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복음서

파도속에서(마 14:22-33)-홍정길목사

공 상희 2007. 1. 24. 11:38
파도속에서(마 14:22-33)-홍정길목사  

 

파도속에서(마 14:22-33)


풍파 속에 주님이 누워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죽게 된 줄로 알고 주님을 깨웠습니다. 일어나신 주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 때,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너에게 있다는 믿음이 이런 위기 때 정말 값어치 있느냐?" 물으셨던 주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거의 같은 환경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때는 낮이었는데 지금은 밤입니다. 그 때는 주님께서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셨는데 지금은 주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먹이시자 사람들은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왕관을 만들어 그 머리에 씌우려고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무리들을 해산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먼저 벳세다로 가라. 내가 나중에 가리라."고 명하시고 사람들을 모두 흩으신 다음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반대편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바람이 붑니다. 밤 사경 그러니까 새벽 3시부터 6시까지인데, 아무리 노력해도 거센 바람을 거스릴 능력이 없어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합니다. 아마 어두웠기 때문에 목표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들이 몹시 괴로워하고 있을 때에 주께서 친히 물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지금 바람과 파도와의 싸움으로 두려움에 꽉 차 있던 그들 앞에 이상한 물체가 바다 위로 저벅저벅 걸어오자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유령이다."고 외치는 소리에 주께서 "내니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저들을 안심시킬 때 시몬 베드로는 주님께 요청합니다. "주님, 만일 당신이 주시거든 나를 명해서 당신처럼 바다 위를 걷게 해주소서." 주께서 "오라" 명령하시니까 그는 바다를 육지처럼 걸어서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걷다가 갑자기 그의 시선이 바람이 만들어내는 큰 파도, 울렁거리는 파도에게로 옮겨지자 주님을 향한 신뢰가 무너져 바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외쳐댑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서 저를 건져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파도 속에 있습니다. 저번에는 예수님이 계셨는데 지금은 계시지 않는 상황, 외롭게 나 홀로 싸우는 싸움을 계속 해야되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 내게 오늘 이 시간 주께서 하시고 싶은 첫 번째 말씀은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기도할 때 병도 낫습니다. 기도했더니 안 되는 일이 되어집니다. 그의 믿음 생활이 점점 다양해지자 욕심이 생깁니다. 내가 예수님 같은 기적을 꼭 하나 하고 싶다. 기적 중에서도 물위를 걷고 싶다. 그리고는 금식하고 철야하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 믿습니다." 하고는 바다에 들어갔는데 풍덩 빠졌어요. 그래놓고 친구에게 하는 말이 "믿어도 안되더라."입니다. 그 때 옆에 있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야, 너와 베드로의 형편은 다르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라고 해서 갔는데 주님께서 너보고 바다로 오라고 그랬니?" 자기 확신, 자기 신념을 믿음이라고 강조하는 설교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가장 큰 적입니다. 믿음대로 된다는 말, 그 말은 내 의지대로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신 우리 주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주시면 당신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바다를 육지처럼 걸을 것을 믿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만 걸을 뿐 아니라 나도 걷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는 믿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을 나로부터 시작하려고 듭니다. 아닙니다. 믿음은 나에게로부터 우리 주님께로 신뢰의 대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정말로 전능하신 주님을 믿고 있는가? 나의 구속주 되신 주님을 믿고 있는가? 어느 때나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참으로 인격적으로 믿고 신뢰하는가를 다시 점검해보십시오.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기적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전능하신 주님을 온전히 알고 신뢰하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이 물위를 걷는 것 당연합니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이 물위를 걷게 해주실 전능하신 분이신 것을 내가 믿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의 명령 따라서 물위를 걷습니다. 그러다가 앞에 나타난 파도를 보고 빠져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는 모습을 봅니다.


