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문 서

독수리 같이(욥기 39:1-18, 26-30)

공 상희 2006. 8. 9. 16:09
독수리 같이(욥기 39:1-18, 26-30)  

 

독수리 같이(욥기 39:1-18, 26-30)


지난 시간부터 욥의 친구들의 말은 끝나고 하나님이 결론적으로 욥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38장에서는 땅의 기초를 정하신 것에 대해서, 바다의 한계를 정하신 일에 대해서, 새벽빛이 밝아 오는 것에 대해서, 구름에 대해서, 비와 서리와 번개에 대해서, 별들과 그 세력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와 같은 대우주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것이 우리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확신이 생기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대우주의 운행만을 주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등 동물에게도 온정을 가지시고 그처럼 철저하게 보살펴 주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친절히 만물을 보살펴 주시는데, 더구나 미물인 짐승까지도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을 등한히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일 뿐더러 이와 같은 하나님을 사람된 우리가 비난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하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자기의 선행을 가지고, 욥이 하나님 앞에 자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욥에게 제시하는 것은 그가 우리 주위에 있는 동물에 대해서 그토록 무지하고 손가락 하나 대기도 어려운 처지이기에 겸손하지 않을 수가 있으며 만물이 의지하고 있는 하나님을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야생으로 뛰어 다니며 자유로이 사는 길들지 않은 짐승들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짐승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보살핌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아니하시면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도 그대로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짐승들이 새끼를 낳는 것과 키우는 일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자라고 있는 셀 수도 없는 짐승들을 먹이시고 키우십니다. 그리고 그 짐승들을 이 땅 위에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멸종되지 아니하고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지만 땅에서 번식합니다.


4절에 보니까 “그 새끼는 강하여진다”고 했는데 짐승이 비록 괴로움 중에 태어났을지라도 그 어미가 잠시 젖을 먹여 기른 후에는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들에서 길리우다가 나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 했습니다. 짐승은 그 어미에게 오랜 부담을 주지 아니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녀에게 귀감이 되는 말씀입니다.

핏덩이로 태어난 아기를 감싸 키우고 돌보아 돌이 되고, 걷고 뛰고 말하고, 유치원 가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편 되면 대학을 다니고 그러다 보면 24-25년 동안 부모님의 보살핌이 있어야 합니다. 그뿐입니까? 가정을 이룬다고 있는 정성 다해서 뒷바라지 해주느라고 부모된 분들이 얼마나 애씁니까? 이것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20여년 동안 투자했는데도 그것도 모자란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녀가 혹 있는데 조심해 들으세요 짐승에게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독립심, 자립심이 있어야 합니다. 두고두고 부모에게만 기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5절 이하에는 들나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들나귀는 길들이기 어려운 짐승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들나귀에게 자유로운 기질을 주셨고 그에 대한 하사품도 주셨습니다. 길든 나귀는 노동을 해야만 합니다. 들나귀는 그를 속박하는 것이 없습니다. 노력으로부터의 자유와 마음대로 배회할 수 있는 자유는 들나귀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렇게 되면 가련합니다. 수고하고 땀흘리며 보람된 일을 하는 것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본분이지 할 일 없이 서성거리며 지내는 것은 답답한 일입니다. 피곤하게 일하다가 쉬는 것은 양약이 되고 다음 일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만 흔히 하는 말로, 하루는 놀고 하루는 쉬는 날이 반복되는 것은 고역입니다.


서울 근교에 군인들이 다니게 되어있는 골프장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가면 퇴역 장성들이 나와서 골프를 하는데 한 주간에 한 두 번이 아니라 매일 나온다고 합니다. 피곤하게 일하다가 푸른 잔디밭을 밟으며 골프를 하는 것은 상당한 휴식이 되고 활력을 재창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할 일이 없어 시간 보내기 위해서 매일 골프장에 출근하다시피 하는 것은 멀리서 보기에는 여유 있는 사람처럼 보일는지는 모르지만 사실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것입니다. 낚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일을 해야 합니다. 육신적인 일이든 정신적인 일이든 일할 거리를 찾아야 행복합니다. 영어로 행복하다는 말을 ‘Happy’라고 하는데 그 뜻은 기쁘다는 뜻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기쁩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일하는 데 기쁨이 있고 일하다 쉴 때 기분이 좋습니다.

여러분은 밀레의 ‘만종’이라는 그림을 다 보셨을 것입니다. 들판에서 일하는 젊은 부부가 있습니다. 온종일 땀흘려 가며 일했습니다. 해는 서산에 기울었는데 멀리 교회당에서 저녁 종소리가 들려 옵니다. 온 종일 힘써 일하던 이 부부가 일손을 멈추고 쟁기를 손에 든 채, 조용히 머리 숙여 하루 동안에 건강을 주셔서 그리고 일터를 주셔서 일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를 드리는 모습에서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피곤할 때 더운 물에 목욕하면 시원하고 기분이 좋지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 몸의 세포가 활발히 움직이니까 그렇습니다. 부지런히 일해야 행복이 있습니다.

