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는 무서운 죄다 (딤후 3:13-15)
[요약] 무지가 무서운 죄인 것은 결과가 악만큼 혹은 악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무지하면 속고 속이며 큰 실수를 저지른다. 구제의 양면성을 알아야 한다. 구제의 동기는 은밀해야 하고 나팔 불어서는 안 되나 일부러 감출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 맡김 역시 양면성이 있다. 온전히 맡김이지만 이는 무관심이 아니라 사람의 할 일을 다함이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꼭 죽어 매장될 일이 있다면 침묵하라(마27:12). 치유 역시 회개하고 기도하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이 내신 방법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이 시간에 “무지는 무서운 죄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무지처럼 어리석고 무섭고 악한 것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지라는 것은 의도는 악이 아닐지라도 결과는 악만큼 혹은 악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의학이 발달하기 전 서양의 의사들은 환자를 수술하면서 도구를 소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고름과 핏자국이 많이 묻은 가운을 입은 자일수록 수술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무지가 얼마나 많은 환자들을 죽였는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 텍사스 인디언들이 자기들의 땅에 나는 검은 액체가 석유인지 알지 못하고 풀조차 나지 않는 저주의 땅이라면서 그 넓은 유전지대를 헐값으로 백인들에게 팔았다고 합니다. 나중에야 알고 가슴을 쳤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혹은 알지 못하면서 설교자가 되면 선한 의도였어도 자동으로 이단설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지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단설도 조심하고 나아가 자기 분수를 넘어 작은 지식으로 타인을 함부로 난도질하는 일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처럼 알지 못해서 손해보고 알지 못해서 지배 받고 알지 못해서 멸망의 길로 달려갑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 했던 호세아의 외침과 같이 지금 이 시간에도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일본을 돌아보면서 예수 믿는 저로서는 부러운 것보다는 안타까운 것이 더 많았습니다. 1억 2,800만의 영혼 중 1%만 예수를 알고 나머지 99%는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해서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무지해도 무지한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할수록 배움에 대한 갈망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알지 못하면 속고 속이며 큰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3:13-14)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알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몇 가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구제를 좀 더 알아야 하겠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구제입니다. 마6:3-4에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이 구제에 대한 교훈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5:14-16에 또 다른 교훈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두 말씀을 종합해 보면 우리의 구제가 자기 의나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오로지 모르게 해야만 옳다는 뜻은 아니란 말입니다.
가령 성경에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은밀히 계신 하나님께 하라고 했다고 성경에 골방기도만 있나요? 성경을 보면 발성기도도 있고 합심기도도 있고 부르짖는 기도도 있습니다. 다행스럽게 우리 한국교회가 기도 만큼은 양면성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제에 있어서는 오로지 은밀한 구제만을 추구해 오고 있어서 사회의 오해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기독교의 사회봉사를 빼면 타종교는 봉사랄 것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 얼마나 억울합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일로 전도의 길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북한을 돕는 것도 기독교 빼면 다른 종교에서는 거의 없습니다. 지난 번 태안에 기름유출사건 때도 우리 기독교인들의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전체 봉사단의 3분의 2가 우리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사실은 다 묻혀버리고 계속하여 기독교가 세인들의 비난의 타깃이 되고 있음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남의 탓보다 구제에 대한 성경 이해의 부족 탓이 더 큽니다. 이제는 봉사도 구제도 너무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간혹 재해를 당했을 때 국민들이 성금을 내는데 그 때 다른 종교의 명단은 수없이 호명 되는데 기독교 명단은 별로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체 방송언론사에 내기 때문입니다. 각종 구제금이나 의연금은 기독교방송이나 기독교 신문사에 내는 것보다 우리나라 공영방송사에다 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말입니다. 왜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대로 등불을 등경위에 켜서 우리 기독교의 아름다움을 알려야 할 때입니다.
2. 맡김에 대해 좀 더 알아야겠습니다.
마태 4장을 보면 예수를 거룩한 성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할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마4:7) 하시며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사람의 할 일을 구분하지 못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 할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큰 믿음인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이 났는데 어떤 사람이 불을 끄기 위해서 기도하자고 했답니다. 그러나 목사는 말하기를 불을 끄면서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어느 편이 믿음이 더 좋은 것일까요? 처음 사람이 믿음 좋은 것 같아도 그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할 일을 다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돕지 않으시며 그 불이익은 우리가 당합니다.
