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문 서

진정한 행복

공 상희 2008. 11. 28. 17:14

진정한 행복

본문: 시128: 1- 2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이 세상의 많은 것을 가졌으면서도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유명한 스승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왕의 고민을 듣고 난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야 간단하죠. 임금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입으시면 됩니다.” 그래서 왕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신하들은 각자 세상에 나가 유명한 장군, 학자, 부자 등을 만났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행복한 사람을 찾아 헤매던 한 신하가 어두운 그믐밤에 피곤에 지쳐 강가를 걷고 있을 때, 그의 귓가에 아주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는 피리 부는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당신의 피리 소리는 아주 아름답고 행복하게 들립니다. 당신의 마음도 그렇게 행복합니까?” “그럼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합니다.” 신하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당신의 속옷을 내게 파시오. 돈은 얼마든지 주겠소.” 그런데 사내의 대답은 신하를 무척 실망하게 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두워서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소. 어제 지나가던 불쌍한 거지에게 마지막 남은 속옷을 적선하고 말았다오.”

요즈음 현대인들이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인가를 설문조사했습니다. 대답은 돈과 시간이었습니다. 경제적 안정과 삶의 여유를 갈망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과연 인간은 풍요와 여유가 채워지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에스겔서 16장49절은 소돔성의 죄악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멸망했는가. 풍요와 태평이 타락으로 이어졌고,풍족한 식물은 교만을 가져왔습니다. Sodomite는 동성애자,남색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 단어는 소돔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소돔성의 대표적인 죄가 교만한 것이요, 쾌락주의 인생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바로 그곳에 함정이 있습니다. 가장 풍요롭다고 느끼는 그곳에 죄악이 넘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사탄은 내 영혼을 파고듭니다. 행복은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행복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합니다.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병이 다 낫기만 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고, 병이 낫고 나면 또 다른 바램이 생기는 것이 우리의 생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우리 영혼의 방황은 끝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은 다릅니다. 예수님 안에는 만족이 있습니다.
사람이 4억 4천만 달러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할까요? 카우센이라는 독일사람은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서독에만 1만 5천 개의 아파트와 콘도미니엄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인근 지역에도 25개의 빌딩과 1천 5백 개의 아파트가 그의 것이었으며 아트란타 시에는 무려 53개의 빌딩에다 4천 2백 개의 아파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카우센의 총 재산은 4억 3천 9백만 달러로 추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 재벌이 목을 매어 자살해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살한 이유는 돈 때문이었습니다. 사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나 4억 4천만 달러 이상의 돈을 가진 사람이 아주 망한다고 해도 적어도 백만 달러 정도는 남을 것이고 그 정도의 돈이라면 남은 평생을 물질적인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끝없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의 욕심이 결국 사망을 부른 것입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6: 17-18)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가운데 인생의 행복을 모르고 살았다면 비극적인 존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할 때 얻을 수 있을까요?

