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5 경

긍정의 바이러스 민수기 13:30-33

공 상희 2006. 8. 8. 14:20
 

 

긍정의 바이러스  민수기 13:30-33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고로 '탓'을 많이합니다. 남 탓, 세상 탓, 조상 탓. 하다못해 날씨 탓도 숱하게 합니다. 특히 문제가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하면 그 '탓'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한때는 하도 남 탓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이것을 뒤집어 '내탓이오'하는 운동까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의 탓이건 나의 탓이건 뭔가를 탓하는 것은 긍정이 아니라 부정의 심리에 바탕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06년이 시작된지 22일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것저것 탓하면서 지난 과거와 부정적인 심리에 발목을 잡혀 있습니다. 황우석 사건, 사학법 파동도 이래저래 '탓하는 국민, 탓하는 나라'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파나소닉, 내쇼날 상표를 만들어낸 일본재계의 신으로 불린 마쓰시다 고노스케 회장에게 기자들이 묻기를, 회장님은 어떻게 해서 이토록 거대한 기업을 일으키게 되었습니까? 하니 "나에게는 세가지 유리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라면서 대답하기를.. 첫째는 내가 11살때 부모를 잃은 것이며, 둘째는 내가 국민학교(소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것이며(사실은 그것도 중퇴), 셋째는 내가 태어날때부터 병약했던 것입니다." 허걱.. 그게 유리한 조건인가? 회장의 답변은 이어졌습니다

"11살때 부모를 잃음으로써 자립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었고,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않아서 항상 나보다 더 배운 남의 말에 경청했으며, 몸이 약해서 건강관리를 잘해서 이렇게 90살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난 '때문에'라고 탓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난 '덕분에' 평생 근검절약할 줄 알아 부자가 됐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는 소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라고 탓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배우지 못한 '덕분에' 평생 공부에 남들보다 더 많이 관심을 갖고 한 자라도 더 배우려고 배움에 온 열정을 쏟았으며 말년에는 마쓰시타 정경숙이라는 배움터까지 세웠습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몸도 약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약한 '때문에'라고 핑계 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몸이 약했던 '덕분에' 더 조심하고 삼가면서 건강을 챙겨 95세가 넘도록 장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삶을 대하는 자세의 특징은 '때문에'라며 탓하는 것이 아니라 '덕분에'라고 말할 줄 아는 철저한 긍정의 철학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긍정을 선택하라 그러면 당신의 삶은 최고가 되리라!"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조엘 오스틴이라는 젊은 목회자가 던진 말입니다. 조엘 오스틴은 텍사스주의 한 지방대학을 1년 만에 중퇴했을 뿐, 한번도 신학을 정식으로 공부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18세부터 17년간 아버지 존 오스틴 목사의 목회를 방송하는 프로듀서 역할만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사망하기 직전에 당부한 대로 아버지가 이끌던 레이크우드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정식으로 목사 교육을 받지 못한 그가 설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교회가 어느 교단에서 속하지 않은 무교파 교회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목사의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레이크우드 교회는 네 배 이상으로 성장했고 급기야 프로농구팀 휴스턴 로키츠의 홈구장을 장기 임차해 교회로 사용해야 할 만큼 많은 사람이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엘 오스틴은 미국 전역에서 방송을 타 그가 출연하는 텔레비전 설교 프로그램은 미국 안방을 점령하고 전 세계 150여개국에 송출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제 마흔세 살 난 그에게 무엇이 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조엘 오스틴이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끊임없이 긍정의 바이러스를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긍정의 가치, 긍정의 힘에 굶주려 있었던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긍정보다 부정을 선택하곤 합니다. 바로 거기서 일은 꼬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긍정을 선택할 때 거기서부터 모든 삶의 실마리가 풀려나갑니다.

오스틴이 쓴 긍정의 힘이란 책의 시작은 저자의 확신에 찬 어조로 진행됩니다.

[이 책은 오늘을 온전히 잘 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 준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간단하지만 심오한 일곱 단계가 펼쳐질 것이다. 당신이 이 책의 일곱 단계를 적용하면 전보다 더 큰 행복을 얻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 하루나 이번 한 주가 아니라, 평생 동안,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과 열정이, 당신과 함께 할 것이다! 아무쪼록 당신이 그럭저럭 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잠재력을 극단까지 발휘하길 바란다. 그러려면 당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부정적인 태도를 벗어던지고 더 큰 비전을 품어야 한다. 더 많은 일을 행하고, 더 큰 즐거움을 누리며, 더 대단한 사람이 된 자신을 상상하라. 바로 이것이 오늘을 온전히 사는 비결이다. 자, 잠재력을 극한까지 발휘할 준비가 되었는가? 이제 시작이다. 오늘부터 최선의 삶을 살아내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정의 힘이 아니라 긍정의 힘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라며 탓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 덕분에, 무엇 덕분에 라고 말하며 긍정하시기 바랍니다("하나님 혹은 목사님 때문에 휴일날 단잠을 깼어"가 아닌 "하나님, 목사님 덕분에 한주의 시작을 하나님 앞에 예배로 하는 구나"). 항상 나의 주변에 긍정의 바이러스를 넉넉히 퍼뜨리는 여러분과 저의 생활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 민수기 13장에는 부정의 힘에 빠져 악한 평가를 내리고 재앙으로 이르는 열명의 사람들과, 긍정의 힘을 가지고 긍정의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 둘의 이름은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두 사람의 긍정적인 모습을 부각시킬 수 있었던 배경이 되는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은 가데스 바네아 사건입니다.

