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선지서

이스라엘의 기질(호12:1-14)

공 상희 2007. 1. 22. 20:39
이스라엘의 기질(호12:1-14)  

 

이스라엘의 기질(호12:1-14)


 이 세상에 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아주 복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태어난 아이가 병들지 않고 사고 당하지 않고 나쁜 죄에 물들지 않고 바르게 자라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원리가 우리의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도 없고 하나님도 모르고 미신이나 섬기면서 살다가 복음을 들어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요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것 못지 않고 어렵고 중요한 것이 그렇게 예수를 믿은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바르게 자라고 변화되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신앙이 바르게 성장하는 것이 그것 못지 않게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지 않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모습으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고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의 족장들 중에서 성화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은 야곱입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만들어지기까지는 이십 년 이상의 종 생활을 거친 후의 일이었습니다. 결국 야곱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만들어지는데 장애가 되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기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기질을 보고 구원하거나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장하고 변화되는데 가장 그 사람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기질입니다. 기질이 강하고 거짓되면 거짓될수록 더 많은 하나님의 채찍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왜 예수를 믿은 후에도 우리가 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시련과 연단을 받을 수밖에 없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됩니다.


1. 이스라엘의 거짓된 모습


이스라엘의 고쳐지지 않는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1:12,󰡒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궤휼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니까, 그들이 하는 것이 거짓과 궤휼로 하나님을 에워싸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에워싼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이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하여 또 거짓말합니다. 그러니까 한번 거짓말을 하고 나서는 양심에 찔려서 당사자를 찾아가서 ‘이만저만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요.’라고 말하면 끝나는 것인데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거짓말에 또 거짓말을 하고 거기에 또 거짓말을 하니까 나중에는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수습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거짓으로 에워싸는 것이고 거짓으로 도배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하는 것이 통할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서 또 거짓말을 하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기가 질리게 해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드신 분이고 어떤 상태에 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뻔한 일에 대하여 거짓말로 속이려고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죄송합니다. 그만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이렇게 죄를 지었습니다. 너무 자주 실망시켜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면 끝나는 것인데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하면서 다른 사람의 핑계를 대니까 하나님께서도 상대하고 싶지가 않은 것입니다.


 12:1,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바람을 먹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실속없이 생각이 허황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누군가가 치켜 세우는 말만 듣고 자기가 마치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풍’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이 동풍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것인데, 한번 불어오면 모든 것을 다 죽이고 파괴시켜버립니다.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간다’는 것은 지금 자기들이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따라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시골뜨기가 도회지에서 깡패들을 만났습니다. 그는 깡패들이 추켜세우는 말이 정말인 줄 알고 멋을 부리면서 그들의 앞잡이가 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골뜨기는 정말 광풍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좋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면 그가 얼마나 거짓된 사람에게 속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사기꾼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을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바람을 좀 집어넣어서 자기 말을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후에는 철저하게 이용해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배성들에게 원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철저하게 하나님께 자신들의 삶을 맡기고 주어진 범위 안에서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을 져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들도 큰 대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2절,󰡒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리시라.”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과 싸워오신 것이 무엇입니까? 제발 ‘내 말을 좀 믿으라. 주위에 있는 나라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먼저 너 자신의욕심부터 꺾으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괜히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힘이 없으니까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신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반항을 했습니다.


 우리가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인정하고 자기 자신을 계속 죽여야 합니다. 결국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과정이고 자기를 죽이고 부정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을 수가 없습니다.


2. 야곱의 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사람이 조상 야곱이었습니다.


 3절,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성경은 야곱의 인간성을 태어날 때 형의 발꿈치를 잡은데서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하나님과 씨름한 것까지 연결시켜서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의 일생이었습니다. 물론 가끔 아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특별하게 태어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울음소리가 우렁차다고 하든지 탯줄을 몸에 감고 태어난다고 하든지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정말 태어날 때부터 그의 기질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도록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갓난아이인데도 얼마나 지기 싫어하고 집착이 강한지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나중 삶이 정말 태어날 때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이고 집착하는 것이 강해서 일단 한번 붙잡으면 절대로 놓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번 마음먹으면 무슨 말이든지 하고 무슨 짓이든지 해서 그 마음먹은 것을 이루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를 축복하실 생각이었으며 늘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항상 자기가 원하는 것은 먼저 움켜주었고 한번 움켜쥐면 절대로 놓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보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러는 것이 절망감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원하신 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면 야곱을 통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자기 것만 꽉 움켜쥐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직접 씨름을 하셨습니다.


