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주일

성령의 권능으로 전도하는 교회(행5:17-32)

공 상희 2007. 5. 23. 14:29
성령의 권능으로 전도하는 교회(행5:17-32)  

 

성령의 권능으로 전도하는 교회(행5:17-32)


어떤 한 대학교수가 학생들 앞에 섰습니다. 이 의과대학 교수는 지금 중대한 질문 하나를 던지고 있습니다. "제군들 만약에 어떤 부부가 있는데 남편은 아주 심한 유행병에 걸려 있고 또 부인은 폐결핵으로 거의 죽어 가는 상황이고 이미 아들을 넷을 낳았는데 네 아들 모두다 어머니의 병에 전염돼서 말라 가고 있는 상황에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했다고 하면 제군들 같은 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교수님 그건 볼 것도 없습니다. 없애야 합니다." 그때 교수가 말했습니다. "학생은 금방 위대한 대 음악가 베토벤을 죽였네." 환희의 송가를 짖고 또 운명을 지은 위대한 악성 베토벤은 바로 그런 환경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비참한 상황 가운데 많은 마을 사람들이 그 어머니에게 아이를 없앨 것을 종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생명을 없앨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낳을 것입니다." 그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베토벤이 탄생했던 것입니다. 과연 토마스 폴로가 말한 그대로 위대한 희망은 위대한 사람을 만들어 내는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이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위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은 위대한 세상을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절망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물 부족이 너무 심각해서 이제 일류는 목이 말라죽을 것이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혹은 '인구 문제 때문에 일류는 살 수 없게 되는 날이 다가 오게 될 것이다. 공해 때문에 우리는 서서히 숨을 쉬지 못하고 죽어 갈 것이다.' 여러 가지 문제를 말하면서 희망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근거가 있는 말입니다. 이유가 있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여러 가지 조건들이 채워졌다고 그 조건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마틴루터가 말했습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희망이라." 그랬습니다. 경제 가가 세상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정치가가 세상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환경이 세상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희망이 있는 한 이 세상은 움직여 나갈 것입니다. 희망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 이 땅에 있는 한 이 시대도 희망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이 시대의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내용을 살피면 바로 그 시대도 희망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이스라엘을 식민 통치하고 있는 로마 제국은 날로 날로 강대해지고 있습니다. 점점 더 그 세력을 뻗어 나가고 있고 이스라엘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이 믿으려고 했던 종교 지도자들마저도 타락했습니다. 교권 주의에 빠져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허위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고 그들이 믿는 정치 지도자들 모두도 타락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배만 채우는 것에 온통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시대에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대도 희망은 있었습니다. 성령이 오심과 함께 영혼의 불길처럼 퍼져 나가고 있는 복음이 바로 그 시대의 희망이었습니다. 성령의 오심과 함께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가 그 시대의 희망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복음을 들고 담대하게 거리마다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 복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시대의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골목마다 거리마다 이 사도들을 따라왔던 것입니다. 왜요? 거기에 희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고기들은 불이 있는 곳으로 모여듭니다. 빛이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희망이 있는 곳을 향해서 모여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종류의 희망을 주었기에 사람들이 그토록 많이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이 제자들 앞으로 다가 왔을까요? 먼저 그들은 치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번같이 해보실 까요. "치유하는 사람들" 15-16절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그렇습니다. '다 나음을 얻으니라.' 그들 앞에 나온 사람들은 제자들에 의하여 치료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용한 의사가 있는 곳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 앞에 나와서 그들의 병을 내어놓고 치료받는 위대한 일들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의사들이 여러분 계십니다만 소문을 들어보면 용하다는 소문이 부산에 퍼져서 환자들이 많이 온다는 그런 소문을 듣고 한번씩 가보면 정말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되며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들은 자기를 치료하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예수님에게로 모여들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에게 가면 치유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병든 자가 치료를 받았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가 위로를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는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치유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께로 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마음이 상한 자 주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 마음의 병이 치료를 받았습니다. 우물가의 여인 같은 생활이 뒤죽박죽이 되어서 삶이 처량한 병을 앓고 있던 그는 사람들도 주님을 만나게 되는 순간부터 그 삶이 치유를 받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삶을 정경이 이렇게 요약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9:3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게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가르치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말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기도 하셨지만 말씀과 함께 치유하는 역사를 베푸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들은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 가지를 설명할 수 있겠으나 우리는 한가지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을 치유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치유 자로 이 세상 속에 보내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많은 병자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있는지요. 어제 설날이었지만 우리 성도 가운데 몇 분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심방을 갔었습니다. 설날에도 왜 그렇게 아픈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고 병석마다 환자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육체가 아픈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상한 자들이 왜 그렇게 많은 지요. 내가 누구에게 상처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지요. 이 땅에 마음이 상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희망을 상실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기력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열등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좌절감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 그것은 치유하기 위하여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상처를 주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쉽게 입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를 쉽게 주는 자 상처를 쉽게 받는 자 그것과 함께 또 한 무리의 위대한 자들이 있으니 그것은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들입니다. 잘못하면 우리가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나도 모르게 뱉은 말 한마디로 나의 형제와 나의 이웃들에게 상처를 주신 적은 없었나요? 무심코 행한 행동이 나의 이웃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은 없었던가요?