가데스 바네아 사건의 내용을 말씀드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 복지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총 2백만 명이 넘는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집트를 떠난 저들이 2년 동안 걸어 도착한 곳이 바로 바란 광야의 가데스라는 곳이었습니다. 가데스라는 지명이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복지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하기만 하면 되는 지점까지 도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의 땅은 그저 얻을 수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2년 동안은 전쟁 한번 치르지 않고 은혜로만 걸어온 길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반드시 싸워 이겨야만 하는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게다가 가나안 땅에 사는 일곱 부족은 유목민 이스라엘이 상상하지도 못하는 뛰어난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튼튼한 요새와 막강한 전투 병력까지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가나안이라는 복된 땅을 얻기 위해 저들과 맞서 싸워 이겨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뜻 움직이질 않습니다. 선지자 모세가 아무리 격려하고 권면해도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엉뚱한 제안을 해옵니다. 정탐꾼을 뽑아 먼저 보내보자는 겁니다. 우리 스스로 적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지 않고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럴 듯해 보이는 주장이었지만, 매우 인간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인간들의 마음에 안전하게 느껴지는 방법일지 모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다 왔으니, 어서 올라가 싸워 이기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인간들이 두려워하면서 주저하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완곡히 말하면, "정탐꾼을 먼저 보내보자"는 제안은 불신앙의 발로였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던 까닭입니다(제가 수민이한테 교회가면 사탕줄게 했는데 수민이가 그 약속을 믿지 못하고 교회에 사탕이 있을까? 사탕이 있는지 못믿겠다. 정탐꾼을 보내보자 한다면 아버지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자식에 대해 얼마나 화가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긍정의 힘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불신앙인데도, 포장은 아주 그럴 듯 해서, 모든 백성들이 그만 정탐꾼을 보내보자는 잘못된 주장에 동조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정탐꾼을 먼저 보내보자'면서 행동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의 대가는 아주 혹독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저들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선민의 자격을 저들에게서 영구 박탈하고, 그 자리에서 몽땅 몰살하시기로 결정하셨던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11-12절을 보면, 화가 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심각하면서도 이례적인 제안을 하십니다. "모세야, 안 되겠다, 이 백성은 내가 믿지 못하겠다, 이젠 내가 싫다, 이것들 다 쓸어버리고, 내가 더 크고 강한 백성들로 너에게 새로 만들어 주겠으니, 우리 새로 시작하자, 모세야!"

그러나 천만 다행으로 저들에겐 자기 동포를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지도자 모세가 있었습니다. 모세의 목숨을 건 간절한 기도 덕분에 저들은 몰살당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끄럽긴 하지만 선민의 자격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불신앙의 대가로, 저들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한 채, 다시 광야로 돌아가 38년이란 긴 세월을 방황해야 하는 징벌의 역사를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긍정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 백성들의 부정적인 판단으로, 2년에 끝낼 수 있었던 광야 생활을 40년 동안이나 계속해야 했습니다. 또한 120년을 기다려온 모세마저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출애굽한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광야에 묻히는 참담한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불신앙의 그림자가 있지는 않습니까? 내 마음 속에 긍정의 힘 보다 부정의 힘이 더 강하진 않습니까? 혹시 그러시다면 이 시간, 그 불신앙의 그림자와 부정의 힘을 제거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긍정의 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었어만 했던 것일까?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이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려면 우리는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라는 질문들을 가지고 <가데스 바네아 사건> 속으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기를 원합니다.

선지자 모세가, 백성들의 주장에 밀려서, 각 지파에서 열둘을 뽑아 정탐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일 동안 정탐하고 돌아온 저들의 보고는 일단 긍정적인 것들이었습니다.  민수기 13장 27절에 보면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틀림없다는 보고입니다. 이들의 첫 보고는 긍정적인 보고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28절에서 저들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28절을 보면 "그러나 그 당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각 지파에서 뽑은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해 보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것 맞는데, 거기 사는 사람들이 우리 보다 강하고, 우리보다 견고하고, 우리보다 크더라는 겁니다.

