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강해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데살로니가전서 1:1 인 사 2001. 6. 13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오늘부터 수요일에 데살로니가전서로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수요일에 이사야서를 통하여 선지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 증거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살펴 보았습니다. 구약의 선지서와 바울을 서신서의 분위기가 많이 다르겠지만 그러나 역시 증거하는 바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서가 예언적이라면 신약은 그 성취를 말하고 있고 그리고 신약의 교회들은 그 언약이 이루어진 결과 속에서 어떠한 모습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동안 창세기 요한복음 이사야서를 통하여 복음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보았습니다. 이제는 그 복음을 받은 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도 함께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2년 동안 함께 말씀을 나눈 것은 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증거를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분의 종교적인 부분들이 무너지면서 -아직도 제대로 무너졌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이제 놀자는 쪽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새벽기도 하다가 복음을 듣고 나니 이제는 새벽기도 안가도 마음 편하게 누워 자도 된다는 것입니다. 헌금 안해도 부담도 안되니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서 자신의 안일함과 나태를 합당하게 여긴다는 것은 결국 자기의 배를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시 사람의 행위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받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가 어떻게 권면하고 있는가를 듣고서 다시 복음으로 충만하여 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정말 말씀을 사모하고 복음 안에서 기뻐하는 자라면 더욱 말씀을 사모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떠한 이익보다 우선적으로 말씀을 생각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데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씀 듣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까? 어떤 분이 그러시더라구요. 이제 목사님의 말씀 많이 얻어먹었으니 배가 부르다면서 이제 다른 곳에 간다고 합디다. 그런데 그 분이 정말 원한 것은 말씀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들이 채워지지 않았음이라는 것을 짐작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도 대다수가 이제 배가 불러서 더 들을 말씀이 없다고 하면 제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더 전할 말씀이 없다면 그만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1:6-10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찌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바울서신에서 점검을 받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복음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복음적인 삶이 나타나는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사야 선지서를 통하여 우상숭배가 무엇이며 무엇이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는 종교적인 행위였는가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하는지를 점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사야서에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나고 있지만 이제 서신서 안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제 데살로니가 전서가 기록된 배경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데살로니가는 B.C 315년경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장관이었던 카산더가 이 지역의 통치자로 오면서 그 도시의 이름을 자기의 아내 이름을 따서 데살로니가로 불렀다고 합니다. 그 아내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동생이라고 합니다. 그 후에 로마시대 때는 동방으로 가는 로마의 중요한 국도가 있는 곳입니다. 데살로니가 근처에 빌립보와 베레아가 있습니다.
이러한 데살로니가 지역에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게 된 상황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16:6-10절을 봅니다. "봉독" 바울 사도가 아시아 쪽으로 복음을 전하려 하였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환상 가운데 마게도니야 사람이 건너와서 자기들을 도우라는 것을 보고서 마게도니야로 갑니다. 16:11절을 봅니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빌립보에 갑니다 마게도니야 첫 성이요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자주장사 루디아가 주께서 마음을 열어 주심으로 복음을 받게 하십니다. 그런데 어느 귀신들려 점치는 사람을 고침으로 인하여 그 주인이 손해를 입게 되자 바울과 실라를 잡아서 관원에게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감옥에 가두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송하다가 감옥문이 열려 버린 사건입니다. 이곳이 빌립보 지역이고 여기에서 로마사람들이 바울이 로마시민이라고 하자 제발 떠나가 달라고 합니다. 복음이 들어가자 성이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안정을 위하여 복음을 추방하여 버립니다. 복음을 그 당시에 사람들이 염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염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서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왠 전염병을 퍼뜨리는가 하면서 좇아내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복음은 이러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에서 다른 곳으로 간곳이 바로 빌립보 옆에 있는 도시 데살로니가입니다.
여기서 복음을 전한 내용이 사도행전 17:1-9절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에서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절입니다. 역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합니다. 이러한 증거를 3주간에 걸쳐 증거하니 그 중에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역시 여기서도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관원을 데리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떼를 지어 바울과 실라를 잡으려고 온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를 찾지 못하니 바울과 실라를 맞이한 야손이라는 사람을 잡아 간 것입니다. 그리고 고발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하나님만을 임금으로 섬겨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들의 임금은 가이사 이기에 가이사 외에 다른 임금 곧 예수라는 임금을 소개한다고 잡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일 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가이사 외에 왕이 없나이다 하면서 자신들의 참되신 왕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도 동일한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복음이란 우리의 임금이요 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의 마음에는 가이사 같은 임금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마음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그것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왕으로 모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복음을 듣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자들이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러한 기적이 데살로니가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피하여 베뢰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베뢰아에서 아덴으로 아테네에서 또다시 고린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에서는 좀 오래 있었기에 고린도에 있으면서 데살로니가에서 온 사람들에게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고서 이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오늘은 이 편지의 인사말을 보고자 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의 이름으로 인사를 합니다. 실루아노는 실라와 같은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실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아들이라고 하는 디모데입니다. 이들이 바울의 복음전하는 일에 함께 한 동역자들이기에 성도들에게 함께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편지 형식을 가지고 있기에 제일 먼저 인사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인사는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의 인사는 그 사람의 환경에 따라 인사말이 달라집니다. 영어로 굳모닝이 아침인사입니다. 영국에서는 얼마나 안개가 자주 끼이는지 맑고 좋은 날이 별로 없으니 관심사가 좋은 날씨입니다. 그러니 좋은 아침이 인사이고 우리나라는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진지 잡수셨습니까? 지금이 보릿고개 아닙니까? 그러니 밥을 먹기 힘이 들었으니 진지 잡수셨습니까가 인사말이었습니다. 그리고 6,25전쟁 전후로 자고 일어나면 목이 달아나는 세상에서 밤새 안녕 하셨습니까? 그리고 요즈음 인사는 무엇입니까? 먹고 살만하니 건강에 대한 인사 몸에 대한 담론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영자의 살빼기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날 먹고 살만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비만이 문제가 되었기에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속사람이 강건하냐고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인사말에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로 인사말을 시작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 무슨 건물이나 특별한 조직들이 있었을까요? 단지 3주 동안 복음을 전하고 떠난 곳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놀라운 복음의 능력이 나타났는지 그들이 복음을 듣고서 어떤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나타나고, 다른 교회들에 본이 될만한 그러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바로 복음을 듣고서 믿게 된 성도들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어디로 연결이 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됩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이냐 아니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교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는 것이 건물, 목사, 장로,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 성가대,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란 두세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인다면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교회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멋진 건물과 완벽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지 않는다면 그곳을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특정인의 사상과 말빨이 통하는 곳이라면 교회라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가 역시 아버지께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이미 보았듯이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시듯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는 것이 바로 교회이요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란 여러 가지 환난과 핍박이 올지라도 항상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떠한 외부의 위협이나 내부적인 어려움들이 있다고 하여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은혜와 평강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인사말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하면서 은혜와 평강이 있을찌어다 라고 합니다.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이러한 은혜란 기쁨이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으면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이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그 무엇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로 성도가 충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로 채워질 때라야 참된 평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평강이란 샬롬입니다. 전쟁이나 위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날마다 전쟁터입니다. 날마다 위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전쟁이나 위협이 도사리고 있지만 무엇 때문에 평강을 누리게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므로 평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평강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의 것들로 자신의 평강을 유지하려고 하니 평강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늘 불안한 것입니다. 장사가 안되어도 불안, 회사의 경기가 좋지 않아도 불안, 목사는 성도가 줄고 헌금이 줄면 불안, 이러한 모든 것들이 세상이 주는 것으로 평강을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주님의 은혜를 알고 받는다면 아니 이미 주어 졌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대로 깨닫게 된다면 세상의 환난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 주님의 은혜로 주어진 평강을 깨뜨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엡 1:3-14 하나님의 일하심)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더 많이 알아가고 그 일들이 성도에게 얼마나 많이 주어 졌는가를 알고 믿을수록 더욱 평강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러한 인사말을 구약 제사장의 축복과도 연결이 됩니다(민6:24-25). 이러한 은혜와 평강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받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세상을 두려하지 말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2-4 바울의 감사 2001. 6. 20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의 택하심을 아노라"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은혜와 평강으로 인사를 하고서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인하여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 항상 감사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다 감사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의 열매들이 나타났을 때 그것이 얼마나 기쁨이겠습니까? 이러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역사는 하나님의 일하심이기에 바울은 그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기쁨이기도 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에 걸쳐서 복음을 전하고 그곳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 의하여 쫓겨 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서 그 3주간의 말씀을 듣고서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나타남으로 다른 교회들에게 본이 될만한 열매들이 나타남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열매들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지가 벌써 몇 년이 되었습니까? 성경책을 가지고 다닌 지가 몇 년이 되었습니까?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단지 3주간의 말씀으로 인하여 얼마나 아름다운 열매들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이 나타납니까? 그래 저 목사가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다하신다 하더니만 이제는 드디어 사람의 행함을 강조하구나 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면 그렇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순전히 나만 사랑하였구나 그것을 복음이라는 빌미로 이용하고 있었구나 하고 회개가 되십니까? 주님과 여러분만이 아실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 열매로 사람을 아는 것입니다. 열매로 그 사람을 안다고 해서 우리가 열매를 맺자는 쪽으로 나가면 이것은 믿음 더하기 행함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에다가 행함을 더하여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이란 어떤 열매가 나오는가를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과연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15-20절입니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컹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라" 이 말씀은 양의 탈을 쓰고 오는 거짓선지자를 어떻게 분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모르는 것입니다. 양 같습니다. 겸손하고, 부드럽고, 자상하고 천사 같습니다. 그렇게 위장하고 올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입니다.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열매로 압니다. 열매란 하루아침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몇 년이 지나봐야 아는 것입니다. 사과나무인지 배나무인지 어릴 때 묘목만 보아서는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식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린 나무를 심고서 몇 년이 지나서 열매가 나오는 것을 보면 당장 알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도 몇 년을 지나보면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을 하여 분별하여 보는 것입니다. 과연 나에게서 아름다운 열매들이 있는가?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점검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여기서 어떤 식으로 나가는가하면 열심히 열매를 맺도록 노력하자는 식으로 나갑니다. 결국 사람의 열심과 사람의 행함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믿음에다가 사람의 행위를 포함하여야 된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구원은 은혜로 되었지만 상급은 행함으로, 구원은 믿음으로 되었지만 세상에서 복받는 것은 우리의 행함으로 이렇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어떤 식이 되어 버렸습니까? 열매, 열매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열매를 맺게 되는가 하니 억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전도 열매, 헌금 열매, 헌신열매 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경쟁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성경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말은 성경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도 그 내용은 박정히 독재의 밀어붙이기식 입니다.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하라' '과정보다 결과'이러한 운동들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세속화입니다.
지금 성주교회에서 교사 강습회를 합니다. 그곳 식당이 초등부실로 사용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벽에 보니 전도왕 골든벨이라는 커다란 사진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전도를 다섯 명하면 전도가 아니라 교회 데리고 오는 아이 다섯 명이면 면류관을 씌워서 사진을 크게 찍어 벽에 붙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교회에 데리고 온 아이들의 이름을 훈장처럼 사진 밑에 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한쪽 벽에는 등반을 한 친구들 중에서 추첨을 하여 7월 1일날 코렉스 21단 자전거를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다른 부서보다 많은 열매를 맺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성령의 열매입니까? 육체의 열매입니다. 억지 열매입니다. 돈을 주고 사와서 매달아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의 사람이 이러한 내용들을 사진에 담아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추측컨데 경상노회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교회이니 우리도 이렇게 하여 어린이 한번 많이 모아 보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추측을 해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무엇이 열매다 그러니 이렇게 이렇게 하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그러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하고서 궁금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어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인지 그 내용을 보시면 자연히 알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이러한 열매이구나 이러한 열매는 세상에서 할 수 있다 해보자 이런식의 열매들이 아니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주 예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 안에서 나타나는 열매들이지 그분을 떠나서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열매를 맺으려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절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 나타나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무엇인지를 보면서 우리가 더욱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있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우선 믿음의 역사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그냥 믿음이면 되지 왜 역사라는 말이 붙는 것입니까? 참된 믿음이란 반드시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역사란 말이 새번역에는 행위로 되어 있습니다. 믿음에 따른 행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의 역사를 가장 많이 인용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는 말씀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입니다. 이 말씀을 앞뒤도 보지 않고 달랑 그 구절만 가지고서 어떤 식으로 적용합니까? 할 수 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자 가나안에 왜 못들어 갔는가? 부정적인 생각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나아가자 이것이 믿음의 역사를 이룬다 하면서, 총동원 전도도 하고, 특별새벽기도회도 하고, 대형집회도 하고, 북한 돕기도 하고, 커다란 건물도 지었습니다. 자신들의 땀과 수고로 이루어 놓고서도 말로서는 믿음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들이 말하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일들은 믿음이 없이도 얼마든지 할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히브리서 11:1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 말씀도 어떻게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가 하면, 지금 우리 예배당이 비록 초라하고 보잘 것 없지만 앞으로 5년 후에는 멋진 새 예배당으로 지어질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되어질 그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열심히 헌금합시다. 그러면 여기서도 믿음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바란다고 합니다. 그러나 5년 후에 지어질 예배당건물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이하에서 믿음의 선진들이 무엇을 바라고 기다린 것입니까? 아벨이 에녹이 노아가 아브라함이 무엇을 바라고 믿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약속의 실체가 오시기를 믿고 기다린 것입니다. 모든 언약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란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증거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믿음의 증거란 같은 원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타납니까? 디모데전서 6:6-12절을 봅니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유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역사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피하고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위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다면 이것이 믿음의 역사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루어 낼 수 있는 일들을 믿음의 역사라 하지 않습니다. 엄청난 업적들을 가지고 믿음의 역사라고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영생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알고서 그것을 위하여 세상의 것들을 버리는 일들이 믿음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의 역사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땅의 것들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것들 땅의 것들을 사모함을 피하고 영생을 위하여 믿음을 사랑을 인내를 소망을 영생을 추구하고 달려가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니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러한 믿음의 역사가 나타남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말씀의 능력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랑의 수고입니다. 기독교만큼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 곳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지 주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디모데 후서 3:1-5절입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며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게 돌아서라"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니 무엇이 가장 필요합니까?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일에 쓰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아니하는데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인색한 것입니다. 자기의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때가 지금 아닙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 가장 귀하고 좋게 여기는 것을 교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내어 놓습니까? 형제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 되는데 어떻습니까? 집에서 쓰다가 별로 쓸모가 없어지고 치우기도 귀찮으면 이것 교회(예배당)갖다 놓을까 그러지 않습니까?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사랑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누가 진정 수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누가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까? 모두가 사랑받기를 원하고 자기를 사랑하여 주기를 원하고 있는데 어떻게 사랑의 수고가 나오겠습니까? 자신이 얼마나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또한 받고 있는지를 모르기에 끊임없이 사랑받기만을 원하고 사랑의 수고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말이 아니라 수고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란 말에서 나오는 모든 내용들이 결국 자기의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하셨고 그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사랑이 나오지 않음은 여전히 자기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예수님이지 교회(조직이나 건물)가 아니라고 하니 자기 가족만 챙기는 것입니다. 가족도 아니라 그러면 결국 자기만 챙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가 지적받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사랑안에 살고 그 사랑이 넘침으로 우리 안에서도 아름다운 사랑의 수고가 나타나기를 사모하고 기도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소망의 인내입니다. 나의 사사로운 꿈이나 장래의 계획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입니다. 단지 우리가 이것은 되었으면 하는 그러한 소망이 아닙니다. 이미 로마서 8:24-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렇게 보시면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어떤한지를 조금이나마 살펴 보았습니다. 이러한 내용들로 우리안에 채워지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꾸만 세상의 것들로 채우면서 말로서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데살로니가서에서 결론적으로 살펴봅니다. 살전 1장 9절에서 10절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이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상을 다 섬기고 있습니다. 노골적이든 은근하든 간에 다 우상숭배자들입니다. 탐심이 우상숭배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 것이 바로 믿음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동안의 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 것보다 더 큰 믿음의 역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랑의 수고가 당연히 나오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사랑을 받기 위하여 모든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알았기에 이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소망에 대하여는 10절입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결국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어디로 갑니까? 