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한
대로 받습니다(욥기 34:1-20)
같은
욥의 친구임에도 그 전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그리고 소발과는 달리, 엘리후는 욥 자신이 이제 반성해 볼 때 자기 마음에서도 자책하는 정이
우러나오기 시작한 것만을 가지고 그를 책망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생각하게 될 욥기 34장에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
10절 이하를 보십시다.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10-12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가 있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 2절에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라고 했습니다. 멜기세덱은 첫째 의의 왕이요 그 다음으로 평강의 왕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전세계 인류는 다 평화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오늘 전세계 인류뿐만 아니고, 어떤 시대 어떤 지방이나 국가나 국민이나 개인을 막론하고 다 평화를
갈망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으로 평화를 갈망하고, 국내적으로도 평화를 갈망하고, 우리 가정에서도 평화를 원하고, 우리 마음속에서도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이 있는데 우리가 갈망한다고 반드시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평화라는 것은 한 결과인데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원인이 조성되기 전에는 평화가 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비가 올 수 있는 모든 기상 조건이 완비되어야 갈망하는 비가 내리는 것 같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조건이 준비되어야 이 세계의 평화나 국가의 평화나 개인의 마음속의 평화가 임하게 될 줄로 압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평화가 올 수 있는 조건이 무엇입니까?
공의입니다.
정의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상이 이 진리를 말해 줍니다. 이사야 32장 17절에 보면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했습니다. 화평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먼저 의가 있어야 화평이 옵니다. 평안과 안전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먼저 의가 있어야 그 결과로 평안과 안전이 올 것입니다.
시편
85편 10절에 보면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라고 말했습니다.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는 것과 같이 언제든지
같이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엘리후가
욥에게 말한 내용도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는데 참 평안을 원하면 공의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의는 평화의 전제 조건입니다. 성경에 “불의한 자는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간다”고 말했습니다. 왜요?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의가
없이 참된 평화가 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의는 평화의 기초가 됩니다.
평화는
의의 터 위에만 건설될 수 있습니다. 불의의 터 위에 건설된 어떤 평화 기구나 어떤 정권이나 어떤 제도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것과
같아서 언제 넘어질지 알 수가 없고, 그것은 마치 화산 위에 세운 것 같아서 언제 폭발하여 없어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의 왕으로, 평강의 왕으로 세상에 임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평화를 말씀하시기 전에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준다”고 하는 말씀에는 인류나 개인의 평화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시면서 어떻든지 의를 찾으라고 우리에게 예수님이 부탁하신
것입니다.
요사이
우리 나라가 민주화 과정에서 여야가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서 열심히 모이고 토의합니다. 이것도 공의의 정신에 의해서 헌법이 개정되어야 이 나라의
평화도 임하게 될 것이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 동안 이 나라의 잘못된 법과 구조를 위해서
기도해 왔습니다만 이제는 공의의 전제 조건하에 공의를 기초로 한 나라의 법이 제정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헌법의 근본 정신에 의해서 입법, 사법, 행정 이 모든 기관이 공의에 의해서 시행될 때에만 이 나라에 진정한 불평이 없는 평화가 올
것입니다. 특별히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자유와 권리, 법 아래서 만민 평등의 원칙이 잘 준수될 때에만 우리 나라의 진정한 평화도 있을 것입니다.
국가에서
무슨 허가를 한다든지 인가를 하는 데도 이 공의가 있어야겠습니다. 우리 국민이 누구나 납세를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에만 우리 국가가 자립할 수
있는 경제 위에 서겠는데 이와 같이 모든 행정이 반드시 공의 가운데서, 납세 의무도 납세 부과도 공의로 시행되어야겠습니다.
하물며
사법부의 행정, 특별히 재판소에서 재판하는 것은 온전히 공의를 세우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이와 같은 재판이나 공판이 조금이라도 공의의 법칙에
벗어나게 되면 우리 나라의 기강은 문란하게 될 것입니다.
