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2
창원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
고린도전서 9:16-18 바울의 자랑과 상 2005. 7. 14
16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17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 사도를 무시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종의 모습으로 그들을 섬겼지만 그러한 중심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강압적으로 목회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은 잘 따랐던 것입니다. 그들을 종으로 삼고 사로잡고 뺨을 칠지라도 용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고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용납하느냐고 책망하는 모습을 고린도후서에서 보았습니다.
바울사도를 무시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자랑거리들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성령의 은사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러한 은사들이 나타나니 그들은 자기들이 무언가 특별한 사람들이어서 그런 은사가 온 줄 생각하면서 서로 자기들의 은사를 자랑하였던 것입니다. 은사가 임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부족하고 못났으면 은사가 주어졌겠습니까? 고린도전서 4:7절입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받았다는 것은 자기의 능력이 없기에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잘난 것인 양 자랑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하도 자기 자랑을 하니 바울사도가 하는 수 없이 자기 자랑을 합니다. 내가 어떤 사도보다 못하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혈통적으로나 신분으로나 학식으로나 못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자랑하는 것을 어리석은 자의 자랑으로 여기고 좀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고도 그 누구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를 자랑하라면 나의 연약함만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자기의 수고만이 아니라 자기가 보았던 그 영광의 나라에 대하여는 말로 다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1-10절을 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셋째 하늘에까지 끌려갔다 왔습니다. 하늘나라를 보고 왔는데 사람이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무엇으로도 표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영광을 보고 왔지만 그런 사람을 객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내가 아니라는 식입니다. 주의 은혜로 된 것이지 내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계시가 너무 커서 하나님께서 자고하지 않도록 사단의 가시를 주셨는데 왜 그렇게 약하게 하셨는가 하면 자신은 약하여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약하여야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기에 자기는 이제 약함만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천국을 보고 왔다는 한국계 미국인이 쓴 책을 조용기목사가 번역해서는 수 십 만권이 팔렸답니다. 그 천국은 강남의 고급맨션을 그려놓았습니다. 천국을 보고 왔다는 자들의 공통된 특징이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천국에서 자기가 사는 집의 평수가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천국에 온 사람은 자기 집에 없어서 합숙소에 있고, 전도와 십일조와 구제와 봉사를 많이 한 사람일수로 고급 맨션이며 평수가 넓어진다고 합니다. 이런 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이 땅의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어놓고서 천국이라고 거짓말 하고 있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천국에 갔다 온 바울사도는 도저히 사람의 말로 이를 수가 없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성경 외의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막으시기 바랍니다. 갈릴리 서점에 책을 주문하여 가지러 갔더니 서점 주인이 ‘지옥의 하나님’이라는 책 제목을 보고서 지옥간증인줄 알았나 봅니다. 그래서 이 야기가 시작이 되었는데 천국 간증에 대한 책을 보고서는 ‘그들이 보았다고 하는데 안 믿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바탕 하고 왔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천국은 지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는 어디로 사라지고 인간들의 탐욕에 찬 경쟁심만 돋워서 교회 부동산 키우기에 앞장서게 하고서는 천국을 보았다고 합니다.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을 합니다. 천국을 인간들 욕망의 투기장으로 바꾸어 놓고서 그런 자들을 간증자로 모셔다가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 곳을 그대로 고정시켜 버리면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자기를 위한 자랑을 하라고 하면 자기의 연약함을 자랑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바울사도가 너무 겸손한 것이 아닌가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울사도에 대하여 너무 미화하여 보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오직 복음을 위하여 평생을 살았던 위대한 사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9:16절입니다. 자기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간증에서 보면 지상에서 자기가 전도를 하거나 헌금을 하거나 봉사를 하거나 간에 그러한 것들이 재료가 되어서 하늘나라에서 집이 지어지는데, 바울사도는 전도한 것이 자기 자랑이나 공로나 재료가 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른 성경에서 행한대도 갚아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행한 대로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였습니까? 모든 우선순위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나중에 보상을 바라고 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한 대로 갚으시는 주님 앞에 지옥가야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행함을 챙기시겠습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붙드시겠습니까?
바울사도는 자기가 전도한 것이 자기 자랑이 될 수가 없는 이유는 부득불 할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득불 할 일이라는 것은 억지로 마지못해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 바울 사도 자신이 복음을 선택하거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한 사람이라면 자랑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복음을 핍박한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복음에 사로잡힌바 되고 복음에 정복당한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의 종이 되고 노예가 된 것입니다. 만약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마땅한 자세입니까? 복음에 정복당하고 보니 그 복음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복음을 위하여 내가 얼마나 헌신하고 내가 얼마나 열심을 내는가를 자랑할 수는 결코 없다는 말입니다. 복음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기에 내가 목숨 바쳐 복음을 전할 지라도 나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여름에 강물에서 수영을 하다가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댑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 언덕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용감하게 뛰어들어서 그 사람을 구하여 냅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나오면서 무어라고 하였는지 아십니까? “누가 내 등 떠 밀었노?” 만약 자기가 자의로 구하였다면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등 떠밀려 갔기에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바울의 심정이 이러하다고 봅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고 그의 사랑의 강권하심으로 일어난 일이기에 그의 살아계심과 그의 일하심을 증거 할 뿐입니다. 바울의 행위를 통하여 바울 자신이 증거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17절을 봅니다. 내가 임의로 하였다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은 자라고 합니다. 직분을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어느 정도의 충성입니까? 종이 하루 종일 수고하며 일하고 돌아와서도 주인의 밥상을 차려드리고 시중을 다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였다고 주인이 사례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주인이 아무른 사례를 하지 않을지라도 종은 무어라고 해야 합니까? 마땅히 종이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이것이 직분을 맡은 자의 마땅히 할일 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직분이 얼마나 놀라운 직분이며 영광스러운 직분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예하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 복음에 참예하기 위하여 바울사도는 모든 것을 행한다고 합니다. 복음에 참예시켜 주신 그 은혜로 모든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참예시켜 주셨기에 자신은 종이 되어도 괜찮고, 바보가 되어도 괜찮고, 죽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이렇게 복음에 참예한 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상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그 상이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받았다면 그것이 영광이요 생명인 것입니다. 이러한 묵시적인 상의 개념을 이 땅의 물질적인 개념으로 바꾸어서 천국에서 상의 차등을 이야기 하면서 인간들이 상상한 천국과 상급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이 말하는 상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18절입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임의로 아니할 지라도 직분으로 받았기에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직분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직분을 받았는데 그 직분을 잘 감당하는 상이 무어냐는 것입니다. 그 상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한을 다 사용하지 아니하는 것이 자기의 상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복음이 얼마나 좋았으면 그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고 고생하는 것을 상으로 여길 정도입니까? 그 복음의 실체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사랑과 용서를 알고 나니 주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당하는 고난들이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어찌 나 같은 죄인이 주님을 위하여 고생을 다 당할 수 있는가 하는 기쁨인 것입니다. 미친 사람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에 눈이 멀었습니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나오면서 뭐라고 합니까? 주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으니 기쁘다고 복 받았다고 하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아야지 하고 나서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핍박을 받는 것은 고생이지 고난이 아닙니다. 나는 이만큼 주님을 위하여 참고 견뎌내었다. 다른 사람들 다 덥다고 산과 들로 놀러갔는데 나는 가지 않고 나왔다. 그런 자신의 결단과 결심으로 견뎌 내었다면 그기에 따른 보상을 기대하게 됩니다. 나 이만큼 했는데 주님도 좀 알아주시겠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대우를 해 주실 것이야! 이런 생각들은 사랑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의 자랑과 상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십니까? 바울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바울의 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 상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 하늘의 영광과 생명이 다 감추어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자기가 택함을 입고서 고난의 자리에 들어선 그것이 너무나 감사하여 자기의 권리마저 사용하지 아니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 받은 사람만 아는 것입니다.
이런 예로 마치고자 합니다. 이미 끝난 해신이라는 드라마에서 수애가 자미부인에게 사로잡힙니다. 장보고의 군대를 청해진으로 물리면 수애를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보고가 거절하자 자미부인이 수애를 보고 배신당한 기분이 어떠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수애가 하는 말이 당신은 참 불쌍하다고 합니다. 한번도 남을 사모해본 적이 없으니 불행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그분이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후회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죽더라도 말입니다. 사모하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소설도 이런 사랑을 그려냅니다. 오늘 우리도 바울이 받은 이 사랑을 알기 원합니다. 자기의 자랑과 상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고서 그 사랑과 상이 얼마나 좋은지 바보가 되어도, 고난이 닥쳐도, 죽어도 좋다는 그 자랑과 상을 우리도 맛보기 원합니다.
고린도전서 9:19-27 자유인의 목표 2005. 7. 31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오늘 설교 제목을 자유인의 목표라고 잡아 보았습니다. 자유인이라면 목표가 없어야 참으로 자유인이지 않겠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자유인인데 그런 사람에게 목표가 있다는 것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니 참으로 자유하면서도 아주 분명한 목표와 방향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바랍니다.
19절에서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종으로 매일 이유가 없는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도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권도 있어서 로마의 법에 의하여서도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의 종이 될 이유가 없는 사람인데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요즈음 이중 국적자의 병역문제로 시끄러운데 아이 낳을 때쯤이면 원정 출산하여 미국시민권을 가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시민권을 얻어서 국적을 포기하게 되면 국방의 의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외국에서 2대 3대로 살던 사람인데 이런 사람은 전혀 의무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겠다고 군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자기의 자유보다 자기의 뿌리인 조국이 중요하다고 여기기에 자기 자유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는 무엇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자유를 포기하고서 종이 된 것입니까? 자기 조국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기 시민권이 있는 로마를 위한 것입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도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위하여 자기의 자유를 포기하고 종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자의 모습입니다.
20-22절까지 세 종류의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즉 율법 있는 자들, 율법 없는 이방인들, 그리고 약한 자들입니다. 이들을 대할 때에 율법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는 율법에서 완전히 자유 한 사람입니다. 모든 율법의 의무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어 졌기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율법의 요구나 정죄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있는 자와 같이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1-3절입니다. “봉독” 디모데가 예수님을 믿었지만 아버지가 헬라인이어서 할례가 없던 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을 위하여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1장에서는 성전의 결례를 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2:3-5절을 봅니다. “봉독” 디모데는 할례를 받게 하고서는 디도는 할례를 받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짓 형제가 들어와서 복음으로 자유하게 한 형제를 다시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하기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11-14절입니다.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하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안 되는 모습이 이런 모습입니다. 약한 자가 있다면 그런 자에게 자신은 더 약한 자라고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그것밖에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없는 사람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무슨 말만하면 믿음이 그렇게 없느냐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으니 그렇지! 성경 보지 않으니 그렇지! 이런 식으로 나오니 말도 꺼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자신이 죄인중의 괴수라고 하면서 다가서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자유 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는 분명한 목표와 방향이 있습니다. 어떤 목표와 방향입니까? 22절과 23절에 보시면,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하고자 함과 복음에 참예함임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구원이 복음으로 되는 것이기에 복음을 전하여 한 사람이라도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자가 나오는 것이 바울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복음에 참예함을 기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자유인이지만 그 자유를 사용하는 방향과 목표였습니다.
바울의 목표가 복음에 참예함이라고 하니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복음에 참예한다는 말로 들립니다. 27절 말씀을 보아도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것은 자신이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두려워한 것은 구원을 잃어버리게 될까봐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 바울의 일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울을 선택하신 것이기에 그 선택과 부르심에는 후회나 실수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24-27절의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운동장에서 달리기 하는 자가 많을 지라도 상 받는 자가 한 사람이듯이 너희도 상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고 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절제합니다. 어떤 운동도 절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고린도지역에 2년에 한번씩 운동경기가 열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선수들이 약 10개월 전부터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절제하면서 시합에 이기기 위하여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이렇게 달음질하지 않으면 상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신문에 연재되는 만화에 허영만 씨의 식객이 있습니다. 그 중에 도시의 수도승이라는 제목으로 연재가 되고 있는데 그 주인공은 보디빌더입니다. 16살에 시작하여 21세에 최연소 국내챔피언이 되고 세계 챔피언도 된 사람이라는데 20년 넘게 보디빌더로서 엄청난 훈련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음식절제라고 합니다. 운동이 2라면 음식절제가 8이라고 합니다. 좋은 근육질을 유지하기 위하여 맛없는 닭 가슴살과 야채종류로만 식사를 하고 기호식품들은 먹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시의 수도승이라고 할만 하지요!
그렇게 열심히 하는 보디빌더의 성취감이 무언가 물어보니 바벨을 들어올리는데 5킬로그램 더 들어 올리는 것과 어제보다 더 커진 근육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근육이 썩지 않습니까? 그가 받은 상패와 트로피들이 영원한 것입니까? 그렇게 썩을 면류관을 위하여서도 그렇게 절제하면서 훈련을 하는데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위하여 절제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방금 자유인이라고 해 놓고서는 자유인은커녕 절제하는 운동선수들보다 더한 절제와 훈련을 하라고 하면 그것이 무슨 자유인인가 하는 반발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절제하지 않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상을 받지도 못하고 마치 구원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자기를 쳐서 복종한다고 하니 이게 무슨 자유입니까? 그리고 인간이 열심히 해서 상도 받고 구원도 받자는 식이 되어 버리면 그게 무슨 복음입니까? 라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저는 이렇게 봅니다. 상 받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상을 주셨고 이미 구원을 베푸신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아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시면,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이미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다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복이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며, 그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것이며,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3:14-19절입니다. “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스겔 선지자는 보좌에서 생수가 나와서 그물이 가는 곳마다 살려내는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 물이 발목을 적시고 허리를 적시고 헤엄칠 큰 강으로 흘러가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은혜의 강물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지금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 은혜를 맛본 것입니다. 그래서 달리기를 독려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상인지 그 세계를 맛보았기에 죽도록 달려가도 그 은혜의 세계를 다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상을 받지 못할까봐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그 상의 은혜를 다 맛보지 못할까봐서 달리는 것입니다. 바울의 상은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 것을 자기의 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으로 자유 한 사람의 목표인 것입니다.
한스 큉이라는 신부는 왜 그리스도인인가의 책에서 이런 자유를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권리를 대가 없이 포기하기를 기대하시는 권리 주장에서의 자유, 권력을 남을 이롭도록 사용하기 위하여 세력 다툼에서의 자유, 소유와 소비로부터의 자유를 행사하는 소득으로부터의 자유, 마지막으로 봉사하기 위한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봉사에는 서열 없는 봉사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가 바울사도에게서 그대로 다 나타납니다.
씨 뿌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라고 합니다. 세력 다툼의 문제는 ‘누가 십자가를 졌는가?’ 로 마무리 해버립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미 그 복음에 사로잡힌바 된 그 세계가 얼마나 좋은지 그 자유가 얼마나 좋은지 그 붙잡힌바 된 그것, 자기를 사로잡은 복음을 향하여 평생을 달려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10-14절입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2)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3)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이 자유를 우리도 마음껏 맛보기를 소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0:1-13 거울 2005. 8. 1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ㄱ)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12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그 거룩하심을 아는 일에, 우리의 평생을 올림픽에 곧 나갈 선수처럼 절제하며 훈련하여도 다 알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은사 몇 가지를 가지고 모두 다 받은 것처럼, 신앙에 있어서 다 아는 것처럼 교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12절에서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들의 교만을 지적하기 위하여 거울을 가져다 됩니다. 그 거울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까지 어떻게 실패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음행과 원망과 불신과 교만함의 거울을 들이대면서 이것이 바로 너희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거울 앞에 우리의 모습도 비추어지기를 바랍니다.
10:1-4절입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이중 부정은 강한 긍정입니다. 꼭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어떠하였는가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출애굽하기까지도 얼마나 엄청난 기적과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까? 열 가지 재앙에서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마지막 재앙에서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살아남았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생략하면서 이미 출애굽 이후의 기적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도 기적이지만 출애굽 이후도 연속적인 기적입니다. 구름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습니다. 우리는 흔히 홍해 건너고 광야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이 인도한 것으로 알지만 성경에서는 홍해 바다를 건너기 전에 이미 구름기둥이 보호하고 있습니다. 애굽 군대의 추격을 구름과 흑암이 밤새도록 격리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진영은 밤이 낮처럼 밝았습니다. 그동안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름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로 건넜습니다.
이 구름과 바다 속을 지난 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군 훈련소에서 수 백 명을 한꺼번에 세례를 주는데 여기서는 한 민족 전체를 한꺼번에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다 함께 신령한 식물, 하늘로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다 같은 신령한 반석에서 신령한 음료를 먹었습니다. 반석이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출애굽 한 사람은 모두 다 그 기적을 맛보고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수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장정만 60만 명인데 가족을 합하면 적어도 2백만 명은 추산이 됩니다. 그 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단 두 명뿐입니다. 물론 가나안 정탐 시에 20세 이하는 예외가 되었습니다만 성인으로서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 놀라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어떻게 하시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천국에 들여보내시려고 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설교도 그렇게 들어왔습니다. 지난주에 바울도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란 새 언약 안에서 외적인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는 면에서 모든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요한복음 3:16절을 말씀 드렸습니다만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들으면 기절할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이요 할례를 받아야 하며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누구나 구원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싫었으면 그 말씀을 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겠습니까?
노아 홍수 때에 구원받은 자가 단 8명입니다. 가족수로는 한 가족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고향 회당에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읽으시고 오늘날 너희에게 응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무지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엘리야 때에 3년 6개월의 가뭄 속에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시돈 지역의 사렙다 과부 한 사람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는 말씀과 엘리사 시대 때에 이스라엘의 수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지만 아람 군대의 나아만 한 사람만 고침을 받았다는 이 말씀을 듣고서 그들이 예수님을 언덕에서 밀어뜨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과 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열심히 전도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구원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고 하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얼마나 기분 나쁜 말씀으로 들리겠습니까? 그러면 전도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전도란 무엇을 전하여야 합니까? 하나님은 다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씀도 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문은 다수결로 가결하는 곳이 아닙니다. 민심이나 여론과 아무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만이 세워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개인의 구원중심으로 생각하면 많은 이런 말씀은 단 한 말씀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도 취사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부담 되는 말씀은 넘어가고 좋은 것만 취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고 고린도 교인들이고 오늘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광야에서 다 엎드려지게 하였다고 말씀드리면 당장 마음에 생각하기를 그러면 광야에서 죽은 사람은 천국가지 못하고 다 지옥 갔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그런 질문자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싫어하시는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구원에 관심이 있으니 그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멸망되었다고 지옥가지는 않습니다. 모세도 아론도 광야에서 죽었는데 그들도 천국가지 못하겠습니까?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한 숨을 쉬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래도 구원은 받을 수 있겠구나? 역시나 무슨 중심입니까? 자기 구원중심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이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거울과 경계로 기록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갑니까? 이런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보게 될 때에 오늘 결론은 어떻게 내려지겠습니까?
