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
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강론 목차
1.사도행전 1:1-3 하나님 나라의 일
2.사도행전 1:1-11 증인
3.사도행전 1:15-26 직무의 한 부분
4.사도행전 2:1-4 성령강림(1)
5.사도행전 2:4-13 성령강림(2)
6.사도행전 2:17-21 성령강림(3)
7.사도행전 3:1-10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8.사도행전 4:1-22 예수의 권세와 이름
9.사도행전 5:1-11 교회의 순결
10.사도행전 6:1-7 말씀전파
11.사도행전 6:8-15 스데반
12.사도행전 8:1-25 사마리아
13.사도행전 8:26-40 주의 영에 이끌림
14.사도행전 9:1-19 핍박받는 예수
15.사도행전 9:20-31 그리스도의 공동체
16.사도행전 10:1-16 종교에서 신앙으로
17.사도행전 10:34-48 중심을 보시는 주님
18.사도행전 11:15-26 그리스도인
19.사도행전 12:1-12 교회의 기도
20.사도행전 13:1-12 대적자
21.사도행전 13:13-43 약속의 아들 예수
22.사도행전 14:8-18 능력
책 머리에
성경 본문을 실었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본 강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 강론은 말씀을 이해하는 방편이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본문의 말씀을 헤아리면서 강론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첫 번째 강론
하나님 나라의 일
사도행전 1:1-3
“1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오늘날 사도행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잘못된 대표적인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을 중심으로 보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보고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 혹은 ‘나도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사도들처럼, 아니면 스데반과 같은 훌륭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성령으로 말미암아 베풀어지는 은사에 관심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가 중심이 되어 있는 경우입니다. 사도행전을 이렇게 보는 대표적인 슬로건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가지고 모범을 삼고 표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사도행전을 보고 우리 교회도 목사의 설교로 수 천명씩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도록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두 가지 잘못된 해석이 빚어낸 한국교회의 현상은 성령을 이용해서 교회 한 번 크게 키워보자는 쪽으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도 아니고, 사도행전을 가지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슬로건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은 결코 성령의 능력을 어떻게 하면 잘 이용해서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지지하거나 그 근거를 제시해 주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보는 관점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 자체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혹은 신약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관점에서 불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로 집약되고 있습니다. 그 약속의 중심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약속의 완성이 십자가입니다.
히브리서 1:1-3에서 그 의미를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사도행전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사도행전의 중심에 서 계셔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도 우리가 가지는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사도행전 1:1에 보면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이 먼저 쓴 글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에 의하면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줄 알았노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일인이 썼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가 사도행전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밝히기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1-2절)에 대하여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은 무엇에 대하여 썼는가 하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여기서 “해 받으셨다”는 말은 십자가 사건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천국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 결코 새로운 주제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11:20에 보면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볼 때에 예수님은 십자가 전이나 후나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의 범죄 이후에 땅은 저주 아래에 있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교제가 있는 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에 나타난 바벨탑 사건은 인간이 하늘에 올라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항상 땅에 사는 것으로 만족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을 침범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죄악이라는 것을 인간들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하늘에 오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늘이 이 땅에 임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하늘을 열면 되는 것입니다. 하늘이 이 땅에 내려오면 됩니다. 그것을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것입니다(요 1:51). 다시 말해서 하늘에 있던 천국이 예수님의 말미암아 땅으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모든 행하심(이적)과 가르치심 등은 십자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그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믿는 자가 천국의 백성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은 이제 주님으로서 십자가를 통해 천국으로 자기 백성들을 불러모으시고 그 불러모으신 자기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예수님이 부족하여 못다한 일을 우리가 마무리 짓는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완성하신 천국을 재림으로 말미암아 지상에 세우실 때까지 우리는 십자가 안에 있는 천국을 나타내고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맡겨주신 일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관심 가지고 사는 것을 뜻합니다.
하늘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 나라의 일이 아니고, 또한 땅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땅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 주님 안에서 십자가로 이루어진 천국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비록 이 땅에서 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 그 일을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비밀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기쁨을 두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1997.6.15).
사도행전 두 번째 강론
증인
사도행전 1:1-11
“1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부활 후에 이 땅에 계시면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제 사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 나라의 일은 예수님이 못다한 일을 채우는 차원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에 의해 십자가로 성취된 천국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차원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11절에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것을 사도들이 보고 있을 때에 천사들이 곁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즉 사도들뿐만 아니라 교회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증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증거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5절). 그러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누가복음 3:21,22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데 유독 예수님에게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한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첫발을 내딛은 것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신 것은 십자가를 질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아버지께서 기뻐하신 십자가를 지셨기에 성령 세례가 인간에게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님과 같이 성령 세례를 받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무슨 큰 능력으로 예수님과 같은 수준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운명에 놓인다는 뜻입니다.
죄인에게 이러한 성령 세례가 가능하게 된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 없기에 말할 수가 없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인간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성령받은 증거입니다. 인간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받은 자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증거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천국의 일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두고 하나님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사 43:10/ 참고 사 43:10; 44:8). 그런데 이스라엘은 증인의 역할에 대하여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귀머거리요 소경이었습니다(사 42:18). 귀머거리와 소경이 어찌 증인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귀와 눈, 입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참된 종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에게 신(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사 42:1). 실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 이끌린 참된 종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한 증인이었습니다(요 17:4). 그 종이 소경의 눈을 밝히겠다고 하신 약속대로(사 42:6,7)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령 세례가 가능하게 되었고 우리의 귀와 눈, 입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령께서 임하시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는 하나님의 권능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다름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능력입니다. 어떻게 하든 성령님은 우리를 주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자가 증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요 16:13,14) 고 했습니다. 성령 받은 증거는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나를 증명하고 나를 자랑하는 자였는데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또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어떤 것을 나타내시며,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하는 것이 증거되어져야 하나님의 자녀요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증인이라 해도 제대로 증거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0-12). 하나님의 사정과 우리의 사정 양편을 다 아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주장하셔서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고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다 알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로 베푸신 것들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한다고 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받은 자가 성경을 볼 때에 예수님에 대하여, 그분이 지신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공부를 할 필요가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때 성경공부란 우리가 믿는 바를 정리하는 차원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가 연약함으로 성령을 소멸하고 때로는 애써 외면함으로 자기를 드러내면서 자랑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궁극적으로 누구를 증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예수님만 자랑하고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설교가 잘하는 설교입니까? 내 생각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판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설교자에게서 예수님이 보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복음이라는 용어들을 열거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자기가 세워놓은 교회가 잘되도록 하는 일에 헌금하라, 충성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명백하게 가짜입니다. 가짜 예수님, 가짜 십자가를 유포하는 자입니다. 그런 자를 과감하게 몰아낼 수 있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여야 합니다.
주성교회로 시작하면서 어떤 누구에게도 도와 달라고 손을 벌리지 않았습니다. 노회에도 개척교회니까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먹고 살만하니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기도 하면서 저를 보고 자존심이 참 강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나 개인의 힘만으로 제대로 된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도 아닙니다. 물론 주성교회를 돕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하십시오. 그것을 막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말씀대로 증거하고 싶은 것입니다. 돈이나 사람의 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혹 어떤 분이 도우셨다면 그것이 주님의 교회다운 모습을 유지하려는 것으로 인해 주께서 불쌍히 여기신 결과로 알고 주성교회는 오직 주님의 증인되는 일에 전념하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름이 드러나고, 죄인의 자존심이 세워지며, 각자의 공로가 자랑이 되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증인들이 모인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는 단호한 결단으로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증인도 아니고, 성령의 증인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나 오늘날 교인들이나 동일한 관심사는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시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때, 날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또한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만 보여주는 증인의 역할입니다(1997.6.22).
사도행전 세 번째 강론
직무의 한 부분
사도행전 1:15-26
“15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16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25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평강, 위로, 치유의 주님만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 위로와 평강뿐만 아니라 얼마나 큰 두려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두려움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요소입니다.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는 함부러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한 말과 행동들은 특히 교회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위로와 평강을 외치면서 주님 두려운줄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이야기하면서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과 관계없는 일들을 즐겨하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교회를 이용해서 자기의 야망을 이루어 보려고 합니다. 목회자들이든 교인들이든 상관없이 단체로 정신이 엉뚱한 곳에 팔려 있습니다. 인간들의 모임에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면 뭐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좋다는 프로그램들은 언제든지 도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성경적이냐 아니냐 하는 검증은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다른 교회에서 실시한 프로그램으로 많은 수를 모았다는 것으로 성경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교회를 키우는 온갖 방법들만이 성경화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무엇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까? 오늘날 교회는 교회 자체가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교회의 외적인 제도나 조직 중심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에 목회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목회자가 보이지 않는 주님의 대리인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성령에 대한 가르침은 옛날 이야기 정도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은 하늘에 묶여있는 존재로만 생각될 뿐입니다. 더 이상 하늘에서 땅에 손을 댈 수 없는 연약한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우리는 다시 한 번 귀 기울여야 합니다. 11절에 보면 천사가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고 했습니다. 창세기 1:1에 의하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살리셨습니다.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로 부르셔서 다시 이 땅에 보내시기까지 하늘 보좌에 앉히셨습니다. 십자가가 엄연한 사실이라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역사의 주관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 셈입니다. 다시 오실 때까지 그분은 하늘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실 것입니다. 역사의 모든 중심은 예수님께 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일하신다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진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8에 보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자가 사도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리우신 이후에 베드로는 성경을 펼쳤습니다. 성경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담당하던 자가 갔으므로 이 일에 필요한 사람을 뽑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직무를 다른 사람이 취해서 대신하여야 할 것을 시편 69:25과 109:8 말씀으로 확인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선택에 전적으로 맡기고 있습니다(24절). 그 직무는 누가 되든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자”(22절) 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자리에 맛디아가 새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의 직분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연결된 고리로서의 12사도라고 하는 한 묶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증거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 직무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타인이 취하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하늘 보좌에 앉아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고 움직이시는 예수님의 뜻이 중요한 것입니다. 역사의 중심을 예수님으로 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중심이 되신 그분의 말씀대로 증거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 뜻이 펼쳐 나가는 일에 주님은 가룟 유다를 쓰실 수도 있고, 맛디아를 쓰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맛디아를 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통해서만 일하셔야 된다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내 중심입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증인이 되는 일은 우리가 책임지고 할 일이 아닙니다. 1:8 말씀에서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에서도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뽑으시고, 주님께서 자신의 증인이 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의 못남과 실수와는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반드시 증인이 되게 하신다는 주님 자신의 의지요 열심입니다.
우리가 그분에 의해 뽑혔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증거의 내용이 되어야 하고 증거할 때에도 역시 예수님을 중심으로 삼고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교회의 지체로서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말입니다. 목표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썩어질 우리의 몸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회란 주님의 몸만 남기는 작업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직분을 가졌느냐 하는 것에 관심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직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직분이란, 우리가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을 위해 살기 때문에 날마다 버려야 할 것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께서 자신이 이룬 십자가, 희생의 피의 확산을 위해 주실 수도 있고 취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 정신, 희생 정신으로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분이란, 내게 주실 수도 있고 나에게 취해서 타인에게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실패가 나의 실패임을 인정합시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 앞에 엎드리면서 자신을 부인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주께서 어떤 직분을 가졌느냐 하는 것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증인으로서 직무의 한 부분을 감당하였는가 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가진 직분을 의식하면서 일하는 그것은 주님을 공격하고 훼방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반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자기 중심이 될 때에 그러합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의 직무만 내게 주어진 것임을 날마다 확인합시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직분 때문에 생겨나는 폐해가 너무 많습니다. 직분이 유익을 주는 부분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리스도를 가리고 복음을 복음되게 드러내는 일에 오히려 방해가 되고, 복음을 반전시키는 효과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입니다. 주성교회는 직분임명이 없습니다. 기존의 교회에서 오시는 분들은 거기서 어떤 직분을 가졌든지 다 버리고 오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중심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 된 지체로서 성도만 있을 뿐입니다. 한 지체입니다. 여기에 목사, 장로, 집사, 평신도라는 통속적인 구분이 있어야 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직분이 모조리 다 필요 없으니 직분 자체를 거부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직분을 세우는 교회는 다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세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성교회가 존재하는 한 세우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증인이 된 것으로 만족할 줄 알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십자가를 증거할 때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제대로 증거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1997.7.6).