잠언
14장 34절에 보면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했습니다. 우리 나라를 흥하게 하는 한 가지 원리는 공의를
시행하는 길입니다.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는 “오직 공법을 물과 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게 할지라”고 안타까이 부르짖었습니다. 우리 국가 어떤 기관이나, 어떤 단체, 어떤
사회, 어떤 기구든 오직 공법, 오직 공의를 물과 같이 하수같이 하여 운영할 때 우리 국가는 축복을 받고 민주국가로 발전되어서 우리 국민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뿐 아니라 우리 자손 만대에 축복이 될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교회에 평화가 어디서 옵니까? 공의에 의해서 모든 일이 처리될 때 교회에 평화가 옵니다. 학교도 그렇습니다. 학교의 평화가
어디서 옵니까? 모든 학교 행정이 공의에 의해서 공법이 시행될 때에만 학교의 평화가 유지된 것입니다.
가정도
그렇습니다. 가정에 식구들 사이에 공의가 없으면 그 가정에 불평이 생깁니다. 아무리 한 아버지 어머니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아들과 딸들을 사랑한다고 해도 공정하게 공의에 의해서 사랑할 때에만 그 가정에 참된 평화가 옵니다.
우리
개인의 마음의 평화도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의 평화도 우리에게 의가 있어야 화평이 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인 까닭에 우리의 생활에 불의가
있으면 제일 먼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립니다. 우리가 불의한 길로 행하게 되면 어떤 다른 사람이 내게 형벌을 내리기 전에, 어떤
사람이 나를 책망하기 전에 제일 먼저 우리 마음이 불안하게 됩니다.
이사야
57장 20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이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악한 사람의 마음은 물결이 움직여서 바다 속에 있는 진흙과 검불이 솟구쳐 올라서 빙빙
도는 그런 바닷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악한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형벌은 이렇게 그 마음에 안정이 없고, 그 마음이 깨끗치 못하고, 그 마음이
출렁거리고 밤에 잘 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음식을 먹어도 음식의 맛이 없으리만큼, 제일 먼저 그 마음이 불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하면 의의 길로 돌아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의의 왕으로 우리에게 의를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다 죄를 용서함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기 전에는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누구든지 저를 믿는 사람은 모든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양심이 맑아지고 깨끗해질 때에만 참된 평화가 우리 마음속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했습니다. 이 평안은 예수님만 줄 수 있는 평안인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의롭다 함을 주시고 우리 양심에 평안을 주시고 그 후에 참된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역시 평강의 왕으로서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의의 왕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의 마음에 평화가 올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의의 왕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의 가정에 참된 평화가 올 것입니다. 우리
온 민족이 회개하고 의의 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 국가에 참된 평화가 올 것입니다. 아니 온 세계가 의의 왕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할 때 진정한 세계 평화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 하실 뿐 아니라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를 굽히시면서 사랑하시지
아니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사랑과 공의를 성취시킨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신다”(11절)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보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했습니다. 욥기 34장 11절 말씀과 같은 뜻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농사하는 데 비유했습니다. 이것은 인생 전반에 걸쳐서 적용되는 질서와 조직의 원리입니다.
심는
것과 거두는 것은 농사를 짓는 데 사용되는 말입니다. 추수를 바라는 농부는 반드시 자기의 밭에 씨앗을 심습니다. 심지 않고 추수를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꼭 같은 윈리가 그 씨앗의 품종이나 질이나 양에 적용이 됩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보리를 심으면 보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좋은 씨앗을 심었으면 좋은 열매를 거두고, 나쁜 씨앗을 심었으면 나쁜 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이 심었으면 풍성한 가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요, 적게 심었으면 적게 거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도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했습니다.