여러분 우리가 상처 주는 사람이 되면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떠나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들을 치유하며 그들을 감싸 안으며 그들은 위로하고 그들을 고쳐 주는 치유 자의 자리에 들어 있을 때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싸매어 주는 자에게 모입니다. 용서해 주는 자에게 모입니다. 용납하고 인정해 주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존경하는 위대한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 그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젓가락 간디 얼마나 빼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위대했습니다. 그의 가슴이 얼마나 넓었든지 하루는 헬크타 시를 걸어가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가 손을 뻗어서 도와 달라고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간디가 그 할머니의 야윈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손수건을 끄집어내어서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할머니 울지 마세요." 이 간디는 자기도 글썽거리는 눈을 가지고 말합니다. "이 모든 인도 사람들의 눈물을 내가 닦아 줄 수만 있다면 그러나 내 손은 너무나 짧군요." 그 말이 인도를 독립시키는 위대한 힘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치유하는 사람이 되길 원했습니다. 수많은 상처받은 인도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기를 원하는 치유 자의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길 수많은 인도 사람들은 그를 등불처럼 태양처럼 바라보고 그에게 집결되었던 것입니다. 기어이 독립은 쟁취하고야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이 땅에는 온통 상처받았다고 울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치 있습니다. 하소연을 들어보면 누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하는 사람은 왜 그렇게 많은지 쉽게 남을 상처 주는 사람도 얼마나 많이 있는지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합니다. 내 형제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들을 치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 위에서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상처를 씻어 주셨습니다. 치료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그 피 붙은 손 그 피 붙은 손이 우리의 모든 상처를 치유해 주신 것을 우리가 믿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 못 박힌 손으로 치유하심을 받은 존재가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절망에서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눈물과 슬픔 가운데서 주님의 그 피 흘린 손으로 말미암아 치유함을 받은 치유 받은 백성들인 것을 고백합니다.


바로 그러길 이제 우리도 주님의 손이 되어서 예수님의 손으로 마음이 상한 자들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소외된 자들을 붙잡아 주는 손들이 되어야 합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치유하는 손으로 이 세상을 향하여 손을 뻗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역시 치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왜 우리 교회가 여기 있는 것입니까? 이 지역사회의 상처를 싸매는 교회 장애인들을 돌보는 교회 외로운 노인들을 붙잡는 교회 노숙 자들과 고아들에게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안으며 치유하는 교회가 될 때 하나님은 이 시대의 우리 교회를 희망으로 삼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시대의 희망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치유하는 자로 보내셨습니다. 오늘도 주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피 붙은 손이 여러분의 상처를 다 치유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것들이 고침 받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로 치유 받으시고 세상 가운데 나가셔서 수많은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손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유 자로 살아야 이 시대의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한번 같이 해 보실까요. "자유 자로 살아갑시다." 오늘 18-19절을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옥문을 열고 주의 사자가 그들을 자유롭게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사도들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밤에 갇혀 있는 동안에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갇혀 있는 그 자리에서 그들을 끌어내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갇혀 있지만 해방을 받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은 무엇입니까? 갇혀 있는 상황 가운데서 자유를 주는 것 그것이 신앙의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자기도 자유 하지 못한데 자기도 억눌려 있는데 우리가 누구의 희망이 되겠다는 것입니까? 먼저 우리가 자유 자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설교 가인 스폴린 목사님이 한 번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데 학생이 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천국을 설교할 때는 표정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습니까?" "예, 소망이 충만한 모습으로 설교를 해야죠." "그런데 목사님 지옥을 설명할 때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학생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학생 지옥을 설명할 때는 딴 표정 지을 필요가 없네.


