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복음서

나다나엘로 본 예수 만남 (요 1:43-51)

공 상희 2009. 1. 31. 10:39

나다나엘로 본 예수 만남 (요 1:43-51)

 

[본문]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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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나다나엘로 본 예수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으십니까? 저도 만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사랑하시고 꿈에라도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렘29:12-13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만나고 싶다고 다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만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예수님을 만난 나다나엘이 나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 바돌로매가 바로 나다나엘입니다. 나다나엘은 갈릴리 어부 출신으로 날마다 바다에서나 육지에서나 메시아를 갈망하며 소망했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전도를 듣고 예수를 만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수를 더 깊이 만나 하늘이 열리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복된 일입니까?


이처럼 예수 만남은 단순한 이름의 예수의 만남이 아닙니다. 실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요, 나아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 시간 그 놀라운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죄악에서 구원 받은 것만도 감사한데 예수 안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우리에게 왕래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통해 온갖 아름다운 것을 우리에게 안겨다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예수를 만나시되 깊이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까요?

1. 전도를 통해 만납니다.


45절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 방방곡곡 세계 모든 나라를 다닌다 해도 그냥 만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롬10:8-9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요1:12에는 예수를 믿는 것이 곧 영접하는 것이라 했어요.

그런데 예수라 해서 아무나 믿는 건 아닙니다. 당시 유대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많았습니다. 오늘날도 자기를 예수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무나 예수라 한 대서 다 믿어서는 큰일 납니다. 45절에 나와 있는 대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바로 그 분 즉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나를 위해 성령으로 나시고 나의 죄를 위해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사신 그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는 것은 바로 그 예수를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성경이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나다나엘 보세요. 46절에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빌립에게 반문합니다. 날마다 성경을 보며 메시아를 갈망하던 나다나엘이 이렇게 반문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빌립의 말을 의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태는 마2:23에서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고 했습니다. 마태는 분명 성경을 보면서 이런 해석을 도출해 냈는데 나다나엘은 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의심했느냐는 말입니다.

성경을 보기는 보았으나 깊이 보지 못했고 성경을 알되 깊이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의 말이 이해는 되요. 당시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으니까요. 우리가 찾아봐도 구약 성경에 마2:23과 같이 나사렛 사람이라 칭할 것이라는 직접적인 예언은 한 곳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깊이 보지 못한 것입니다. 무조건 깊이 보란 말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봐야 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분명 메시아는 이스라엘에서 나지만 가장 천시여기는 동네에 나며 그곳이 바로 나사렛이라는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사11:1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하는데 그 가지가 바로 메시아를 가리킨다는 정도밖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가지가 바로 예수라. 해석이 여기서 끝나면 미흡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나아가 왜 예수를 나무 가지에 비유했을까? 하는 데까지 나가야 합니다. 히브리어로 가지는 ‘네체르’라 하여 보잘 것 없는 시작’이란 뜻입니다. 즉 메시아가 오시는데 아주 몰라볼 정도로 비천하게 오시고 비천한 장소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가장 비천한 곳은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마4:15에 “이방의 갈릴리여”라고 할 정도로 갈릴리는 자기 나라이면서도 이방 땅이라고 여길 만큼 천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셨으니 얼마나 천대 받겠습니까? 신기한 것은 발음으로 봐서도 가지를 가리키는 ‘네체르’는 나사렛과 유사한 발음입니다. 성경을 보되 좀 더 깊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문자적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이기도 합니다. 한 본문도 성령의 비추심 따라 오묘하고 다양한 메시지가 나오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이 예수를 믿는 우리 안에 계신다 했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멀리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아 헤매지만 발견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임마누엘 아닙니까? 그러므로 갈릴리 나사렛보다 더 비천하고 낮은 우리에게서 찾으시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음성도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있지만 또 우리 마음에서 우러납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 뭔가 깨달아지는 것 같지 않나요?

이것을 모르기에 주님과 동행하지 못합니다. 지금 비천한 내 곁에 와 계심부터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대화해 보세요. 찬양해 보세요. 경외해 보세요. 지금 곁에 계신 주님을 믿고 말씀을 건네 보세요. 임재를 믿어야 임재를 느낍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고 거기에 준해서 주님과 함께 살 때 주님의 임재를 더욱 느끼게 되고 함께 하셔서 더불어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만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마태의 사고로 믿어야지 나다나엘 사고로는 예수를 만나지 못합니다. 나다나엘 사고로는 성경을 봐도 이해되지 않고 기도를 해도 만나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수백 번 읽는다 해도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천만 번 읽어도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를 두고 성령의 조명이라, 혹은 박윤선 박사는 계시 의존 사색이라 했습니다.

