아사가 그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 같이 행했다는 것은 곧 다윗의 길로 행했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열왕기서에서는 두 길이 등장하는데, 다윗의 길로 행하는 것과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는 것이며, 이 두 길의 결과는 극과 극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즉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으로 나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던 사람들의 마지막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가야할 길이 어떤 길인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는 길은 다윗의 길로 행하는 것이고,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끊어짐을 당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마음은 어느 길로 향해야 할까요? 두말할 것 없이 다윗의 길입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 여로보암의 길이 더 좋아 보인다고 해도 그 길의 마지막은 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길은 다윗의 집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집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윗의 집은 단순히 다윗이라는 사람의 가문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집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언약에는 장차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언약을 성취하심으로써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구원하여 생명으로 인도하실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길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까요?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다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기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길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집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윗의 집에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고 제사장을 세운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직 다윗에게 하신 언약 외에는 없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길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는 것은, 언약에서 멀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길은 망하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다른 길은 없음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인 것입니다. 교회가 제자훈련을 하든, 성경공부를 하든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세움 받은 이유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교회에 마음을 두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여로보암은 다윗의 집에 마음을 두지 않고 자신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백성들이 다윗의 집에 가는 것이 염려되어 다른 길은 만들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만을 생명으로 삼고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만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교회에 마음을 두게 되면, 결국 교회를 위한 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바꿀 수밖에 없고, 예수님을 믿는 것도 교회를 위한 것으로 강조할 수밖에 없고, 내 교회의 교인들이 다른 교회로 가는 것도 참지를 못하게 됩니다.
2절을 보면 “내가 너를 진토에서 들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라는 말로 바아사를 책망합니다. 바아사도 우리도 본래 진토와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들어서 생명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진토와 같은 나를 건지심을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은 다윗의 길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길에 행하는 신자에게서는 오직 자신의 연약과 무능을 내놓을 뿐이고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임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의 길에서는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 대신에 자기 재주와 힘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만 있습니다. 더욱 더 힘있는 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나라를 강하게 하려고 하는 것처럼, 교회를 키워서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자 하는 것만 있게 됩니다.
여로보암이 백성들의 마음을 자신에게 붙들어 놓기 위해서 거짓 신을 만들고 가짜 제사장을 세운 것처럼,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만 소망하는 자가 되는 것으로 기뻐하기 보다는, 교인들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붙들어 놓고, 자신의 교회에 충성하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 마음에 맞는 신을 내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로보암의 길은 분명 망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여로보암과 같은 결과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이 가득 덮이고, 악의 세력이 강하게 역사하는 현실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생명으로 나아가는 참된 길에 행하는 것입니다.
(42강) 열왕기상 16:15-28 인간의 실상
<본문>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칠년에 시므리가 디르사에서 칠일 동안 왕이 되니라 때에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더니 진중 백성들이 시므리가 모반하여 왕을 죽였다는 말을 들은지라 그 날에 이스라엘의 무리가 진에서 군대장관 오므리로 이스라엘 왕을 삼으매 오므리가 이에 이스라엘 무리를 거느리고 깁브돈에서부터 올라와서 디르사를 에워 쌌더라 시므리가 성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 위소에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놓고 그 가운데서 죽었으니 이는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함을 인함이라 저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시므리의 남은 행위와 그 모반한 일이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둘에 나뉘어 그 절반은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좇아 저로 왕을 삼으려하고 그 절반은 오므리를 좇았더니 오므리를 좇은 백성이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좇은 백성을 이긴지라 디브니가 죽으매 오므리가 왕이 되니라 유다 왕 아사 제 삼십 일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이년을 위에 있으며 디르사에서 육년 동안 치리하니라 저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그 산 주인이 되었던 세멜의 이름을 좇아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오므리의 행한 그 남은 사적과 그 베푼 권세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오므리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합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열왕기상 16:15-28)
<설교>
이것이 자기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뜻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믿는 자들을 사용하시고 계십니다. 신자는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 순종케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하늘에만 계시고 우리의 삶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신다면 어떨까요? 그렇다고 해서 먹고 사는 일에 어떤 지장이 있게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정욕대로 우리의 욕망을 따라 흘러가는 삶이 될 뿐입니다. 결국 멸망이라는 마지막에 도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며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곧 우리의 정욕대로 흘러가도록 방치 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파악하고 있다면, 자신이 홀로 방치된다는 것에 대해 큰 두려움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의 일이 형통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고 붙들지 아니하실 때 자신의 결국을 뻔히 내다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자기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에 대해 철저히 무너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사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원수 되는 것이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없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없이 살기에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영광과도 상관없이 삽니다. 그래서 모든 관심은 자신에게 집중이 됩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쏟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모습이 과연 교회 밖의 모습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하고 부지런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 세상과는 다르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교회가 진심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의 현장이라면 하나님이 없이 사는 세상의 모습과는 달라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세상과 전혀 구분이 안될 정도로 무너진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르기는 하나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교회의 세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을 두고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비록 남쪽과 북쪽으로 나뉘어졌지만 남이든 북이든 모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북쪽 이스라엘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권력을 두고 서로 죽고 죽이는 것만 난무하지 않습니까?
북쪽 이스라엘의 왕권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참으로 난잡합니다. 북이스라엘의 맨 처음 왕은 여로보암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 나답이 왕위를 이어 받지만 나답은 바아사의 모반으로 인해 죽게 됩니다. 결국 왕권은 여로보암의 집에서 바아사의 집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되지만, 엘라는 또 시므리의 모반으로 인해 죽게 됩니다. 시므리는 또한 오므리의 모반으로 인해서 7일 만에 자살하게 되고 오므리가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그 아들 아합으로 왕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처럼 본문의 내용은 권력을 가운데 두고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물고 물리고, 죽이고 죽는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없이 사는 세상사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러한 세상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5절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칠년에 시므리가 디르사에서 칠일 동안 왕이 되니라 때에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더니”
시므리가 엘라를 죽이고 왕이 되었는데, 그 기간이 7일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6절에 “진중 백성들이 시므리가 모반하여 왕을 죽였다는 말을 들은지라 그 날에 이스라엘의 무리가 진에서 군대장관 오므리로 이스라엘 왕을 삼으매”라는 말대로 이스라엘이 군대장관 오므리로 왕을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18,19절에서 시므리에 대해 “시므리가 성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 위소에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놓고 그 가운데서 죽었으니 이는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함을 인함이라 저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시므리는 7일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시므리를 두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함을 인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7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무슨 악을 행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시므리가 악을 행함으로 오므리를 들어서 시므리를 치게 하시고 결국 스스로 죽는 길로 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시므리의 악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여로보암의 길로 행한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한다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죠? 여로보암이 마음대로 제사장을 세우고 산당을 만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곧 생명의 길이라는 사실을 도외시한 결과입니다. 따라서 여로보암의 길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시므리가 아무리 단지 7일 동안 왕위에 있었다고 해도 그가 모반을 하여 엘라를 죽이고 왕이 된 것이 곧 하나님의 언약으로부터는 이미 마음이 떠난 자로서 권력을 힘을 여기는 것이기에 여로보암의 길로 행한 것이라는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시므리에 대해 모반을 함으로 역시 왕이 된 오므리도 25,26절에서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고 평합니다. 오므리 역시 하나님의 언약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권력을 중심으로 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역시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고 말합니다. 결국 본문의 내용은 권력을 추구하고 권력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면서 모두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오셨습니까? 세상의 주인이시며 세상을 심판해 버릴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신 예수님이 권력의 강한 힘으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아진 자리에 가장 약한 분으로 오셔서 때리면 맞고, 욕을 하면 욕을 당하시고, 죽이면 죽으시는 나약한 길을 가신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과연 교회가 이러한 예수님을 마음에 두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로보암의 길을 달려갑니다. 연약하고 힘없는 자로 생존하는 것을 불행으로, 저주로 여기면서 하나님께 자신을 여로보암의 길로 인도 해달라고 부르짖는 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여로보암의 길이 곧 악을 행하는 길이고 멸망의 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힘이 좋아서 힘을 원할 뿐입니다. 나약한 자보다는 강한 자가 되어서 세상에 이름을 높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아마 나약한 자로 살아가는 것을 싫어 할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 세상에 내어 놓고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싫을 것입니다. 그리고 힘과 권력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부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생명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않는 세상사는 서로 힘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죽고 죽이는 싸움터일 뿐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무기력하게 당하는 사람은 바보라고 조롱을 받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러한 길을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과연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힘이라면 그것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이고 여호와께서 인정치 않는 길입니다.
그런데 과연 어떤 사람이 힘이 주는 유혹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면서 그를 낮추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기 위해서 광야에서 40년을 유리하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힘을 구한다면 그것이 곧 영원한 생명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증거인 것이고, 그가 믿는 그리스도 역시 그 마음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분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자는 낮은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자가 어려움을 당한다면, 실패의 길을 걷게 된다면, 그 모든 것은 우리를 낮추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하나님 나 좀 살려주십시오’라고 애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나를 낮은 자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 진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둔 신자의 믿음인 것입니다.
세상은 힘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힘을 의지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습니다. 믿는 것은 낮은 자에 불과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의 의로움 뿐입니다.
강한 교회가 되고자 하고, 힘 있는 교회가 되고자 하는 모든 것이 곧 십자가 정신에서 벗어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감사하고 십자가가 전부인 믿음으로만 모이는 것이 교회입니다.
(43강) 열왕기상 16:29-34 아합의 악행
<본문>
유다 왕 아사 제 삼십 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 이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열왕기상 16:29-34)
<설교>
사실 신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믿음에 있어서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 뜻과 계획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으시고, 또한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씀을 통해 확인한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 또한 말씀이 그 증거물임을 알 수 있기에 말씀이 믿음의 모든 것을 충족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즉 눈에 보이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헛된 기대들이 믿는 자로 하여금 말씀을 무시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말씀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소중히 여기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그러나 말씀을 경외하는 것은 성경책을 소중히 하는 것도 아니고,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쓰는 것도 아니라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지도 않으면서 ‘말씀이 귀하다’고 하는 것은 거짓된 것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믿는 신자에게는 다른 기적이나, 신비로운 체험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하나님의 복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런 얘기들을 통해서 지금 우리의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고, 무엇이 사는 길이고 무엇이 죽는 길인가를 따로 계시를 받지 않아도 말씀으로 인해서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말씀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고, 살아 역사하심도 알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무시하거나, 살아계심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곧 말씀의 세계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만 믿습니다. 믿는다는 사람들 역시 보여 달라고 하고 보이는 것에 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기적과 신비한 일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시지 않습니다. 대신 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을 만들어 내십니다. 보여 달라고 하는 대신에 말씀만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자들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믿는 신자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멀어지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와 죄에 대해 가볍게 여기게 됩니다. 죄를 지어도 멀쩡한 자신을 보면서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를 무시하는 악행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합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기에 아예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아합의 얘기를 통해서 오늘 우리들의 믿음의 실상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과연 말씀을 믿는 자로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보면서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내 눈에 안보인다는 것 때문에 아예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여기고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반역을 해서 왕이 된 오므리가 죽고 그 아들 아합이 왕이 됩니다. 아합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아주 악한 왕으로 기억된 사람입니다. 그 악행이 얼마나 심했는지 아합에 대한 내용이 22장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합의 악행에 대해 먼저 염두에 두고 살펴야 할 것은, 단순히 ‘아합은 나쁜 왕’이라는 평가의식이 아니라, 아합의 악행을 통해서 우리의 악함을 발견하는 자기 평가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악행이 이처럼 낱낱이 기록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악행이 어떠한가를 보라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악행을 발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오심이 왜 하나님의 사랑이고 긍휼이며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서라도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깊이 깨달아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합의 악행은 30-3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는 이것이 아합의 악행입니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이방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바알을 숭배하고 바알을 위해 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의 악행을 보면 그 전의 이스라엘 왕들의 악행과 그 내용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들 모두 역시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합은 그 정도가 좀 더 심했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왕들의 악행이라는 것이 결국 우상을 만들어 섬긴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바알과 아세라 목상처럼 어떤 형태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들의 악행이나 아합의 악행이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 쉽다는 함정이 있습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말씀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우상과 악행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합은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겼다고 말합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언약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산당을 만들고 제사장을 세워서 백성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이 아닌 곳에서 제사 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아예 잊어버리고 무시해 버린 채 자신의 나라를 굳건히 하는데만 관심을 둔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이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언약도 하나님도 무시해 버린 채 오직 보이는 것만을 좇아 행하기를 즐겨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에만 모든 관심을 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우상을 더욱 끌어 들인 것입니다.
당시 바알은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지켜주며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게 해주는 신이었습니다. 아세라는 여신으로서 바알의 아내이며 역시 풍요를 상징하는 신이었습니다. 이러한 우상을 이스라엘이 받아들이고 섬겼다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그들을 건져내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잊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풍요와 행복을 추구하며 거기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살았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즉 현재의 복과 풍요를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현재의 복과 풍요라는 것이 가치 있고 귀한 것이 아닙니다. 헛된 것이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물거품과 같은 것이고, 썩어질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세계 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하늘의 복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자로 사는 것만이 귀하고 복된 것이 됩니다. 세상의 재물이나 세상에서 얻어진 모든 것들은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기면서 오직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세계를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에 모든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아합의 시대가 어떤 정신으로 살았는가?에 대해서는 34절의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는 말씀으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다가 아들들을 잃어버립니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가 결코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수아 6:26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복한 후에 여리고를 멸망의 표본으로 삼고자 한 말이었습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이같이 망한다는 것을 상기시킴으로써 이스라엘 역시 여호와를 대적한다면 여리고처럼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엘이란 사람이 이것을 무시하고 여리고 성을 건축합니다. 히엘의 완고함은 여리고 터를 쌓을 때 맏아들을 잃었으면서도 여전히 말씀을 무시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기초를 쌓을 때 장자를 잃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히엘이 터를 쌓을 때 맏아들을 잃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당연히 말씀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히엘은 계속에서 여리고를 건축합니다. 그리고 문을 세울 때 말째 아들을 잃고 맙니다. 이것이 인간의 완고함이고, 어리석고, 무지함입니다.
결국 히엘에 대한 얘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합 시대의 사람들이 어떤 정신으로 살았는가를 표본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고집스럽게 나가는 것이 그 시대의 의식구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못하고, 설사 들었고 생각한다고 해도 무시해 버린 채 살아가는 완고함과 어리석음이 결국 멸망으로 끝나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히엘이란 사람이 어리석게 여겨집니까? 여호수아가 분명히 경고했는데 왜 계속 성을 쌓다가 아들을 다 잃어버리는가? 답답하다는 생각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처럼 어리석고 완고하고 답답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사실 우리가 바로 아합이나 히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의 경고의 말도 있고, 또 히엘의 어리석은 모습도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경고를 받으며 깨어 정신 차린 자로서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들은 하나님께 잠깐 징계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지막이 멸망입니다. 즉 우리도 아합이나 히엘과 같은 의식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마지막 역시 멸망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말씀이 보여주는 멸망의 세계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예 말씀의 세계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아 버린 채, 오로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추구하면서 나아갑니다. 그 길이 여로보암이 행한 악한 길인지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말입니다. 설사 여로보암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줘도 가볍게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세상의 주인이시고 세상을 손수 다스리고 계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가 부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말씀 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시는가를 목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저주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을 이루실 것임을 믿는다면, 눈에 보이는 현재를 현실로 인정하지 않고 말씀의 세계를 현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이 2006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 동안 살아온 모든 것 역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살았다 못살았다는 것은 우리의 환경이나 형편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았는가로 평가돼야 할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선한 것이며,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악행입니다.
(44강) 열왕기상 17:1-7 엘리야의 등장
<본문>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열왕기상 17:1-7)
<설교>
그러나 아합이 원하는 풍요의 세상은 아합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풍요는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 모든 인간을 붙들고 있는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풍요로움은 곧 인간의 행복과 연결됩니다. 사람들은 풍요로울 때 마음의 여유와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풍요의 삶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바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신자는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각기 나름대로 신을 부르면서 풍요를 구합니다.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풍요를 누리면서 부족함이 없이 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하나님을 부르며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자신의 풍요를 구한다면 결국 아합이 추구하는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살아가는 삶은 달라집니다.
