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제는(욥기 30:9-31)
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 30장은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욥의 과거는 영화롭고 빛났고 세상에서는 아무 부러울 것이 없이
지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영화는 사라지고 육신의 건강마저 잃었는데 너무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 집사님 중에 한 분이 종합병원 과장으로 13년 봉사하시다가 65세로 은퇴하시면서 수원에 있는 큰 병원의 원장으로 취임하시게 된 것을
축하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대개의 경우 정년 퇴임을 하시게 되면 댁에서 조용히 지내시게 되는데 이처럼 전보다도 더 귀한 책임을 지고 활발하게
일하시게 되신 것을 생각하니 너무 기쁩니다. 저는 우리 집사님이 그처럼 잘 되시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과거보다 현재가 잘 되는
것이 그렇게 좋습니다.
그런데
욥의 현재의 처지는 그와 반대입니다. 욥은 과거에 매우 영예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굴욕 속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존대함을 받던 욥이 이제는 가장 비천한 사람들에게까지도 멸시를 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읽은 말씀 9절을 보세요. “이제는 내가 그들의 노래가 되며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욥에 대한 민요를 만들어 부르면서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했던 결과가 저처럼 처참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정직한 이웃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을 조롱거리로 삼는 사람들, 그들이 고통 속에서 번뇌할 때 옆에서 보며 희희낙락하는 사람들은 야비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입니다. 욥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내 양떼를 지키는 개보다도 못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절을 보세요. “그들은 나를 미워하여 멀리하고 내 얼굴에 침 뱉기를 주저하지 아니하나니” 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흉측한 광경이라도 보는 것처럼 욥을 피했으며, 그가 마치 못난 괴물이나 전염병에 걸린 사람인 것처럼 그를 미워하며 달아났습니다. 그들은
욥에 대해서 큰 경멸감과 분노를 표했습니다. 그들은 욥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어했습니다.
12-13절에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그 낮은 무리가 내 우편에서 일어나 내 발을 밀뜨리고 나를 대적하여 멸망시킬 길을 쌓으며 도울 자 없는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구나.”
그들은
욥에 대해 악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욥을 조롱할 뿐만 아니라 희생시키려 했습니다.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구나.” 어떤
이는 이 구절을 “그들이 화를 당한 원인을 내게 뒤집어씌우는구나”고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욥이 당하는 재앙을 보고 개가를 올렸을 뿐 아니라 그의 재앙을 더욱 재촉했습니다. 그래서 욥으로 하여금 번민이 더하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사람이 당하는 재앙을 보고 기뻐하거나 재촉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이
일을 돕는 자 없었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들은 후원해 주거나 옹호해 주는 이가 없어도 그들끼리 합해서 그 일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일에
있어서는 어리석지만 재앙을 행하는 데는 매우 현명하여 그것을 궁리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 악인들이 선한
사람이 재앙을 당한다고 해서 무슨 큰 도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뻐합니다.
더구나
이 모든 재앙을 행한 자들은 그 수가 많았고 일치 단결했으며 과격했습니다. 14절에 “성을 크게 파괴하고 그 파괴한 가운데로 몰려 들어오는 것
같이 그들이 내게로 달려드니” 했습니다. 수문이 터져 물이 쏟아져 내림같이 재앙이 달려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명예와 존귀를 빼앗긴 사람은 악한 사람들에 의해서 경멸 당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각오해야 합니다.