첫째, 행복은 의로움이 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주신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운 환경 가운데 행복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단이 그들을 유혹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자 형용할 수 없는 행복을 누렸던 바로 그 곳에서 그들은 벌거벗은 수치 때문에 몸부림치고, 하나님께 지은 죄로 인해 불안과 공포가 들어와 절망 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행복이란 결코 좋은 환경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참된 행복이란 의를 동반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아담과 하와의 후손된 이 땅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 의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스스로 의를 얻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위해 의롭게 되는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을 때 얻게 되는 의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의롭다 함을 얻게 되며 이러한 의로움이 있을 때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한 수치와 불안, 공포에서 해방되어 행복의 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시51:4,7,8)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둘째, 행복은 마음의 평강을 통해 얻게 됩니다.
'마리린 몬로'가 생존시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한 여성으로서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아직 젊고 건강할 뿐 아니라, 매우 아름다우며 돈도 많이 모았습니다. 하루에도 수 백 통의 팬레터를 받고 사랑에 굶주리지도 않았습니다. 부족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나의 마음은 외롭고 공허하여 기쁨이나 평안이 없습니다.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이유 없이 불행합니다.."
부귀영화로 온 세상을 호령할 명예와 권세를 가졌다 해도 마음 속에 평강이 없으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마음의 평안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자기 양심과 이웃과 화목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나아가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할 때 우리는 죄에 대해 참소하던 우리의 양심과도 화목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쁨으로 우리는 이웃의 허물과 죄도 용서할 수 있게 되어 이웃과도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양심과 또한 이웃과 화목하며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맏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셋째, 매사에 성실히 일할 때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엡6:6,7)
세계의 많은 명화 중 우리에게 가장 깊은 감명을 주는 것은 19세기 작품인 프랑스의 화가 밀레의 '만종'이라 하겠습니다. 한 젊은 부부가 하루 종일 밭에서 땀흘려 일하다가 황혼이 될 무렵 하던 일을 멈추고 엄숙하고 경건하게 기도드리는 모습은 인간의 숭고한 사랑과, 노동과 종교가 혼연일체가 된 성스러운 면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가정도 원만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의 요소가 반드시 구비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노동을 떠나서는 생명을 유지, 보존할 수 없고 사랑이 없는 노동은 고역스러울 뿐인데 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국의 식민 정치가였던 '쎄실 존 로즈'는 건강 관계로 남아프리카로 이주하였다가 그곳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고 큰 거부가 되었던 사람인데 그의 재산은 600만 파운드의 다이아몬드를 옥스포드 대학의 장학기금으로 기증할 만큼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잠시 영국으로 귀환하였을 때에 구세군의 2대 대장이었던 부드 장군과 기차로 여행할 기회가 있어 담화하던 중, 부드 대장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다고 생각되십니까?"하고 묻자 로즈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 "행복이라니요?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하고 반문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드 대장은 다시 말하기를, "천하에 진실로 행복한 곳은 오직 한곳뿐인데 그 곳은 주님의 십자가 슬하입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만이 우리의 죄가 사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전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톨스토이의 '인생일기'란 책에도 보면 프랑스의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파스칼의 말을 인용,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속세적인 행복을 찾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기진맥진 한 두 팔을 그리스도 앞에 내놓을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행복이 찾아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한 때 인간을 구멍난 항아리에 비유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쏟아 부어도 그 항아리는 절대로 완전히 채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없이는 항상 공허하며, 온전한 성취감과 행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아내인 룻과 함께 지낸 카리비안 섬에서의 일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자인 한 사람이 자신의 화려한 집으로 우리를 초대했습니다. 그는 75세였는데, 식사시간 내내 억지로 눈물을 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밖에는 요트가 있습니다.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개인용 비행기도 있고 헬리콥터도 있습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비참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날 오후에 빌리 그래함 부부는 그 지역 목사님의 방문을 받았는데 그 목사님도 75세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저는 제 이름으로 저축된 것은 2파운드도 갖고 있지 않지만 이 섬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빌리 그래함은 아내 룻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누가 더 부자라고 생각해?" 우리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신29:9)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40:4)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잠16:20)

다섯째,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하나님께서 진정한 행복을 주십니다.(시73: 27, 2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 4:8)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많은 것들에 가까이 하고자 합니다. 돈을 가까이 하고 명예를 가까이 하고 친구를 가까이 하고 또 여자를 가까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는 참된 행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 행복은 어디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까?
진정한 행복은 바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1)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다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입니다.
2)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를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하나님과 예수 안에 거하는 자가 행복을 누립니다.
한 사람이 40년 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은퇴했습니다. 그는 친구와 친척들에게 자랑했습니다.
"이제 나는 걱정거리가 없어. 출근할 필요도 없지. 서둘 것도 없어. 직장상사도 없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 사람은 행복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행복은 무엇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이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매이는 것이지 서로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나 자녀들도 서로 매여 있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노예"로 매일 때 참 자유를 누린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돈, 권세, 명예와 같이 이 땅에 속한 것은 영원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명예와 돈이 결코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참된 행복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33:12)

일곱번째,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시146:5)
만일 할아버지가 젊은이들과 축구시합을 하고 손자의 친구들이 할머니인 줄 모르고 데이트 신청을 하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요? 발칙한 상상이라 하겠지만 미래에는 이런 일들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노화 방지 신약을 개발, 연구하는 벤처기업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노화현상의 원인을 찾아내고 이를 지연시키는 연구가 빠르게 진전되고 있습니다. 영원한 젊음을 통해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가요? 장수와 부는 세상을 살아갈 때 약간의 편안함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삶을 풍성하게 채워주지는 못 합니다. 삶의 본분인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길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34:9)
어느 마을에 나뭇짐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믿음이 어지나 좋던지 혼자 살면서도 늘 신앙 생활에 힘쓰며 입에서는 찬송이 떠나는 날이 없었습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 가지고 내려올 때에는 언제나 교회 앞에 나뭇짐을 세워 놓고 성전에 들어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도를 드린 뒤에 기쁜 얼굴로 나오곤 했습니다. 날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목사님이 하루는 그 할아버지한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슨 소원이 그렇게 많아서 늘 기도를 하십니까 ?” 할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특별히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지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얼굴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저를 내려다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마주보는 것만이 저의 유일한 행복입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84:4)