7-10절입니다. 우상숭배하지 말자. 간음하지 말자. 주를 시험하지 말자. 원망하지 말자고 하면 되겠지요! 그렇게만 결론을 내린다고 하면 모세의 율법만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되는가를 보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거울과 경계는 과거의 역사를 보고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고치자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과거의 역사를 보고서 고친 인간이 없고 국가가 없습니다. 나라와 나라가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 자기들의 욕심 때문입니다. 그런 역사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욕심들을 버리는 나라가 있습니까? 다른 나라는 다 망해도 우리나라는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종교적인 욕구로 바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다른 교회는 구원받지 못해도, 나는 우리 교회는 우리 가정은 구원되어야만 해, 이런 식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모세는 시내 산에서 40일간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있는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자기들을 구원한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금송아지를 만들 때에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자기를 위하여 만들어지는 신이 우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어떤 형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하는 모든 것이 다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이 우상 아닌 것이 없습니다. 종교를 왜 가집니까? 왜 예수를 믿습니까? 하나님을 왜 찾습니까? 나를 위하여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세상의 복이 되든지, 구원이 되든지, 사후의 천국이 되든지, 상급이 되든지 간에 모두가 우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이 아닌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에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 지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가 아니라 내 자신이 바로 우상숭배자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만 두고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간음도 이방여인의 미모에 끌려가자 그들의 신들을 제사하는 축제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 뒤는 먹고 마시고 뛰어놉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서도 거기서 한 짓이 음행입니다. 모든 우상숭배는 거의 다 음행과 연결이 됩니다. 우상숭배가 신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드는 것이라면 음행이란 자기의 몸의 쾌락을 위하기에 우상숭배와 음행은 결국 다 자기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란 우리의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셨으니 주님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로 모였다고 하면서 자기 몸만 챙기고 있다면 그것이 우상숭배요 음행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말씀 앞에서 어느 누가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까? 우상 숭배한 거울과 음행의 거울을 비추어 보면 그 안에 누가 나옵니까? 내 자신의 얼굴이 그 안에서 춤추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주를 시험하고 원망한 것은 광야에서 늘 하든 일이었습니다. 길이 좋지 않다고, 만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고기가 없다고, 늘 원망한 것입니다. 그 원망과 불평은 언제가 애굽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먹던 고기, 마늘 파 부추, 수박 외 등이 맛있었다고 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가는 것이 참으로 생명의 길인데 그 길이 늘 싫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원망과 불평이 어디에 있습니까? 애굽을 그리워하고, 애굽식으로 살려고 하니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실력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십니다. 택하신 자에게는 피할 길을 주십니다. 어떻게 피할 길을 주시는 것입니까?
신명기 8:2-3절입니다. “봉독”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 그 길이 피할 길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시는 길이 우리가 피할 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감사하게 만드시고 그만을 사랑하게 만드시는 것이 피할 길입니다.
고린도전서 10:14-22 누구와 사귑니까? 2005. 8. 14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지난주에 거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구약의 거울을 비추어보니 구약의 범죄 한 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우상 숭배, 간음, 주를 시험, 원망 이러한 죄악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제 거울을 보고서 고칠 수가 있습니까? 인간이 스스로 고친다는 것은, 이미 구약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율법의 내용들을 스스로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율법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범죄 한 아담이후의 인간이 다 죄 아래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나는 예수를 믿기에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지난주에 결석하신 분도 계서서 잠시 우상숭배에 대하여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상이란 마리아상이나 불상이나 자연물에 절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신을 섬기는 것도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탐심이 우상숭배이기에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를 부르면 그것이 다 금송아지를 섬긴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신을 만들어 낸 결과가 금송아지였습니다.
내일이 광복 60주년이라고 죄수들을 특별사면하고, 거창한 행사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부가 사면하고 광복을 노래하여도 여전히 캄캄한 어두움 아래 갇혀있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모릅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참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은 어두움을 더 사랑하여 그 빛을 미워하여 죽이고 추방하여 버린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세상은 빛이고 예수님은 음울한 어두움으로 보는 것입니다. 멸시와 배척 온갖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실패로 보고 있는 세상은 여전히 어두움아래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20절입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어두움을 빛이라고 하고 빛을 어두움이라고 하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우상숭배의 현장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4절입니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합니다. 우상 숭배가 어떤 형상물에 절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것이 다 우상숭배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씀을 한 곳 더 찾아봅니다. 요한일서 2:15-17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러한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이것은 곧 무엇과 연결이 됩니까? 간음과 연결이 됩니다. 야고보서 4:4절입니다. “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의 것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우상 숭배요 간음인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나는 우상숭배하고 간음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마음이 듭니까? 아니면 원망과 분노가 일어나면서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하면서 튀어 나가고 싶은 마음은 듭니까?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10:15절에서 지혜 있는 자들에게 대하여 말하는 것처럼 말하니 너희가 스스로 판단하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말합니까? 복음을 듣고, 진리를 알아서 자유 한다고 합니다. 우상도 우상의 제물도 아무것도 아니기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우상제물을 먹는 자리에 함께 참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으로 교만하여 졌지 사랑으로 덕을 세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자유와 지식이 오히려 교만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들이 살고 있는 모습이 우상 숭배하는 모습과 다름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봅시다. 우리는 과연 복음을 들었다고 하면서 과연 누구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우상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교만하여 져 있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16-17절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잊은 것입니다. 우리의 축복하는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요,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성찬식에 참예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살 찢으심과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게 하셔서 성찬식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18절입니다.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육신으로 비유합니다. 그들이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먹는 것은 제단에 참예하였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그림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하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육신으로 난 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제물을 드리면 제물이 불태워지는 제물이 있고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제물이 있고 제사를 드린 자가 함께 먹는 제물이 있습니다. 화목제물을 함께 먹게 되는데 그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그 제단에 참예된 것이기에 이방 제사에 참예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는데 어떻게 우상의 제단에 드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과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우상의 신전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방인의 제사란 결국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20-21절입니다. 이방인의 제사란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제사에 참예하는 것은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과 교제하면서 귀신과 교제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법원 앞길에서 차에 고사지내는 것을 신호대기 하면서 보았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나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중에 어떤 아주머니가 지나가면서 쳐다보니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떡과 사과를 받아서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평소에 무엇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고사 지내는 사람이겠지요. 그런데 제가 그곳에서 함께 음식을 먹는다면, 저는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고 우상이란 헛된 것이라고 여기고 먹을 수 있다고 하여도, 여러분들이 저의 모습을 보게 되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23-24절을 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도의 답변입니다.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있다면 우상숭배자입니다. 왜 우상숭배자가 된 것입니까? 예수님과의 사귐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 받아서 천국 가는 것도 좋은데 세상에서 사는 것은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적당하게 예수 믿어 줄 테니, 적당하게 타협하는 선이 십일조 내고 주일날 지켜주겠다는 정도입니다. 그 정도도 하지 않으니 교회에서 그것이라도 하면 신앙생활 하는 것인 양 인정해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거래이지 사귐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참예, 교제라는 말이 나옵니다. 주님의 몸에 참예하고 주님과 사귐이 있어야 성도입니다. 그 주님과의 사귐이란 반드시 한 몸이 된 성도와의 사귐도 있는 것입니다. 그 사귐이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사귐입니다. 그런데 저의 모습을 보아도 여러분의 모습을 보아도 우리가 도대체 주님과의 사귐이 있는가를 의심할 수가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강대상 뒤에 교인 주소록이 있습니다. 가족 이름이 다 나와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때 성경에서 기도제목을 한 가지씩 말씀드립니다. 요즈음 잠언서인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으로 보고서 성도들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여호와를 경외하기 원합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는데 지난 주 새벽에 기도를 하다가 우리 중에 누가 과연 여호와를 경외하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란 그의 보내신 자를 믿고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살아가는 방향과 목표가 과연 주님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을 향한 것인가를 물어 보았습니다.
우상숭배란 예수님보다 세상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숭배라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목사가 예수님보다 자기가 담임하는 교회운영에 더 관심을 가지면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헌금이 얼마나 나오는지 개인 보고를 받지 않는다고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제직회 보고서를 보지요! 가끔씩 교회소모품 비용 청구하다가 회개집사님의 봉투를 힐끗 보기도 합니다. 누가 얼마나 했는지 얼핏 보았는데 눈치를 챘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데 관심이 가지요! 예수님과의 사귐이 정말 좋다면 그런 것에 관심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인데 과연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님보다 교회 건물이나, 사람의 수나, 헌금의 액수나, 교인들이 재미있게 지내는 분위기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것은 목사만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더 관심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도 않으신 분은 오직 내 가정, 내 직장만 관심이 있습니까?
지금 누구와 사귐이 깊어지고 있습니까? 그분을 사랑하기에 그분을 더 알고 싶고, 그분과 더 깊이 사귀고 싶고, 그분에게 무엇이든 더하지 못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까?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귐을 사람들이 원하지 않습니다. 왜 원하지 않습니까? 그분과 사귀려고 하니 세상과 이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멀어지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세상과 사귀고 싶어서 주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요 귀신과 사귀는 것입니다. 단지 이방인의 제사에 참예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귀신과 사귀는 것입니다. 이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아직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데 그들이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습니다. 무엇을 영원히 붙들겠습니까? 60억을 가진 할머니가 자식들은 재산 다툼하고 남편은 딴 살림 차렸습니다. 그래서 한강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주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84:10절입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누구와 사귀겠습니까? 주님과의 사귐은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23-11:1 무엇을 하든지 2005. 8. 21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우상 제물을 먹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고린도전서 8장에서 시작하여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그동안 이 단락으로 설교를 7번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결론인데 여러분은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겠다는 기준이 세워졌습니까? 우상 제물을 먹고 아니 먹고 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일과 행위에 있어서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하여 어떤 기준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답변하시기가 어렵지요? 많은 사람들이 제가 설교를 하고나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말해 달라고 합니다. 저는 분명히 말씀을 드렸는데도 마음에 와 닿지 않은가 봅니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시면 됩니다. 아니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행위가 어떤 것입니까? 하고 또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이 성도 안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지시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어렵게 말하지 말고 이것을 하라 저것은 하지 말라 그렇게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대부분 이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된 마음의 바탕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부터 인간이 육신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육신이 되어버린 인간은 법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육신이 된 자는 아무리 법을 지켜도 그 안에서 사랑이 나오지는 않는 것입니다.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자기 의가 쌓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정죄할 뿐 사랑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면서 무엇을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 몇 가지를 제시하면 그것을 붙들고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부담스러우면 안 되니 적당하게 제시를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무엇입니까? 지난주 설교 원고에는 기록하였다가 말씀을 드리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주일 성수와 십일조입니다. 그것만 하면 기본은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좀더 많이 하면 여러 종류의 헌금들과 교회의 봉사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아무리 지킨다고 하여도 법 지키는 차원에서 하는 것은 육신입니다.
로마서 8:7-9절입니다.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법을 얼마나 잘 지켰습니까? 모세의 율법에서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이 613가지입니다. 그런 율법의 명령 중에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잘 지키기 위한 보조 계명이 몇 가지인지 아십니까? 365가지입니다. 왜 그렇게 많은 것입니까? 십계명을 생활 속에서 실천을 해야 하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지적을 해 주어야 하니 365가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중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한 가지 법에 따른 보조 법만 39가지입니다. 안식일에 불을 피워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몇 킬로미터를 걸어야 하는지, 안식일에 구덩이에 짐승이 빠지면 건져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사람이 다치면 치료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상체에서 피가 나면 지혈은 하지만 약을 바르지 못하게 하는 등, 이러한 법들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여러분에게 제시하면 여러분이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는 누가 무엇을 가르치지 않아도 그 기름 부으심이 다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27절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주께서 각자에게 친히 가르치시고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오늘 결론을 내리자면 우상 제물의 문제만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기준을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다 나옵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미 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일곱 번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는데 기억이 나지 않으시지요? 그래서 다시 제목과 내용의 요약을 하겠습니다. 그러면 대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지식과 사랑’에서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 참 신이시기에, 우상의 제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러한 지식은 교만으로 흘렀지 사랑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의 제물을 먹지 못하는 자를 향하여 아직도 우상에 대한 지식이 없느냐며 멸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고 안 먹고의 기준은 자기 지식보다 사랑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형제를 위하여’ 셋째, ‘복음을 위하여’ 에서는 그 행동의 기준이 형제와 복음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편한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형제를 위하여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형제가 실족하게 된다면 평생에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넷째, ‘바울의 자랑과 상’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몇 가지 받은 은사들로 자랑을 하니 자기는 그런 자랑이라면 더 큰 자랑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여는 자기의 약함만을 자랑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바울의 상이란 형제를 위하고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아니한 것이 자기의 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섯째, ‘자유인의 목표’입니다. 자유인이란 아무 목표가 없어야 자유인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사도는 자기를 사로잡은 그 십자가의 세계를 알아가는 것이 목표라고 하였습니다. 그 십자가를 알면 알수록 더욱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에서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까? 죄에서, 율법에서, 죽음에서, 세상에서, 자기 자랑에서, 자기 체면에서 점점 더 자유하게 하는 것이니 그 자유, 사로잡힌바 된 그 십자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 자유인의 목표인 것입니다.
여섯째, ‘거울’입니다. 구약의 거울을 비추어 보니 우리의 모습이 그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온갖 우상숭배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다만 형상물에 절하는 것만이 우상이 아니라 탐심이 우상 숭배며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 이런 우상 숭배에 갇힌 것입니다. 오직 피할 길을 주님께서 주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누구와 사귀십니까?’ 지난주의 말씀입니다.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고자 하는 것인데도 우리는 날마다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고자 작정하고 달려들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 달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려 달라는 그 의도가 무엇입니까? 시키는 것 몇 가지만 하고서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더 세상을 사랑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까?
다시 요약을 하였으니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준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아직도 세워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행위가 아니라 원리를 말씀드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체적인 지침을 내리면 반드시 율법 화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사람의 행위에 있어서 성령의 열매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구체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봉사의 예로 듭니다. 겉으로 볼 때는 똑 같이 두 사람이 봉사를 합니다. 두 사람 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그 봉사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은 되는데 어느 것은 되지 않는 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한꺼번에 다 나오는 속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세상에서나 성령을 열매를 맛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별 것 아닌 것 몇 가지 한 것으로 자기는 많이 한 것인 양 자랑하고 비교하면서 위안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결론을 어떻게 내리고 있습니까? 23-24절입니다. 모든 것이 가합니다. 모든 것이 다 자유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자유라고 내 편한대로 하였는데 그것이 덕을 세우지 못하였다면 나의 지식으로 교만하게 행한 것이지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합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25-30절입니다. 시장에 나오는 음식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사 먹으라고 합니다.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에게 드려진 것이라고 하여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식사를 마련하고 초대를 하면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시장에 파는 것이나 차려진 음식이나 고기의 대부분이 우상에게 드려진 것들이지만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파는 것이고 손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사온 것이기에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그 음식이 우상 제물로 드려진 것이라고 알려 준다면 그 알게 한 자와 그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알려준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나의 양심은 자유 합니다. 거리낄 것이 없지만 그 사람의 믿음이 연약하여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이라고 알려주면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31-11:1절입니다. 총 결론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며, 형제의 유익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의 봉사든, 가정생활이든, 사회생활이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사랑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인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 하나님의 교회에서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거치는 자란 결국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에 나오는 일입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 받은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1:2-16 권세 아래 2005. 8. 28
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6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찌니라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14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16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찌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우상의 제물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 결론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이웃의 유익을 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예배 시에 여자가 머리에 너울을 쓰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2절을 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기억하고 바울 사도가 전한 유전을 지키므로 칭찬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전하여 준 유전은 바울사도의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즉 복음의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서 잘 지키고 있음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또 교회 안에 일어난 문제는 여자가 예배 시에 머리에 무엇을 쓰는가? 아닌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 당시의 고린도 지역에서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이 여성스러움의 표시였습니다. 학자들마다 분분한 이견들이 있지만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거나 머리를 미는 것이 여자로서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머리는 미는 것은 종들이나 간음한 여자들이 벌로서 머리를 밀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는 여인들은 영향력 있는 고린도 인들의 고급 정부들과 아프로디테 신전의 매춘부들이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 여자들이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서 예언이나 기도를 한 것입니다. 여자가 교회 안에서 잠잠 하라는 고린도전서 14장의 말씀도 있지만 오늘 말씀은 여자가 교회에서 예언과 기도를 금하지 아니합니다. 은사가 있어서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질서도 없이 안하무인격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질서라고 할 때 사람들이 만들고 세운 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입니다. 그 질서는 누구의 우위나 신분의 차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지으심으로 만물을 아름답게 하신 것입니다. 피조물이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그 피조물의 아름다움이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떠난 것이 범죄였습니다. 유다서 1:6절에 보시면 천사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를 결박하여 영원한 심판의 때까지 가두어 두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피조물인 천사가 자기의 지위를 떠나서 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자기편에 합류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죄란 자기 지위를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후에 아담을 돕는 배필로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금령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와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뱀이 누구를 유혹합니까? 하와를 유혹합니다. 그 유혹은 말씀의 변개에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하와가 살짝 변개시킵니다. 만지지도 말며 먹으면 죽을까 하노라는 것입니다. 사단이 그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따 먹으라 그러면 너도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와가 따먹고서 남편에게도 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순전한 남자가 아담 아닙니까? 그런데 여자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을 더하시고 남편을 사모하게 될 것이고 남편은 너를 다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모한다는 말이 자기 손에 쥐고 싶어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창세기 3:16절을 공동번역에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새 번역에서는 “····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여자가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어 하고 남편을 지배하려고 하지만 남편의 다스림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의 비밀입니다. 오늘도 부부의 갈등은 이 문제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남편을 손아귀에 쥐고서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여자는 어떻게 됩니까? 이제 옛 창조에 속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인데 그런 구분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이런 항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 없는 여자 없고 여자 없는 남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께로 났습니다(고전 11:11-12).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것은 아무런 질서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중심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통일이 되어야 새로운 창조의 질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7-14절입니다.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구속함, 곧 죄 사함을 받은 것은 그 비밀의 경륜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비밀의 경륜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라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가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 나오는데 우리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라면 쉽습니다.