본문을 보면 갑자기 선지자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신앙적으로 위기에 빠졌을 때 등장하여 그들을 책망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엘리야가 등장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신앙적으로 큰 위기에 봉착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신앙적 위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난 시간 말씀드린 대로 아합이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이 이스라엘 내에서 무시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합 개인의 위기가 아닙니다.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함으로써 모든 아들을 잃었다는 내용은 아합을 위시한 이스라엘의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채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위기였습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등장시켜서 이스라엘을 책망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는 말과 함께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아주 건방진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비가 오고 오지 않는 것이 자신의 말에 달렸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아합이 섬기고 있는 바알과 아세라는 아무것도 아님을 의미하는 말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수년 동안 비가 없다면 그 땅은 황폐해지고 곡식을 수확할 수도 없어서 엄청난 기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알과 아세라는 이스라엘에게 풍요를 주는 신입니다. 즉 풍족하게 비가 내리게도 하고 풍성한 수확을 하게 해주는 신이 바알과 아세라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가 없을 것이라는 맹세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가 참된 신임을 선포하는 것이고 세상은 바알과 아세라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 받고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이기에 인간의 실력과 재주로 유지되는 세상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고, 세상이 자신의 풍요를 위해 부르는 모든 신이 거짓된 것이며, 오로지 하나님의 뜻과 계획만이 실제 현실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자신의 소망이나 꿈보다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먼저 임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3,4절)고 말씀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릿 시냇가로 가서 머물자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서 아침, 저녁으로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보내서 먹게 하십니다. 과연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왜 이런 생활을 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아합과 엘리야를 통해서 두 세계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아합의 세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전형적인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엘리야의 세계는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살아가는 신자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합의 세계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관심은 자신들의 풍요입니다. 자신들을 지켜주고 풍요를 보장해주는 신을 참된 신으로 여기고 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약속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주어진 환경에서는 만족함이 없으며 하늘의 생명에 대해서조차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관심은 자기 사랑일 뿐입니다. 반면 엘리야의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며 하루하루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먹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풍요를 꿈꾸고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이 두 세계 중에 여러분은 어떤 세계가 마음에 드십니까? 혹 아합의 세계는 아닙니까? 사실 우리의 속에서는 끊임없이 아합의 세계를 원하는 욕망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욕망이 포기되는 길은, 아합의 세계를 결코 하나님이 그대로 방치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하나님은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아합을 책망하게 하심으로써 아합의 세계는 결국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을 세계에 불과함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보내서 떡과 고기를 공급하신 것은, 많은 목사들이 즐겨 설교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먹을 것이 없는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받아 생활한 것을 기적으로 말하면서 하나님을 신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분으로 말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사람들이 싫어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께 엘리야처럼 생활하라고 하신다면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엘리야를 호화 빌라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은 먹을 수도 없는 고급 음식을 보내서 먹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릿 시냇가는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환경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그런 환경으로 밀어 넣으신 것이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까마귀를 명하여 먹이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까?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를 믿고 의지하는 신자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까마귀가 나를 먹일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앞서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이 까마귀를 통해 보내신 것은 아침과 저녁 그때그때 분량의 떡과 고기였습니다. 즉 한달 양식, 일 년 양식을 한꺼번에 보내주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구하고 요구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욕망은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 것이 있다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모레 것 까지 있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나아가서 평생을 먹고 살 분량이 주어졌다고 해서 만족하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오직 풍요만을 추구하는 아합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아합의 세계가 바라보는 엘리야의 생활은 벗어나야 할 환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엘리야의 생활이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들을 힘든 환경으로 밀어 넣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아합의 세계와 다른 점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되어지고 있음을 선포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실상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목격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말씀을 믿는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림 받는 현장으로 보이게 됩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눈이 오는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고 자연 현상도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되어지는 것임을 믿는다면 결코 말씀을 가볍게 여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현실을 말씀이 다스리는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는 풍요로움과 소위 만사 형통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는 하나님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세상이 원하는 신중에 하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날의 양식으로 감사하고 풍족함을 누려야 하는 사람입니다. 내일 것이 없다고 해도 내일 일은 내일의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면서 오늘의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창고에 가득 소출을 쌓아 두고 풍족해 하고 걱정 없어 하는 부자와 같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날마다 기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증거하고 계시는데도 우리의 욕망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무시하게 하고 가볍게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만나고 싶어 하는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일 년치, 십년 치, 아니 평생 먹고 살 양식을 가득 쌓아 주시는 하나님일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릿 시냇가로 엘리야를 보내시고 까마귀를 보내서 그날그날 먹게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까마귀를 보내서 먹게 하신 내용을 좋아하는 것은, 그저 신기한 사건이라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구제단체를 보내서 구제하도록 하셨다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분명 신기함과 기적이라는 인식이 크게 반감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참으로 우둔한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신자는 단순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자는 세상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말씀한 대로 성취되는 것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재주나 실력을 믿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결과인 것이고, 설령 지금의 형편이 힘들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런 형편으로 나를 집어넣으시고 세상에 나타내시고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며 엘리야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세계를 원하십니까? 올 한해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까? 과연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어질까요?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만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루하루 주어지는 삶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며 말씀을 의지하는 엘리야의 세계를 증거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루의 것으로 불안해하고 내일 것을 생각하며 염려할 때, 신자는 하루의 것으로 감사하며 내일의 일은 내일에 일하실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가는 놀라운 세계를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날의 것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아합의 세계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행복입니다. 올 한해는 풍요를 꿈꾸기보다는 엘리야의 세계를 맛볼 수 있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45강) 열왕기상 17:8-16 기적으로 산 과부
<본문>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가로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저가 가지러 갈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열왕기상 17:8-16)
<설교>
하지만 그런 생각은 성경이 기적을 얘기하고 있는 의도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성경이 수많은 기적을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나 예수님 그리고 사도나 선지자들의 능력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며, 성경을 좀 더 멋있고 극적인 내용으로 채우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기적이 아닌 것입니다. 비록 인간이 어떤 초능력을 보였다고 해도, 대단하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기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적은 오직 신의 영역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기적을 단지 신기한 현상이나 사건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한 계시적 사건으로 바라본다면 성경에 왜 기적이 등장하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고 기적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교회의 잘못됨은 눈에 보이는 것과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것에서 믿음을 확인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볼 수 없는 신기한 현상이나 사건들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미 완벽한 계시를 접하고 있는 신자가 신기한 사건이나 현상에 매료된 채 호들갑을 떨게 되면 결국 기독교의 중심에서 이탈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적의 사건에 매혹되어서 오늘날도 믿음이 있다면 그와 같은 신기한 현상이 있게 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나, 인간의 이성으로 기적에 접근하면서 기적을 단순히 신화적인 사고로 기록된 것으로 이해하면서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으로 바꾸어 버리는 모든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들 모두는 기적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건 자체를 해석하는데 치중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 안에는 소위 기적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종교사업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있는 곳에 더 믿음이 있고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고 착각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단지 눈에 보이는 신기한 현상과 감각적인 체험에 이끌려 십자가 중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직접 병이 낫고 귀신들린 사람이 고침 받는 것을 목격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달리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냥 병이 나은 것으로 보면 되고, 미친 사람이 나은 것으로 보면 될 뿐이지 그것을 믿음으로 연관지어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안수하여 병이 나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천국 가는 것 아닙니다. 미친 사람이 멀쩡해 졌다고 해서 그가 천국 가는 것 아닙니다.
참된 기적은 구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인간의 부패한 심성에도 불구하고 전혀 왜곡됨이 없이 지금도 전달되고 있는 것이 진정한 기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혹 신기한 현상들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의 생명을 맛보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등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이런 시각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문을 대하는 사람들마다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말씀의 중심에서 벗어난 채 단지 사건과 현상에 치우친 때 자신도 동일한 사건과 현상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 내용에 이어 본문의 말씀도 엘리야의 사역에서 유명한 내용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릿 시냇가에 숨어있는 엘리야에게 매일 까마귀들이 떡과 고기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에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연상하는 것처럼, 본문의 내용도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이 곧 성경을 자기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바라보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엘리야가 까마귀들이 가져다주는 떡과 고기를 먹고 시내의 물을 마시며 지냈지만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시내가 마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9절)는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르밧으로 간 엘리야는 거기서 나뭇가지를 줍는 한 과부를 만나 물과 떡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과부는 먹을 것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12절)고 말한 것처럼,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움큼과 조금 남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의 과부였습니다.
과부의 말을 들은 엘리야가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13,14절)는 말을 하고 과부가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아무리 떡을 만들어 먹어도 통의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다는 이 내용이야 말로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이 본문을 얘기하면서 과부의 순종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즉 과부의 집에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은 것은, 마지막 남은 자신의 전부를 엘리야를 위해 떡을 만들라는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헌신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르지 않는 복을 주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성경을 이용해서 교인들을 이용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해석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과부의 믿음, 과부가 받은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사는가에 민감한 관심을 보입니다. 때문에 복을 받는 것에 민감하게 되고 복을 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게 됩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체험하느냐에 있는 것이고, 과부의 집에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느냐에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보내서 떡과 고기를 먹게 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 역시 먹이시고 입히시며, 과부의 집에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신 그 은혜가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모두가 욕망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마음의 감각들이 둔해졌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조금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먹고 죽을 때만 기다려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과부에게 떡은 마지막 남은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가루가 다하지 않고 기름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엘리야의 말을 믿고 엘리야에게 준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가루와 기름이 많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금 남은 가루와 기름이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풍족해질 것임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오늘도 조금 남은 가루와 기름이 있을 뿐이고, 내일도 조금 남은 가루와 기름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결국 본문에서 보여주는 기적은 우리나라의 설화에 등장하는 화수분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화수분은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를 말합니다. 그 속에 물건을 담아 두면 끝없이 새끼를 쳐 그 내용물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설화상의 단지를 이르는 것입니다. 쌀을 담아두면 그 쌀을 아무리 퍼내도 그대로 있고, 돈을 담아두면 돈을 아무리 퍼내도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르밧 과부의 가루와 기름은 퍼내도 퍼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매 때마다 떡을 만들어 먹었으나 그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뭐가 다릅니까? 화수분은 쌀을 담아두고 계속 퍼냄으로써 한 말을 순식간에 한 가마 백 가마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르밧 과부의 기름과 가루는 말 그대로 일용할 양식이 마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기름과 가루를 퍼내서 한 말, 한 가마로 만드는 기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욕망이 이처럼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과부에게 기름과 가루는 자신들의 전부였고 마지막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라지면 남은 것은 죽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니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엘리야의 말을 듣고 엘리야에게 준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음을 뜻합니다. 풍족하게 해줄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다만 조금 남은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조금 남은 가루와 기름은 항상 그대로였습니다.
그렇다면 과부는 다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가루와 기름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요? 덕분에 부자 되겠다는 것을 꿈꿀까요?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한 움큼의 가루가 다음날에는 열 움큼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움큼 그대로였을 뿐입니다. 아마 과부는 다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한 움큼의 가루와 기름 조금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기적이 자신을 살리고 있음을 체험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쌀독에 쌀이 한 움큼 남았는데, 그것으로 마지막 밥을 해 먹는데도 다음날 한 움큼이 그대로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과부처럼 하나님의 기적이 나를 살리고 있다는 체험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한 움큼이 한 말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매일 한 움큼 그대로라면 그것으로 부자를 꿈꿀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신기한 쌀독으로만 남지 않겠습니까? 결국 문제는 사르밧 과부와 같은 절박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부에게 조금 남은 가루와 기름은 그의 전부였고 그것을 먹고 나면 죽는 것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 처지에서 가루와 기름이 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생명이 하루하루 연장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과부에게 가루와 기름이 다하지 않는 것은, 매일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살리는 것을 체험하게 해주는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심정이 없습니다. 냉장고에는 먹을 것이 가득하고, 쌀통에는 한 달, 두 달 먹을 쌀로 가득합니다. 이처럼 내일의 것이 넉넉하기 때문에 내일의 것을 하나님이 주지 않으시면 죽는다는 절박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풍요가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본문의 사르밧 과부의 기적을 체험하려면 과부의 위치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수중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다 빼앗아 가실 수 있음을 생각하시고 과부의 절박한 위치까지 내려가 보신다면 신자는 한 움큼의 가루와 기름 조금으로도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보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하는 심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일용할 양식으로는 감사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욕심이 커져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이고 하나님의 자비의 능력으로 살면서도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부의 위치까지 우리의 마음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기적임을 알 것입니다.
(46강) 열왕기상 17:17-24 행복과 불행
<본문>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 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그 아이 위에 몸을 세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 오고 살아난지라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 어미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줄 아노라 하니라(열왕기상 17:17-24)
<설교>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놀고 싶을 때 놀면서 정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필히 돈이 필요합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놀고 싶을 때 놀고, 자기 멋에 살기 위해서는 돈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런데 돈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을 다니든, 사업을 하든 일을 해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직장과 사업이 인간을 놀고 싶을 때 놀지 못하게 하고 먹고 싶을 때 먹지 못하게 합니다. 결국 사람은 행복한 삶을 위해 돈을 벌지만,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 모순에 있게 됩니다. 즉 행복을 위해서 행복을 포기하는 모순이 현대인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행복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세상은 행복의 필수적인 조건을 외부의 형통에 두고 있다면, 신자는 내면의 평강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면의 평강이라는 것이 인간이 추구한다고 해서, 또한 노력한다고 해서 누려지는 것일까요? 평강은 인간이 추구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와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미 내면의 평강을 추구하는 노력이 실패할 개연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신자에게 고난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고난에서도 감사하려고 하고, 또한 자신의 믿음을 성숙시키는 기회로 삼고자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고난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뿐입니다. 고난이 계속되면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 버립니다. 간혹 신자로서의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남들 앞에선 행복한 척 위장을 할지라도 실제 자기 내면의 깊은 감정에는 아무 기쁨이 없다는 것을 본인만은 압니다. 심지어 그런 위장이 자기마저 속여서 한 동안 행복해지다가 고난이 닥치면 금방 그 위장은 실체를 드러내고 심령의 평강도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지 않습니까? 이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아무리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이 엘리야를 세워서 과부의 집에 있게 하셨던 놀라운 기적에 대해 들었습니다.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 밖에 남지 않았던 과부의 집에 가루가 다하지 않고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이 기적은 부자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기적이었습니다. 비록 지금 우리들은 일용할 양식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기적의 축복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욕심이 커져 있지만, 당시 과부의 처지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끊어지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기적이며 무한한 축복이었을 것입니다.
매일 같이 떡을 만들어 먹어도 비록 조금 남은 가루와 기름이지만 다하지 않고 마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진심으로 과부는 매일 같이 조금 남아 있는 가루와 기름을 보면서 행복해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행복이 깨어지는 사건이 발생을 한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집에서 과부의 아들이 병이 들어 죽은 것입니다.
그러자 과부는 엘리야를 향해서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18절)라고 말합니다. 즉 과부는 선지자 엘리야가 자신에게 온 것 때문에 아들이 죽게 되었노라며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복을 누릴 때는 이 모든 것이 선지자 엘리야가 우리와 함께 때문이라며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죽자 태도가 돌변하여 엘리야가 자신의 집에 온 것 자체를 불행으로 여기면서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부의 이런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습만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음으로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던 과부의 집에 아들이 죽음으로써 순식간에 불행이 있게 됩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일에 대해 혼란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시며 행복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인데, 왜 기쁨이 있게 하시다가 또 다시 불행과 슬픔이 있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대개 이런 경우 ‘연단’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연단하기 위해서 불행과 슬픈 일도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행으로 인한 심적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자신의 신앙을 성숙시키기 위한 기회로 삼고자 노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물론 그러한 고통스런 일들을 통해서 신앙이 연단되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연단이라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을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즉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일도 함께 주어짐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길로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기쁨이고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축복에서 자신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죽어 버립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하나님입니다. 아들이 죽는 것은 불행한 일이고, 그러한 불행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만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라는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이 자신에게 옴으로써 자신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아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과부의 원망을 들은 엘리야가 죽은 아들을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 침상에 눕힙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그 아이 위에 몸을 세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20,21절)라고 기도하자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나게 됩니다.
무슨 병주고 약주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다시 살려주실 것이면 왜 아이를 죽게 하시는 것입니까? 선지자 엘리야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까? 24절을 보면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줄 아노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여인이 이제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았다는 말은,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기적을 누리면서도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몰랐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14절에서 엘리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고, 그 말대로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기적을 맛보고 살았으면서도 엘리야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을 몰랐었다는 뜻이 아닙니까?
왜 여인은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기적으로 살면서도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여인은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기적에서 자신이 사는 것에만 마음을 두었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먹고 죽자고 했던 때를 잊어버리고 가루와 기름이 다하지 않는 기적에서 하나님이 아니면 죽어야 했던 자신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었으면 아들은 굶어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런 아들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병들어 죽었다고 해서 엘리야를 원망합니다. 마치 죽지 않아야 할 아들이 죽은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사람이 잊고 있는 것은, 자신을 죽어야 할 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자인데 하나님이 살게 하신 것이고, 실패해야 할 사람인데 하나님이 붙들어 놓고 있는 것임을 생각하지 않고 먹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평소에는 은혜를 아는 것처럼 떠들다가도 힘든 일이 있으면 순식간에 태도가 돌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부가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기적에서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과부가 죽고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나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게 하시는 하나님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죽게 하시고, 실패하게 하시고, 넘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예 그런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넘어지고 실패하고 고통이 있을 때 혼란을 겪게 되고 실망과 낙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아무리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이롭게 하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진심으로 죽고 사는 모든 문제가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알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것을 선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를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고난과 고통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평소 때에는 세상에서 젊은 사자처럼 설치다가 궁핍해지면 잠시 피난을 가는 도피처가 아닙니다. 신자는 항상 그분께만 붙어 있어야 합니다. 도저히 참 행복을 찾을 수 없는 세상을 떠나서 항상 거처하는 곳이 그분의 품 안이어야 합니다. 그분과의 동행 자체가 피난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행복은 그 본질상 추구한다고 획득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행복은 반드시 발견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좋고 선한 행복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그것을 발견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행복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기도하여 현실의 문제가 해결 되고 고난에서 구원 받으면, 또는 그 반대로 하나님을 위해서 큰일을 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기대는 아주 큰 착각일 뿐입니다. 그 또한 여전히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이 반드시 발견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은 범사에 하나님을 발견하라는 뜻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 바로 그곳이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거처이며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무대장치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품 안에 있는 자신을 반드시 발견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하나님의 품 안에 있기에 자기는 더 이상 불쌍한 존재가 아니며 불행과는 도무지 거리가 멀다는 믿음 위에 있어야 합니다.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반드시 그분의 유업을 받게 되어 있다는 부분에 절대로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시쳇말로 때려죽어도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며 나는 그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참된 행복은 그렇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고통이 없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나에게 함께 하시며 동행하심을 믿는 것이 행복입니다.