바울이 홍해를 세례라고 했고 반석을 그리스도라 한 것은 영적으로 한 말입니다. 베드로 역시 노아 홍수의 물을 세례로 영해했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살렘 왕 멜기세덱이라는 이름 가지고 풀어간 것을 보면 신비하기 그지없습니다. 알레고리는 나쁘지만 성경이 쓰는 알레고리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과 같은 자기 안에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3. 간사하지 않고 진실해야 합니다.

46-47절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이 구절에서 상대와 대화조차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성품을 꿰뚫어 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신성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한 것은 그가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진실함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야곱을 보세요. 그가 이스라엘이지 않고 야곱일 때 얼마나 속이고 장사하고 조건부 서원이나 하고 육신을 위해 하나님과의 약속도 잊은 채 간사하고 간교했습니까? 야곱이 그것 때문에 얼마나 불같은 연단을 받았습니까? 그래서 얍복강에서 축복을 구하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한 것은 그만큼 자기 문제로 부르짖고 갈등한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하고 외식하며 자기를 포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기 모습 그대로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께 오는 자에게 주님은 만나 주십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포장하는 사람은 만나주지 않으십니다. 얍복강에서의 야곱과 같이 자기 모습 그대로 나와 비통히 여기며, 잔머리 쓰는 인간의 간사를 버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해야 합니다.

4. 경외의 삶 충분히 해야 합니다.

48절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주님을 발견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부르기 전이면 예수님은 멀리 떨어져 있을 때인데 나다나엘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까지 다 아시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4:4에 예언한 대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 풍성한 열매와 시원한 그늘처럼 왕이 오셔서 자신들을 위로해 주실 것이라 믿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타락하였습니다. 말씀생활이 무너지고 기도생활이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무화과나무 아래서 말씀보고 기도하던 나다나엘을 만나주셨다는 사람을 기억해야 합니다.

늘 예배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정규예배 잘 드려야 합니다. 매일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늘 말씀보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교통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며칠만 아니 몇 시간만이라도 열심히 경외해도 주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능력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예배 중에 함께 하시고 예배 중에 복 내려 주십니다. 우리는 신령한 제사장입니다. 날마다 신령한 제단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5.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세요.

49절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모든 비밀을 다 알고 계신 전지전능하신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외쳤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은 당시 메시아를 암시하는 별명입니다. 당신은 메시아라는 외침입니다. 그토록 사모하고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면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이란 하나님이란 개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니까 신성을 침해했다고 유대인들이 핍박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아들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와 예수님의 다름 점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왕이라 했다면 그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절대 순복해야 합니다. 항상 주님을 사랑하고 그의 지배 아래 순복하는 겸손을 가지면 주님이 더욱 충만하게 임하십니다. 겸손한 자에게 큰 은혜를 주십니다. 주님이 바로 은혜이십니다. 주님이 성령으로 임하십니다. 삼위일체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엎드려 보혈로 우리 양심을 보호하면서 매일 나와 세상을 십자가에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이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6. 계속하고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50-5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주님을 만났다고 다가 아닙니다. 주님의 임재 속에 살며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만족을 누리며 능력이 무수히 나타난다고 다가 아닙니다.

더 주님과 온전한 연합과 일치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와 함께 높이 된 그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은 무궁무궁하십니다. 뭐 좀 받았다고 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 나가고 평안하다고 자만하거나 태만하지 마세요. 주님이 날마다 사랑으로 품어주신다고 계속 동일한 체험일 것이라고 생각지 마세요. 우리는 전기 제품과 같아서 전원이 끊기는 순간 제로 and 섬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더 큰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고 성령으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 만나기를 사모해도 알지 못하면 만나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 나다나엘처럼 전도 받고 성경의 가르침 따라 예수를 나의 구주 나의 왕으로 믿고 영접하며 주님이 함께 하신 줄 믿고 날마다 경외하고 사랑하며 겸손하며 순종하고 자만하지 않고 전진하여 온전히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