여기 두 번째로 우리가 배워야 될 것이 있다면 믿어도 똑같이 믿는 것이 아니라 기질대로 믿는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베드로는 다혈질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중간이 없습니다. 전부이든지, 아무 것도 아니든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당신을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묻습니다. 이 때, 시몬 베드로는 확신에 차서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되도다. 이를 알게된 것은 네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가 안다. 네가 온전한 믿음을 가졌다." 그랬는데, 몇 절을 더 읽어가면 그 구세주와 주님으로 오신 주님께서 자기의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얼마 있다가 관원들에게 붙잡혀가서 모진 고난을 당한 다음에 십자가에서 죽으리라." 그랬더니 베드로는 금새 "그리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바로 전까지 "주는!"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당신이 말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야 되는 "주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에 "주님, 말 같은 소리하지 마시오.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인격 전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리 저리 말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께서 발을 씻기니까 숨 죽인 채 말도 못하고 황공무지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베드로는 자기 앞에서 예수님이 수건을 가지고 대야에 물을 담아 발을 씻기려고 드니까 "주님, 다른 사람은 씻겨도 나는 절대로 안됩니다." 하고 거절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없다." 그랬더니 "주님, 그러려면 내 전신을 다 씻어주시옵소서." 안한다고 그랬다가 전체를 다 씻기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고통의 때에 제자들이 다 떠난다는 예언을 듣고 그는 외칩니다. "다른 사람은 다 떠날지라도 나는 당신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 곁에 있다가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에 조그마한 칼을 뽑아 말고라는 사람의 귀까지 잘랐습니다. 용감무쌍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더 어려운 핍박이 오니까 그는 한 계집종의 신랄 앞에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아니, 맹세하며 부인합니다. 나중에는 저주하며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어도 똑같이 믿지 않습니다. 요한은 요한 같이 믿고 베드로는 베드로같이 믿고 바울은 바울처럼 믿습니다. 바울은 담즙질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그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행 20:24) 담즙질은 목표를 한번 세우면 죽어도 합니다. 그러니까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합니다. 기질대로 믿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기질은 우리 믿음의 반석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내 기질을 통해서 예수님 믿을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기질에 의지하는 믿음이면 안됩니다. 내 기질을 성령님께서 주장하실 때, 가장 아름다운 기질로 쓰임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때까지 베드로는 기질대로 믿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시험에 질 때를 자세히 살피면 이미 주께서 우리를 위해 다 이루시고 해결해주신 사건 앞에서 다시 반복해서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지금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파도가 일어났습니까? 아닙니다. 이미 노한 풍랑이 배를 흔들고 있었고 파도는 배를 삼킬 듯이 몰아붙이고 있었습니다. 그 정황 속에서 주께서 오라 하니까 갔습니다. 그 파도가 베드로를 삼키지 못한 채 예수님의 명령 따라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해결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잘 가다가 이미 주께서 해결해 놓은 그 파도를 보고 빠졌단 말이예요. 우리가 이렇게 실패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어떤 일에 실패해서 고통을 받았지만 주께서 그 실패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잘 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실패와 비슷한 경우가 닥치니까 믿음을 포기하고 무너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또 과거에 지었던 죄, 우리 주님께서 내 모든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옮겨졌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안개의 사라짐 같이 내 죄를 도말하신 주의 완전한 용서를 믿습니다. 내 죄가 주홍처럼 붉을지라도, 먹장처럼 검을지라도, 흰눈처럼 양털처럼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해결해주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승리하고 잘 살다가도 어느 날 비슷한 죄의 유혹이 닥치면 그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쉽게 무너집니까? 이미 주께서 해결해주셨습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유혹 앞에 무너져버린다면 무서운 파도를 보고 믿음을 잃고 물 속에 빠져버렸던 베드로와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주께서 해결해 놓으셨기 때문에 아무리 파도가 크게 불어닥쳐도 머리털 하나 젖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믿음이 흔들려서 파도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베드로 같은 내 모습을 삶 속에서 얼마든지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도 우리 주님을 찬양해야겠습니다. 믿음이 너무 연약하고 부족해서 주님께서 나 같은 것을 돌보지 않을 것 같지만 "나를 구원해주소서."라고 손을 뻗치는 베드로의 외침에 주님은 사랑의 손으로 그를 붙잡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말 한마디로 "그대로 떠올라라." 라고 하면 떠올랐을 텐데 사랑의 주님은 직접 손으로 붙잡아주십니다.


풍랑 속을 걸어오신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살펴보게 됩니다. 첫째로 우리 주님은 풍랑으로 고통받는 제자들에 대해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기도가 저들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분입니다. 먼저 보낸 제자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절망할 때, 아무도 나에게 관심 가져주지 않아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 때도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의 가사 처럼 "누군가 날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롭고 지쳐서 넘어져있을 때 누군가 날 위하여 기도하네" 우리 주님은 보좌 우편에서 이 험한 인생의 풍파를 헤치면서 살아가는 나를 향해서 기도하는 주님이십니다.