사도행전 네 번째 강론
성령강림(1)
사도행전 2:1-4
“1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늘날 교회는 신앙을 너무도 인간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주관적인 신앙에 젖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은 본래 죄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자기 중심적이 되어 있는데 교회가 그것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돈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돈의 지배를 받는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돈이 능력이지 말씀이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말씀만으로 한다는 것이 어딘가 모르게 능력이 상실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돈을 모아서 힘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인수가 많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은 돈을 들고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목회자들은 저마다 목회성공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이 모았는가에 비례하여 얼마나 많은 사례를 받으며 부를 누리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 교회는 돈의 힘을 축척하는 일이 된다면 어떤 신학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도 마음대로 이용하고, 성경도 제 멋대로 왜곡해도 무방하다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오순절 신학을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인들도 처음에는 거부감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차츰 오순절 신학을 신앙 생활 속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앙의 권태감과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여 구원의 확신도 있는둥 없는둥 신앙 생활하고 있었는데 신비함과 열정적인 것 내지는 종교적 경험들로 말미암아 무엇인가 내 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내게 이런 뜨거움(?)이 있는 것보니까 아~ 이제야 정말로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구나’라고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소위 말해서 신앙 생활 할 맛이 생긴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오늘날 장로교조차도 간판은 “대한예수교 장로회”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대한오순절교 장로회” 아니면 “대한순복음교 장로회”라는 이상하고 웃지 못할 부류의 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이는 모두다 인간을 중심으로 한 주관적인 신앙으로 정립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결코 주관적이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신앙이란 객관적인 차원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근거가 내 쪽에 있는가 주님 쪽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성경이냐? 아니면 우리의 체험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모두가 ‘성경’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사실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또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 많은 신자들은 성경보다 체험을 앞세우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성경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체험 위주의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속에서 성령께서 강림하신 사건의 뜻이 무엇인지를 성경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한 의미를 강론하고 있는 내용 중에서 3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즉 성령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을 높이신 것에 대한 결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사건 때문에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104:29-30에 의하면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니이다 주의 영을 보내사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영(성령님)이 보내어질 때에 죄인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이루는 메시야란, 죽음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까지 이루시는 분이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심으로 주(主)의 자리에 등극하신 것이었습니다. 주의 자리에 등극하신 그분이 그의 영을 보내실 때에 이 땅은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하늘 보좌에서 자신의 권세로 성령님을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로 임했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주관적으로, 임의로 하시는 사역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으로 임했다는 것은, 불심판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기준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자를 심판하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게 하는 일은 성령께서 임의로 주관적인 사역에 의해 되어지는 일임을 계시하신 사건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즉 예수님 자신이 하늘로 가야만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8:18이하에서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0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십자가 사역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부활, 승천, 성령강림으로 한 묶음이 되고, 이 사건들이 연결되어 나타내어진 자만이 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자들을 건져낼 수 있는 메시야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 성령강림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온 천지를 향해 예수님이 당했던 십자가 사건을 계속적으로 재현시켜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는 사건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의 길을 가는 주님의 운명과 같은 자들을 성령께서 주장하시어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도록 하시는 데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 오순절 때의 성령강림 사건 자체는 다시 반복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오신 성령께서 그 주님의 운명과 같이 자기 백성들을 고난의 길로 몰고 가시는 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제 새로운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주님의 나라를 담아내고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구원사역을 완성하셨기에 세상 끝 날까지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다스리시는 공동체를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된 우리는 성령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실 것인가 라는 식으로 주관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오심이 왜 있어야만 되었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객관적인 차원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아니고는 인간은 전혀 주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구원이 불가능했기에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인간은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기에 주님은 성령님을 보내사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조차도 우리 스스로 할 수 없었고 하늘에서 오신 분이 우리로 하여금 믿게할 때에 믿을 수 있는 존재임을 우리는 날마다 다시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은혜를 더욱 크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이 신자들을 능력있는 자로 만드시는 것이라는 감언이설에 속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이 오셔야만 되었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란 특별한 능력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계시 그것을 가지고 가르치시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사역입니다(요 14:26). 성령님의 활동은 오직 주님을 증거하는 일에 초점이 모아지는 것입니다(요 15:26). 따라서 십자가를 증거하고 자랑하는 모습이 성령세례를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자랑하며 그의 십자가를 드러내시는 역할이 바로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아직도 주님 앞에 자기 자신의 신앙에 어떤 부분이든지 내세울 것이 있고 자랑할 것이 있다면 성령님에 의해 주장되어지는 삶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란, 성령님에 의해 주장되어지는 삶으로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릴줄 아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아직도 내가 예수 믿으려고 하는 자라면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 주님의 약속과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에 의해 믿게 된 자로 고백하고 그분의 능력에 자신을 맡기는 모습으로 사는 자가 주님의 약속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내가 하는 일에 성령님께서 들러리로 서 주시기를 간구하고 나를 도와주는 것이 성령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이제는 주도권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신 주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1997.7.13).
사도행전 다섯 번째 강론
성령강림(2)
사도행전 2:4-13
“4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6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9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13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지난 주일에 성령강림에 대한 말씀을 강론하면서 특별히 강조한 것이 신앙의 객관화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신앙을 주관적인 관점에서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자기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아도 자기중심에서 먼저 생각합니다. 성령강림에 대한 문제도 결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원리에 대하여 굴복하려고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체험한 것이 성령체험인지 아닌지도 규명하기 이전에 이미 체험했다는 것 앞에 모든 것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지향하고 있고 어떤 방향으로 일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입니다. 성령에 대한 문제만큼은 성경을 덮고 이야기를 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근거한 신앙이 아니면 안됩니다. 우리의 체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원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근거는 내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그분이 정하신 원리, 법칙에 의해 구원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건들은 결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이렇게 경험하도록 노력하라는 뜻으로 기록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 구원은 이러하다는 것을 성경말씀으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도 사건 자체만을 보고 우리도 그렇게 체험하기 위해서 노력하자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개인 구원의 한 과정으로 집어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지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약속의 성취라는 차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계속적으로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류를 범하고 있는 일례가 바로 방언에 대한 문제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하여 말하자면 방언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혼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오순절 성령강림의 반복적인 역사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방언에 대하여 대단히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태도입니다. 아니 성령받는 것과 방언을 필연적인 관계로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방언을 했다. 그러니까 오늘날도 성령을 받은 사람은 방언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반대로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방언을 받기 위해서 별별 노력들을 다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방언을 훈련시키고 전문적으로 방언을 받게 해주는 기도원이 등장하고 성업을 할 정도입니다. 한마디로 장사꾼들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도,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한다--방언을 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역순의 논리가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방언이 성령받은 것에 대한 증거로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로 계속해서 방언에 대하여 말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서들에서도 성령에 대한 언급을 할 때마다 그 증거로 방언에 대해서 말해야 함이 옳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동반된 방언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방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성령받은 증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4절에 의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들 놀랐습니다(7절). 그런데 무엇 때문에 놀랐습니까? 그들의 놀람은 방언을 한다는 것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좀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11절을 보면 더욱 확실해 집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즉 각 나라마다 말이 다 다른데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에 대하여 거리낌없이, 언어의 장애없이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언어의 장애가 있었습니까? 창세기 11장에 의하면 인간들이 성과 대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의 목표는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창 11:1)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기 형상을 온 세상에 퍼뜨리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였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추방당하였으나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상태는 죄의 본성대로 사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죄의 본성대로 사는 인간들은 바벨탑을 쌓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의 의도를 해체시키기 위하여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각 나라에서 온 유대인들이 오순절을 지내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왔다가 성령강림을 경험하고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하여 듣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우리에게 방언을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앞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시는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랫동안 다른 나라에서 살았기에 유대인들의 말을 잊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일시적으로 복음을 전해서 알아듣게 하신 하나님의 방편이 무엇인가 하면 방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 때문에 언어를 혼잡케 하신 하나님께서 여기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으로 언어를 서로 알아듣게 하신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역할이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는 것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사도들이 방언으로 전했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큰 일이란, 베드로의 강론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표현법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출 14:31).
베드로는 성령받은 것으로 자랑하면서 너희들도 성령받으면 이렇게 될 수 있다고 강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강론에서 강조되는 한 가지 핵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주가 되셨고, 주가 되셨기에 우리에게 성령을 주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성령받은 자가 드러내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령받은 자가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은 방언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방언이란, 그 당시의 상황에서 복음을 세상에 널리 증거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취하신 하나님의 조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언어가 혼잡케 된 이 상태를 회복하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께서 오셔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근거로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4:3에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되도록 힘쓰고 애쓰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되게 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알라는 뜻입니다.
근본적으로 성령의 역할은 그리스도를 지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보냄을 받은 분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는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할 수밖에 없고, 거기에 모였던 모든 무리들도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하여 듣고 놀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관심 가졌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큰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심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무리들이 방언 때문에 회개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대한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였던 것입니다(37절).
그러나 성령받지 않은 자들은 성령받은 자들을 향해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했습니다(13절). 성령받지 않은 자들은 교회를 향해 늘 조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없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도리어 육은 성령을 항상 거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성령받지 않은 자가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사업하는 얘기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가정의 문제를 다루는 곳도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이야기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이 주장하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보통 성령께서 인도하신다 라고 할 때에도 과연 그 인도란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늘 기분좋게 생각하고 또 그 말을 즐겨 사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은 이미 방향이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방향은 오직 십자가를 향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자와 성령을 주장하심을 입는 교회는 항상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복음의 확산을 위해 주어졌던 방언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관심 빼앗기지 않고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면서 성령께서 그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이끌고 가시도록 맡기는 신앙이 성도의 참 모습입니다(1997.7.20).
사도행전 여섯 번째 강론
성령강림(3)
사도행전 2:17-21
“17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19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 때문에 사람들이 조롱하면서 새 술에 취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14절)고 하면서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이 어떤 일인지를 설명합니다. 이것이 14절에서 36절까지 베드로의 강론입니다.
우리가 주의 깊게 볼 것은, 여기에 기록된 베드로의 강론과 오늘날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가 기독교를 소개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기독교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논리적인 설명을 해서 사람들에게 납득을 시키고 이해를 구하는 그런 시도가 전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논리적인 설명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성경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일하심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대하여 일하실까봐 염려되니 우리들이 부지런히 그리고 빈틈없이 일해야 한다고 외치는 듯 합니다.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세상에서 하는 사업의 경영원리대로 장사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교인들대로 복음이라는 물건을 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천국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강론은 결코 기독교를 감상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의 강론은 당시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일방적인 선포였습니다.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얼마나 괜찮은 분인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분이 나를 얼마나 지극히 사랑하셨는가 하는 강조도 없습니다.
베드로의 강론에서 큰 강조점은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 예수님을 하나님은 부활시켜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베드로는 그 선포를 위한 근거로 구약의 요엘서 2:28이하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17-21절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마지막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1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요엘서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욜 2:32).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주가 되었습니까?
베드로의 강론 36절에 보면 예수님을 주로 삼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가리기 위하여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습니다. 물론 내가 구원받아야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 주의 이름 앞에 굴복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는 상황을 오늘 본문에서 말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7절). 성경에서 말세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식으로 세상이 끝나는 시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성령으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때를 가지고 말세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신 것은 하늘의 사람과 땅의 사람을 지금부터 갈라놓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자와 아닌 자를 이 땅에서부터 구분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내 안에서 무슨 감정적인 차원으로 세상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오는 뜨거움 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신앙이란 내 쪽에서 무엇인가 근거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근거는 전부 예수님 쪽에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은 신앙 안에서 말할 것이 못됩니다. 다만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로 삼고 있는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하셨기에 독생자를 주셨던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 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셨다는 자가 주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은 이것이 늘 반복되어지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작업 그것은 주님 오실 때까지 주의 성령이 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이 신비한 무슨 이적을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여기서 말씀하는 “예언”이란 장차 일어날 일에 비추어 현재를 고발하기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이 일 때문에 주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십자가로 우리를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하는 고발입니다.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비전(vision)을 가집니다. 이것은 세상의 썩어질 것에 대한 비전이 아닙니다. 세상은 주님의 뜻에 의해 곧 망한다는 비전입니다. 세상이 망하기 때문에 망하지 않고 불탈 수 없는 영원한 나라만이 유일한 소망이 됨을 아는 차원에서 비전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루어질 예수님의 나라 때문에 늙은이들도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드신 분들은 항상 인생의 끝을 느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꿈이라는 것은 인생의 연장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꿈같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먼 미래의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지금 현실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 속에 있는 자들이 교회입니다. 젊은이든 늙은이든 상관없이 환상을 이야기하고 꿈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모임이 교회입니다. 세상에 희망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나라에 대해서만 말할 수밖에 없는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 마디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19절에 보면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라고 했습니다. 20절에서 풀어주기를 그것이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자기의 왕권으로 자기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는 그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때(기간)를 말세라고 합니다.
마지막 해가 떨어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의 끝, 즉 주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 심판이 십자가를 통해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아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오직 주의 이름을 선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에 의한 것이 아니고서는 망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성령이 교회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은 아직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존재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직 회개의 기회가 주어져 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세입니다. 말세는 오직 주의 영의 다스림에 의해 하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십자가로 인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그분만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날마다 말세의 현상들을 보고 예수님과 연관지어서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아는 자는 예수님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고 예수님의 나라에 꿈을 두는 자들입니다.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비추어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1997.7.27).
사도행전 일곱 번째 강론
나사렛 예수그리스도
사도행전 3:1-10
“1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두는 자라 3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강론을 보면서 우리가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아마 이런 것이라 생각됩니다. ‘베드로는 참으로 못난 자였다. 성격도 급하고 나서기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자였고, 예수님 앞서서 행동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자였다. 그런데 그가 성령의 능력을 받고 나서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그가 한 번씩 설교하니 3000명씩 혹은 5000명씩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니 우리도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주님을 위해서 큰 일을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봉사는 반드시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일을 해야지 그냥 할려고 해서는 교회 일에 방해만 될 뿐이다.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한다면 성령받기 전의 베드로와 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날마다 목사의 일을 방해하고 교회의 일을 그르치게 된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기도했던 것과 같이 열심히 성령의 능력을 받도록 기도하기만 하면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정성을 보아서라도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야기도도 열심히 하고 금식기도라도 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받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자. 그래야만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충성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사도행전을 보는 한국교회 교인들의 시각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의 능력을 받을까에 온 관심이 모아져 있습니다. 이러한 관심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대한 본문도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보니까 3000명씩이나 회개시킨 베드로에게 초점이 모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 성경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와는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결코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항상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관심가지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나 바울, 이런 사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어떤 일을 했는가 하는 일에 핵심적인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처음 이적입니다. 소위 말해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에 사도들이 행한 첫 번째 이적이라는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있던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를 일으키는 사건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우연히 일어난 일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을 사도행전의 서두에 놓고 사도행전에서의 첫 번째 이적으로서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해 주시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복음 전하는 것을,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과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으로 같이 묶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23을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예수님의 사역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도 보면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그랬는데 실제적으로 예수님은 모든 병자를 다 고치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 복음 전파와 질병고치는 문제를 연결시키는 것뿐입니다. 즉 병고침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에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의 문맥을 통해 보면 성령강림 이후에 방언으로 각 처에서 온 지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방언을 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들 말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방언이라는 것을 사용하셔서 복음이 증거되게 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있는 베드로의 강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로 인해 수 천명의 유대인이 회개함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엄청나게 부흥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에게 맡기신 복음을 그들이 선포할 때에 주의 성령께서 상대방이 이해하고 예수를 믿도록 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상관없이 주께서 부르고자 하시는 뜻에 따라 인간은 결국 복음 앞에 굴복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이적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의 형태를 사도행전에서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이 행하는 이적과 예수님의 사역과 어떤 특별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도들은 복음 사역의 형태를 예수님의 사역의 형태를 그대로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사도들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복음에 대한 일이 성령강림 이후에 이제 교회로 맡겨졌다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던 사역, 즉 병고침을 통한 천국복음전파의 사역이 교회의 사도들을 통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결국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의 살아있는 몸으로 계속 복음이 증거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책임과 권리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천국으로 보여주셨다면 교회 역시 그런 천국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면 교회 역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으로만이 증인의 역할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의 증인역할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만드시는 일이란 마귀의 권세 아래에서 놓임을 받게 하는 일입니다.