3절 하,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여기서 힘을 겨루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야곱과 아무 말없이 씨름을 하셨습니다. 야곱은 밤중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목숨을 건 씨름을 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공격을 받고 씨름을 하는데 그것도 밤에 예의를 지키면서 씨름을 했겠습니까? 사람은 밤과 낮에 행동하는 것이 다르고 다른 사람이 볼 때와 보지 않을 때가 다릅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을 하면서 철저하게 자기 인간성을 다 보여준 것입니다. 온갖 속임수와 욕설과 비겁한 짓을 다 해가면서 이기려고 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그의 환도뼈만 위골되었습니다. 그때 야곱은 자기와 씨름한 사람을 보았고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던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4절,“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도대체 야곱이지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울면서 천사에게 간구합니까? 상대방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더러운 본성을 전부다 내어 놓았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숨기거나 감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울지 않는 사람입니다. 완벽주의적인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약한 부분을 내어놓거나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약한 부분을 알고 그것을 도와주려고 해도 야곱은 늘 자존심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늘 문밖에 세워두고 자기 멋대로 모든 것을 처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한번 씨름한 후 야곱은 자기가 얼마나 믿음이 없으며 얼마나 거짓되고 추악한지 하나님 앞에서 다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야곱은 자신을 감추거나 그렇지 않은 체 할 것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야곱의 마음 안에도 약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도 두려운 것이 있었고 울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껍질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한번 씨름한 후 야곱은 자신의 약한 부분을 모두 다 하나님 앞에 틀어내어 놓습니다. 그때 야곱은 승리자가 되고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7절, “저는 상고여늘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는도다.”


성경 원문에는 ‘저는 상고여늘’이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가나안’이라는 한 마디만 있습니다.󰡐가나안’이라는 말은 상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누가 가나안이고 누가 상인인 것입니까? 야곱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야곱은 빈털털이로 밧단아람으로 도망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짐승을 치면서 속임수로 재산을 증식시켰습니다.


라반과 품삯을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야곱은 양떼 중에 얼마되지 않는 얼룩지고 검은 것으로 품삯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생학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양들은 물을 마실때 교배를 하는데 그 앞에 무엇인가 세워두고 자극을 주면 얼룩지고 점이 있는 양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야곱은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이 자기가 가진 지식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이것은 땅집고 헤엄치는 것과 같습니다. 무한정으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런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야곱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시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라반에게 혹사만 당하고 돈 한 푼 받지 못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지 않고 속임수를 써서 자기 머리로 먼저 부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기 꾀로 하나님을 축복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직하게 장사를 해도 부자가 되게 하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믿지 못해서 항상 부정한 저울추를 사용했고 정직하지 않고 됫박을 사용해서 부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재산을 보면 어디서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축복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거짓으로 돈을 모은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8절,󰡒에브라임이 말하기를󰡒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하거니와”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짓으로 사취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지느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가지지 않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는데도 부자가 된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많이 가지는 것은 얼마를 가지든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지지 못한 것은 죄요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게으르고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 이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야곱의 결정적인 실수가 무엇입니까? 야곱의 결혼언약입니다. 12절, “옛적에 야곱이 아람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얻기 위하여 양을 쳤고”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온 것은 결혼할 여자를 보기 위해서 였습니다. 야곱이 거기서 여자를 보았으면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둘 인데 하나는 좀 사랑스럽고 하나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 언니를 결혼시킬까봐 라헬과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칠년동안 노동을 약속해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는 언약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베개를 베고 누워 있는 야곱에게 하늘 문을 여시고 나타나신 것은 지금 그가 성전에 누워 있으며 이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벧엘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너무 믿으면 못생긴 여자를 아내로 주실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서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는 대신 사랑을 위해서  선뜻 칠년간 종이 되는 계약을 세웠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 되는 것보다는 라헬과 연애하고 라헬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제사장의 자유를 포기하고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인과의 사랑을 위해서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포기했습니다. 아마 여인이 아니었다면 다른 것으로도 얼마든지 야곱은 그 특권을 포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공부라든지 아니면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똑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으로 그들에게 주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안전을 걱정해서 선뜻 앗수르와 주종 계약을 맺어버리고 애굽에도 조공을 보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들을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바른 위치는 바로 여기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바로 이 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그런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직성이 풀리지 않고 자꾸 우리 독단적으로 무엇인가 이루기 위하여 세상과 연합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이 존귀한 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다른 것을 따라가는 자들을 노예가 되게 하십니다. 가장 비참하게 만드셔서 자신의 모습을 똑똑히 보게 하십니다. 나중에 야곱이 애굽의 바로를 만나서 뭘라고 말했습니까?󰡒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왜 야곱이 이처럼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까? 그의 기질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빨리 하나님 앞에 항복했더라면 그의 세월이 이토록 험악하지는 않았을텐데 그는 끝없이 머리를 굴리고 자기 욕심대로 모든 것을 행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사람이 죽도록 고생하는 것은 사실 자기 기질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질이 강한 사람은 비싼 댓가를 지불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기질이 그런 변화없는 생활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구원방법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가장 강력한 힘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10절, “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그들에게 가나안의 모든 미신을 이길 수 있도록 선지자를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나안의 모든 미신과 복술과 귀신의 역사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왜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중에서 가장 귀한 선물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돈이나 권력을 주시는 대신에 말씀을 주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의 무서운 적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본성보다 더 무서운 적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이 세상의 어떠한 적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일어서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모두 다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힘을 주실 때 다른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주심으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백성들이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생활에 적용되도록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좀 깊이 있는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귀만 즐겁게 하는 말씀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책망하고 치료하는 말씀은 어떻습니까?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시원하게 합니다. 그러나 가벼운 축복의 말씀을 그때 그 순간 귀만 즐겁게 하다가 끝나는 말씀입니다.


