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과 희락
본문: 약4: 1- 4
하나님은 인간을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동산을 아름답게 지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풍부하게 만드시고 그 안에 인간을 살게 하셨습니다. 동산에는 먹을 것이 가득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부족함이 없이 누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또 독처하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아 돕는 배필을 만드셨습니다. 동산은 아름답고 풍요로웠으며, 사랑하는 배필까지 생겼습니다. 에덴동산은 즐거움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즐기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행복 보장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세상에는 불행한 사람이 이리도 많은 것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진흙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 따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그것이 남자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든 재료는 모두 3가지입니다. 진흙과 하나님의 생기와 뼈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3가지 성질을 다가지고 있습니다.
1. 흙으로 돌아가려는 성질입니다. 사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죽어서가 아니라 살았어도 흙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동물은 흙으로만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흙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것은 동물적인 존재가 되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간혹 뉴스를 들어보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 같은 사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얼마 전 뉴스에 엽기적인 기사가 있었습니다. 30 대 남자가 새벽에 학교에 가는 여고생을 데려다 준다며 자기 승용차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 강제로 추행을 했습니다. 불타는 욕정을 참지 못하고 짐승 같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게 짐승처럼 행동하는 인간입니다. 이런 사람은 동물적인 쾌락만 추구합니다. 육체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합니다.
불란서 작가인 에밀 졸라는 ‘나나’라는 소설을 써서 일약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습니다.
‘나나’는 <바리에떼>라는 극장의 여배우로 활약하다가 스스로 창녀로 전락해버리는 여주인공의 이름입니다. 풍만한 육체와 눈부신 미모를 가진 아름다운 나나는 천부적으로 선량하고 동정심이 많은 여자였습니다. 나나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연극 배우가 되었지만, 세탁부인 어머니와 기와장이였던 아버지와 살았던 그 지긋지긋한 가난이 두려워서 돈을 모으기 위해 매춘부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나나의 특징은 그녀가 결코 내일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창녀, 나나의 주위엔 수많은 남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나폴레옹3세의 시종인 귀족 계급의 백작과 돈 많은 은행가, 젊은 군인 형제들이 그들의 모든 재산을 바쳐가며 나나의 사랑을 얻으려고 발버둥칩니다. 결국 백작은 나나의 쾌락의 포로가 되어 가산을 탕진합니다. 부유한 은행가도 나나와의 쾌락을 좇다가 형편없이 파산해 버립니다. 군인 형제들 중 형은 나나로 인해 공금을 횡령하다 몰락해버리고, 동생은 나나와의 사랑에 빠져 결국 자살해버립니다. 그러나 파멸한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나 자신도 왕궁처럼 화려한 거실에서 결국 천연두에 걸려 죽어갔습니다.
“쾌락은 가장 완전하게 인간을 파멸시킨다”는 말이 나나의 일생을 통하여 확실히 증명되었습니다.
어떤 창고 속에 꿀이 들어 있었습니다. 파리 떼들이 꿀 냄새를 맡고 몰려와 꿀을 핥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어찌나 꿀맛이 달던지 파리들은 떠날 줄 모르고 먹고 있다가 그만 날개며 발에 꿀이 묻어서 결국 영영 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중 한 마리가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불쌍한 족속들이야. 작은 쾌락 때문에 목숨을 버려야 하다니!”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잠 21:17)
연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인생의 쾌락을 찾아 동분서주하며 사치와 과소비를 하다가 가난하게 됩니다. 분수에 넘치게 방탕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사람 또한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부자가 되려면 많이 벌어들이는 것 이상으로 근검 절약하고 저축을 하여야 합니다. 사치와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그 일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게 될 뿐입니다. 사치와 쾌락은 불신자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도 빠지기 쉽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4:19)
