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대로를 닦자 (눅 3:1-6)
이 시간에 “마음의 대로를 닦자”라는 제목입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성을 쌓는 나라는 후퇴하지만 길을 닦는 나라는 발전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발전의 원동력도 바로 경부고속도로를 시작으로 도로와 항만과 공항을 잘 정비했을 때 왔다고들 말합니다. 지금도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다운 강이 없는 상황에서 장차 사막화 현상 시 물 부족을 대비하고 물류비용을 줄이기 위한 운하라든가 여러 가지 방안들이 다각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오시는 길을 닦는 것은 삶의 행복과 장래를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시84:5에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하였습니다. 고대 시대에 왕이 한 도시를 방문할 때는 그 앞에 사자가 먼저 가서 그 방문을 알리면 시민들이 나와서 도로의 패인 부분을 메우고 세마포를 깔면서 왕이 오는 길을 예비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주님을 예비하려면 마음의 대로를 잘 닦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그 인생 속에 가장 아름다운 영생과 천국을 안고 찾아오셔서 넘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주님 오시는 길을 닦아야 할까요?
본문 5절에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것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그랬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회개인데 이 구절에서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방법을 네 가지로 알려줍니다.
1. 마음의 골짜기를 모두 메워야 합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이 골짜기는 산골짜기가 아닙니다. 세례요한이 포크레인으로 토목공사했다는 말 없어요. 마음의 골짜기입니다. 이 마음의 골짜기가 무엇일까요?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음부와 낙원 사이의 큰 구렁이 나옵니다.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6) 이처럼 골짜기가 깊어서 이편에서 저편으로 갈 수 없는 큰 구렁이 있습니다.
그 구렁이 무엇일까요? 불신의 구렁입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어떤 누구라도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구원 받을 수 없어요. 예수 없으면 지옥 갑니다. 그리고 그 구렁은 커서 한 번 지옥 가면 천국으로 건너 올 수 없습니다. 오직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을 때만이 마음에 구렁은 사라지고 예수님께서 찾아오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개가 아니라 모든 골짜기라 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고 해도 주님의 교훈을 구체적으로 믿지 못한다면 아직도 골짜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성경 보면서 온전히 믿음에 서서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울을 보면서 온전히 말씀의 긍정으로만 가득찬 표정과 말 등 믿음의 훈련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히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의심의 골자기를 다 메워야 천국의 풍성한 은혜가 임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는 것도 골짜기입니다. 불신과 의심과 태만의 큰 골짜기 작은 골짜기 온전히 메우시기 바랍니다.
2. 마음의 높은 산들도 낮아져야 합니다.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성경에서 산은 어찌할 수 없는 큰 문제라든가 혹은 상상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는 교만을 말할 때도 쓰였습니다. 시68:16에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하였습니다.
이 교만의 높은 산들이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와 왕으로 삼았으면 그 앞에 복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면서도 내 뜻을 주장한다면 그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고 진노하시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런데 교만이란 얼마나 교묘한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알기 쉽게 겸손하지 않는 것이 교만이라고 가르칩니다. 혹은 순종이 겸손이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숨은 교만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만이 낳는 두 자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월감이고 또 하나는 열등감입니다. 우월감도 교만이지만 열등감도 그 바탕은 교만입니다. 주님 앞에서라면 과거의 경력도 버려야 합니다. 공회 의원 니고데모가 밤에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왜 밤에 찾아왔을까요? 자기의 이력과 남들의 이목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흔히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자로 프랜시스(St. Francis,1181-1226)를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 소유를 모두 나눠주고 가난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장 부족한 자라는 겸손을 가졌습니다. 세례 요한도 고귀한 대제사장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빈들에서 낙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습니다. 낙타털옷은 왕궁의 부드러운 옷과는 달리 무겁고 볼품없으며 일생을 입고도 떨어지지 않는 옷입니다. 불로 쇠를 다루는 장인들이나 입었던 작업복입니다. 메뚜기는 일반적으로 먹는 정상적인 음식이랄 수도 없고 석청 역시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마는 음식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위치를 아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지난 7월 19일 가족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가다 경기도 가평에 추락한 통일교 문선명 교주를 두고 항간에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자칭 예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비행기에서 떨어졌느냐? 혹은 예수보다 낫다고 자처하고 참 가정을 이루어준다면서 자녀들 중에는 왜 마약중독자 등 문제가 많은가? 혹은 수천억을 들여 궁궐을 짓고 일반 헬기의 50배나 되는 430억 원이 넘는 대통령 전용기와 동종인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온갖 호화 생활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논란이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이라면 가난한 신도들의 돈을 취해 개인의 사치생활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열매로서 그 나무를 아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한없는 천국의 복락을 안고 찾아오십니다.