여덟번 째, 충성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행복을 누립니다.(시119:22)
어떤 날 영국 임금님이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나라 안을 순시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조그마한 동리에 이르렀을 때, 동리 모퉁이에 있는 물레방앗간에서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듣고 임금님이 발걸음을 멈추고 물레방앗간을 들여다보았더니 한 할머니가 혼자 일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하도 아름답게 여겨져서 임금님이 할머니보고 한번 더 나를 위해 불러달라고 간청을 했더니 부끄러워하면서 할머니는 다시 노래를 부릅니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 역시 세상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할레루야 찬송이 절로 나네."
이 찬송을 듣고 임금님은 너무도 기뻤습니다. 다시 부탁하기를 2절도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이 찬송은 내가 만든 거라서 2절은 없습니다. 1절뿐입니다." 합니다.
임금님은 가슴에 우러나는 생각이 있어서 "내가 2절을 만들어 부르겠습니다. 지어 드릴 터이니 앞으로도 2절도 꼭 부르세요"하고 즉석에서 작사를 하여 불렀습니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영국 임금이 날 부러워하네.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할 때 할렐루야 찬송이 절로 나네."
행복이란 만족감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못다 한 소원이 있으면, 아직도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굴까, 진정 행복한 순간이 어느 순간일까, 생각할 때마다 저는 사도바울의 고백을 늘 생각하곤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절입니다.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고" - 관제라는 것은 피를 쏟아 붓는 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시간에 피를 쏟아 부어도, 그래도 기뻐하리라, 나와 함께 기뻐하자 아, 멋진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단 한번만 경험하고 죽어도 그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늘 그런 생각으로 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어쩌다 한 번만이라도 '이대로 눈을 감고 여기서 죽어도 좋다'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있는 시간입니까. 그와는 반대로 '죽어도 눈을 못 감겠다'니까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은 나를 부러워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이요 그것이 진정한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말씀했고,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이전에 바라고 따르던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라고 말했습니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잠28:20)

아홉번 째, 미래에 대한 소망과 기쁨을 가질 때 우리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크면 클수록 그에 따르는 슬픔과 허무도 더 깊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영화와 달리 허무와 절망이 따르지 않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어주시는 것으로 참된 기쁨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1절에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곧 기쁨의 샘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천국 소망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영원한 천국을 예비해 두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천국이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음을 깨달아 알 때 우리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을 갖게 되며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2절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십니다. 또 탈무드에 보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을 통해서 배우는 사람이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요, 세상에서 가장 부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만족하게 여기고 기뻐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추억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항상 과거에 마음을 두고 '그 때가 좋았지'하며 빙그레 웃어 봅니다. 옛날 일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 지나간 일입니다. 또 현재만 생각하고 만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아주 급하게 또 다른 환경으로 바뀝니다. 문제는 미래입니다. 미래적인 행복만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여러분, 마주앉아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는다해도 그 자리가 이 음식을 먹고 나면 다시는 같이 먹을 수 없는 이별하는 자리라고 한다면 그 만찬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입맛이 돌지 않습니다. 맛이 제대로 작용하겠습니까?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 맛도 없습니다. 내일을 약속 받지 못한 오늘의 행복은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별의 만찬과 같은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기쁨이란 자기 최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열 번째, 사람의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 할 때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었던 솔로몬의 고백이 그러했고 그후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는 삶은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고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성공을 찾아 주님을 점점 멀리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들도 언젠가는 그 옛날의 조상들처럼 인생을 다 살고 나서 고백하겠지요 " 나의 삶이 불행했었노라고 . 결국 나는 헛된 것을 찾아 내 인생을 허비했노라고"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섬긴 삶은 결코 헛되지 않다고 ....
진정한 행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 각자가 물어야 할 근원적인 물음입니다. 현대의 성녀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는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고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지금 그분과 함께 천국에 있을 수 있는 그 능력 안에서 천국을 발견합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그분과 함께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과 함께 행복해진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고 그분이 도우시는 것처럼 돕고, 그분이 주시는 것처럼 주고, 그분이 섬기시는 것처럼 섬기고, 그분이 구하는 것처럼 구하고, 24시간 그분과 함께 있으며 빈궁한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그 분을 어루만지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단순한 공식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만 발견됩니다. 그밖에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실망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하나님의 뜻을 제일 먼저 찾는 사람들은 참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부귀나 영화, 공명이나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성령 충만과 영원한 천국의 소망 안에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기쁨 가운데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기쁨과 평강이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충만히 퍼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방황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없이 지금 좇고 있는 그것이 채워진 후에 또 다른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은 그대가 찾고 있는 바로 그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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