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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0406 고등부 (찬송 14, 487, 483 성시 9)
이렇게 기도하라(마6:5-15) - 주기도문1
<예화> 한 미국인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다가 식인종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식인종들은 먹을 양식을 마련했다고 무척이나 즐거워하면서 잔치가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선교사는 오랏줄에 꽁꽁 묶여 추장앞으로 끌려 갔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교사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하며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눈을 뜨고서 선교사 앞에 있는 식인종 추장을 보는 순간 선교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선교사 앞에 있는 바로 그 추장은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왔었던 대학교 동창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식인종 추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그렇게 많이 배웠어도 변한 것이 없었나?"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식인종 추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섭하게 하시나! 나도 무척 많이 변했다네. 과거에는 기도를 전혀 하지 않고서 사람을 잡아 먹었었는데, 이제는 기도를 하고 나서 잡아먹지!"
우리가 일평생 드리는 기도 중 가장 많이 드리는 기도는 무슨 기도 입니까? 아마 그것은 주님께서 가르처주신 본문의 기도일 것입니다. 이 기도를 드릴 때 얼마나 우리는 그 의미를 알고 드립니까? 혹 아무런 의미도 없이 기계적으로 반복하여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교에서 외우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처럼 하나의 주문을 외우듯 무의미한 반복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주기도문을 하는 속도를 보면 여러분 스스로 아마 주문외우듯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이렇듯 아무렇게나 주문 외우듯 해서는 안될 많은 내용과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이 기도를 자세히 다음주까지 살펴 보도록 합시다. 흔히 우리는 이 기도를 가리켜 "주기도문" '주기도' 혹은 "주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명칭을 부여 한다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라는 명칭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의 내용 가운데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이 기도의 필요성이 우리 주님께는 전혀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 '우리 주님은 죄가 없으시다'고 말씁하고 계시는데 죄가 없으신 분이 어찌 사죄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 기도는 제자들의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에 의하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눅11:1)
1. 주기도문의 탄생 동기(Luke 11:1) 1)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나도 예수님 같이 기도하고 싶다'는 간절한 갈증과 열망이 제자들의 마음 속에 솟아 났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생애가 기도하는 일생이었는데 이를 가까이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에서 새벽 동트기전 아직도 어두울 때에 기도하셨고, 때때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셨습니다. ① 공생애 시작 - 광야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신 후에 사역을 시작 ② 이적,기사 - 5,000명을 먹이시는 위대한 기적을 베풀기 전 기도하셨고 ③ 변화산 -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시기 전에 기도하신 주님 ④ 나사로를 살리실 때 - 기도하신 후에 이루셨고 ⑤ 십자가의 죽으시기 전에 -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 감당하시기 전에 밤새워 기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3번 ⑥ 운명하시기 직전 -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⑦ 제자를 선택하실 때 - (눅6:12),눅 3:21, 요 6:11, 요 11:41, 제자들은 우리 주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치신 후, 풀 섶에서 일어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 거룩한 광채와 얼굴을 가득 채운 평온함과 하늘로 부터 부어주시는 능력으로 충만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제자들도 체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선생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본문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1:1에는 이 주기도가 나오게 된 배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하고 요구한데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것은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가르쳐달라, 즉 기도의 형식같은 것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가르침의 핵심을 알려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를 이해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선명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2) 새로운 기도가 필요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이 진지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을 보던 제자들이 요청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기도를 진지하게 하시는데 왜 우리에겐 그렇게 할 수 있는 기도를 가르쳐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은 기도할 때 사용하는 문장, 모범적 기도의 형식, 기도에 관한 일반적 교훈까지를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당시 랍비들은 18가지의 기도문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 역시 세례요한에게 배운 기도를 따라하고 있었는데 그의 기도에는 형식적이고 문제가 되는 부분들이 많아서 그대로 옮겨서 사용하기에는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필요했고 나아가 의식적인 기도의 탈피가 요청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들의 무지와 무능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부탁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떤 기도가 응답 받는 기도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모르면 배워야 발전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 요청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 아뢰야 하겠습니다.
3) 기도는 인간의 본능이다.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기도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로서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미개한 문화에 사는 사람들일수록 물건들 즉, 우상을 많이 섬깁니다. 무속신앙도 비교적 기이하거나 오랜 세월을 지내온 물건들에게 복을 빕니다. 지신, 산신, 용왕, 해신, 달신, 별신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데 이 모두에게 복을 달라고 비는 기도를 합니다. 예) 신학자 로이드 죤즈는 "사람이 왜 기도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는 오히려 이렇게 반문하였습니다. "뻐꾸기는 왜 밤에만 우는가?" "독수리는 왜 창공을 솟아오르는가" 그 이유는 뻐꾸기는 밤에만 울도록 지음 받았고, 독수리는 창공을 향해 날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기도하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인간성의 연약함에 부딪힐 때 마다 기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천국은 무릎으로 나아가는 나라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제자들은 "기도에 대하여"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한 것이 아니라,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단순히 기도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신학이나 기도에 대한 어떤 이념을 배우기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는 사람중에서도 전혀 기도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는 기도를 해보기 전까지는 배울 수가 없는 종교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진, 기도를 향한 목마름과 기도의 열정 앞에, 주님은 응답하시기를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고 하시며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2. 잘못된 기도의 모형(Mt6:) 1) 외식하는 기도(V.5) 유대인은 제3시, 6시, 9시(오전9시, 12시, 오후3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갑니다. 또 기도하는 시간과 함께 중요한 것은, 회당에서 기도할 때만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통속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기도에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자기 절제의 모습으로 훈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기도 그 자체의 중요성을 상실할때 바리새인처럼 외식하는 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과시하는 모습을 나타내려고 열심히 기도를 하므로 기도 본래의 의미를 변질 시키기도 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는데, 그들은 회당에 들어가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거리에서부터 기도를 시작하므로 자기가 기도 좋아함을 나타내곤 했습니다.