두 번째로 그 분은 보시는 분입니다. 같은 내용을 마가복음 6장에서 기록한 것을 보면 재미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막 6:48) 예수님께서 계셨던 그 해협을 지나가 호숫가에서 배 저어가는 제자들을 보셨다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추측키로는 그 캄캄한 밤에 보이기는 뭐가 보였겠습니까? 그러나 전능하신 주님께서 세상에 보지 못하는 것이 없으신 눈으로 제자들이 고통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은 내 한숨도 들으십니다. 내 억울함도 보십니다. 아무도 모르게 흘리는 눈물을 우리 주님은 보십니다. 주님 앞에는 빛과 어둠이 일반입니다. 세상에 주님 앞에 감추인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주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외치자 이사야 49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49:15-16) 우리 주님은 나를 보시는 주님입니다. 노 저어 가는 내 인생 항해 길에서 고통받아 기진해 쓰러져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그 때도 나를 찾아오신 주님입니다. 그 찾아오심은 어떤 세력도 막을 수 없습니다. 양 한 마리가 높은 산에 홀로 도망갔을 때, 목자이신 주님은 끝까지 찾아가서 그 양을 목에 안았습니다. 그 때까지 쉬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구덩이에 갇혀 있었습니다. 아무도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불을 뚫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찾아가셨습니다. 그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 도저히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그 무서운 풍파를 헤치고 걸어가십니다. 전능하신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도우러 가는 그 길에 물은 중력의 법칙을 버리고 아스팔트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어디나 찾아가십니다. 누구와도 함께 가십니다. 내가 믿음이 약해서 쓰러져 바다에 휩쓸리려고 들 때도 사랑의 손길로 나를 붙잡아 주십니다.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감사한 것은 "너 믿음이 없다. 왜 네가 믿음이 없느냐?" 그렇게 꾸중하지 않고 "네가 믿음을 갖기는 가졌었어. 그래서 물위를 걸을 때도 있었어. 그렇지만 네가 믿음이 적구나. 만약 네가 큰 믿음을 가졌다면 마치 저 홍해를 끝까지 걸었던 너희 조상 믿음의 선조들처럼 역사상 처음으로 호수 위를 걸어 육지까지 가는 사람이 되었을 텐데... 네가 나를 믿었다면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확실히 믿었다면 너는 끝까지 승리했을 텐데... 그러나 네가 믿음은 가졌지만 연약한 믿음을 가졌다. 그래서 너는 빠질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너를 지금도 사랑한다. 내 구원의 손을 붙잡아라. 내 사랑의 손을 붙잡아라"라고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서 기도하신 주님입니다. 내 모든 고통의 현장을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억울해서 견딜 수 없는 분들 계십니까? 그 억울함을 아시는 분이 계십니다. 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겉도 아시고 속도 아시고 밖의 표현도 아시고 속의 생각도 아시는 그 분, 모두 보시는 주님은 내가 힘이 없어 기진할 때도 찾아오십니다. 그 분이 나를 찾아오심을 막을 세력은 없습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그 분은 내가 쓰러졌을 때의 적은 믿음을 멸시하지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구원해주실 주님입니다. 믿습니까? 이 주님을 오늘도 찬양합시다.


그 주님을 평생 섬겼던 토플레디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42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청교도였는데, 얼마나 병을 많이 앓았던지 사람들은 그를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라고 했습니다. 평생을 아픔과 고통 속에 살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찬양했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아는 찬송가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를 작사했습니다. 또 우리에게 늘 격려를 주고 위로를 주는 귀한 찬송을 남겨주었습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태평성세가 되어서 고요한 바다로 항해하는 그 때를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절은 바뀝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무서운 노도광풍이 부는 풍랑의 밤에도 그는 믿고 있습니다. 이 바람이 나를 침몰시킬 수 없다는 것, 단지 이 흉맹한 바람은 기껏해야 내가 가고자 하는 곳까지 며칠 가야될 것을 단숨에 가게 만드는 지름길로 인도하는 운반기구에 불과하다고 그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항해 인생길 갈 때 주님께 간구해야 될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주여, 내게 믿음을 더해 주옵소서. 이 항해 길 인생 가는 동안 주여, 큰 믿음을 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 모두 찬송가 503장을 의미를 생각하며 같이 찬양하겠습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내 걱정 근심을 쉬없게 하시고 내 주여 어둔 영혼을 곧 밝게 합소서.

이 세상 고락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없을 때 큰 믿음 줍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