신혼 부부가 신혼 여행을 갑니다. 얼마나 달콤하고 좋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며칠이고, 길어야 한 주간, 오래 잡아서 보름이나 한 달이지요, 두 달, 세 달 아무 일 하는 것 없이 아침밥 먹고 손잡고 같이 걷고, 점심밥 먹고 수영하고, 저녁밥 먹고 구경하고 자고, 이튿날 일어나서 아침밥 먹고 손잡고 같이 걷고, 점심 먹고 등산하고, 저녁 먹고 텔레비전 보다가 자고, 이렇게 계속하면 한 달 못 가서 싸움이 생길 것입니다.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열심히 일하는 종교입니다. 명상의 종교가 아니라 선한 일을 하는 종교입니다.


길든 나귀는 힘든 일을 하므로 사람에게 쓸모가 있기 때문에 그에게는 피난처도 되며 먹으러 가는 곳도 되는 외양간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비옥한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들나귀에게 자유는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불모의 땅에서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에게는 소유주가 없으며 그는 누구에게 예속되어 있지도 아니합니다. 그는 도회지의 소요와 시끄러움 속에서 생활하는 자들을 비웃으며 황야에 사는 자기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인이 없으므로 먹여 주는 이도 없고 그에게 주는 양식도 없고 자기가 먹이를 구해 먹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는 여기저기 다니다가 발견하는 대로 뜯어먹고 삽니다. 위험 부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길들여져서 일하는 나귀는 푸른 것을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먹을 것이 풍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들나귀의 망아지조차 복종시키지 못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지배하려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9절 이하에는 들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네가 능히 줄로 들소를 매어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시게 되었습니까? 욥은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네가 만물을 네 지배하에 둘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으니 들소를 가지고 먼저 시작해 봐라. 들소에게 네 기술을 시험해 봐라. 네 황소와 나귀가 없어졌으니 들소란 놈이 그것들 대신에 너를 섬기려 하는지 시험해 보고 그 놈이 네가 네 가축에게 만들어 주던 식량에 만족할는지 알아 보라. 그가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천만에”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너는 그를 길들일 수도 없고 그의 줄로 그를 맬 수도 없으며 그로 쓰레를 끌게 할 수도 없다” 했습니다.


짐승 중에는 사람을 섬기고 싶어하는 것이 있는데 그런 짐승들은 사람을 섬기는 일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기 주인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짐승은 사람을 절대로 섬기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런 짐승은 언제나 불안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살면 자유가 있을 것 같고 그것이 평안하고 만족할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거스틴의 고백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줍니다. 그가 하나님 없이 살 때 세상적인 것을 다 누리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거기 만족과 평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이여, 당신은 당신을 위해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당신 품에 돌아오기까지 평안함이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길든 소는 주인의 보호를 받으며 배불리 먹습니다. 그러나 야생 들소는 언제나 주려 지내며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닙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될 때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13절 이하 18절까지는 타조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타조는 제 새끼에 대해서 무정합니다. 타조는 다른 날짐승처럼 둥지나 은밀한 장소에 알을 낳는 것이 아니고 둥지도 짓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알을 낳고 까게 합니다.

다른 새들은 본능적으로 알을 낳을 때부터 깔 때까지 그리고 독립할 때까지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타조는 본성이 괴상합니다. 그저 땅 위에 아무데나 알을 낳고 그 알을 부화시키는 데 신경을 쓰지 아니합니다. 모래와 햇빛이 알을 부화시켜 줍니다. 14절을 보세요. “그것이 알을 땅에 내버려두어 모래에서 더워지게 하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타조는 자기가 낳은 알을 보호할 줄도 모릅니다. 15절에 보면 “여행자의 발이 그 알들을 부수어 버릴지도 모르며 들짐승이 알들을 깨뜨려 버릴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린 타조가 생겨나며 타조가 멸종되지 않습니까? 타조는 자기 알을 버려도 하나님이 모래와 햇빛으로 품어 주셔서 부화하고 번식합니다.

타조에게는 새끼에 대한 애정이 부족합니다. 16절에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구로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괘념치 아니하나니” 했습니다.

이것은 타조에게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17절에 말씀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내가 지혜를 품부하지 아니하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니라” 했습니다. 바꿔 말해서 그 자식을 사랑하며 돌보는 것도 하나님이 지혜의 선물을 주신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어떤 부모들은 자기 자녀에게 대해서 무성의합니다. 육신적인 보호는 하고 보살피면서 영혼에 대해 무성의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조심하고 자녀의 영혼을 돌보기를 힘써야 합니다. 자녀의 영혼을 바로 돌볼 줄 아는 부모가 지혜 있는 부모입니다.

