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바꾸는 에바다 (막 7:31-36)
[본문]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36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오늘은 명절이라서 우리 모교회를 찾아 함께 예배하는 분들도 계셔서 더욱 은혜로운 주일입니다. 이 시간 "운명을 바꾸는 에바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이 맘 때면 올 해 나의 운세는 어떤가 관심을 기울입니다. 토정비결 사주팔자를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기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지 결코 운명론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우리는 아담의 자손으로 영원히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로 영원히 지옥 불에 떠어질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운명에 관심 갖지 말고 그 운명을 바꾸어 보려고 해야 합니다. 자동차가 아무리 고급이어도 자동차로는 도로주행밖에는 못하지만 비행기 타면 산과 바다 들판 자유롭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얼마든지 희망을 만들면서 운명을 바꾸고 높이 높이 비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듣는 귀와 말하는 입술입니다. 왜 그럴까요? 죽고 살고 되고 안 되는 것이 듣고 말하는 것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구원 받고 영생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입술이 온전치 못하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시인하고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기 인생과 운명을 고치려면 귀와 입술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그럼 귀와 입술이 변화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귀와 혀의 중요성을 자각해야 합니다.
32절을 보면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귀먹고 말 못하면 얼마나 불편합니까? 자기도 불편하지만 남도 불편합니다. 말해도 들을 줄을 압니까? 또 어눌하니 그 말을 어떻게 알아듣습니까? 더구나 배경이 갈릴리 바다 아닙니까? 뱃일하는 사람들은 목소리도 커야 하고 귀도 잘 들려야 합니다. 그래야 손발이 맞아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습관이 되서 불편한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일하자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타인들이 “이 사람 좀 고쳐 주세요.”하고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육신의 귀와 입이 아닙니다. 문제는 영의 귀와 영의 입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귀와 입술은 건강하지만 영의 귀와 입술은 병들어 들어야 할 소리는 듣지 않고 세상 소리만 듣고 세상 소리만 합니다. 믿음의 말을 할 줄 모릅니다. 귀가 병들면 입도 병듭니다. 못 들으니 말 못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우리 믿음이 자라려면 무엇보다 듣고 말하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막4:24에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하셨어요. 사람이 무엇을 듣느냐가 중요합니다. 들으면 그것이 자기 지식이 되고 사상이 되고 인격이 되고 운명이 됩니다. 말하는 것도 그래요. 잠18:20-21에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했습니다. 민14:28에도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듣고 말하는 것의 중요성을 깊이 자각하는 것만이 자기 문제를 해결할 길이 됩니다.
2.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걸 보여 주시기 위해서 주님 하신 일을 보세요. 33절에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했지만 주님은 그를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무엇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귀와 입이 고침을 받으려면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요일4:5에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했어요. 그러므로 몸은 세상을 살아도 우리 귀는 하나님 말씀에 쫑긋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이 바뀝니다. 운명이 바뀝니다. 그러므로 늘 말씀을 들으세요.
3. 세상 소리를 듣지 않아야 합니다.
33절에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주님이 안수하시는 모습이 특이하지요? 손가락을 양 귀에 넣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주님은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신 이유는 뭔가 메시지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즉 세상의 소리를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귀에 온갖 소리가 들려오지만 세상적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세요. 그렇지 않고는 믿음과 축복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라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롬10:9-10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했어요. 그만큼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업하는 사람에게 말을 들어보니 방송 듣고는 절대 사업이 안 되더랍니다. 방송 나오면 이미 늦었고 또 언론이란 그 특성 상 문제 가지고 떠들기만 하지 사업가에게 좋은 안내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공하려면 소리를 잘 들어야 합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하니다. 건강하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의사를 만나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말씀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좋지 않는 말에는 귀를 막아야 합니다.
4. 입술의 잘못에 놀라야 합니다.