(47강) 열왕기상 18:1-15 오바댜의 두려움
<본문>
많은 날을 지내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아합이 궁내 대신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 인을 가져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러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저를 만난지라 저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가로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붙여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저희가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나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신이 나의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고하였다가 저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일백 인을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저가 나를 죽이리이다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모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날 아합에게 보이리라(열왕기상 18:1-15)
<설교>
하지만 대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상식을 동원하여 ‘하나님이 나를 유익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이런 일이 있게 하시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 삼는 것으로 끝나버립니다. 여전히 그 머릿속은 헝클어진 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 이해도 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면서 앞의 어려운 일은 잊게 되고, 또 새롭게 주어진 어려운 일에 치여서 여전히 혼란과 갈등 속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오바댜란 사람이 등장합니다. 오바댜는 아합의 궁내대신으로서 권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서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멸할 때, 선지자 백 명을 오십인 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이면서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오바댜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지자를 한 둘이 아니고 백 명을 몰래 숨겼다는 사실이 아합에게 발각된다면 궁내대신이라는 지위는 물론 목숨까지 잃을 수 있고, 나아가서 자신의 가족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선지자를 숨겼다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오바댜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바댜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소중하다는 오바댜의 모습이야 말로, 오늘날 진리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모두 죽는다는 것은 말씀의 황폐화를 가져오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를 숨긴 오바댜의 행동은 단지 선지자를 보호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오바댜를 두고 볼 때, 과연 진리를 말하는 오늘 우리들에게 진리가 내 모든 것을 걸 정도로 소중한 것으로 자리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몸이 사는 일이 관심의 전부입니다. 반면에 영혼이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 밖입니다. 그러므로 몸이 사는 일에 도움이 되는 것만을 소중히 여길 뿐, 영혼을 살리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현대인들의 모습과 우리가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는 우리의 몸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찾아와서 진리를 외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내면에는 진리를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내 몸에 도움이 되는 것을 소중한 것으로 감추고 살아가면서도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척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하나님께 내어 놓을 것은, 진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불의한 자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자신을 내어 놓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위선이 발생하게 되고 위선에 둘러싸여 자신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오바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바댜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선지자를 숨겼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분명 위대한 일이고 본받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오바댜의 모습이야 말로 우리가 마음에 두어야 할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바댜를 통해서 인간의 본질을 내어 놓게 합니다. 그리고 그 본질 앞에서 신자에게서 버려져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십니다. 우린 오늘 말씀에서 바로 그것을 봐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버려져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말입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대로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러 가는 길에 오바댜를 만난 것입니다.
당시 오바댜는 아합과 함께 물 근원을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아합과 다른 길에서 물 근원을 찾고 있을 때 엘리야가 그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바댜를 만난 엘리야는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8절)고 지시합니다. 그런데 오바댜는 엘리야의 말에 대해 “가로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붙여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9절)라고 반응합니다. 엘리야는 단지 아합에게 가서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고하라고 했을 뿐인데, 왜 오바댜는 그것을 자신을 죽게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참된 선지자인 엘리야를 죽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12절을 보면 오바댜가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신이 나의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고하였다가 저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는 말을 합니다. 오바댜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위험에 빠지도록 그냥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엘리야가 있는 곳을 아합에게 고한다면, 여호와의 신이 엘리야를 이끌어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숨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아합에게 거짓을 고한 것이 되어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우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숨기고 그들을 먹인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을 각오한 일입니다. 3년 동안 기근이 들었다면 비록 궁내대신이라는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도 백 명의 선지자를 먹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재산도 아깝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아합에게 발각되어 목숨을 잃게 될 것도 두렵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재물과 자신의 목숨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오바댜가 지금은 죽을 것을 염려하여 아합에게 엘리야가 있는 곳을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바댜의 이러한 다른 모습을 과연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목숨도 두렵지 않던 오바댜가 변한 것입니까? 하지만 오바댜는 변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오바댜의 잘못된 생각은 자신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선지자를 살리는 가치있는 일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에 의해 죽을 사람은 아니란 것입니다.
오바댜가 목숨을 잃을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선지자를 숨긴 것은, 여호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기 때문에 여호와를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고, 그 믿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지자를 숨기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여호와를 위한 죽음이기에 가치 있는 죽음으로 여겼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만약 엘리야가 있는 곳을 아합에게 알렸다가 하나님이 엘리야를 다른 곳으로 숨겨 버리심으로써 자신이 죽는다면 과연 그 죽음을 여호와를 위한 죽음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여호와의 손에 의해 죽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바댜는 이런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바댜는 자신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는 말과 함께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일백 인을 오십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저가 나를 죽이리이다”(13,14절)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위해 자신이 한 일을 말함으로써 결코 여호와의 손에 의해 죽어야 할 사람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벗어나야 할 생각입니다.
오바댜는 자신이 여호와의 손에 의해 죽어서는 안되는 자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고, 선지자를 백 명이나 숨기는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죽음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자신의 가치가 여호와 앞에 부인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5,16절을 보면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 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아니하노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죽음의 근본적인 의미를 예수님은 어떤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했기 때문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가진 재물, 권세, 명예, 외모, 지성, 교양, 심지어 도덕성, 종교성마저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땅에서 가장 가깝게 지냈어야 할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공회원들과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었어야 했고, 가장 멀리했어야 할 사람들은 죄인, 세리, 창녀, 병자, 어린아이, 과부들이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로 행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세상 기준의 반대가 하나님의 기준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쌍하고 고달픈 사람을 더 사랑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인간의 겉모습 대신에 속사람을 판단했다는 의미 즉, 겉으로 위선을 떠는 자들 대신에 그 마음의 본성이 착한 자를 좋아했다는 뜻은 더욱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한 사람의 예외 없이 다 위선을 떨고 그 중심에서부터 더럽고 추한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비한 모습으로 나오는지 아닌지의 여부만 가지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윤리적인 인간적 겸손을 높이신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 큰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겸손을 높이시고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바댜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선지자를 살려주는 일에서 자신은 여호와에 의해 죽을 수 없는 존재임을 바라본 것입니다. 즉 자신도 하나님 앞에 큰 죄인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9절의 “가로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붙여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라는 항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공적으로 인해서 여호와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때문에 아합에 의해 죽는다면 그것은 의가 되는 것이기에 두렵지가 않지만, 엘리야가 자신을 아합의 손에 붙여 죽게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11:1-3절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 할 것이요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인간을 그 육체대로 심판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은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두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재물, 권세, 명예, 교양, 지성, 도덕성, 종교성, 그 어떤 것들도 심지어 영성마저 인간을 절대로 더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만이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의 공적을 바쳐야 주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셨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에게 가치를 두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를 위해 사는 것은 자신도 타인도 육체대로 알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고 타인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에 못박힌 자로 사는 것입니다.
(48강) 열왕기상 18:16-24 머뭇거림
<본문>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인이로다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 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열왕기상 18:16-24)
<설교>
세상은 도움을 주고받는 것을 물질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의미로 생각하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고, 돈이 없어 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치료비를 주거나 무료로 치료할 수 있도록 병원을 알선해 주고, 돈이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는 학생에게 공부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 등을 사람을 돕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에게 있어서 진정한 도움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한 복지공무원(Social Worker)이 교통사고로 몸이 완전히 뒤틀릴 정도로 부상을 당했는데도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빈민가 소년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담당할 케이스가 아닌 데도 정형외과 의사에게 치료 받도록 도와주어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인생에서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이 아이에게는 진정한 도움을 주었구나!”라고 생각되어 아주 만족했습니다.
몇 년 후 동료들에게 그 소년이 어떻게 되었을는지 추측해보라고 했습니다. 다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선생, 의사, 변호사, 공무원이 되었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흉악한 범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저는 그 소년을 다시 걸을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지만 그에게 어디로 향해 걸어가야 할지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지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베풀어준 것이 진정한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돈과 권세로 도와주는 것은 사람의 외적 조건만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찾아가서 말로서 격려하고 함께 슬픔을 나누며 위로하는 것도 일시적인 감정상의 평안을 주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통사고로 불구가 될 수 있는데도 돈이 없어 치료를 못한다면 분명 도와주어야 합니다. 또 정서적으로 비뚤어지지 않도록 많은 권면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도움은 인생의 방향을 어디로 향해 걸어가야 할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평생 일할 수 있는 좋은 직업을 알선해 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 또한 외적 조건을 변화시켜 주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깨달아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참된 진리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모든 인생에게 필요한 진정한 도움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또한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가진 자라고 해도 여러분은 세상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자로 세움을 입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모두 진리를 아는 자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리를 알고 진리를 전할 자로 부름 받은 신자가 인생의 중심을 진리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 스스로 진리가 중심이 아닌 인생을 살아감으로써 타인에게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없는 자로 전락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는 말을 합니다. 엘리야가 바라보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상태였습니다. 인생에서 분명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흔들거리면서 외적인 조건과 형편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중심된 것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붙들며 흔들림이 없고 비틀거림도 없이 참된 진리의 길을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까? 오바댜가 엘리야의 있는 것을 아합에게 고하자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만났을 때 한 말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17절)입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자로 바라봅니다. 엘리야가 한 말로 인해서 이스라엘에게 기근이 들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아합의 말에 대해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18절)고 대답합니다. 즉 엘리야는 아합과 아합의 집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가 무엇인가를 보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합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속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있는 전형적인 종교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서 모든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변 사람과 환경에 모든 원인을 두고 책임을 돌리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하고 관심도 두지 않는 아합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괴로움을 당하는 길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으라고 합니다(19절).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의 대결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참된 신이 누구시며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신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참된 진리를 가르쳐주고 참된 신을 중심에 두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스라엘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도움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인생은 그 마지막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죽느냐 아니면 알지 못한 불신자로 죽느냐가 그의 모든 인생을 판가름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세상에서 어떤 인생을 살았든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로 죽는다면 결국 영원한 사망, 즉 지옥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몇 십 년 호화롭게 살았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알 필요성도 느끼지를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되고 영원한 고통에 빠져들게 되었다면 그 인생을 성공이라든가 가치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세상의 현실은 진심으로 중대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보지를 못합니다. 아합 역시 이 중대한 문제를 보지 못했기에 바알과 아세라 상을 세운 것이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설치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의 인생에 진심으로 중대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세상에서의 삶에 이익이 되고 유리한 신을 참된 신으로 여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자 하기 보다는 병을 고쳐주고 복을 주고 사업을 돕는 바알을 하나님으로 여기며 좇았던 것입니다.
교회가 진심으로 성도를 돕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복 받고 잘 삽니다’ 라는 성경에도 없는 자기 말을 해줌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그저 순간적인 기대와 위로를 갖게 하는 것입니까? 어렵고 힘든 사람을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교회의 할 일입니까? 물론 교회 안에 어려운 분이 있으면 모두가 함께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교회가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선포하고 인생에 없으면 안되는 한분을 증거하기 위해 세워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음을 물질을 나눔으로써 증거하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가 외면할 수 없고 외면해서는 안되는 가장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희미해지고 오히려 교회 부흥이나 가정 행복, 환경운동과 같은 것에 집중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천국보다는 현실에서의 활동을 통해서 교회다움을 맛보고자 하고, 그것을 교회의 본질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합은 엘리야 때문에 자신이 괴롬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져 있고 관심 자체가 잘못되어 있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못합니다. 모든 문제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합의 이런 모습입니다. 혹 여러분이 목사의 설교가 여러분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지 못한다거나, 오히려 괴롭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원인을 목사에게 두기에 앞서 먼저 여러분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담은 자기 말을 하는 것이라면 복음을 원하는 신자에게 그 말은 괴로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서 전하는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자신을 괴롭게 한다면 목사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아합처럼 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에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오직 내게 기쁨이 되는 말만 듣기를 원하는 나에게 모든 문제가 있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원망한 것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것도 자기 욕망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를 외면한 채, 눈앞에 펼쳐진 세상에서의 허망한 삶에서 마음이 멀어지지 않기 때문에 참된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던져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병에서 고침을 받고 몇 십 년의 인생을 풍족하게 잘 사는 것보다 영원한 생명의 문제가 더 중대합니다. 교회만 나오면 영생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식이라면 결국 주어지는 것은 괴로움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환경과 형편의 모든 것이 결국 괴로움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혹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믿는다 할지라도 남은 것은 세상 마지막 때까지 영생을 바라보고 달려가면서 타인에게 영생을 전파하는 것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지 영생의 문제는 해결되었으니까 이제 관심은 다른데 두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 교회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의 문제는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해주지 못하는 말이고 또한 대중들의 흥미를 끌 내용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점차 교회 내에서 외면당하는 외침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내용들이 교회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입니다.
결국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그 중심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만한 참된 진리가 없습니다. 이처럼 중심이 없기 때문에 쉽게 흔들리고 낙심하고 비틀거리게 됩니다. 하나님만으로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관심을 다른데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기쁨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다른 것에 기웃거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생각이야 말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고 하나님을 바알처럼 여기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날 위한 하나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바알 같은 신이 하나님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심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 한분으로 굳건히 세워져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49강) 열왕기상 18:25-29 인간의 종교
<본문>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깐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열왕기상 18:25-29)
<설교>
그런데 코페르니쿠스라는 사람이 지구는 공처럼 둥글다는 말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당시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지구가 둥글다면 내가 서 있는 반대편의 사람은 다 밑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눈에 보이는 대로 지구를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앙도 다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이며 스스로 자기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 실체가 존재함을 믿게 되고 자기 인생 또한 어떤 절대적인 분의 주관 아래 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처럼 성령의 거듭남, 즉 가치관의 전도로부터 출발합니다. 그 이전에는 아무리 교회 활동에 열심을 내어도 교인일 따름이지 신자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란 항상 새롭게 바꾸어진 가치관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입니다. 물론 새 가치관을 따라 사는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모르거나 잊어버리는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기 인생이 지향하는 바가 분명히 달라졌고 또 그렇게 살려고 힘쓰는 것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은 바뀌지 않은 예전의 가치관으로 살면서 종교생활만 열심히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열심을 근거로 삼아 하나님을 부릅니다. 물론 자신이 구하는 것을 응답 받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종교생활의 모든 열심이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기독교 신앙이 아니며,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진 모습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종교 형태를 그대로 갖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종교 형태가 어떠한가를 본문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갈멜산에 모으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 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23,24절)는 방법으로 누가 참된 신인가 확인하자고 합니다.
그 자리에 모인 백성들 모두가 엘리야가 제안한 방법이 옳다고 찬성하니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은 송아지를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라고 외쳤지만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기색도 없이 쌓은 단 주위에서 계속 뛰놀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엘리야는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깐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27절)라는 말로 그들을 조롱하고, 엘리야의 조롱에 더욱 다급해졌을 850명의 선지자들은 더욱 큰 소리로 부르고 자신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알로 부터는 아무 소리도 없고 잠잠했을 뿐입니다.
우린 이 내용에서 자신들의 신을 부르고 응답을 받기 위해 그들이 어떤 방법을 동원했는가에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의 응답을 받기 위해 취한 그들의 행동에는 오늘날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는 사고방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자기들의 신을 부르고 응답을 받기위해 동원한 것은 자신들의 열정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열심히 신을 부르는 것뿐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자해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과 정성을 신에게 보임으로써 신의 응답을 받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알은 그들의 어떤 행동에도 잠잠했을 뿐입니다.
물론 바알이 우상이기에 잠잠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면 만약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다른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다시 말해서 850명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똑같은 방식을 취했다면 하나님이 과연 그들의 정성과 열심을 보시고 응답하셨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을 불렀기 때문에 응답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850명 선지자들은 근본적으로 신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성과 열심을 동원하면 신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열심과 정성을 동원해서 신을 부른다면, 비록 그 이름이 하나님이고 예수라고 해도 우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열심과 정성을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자신의 말씀 안에서만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열심과 정성을 보여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에만 모든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850명의 선지자가 오랜 시간 신을 부르고 자신의 몸을 상하기까지 하는 것은, 자신들의 정성이 부족하면 신이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신을 믿지 못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즉 신자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신의 열심과 정성이 부족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기도만 하면 무조건 응답해 주신다고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믿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기도는 자신의 뜻과 소망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자신이 순종할 수 있기를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눅 1:37,38절을 보면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고 말합니다. 천사가 처녀인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님을 잉태할 것을 말하자 마리아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잉태할 것이라는 말씀이 마리아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마리아 개인적으로는 아주 힘들고 불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최악의 경우 돌에 맞아 죽는 일이 내게 일어날지라도 순종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일이 내게 일어나서 설사 죽게 된다고 해도 하나님이 꼭 이루셔야 할 일이고 또 그 일에 하나님의 귀한 뜻이 있다면 그대로 하시옵소서. 저는 그 일에 쓰임 받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기쁨이며 죽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없습니다”는 것이 마리아의 고백의 의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4:9,13)는 고백을 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 “우리 산자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1)고 담대하게 선포했지 않습니까?
이처럼 신자는 자기 믿음에 전부를 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신 말씀에 모든 걸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열심과 정성을 신뢰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모든 것을 분명히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신자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은 무엇이든 이뤄주신다’는 믿음만 어떻게 하든 키우려고 하는 종교적 행위만 평생에 걸쳐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도 안 믿어지거나 하나님도 안 들어주실 것이라는 것을 자신도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반증에 불과할 뿐입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기에 자신의 열심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을 마치 신앙의 모토인양 외쳐대고 있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자라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는 고백이 그 중심에 살아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세상에서 완전히 바보 병신이 되는 것쯤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나 기꺼이 감당하겠습니다” 라는 고백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는 죽자 살자 믿어서 자신의 편안하고 안락한 머리 둘 곳을 얻고자 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기도, 봉사, 헌금, 성경공부, 등등 모든 것을 다 했는데도 하나님은 요지부동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없습니까? 심지어 의지적으로 감사하고 열심히 찬양도 해보지만 기쁨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잠시 그때 뿐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경험한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도무지 신뢰할 수 없어서 믿음 자체를 포기하려해도 뭔가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게 되고, 결국 교회 활동은 여전히 참석은 하지만 아무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이 믿음은 이제 허울만 남았고 아무 힘도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명목상으로는 신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스스로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산소 호흡기에만 의존하는 식물 인간과 같은 신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날 교회에서 설교 말씀 듣는 것이 유일한 신앙 활동으로 남게 될 뿐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열심을 동원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보기 위해 하나님을 감동시킬만한 거리를 동원하게 되고, 그것이 결국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담은 열심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께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열심으로 쉬지 않고 일하시는 분입니까? 신자에게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 분이 되면 안됩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신자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었고 침 삼키는 순간도 놓치지 않으시며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또 그 일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범사를 바라볼 때입니다.
