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문 서

지상에서 영원으로(전 1:2-11)

공 상희 2006. 9. 19. 14:51
지상에서 영원으로(전 1:2-11)  

 

지상에서 영원으로(전 1:2-11)


첫째, 지상의 삶에 영원한 것은 없다


세상의 삶 속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이것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욥기 14장 1∼2절에서 욥은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7∼12절에서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 물이 바다에서 줄어지고 하수가 잦아서 마름같이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고 욥은 탄식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지위, 명예 그리고 권세와 부귀, 영화, 젊음과 업적 등 그 어느 것 하나 소유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억만장자였던 하워드 휴즈는 죽을 때 마지막으로 “Nothing, Nothing, Nothing”이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부를 가지고 호화롭게 살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날 때는 결국 “아무 것도 없다”란 비통한 고백만 남겼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과 함께 이 지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부귀와 영화, 공명을 아무리 쌓았다 할지라도 그 모두 물거품에 불과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20세에 왕위에 올라 페르시아, 이집트, 이란을 정복한 뒤 인도를 정복하려 했으나 열병과 장마로 인해 바벨론으로 돌아와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34세에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지나간 죽음의 길을 앞두고 허무함을 절감하며 “내가 죽거든 내 손을 빈손으로 관 밖에 내어 놓아 성을 돌면서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고 외쳐라”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 울었다는 천하의 알렉산더 대왕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빈손으로 돌아가고, 마찬가지로 거리에서 불쌍하게 살다가 죽어가는 사람도 빈손으로 갑니다.


위대한 사람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후세에 기억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죽은 당사자에게 무슨 유익이 되며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죽고 난 다음에 그 모든 것은 죽은 사람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묘지 앞에 아무리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하고 찬양하고 칭찬하며 박수를 친다한들 죽은 사람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바람과 같을 뿐입니다.


이사야 40장 6∼8절에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 이외에 인생은 모두가 풀과 같은 일장춘몽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 고사 가운데 ‘노생지몽(老生之夢)’이란 말이 있습니다. 옛날 당나라에 노생이라는 젊은이가 한단이라는 곳으로 가던 중 잠시 주막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마침 같은 방에 묵게 된 한 노인과 술잔을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노인이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입신출세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려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리고는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그는 주막을 나와 어느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당대 최고의 부자인 최씨의 딸과 결혼하고 날로 부유해져 3년 후에는 수도의 장관이 되었습니다. 몇 년 후, 오랑캐가 쳐들어 왔을 때 이를 격파하여 공을 세웠고 드디어 재상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던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역적으로 몰려 귀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귀향지의 조그마한 오두막에서 “내가 고향에서 농사나 짓고 있었으면 평안히 살 수 있었을텐데 무엇이 부족하여 벼슬을 하려고 하였던가!” 한탄하며 칼을 뽑아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흔들었습니다.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예전에 머물렀던 주막집이었고 옆에는 노인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노생은 깜짝 놀라 “아니 이게 꿈이었던가”하고 소리쳤습니다. 옆에 있던 노인은 “인생이란 원래 그런걸세”라며 껄껄 웃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노생지몽’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인생이란 꿈과 같이 덧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젊은이는 하룻밤 꿈에 일생을 다 경험했습니다. 결국 우리도 일생을 지나 돌이켜 보면 일장춘몽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실로 참 삶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은 없습니다. 인생에는 아무것도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의 비극입니다.