13절, “여호와께서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선지자로 저를 보호하셨거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세이지요. 그러나 모세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낸 것은 모세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있고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런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가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그들은 망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위대한 구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른 설교의 말씀이 있는 한 하나님의 백성은 사탄의 모든 악한 흉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결국 자기 자신을 믿게 되고 자기의 얕은 꾀로는 마귀의 음모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결국 야곱이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 항복했기 때문입니다.


4절,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야곱의 삶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무엇이었습니까?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도망쳐서 아버지께 돌아가는데 형 에서를 만나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형 에서는 자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백명의 용사를 데리고 온다고 합니다. 야곱은 형과 싸울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상하게도 야곱은 에서에게만은 심한 컴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에서만 생각하면 고양이 앞의 쥐와 같았습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늘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에 형 에서보다 더 강한 자와 밤새 겨루어야만 했습니다.야곱은 지기 싫어서 이길 수도 없는 이 싸움을 끝까지 했습니다. 결국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 그분이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다리를 위골시켰을 때 그는 항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분을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다리로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이 힘센 자가 아니면 자기를 지켜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4절,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겼다.’고 하지만 ‘지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뼈가 위골되었을 때 야곱은 울면서 그에게 매달렸습니다. 이때 야곱을 수십년간 붙들어 온 자존심과 모든 인간의 꾀가 허물어지고 그는 완전히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그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사람은 울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운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번도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다른 사람 앞에 내놓은 적이 없는 아주 강한 기질의 소유자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어야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을텐데 마음을 꽉 닫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도 도우실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은 최초로 이 얍복강가에서 최초로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내놓고 도와달라고 울부짖으면서 간구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싸운 대상이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밤새 싸우면서도 자기가 싸우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침이 되었을 때 그는 자기가 싸운 대상이 다른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염체가 어디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울었습니다. 이때가 바로 야곱이 변하여 승리자라는 새 이름을 얻는 순간입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내놓고 몸무림치며 울 때 그는 새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야곱이 그토록 정직하지 못하고 간사한 사람이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변화시켜서 새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짓과 술수를 다 알고 계시지만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결국에는 그들이 자신의 연약함과 악한 기질을 인정하고 눈물흘리며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 일이 얼마나 늦게 이루어진지 아십니까? 너무 늦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후에 7백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볼 때 인간의 고집과 회개치 않는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의 구원을 더디게 이루어지도록 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야곱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벧엘에서 야곱을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야곱에게 일어났던 일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이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수 있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6절,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희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


그들이 살 수있는 길은 야곱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항복하고 벧엘에서 항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특권이요 이스라엘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길은 어떤 신비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애와 공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9절, “내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기를 명절일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그들은 명절일에 장막에 거하면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진짜 초막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14절, “에브라임이 격노케 함이 극심하였으니 그 주께서 그 피로 그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저의 수치를 저에게 돌리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