이어지는 13-14절의 말씀을 봅니다. “13 그 안에서 너희도 2)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3)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그의 영광을 찬미하면 됩니다.
그런데 12절에서 우리가 그의 영광과 찬송이 된다는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1:7-10절을 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 남자가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이었습니까? 범죄 하기 전입니다. 범죄하고 나서는 아담은 이름 그대로 흙입니다. 그래서 범죄 한 이후의 인간의 아담의 형상, 흙에 속한 형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위하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범죄 한 아담을 여자의 후손으로 생명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범죄 한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게 되는 것은 오직 참 하나님의 형상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 즉 아들의 형상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범죄 하여 피조물의 지위를 떠난 아담을 그의 피로 용서하셔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미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따로 특별히 무슨 일로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형상, 그 아들의 형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미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머리이고 나는 그의 몸인 것입니다. 머리가 나를 주장하고 다스리시고 인도하여 가신다는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그리스도의 통치와 그의 권세 아래 들어오게 되는 새로운 질서에 편입된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을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어떻게 보이는가 하면 여자가 남자의 권세아래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여자 분들이 기분이 나쁩니까? 방금까지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남자의 예를 들어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아래, 그 만물을 통일하시는 질서아래 들어가게 된 것이 구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은혜가 여자에게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우선 눈에 보이는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여자들이 은사를 받았다고 여성다움이 나타나는 수건을 벗어버리고 남자도 무시하고 설쳐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 없는 여자 없고 여자 없는 남자 없이 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지만 그러나 여자가 남자의 영광이라는 사실입니다. 남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남자가 사는 것처럼, 남자의 희생으로 여자가 사는 것인데 그 여자는 자기 남편을 그리스도처럼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권세아래 있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상황은 40대만 넘어가면 모든 경제권을 여자가 다 쥐고 있습니다. 더 빨라져서 30대에도 남자가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사 갈 때에 강아지라도 안고 있어야 된다는 서글픈 이야기를 듣습니다만 이것이 종말의 현상이며 범죄 한 이후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여자란 어떤 여자입니까? 남편의 권위에 순복할 줄 아는 여자입니다. 자기가 남편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도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이 남자의 머리인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겠지요! 남편 말대로 해서 어떻게 사느냐 싶을 것입니다. 자기 밥 그릇도 못 챙기는 남편처럼 보이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영원한 남편이 되시는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무능한 남편보다 더 무능한 예수님입니다. 세상에서 전세방도 구할 형편이 못되고, 겨우 하루하루 은혜로만 살아갑니다. 내일에 대하여는 대책이 전무합니다. 그래서 바가지를 긁으면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백합화를 보라! 농사짓지 않고 길쌈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아름답게 입히신다는 남편입니다. 그러다가 멸시천대 받고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우리의 영원한 남편이 되십니다.
여자가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이 처량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영광이 됩니다. 요즈음은 구질구질 한 결혼생활 하기 싫어서 혼자 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화려한 싱글 이라고 하지만 정말 화려합니까? 점점 늙어가는 것을 온갖 화장과 장식품으로 치장하면서 감추어 가는 것이 화려합니까? 화려한 서글픔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남편을 섬기며 손과 얼굴에 주름살이 늘어가고 흰머리가 나고 몸에는 된장냄새 김치냄새가 베이더라도 그것이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그 안에 주를 사랑함이 있다면 여자의 머리인 남편을 존경하는 것이 여자의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권세아래 있다는 표입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에 복종하고 아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남편에 말에 먼저 순복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3:1-7절입니다. “봉독”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17-34 주의 만찬 2005. 9. 4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19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1)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1)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1)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2)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찌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오늘 이 말씀은 일년에 적어도 한 두 번은 꼭 듣는 말씀입니다. 성찬식 때마다 이 말씀을 읽고 성찬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부터 성찬식에 참예하게 되는데 성찬에 참예하여 은혜를 받기도 합니다만 늘 마음에 눌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일주일 전에 미리 광고를 하면 그 주간은 고난주간처럼 보냅니다. 텔레비전을 안 본다든지 오락을 피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찬을 받기 전에 자기를 살펴보고 죄가 있으면 받지 말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찬을 받을 까? 말까를 고민한 적이 저는 한 두 번이 아닙니다.
27-30절을 봅니다.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살피고 먹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병들고 자는 자가 많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이러한 고민을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빨리 죄를 회개하고 성찬에 참여하든지 아니면 성찬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성찬을 받고 나도 마음이 찜찜한 것입니다. 제대로 회개는 하였는지 아니면 바르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과연 그러한 말씀입니까? 죄인이 참여할 수 없는 성찬이라면 그림의 떡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자신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셨는데 죄인이 참여할 수 없고 의인만 참여하는 성찬이라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26-27절입니다. “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려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죄인이 죄 사함을 받은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를 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성찬식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참여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므로 왜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에 이런 말씀을 하게 되었는지를 전체를 통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습니다. 파당이 생기고 우상제물의 문제가 있었고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원리적으로 해결을 하는지를 보아 왔습니다.
파당이 생기는 것에 대하여서는 누가 십자가를 졌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분이 따로 계시는데 누가 자기가 옳다고 나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상 제물의 문제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형제의 유익을 구하여 덕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고 하였습니다. 머리에 수선을 쓰는 문제는 누가 머리냐를 말씀하였습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중심으로 통일 되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성찬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고린도 교회를 칭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11:2절에서는 칭찬한다고 하더니만 이 문제는 칭찬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열심히 모였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모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왜 모이는 가의 의미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내용 없는 열심은 자기만족에 불과 합니다.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하였으면 목이 다 쉬었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슨 내용으로 기도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17-19절입니다. 모임이 유익을 주지 못하는 모임이 되어 버렸습니다. 모여서 분쟁이 생긴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누구의 제자인가로 분쟁이 생겼는데 지금은 주의 만찬을 먹으면서 분쟁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너희 중에 그런 편당이 생기게 됨으로 누가 옳은지가 드러난다고 합니다. 신앙도 늘 편하고 좋을 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에 누가 진짜 신앙인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모이는 것이 유익을 주지 못하게 되었습니까?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떡을 뗐습니다. 떡을 뗀다는 것은 단지 식사만 한 것이 아니라 주의 만찬을 행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떼시면서 자신의 몸이라고 하셨고 잔을 주시면서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모여 떡을 뗄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기념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45-47절입니다.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4:32-35절입니다. “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6)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을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바로 이 모습이 성령의 충만한 모습니다.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한 마음이 된 것입니다. 한 마음이 된 것이기에 함께 떡을 뗀 것입니다. 한 마음에 되었기에 무슨 차별이 없어졌습니까? 빈부의 차이가 없어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인하여 그 십자가로 인하여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동안 인간을 차별하던 모든 차별들이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됩니다. 지역, 혈연, 학연, 경제적이 차별이 다 무너진 것입니다. 어떤 착한 사람도 예수님의 살과 피 앞에서 자기 자랑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죄인도 예수님의 살과 피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 모여서 성찬을 행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20-22절입니다. 이 당시의 교회란 집이 넓은 사람이 자기 집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장소로 내어 놓으면 그곳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모임이 있을 때에 부자들이 음식을 준비해 옵니다. 그리고서는 함께 모여서 떡을 떼고 잔을 나누어야 하는데 먼저 온 사람들이 먼저 먹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배부르고 취하기까지 하는데 가난하여 늦게 까지 일하고 온 사람은 먹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음식 끝에 마음 상한다고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것도 주의 만찬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의 의미를 다시 들으라는 것입니다. 23-26절입니다. 유월절 만찬의 떡과 잔을 자신의 살과 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을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로서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예수님과 살과 피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 즉 예수님의 죽으심을 주님 오실 때까지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주님 오실 때까지 증거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들은 성찬을 일년에 한두 번 기념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성찬을 얼마나 행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일 때 마다 성찬의 의미가 증거 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는 사실이 늘 선포되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죽으심 안에 성도가 늘 놓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벗어 버리고 나면 자기 자랑이나 자기 공로가 나오게 됩니다. 누가 더 많이 행하였는가? 누가 예수 믿고 세상의 복을 많이 받았는가? 하는 차별이 나타나게 되면 그것은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곳이 아니라 자기의 땀과 피를 자랑하는 곳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곳에는 시기와 다툼과 분쟁과 요란함이 있습니다. 차별이 나타납니다.
초대교회 때에 주님의 만찬은 오늘처럼 기념예식이 아니라 식사였습니다. 그 식사자리에 가난하다고 업신여김을 받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살과 피를 업신여기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를 살피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27-34절입니다. 주의 몸을 분별치 못한 일에 대하여 징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든 자와 잠자는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잠자는 자란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공포를 느끼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의 몸을 구별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징계를 하심은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면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징계가 더 유익한 것이 됩니다. 오늘날도 이런 징계가 있다면 우리는 이미 다 죽었을 것입니다.
징계가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면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 세상이 이미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죄 아래 있어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무엇을 몰라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의 의미를 모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보고 무능하다고 합니다. 저주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바로 심판 받을 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모르면 아무리 건강한 자라도 이미 병든 자이며 아무리 살아있다고 큰소리 쳐도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은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실패해도 죽어도 상관없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입니다. 이미 주님의 죽음에 동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1:23-26 주의 죽으심 2005. 9. 11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1)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지난주에 성찬의 전체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 중에 새 언약에 대하여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새 언약이 있다는 것은 옛 언약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새 언약으로 하시지 않고 왜 옛 언약을 주신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죄를 모르는 자는 은혜도 모르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전체를 통하여 인간이 어느 정도로 구제불능인지를 철저하게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직 자기 아들의 피로만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방금 자기 아들의 피로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시는 것이 새 언약입니다. 이 새 언약을 오늘 본문에서 다른 말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단어가 무슨 단어입니까? ‘주의 죽으심’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으로 구원받은 자는 주의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예수님 오실 때까지 기억하고 증거 해야 할 것은 주의 죽으심인 것입니다.
교회란 주의 죽으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의 죽으심을 벗어나면 그것은 교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0:28절에서는 교회를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피를 흘리심으로 교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만드실 뿐 아니라 유지하는 것도 친히 머리가 되셔서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땀과 피가 교회를 만들거나 유지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옛 언약인 율법 하에서도 인간의 땀과 노력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27:6절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을 때는 다듬지 않는 돌로 쌓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주어진 말씀인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에발산에 단을 쌓을 때에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들의 노력이나 애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다듬지 않는 돌로 신앙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에발산에 단을 쌓을 때에 다듬지 아니한 돌로 쌓은 것입니다(수8:31).
이뿐 아니라 인간의 땀을 거부합니다. 성경에서 땀이란 단어가 세 번 나오는데 첫 번째가 아담이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서 먹고 살기 위하여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땀 흘림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두 번째 땀이란 단어는 제사장이 땀 흘리지 못하게 하는 말씀에서 나옵니다.
에스겔 44:16-18절입니다. “16 그들이 내 성소에 들어오며 또 내 상에 가까이 나아와 내게 수종들어 나의 맡긴 직분을 지키되 17 그들이 안 뜰 문에 들어올 때에나 안 뜰 문과 전 안에서 수종들 때에는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 옷을 입을 것이니 18 가는베 관을 머리에 쓰며 가는베 바지를 입고 땀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를 동이지 말 것이며” 제사장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양털로 된 속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 옷을 입게 한 이유는 땀을 흘리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땀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땀만이 아니라 사람의 분비물을 다 부정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레위기 15장에 보시면, 남자나 여자의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은 병으로 나오는 것이든 정상적으로 나오는 것이든 그것이 고름이든 피 이든 간에 다 부정하게 여겨져서 정상적인 것은 몸을 씻어야하고 병적인 것은 치료가 되고 속죄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땀과 피는 누구의 땀과 피가 되는지는 자명 하게 드러납니다. 누가복음 22:42-44절입니다.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 감람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을 무엇을 하였습니까?
누워 잤습니다. 땀을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조차 바치겠다고 한 제자들이 누워 잤습니다. 깨워놓아도 또 잤습니다. 나중에는 다 도망 가버린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구원이란 인간의 땀과 노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결단과 각오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땀을 피 같이 쏟으시며 기도하신 후에 잡히시고 살을 찢고 피를 흘리며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유월절 만찬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19-20절입니다. “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떡을 자신의 몸이라 하시고 잔을 자신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새 언약이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새 언약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완전하게 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 백성의 특징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무엇을 증거 하는 사람입니까? 주의 죽으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누가 더 많이 주를 위하여 땀을 흘리는가를 경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땀만이 아니라 피까지 요구합니다. 어떻게 피까지 요구하는 것입니까? 사람의 땀과 피 같이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돈이란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람들이 피같이 여깁니다. 그런 돈을 교회에 바치면 축복받는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의 땀과 피는 소용없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 교회가 과연 주님 오실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을 증거 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제 금요일 성경공부 마치고 김 집사님 장유로 모셔드리면서 바로 앞의 교회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한 주에 수십 명씩 등록을 하는데 자기 교회는 부산에서 지원하기에 헌금의 부담도 없는데도 오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고 하기에 한 주에 수십 명씩 등록하는 교회가 어떤지 한번 가 보았습니다. 집사람과 함께 그곳에 가서 화장실과 필그림이라는 휴게실에 가 보았습니다. 화장실이 얼마나 좋은지 놀랐습니다. 그리고 필그림이라는 곳은 카페처럼 꾸며져 있는데 커피 한 잔에 천원에 팔고 있었습니다. 커피를 한잔 하면서 교회 안내장을 보니 문화교실이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다양하게 되어 있는지 헤아리는데도 한참이나 걸릴 정도였습니다. 다이어트 건강체조로부터 독서 논술지도, 퀼트, 토피어리, 악기교실, 어학교실, 모두 무료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동네 근처로 가면 어느 교회로 등록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주변의 작은 교회들이 무엇을 꿈꾸고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교회도 저렇게 될까를 꿈꾸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려면 사람이 많이 모여야 되고 돈도 많이 들어와야 하는데 사람이 많이 모이고 돈이 모이려면 무언가 매력적인 것을 제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그 십자가만 증거 하여 얼마나 사람이 모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교회는 그런 건물을 원하거나 돈을 많이 내라고 하지 않으니 괜찮은 교회라고 생각이 되십니까? 그런 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는 우리는 그런 세상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니 우리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역시나 예수님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주님 오실 때 까지 그것만을 붙들고, 그것만을 증거하며 사시겠습니까? 이 교회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말입니다.
왜 주의 죽으심만을 주님 오실 때까지 증거 해야 하는지를 히브리서 10:1-18절을 보겠습니다. “봉독” 율법은 그 어떤 것도 온전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황소나 염소의 피로 되지 않습니다. 제사장으로도 안 됩니다. 왕도 안 됩니다. 오직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대로 한 몸이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은 것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온전케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옛 언약이 아니라 새 언약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새 언약이기에 그렇습니다.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에 대한 말씀입니다. 16-17절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자기 백성의 마음에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저희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실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새 언약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어떻게 유혹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과 그의 백성사이를 이간질하고 갈라놓으려고 하는 것이 마귀의 최종목표인데 무엇으로 유혹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도 믿어야 되지만 그것만은 안 되고 너도 무언가 행함을 보태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습니까? 세상이 악한 자에 속하였기에 세상의 말을 듣게 됩니다.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예수님의 피 흘려주심만으로 구원된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우리의 땀과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땀과 피만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라서 우리의 땀과 피에는 죄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사람이 되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으심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며 바로 아들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 나라에 인간의 땀과 피가 찬양되지 않습니다. 그 아들만이 영광을 받게 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의 죽으심을 모독하는 자는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받지 않고 모독하는 것이 죄가 됩니다. 히브리서 10:26-31절입니다. “봉독” 옛 언약인 모세의 율법 하에서도 범죄 하면 그 대적한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범죄 하면 두 세 증인을 인하여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고 합니다. 모세의 법을 어겨도 심판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아들, 그의 죽으심으로 이루어내신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고 그것을 증거 하는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는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과연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자기의 땀과 피를 부인하고, 그 아들의 피, 그의 죽으심으로만 우리가 온전케 됨이 믿어지십니까? 그것이 바로 은혜의 성령이 임한 증거입니다. 세상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죽으심만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증거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의 증인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2:1-3 신령한 것 2005. 9. 18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지난주에 성도란 주의 죽으심을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증거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같은 추석날에 친척들이 모였습니다. 성도라면 무엇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까? 주의 죽으심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아니 성경에 많고 많은 이야기 중에 왜 꼭 주의 죽으심이어야 합니까? 예수 믿고 나서 더 나아진 나의 모습, 예수 믿고 나서 받은 여러 가지 은사와 복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보암직한 일들도 많이 있는데 왜 분위기 좋은 이런 날에 꼭 설렁한 십자가의 이야기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사람들이 다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전혀 지혜롭거나 아름답거나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예수를 믿는 집안이라고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야기 해보면, 그 십자가가 세상의 능력과 성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를 제시하면, 그만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신령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1절을 봅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중부정으로 굉장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것에 대하여 꼭 알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 신령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은사들입니다. 성령의 은사들에 대하여 알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 당장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 그래 나도 은사를 받아서 많은 능력을 행하여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합니까?
이미 고린도 교회는 많은 은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은사가 나타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만 하시고 그 다음에는 우리가 믿고 가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 까지도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그들의 모습은 이방인들의 종교적인 체험들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우월감을 가지고 사는 모습과 같게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것이 발달하였든 원시적인 모습이든 어디에서나 초월적인 현상이 나타납니다. 고린도 지역은 헬라의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에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보기도 하고 경험하기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종교적인 체험에는 황홀경이나 무아지경에 끌려들어가서 방언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신적인 능력으로 보았기에 그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신의 능력이 의심을 받는 것입니다.
옛날만 아니라 오늘날같이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신비하고 초월적인 것에 매력을 느끼고 찾아 나섭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종교성을 과학과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다 벗겨버렸으니 사람들이 공허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약을 의지하여 황홀경을 맛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고 동양의 신비한 종교를 찾아 나서기도 하는 것입니다.