그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시요 그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인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는 인내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장래에 노하심에게 건지실 것입니다. 주님의 진노하심이 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는 자들은 장래에 노하심이 임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4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결국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있는 자들입니다. 복음을 증거함으로 이러한 자들을 얻게 된다면 그들로 하여금 함께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택하신 자들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4-8 복음의 능력 2001. 6. 27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을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 받는 자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니야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 복음을 전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이 나타난 것을 보니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것이요 사랑하신 것임을 안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택함을 받았는지 아닌지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하면 그 사람이 복음을 기뻐하는지 배척하는지를 통하여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유대인의 회당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이란 바벨론 포로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봅니다. 이들이 여러곳에 흩어져 있기에 유대인 성인 열명이면 회당을 하나 세울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회당에서 매 안식일에 모여서 모세오경이나 선지서 시편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이 귀하기에 회당에만 보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회당에가서 복음을 전하니 믿는자도 있고 배척하는 자도 있는 것입니다. 주로 배척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 참되신 하나님을 증거하니 배척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헬라인들 가운데서도 복음을 인하여 손해가 오는 사람들은 배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아서 바울과 실라를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며 이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복음을 받아 들일수가 있었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복음, 복음 말은 합니다. 그러나 정말 말로서만 나타날수가 있습니다. 아직도 종교적인 습관들이 몸에 배여 있어서 옛날이 오히려 그리워 하는 것입니다. 이것 저것을 행하라 그러면 복을 받는다. 또는 이것 저것을 행하지 말라 저주 받는다. 이런 식의 가르침을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다른 것은 고민 안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설교를 들으면서도 오늘은 무엇을 하라는가 무엇을 하지 말라는가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받아 적든지, 아니면 기억을 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신경씀이 과연 주님을 사랑해서인가, 아니면 자기에게 손해가 오지 않고 복이 오게 하려는 방책인가를 점검해보면 거의 다 후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에 대하여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또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점검해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복음의 능력안에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5절을 봅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여기서 우리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자와 복음을 받는 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은 말로서만이 아니라 참으로 자신들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복음을 받은자의 동질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복음안에서 하나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이 말로서만이 아니라 어떻게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만 들으면 대단한 능력의 종이 나타나서 기적을 베풀고, 신기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보아라 지금도 하나님의 살아계신 현장을 체험하라 그러는 것입니다. 지금 울산에 있는 어느 교회는 산뿌라로 덮어씌운 이빨이 그 교회에 가서 목사의 기도를 받으면 산뿌라가 금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금요기도회때 그렇게 하고 있답니다. 의성 누곡교회 심목사님이 얼마전에 오셨을 때 그 말씀을 하시던데, 얼마전 라듸오 상담프로그램에서 그것을 질문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기적과 능력으로 보고 있으니 이초석이나 이재록같은 사람들이 이땅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말하고 있는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란 어떤 것입니까? 5절 끝에 보시면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어떠한 사람으로 알려졌습니까? 살전 2:2절을 봅니다.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중에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고 합니다.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한 것이 사도행전에서 잘 나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 와서는 그러한 고난과 능욕이 없었겠습니까? 사도행전 17:5절을 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 내려고 찾았으나" 빌립보에서만이 아니라 데살로니가에서도 역시 고난과 능욕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형편을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잘알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데살로니가 2:9절입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이러한 고생을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목도한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자가 벤츠를 타고 와서 손한번 흔들면 병자들이 살아나고, 말한마디 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그러한 전도자가 아니라 죽도록 고생하는 모습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이 전하는 내용을 누가 귀담아 들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러한 바울의 모습을 알면서도 그가 전한 복음을 받아 들였다는 것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입니다. 즉 성령으로 아니하고서는 누가 그러한 복음을 듣고서 기뻐하고 따르겠습니까? 살전 1:6절입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복음 전하는 자만 환난과 고생을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받은 자들도 환난을 당한 것입니다. 어떠한 환난이겠습니까? 바울이 당하는 그러한 환난인 것입니다. 살전 2:14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결국 복음을 인하여 같은 고난을 받는데도 예수님과 바울을 본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난이요, 바울도 그 십자가의 고난을 증거하면서 온갖 환난과 고생과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이러한 고난의 주님과 또 바울을 본 받는다는 것이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을 전한다는 사람들의 기술과 테크닉이 얼마나 세련되고 화려한지 모릅니다. 말로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음향과 조명과 멀티미디어까지 갖추고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있는지 대형교회들과 대형집회들에 가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만사 형통이 외쳐지고 있습니다. 크고 힘있게 된다고 외칩니다.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단지 성공을 위하여 치르는 희생정도로 생각합니다. 어디에서도 바울의 복음 전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예수 믿어서, 가정이 잘되고 나라가 잘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을 가지고 세계를 복음화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능력이라 성령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성경을 보고 있는 것입니까? 다시 6절을 봅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자 되었느니라" 환난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무엇이 있습니까? 성령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이 없어지고 나의 어려움이 사라지면 기쁨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기쁨이란 성령으로 인하지 않고서는 모두가 순간이요 안개요 허무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이러한 기쁨을 맛보지 못하면 예수를 믿는 것이 참으로 피곤하고 힘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환난 가운데서 도대체 무엇이 기쁨이 되는 것입니까? 바울이 감옥에서 기뻐하는 기쁨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복음을 인하여 고생하는 것이 기쁨이 되는 것이 도대체 어떤 능력입니까? 데살로니가 전서 5:18절에서는 무어라고 합니까?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능력이란 많은 환난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받은 것이 기쁨입니다. 이러한 기쁨이란 지금까지 자신의 만족과 유익이 있으면 기쁨이고 자신의 불만족과 손해가 오면 화가 나고 기쁘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러한 것들에 상관없는 기쁨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살전 2:3-4절입니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환난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에 기뻐하는 것입닌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이 말씀에서 점검을 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에 화가 납니까? 오직 나의 만족과 유익이 채워지면, 나의 명예와 자존심이 세워지면, 나에게 기쁨을 주는 일들이 일어날 때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복음의 능력이란 지금까지 자신의 만족과 유익과 기쁨이라고 여긴 것들이 순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것임을 알고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사람이 된 것이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제는 나의 기쁨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를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직장일이나 가정이나 무슨 일을 하든지 나의 모든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를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고 아직도 범사에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서만 살고 있다면 우상 예수를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만족과 기쁨을 위하여 교회에 들락거렸다면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데도 기뻐할수 있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렇게 기쁜 것입니까? 1:10절입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요 소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이 증거되고 그 예수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참으로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음을 받아 들일수 있는 자는 참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2:1-5절을 봅니다. "형제들아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자세가 나옵니다. 사람의 어떠한 지혜나 지식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좋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십자가의 영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소식이 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님이라고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심판의 소식앞에서 예 참으로 그러합니다하고서 죄를 회개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아부하거나 아첨하지 아니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대로 증거할 뿐입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이것을 반대하는 쪽과 받아들이는 쪽으로 나누어 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반대하는 쪽이 온갖 핍박을 가하여도 결코 굽히지 아니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능력을 육에 속한 사람은 결코 알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2:6-16절을 봅니다. "봉독" 누가 알아 들을수 있습니까? 오직 성령으로 알아 들을수가 있습니다. 복음은 이러한 자들을 골라내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으로 인하여 환난 중에도 기뻐하십니까?
살전 1:9-10 복음의 내용 2001. 7. 4
"저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라"
지난주에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았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나타나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그 복음의 능력이 어떠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사람이란 자기의 행동에 무엇을 기대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의미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행동의 중심에는 반드시 자신의 이익과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에 나올때에 자신이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이 만족되어야 한다는 요구들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난주일 낮예배중에 어떤 아저씨 한분이 두리번 거리다가 자리에 앉았습니다. 나중에 예배마치고 나가시길래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어떤 젊은 사람을 치료하는 곳에서 만났는데 그 사람이 교회에 한번 나와보라고 해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는 말이 자기가 사업을 하나 할려고 하는데 이런 곳에 와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겠나 해서 와보았다는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디다. 나중에 어느 집사남이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합디다. 이근처에 사는데 자기 아들이 다단계에 들어가서 약 오천만원을 투자하였는데 더 투자 할수도 빠져 나올수도 없어서 자기 아버지가 아들을 돕기 위하여 이 교회 저교회 나가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러나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거의다 자기의 바램이나 소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바램이 과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인가 하는 것을 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이미 주셨고 또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고서 자기가 평소에 소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달라고 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입니다.
그러면 복음의 내용이란 무엇입니까? 10절입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여기에서 한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입니다."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내용입니다. 사도행전 3:14-15절입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성전 미문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자를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키자 사람들이 주목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합니까? 이 사람이 일어난 것은 우리 개인의 경권과 권능이 아니라 바로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에 대하여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셔서 일하시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는 무엇을 전하여야 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5:1-4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한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음을 헛되이 믿지 않았다면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기초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모릅니까? 교회 나오면 그것 다 알고 믿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신 것은 사도신경에도 나오는데 그것을 모릅니까? 그런 것은 이미 믿고 있으니 그것 말고 믿고났으니 다른 것을 좀달라는 것 아닙니까?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에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우니 실질적인 도움을 달라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미 돈은 잘 안주시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마음의 위로나 평안이라도 좀 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각박하여 인심이 사납게 돌아갑니까? 그러니 교회안에서라도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것입니다. 군중속의 고독을 해소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들마다 사람들의 요구를 맞추어 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인들의 필요가 무엇인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교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알고 믿게되면 그외에 그동안 관심가졌던 것들이 다 죄임을 알고서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정말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나오게 되면, 성령께서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으로만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비록 건물이 초라하고, 목사가 볼품이 없고, 교인들을 돌아보아도 특별히 세상적으로 나은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복음안에서의 교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늘날 성도들의 가장 고질병이 십자가도 알고 부활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릴 때부터 외워온 내용이기에 너무나 잘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초등학생이 구구단을 달달외우면 수학을 다 공부한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알고 외우고 믿는다고 하는데 그 능력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말하고 있는데도 그 내용들이 모두 안개같고 그림자 같고 잠시있다가 없어질 것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5:1-11절을 봅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1)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2)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 한곳의 말씀만으로도 얼마나 엄청난 내용인지 몇시간을 다 말씀을 드려도 부족합니다. 이 말씀의 중심에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을 통하여 성도에게 주어지는 엄청난 내용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먼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은혜안으로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환난이 와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환난이 즐거울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환난도 즐거운 이유는 환난이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어 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능력이 무엇 때문에 일어납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죽으심, 그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었기에 우리가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로마서 6:1-11절입니다.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으심은 예수님 혼자의 죽으심과 부활이 아니라 그의 택하신바 된 성도들도 함께 죽음과 부활에 연합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란 그리스도와 한몸으로 연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일어난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과 부활을 모델케이스로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친히 우리를 그의 몸에 묶어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을 연합이라 세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함됨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것입니다.
로마서14:8-9절을 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의하여 성도란 이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거나 죽거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의 권세는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자와 죽은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 되시는지 에베소서 2장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주어지는 이러한 권세와 영광은 세상의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제대로 알게 되면 어떠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까? 주님의 십자가와 그 부활을 생각하면 다른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외에는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안에 믿음의 비밀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심령에도 복음의 내용들이 가득하여 지기를 소원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1:10 노하심에서 건시심 2001. 7. 11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비오고, 무덥고, 피곤할 때 수요예배쯤은 빠져도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없으십니까?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닌데 하루쯤 빠진다고 무슨 큰일이나 나겠나? 지금까지 잘 참석하여도 덕본것도 없고, 빠져봐도 별 손해가 온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보니 수요일은 많이 빠지던데, 오늘 하루쯤은 쉬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뭔가 개운치 않으면 다음주일 헌금할 때 평소에 헌금하는 것에 좀더 한다든가 하는 것으로 떼우시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오늘 새벽기도회 때, 열왕기 상 10장에서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하여 온 내용이었습니다. 이 여왕이 예루살렘까지 와서 하나님의 지혜를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에게 여러 가지 진귀한 예물들을 가지고 왔는데 그 중에 한가지 금만 120달란트 였습니다. 대략계산을 해 보았습니다. 1달란트가 6000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이 하루 일당입니다. 그러면 요즈음 일당을 5만원으로 잡으면, 약 360억원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위하여 지불된 비용입니다. 그러면 돈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하겠네요라고 하시지 말고 그러한 말은 헌금을 강조하다가 보니 반발로 인하여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어떻게 돈으로 따질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말씀이 공짜로 주어지는데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없이 값없이 와서 먹으라고 하는데도 오는 자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특수성입니다. 복음이란 분명히 기쁜소식입니다. 복된소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된소식을 공짜로 와서 듣고 받아서 가라고 하여도 오지 않습니다. 만약에 세상에 어떤 귀한 것을 준다고 하면 수백만원 수천만원을 들여서라도 달려올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양식에 대하여는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복음이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복음의 내용의 핵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믿는자가 함께 참여되어 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자는 죄에 대하여 죽은자요 의에 대하여 산자가 되었습니다. 죄의 권세가 주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생명이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몸을 가지고 있기에 여러 가지 유혹과 실패와 좌절을 맛보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결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죄의 삯인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우리가 알고 받았다면 우리는 정말 평생토록, 영원토록 주님을 찬송하여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이러한 감사와 기쁨과 찬양이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한지를 잘 모르고, 그러한 진노에서 구원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이 세상의 것들을 바라고 있지나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9절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께 소망을 걸었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예수님께 소망을 두면서, 기대하는 바가 이 세상의 것이라면 얼마나 불쌍한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고, 이러한 세상에 속한 것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아버지께로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좇아 온 것인데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은근히 세상의 것들을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예수님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웃 기웃거렸습니까? 혹시 떡이나 얻어 먹을까? 혹시 병이나 고쳐볼까? 무슨 기적이나 구경할까? 하고서 몰려든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은 썩는 양식이 아니라 영생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생얻는다고 하니 거의 다 떠나가버린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영생이 아니었습니다. 죄사함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현실적인 필요들을 위하여 따라 나선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안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필요로 인하여 나오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깨어지든지, 아니면 떠나든지 양단간에 결단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중간하게 있다는 것은 복음이 제대로 증거되지 않았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미가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사람들이 욕으로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제가 설교자로서의 고민이 정말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안색이 변하여 돌로치려고 하는 정도로 복음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은자는 서로 사랑하기를 눈을 빼어줄 정도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신 죽기까지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돌로 치는 것도 아니고, 목숨을 내어놓을만큼 사랑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복음을 희석시키고 있구나! 하는 고민이 늘 저의 고민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오늘 또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으로 기뻐하시든지 아니면 돌아서든지 하는 것입니다. 너무 냉정하지 않느냐구요? 어두움과 빛입니다. 썩어질수록 혼미만 거듭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전서 2:4-6절을 보시면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사람의 영광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을 기뻐하든지 아니하든지 간에 복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강림하심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그분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이제 그를 믿는자들도 살리시기 위하여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리심은 장래 노하심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장차 진노가 나타날 것입니다. 전 우주적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진노를 우리가 알고 믿는다면 이러한 진노에서 건지심을 받는 것이 가장 큰 복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아직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것들을 바라고 소망하고 있다면 이것이 어찌 성도의 자세이겠습니까?