이것을 위해 주의할 것은 신자가 죄 안 짓고 선한 일을 하며 하나님이 신자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고 또 하나님은 신자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신자가 그런 방향으로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하나님의 근본적이고도 궁극적인 일을 잘 발견할 수 없게 된 나머지 항상 침묵하는 하나님으로만 비췰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택한 백성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로 채워서 하나님께만 세세토록 감사와 경배와 찬양을 돌려주기만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신자가 처한 환경과 일어나는 범사 모두도 오직 그 목적에 바탕을 두고 섭리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당연히 이 땅의 것으로 채워주시기도 하지만 필요하다면 끝없는 고난도 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이고 신앙입니다. 신앙은 자기 열심이 아닙니다. 자신의 열심으로 신을 움직이고자 하는 것은 종교일 뿐입니다. 생명이 없는 인간의 놀이일 뿐입니다.
(50강) 열왕기상 18:30-40 하나님의 응답
<본문>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열왕기상 18:30-40)
<설교>
이것을 단지 바알 선지자가 부른 것이 우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바알 선지자들이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에 대한 바알 선지자들의 생각과 사고방식으로는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우상을 부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즉 우상은 바알과 부처와 같은 하나님과 이름이 전혀 다르거나 어떤 형상 문제가 아니라 신에 대한 인간의 사고방식과 그 생각에 의해서 결정되어 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이란 이름을 부르고 기도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부르는 사고방식이 바알 선지자 식이라면 그것은 우상을 부르는 것과 동일한 뿐입니다.
그래서 바알 선지자들이 신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 자신들의 정성과 심지어는 피를 흘리기까지 하는 열성을 바치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복을 받기 위해서 자신의 열심과 정성을 바치고자 하는 것과 동일한 사고방식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떤 마음과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을까요? 이것을 안다면 우상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인간의 종교와 신앙이 어떻게 다른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참된 하나님을 신앙하고자 하는 신자에게는 매우 중대한 문제임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제 엘리야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차례가 왔습니다. 엘리야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부른 후에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합니다. 여호와의 단이 무너져 있었다는 것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얼마나 소홀했던가를 보여줍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해도 응답이 되지 않아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여호와를 부르는 것에 대해 소홀히 했을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엘리야는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고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미 오랜 옛적에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과 함께 하고 계심을 암시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언약과 함께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스라엘은 마치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은 것처럼 여기며 우상을 섬기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신뢰하지 않은 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들의 문제와 고통에 함께 하시고 그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는 것을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의 함께 하심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신의 전지전능하신 힘으로 자신들이 어렵고 힘들 때 도와주고 해결해주고, 언제 올지 모르는 불행한 재앙으로부터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인간의 종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편이 전혀 나아지지 않을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해 불신과 의혹이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홀로 신앙으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의 열심과 정성에 도취되어서 자기 종교에 빠진 채, 그것을 신앙으로 오해하면서 다른 길을 달려가는 종교인들이 부지기수인 것이 지금의 기독교의 현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신뢰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엘리야는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시며 참된 신이신 하나님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단을 쌓은 것을 보면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32-35절을 보면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단 주위에 도랑을 파고 물이 도랑에 흘러 가득 찰 정도로 제물과 단 나무에 물을 붓도록 합니다. 제물과 단에 물을 붓는 것은 제단에 불이 붙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지할 것은 돌로 단을 쌓고 도랑을 만들고 나무를 쌓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는 일은 엘리야가 손수 하였으면서도 유독 제물과 나무에 물을 붓는 일은 백성들을 불러 시킨 것입니다.
엘리야는 왜 자신이 모든 일을 다하고 물을 붓는 것만은 백성들에게 하도록 했을까요? 물 붓는 일이 힘들어서였을까요? 사실 물 붓는 것보다는 도랑을 파고 단을 쌓고 나무를 쌓고 제물의 각을 뜨는 것이 더 힘듭니다.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물을 붓는 일, 즉 제단에 불이 붙는 것을 방해하는 일을 백성들에게 하게 한 것은, 지금껏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일을 방해하는 존재였을 뿐임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일을 방해하는 이스라엘이라면 당장 벌을 내려서 심판해 버리고 멸망시키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여전히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해 가시는 분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 엘리야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여 도저히 불이 붙을 수 없는 제단에 불을 내리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이런 하나님을 우리의 지식으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지식에서 나오는 하나님은 바알 선지자들의 수준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참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깨닫게 하시고 생명이 있는 진리의 길로 가게 하시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며 그 일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만 아니라, 제물을 쌓은 단과 나무와 도랑 속에 가득 흐르는 물까지 다 태웠습니다. 그 태우는 모습을 “물을 핥은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길이 도랑의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완전히 증발시켰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분명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나는 아무리 기도해도 저런 기적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만이 아니라 세상 누가 기도해도 엘리야의 기도 응답 같은 기적을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본문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너희들은 아무리 기도해도 이런 기적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까? 그러면 우리를 놀리는 내용밖에 더 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이처럼 기적을 일으키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그러한 능력을 오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주어져야 하고 또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본문의 기적과 같은 기적을 맛보며 살아가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단지 엘리야에게만 보여주고 끝내는 기적이라면, 본문의 기적이 오늘 우리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본문의 응답을 두고 단순히 큰 기적으로 응답하셨다고 쉽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지난 3년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바싹 마른하늘에서 천둥 벼락이 칠 리는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하실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구름이 몰려와 번개가 쳤다든지, 어디선가 조그만 불똥이 날라 와 아주 천천히 태웠다면 바알 선지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고 항변할 구실을 줬을 것입니다. 그냥 일상적인 자연현상으로 몰아붙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이 흥건하여 불이 붙을 수 없는 단에 불을 붙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태워 버립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기적은 반드시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 하나님이 아니면 도저히 그렇게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분명하게 깨닫도록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신자의 기도가 이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 응답을 꼭 기적이나 놀라운 일이 터지는 방식으로 기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응답은 기적을 만들어 내고 놀라운 일이 터지는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적과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로 생각하지 않고 다만 눈에 보이는 놀라운 사건과 현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갈멜산의 대결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것은 분명 초자연적 기적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이 놀라운 기적이며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한 자이며 피조물인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된다는 것, 눈에 전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간구하여 응답이 되는 것 자체만으로 큰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 것과 같은 기적인 것입니다.
신자가 기도하면서 이런 기적을 누린다면 그 신앙은 참으로 단단해 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적을 맛보지 못하는 것은, 대개의 사람들이 기도응답을 자신에게 일어난 큰 문제가 해결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37절을 보면 엘리야는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라고 기도합니다.
엘리야는 무작정 단에 불을 붙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알 선지자의 기도와 다른 점입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오직 단에 불을 붙여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단에 불이 붙음으로써 자신들이 엘리야를 이기고, 자기가 믿는 바알이 신이라는 것을 증거함으로써 승리하고자 하는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방인의 기도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승리를 위해서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만약 엘리야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여호와를 불렀다면 단에 불을 붙여서 하나님이 참된 신임을 보여 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증거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승리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 밖에 안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시고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분임을 보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인간의 환경과 형편을 바꾸기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도 하나님의 선과 영광만이 드러나길 소원해야 합니다. 질적 양적으로 좋고 큰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소원하는 바를 크게 부풀려 놓고 그대로 응답되리라 억지로 믿으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미리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에 소원하고 있는 것과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대로 응답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지기를 더 소원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뢰고 울부짖되 그 간구한 모든 문제에 대한 자기의 집착은 버리는 것이 필수입니다. 그 계획대로 일을 진행시키되 일이 되어가는 방향과 모습을 두고도 계속해서 묵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문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선만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그래서 제가 다시 한 번 그 크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며 찬양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모든 기도에 함께 동반되어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이 기도가 모든 기도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의 소원과 문제에 대해선 하나님이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며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또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우리에게 듣기를 원하시는 기도는 바로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이루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저는 단지 그 영광을 전하는 도구로 삼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임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에는 분명히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선이 드러나고 영광이 드러나는 방향으로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삶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일을 확인하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고 계시는 놀라운 기적을 맛보며 누리게 됩니다. 그 믿음에 의해서 신자는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참된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의 길을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51강) 열왕기상 18:41-46 엘리야의 기도
<본문>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 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3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열왕기상 18:41-46)
<설교>
어떤 인생이든 급하고 힘든 일들은 계속 겹치기 마련입니다. 간절히 기도하여 한 가지 일이 해결되어봐야 얼마 안 되어 또 다른 큰일이 생깁니다. 자연히 큰 일이 생길 때만 간헐적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결국 자기 믿음이 삶을 주관하지 못하고 삶에 믿음이 따라가기 바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요동치는 환경과 사건에 따라 그때그때 대처하는 인스턴트 믿음에 불과할 뿐입니다.
기도하는 신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를 하는 이유와 목적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신자는 자신의 필요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도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기도하는 가장 큰 이유와 목적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나님께 도움 받는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도의 본질이자 핵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신자에게 기도하라고 하시고, 또 기도를 응답해주는 이유와 목적이 과연 급하고 어려운 일에서 구원해주는 것만이 전부이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무 탈 없이 잘 지내는 신자에게 어려운 일이 있게 하시고, 기도하면 해결해 주시는, 말 그대로 병 주고 약 주는 꼴이 되지 않습니까? 큰일이 생겨야 기도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런 수준의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심술궂은 신과 밀고 댕기기 시합하는 것이 평생 동안 신앙 생활하는 내용의 전부가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큰일을 겪고 간절히 기도하여 응답 받음으로써 신자의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간다고 단순히 결론지으면 안됩니다. 물론 그것도 소중하고 큰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일이 있으면 기도하고 응답 받는다는 방식으로만 계속 반복된다면 결국 굳어지는 것은, “하나님은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여 어떤 환난에서도 건져 주시는 분” 이라는 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자가 평생 동안 신앙 생활하면서 겪는 것은 기껏 환난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늘었다 줄었다 한 것뿐이지 않겠습니까? 신자가 급한 일이 생겨야만 기도하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기도할 이유가 생겨야 기도할 텐데 평소 때에는 기도할 특별한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기도할 이유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응답해 주지 않을 것을 미리 예상하고 기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는 기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본문의 엘리야의 기도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기도를 강조하는 많은 사람들의 단골 메뉴이기도 합니다. 특히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기도를 말할 때, 본문은 좋은 설교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43절에서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바다를 바라봐도 비가 올 아무런 기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포기하지 않고 사환을 일곱 번씩이나 가게 한 엘리야의 열심히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 이 본문을 인용해서, 응답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면 하나님이 결국 응답 하신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있습니다. 41절을 보면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 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비의 소리가 있다는 것은, 엘리야가 이미 비가 내릴 것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기도할까요? 비가 몰려오다가도 자신이 기도하지 않으면 되돌아 갈 것 같아서 기도한 것입니까? 엘리야는 비가 올 것을 기대하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큰 비가 올 것을 알면서도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 상식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마 6:8절을 보면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기도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야 할 바를 아시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까?
예수님은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기도는 자신의 기도로 필요한 것을 신에게 응답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자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이방인처럼 기도해서 받겠다는 생각은 버리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방인과 같은 사고방식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야 역시 기도해서 응답받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비가 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하고 사환을 일곱 번씩 바다를 보게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지 못한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엘리야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엘리야는 선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선지자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에게도 동일합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말씀을 전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지,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생각도 판단도 없는 기계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있고 깨달음이 있는 인격자로서,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하나님의 편에서 바라본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형편이었기에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엘리야의 기도는 단순히 비가 오게 해서 그동안 가물었던 이스라엘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을 한 것도,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참된 신이라는 것을 증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36절의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라는 내용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엘리야의 모든 일의 목적은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행하고 계심을 이스라엘이 아는 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37절의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봐도 엘리야가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서 주 여호와가 살아계신 참된 하나님이신 것을 이스라엘이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비가 오지 않게 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비가 오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이스라엘이 앎으로써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간섭 안에 있었음을 알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또한 하나님은 자신들에게 함께 하심을 확신함으로써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엘리야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시라는 바른 신 개념 가운데 참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이 하나님이 비를 내리실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게 한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비 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기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하니까 ‘그럼 기도할 필요가 없겠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삶의 모든 목적을 자신에게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는 말씀 앞에서 기도할 이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면서 왜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름대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자기 종들에게 기도를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응답되는 방식으로 세상을 운영해 나가시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자는 기도할 일이 없기 때문이고 기도할 일이 없다는 것은 오직 자기 목적을 위해 살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신자가 자기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산다면 기도할 일은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기도해야 하고 또 신자가 기도하는 것은 신자로서의 자기의 소명을 이루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소명이라고 해서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간단한 예로 자식을 양육해도 자기 자식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긴 자식으로 여기고 그분의 뜻과 계획대로 키우는 것이 소명입니다. 그런 소명 의식에 철저하면 당연히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에게 목적을 두는 삶을 산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도 자기 구원을 위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무엇을 해도 자신의 구원과 연관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신 것도 신자로서 의의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 땅에 증거하라는 것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붙들고 있는 신자는 절대로 개인적인 큰일이 생겨야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지금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일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며 또 그분이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 있다는 확신이 있는데 어찌 그 일을 위해 항상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개인적인 크고도 위급한 일도 그 소명에 비추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기도하지 단순히 그 환난에서 구해달라고만은 기도하지 않는 법입니다. 엘리야 역시 이스라엘에게 비가 내리게 해서 백성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비의 소리가 있음을 알면서도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가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길로 인도하고자 했기 때문에, 비가 오고 안오는 모든 것이 여호와의 일임을 보여주기 위해 비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비가 올 흔적이 없음에도 계속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비를 내리실 것을 알기에 아무런 흔적이 없어도 기도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자신의 모든 삶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면, 자신의 삶이 환난과 어려움에서 나아질 흔적이 전혀 없다고 해도 기도를 포기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조그만 흔적이라도 찾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나의 목적을 앞세운 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사는 신자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52강) 열왕기상 19:1-8 엘리야의 낙심
<본문>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 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향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열왕기상 19:1-8)
<설교>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의 여러 별칭 가운데서 특별히 아브라함이 이름한 “여호와 이레”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뭔가 큰 힘이 되는 이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자가 자신이 힘들고 어려울 때, 또는 자기들이 가는 앞길에 하나님이 모든 장애물을 미리 다 제거하여 붉은 카펫을 깔아 놓고 기다리실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삶의 형통으로 연결하여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이끄실지 일생에 대한 계획을 다 세워놓고 이끌고 계십니다. 우리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가 하나님이 준비하신 계획에 의한 것이란 뜻입니다. 즉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이 알라딘의 램프에 나오는 큰 거인이 되셔서 신자가 가는 길에 있을 모든 불행을 미리 제거하고 형통하고 편안한 삶을 살도록 해주시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인생의 한 치 앞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주 전체뿐 아니라 신자 하나하나의 모든 일생을 알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의 앞날에 좋은 일만 준비해 놓은 것이 아니라 힘든 환난도 함께 준비해 놓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그 준비된 고난 뒤에 또 다른 하나님의 일을 준비해 놓으시고 계실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고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시각에는 100% 절망과 실패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그 뒤의 역전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100% 형통과 성공처럼 보일지라도 그 뒤의 실패도 알고 계십니다. 아니 일부러 그런 실패를 겪게 하십니다. 물론 그 실패 뒤에는 또 다른 하나님만의 일을 준비해 놓고 계시는 것도 너무나 당연합니다.
따라서 “여호와 이레”를 신자가 기도하면 어려운 일이 미리 술술 풀려가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단순히 해석하고 적용하면 결국 신자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준비해 주신다고 했는데 왜 내 앞날에는 이런 불행만 일어나는가? 그것도 내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라는 의심을 떨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엘리야도 이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850명과의 갈멜산 대결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둡니다. 엘리야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불을 내리심으로 물에 젖은 단과 제물을 태워 버리고 도랑의 물까지 마르게 합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명해서 바알 선지자를 죽이도록 합니다.
이러한 엘리야의 승리 뒤에 돌아올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아합은 엘리야의 기도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심을 믿게 되고, 백성들 또한 정신을 차려서 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엘리야는 이스라엘 안에서 참된 선지자로 존경받는 결과를 예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결과는 전혀 예상 밖으로 흘러가고 맙니다.
1절을 보면 아합이 자기 아내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행한 일과 바알 선지자를 모두 죽인 일을 말합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사자를 보내서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2절)는 말을 전하게 합니다.
어쩌면 이세벨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엘리야에 의해서 주도될 것을 염려했는지도 모릅니다. 엘리야의 능력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엘리야에게 향하게 되면, 결국 아합과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엘리야는 이세벨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세벨의 협박에 대한 엘리야의 반응이 참으로 뜻밖입니다. 지금까지 본 엘리야는 능력의 선지자였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가루와 기름이 다하지 않는 기적을 베풀었고,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갈멜산에서의 하나님의 응답은 누가 봐도 하나님이 엘리야와 함께 하심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능력을 체험한 엘리야라면, 이세벨의 어떤 협박에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담대하게 이세벨과 맞서는 것이 선지자 엘리야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야는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3,4절)는 반응을 보일 뿐입니다.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가 왜 이렇게 쉽게 도망해 버리고,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할 정도로 모든 소망을 잃어버리고 낙심한 상태로 전락해 버리는 것일까요? 과연 이세벨의 협박이 두려워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요? 하지만 단순히 이세벨의 협박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라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본 형편은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세벨의 협박으로 인한 백성들의 반응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이 엘리야 개인을 향한 감정이라면 하루의 여유를 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당장 군사를 보내서 엘리야를 잡아들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세벨은 사자를 보내서 내일 이맘때에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마치 엘리야더러 죽기 싫으면 빨리 도망하라고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세벨이 이처럼 하루의 여유를 둔 것은, 엘리야를 배려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협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어집니다. 만약 엘리야를 당장에 잡아 죽였다면, 당시 하나님의 응답으로 인해 백성들이 엘리야를 선지자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백성들의 반발을 일으켰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의 여유를 둠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엘리야를 추종했을 때 자신에게 돌아 올 위험을 생각하게 했을 것이고, 결국 백성들로 하여금 엘리야에게 등을 돌리도록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10,14절의 내용에서 드러납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고 있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떡과 물을 준비하여 먹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길을 떠나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묻자 엘리야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10절)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반복된 물음에 대해 14절에서도 같은 답을 합니다.