현각 이라는 사람은 미국 뉴저지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예일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하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대학원 때 선불교의 숭산 스님의 설법을 듣고 한국에 와서 주지까지 되었습니다. 지금은 선불교를 외국에 알리기 위하여 불교경전을 영어로 번역하고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절에서 산사체험이라는 관광 상품이 개발되어 외국에까지 팔리고 있는 것입니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의 조용한 절에서 몇 일간 수련을 하면서 자기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많은 돈을 들여서 한국의 산사까지 찾아오는 것은 무언가 끌리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성들이 교회 안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역시 신비 체험 쪽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았다. 들었다. 방언을 하였다는 것으로 자기들은 대단한 신앙을 소요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영성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특별한 집회를 하는 곳이 한 두 곳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여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 가서 특별한 경험을 하고서는 그것이 진짜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무언가 끌리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와 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이 성령의 일인지 악령의 일인지 알 수가 있습니까? 자기 마음에 좋고 안 좋고, 와 닿고 아니 와 닿고의 문제가 아니라 바른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1절을 봅니다.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라고 합니다. 참으로 신령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이방인들이 신령하다고 하는 것, 신비하고 초월적이라고 하는 것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만 모든 종교라는 것에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무슨 능력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는 말 못하는 우상이 끄는 대로 끌려 다녔다는 것입니다. 우상이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우상입니다. 그런 우상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우상이 끌면 끌려 다녔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딱 꼬집어 말은 못하는데 그곳에 무언가 끌리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배후가 무엇입니까?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여러 가지 신기한 능력들을 나타내어서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끌려 다녔던 자들이 고린도 교인들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1-2절에 보시면, 허물과 죄로 죽어 있던 상태, 그 때에는 이 땅의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귀가 끌면 끌리는 대로 따라갔던 것입니다. 무언가 신비하고 초월적인 것이 나타나면 대단한 신의 능력이 나타난 것으로 알고 따라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자의 임함이 어떤 모습으로 오는지를 성경은 잘 경고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9-12절입니다. “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1)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모습이 이렇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표적과 기사를 따라가는데 그 진리가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보여 주셨습니까? 최종적으로 이 땅에 남기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생애가 무엇을 위하여 기록되어 있습니까? 사 복음서가 무엇을 중심으로 기록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어린 시절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청소년기도 아닙니다. 마지막 3년 공생애기간이 기록되었는데 그 내용은 십자가를 향한 길입니다. 제자들에게 거듭 말씀하시면서 인자가 고난을 받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되는, 세상의 영광을 바라본 것입니다. 비록 고난이 따른다고 하여도 그런 고난쯤은 나중에 나타날 영광을 생각하면서 견뎌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삼년이나 고생하며 따라다닌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제자들마저 다 돌아선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실패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저주 받은 죽음이기에 더욱 더 실패로 본 것입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면서 일말을 기대를 가진 사람들조차 나무에 달려 힘없이 죽은 예수님을 보고서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구나! 하고서 돌아서버린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이 말씀이 신명기 21:23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율법에 의하면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 나무에 달려 죽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나무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서 두 가지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보고 저주 받을 자라고 하든지 아니면 주라고 고백하든지 둘 중의 한 가지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네게 알게 한다고 합니다. 무엇이 신령한 것인지 무엇이 참된 성령의 은사인지를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르게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것을 이것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어떻게 믿느냐?
그러므로 신령한 것이란 종교적인 초월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느냐가 신령한 문제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기적이 없습니다. 이 보다 더한 표적이 없습니다. 다른 종교적인 표적들과 기적들과 초월적인 것들은 마귀들도 얼마든지 흉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들의 주로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 즉 성령의 은사를 판단하는 기준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 기준은 바울 사도에게 일관적으로 흐르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미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고린도 교회 안에 파당이 생겼을 경우에 어떻게 해결합니까? 누가 십자가를 졌는가? 하는 말씀으로 해결합니다. 십자가를 지지도 아니한 자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파당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대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의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고린도전서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모든 문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해결하는 것입니다. 은사의 문제도 예수 그리스도로 판단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의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깨닫게 하시고 기억하게 하시며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은 초보단계이고 그 다음에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는 것은 고급한 단계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를 더하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2장의 여러 은사를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를 말하며 그러한 은사를 몸을 위한다고, 즉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입니다. 13장의 사랑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말씀합니다. 14장의 은사도 결국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은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신령하게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다 이루심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보다 보다 더한 은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믿지 못하기에 은사를 주셔서 믿게 하시는 것인데 오히려 은사를 받았다고 교만하여지고 자기들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행동하는 그들은 십자가와 거꾸로 가려고 한 것입니다.
열광적인 분위기나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적이 없지만 묵묵히 바보처럼, 십자가의 예수님을 주로 믿고 가는 것이 참으로 신령한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신 표적임을 믿고서,,,,
고린도전서 12:4-11 은사의 목적 2005. 9. 25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 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지난주에 결석을 많이 해서 신령한 것에 대하여 잠시 요약을 합니다. 우리는 신령한 것 그러면 신비하고 초월적인 것을 신령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본 말씀에 의하면 신령한 것이란 십자가에서 저주 받아 죽으신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고 하지 않고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신령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신령한 자인지 아닌지의 구별을 무엇으로 하면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보느냐로 구별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 중에 영들 분별함도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것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떻게 보고 믿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말씀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은사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초보 단계이고 고급단계로 올라갈수록 초월적인 능력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바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나타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수많은 은사가 나타났는데 그 은사의 목적을 모르고서 자기 은사 나타난 것으로 자랑하고 교만하여 진 것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 신령한 것을 말하게 된 사람들이 무엇을 증거 하였는지를 먼저 확인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36절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사도행전 2장1절부터 성령이 임하신 내용의 결론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기까지 기다리라고 하시면서 승천을 하셨습니다. 승천하신지 10일 만에 그 때가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그 복음이 각 지역 사람들이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각 지역의 언어로 알아듣게 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큰일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큰일이란 십자가의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지금 보고 듣는 이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요엘서와 시편을 인용하면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구약을 제대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구약의 선지자들이 누구를 증거 하기 위하여 그렇게 예언하였는지를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밝히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말세에 성령을 부어 주리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이며 그 성령을 보내시기 위하여 주가 오셔야 하셨고 고난 받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셔야 하셨던 것입니다. 이일의 증인이라고 사도들이 말합니다.
사도행전 2:33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오른손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에 무엇으로 구원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오른손입니다. 출애굽기 15:6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이스라엘의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실 때에 애굽을 치시고 홍해를 가르신 손이 여호와의 오른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그 오른손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하나님의 의를 다 이루신 예수님을 높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자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이미 창세전부터 앉아계셨던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자기를 비워 종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승천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히신 것입니다. 그 오른편이 무엇을 하시는 자리입니다. 구원하시기도 하시고 심판하시기도 하시는 구원과 심판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앉으셔서 누구를 보내시는 것입니까?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오른 손의 역할을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이루셨고 그 일을 이제는 성령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봅니다. 4절에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절에서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절에서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가 주님의 일이나 하나님의 일이 다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주님을 높이지 않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를 자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주신 것은 유익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무엇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계속하여 나오는 말씀입니다만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은사이지 어떤 개인이 사유화하여 특권처럼 사용하라고 주신 은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은사의 목적과 방향을 알지 못하면 자기 치장용으로 자기 과시용으로 은사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란 구한다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시는 분의 뜻대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11절을 봅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 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는 것입니다. 그 뜻이란 아버지의 뜻이며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심으로 이 땅에 종말론적인 공동체가 탄생하였는데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철저하게 은사 공동체입니다.
은사 공동체라고 하니 모든 사람이 은사를 받았다고 하니 여러분들은 나는 방언도 통역도 못하는데 어떻게 은사를 받았는가 하실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은사 그러면 워낙 그런 은사를 받지 못하면 열등한 신자처럼 교육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여러분이 신령한 은사를 받았는지 아닌지를 무엇으로 점검한다고 하였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믿습니까? 저주 할 자입니까?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십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하여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은사들은 무엇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 유익이 무엇입니까? 은사를 통하여 계시가 분명하여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언이나 방언이나 통역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계시가 완전하게 드러났기에 그 계시로 충분한 것입니다.
8절을 봅니다. 어떤 이에게 성령의 은사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때에는 아직도 계시가 완성되지 않았기에 지혜와 지식을 말씀을 더하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복음서가 기록되고 서신서가 기록되고 요한 계시록이 기록이 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기록이 된 것이지 그 이전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은사로 된 것입니다. 복음서와 서신서와 계시록으로 계시가 완성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빼거나 더하거나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지혜와 지식의 은사로 기록된 성경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 통일성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사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직통계시를 받는다는 사람들이 자기가 받은 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도대체 몇 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보았다 들었다는 그런 말에 귀 기울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금은 지혜와 지식의 은사가 없습니까? 있습니다. 어떤 지혜와 지식의 은사들이 있겠습니까? 새로운 계시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계시를 바르게 알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7-23절입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4)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지혜와 계시의 정신,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도 번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시면, 무엇을 알게 됩니까? 하나님을 알고, 성도의 소망,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 그의 힘의 강력한 역사를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지극히 크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신 것입니다. 그 오른편에서 모든 권세를 다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교회는 그의 몸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 입니다. 이러한 신령한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왜 은사를 주시는지 그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하여 졌습니까?
9절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믿음과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내일 죽을 것을 알고서도 깊이 잠을 자게 된 것이 믿음입니다. 도대체 무슨 배짱입니까? 그런 믿음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다스리시는 주가 주신 것이구나 하면서 주님을 증거 하게 됩니다. 바울사도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자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자 자기의 옷을 찢으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이것이 은사로 주어진 믿음과 병 고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유를 행한다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까? 물론 입으로야 주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만 성경에서 병 고친다는 광고를 하고서 병 고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모두가 우발적입니다. 그리고 다 고쳐준 것도 아닙니다. 병 고치는 은사가 있다고 자기가 전매특허인 것처럼 사용하는 경우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때그때 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하여 나누어주실 뿐입니다. 절대로 은사를 사유화하거나 반복하거나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복이 안 된다는 것은 이렇게 하니 무엇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할 수가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조절하고 조작할 수가 있기에 그렇게 맡겨두지 않는 것입니다.
10-11절입니다. 14장에서도 다루는 부분입니다. 은사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도를 유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가 어떻게 되는 것이 성도의 유익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늘의 신령한 복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감사하며 사모하며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내 개인이 능력을 받고 높아지고 특별한 사람이 되기 위한 은사는 없습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유익을 위하여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다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4:1-16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승천하셔서 은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게 주신 이유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은사의 목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안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목적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31 한 몸 2005. 10. 2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있었기에 스스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되는 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주의 성령이 임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이 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요엘서 2:28-32절입니다. “봉독” 여호와의 신을 부어주셔야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그런 자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성취를 성령이 임한 베드로사도가 사도행전 2장에서 증거 한 것입니다. 말세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구원을 얻게 되는 일이 지금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죄 아래 오셔서 죄인의 자리에 들어가시고 죄의 삯인 저주와 사망을 십자가에서 치르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등극하신 것입니다. 그 주의 오른 편에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한 몸이 되는 것입니까?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둘이 결혼하여 한 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결혼하여도 두 몸이지 한 몸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 몸이 되라고 하신 것은 사람이 이루어 낼 사항이 아닙니다. 범죄하고 나서 서로가 한 몸이라면 서로 책임을 져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책임을 지기는커녕 서로 핑계를 되는 것입니다. 내 살 중에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라고 한 적이 언제인데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는 서로 핑계되기에 바쁜 것입니다. 이게 한 몸 된 모습입니까?
우리가 결혼할 때 부부는 한 몸이라는 주례사의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그런데 한 몸처럼 살고 있습니까? 아내가 아프면 똑같이 아픕니까? 조금은 안타깝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남편이 괴로운 일이 있으면 똑같이 괴로움을 느낍니까? 그러니 한 몸이라고 하셨지만 우리가 이루어낼 수가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처음 아담은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성공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한 몸을 이루어 내시는지를 봅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물로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그 세례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례 속에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 세례 요한이 무어라고 합니까?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당신이 세례를 받습니까? 하면서 만류하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례 요한의 세례는 죄인이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이 받는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렇게 하는 것이 의를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자리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죄인과 함께 연합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서 죄인의 가야하는 심판의 자리로 가신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로 가신 것입니다.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이 죄인과 하나로 연합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한 몸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십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신 그 모든 것이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의롭다 함을 받고 거룩함을 받고 영화롭게까지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0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거룩과 구속함이 됩니다. 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바로 성령이 임하심으로 하나로 묶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6장에서 세례라고 합니다. 함께 묶여버린 것입니다. 한 몸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6:1-11절입니다. “봉독”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았다는 것을 세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2천년 전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함께 죽고 사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그렇게 죽고 살아나신 분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니 연합이 되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세례라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니 우리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요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12:12-13절을 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지체가 아무리 많아도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도 그리 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그 안에서 차별이 없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왜 한 성령을 받고 한 성을 마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싶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성령을 마시고 싶어서 마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가 받게 된 것이고 마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한 성령을 받은 것이고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 성령을 받고 마시게 된 자는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가 되었기에 누가 더 잘났는가 하는 차별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가 다 한 성령을 받고 마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의 벽이 얼마나 높았는지 사도행전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믿지 못하여 사도들을 현장에 파견하여 확인하였던 것입니다. 종과 자유자란 노예와 주인의 차이입니다. 그런 엄청난 차별들이 성령이 임하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에 우월이나 열등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러한 차별과 자랑이 나오게 된 것입니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 것은 얼마나 자신이 부족하였으면 은사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게 하셨는가를 생각하여야 하는데 자기는 잘난 것이 있어서, 또는 받을 만 해서 받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할 부분입니다. 그래서 많은 은사를 받았다는 자들이 어떻게 은사를 받았는가 하면, 특별한 금식기도와 고행을 통하여 또는 특별하게 성경을 공부해서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은사가 선물이 아리나 삯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놓치게 되면 자기 자랑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은사가 무엇을 위하는 것인가를 몸의 지체로서 비유하고 있습니다. 몸에 수많은 지체들이 있지만 서로 분란이 없고 다 몸을 위하듯이 은사는 그렇게 사용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도 자기들이 튀고 싶은 것입니까? 그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은사를 받는다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를 받아도 자기들이 죄인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16-19절입니다.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그림자와 몸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월삭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입니다.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위하여 누가 일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그 공로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몸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하는데 머리를 붙들지 않고 무엇을 붙들려고 하는 것입니까? 일부런 겸손함, 천사 숭배함,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고 자기 경험과 체험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잠언 18:1절입니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요즈음 새벽기도회에 잠언을 보고 있는데 이 말씀을 보았습니다. 몸의 지체로서 붙어 있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특별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나뉘고자 하는 것은 자기의 욕심을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참 지혜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말없이 조용히 숨어서 봉사하고 충성하는 자가 더 큰 은사인 것입니다. 자주 말씀을 드리지만 앞에서 드러나는 은사는 믿음이 더 약한 사람이라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붙어 있지 않을 것 같아서 주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앞에 드러나는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 나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봉사의 일로 주신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다시 읽어봅니다. 그러면 은사를 주신 것은 한 몸을 이루시기 위하여 주셨기에 그것은 어떤 차별이나 우열이 있을 수가 없이 한 몸을 이루시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시 봉독” 지체가 자기 잘 날 체 하여도 다 몸에 붙어 있어야 지체가 됩니다. 그리고 지체의 기능이 다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지체가 너는 필요 없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의 약하게 보이는 부분이 더 요긴한 것입니다. 몸 가운데 분쟁이 없게 하셔서 고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함께 고통을 받고 영광을 받으면 함께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밤송이의 가시처럼 붙어 있는 것입니다. 밤송이의 가시가 밤송이라는 몸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잘난 가시라고 몸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그냥 남을 지르는 하나의 가시일 뿐입니다. 물론 몸에 붙어서도 서로 가시노릇을 합니다. 이솝우화에서 지체들의 공로다툼이 납니다. 공로다툼의 결과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모습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어야 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대속하신 주의 사랑을 알도록 조치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와 각종 능력을 주셨는데 그로 인하여 교회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밝히 알려주신 것입니다. 28절 이하의 첫째 둘째라고 서열이 나오는 것은 신분상의 차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기초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시간의 순서로 보아야 합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은 은사의 특징은 14장에서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양한 지체들은 결국 한 몸을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머리를 붙드는 것이며 그 머리의 지시를 받아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몸을 부르심을 입은 목적입니다. 이렇게 한 몸을 이루게 하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3:1-7 사랑이 없으면 2005. 10. 9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1)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지난주에 한 몸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는데 조금 더 말씀을 드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아담에게 하와를 주시면서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몸이라면 자기 몸처럼 돌보고 섬기고 책임을 져야하는데 범죄후의 모습은 서로 핑계되기 바쁜 것입니다. 한 몸이 아니라 너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가 보여준 인간의 실상입니다. 아무리 한 몸이라고 해도 결국 자기 몸 밖에 챙기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이루어 낼 수 없는 한 몸 되는 일을 예수님께서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셔서 율법 아래 오신 것입니다. 율법의 제정자가 율법의 정죄아래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죄인과 연합되셔서 죄의 삯인 저주와 심판을 받기 위하여 십자가로 가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최후만찬에서 떡을 떼어주시면서 내 살이라고 하셨습니다. 잔을 주시면서 예수님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십니다. 그 다 이루심을 자기 백성에게 적용시키기 위하여 부활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의 몸이 되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23-33절입니다.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ㄱ)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이 말씀 안에 제가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까지 드리는 내용이 다 들어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에 대한 목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비밀입니다.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되라는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그 말씀이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한 비밀입니다. 첫째 아담은 자기 몸을 주지 못합니다. 주어도 죄인의 몸이기에 책임 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주심으로 그의 아내 된 교회의 티와 주름잡힌 것과 흠을 없게 하시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몸의 지체라는 것입니다. 부부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이제는 부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조직이나 법의 단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사낸 주의 백성들이 교회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 지체들은 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기에 어떻게 서로 돕고 섬기며 봉사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까? 29절에서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같이 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렇게 됩니까? 자기 몸을 보살피듯이 아내를 보살피고 아내는 남편을 경외합니까? 성도끼리 자기 몸을 보살피듯이 살피고 있습니까? 오히려 시기와 분쟁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서로 잘났는지 시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너보다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파당이 생기고 서로 잘났다는 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은 그들의 열심이나 착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사랑하셔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희생과 공로로 일어난 그 큰 구원을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늘 잊어먹었습니다. 자기들이 잘나서 구원받는 것인 양 자기들의 의를 자랑하고 교만하여 졌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셨습니다. 그 구원을 잊어버리고 믿지 아니한 자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지금 바울사도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2장 14장에서 수많은 은사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그 사이에 13장에 있습니다. 이 사랑장이 독립적이 것이 아니라 은사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점검하는 장인 것입니다. 자기들이 은사를 받았다고 잘난 체 하는 데 대하여 책망으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너희가 사랑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합니다. 더욱 큰 은사, 가장 좋은 길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고린도전서 13:1-3절입니다. “봉독” 우리는 은사 그러면 무엇을 은사로 여깁니까? 방언, 천사의 말,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 내 모든 것으로 구제하는 것,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 이런 것을 은사로 봅니다. 얼마나 대단한 은사입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것, 내 몸을 불살라 이웃을 위하여 내어주는 것, 이런 은사가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행한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7:22-23절입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의 이름을 선지자 노릇하는 것,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는데 주님께서 그 날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떠나가라고 합니다. 물론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은사 그러면 이런 쪽의 은사들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그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지 않습니까? 언제 우리가 우리의 가진 모든 것으로 구제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정말 대수롭지 아니한 티끌만한 것만 조금 해도 항상 남과 비교하면서 나는 너보다는 낫다는 식으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일의 크고 작음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그 어떤 놀라운 업적이 나타났더라도 그것은 전부 헛방입니다. 오히려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부터라고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으로 하면 되겠지요?