문제는 저들의 마음이 부정으로 돌아서고 나자, 계속 부정으로 치닫고 말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13장 31절에는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고 강력하게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자기들이 방금 전에 했던 내용을 정 반대로 뒤집고 맙니다. 32-33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을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보고합니다. 이 부정적인 보고에서 특히 32절의 <악평>이란 단어와 33절의 <메뚜기>라는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먼저 긍정의 힘만 강한 것이 아니라 부정의 힘도 아주 강하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의 힘은 창조의 힘인 반면 부정의 힘은 파괴의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보면, 일단 가속도가 붙은 부정의 힘은 계속해서 다음 단계의 파괴로 이어집니다. 단순히 <그렇지 않다!>고 말하던 부정이, 32절에 와보니 <악평>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이 악평은 나중에 진노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으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14:37) 

심각한 문제는 부정에서 시작된 악평이 땅을 넘어 사람에게까지 전이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땅에 대해서만 악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악평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33절에 보면,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보고 메뚜기라고 표현하는 충격적인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고는 못하더라도 사람을 메뚜기로 전락시키는 부정의 힘이 강하게 표출되는 표현입니다.

가데스 광야 사건속에서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부정의 힘이 긍정의 힘을 이겼다는데 있습니다. 30절을 보니, 갈렙이 나서서, "그렇지 않다고,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할 수 있다고, 능히 이길 수 있다고, 이제 가자고, 우린 할 수 있다"고 다른 각도에서 보고하며 저들에게 호소합니다만, 일단 부정적인 악평에 물든 저들의 마음이 돌아서질 않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부정의 극단으로 치닫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로 치려합니다(14:10).

부정은 늘 악평으로 이어진다는 사실과 악평은 언제나 하나님의 진노를 사며, 재앙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정의 힘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로를 확인합니다. 14:36-38보면,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으로 모세를 원망케 한 사람,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그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

하나님은 부정에서 시작하여 악평으로 끝을 내는 저들에게 조금의 유예기간도 주시지 않고, 회개할 기회도 주시지 않은 채, 그냥 그 자리에서 벌을 내려 죽게 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민이며, 각 지파의 대표로 선발되었던 사람들이, 처음엔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고 있었다고 보고했는데 왜 갑자기 돌변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한 마디로 마음에 불신앙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승리가 보장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더 이상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긍정의 힘을 상실한 까닭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10명의 정탐꾼들이 퍼트린 불신앙 바이러스가 한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감염시킨 것입니다. 정탐꾼들의 악평 한마디에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14장 1절을 보면, 온 회중이 목을 놓아 통곡하며 소리지르며 말하는데 "차라리 애굽 땅이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젠 완전히 망했구나, 아니다, 이러지 말고, 어서 돌아가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밤새도록 부르짖었다고 기록합니다.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메뚜기로 전락해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들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메뚜기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개 <부정>에서 시작하여 <악평>으로 이어지는 심리 상태를 가리키는데요, 이 콤플렉스에 사로잡히고 나면, 신분고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매사를 메뚜기의 눈으로 바라보니, 상대는 커 보이고 나는 작게만 보입니다. 나는 메뚜기같이 작다라고 열등감을 갖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학력의 열등감을 갖습니다. 어떤 분들은 외모의 열등감을 갖습니다. 어떤 분들은 물질의 열등감을 갖습니다. 이런 열등감을 갖으면 스스로 두렵고 위축되어서 앞을 향해 도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장점은 잘 보지 못하고, 약점만을 골라내 크게 확대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에는 별 관심이 없고, 할 수 없는 일들, 부정적인 일들을 먼저 생각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까지 늘 부정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항상 불안하여 메뚜기처럼 어디론가 튀어 도망갈 채비만 합니다. 그래서 메뚜기 콤플렉스는 패배주의로 연결되곤 합니다. 항상 문제의 주변을 맴돌기는 하는데 맴돌기만 할 뿐, 그 문제에 도전하고, 문제를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하려는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나도 모르게 메뚜기 사고방식에 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를 메뚜기라 생각하는 착각의 감옥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혹독합니다. 남은 생애를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광야에서 고생만 하다가, 그렇게 광야에서 죽게 되는 겁니다.

세상에서 사업에 승리하는 기업을 보십시오. 지성이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긍정적이며 분명한 확신이 있는 기업이 승리합니다. 과거 정주영같은 기업가들을 보십시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입니다. 그는 명문대 출신의 많은 직원을 거느리고 회장으로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기업으로 성공할 수 있었습니까? 성공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과 확신을 갖고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도전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부흥하는 교회는 우리교회가 부흥한다는 부흥의 긍정과 확신이 있는 성도들과 지도자가 있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는 긍정의 힘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흔하디 흔한 메뚜기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명령을 실천할 능력과 자세를 갖춘 적극적인 사람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메뚜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부르심 받은 역군이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승리가 예정된 불굴의 용사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나 자신을,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메뚜기가 아닌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아름다운교회 믿음의 식구들은 절대로 메뚜기가 아닙니다. 우린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이며,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러니 늘 부정의 힘에 빠져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라고 탓하면서, 악평과 재앙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긍정의 힘으로 확신을 갖고 누구 덕분에, 무엇 덕분에 라고 감사하면서, 담대하게 승리하며 최고의 오늘을 살아 승리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긍정의 바이러스를 우리의 주위에 넉넉히 퍼뜨리며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