우선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한지를 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1:18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불의에 대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의롭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로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하나도 빼지 말고 100% 다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처럼 지켜서도 안됩니다. 외형적인 충족만이 아니라 그 마음의 중심까지 온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가 없는 곳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 수많은 죄의 목록들이 나타납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것도 사실 일부입니다. 시기, 자랑, 수군수군하는 것도 결국 불의 이기에 하나님의 진노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진노와 저주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한곳만 더 보고자 합니다. 골로새서 3:5-6절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땅의것을 사랑하는 탐심위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탐심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들은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교회에서 하는 일도 얼마든지 탐심으로 일할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도, 찬양도, 기도도, 전도도, 선교도, 구제도, 건축도, .... 다 탐심으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실상이 이러한데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이 고안해낸 방법들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하신일을 믿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자꾸만 우리의 탐심을 없애고 우리의 자랑을 없애고 좀더 나은 것으로 열매를 만들어 내자라고 합니다. 다른 교회는 몰라도 우리교회는 바르게 개혁을 하여 보자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심은 이 세상을 고치시고 보전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이 악한 세상에서 자기 백성들을 건지시기 위함입니다.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지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밀알 장애인 마산 창원지소에서 메시지 한편을 부탁하였습니다. 우리교회가 지원을 하고 있으니 그러한 교회마다 한번씩 메시지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고 하여 글을 보냈습니다. 장애인의 사역이 얼마나 어렵고 힘드는 것입니까? 일년내내 가르쳐도 말 한마디 겨우 하는 정도를 언제까지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서라도 장애의 상태를 좀더 낫게 개선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좀더 나은 교육, 좀더 나은 재활치료, 환경등을 통하여 도와주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란 부족이나 장애가 아닙니다. 부족하면 조금만 채워주면 되고, 장애라면 장애의 요소를 제거하면 됩니다. 그러나 죄인이란 고쳐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어떤 좋은 환경이나 프로그램으로 고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죄악에서 건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얼마나 인간이 싫어하는지 아십니까? 인간의 불가능에서 출발을 해야 하니 사람들이 반가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란 우리의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는 자로서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아예 예수님을 협박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이것 해결하여 주지 아니하면 한번 두고보시오 재미 없습니다하는 식입니다.
'닭살돋는 묵상'이라는 책에서 나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벌벌떨면서 전봇대 밑에 서있고, 조폭같은 자가 위협적인 자세로 "결정은 내가 할테니 주님은 복이나 주소"그러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가 아닙니까? 주님의 진노를 생각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아는 사람만이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와 그 사랑을 제대로 알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한곳만 더 봅니다. 요한계시록 6:12-17절입니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과실이 떨어지는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낮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리라" 이러한 진노의 날이 장차 임하실 것을 믿으십니까? 이 때는 어떠한 세상의 신분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노앞에서 경악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굴과 바위틈에 숨어서 산과 바위가 무너져서 자신을 가리워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정도입니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이렇게 하겠습니까? 그 진노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진노라는 것입니다.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 양입니다. 이분의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노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이러한 것을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진노,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건짐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소식은 기쁘지 않고 장차 진노 가운데 불타버릴 것들을 바라고 소망하면서 교회나오고 예수님을 부른다면 얼마나 불쌍한 자들입니까?
오늘 하루를 살면서 우리가 무엇으로 기뻐하고 살았습니까?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짐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인하여 얼마나 기뻐하셨습니까? 이것이 기쁘지 않다면 지금 우리의 마음은 다른 것에 빼앗겨 있는 것입니다. 다시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복음으로 인하여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3:36절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진노를 피하고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알려지고 믿게 된 것이 복된 소식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기뻐하시고 감사하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5 하나님의 복음 2001. 7. 18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1절에서,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에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헛되지 않았음을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고난과 핍박속에서 데살로니가에 들어갔지만 헛수고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복음의 열매들로서 맺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이 전하여 지고 열매들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복음을 바울사도가 무슨 복음이라고 하는가 하면 2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우리가 전한 복음이라고도 하지만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그 복음의 기원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는 12제들과는 다르게 복음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을 함께 동행하였고,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부활하셨고 주와 메시야가 되셨다고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증거를 유대교에 대한 이단으로 보고 이들의 무리를 잡으려고 다니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이 바울이 예수를 따르는 이단들을 잡으려고 대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늘에서 강렬한 빛이 비추이고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받은 복음의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11-12절을 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전하는 이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다면 하늘에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이 12제자들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복음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바로 아라비아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3년후에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교제를 합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특징이라면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이 이미 유대의 경계를 넘어 섰습니다만, 특히 사도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의 기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받은 복음이기에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복음을 주신분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10절에서도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복음이란, 말 그대로 복된 소식, 기쁜소식인데 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기쁜소식이면 사람들이 기뻐해야 하는데, 왜 바울사도는 사람을 기쁘게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까?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 4절에서도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기쁜 소식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하는데 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참된 복음과 가짜 복음이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기쁜 소식이란 어떤 것들입니까? 아주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라면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라면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키가 작은 사람이면 키가 커지는 것이고, 학생이면 공부를 잘하는 것이고, 운동선수라면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것이고, 사업가라면 사업이 잘되는 것이고, 정치가라면 대통령이 되어 보는 것이고, 종교인이라면 자기 종교가 세계최고의 교세를 확보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됩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이러한 것들을 죄라고 고발하고 나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는 것이 복음의 전제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오히려 인간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숨겨져 있던 죄들을 들추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죄를 사하시는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는자는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인데 이것을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돼지가 진주의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돼지는 오직 자기의 배만 채워지면 행복한 것입니다. 자기의 욕구만 채워지면 만족하는 것이기에 진주를 던져 주면 오히려 그것을 발로 밟고 진주를 던져준 사람을 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돼지에게 필요한 기쁜 소식은 진주가 아니라 자기의 배를 채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돼지를 두고서 말씀하신 것입니까? 결코 아니지요! 사실 돼지는 자기 배의 80%밖에는 음식을 먹지 않는 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위장의 120%를 넘게 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의 탐심이 더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복음이 인간에게 기쁜 소식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이미 인간이 허물과 죄로 죽어 있기에 죄에 대하여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고통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몰라도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문둥병에 걸린 사람처럼 통증이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문둥병에 대한 상세한 규례들이 나와 있습니다만 문둥병이 있는 사람과 집은 철저하게 격리를 시키는 것입니다. 문둥병을 이제는 한센씨병이라고 부르지요. 듣기 좋지 않다고 바꾸어 부릅니다. 병신이라고 하지 않고 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동들이 장애인들의 인권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기에 그렇게 좋게 부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도 자신들을 구제불능의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실수도 하고 잘못을 한다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구제불능의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두고서 신도 이만큼 도와주니 인간도 이만큼은 채워야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에게 기쁜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복음이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기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2절을 봅니다. 이미 빌립보에서 많은 고난과 능욕을 받았습니다. 고난은 육체적인 것이고 능욕은 수치와 모욕이니까 정신적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받을수 있는 고난은 다 받는 것이지요. 이러하다면 복음을 전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기쁜 소식이기에 환영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왜 고난과 능욕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복음안에 사람이 기뻐하지 않는 소식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복음안에 넣어두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외에 주어진 의라는 것입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살아갈려면 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죄로 인하여 그 필요를 필요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복음안에서 주시고자 하시는 그 의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다른 것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의 싸움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기쁘게하는 것이라면 이것도 인정하고 저것도 인정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면 그 사람을 기쁘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6-17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복음안에 들어 있는 내용입닌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쓰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외의 것을 의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인간의 애씀과 수고와 땀과 심지어 피흘림까지 의미없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의롭다고 여긴것들 선하다고 여긴 것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의만 붙들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싸움은 이것입니다. 내가 행한 것을 붙들것인가? 아니면 나 행한 것 죄뿐이니 하면서 주님의 의만을 붙들것인가?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직 복음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만을 전하였는데도 복음의 열매가 나타난 것은 바로 하나님께로 온 복음이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기에 고난과 능욕을 극복하고서 증거가 되는 것이고, 그 고난과 능욕가운데서 전하여진 복음을 받아 들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복음이기에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은 자들이 세상의 영광과 부귀를 누렸다면 바울은 아마 가는 곳마다 최고의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바로 사람을 기쁘게 함으로 오는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순진한지 아니면 무지한지 모르지만 우리가 바르게 안해서 그렇지 바르게만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결국 세상에서 성공하게 될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내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구절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였습니까? 말구유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 과정은 고난과 능욕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지상에서의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고자, 주님을 따르고자 하면 할수록 고난과 능욕이 따르게 됩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우리가 경건하게 살려고 하지 않기에 핍박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마음만 먹어도 당장 핍박이 올것입니다. 회사에서 부정하게 하는 일을 못하겠다고 하면, "그렇게 해서 회사가 돌아가겠나?" "제가 예수 믿기에 이렇게 못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예수를 택하든지 회사를 택하든지 결정하게!" 가정에서는 아니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려고 헌금을 그렇게많이 해요! 이름을 밝히지도 않는데 적당히 하면 되지 그래가지고 언제 아이들 학원비 되고, 집이라고 장만 하겠어요? 이러지 않겠습니까?
오늘날도 바울의 복음을 전하게 되면, 역시나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뻐하는 복음으로 변질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 변질시키는 유혹들이 어떻게 들어오는 것입니까?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변질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사도가 어떠한 싸움을 싸웠는지를 보고자 합니다.여러분도 끊임없이 여러분을 좋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관심사는 사람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타협없이 하나님의 의만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자세는 3절과 5절에 나타납니다.
3절에서, 우리의 권면이 간사에서나 부정에서나 궈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면 간사하게 하면 됩니다. 속으로 아니더라도 밖으로 미소짓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궤계에서 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궤계라는 것은 아주 교활한 속임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미끼로 고기를 낚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교회 다니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준다고 합니다. 우리를 따르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준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 궤계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사탕으로 유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싶은 욕망들이 있는데 그 욕망을 이루어 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만 하면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너희가 나를 왜 따르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나의 살과 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사람의 인기를 얻으려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준다고 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사나 부정이나 궤계에 있지 않고 오직 순전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믿는자들이 나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5절입니다. 바울사도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상대방이 나에 대하여 진정이 아니라 아첨인줄 알면서도 아첨의 말을 하여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진심어린 충고는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 아첨에 대한 주석을 보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감언이설(甘言利說)이다. 어떤 사람에게 안도감을 줄 목적으로 그럴 듯한 말을 하여 자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첨을 왜 하는 것입니까? 상대방에게 안도감을 주는 것입니다. 거짓 확신과 거짓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물론 아첨을 당하는 자는 모릅니다. 자신이 평안하게 된다고 하니 그저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자신이 무언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자신의 목적이나 의도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은 종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종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아첨의 말을 하여서 자기를 따르게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좀 큰 교회가 되면 부교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안에서 경쟁이 있습니다. 누가 더 인정을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아첨의 말을 하여서 자기의 사람들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교역자들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성도들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사람들을 만들기 위하여 얼마든지 아첨의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선거가 임박하게 되면 평소에는 전화 한통 없다가도 괜히 전화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첨의 말을 하는 것을 결국 탐심의 탈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하나님을 위하는 것처럼 탐심의 탈을 쓰고 나오는 것입니다. 가장 교회를 위하는 것처럼 탐심의 탈을 쓰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결국 자기의 다른 목적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른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의 팽창입니다. 자기의 세력화입니다. 이것이 탐심의 탈을 쓰고 나오는 모습입니다. 입만 벙긋하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일,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얼마든지 탐심의 틀을 쓰고 나올수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설마 저 사람은 아니겠지, 그러나 설마가 사람잡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 말씀에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떠하였습니까? 간사하거나 부정하거나 궤계가 아니었습니다. 아첨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신은 정말 성실하고 진실하다고 사람들이 인정하고 칭찬하고 영광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엄청난 핍박과 고난과 능욕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목적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복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영광이냐 아니냐는 관심밖의 일입니다.
4절을 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복음을 받았다는 것은 이러한 삶이 나타나는 것이 증거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간사하게 하거나 궤계를 쓰거나 아첨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이나 행동들이 모두 하나님의 감찰하심 아래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을 받은자의 삶의 자세입니다.
살전 2:6-12 사도의 의무과 권리 2001. 7. 25
6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1)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7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9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10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모든 직분에는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자신이 행할 의무를 당연히 하였다면 권리도 주장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의무는 행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하는 자들이 많다면 이런 곳은 참으로 피곤한 모임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무는 충분히 감당하는데도 자신의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모임이 되겠습니까? 오늘은 바울 사도의 의무와 권리가 무엇이며, 또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합니다. 사도란 여러분이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보내심을 받은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사도들을 보내실 때 무엇을 위하여 보내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우선 열두제자들을 봅니다.
마태복음 28:18-20절입니다. "18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전권을 하나님께로 부여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권세로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보내시는 것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이란 "천국복음"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전하도록 사도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이 주된 의무를 소홀히 하게 되는 경향이 사도행전에서 나타났습니다. 교회안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구제의 문제로 말썽이 생기자 사도들이 자신들의 본연의 의무로 돌아가기 위하여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집사를 세운 것입니다.
사도행전 6:1-6절을 봅니다. "1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1)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2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2)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3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4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3)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5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사도들의 본연의 의무란 말씀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제하는 일이나 제정출납들의 일을 하다가 보니 말씀을 제쳐두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여 집사를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겠다고 하니 성도들이 기뻐한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겠다는 사도들의 말을 듣고 성도들이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도 자신들이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지, 사도들이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슈퍼맨 목사를 원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교회정치를 배울 때, 교회에도 정치가 있는가 하시겠지만, 교회에 직분을 세우고, 행정적인 절차를 행하고, 치리를 하는 것들이 모두 교회 정치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공부를 할 때, 교수 목사님이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목사가 설교 못해서 좇겨 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행정에 미숙하여 좇겨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치를 잘못해서 좇겨 난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면 그만 두든지, 좇겨 나든지 해야 하는데 목사의 주된 임무는 관심이 없고, 사소한 일들로 인하여 좇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기 보다는 정치를 잘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교인들 사이에 정보원을 두고서 이런 저런 동태를 살피며 적절한 처방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뿐만 아니라 목사가 건축전문가가 되어 가고, 그러다 보니 부동산 전문가도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능력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말씀만을 전하면, 고리타분하다고 하고, 융통성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목사가 모든 일을 다해 달라고 합니다. 이것도 해주시고, 저것도 해주시고 하는 식입니다. 그러면 결국 여러분이 손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만능 엔터테이너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인기 있는 연예인은 한두가지로 인기가 있으면 안됩니다. 만능이어야 합니다. 단지 노래만 잘하거나, 연기만 잘해서 안됩니다. 춤도 잘 추어야 하고, 재치 있게 말도 잘 해야 하고, 운동도 잘해야 하고, 대중이 즐거워 하는 일이라면 엽기적인 일이라도 얼마든지 해내는 그러한 연예인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가 쇼를 하는 것입니다. 일부러 웃기기 위해서 유모아집을 열심히 보아야 하고, 노래도 잘해야 하고, 옷도 잘 입어야 하고, 목소리, 표정, 다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모와 목회자 자녀들 까지도 완벽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들에 맞추어 주려고 하다 보니, 결국 말씀을 제쳐두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러분의 유익을 위하여 무엇을 목사에게 요구해야 할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된 임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서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행전 6: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라고 합니다. 만약 사도가 자신들의 의무에 충실하지 않았다면 교회가 구제사업소롤 바뀌었을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기에 이렇게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입니다만. 오늘날도 교회가 말씀에 관심이 없으면, 교회가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도 얼마든지 할수 있는 일들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수 있는 것입니다.
열두사도들이 이렇게 되었다면 바울은 어떠합니까? 열두사도들과 다른 배경에서 사도가 되었으니 사도의 의무가 달랐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역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의무 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4절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바울 사도의 의무인 것입니다. 주님께 부탁을 받은 것이 복음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사하게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는 미끼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복음을 부탁 받았기에 이러한 복음을 변질 시키는 자들이 있다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할지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세가 자신의 의무에 충실한 자세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인하여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지만 그러나 자신이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마당히 할 일이기에 자기 자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의무적인 일이라서 마지 못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으로 인하여 자신이 의롭다함을 받은 이 은혜의 복음이 얼마나 좋은지 사도행전 20:21-2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2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이것은 단지 의무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도 조금도 아까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의무일뿐만 아니라 주님의 크신 은혜로 인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복음 전하는 자로서의 권리는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권리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9:1-18절입니다.