둘째, 영원을 지상에 가져오신 예수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영원을 지상으로 가져오신 분에 대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영원한 것이 없는데, 영원을 이 지상에 가져오신 분이 계십니다. 일반적으로 철학이나 해탈의 종교는 삶의 절망을 수양과 참선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인간적인 힘으로 인간의 허무와 무의미를 극복하고자 애를 씁니다. 수양과 참선, 이 모든 것을 다 합쳐도 인간의 힘으로 인생의 허무와 무의미를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수양을 많이 하고 참선을 많이 한 분이 있다면 아마도 불교계의 성철 스님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일생동안 참으로 대단한 고행을 하신 분입니다. 그는 결혼직후 출가하여 그가 거하는 곳에 철조망을 둘러쳐 10년 간 그 어떤 사람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16년간 솔잎 가루와 쌀 가루만 먹고 살았으며 8년간은 눕지 않은 채 앉아서 자면서 수양을 쌓았습니다. 이런 엄청난 고행을 쌓고도 그는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너무도 많이 거짓된 말을 했기 때문에 죄가 하늘에 닿아 산보다 더하다”라고 하며 그 때문에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평생을 고행과 수행으로 덕을 쌓으려 했지만 결국 그의 마음 속에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골로새서 2장 8절에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39편 4∼5절에는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은 주님 앞에서 없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영원한 하나님으로 유한한 우리 인간에게 오셔서 유한한 인간 속에 영원한 삶의 희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1장 1∼3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출생 당시에는 핏덩이로 강보에 쌓였었지만 그의 실상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사실을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약 700년 전에 예고했습니다. 이사야 9장 6∼7절에서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 아들, 한 아기가 어떻게 그 이름이 기묘자요 모사이며 전능한 하나님으로 영존하신 아버지이고 평강의 왕이 될 수 있습니까? 인간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베푸신 가장 위대한 기적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유한한 세계와 인생으로 오신 예수님은 유한한 인간이 겪는 삶의 모든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에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은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풍찬노숙 하시며 인간의 희노애락을 모두 경험하시며 33년 동안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유한한 삶의 종말인 죽음을 맞으셨으나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인간 삶의 가장 큰 비극은 죽음 아닙니까?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납니다. 부귀와 영화, 공명, 지위, 명예, 권세 등은 모두 죽음과 함께 끝이 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3일 만에 그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시므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15절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포로가 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맞아 3일 만에 부활하시어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 24절에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서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의 유한한 삶 가운데 오셔서 그 유한을 극복하시고 영원을 이루신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유한한 인생이 예수님 안에서 극복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무궁히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영원한 생명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기껏해야 70세요, 80세를 지나면 죽을 수 밖에 없지만, 이제 그 속에 영생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이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을 살 수 있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는 유한한 질그릇 같지만 그 안의 내용은 영원한 삶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유한을 극복한 영원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벤허’라는 유명한 소설을 쓴 사람은 미국의 장군이요 정치가요 소설가인 루이스 월너스입니다. 그는 친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반대하여 친구에게 성경의 불합리성과 성경의 낡은 모순을 지적하고 폭로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압도될 만한 성경의 놀라운 증언 앞에 성경을 반대하는 책을 쓰다가 붓을 꺾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발견한 예수님과 성경에 대해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이 바로 ‘벤허’입니다. 이 책은 출판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여러 차례 연극과 영화로 제작되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유한한 인생으로 오셔서 모든 것이 유한한 이 세상에서 사시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유한을 극복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접붙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비록 육신에 살지만 영원을 가지고 삽니다.


셋째, 유한 속에 살면서 영원을 가진 삶


유한 속에 살면서 영원을 가진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이면 유한한 삶이 영생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우리의 유한한 삶이 이제는 영원을 품고 살게 된다니 이것은 기이한 일이 아닙니까?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권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께서 우리를 영접하러 오셔서 우리를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영원히 함께 있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유한한 존재가 아니요 영원한 존재입니다. 유한한 흙의 장막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는 영원한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유한을 극복하고 영생에 이르는 의식이 바로 세례입니다. 로마서 6장 4∼5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받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구원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우리가 물 속에 들어가 우리의 과거를 장사지내고 이제 물에서 나올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영원히 사는 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마귀 앞에서 증명하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해 체험한 이 사실은 우리 인생에 일어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 ‘주여 주여’하지만 세례의 극적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영원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에는 문화적인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유럽에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흔적입니다. 그들은 정치와 경제, 교육, 문화, 군사, 산업 등 모든 것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화적인 그리스도인! 그러면서도 자신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모릅니다. 이러한 문화적인 크리스천들에게 영생은 없습니다.


전통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할아버지가 예수님을 믿고,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으므로 함께 교회를 다닙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로 영생이 없습니다. 의식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1년 중 크리스마스에 한번, 부활절에 한번 교회를 나가지만 그 외에는 세속에 물들어 생활합니다.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영생은 없습니다.