쾌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지녔던 삶의 한 특징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전에는 행락 (쾌락)에 종노릇한 자였습니다" (딛3:3). 쾌락은 무지, 불신, 사기, 정욕, 악독, 투기, 가증, 상호증오와 같은 다른 요소들과 함께 옛 삶을 이루고 있는 무서운 요소입니다 (참조. 벧후 2:13). 쾌락은 주인으로 인간을 지배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쾌락에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옛 삶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자비와 사랑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딛 3:4). 쾌락에서 구원받는 것은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딛3:5).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와 같이 바울이 쾌락에 종노릇하던 우리의 옛 삶을 운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도 자칫하면 다시 쾌락을 추구하는 삶으로 돌아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수치를 사모하고, 현재의 영광을 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쾌락은 여전히 무서운 유혹거리입니다. 야고보는 그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심지어 쾌락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해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원인가운데 하나는 쾌락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약4:3). 이것은 잘못된 기도에 대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쾌락을 위한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쾌락은 다툼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약4:1). 그래서 쾌락은 "싸우는 쾌락"이라고 불리웁니다 (약4:1). 사람들은 쾌락을 얻기 위해서 싸움을 합니다. 오직 쾌락의 자리인 육신의 "지체", 몸의 각 부분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쾌락을 추구하는 자는 사람과도 싸우고 하나님과도 싸웁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상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약4:4). 쾌락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적이며, 최종의 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쾌락은 최대의 적이며, 최종의 적인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은 눅 8장에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하는데서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세 가지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길가의 적이고, 둘째는 바위의 적이고, 셋째는 가시떨기의 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마지막 적인 가시떨기는 또 다시 세 가지 원수를 가리킵니다. "염려와 재리와 쾌락"입니다.(눅 8:14). 여기에 나오는 단어들의 순서에 주의해야 합니다. 모든 인생은 더 나은 경제를 갖기 위해 염려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 다음 단계는 재물을 모으는 것입니다. 재물을 모으게 되면 반드시 쾌락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쾌락이란 것은 인생에게 있어서 가시와 같은 존재이며, 마지막 단계의 문제입니다. 쾌락은 최종적인 적입니다. 쾌락은 말씀을 질식시키고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최종적인 적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말세가 되면 "쾌락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게 됩니다" (딤후 3: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쾌락을 억제하는데 높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아마도 우리 시대에 기독교의 최대의 적은 쾌락주의라고 생각됩니다. 세상의 문화는 전반적으로 쾌락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문화에 참여할 때 깊은 비판력을 가지지 않으면 쉽게 쾌락에 빠져들고 맙니다. 우리는 예수, 베드로, 바울, 야고보와 같은 신약성경의 중심적인 인물들이 쾌락에 대하여 지적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쾌락을 멀리함으로써 이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힌 것을 분명하게 보일 수가 있습니다 (갈 6:14).
사람들이 죄짓는 것은 당위감 때문이 아니라 죄가 가져다 주는 쾌락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 몸에 스릴을, 영혼에 순간적인 만족을,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 생활에 흥분을 가져다 줍니다. 그것이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일시적인 죄의 쾌락’에 대해 말합니다(히11:25). 우리가 죄짓는 까닭은 비록 일시적일 망정 죄가 가져다 주는 쾌락이 순종이 가져다 주는 쾌락보다 더 만족스럽다는 거짓말을 믿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힘은 하나님보다 죄가 나를 더 행복하게 해 준다는 거짓 약속에 있습니다. 존 파이퍼의 말처럼 “죄란 우리 마음이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할 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제대로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안의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쾌락을 동반하는 유혹의 힘과 싸우는 유일한 길은 더 큰 쾌락, 더 즐거운 쾌락, 예수님과 사랑에 빠질 때 오는 쾌락에 힘입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생기로 돌아가려는 성질입니다. 생령은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동물에게는 생령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만 생령이 있습니다. 인간은 생령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영적인 존재가 되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형상을 지니며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은 자기와 비슷하게 자기와 닮게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은 신적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과 비슷하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야기도 하고 교제도 할 수 있는 영적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천사도 부러워할 정도로 사람은 특별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저를 천사보다 또는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사 8:5)