1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1)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4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5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6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7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모세 율법에 ㄱ)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다른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13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15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17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18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이러한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권리를 사용하는 것이 전혀 무리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더욱 그러한 권리를 주장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개척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그러한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복음이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하며, 자신의 권을 다 사용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바울은 또다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복음을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권세를 다 비우시고 종으로 오신 것처럼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6-8절을 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자신이 사도로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능히 권리를 주장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권리를 주장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유순하게 어머니가 아이를 다루듯이 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머니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자녀를 키우듯이 바울 사도가 단지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주고자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의 사랑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 사랑이란 바로 복음을 듣고서 복음의 열매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까지 내어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9-11절입니다. "봉독" 이러한 수고가 사랑하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 그러면 그를 위하여 수고하고,내어 주는 것이 힘이 드는 것입니까? 행복입니까? 행복입니다. 현대인들이 행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 없으면 죽겠습니다. 나는 죽도록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이러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고 광고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순전히 자신들이 욕심만 채우려고 하지 희생하고 인내하고 섬기고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말로는 사랑이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입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이란 자신을 희생하고 수고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내어주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행복한 것입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이러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랑이란 결국 자신이 복음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으며, 그 사랑으로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여 복음의 열매를 보게 되니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최양이 집사가 성민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한 사랑입니다. 아이가 잠안자고 애를 먹이니 힘들고 괴로운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그것도 기쁨과 행복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누가 이러한 사랑을 할 수가 있습니까? 단지 의무와 권리만 남은 그러한 관계란 이미 죽은 관계입니다. 부부라고 의무과 권리만 주장한다면 법적인 남남은 아니더라도 이미 남남인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의무와 권리의 관계로 유지됩니까? 사랑의 관계로 유지됩니까? 저와 여러분이 목사와 성도라는 의무과 권리주장으로 유지됩니까? 아니면 사랑으로 유지되고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우리가 사랑의 관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다고 의무와 권리도 충분하지 못합니다. 의무는 소홀히 하면서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그런 모습이 우리에게 없습니까?
바울 사도와 고린도 교회의 사이가 의무와 권리의 관계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바칠지라도 권리는 사용하지 않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자신의 권위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와 주님의 관계가 의무과 권리의 법적관계로 된다면 우리 모두는 죽어 마땅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의무도 제대로 행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저 주시는 은혜의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알고서 주님을 나의 생명처럼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끼리 만나면 계산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여 목숨까지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하지 못한 우리의 이기적인 모습을 회개하여야 할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없는 에베소 교회에 주님은 촛대를 옮겨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어디에서 사랑에 실족하게 되었는가 돌아보고 회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이 있기라도 하였습니까?
이제 다시 복음을 들읍시다. 복음의 능력을 알아 갑시다. 그리하여 의무와 권리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러한 복음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12절의 말씀이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데살로니가전서 2:12절입니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 사도가 자신의 의무를 다 행할뿐만 아니라 자기자신까지 내어주고자 한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복음 때문입니다. 그러한 복음을 전하여 복음의 열매로서 데살로니가 성도를 만나게 되니 계산없는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결국은 우리를 부르시고,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 나라와 그 영광의 나라에서 사는 모습이 어떠한지를 조금이나마 보게 됩니다. 의무와 권리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자기의 목숨까지 내어주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우리가 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을 정당화하지 마시고, 회개하면서 이러한 사랑, 자기를 내어 줌으로 행복해하는 이러한 사랑을 맛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알고 그 사랑과 그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데살로니가전서 2:13-16 말씀의 역사 2001. 8. 22
13○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14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15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바울의 감사.
13절에 보시면,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감사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쉬지않고 감사한다고 합니다. 사도가 이렇게 감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도가 전하는 복음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흔히 생각하고 있듯이 목사가 전하는 말은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라는 식으로 말하면 곤란합니다. 목사의 말을 무조건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라고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라고 말하기 보다는 '우리 목사님이 그러지 않던데요'라거나 또는 '어느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던데요'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맹신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씀을 받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할것입니다. 저것은 옳고 저것은 틀렸고 그렇게 말씀을 받으면 은혜가 되지 않지 않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는 것은 아직 자신이 말씀을 받고 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말을 잘 받아 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받아 들일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본성상 받아 들이지 못하고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 어느 구절이라도 우리가 환영하고 받아 들일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말들이란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 들일수 있는 논리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받아 들이기 힘이 드는가는 몇가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청년때에 일을 하고 있을 때 였습니다.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여주인이 교회집사인데 너무나 인격적인 모독을 하는 것입니다. 일을 그렇게 잘못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성실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보다 못하여 편지를 한 장 썼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종이 아니지 않느냐고 계약이 끝나면 그만인데 너무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성경을 한절 인용하였습니다. 골로새서 4:1절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찌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라는 말씀을 쓴 것 같습니다. 편지를 주고서 바로 퇴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출근을 해보니 분위기가 이상한 것입니다. 그집의 자녀가 자기 어머니가 내 편지를 보고서 한숨도 못잤다는 것입니다. 나는 회개하여서 그렇게 되었나 했더니 정반대입니다. 감히 네가 무언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을 하는가 하는데 기분이 상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이러한 자세가 되지 않습니까? 그 말씀을 누가 전하든지 간에 우리의 자녀가 말씀을 한절 듣고 와서는 부모의 잘못을 말씀으로 지적을 할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회개합니까 아니면 그 아이를 나무랍니까? 아니지요 어느 목사가 전도사가 아이들한테 이따위로 가르쳐 놓았는가 하고서 화가 나지 않습니까?
한가지 더 예를 들지요 그때는 청년때에 그렇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목사가 되어서도 설교를 하면서 인간의 자존심을 지적하면서 고3학생들이 대학에 떨어지면 교회도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더니 이 말을 자기에게 한것이라고 하고서는 자기 아내에게 가서 이야기하고 울고 불고 아는 집사들에게 전화하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적을 받고 책망을 받을때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면 이것이 생명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드문지 모릅니다.
말씀의 역사.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얼마나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너희가 나의 전한 복음을 사람의 말로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으니 쉬지않고 하나님께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전하는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인 것입니다. 13절 하반절을 봅니다.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바울사도의 말을 사람의 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복음을 믿게 되고 그 믿음에 따른 변화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말씀을 내가 받아 들이고 그 다음에 나의 행동을 바꾸어 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언제나 말씀을 받아 들이고 행동을 하는 내가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역사하느니라는 것은 로빈슨 이라는 사람이 아주 깊게 연구를 하여서 이 말씀은 "역사되어 진다"라는 수동태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의 능력이 있기에 말씀을 받아 들이는 것도 말씀의 역사이고, 그 말씀을 받아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나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의 역사로 인하여 또 하나의 일이 일어난 것은, 유대에 있는 교회를 본받고 박해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유대에 있는 교회를 본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본받음이란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은 교회를 본받았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핍박을 받은 교회를 본받다니 이게 있을수 있는 일입니까? 만약 우리 교회가 한국의 어떤 교회를 본받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떤 교회를 본 받고 싶습니까?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좋은 교회로 소문난 곳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수많은 교회들중에서 말씀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는 교회를 본받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말씀의 역사는 그러한 핍박받고 있는 유대에 있는 교회를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 고난이란 유대에 있는 교회가 유대인들에 핍박을 받듯이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 동족에게서 핍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인 것이 말씀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부터 고난과 핍박을 통하여 받아 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는 자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선포되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서라도 일단 많은 사람을 확보하고서 가르치고 훈련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려 합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비록 꺼려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여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골라내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대부분 전자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사람이라도 더 데리고 와서 말씀을 듣게 해서 교인이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전도가 그런식으로 이해되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태신자를 만든다고 야단들입니다. 태신자 카드를 만들어 나누어 주고서는 이중에 한두명은 데리고 올수 있다고 하면서 아주 상세하게 부모형제,친지,단골가게 주인,배달하는 사람들, 이웃사람들 등등을 목록화하여 한사람이 두사람씩 세사람씩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요즈음 카드회사들이 자기카드 회원 늘리는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선포되고 받아 들여 지는가를 성경에서 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8-25절입니다."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바 ㄱ)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1)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멸망당할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편을 가르는 것입니다. 세상은 편을 가르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과 그렇지 아니한 자들을 말씀은 갈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역사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살려내는 것이고, 멸망받은 자들은 알아 듣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 말씀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 볼때는 반드시 미련하고 거리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이 구원얻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미련한 것입니다. 여기서 전도란 설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란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선포의 핵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들의 전도, 설교,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의 핵심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다"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고 거리끼는 내용입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핍박.
15-16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쫒아 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자기 동족들이 구원을 얻기를 얼마나 애를 썼는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한다고 하여도 끊어지지 아니할 줄을 알지만, 그렇게 간절히 바랐지만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하여 막는 자들에게 여지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란 결국 복음에 달린 것입니다. 누가 복음을 받아 들이고 있는가 배척하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일을 좋아하지 복음은 좋아하지 아니합니다. 자기의 의를 내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복음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의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면 자신이 얼마나 중한 죄인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의 의가 누더기임을 알고 오직 주님의 의만을 사모하게 되는 것이 말씀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인지 사람의 말인지 알아 들을수가 있습니까? 여름 수련회때 몇분의 목사님들과 함께 하였는데 그중에 두분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한분은 신비주의 쪽으로 열심이었답니다. 기도를 해도 공동묘지에 성도들을 끌고가서 기도시키고 안수하고 방언하고 통역하고 환상보고 하는 그런 쪽이었는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늘 이것은 아닌데 이것은 아닌데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열심'란 책을 보고서 그래 이것이구나 하고서 복음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였답니다. 또 한분은 조용기 목사를 좇아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니면서도 이것은 아닌데 아닌데 하다가 박영선 목사님의 책을 통하여 복음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서 다시 공부를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것은 아닌데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말씀이 그러한가 하고서 말씀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 주의할 점은 자기의 마음에 안든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게 아닌데 하고서 거부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참으로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게 해 달라고 바울사도가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여야 그 말씀의 역사로 인하여 주의 택한 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바꾸어 버리면 얼마나 큰 죄악입니까? 자신도 천국에 못가면서 천국 갈 사람도 가로막고 있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대한 사도의 책망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도 잘못된 말씀으로 인하여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더욱 주의 말씀에 주의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7-3:10 바울의 기쁨 2001. 8. 29
17○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19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바울사도의 교회에 대한 사랑과 감사.
오늘 말씀은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교인을 향한 사랑과 관심이 나타납니다.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지 내가 어쩔수 없이 떠났지만 그러나 몸은 떠났지만 마음이 떠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바울이 떠난 것을 수동태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쩔수 없이 떠나게 되었지만 그러나 마음이 떠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몸이 떨어져 있다고 하여도 마음이 멀어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그리워하고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람이 있습니까? 성도와 성도의 관계이든, 목사와 성도의 관계이든 그리스도의 복음안에서 이러한 그리움과 보고싶어함이 있습니까?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그러나 늘 보고싶고 그리운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단지 옛날 한교회 출신이나, 동문이나, 같은 고향사람이라는 관계가 아니고 복음안에서 만나서 교제가 계속되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없다는 것이 불행한 것입니다. 그저 친목을 도모하기위한 모임들은 몇 개씩 가지고 있을지라도 말씀의 교제를 위한 모임이 얼마나 됩니까? 바울과 데살로니가 성도간의 이러한 사랑과 관심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일까요?
그 사랑의 근거.
골로새서 1:3-6절을 봅니다. 3○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5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2)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나 다른 교회에 대한 사랑과 관심도 동일한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기쁨과 감사가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듣고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이 나오는 것은 그 근거가 하늘에 쌓아둔 소망때문입니다.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함께 바라보는 사람이 생긴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만이 느낄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자꾸만 땅에만 소망을 두고 사니까 기쁨과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소망을 둔 자라면 그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기쁘고 감사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복음을 듣고서 복음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3:1-4절을 봅니다. 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하늘에 소망을 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으로 거듭나게 된 자들이 위엣것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땅엣 것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영광과 소망과 기쁨을 자신의 면류관으로 바울사도가 보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9-20절을 다시 봅니다. "19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바울사도의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 데살로니가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 성도들이 바울사도의 영광과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나타날 소망과 기쁨과 자랑을 바울사도는 이미 맛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소망과 기쁨과 자랑이 있습니까? 이런것이 없음에 대하여 안타깝게 여기고 부러워하고 하는 성도가 얼마나 희박한지 모릅니다. 왜 이러한 기쁨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단의 방해공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사도와 데살로니가 성도간의 교제도 방해하는 세력이 있는 것입니다.
18절에 보시면, 바울사도가 한두번 가고자 애를 썼지만 가지 못함은 사단의 방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단의 방해를 바울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사단의 가시라고 하였기에 육체적인 질병으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르게는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의 방해로 쫒겨 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로 들어가지 못하게하는 금지령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겠지요 그래서 자신들은 그리스 아테네에 머물면서 디모데를 보내는 것입니다.
3:1-10절입니다. "1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2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3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4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5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6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7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8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9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10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만나기를 원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을 더욱 든든히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지 못하여 디모데를 보내면서 역시 성도를 굳게 하고 믿음에 대하여 위로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 들임을 통하여 당하게 되는 여러 가지 환난에 요동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사단의 방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안에 있는 자유를 가만히 엿보고서 요동하게 하려고 시험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바울의 전한 복음을 헛되게 할까봐서 디모데를 보내었는데 디모데가 가지고 온 소식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소식을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바울사도를 간절히 보고자 하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한 자들이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였기에 우리라고 표현을 합니다-당하는 여러 가지 궁핌과 환난 가운데서 그들의 믿음의 소식을 듣고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도 그들이 믿음위에 선 것을 인하여 이제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과 감사가 바울자신의 노력과 애씀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감사를 결국에는 어디로 돌리고 있습니까?
9절을 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라고 합니다. 결국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궁핍과 환난중에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기에 이러한 복음의 열매가 나타남을 인하여 자신의 기쁨과 영광과 자랑일뿐만 아니라 이러한 열매를 허락하신 궁극적인 원인을 하나님께 두고 있기에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이러한 기쁨과 감사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인한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까? 복음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기에 이 복음이 우리를 살리는 능력이 됨을 인하여 감사하고 기쁘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나같은 죄인에게 이렇게 놀라운 복음의 선물을 주셨습니까? 이 은혜를 무엇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겠습니까 하는 그러한 감사가 나오고 있습니까? 이러한 감사와 기쁨의 교제를 함께 나눌수 있는 지체들이 있습니까? 바울사도의 기쁨과 감사는 결단코 이 세상에서 평안하고 잘먹고 잘사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환난과 궁핍과 질고가 그를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기쁨과 감사가 나오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이 문제를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땅에 것입니까? 하늘에 것입니까? 우리의 관심사가 예수님이 재림하실때에 기쁨과 감사와 영광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 재림하실 때 불타버릴 것들입니까? 예수님 재림하실 때 나타날 그 기쁨과 감사와 영광을 생각하신다면 바울사도와 같은 기쁨과 감사가 우리에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환난과 궁핍과 질병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뛰어넘는 하늘 은혜와 기쁨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우리의 관심사가 이 땅의 것들이라면 이러한 하늘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손해앞에서도 벌벌떨게 됩니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어떤 책제목을 보니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라는 책이 있습디다. 이 내용은 시간을 잘 지킨다. 참는다. 남의 말을 잘 들어준다. 배려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기록하여 놓았습디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사소한 것들도 아닌, 정말 별 것 아닌 것들로 인하여 목숨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들입니까?