본래 우리는 사망과 죄악의 종된 자들입니다. 곧 마귀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죄인들을 주께서 구원하시려면 먼저 우리를 잡고 있는 마귀의 권세를 쳐서 항복시키기 전에는 우리를 자유케 할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이런 면에서 구원에 대한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를 항복시키지 않고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적들을 통해서 바로의 세력을 꺾어 놓으신 것입니다.
성경이 구원에 대해 설명할 때에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하여 동의하고 항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외부의 힘에 의해 우리를 붙잡고 있던 주인이 그 힘을 잃어버린 것이요, 또한 새로운 세력이 우리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구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골 1:13).
그러므로 교회의 할 일이란, 흑암의 세력에 붙잡힌 자에게 빛을 비추어 흑암의 권세를 몰아내고 생명의 길로 인도해 낼 수 있는 일을 부여받고 그 권리와 권세를 갖고 있는 자로 서야 하는 이 특권과 사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에게서 하나님의 다스림에로 돌아가게 하는 일들입니다.
이 일들을 교회가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때에 주님께서 그 증인의 역할을 사용하셔서 자기 백성들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일을 누가 하시느냐 하면 주의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증인이 되는 모임을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앉은뱅이 거지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갈 때에도 여타의 사람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구걸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고 할 때에도 거지는 무엇을 얻을까 하며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5절). 거지가 원했던 것은 몇 푼의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 수준에서 최고의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물질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보실 때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끊임없이 원하고는 있으나 그것은 영생과는 관계없는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는 상관없는 것들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고 했습니다. 인간의 죄문제, 영생의 문제는 은이나 금과 같은 물질적인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실로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유대인들이 하찮게 여기고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하는 빌립의 말을 들었던 나다나엘은 처음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 라고 무시하였습니다. 그렇게 인간들이 무시하는 그곳에, 그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유대인(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십자가에 버렸던 건축자의 버린 돌을 하나님은 취하셔서 만유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솔로몬 행각에 서서 외쳤습니다. 먼저 한 말을 보면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했습니다(12절). 베드로와 요한이 강조하였던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나사렛”이라는 한 시골 지명을 붙이는 것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인간들의 죄악된 심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잘 알 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이름으로만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예수님 그분이 그리스도시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취하셨다는 차원입니다. 약속을 완전히 이루신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만이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와 요한은 보잘것없는 자신들에게 주목하지 말고 생명의 이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도록 외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가 가진 것은 물질입니까? 나의 지식입니까? 자존심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우리는 분명히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계실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기독교란, 다른 사람이 배운 것보다 내가 더 배우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보다 내가 더 많이 가짐으로써 하나님이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세상적인 학력이나 지위로서 누를 수 있을 때에 나를 통해 예수님의 이름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승부욕에 불과할 뿐입니다.
교회의 증인됨은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십가가의 길을 가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아직 존재한다는 것은 종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존재하기에 아직 복음이 증거되어지는 때라는 것입니다. 여기 이 일에 우리가 투입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시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도록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오늘 우리 신자들을 향하여 저 사람은 은과 금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원을 준비하며 또한 누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도록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물질적인 것으로 우리 삶에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생명을 주어서 흑암의 권세에서 빼내는 이 엄청난 일 때문에 오늘도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구제 자체에 빠져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인양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적절히 실시되고 있으면 교회다운 교회요 참신한 교회로 떠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교회 밖에 20%를 주고 있다, 30%를 주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는 것은 교회 재정을 가지고 구제를 얼마나 하느냐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내 몸임을 나타내느냐’로 보시는 것입니다.
철저히 말씀대로, 주님께서 지상에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대로 주님을 증거하고 있느냐 하는 것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척도를 가지고 참된 교회냐 아니냐 하는 것은 우리의 기준에 불과합니다. 은과 금은 우리에게 없지만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뿐임을 나타내는 교회가 존재한다면 아직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은혜를 아는 자는 물질적인 것에 매이지 않고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에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자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아는 모든 사람 앞에 우리가 내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어야 하고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모이는 교회의 모습이기를 원합니다(1997.8.10).
사도행전 여덟 번째 강론
예수의 권세와 이름
사도행전 4:1-22
“1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3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9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13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15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16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22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우리가 사도행전을 대할 때에 막연하게 어떤 큰 권능과 이적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진행되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베드로의 강론,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사도들이 천사의 직접적인 인도로 감옥을 탈출하는 일,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에 일어나는 놀라운 능력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기독교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로 사도행전, 또한 기독교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은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큰 능력이나 놀라운 일들이 사도행전 전체를 주도하고 있고, 또한 그러한 일들이 우리 신자들 각자의 생애 속에서도 그대로 연속될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행전 속에 일어난 일들이 큰 권능과 이적들의 연속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상조차도 힘든 고난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 이하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겪었던 고난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수없이 옥에 갇히고 매맞으며, 여러 번 죽을뻔 하였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을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을 당했으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강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 동족으로부터, 이방인으로부터, 때로는 이단들로부터 무수한 위험을 당했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의 고난들을 어찌 다 일일이 열거할 수 있겠습니까? 대충 말한 것들입니다. 대충 말한 것이 이 정도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난들을 애써 외면하면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다면 무조건 이생과 내세에서 동시에 편안하고 복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우리의 눈을 넓혀 성경을 대한다면 그 속에는 놀라운 또 하나의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속에서 한 본문, 한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큰 권능과 이적 때문에 영광과 찬사가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과 어려움이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적과 큰 권능으로 나타나고 내게 큰 복으로, 유익으로 베풀어지는 것만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넌센스입니다.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2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부활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무슨 의미가 있길래 그들이 싫어합니까?
예수님의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로 새로운 예수의 나라를 만들어 지금도 살아서 계속 그 나라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성전의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쳤다고 이미 베드로와 요한은 선포하였습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살아서 계속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서 계속해서 자기 백성을 만드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두개인들은 부활의 교리를 믿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싫어하였습니다. 오늘날 세상도 유대인들의 세계와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분의 부활을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도무지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불러다 놓고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 어쩌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자기들의 권능으로 일으켰다고 했으면 이런 고난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이적이라고 선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절).
사도들은 거기에 덧붙여 인간들이 버린 돌을 하나님께서 취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1절). 이 말은 한마디로 하자면 너희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칭 건축자라는 어리석은 자들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집을 세우는 건축자와 같이 율법으로 인간의 공로에 의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내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찮게 여기고 버렸던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구원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이루어내지 못하는 의를 하나님 편에서 이루셨다고 사도들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12절)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십자가로 모든 의를 이루신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님 그분이 지상에 오셔서 언약을 친히 성취하신 이름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건축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이루신 십자가 그것만이 우리의 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지금 유대 지도자들 앞에 잡혀 있는 상황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의 이름만이 구원이 된다고···
결국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세상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놓으라고 촉구하고, 유혹하며 날마다 회유하고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은 다른 것은 다 놓을지라도 예수의 이름만큼은 놓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 모든 것을 걸어 놓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권세에 도무지 굴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십자가 안에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예수님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애써 부인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때문에 사도들을 붙잡아서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바로 마귀적인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하는 그들의 생각과 행위가 예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권세에 굴복당하지 않고서는 그 이름의 고귀함, 그 십자가의 숭고함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의 권세와 이름에 굴복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는 이 엄청나고 놀라운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바로 항상 예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 교회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늘상 하나님의 편이고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성령님을 돕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경계하고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 또는 큰 능력으로 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실적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신 아들로 인해 하나님 앞에 굴복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이름으로 하나님께 굴복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러한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어느 것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를 깨달은 것입니다(19절).
마가복음 13:11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결국 사도들도 자신들이 그렇게 담대했기 때문에 서슬 퍼런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일하게 하신 주님 때문이었습니다.
31절에 보면,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할 수 있는 것은 무슨 큰 이적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해롭게 하고 괴롭히는 사람을 골탕먹일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사도들의 능력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신자들의 능력도 바로 이러한 능력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이름에 굴복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만 살 수 있는 삶, 어떤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을 놓지 않는 능력 그것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 되어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행 26:19). 바울 사도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거스리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건물)는 믿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는 믿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는 교회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싫어합니다. 교회 다니는 부모들의 구호도 이러합니다. ‘교회는 다니되 예수는 믿지 말라!’입니다. 교인이 되는 것은 괜찮지만 혹시 만약에라도 예수님의 사람이 된다면 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은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 있습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딤전 1:17). 그러기에 예수의 권세와 이름을 믿는 자는 하늘에서 보이신 것들로 인해 하늘의 것들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20절)고 고백하였던 사도들의 모습이 바로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모습으로 주님의 증인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못난 우리를 예수님의 권세와 이름에 굴복시키신 성령님의 능력에 오늘도 순종하면서 살기로 합시다(1997.8.17).
사도행전 아홉 번째 강론
교회의 순결
사도행전 5:1-11
“1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9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10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성경을 해석할 때에 어려운 점이 무엇인가 하면 교회를 개입시켜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 본문을 대할 때에 교회와 연관시켜서 해석할 때에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로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교회라고 간판을 걸고 사람들이 모이는 종교집단을 가지고 교회로 전제하고 성경 해석에 연관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성경과는 동떨어진 모습임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책이지 교회를 보여주는 책이 아닙니다(요 5:39).
오늘 본문은 대표적으로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교회의 관념을 가지고 해석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이 본문 말씀을 가지고도 교회 당회장 목사의 권위의식을 높이는 데나 혹은 목사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패가망신하거나 죽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엄포놓고 공갈, 협박하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본문 말씀 때문에 ‘앞으로 헌금을 잘해야 하겠구나!’ 또는 ‘교회에서는 함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구나!’라고 생각해서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본문 말씀을 가지고 헌금은 반드시 목사의 발 앞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또한 십일조는 반드시 일원짜리 하나라도 떼어먹지 말고 철저히 해야 하며, 본 교회에 내어야지 다른 교회에 내서는 안된다는 것을 교훈하는 근거로 이 본문을 사용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돈의 얼마를 감춘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 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앞의 4장에서 사도들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기득권에 의해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더욱 교회는 말씀대로 든든히 서 갈 수 있었습니다. 32절 이하에서는 교회가 유무상통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이 밭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4:37)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과 나눌 때에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도들에게 맡겨서 말씀대로 행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서 사도들이 요셉을 “바나바”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바나바의 뜻은 ‘권위자’입니다. 권위란,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 밭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주어서 사도들이 그것으로 교회에 핍절한 사람을 위해서 쓰게 되니까 온 교회가 힘을 얻고 생동을 얻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바나바의 물질적인 도움으로 인해 교회가 힘을 얻고 위로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4:33에 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이미 부활하신 주님께서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혜란 단순히 순간적인 뜨거운 감정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된 그 상태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방법대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4:32에서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는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말씀에 복종하면서 사는 모습이 있게 되었습니다. 은혜 받은 모습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알기 쉽게 유무상통하는 모습으로 성경에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것을 거꾸로 생각해서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을 보니까 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해한 사람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요셉이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재산을 팔아서 사도에게 갖다 바치니까 사람들에게 칭송도 받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모습을 자랑하게 된다는 식으로 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속이는 일이었습니다. 결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의 얼마를 떼어먹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도 아닌데 주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거기에는 인간적인 욕심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주님과 주님의 은혜성을 모독하는 죄성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주님이 자신의 교회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부정하려고 하는 마귀적 속성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철저히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에 대하여 간과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간다면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와 같이 쉽게 생각하고 자기 자랑과 칭송을 위해 더럽혀 놓을 가능성은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차례로 치셨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11절)고 했습니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유대교의 기득권으로 사도들을 괴롭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부활한 주님은 자신의 교회에 대하여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그런 무능한 분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러한 차제에 주님은 교회를 우습게 알고 주님을 속이며 무시하려고 했던 자들을 치셨습니다. 적어도 이 일을 통해서 얼마간은 주님에 대하여 두려운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반대로 사도들과 신실한 신자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더욱 담대히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철저히 자기 몸 된 교회를 친히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교회의 순수함은 인간이 거론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오직 주님이 담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염려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하는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를 교회로 주신 것입니다. 교회가 없으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교회가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주셨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알도록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움직이실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주님과 만나게 되고 주님이 살아 계심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홀로 머리가 되십니다. 목사나 장로, 권사가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교회라면 그것은 이미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친목단체에 불과하고 한낱 계모임이나 종교단체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인정하는 자들만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는 교인을 인간이 함부로 막아서도 안되고 쫓아내어서도 안됩니다. 또한 우리가 막을 수도 없고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만 십자가만 선포함으로 십자가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이 자연히 떨어져 나가도록 오직 복음만 선포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순결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에는 고개 숙이고 겸손하게 와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주님 앞에 내 놓을 것이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세로 나와야 합니다. 내 자랑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자랑을 담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도 주님의 은혜를 보답한다는 말을 잘합니다. 우리가 어찌 주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털끝만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교회에 올 수 있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 자리에 오게 하셨다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 대한 보답입니다. 교회를 키우는 인간적인 방법과 도구들을 동원할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다스리시는 주님의 다스림에 복종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성교회로 모이면서 처음부터 온 유혹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물질적인 힘으로 예배당을 제공하려고 우리 교회에 나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물질적인 힘으로 운영되어지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물질적인 힘을 가진 사람이 교회로 와서 무엇인가 제공하려고 하는 것을 날마다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자청년이 자신을 따르고자 할 때에 반갑게 맞이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재물을 이용해서 주님을 섬기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졌던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야 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돈으로 만들어지고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께서 죄인들을 감동시키시고 부르셔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참으로 염려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 그렇게 해서 교회가 될까 라고 염려를 하십니다. 이렇게 발전하는 시대에 한 사람이라도 더 불러모아야 예배당이라도 짓고 사람들의 힘을 모아야 위로도 되고 교회가 교회답게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개척 양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상가 건물이 있어야 되고 예배를 드리는데 필요한 기물들이 있어야 된다고 전통적인 사고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교역자도 개척을 계획하면 상가 건물을 얻으러 다니고 예배당에 채울 물건부터 확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교인이 모이면 어김없이 예배당 건물을 짓기 위해 건축 헌금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가에 세 들어 있는 교회는 예배당 건물을 짓기 위해서, 건물이 있는 교회는 더 크게 짓거나, 교육관을 건축하며, 기도원을 사들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란 건물이 있고 예배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졌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꼭 부동산을 확보하고 거기에 예배당을 세워야만 주님께 영광이 됩니까? 아닙니다. 예배 처소가 전세로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수 있음에 감사하며 예수님으로 만족하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건물을 확보했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 순수하게 자신의 몸으로 인정하는 모임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교회는 주님께서 친히 세우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해야 교회답게 되지 않겠느냐 하는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 자신이 친히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해 날마다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자들이 득세하는 어제의 교회를 부수고 오늘 주님의 교회로 새롭게 세워 가시는 주님의 뜻에 날마다 순종하는 교회가 참된 주님의 교회입니다(1997.8.24).