학문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일평생 기독교를 학문으로 공부하고 그것을 가르치면서도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만나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여 우리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그러한 놀라운 동기가 부여되어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하셨고, 17장 3절에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신 것을 공개적으로 입술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디엘 무디는 이 땅에 있는 그 어떤 것을 믿어도 결국 후회하고 의미없게 되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이생과 저생에 후회함이 없을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옛날 이집트 왕조시대에는 크고 작은 피라미드가 140여 개 건설되었고 그 가운데 오늘날 확인된 것만 해도 80여 개가 넘습니다. 그중 이집트 구푸왕의 피라미드가 가장 큰 것으로 한 변이 233미터, 높이가 146미터입니다. 이것을 짓기 위해 2.5톤짜리 석회석이 230만개나 사용되었고 10만여 명이 무려 20년간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처럼 많은 노동력과 자금과 시간을 들여 피라미드를 만든 것은 죽은 자를 미이라로 보관하면 죽은 사람의 영혼이 돌아와 부활한다는 미신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유한성을 초월하고 영생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수천년의 세월이 지나고 난 이후 저 사막 가운데 우뚝 선 피라미드 속에는 그 옛날 이집트 왕들의 생명없는 미이라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유한한 곳에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한 번 나서 죽는 것이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세계를 접하려면 오직 지상의 유한한 삶 속에 오셔서 그 유한으로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극복하시어 영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야만 가능합니다. 예수님만이 영원히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유한한 이 세상, 인간의 삶은 기쁜 순간이든 고통의 순간이든 모두 지나가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이면 우리는 유한 속에서도 영원을 품고 영원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영생이 가져다주는 행복


삶의 모든 것 가운데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와 형제들이 현재는 함께 살지만 죽음으로 헤어지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다가 천국에 올라가 모두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만날 것을 생각하면 의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사소한 것 하나라도 영원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어떤 일이든 선악간에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됩니다. 없어지고,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지위와 명예, 부귀와 영화, 공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무슨 일을 했는가하는 그것이 영원히 남습니다.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평가를 받게 되므로 우리는 영원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18절에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원이 유한 속에 들어와 있으므로 먼저 떠나간 사람도 주님과 함께 오고, 우리도 영원을 얻을 때 주 안에서 그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유한으로 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생활 중에 재능을 받아서 일한 모든 것들에 영원한 상급이 따릅니다. 우리 각자가 남편으로, 아내로, 사회인으로, 공무원으로 일한 모든 것이 천국에서 영원한 칭찬과 동시에 꾸짖음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5장 21절에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행한 그 모든 것이 영원한 것입니다. 죽으면 그뿐인데 노력하고 애쓰며 살 것이 무엇이냐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영원히 삽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논공행상이 하늘나라에서 반드시 심판받고 보상받게 되는 것입니다.


봉사와 헌신의 영원한 보상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열심히 섬겨 이른 아침부터 교회에 나와 교통 정리를 하고 혹은 성도님들의 출입을 정리하고 정돈하며 돌보아줍니다. 하루종일 이렇게 봉사하다 보면 다리가 퉁퉁 붓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처럼 충성하고 헌신하는 이 모든 것이 영원과 연결되어 농공행상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 12장 2∼3절에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한 그 모든 일에 보상이 따라오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도 헛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 속에 사는 사람들이요, 영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로서 우리 생활에 보상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은 인간의 세월이고 영원은 하나님의 세월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8∼29절에는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운명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유한 속의 삶에서 영원을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유한한 인생의 장막에 살다가 영원히 멸망되고 말것이냐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부활신앙은 지상의 삶에 참된 의미를 주며 그 의미가 영원까지 계속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일시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영원이 있습니다. 먹고 자고 깨어 일하는 일상의 생활이 결코 헛되고 헛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영원한 것입니다.


가을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볼 때 젊은이들은 깔깔대고 웃고, 나이든 이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젊은이들에게도 지나 순식간에 노년으로 밀쳐버리고 맙니다.


예수님 밖에 있는 삶이란 종국적으로 헛되고 허무하고 절망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유한한 가슴 속에 영원하신 예수님을 모시면 인생의 종말은 사라지고 오직 영원한 삶과 믿음, 소망, 사랑이 끝없이 펼쳐지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