엘리야의 답을 보면 이세벨의 위협을 피해서 도망쳤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으로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엘리야가 도망을 쳐서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할 정도로 낙심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불이 내려와 단을 태웠을 때 백성들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18:39)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말한 대로 바알 선지자들을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고 그들을 죽이는 일에 동참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백성들은 완전히 하나님을 믿게 되고 엘리야 편에 선 것처럼 보여집니다.
사실 엘리야도 백성들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상태였지만, 불을 내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목격하고,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변화되어서 아합의 악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신앙의 개혁을 일으켜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는 바른 신앙의 길을 갈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자, 엘리야와 함께 하면 자신들에게도 위험이 닥쳐올 것을 생각하고 엘리야에게 등을 돌려 버리는 백성들에 대해 크게 낙심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러한 형편을 탄식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다’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로뎀 나무에 앉아서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의 탄식과 낙심과 절망은 갈멜산에서의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백성들에게 아무런 열매도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이런 반응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도 얼마든지 경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결과를 미리 예상합니다. 기도를 하면 기도에 대한 결과를 예상하기도 하고, 신앙에 대한 결과를 예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나의 삶을 형통케 하실 것이라는 기대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기도를 했으니 하나님이 응답해 주지 않겠는가라는 기대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기대하는 열매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대개 실망하고 낙심하게 되며 믿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이것은 목사에게도 강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많은 목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기대하게 됩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신자들이 말씀에 의해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0년 20년 말씀을 전해도 전혀 달라짐이 없을 때, 오히려 목사에 대한 반발을 감지할 때, ‘내가 지금까지 바른 말씀만 전파한 결과가 이것인가? 이럴 바에야 말씀을 전파할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절망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엘리야는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고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내 조상들도 백성들의 마음을 바꾸지를 못했는데 나라고 별 수 있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결국 엘리야는 자신이 선지자로 계속 일해야 할 이유를 잃어버림으로서 차라리 지금 죽는 것이 낫다는 자포자기에 빠진 것입니다. 엘리야의 낙심은 갈멜산의 기적이 백성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 무너진 결과입니다. 이것이 엘리야의 오해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 오해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기대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신자가 신앙의 문제로 인해서 낙심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기대를 갖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신앙이 자신에게 가져올 결과라든가, 자신의 열심이 가져올 결과를 자기 나름대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때 엘리야와 같은 낙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있는 것입니까?’라고 항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낙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모든 기대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결과가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일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천사가 엘리야에게 떡과 물을 주는 것은, 엘리야를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산에까지 갈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배를 부르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원하는 위대한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 일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낙심하고 주저 않은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산에 갈 만한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지금껏 하나님이 주시는 그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사명은 놀라운 기적을 동원해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공급받으며 말씀 앞에 인도되고 있음을 증거 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이게 놀라운 기적에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홀히 여기는 말씀에 함께 하십니다. 평생을 신앙생활 했는데 형편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계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앞에 나온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입니다. 이것을 믿는 신자에게 낙심은 있을 수 없습니다.
(53강) 열왕기상 19:9-18 세미한 소리
<본문>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열왕기상 19:9-18)
<설교>
신자가 성경을 잘 안 읽는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라면 성경의 내용들이 자신의 현실 세계와는 동떨어진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성경의 내용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의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다고 해도 결국 삶과는 멀어진 채 단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의 대상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백성들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얘기가 성경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성경을 제대로 본다면 필히 지금 자신에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성경을 보면서도 자신의 현실에서 하나님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고 원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우리를 하나님이 안계신 것 같은 큰 낙심으로 치닫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렸던 엘리야가 바로 그렇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의 대결에서 바알 선지자들에게 멋있는 승리를 얻었으면서도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할 정도로 낙심에 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단에 불을 내리시고, 가물었던 땅에 비까지 내리셨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이세벨의 협박으로 인해 도망을 치게 되고 결국 큰 낙심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야의 낙심은 단순히 이세벨의 협박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잠깐 언급했지만, 오늘 본문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낙심에 빠진 엘리야의 문제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만을 구하는 엘리야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구운 떡과 한 병 물을 주면서 일어나 길을 가도록 합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호렙에 이르러 그곳 굴에 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나타난 하나님께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9절)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10절)라고 대답합니다.
엘리야의 대답을 보면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백성을 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갈멜산에서 하나님이 참된 여호와이심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의 언약을 버리고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하는 백성들에 대해 엘리야가 크게 실망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엘리야의 낙심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하고 기대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11,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술 정도의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그 모두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이 크고 기이한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즉 베드로처럼 한번의 설교에 수천 명이 회개하는 것과 같은 것을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우리에게서도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엘리야 역시 하나님의 일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 가운데 계시지 않은 하나님으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오늘날 역시 하나님의 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 역시도 그처럼 위대하고 세상이 놀랄만한 일로 나타날 것임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평범하다고 여겨지는 것에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도 하나님의 일하심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할 때, 즉 큰 낙심에 빠져서 고민하고 있을 때 천사가 다가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고민과 근심과 걱정을 못 본 척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민하고 걱정하는 모든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세밀하게 살피시면서 찾아와 해결을 해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문제 해결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과 결과에 묶어 놓아서는 안됩니다. 내가 기대하는 결과대로 해결되기를 고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시는가를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큰 문제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하는 고집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고집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어려움에 처해 있고 고민과 근심이 계속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일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이 내 문제를 위해 일하지 않으시고 가만 계신 것처럼 여겨질 뿐입니다. 그것이 신자를 더욱 깊은 실망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식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이해하고 자신의 문제를 바라본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면서 힘을 주시고 나에게 일하고 계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고 또 보이지도 않는 세미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세미한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오시며 그 심령에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의 완악한 마음을 무너뜨리시고 고치심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주면 이스라엘이 마음을 돌이킬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또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완악한 마음이 기적의 사건을 목격했다고 해서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엘리야는 몰랐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은 세미한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일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라고 말하는 것이 그런 의미입니다. 자신이 여호와를 위해 아주 열심히 일했으나 왜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인가라는 뜻입니다. 즉 엘리야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결과를 맺게 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열심이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신만 남았다고 여겼습니다. 자신의 열심을 기준으로 해서 돌아볼 때 남은 자는 자기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18절)고 말씀합니다. 이들 칠천 명이 하나님의 세미한 말씀으로 일하신 결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을 세상에 남기시는 하나님의 일은 말씀으로 되어집니다. 세상을 놀라게 하고 세상을 뒤집어엎는 엄청난 기적의 사건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혹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께 굴복하는 자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힘에 대한 굴복일 뿐입니다. 즉 심령이 고침 받아서 그 마음이 하나님께 돌이킴 받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세미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기 위해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일치된 내용으로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고민과 근심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는 것은, 세미한 말씀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면서 우리 마음을 고치시고 돌이키는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한시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열심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특심한 열심을 가졌다고 해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세미한 말씀으로 이루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께 사용되는 도구일 뿐입니다. 13절을 보면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다시 반복해서 묻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10절과 동일한 대답을 합니다(14절). 이것은 아직 엘리야의 생각이 바뀌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여전히 자신의 열심이 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15,16절). 이스라엘이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사엘과 예후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때려서라도 말씀을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기필코 이루심으로 신자는 어떤 경우에도 실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만 의지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임을 믿고, 다만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만 충실하면 됩니다.
(54강) 열왕기상 19:19-21 엘리사의 새로운 시작
<본문>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열왕기상 19:19-21)
<설교>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군가를 택하시고 신자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신자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이제는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자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았다고 해도 그 뜻이 내 뜻과 전혀 다를 때 쉽게 내 뜻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부르신 신자로서의 길을 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한 자락이라도 그 속에 남아 있다면 그 마음에는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가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피어오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소원이 없다는 것은 평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 부르신 신자로서의 책임과 사명에 대해서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신자로서의 위치를 재확인해 보고 우리 자신들이 그 위치로부터 얼마나 멀어진 채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봄으로서의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내용은 엘리사가 엘리야로부터 부름을 받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먼저 생각할 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15,1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지시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엘리야가 엘리사를 선지자로 부를 때 기름을 부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엘리사만이 아니라 하사엘이나 예후에게도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입니까? 그러나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기름을 부으라는 말씀을 실제로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우고 선지자가 되게 하라는 뜻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하사엘은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우는 이스라엘과는 상관이 없는 이방나라의 왕입니다. 즉 하사엘이 왕이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선지자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름을 부으라는 것은 실제로 그런 의식을 행해라는 의미는 아니었고 엘리야도 그것을 알았기에 엘리사를 선지자로 부르면서 기름을 붓는 의식을 행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구별하여 세우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사람이나 물체든 하나님께 봉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의미의 표시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사엘과 예후, 그리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신 것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때리는 막대기로 쓰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불신자라고 해서 하나님의 도구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하사엘을 하나님의 도구로 세우신 것처럼 이방인 역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만 불신자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뿐입니다.
하사엘이 나중에 이스라엘을 공격 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스라엘을 치는 막대기로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스라엘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칠 수 있는 힘과 기회를 하나님이 주지 않았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하사엘을 이스라엘을 때리는 막대기로 사용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칠 수 있는 힘과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비록 하사엘은 전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사엘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신자는 하나님께 사용되면서도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이나 자신이 계획한 일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가능성이 있게 된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다릅니다. 자신이 계획한 것을 이룰 수 있는 힘과 기회와 가능성이 주어졌다면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갖추어 주신 것으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갖추어 주신 것도 나 개인의 풍족하고 편안한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함임을 잊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과 형편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라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만났을 때 엘리사는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열 두 겨리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았다는 것은, 열 두 겨리의 소를 이용해서 열 두 고랑을 동시에 갈 정도로 밭이 넓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엘리사가 열 두 째 겨리와 함께 있었다는 것은 나머지 열 한 겨리는 종을 이용해서 밭을 갈았음을 뜻합니다. 사실 열 두 겨리의 소를 엘리사 혼자 부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엘리사는 무척 부자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엘리사에게 엘리야가 겉옷을 던집니다. 선지자의 겉옷을 입혀준다는 것은 선지자의 사명이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이데 대한 엘리사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20-21절을 보면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목사와 같은 전문 사역자들이나 신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사명을 받는다는 것은 모든 신자에게 해당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기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나님이 부르신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 신자도 하나님의 부름에 대해 엘리사와 같은 반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 1:15,16절에서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 ….”라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는 것과 하나님이 부르신 뜻에 대해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무엇에도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에게는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부르신 뜻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내어 놓고 순종하고자 해야 합니다. 이것이 비로소 신자로 출발하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대해 엘리사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버리고 순종합니다. 부모에게 입 맞추게 해달라는 것은, 부모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마지막 이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 한 겨리를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먹게 하였다는 것은, 예전의 삶과 연관된 것들로부터 단절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전의 삶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를 뜻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로서의 인생이 고달프고 힘들다고 해도 하나님이 입혀준 옷은 벗어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소를 잡고 기구를 불사른 것은 지금껏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은 벗어 던지고 하나님이 입혀주신 옷을 입은 것입니다. 이러한 엘리사처럼 신자 되었다는 것도 예전의 옷은 벗어 던지고 하나님이 입혀주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전의 옷을 벗어 던진 적이 없으니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옷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고 살아가는 일에 급급할 뿐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으로 돌아갈 다리가 무너졌음을 뜻합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포기하고 세상으로 되돌아가느니 차라리 지금 죽기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보다 주님의 은혜와 인자하심을 더 사랑하게 되었기에 이런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소를 잡고 기구를 태워 버린 것은, 예전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부러워 할 것이 없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소를 몰고 밭을 가는 생활을 할 때는 자신보다 더 많은 밭을 가진 자에 대해서, 더 많은 소를 가진 자에 대해서 부러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밭과 소를 소유해야겠다는 꿈과 소망을 갖고 살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와 기구를 없애버림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엘리사에게는 더 이상 예전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부러워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신자가 예전의 옷을 벗어 새로운 옷을 입었다면, 예전에 입었던 옷에 대해서는 미련을 둘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입혀주신 새로운 옷이 더 귀하고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새로운 옷으로 인해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가 이러한 삶의 맛을 누리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라고 하면서도 삶은 여전히 예전의 방식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신자로서의 삶을 나타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신자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주어지든 또한 누구에 대해서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당당한 인생의 모습으로 증거되어야 합니다. 어떤 환란과 어려움도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과 감사를 흔들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의 권세가 함께 함을 믿는 신자라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사가 열 두 겨리의 소를 모두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살아가는 선지자의 삶이 더 가치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밭을 갈고 많은 소를 부리는 부의 인생보다는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인생이 귀하다는 것을 알았던 엘리사처럼, 신자는 세상에서 부를 누리는 인생보다도 하나님의 부름을 입은 신자로 살아가는 인생이 더 귀함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이러한 내용들이 우리의 가슴에 파고들지 못한다면 신자로 살아가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는 신자라면 자연히 그 소원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부를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신 신자로 살기를 더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소원하면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 소원이 곧 하나님의 소원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55강) 열왕기상 20:13-21 여호와인줄 알리라
<본문>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나아가서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저희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가로되 누구로 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가로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 아합이 이에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을 계수하니 이백삼십 이인이요 그 외에 모든 백성 곧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을 계수하니 칠천 인이더라 저희가 오정에 나가니 벤하닷은 장막에서 돕는 왕 삼십 이인으로 더불어 마시고 취한 중이라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이 먼저 나갔더라 벤하닷이 탐지군을 보내었더니 저희가 회보하여 가로되 사마리아에서 사람들이 나오더이다 하매 저가 이르되 화친하러 나올지라도 사로잡고 싸우러 나올지라도 사로잡으라 하니라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과 저희를 좇는 군대들이 성에서 나가서 각각 적군을 쳐 죽이매 아람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이 쫓으니 아람 왕 벤하닷이 말을 타고 마병으로 더불어 도망하여 면하니라 이스라엘 왕이 나가서 말과 병거를 치고 또 아람 사람을 쳐서 크게 도륙하였더라(열왕기상 20:13-21)
<설교>
루터의 일화처럼 신자가 비록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지만, 많은 경우 살아계신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대접하고 있지를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어려운 환경과 상황으로 인해서 마치 이제는 살 소망이 없는 사람처럼 낙심해 버리는 경우가 많이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십니다. 힘을 내십시오”라는 말들이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처음에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의지해 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고 고난은 계속되어질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단지 기독교의 교리와 이론으로만 굳어지게 될 뿐 믿음으로부터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라는 말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어려움에 있는 신자를 외면한 때문도 아니라 문제는 신자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일하심과 함께 하심에 대해 오해를 하거나 다른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해결책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수정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아합이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1절을 보면 “아람 왕 벤하닷이 그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 이인이 저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치며”라고 말하는 데, 벤하닷에게 왕 삼십 이인이 함께 있다는 것은 당시 아랍의 속국이었던 32개의 작은 나라를 전쟁에 함께 끌여 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벤하닷이 대군을 이끌고 침공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벤하닷이 아합에게 사자를 보내서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처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2절)고 하자 아합은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같이 나와 나의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3절)고 말함으로써 벤하닷에 대한 완전한 굴복을 보여줍니다. 아합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갈멜산 대결에서 바알과 아세라 신의 무능력을 목격한지라 지금껏 믿어왔던 바알과 아세라 신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비록 엘리야의 단에 불을 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하고, 엘리야가 기도하자 3년 반 동안 비가 없다가 비가 내리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아합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아합이 벤하닷의 대군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벤하닷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원하는 모든 것을 바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아합이 철저하게 굴복하는 것을 본 벤하닷은 다시 사자를 보내어 “내일 이맘때에 내가 내 신복을 네게 보내리니 저희가 네 집과 네 신복의 집을 수탐하여 무릇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 한지라”(6절)고 말합니다. 수하를 보내서 아합에게 좋은 것 모두를 직접 가져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자기들의 속국으로 삼겠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벤하닷의 이러한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던 아합은 나라의 장로들을 불러 의논을 합니다. 그리고 장로와 백성들은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지도 마옵소서”(8절)라고 말합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합은 장로와 백성들의 의견을 좇아서 벤하닷의 사자를 불러 “너희는 내 주 왕께 고하기를 왕이 처음에 보내어 종에게 구하신 것은 내가 다 그대로 하려니와 이것은 내가 할 수 없나이다 하라”(9절)고 말합니다.
아합의 말을 들은 벤하닷은 “사마리아의 부스러진 것이 나를 좇는 백성의 무리의 손에 채우기에 족할 것 같으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10절)고 협박합니다. 이 말은 사마리아 성을 무너뜨려서 부스러기를 만든 후에 벤하닷의 군사가 한 줌 씩 집어도 모자랑 정도로 사마리아 성은 조그맣고, 벤하닷의 군대는 대군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 주먹거리도 안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말에 대해 아합도 화를 내어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같이 자랑치 못할 것이라 하라”(11절)는 말로 응수를 합니다. 싸움을 해보지도 않고, 싸움을 끝내고 갑옷을 벗는 사람처럼 이겼다고 장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을 들은 벤하닷은 이스라엘을 공격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한 선지자가 아합에게 가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저희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나이다”(13절)는 말을 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합은 악한 왕인데 왜 하나님이 아합을 도우시는가? 라는 의문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분명 아합은 멸망을 받아야 할 악한 왕입니다. 그러한 아합을 돌이키시기 위해서 아합을 도우실까요?