사도행전 열 번째 강론
말씀 전파
사도행전 6:1-7
“1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2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3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4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5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이 땅에 있는 교회는 항상 세상적인 문제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모임이기 때문에 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교회이기 때문에 완벽하고 완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이 땅에 있는 교회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교회입니다. 문제가 있고 완전하지 못한 그 모습 안에서 참된 주님의 교회를 말씀으로 날마다 새롭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교회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이방인들에게 던지시고 그 가운데서 남은 자를 항상 골라내시고 불러내셔서 새로운 이스라엘로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오늘 모임에서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그 말씀에 의해 십자가에 자신을 죽이고 오직 예수님의 피의 능력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회개가 있어지는 그 사람들이 바로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이후에는 교회의 일로 인하여 사람들이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편에서는 자신이 살아서 역사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신 것이었기에 사람들은 교회에 대하여 이제 인간적으로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사람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드러내신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사도들에게는 주님이 살아 계시고 자신의 교회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으로 인해 더욱 위로와 힘이 되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5:41,42에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1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여기서 헬라파 유대인이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의 공격을 받아 약속의 땅에서 다 쫓겨나서 이방인들의 땅에서 살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으니 우리도 하나님을 버린다고 하여 이방인들의 문화를 취하고 이방인들과 같은 상태로 되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과는 달리 다니엘과 같이 이방 땅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여호와만을 섬기며 포로에서 회복될 때에 본국으로 돌아온 자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 안에서 서로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파당이 형성되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헬라파 유대인들을 멸시하였습니다. 또한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사도행전 5장에 나타난 대로 자기 재물을 교회에 헌납한 것을 모아서 일괄적으로 교회에서 나이든 과부들에 대한 생활비를 제공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참고 딤전 5:9,10).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돌아갈 구제가 누락되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 보면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원망”이란 말은 출애굽 당시 광야를 걷던 이스라엘에게 나왔던 것입니다(출 16:7, 민 14:27, 고전 10:10).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광야 교회나 예루살렘 교회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광야의 상황이기 때문에 물을 먹어야 할 권리가 있고, 편하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으며, 시마다 때마다 양식을 챙겨 먹어야 할 권리가 있으며, 구제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어떤 누구도 받을 권리가 있는 자는 없습니다. 가난, 결핍 모자람 등은 우리에게 있어서 큰 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권리가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죄인된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대가를 받을 권리가 없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것입니다.
구제란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저 주님의 은혜에 의해 베풀어지는 줄 알고 감사하게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구제할 권리만 있지 받을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나의 희생을 통해 주님의 것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을 받은 자들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일방적으로 한없이 받은 자들입니다. 교회가 구제한다는 차원은 복음을 전한다는 차원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가난한 자들에게 교회 재정의 일부를 지출하여 물질적으로 보조했다고 해서 그것이 구제가 아닙니다. 물질을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해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세상에서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이나 물질입니까? 아니면 복음으로 말미암는 영생입니까? 당연히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여기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삶의 형편을 좋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교회의 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4절). 여기서 기도와 말씀 이 두 가지를 다 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것 때문에 기도가 동원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다는 고백을 하는 차원에서 기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본래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일곱 사람을 택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5절) 세웠다고 했습니다.
이 일곱 사람을 흔히 일곱 집사라고 합니다. 물론 본문에서 집사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곱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 구제에 대한 문제가 생기게 되었을 때에 사도들이 어떻게 이 문제를 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이 본 것은 교회가 본질적인 것에서 어긋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 전하는 것에 교회가 전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20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예수님이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즉 그분이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에 기준을 잡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초로 해서 사도들이 터가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들이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고 한다면 사도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본래 가져야 하는 사명은 말씀 전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말씀만을 전하고, 일곱 사람은 재정만 담당하며 교회의 잔무를 처리해야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같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무해야 합니다. 교회가 복음 전하는 일을 전무함에 있어서 곁가지처럼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서로가 감당하여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이 방해받지 않도록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로 다시 돌아가게 될 때에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7절).
여기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였다는 말씀은 제사장들이 전부 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말이라기 보다는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이 될 때에 어떤 자들도 복음에 굴복되지 못할 자는 없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유대교의 지도자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 땅의 교회에 문제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항상 새롭게 말씀을 전하는 본질적인 것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 교회는 늘 이런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사도행전 곳곳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9:31에 보면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했습니다. 12:24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16:5에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19:20 말씀도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했습니다. 항상 초점은 말씀이 힘이 있어 그 말씀에 굴복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끝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28:30-31).
바울이 어떻게 되는가? 또는 교회가 성장 발전했다는 것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의 복음, 말씀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취되어 간다는 것이 사도행전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교회에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자기 백성들들을 복음에 굴복시켜 나가시는 일만큼은 친히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세상의 일로 방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방해받지 않으십니다. 이 땅의 교회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은 결코 무너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가 문제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뜯어고치고 새롭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늘 말씀을 전하는 본질적인 사명에로 돌아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왕성하게 하는 일에, 복음이 전해지는 일에 신경쓰고 있습니까? 그 일에만 전념하는 교회가 주님의 몸 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이 땅에 세우시고 기대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들이 전하고자 했던 것은 큰 교회가 아니라 복음이었습니다. 구제가 아니라 말씀 전파였습니다. 전도하자, 선교하자 그러면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래 교회에 맡겨진 일이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돈이나 세상적인 일에 근심하며 신경쓰는 교회라면 날마다 버려야 합니다. 인간이 만든 조직이나 행정상의 일이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하는 일에 관심가지는 교회라면 세상의 모임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주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일에만 신경쓰며 만족하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1997.9.7).
사도행전 열 한 번째 강론
스데반
사도행전 6:8-15
“8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10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11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교인들의 신앙을 대부분이 크게 둘로 양분하고 있습니다. 성숙한 신자와 성숙하지 못한 초신자와 같은 신자로 말입니다. 그 기준은 아주 유치한 것에 있습니다. 예컨대 주일성수, 철저한 십일조 생활, 기도 혹은 전도 생활, 교회 특히 목사에게 얼마나 충성하는가 하는 이런 것들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성숙하지 못한 신자로 말해지고, 성숙하지 못한 자란 곧 믿음이 약한 것으로 취급합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직분도 잘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직분을 주는 기준도 외적인 기준에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되는 인물들을 보면 그러한 외적인 모습을 가지고 성숙한 신앙으로 평가하는 내용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 성숙한 신자라는 그런 식의 의미를 성경에서는 전혀 말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그런 표현 자체가 성경에는 없습니다.
단지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하는 두 가지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도 좀 나은 신자가 있는가 하면 조금 못한 신자가 있다는 식의 발상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철학적이고 진화론적 이론에 불과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어쨌든 한 사람이라도 교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온갖 원리들을 다 제공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성숙한 신자로 만들기 위하여 갖가지 프로그램들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프로그램들을 이수하기만 하면 성숙한 신자가 되는 것처럼 선전합니다. 그것 때문에 목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인간이 할 수 있고 만들 수 있는 것들이라면 다 추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잡동사니가 되었습니다. 성경공부도 하나의 프로그램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성경공부 하는 자체를 신앙 생활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 생활 즉 삶의 일부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공부도 삶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어떤 한 부분 즉 주일성수, 십일조 생활, 교회 봉사 이런 것만 가지고 성숙한 신앙이다 아니다 라고 말한다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주일성수, 십일조, 교회 봉사를 열심히 했다는 대목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오직 주님을 위해 살았을 뿐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자신의 복음을 위해 바울 사도를 도구로 쓰셨을 뿐입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보여지는 일부분을 가지고 그 사람의 신앙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판단에 맡길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스데반에 대해서도 보면 그가 결코 성숙한 신자였다고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합니다(5절).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이 교회 생활을 잘했다든지 그가 주일성수를 철저히 했다든지 십일조를 잘 냈다는 그런 부분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보는 기준으로 본다면 도무지 그가 성숙한 신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여기에 왜 뽑혀 나왔습니까? 그가 교회에서 뽑혀 사도들에게 안수를 받게 된 이유는 6:1 이하에 있는 대로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반목과 갈등 때문에 사도들이 자신들은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무하겠다고 해서 세움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지는 논리는 이런 것입니다. 사도들은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무하기 위해서 일곱 사람들을 세워 구제를 공평하게 하도록 했다는 식으로 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5절에 기록된 일곱 사람은 구제하는 일에 전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구제를 공평하게 하거나 교회의 재정출납을 전담했다고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기 위해 일곱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 일로 인해 이렇게 교회가 본질적인 말씀 전파의 임무로 확고하게 세워지니까 제사장의 무리까지도 이 도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즉 교회가 본질적이고 근본적으로 해야 할 일로 돌아서게 되니까 말씀에 복종하게 되는 자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스데반을 비롯하여 교회에 세움받은 여섯 사람들이 사도들과 역할 분담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본래 해야할 일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이 해야 하는 일도 구제하는 일을 열심히 관리하거나 재정을 맡아서 관리하는 그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8절에 와서 느닷없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나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공회에 잡히게 됩니다. 공회는 거짓 증인들을 세워 하나님과 모세를 모독하는 말을 하고 율법을 거스려 말한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스데반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공회 앞에서 말씀을 강론하게 됩니다. 그것이 7장에 나타난 스데반의 강론입니다.
그 강론의 내용을 우리가 여기서 다 자세하게 살펴볼 수는 없습니다마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구약에서도 우리 조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의인들이 고난을 당했고, 결국 오늘날에도 말씀이 아닌 다른 것, 즉 외적인 종교형식에 관심이 빼앗기다보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살인자가 되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이렇게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도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했습니다(15절). 즉 어떤 악의를 가지거나 자기 자신의 어떤 이기심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포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회에서 이 말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분노하였습니다.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죽였습니다. 이것을 볼 때 과거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요 18:31)라고 한 말은 거짓이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빌라도라는 로마 권력의 손을 빌어 합법적으로 죽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경우와 같이 자기들의 눈에 거슬리고 하나님을 모독한다 싶으면 언제든지 율법에 근거해서 마음대로 살인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구약의 연장선에 있는 자들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조상이 의인들을 무참하게 죽였던 것과 같이 의인 스데반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받고 죽임당하는 것을 기뻐했듯이 스데반은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님이 가셨던 길입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를 지적했던 유대인들로부터 날아오는 돌을 막아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령충만 그것은 고난이요, 죽음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의 생애는 비참하게 돌에 맞아죽는 생으로 마감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죽는가 죽음의 형태로 말하지 마십시오. 참 신실한 신자였는데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비참한 것으로 따지자면 예수님만큼 비참하게 죽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성령충만이라는 것은 날아오는 돌을 막아주고 고난을 제거해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한 편의 설교 때문에 죽게 만드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스데반의 생애는 실로 죽음으로 가고 있는 생애였습니다. 얼마전 TV에서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기 위해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주행시험을 본다고 하는 60세가 넘은 할머니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한글을 배우며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노인들에 대해서도 심심치않게 방영되고 있습니다. 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꿈을 이 사회에 도전정신으로 주겠다는 것이 방송사의 의도일 것입니다. 젊은이들도 이런 정신을 가지고 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에게는 그런 꿈도 없었습니다. 그냥 성령충만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셨던 그 고난과 죽음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성령께서 장악하고 있는 자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5:41에도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렇게 고난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주장하신다는 의미는, 성령께서 고난의 길로 주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로 끌고 가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길에 끌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거부하거나 반항하거나 좌절할 권리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도리어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죄성 때문에 나오는 치욕스러운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 대한 반항이나 좌절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겨버립시다.
고난과 죽음이 눈 앞에 임박해 있다고 할지라도 성령충만한 자는, 십자가를 믿는 자는 세상의 죄를 들추어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생이 되심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이 두려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죽인다는 위협 자체가 우리를 위축되게 하는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나 또한 죽어 가는 것을 아는 자는 영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신자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단순하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만 믿는 신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숙한 신자로 오늘보다 내일 좀더 나은 사람으로 되기를 원하면서 온갖 교회의 외적인 일에 매달리기를 좋아하는 교인이기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 이 순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온갖 종교적인 행위나 경건의 모습으로 치장하려고 하지 마시고 지금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어가고 있는 솔직한 모습으로 주님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1997.9.14).