오늘
분문 11절에 뭐랬어요? “이는 하나님이 내 줄을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케 하시매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
굴레
벗은 송아지처럼 자기 마음대로 종횡무진하면서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언제나 이처럼 그릇된 대우를 받게 되면 시므이의 저주를 받았을
때의 다윗처럼 그 손에서 속박의 줄을 끊으신 하나님의 손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쫓겨가게 될 때 시므이가 쫓아오면서 먼지를 날리며 돌을 던지며 얼마나 저주했습니까? 같이 가던 장군이
다윗에게 너무 분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대왕이시여, 저놈을 제가 단칼에 목을 잘라 버릴까요? 어떻게 대왕께 저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한 말이 “여보게, 그냥 두게. 저것도 하나님이 다 시켜서 하는 일이야. 아니, 내가 낳은 내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내가 도망가는 신세인데 다른 사람이 그러는 거야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저로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명예, 대중의 칭송이란 언제나 불확실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높은 권세를 가진 사람이 갑자기
치욕의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쉽게 없어지고 변하는 세상 것에 야망을 품거나 그것을 자랑하는 것은 정말
덧없는 일인 것입니다.
전에
한국교회의 부흥사로 전국 방방곡곡에 부흥회를 인도하신 이성봉 목사님의 부흥성가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소망 구름 같고 부귀와
영화도 한 꿈일세. 사망의 바람에 이슬 같이 된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예수님이 어린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입을 모아 “호산나, 호산나”하면서 대환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못되어 바로 그 사람들이 그 입으로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 질렀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더구나 이처럼 짓밟히고 욕을 당하는 것이 선한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일이고 가야 할 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란 보이는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는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가난해서 겪는 어려움보다도 사람들의 멸시를 받을 때 당하는 곤욕이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로마의
군중들은 행운아에게는 충성스러운 반면에 몰락한 사람은 가차없이 박해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욥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처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였습니다.” 시편 22편 6절에 보면
다윗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이
말씀에서 다윗은 영감을 받아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실 것과 영광 누리실 것을 예언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육신이 언제나 건강합니까? 사업이 번창하기만 합니까? 가정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아갑니까? 다른 사람의 오해도 중상과
모략도 당하지 아니하고 지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도 그 몸에 병이 듭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
나사로도 병이 들었습니다. 훌륭한 사도 바울에게도 육신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도 사업의 실패를 할 수가 있습니다. 가정의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받고 중상과 모략을 당해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조롱하는 말을 합니다. 욥이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그의 아내가 “그런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를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했습니다. 친구들도 그를 찾아와 위로는커녕 오히려 마음을 더 괴롭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이적을 행하실 때는 인산인해를 이루며 몰려들던 사람들, 억지로라도 왕으로
옹립했으면 하던 그 사람들이 지나가며 동정의 눈물은 고사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까 하나님이 구원하시겠지!”하며 비웃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세상의 현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53장 3절을 보세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욕하고 침 뱉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감추지 않으셨고 욥보다 더 그 분노를 참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이제는”이라는 말이 세 번째로 나옵니다. “이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날이 나를 잡음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환난의 날이 우리에게 닥칩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환난이 있습니다. 이 환난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유식한 사람이나 구분없이 누구에게나 옵니다. 환난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환난, 정신적인 환난, 민족이나 국가적인
환난, 세계적인 천재 지변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도 다 어떤 종류의 환난을 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의 날이 있습니다. 개인 생활에도 환난의 날이 있습니다. 민족 역사 속에도 환난의 날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에게서 봉사받기만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들이 찾아와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어떻게 당해내는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원망부터 합니다. 그것은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환난 당하면 낙심합니다. 이것도 환난을 바로 대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환난을 당하면 아예 절망하고, 반항하고, 포기하고,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이것도 물론 환난을 바로 대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환난에 직면하면 아예 타락해 버리고 심지어 흉악한 죄를 범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것도 잘못된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런 때에 원망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반항하지 말고, 시비하거나 자포자기하지 말고 나를 부르라. 하나님께 나아와
부르짖으라.” 다시 말하면 환난의 때에 눈을 들어 하나님을 앙망하며 간절히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 바로 왕의 큰 핍박을 받아 말할 수 없는 환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눈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보내서 그들을 민족적 환난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짖는 사람이나 민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하여 주십니다. 개인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하만의 흉계 밑에 멸망 직전에 있던 유대 민족을 기억합니까? 40일 후면 멸망할 것을 선고받은 니느웨 백성을 기억합니까? 저희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대한 민국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정말 거의 소망이 없을 정도로 막다른 골목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서로가 극단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비상시국에 직면했었고, 계엄령이라도 선포하고 군대의 힘을 쓰지 않으면 진압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군대의
힘이면 됩니까?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학생들, 시민들, 성직자들의 이 거센 물결을 무엇으로 막습니까? 군인들이 총을 겨누고 누구를 쏠
것입니까? 그것은 그때 형편을 보아야 알 일이었습니다. 어느 편을 쏘아 끝을 맺든지 간에 그렇게 되면 또 악순환이 거듭되는 비극만이 초래되는 것
아닙니까? 국민 중 그것을 바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 일 때문에 기도했습니까? 얼마나 애타게 부르짖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지난 월요일 집권당인
민정당의 노 대표의 시국 대책 발표를, 여야를 막론하고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민주당이 이긴 것도, 학생들이 이긴 것도, 민정당이 진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성도들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신 것임을
믿습니다.
