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구비할 세 가지 요건 (눅 14:25-33)
[요약] 주님은 따르는 무리에게 진정한 자세가 없이는 제자가 될 수 없음을 말씀하셨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먼저 주님을 사랑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주님을 닮을 수가 있다. 다음은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내 주장과 내 개성과 내 스타일을 고집하면서 주님을 닮을 수 없다. 그리고 주님을 본 받는 제자의 길을 충분히 이해하고 어떤 고난도 각오하는 중대결단을 해야 한다. 그 길은 마냥 좋아 보이는 보랏빛은 아니다. 우리는 개념 없는 허다한 무리인가? 아니면 예수와 함께 살고 죽기로 각오한 참 제자인가?
이 시간에 “제자가 구비할 세 가지 요건"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성도는 넓은 의미에서 모두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을 믿을 뿐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삶을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이 길은 생명길이요 주님이 함께 하시는 길이요 은혜 충만한 길이며 영원한 영광도 함께 받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반드시 제자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교인입니다. 이 속에는 믿음의 사람도 있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그저 육신적인 이유 때문에 교회 출석하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신자가 있습니다.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으로 영육 간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제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 믿어 구원 받음은 물론이고 충성된 마음으로 말씀과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온전히 닮아가고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며 또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오늘 본문을 보니까 주님을 따르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 허다한 무리 중에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안타깝게도 참된 제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돌아보시면서 참된 제자의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 약 세 번에 나오는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한 자세 없이는 참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동안 주님의 참 제자가 되는데 실패했다면 왜 그랬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습니까?
1.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26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그랬습니다. 성경은 미워하지 말라 하셨는데 왜 이런 교훈일까요? 본문의 정확한 의미는 사랑의 우선순위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주님을 가장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을 주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가 되려고 결심해도 작심사흘이 되고 마는 것은 이 사랑의 결핍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내 몸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에 미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루 24시간 이 사랑의 에너지로 충만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이 축구황제 펠레에게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을 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을 차고 있을 때도 공을 차는 시간이고요, 공을 차지 않을 때도 축구에 대해 이야기하고요, 축구에 대해 이야기를 안 할 때는 축구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꿈도 축구에 대한 꿈만 꿉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오로지 축구에 대해서만 24시간을 생각하며 지내니까 유명한 선수가 된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제자의 첫째가는 자격은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기업체의 사장이라면 어떤 사람을 뽑으실까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이 입사시험에 응시했다면 누가 합격했을까요? 열두 명의 성격을 분석해 보면 베드로는 분명 성격이 급하고 덤벙거려서 떨어졌을 것입니다. 안드레도 너무 내성적이고 추진력이 부족해서 탈락했을 것입니다. 또 야고보와 요한은 우레의 아들이라 했던 것을 보면 성격이 불같아서 떨어졌을 것입니다. 더욱이 어머니의 치마 바람에서 자라서 자립심이나 의사결정에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도마는 매사에 상대방을 의심하는 것이 많아 떨어졌을 것입니다. 세리 마태도 과거에 로마의 앞잡이로 세금 거두는 일을 했으니 이력서 문제에서 카트를 당했을 것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혁명가적인 기질이 있어 노조의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 탈락시켰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합격할 것 같습니까? 제자들 중 최적격자는 아마도 가룟 유다일 것입니다. 그는 학식과 경험을 겸비한 인물이고 매사에 현실적으로 잘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고학력에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생애를 바친 애국자입니다. 그러니 최고 점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치명적인 약점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재능이 출중해도 회사의 기밀을 밖으로 빼돌려 팔아먹을 위험한 인물입니다. 이처럼 그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이 아니라 몇 푼의 돈 때문에 스승을 팔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였던 것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엉겁결에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실 때 그는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요한도 목숨 걸고 주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갔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제자 되게 합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천 원짜리 지폐가 만 원짜리 지폐를 만나 물었답니다. “어이~ 만 원짜리! 너 그동안 어디를 돌아 다녔냐?” 그러자 만 원짜리 지폐가 대답했습니다. “응, 카지노도 갔었고 유람선 여행을 갔다가 야구게임에도 몇 번 갔었지. 천 원짜리! 넌 요즘 어떻게 지냈니?” 그러자 천 원짜리가 말했답니다. 무어라고 말했을까요? “음, 나야 늘 그렇지 뭐. 교회, 문방구, 또 교회, 교회. 나는 주로 교회에서 놀아. 그러다 한번은 거지에게 갔는데 거지가 애들도 갖지 않는 천 원짜리 준다고 침을 뱉었는데 기분 나쁘더라. 그런데 그 다음 주에 또 교회에 갔단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뭔가 깨달아지는 것이 없나요?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돈 쓰는 것을 보면 주님을 사랑하는 여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24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사랑하지 말라, 달리 말하면 주님만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시험하실 때 믿음의 시험도 하시지만 사랑의시험도 하십니다. 아브라함 독자 이삭을 제단에 바치게 하심도 사랑의 시험입니다. 이 사랑의 시험에 합격했을 때 하나님께서 크게 복을 주셨습니다. 스데반도 사도 바울도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참된 제자였습니다.