그러면 결국 아합은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일은 실패한 것입니까? 사실 하나님이 선지자를 아합에게 보내신 것은 아합을 돕기 위함이기보다는 13절의 말씀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아합의 완악함을 드러내심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완악함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벤하닷을 아합의 손에 붙이시겠다고 하시자 아합은 “누구로 하시리이까”(14절)라고 묻습니다.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이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하고, 아합이 먼저 싸움을 시작할 것을 말하자 아합은 각 도에서 232명의 방백의 소년들을 모으게 됩니다. 그 외에 칠천 명의 군사가 있었지만 어쨌든 그 숫자로는 벤하닷의 대군과 싸운다는 것은 무모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무시했던 벤하닷은 결국 도망을 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승리를 경험하게 하신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이스라엘의 신이 곧 여호와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에는 ‘하나님이 언약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출 6:2-7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주기로 언약하셨는데, 이제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는 애굽과 싸우시고 승리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심으로써 여호와인 줄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라는 이름은 단순히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약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이름인 것입니다. 바로 이 여호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아합을 도우시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승리는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싸우시는 여호와라는 것을 증거하는 승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승리한 것처럼, 신자 역시 날마다 승리하는 사람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에는 동의하면서도, 사실 승리자로서의 기쁨을 맛보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날마다 승리하는 사람이 신자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항상 나약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신자는 하나님이 도우시기 때문에 승리한다고 하면서도 ‘나는 날마다 승리하며 살고 있다’는 말을 자신있게 하지를 못하고, 승리의 기쁨도 누리지를 못하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알게 하신 ‘여호와’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부르고 있지만, 정작 여호와 하나님은 알지 못하고 만나지를 못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자의 승리를,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건짐을 받고 자신의 소망을 기도로써 크게 이뤄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아가 도덕적으로 죄를 짓지 않고 항상 기도하고 말씀 보면서 영적으로 평강과 위로를 얻는 것을 승리로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신자 자신이 영육 간에 강성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을 신자의 승리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승리를 이러한 방향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자신의 삶에서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움에서 건짐 받기는커녕 어려움이 계속될 때 하나님의 승리를 맛볼 수 없는 것이고 결국 낙심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열심히 기도를 해도 나아지는 것이 없으면 낙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영적인 평강과 위로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고후 2:1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는 말을 합니다. 즉 사도 바울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를 경험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형편을 보면 승리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쫓기고 매 맞고 옥에 갇힌 것이 바울의 일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가 말한 승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승리와는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승리는 자신의 승리를 의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232명의 소년들을 앞세워서 벤하닷의 대군을 물리쳤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신 결과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승리가 아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죄와 사단과 죽음의 권세를 이긴 바로 그 승리를 말한 것입니다. 복음 안에 들어온 자가 참 생명을 얻음으로써 죽음을 이겨내는 승리인 것입니다. 그 승리가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 뿐 아니라 바울 자신과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를 자신이 싸워서 죄에서 건져내고 참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와 싸우심으로써 승리하신 결과임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참 생명을 얻었다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사단과 싸워서 승리함으로 사단을 뿌리치고 예수님을 택한 결과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죽음의 권세와 싸우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참 생명을 얻은 자로 굳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심으로써 날마다 이 승리를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약한 자 같으나 강한 자이고, 지는 자 같으나 이기는 자입니다. 때문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기는커녕, 세상에 아무것도 증거할 것이 없는 무력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56강) 열왕기상 20:31-43 여호와의 말씀
<본문>
그 신복들이 저에게 고하되 우리가 들은즉 이스라엘 집의 왕들은 인자한 왕이라 하니 만일 우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 이스라엘 왕에게로 나아가면 저가 혹시 왕의 생명을 살리리이다 하고 저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러 가로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나의 생명을 살려주옵소서 하더이다 아합이 가로되 저가 오히려 살았느냐 저는 나의 형제니라 그 사람들이 징조로 여기고 그 말을 얼른 받아 대답하여 가로되 벤하닷은 왕의 형제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는 가서 저를 인도하여 오라 벤하닷이 이에 왕에게 나아오니 왕이 저를 병거에 올린지라 벤하닷이 왕께 고하되 내 부친이 당신의 부친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 보내리이다 또 나의 부친이 사마리아에서 만든 것 같이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아합이 가로되 내가 이 약조로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약조하고 저를 놓았더라 선지자의 무리중 한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 동무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치기를 싫어하는지라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나를 떠나갈 때에 사자가 너를 죽이리라 그 사람이 저의 곁을 떠나가더니 사자가 그를 만나 죽였더라 저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 가로되 너는 나를 치라 하매 그 사람이 저를 치되 상하도록 친지라 선지자가 가서 수건으로 그 눈을 가리워 변형하고 길 가에서 왕을 기다리다가 왕이 지나갈 때에 소리질러 왕을 불러 가로되 종이 전장 가운데 나갔더니 한 사람이 돌이켜 어떤 사람을 끌고 내게로 와서 말하기를 이 사람을 지키라 만일 저를 잃어버리면 네 생명으로 저의 생명을 대신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은 한 달란트를 내어야 하리라 하였거늘 종이 이리 저리 일 볼 동안에 저가 없어졌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 저가 급히 그 눈에 가리운 수건을 벗으니 이스라엘 왕이 저는 선지자 중 한 사람인 줄 알아 본지라 저가 왕께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 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니라(열왕기상 20:31-43)
<설교>
신자는 주의 도를 좇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도, 즉 주의 말씀에 대해서는 끝까지 지키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하며, 주의 도로 행하는 것을 즐거워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고, 탐욕에서 멀어지게 하고, 허탄한 것을 보지 않게 하고, 우리의 심령을 소성케 해줍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신이 이런 존재로 바꾸어지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면 자연히 그 마음은 말씀을 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순히 말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성경공부하고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곧 푯대임을 알고 오직 말씀을 좇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생명의 길을 달려가는 것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의 관심이 말씀에 의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바꾸어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세상이 추구하는 사람으로 되는 것에 있게 된다면 자연히 그 마음은 말씀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 역시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성경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했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삶의 전부로 여긴다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사랑하는 자로 살기를 힘써야 할 것이고, 자신의 불의함으로 인해서 사랑이 아닌 미움이 드러난다면 애통해 하고 회개하면서 주의 도로 자신을 가르치며 주님의 사랑을 배워서 사랑하는 자로 바꾸어 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것이 말씀에 마음에 두고 살며, 말씀을 좇고 순종하고자 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은 옳고 좋은 교훈으로 여기면서도 정작 삶에서는 이 말씀을 잊은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신자와의 관계에서, 또 여러 가지 일에서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잊은 채, 다만 자신의 옛 본성만을 나타냄으로써 다툼과 마음 상함만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으로 끝나버립니다. 이런 것들이 말씀을 좇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이 여전히 자기 생각과 감정대로 살아가는 옛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고, 결국 죽을 자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본문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과 1차 전쟁에서 패했던 아람 군대가 다시 2차 전쟁을 하였으나 역시 크게 패하고 벤하닷은 성읍 한 골방에 숨어 지내는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숨어 지낼 수 없는지라 신하들이 벤하닷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신복들이 저에게 고하되 우리가 들은즉 이스라엘 집의 왕들은 인자한 왕이라 하니 만일 우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 이스라엘 왕에게로 나아가면 저가 혹시 왕의 생명을 살리리이다 하고”(31절) 즉 이스라엘 집의 왕들은 인자하다고 하니 왕을 찾아가서 살려달라고 해보자는 것입니다.
굵은 베로 허리를 묶는 것은 심히 애통해 하고 슬퍼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는 것은, 그 테두리로 목매어 죽임을 당해도 좋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것은 죽어 마땅한 죄를 범한 것임을 자복하는 모습을 하고 이스라엘의 왕을 찾아가면 인자하다고 하는 왕이 설마 자신들을 죽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고 움직임으로써 살아날 방도를 모색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이스라엘을 침략한 것을 진심으로 죽어 마땅한 죄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기 위한 방편으로 꾸며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아합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찾아와서 “나의 생명을 살려주옵소서”라고 간청하는 벤하닷의 말을 듣고 “저가 오히려 살았느냐 저는 나의 형제니라”(32절)고 말합니다.
머리에 테두리를 이고서 죽어 마땅함을 보이는 벤하닷이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은 머리에 테두리를 이고 있는 행위는 살기 위한 거짓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합은 그들의 속셈을 읽지 못하고 벤하닷을 형제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고 벤하닷을 인도하여 자신의 병거에 태웁니다. 벤하닷의 죄를 묻지 않고 친구로, 형제로 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벤하닷은 아합의 환심을 더 얻기 위해서 자기의 아버지 벤하닷 1세가 오므리 왕에게 빼앗은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을 다 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벤하닷 1세가 이스라엘을 치고 사마리아에 거리를 세웠던 것 같이 아합도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다가 거리를 만들라고 제안을 합니다.
남의 나라 수도에다가 거리를 만든다는 것은 그 나라를 속국으로 삼아 정치적으로 지배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이제부터 아람은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는 속국임을 인정하는 말인 것입니다. 아합은 벤하닷의 이런 조약을 거절하지 않고 약조를 맺고 벤하닷을 놓아 주게 됩니다. 벤하닷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합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벤하닷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아합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무시한 채, 자신의 유리함과 감정을 따라 움직이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선지자의 한 행동을 들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35절을 보면 “선지자의 무리 중 한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 동무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치기를 싫어하는지라”고 말합니다. 선지자 중 한 사람이 다른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니 너는 나를 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치기를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앞세운 것입니다.
사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느닷없이 자신을 치라고 하는 말을 어떻게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친구를 말입니다. 그래서 못 치겠다고 거절했는데 그것이 죽을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기를 거절한 선지자는 36절의 내용대로 사자를 만나 죽게 됩니다. 반면에 다른 선지자에게 동일하게 여호와의 말씀이니 나를 치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상하도록 쳤다고 말합니다. 과연 어느 것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이 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선지자는 수건으로 눈을 가려서 자신을 알아볼 수 없도록 변장을 하고, 아합을 기다리다가 왕이 지나갈 때 불러서 “종이 전장 가운데 나갔더니 한 사람이 돌이켜 어떤 사람을 끌고 내게로 와서 말하기를 이 사람을 지키라 만일 저를 잃어버리면 네 생명으로 저의 생명을 대신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은 한 달란트를 내어야 하리라 하였거늘 종이 이리저리 일 볼 동안에 저가 없어졌나이다”라는 비유의 말을 합니다. 그러자 아합은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는 답을 내립니다.
포로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고,만약 포로를 잃어버리면 네 생명으로 대신하거나 은 한 달란트를 내어야 한다고 약조하였으면 그대로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합의 말을 들은 선지자는 하나님이 맡긴 포로인 벤하닷을 놓아준 아합에게 “저가 왕께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42절)는 책망의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신자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것이란 사실입니다.
어찌 보면 아합이 벤하닷을 살려준 것은, 세상을 향해서 이스라엘의 인자함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서 그러한 인자함을 보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대세를 좇는 것도 아니고, 상황에 따라 변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살피면서 말씀에만 순종하는 백성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람 나라와의 전쟁을 통해서 아합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벤하닷에게 승리하게 하심으로써 아람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싸움의 대상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승리에 도취되어서 자신에게 굴복하는 벤하닷에게 거들먹거리면서 그를 살려줌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타협하지 말아야 하고 싸워야 할 대상에 대한 분명한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한 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고 있던 사단의 권세와 싸우시고 승리하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승리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자신을 붙들었던 사단의 권세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며 살아가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에 의해 멸망 받을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그 어떤 타협도 하지 않은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가 하나님의 싸우심과 승리로 말미암아 자신이 사단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국 사단의 세력을 싸움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신자로 하여금 죄에 대한 타협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버립니다. 아합은 벤하닷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패배한 사람으로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승리자라는 자리에서 관대함을 베풀어서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이것이 아합이 벤하닷의 목숨을 대신해야 하는 이유였습니다. 신자는 자신도 세상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주변 상황과 자신의 감정에 붙들려서 행동할 수밖에 없고,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것 보다는 주변 상황과 자신의 감정에 붙들려서 행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벤하닷이 아합에게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아합을 추켜세움으로써 자신이 살아날 방도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벤하닷을 하나님의 멸망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아합은 자신의 이름을 높일 수 있는 조건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들이 벤하닷과 같은 유혹에 빠져서 아합의 길로 가고 있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 이름을 높이고, 자신을 자랑하고, 내세울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은 죄의 유혹일 뿐입니다. 그리고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 생각 없이 자기 이름을 높이는 길로 가버릴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사망에서 건져 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길로 인도 받는 신자의 싸움의 대상은 십자가의 길이 아닌 모든 것들입니다. 우리의 승리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아닌 내 이름을 높이고자 하고, 나의 관대함과 인자함을 보이고자 하고, 자신의 업적을 쌓고자 하는 모든 것이 십자가의 길에 있는 신자의 대적입니다.
이러한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의 대적의 본질을 알 수 없게 되고, 싸움의 대상도 알 수 없게 됨으로써 주어지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이득과 이름을 위해 유익한 쪽으로 선택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 채, 죄를 형제로 여겨버리는 무지한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길을 나 또한 그대로 좇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에 의해 사망에서 건짐 받은 자로서 말씀을 좇는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죄를 대적함으로써 무엇이 멸망의 대상인가를 증거할 자로 부름 받았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잊은 채 주어진 상황을 좇아 자신을 위해 살아간다면 아합의 길과 다를 바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57강) 열왕기상 21:1-16 나봇의 포도원
<본문>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 왕 아합의 궁에서 가깝더니 아합이 나봇에게 일러 가로되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찌로다 하니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업을 왕께 줄 수 없다 함을 인하여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궁으로 돌아와서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를 아니하니 그 아내 이세벨이 저에게 나아와 가로되 왕의 마음에 무엇을 근심하여 식사를 아니하나이까 왕이 이르되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저가 대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않겠노라 함을 인함이로라 그 아내 이세벨이 저에게 이르되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쳐서 그 성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인들에게 보내니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힌 후에 비류 두 사람을 그 앞에 마주 앉히고 저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저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라 하였더라 그 성 사람 곧 그 성에 사는 장로와 귀인들이 이세벨의 분부 곧 저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대로 하여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 때에 비류 두 사람이 들어와서 그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거를 지어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저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고 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포도원을 취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아합이 나봇의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 (열왕기상 21:1-16)
<설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봇이 이런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봇은 아합의 궁에서 가까운 거리에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을 아합이 탐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갖기 위해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2절) 아합의 제안을 살펴보면, 아합은 어쨌든 정당한 방법으로 포도원을 구입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권력으로 강제로 빼앗을 수도 있었겠지만, 나봇의 포도원보다 더 좋은 포도원을 주거나 아니면 합당한 값을 주겠다고 한 것을 보면 백성을 압제하는 포학한 심성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봇은 아합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거절의 이유는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찌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열조, 즉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업을 남에게 파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신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25:23절을 보면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는 규례가 있습니다. 이처럼 나봇은 하나님이 토지를 사고파는 행위를 금해 놓으신 규례를 들어서 포도원을 팔 수 없다고 거절한 것입니다.