오늘 새벽기도회때 아합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왕이 자신의 정원을 넓히기 위하여 자신의 궁궐근처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봇에게 다른 포도원을 주든지 아니면 돈을 줄테니 포도원을 자기에게 팔라고 합니다. 그러자 나봇이 거절합니다. 가나안 땅은 사거나 팔거나 할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이스라엘의 헌법이니 왕도 어찌 할수 없어서 그것 때문에 밥도 안먹고 답답해 합니다. 이 아합의 모습을 보고서 이세벨이 나봇을 모함하여 죽이고서 포도원을 차지 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아합과 이세벨이 얼마나 비참하게 죽는지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핥고 이세벨은 개들이 뜯어 먹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원을 넓히지 못하여 근심하고 답답해 하는 아합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다 나그네로 사는데, 아무도 거부할수 없는 사실인데 사람들은 그래도 자신의 정원하나 넓히는 일로 인하여 답답해 하고 있는 이런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물론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나라이기에 땅도 사고 팔고합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와 다른 교회들을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당 건물을 지었다든가 누가 어떻게 출세하였다든다 하는 것을 일체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되고 그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서 어떠한 환난과 핍박가운데서도 믿음이 든든히 세워지는 것을 인하여 기쁘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하여 나의 진정한 기쁨과 감사가 어디에 있는가를 점검하여야 할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까? 안개와 그림자와 바람을 붙들고 무언가를 잡았다고 감사하고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나타날 그 기쁨과 감사와 영광을 나의 면류관으로 여기고 살겠습니까?
끝으로 빌립보서 3:17-4:1절을 봅니다. "17○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18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1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요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이러한 약속의 말씀이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감사와 자랑과 면류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9-13 바울의 기도 2001. 9. 5
"9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10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11○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12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지금 어느 교회에서는 500명의 교인중에 400명이 새벽기도회에 나온다고 합니다. 그들의 기도의 내용의 주제는 자식이 잘되기를 원하는 것이 제일 목적이라고 합니다. 부흥회를 통하여 기도하면 자식이 잘된다고 하였고, 그리고 헌금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몇일씩 기도하라고 부흥회를 하는 여전도사가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천번제를 함께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기도를 너무나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을 은혜받았다고 하면서 열심히 새벽기도 금식기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성경적인 신앙의 모습이라고 볼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어머니들이 우리 조상의 어머니들이 자식이 잘되기만 한다면 한 겨울에도 정한수 떠다 놓고서 얼마나 빌고 또 빌었습니까? 그러니 자식 잘되는 것은 곧 자기의 집안이 잘되는 것인데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러한 욕구와 바램이라는 불씨가 사람들안에 다 들어 있는데 거기에다가 부흥회를 하면서 기름을 부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불이 붙은 것입니다. 자신들의 욕망의 불씨에 불이 붙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당장 그러면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목사님을 기도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적이 한번도 없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러분들이 새벽기도회에 별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전에는 기도하면 자녀들이 잘된다고 할 때는 억지로라도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특별기도회를 한다면서 도장을 찍는다고 할 때는 거의다 새벽기도회에 나왔다면서요? 그런데 왜 요즈음은 그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재미가 없지요! 기도란 나의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이 기도로 알고 있었는데 성경에서 보니 기도는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이 세워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니 이런 기도를 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 말씀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기도는 하기 싫고 잠이나 자자는 것 아닙니까? 혹시 새벽에 잠이 깨어도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잠언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가난과 궁핍이 도적같이 임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단지 물질적인 가난만을 말하고 있을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성도라면 믿음에 부요하여야 하는데 그러한 기도는 하기 싫은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십시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기도를 하여야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줄을 잘 모르면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의 기도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오늘은 바울사도의 기도를 보고자 합니다.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소식을 듣고서 모든 기쁨으로 기쁘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감사로 하나님께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10절을 봅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한다고 합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만나 보기를 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장 가서 보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단이 막고 있음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간절히 주야로 기도하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만나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너희 믿음의 부족을 온전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의 부요를 위하여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보면서 정말 주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주야로 간절히 원하고 소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것들입니까? 없어질 것들입니까? 과연 믿음에 부요하기를 주야로 간구하고 계십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집안일을 하든지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간에 믿음에 부요하여 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까? 바울사도의 기도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 부요하여 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11절을 봅니다. 기도를 누구에게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는"이라고 합니다. 기도란 하나님 아버지께만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도 기도를 받으시는 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예수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간구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바로 가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냥 가려한다고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로 가기를 바울이 얼마나 원하였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기도를 보면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무엇을 하리라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리라고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내뜻과 내 주장과 고집을 앞세워 놓고서는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장과 뜻들이 과연 주님의 마음에 합한 것인가를 생각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가기를 원하는 것은 사사로운 볼일이나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믿음을 부요하게 하기 위한 걸음입니다만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일거야 그러니 무조건 열심히만 하면된다 그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범사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6-7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아뢸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서 아룁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기도응답이 잘됩니까 하는 방법론 차원으로 보면 안됩니다. 이미 이렇게 기도하는 성도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모든 일에 대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응답을 주시는 것입니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주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보기를 원하는 것도 자기가 보고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12절에서 성도의 사랑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를 사랑한 것처럼 성도끼리 사랑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성도와 성도간의 사랑이 풍성하여지고 넘쳐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서도 사랑이 풍성하여 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근거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랑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자신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랑을 받은 그 사랑을 받았기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사랑하고 그러한 사랑을 받은 자들은 또한 서로 사랑하고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까지 사랑이 풍성하여 넘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서도 이러한 기도가 있기를 원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사랑을 알아갈수록 성도들 안에 사랑이 풍성하고 넘쳐나기를 기도합시다. 그저 모이면 아이들 교육문제, 결혼문제, 장래문제 이러한 말들보다는 서로 말씀으로 위로하고 말씀으로 세워가는 그러한 사랑이 풍성하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풍성하여 지려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근거를 바울의 다른 기도에서 찾아 보고자 합니다.
에베소서1:15-23절을 봅니다.
"15○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4)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 말씀은 오래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만 요약해 보고자 합니다. 바울의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적인 어떤 잘됨이라든가 땅의 것들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눈을 밝히사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성도가 받을 그 기업의 영광이 무엇인지, 그의 힘의 강력한 역사하심이 어떻게 베풀어 졌는지를 알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에베소서 3:14-21절을 봅니다.
"14○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여기서도 바울사도는 성도가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속사람이 강건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로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내 마음에 주가 되어 있고 예수님은 우리의 시중이나 드는 그러한 분으로서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가 하기 싫고 귀찮은 일이나, 어렵고 힘드는 일을 떠 넘기는 식의 기도는 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자신이 깨어지고 부수어 져야 하는 문제를 기도하였다고 떠 넘겨 버리는 것은 아닙니까? 여전히 나는 그대로입니다. 이것은 나 기도했다는 것으로 핑계대고 자신은 도망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역시 그리스도가 주가 아니라 자신이 주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안에 주로 계시게 하시기를 간구하면서 우리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충만히 알아감으로 성도가 서로 사랑하게 되며, 이러한 사랑을 우리가 입었기에 모든 사람을 대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바울사도의 기도입니다.
끝으로, 13절에서 성도의 사랑이 풍성하여 짐으로 너희 마음을 굳게 하고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때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앞에서 흠이 없게 하시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성도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향한 바울사도의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강림하실때에, 재림하실때에 흠이 없이 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흠이 없이 나타나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신랑되신 예수 께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예 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어린 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지어진 의의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옷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잘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들어가지 않도록 깨끗하게 입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신랑이 주신것만 챙겨서 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지저분한 것들은 천국에서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풍성하여져서 예수 그리스도 다시오실때에 기쁨으로 맞이 할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광과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계시록 19:6-8, 22:14절을 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세마포옷을 입고 나가야 합니다. 의의 옷을 입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옷을 빠는자가 복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8 하나님의 뜻 2001. 9. 12
"1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1)아내 취할 줄을 알고 5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6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7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8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나의 소원이나 나의 뜻만이 관철되도록 기도하거나 정성을 드리거나 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시는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나라와 나의 의가 아닌 것입니다. 나의 나라란 자신이 중심이 되어있는 세계의 전부를 말합니다. 자기가 중심이 된 가정은 자신의 가정이 한 나라입니다. 회사도, 모임도, 교회도 자기 자신이 중심이라고 생각하면 그곳은 자신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것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 중심이 되지 않으면 결국 모두 나의 중심이고 나의 나라 나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나의 의는 아무리 다 모아도 하나님앞에 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안에 그 무엇이 쓸만한 것들이 있었다면 그러한 것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기에 도저희 스스로의 의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0:2-3절에서는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었으나 하나님의 의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에 의하여 증거된 의, 율법외에 주어진 하나님의 의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란 우리가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성경전체가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전서를 마무리 하면서 4:1절에서 "종말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편지 말미에 "끝으로" 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종말이라는 뉘앙스도 있습니다. 성도란 언제나 종말론적인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끝으로 하면서 몇가지의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바울사도에게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받은바대로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받은바 대로 살고 있지만 더욱 힘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들이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와 같은 내용들이겠습니다.
2절에 보시면, 이러한 내용들이 사사로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 예수로 말미암아 주어진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의 서신들이 사사로운 편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편지들을 주고 받고합니다만 그러나 사도의 서신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아릅답고 거룩하여 보이는 편지들이라도 성경의 편지를 대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몰몬교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새롭게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미국 어디에선가 금판에 쓰여진 것을 그들의 창시자인가 하는 사람이 계시로 찾아 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몰몬경을 성경처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슷한 내용들이 얼마나 많이 난무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죽었다가 살았다는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고 하는 말들이 무슨 성경의 계시인양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교회에서도 성경외의 내용들이 비록 성경의 용어를 빌린다고 하여도 전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것들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만들어 놓고서 맹종하게 만드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라 사도 바울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쓸때는 끝에다가 자신의 사인을 보내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3:17절을 봅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 바울의 편지를 받아 쓰는 사람이 쓰고 나서는 끝에는 자신의 친필사인을 넣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들을때에 과연 성경이 그러한가 하고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으로 주어지는 말씀인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뜻이라고 권면하는 내용는 "거룩함"입니다. 거룩이란 분리입니다. 세상의 가치관 사고방식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거룩함중에 오늘 말씀은 "성적인 거룩"을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있는 곳은 지중해 연안입니다. 이 시대는 1세기입니다. 로마제국과 특히 헬라의 생활을 특징지워 주는 것은 성적방종이었습니다. 그리스 신전들이 곳곳에 세워진 그러한 신전에서 신들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 성적인 혼음들이 있습니다. 신전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제사를 지내러온 남자들과의 성적인 관계가 그들의 신을 섬기는 예식의 한부분인 것입니다. 그렇게 함을 통하여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을 자극하여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제사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의 일상적인 생활속에 성적인 간음들이 심각한 범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의 일부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적인 문제를 바울사도가 지적하면서 거룩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치관과 생각들이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이제 이어서 3-6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음란을 버리고 각기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줄을 알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의 아내라는 단어가 "그릇"이라는 단어입니다. 남자나 여자를 그릇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므로 꼭 남자가 자기 아내만을 바르게 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릇을 몸으로 본다면 모든 성도가 자신의 몸을 거룩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남자만 바람피우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얼마나 많이 바람을 피우는 것입니까? 아내라는 단어에 몸이라고 넣어도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무엇과 다르게 구별되라고 하는 것입니까? 5절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을때는 색욕을 좇아 가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뜻은 그러한 이방인들과 같이 색욕을 좇을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성적인 거룩만이 아니라 우리도 이 세상의 탐심을 따라 이 세상의 풍속을 좇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모습들이 우리안에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함께 지적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성적인 음란만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사랑이 주님앞에서 음란한 것이면 역시 간음인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고 세상의 없어질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역시 부정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점검하여 보는 기준이 무었이겠습니까? 모든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시는가 하는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말씀을 읽고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것이 아닙니까? 예배당에는 오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단지 예배드리러 오는 나의 정성을 바쳐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자신의 뜻들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뜻을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니 자기에게 무언가 유리한 말씀은 얼른 받아 챙기는데, 자기에게 손해가 오는 것들은 버리는 것입니다. 헌금하지 않아도 된다더라, 새벽기도 안해도 된다더라 사실 이러한 뜻도 아닌데 자기 임의로 해석하여 자기것으로 잘 챙기고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사랑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일에 바쁘고 자기 기쁨이 앞서지 주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는 관심이 없는 상태, 이것이 주님앞에 간음인 것입니다.
6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분수를 넘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의 분수를 넘는 것은 형제를 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다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자족할줄 아는 것이 성도의 거룩함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족이 없습니다.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가져다 준 욕망의 포로된 모습입니다. 한 아내로 만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람피는 것을 무슨 자랑마냥 영웅담처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오늘도 끊임없이 세계제일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분수를 모르는 인간의 대표적인 집단체가 미국입니다. 세계제일의 경제대국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횡포란 전 세계적입니다. 그들이 일으킨 전쟁이나 테러들로 인하여 죽은 자들이 지금 미국이 당한 테러로 인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자기분수를 모르고 전세계에서 왕노릇하려는 미국이기에 얼마나 원수가 많이 생기겠습니까? 세계 무역센터라는 세계의 경제흐름의 중심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보면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이란 다른 곳에서 말들을 하고 있기에 그런 언급은 하지 않고서 성경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계시록 18장의 바벨론이 무너지는 내용입니다. 전 세계의 무역상들이 의지하던 바벨론이 무너지자 그 바벨론을 의지하던 도매상들이 모두 통곡하는 내용들입니다. 지금 미국의 무역센터가 계시록의 바벨론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 어느 국가든지 나올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나라가 되기를 모든 나라들이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시 대통령이 건물을 무너뜨리더라도 미국인의 의지를 꺽지 못하리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에돔이 또 생각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리는 것을 자기들이 또 일으켜세우겠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1:4절입니다.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리는데 우리는 다시 쌓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악한 지경이라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굴의 의지로 우리는 다시 일어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너졌을 때 겸손하게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여야 할것입니다. 성경에 손을 얻고 대통령선서를 하면 무얼 합니까? 자기의 분수를 모르고 하나님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만의 일입니까? 오늘 우리 모두가 다 이러한 색욕을 좇아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 저주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분수를 모르고 행함으로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런데 이러한 미국을 무슨 하나님의 나라나 되는것처럼 미국을 말하고, 미국의 부자들이 하나님을 잘 섬겨서 부자가 되었다고 설교예화를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바벨론의 속성과 에돔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수를 모르고 형제를 해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신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을 보면서 우리가 경계를 삼아야 할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악해서 저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저렇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은 것이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3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처럼 거대하지는 않더라도 모두가 자기들의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바벨탑이 무너집니다. 그때 애통하며 통곡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7-8절을 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습니까? 그렇다면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을 거부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거룩하여져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기에 거룩함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를 그 아들의 피로 단번에 거룩하게 하심을 입었기에 그 거룩함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들로 더럽히지 않도록 자신의 몸을 지키고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할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기도로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함이 아니요 거룩케 함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9-12 성도의 삶 2001. 9. 19
"9○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10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11또 너희에게 명한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2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를 마감하면서 성적인 거룩에 대하여 지난주에 살펴 보았습니다. 이것은 단지 성적인 것만이 아니라 세속에 물들지 아니함이란 것도 함께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주의 재림때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나타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주님의 보혈의 능력안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신부복을 입고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기다리는 신부의 모습이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부지런히 형제를 사랑하고 각자가 자신의 할 일을 힘쓸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의 문제를 살펴봄으로 성도의 삶의 자세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형제사랑에 관한 문제입니다. 9-10절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형제사랑을 잘 행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제사랑에 대하여 더욱 많이 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형제사랑의 구체적인 예들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어려운 형제들을 물질로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안에서만이 아니라 마게도니야 지역의 교회들에게도 이러한 사랑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지역에 빌립보와 베뢰아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에게 까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형제사랑이 알려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사랑의 수고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수고를 칭찬하면서 더욱 이러한 형제사랑을 더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오실 때 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제사랑에 대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보고자 합니다.