고린도전서 13:4-7절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합니다. 이 두 가지의 속성을 우선 살펴봅시다. 어떤 형제가 다른 형제의 잘못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서 억울하다고 하면 우리는 무어라고 합니까? 네가 참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꼭 덧붙이기를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가 당하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절대로 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네가 과연 잘되나 안 되나 내가 너 망하는 꼴을 보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오래 참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우리는 사랑의 처음 속성인 오래 참음부터 이미 글렀습니다. 온유하며 오래 참는 것이 아니라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참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를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으니 서로 사랑하자고 말할 내용이 아니라 주여 용서하소서! 라고 회개가 나와야 되는 말씀입니다.
디모데전서 1:15-16절입니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이 소식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에게 복음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죄인중의괴수라고 합니다. 그런 죄인 중의 괴수를 오래 참으심으로 구원하셨다는 것은 앞으로 구원이 일어나는 자들도 주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사도도 베드로 후서 3:15절에서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란 주님의 사랑의 속성인 오래 참으심으로 구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어느 말씀을 보아도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말씀은 한 말씀도 없는 것입니다. 모두 회개하여야 할 말씀입니다.
주여! 주님의 그 온전한 사랑을 입지 않으면 안 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길이 참으신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렸음을 용서하여 주소서! 사람들이 조롱하여 침을 뱉고 뺨을 치고 옷을 벗기고 십자가에 달 때에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이 알지 못하여 저렇게 하나이다하시면서 오래 참으신 주님의 그 사랑을 받은 자가 자기 자신임을 안다면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2천년을 오래참고 계십니다. 그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됩니다.
이제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하면서 이 목록을 볼 것이 아니라 회개할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데 우리는 투기하였습니다. 주여 용서하소서!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데 자랑하였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였습니다. 용서 하소서!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한데 얼마나 교만하였는지 하나님보다 더 높아진 교만을 용서하소서!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는데 우리가 얼마나 무례하였습니까? 용서하소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데 복음을 이용하면서 자유라고 하면서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였음을 용서하소서! 성내지 아니함,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함,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함, 진리와 함께 기뻐함,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는 것인데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이것 많은 못 참겠다고 팔 걷어 부치는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이 사랑 장을 보면서 우리의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정말 주의 오래 참으심과 용서가 없이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더욱 절실히 느낍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서 내가 이렇게 사랑하자는 것보다 내가 먼저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입어야만 하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지체들을 향한 시선도 달라질 것입니다. 당신보다 내가 더 용서를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주님께서 이렇게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그럴 때에 나의 결단과 결심으로 나오는 용서와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만 나오는 용서와 사랑이 증거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8-13 온전한 것이 올 때에 2005. 10. 16
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요한복음 6:6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아무리 육적인 노력을 하여도 영으로 바뀔 수가 없습니다. 결단과 결심으로 안 됩니다. 선행이나 고행이나 금식으로도 육이 영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면 영이요 생명이 됩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의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성경책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책을 보아도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이요 생명인 예수님의 말씀을 성경책에 기록하여 놓았다고 해서 그 성경을 인간이 스스로 읽고 해독하여 영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박사가 성경을 잘 풀어서 전한다고 하여도 성경을 잘 풀어 해석하는 능력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이 임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예수님께서 이루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셔서 자기의 몸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나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이나 반드시 나타나는 모습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은혜를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2-14절을 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에 속한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습니다. 성령의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인데 그런 일이 미련하게 보일뿐 아니라 깨닫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도들이 전한 것은 사람의 지혜로 가르친 말이 아니라 성령의 가르치신 것을 전하는 것이기에 동일하게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복음을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며 그렇게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봉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문제는 은사를 받고나서 자기들이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처럼 자랑하고 교만하여 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은사를 왜 주셨는가를 알리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12-14장까지의 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사를 주신 목적은 계시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며, 그 계시의 분명함이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지금도 자기의 몸 된 교회를 친히 돌보시고 계신다는 것을 증거 한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사랑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가장 좋은 길을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 8절을 봅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온전합니까? 이미 고린도전서 8:1절 말씀에 보았습니다만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을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제일 좋은 길이며 온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것이 오면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한 것입니다. 그 사랑의 특징과 속성은 이미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9-11절입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알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 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여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 때는 어린 아이 때의 것만 알지만 장성한 사람이 되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버려야할 어린 아이 때의 일이 무엇입니까?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이나 여러 가지 은사들이 어린아이의 일입니다. 분명히 그러하지요!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성령 운동하는 사람들의 말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예언하고 방언하는 것들을 장성한 일이고 온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과 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린아이의 일이 아닌 온전한 것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2:31절에서 제일 좋은 길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어떤 능력을 행하여도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전 재산으로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온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우리가 실천해서 온전하여 지는 것입니까? 그 사랑을 받아서 온전해 지는 것입니까? 사랑을 받아서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속성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제가 방금 온전한 것이 온다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그런지 결론에서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여기서 온전하다는 것을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계시의 온전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모든 것이 다 온전해 집니다. 그 때에는 불신자도 명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얼굴을 마주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말씀은 계시의 완전성입니다. 만약에 예수님 재림하시기까지 계시가 계속 주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책이 수 만권이 되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시대에 계시가 완성되기까지를 온전한 것이 오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계속하여 계시가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결과 카토릭은 교황의 말이 성경과 동등하고 교회의 전통이 성경과 동등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만이 계시가 아닌 것입니다. 그 결과 온갖 우상숭배가 가득하여졌습니다.
이러한 중세교회에서 개혁하고자 오직 성경이라고 오직 은혜라고 오직 믿음이라고 개혁을 하고 나온 것이 개신교라는 곳입니다. 서머나교회 예배당입구에 가보면 큰 돌에다가 이 말을 새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이 과연 성경만을 계시로 믿고 있습니까? 성경은 단지 참고서일 뿐입니다. 무엇을 진짜계시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까? 심판받아 망할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계시 받은 증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나 교인이나 말하는 내용들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온전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사람들의 성공사례 간증이나 이상하게 보았다 들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 목사들은 어느 교회가 빠르게 성장하는가를 염두에 두고서 그런 성공세미나를 보고 배웁니다. 교인들은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도 받고 세상에서 성공도 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교회에 나옵니다. 그리고 듣는 이야기는 세상에서 버림 받은 십자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흠모할 만한 세상의 영광들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도 엉터리 계시는 계속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근거를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오늘도 계시가 주어지는 것인 양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나오는 은사들은 아직도 부분적으로 계시가 주어지고 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계시가 완성이 되고서는 더 이상의 그런 계시적인 은사들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왔기에 그런 것들은 폐하여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성경대로 되는 것이며, 천국과 지옥도 성경대로 되는 것입니다. 다른 계시가 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더 확실한 예언이 바로 성경의 말씀이기에 너희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기 까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을 이야기 하면서 세상의 보이는 영광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집사가 하는 말이 자기는 교회가 시키는 대로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니 복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복이란 것이 세상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라고 하여도 자기의 체험이 있으니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오히려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믿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날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 꼴도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 집사가 믿었던 것은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정말 십자가의 못 박히신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세상에서 버림받고 멸시받은 그 십자가를 믿고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 역시 세상에서 버림받고 멸시 받은 길인데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시겠습니까? 그러면 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셨다는 그 이루심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 이루심이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없는 곳은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함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것이 올 때에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게 되는데 그 온전함이란 일차적으로 계시의 완성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 계시의 완성이란 무엇을 증거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 이것이 완성이 되는지 성경을 몇 곳 보겠습니다.
로마서 5:8절입니다.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 피로 의롭다 함을 입어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고 그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즐거워하게 됩니다. 이보다 더한 온전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요한일서 4:16-17절입니다.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 졌기에 심판 날에도 담대합니다.
이렇게 온전한 사랑을 입은 자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의 허물을 덮어줄 수밖에 없고 용서 할 수 밖에 업고 오래 참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부분은 지난주의 말씀대로 참으로 회개할 내용들인 것입니다. 그런 곳에 자기 잘난 체 하는 것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 나오더라도 그게 부끄러운 것인 줄 알고 주의 온전함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넓고 길고 높고 깊은 사랑 속으로,,,
에베소서 3:17-19절입니다.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폐하여 집니다.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다 폐하여지지만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이 온전한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성도의 온전함입니다.
고린도전서 14:1-19 예언하라 2005. 10. 23
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절 말씀에 보시면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하면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는 신령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에서 예언과 방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지만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통역이 없는 방언은 사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교회에 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방언은 혼자서 하도록 하되 금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예언과 방언이 주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하였습니까?
아직도 성경의 계시가 완성이 되지 않았기에 사도시대에 계시가 예언이나 방언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가 완성이 되면 그러한 계시적인 은사인 예언과 방언은 필요가 없게 됩니다. 온전한 것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 온전한 것이란 계시의 온전함만이 아니라 그 계시의 온전함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함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란 죄인 되고 원수 된 자들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 안에 있는 자는 온전한 자이기에 그 사랑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언하라는 것은 무엇을 예언하라는 것입니까? 우선 예언이 아닌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예언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장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언으로 생각합니다. 장래에 나에게 좋은 일이 있을지 불행한 일이 있을지를 알아서 좋은 일은 불러들이고 불행한 일은 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 가는 곳이 점집입니다.
지난주에 경찰들이 범죄자를 잡는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부산의 해운대경찰서에서 점치는 사람을 검거하였는데, 점치는 사람들이 어떻게 장래를 예언하는가 하면 자식들이 피를 토하고 있다고 하거나 사업이 안 된다고 하거나 해서 큰 굿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4억을 넘게 바친 것입니다. 그리고서도 그 집에 식모살이를 하고 잘못하면 얻어맞아가면서 그 무당의 말을 듣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의 가정에 불행이 찾아온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무당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기도원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지는 않습니까? 유명한 기도원이나 기도하는 사람에게 기도 받으러 간다고 합니다. 무당이 하는 짓을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이라고 하면서 직접 계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걸리면 무당에게 속은 것과 마찬가지로 속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20절입니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구나!” 왜 이들을 용납합니까? 무당처럼 장래의 일로 위협하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종교성이 많아서 무당에게 속아 살았는데 이제는 또 다른 종교의 이름으로 속고 있는 것은 속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세상이 어떻게 되어도 나와 내 가정은 잘 되어야 한다는 이기심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러한 욕심이 무엇을 잉태합니까? 죄를 잉태합니다.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것입니다. 무당에게 속거나 중에게 속거나 목사에게 속는 것은 그 마음속에 자기 욕심이 가득하기에 속는 것입니다. 속이는 자가 나쁩니까? 속는 자가 나쁩니까?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속이는 자나 속는 자가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런 욕심이 없습니까?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어디에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까? 자신과 가정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제일로 사랑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거짓말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우리의 심성으로 예언을 알려고 한다면 그 예언조차 자기의 이익의 재료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을 이야기 하면서 재산을 착취하고 그런 종말론에 빠져서 자기는 구원받아야 하겠다는 것도 역시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구원욕망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의 예언들은 모두가 가짜 예언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5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십니다. 너의 후손이 외국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할 것이면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징치하고 나서 재물을 가지고 나오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언약을 받는 아브라함은 자식도 낳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언약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4백년간 종살이하고서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6:3-9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기 위하여 모세를 보내시고 그 언약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전한 그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생 종살이나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무엇 때문에 출애굽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기 언약 때문입니다.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열 가지 재앙을 내리고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 하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 가만히 서서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불순종하던 자들이 멸망합니다. 그들의 불순종이 무엇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바를 하나님께서 이루실 능력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을 멸망시키시지만 결국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셔서 가나안 땅에 들여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언약 완성을 통한 영광을 하나님 홀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자기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모세가 계시를 받았습니다. 율법도 받고 장차 일어날 한 선지자에 대한 예언도 받게 됩니다. 신명기 18:15절입니다. “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이 말씀은 어디에서 받은 말씀이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6-22절 봉독” 진짜 선지자는 그 하신 말씀이 반드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는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를 어떻게 구별합니까? 똑같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그 말의 증험과 성취함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선지자는 자기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예언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언자들의 공통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말하면서 예언한 자들은 왜 백성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배척을 당하였을까요? 개인의 욕망을 정죄하였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꿈, 가정의 꿈, 자기가 속한 단체가 회사이든, 국가이든, 교회이든 자기들의 욕망을 위한 장래를 꿈꾸면서 자기들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가려는 자들에 대하여 심판을 선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언을 증거 하는 자들이 받은 선지자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보겠습니다. 이사야 50:4-6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예언을 전하는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듣고 학자의 혀로 곤핍한 자를 도와주려고 하는데 그런 예언자를 어떻게 대접합니까? 때리고 수염을 뽑고 뺨을 때리고 침을 뱉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전하는 자에 대하여 이렇게 대접한 것입니다. 이 예언자들의 완성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하나님 자신이 오셔서 하셨는데 세상이 그를 어떻게 대접하였습니까? 결국 강도보다 더 밉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아래 저주아래 있습니다. 이제 무슨 예언을 해야 할 것입니까? 이 세상은 멸망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불에 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피로 만드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곧 임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서 돌이키시고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실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예언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3절에서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는 것이며 권면하는 것이며 안위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에 예언을 함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무슨 말로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서로 격려하고 안위케 되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무엇이 위안이 됩니까? 잠시잠간 후면 오실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위안입니다. 권면이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이 세상의 물건들은 다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이나 북한의 지하성도들이 고난 중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이 위로겠습니까? 주님이 곧 오십니다. 이보다 더한 위로는 없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위로로 들리십니까? 저주로 들리십니까?
위로로 들리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저주로 들리는 것이 다수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 예언이 사라져버린 것이 아닙니까? 세상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주님의 영광의 날을 소망하면서 나그네로 외국인으로 살지 않고 있는 교회라면 이런 예언의 말씀은 저주로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가는 곳마다 환영 받는 일은 극소수였고 온갖 고난과 핍박과 매 맞음과 헐벗음과 위협 속에 춥고 떨었습니다. 참된 예언자의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4:5-6절입니다.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구약의 마지막 성경입니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저주로 땅을 치신다고 합니다. 그 엘리야로 온 자가 세례요한이며 이 세례요한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두시면 저주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편안하고 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만이 전부인양 살아가는 자들에게 오늘도 예언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살라집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예언을 믿으시고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예언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임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4:20-25 방언인 복음 2005. 11. 30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바 ㄱ)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3)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내일이 종교개혁 488주년 기념일입니다. 왜 로마교회에서 개신교가 분리되어 나왔는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론들이 많지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고린도전서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계시적인 은사가 사도시대 이후에도 계속 되는게 아닌가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시대에는 부분적으로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주어지는 방법이 예언이나 방언이나 방언의 통역을 통하여 주어졌는데 모든 예언과 모든 방언이 다 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4:26-33절을 보면 서로 제제를 받아야 하고 분별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시대로 계시적인 은사는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사도시대가 마감이 되고 나서 사도들에게 직접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을 속 사도라고 부릅니다. 속 사도들은 직접 계시를 받은 사도와 자신들을 엄격하게 구별하였습니다. 그러한 사도시대와 그 이후 3세기까지 엄청난 핍박이 교회에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계속 증거 되어 갔습니다. 그러면 수많은 기적과 계시가 계속 주어졌을까요? 이 부분을 깊이 연구한 워필드에 의하면 속사도 교회의 첫 50년(주후 100-150년) 동안에는 거의 아무런 이적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50년(주후 150-200년) 동안에는 조금 그리고 대수롭지 않는 이적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세기에 이르러서야 풍성하고 정밀한 이적들이 나타났으며 5세기 이후로는 계속 증가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도시대 이후에는 기적이나 표적인 거의 없었는데 왜 3세기 4세기에 들어가면서 이적과 기적들이 많이 나타났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핍박 받는 교회가 힘을 가지게 되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는 이방인들이 함부로 기독교인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392년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하면서 기독교는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기독교가 핍박을 받는 종교가 아니라 핍박을 하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온갖 미신적인 것과 신비종교들까지 기독교의 이름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권력과 결탁하게 되고 돈이 많아지게 되니 온갖 부패가 다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몇 주 전에 주보 칼럼 란에 손성식 목사님의 글의 제목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교회사란 욕망하는 인간의 배설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배설물의 냄새를 맡고서 마틴 루터가 오직 계시는 성경뿐이라고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그리고 구원이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은혜라고 외친 것이 488년 전 10월 31일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종교개혁을 한 개신교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하기는 합니다. 일년에 한번 종교개혁 기념일에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사란 욕망하는 인간의 배설물인 것처럼 개신교 역시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계시처럼 간주하고 있습니다. 온갖 체험과 성공사례를 성경의 계시보다 오히려 우위에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뒷전이고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보자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만 그럴듯하면 성경을 가지고 얼마든지 포장해주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성경을 봅시다.