33절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아무리 사랑하는 주님이시지만 침을 뱉어 침 묻은 손을 혀에 갖다 대신다면 기겁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옛날에 조리 도구가 없었을 때 음식을 씹어서 아이에게 먹였다고 하지요. 지금 만약 그렇게 한다면 아이 맡길 딸과 며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백이면 백 기겁을 하고 데려갈 것입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두 눈은 성한 그 환자가 보는데서 손에 침을 밷으셔서 혀에 대니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주님의 침이긴 하나 또 씻고 또 씻고 싶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묘사를 통해서 입술의 부정함을 깨닫게 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부정한 입술을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입술로 내 인생이 그렇게 불행해짐에 대해서 자각할 정도가 아니라 까무러질 정도로 느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3:5-9) 했습니다.
벧전3:10-11에도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말 잘못으로 자기 인생이 불행했다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혹은 말하지 못함으로 불행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는 답답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기 바랍니다. 도움이 없을 때도 하나님이 도우신다고 말하세요. 막막할 때도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하세요. 궁핍하고 어려울 때도 하나님이 채우실 것이라고 말하세요. 반드시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이라고 말하세요. 반드시 나를 들어 쓰실 것이라고 말하세요. 그래도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고 하세요. 이 믿음의 말이 여러분의 인생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
5. 변화를 갈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34-35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여기 탄식은 신음소리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그를 위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이해가 되시나요? 더 중병 가진 사람들도 많은데 귀와 입만 둔할 뿐 성한 몸 가진 자에게 그렇게 탄식하시다니 이해가 됩니까?
이처럼 잘못 듣고 잘못 말하고 살았던 것을 애통하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몰고 다니는 사람들은 항상 생각이 다르고 말이 달랐습니다. 말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마21:21)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가슴을 치고 입술을 치며 내 입이 문제라고 탄식하며 고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도 이 탄식이 있었기에 그 입술이 정함을 받았습니다. 사6:5-6에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탄식했습니다. 그 때 천사가 이사야의 입술을 정하게 하여 주었습니다.
6. 말의 위력을 실감해야 합니다.
36-37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이 구절에서 언어의 신비로움을 보여줍니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더 알리고 알렸습니다. 이것이 언어의 신비요 사람의 심리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단순한 어떤 사건의 서술이 아니에요. 주님께서 병인을 고치신 후 언어의 신비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말에 따라 부어지는 마음이 다릅니다.
가령 자녀들에게 하는 우리의 말에 따라 순종의 능력이 역사하고 혹은 불순종의 힘이 역사하기도 합니다. 잘못했어도 "잘했구나. 재능이 엿보인다." 하면서 격려하면 더 잘하는 마음이 부어집니다. 그러나 "넌 항상 왜 이러니? 잘하라고 했잖아" 하면서 책망하면 낙심과 무능력의 마음이 부어집니다. 그 말 듣고는 잘할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환자에게도 말 한 마디가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고운 언어를 사용하면 마음도 고와지지만 언어가 거칠면 마음도 거칠어집니다.
술 마시지 말라 하면 더 마시고 싶어집니다. 이 때는 차라리 조용히 기도해 주세요. 부부싸움으로 가정이 고쳐질 줄 아십니까? 지적하고 꼬집는 부부싸움해서 가정이 변화되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더 악화될 뿐입니다. 그냥 조용히 기도하세요. 예배 시간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자주 선언하고 말하면 놀라운 기적들이 나타납니다.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 말의 위력들을 많이 경험해야 합니다. 제자훈련 과정 중에 반드시 받아야 할 과정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일생 아버지 말씀만 듣고 아버지 말씀만 하셨고 아버지의 뜻대로 사셨습니다. 세상 소리 듣지 않았습니다. 불신의 말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에바다의 삶이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안 된다 해도 우리는 된다고 말하십시다. 세상에서는 죽는다 해도 우리는 산다고 말하십시다. 그러기 위해 들려오는 소리에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신령한 귀와 입술로 고침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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