오늘날 교회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그런데 말로서는 하는데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형제가 배가 고픈데 밥사먹으라고 하지 말고 밥 사먹을 돈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추운데 옷을 사입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옷을 하나 사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수고입니다. 말로서만이 아니라 수고가 따르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형제를 사랑한다고, 수고를 한다고 하지만 자기가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리들도 다 하는 것입니다. 자기와 같은 성씨라고 사랑하고, 같은 동문이라고, 같은 군대출신이라고, 같은 나이라고, 취미가 같다고, 같은 계원이라고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관심과 배려를 한다는 것은 결국 사랑이 아니라 새로운 이기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45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이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러한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사랑이란 나와 성격이나 취미나 어떠한 인간적이고 조건이 아니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자매가 되었다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정도는 어디까지 입니까? 요한일서 4:7-2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13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15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21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사랑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바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 사랑이 어떠한지를 알고 받았기에 함께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을 사랑할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안에 있어야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사랑에 의하여서입니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라고 깨어질수 있는 하나의 친목단체일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낚시나, 보울링이나, 탁구나, 등산이나간에 어떤 취미와 기호를 따라 모인 하나의 계모임이나 다를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 내용이 종교적으로 덧칠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말씀을 통하여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가 보다는 내가 받은 사랑이 있는가를 점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받은 사랑이 있다면 자연히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받은 사랑이 없다면 인위적인 사랑의 모양을 만들어 낼수가 있지만 그것이 주님앞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있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의 기도에서 그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랑이 없는데도 서로 사랑한다고 교제하고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 미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안에 사랑없음을 두가지로 점검을 해볼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있는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가?
다시 데살로니가 4:9절을 봅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형제사랑에 대하여 더 할말이 없을정도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증거한 복음인데도 그러나 그 사랑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이 아니고서는 그저 인간적인 사교단체일 뿐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이 무엇입니까? 조금전에 본 요한일서의 말씀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5: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것이 우리가 받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고치고 개선하여 나아진 상태가 되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있을 때에 사랑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입었기에 우리안에 있는 약한 형제들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또다시 우리의 사랑없음을 지적받고서 주님의 긍휼을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바로 알게 하옵소서 그 엄청난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알게 하옵소서 하여야 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 사랑을 잊어 버리신 것입니까? 이것을 잊어 버리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촛대를 옮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은 것이 없으면 애초부터 교회가 아니지만 그러나 받았는데도 잊어버림으로 자기의 의와 자기의 행위만 나오게 되니 형제사랑이 간곳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경제적인 독립을 말하고 있습니다. 11-12절입니다.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이렇게 함을 통하여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데살로니가 교회에 종말의 문제를 잘못 이해 하여 일할필요도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1-2절을 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휴거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모든 일을 그만두고 기다리는 그러한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맡겨진 일들을 잘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이 왔다고, '일하면 무엇하나' 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싫어서 하지 않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서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에 보시면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헬라시대에 손으로 일하는 것을 천하게 여긴 것입니다. 자유인이라고 불리운 자들은 자기들의 종들이 천한 일들을 하고 자기들을 철학이나 논하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양반이라는 자들은 풍류니 무어니 하면서 놀면서 손으로 일하는 것을 천대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는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대부분이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 중심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도 너희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기에 자기 손으로 힘써 일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3:10-12절을 봅니다. "10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일은 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고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손으로 일하지 아니하고 입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일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저 편해 보이고 깨끗해 보이는 일들만 할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먼저 들어간 나라들에서는 직업에 귀천을 그렇게 따지지 않습니다. 독일같은 경우는 칼갈이가 대학교수나 같은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전에 텔레비젼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월급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적인 인정도 칼가는 사람이 하나도 쳐지지 아니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니 독일의 면도기나 주방기기들의 제품이 세계적인 제품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어진 일을 하나님앞에서 성실히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앞에서 일하시면 분명히 인정도 받게 됩니다. 그래야 외인에게 대하여 단정히 행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울때도 사회에서 직장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눈치나 보고,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살려면 한국적 상황에서 참으로 순교의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러한 삶도 결국은 형제 사랑으로 연결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것들이 모두 사라질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일도 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하면서도 아이도 낳고 농사도 짓고 가정생활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자기의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어떻게 교회의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그러니 무조건 교회에 관련된 일만이 주의 일이라는 생각들을 버리시고 주님앞에서 사는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서 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살기 위하여 우리는 늘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내가 처한 곳의 이웃이 덕을 보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위로하라 2001. 9. 26
"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2)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18절에 보시면 '이 여러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위로를 받고 위로하여야 할 상황들이 많이 있습니다. 낙심, 실망, 실직, 이별, 파산, 사별등의 문제에 부닥히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이러한 일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위로할 수가 있겠습니까?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을 말씀하면서 이 여러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증거하였을 겁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하여 있는줄 알고 일도 하지 않고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살펴본대로 자기 손으로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줄 알았는데 성도들 가운데서 죽은 자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러한 일이 어떻게 된 셈인가 하면서 당황해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어떻게 함께 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들이 일어나면서 어떤 자들은 예수님의 재림 자체까지 불신하려는 경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에 대하여 좀더 상세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자는 것이다.
13절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한다고 합니다. 자는 자들에 대하여 알게됨으로 소망없은 자들처럼 슬퍼하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입니다. 자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 깨어날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깨우러 가자고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면 깨어 나겠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나사로를 다시 불러 내시는 것입니다. 마치 자다가 일어나는 것처럼 나사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부활과 생명안에 들어 있기에 비록 세상이 볼때에는 비록 죽어서 무덤에 들어 갔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깨우시면 언제나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망이 없는 자들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의 부활의 근거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할을 믿을진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도 주님 재림시에 다시 데리고 오실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주무신 것이 아니라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묻히셨다가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죽음이 아니라 자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죄의 결과인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그 죄의 값을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 하셨기에 사망이 아니라 자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성도가 죽지 않고, 오늘 말씀대로는 자지 않고 그대로 영생에 들어가면 될텐데 왜 그렇게 하는 것이가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15절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이 바울 사도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주님의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의 권위를 통하여 더욱 예수님의 재림과 부활의 확실성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실때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 죽어 있는자, 즉 자는 자들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자는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나서 많은 시간이 지나서라는 뜻보다는 자는 자들을 먼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데리고 오신다는 것으로 봅니다. 시간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시에 거의 동시적 사건으로 일어나겠지만 순서상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임을 말씀함으로 죽은 자들에 대하여 슬퍼하거나 당황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시 부활의 순서에 대하여.
15절 하반절에서 17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안에서 자는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고 살아 있는 성도들이 저희와 함께 공중으로 끌어 올려져 주님을 맞이 할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주안에서 자는 자들과 함께 현재 살아서 주를 믿는 자들이 함께 재림의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러말고 서로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석원태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니 요즈음 이상한 교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천당이 없는 교회, 지옥이 없는 교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는다는 말을 빗대어 하는 말이겠지요 그러면서 그러한 교회가 어떻게 교회입니까?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도의 복이란 하나님 자체가 복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니 지상에 보이는 것들이 성도의 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경향교회과 고려신학교를 위하여 헌금하라고 하는 것은 땅의 것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디다만, 그러나 그 메시지의 중심은 받을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천국과 지옥을 알고 있다면 우리의 최고의 위로와 소망이 무엇이어야 마땅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에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위로가 되지 않는 상황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라고 하면서 이 말씀이 위로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름만 성도, 무늬만 성도가 아니겠습니까?
휴거에 대하여.
16-17절을 봅니다. 주님의 호령소리과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주님 강림하실때에 주님안에서 자던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고 살아 있는 성도들이 구름속으로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 할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공중으로 끌어 올려진다는 말을 휴거라고 합니다. 휴거란 국어사전에 없는 말이지만 데살로니가전서 4:17절의 내용을 한문글자로 만든 것이 휴거입니다. 휴거(携擧)란 '끌 휴 들 거'라는 조어입니다. 이장림씨가 휴거란 책을 번역하여 한동안 휴거 열풍이 불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시에 휴거가 되지 못하면 지상에 남아서 엄청난 고통을 당한다는 세대주의적인 성경해석에 따라서 휴거론이 대두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이 성도들에게 경각심을 주긴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너무나 지나친 신비주의로 치닫고 재림의 날자를 예언하고 하는 바람에 이제는 아예 이 영광스러운 휴거를 이야기 하는 것도 금기시 되어 버린 것입니다. 구름속으로 영광중에 끌려 올라가 주님을 공중에서 맞이하여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되리라는 성도의 최종 소망이 실종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안에서도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이 그저 보이는 세상에서 잘먹고 잘 살다가 이방인들이나 상상하는 무릉도원(武陵桃源)같은 세계에 들어가겠거니 하고서 사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의 큰 호령소리와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속으로 이 구름이란 하나님께서 현현하실 때 나타나는 그 영광의 구름입니다. 이 속으로 끌어 올려져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60년대 부흥회때나 나오는 이야기여야 합니까? 공중속에서 주님을 맞이 한다는 것은 공중의 권세잡은자의 세력이 완전히 멸하여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예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 왜 이렇게 희미하여 져 버린 것입니까? 오늘 이곳에 오신 성도여러분이 지금 당하고 있는 어떠한 고난과 고통과 아픔이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주님의 재림과 그 영광중에 주님을 맞이할 것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헛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죽음의 길을 의연하게 걸어간 허다한 증인들이 구름같이 있습니다.
오늘 모퉁이돌 선교회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중국에 가정교회들을 인도하는 자들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여건속에서 영혼들을 돌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가정이나 여행경비나 필요한 것들을 어떻게 채우는가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오직 무릎으로 나간다고 합니다. 내일 문제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일이 터지지 않았으니 감사하고 내일은 또 하나님이 먹여 주시겠지요"하더랍니다. 이들이 부러웠다고 합니다. 아무 걱정도 없어 보였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모두를 소유한 부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삶이 부러움이 되십니까?
이러한 말씀이 위로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유와 위로의 목회라고 하면서, 현대사회속에서 여러모양으로 고통받고 있는 자들에게 상담하고 위로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힘들고 지쳐하는 것입니까? 단지 일용할 양식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십년, 백년, 천년, 만년 먹고 살기 위하여 일하고 있으니 피곤하고 지친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탐욕으로 인하여 지쳐 있는 자들에게 위로를 한다고 눈치없이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로 위로한다고 하면 아마 욕으로 들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이러한 위로를 기다리는 성도가 있는데도 목사가 믿음이 없어서 이러한 위로를 하지 않고서 그저 세상에서 잘되리라는 말로 위로한다면 이 사람은 또한 괴로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에 대하여 좀더 살펴 보고자 합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을 봅니다. 몇절씩만 봅니다. 17-19절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리스도안에서 죽은자를 잠자는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이생뿐이라면 가장 불쌍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재림과 부활에 소망을 두지 않고 이생만 바라고 지금 살고 있다면 가장 불쌍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양다리 걸치고 이생의 것을 소망하고 살고 있다면 너무나 불쌍한 자들입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주님도 없이, 재림과 부활의 소망도 없이 이생이 다이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자들보다 더 불쌍한 것입니다. 그렇게 살자니 혹시나 지옥가면 어떻게 하나 싶고 주님의 재림에 소망을 두고 살자니 세상이 그립고 이 두 사이에서 언제까지 머뭇머뭇 거릴려고 하십니까? 그럴수로 갈등만 증폭되어 질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참으로 불쌍한 모습인 것입니다.
20-24절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처럼 부활의 순서가 나옵니다. 첫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시고,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그에게 붙어 있는 자이고 그 다음에 모든 산자도 부활하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심판하시고 만물을 하나님 아버지께 바칠것입니다.
50-58절을 봅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몸을 벗고, 이것이 죽음입니다. 그리고 신령한 몸을 입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다 잠잘것이 아니라 마지막 나팔에 계시록에서 일곱천사가 나팔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진정한 소망입니까? 우리에게 자신이 없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이러한 이김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십니다. 57절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김을 받은자는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아니하고 그 날을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의 말씀이 오늘 우리의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도안에서 이러한 말로서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곧 주님이 오십니다. 바로 문밖에 와 계십니다. 개인적인 종말은 오늘 밤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날이 홀연히 임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11 때와 시기 2001. 10. 3
"1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3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4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7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10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것 같이 하라."
지난 토요일 오후에 세차를 하였습니다. 세차를 하고나서 조금 있다가 일요일날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 소식을 어느 집사님에게서 들었습니다. 만약 일요일 비가 온다는 소식을 알았다면 세차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가 온다는 소식을 모르고 세차를 하였다고 해서 다음날 하루종일 비가 오는데 저의 차에만 비가 내리지 않는 그런 경우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모른다고 해서 재림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시기와 때에 대하여 알든 모르든 간에 주님의 재림은 가까이 다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4절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1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1)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1)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1)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1)표적 밖에는 보여 줄 1)표적이 없느니라."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일기는 볼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기예보가 얼마나 정확하게 예측을 하고 있습니까? 거의 정확하게 예보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기의 예보만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도 인류학자나 사회학자들이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미국의 테러에 대하여 문명간의 충돌이라고 예측한 새뮤얼 헌팅턴이라는 하바더 대학의 교수이자 세계적인 정치가의 책이 잘 팔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들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어디에 투자를 하여야 이익이 많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밤잠을 자지않고서 연구하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는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러한 표적을 원하지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 처럼 예수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서도 사람들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임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비가 오는 것을 몰랐다고 해서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에 대하여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도 전에 먼저 죽어 버린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의심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의심으로 까지 연결이 되자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예수님 강림하실 때 지금 살아 있는 자들보다 먼저 일어나서 온다고 증거하고나서 이제 더욱 주님의 재림을 기억하며 깨어 근신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재림의 때와 시기는 이미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알고 있다고 합니다. 1-2절에 보시면 더 이상 쓸것이 없을 만큼 잘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재림의 날을 주의 날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주의 날은 밤에 도적같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 주의 날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고서 도적같이 임한다는 말씀도 보고자 합니다.
주의 날에 대하여서는 구약에서 많이 언급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날을 유대인들은 사모하고 기다려 왔습니다. 그날이 오면 사방의 대적들을 주께서 다 몰아내시고 오직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주실것이라고 기대하고서 기다린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심판하는 날로서 주의 날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나 아모스에서 보면 이날이 이방인에만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에게 임할 심판의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 5:18-20절입니다. "18○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여호와의 날이 빛나고 영광스러운 날로서 기다렸는데 오히려 심판의 날로 임하여 버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사상에는 여호와의 날이 오면 이방인들이 심판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자기들이 심판이 되리라고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마치 오늘날 자신은 천국에 일등 간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다른 사람들도 저 사람이라면 천국에 일등으로 들어갈 사람이라고 보았는데 그날에 주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하신다면 그 주의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좇아내고 이런 저런 능력있는 일들을 하였습니다 할지라고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실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 자신의 일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날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사람이었는데 그날이 오히려 심판의 날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에 대하여 알지 못하여도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주의 날이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심판의 날로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약에서도 주의 날이란 심판의 날이 됩니다. 그러나 주를 믿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특징은 민족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온 인류가 심판대 앞에 서게 되지만 그러나 각자가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4:12절에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날이 임하는 그 때와 시기에 대하여서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이미 듣고 알고 있어서 더 이상 쓸것이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미 알고 있는 그 때와 시기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가? 2절에서 도적같이 임하리라는 것입니다.