더구나 자녀의 영혼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의 영혼을 잘 보살펴야 합니다. 육신에만 관심 두고 얼굴 치장, 옷치장에 신경 쓰고, 몸의 건강 돌보기 위해서 운동하고 음식 가려 들고 얼마나 힘씁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몸에 대해서 신경 쓰는 것만큼 우리 자신의 심령에 대해서 마음쓰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타조가 제가 낳은 알은 위험에 처하도록 내버려두면서도 자기 자신이 위험에 싸이게 되면, 위험한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세상 어느 짐승도 따를 수 없을 정도입니다. 18절에 보세요. “그 몸을 떨쳐 뛰어 갈 때에는 말과 그 탄 자를 경히 여길 정도”라고 했습니다.

위기를 맞으면 타조는 그 날개를 높이 쳐들며 그 날개의 도움으로 얼마나 빨리 달려가는지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마상의 기수조차도 그것을 따라 잡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시속 40km가 넘는다고 합니다.


19-25절까지는 말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26절 이하는 매와 독수리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매와 독수리는 날짐승 중의 왕입니다. 매는 매우 빠른 짐승입니다. 나는 속도가 시속 240km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냥을 할 때 사용했습니다.

더구나 독수리는 어떻습니까? 본문 27절 이하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거하며 거기서 움킬 만한 것을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륙당한 자 있는 곳에도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여기서도 발견합니다. 이 종류의 짐승이 저 종류의 짐승을 잡아먹고 살도록 하는 약육강식의 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약한 것은 많이 퍼지게 하고 강한 것은 번식을 적게 합니다. 그리고 같은 동물을 이용해서 지구 표면에 남아 있는 동물의 사체를 먹어 버리게 했습니다. 만일에 그렇지 않고 사체를 그냥 둔다면 동물의 사체 때문에 공기가 오염되고 이 땅에는 발 옮길 틈을 찾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독수리는 우리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이사야 40장 31절을 찾아 읽어보십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멀리 바벨론에 포로 되어서 가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세월이 흘러 50년, 60년, 70년이 흘렀지만 아직 포로에서 해방될 희망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자연히 그들 가운데는 낙심하는 사람, 실망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선지자는 하나님을 앙망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너희들은 알지 못하느냐? 너희들은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며 곤비치 아니하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한다”고 외친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여기 “앙망한다”는 말은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또 이 말씀 중에는 “기다린다, 의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종이 상전을 모시는 것처럼 모신다”는 뜻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나를 의지하지 말고 내 지식이나 경험, 내 지혜나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좀 있다고 그것 의지하는데,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돈 의지하지 말라고, 변하는 환경을 의지하지 말라고, 지나가는 청춘도 의지하지 말라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앙망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사람이나 세상 것을 앙망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봄동산의 꽃이 언제나 위를 향해서 자라고 올라가듯이 우리의 심령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서 올라가고, 꽃이 언제나 햇빛을 향해 피는 것처럼 되라는 뜻입니다. 불길이 언제나 위를 향해 타오르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 속에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서 타오르는 불길이 올라가는 생활을 하라고, 언제든지 영혼의 방향을 위로 향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묵상하여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가운데 살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해바라기 꽃을 아시지요. 그 꽃은 언제나 해를 따라 다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심령이 언제나 영혼의 해가 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따라 가면서 살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죄를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적인 표현으로 하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를 묵상하며 그를 항상 앙망하면서 꼭 주님과 교통하며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언제나 새 힘을 얻어서 어떤 환경이든지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새 힘을 얻으리니.” 전에 없던 새로운 영적 능력을 얻겠다고 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힘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체력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머리, 지력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인내력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권세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를 앙망하는 사람은 이 제한된 힘 위에 하나님의 능력을 더하여 주시겠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위로 올라가는 힘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한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한 힘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비행기로 로켓으로 육신은 공중에 올라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의 심령은 이 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근심과 염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시기와 미움, 고통과 번민, 슬픔과 같은 땅에 속한 것에 매여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같이, 주를 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어서 땅에 속한 모든 것을 초월해서 공중에 날아가는 것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뜻인 줄 압니다. 높이 올라가면 시야가 넓어집니다. 위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 빌딩이 높다지만 산이 높다지만 비행기 위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아서 우리 심령이 높은 곳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면, 세상 향락, 세상 영광, 세상 권세와 같은 것들이 세상 사람의 눈에는 굉장해 보이지만 우리 주님을 앙망하는 신앙의 견지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게 된 다음부터는 전에 귀하게 여기고 사모하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슬픔도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이 올라가면 구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면 구원을 받습니다(사 45:22). 하나님을 앙망하면 수치를 당치 아니합니다(사 49:23). 스데반이 순교할 때 하나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살아 있을 때도, 죽을 때도 주님을 앙망합시다.

박조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