나봇이 아합의 요청을 거절한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일단 아합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권력자의 요청을 누가 감히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아합은 거저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당한 보상을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잘만 하면 지금의 포도원의 가치보다 훨씬 높은 보상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즉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봇이 하나님의 규례를 내세워서 아합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리는 것은, 왕의 권력보다 일순간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나봇에게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나봇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힘은 왕의 권력도 돈의 힘도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나봇의 이러한 반응을 나봇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시각에서 보지 않는다면 나봇의 행동은 어리석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아합이 강제로 빼앗겠다는 것도 아니고 보상을 해주겠다고 하는데 아합의 요청을 들어주면 왕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또 많은 보상도 받을 수가 있으니 일석 이조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기회를 놓치는 나봇이 조금은 어리석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나봇과 같은 믿음의 시각에서 생각한다면, 나봇의 행동이야 말로 정당한 것이고 나 또한 나봇과 같은 믿음이 있기를 소원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과연 여러분은 어느 쪽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나봇이 말한 여호와의 규례, 즉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라는 규례가 문자 그대로 지금도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규례가 폐지된 것도 아닙니다. 토지를 팔지 말라는 규례가 문자대로 적용되는 것도 아니고 폐지된 것도 아니라면 과연 이 규례는 지금의 신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규례대로 산다는 것을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영영히 팔지 말라고 말씀하신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후에 그들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이스라엘 지파에게 분배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소유하게 된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비록 땅을 소유하긴 했지만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했고,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존하고 있음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땅에 거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이스라엘의 정신이었습니다. 이런 의미로 세우신 규례가 토지를 팔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든 토지를 판다면 그것은 토지를 자신의 소유로 여긴다는 뜻이 됩니다. 토지를 자기 소유로 여긴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 생존하고 있음을 잊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이스라엘에게서 끊어질 악한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생존하는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누가 누구의 주인이 되고, 지배자가 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토지를 팔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안에 종이 발생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해져서 부득이 토지를 팔아야 하고, 또는 남의 종이 되어야 하는 일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희년이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희년이 되면 토지를 산 사람은 원래 주인에게 모두 둘려주도록 하시고, 종에게는 자유를 주도록 하심으로써 결국 이스라엘 안에는 주인도 지배자도 없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주인이시고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조상의 유업을 남에게 팔지 않는 것은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참된 주인이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다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나그네 인생임을 고백하는 신앙이 조상의 유업을 팔지 않는 것으로 증거되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아합이 왕의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의 것을 강제로 빼앗지 않고 정당한 보상을 하고자 하는 것만 생각한다면 아합도 꽤 괜찮은 왕으로 비춰 질 수 있겠지만 신앙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역시 악한 왕이라는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거하는 이스라엘의 정신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봇이 거절하자 아합은 근심하고 답답하여 궁으로 돌아와서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를 아니하였다고 합니다(4절). 아마 아합은 나봇의 거절에 의해서 왕으로서의 자존심이 크게 상한 것 같습니다. 나봇의 거절은 하나님의 법을 내세운 정당한 것이었기 때문에 아합이 나봇에 대해 분노 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왕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생각하지 못하고 포도원을 팔라고 제안했기에 왕으로서 체면이 크게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것은, 미처 하나님의 법을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설사 우리가 아합이었다고 해도 아마 아합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회개보다는 나봇에게 무시당했다는 생각과 왕으로서의 체면이 깎이고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으로 밥맛까지 잃어버릴 정도로 괴로워하고 답답해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나봇에 대한 아합의 반응을 보면서, 어린애처럼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인간입니다. 우리 역시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삶의 중심에 말씀을 둔다면, 그리고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아간다면 나의 체면 자존심보다는 말씀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부터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자에게 있을 것은 언제나 회개인 것이지 누군가가 나를 무시하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나를 알아주지 않는 일들이 있다고 해도 그런 것으로 아합처럼 괴로워하고 답답해하는 행동으로는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또 한 사람 이세벨이 등장합니다. 이세벨의 아합의 고민을 듣더니 나봇의 포도원을 주겠다고 장담을 합니다. 그리고 아합의 이름으로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힌 후에 비류 두 사람을 그 앞에 마주 앉히고 저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저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라”(9,10절)는 편지를 써서 나봇과 함께 하는 장로와 귀인들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장로와 귀인들은 편지대로 하여 나봇을 돌로 쳐 죽이고 이세벨에게 통보하자 이세벨은 나봇이 죽었다는 것을 아합에게 말하고,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지 않은 자들의 행동 모습입니다. 이세벨에게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나봇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감히 왕의 말을 거절하는 존재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장로와 귀인들 역시 나봇의 옳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세벨이라는 권력가만 보였습니다. 이것이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가 증거해야 하는 것은, 세상의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으면서 말씀에만 다스림을 받는 삶의 모습입니다. 설사 그런 삶의 결과가 손해와 고통으로 주어진다고 해도 신자가 가야할 길은 바로 그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진심으로 애통하는 마음으로 나봇의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봇과 같은 믿음으로 세상의 무엇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이끄는 길로만 갈 수 있기를 소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신자다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있는 것입니까?’
(58강) 열왕기상 21:17-29 아합의 회개와 심판
<본문>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거하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라 저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나의 대적이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또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의 노를 격동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찌라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저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것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열왕기상 21:17-29)
<설교>
따라서 성경을 읽는 신자는 언제나 모든 사건의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의 사건에서 돌을 들고 정죄하려는 군중이 아니라 군중에게 끌려온 부정한 여인이 되어 주님 앞에 벌거벗은 부끄러운 모습으로 엎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를 고고한 인품의 소유자로 만들고자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인품에 스스로 빠져 들게 되면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정죄하는 군중의 입장에 서게 될 뿐, 간음한 여인이 되어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은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십자가 밑에서 바라보고만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인품과 자존심과 도덕과 윤리를 모두 무너뜨리고 오로지 벌거벗은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에서 자신의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보셨습니까? 부끄러운 모습으로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을 묵상하셨습니까?
토지를 팔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규례는 생각하지 못하고 나봇에게 포도원을 팔라고 한 자신의 허물을 보기보다는, 자신의 요구가 거절당한 것으로 근심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침상에 누워서 식사까지 하지 않는 아합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자신의 자존심과 욕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의 부끄러움을 보셨습니까?
그래서 신자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서 아합으로 인해 나봇이 죽임을 당한 것처럼, 결국 우리의 자존심과 욕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합이 죽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려고 내려갔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합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거하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라 저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18,19절)는 여호와의 말씀을 아합에게 전하게 하십니다.
아합이 나봇의 피를 흘린 것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봇은 자신의 이익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나봇이 피를 흘리고 죽었다는 것은 곧 아합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봇의 흘린 피를 증거 삼아 아합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합에게 속한 남자는 종이나 자유자나 다 쓸어버리겠다고 하십니다. 또한 이세벨도 개들이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엄청나고 무서운 재앙에 대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엘리야가 전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을 들은 아합은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27절)는 반응을 보입니다. 아합이 보인 반응은 전형적인 회개의 모습입니다. 아합의 이런 반응에 대해 우리는 선뜻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합은 악한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악한 왕은 회개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신다면 그 어떤 악한 자라고 해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합의 회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결국 아합이 죽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 피를 개들이 핥았기 때문입니다(22:38).
28,29절의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아합의 회개를 하나님 앞에서 겸비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아합에게 예고하신 재앙을 아합의 시대가 아니라 아들의 시대에 내리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합의 회개를 하나님 앞에 겸비한 것으로 말씀하시면서, 왜 아합이 결국 하나님이 예고하신 대로 그 피를 개가 핥는 죽음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비록 하나님이 아합의 회개는 하나님 앞에 겸비한 행위로 인정하셨지만 그의 죄는 용서하지 않으셨다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점들을 생각해 보면, 아함의 회개는 참된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었다는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 이유는 22장에 등장하는 아합의 행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2장에 보면 아합이 유다와 여호사밧과 함께 아람을 치고자 합니다. 그때 여호사밧이 아합에게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떤지 물어보라고 합니다. 아합이 미가야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물었을 때 미가야 선지자가 자신에게 흉한 일을 얘기한다는 이유로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27절). 회개는 그 마음을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아합이 진심으로 회개를 하였다면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켰음을 뜻하는 것이고, 그런 아합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자신에게 흉한 일을 예언한다는 이유로 옥에 가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한 후의 아합의 행적을 생각해 본다면 본문에서의 아합의 회개는 예고된 하나님의 재앙에 대한 일시적인 반응에 불과했다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합의 회개가 참된 것이 아니었음을 아셨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왜 아합을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안에 악을 행한 자를 심판하시고 재앙을 내리신다면 그것은 악인을 처벌하시기 위함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누군가를 높이신다면 그것 역시 그 한 사람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높임 받을 자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아합을 겸손한 자로 인정하시고 높이시는 것이 아니라, 아합의 행위 즉 회개가 하나님 앞에 겸손한 것이며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받으시고 높이시는 분임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아합에게 예고된 재앙을 아들의 시대로 연기하는 것도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본다면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로 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대개 죄 안짓고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겸비한 자를 기뻐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처럼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로 살아가는가?’라는 중요한 문제가 우리 인생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해서 사람을 몇이라도 더 끌어 들이는 것에 관심을 두고 거기에 더 신경을 쓴다면, 과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바르게 보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 속에 두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아합의 겸비함은 아합의 회개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즉 죄인된 자가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보는 것이 겸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와 긍휼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임을 알았다면 우리의 중요한 문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는 다른 목적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많이 외치는 것 중 하나가 회개와 부흥입니다. 부흥과 함께 회개를 외치는 이유는 회개가 곧 부흥과 축복으로 이어지는 열쇠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운동을 외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는 ‘미스바의 회개운동’일 것입니다. 사무엘상 7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침략으로 큰 위기에 처한 사건이 나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언약궤도 블레셋에 빼앗기고 백성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이란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미스바에 모으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금식하고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다고 하면서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물리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했을 때 금식하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출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교회나 국가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하나같이 교회와 이 민족이 하나님께 회개해야 산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목적을 가지고 하는 의도적인 회개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자신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어려움의 원인을 자신의 죄에 두면서 회개해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역시 자신을 염두에 두는 의도적인 회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 앞에 겸비한 모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용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의도적인 회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적 죄책감, 종교적 의무감, 하나님의 축복의 상실이나 징계에 대한 염려 등이 회개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6:1-3절의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다윗의 고백을 보면 마치 하나님의 징계가 두려워서 회개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사실 시편에는 이런 내용의 회개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지만 다윗의 두려움은 단순히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 6:5)는 고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또 그분께 감사할 수 없는 곳에 처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에 거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변화는 죄의 질과 양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소지하고 있는지 그 안에서 정말로 복된 신자의 삶을 누리고 있는지의 여부일 뿐입니다.
십자가의 뜻이 무엇입니까? 죄에 대한 용서, 형벌로부터의 면죄, 신자의 변화 다 포함되어 있지만 그 이면의 근본적인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이었던 인간에게 화목의 손길을 먼저 내미시고 아름답고 거룩한 교제를 다시 이뤄나가자는 초대가 아닙니까?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바치면서까지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지 않습니까?
신자의 회개는 바로 이 십자가의 바탕 위에서만 이뤄져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바꾸어진 가치관에 따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벌 안 받으려고, 복을 받으려고, 믿음을 키워 착한 사람이 되려고 회개하는 수준에 머무르면 안됩니다. 신자는 진정으로 주님과의 아름다운 교제만이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자 가치이자 힘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심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59강) 열왕기상 22:1-18 나 홀로 아리랑
<본문>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년을 지내었더라 제 삼년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려가매 이스라엘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 왕의 손에서 취하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뇨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요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일반이니이다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청컨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이스라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인쯤 모으고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저희가 가로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이스라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로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문어귀 광장에서 각기 보좌에 앉았고 모든 선지자가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하더라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일러 가로되 선지자들의 말이 여출일구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컨대 당신의 말도 저희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 미가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저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말랴 저가 왕께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왕이 저에게 이르되 내가 몇 번이나 너로 맹세케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으로만 내게 고하겠느냐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저 사람이 내게 대하여 길한 것을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것을 예언하겠다고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열왕기상 22:1-18)
<설교>
이것은 현대인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현대인을 단지 삶에 찌들고 고생하는 사람으로만 바라본다면,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고 힘을 주는 설교가 필요하고 어울릴지 모릅니다. 또한 윤리와 도덕이 무너져가고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사회로만 본다면 윤리와 도덕적인 설교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현대인을 그런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현대인이든 고대인이든 모두를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존재로 봅니다. 고생하며 살든 떵떵 거리면서 풍족하게 살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멸망의 자식으로 보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현대인들의 삶과 세상에서 지고 가는 짐을 보면서 어울리는 설교를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에게 어울리는 설교를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주 아래 있는 자에게 어울리는 설교는 분명 저주에서 구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현대인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면 먼저 무엇이 필요할까요? 저주 아래 있는 것이 자신의 실체임을 볼 수 있도록 죄에 대해 외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러한 설교들은 현대인들은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희망적이 아니고 부정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의 저주와 상관없는 자가 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에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실체가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를 말하고 죄인 됨을 말하면 역시 듣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성경은 불필요한 것입니까? 긍정적이지 못하고 희망적이지 못하고 부정적인 성경으로 치부해야 합니까? 특히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며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지독하게 외쳤습니다. 그러한 외침들이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까?
이미 구원 받은 신자이기에 하나님의 저주나 심판에 대한 얘기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구원에 매인 자일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이런 신관은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고 증거할 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있던 자신의 실체를 발견했을 때, 나를 저주에서 건져내신 은혜와 사랑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저주에서 건져내신 은혜와 사랑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인간을 위한 하나님을 외친다고 해도 그 속에서 저주의 하나님을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나 홀로 아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저주의 하나님에 대해 듣기를 싫어합니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라는 것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저주보다는 평안을 주시고, 심판보다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싶어합니다. 심판과 죄를 외치는 듣기 싫은 말보다는 이왕이면 축복의 말을 듣고자 합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시대나 지금의 교회나 다를 바 없는 실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홀로 아리랑으로 존재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미가야 선지자도 ‘나 홀로 아리랑’을 외치고 있습니다. 당시 400명의 선지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가야 선지자의 말에는 아무도 동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말씀이 신자를 얼마나 외롭게 하는지 모릅니다. 1,2절을 보면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3년이 되었을 때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로 내려가 아합을 만납니다. 그때 아합이 여호사밧에서 본래 이스라엘의 땅인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해 함께 아람을 치자는 제의를 하게 됩니다.
여호사밧은 아합의 딸 아달랴를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킴으로써 아합과 사돈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합의 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요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일반이니이다”(4절)는 말로써 아합과의 돈독한 관계를 확인 시키며 아합에게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5절)라고 말합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섬기는 선한 왕이었기 때문에 평소에 무슨 일을 행할 때 하나님께 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합에게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한지 물어 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합은 선지자 사백인 쯤을 모으고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선지자들은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라고 답합니다. 아합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850명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바알보다는 하나님이 더 세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선지자 400명을 모아 데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복을 빌어주는 선지자로 채용을 한 것입니다.