학생 모습 그대로 모습으로 말하면 그게 바로 지옥의 표정일세." 무슨 말씀입니까? 여러분 입이 천국을 말하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우리의 모습 가운데 천국을 보여주지 안으면 누가 천국을 믿겠습니까! 예수 믿으라고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삶 가운데 근심이 가득하고 아직도 자기를 굴러 메고 있는 모든 열등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좌절감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산다면 누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먼저 내가 자유 자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자유 자가 된 것을 세상에 보여줄 때 우리가 세상에 소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속에 있지 않았습니까!


사자들이 으르렁거리고 있었지만 그는 자유 자였습니다. 사자와 더불어 완전히 분리되는 그런 자리에 하나님 은혜의 손아래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길 다리오 왕조차도 희망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랍과 메삭과 아벳느고 그는 풀무 불 속에서 공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유히 마치 해운대 온천을 즐기는 사람처럼 거기서 놀고 있었습니다. 왜요 자유 자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들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길 수많은 바벨론 사람들이 그들을 희망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까! 바울과 실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깊은 빌립보 감옥 속에서 모든 속박 가운데 그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자유 자였습니다. 환경이 그를 억압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찬송할 때 마치 소풍 나온 사람처럼 즐겁게 주를 노래하고 있을 때 죄수들이 그들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간수들이 그들의 모든 노래를 듣고 있었습니다. 감옥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다 도망간 줄로 알고 자살하려고 하는 간수를 향해서 사도들이 말하지 않습니까! "죽지 마십시오.