사도행전 열 두 번째 강론
사마리아
사도행전 8:1-25
“1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7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8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9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12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14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16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17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18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1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24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25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의 일에 별로 만족이 안됩니다. 모든 면에서 여러모로 불만이 있습니다. 탤런트들 중에서도 자기의 신체에 대해 만족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TV의 한 프로그램을 통해 본 적이 있습니다. 어디 한 부분이라도 반드시 자기 신체에 대해 불만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는 우리의 생활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정에 대하여, 직장에 대하여, 그리고 정부에 대하여 불만이 있지만 거저 참고 살아갈 뿐입니다. 불만이 있다는 것은 자신을 아직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크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상이 높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일에 만족이 되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세상과는 반대되는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길을 주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우리의 불평, 불만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불평과 불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자리, 이런 환경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란, 자신의 선택과 지혜에 의해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어떤 분에게 붙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의 선택과 그분의 결정에 의해 움직여질 뿐입니다. 그분은 다름아닌 예수님이십니다. 여기 주님께 붙잡힌 바 되어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지는 빌립이라는 사람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그가 어떻게 붙잡혀 있습니까?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스데반을 죽인 그들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예수라고 하는 자를 우습게 보았습니다. 급기야는 예루살렘 교회를 공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스데반으로 인하여 환란, 핍박이 온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스데반 만큼 골치 아픈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고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평온하게 신앙 생활 잘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평지풍파를 일으킨 스데반을 질타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스데반의 일로 인간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면서 인간들의 죄를 지적하는 스데반을 죽인 자들은 다름아닌 예수님을 죽였던 자들입니다. 예수님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 대해서도 철저히 응징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이렇게 흉악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을 알고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신자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빌립은 6장에서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들의 구제에 대한 갈등 때문에 뽑혀진 사람입니다. 어쩌면 빌립이라는 사람도 예루살렘에 가만히 머물러 있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5절에 보니까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가 거기서 복음을 전한 이유는 한 마디로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4절). 그 중의 한 사람이 빌립입니다.
빌립은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마리아 성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수하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17절). 이 본문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도 해석이 분분합니다. 예수를 믿지만 성령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결코 그런 의미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은 간단합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까지 이르러 전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은 주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주도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아직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타당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10장의 고넬료 사건에서 베드로의 태도를 보면 그가 이방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자기 민족에게만 주어진 복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다고 하니 의아해 했습니다. 이방인과 같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하고 또한 그들 역시 복음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관심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사마리아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특이하게 성령이 임하는 사건으로 기록되는 것입니다. 결국 전도는 주의 성령께서 하신다는 뜻입니다. 복음전파는 철저히 그분이 주도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셨습니다. 이는 허풍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로만 말씀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홀로 친히 이루시는 천지창조 때에 하신 말씀과 같은 주님의 선언이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그리고 온 유대에 복음이 증거되게 하셨습니다. 지금 복음이 유대라는 민족주의의 경계를 넘어서도록 일하신 것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증거하신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되게 하시는 분 역시 예수님 그 분이십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주님의 일입니다. 증거하시고, 성령주시며,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일까지 주님이 친히 다 하시는 일입니다. 그 일에 우리는 부름받았을 뿐입니다. 전면에 나서서 설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일하게 하실 때에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에게 불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이 자리로 몰아 넣으셨고 그분이 일하게 하시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지 있는 자리에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은 그냥 높은 자리에서 구경만 하시고 실제적인 일은 교회나 노회, 혹은 교단, 선교단체를 운영하는 인간들에게 일임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실제로 그의 영 안에서 계속해서 직접 일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욕심에 의한 열정과 힘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복음을 누구에게도 일임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죄인들을 불러 증인으로 사용하실 뿐입니다. 도구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빌립이 대단한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해서 빌립의 전도를 배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시몬은 그것을 돈으로 사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일하심을 돈으로 사유화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얼마전에 류광수씨를 중심으로 해서 다락방 전도훈련을 받은 기존의 교단에 속한 목회자들이 뭉쳐서 또 하나의 교단을 세웠습니다. 본래 속해 있던 교단에서는 하도 이단이라고 떠들어대니까 견디지 못해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하나의 교단을 만들어서 다락방 전도의 방법을 마음껏 실시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술사 시몬이 행했던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전도 방법이라는 마술적인 힘으로 사람을 모아서 이전에 백만원으로 하던 것을 이제는 천만원으로 교회사업하자는 심보입니다.
전도에 방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전도 방법이 있고, 바울의 전도방법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류광수씨의 전도 방법이 따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도 자체가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거기에 어떻게 하니까 많은 사람을 예배당으로 끌고 나올 수 있더라는 식의 인간적인 전도방법의 추가는 주님의 전도를 방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한 사람의 전도 방법이 효과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중심으로 교단을 만들고 ‘다락방 전도’라는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주님의 일하심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우리는 빌립의 전도를 배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자신의 권위로 일하시는 그 권위에, 그 일하심에 순종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에 대한 순종을 바치는 것이지 우리의 기능, 재능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남을 죽여서라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방법입니다. 세상에서는 할 수만 있으면 자기를 최대한으로 드러내고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자기를 내세우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이란 자신을 죽여서 주님을 증거하고자 하는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는 본 적도 없고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그런 방식으로 주님은 자신의 복음을 증거해 나가십니다. 이것을 믿고 그분의 일하심에 맡겨진 자가 성도요 그리스도인입니다(1997.9.21).
사도행전 열 세 번째 강론
주의 영에 이끌림
사도행전 8:26-40
“26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아사야의 글을 읽더라 29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31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35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37(없음) 38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39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야고보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약 2:1-5).
성경은 언제나 인간의 죄를 지적하고 공격하면서 복음의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세상과는 반대적인 상황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성경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경을 통해서도 주님을 볼 수 없고, 가능성이 있고 꿈이 있는 자기 자신만 보이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항상 성경에서 지적하는 인간의 죄성이 어떤 것으로 드러나는지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여기 야고보의 말씀에서도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즉 누구든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우리의 죄성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를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는 세상과는 전혀 반대되는 나라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즉 성경에서 인간의 죄로 지적하고 있는 것들을 그대로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로 주님의 십자가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엄청난 교인수의 부흥이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실로 야고보서에서 인간의 죄로 지적하고 있는 말씀 그대로의 모습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큰 교회가 대접받고, 많은 사람을 끌어 모은 목회자를 능력있는 목회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교회들은 여기에 다 동의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기독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을 놓고 십년, 이 십년을 목회하더라도 복음 그 순수함을 놓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전하려고 발버둥치는 목회자나 또한 그런 교회를 만족하면서 예수님만 믿는 신자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할 수만 있으면 외적으로 폼나는 교회를 만들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신앙의 초점은 늘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우리의 신앙, 혹은 기독교가 왜 이렇게 열심이 없는가, 뜨거움이 없이 냉랭한가 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하고 있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이기도 합니다. 평범하게 사는 것에 대해 못견뎌 하듯이 신앙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를 해도 좀 열정적으로 하고, 기도를 해도 좀 뜨겁고 화끈하게 해야 한다는 등의 생각을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습니다. 좀 두드러진 신앙 생활,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온 교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그런 교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이것이 많은 신자들에게 고민거리요 숙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는 이제까지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만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흉내내는 법만 배웠습니다. 전도흉내, 기도흉내, 예배흉내, 심지어는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조차도 흉내만 내었지 정작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외면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되는 빌립이라는 사람은 결코 외적으로 무엇을 이룬다는 차원으로 주님의 일에 부름받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은 그 자신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비전이나 계획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핍박이 심해졌기에 쫓겨서 사마리아로 내려와 있다가 복음을 전했는데 사람들이 믿게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거기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26절에 의하면 난데없이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어떤 곳인가 하면 “그 길은 광야라”고 했습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27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뿐만 아니라 가사로 가는 광야의 노정까지 전적으로 주의 성령에 이끌려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계획은 필요없다. 우리도 빌립처럼 성령의 능력을 받아 전도하자!’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주의 성령께서 빌립을 붙잡으니 빌립이 꼼짝없이 주의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더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식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하게 주님께서 주도적으로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적인 계획이나 경험, 지식이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계획도 잡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계획이 필요하다면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자기가 계획한대로 되어야 한다는 고집을 부릴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웠다 하더라도 그것을 무시하고 일하시는 주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계획이 전혀 주님의 일을 이룰 수 없다는 전제에서 세워지는 계획이어야 합니다. 빌립의 입장에서 볼 때에 사마리아 전도는 큰 경험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께서 빌립을 광야의 길로 몰아내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빌립의 전도는 사마리아에서 받는 대접, 나타낸 능력, 명성 이런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코 그 다음 사역에 연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도의 경력이 붙어서 그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전도는 경력도 아니고 내게 축적되는 방법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경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주도하심에 의해 믿음으로 되어지는 일입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전도의 결과로 말미암아 이제 더 넓은 지역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해서 좀더 큰 개척교회를 하자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광야로 보내시는 주님의 명령은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사역은 주님께서 빌립을 도구로 붙잡으시고 쓰시는 주님의 사역입니다.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행해진 전도 그것은 주의 영에 의해 주도된 일입니다. 앞의 사역과 뒤의 사역은 단절된 사역이었습니다. 앞의 전도행사가 경험이 되어 그 다음의 전도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늘 새로운 시작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영원이란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초월적인 상태입니다. 그러기에 영생을 지루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루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날마다의 새로움이기 때문에 지루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늘 새롭습니다. 이 땅에서는 새로운 것이 있을 수가 없지만 하나님 나라는 늘 새로운 것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일은 과거의 어떤 일이 경험으로 쌓여서 그것이 도움이 되고 그것의 연장으로 더 나아지고 더 발전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39절). 서로 갈 길을 갔습니다.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갔습니다. 이 사람은 에디오피아의 큰 권세를 가진 사람이니까 이 사람 붙잡고 개척 교회하면 쉽게 성공할 수 있겠구나 내지는 에디오피아에 따라가면 궁궐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 역시 나에게 복음을 알게 해준 사람이기 때문에 그와 늘 함께 있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빌립과 함께 큰 교회를 한 번 해 보려고 제안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복음 전함! 그리고 결별이었습니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났을 때에 그는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읽는 성경 구절을 가지고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35절). 사지로 끌려가는 어린 양의 모습을 묘사한 그 내용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대속의 죽음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빌립은 이 말씀을 가지고 오직 예수님만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만을 전하는 빌립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지금 빌립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십자가의 주님과 같이 오직 주의 영에 의해 끌려갈 뿐입니다. 거기에 인간의 전도경험, 축적된 힘, 완벽한 플랜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전하는 그 내용과 같이 예수님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자가 예수 믿는 자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이 나오면 특별하게 대우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장로를 뽑을 때 될 수 있으면 돈이 많은 사람을 세우려고 합니다. 외모를 보니까 교회에 도움이 되고 쓸만하기 때문에 이용하고자 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주의 영에 이끌림을 받는 신자, 교회는 예수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그대로 가고 있는 모습으로 주님을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경험이 부족해서, 물질이 없기 때문에, 교인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큰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것이 토대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큰 일은 주님 자신이 친히 하십니다. 주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바르게 가르치고 증거하고 있는가를 늘 점검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1997.9.28).
사도행전 열 네 번째 강론
핍박받는 예수
사도행전 9:1-19
“1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10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12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5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우리는 교회를 말할 때 자주 ‘주님의 몸 된 교회’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성경적 원리에 의해서 지금 한국 교회에서 생각하고, 행해지고 있는 것이 주님의 몸과 그 몸의 정신에 맞는 것인가 하는 측면에서 이야기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교회 개혁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의식 있는 젊은이들은 누구나 다 교회 개혁에 대한 고민과 걱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교회 개혁에 대한 논의들의 대부분은 참신한 교회상에 대한 이상과 비전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논의가 나오게 된 배경들을 보면 거의가 다 자신이 기존의 교회에서 당한 억울함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는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성경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교회를 옹호한다고 해서 다 주를 위해 사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반대로 교회를 비판한다고 해서 다 주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가 관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맞는 것인가 하는 문제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고 그분의 소유로서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단성 여부는 그 교회가 어떤 것을 믿고 주장하느냐 하는 문제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믿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 그분이 지신 십자가, 거기서 흘린 피가 오직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으로 믿고 주장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교회를 믿고 교회만을 이야기하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분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교회여야 합니다. 그 교회는 주님의 몸과 동일시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교회가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8:3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라고 했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핍박한데 대하여 예수님은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4절). 사울이 핍박한 대상은 그냥 헛된 것을 믿고 추구하는 종교인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었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주님의 몸이라는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관점에서 이단적인 종교 모임을 해체시키려고 다메섹까지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단적인 모임을 해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전에 자신을 비롯한 유대교의 신봉자들이 죽인 그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사울을 가로막고 서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5절). 사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대단히 난처한 상황이었고 황당한 순간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자신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동조했고 뿐만 아니라 스데반을 죽이는 일을 주도해 왔는데 그것이 일순간 무너지면서 혼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모독하는 예수를 십자가에 사형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지금 행하고 있는 일이 이단적인 종교 모임을 없애려고 하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이것이 사울의 모습이었습니다. 오직 자기의 종교적 믿음과 열심이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님에 대한 막연한 열심과 충성심이 주님을 공격하고 주님을 괴롭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사울 뿐만 아니라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께서 아니니아에게 말씀하시기를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12절). 그냥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울이 환상으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되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미 각본은 다 짜여졌고 주님이 친히 이 일을 주도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옛날에 가졌던 여전한 생각으로 사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13-14절). 결국 아니니아라고 하는 사람도 주님께 도움이 되기는커녕 주님을 성가시게 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15-16절)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될 일도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니니아가 책임져야 할 일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언약하신 대로 부지런히 자기 백성들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비록 사울과 같이 이렇게 주님에 대한 대단한 핍박자라 할지라도 복음 앞에 굴복시켜 나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에 대한 대적자에 대하여 힘없이 보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뜻이 있다면 그 사람을 불러서 자신의 증인이 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모든 인간들이 다 주님의 대적자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자였습니다. 주님의 일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늘 방해자가 되고 있고 원수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십자가의 정신과는 반대로 살려고 하는 자들이 우리들입니다. 그런 자를 주님께서 성령 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주님의 일에 동참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주님께서 친히 하시고 계십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일하심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설쳐야 주님의 일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왜 별의별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하고 갖가지 전도 방법을 다 동원해야 합니까? 왜 많은 일거리들을 만들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일급 장애인 내지는 식물인간과 같이 만들어서 한쪽 구석에 고이 모셔두려고 합니다. 이런 우리의 생각이나 행위로 인해 주님은 핍박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알아서 일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이 바로 나의, 우리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은, 나는 종이기에 주인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그분이 살아 계신다는 것과 그분이 자신의 언약대로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울에게는 주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부르셨기 때문에 사울이 큰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우리는 넘겨짚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성경의 의도와는 다른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로서 한 일이 큰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울과 같은 핍박자를 복음 앞에 굴복시키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일이 큰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증인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집사 직분 주지 않는다고 교회 일 못하겠다는 소리가 어떻게 나올 수 있습니까? 장로, 권사로 세움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 보기에 창피해서 교회에 안나오겠다는 말이 할 수 있는 말입니까? 직분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라고 했습니다. 주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저주 속에 있는 자입니다.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고, 교회를 얼마나 개혁했는가 하는 것을 주님은 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 우리 눈에 보이는 교회를 먼저 생각하다 보니 주님을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조용히 교회를 떠나시면 됩니다. 그리고 언제가 주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실 때에 교회에 나오시면 됩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때에 자신 있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자기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요 21:15-17). 자기 자신을 믿을 자로 내세우는 것은 늘 실패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쓰임 받을 것인가 하는 것으로 고민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주님의 소관입니다. 주께서 쓰실 때에 다만 우리는 “무익한 종”(눅 17:10)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쓰신다면 쓰시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히 여길 뿐입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조건들을 믿을게 아니라 주님을 믿고 그분의 일하심에 맡겨진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을 대적하지 않고 주님 말씀대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게 되었다면 무조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1997.10.5).
