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부설교

믿음의 축복

공 상희 2008. 8. 29. 09:07

믿음의 축복

롬4:13-25절, 253.256.539장. 3927 Bible 말씀연구소 박봉웅 목사.

생명과 구원의 종교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위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구체적인 약속 곧 메시야를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음으로 받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내용을 한마디로 말해본다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같이 다 죄인이고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그 모델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의 신앙의 내용을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23절의 말씀처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할례받기 때문에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었기에 구원에 이르렀고, 할례는 구원받은 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믿었던 방법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이런 하나님을 믿었으니 그의 신앙은 부활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절 말씀을 보면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믿었던 믿음의 내용이 부활신앙이었음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증거 하면서 본문 마지막 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창세기 22장에서 100세에 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참으로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약속의 자손을 끊으려고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제단에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까? 이것처럼 불합리하고 모순되는 것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그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으로나 합리적인 것으로는 절대로 이삭을 드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제단에 데리고 가서 이삭을 죽이기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으로 이미 이삭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은 무엇을 믿고 그의 아들이삭을 바친 것입니까? 그 해석이 바로 로마서 4장에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 믿는 부활신앙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없는 것을 가지고 있도록 하시는 창조주의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했을 때,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 것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것은, 생명을 살리는 운동은 생명을 지불하고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단독의 사역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결국 이 사건을 통해서 장차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는 바로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알 때 가능합니다. 부활신앙은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 가운데 있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을 믿을 때,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기독교는 윤리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오순절 이후에 사도 베드로는 첫 번 설교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어야 합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부활신앙을 가졌다면,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날마다 부활을 뜨거운 가슴으로 외치며 믿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신앙이야말로 기독교신앙의 핵심이며, 부활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산 소망으로 가슴이 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요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라고 했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기독교입니다.

둘째는 아브라함이 믿었던 신앙의 내용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는 곧 기적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18절에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아들을 낳을 수 있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19절에서 설명을 잘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 그 몸이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라도 90세가 되었고 그녀는 처음부터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겠다는 말씀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될 줄 알고 믿었습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측 가능한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하고, 불합리한 것을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기적을 동반합니다. 기적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을 믿을 때 가능해지는 것은 무수히 많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믿음이 없기에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묻기를 왜 우리에게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느냐고 했을 때 믿음이 없는 연고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기적을 동반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안 되는 것을 되게 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적 중심의 신앙을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꼭 기적을 봐야 믿겠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욕구충족을 만족시켜주는 이적을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은 불가능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여 주십니다. 기독교 역사에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믿음이었고, 그것은 기적을 동반했습니다.

사실 예수 안 믿던 남편이 예수 믿게 된 것은 기적이고 안 믿던 부모님이 예수 믿게 된 것도 기적입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의사가 생각할 때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병을 믿음으로 고친 사람을 수도 없이 보아왔고,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단된,

사람이 믿음의 기도로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를 선물로 받은 예를 수도 없이 찾아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를 잘 보지 못할지라도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믿음이 기적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사실 우리가 부활신앙을 갖게 된 것도 기적이며,

땅 위에 발붙이고 살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 자체도 기적입니다. 기독교는 이론의 종교가 아니고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과, 우리 가정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를 알고부터 사람이 달라지고, 복음을 알고부터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셋째는 아브라함이 믿었던 신앙은 약속을 믿는 신앙입니다. 20절 말씀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신념과는 다릅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의 소망사항에 대한 확신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인격적 상대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신앙과 맹신은 다릅니다.

달을 보고 절하면서 소원 성취를 비는 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이란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녀를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은 곧 하나님의 약속은 참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에 영광을 돌리는 믿음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진실성을 믿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오늘 아침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은 것은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키었거나 할례를 받음으로 된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이삭을 살리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사망권세에서 다시 살리신 줄 믿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기적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오늘과 같은 시대에 꼭 필요한 믿음입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질 때 변화의 역사, 기적의 역사를 체험케 되리라고 봅니다.

내 자신의 그 무엇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깨달았으니 이제 우리의 미래의 삶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와 세상을 넉넉히 이기고 승리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