오늘날 타락한 언론을 가리켜 포퓰리즘 언론이라고 하는데 포퓰리즘(populism)이란 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여 진리의 본질을 버리고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야 광고수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연일연야 교회의 부정적인 면만 부각 혹은 왜곡시켜 나쁜 기사만 쏟아냅니다.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듣는 자로 하여금 망하게 하는 마귀의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면서 무관심하고 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도 사이버선교사가 되어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말하면 상당수 지도자나 교인들이 그것을 반대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자는 것입니다. 맡긴다는 것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냥 맡기는 것이 옳을까요? 최선을 다하면서 맡기는 것이 옳을까요? 하나님께 맡기자는 사람들 기도라도 하느냐? 애타는 마음이 없는 것을 보아 별로 기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딤후2:14에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해가 생겼을 때는 일을 키우지 말고 속히 해명할수록 좋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본다면서 침묵만 할 때 일이 더 커지는 것을 저는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침묵으로 키운 그 문제를 결국 지혜로운 사람들이 등장하여 처리하는 것을 보면서 침묵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느낍니다.
이스라엘의 중간사를 보면 적들이 유대를 공격할 때 꼭 안식일에 침략합니다. 그 때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지킨다고 가만있다가 큰 피해를 당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될 때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신학적인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고 안식일에도 생명에 관한 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싸울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마카비는 군대를 모아 독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침략하는 적군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물리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게 그리고 번번이 역사해 주셨는지 자세한 내용은 이스라엘 중간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에 의해 기독교가 얼마나 박해를 받았습니까? 박해의 내용은 거의 100% 오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천국을 전하니 다른 나라를 전한다고 반국가적인 단체라, 왕 되신 예수를 말하니 로마 황제 말고 다른 왕이 어디 있느냐고, 성찬식을 하니 사람 고기 먹는 인육식자라, 박해를 피해 모여 예배하니 남녀 불륜의 집단이라, 혹은 네로는 로마를 불질러놓고 기독교인이 한 것이라고 꾸며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온 국민의 증오의 대상이 됩니다.
그 때까지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순교를 더 즐겨했습니다. 신학적인 차이 때문입니다. 만약 침묵만이 신앙이라는 신학을 가졌다면 그 박해는 계속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그렇게 침묵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면서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변증가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변증가들은 로마 황제들을 상대로 변증문서를 만들어 보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에 대한 오해는 점차 불식되었고 결국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또 국교로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처럼 꼭 죽어 매장될 일이 있다면 침묵하세요(마27:12). 사람이 할 일은 하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싸우는 것과 정당한 변호는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사기를 보더라도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사사를 일으키셔서 하셨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해서든지 뜻을 이루시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하는 일을 비난하거나 차단하는 어리석은 일은 범하지 말아야합니다. 내가 하지 못하면 기도로라도 도와야 할 것입니다.
3. 치유에 대해 좀 더 알아야겠습니다.
병들었을 때 어떻게 하느냐? 이 때 기도만 해야 하는가? 아니면 치료만 해야 하는가? 이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을 늘 봅니다. 정답은 방법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기도와 치료가 병행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치유는 하나님이 주시지만 그 방법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경우 기도만 해도 낫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예는 아닙니다.
우리는 그 예를 행9:17-19에서 보게 됩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안수할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지만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졌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셨어도 음식에 문제가 있어 건강치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디모데의 질병에 대한 바울의 처방 역시 딤전5:23에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했습니다. 바울이 믿음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그리고 피곤에 지쳐 우울증에 걸린 엘리야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음식과 잠으로서 그의 질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신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말씀과 양식으로 양육하셨습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시고 매일 하늘의 만나와 반석의 생수 그리고 절기에 무교병과 쓴나물로서 이스라엘을 먹이셨습니다. 이 음식들은 신령한 의미 외에도 그 특징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과 마음을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양육하시면서 음식의 도움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 전 스포츠맨으로 불리는 어떤 분이 간에 병이 들었기에 물어보니 10년간 현미를 먹고 있었습니다. 현미는 폐대장에는 좋으나 간담은 억제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간이 비교적 약한 소양체질이 현미를 그토록 오래 먹고 있었으니 간이 약해질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 한 가지만 알게 해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우리의 환경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병들었을 때 회개하고 기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내신 방법들을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예처럼 음식을 통해서 건강을 얻으시고 혹은 유익하다면 하나님이 내신 다른 방법을 끌어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든지 건강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이 땅에 베풀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도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한다는 하나님의 탄식이 들려옵니다. 무엇보다 알아야 할 분은 우리 주 예수입니다. 다 잊어도 예수님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배워 확신한 일에 거합시다. 우리 모두 진리의 지식으로 충만하여 자유하게 해주시는 놀라운 진리를 경험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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