이
원리는 농사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적인 면이나 영적인 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오늘 주신 말씀 11절에는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사실
무엇을 추수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은 추수할 사람이 아니라 씨를 뿌린 사람입니다. 씨를 뿌린 사람이 진실하고 성실하게
파종했으면 그는 분명히 아름다운 풍요로운 가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팥을 심어 놓고 콩을 거두겠다고 기대하는 것”은
자가당착입니다.
욥기
4장 8절에 보면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호세아 선지가 자기 세대를 향해서 경고한 말씀을 보아도 “바람을
심은 자는 광풍을 거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원리는 만고 불변의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이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고 단언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속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귀는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미혹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했습니다.
거짓의
조상은 마귀입니다. 마가복음 13장에 보면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장에 22절에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고 경고했습니다.
여러분,
이적과 기사를 행한다고 따라 가다가는 미혹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야말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기 때문에 분간하기 어려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 피할 수 없는 심음과 거둠의 법칙 앞에서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씨앗을 심으며 자신이 심은 씨앗이 필경
그것에 상응하는 품종을 결실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막연하게나마 자신들은 이 법칙에서 제외될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예외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미움을 심으면 미움을 거두고,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두게 됩니다. 죄악을
심으면 사망을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신다”고 오늘 본문에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속일 따름이지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 자신은 이 심고 거두는 법칙에서 제외 될 것이라고 기대할는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씨앗을 심어 놓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그가 심은 그대로 거두게 할
것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봄에 심고 여름에 거둘 수도 있습니다. 어떤 씨는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둡니다. 어떤 것은 금년에 심고 5년 후에, 10년 후에
거둡니다. 어떤 것은 내가 심고 다음 대에 가서 거둡니다. 어떤 것은 이 세상에서 심고 저 세상에 가서 거둡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법칙이 변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심는 것과
거두는 것의 원리에 의한 또 하나의 측면을 보여줍니다. 육체와 성령은 우리가 씨를 심는 두 밭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어디에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수확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인데도 거의 무시되어 온 것이 이 성결의 원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실 자신의 본성이나 기질, 그리고 환경의 운명적인 포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존재 양식은 우리의 행동 양식에 크게
의존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성결은 우리의 행동에 의해서 형성이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며, 6장에 보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은 우리가 따라
걸어야 하는 길로 또는 씨뿌리는 밭으로 비유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밭에 심지 않고서 어떻게 성령의 열매를 거두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영국에서
내려오는 말 중에 “생각을 심고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어 습관을 거둔다. 습관을 심어 성격을 거두고, 성격을 심어 운명을 거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퍽 성경적인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일매일 사사건건 무엇인가를 심는 생활을 합니다. 육체를 위해 심든지 성령을 위해 심든지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5절에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면
육체를 위해 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마디로
육체가 하고 싶어하는 대로 만족시켜 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심는 씨앗은 넓은 의미로 말해 우리의 생각과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찾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했습니다.
우리는
친구를 사귀어도 책을 하나 읽어도 여가를 활용해도 성령을 심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고 하는 것도 말하자면
성령을 위해 심는 생활입니다. 이것을 떠나서 성령의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두 가지 씨 가운데서 한 가지 씨앗을 심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두는 것도 자연히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를 위해 심었으면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둘 것입니다. 도덕적인 부패와 파탄으로 마침내 패망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해 심으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도덕적, 영적 성장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함을 열매로 맺으려면 두 가지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일을 피하고, 성령을 위해 심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첫째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회중의 마음 밭에 심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씨앗은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며 그것은 육체가 아니면
성령이라는 밭에 심어집니다. 그리고 셋째 씨앗은 선행이며 그것은 공동체 안의 다른 사람들의 생애 속에 심어집니다. 하나님은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어느 하나도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어떤 경우이건 작용하는 원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십니다.” 좋은 것을 거두고 아름다운 것을 얻기 원하십니까? 좋은 씨를 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평생 좋은 씨를 뿌리십시다. 그리고 선과 사랑과 평화와 승리와 축복의 열매를 기쁨으로 거두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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