때와 시기라는 말이 헬라어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사용합니다. 크로노스는 시간의 흐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카이로스는 사건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니 재림의 때와 재림의 사건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 일년간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면 일년이라는 때가 있고 그 때 안에서 특별한 사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년간의 기간을 크로노스로 특별한 사건을 카이로스로 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임하실 때 와 시기에 대하여 도적같이 온다고 하시는 말씀은 그 날자를 알아 맞힐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날과 때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씀을 아모스를 가지고 인용을 합니다. 아모스 3: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니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선지자들을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이상하게 꿈에서 보았다 환상을 보았다고 하는 자들을 주의 종에 대입하여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성경에 주님의 날에 대하여 충분히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날자를 언급할 필요가 전혀 없을 만큼 완전하게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날자나 시기를 예측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의 저주에 대하여는 이미 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때와 시기를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도적이 오는 것처럼, 신랑이 밤중에 갑자기 오는 것처럼, 주인이 불시에 오는 것처럼, 알지 못하는 때에 갑자기 임하는 것입니다. 도적이 언제 온다고 말하고 오지 않는 것입니다. 신랑이 올때에 졸며 잘때에 오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살림을 맡겨 두었는데 갑자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오실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한 여인이 해산 고통이 임하듯이 멸망이 홀연히 임하게 되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지금에는 해산의 날자를 초음파를 통하여 보면 거의 일주일 내외로 예측을 합니다. 즉 때는 예측을 합니다. 그런데 해산의 고통이 언제 임할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홀연히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날자를 예측하여 대비할 수는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갑자기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여기게 됩니까? 두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세상이 주는 행복에 빠져서 먹고 마시며 즐기자 할 그러한 안전의 때입니다. 마치 어리석은 부자가 많은 재물을 쌓아두고서 이제 내 영혼아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기자 할 그러한 안전과 평안의 때에 갑자기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사람들 모두가 추구하는 안전과 평안이란 결국 어리석은 부자가 추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경제와 정치가 안정적인 것을 안정과 평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러한 때에 갑자기 멸망의 날이 임하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 홍수때 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때 처럼 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29-51절입니다. "봉독"
또 하나는 거짓 선지자들에 의하여 평안이 없는데 평안이 있는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6:14, 8:11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긴급하게 수술을 하여야 하는데 반창고 붙여주고 빨간 약 발라주고서 다 나았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에스겔 13:8-16절을 봅니다. "8○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또 말하노라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9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 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10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11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무너지리라 폭우가 내리며 큰 우박덩이가 떨어지며 폭풍이 열파하리니 12그 담이 무너진즉 혹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것에 칠한 회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겠느냐 13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으로 열파하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이로 훼멸하리라 14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훼파하여 땅에 넘어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 담이 무너진즉 너희가 그 가운데서 망하리니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15이와 같이 내가 내 노를 담과 회칠한 자에게 다 이루고 또 너희에게 말하기를 담도 없어지고 칠한 자들도 없어졌다 하리니 16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그러니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평소에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두움에 속하지 않는 자들에게야 가능한 것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있을 때에라도 빛에 속한자들은 그 때와 그 시를 알지 못하여도 언제나 깨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과 거짓된 안전에 우리의 생명을 맡기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에 의하여 제시되는 여러 가지의 일들을 행하는 것에도 우리의 안전을 삼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말씀에 주의하면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8-11절을 봅니다. 낮에 속한자라면, 근신하여 믿음과 사람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은 우리로 하여금 살든지 죽든지 주와 함께 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이렇게 되도록 서로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워나가야 할것입니다. 주님께서 도적같이 홀연히 임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2-15 화목하라 2001. 10. 10
"12○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4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15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바울서신은 그의 서신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지만 그러나 각 성도의 삶의 상황에서 어떻게 말씀을 적용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복음안에서 이러한 삶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신서를 보면서 바울사도의 권면을 듣고서 잘하고 있는 일이라면 계속하여 격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하고 있는 일이라면 시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바울의 말이 아니라 주의 사도로서 한 말이기에 곧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크게 두가지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12-13절의 말씀에서,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다스리며 가르치는 자들을 알아주고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모든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의 내용들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보시기 전에 교회가 무엇인지 먼저 보고자 합니다.
에베소서 4:1-16절을 봅니다. "1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그러므로 이르기를 ㄱ)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1)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14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오직 2)사랑 안에서 3)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주의 백성들이 교회입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에 의하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르심을 입어 나온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머리란 모든 지시를 내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각자에게 은사를 허락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사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심으로 대적을 성문을 깨트려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 내시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모두 마귀의 권세에 붙들려 사망의 종 노릇하고 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승리하심으로 우리를 주님께서 사로잡아 내신 것입니다. 전쟁용어입니다. 이 말씀이 창세기 3:15절에서 이미 예언된 그러한 전쟁인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함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로잡아 낸 자들에게 무엇을 주시는 것입니까?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사들을 몇가지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자, 목사와 교사로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자는 이미 완결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복음을 전하는 자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미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하여 확정이 된 복음의 내용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사도들과 동일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계시를 받아서 증거하였고, 오늘날 복음 전하는 자들은 그 받은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이 왜 필요한가 하면 구분하지 않으면 얼마나 혼동이 많겠습니까? 나도 계시 받았다 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두 사람입니까? 그러므로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늘 주의해야 할것이 자기의 복음을 전하는가를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가 복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낸 복음이라는 말이지요? 물론 이러한 구분은 신분상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기능상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안에서 사도와 선지자들과 복음 전하는 자들의 기능을 누가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사와 교사라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목사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직분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로 주신 것은 12절에서 보시면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은 교회에 직분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에 목사와 교사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은사와 직분이 있는데 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를 가장 귀하게 여기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말씀을 듣고서 가야할 방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목사를 위하여 성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성도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도, 선지자도, 복음 전하는 자도 바로 여러분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이루어가시는 일에 목사와 교사를 주셔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왜 말씀을 배우고 가르침을 받아서 성장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14절입니다.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의 터위에 세움을 입지 아니하면 계속하여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하는 자를 알아주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나 자기의 명예를 위해서 말씀을 인용한다면 그러한 자들은 여러분이 거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을 거부할 말씀에 대한 바탕이 없으니 계속 끌려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정말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자들이 있다면 여러분이 알아주고 사랑안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결국 여러분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워낙 목사에 대하여 불신이 많다 보니 아예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어디 한번 두고보자라는 식입니다. 제가 처음에 여러분들을 만났을 때, 목사에 대한 사례와 예우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보고서 이 사람들이 얼마나 목사에게 당하였으면 목사에게 어떻게 하여 드릴까요 하고서 물어 보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하여 놓고서 통보하는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분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주님의 뜻을 헤아리기 보다는 다른데 관심을 두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사기를 당하였으면 저렇게 경계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목사로서 책임을 느낍니다.
목사란 여러분을 말씀으로 훈련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하게 여기는 것은 여러분의 성장에 유익한 것입니다. 목사와 사사로운 감정이 생기거나, 화목하지 못하면 또는 성도간에 화목하지 못하면 결국 여러분의 손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수고를 알아주라고 합니다. 목사의 수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수고입니다. 그런데 어떤 집사님이 목사님정도 되시면 그냥 강단에 서시면 설교가 줄줄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시던데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때로는 5분안에 말씀의 줄기가 세워지기도 합니다만 대부분 끙끙거립니다.
아이를 낳는 고통만한지는 모르지만 설교 한편 한편이 쌓여갈 때 마다 지진아나 팔삭둥이가 나오는 것 같아서 돌아보기가 겁이 납니다. 그래서 설교 테이프를 저에게 신청하는 사람들에게 할수만 있다면 신청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어저께 테이프를 보내면서 함께 편지도 넣었습니다. 설교를 잘하여 사람들을 많이 모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주님의 뜻이 제대로 증거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러한 수고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증거하는 자에 대한 배려가 나타나는 것은 결국은 여러분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정말 심방을 받고 싶었는데 목사님이 설교준비와 성경공부에 얼마나 바쁘시겠느냐며 심방요청을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이분이 수고를 알아 주는구나 싶은 것입니다.
14-15절입니다. 이제 좀더 구제적이 권면을 들어 봅시다. 이 권면은 목사와 성도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안에 이러한 자들이 있을 경우에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자신에게 해당이 된다면 이 말씀의 권면을 받아들이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이 일을 목사가 하기에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사가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유익을 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첫째,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라고 합니다. 규모 없는 자들이란 군대 대열에서 낙오된 병사들에 대하여 사용하는 말입니다. 어떤 대형을 흐트리게 하는 자들입니다. 교회의 목표란 분명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을 흐트리는 자나, 악성적인 게으름이나, 빈둥 빈둥거리는 자들을 권면하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마음이 약한자들을 안위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에 낙심해 있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데살로니가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먼저 죽어 버린 형제로 인하여 낙심중에 있는 자들을 안위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위는 사도 바울이 한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임을 증거함으로 안위를 주는 것입니다.
셋째는,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힘이 없는 자란 육체적인 것이겠습니까? 영적인 것이겠습니까? 영적인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힘이란 세상적인 힘입니다. 돈이나 권세나 명예같은 것이 힘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라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무력한자 연약한자를 붙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두곳의 말씀만 봉독합니다. 로마서 14:1-23, 고전 8:1-13절입니다. "봉독"
먹는 문제, 날짜 문제에 있어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아직도 구약의 음식 정결법을 지키거나 또는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에 대하여 힘이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붙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하는데 왜 너는 이것을 하지 못하느냐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 제물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들을 위하여서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유익을 구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주님께서 오래 참으신 것처럼 오래 참으라는 것입니다. 단지 형제에 대하여서만 오래 참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아닌 자들에 대하여서도 오래 참는 것입니다. 끝으로,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들 대하여 항상 선을 좇으라고 하십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안에 여러 가지 핍박이 있었습니다. 교회 밖으로부터 오는 핍박도 있었고, 교회안에서의 핍박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6-21절입니다. "16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 17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ㄱ)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ㄴ)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모두 이러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22 하나님의 뜻 2001. 10. 17
"16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성령을 소멸치 말며 20예언을 멸시치 말고 21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제가 전도사때에 청년회 좌담회에 몇사람과 함께 초대를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적이 있습니다. 무슨일을 결정하고자 할 때 당신이 손해보는 쪽으로 선택하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결정할 때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민하고 끙끙거려서 무슨 일을 결정하여도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보다는 나의 욕심대로 결정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도 늘 위안을 삼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겠지 하고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불안해 하고 자신없어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괜히 고생하고 손해보는 것 아닌가 하는 그런 염려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성경구절까지 인용을 하면서 자신을 위로하고 있지만 그러나 참으로 깊은곳에서부터 나오는 기쁨과 감사가 있는가 하는 것을 점검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우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 있습니다. 아주 명명백백하게 하나님의 뜻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하나님의 뜻이 무어냐고 묻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 보다는 어떻게 하면 나의 뜻이 무리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질까를 염려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이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어 있지만 모든 삶의 상황에 다 대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들이 책으로 나와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가지만 간단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것도 하나의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는 방법이 되기는 합니다. 팀 라헤이라는 사람이 지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습니까'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운전을 할 때 도로표지판을 보고서 가듯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가는 방법들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덟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순종, 기도, 성령, 상황, 마음의 평안, 우리 자신의 소원, 신실한 충고, 상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어느 정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도움이 되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은 모호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맞지 않기에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세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이렇게 하라 그러면 항상 기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될것이라는 말씀보다 훨씬 더 깊은 말씀입니다. 우선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대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정리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기뻐하고 있습니까? 늘 기도 하십니까? 범사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기쁨은 순간이요 슬픔은 오래갑니다. 기도는 잠간이고 나의 생각은 하루종일 심지어 기도중에도 나의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감사는 나에게 덕이될 때 잠간이지만 불평은 범사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루시지 않으시면 인간이 이루어 낼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까? 어떻게 항상기뻐하고 쉬지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기에 성도는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고, 항상 기도할 수밖에 없고, 항상 감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 편지하기를 항상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히게된 것이 무슨 기쁜일입니까? 무엇이 감사한 일입니까? 복음을 전하면 범사가 형통하게 잘풀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에서 많은 간증자들이 복음을 전하였더니 집안이 잘되고, 건강하여지고, 교회가 부흥이 되고, 사업도 잘되었다고 간증들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전도하는데 그들보다 복음을 잘못 전해서 감옥에 갇히고 죽도록 고생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복음을 잘못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까? 지금도 복음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죽음을 당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들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당하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데도 그러한 성경은 뒤로 제쳐두고 전도하고 선교하면 복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영국처럼 미국처럼 선교해서 복을 받자고 합니다. 그러나 강대국이 되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여러분이 보시면 잘 알지 않습니까?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얼마나 많은 죽을 고생을 합니까? 그런데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비록 자신이 감옥에 갇힐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막히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하여 기뻐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하라는 이유는 자신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까지 귀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참된 기쁨을 찾았기에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기쁨은 쓰레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빌립보서에 가득합니다. 온통 기뻐하라는 말씀을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한곳만 봅니다.
빌립보서 4:4-7절을 봅니다. "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감옥에 갇힌 신세인데 무엇이 그리 기쁜것입니까? 5절에 보니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에 그리 염려하고 걱정할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군에 갔다온 사람은 이런 말을 다 압니다. '거꾸로 메달려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펄펄뛰는 젊은이들을 군이라는 통제사회속에 가두어 두었으니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습니까? 감옥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 그런 것이 군인들에게 얼마나 있겠습니까? 하루빨리 제대할날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바울사도는 주님의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하루 지나면 하루 주님께로 빨라진 것입니다. 그러니 제대날자 통보받고서는 오직 그날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지고 가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제대할 날이 있습니다. 그날이 심판의 날이 되는 사람이있는가 하면 영광의 날이 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란 어떤 사람입니까?
그날에 영광의 주를 뵈올것입니다. 이것 하나로 평생을 기쁨으로 버티지 못하겠습니까? 주님이 주신 약속의 기쁨이 군대 제대하는 것보다 못합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도록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과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에 그 약속 하신바가 이루어 질것이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수밖에 없는 것이 성도의 신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과 감사를 누리지 못함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주장하고 있으니 그 고집을 부리고 있는 만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사와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만 손해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 고집 그만부리시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려봅시다. 왜 그럴수밖에 없는가를 요셉의 이야기를 통하여 확인하고자 합니다.
지난주와 이번주 구역공부에서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나자 더욱 형들의 미움을 받습니다. 평소에도 아버지의 편애와 고자질로 인하여 미운털이 박혀 있는데 이제는 꿈까지 꾸어가지고서는 자랑하는 것입니다. 부모형제들이 요셉에게 엎드려 절하게 되리라는 말을 하니 얼마나 미워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어느날 형들이 양을 치고 있는곳에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갑니다. 그러자 멀리서 형들이 알아보고 저기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우리가 저를 죽여버리자 그러면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잡고 겉옷을 벗기고 물없는 구덩이에 잡아 넣어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고함을 질렀을까요? 그런데도 형들은 미운놈 없애 버려 속이 시원한지 그 곁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의 형제를 비록 배가 다르지만 그렇게 죽이려고 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요셉은 하나님의 계시로 인한 고난입니다. 그렇지 않는 미움정도야 있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죽여버리고자 하는 미움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자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자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요셉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무조건 이유없이 싫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멀리서 대상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서 자신들이 직접 피를 흘리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자고 하여서 대상들에게 노예값으로 팔아버립니다. 은 20을 받고서 팔려버립니다. 얼마나 살려달라고 부르짖었겠습니까? 그러나 외면하고서 팔아버린 것입니다. 가서 고생하다가 죽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요셉이 어떻게 됩니까? 보디발이라는 바로왕의 시위대장집에 노예로 팔려 갑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에서는 형통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앞에서 일합니다. 그런데 여주인의 유혹을 하나님 때문에 거절하자 오히려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이것이 무슨 형통입니까? 그러나 범사에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바르게 산 것이 왜 감옥에 갈 입니까? 그리고 감옥에서 술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하여 주면서 복직하거든 자신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으니 왕에게 간청을 드려서 풀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어버립니다. 무려 2년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그렇게 됨이 형통입니다. 바로가 이년후에 꿈을 꾸게 되자 그제서야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합니다. 그때 요셉의 나이가 30세입니다. 관리로 나아갈수 있는 나이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때를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자기의 형들이 양식을 구하려고 왔을때에야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형들에게 바로 자신을 알리지 않고 일부러 고생을 시킵니다. 감옥에도 가두어 버리고 볼모로 잡고 나중에 베냐민의 자루속에 요셉의 은잔을 넣은 시험들을 통하여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알게하고서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하는 말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냈나이다" 요셉이 드디어 자신의 고난의 의미를 말합니다. 결국 희생당한자가 희생시킨자를 살려내는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 믿음으로 오는 여러 가지 고난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고난들을 왜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성도를 고난으로 인도하는 이유입니다. 은혜를 주실뿐만 아니라 고난도 주시는 이유입니다.