3. 인간은 뼈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존재로 남으려는 성질입니다. 뼈는 흙과 달라서 아주 특별한 재료입니다. 뼈는 아주 고급 재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자를 만들었을 때 남자보다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흙으로 만든 남자는 거칠었습니다. 그러나 뼈로 만들 때는 아주 부드럽고 매끈했습니다. 도자기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보통 진흙으로만 빚은 도자기는 유약을 발라도 표면이 거칩니다. 그런데 도자기를 만들 때 뼈를 섞어서 만들기도 합니다. 뼈를 섞은 도자기를 본차이나라고 합니다. 본차이나는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매끈하고 곱습니다. 두드리면 땡~ 하는 탁음이 울립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만드실 때 아담의 갈비뼈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여자를 보았을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소리쳤습니다. 놀라운 탄성을 지른 것입니다. 너무 반가워한 것입니다. 첫눈에 반해서 사랑을 고백한 것입니다. 뼈를 재료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세 가지 재료가 가진 성질이 잘 어우러져 인간이 됩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어떻게 됩니까? 흙에 치우치면 짐승이 됩니다. 영의 사람으로 치우치면 교만하게 자기가 신이 되려고 합니다. 뼈에 치우치면 공주병에 걸립니다. 하나님은 이 세 가지 재료를 어우러지게 만드셨습니다. 어울릴 때 조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특제품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특별한 목적을 두셨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전도서 마지막 결론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본분을 지키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부담이 되거나 어렵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 일을 아주 즐겁게 하도록 모든 즐거운 환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창조하신 이 세계를 관리하게 하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사명입니다. 자연을 보살피고 관리하는 일은 인간의 책임입니다. 잘 가꿔진 자연을 바라보면 그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찬양과 경배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너무 즐거운 일입니다. 인간은 즐겁게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만두를 잘 빚는 권사님이 계십니다. 이 권사님은 만두 빚을 때면 아주 즐거워하십니다. 만두를 올려서 익힌 후 사람들을 대접하면 모두 맛있게 먹어줍니다. 특히 교역자들을 대접하면 모두 좋아합니다.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맛있는 만두는 처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권사님은 만두 빚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누구나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하면 즐겁습니다. 청소하는 일은 힘든 일입니다. 쓰레기를 치우고 어지러운 것을 정리하다 보면 육체적으로 피곤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청소할 일이 생기면 도망칩니다. 그런 사람 붙들어서 청소시키면 입이 나옵니다. 청소를 아주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청소를 하면서 보람과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러운 곳이 내 손을 통해서 점점 깨끗해지는 것을 보면 흐뭇합니다. 특히 교회 청소를 하는 일이 즐겁습니다. 군대에서 훈련받는 일은 고됩니다. 유격훈련이 특히 힘이 듭니다. 산을 뛰어다니면서 절벽을 기어오르고 물 위로 뛰어 내려야 합니다. 진흙탕에서 기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유격훈련이 재미있습니다. 밧줄을 타고 타잔처럼 날라 가는데 놀이 같다고 합니다.
인생은 보기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을 살다가 보면 도둑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슬픈 일도 생깁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기쁨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는 언제나 희망도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내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떨 때 즐겁습니까?
전도서 3:22 말씀에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고 했습니다. 전도서를 쓴 솔로몬은 사람이 수고하면서 즐겁게 사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했습니다. 전도서3장 13 절에서도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8:15 말씀입니다.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역시 먹는 즐거움이 큽니다. 하나님도 에덴동산에 각종 실과 맺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계절마다 맛있고 탐스러운 과일을 먹으며 즐겁게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풍요로운 시대입니다. 이제는 먹을 것에 대한 빈궁에서 벗어났습니다. 기분이 내려앉으면 맛있는 음식을 찾아서 드시기 바랍니다. 건강을 생각해서 맛있는 것을 적당히 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맛있게 먹고살면서 즐거워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자연을 보는 데서 즐거움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세상 즐거움은 먹고 마시는 즐거움과 여행하면서 자연을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인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즐거움은 역시 주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안에서의 기쁨은 샘솟는 기쁨입니다. 마르지 않는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인생을 즐겁고 재미나게 사는 것은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웃을 때 몸의 모든 근육이 활발히 움직여지고 엔도르핀을 비롯한 여러 호르몬을 분비해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어줍니다. 소나 양과 같은 동물들은 울기만 하고 웃을 줄 모르는 것과는 달리 인간은 웃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본능적으로 웃음을 추구하는가 봅니다.