사도행전 열 다섯 번째 강론
그리스도의 공동체
사도행전 9:20-31
“20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23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26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28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우리는 ‘바울 사도’에 대하여 떨쳐버리지 못하는 생각은, 그는 위대한 사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로마까지 복음을 전했던 사람이요, 신약 성경 중에서 13권이나 기록할 수 있었던 사람으로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의 업적만 생각했지 실제로 그가 당한 고난, 그가 진정으로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바울 사도의 업적을 기록해 놓고 우리로 하여금 바울과 같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사울과 같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주님을 핍박하는 못난 인간일지라도 주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 말씀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싶은 것입니다.
결국 사울을 굴복시키고 복음을 전하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바울과 같이 되자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울을 굴복시켜서 바울 되게 하시는 주님이 더 위대하고 그분이 더 크게 보여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분이 나타내신 복음만이 죄인들을 주님의 주님 되심 앞에 굴복하게 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드러내신 복음 앞에 굴복된 적도 없고 항복하지도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늘 다른 문제를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소위 말해서 ‘말씀만’으로는 목회가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만 가지고서는 (큰)교회를 이룰 수가 없다고 여깁니다. 우리 교회가 원하는 웅장한 성전건축(?)이 무리 없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증명되어야 한다고 주님을 향해 협박하고 있습니다.
내게 있는 고질병이 해결되어야 말씀을 믿겠다고 합니다. 이번 승진에 자신이 누락되지 않아야 열심히 교회 나오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내 자녀의 앞 길이 탄탄대로라는 것이 보장된다면 그때 가서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도무지 십자가 앞에 굴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온통 자기 자신이 이 땅에서 살아남는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란 우리 자신이 살아남는 일에 기반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십자가는 우리를 세상적으로 망하게 하고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을 부르신 주님은 결코 사울을 이 땅에서 훌륭한 위인으로 만들고자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앞에 굴복된 한 죄인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울 역시 그의 남은 생애가 물질의 복을 받고 호의호식하는 생활이 아니었다는 것을 부르심을 받은 시작부터 보여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사울을 부르신 것에 대하여 9:15,16에서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주님이 사울을 무엇 때문에 택하셨습니까?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 택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전하는 것을 무엇으로 나타내시느냐 하면 주님을 위해 해를 받는 것으로, 즉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셨던 그 모습 그대로 십자가의 길, 고난과 죽음의 길로 가는 것만이 주님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가 욕먹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사울은 이제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믿게 되었으니 앞으로의 삶은 주님이 축복해 주실 것이니까 어떤 사업을 하고 어떤 일을 해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사울은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 했습니다(20절). 자신에 대하여 오해하고 경계하는 일이 있어도 그 일 때문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였습니다(22절).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자들 앞에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전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29절).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누구나 다 목회자가 되어서 주의 일을 해야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만을 위해 살면서 예수님만을 전하는 목적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의 중심이나 목표가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결코 사울은 예수님을 전하면서도 교회를 위하여 크게 보탬이 되었다거나 유익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전부 도망다닌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전하니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밤에 광주리를 타고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오니까 먼저 믿은 제자들이 그를 만나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통해 간신히 예루살렘의 제자들과 인사를 하고 예루살렘에 거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예수의 이름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또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울은 다시 자기 고향인 다소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은 이후의 사울의 삶이었습니다.
여기에 성경은 아주 중요한 말씀으로 한 사건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31절에 보면,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하여”는 어떤 상태였습니까? 갖가지 전도방법과 제자훈련이 실시된 때가 아니었습니다. 화려한 예배당이 완공된 때도 아니었습니다. 선교 센타가 건립되어 수많은 선교사가 준비된 때도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없애고자 했던 사울이 이제 겨우 말씀에 굴복되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동시에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이 득세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있었습니다. 즉 핍박할 자는 여전히 주님을 핍박하고 있고 주님의 부름을 받은 자, 예수를 믿는 자는 그대로 복음을 전하는 그런 상태로 교회는 평안하고 든든히 서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갈 수 있었습니까? 한 마디로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31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주님만을 경외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위로 때문에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든든히 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많이 모을 수 있는 능력있는(?) 목회자가 부임해 와야 교회가 든든히 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반대하는 자라 할지라도 포용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목회자가 와야 교회가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각종 프로그램이 풍성해야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를 세우고 많은 직분자를 세울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주장하셔서 예수님만으로 만족하고 예수님만 전하는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갈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으로 보여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다른 분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사울에게 핍박받으셨던 그 예수님입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행 8:17)고 했습니다.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 그분이 나를 너에게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사울이 만난 예수가 다른 예수가 아니라 같은 예수라는 뜻입니다. 사울에게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물으신 그 예수님이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늘 같은 예수를 말씀 안에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일거리를 많이 만들어서 목회자에 대하여 불만이 토해지지 않도록 하는 모임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를 놓고 회개하는 모임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예수님만 자랑하고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의 몸만 남기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니라”(엡 4:3-12)고 했습니다.
‘하나가 되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들이 아니라 이미 성령께서 주님의 십자가 안에 하나로 만드신 것을 아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드러내고 그 몸을 세우는 일에 하나로 만드신 것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인들의 자기 자랑이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오직 머리되신 한 분 그리스도 그분의 의만 공개되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가 되도록 힘써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 주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믿고 그분만을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2-24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새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늘의 일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여기서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만이 새로운 것입니다. 따라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새 사람을 입기 위해 노력하라는 뜻으로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지향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만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만을 지향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만을 전하고 그분이 지신 십자가를 지는 죽음을 보여준다면 그 동일하신 예수님 앞에 같이 굴복하고 주님만을 높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분만 존귀하게 여기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너만 잘났느냐?’라고 질타합니다. 교회에서 서로 시기하고 경쟁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같은 예수님, 같은 성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주님을 섬기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직 성경대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는 다른 예수를 믿는 자들에 의해 소외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며 죽임을 당하는 자가 신자입니다. 고난을 기쁨으로 삼고 그리스도의 몸만 남기도록 세상 것을 날마다 제거하는 자들의 모임이 그리스도의 공동체요 교회입니다(1997.10.12).
사도행전 열 여섯 번째 강론
종교와 신앙
사도행전 10:1-16
“1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4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7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9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더라 10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1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13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14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15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주님의 요구보다 나의 요구 때문에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직 그 사람은 신앙 생활이 아니라 종교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과 종교란 다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봅니다. 해도 별 관계없고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취미 생활과 같은 정도로 취급합니다. 신앙을 막연히 자기 마음의 위안을 찾기 위해 절간을 찾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신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진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이런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종교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 종교의 본질은 모두 다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기독교는 많은 종교 중의 하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생명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생명입니다. 취미 생활 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문제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을 주장하시는 분의 소관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은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주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주님에 의해 주장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성경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보자기 안에는 율법의 말씀에 따라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각종 동물들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말씀하시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13절). 그러나 베드로는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언제든지 먹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그릇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베드로가 이 환상에 대하여 고민할 때에 가이사랴에서 고넬료가 보내온 자들이 당도하였습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고넬료의 집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에게 보여준 환상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본문의 내용 역시 우리도 환상을 보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왜 이렇게 일하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다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베드로가 없으면 주님의 일이 안되기 때문에 여기 이쯤에서 베드로를 환상으로 설득시켜야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왜 이렇게 일하실까? 기왕이면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서 헷갈리게 하지 말고 직접 나타나셔서 다 말씀하시고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보내시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조금은 복잡하게 일하십니다.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고 고넬료로 하여금 사람을 베드로에게 보내서 모셔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죄성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먹으라고 하시는 음식을 베드로가 거부한 것은 막연한 자기 고집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베드로에게는 항변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서는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철저히 구분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정한 것은 만져서도 안되고 먹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율법을 따라 음식을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생각한 것처럼 부정한 것과 정한 것에 대한 개념은 율법을 가지고 구분할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이란, 단순히 더럽다 깨끗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즉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정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내 쪽에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해서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받고 안받고는 하나님 편에서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그 기준을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예수님으로 정하셨습니다.
기준이 새롭게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주어진 율법 속에 이미 언약의 실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다 드러날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것만 아니라 고넬료에게 보여주신 것으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고넬료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기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2절)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4절)고 했습니다. 그래서 욥바의 베드로 사도를 청하여 말씀을 듣도록 명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 말씀을 가지고도 오해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구제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 이 본문은 그런 의미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기도와 구제 그런 차원이 아니라 베드로를 불러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 복음을 듣지 않으면 안된다는 차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도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베드로에게 이것을 환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유대인 대 이방인’의 개념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이냐 밖이냐 하는 것으로 구분될 뿐입니다. 이것을 죄인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은 이렇게 복잡하게 일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만을 위한 신앙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아니면 주님의 일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이웃에게 희생의 모습을 보여줄 줄 아는 자여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23,24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가 자신이 잘되고 편안하게 하는 방향으로만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읽으라고 요구하시는 것도 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고,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도 우리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고 자기 신념이고 자기 종교일 뿐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생각, 행동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늘 주님을 공격하고 성가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한다고 할 때도 될 수 있으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찾기보다는 다른 것에 훨씬 더 많은 비중을 둡니다. 이를테면 환상이나 입신(흔히 천국에 갔다 오는 체험이라고들 함) 같은 신비한 체험, 또는 병 고침을 받는 기적 등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고 또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란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 자체에 기쁨과 만족을 두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삶이란 죽은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세상의 사람들이 자신은 살아있다고 하나 실제로는 죽음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일하신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 과정을 생각하시고 거기에 의미를 둔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일의 결과로 인한 영광이 누구에게로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그것은 종교입니다. 취미 생활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종교에서 신앙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 생활이란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정도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다스림 속에서 살아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지는 삶이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 역시 날마다, 매 순간순간마다 자기 자신이 죄인으로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어있는 현장을 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요구하는 종교에서 주님의 요구를 생각할 줄 아는 신앙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1997.10.19).
사도행전 열 일곱 번째 강론
중심을 보시는 주님
사도행전 10:34-48
“34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35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6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43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44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46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48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교회의 부흥을 말할 때에 대부분은 교인 수가 많은 것, 예배당을 웅장하게 지은 것, 세계 선교를 많이 하는 것, 기도나 성경 공부의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많은 것 등으로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와 동일하게 개인적인 신앙에 대해서도 외적으로 행해지는 것에 열심이 있고 윤리적으로 사람 됨됨이가 된 것 같으면 신앙이 성숙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부흥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박국 3: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대부분 이 말씀을 교회의 양적인 부흥을 이루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교회들의 주보마다 이 말씀을 표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 상황을 본다면 통탄할 노릇입니다. 본래 하박국 선지자가 기도했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악이 득세하며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를 공격하게 되는 그런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 때 얻은 결론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악이 득세하는 이스라엘을 이방인들이 와서 멸망시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당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속히 이루어지기를 구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는 것을 부흥으로 보고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뜻대로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교회가 이 말씀을 표어로 내 건다면, 우리 교회는 속히 망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지금 우리는 엄청나게 비뚤어진 성경 해석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종교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그저 좋은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고, 우리 생각으로, 내 방식대로의 기독교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필요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것을 가지고 평가할 게 아니라 성경에서 평가하는 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내 쪽에서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세상의 사고방식과는 반대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면, 베드로 설교의 시작이 의미 있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34-35절). 물론 이 말씀도 누구든지 선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받아서 구원을 행하신다는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라는 데에 있습니다.
전에 베드로 자신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여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는 것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구분하며 율법대로 살려고 했던 자였습니다. 율법대로 살았다는 것은 외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외모에 치중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고넬료에게 관심 가지신 주님에 대해서 깨닫고 보니 자기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늘 외모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외모를 보는 것이 인간입니다. 속 중심을 볼 수 있는 자라면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 주님 때문에 베드로는 이제 고넬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은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치시는” 것이었습니다(38절). 병 고치심에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위로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마귀의 다스림 하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빼내어 하나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행위에 의해서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난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베드로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율법을 지킨다는 외적인 기준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39절에 보면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라고 베드로가 말합니다. 마귀의 권세를 파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다고 폭로합니다. 이방인에게 더구나 고넬료는 이달리야 군대의 백부장입니다. 유대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나라의 군대 장교입니다. 그 앞에서 자기 민족의 어리석음과 수치스러운 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뇌리 속에는 이제 유대 나라가 자기 민족이라는 생각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주님이시기에 율법으로 외적을 것을 드러내고자 했던 유대인들이든 아니면 율법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았던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이 선택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식으로 말씀하면서 고넬료의 가정이 구원을 받는 것은, 그의 선행이 구원의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로 주님의 이런 의도 때문에 고넬료가 동원되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44-46절).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주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주신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누가 주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도행전 1:8의 말씀을 주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증인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증인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조차도 과감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율법을 지킨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이시면서까지 주님의 의도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자기 백성들을 증인으로 쓰실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으로 일하십니다. 기준은 하나님 자신이 주신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것으로 결코 첨가하거나 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일하신다는 데 대하여 의의가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외모를 보는 우리는 중심을 보시고 일하시는 주님의 일에 함부로 말할 수 없고 끼어들 수 없습니다. 그저 순종할 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47절)라고 하면서 세례를 준 것입니다. 세례를 준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인정하신 일을 베드로 자신이 거부할 수 없다는 뜻에서 세례를 준 것입니다. 우리 속에 그의 법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은(렘 31:7, 겔 36:26-27)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신자란 그분의 법을 외적으로 지킨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율법을 지키려고 힘쓰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갈 6:2)을 마음에 두고 사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갈라디아서의 문맥에서 볼 때 성령께서 날마다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말합니다(갈 5:24).