14:20절입니다. 지혜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자가 되라고 합니다. 지혜에 장성한 자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주어진 은사들이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어야 하는데 자기를 과시하는 자기 증명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입니다. 은사가 주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 된 교회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친히 다스리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가 임하였다는 것은 성도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사를 받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가당찮은 이야기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기에게 무슨 은사가 임하였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나는 무언가 특별하니까? 이런 은사를 받았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가장 고질적인 모습이 목사입니다. 얼마나 부족하였으면 목사로 은사를 다 주었겠느냐고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게 있어서 사도가 되었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못났기에 사도로 세운 것입니까?
디모데전서 1:15-17절입니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이것이 은사 받은 자의 고백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단 한마디라도 나오지 않습니다. 죄인중의 괴수였는데 주님의 긍휼을 입은 까닭은 자기 후에 주님을 믿어 영생 얻는 자들의 본이 되게 하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나 같은 죄인도 용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은혜와 은사를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일절 자기의 자랑은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21-22절을 봅니다. 22절에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흔히 방언을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방언을 하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은 신적인 간섭이 있고 신과 직통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본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과 정 반대로 본 것입니다.
21절의 말씀은 이사야 28:1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28장의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전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교만하여 질대로 교만하여 진 것입니다. 그래서 28:1절에서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라고 책망합니다. 교만을 면류관처럼 쓰고 있으니 교만의 절정입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안 중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말씀이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결과가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망합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무슨 짓을 하였겠습니까? 하는 온갖 약탈을 다 하였습니다. 온갖 약탈을 다하면서 그들이 한 말이 입술이 생소한 다른 방언이었습니다. 그러니 방언이 나타난 것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합니다. 그러니 역시 다른 방언이 나타났다는 것은 심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방언을 말하면서 왜 이사야 28장을 인용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방언한다고 떠들어 대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지금 너희들이 하는 모습이 이방인들이 쳐들어와서 방언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쳐들어와서 방언하는 것이 해만 끼치듯이 너희들이 전부 방언만 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미쳤다고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통역이 되면 교회에서 하지만 통역이 되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만 마디 방언보다 다섯 마디 하는 것이 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교인들이 다 예언을 하라고 합니다. 이 예언이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언약이 이제 새 언약으로 완성이 되었기에 온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하시며 모든 권세와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에 무릎을 꿇는 것이 복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철장권세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24절입니다. 방언이 아니라 예언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에 숨은 일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방언을 한다고 온 교회가 왕왕거리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미쳤다고 하겠지만 모든 교인이 다 예언을 하면,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언이란 점치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하실 일을 증거 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 예언을 들으면 그들의 마음의 숨은 죄가 드러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 복음을 들은 자들이 어찌할꼬! 하면서 탄식을 한 것입니다. 물론 핍박하고 배척하는 자들이 더 많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회개하며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증거 하기를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임을 증거 하게 되면 반드시 죄에 대하여 책망이 나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숨겨진 것들이 복음으로 다 들추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무엇을 꼬깃꼬깃 감추어 두고 있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13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셔서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면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에 흰 옷을 사 입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가련하고 벌거벗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또다시 복음을 듣고서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만족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있으면 만족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야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알고 흰 옷을 사 입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게 되어 책망과 판단을 받게 되면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과연 너희 중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 중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 말씀은 구약 성경 스가랴 8:23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면 이렇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은혜를 구하러 와서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돌아오는 자들이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이 돌아올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복음은 방언입니다. 이상한 소리가 방언이 아니라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방언인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구원이 오직 은혜로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런 방언을 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4:26-40 잠잠하라 2005.11.6
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은 다른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찌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4)하나님이시니라 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것 같이 ㄴ)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5)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성도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몸이란 여러 지체가 서로 도우면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에도 여러 지체들이 서로 덕을 세우기 위하여 은사가 주어진 것입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형제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나의 유익과 만족이 아니라 형제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에 어떤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자기를 내세우거나 자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26절을 봅니다. 어찌할꼬! 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입니까? 은사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진 것인데 자기를 과시하고 자랑하고 있으니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모일 때에 여러 가지 은사가 있으나 그 모든 은사는 덕을 세우기 위하여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은사 중에 찬송시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고 계시와 방언과 통역도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계시가 주어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시대와 다릅니다. 사도의 사도됨이란 계시를 위하여 세움을 입은 것입니다. 바울시대는 아직도 계시가 부분적으로 주어지고 있었기에 계시가 있고 방언과 통역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방언이나 예언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무당이 입신한 상태에서 자기의 의식과 상관없이 나오는 말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으니 요즈음도 이상한 말하는 사람이 예언한다고 그러면 꼼짝없이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와 예언과 방언이 부분적으로 주어질 그때도 의식 없이 무질서하게 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27-28절입니다. 너희가 모일 때에 라고 하였으니 교회 안에서 방언을 하게 될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차례대로 할 것이며 한 사람은 통역하고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합니다. 왜 잠잠 하라고 합니까? 그것은 교회에 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잠 하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29-30절입니다. 예언도 두 세 사람이 차례대로 말하면 다른 사람은 분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예언한다고 다 옳은 예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변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곁에 있는 사람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하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잠잠하라고 합니다. 왜 잠잠하라고 합니까?
31-33절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예언하라고 합니다. 만약 두 세 사람이 예언을 받은 것이 있다고 한꺼번에 말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의 제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을 분별하고 제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한 사람씩 차례로 말하여 모든 사람이 배우고 권면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34-36절입니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합니다. 다른 교회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의 여자들도 잠잠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 번째 잠잠 하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배우려면 집에 가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여자 분은 기분이 어떻습니까?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는 것에 대하여 많은 여자들이 반대하고 나섭니다. 왜 여자들은 잠잠하라고 하는지 이 부분에 대하여 좀더 말씀을 봅니다.
디모데전서 2:8-15절입니다.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11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여자들의 마땅한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합니까?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무질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라는 말씀도 질서의 차원입니다. 또 한 가지는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편의 말을 듣고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를 주장하기 위한 말들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말이 많은 것입니다. 자기들이 신령한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바울사도 너만 계시를 받느냐면서 무시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를 비난한 사람들처럼 바울사도의 말을 무시하기에 무어라고 합니까? 37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합니다. 누가 감히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도의 권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완성되어 기록된 이 성경의 말씀만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는 것입니다.
여자 분들에게 묻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 잠잠하시겠습니까?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분별없이 나서서 말하는 것을 바울사도가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자가 잠잠 하라는 것은 여자를 무시하거나 깔보는 것이 아닙니다. 잠잠해짐으로 보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 앞에서 잠잠한 신부가 된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여자만 잠잠할 것이 아니라 남자도 잠잠해야 하는 것입니다. 방언과 예언을 하는 남자들도 순서에 따라 하고 다른 사람이 하게 되면 잠잠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8절에서도 잠잠하라고 하고 30절에서도 잠잠하라고 합니다.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여자에게 잠잠하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신랑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는 신랑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 앞에서 잠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잠잠해야 할 일은 잠잠하지 않고 잠잠하지 말아야 할 일은 잠잠한 것이 문제입니다. 처음에 은사를 말씀하면서 교회로 모인 성도란 모두가 다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드러나 보이는 은사가 있고 숨겨진 은사들이 있습니다. 누가 더 높고 낮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은사가 아닙니다. 모든 은사는 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봉사하기 위하여 주어진 은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받은 몸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모든 은사란 덕을 세우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를 유익하게 하는 일에 우리의 몸이 사용되고 있습니까? 내가 말하는 한 마디가 교회의 유익을 주고 있습니까? 내가 하는 행동이 교회의 유익을 주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값으로 주고 사신 것이기에 여러분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편한대로 사용하라고 주신 몸이 아닙니다.
형제자매를 섬기는 일에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아기를 둔 엄마도 직장을 가진 분도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섬길 수가 있습니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섬기고 자기 이익을 앞장세우기에 섬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란 한 몸으로 부름으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가 서로 섬기듯이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서로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 섬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더욱 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빠져 나가는 것이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기에 좋다고 여기십니까? 그러나 함께 부딪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몸에 분쟁이 없어야 하는데 몸에 온갖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온갖 죄인들이 모인 곳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잠잠하지 못하는 인간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조그마한 것이라도 잘한 것이 있으면 잠잠하지 못하고 자랑하고 싶고 조금 억울한 일이 있으면 몇 배를 부풀려서라도 말하고야 마는 자신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의 이야기를 또 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이 돌아가시고 나면 월요일 제가 청소를 합니다. 청소를 하다보면 나 같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몸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하면서 청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청소하다가 보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먹다 남은 커피 잔 씻고, 아이들이 먹다 버린 사탕이나 껌을 떼고, 화장실 휴지와 아이들 똥 귀저기까지 버리다보면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화가 날 때에 누구를 생각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섬기셨는가를 생각하면 나의 죄를 알게 되고 주님께 회개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함께 부딪히지 않고서는 이런 은혜를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때로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기도 하고 교회 안 오면 이런 꼴 보지 않아도 되겠지! 하고 싶은 마음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주님께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어떤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3:7절을 봅니다. “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 곤욕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셨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대신 곤욕을 당하시면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처럼 그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이 주님 앞에 우리는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 이런 죄인이기에 주님께서 대신 죽으시지 않고서는 어떤 가능성도 없는 인간입니다. 하면서 주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언도 그치고 방언도 그치지만 주님 오시는 날까지 복음은 계속 됩니다. 복음 앞에 우리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됨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되는 것이 이 시대의 은사요 기적인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은 잘하는 것이 있는 줄 알았는데 복음을 듣고 보니 나 행한 것이 죄 뿐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며 이런 교회에서 서로 섬기게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더 깊이 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20:28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런 은사와 기적을 날마다 맛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1-11 복음을 알게 하노니 2005. 11. 13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1절 말씀에 너희에게 복음을 알게 한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을 받지 않아서 복음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전한 복음을 다시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이라고 합니다. 이미 전한 복음을 받았고 그 가운데 섰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다시 복음을 알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로마서가 복음의 핵심을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도 로마에 이미 복음을 듣고 있는 자들에게 다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한번 듣고 섰다고 해서 다음의 단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의 시작이요 끝이며 전부인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복음이 구원의 능력입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며 의인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미 복음을 듣고 그 가운데 섰다고 하는 고린도 교회에 왜 또 복음을 알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지금까지 수많은 문제들이 고린도 교회에 일어났습니다. 그 문제들이란 파당이 생긴 문제, 음행의 문제, 우상제물의 문제, 그리고 지난주 까지 보았던 은사의 문제들입니다. 이런 문제투성이인 고린도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것은 오직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복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은사와 방언과 통역과 예언들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구원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을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아야 하는데 이미 복음을 들었다고 하면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복음을 듣고 믿어서 이미 구원은 챙겨놓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더 신기하고 놀라운 것들을 경험해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행함으로 복을 받자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부터 믿는 자로서 다른 사람들보다 무언가 더 나은 것이 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더 뛰어나고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믿지 아니한 사람과 분명히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삶의 목표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즉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하는 모습은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사는 것입니다. 외국인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물건은 다 쓰지 못할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자처럼 여기라고 합니다.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멸망할 것을 알고 이미 완성된 세계, 그 아들의 피로 만든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구별과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좀더 착하게 살아야지! 그렇게 정리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착하게 살아서 이 세상을 좀더 살맛나게 만들어야지 그런 생각은 불신자들도 다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구별됨이란 어떤 것입니까? 이 시대가 노아 홍수 때와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와 같은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그때 보다 더 악한 심판의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해된 이 땅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1:8절입니다.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두 증인이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하여 길거리에 사흘 반 동안 전시가 되고 구경거리가 됩니다. 왜 죽임당하는 것입니까? 이 땅에서 들러붙어 살고자 하는 자들을 괴롭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죽임당한 곳이 영적으로 말하면 소돔이며 애굽이며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불살라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3-4절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증거 하였다고 합니다. 그 증거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복음입니다. 왜 그것이 복음이 되는가 하면 로마서 4:23-25절을 봅니다. “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주심이 되었습니다. 그의 살아나심은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의롭다고까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께서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란 우리에게는 전혀 없는 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롭게 창조하여 내신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로 받게 된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편을 가르고 서로 시기 경쟁하고 있다면 어떻게 복음을 들은 자의 모습이냐는 것입니다. 은사를 주신 것도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 것인데 자기 자랑하고 자기 자존심 세우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이미 복음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복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입을 닫고 회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얼마나 자기 잘난 체 하며 삽니까? 자기 자존심을 세우며 살고 있습니까? 눈만 뜨면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한번 보란 듯이 살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살지 않습니까? 눈앞에 닥친 이 어려움을 속히 해결하고 그 보다 열배 백배 더 나은 입지에 서서 보라 내가 예수 믿고서 이렇게 복을 받았다고 하면서 큰소리 한번 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왜 나에게는 이렇게 형편을 어렵게 하십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나요? 하나님께 물으니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묻습니까? 목사님 좀 알려주세요! 우리 아들만 일류대학에 합격을 한다면 내가 새벽기도인들 철야인들 금식인들 못하겠습니까?
여러분이 목사라면 무어라고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집사님이 믿음으로 기도하시면 들어주실 것입니다. 저도 특별히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말을 해야 합니까? 아니 지금 시험이 발등에 떨어진 불인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자라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문제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할말이 없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그렇게 난다. 긴다 하는 잘난 사람들에게 바울사도가 무엇을 제시하는 것입니까? 바울 파, 베드로 파, 아볼로 파라고 말하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누가 십자가를 졌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자기 자랑이 나오고 시기와 경쟁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계속하여 나왔고 지금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들으면 나오지 않습니까?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것 까지 더 드러납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래야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 자신이 복음을 받게 되고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봅시다. 5-9절입니다. 왜 부활의 목격을 이야기 하는가 하면 고린도 교인들 중에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을 베드로가 만났고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오백여명의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그 중에 태반이나 지금도 살아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바울에게도 보이셨다고 합니다.
요즈음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닌데 그러나 바울사도가 맨 나중이라고 하면 그 뒤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맨 나중인데 또 더 있다면 맨 나중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사도바울 다음에 누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거나 어디에 예수님이 있다고 하여도 믿지 마시고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바울이 열심이 특별하였거나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무어라고 합니까? 만삭되지 못하여 태어난 자라고 합니다. 칠삭둥이 팔삭둥이라는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보자면 조산된 자요 유산된 자입니다. 보통 사람보다 더 못난 자라고 합니다. 자신은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여 사도라 칭함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를 도구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도들은 나은 것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 다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사도됨이란 결코 자기를 자랑할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하물며 사도들도 자기들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복음인데 그 복음을 듣고서 자기를 자랑한다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인간도 복음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구원될 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자신이 복음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좋아서 어떤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지만 그러나 자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아니요! 자기 부인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해서 일부러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제대로 받고 그 복음에 선 자들은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여기서 내는 바울사도입니다. 저희란 다른 사도들입니다. 모든 사도들이 다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은혜로 믿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런 고백이 나옵니까? 우리가 믿게 된 것이 은혜로 된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 간단하고 기초적인 내용을 왜 은사가 풍성한 고린도 교회에 다시 알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그 십자가에 나타난 죄에 대한 징벌과 용서와 부활하심으로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복음의 비밀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받은 자의 반응은 지옥가야 마땅할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모든 것을 은혜로 받고 사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한가진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은혜가 희미하면 복음이 희미한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린도전서 15:12-19 부활이 없으면 2005. 11. 20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린도교회에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 문제들을 바울사도는 복음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성도라면 복음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란 없는 것입니다. 그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 죽으심이 우리의 죄를 사하심이요 그 살아나심이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복음을 믿으십니까?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전파되었는데도 고린도 교인들 중에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지금 태반이나 살아있다고 하면서 부활에 대하여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보면서 아니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부활을 믿지 않을 수가 있는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다 외우고 그렇게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입술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으로 부활을 믿으시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제 점검을 해봅시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목표로 하지 않고 보이지 아니하는 부활의 세계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손해를 보게 되고,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나는 부활을 믿는 사람이기에 그런 손해를 감수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상대방을 향하여 축복하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돈은 떨어지고 몸은 아프고 배는 고프고 추운데도 부활로 인하여 감사하며 살고 계시지요? 그것이 부활을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아멘이라고 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가증스러운 모습입니까? 사소한 손해 본 것 참지 못하고 조그마한 자존심 하나 상한 것을 견디지 못하면서 내세를 믿고 부활의 세계를 믿는다는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하고 살아왔습니다.
디도서 1:16절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 부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고 시인을 하지만 행위로 부인하는 것은 가증한 것이며 복종치 아니하는 것이며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믿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부활하실 정도로 전능하신 예수님이라면 왜 나의 삶에 쨍하고 해뜰 날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속담에도 말하는데 어떻게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한평생 허리한번 펴지 못하게 만드시는 것입니까? 내가 무엇을 잘 못하였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부활의 주님을 믿고서 세상에서 잘 된다고 하는데 나는 이게 무슨 꼴입니까? 이런 생각으로 부활의 주님을 부르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에서 부활을 믿은 사람들의 모습이 어떤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1:24-26절입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가 세상의 보장된 부귀영화의 삶을 버리고 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원하였습니까?
그것은 애굽의 영광이나 보화란 죄악의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악의 즐거움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상 주심을 바라본 것입니다. 여기서 상이 무엇입니까? 애굽의 모든 보화, 그 당시 세계 최고의 강대국의 보화보다 더 나은 보화란 이 세상의 물질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상이 아닙니다. 그 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상인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히브리서 11:35절을 봅니다. ‘더 나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이 부활을 믿었기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과 결박과 옥에 같이는 시험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유리하고 궁핍하며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무엇을 믿었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까?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인다고 하여도 달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무엇을 믿었기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부활의 예수를 믿었기에 그렇습니다.