우리에게 즐거움과 재미를 안겨주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쾌락이고 다른 하나는 희락입니다. 쾌락은 컴퓨터 게임이나 성적인 행위를 통해 느끼기도 하고, 오락이나 마약, 도박을 하면서 그리고 값비싼 물건을 소유했을 때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쾌감은 단순 자극으로 말초적 본능을 만족시키며 곧 사라져버리고 오히려 허망함을 느끼게 합니다.
반면에 희락은 육체와 영혼의 종합 자극으로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기쁨의 근원을 가지며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진리를 깨달을 때,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섬길 때 누리는 행복감은 신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과 건강을 지켜주는 것은 말초적 쾌락이 아니라 희락입니다.
참 기쁨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클럽이나 살롱이나 술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술 마시는 것이 참 기쁨이 아닙니다. 참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면 참된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 하나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주님께 피함으로 참된 기쁨을 누리며 주님의 보호를 받으며 즐거워하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함으로 영원한 기쁨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다섯 달란트의 은총을 주시면서 살게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몸이요, 둘째는 몸 안에 담겨 있는 인격입니다. 셋째는 선천적인 재능, 넷째는 후천적인 것인 기술이라는 달란트, 다섯째는 세월과 시간입니다. 이것을 인류에게 골고루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고 삶의 역동성을 주셨습니다. 이와 함께 마지막날에는 삶의 결과를 두고 계산하여 상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상 주심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3) 여기서 하나님이 성도에게 묻고자하는 것은 큰 일이 아니라 작은 일입니다. 그리고 상 주심의 내용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누가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우울한 종교가 아니라 기쁨이 넘치고 활기가 있고, 즐거움이 넘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의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도 평안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기쁨을 주시려고 애쓰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행복해야 하고 이를 누리며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 안에서 희락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이 누리는 즐거움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즐거움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편 16: 3)라고 말씀하셨고, 신명기 기자는 우리 성도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 부터 세말 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11:12)고 했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13장 21∼22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우리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우리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우리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항상 보호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동행하여 주셔서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깨진 그릇에는 아무 것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셋째, 예수 안에서의 즐거움은 구원의 즐거움입니다. 구원은 영원한 생명의 발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분히 즐거워할 이유가 있으며 그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고 또 하나는 그 받은 구원을 누리고 즐기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달라”(51:11)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구원의 즐거움의 회복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적 삶의 중요한 과제일지 모릅니다.
넷째,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나누어줄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인생의 즐거움과 행복은 사랑을 받기보다는 사랑을 줌으로써 가능하며 함께 나눔으로써 행복은 더욱 커집니다. 영어의 JOY(기쁨)라는 말은 Jesus(예수) Other(다른 사람) Yourself(자기 자신)가 이뤄질 때 비로소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고 행복하게 하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섯째, 신앙인의 즐거움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환란 속에 인내를, 인내 속에 연단을, 연단 속에 소망을 이룹니다. 신앙인이 가지는 소망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실체인 것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빌립보서 4:4 말씀에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주안에 즐거움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누리는 사람은 주안에서 기쁨을 누리면서 살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행복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과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말입니다. 주안에서 기쁨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전도서3장 14 절 말씀에도 하나님이 이 같은 선물을 주신 까닭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은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행을 하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바라보면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신 은혜를 헤아리면서 감사하십시오. 선한 일을 하면서 기뻐하십시오. 수고하면서 즐거워하십시오. 수고하는 것 중에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이 가장 귀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서 하면 하나님과 함께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과 평안을 누리시기를 다시 한번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날마다 우리를 보살피시는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먹이시고 입히시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 삶에 더욱 풍성하게 하소서. 그러나 먹고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지 않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길 원합니다. 지금 이 나라는 사람들이 자신만을 생각하고 서로를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 이기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도덕적인 양심은 사라졌습니다. 마음에 찔림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너져 가는 도덕적인 양심을 긍휼히 여겨 주소서. 마음으로 도둑질한 것도 죄라고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게 하소서. 무디어져 가는 우리의 마음을 다시 일깨우시고 주님의 말씀에 더욱 귀기울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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