이번의
일을 보면 우리 국민이 민주주의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발표가 있자 너무 기쁜 시민은 다방에서 차를 무료로
서비스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가슴 뭉클한 일입니까? 누가 시켜서 한 일입니까? 우리는 노 대표의 결의를 진심으로 환영하며 정말 민주주의 방법에
의한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뤄지는 역사가 이뤄지기를 기대합니다. 정말 우리 국민은 놀라운 국민입니다. 어디 지금 데모하는 학생을 보셨습니까?
최루탄이 이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세계가 놀라고 있습니다. 한국은 정말 멋진 나라인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꽃이 피고 열매 맺게 해야 합니다. 시편 22편 26절에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려운 일이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은 매우 현명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를
찾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과 친교를 맺기 원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이사야
55장 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가 있습니다. 가까이 계실
때가 있습니다. 보통 우리의 경험으로는 우리가 어려운 지경에 있을 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십니다. 부모도 자녀가 아플 때 곁을 떠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환난의 때는 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 여러분, 내 힘이나 지식이나 경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당하셨습니까? “아이고 나 죽는다”라며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 이거 어떻게 합니까?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힘 주세요, 지켜 주세요, 용기를 주세요, 인내하게 해 주세요”하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가다가 물결보고 겁이 났고, 겁이 나는 순간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주님, 나를 살려
주세요.” 그때 주님의 능력의 팔이 물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를 건져냈습니다.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이 왜 복이 있는지 아십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는데 그 환난 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으니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그 마음에 간절함이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을 것이 있으면 기다리지 않고 먹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샘물을 찾는 것처럼
영혼이 기갈한 사람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다른 것 찾을 겨를 없이 물만 찾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영혼이 기갈할 때 그 영혼은
하나님만 찾습니다. 하나님 찾아야 그 갈한 심령이 해갈할 터인데 세상의 다른 무엇으로는 해갈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찾기 전에는 참 만족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우리가 좋은 것을 얻을 것이며 우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보장받습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다시 찾아 왔을 때 모든 죄를 용서받고 아들의
권리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찾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더 지체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을 찾으십시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어 주시리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감당키 어려운 고통을 겪으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잊으시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처럼 생각되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신음 소리를 듣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십니까?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을 감당키가 어렵습니까? 그럴수록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그럴수록 믿음을 더욱 가지십시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런 때 주님을 의지했었고 하나님의 건지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을 때 바로 그때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 하나님께 두 손들고 돌아올 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두 손 들고 찾아오는 사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와 만족을 안겨 주십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러나
이제는, 전에는 죄를 범했으나, 전에는 어려움도 겪었으나, 전에는 더럽게 살았으나, 어둡게 살았으나, 슬퍼했으나, 절망했으나, 잃어 버렸으나,
멀리 했으나, 병들었으나, 눌려 살았으나, 미워했으나… 이제는 바로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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