2. 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27절을 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여기에 중요한 제자의 요건이 나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죽으러 가라는 말인데 이것은 자기 부인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내 인생의 주인 됨에서 겸손히 내려와 주님께 순복하고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자세입니다. 내 주장과 내 개성과 내 스타일을 고집하면서 주님을 닮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잘 안 됩니까? 제자의 삶이 잘 안 됩니까? 내가 살아 있으니 안 됩니다. 내가 죽어 주님을 따를 수 있을 때 비로소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주님의 교훈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 2:20절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교회 봉사하는데 교인들이 기피하는 3D업종이 있다고 합니다. 뭔지 아시나요? 먼저 주방봉사랍니다. 사람들에게 뒷모습만 보이고 설겆이통에 손을 넣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주일학교 교사랍니다. 아이들이 관심 갖도록 교안 준비도 쉽지 않거니와 떠드는 아이들 관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 다음은 구역강사라고 합니다. 수고해도 알아주는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직분이 3D입니까? 힘들게 봉사해도 표가 나지 않고 알아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 없어 다 내가 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과분한 축복입니다.
우리 주님을 보세요. 주님께서 이 세상을 사신 삶은 전적인 자기 부인의 삶이었습니다. 영광스런 하늘 보좌 다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호화로운 궁궐에서 살지 않으셨고 갈릴리 나사렛 촌에서 목수로 사셨습니다. 그는 풍체도 없으시고 아름다움도 없으셨습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마저 도망쳤지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한 번도 거부하지 않고 걸어가셨습니다. 자기를 내려놓는 부인의 삶이었습니다.
3. 이해와 각오가 필요합니다.
33절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앞의 두 비유를 가리키는 "이와 같이"란 용어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간략히 말하면 제자의 삶을 충분히 이해하고 결단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가 심했기에 주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순교요 각오였습니다. 이 각오 없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28절 이하에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했듯 주님을 따르는 자들 중에는 제자의 삶이 보랏빛처럼 마냥 좋아보여서 따른 자도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따르다가는 실망한다는 것이죠. 예수 믿으면 모두 복 받고 고난도 어려운 일도 없고 잘 되기만 한다고 알면 실망할 날이 옵니다. 영광과 축복도 있지만 고난도 시험도 있습니다.
그리고 31절부터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하셨습니다. 대적하느냐? 화친하느냐? 적군을 앞두고 해야 하는 결단은 보통 결단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단단한 각오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목숨을 건 결단 없이 어떻게 주님의 제자가 됩니까? 과연 이 길을 갈 수 있을 것인지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결단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고난을 각오한 사람은 웬만한 고난도 고난처럼 여겨지지 않고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상처 받고 실망합니다.
기도해 주셔야 할 일은 지금 인도에서 과격파 힌두교 정당이 법을 제정해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여 죽이고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길이 어떤 것임을 알고 각오하는 사람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이미 예상하고 각오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시고 멸시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라”는 찬송이 나의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만이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주님은 자기를 따를 참 제자를 찾고 계십니다. 어떤 제자입니까? 허다한 무리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참 제자입니까? 우리 모두 사랑 없이는, 나를 내려놓음 없이는, 제자에 대한 이해와 각오 없이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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