빌립보서 3:1-17절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옛날에 자랑거리로 삼았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배설물은 때로 거름으로도 사용합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을 해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을 믿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해로 여긴다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영광이나 돈을 사랑함이나 세상의 쾌락 사랑함을 해로 여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베냐민 지파라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을 만큼 지킨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자랑거리입니까? 이것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배설물이요 오히려 해로 여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이 해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 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능에 참예함을 아는 것은 그의 죽으심에 참예하는 것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내가 부활에 참여하고자 함을 알게 되려면 이 세상에서 죽음에 넘겨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죽으라는 말입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을 믿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이미 죽은 세상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세계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이 없고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다시 봅니다. 12-18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만약에 없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복음이 헛것이요,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요,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도 죄의 권세 가운데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면 구약에서 그렇게 더 나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핍박받고 죽어간 성도들과 신약에서 역시 부활의 예수님을 믿고 순교당하고 핍박받아 죽어간 그들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부활의 세계고 뭐고 간에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한번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지 않습니까? 나를 무시하는 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고 싶은 욕망이 우리 속에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지 아십니까? 그런데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간에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았습니까? 세상의 영광을 누리며 살았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며 살았습니까? 보통 사람들도 더럽다고 여기는 부도덕한 일들만을 더럽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는 가장 고상하고 아름답게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았다고 하는 것조차 배설물과 해로 여기는 것이 부활을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무엇이 증거 되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게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세상은 죽은 세상이고 부활의 세계 생명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믿기에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신구약에서 공통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확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한 주간 라디오 방송에서 나오는 설교를 세편이나 들었는데 세편이 다 감사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이냐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론은 그 감사를 어떻게 나타내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번 주를 한국교회 대부분이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 헌금 정성껏 하라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렇게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복을 주셔서 세상에서 성공하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방금 본 성경과 다릅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씀에 아멘하고 따라갑니까? 이 세상에서 살려고 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17-21절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 받을 세상의 영광을 바라보았다면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입니다. 저희의 신은 배입니다. 욕망이 그들의 신인 것입니다.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누구 입니까? 저와 여러분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바라는 것이 땅의 영광이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이 원수가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심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15:20-28 부활의 첫 열매 2005. 11. 27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ㄱ)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1)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19절 말씀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영광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복 받고 잘 된다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성경에서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온통 환난과 핍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믿음을 버리지 아니한 것은 더 나은 부활의 세계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영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이 배설물이요 해가 됨을 아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수능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합격하였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게 여기겠습니까? 더군다나 학교를 다니면서 고시를 패스하고 높은 관직에 있다가 대학의 총장을 지낸다면 얼마나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겠습니까? 우리가 만약 바라는 것들이 그런 것이라면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대학총장, 도지사, 시장, 회장, 회장의 셋째 딸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자살하였습니다. 세상의 영광의 정점이라고 하는 곳에서 자살 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세상의 것이라면 이미 그런 것들을 누리는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무엇이 부족해서 자살하겠습니까? 그들이 쌓아놓은 사회적 명성, 그 이름이 수치스러워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자살한 것입니다. 또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자살한 것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오늘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달려간다면 지옥에 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약속의 세계, 부활의 세계를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은혜로 주셔야만 되는 것이지 노력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떤 부끄러움을 당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모습이라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워서 자살하였습니까? 용서받고 정죄하지 않는 다는 기쁨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이라고 그 직업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기생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자신을 세리라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살인자요 포행자라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왜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세계는 그런 것들이 다 용서되고 영광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부끄러운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의 세계에서 부끄러운지 영광스러운지가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끄럽다고 자살한 사람들이 그것이 끝이겠습니까? 그런 자들까지 하나님은 다시 살려내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부끄러움에 집어넣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영원한 영광에 참여시키실 것입니다.
다니엘서 12: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마지막 날의 비밀을 예언한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자와 영원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가 있을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자란 구원을 얻는 자인데 이런 자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그렇지 아니한 자들은 무궁한 부끄러움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런 계시와 예언의 내용을 듣고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소망하여 살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부끄럽지 않고 멋있게 살고 싶은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영광의 세계에 살고 싶습니까? 두 가지 다 하고 싶겠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는 늘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영광에 있으니 자신의 부끄럽고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고삼에서 대학에 가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학생들이 많이 생깁니다. 대학에 떨어지거나 재수를 하게 되면 부끄럽다고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자존심 상하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약함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온갖 말이 다 나오니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홈페이지 교회 소개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교회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는 일체의 선함과 의로움이 없음을 고백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 영광의 날을 소망 하는 곳입니다. 원본은 이러한데 관리집사님이 고쳐 놓았습니다. 그런 곳이 늘푸른 교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렇지 않지요!
그러면 우리는 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 못하고 세상의 영광도 없고 가장 불쌍한 사람들 중에 더 불쌍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 말씀이 소망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가 되셨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첫 것은 하나님께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곡식의 첫 열매만이 아니라 짐승도 첫 것의 수컷은 여호와께 드려야 합니다. 사람도 장남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모든 장남을 대신하여 레위지파가 드려집니다. 출애굽기 13장에 보시면, 왜 처음 것을 드리라고 합니까? 애굽에서 10번째 재앙이 장자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장자와 첫 수컷은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드려짐이란 희생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장자의 개념이란 자기의 희생으로 나머지를 살려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장자는 르우벤 이지만 장자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11번째 요셉이 장자의 몫인 두 몫을 받는 것은 요셉이 희생으로 형제들을 살려내기에 장자의 명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통적인 서열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희생하는가의 문제인 것입니다.
에스겔 44:30절입니다. “또 각종 처음 익은 열매와 너희 모든 예물 중에 각종 거제 제물을 다 제사장에게 돌리고 너희가 또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 그들로 네 집에 복이 임하도록 하게 하라” 에스겔서는 새 성전과 새 언약을 말합니다. 옛 성전이 우상으로 가득하여 하나님이 신이 떠나버리고 새로운 성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처음 익을 열매와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 네 집에 복이 임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처음 것이 제물로 희생되어져야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16절입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하면 떡 덩이도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씀이 연결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까? 그것은 다니엘서의 말씀대로 기록된 책에 있는 자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주신 자들을 살려내기 위하여 첫 열매로서 희생하셨습니다. 희생만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기에 그 첫 열매의 영역 안에 있는 자들은 다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1-22절입니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기에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담의 후손으로 사망의 권세아래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고서 죽은 자들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잔다고 합니다.
23-24절입니다. 여기서 순서가 나오는데 순서를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첫 열매의 희생과 부활이 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나 지금 예수를 믿는 자들이나 다 부활의 능력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순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먼저이고 그 다음은 예수님의 재림하실 때에 살아서 믿는 자들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절입니다.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2)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십니까?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여 성도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환난을 당하여야 이 말씀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모퉁이 돌 선교회에서 소식지가 올 때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호사스러운 것입니다. 도대체 믿음으로 인한 고난과 환난과 핍박이 있기나 한 것입니까? 그러니 성경의 이런 말씀이 위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내가 괴롭고 외로우니 사랑해달라는 투정 외에 무엇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주님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25-27절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실 것입니다. 불가불이란 이중 부정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반드시 예수님이 왕 노릇하시는 것입니다. 재림하셔서 제일 나중에 멸망시켜버릴 것이 사망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사망을 이기시고 왕 노릇 하고 계십니다. 그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위로가 되시고 소망이 되십니까? 그런 사람은 28절의 말씀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만유란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든 것의 주가 되십니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희생과 노력이 그렇게 만드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 주님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29-34 날마다 죽노라 2005. 12. 4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부활이 없으면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의 영광이 목표가 아니기에 세상의 영광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으면 가장 불쌍한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하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만유의 주가 되시지만 그 사실을 믿는 자만 아는 비밀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재림과 함께 모든 자가 다 부활하게 될 때에는 믿지 아니하는 자도 예수님이 주가 되심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 보다 더한 복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이러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기에 이제 다시 부활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입니다. 29절에서 그 한 예로 너희가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아직도 해석이 분분한 내용입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이 말씀이 이곳 한 곳에만 나오고 다른 성경에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그 어떤 기록에도 죽은 자의 세례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추정을 합니다. 예수를 믿다가 죽었는데 세례를 받을 기회가 없어서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미신적이고 이방적인 것이기에 바울사도가 나중에 귀정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바로잡는 중에 어떤 문제들은 직접 가서 바로잡겠다는 말씀이 고전11: 34절에 나옵니다. 이 문제도 바로 잡았을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그 뒤로는 이런 문제가 전혀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오늘 본문에서 이런 말씀으로 부활을 증거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잘하고 있다고 이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부활이 없다면 그런 행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의미로 죽은 자의 세례를 언급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이라고 무조건 그것은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앞뒤 보지도 않고 성경에 있는 내용이라고 우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서 성경을 보기에 그렇게 이용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란 우리가 다시 살아서 영생을 얻는 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우리의 마음을 좋게 하기 위하여 죽은 자를 위하여서 세례도 받고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고 공적도 쌓으면 연옥에 있는 자들이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교리의 근거를 가지고 교인들을 미혹한 것이 중세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며 지금도 그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임을 어떤 성경을 보더라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좋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닙니다. 우리가 편하고 기분 좋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란 창조주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본분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1:16-18절을 봅니다.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예수님을 위하여 만물이 창조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즉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은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그 사실을 지금은 그의 몸 된 교회만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난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만물의 주가 되시는 분이 우리의 머리가 되신 다는데 무엇이 부족합니까? 몸이란 머리에 종속 되는 것입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합니다. 머리가 좋으면 몸도 덜 고생합니다. 머리가 영광스러우면 몸도 영광스럽게 됩니다. 그러나 머리가 없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즉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30-31절입니다. 부활의 주님, 우리의 머리가 되신 주님이 계시기에 때마다 위험을 무릅써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합니다. 왜 날마다 죽는다고 말합니까? 죽어도 상관이 없는 세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 왜 사느냐고 물어보면 무어라고 대답합니까? 살기 위하여 산다고 합니다. 자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산다고 생각하니 자기를 살리는 방향이 진리인양 여기고 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지 않아야 할일을 하였을 때 궁색한 변명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존권이 가장 중요한 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죽는다는 말, 끝이라는 말은 금기시 되고 터부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전도서 7:1-4절입니다. “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일 축하는 하는데 죽은 것에 대하여 축하는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습니다. 왜 그것이 지혜로운 자 입니까? 모든 사람의 결국이 죽음임을 알고 있기에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죽음에서 인생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무엇을 자랑한다고 합니까?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죽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까? 부활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를 아는 사람이 참으로 산자인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씀이 세상이 말하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에서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라는 글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 죽고자 함이란 결국은 자기를 살리는 것으로서 죽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죽음은 비록 죽을 지라도 나라가 기억하고 백성이 기억하여 충신의 반열에 오르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하여 죽는 죽음이란 어떤 죽음입니까? 세상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힘입니다. 가족에게서도 외면당하고, 마을에서도 배척받고, 나라에서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십자가에 처형시키라고 고함지른 그 죽음에 함께 죽임 당하는 것이 예수님을 위하여 죽는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족이 이해합니까? 제자들이 이해합니까? 모두가 힘을 얻고자 따라 왔다가 아무런 힘을 주지 못하고 약하심으로 달려 죽어가는 그 십자가 앞에서 모두가 부인하며 돌아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주를 위하여 사는 모습은 바로 세상에서 죽는 모습입니다. 고린도후서 1:8-9절입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0-15절입니다. “봉독” 이 두 곳의 말씀만 보아도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입니까? 죽는 모습입니다. 비참합니다. 날마다 죽음에 넘겨집니다. 죽으려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죽음에 넘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라면 능력이 나타나고 세상에서 보란 듯이 권세와 영광이 나타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그런 모습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죽는 자의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십자가의 증인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모습에서 자기를 발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모든 세상의 자랑거리라는 것은 헛된 영광이며 허상인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의 실상이 저주받아 죽은 그 십자가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자기를 시작하지 않으면 전부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살지 않는다는 것은 내 의지로 나를 위하여 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다 자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 다는 말씀을 내가 주를 위하여 목숨 바쳐 살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살리기 위하여 주를 위한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해서 될 일인지 다음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34-39절입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2)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 말씀을 우리가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기 백성을 오늘도 주님의 죽음에 합류시키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살려도 발버둥쳐도 결국은 죽음으로 끌려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는 십자가의 죽음은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사신분이 부르시는 곳입니다. 우리를 날마다 죽음에 넘깁니다. 그러나 그 끝이 죽음이 아니라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로 이끌어 들이고 있는 것이 날마다 죽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죽음에 넘기는 일을 너무 큰 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로서도 나타납니다. 전에는 죄인 줄도 몰랐는데 갈수록 자신의 죄의 깊이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한 대신 죽음임을 믿게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날마다 자기 의와 자기 정당성을 가지고 분노하는 우리를 날마다 십자가에 넘기실 것입니다. 그 앞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35-49 살려주는 영 2005. 12. 18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45 기록된바 ㄴ)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지난 주 설교제목이 혹 생각이 나십니까? ‘날마다 죽노라’였습니다. 제목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얼마나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면서 사셨습니까? 한 주간을 돌아보면 우리는 자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해 오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고 아니한 것의 기준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 기준이 주를 위하여 예스와 노를 하셨습니까? 아니면 자기를 살리고자 행동한 것입니까? 아마 자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사셨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살았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히브리서 2:14-15절입니다.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예수님께서 왜 혈육에 함께 속한 자로 오셔서 죽으신 것입니까? 사망으로 사망을 없이하시기 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일생동안 죽기를 무서워하며 죽음의 종노릇하는 자를 해방시켜 생명의 종으로 삼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증거 되는 이런 말씀이 여러분의 귀에 들어오고 있습니까? 눈이 초롱초롱해지면서 관심이 가집니까? 주일학교에서 설교하면 예화시간에 눈이 반짝거리다가 ‘예수님’ 이야기만 나오면 이상하게 눈이 풀리고 행동이 흐트려지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까? 어른은 속으로는 싫으면서도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할 수 있는 것이 어른입니다. 여러분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우편배달부는 그대로 전할 뿐입니다.
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이며 진짜 현실인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에 멸망 받을 세상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믿는다고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심이 없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입니까? 주님 오실 때까지 주님의 살과 피를 기억하고 증거 해야 할 교회가 이방축제인 크리스마스를 지킨다고 온 세상이 난리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생일이라면 주님의 죽으심은 장례식입니다. 지난주 본 잠언에는 태어나는 날보다 죽는 날이 났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떤 곳이기에 죽는 날이 낫다고 하겠습니까?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실감이 나십니까? 그런데도 세상이 좋다고 세상에서 살려고 바동거리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예수님께서 사망으로 사망을 잡으시고 사망의 종인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 첫 열매로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가 어떻게 살며 어떤 몸으로 오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35-41절입니다. 식물의 씨앗을 뿌려서 자라게 되면 완전히 다른 형체로 나오는 것을 예로 들어 부활을 말합니다. 사과씨앗 하나를 뿌려서 그 씨앗이 죽으면 사과나무가 나오게 됩니다. 전혀 다른 형체가 나오는 것을 예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식물이 아닌 동물도 육체가 다르다고 합니다. 사람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가 다 육체이지만 같은 육체가 아니듯이 부활의 몸이란 세상의 육체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영광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이 다 다르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부활의 몸이 얼마나 영광스러울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에 속한 형체가 따로 있다고 말씀합니다. 헬라 이원론에서는 물질은 더럽고 정신은 깨끗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이원론이 없습니다. 분명히 하늘에도 하늘에 속한 영광스러운 형체가 있는 것입니다. 무슨 유령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것은 무슨 영광밖에 보지 못하고 삽니까? 땅에 속한 영광만 보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영광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되면 죽게 됩니다. 그래서 다 보여주시지 않고 성경에서 몇 사람에게만 하늘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삼손의 부모가 보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동시에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보았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먼저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땅의 형체를 가진 자가 하늘의 영광을 보았기에 죽은 자처럼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시면서 계시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시는 것을 보고서 너무나 좋아서 세상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그곳에서 살고 싶어 했습니다. 지금 산 밑의 가족들과 다른 제자들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늘의 영광보다는 이 세상의 영광이 좋사오니! 하면서 퍼지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바울사도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서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삼일 만에 아나니아가 기도함으로 눈이 열렸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보았던 세상의 영광,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 이룰 수 있다고 여긴 그 영광들이 배설물이며 해로운 것임을 알고 십자가의 영광만이 참된 영광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셋째 하늘에 끌려 올라가 그 영광을 보았는데 무어라고 합니까? 고린도후서 12:4절입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도저히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는 영광인 것입니다.
42-44절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어떻게 됩니까? 계속하여 대비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썩을 것입니다. 점점 썩어가고 있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성형수술을 하여도 속에서 썩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썩어가는 것을 방지할 방법이 없을까요?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인간이 자기 몸을 영원히 살리기 위하여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진나라 시황제가 불로초를 구하려고 하였다는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었습니다. 지금은 과학시대입니다. 그래서 복제를 하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아니 세계가 황우석 교수의 논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난치병 환자를 위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난치병 환자의 절대다수는 가난하여 그 의료혜택을 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은 부자들이 자신들의 몸을 더 건강하고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하여 사용될 것이기에 엄청난 경제적인 가치가 있는 기술이 복제기술입니다. 그래서 나라서 지원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황우석 교수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썩을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의 몸은 썩을 것이며 계속하여 썩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욕된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 것입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 것입니다. 육의 몸이 있기에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신령한 몸이라고 하여 유령 같은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24:39절입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 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영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유령이 나타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만져 보라고 하시면서 음식도 드셨습니다. 부활하신 몸을 만질 수 있고 음식도 드실 수 있는 형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몸은 아직 영광의 몸이 아닙니다. 부활하셔서 영광의 몸이 되신 것은 바울사도가 보았고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기록합니다. 그 영광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무슨 몸으로 살고 있습니까? 45-49절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입니다. 산 영이란 스스로 살수가 없고 누가 살려주어야만 사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아담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의 후손입니다. 아담이 범죄 함으로 우리가 그 안에서 다 범죄하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살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살리려고 해도 자신을 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아담의 후손의 흙에 속한 형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입니다. 살려주는 영이 되기 위하여 흙에 속한 형상으로 오셔서 죽으셔야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나심으로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 하늘에 속한 형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그 영광을 본 바울사도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입니다. 이 몸을 떠나 영광의 몸을 입기를 그렇게 소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빨리 죽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서 죽지 못한 것이지 자기는 소원이 하루라도 빨리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과 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바울이 사모한 그 죽음을 우리도 사모할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죽음에 계속하여 넘겨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21-24절입니다. “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부활을 믿는 바울 사도의 삶의 자세입니다. 한 곳 더 말씀을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3:18-21절입니다. “봉독” 십자가의 원수는 땅의 일을 생각하고 땅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영광으로 삼고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이 소원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냥 죽지 마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사시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은 이 세상에서 죽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세상에서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돈이 없으면 비참해지는데 자존심 상하는데요! 그런 우리의 자존심을 죽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에 대하여 이 일을 이루시는 일에 실패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살 수 없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살려주시는 영 이시기에 우리를 죽여서도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어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낮을 몸을 그의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하실 그 주님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50-58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2005. 12. 18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ㄷ)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55 ㄹ)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린도전서 15장으로 오늘 일곱 번째 설교를 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고린도 교회에 있어서 바울사도가 이렇게 길게 여러 가지 예증을 들어가면서 부활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헛된 것이며 믿음도 헛된 것이며 여전히 죄 가운데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에게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왜 불쌍한 자가 됩니까? 그것은 세상의 영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영광은 쇠하여지고 더러워지고 썩어질 것들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가 부활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세상의 썩어질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썩지 아니할 그 영광의 나라, 그 부활의 나라, 그 아들의 나라를 구하고 있습니까? 그 약속을 은혜로 받았기에 세상의 형편과 상관없이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주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부활을 믿었던 사람들은 세상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세상의 그 어떤 영광보다 더 귀하여 여겼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재물보다 더 나은 상을 바라보았기에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을 나그네로 거류자로 살았습니다. 바울사도는 하루라도 빨리 죽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살기가 괴로워서가 아니라 부활의 영광을 보고 왔기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부활하게 되는가 하는 것은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부활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유업으로 받는가 하는 면을 보고자 합니다. 우선 50절입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지 못합니다. 혈과 육이란 우리 인간의 전 존재를 말합니다. 이미 죄로 인하여 사망아래 살고 있는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 전제가 됩니다.