그러므로 최고의 율법은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 앞에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귀한 자나 천한 자의 구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배운 자나 못배운 자의 차이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자기의 죄인됨과 주님의 의만 보일 뿐입니다.
천국은 자기의 잘남을 주장하는 나라가 아니라 자기의 못남을 이야기하면서 오직 주님의 은혜에 의해 왔음을 고백하고 어린 양되신 주님께만 영광이 돌려지는 나라입니다. 천국을 보여주어야 하는 교회는, 바로 이러한 천국의 모습을 앞당겨서 보여줄 수 있는 교회여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외적인 면을 보시고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선택하시고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외형적인 것을 갖추었다고 해서 주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한국 교회는 주님이 원하시지도 않는 온갖 잡동사니를 다 모아놓고 양적인 부흥을 주님이 기뻐하신다고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전라도, 경상도파가 생겼습니다. 본의든 아니든 전도회, 권사회, 집사회 등으로 나누어져 당파를 형성하고 조직을 구성해 직분을 나눠먹기 식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자기네들끼리 마음맞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런 모임이 왜 있어야 합니까?
교회는 우리의 구미에 맞는 모임으로 나눌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효율적인 일을 위해 여러 기관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교회는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내는 일을 하는 모임이어야 합니다(1997.10.26).
사도행전 열 여덟 번째 강론
그리스도인
사도행전 11:15-26
“15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19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24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25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얼마 전 신문에 요즘 학부모들이 초등학교 자녀들에게 ‘설소대(혀밑과 아래 잇몸 사이를 연결시켜준 부위) 절개수술’을 많이 행하고 있다는 것이 보도되었습니다. 그 수술은 혀가 짧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술입니다. 그런데 멀쩡한 아이들에게 영어 발음을 좋게 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조기교육, 영재교육 등 우리 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대단하다 못해 너무 지나칠 정도입니다.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우리 나라만한 데도 없다고 그럽니다. 못살았던 우리의 과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대(代)에서는 못배워서 남의 밑에서 고생하며 살았으니 다음 세대에게는 그 설움을 당하지 말게 하자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한(恨)을 자녀를 통해 풀어보자는 개인적인 욕심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자녀라고 하는 것도 나의 욕심을 이루는 대리 만족의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국 인간들에게 있어서 부모, 형제, 친척이라는 관계는 인간적인 핏줄을 이용해서 자기의 야망을 이루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는 그러한 부모들의 교육열을 부추기며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입시생들을 위해 기도회를 열어주는 것입니다. 현수막을 내걸고 우리 교회에는 이런 상품이 준비되어 있으니 우리 교회로 와 달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대학에 넣어주고 취업난이 어려운 이 때에 좋은 직장에 취직시켜주는 하나님이라야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하나님으로 자랑하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입니다. 그런 것은 불교에서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자녀들만 대학가는 것이 아니라 절에서 불공드리는 자녀들도 대학에 갑니다. 그러니 교회나 절간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참으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기독교의 모습인지 한국 교회를 보면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천국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고 현세의 복에 대해서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하는 것으로 목사들이 먼저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천국과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중간단계가 아닙니다. 이 땅에 존재하면서 천국을 보여주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분명히 바르게 증거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핏줄을 끊어버리는 자기 부정을 하도록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에 성령받은 자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 유대 민족만 상대하시는 하나님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오해 때문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또한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을 주시되 표면적으로 알 수 있도록 주신 것입니다. 이제 적어도 베드로에게만큼은 분명해졌습니다. 주님이 주도적으로 일하시는 것에 대해서 자신은 뒤따라 가서 증거하는 증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것으로 비난하는 할례자들 앞에서 이 분명한 주님의 일하심을 베드로는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낱낱이 말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15절). 동일하신 성령께서 동일하게 역사하셨기 때문에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서 된 일이라면, 인간들이 구제하거나 기도한 대가로 구원을 받았다는 모든 가능성을 배제한 차원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신기하게 여깁니다. 이방인인 고넬료가 구제와 기도를 했다는 것이 신기한 게 아니라 지난 역사동안에 우리 이스라엘만 상대하시고 우리에게만 구원의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 어찌 비언약 민족인 이방인에게까지 구원의 혜택을 주시는지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이 모든 일을 계획하셨고 그분이 주도하셨다는 것이 너무도 명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잠잠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했습니다(18절). 생명얻는 회개가 이방인에게도 나타난 것입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좀더 효과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일로 인한 환난 때문에 신자들이 흩어져서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의 헬라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했는데 믿는 자들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21절) 된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26절).
주께서 성령 세례를 베푸셔서 자기 백성으로 만들어진 자라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이 그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살아 계신 주님께서 순수하게 일하신 결과로 만들어진 자들입니다. 18절 말씀의 표현대로 생명얻는 회개를 받은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받은 특징이 회개입니다. 회개란,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관계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늘 자기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27절 이하에 보면, 흉년이 들어 안디옥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우려고 헌금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9절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두고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라고 표현하면서 그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같은 성령 세례를 받은 자,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얻는 회개를 받은 자, 곧 그리스도인들이 한 형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인간의 혈통에 의해서가 아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한 형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나눈 자가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6이하에서 이미 그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무리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만나려고 밖에 섰다고 말했을 때에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고 누가 내 동생들인가? 라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었습니다. 그 뜻에 동의하고 그 뜻대로 사는 자가 한 형제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족관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새로운 관계를 맺은 자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얻는 회개를 받은 자입니다. 생명의 회개는 내 쪽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날마다 자기의 허물, 자기의 죄악된 본성이 보여지기 때문에 자기를 신뢰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신뢰할 분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했을 때에 얻을 수 있는 대가가 아닙니다. 내가 회개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가 결코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장하시는 자는 회개가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회개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와 더불어 주님의 십자가만 보인다는 것은 성령받은 증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개란 내가 억지로 할 수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보면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곤 욕심과 자기 잘남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면 회개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이란 관계입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는 내 쪽에서 맺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묶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관계에 우리 쪽에서 무엇인가를 자꾸 끼워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예배, 기도, 헌금, 봉사, 전도 등입니다. 결국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나의 예배, 나의 헌금, 나의 기도, 나의 전도, 나의 봉사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주님과의 관계 때문에 발산되는 것들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하는 일이 주님을 위하는 일인지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인지 늘 주님과의 관계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아니 우리는 늘 주님의 일에 방해만 될 뿐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정에 이끌려 어떤 일을 하면서도 주님을 위한다고 곧잘 말합니다. 내 쪽에서는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주님 편에서 보자면 그것이 주님을 모독하고 욕되게 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죄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씀 안에서 늘 회개가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회개는 반복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오늘 회개했다고 해서 내일 죄를 안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순간순간 죄를 범하기 때문에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자신의 죄인됨을 주의 성령께서 십자가에 비추어 보여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는 항상 십자가가 새롭게 보이는 회개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회개 때문에 오늘도 세상과 세상의 것을 부정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세상의 것들에는 항상 핏줄(혈통)과 연결되어 있게 마련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늘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부인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1997.11.2).
사도행전 열 아홉 번째 강론
교회의 기도
사도행전 12:1-19
“1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4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5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6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애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7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9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2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13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7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18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19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
많은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간증을 보면 어떤 특별한 기적이 일어난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다는 증거로 삼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하여 관심 가진 하나님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한 개인의 유익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그 한 개인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을 내게 유리한 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는 피해가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내 자녀를 하나님의 힘으로 진학되게 한다면 다른 한 사람은 진학하지 못하게 되는 피해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월드컵 축구가 한창 진행중인데 한국의 축구가 상대팀을 누르게 되기를 기대한다면 상대팀은 패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누구의 하나님입니까?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소원을 이루어주지 못하는 하나님은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내 중심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내 중심의 하나님은 우상입니다. 내 중심의 성령은 귀신입니다. 우리라고 하는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맺어진 공동체를 위해 일하시는 신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사탄적입니다. 성경에서 밝혀주고 있는 하나님은 상대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약속을 가지고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약속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하나님의 일하심의 중심입니다. 그러기에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란 바로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자들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한 개인이 이적을 통해 어떤 유익을 얻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계속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께서 십자가를 중심으로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이 본문에서도 야고보나 베드로가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헤롯왕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고 했습니다(1,2절). 야고보는 헤롯 왕에 의해 칼로 죽임을 당하지만 그 다음 장면에 보면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특별히 천사를 보내서 베드로를 구출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우리는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차피 감옥에서 베드로를 구출할 것 같으면 감옥에 갇히도록 내버려두실 것이 아니라 애초에 감옥에까지 가지 않도록 하셔야 되었던 것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야고보는 죽도록 내버려두시고 베드로는 옥에서 구출해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교인들의 입장과 기호에 맞는 다른 예수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욕심을 이루어주는 성경해석학으로 바뀌었습니다. 액땜을 해주기 위해 푸닥거리하는 무당으로 목사의 임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감각적이고 실제적인 이적, 자기 손에 쥐어진 결과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죽임을 당한 야고보 쪽이 낫습니까? 아니면 살려둠을 당한 베드로 쪽이 낫습니까?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베드로 쪽이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대부분의 교회에서도 은혜스럽게(?) 가르치고 있는 쪽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그런 이적적 경험을 가진 자가 존경스러운 교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낫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은 쪽은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
바울 사도는 살고 죽는 것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자기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드러나고 그분이 존귀하게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미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그 순간부터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를 베푸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느냐 주님 밖에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생입니다.
이런 점에서 야고보가 죽임을 당한 것이나 베드로가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은 어느 쪽이 유익하고 좋은가 하는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 주님의 일입니다. 야고보가 죽임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야고보가 죽도록 허락하신 것도 주님의 일이요, 베드로를 옥에서 구출하여 주시는 것도 주님의 일입니다. 야고보를 죽이시는 주님은 또한 베드로를 구출하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야고보에게 헤롯의 칼을 용납하시는 주님은 베드로에게 천사를 보내셔서라도 옥에서 놓임을 받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천사를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뜻이 있으시다면 옥에서 구출하시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이 주님의 일에 베드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6절에 보면, 베드로가 감옥에 있을 때에 살아나가기를 위해서 철야기도를 했다든지 금식을 했다든지 하는 그런 대목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체념했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저 담담한 일상적인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을 보면 지극히 수동적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도록 베드로 쪽에서 분위기를 조성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7,8절).
베드로는 곧장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왔을 때에 교회는 놀랐습니다. 즉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로데라고 하는 계집아이가 베드로가 왔음을 확인하고 대문 밖에 섰더라고 전하니까 사람들은 그 아이보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참말이라고 강조하니 그러면 그의 천사라고 말합니다(15절). 도무지 로데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다고 말씀하고 있지만(5절) 결코 베드로가 풀려나기를 기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베드로가 자기들의 기도에 의한 응답으로 오리라고 하는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교회의 기도 응답으로 풀려 날 수 있었던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기도와 상관없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일하신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교회가 기도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옥에서 구출되어야 했다면 야고보는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이유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더 귀했고 야고보는 귀하지 않았다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일에 맡겨진 역할일 뿐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일하심입니다.
주님의 일하심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란 내가 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주님이 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기도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의 손에 맡기고 주님의 일하심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결과는 24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하실 뿐입니다. 그 약속을 말씀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흥왕하여지는 그 일에 하나님의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한 개인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성취에 동원되어질 뿐입니다. 말씀 성취에 있어서 죽는 역할일 수도 있고 죽음에서 건짐받는 역할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지든지 주님의 일하심에 감사하는 것이 교회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을 기도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철야기도나 금식기도, 소위 말하는 릴레이식 기도가 있어야 교회다운 교회라는 말도 아닙니다. 교회다운 교회란, 얼마나 참신한 교회인가 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열심히 개혁하고 있는 교회인가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다운 교회란, 주님의 일하심에 맡겨진 교회입니다.
교회는 인간 누구를 의지할 수 없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부자, 지식인, 재주꾼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이 만들어 내십니다. 그런 사람을 만들어 내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홀로 하신 일이라면 죄악으로 더럽혀진 세상을 폐기처분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창조하시는 것도 하나님 홀로 하시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신 일이 바로 십자가임을 믿습니까? 그것을 믿는 자들이 교회이기에 교회는 오직 주님의 일하심에 순종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까지도 주님께 다시 돌려 드리는 자가 진짜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큰 일을 맡기셨다고 떠벌릴 일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 그분의 일하신 결과까지 이 모든 것들을 주님께 다시 반납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0-11). 지금 이런 모습을 가진 모임이 교회입니다. 지금 이런 고백을 드리는 것이 교회의 기도입니다(1997.11.9).