2) 이방인과 처럼 중언부언 하는 기도(V.7) <중언부언> 국어 사전을 찾아보면 - [한 말을 자꾸 되풀이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할 때 아무런 의미도 없이 자꾸 되풀이 하는 단어가 이런 중언부언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단어의 원 의미는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말을 배울때 뜻도 알지 못하고 따라서 발음하는 의성어(empty words)로서 아무 뜻도 없이 중얼거리는 것과 의미없는 단어의 나열하는 것을 말합니다. 간혹 오랜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을 하면서 어쩌면 우리의 기도 용어도 하나의 익숙한 기계적인 언어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기도에 영혼에서 우러나오지 못하고, 기도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기도가 바로 <증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기도 시간을 오래 잡고 말을 많이 해야만 하나님이 들으실 줄 아는 기도로 오해를 한다든지, 좋은 단어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토하는 열변적 기도, 그리고 무조건 오래 엎드리기만 하면 좋은 기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간혹있습니다. 그러나 개인기도 시간이 긴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으나, 의미없이 드려지는 기도는 오랜 시간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3. 기도의 모형 "이렇게 기도하라" 단순히 기도를 암송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정신과 기도의 올바른 태도를 강조한 것입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기도 생활의 모든 것, 즉, 기도의 모범과 기도의 구조와 내용을 전부 배울 수가 있습니다. 암송만 하고 그 의미를 올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틴루터(Marthin Luther)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의 기도로 삼고 있지 않으면서 무의미 하게 반복 될때, 이 기도는 순교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라고까지 규정하였습니다. 이는 의미를 알고 기도하는 자가 되라는 권면입니다.
4. 주기도문의 구성과 여섯 가지 기원 1) 주기도의 구성 주기도문은 그리스도 인에게 있어서 사도신경, 십계명과 더불어 그리스도 인의 생활을 인도하는 3대 지침 중의 하나입니다. 사도신경은 성경 가운데서 그리스도 인이 믿는 가장 중요한 내용을 뽑아내어 신앙고백의 형식으로 만든 것으로 사도들에게서 유래되었다고 해서 사도신경이라 부릅니다. 이 사도신경은 5세기 말 서방교회에서 부터 사용한 신조를 적은 격문 즉 신앙내용을 적은 믿음의 고백서입니다. 십계명은 모세가 하나님으로 부터 구약의 율법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의 생활규법 중 가장 핵심적인 것 10개 항목을 받은 것으로서 행위규법의 윤리입니다. 주기도문은 본질상 사도신경 처럼 신앙고백적 교리도 아니고, 십계명 처럼 생활규범적 윤리도 아닙니다.주기도문은 전반부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후반부에서는 인간의 생활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내용상 전체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각 부분은 세 가지의 기원(청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송영이 있습니다.
2) 여섯가지 기원 주기도문의 첫째 부분을 통해서 자신의 의지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기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의 욕망에 하나님의 뜻을 묶으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으신 거룩한 뜻이 피조물인 자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 지기를 소원하는 청원입니다. 둘째 부분은 이 땅에서 사는 자신의 삶 속에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요소의 청원이며 이것까지도 하나님의 영광 아래서의 자신의 행복과 이웃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특히 둘째 부분의 세 가지 청원은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삶의 영역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는 의미가 강합니다. 즉 현재 삶에 필요한 양식, 과거를 위한 용서, 미래를 위한 도움 등 삶의 전 영역이 하나님께 맡겨지는 것으로서 기도는 삶 그 자체를 천지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모두 맡기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 가지 간구 속에는 첫째가 성부 하나님의 공급, 둘째가 성자 하나님의 죄 용서, 셋째가 성령 하나님의 보호와 도움이 나타남으로써 자신의 모든 생명에 관한 것들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결 론 주기도문에 나타나 있는 여섯가지 간구(청원)는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을 위한 구체적인 필요"로서 앞의 세가지 간구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자신의 삶의 목표와 의지를 나타냅니다. 나머지 세 가지 간구는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유지되는 신앙표시이며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삶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상호관심에 대한 권면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기도문의 둘째 부분에 나타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의 기원은 배고픈 돼지가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꿀꿀거림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이 보존되는 것과 모든 필요의 충족이 아버지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주기도문을 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이번 기회를 통하여 우리의 주기도문이 단순한 주문이 아니라 살아계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되고, 이웃을 향한 우리의 기도가 될 수 있도록 깊이 묵상하며 드리는 기도가 됐으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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