빌립보서 1:29절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우리에게 믿음만 은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고난도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은혜로 믿음만 주시지 왜 고난까지 은혜로 주시는가 하시겠지만 은혜주심이 누구를 위하여 주시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하나 은혜받고 구원받아 기뻐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믿음과 고난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단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비밀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서 결국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하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무엇을 할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 뿐입니다. 그 기쁨과 감사를 놓치지 않도록 늘 기도하며서 주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었다면 여기서 도망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난과 핍박과 시련들이라도 죽음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기쁨의 근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데살로니가전서 4:3절에서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세상에서 분리시켜 하나님의 백성에 참예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38-40절을봅니다. "38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이루어 진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까? 이것이 있다면 우리는 감옥에서도 기뻐할 수가 있고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령한 복을 받은자의 기쁨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감사를 세상이 줄수도 없고 알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기쁨과 감사가 없는 것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가운데서 주시고자 하시는 복들을 싫어하고 세상이 줄수 있다는 복들로 우리마음에 채워져 있기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날마나 말씀을 통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라 갑시다. 십자가를 안지려고 하니 문제지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서 사면 틀림없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8:18-30절입니다."18○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9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3)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성도는 환난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나타날 소망을 인합입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께서 기도하시기에 성도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기쁨이요 감사요 빼앗길수 없는 특권입니다. 이것으로 평생을 아니 영원토록 기뻐하고 감사할수 있는 성도가 되도록 쉬지말고 기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22 하나님의 뜻(2) 2001. 10. 24
"16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성령을 소멸치 말며 20예언을 멸시치 말고 21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지난 한 주간 하나님의 뜻대로 사셨습니까?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셨습니까? 그렇지 못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산 것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억조차 하지 않고 거저 내가 주인이 되고 내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서 내 자신이 기분이 좋으면 기뻐하고 내가 손해가 나거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에 화가 났던 그런 삶이 아니었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그 뜻을 헤아려 보기 보다는 거저 내 마음, 내 몸하나 편한 것이 제일이라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밤에도 우리는 또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여 당신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 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갈만한 자질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들이야 이렇게 해서 이루어 질것이 없습니다. 내가 행동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기도만 하고, 바라기만 하고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란 우리가 아무것도 이루어 낼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 율법의 말씀만이 아니라 신약의 모든 말씀도 마찬가지로 이루어 낼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거듭났다고 하여도 몸을 가지고 있는한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몸이 괴로우면 만사가 괴로운 것입니다. 먹는 것도, 듣는 것도, 보는 것도 몸의 상태가 좋아야지 즐거운 것이지 몸이 아파서 괴로운데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배가 고프고 멀미가 나는데 무슨 단풍이 아름답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랑이란 컨디션이다. 사랑이라는 것도 자기 컨디션이 좋아야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얼마나 자신의 기분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항상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항상기뻐할 수밖에 없고, 쉬지않고 기도할 수밖에 없고,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요셉을 예로 들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결국 하나님의 뜻이 요셉에게 이루어지기에 죄없이 미움을 받고, 유혹을 이겼는데 감옥에가고, 술맡은 관원장이 잊어버리는 그러한 일조차 하나님께서는 형통하다고 하시는 것은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빈틈없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형통이란 내 뜻이 술술 잘 풀리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형통이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자기 택한 백성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고난과 시련도 은혜입니다.
야고보서 1:1-4절을 봅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성도의 다른 이름이 흩어진 나그네입니다. 그러니 여러 가지 시험이 닥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험이 닥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반가운 친구가 오는 것처럼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시험이 오는 것이 무엇이 좋아서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까? 이것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고 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우연히 시련이 오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시련과 시험들을 통하여 더욱 온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5-7절입니다. "5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을 입었는데 여러 가지 시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간 근심하게 되지만 그러나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썩지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기업을 받게 하시기 위한 것이랍니다. 그러니 믿음의 시련들을 통하여 썩어질 것들을 구하지 아니하고 썩지아니할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더욱 소망하기 때문에 믿음의 시련이란 기뻐할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주의 할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믿음의 시련이 아니라 자기 욕심에 끌려서 당하는 시험이나, 자신이 악을 행함으로 오는 고난들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2-18절입니다. "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시험이 오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시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유혹에 끌려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이러한 욕심에 이끌린 시험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이란 두가지입니다. 믿음의 시험이 있는가 하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시험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에 끌려서 행하다가 시험에 들어 놓고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시험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각양 좋은 은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빛들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한 선물이 우리를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귀한 은사인 것입니다. 그러니 분별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늘 깨어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2:18-25절입니다. "18○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1)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고난이 어떠한 고난인지를 구별하여야 합니다. 성도는 악을 행하여 닥치는 고난이 아니라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시련이나 고난은 기뻐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자취를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4:14절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계속하여 하나님의 뜻을 살펴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19-22절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고,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것입니다.
첫째,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요구를 거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두가지 싸움이 있습니다. 육체의 욕구와 성령의 욕구입니다. 이둘이 서로 다툼이 일어날 때 분별력이 없으면 성령의 요구를 묵살하고 육체의 요구를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나의 육체의 요구냐? 의 갈등에서 우리가 늘 옛 습관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쉬지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주님께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결국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분별이 되는 것입니다. 이상한 느낌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감동하심은 반드시 말씀을 따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는 것이지 말씀이외에 이상한 내용을 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읽고 들을 때, 설교나 성경공부나 구역공부시에도 하나님의 뜻이 증거됩니다. 이럴 때, 이것이 주님의 뜻이야라고 생각될 때 그것을 꺼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30절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너희가 그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안에 성령이 임하여 계시는데 성령께서 왜 말할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성령의 요구를 무시하면 성령께서 근심하고 탄식하면서 아버지께 기도하시겠습니까? 구하라고 하는 것은 구하지 않고 구하지 말라고 한 것은 구하고, 보라고 하는 말씀은 보지 않고 텔레비젼이나 보고 있으니 얼마나 근심하고 계시겠습니까?
제가 청년때에 어느 여전도사님이 어느 학생에게 말하는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텔리비젼을 한시간 이상 보고 있으면 성령이 근심하신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만, 사실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에서 성령의 근심하심을 느낄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모의 근심을 자식이 어느 정도 알수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근심을 알수가 있습니다. 무엇으로 말씀과 기도로 알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그러니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 자체를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요구를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언을 멸시말라는 것입니다. 이 예언이란 개인의 장래 신수사를 점치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멸시치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심판이다라는 말씀이 예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심판주로 재림하십니다라는 말씀도 예언입니다. 이러한 예언에 대하여 멸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 3장에 보면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나와서 주의 강림하신하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며 기롱하는 자들이 나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희롱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기 기준으로 재단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은 취하고 악은 모양이라고 버리라는 것입니다. 헤아린다는 것은 분별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악인지를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은행원이 위조화폐를 구별하여 내듯이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세밀하게 찾아 내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안에 교묘히 숨어들어오는 온갖 악들을 구별하여 내어서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은 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에게 좋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태복음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것을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늘 말씀과 기도에 깨어 있도록 늘 성령을 구하시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우리에게만 맡겨 두신 것이 아니라 24절에 보시면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렇게 되도록 이루실것입니다. 그러니 그만 고집부리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그 뜻에 순종하며 살도록 합시다.
데살로니가전서 5:23-28 흠 없게 보전되기를 2001. 10. 31
"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1)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25○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26○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27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28○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10월 31일, 10월의 마지막 밤입니다. 말씀을 인하여 목숨을 바친 개혁자들을 생각해봅니다. 도대체 말씀이 무엇이길래 말씀이 잘못 증거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목숨까지 바쳐서 개혁을 부르짖었겠습니까?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교회의 역사 속에서든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것을 사탄이 그렇게 싫어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이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때에 늘 기억하여야 할 것은 말씀이 나에게 달콤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죄된 본성상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거슬리게 되어 있습니다. 단 한가지만 제시하여도 단번에 기분이 나쁜 말씀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살고자 하는데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물질입니다. 돈입니다. 그런데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라는 말씀이 기분이 좋게 들리겠습니까? 종교개혁자 마틴루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으면 참된 회개가 아니라고 하였다는데 결국 주님을 사랑할 것인가 돈을 사랑할 것인가의 싸움인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교인들이 감사헌금 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감사를 표할 때 수십만원씩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할때는 몇만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 당장 여러분의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왜 이런 말까지 하여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가 그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무어라고 평가하시겠습니까? 너는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였구나 그러니 너는 돈과 함께 망하거라고 하실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마술사 시몬이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사려고 하였다가 네 은과 함께 망할찌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목사에게는 너는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너의 목회를 사랑하고 너희 교회를 너의 소유처럼 사랑하였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구나 하실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말씀앞에 앉아 있습니다만 과연 지금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지난주 구역공부에서 시편 137편에서 무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가장 즐거워하고 있는 것보다 더 예루살렘을 사모하지 않으면 자신의 혀가 입에 붙어버리라고 저주선언을 합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선언을 하고 그렇게 되어 버린다면 저부터 혀가 입에 들어붙어 벙어리가 될것입니다. 과연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더 더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후 최고의 목표가 무엇이어야 합니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임하실때에 우리가 그 앞에서 흠 없게 보전되는 것입니다.
살전 5:23절을 다시 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1)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우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까?
23절 말씀에서 영과 혼과 몸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사람을 세부분으로 구분합니다. 이것을 삼분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분설로 나누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분설은 사람을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기에 비하여 삼분설은 영과 혼과 몸으로 나눕니다. 삼분설을 주장하면 우리의 이해가 더 쉽습니다. 혼과 몸은 짐승에게나 사람에게나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사람만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슨설을 정당하고 보십니까? 이분설입니까? 삼분설입니까? 그러나 이렇게 분석적으로 나누는 것은 헬라적 사고방식입니다. 우리가 교육받아온 근대철학이 서구의 헬라철학이라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동양적인 사고방식은 통합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양적 사고도 아니요 서구적 사고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인간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를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인간을 이분설이나 삼분설로 말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마음, 영혼, 육신, 정신등의 개념만이 아니라 귀와 입, 손과 팔과 같은 개념들이 서로 동등하게 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체의 한 부분을 그 사람의 전체를 나타내는 대명사와 거의 바꿀수 있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편6:2-4절에 보시면 "나의 뼈가 떨린다" "나의 영혼이 떨린다"를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평행법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 뼈 따로 영혼 따로가 아닙니다. 뼈가 곧 영혼이요 영혼이 곧 뼈로 환원이 됩니다. 이것을 결국 이렇게 고백하는 "나"를 대신 명칭하는 것입니다. "뼈=영혼=나"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시편84:2절에 보시면 "영혼과 마음과 육체"가 같은 뜻으로 주님을 사모한다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이사야52장에서 "평화를 전하는 자들의 아름다운 발이여" 라고 하는 것은 그 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발이 빠르게 달리는 것을 통하여 그 사람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사기 7장에서 "내 손이 나를 도왔다"는 것은 자기의 무장과 자기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어 하나 하나를 현대적인 의미로 풀어낸다고 해서 정확하게 뜻이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인간을 말할때는 인간의 경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몇부분을 떼어 내거나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인간이 어떠한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인간을 영이라고 하든 몸이라고 하든 간에 그 인간의 죄된 경향성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물론 신약적인 의미에서 영은 영이요 육은 육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영혼과 육체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죄된 인간의 경향성 전체를 육으로 보는 것이고 영이란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을 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자를 영이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는 육인것입니다. 이사람의 정신과 혼이 없다는 말이아닙니다. 이런 전체적인 의미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 영과 혼과 육이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전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계획과 행동까지 그리스도 재림의 날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조금 복잡하지만 조금더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영과 혼과 육으로 말하고 있지만 이것을 복수로 말하지 않고 단수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한 인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인이 흠없게 보전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정말로 기다린다면 이러한 기도가 도전이 되고, 은혜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다면 신랑이 오시는 그 날까지 얼마나 자신을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합니까? 자신의 흠들을 가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화장이 비싼 것 아닙니까? 얼굴의 여러 가지 흠들을 가릴려고 비싸게 화장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신랑을, 우리의 영원한 신랑을 기다리기 위하여 어느 정도로 흠없게 되도록 보전하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네 오른손이 범죄하거든 찍어 내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서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온전함입니다. 눈이 범죄하면 빼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한 눈이 없이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눈 다 가지고 지옥불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팔이 범죄하고 눈이 범죄한 것입니까? 아니면 인간 전체가 죄를 범한것입니까? 어떻게 팔 혼자 눈 혼자 범죄를 하는 것입니까? 결국 인간의 죄된 경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온전케 하여 흠이 없도록 보전하려면 다 잘라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9-18절입니다. "9○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1)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기록한바 ㄴ)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ㄷ)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ㄹ)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ㅁ)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ㅂ)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ㅅ)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에서 신체적인 부분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들에게 흠이 없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목구멍은 열린무덤이라고 하였으니 목구멍 틀어 막아 버리고, 혀는 속임을 베푸니 잘라 버려야 하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니 역시 잘라 내어 버려야 합니다. 발도 잘라 버려야 하고, 눈도 빼어 버려야 합니다. 결국 이러한 신체적인 기관들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인간의 죄임됨의 경향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주님앞에 흠이 없이 설려고 하면 다 잘라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는 말씀이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죄인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러한 인간이기에 사는 것이 죄 뿐입니다. 나 행한 것 죄뿐이니라는 찬송가 가사가 생각납니다. 이 사람이 악하였기에 이러한 가사를 고백하였다고 저는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앞에서 얼마나 성결하게 거룩하고 깨끗하게 살려고 정말 죄와 싸우기를 피흘리기까지 싸운 사람들의 고백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우리가 너무 쉽게 인간이 죄인이야 별수 있겠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처절하게 자신이 온전케 되도록 흠이 없도록 시도해본 사람만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는 말씀에 참으로 동의하게 될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너무 피상적입니다. 그저 무슨 스피드 퀴즈대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죄의 깊이를 보게되면 자신에 대하여 절망할수밖에 없습니다.
이보다 저 좋을수는 없다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그기에 보면 남자 주인공이 결벽증환자입니다. 길을 가다가 길에 흠이 있으면 그곳으로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다른 사람과 접촉이 되면 안된다고 피하여 걸어다닙니다. 식당에 가면 일회용 자기 수저를 가지고 다닙니다. 택시의 문이 더럽다고 손으로 열지를 못합니다. 비누로 손을 씻는데 한번 씻고 비누를 버립니다. 이런식으로 산다고 그 사람이 깨끗하여집니까?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런식의 정결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까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유대인들이 책망을 할 때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정결케 하시는 분이 앞에 계신데 자신들은 스스로 정결하고 흠이 없게 행한다면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윤리과 도덕과 종교가 나아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능력이 있어서 흠도 티도 없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자는 결단코 자신이 스스로 흠이 없게 할 수 없음을 알고 흠 없는 어린 양의 피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희생의 짐승들의 공통된 특징은 흠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온전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흠이 있는 것을 드린다면 이것은 사기이며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으로 온전한 것을 드릴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서 드린다고 하면, 반드시 죄인이기에 흠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앞에 사기이며 저주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아 흠이 없는 자가 됩니까?
베드로전서 1:18-19절입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된 것입니다. 살전 5:24절입니다. 주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에베소서 1:4절 부르신 이유는 흠이 없게 하시려고 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서 1장 17-25절입니다. 그 영광앞에 흠이 없게 세우실 자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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