사도행전 스무 번째 강론
대적자
사도행전 13:1-12
“1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6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7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전도, 혹은 선교란 무엇인가? 왜 하는가?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하여 실제로 성경적인 답변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고작해야 지금 우리 나라가 선교하지 않으면 선교해야 할 나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교회 주변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더욱 많이 열심히 전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목회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선교하면 부흥하더라’는 하나의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난 전도방법이라면 그 세미나에 가서 철저히 배워와서 자기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는 그런 현상들이 한국 교회 도처에서 역력히 보이고 있습니다. 온갖 전도훈련이나 방법들을 가지고 장사하는 강사들도 한 둘이가 아닙니다. 결국 한국 교회는 부흥되도록 하기 위하여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교회가 부흥되도록 하기 위해서 선교했다는 대목은 눈을 닦고 찾아 봐도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 부흥이 동기가 되어서 선교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절에 의하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주의 계시가 임했는데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내가 시키는 일을 위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본 뜻은 ‘내가 시킨 일을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즉 앞으로 시킬 일 때문에 두 사람을 세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킨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효과적으로 주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두 사람을 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시킨 일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부흥되도록 하라고 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키우도록 부탁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초두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셨습니다. 시킨 일은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자면 우리 눈에 보이는 교회야 어찌 되든지 관심갖지 말고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주님을 보여주는 증인의 역할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바나바와 사울이 해야 하는 일은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선교 실적을 기대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몇 명 모았느냐? 예배당을 얼마나 크게 지었느냐? 그런 물량적인 숫자 놀음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보시는 것은 주님의 증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죄인인 자기 자존심을 내세우고 자기 증인인가 아니면 오직 의인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예수의 증인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증인노릇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 일을 누가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겉으로 보면 바나바와 사울이 하는 것처럼 그들을 따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들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1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라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는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이라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바나바와 사울이라는 사람을 따로 세워서 주님의 증인 역할을 하는 대표적인 상으로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일은 바나바와 사울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4절에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은 것뿐입니다. 주도권을 바나바와 사울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쥐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도권을 쥐고 계시다는 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의 역할이란 사람들의 일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 자신의 일이요, 주님 자신이 직접 일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일하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입니까?
바나바와 사울에게 맡겨진 일이 주님의 일이고 그 일을 주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라면 그 책임은 당연히 주님께서 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만약 방해자나 대적자가 나타난다면 그것 역시 주님께서 책임지고 해결하셔야 되는 일이어야 합니다. 계시적 차원에서 말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서 증인의 역할을 하게 했다는 것은 안디옥 교회 모든 교인들이 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도 증인이고 또한 증인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서 다른 지역으로 전도를 하게 하신 것은 그들을 통해 무엇인가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나바와 사울이 전도하다가 당한 일에 대하여 주님이 어떻게 하셨다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그런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원리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바보라는 마을에서 서기오 바울이라는 총독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유대인의 거짓 선지자 바예수가 바나바와 사울을 대적하여 총독이 믿지 못하게 방해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누가 보냈습니까? 성령께서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거짓 선지자가 대적한 상대는 성령님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면서(10절)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11절)고 하니 그 즉시 거짓 선지자는 소경이 되었습니다.
바울에게 이런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예수라고 하는 거짓 선지자가 누구의 대적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적자요 훼방꾼이라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3:15에 보면 하나님께서 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 아래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 상태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골자는 여자와 뱀이 원수가 되고 또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도 계속적으로 원수가 되어 궁극적으로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승리를 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 원수 관계를 만들어 가시는 주도적 역할을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내가”라고 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서로간에 원수관계가 계속적으로 유지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뱀은 죄의 권력으로 휘두르는 마귀이고, 뱀의 후손이란 마귀의 세력에 동조하고 그의 수하에서 놀아나는 자들입니다. 그 세력 전체가 누구와 원수가 되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과 원수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 편에 있는 자들을 대적자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일하신다고 하면 그 이면에는 누가 방해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 주님이 이렇게 일하셔야 됩니까? 단순히 어떤 인간이 방해자가 아닙니다. 어둠의 정사와 권세를 잡은 마귀라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일 안하시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그분이 일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100%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일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나서는 마귀의 권세가 지금도 믿는 자들을 향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1)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도 내 속의 죄성이 마귀의 편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모습으로 설 수 있다는 데 대하여 늘 놀라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1997.11.16).
사도행전 스물 한 번째 강론
약속의 아들 예수
사도행전 13:13-43
“13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19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약 사백오십 년간) 20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23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26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31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32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35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8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42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남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나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요즘 소위 말하는 신세대라고 하는 청소년들이 쉽게 내뱉는 말입니다. 이런 말들 때문에 기성세대인 어른들은 우려 섞인 목소리로 우리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기성세대들은 한결같이 하는 말이 우리는 과거에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따지고 보면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의 어른들이 어릴 때는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를 못했을 뿐입니다. 그 때는 나에게 싫어도 싫다고 직접 그리고 강하게 표현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싫어도 표현하지 않고 참는 것이 미덕이었고 예의라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청소년들과 어른들의 차이점은 직접적으로 표현하느냐 아니면 간접적으로 표현하느냐 그 차이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따지고 보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그 때가 우리의 죄악이 더 교묘하게 위장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세대와 기성세대가 누가 더 악하냐 하는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어제보다는 오늘에 와서 죄가 더 노골화되고 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죄가 날마다 더 직접적이고 다양하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과 동시에 주님의 은혜를 날마다 더 깊이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보고 또한 이런 말씀 강론을 듣는 이유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의 일행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안식일에 행한 강론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울의 첫 강론입니다. 바울은 강론의 시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16,17절).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말은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의 강론에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핵심이 유대인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23절).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32,33절).
당시 상황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론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 이방인들도 유대교에 입교하여 회당에 와 앉아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 죽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들이 믿고 있는 그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버린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의 아들로 주셨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아직 그 종교적 기득권을 가진 지도자들이 살아 있습니다. 그들에 의해 예수는 흔히 있어 왔던 선지자나 아니면 이단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아는대로 베드로는 감옥에 갔던 적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고보 사도는 순교를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인간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믿을 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냥 그저 자신을 적당히 숨겨가면서 종교 지도자들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 믿는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다고 표방해야 합니까? 하나님 믿으면 예수는 거기에 포함되어서 믿게 되어지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알고 있다면 기독교를 대단히 오해한 것입니다. 기독교란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예수를 덤으로 믿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신앙의 핵심이요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나님의 약속의 유일한 아들로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이 지신 십자가만이 약속을 성취하신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30절).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구약의 하나님께서 그 약속하신 바를 지상에서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이루셨는가를 보아야만 제대로 본 하나님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지상에 남긴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십자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된 뜻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란, 단순히 책임을 지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며 포기하고 죽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죽으신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여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가짜 하나님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사실 우리는 초대 교회의 상황, 특별히 그 당시의 정치적인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현장에 있기 때문에 쉽게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남긴 것을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고자 하는 자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세상을 버리고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관심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를 해도 내 소원이 앞세워지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내 중심의 예배입니다. 전도를 해도 교회에서의 내 명예와 관련되어 있고, 교회 봉사를 해도 내가 받고자 하는 천국 상급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무관한 것입니다.
십자가와 무관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마치 옛날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안심하고 있는 유대인들과 같은 입장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피를 믿는 자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내게 왜 필요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왜 죄를 이기는지 아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사했으니까 그것을 믿는 나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죄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란, 예수님 외에 다른 무엇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죄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모든 인간은 죄 아래에 있다, 죄의 권세에 매여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죄가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나오는 자기를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예배당에 나올 때만큼은 죄를 짓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하고 십일조 하는 자기를 사랑하고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기도하고 헌금하는 그 순간만큼은 적어도 죄와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에 이렇게 우리의 모든 것들을 죄라고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막연히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19에 보면, 그것은 귀신도 알고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십자가가 목표인 삶으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거쳐가는 어떤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목표였습니다. 삶의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인용했던 시편 2편에 의하면,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라고 말씀했습니다. 거기서 좀더 읽어 내려가 보면,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 2:12)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말씀은 남아선호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에 의해 낳으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맞추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되어야 합니다. 그분과 연합되어 그분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전도를 하지 않아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문화를 제대로 정립시키지 못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에게 입맞추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크게 건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젊은 자들이 없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기 때문에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물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니고 경제가 어려워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 수완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슬하에 제사지내 줄 아들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맞추지 않으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길에서 망한다는 것은 졸지에 당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갑자기 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말씀을 받는 자들에게 권하기를 성경 매일 3장, 주일에는 5장 읽고, 1년에 전도 한 사람 이상씩하고, 기도는 하루에 30분 이상하기 위해서 새벽기도회에는 절대 빠지지 말라는 식의 강요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43절)고 권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베푸신 은혜를 알고 그 은혜 속에 살아가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자꾸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죄를 교묘하게 위장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십자가를 기쁨과 감사함으로 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강론한 후에 그 강론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인가 하는 기대가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없었습니다. 시기로 비방하는 자들에 대하여서는 더 이상 미련이 없었습니다. 51절에 보면,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발에 티끌을 떨어 버렸다는 것은 말씀을 받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서는 이방인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48절)고 했습니다.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하십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일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는 기쁨과 성령이 충만할 수밖에 없습니다(52절). 우리의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가 커 가는 일에 기쁨이 있습니까? 교회의 재정이 튼튼해져 가는 일에 기쁨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을 자는 받고 받지 못할 자는 받지 못하는 그것이 또한 약속의 성취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사셨습니다(마 11:25-27).
내 형편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십자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의 죄를 위장하고 의로운 것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위선만 남을 뿐입니다. 십자가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기 바랍니다(1997.11.23).
사도행전 스물 두 번째 강론
능력
사도행전 14:8-18
“8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11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13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15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16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17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18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기독교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의 상징으로도 중요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은 주님을 따르려면 십자가를 져야하고 또한 그 십자가에 주님과 더불어 죽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핵심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란 단순히 책임을 지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이야기를 자주하고 많이 했습니다. 아니 매주일 십자가 이야기를 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모일 때마다 십자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것은 그만큼 고난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자주 말하는 것만큼 우리는 지금 이 십자가의 진리에 대하여 무디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해서 자식이 있는 아들에게도 출근할 때에는 부모님이 ‘차 조심하고 잘 다녀오너라’고 당부합니다. 그러면 그 말을 들은 아들은 하루종일 다니면서 ‘부모님이 차 조심하라고 했으니 항상 조심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그냥 으레 하는 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다 교통사고라도 나면 부모님이 한 말이 실감나게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대해서 너무 자주 말하기 때문에 또한 너무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현실입니다. 과거 2000여년 전에 있었던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내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오늘 내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내일 되면 또 죽어야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현실에 부딪히면 십자가는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니 애써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이익과 결부되기만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소원한 문제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급할 때에 찾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모일 때마다 고루한 창고에서 끄집어내어 다시 생각해 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정신, 십자가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5-8의 말씀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말씀은 사람은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것을 대표상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하신 일은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 마음,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그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종의 모습으로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 심정으로 사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사도행전의 핵심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은 살아서 계속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하심이 어떤 정신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 또한 사도행전에서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주의 성령께서 장악하시는 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마음으로 살더라는 것을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켜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 갔습니다. 거기서 한 앉은뱅이를 만나서 고쳐주었습니다. 여기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이 나옵니다. 8절에 보면,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통 이 구절을, 앉은뱅이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고침을 받고 구원받았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27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 사도가 다시 안디옥 교회에 와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즉 하나님 자기 백성들로서 구원받아야 할 자는 사람이 가기 전에 앞서서 이미 믿음의 문을 열어서 믿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가 확인을 했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주님 되심에 이미 굴복하게 된 것을 서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확인의 절차가 바로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앉은뱅이가 일어설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허락하신 결과로 인간들이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주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11절에 보니까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고 하면서 바나바는 쓰스(제우스/쥬피터), 바울은 허메(헤르메스/머큐리)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제사를 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바울과 바나바는 사람들을 향해 앉은뱅이를 고친 이적으로 인해 놀랄 것 하나도 없다고 알렸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행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증거하시고 나타내신 것을 죄인들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17절). 하늘에서 비를 내리시고 결실에 때맞추어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이나 앉은뱅이를 고친 이적이나 동일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나면서 앉은뱅이가 되었던 사람이 고침을 받아 일어나면 그것은 굉장한 일이고, 놀라운 일로 받아들이면서 그저 평범하게 주를 찾고 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농사지어서 열매를 얻는 것은 이적으로 보지 않고 우리가 현실적으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루어진 것을 가지고 우리는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동일한 것입니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베풀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알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산다는 것 자체가 늘 이적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주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로 가리워져 있어서 주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혜택은 모든 사람이 누리고 있지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주님의 주님 되심을 믿는 것은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주님께서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앉은뱅이는 그것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고 하는 자들은 그 믿음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여기 루스드라에서 그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고치는 이적을 통해 인간의 죄성을 고발하고 동시에 주님의 은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주신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만남으로 주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든 동일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스스로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히기만 한다면 이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열성적인 유대인들이 이고니온에서부터 여기까지 따라와서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죽은줄 알고 성 밖으로 끌어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거기서 복음 전하는 것을 마감하지 아니하고 다음날 더베로 가서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돌에 맞아도 끄떡없이 일했기 때문에 능력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런 고난과 죽음의 위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중단할 수 없었던 그 무엇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살아 계셔서 계속해서 자기 백성들을 붙잡고 일해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난과 죽음의 위협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22절)고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현실입니다. 단순히 십자가를 지자 라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면 당장 내 앞에서 나를 신처럼 모시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나를 잡아죽일 듯이 공격하고 위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자를 만나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어떻게 판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모로 역사하시면서 자기 백성들을 만들어 가시고 그들을 한 형제로 받을 수 있도록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확인하면서 삽시다. 그 모든 것들은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이든지 눈에 보이는 특별한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종교적 틀을 삼고 자신의 경건의 요소로 만들고자 하는 죄성이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신앙이란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믿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당을 믿고, 교회 조직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책이나 십자가가 귀신을 물리칠 수 있는 부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교회란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고 할 때에는 무엇을 한다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니까 주님을 머리로 모시고, 주님과 더불어 참신한 모임을 만들어 조직을 이루고 큰 일을 한 번 해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면 주님의 지체된 자로 몸에 붙어 있는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능력입니다. 몸에 붙어 있는 지체가 새삼스럽게 몸을 위해서 무엇을 하자 라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가 어디에 붙어 있고, 어디에 속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상태에 어떤 영역에 담겨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께 속해 있고 주님께 붙잡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조직)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 속해 있어서 주님의 몸, 즉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새롭게 교회로 모인다고 해서 교회가 아닌 것이 교회가 되는 것 아닙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얻은 자가 교회입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으로 사는 자는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자입니다.
타협이나 회피는 십자가의 정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 그 십자가가 정신으로 좌절하지 아니하고 복음만을 위해 살아지는 삶이 능력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이적이요 주님의 능력입니다. 이런 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를 장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1997.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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