우리가 여기 있소." 그 위대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자유의 사람 바울과 실라를 바라보면서 이 간수가 무릎을 꿇지 않습니까! 그들은 지금 소망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찌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소망의 모습 자유의 모습을 보여줄 때 '우리에게 사람들은 어찌하여 그런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묻게 될 것이고 우리는 복음을 증거 하시는 위대한 기회를 얻게 될 수 있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어떤 종류의 감옥에 갇히셨습니까? 환경의 감옥이십니까? 질병의 감옥이십니까? 인간관계의 감옥이십니까? 미움의 감옥이십니까? 근심의 감옥이십니까?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로 옥문 밖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머물러 계시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이미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는 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조언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알지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 옥문을 박차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자유 자가 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믿음으로 이미 주안에서 자유 하게 된 것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자유 자의 모습으로 살면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 삶 가운데 희망을 발견하게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에 자유 자의 모습을 보여 보여주시고 자유의 복음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들어 세계적으로 존경받고 있는 칭송을 받고 있는 성악가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죠? 아주 잘생긴 사람입니다. 장애인 성악가 최승원씨입니다. 뉴옥 타임즈가 그를 묘사하기를 "황금의 목소리를 가진 한국인이다. 사나이다." 이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수 없는 감옥과 같은 여건 속에 살았습니다. 4살날 때 그는 소아마비를 앓았습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비참한 가운데 살았습니다. 열등감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엎친대 덮친 격으로 아버지가 그만 사업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가난했습니다. 고통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하나님의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들려 오는 천사의 노래 찬송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 속에 열등감들이 깨어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찬송하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주님을 찬송하면 할수록 그는 점점 자유 자가 되어 갔습니다. 자기의 모든 연약한 신체가 전혀 자기를 얽매는 감옥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가 알았습니다. 93년에 메트로폴리탄 음악 콩쿠르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3만 명의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모였습니다. 그 전날 밤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내일 꼭 저와 동행해 주십시오. 저를 써 주시옵소서. 제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겠나이다." 이런 기도를 드리고 그는 결선에 나갔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무대에 설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갈채를 보내는 것은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집고 있는 그 지팡이는 지팡이가 아니라 그것은 희망이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은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그는 장애의 감옥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자유 하게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어떤 상황 가운데 계시던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수많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자유와 해방을 보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복된 자유 자로 사시는 장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증거 자로 살아야 우리는 이 시대의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2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옥에 가두어져 있던 사람들이 백성들을 지금 가르치고 있나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대조입니까! 방금 전만 해도 감옥 속에 있던 자들이 지금은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도의 모습이 아니겠어요. 감옥 속에 있는 자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증거 하는 자 이것이 바로 성도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자기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가지 않고 성전으로 바로 가서 생명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금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건강하게 하나님의 집까지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은총을 주셨습니다. 건강을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을 주신 것은 바로 이 건강을 통하여 내가 증거 하는 자가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증거 함으로 복음을 통해서 희망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재능을 주셨습니까? 이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을 증거 하기 위하여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기회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전하라." 이것이 우리가 자유를 얻은 주님의 위대한 명령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우리 20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를 P.R.하고 자기가 희망이라 말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요즘 저는 선거 철이 다가오는 것을 느낍니다. 왜냐면 가끔 예배 시간에 후보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오시지 않으시지 모르지만 왜 선거 철만 되면 후보들이 교회에 나타나는 걸까요? 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눈 도장을 찍기 위하여 여러분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희망입니다. 내가 바로 행동하는 양심입니다. 나를 믿어 주시고 나에게 희망을 걸어 주십시오. 이 정치가들이 이렇게 자기에게 희망을 걸어 달라고 얼마나 열심히 선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이 세상에는 돈을 자랑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자기 권력을 자랑하는 자로 가득차 있습니다. 자신의 명예를 자랑하는 자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참 희망은 정치가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경제인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참 희망은 진리이신 생명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 시대의 희망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죄수들이 지금 267명이라고 하는 엄청난 숫자가 배를 탁 로마로 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배에 타고 있습니다. 그들은 풍랑을 만났습니다. 유라글루 풍랑 가운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절망은 권력을 쥔 백부장이 아니었습니다. 또 지금 노를 젓고 있는 선원들도 아니었습니다. 기수를 쥐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돈을 쥐고 있는 선주도 아니었습니다. 초라하게 포승줄로 묶여서 압송되고 있는 바울 그 바울이 바로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증거 하는 바울 수많은 사람들은 답이 없었지만 하나님 말씀을 가진 바울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증거 하던 말씀을 같이 읽읍시다. 사도행전27:24-25절입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희망은 생명의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살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 시대의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예수 안에 소망이 있다고 말하는 자에게 이 시대의 희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미국 매사추세츠 해안에 잠수함 한 척이 고장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점점 산소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드디어 구출하는 사람들이 다가왔습니다. 잠수함 가까이로 깊이 잠수해 들어갔는데 그 안에서는 망치를 가지고 모루스부호를 지금 교신하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이런 소리예요.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구출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다시 망치로 교신을 했습니다. "조금만 참아라. 희망이 있다. 우리가 당신들을 곧 구출해 줄 것이다."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 시대에 희망이 있는가?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조국에 희망이 있는가? 우리 민족에 희망이 있는가?"


그때 여러분 이렇게 말씀해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 희망이 있다. 예수 안에 희망이 있다.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 예수 안에 자유가 있다. 복음 안에 희망이 있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하여 죽으셨다. 당신을 사랑하신다. 당신을 자유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그 분을 믿음으로 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것이다." 이렇게 담대하게 그들에게 증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어떤 상황에 계시던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십시오. 그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 귀한 복음으로 증거 하여 세상에 놀라운 제반과 기쁨을 주고 소망을 주는 귀한 성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시대의 희망입니다. 이 시대 모든 절망을 향한 해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또한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상처 입은 수많은 자를 치유하는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어떤 감옥 속에 들어가게 되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자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줍시다. 우리의 기쁨을 보여주고 평안을 보여주고 소망을 보여주어 그들로 희망을 발견하게 합시다. 쓸데없는 것은 자랑하지 맙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사랑을 자랑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천국의 소망을 안겨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이 모든 33년의 사역을 마치시고 드디어 천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귀한 얘기가 있습니다. 천사들이 예수님에게 물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도대체 이 땅에 무엇을 남기고 오셨습니까? 무슨 조치를 해 주셨습니까?" "그래, 난 12을 남기고 왔지" "그들을 가지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 다른 조치는 없습니까?" "아무 것도 없다. 나는 그들을 믿는다. 그들이 이 땅을 새롭게 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믿으십니다. 이 시대의 희망으로 우리를 남겨 두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하고 세상을 치유하는 위대한 일들을 진행해 나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믿으십니다. 우리가 바로 이 시대의 희망입니다. 이 시대의 희망으로 사시는 성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