이들 사백인의 선지자는 모두 아합으로부터 봉급을 받았습니다. 이런 자들이 과연 아합이 기분 나빠할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아합의 기분을 거슬리지 않음으로써 계속 아합 곁에 붙어 있으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생계를 위해 아합에게 기분 좋은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 선지자의 전형적인 실상입니다. 말씀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생계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싫어할 말을 하지 못하고, 결국 그 마음에 드는 말을 고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인 저부터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내용입니다. 목사는 말씀의 종입니다. 즉 말씀이 전하라고 하는 말을 그대로 전하는 역할을 맡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사가 힘있는 사람을 의식하고 말씀을 전한다면 그것은 이미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에 불과할 뿐이며 거짓 선지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의 생계는 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시는 말씀만 전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맡고 있는 교회를 발전시켜서 자신의 이름과 자존심을 세워보려고 하는 욕망 역시 말씀을 훼방하는 걸림돌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교회의 부흥 발전을 하나님의 당연한 뜻으로 생각하고, 교회 부흥과 발전을 위해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일인 것으로 착각을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 교회를 크게 하는 것에 뜻을 두신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목사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결국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은 기대할 수 없게 되고 그렇다면 그는 사람을 보고 사람의 말을 하는 거짓 선지자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말씀을 듣는 신자 역시 아합처럼 자신의 마음에 드는 말을 듣기를 원한다면 말씀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취미로 종교생활을 하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든 신자든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말씀 앞에 나와야 만 진심으로 말씀이 우리를 다스리고 고쳐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00명의 선지자가 하는 말을 들은 여호사밧은 뭔가 그들이 참된 선지자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를 챈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들 외에 또 다른 선지자가 없는가를 묻습니다. 그러자 아합은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8절)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아합이 선지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아합은 선지자가 자신에게 길한 예언을 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미가야는 흉한 예언만 함으로써 아합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야를 불러서 물어봐야 흉한 일을 예언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아예 부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호사밧으로 인해 아합이 미가야를 데리고 오라고 지시를 하고, 미가야를 데리러 간 사자는 미가야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선지자들의 말이 여출일구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컨대 당신의 말도 저희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13절) 한마디로 다른 선지자가 모두 좋은 말을 하니 당신도 다른 말 하지 말고 그들처럼 좋은 말을 해야 신상에 해롭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미가야를 만난 아합이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말랴”고 묻자 미가야는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15)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미가야도 아합의 듣기에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선지자들의 말이 엉터리라는 것을 조롱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미가야의 의도를 눈치 챈 아합은 그 말을 믿지 않고 “내가 몇 번이나 너로 맹세케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으로만 내게 고하겠느냐”라며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미가야가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17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아합은 역시 분노의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 미가야는 400:1의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400명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미가야 홀로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야 말로 나 홀로 아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환영을 받는 것은 미가야 선지자가 아니라 400명의 거짓 선지자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이 생명을 원하지 않기에 생명만을 외치는 사람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에 득이 되고 사람을 좋게 하고 듣기에 좋은 말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외치면서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영생을 전하는 것이야 말로 나 홀로 아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가야 할 길은 바로 이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생명을 원하신다면 어떠한 길이 생명의 길인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내 귀에 달콤한 말이라고 해서 옳은 말이고 진리라고 여길 수 없습니다. 내 귀에 달다는 것은, 결국 내 속에 숨어 있는 욕망을 총족시켜 주는 말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예수님만 증거하고 예수님으로만 산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대부분의 사람조차 동조하지 않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다들 관심이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다른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만으로 살고 예수님만 증거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따분하고 하나만 고집부리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고, 기도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고, 착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고, 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하시는 분이고,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주와 심판을 말하는 것보다 얼마나 듣기에 좋습니까? 이왕이면 이런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생명입니다. 과연 그것이 생명이 되는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도 생명이 되는 진리였다면, 예레미야나 미가야 같은 선지자들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자신의 고집으로 인해서 고생을 자초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관심이 없는 세상에서 예수님만을 의지하면서 예수님만으로 기뻐하는 자로 살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나 홀로 아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가야 선지자의 그 때의 그 심정이 오늘 우리에게 전달됨으로써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으로 사는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60강) 열왕기상 22:19-23 하늘의 회의
<본문>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열왕기상 22:19-23)
<설교>
십자가 구원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을 두고도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이 십자가 진리입니다. 세계 최고의 천재, 도덕군자, 신령한 자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진리는 스스로의 노력과 열심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글자와는 달리 진리는 옆에서 누군가가 가르쳐준다고 해서 쉽게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얘기하고 말해줘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진리를 안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가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인생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알게 된 것 이상의 최고의 복은 따로 없습니다. 평생을 두고 감사해도 모자랍니다. 반면에 이처럼 평생을 두고 감사해도 부족할 만큼의 최고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 주위에 너무나 많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낫 놓고도 기역자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절대로 신자보다 무식하거나 더 악하거나 덜 신령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고후4:4)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의 빛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비취는 것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런 내용들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믿고 구원에 이르기를 기뻐하셔야 하고,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주를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단의 세력을 하나님이 막아주시고 많은 자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참된 하나님이시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분으로 존재하십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여호사밧과 함께 아람을 공격하여 이스라엘이 아람에게 뺏긴 옛 땅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로 하고 그 일을 두고 하나님께 묻는 내용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 아합의 선지자 400명은 이구동성으로 올라가 싸우면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과 신상을 위해서 아합의 귀에 즐거운 말을 하는 거짓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들과는 다르게 미가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을 함으로써 아합의 귀에 즐거운 길한 일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했던 것입니다. 지금 아합의 앞에는 진리만을 전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합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누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인가를 깨닫지를 못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아합을 죽이기도 작정하셨기 때문에 아합은 진리를 앞에 두고도 거짓된 길을 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아합이 참된 선지자를 알아보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막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에서 있었던 회의에 대한 내용을 미가야가 아합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미가야가 말하는 하늘의 회의는 이렇습니다. 회의의 의제는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20절)에 대한 것입니다. 회의에 참석한 영들이 각기 여러 가지 방법을 내어 놓는데, 한 영이 자신이 아합을 꾀이겠다고 하자 하나님이 그 방법을 묻고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22절)라고 말하자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23절에서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미가야는 400명의 선지자의 말은, 거짓말 하는 영이 그들의 입에 있기 때문이고 그 모든 것은 아합에게 화가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뒤에 보면 아합은 변장을 하고 전쟁에 참여하지만 적군이 우연히 쏜 활에 맞아 죽게 됩니다. 이미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하셨기에 사람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살아보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아합이 죽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아합이 거짓말하는 영으로 꾀이는 거짓선지자들의 말에 넘어간 것이나 미가야의 참된 말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것 모두가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을 심판하시는 방식입니다. 마음을 완악하게 하심으로써 진리가 있으되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꾀이는 자들의 미혹에 넘어가게 하심으로써 멸망하기로 작정한 모두를 멸망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거짓 선지자가 등장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있고, 하나님은 가라지를 불에 태워 심판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라지와 같은 자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거짓 선지자들의 꾀이는 말에 미혹하게 하셔서 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18절에서 아합이 “저 사람이 내게 대하여 길한 것을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것을 예언하겠다고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미가야 선지자의 말에 대해 화를 내고 있습니다. 대신 400명의 선지자들의 말에 대해서는 아주 흡족해 합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합은 선지자들의 말을 자신의 마음을 기준으로 해서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면 흡족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를 내며 거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합에게는 그것이 곧 죽는 길이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마음을 기준해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거짓말 하는 영은 사람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말로써 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욕심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또한 자존심과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싶은 욕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흡족하게 하려면 사람이 하고 싶어하고 이루고 싶어 하는 욕망을 거드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아합의 400명의 선지자들도 아람을 쳐서 옛 땅을 찾고 싶어 하는 욕망을 거드는 말을 했지 않습니까? 마치 하나님도 아합의 욕망을 도와주시는 분인 것처럼 나가 싸우면 하나님이 승리하게 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의 욕망은 온통 눈에 보이는 것을 향해 있습니다.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고, 그 소망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동조하는 말에 대해서 흡족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거짓말 하는 영이 함께 한 자의 꾀이는 말임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만을 증거하게 되면 ‘재미가 없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재미가 없기 때문에 나를 높여 주는 말이나, 내 욕망에 일치되는 말을 듣는 것을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몰라서 미혹되었다는 것은 사실 틀린 말입니다. 성경을 잘 몰라서 미혹되었다는 것으로 진리를 거부한 잘못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자신이 추구하고 원하는 것이 거기 있기에 따라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욕망에 동조하는 말로 흡족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말로써만 마음의 흡족함을 얻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영생의 나라에 인도하시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성령의 영을 보내시고 거짓된 꾀이는 말을 분별하게 하시고 진리의 길을 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는 진리의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그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신자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국 보내기로 작정한 자를 천국 보내시고, 지옥 보내기로 작정한 자를 지옥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이 뜻을 누구도 막을 수 없고 훼방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등장하여 세상을 미혹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딤후 4:3-4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말하는 것도, 멸망 받을 자를 멸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인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거짓말 하는 영의 미혹에 빠져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면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꾀이는 말에 미혹되고 멸망에 빠질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 역시 거짓말 하는 영의 꾀이는 말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운명은 분명 결정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생명에 들어갈 자와 사망에 들어갈 자로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에 들어갈 자는 운명이 생명으로 정해져 있으니까 마음 놓고 자신의 욕심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생명에 들어갈 자로 정해 놓았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실컷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만 바라보던 마음이 천국을 소망하는 마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징계를 동원하시고 때리시면서 사람답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운명이 영생으로 정해진 자의 마음이 무엇과 통하고, 그 삶이 향하는 방향은 세상과 어떻게 다른가를 증거해야 하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꾀이는 말에 미혹되지 않고 자신에게 결정된 운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거짓말 하는 영의 미혹을 받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누가 거짓된 말로 미혹하는가를 알아내서 그를 멀리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진리의 영으로 인도를 받아 사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은 여러분을 진리를 사모하고 사랑하는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리를 사랑하는 자로 사는 것이 미혹의 말에서 벗어나서 진리와 함께 살아가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만을 추구하게 되면 자연히 여러분을 꾀이고 미혹하는 말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진리를 앎으로써 진리가 아닌 꾀이는 말을 분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61강) 열왕기상 22:24-36 참과 거짓
<본문>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미가야가 가로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보리라 이스라엘 왕이 가로되 미가야를 잡아 부윤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로 먹이라 하라 미가야가 가로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될찐대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또 가로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찌어다 하니라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 왕이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니라 아람 왕이 그 병거의 장관 삼십 이인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병거의 장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필연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이켜 저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지르는지라 병거의 장관들이 저가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이켜 나로 군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해가 질 즈음에 군중에서 외치는 소리 있어 가로되 각기 성읍으로, 각기 본향으로 하더라(열왕기상 22:24-36)
<설교>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가야 선지자를 참된 선지자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참된 선지자는 선한 일의 여부나 인품을 근거로 하여 판단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미가야 선지자의 평소 삶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그의 인품이나 성격 등이 어떤지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를 참된 선지자로 인정을 한다면, 그것은 참된 선지자라는 것을 행위나 인품에 기준을 두지 않았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합의 400명의 선지자에 대해서는 거짓되다는 판단을 하실 것입니다. 왜 그렇게 판단하십니까? 그들의 인품이 엉망이고, 선한 일은 커녕 남을 속이고 남의 돈을 가로채기라도 했습니까? 아니면 아합의 선지자라는 것을 이용해서 백성들을 괴롭히기라도 했습니까? 역시 성경은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아합의 400명의 선지자를 거짓 선지자로 규정을 한다면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한 것입니까?
만약 그 어떤 근거도 없이 무조건 아합 쪽은 나쁜 편, 아합의 반대쪽은 좋은 편이라는 인식으로 참과 거짓으로 분류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편 가르기’와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참된 것을 참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이 없이 다만 자신의 느낌과 생각과 감정에 의한 반응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여러분으로 하여금 참된 것을 참된 것으로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걸림돌로 크게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아합의 선지자 400명과 미가야 선지자는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합의 선지자는 아합에게 전쟁에 나가면 하나님이 도우셔서 틀림없이 승리한다는 예언을 하고 있고, 미가야 선지자는 죽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말을 하는 이유는 아합의 선지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아합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고, 미가야 선지자는 아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내용만을 가지고 미가야 선지자를 참되다고 인정을 하는 것이고, 아합의 선지자 400명을 거짓 선지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의 평소 선행, 인품 등과는 상관없이 아합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 것과 아합의 기분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할 말을 하는 것만을 근거로 해서 참과 거짓으로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하나님이 사람의 기분과 그 입장을 고려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의 기분을 고려하시며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까? 고의로 기분 나빠할 말씀만 골라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사고방식과는 일치가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욕망과 자기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증거하는 그가 곧 참된 선지자인 것입니다.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을 보기 때문에 그에게서는 하나님의 참된 것만 증거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참과 거짓이 함께 있을 때 필연코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은 충돌입니다. 즉 참과 거짓의 관계에서 화합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러한 충돌을 볼 수 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하늘에서 있었던 일을 말함으로써 400명의 선지자들의 말은 모두 거짓말로 규정합니다. 그러자 시드기야라는 아합의 선지자가 미가야의 뺨을 치면서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24절)라고 말합니다.
11절에 보면 시드기야는 철로 뿔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아람 사람을 진멸할 것이라는 예언을 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보면 시드기야는 400명의 선지자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아합의 승리를 예언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시드기야에게 미가야의 예언은 자신의 예언과 권위를 몽땅 무너뜨리는 것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을 자신에 대한 도전과 모욕으로 여기며 분노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적 반응이 미가야의 뺨을 치는 반응으로 표출 된 것입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는 영을 아합의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아합의 선지자들의 말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선지자임을 부정하는 말이며 따라서 자신을 선지자로 여기는 사람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드기야가 분노하며 미가야의 뺨을 때리는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영이 자신과 함께 하고 있으며,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은 분명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선지자며 자신의 말도 하나님이 하신 예언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자, 이런 경우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참과 거짓 사이에서 매우 곤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가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화합의 차원에서 양쪽의 말이 서로 다르지만 어쨌든 하나님이 세운 선지자가 아니냐는 식으로 둘 다 선지자로 여겨주는 방식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스스로 참과 거짓에 대한 관심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가야 선지자의 말이 참된 것이었다는 증거는 미가야의 말 대로 아합이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함으로 드러났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달콤한 말에 마음을 뺏긴 아합은 참된 말로 경고하는 미가야를 옥에 가두고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물과 고생의 떡을 먹이라고 합니다(27절). 그리고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고 전쟁터에 나가라고 하면서 자신은 변장을 합니다. 즉 적군이 자신이 왕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한 것입니다. 아마 전쟁터에서 죽을 것이라는 미가야의 예언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던가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34,35절에서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이켜 나로 군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합이 적군이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서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우연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필연이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아합이 전사할 것이라고 예언하기 전에 분명히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22:14)고 전제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 외에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사할 것이라고 하나님이 미리 예언한 일이 그대로 되어진 이 일을 어찌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참과 거짓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심으로써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기 전이라 할지라도 미가야처럼 하늘의 일을 보고 아는 사람이라면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미가야와 같은 영의 사람이라면 분명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대하는 신자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는 관심이 없이 오직 자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말씀을 대한다면 결국 아합처럼 나의 욕망을 도와주는 말이나, 소위 힘이 나게 한다는 긍정적인 말에 마음이 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사단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부터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셔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셔 버릴 세상에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부서질 세상에 그대로 방치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곳을 떠날 것을 경고하시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목사라 이름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람들의 마음과 관심을 세상에 붙들어 놓는 말을 내 뱉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복 받는다’는 것과 같은 말들이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살려고 힘쓰는 동기 유발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국 세상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더 세상에 집착하게 하는 것 밖에 안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골 3: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입은 신자라면 소망을 하늘에 두는 것이 당연하고, 소망을 하늘에 두고 있다면 땅의 것을 향한 소망이 죽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땅의 것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야 말로 헛된 인생이며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과 그 뜻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곧 참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는 것처럼 본다면 세상을 향해 어떤 말을 외치는 것이 참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과 권능의 목표와 그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 택한 사람 자체이지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풍요롭게 해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있는 욕망이 그런 말에 대해 만족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신자가 병이 나든, 사업이 부도가 나 끼니를 굶든, 심지어 목사가 암에 걸려 죽든, 새벽 기도 나오다가 강도의 총에 맞아 죽든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당신의 영광은 절대 손상당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도 그런 일로 인해서도 전혀 오류가 없음을 믿기에 눈에 보이는 것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만 바라보고 그 선하심에 반응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반응해 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증거한다면 그것이 참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무엇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인가에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교회에서 하는 말이라면 다 참된 말씀이지 않느냐는 것은 스스로 속는 길로 달려가는 것일 뿐입니다.
(62강) 열왕기상 22:37-40 우연과 필연
<본문>
왕이 이미 죽으매 그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 장사하니라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 씻으매 개들이 그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의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의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아합의 남은 행적과 무릇 그 행한 일과 그 건축한 상아궁과 그 건축한 모든 성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아합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열왕기상 22:37-40)
<설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감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겠습니다’라는 말은 ‘이제부터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왕으로 섬기는 인생을 살겠습니다’라는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긴다면 종의 위치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결정 사항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순종의 이유 전부입니다. 여기서부터 자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삶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욕망이라는 것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성공과 영광으로 인정해 주는 것을 인생의 방향과 목적으로 삼아버리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이 방향에서 어긋날 때 실망하면서 낙심하며 결국 이것이 세상을 향한 분노로 쌓이게 되고 스트레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일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으며 내 뜻대로 계획한 방향으로 나아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시로 장애물이 등장하며 원하지 않는 다른 곳으로 방향이 틀어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며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는 결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7,38절에서 “왕이 이미 죽으매 그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 장사하니라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 씻으매 개들이 그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의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합이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을 피해보기 위해서 변장을 하고 전투에 나섰으나 아람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 죽은 것처럼,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주관되고 있는 세상 안에서 말씀을 벗어나 자신의 계획과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무지이고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21:19절을 보면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에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서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미가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아합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합은 자신이 화살에 맞을 것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왕의 복장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적군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유다왕 여호사밧으로 하여금 왕복을 입고 전투에 나서게 했으니만큼 적군의 관심은 여호사밧에게로 향할 것으로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적군이 우연히 쏜 화살이 자신에게로 날아올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의 계획과 수단과 예측을 뛰어넘은 채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져 가는 것이 세상의 현실인 것입니다. 세상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두고 ‘우연’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필연은 미리 예측하고 짐작했던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의 입장에서 우연한 일들은 모두 필연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 한 일이란 바로 하나님이 한 일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반면에 신자에게 필연으로 보이는 일, 즉 스스로 예측과 통제가 가능했던 일이라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에게 이미 은사로 받은 자신의 재질과 능력을 활용한 결과이기 때문에 그 역시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아무리 가볍고 일상적인 일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살아가는 것이고, 또 내 능력으로 안되는 일이 주어졌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뜻이 개입되어 있는 하나님의 필연인 것입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필연적인 예언을 듣고도 그 말씀을 무시하여 결국 죽었습니다. 아합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았다면 살았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아합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결국 말씀에 의해 죽음을 당할 자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아합이 말씀을 무시하지 않았다면…….’이라는 말은 하나마나한 말에 불과합니다. 우린 단지 되어진 일을 보면서 세상 일이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에 의해 결정된 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 가를 알지 못한다면 그저 망상 속에 살아가는 무지한 존재일 뿐입니다. 자신에게 밀려오는 멸망의 파도를 보지 못한 채 성공만을 꿈꾸며 행복한 인생을 기대하는 망상에 갇혀 있는 불쌍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나쁜 일을 접하게 되면 그저 재수가 없었다면서 땅에 침을 뱉는 것이 전부일 것이고, 예측하지 못한 좋은 일을 접하게 되면 운이 좋았다는 것이 전부이겠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자에게는 예측을 하든 못하든 모든 일은 하나님이 벌이시는 필연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인생살이에는 미리 예측할 수 없고 또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발생한 일을 두고 아주 곤혹스러워 하거나 고통을 겪게 마련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곤혹스러워 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후회할 일이 세상의 마지막 때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아합과 같은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개들이 그 피를 핥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아합의 운명을 결정지었으며 그 운명에 끌려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자신의 운명을 예측하지 못하고 자기 계획으로 불행을 피해보고자 하였으나 결국 말씀에 의해 결정된 운명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인생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아합과 달리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짐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물론 신자가 자신의 생활에서 일어날 일들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붙들고 있다면 우리의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인도받을지는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생활에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불안해하고 염려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신자에게는 어떤 일도, 그 일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고통을 안겨준 것이라고 해도 불행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을 이루시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주어진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선을 보지 못함으로 인해서 불행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비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우연의 사건 속에 방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연에 붙들려 살아갑니다. 이것보다 우리를 안심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인생은 결국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것으로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자기의 인생에서 벌어질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고 해도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눈앞의 일들의 결과를 자꾸 예측하려고 하고, 내가 원한 대로 되어지지 않을 것을 염려함으로써 불안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인생의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내가 원한대로 되기를 꿈꾸는 것보다는 인생의 전부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계획대로 되어지기를 원하면서 사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내 인생의 전부를 주관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면 결국 우리에게 가장 적절하고 유익되며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되어지는 일들의 전부를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여기고 순종하고자 한다면 불평보다는 감사가 앞서지 않겠습니까?
신자는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선과 영광이 드러나는 길로 인도받습니다. 이것을 믿으신다면 그분만의 뜻대로 이 일을 또 어떻게 완전하게 이루실까라는 설렘으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절대 우연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필연 뿐이므로 그분이 죽으라면 죽겠다는 헌신의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 안에서 신자만이 누릴 수 있는 참 자유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인생을 복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은 전혀 알 수 없는 복이겠지만 말입니다.
38절을 보면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핥은 곳은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다고 말합니다. 창기는 당시 가장 천한 존재였습니다. 그러한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라면 사람들에게 어떻게 여김 받는 장소일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권세와 영광을 누렸던 아합은 결국 세상에서 가장 천한 장소에 죽어서 개가 그 피를 핥은 운명으로 그 인생을 끝낸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성공하여 부귀와 영광을 누리는 것은 그저 한 때에 불과합니다. 그 한 때를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는 것은, 영원한 약속을 바라보고 믿는 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의 실패는 돈을 벌지 못하고, 남보다 초라한 몰골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가장 불쌍한 것은 병들고 가난해서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결정된 세상의 마지막을 예측하지 못한 채 다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로 웃고 우는 것입니다. 영원한 고통과 영원한 울음이 기다리고 있는 세상의 현실을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고 불쌍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성취되는 사건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도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필연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필연 속에 놓여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앞의 일을 두고 내 마음대로 안된다고 해서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고 있음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선한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필연을 믿고 살아가는 인생의 자유와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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