요한복음 1:9-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으나 아무도 영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도하라고 하면서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말하는지 영접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녀가 되면 권세가 주어지기에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지난주에도 어떤 방송설교를 들으니 이 본문을 결론으로 전하는데 12절까지만 전하고 마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해서 영접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마치면 혈과 육이 됩니다.
이어지는 13절을 보아야 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혈통과 육정, 즉 사람의 뜻으로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안 됩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범죄 한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온 몸이 다 썩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바른다고 하여도 썩어지는 몸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969세를 살았던 므두셀라도 썩어졌습니다. 부활을 증거 한 다윗도 죽어서 무덤에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썩지 아니함을 입었습니까?
사도행전 13:34-41절입니다.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ㄷ)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35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ㄹ)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 일렀으되 ㅁ)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찌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바울사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한 내용입니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예언을 한 다윗은 무덤에 묻혀 썩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심으로 썩음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 분이 살려주는 영이 되셔서 그를 힘입어 죄 사함을 입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던 자들이 예수님을 힘입어 의롭다 함을 입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지 못할 자들이 있다는 것을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하였는데 그 말씀이 41절입니다.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고 합니다.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다 말씀이 응하기 위하여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1-53절입니다. 이것은 비밀입니다. 비밀이란 아무나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를 입은 자만이 알고 믿게 됩니다. 그 내용은 마지막 나팔에 불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니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할 것입니다. 나팔을 부는 것은 신호입니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나팔을 불게 됩니다. 왕의 행차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 나팔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부활의 몸으로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만약 지금 이 시간에 주님의 재림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순식간에 변화될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런 말로 위로를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몸이 아프신 분은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모르는 비밀을 성도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죽을 몸이 주님의 재림과 함께 홀연히 순식간에 죽지 않고 썩지 아니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 세상에서 주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면서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세상이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병원을 가보시면 온통 신음과 고통소리가 가득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아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탄식의 소리가 특별히 아픈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 온 세상에서 가득한 것입니다. 만물의 탄식소리를 들리십니까?
로마서 8:18-25절입니다. “봉독” 지금은 탄식하며 기다립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이런 약속을 믿을 믿음이 없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 줄도 모르기에 이어지는 말씀 26-30절에 보시면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 안에서 친히 기도하심으로 성도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데 그 결과가 하나님이 미리아신 자들로 하여금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미 성령 안에서 약속이 주어졌는데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미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아직 영화롭지 못한 몸입니다. 그러나 이미 성령으로 주어진 약속이기에 반드시 응하게 될 날이 있습니다. 언제 그렇게 됩니까? 마지막 나팔소리와 함께 홀연히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의 성취차원에서 그렇게 일어나고야 말 것입니다.
54-56절입니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하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응하게 됩니다. 사망이 잡아먹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사망의 권세를 이겨 버렸습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해버린 것입니다. 이미 창세기 3:15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응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미리 보는 고로 예언한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한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도 응하게 된 것입니다. 사망이 무엇을 향하여 화살을 쏘듯이 쏘는 것입니까? 죄를 향하여 쏘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사망이 있습니다. 죄란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과 원수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죄라고 합니다. 이 죄로 인하여 아담이 죽게 되고 아담의 후손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죄로 인하여 죽는다는 것을 규정한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권능은 율법인 것입니다. 율법이 가입하지 않았으면 죄를 죄로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죄가 무언지는 법이 투입하게 되면 자기에게 없다고 생각한 죄들이 다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과 법이란 함께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누구도 여기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스스로 법을 만들어서 자기를 살리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율법이 투입되면 율법을 이용하여 자기를 살리고자 나갑니다. 교회에서 무엇을 시키면 그것도 역시 법으로 바꾸어서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정도만 하면 되겠지! 스스로 법을 만들고 기준을 정하여 자기가 점수를 더하고 빼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와 사망아래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죄와 사망과 법에 사로잡힌 자들을 놓아주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에서 해방된 것입니까? 죄에서 사망에서 율법에서 해방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지 우리 구원이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해방된 자들은 무엇이라고 고백하게 됩니까?
57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과 감사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58절입니다. 이 말씀에 견고하며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여러 말씀을 서로 권면하며 격려하며 주의 날이 가까운 것을 볼수록 더욱 권하여 모이기를 힘쓰라고 히브리서 10:2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한 수고를 하고 있습니까? 주 안에서의 수고만 헛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을 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성도라면 반드시 이렇게 살도록 이김을 주실 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일을 버리게 하시며 주의 일, 십자가를 붙들게 하십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죄와 사망과 법을 이겨버리신 그 주님의 이기심을 선물로 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이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6:1-12 연보는 은혜다 2005. 12. 25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영생이나 부활을 꿈꾸며 삽니다. 어떤 영생이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까? 현재의 내 모습이 더 완벽하게 되어서 영원히 유지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야구 투수가 침체에 빠져 있다가 다시 잘하게 되면 강속구가 부활했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면서 성경을 보니 성경의 부활도 세상의 방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황우석교수를 열렬히 지지하던 사람들은 지금도 무엇을 기도하겠습니까? 기적적으로 배아줄기세포가 살아나서 확인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 것을 부활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묻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죽을 몸, 썩을 몸, 약한 몸입니다. 혈과 육이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게 하셨습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을 율법인데 그것을 이기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기 백성을 해방시켜 의와 생명의 법으로 옮기셨습니다. 그 안에서는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죄를 짓고 죽어가는 몸이라고 하여도 우리의 몸을 죄와 사망이 주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주님께서 자기 소유물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졌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실패나 약함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배당 문을 나서면서 무슨 생각이 났습니까? 아이고 추워라! 보일러에 기름 넣어야겠는데, 결혼식에 가야 되는데, 망년회는 어떻게 하지하면서 땅의 생각으로 정신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에서 갑자기 땅으로 추락한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또 한 주간을 열심히 사셨지요! 그렇게 추락한 느낌처럼 부활의 영광을 이야기 하고서 이제 16장에서 마무리를 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연보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영원한 부활의 영광을 이야기 하다가 그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합니다. 그것이 헛되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헛되지 아니하는 주의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로 마치면 될 텐데 갑자기 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땅에 내려온 기분이 듭니까? 부활의 영광을 이야기 하다가 찬바람 쏘이고 나서 현실에 눈떠지는 기분이 듭니까?
금요일 성경공부를 지난주에 종강하였습니다. 마치고 식사를 하는데 예수님은 좋은데 복음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인데 이상하게 들리지요!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좋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상상한 예수님이기에 그렇고 복음이 좋지 않다는 것은 복음이 우리를 죽이는 것이기에 싫은 것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를 죽이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것이 언제나 전제가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살려고 퍼드덕 되고 있으니 날마다 우리를 죽음에 넘기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십자가 안에 그리스도의 사심과 부활과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음이 싫은데도 왜 아직까지 앉아있습니까? 돈 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그나마 참아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를 마감하면서 연보를 하라고 합니다. 매주일 첫날에 각 사람이 이익을 얻은 대로 연보를 하여 모아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회나 다른 교회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하고 예루살렘교회가 연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임을 사도행전을 통하여 이미 보았습니다.
어떻게 개로 여기는 자들에게서 돈을 받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인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이 연보를 주고받음으로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라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도 청년 때에 몸이 아프고 할 때에 구제헌금을 받은 적이 한번 있습니다. 그때 저의 집사람은 저를 위하여 구제헌금 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도 결혼해서 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연보란 내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기에 은혜를 갚자는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연보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것이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갚자는 차원에서 나오면 안 됩니다. 갚을 수 있는 은혜는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여러분들이 정말 자원하는 마음으로 연보가 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잘남이 아니요 지금도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억지나 인색함으로 하셨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6장 1-3절을 봅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를 매 주 첫날에 하라고 합니다. 우리식으로 일요일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날마다 모였습니다. 그런데 한 주간의 이익을 얻었다면 각 사람이 연보를 하여 모아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루살렘교회가 어렵기에 그곳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보내는 연보를 3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은혜라고 합니다. 돈을 보내는 것을 가지고 은혜를 보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연보자체가 은혜요 선물인 것입니다.
4-11절입니다. 그 연보를 고린도 교회에서 인정한 사람이 예루살렘교회로 가져갈 때에 바울사도가 편지를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는 것이 합당하면 함께 가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것은 지금 바울사도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데 에베소 전도의 문에 활짝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문에 열려있다는 것은 대적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대적이 있지만 주님께서 아직도 그 성에 자기 백성이 있기에 문을 닫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전도를 하고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고린도에 올 것인데 그러면 겨울을 함께 지나고 또 다른 곳에 전도하려 갈 여비를 마련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자기는 죽을지언정 자기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하고 또 자기가 가는 것에 대하여도 연보로 도우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울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역하는 일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디모데가 이르면 그도 바울과 함께 주의 일에 힘쓰는 자이기에 조심하여 두려움 없이 지내게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연보가 필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말하는 연보란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은혜로 연보를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14-20절입니다.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2)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2)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찌어다 아멘”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연보를 안 하는 것이 무슨 의가 되는 것인 양 여기는데 교회가 워낙 돈을 이야기하고 바치면 복 받는다고 하니 그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연보를 안 하고 있는 자기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것이 누구의 것입니까? 내 것을 가지고 드린다면 아까울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하면 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 은혜가 임한 자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8:1-15절입니다. “봉독”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무엇으로 나타났습니까?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은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제발 이런 은혜는 임하지 않았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 이런 은혜를 받았다면 말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예하게 된 것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도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 즉 연보에도 풍성하라고 합니다. 연보가 은혜임을 보게 됩니다. 은혜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이런 은혜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로 부요하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요함이란 세상에서 부자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부요하고 은혜에 부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과 은혜가 풍성한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습니까? 환난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이들의 환난과 극심한 가난이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나는 아파트 한 채 뿐인데 다른 사람은 세 채가 되니 나는 극심하게 가난하다고 여기는 것입니까? 상대적인 빈곤감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빈곤입니다.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그런 가난입니다. 그런데도 형제 섬기는 연보에 대하여는 힘에 지나치도록 기쁨으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연보란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지금도 계속하여 은혜가 주어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하늘 보좌에서 낮고 낮은 말 구유에 오셨습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기에 멸망하는 짐승과 같이 자기만 알고 자기 배만 섬기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부요하신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한 연보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부요를 자기의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도 그 부요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보할 때마다 이 주님의 연보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연보는 자랑이 아니라 연보하고서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연보는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셨는데 우리는 어떤 연보를 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제대로 된 연보는 은혜로만 됩니다. 은혜로 연보하게 되면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자기는 무익한 종이며 오직 주의 은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6:13-24 사랑으로 2006. 1. 1
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 이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18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 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1)할찌어다
오늘이 1월 1일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미 전도서에서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있었던 것이 다시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이것이 새로운 것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고린도전서를 2005년 2월 첫 주에 시작하여 오늘까지 11개월이 걸렸습니다. 고린도전서가 이렇게 길고 오래 걸린 것은 그만큼 교회 안에 문제가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문제들이 어떤 것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능력이지 구원 얻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 뛰어난 것으로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자랑들이 나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믿는 자기까지 자랑하고 내세우고 하였기에 온갖 문제들이 다 터져 나왔습니다.
그 문제들이 파당의 문제였습니다. 음행의 문제, 우상제물의 문제, 세상의 법정에 소송하는 문제, 결혼과 이혼의 문제,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심, 성찬의 문제, 은사들의 문제,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 등의 문제들이 산적하였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해 아래 새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있었던 것이 다시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가리켜 보라 새것이라고 하여도 이미 옛날에 있었던 것들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나중에도 그럴 것이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면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살도록 지음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당연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까? 13절을 봅시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선다는 것은 그저 믿습니다! 하면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똑바로 차려서 무엇이 믿음인지 분별을 하고 바른 믿음 위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그럼 믿음위에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합니다. 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합니까? 여자의 마음이 갈대라고 노래합디다.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로마서의 결론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라 고린도 교회의 모든 문제들이 사실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까? 깨어서 믿음으로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하지 않기에 일어나는 문제들입니다. 파당이 생기는 문제를 예로 들어봅시다. 왜 파당이 생기는 것입니까? 자기가 옳다고 하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하여 옳고 그름만 분별하여 시비만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파당이 생기에 되면 사생결단으로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니 온갖 것을 다 동원합니다. 성경도 하나님도 다 동원하면서 자기주장이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주장 속에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넣으려고 합니다. 그런 마음이 사실 우리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10명이 모이면 열개의 파당이 생기고 100명이 모이면 백 개의 파당이 생긴다고 보아야 합니다. 정말인지 아닌지 시험해보는 방법은 깊게 이야기를 나누어보세요! 결국은 다 제각각 생각들이 다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인간은 자기 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바냐서를 수요일 저녁에 보고 있는데 2: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여 손을 흔들리로다”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내용입니다.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유다를 심판하시고 주변나라들까지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데 왜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고 하는 교만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만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가 그 마음속을 파고 들어가 보면 다 이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고 소리소리 지르는 우상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자기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 사랑입니다. 은사를 사용하여도 자기를 위하여, 지식을 사용하여도 자기를 사랑하여 나오는 것들이기에 다 덕을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라고 합니다. 그런 사랑으로 하는 몇 사람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15-18절입니다. 스데바나의 집은 아가야의 첫 열매라고 합니다. 아가야 지역의 전도의 첫 열매인데 이 스데바나가 성도를 섬기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스데바나와 함께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함께 왔는데 이런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의 부족한 것을 채웠다고 합니다. 이들의 나와 너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 행한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이 아니라 답답하게 될 것입니다.
19-20절에서는 아시아의 교회들과 신약에서 자주 언급되는 아굴라와 브리스가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에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그 집에서 모인 것입니다. 이들이 고린도교회에 안부를 전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너희도 서로 거룩하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여기에 언급된 이런 사람들이 성도를 섬기고 자기의 집을 성도들이 모임의 장소로 내어놓고 하는 일들이 무엇으로 하였겠습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시기질투로 한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하는 것 자체가 은혜요 복인 것입니다. 왜 그런지 다음의 말씀을 봅니다. 21-22절입니다. 바울사도가 자신의 편지임을 확인하기 위하여 친필로 쓰는 부분인데 그중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 이 말씀에 아멘이 되십니까? 함부로 아멘하기 힘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동안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무엇을 할 때에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여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얼마나 걸림돌이 되는지 아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종교는 서로 다르지만 인간이 다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라고 하는 것이 종교이며 신의 뜻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파성당의 벽에 대한불교 조계종 자비사에서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 합니다’ 하는 현수막을 붙여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석가탄신일에는 성당에서 보내겠지요!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여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사랑하셔서 메시아를 보내셨는데도 그 메시아를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믿지는 않아도 착하게 살면 천국 간다고 여기는 것이 추기경의 이야기였으며 세상의 종교가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오늘 고린도전서 16:22절의 말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는 말씀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아마 여러분들도 굉장히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부 목사 때에 같이 있었던 다른 부 목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하였을 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가 하며 화를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 성경을 지워버릴까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그 아들 앞에 모든 무릎이 꿇는 것을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 아들을 대적하는 자들은 영원한 지옥형벌에 보내심으로 또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왜 그러느냐고 우리가 물을 처지가 못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에 그런 질문 자체가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아들을 알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서 그 분을 나의 주로 고백하게 되고 그분을 사랑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우리가 의도하지 않는 일이 은혜로 일어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과연 그분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나를 사랑하면서 하지 않았습니까? 나를 위하여 교회오고 나를 사랑하여 헌금하고 나를 사랑하여 무엇을 하였다면 그것은 저주를 받는 것임을 꿈엔들 생각해 보았습니까?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인생을 무엇을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살아왔습니까? 자기를 위하여 살아온 모든 세월이 다 하나님의 진노를 차곡차곡 쌓아온 것입니다. 연애를 하여도, 결혼을 하여도, 직장을 선택하여도, 교회를 선택하여도, 모두가 자기 사랑이 우선이지 과연 예수님을 사랑하여 한 것이 얼마나 됩니까?
고린도 교회의문제가 아니라 우리교회의 모든 문제들도 결국은 무엇이 문제입니까? 주를 사랑하지 않기에 나오는 문제들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아들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주께서 임하십니다. 언제 오신다는 것입니까? 2천년 전에 오신다고 하셨는데 아직 안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시간은 의미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오심으로부터 이 세상은 심판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미 종말의 세상인 것입니다. 믿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철저히 자기를 사랑하며 살아왔기에 자신이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주일학교 교사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행한 대로 갚는다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19장으로 답변을 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입고나갈 세마포 옷이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옷을 직조하는 실이 옳은 행실이라고 하면 과연 지금까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공과공부를 준비해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의 옷을 입혀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저주가 바로 나의 저주임을 아십니까? 그것을 믿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월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더욱더 자신의 죄의 깊이와 넓이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교묘하고 뿌리 깊은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거부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용서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바울 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골로새서 강해 (0) | 2009.05.06 |
---|---|
[스크랩] 고린도후서 강해 (0) | 2009.05.06 |
[스크랩] 고린도전서 강해 1 (0) | 2009.05.06 |
[스크랩] 야고보서 강해 (0) | 2009.05.06 |
[스크랩] 로마서 강해 2 (0) | 2009.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