3. 마음의 굽은 것이 곧아져야 합니다.
“굽은 것이 곧아지고” 이 굽은 것은 마음의 굽은 것을 가리킵니다. 굽었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말하면 마음이 병들었다는 뜻입니다. 자기 편협한 주관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굽으면 무엇이든지 삐뚤어지게 생각합니다. 참으로 보기 민망하고 함께 하기 괴로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일종의 마음의 장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굽은 것은 주의 뜻대로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죄악의 길, 비 진리의 길로 가는 자입니다. 그래서 시125:5에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했습니다.
말세가 다가오면 올수록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성전에 서게 됩니다(막13:14). 이처럼 마음의 성전에 탐욕의 우상이 서면 그 인생도 말세입니다. 영적으로 죽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없어요. 사단이 다가오고 온갖 환난이 회오리칩니다. 예수를 붙들면 행복이 오지만 세상을 붙들면 화가 와요. 예수를 붙들면 신비가 열리지만 신비만 붙잡고 좇으면 악령이 찾아와요. 마귀는 나를 통해서 금방 민족과 세계를 복음화시켜 줄 것처럼 붕뜨게 하여 속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에서 따로 있어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평안한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4. 거친 마음도 부드럽게 되어야 합니다.
“험한 것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요즘 우리나라 곳곳마다 도로정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험한 산골짜기에도 다리를 놓고 터널을 뚫어 시원하게 달리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전주에서 진안 가는 그 험한 길도 시원하게 잘 뚫려 있습니다. 그래서 진안 마이산을 가려면 새 길로 가면 됩니다. 앞으로 2025년까지 계속하여 도로망을 신설하고 그 후부터는 관리만한다고 합니다. 그 때가 되면 어느 산간벽촌도 자동차가 닿을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도 험한 곳이 평탄해야 합니다. 이 험한 것이 무엇일까요? 정서적 변화를 가리킵니다. 불만 불평 침묵 미움 시기 질투가 아니라 항상 주님을 기억하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예배하며 감사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셔놓고 얼마나 실례를 범하는지 모릅니다. 롬1:21과 같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는 안 됩니다. 세리 삭개오는 예수님을 모신 후에 주님의 뜻대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사람에게도 거칠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온전히 함께 하십니다. 내 이웃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히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사람의 뇌는 주어를 분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누가 밉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우리의 뇌는 미워할 때 나오는 독액 호르몬을 분비하여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죽입니다. 그래서 남을 미워하면 결국 자신을 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성령 충만하고 날마다 기뻐하면 뇌는 온갖 좋은 호르몬을 생산하여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며 건강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거친 마음을 고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천국의 복락을 가득히 안으시고 우리에게 오셨고 또 더 다가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주의 길을 예비하지 않으면 주님의 임재와 그 축복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세례 요한의 외침처럼 진실로 회개하여 믿음으로 불신의 골짜기를 메우고, 겸손으로 교만의 산을 낮추고, 순종으로 굽은 부분을 펴고, 사랑으로 마음의 거친 부분을 부드럽게 하여 천국의 온갖 복을 안고 임하시는 우리 주님의 복락을 충만하게 누리시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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