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도망가는 야곱(창세기 31:1~20)
야곱은
도망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집과 라반의 집에서 도망을 갑니다. 사람이란 끊임없이 도망가는 존재인듯 합니다. 불량학생은 교사로부터,
불효자식은 부모로부터, 범죄한 시민은 그 사회와 국가로부터 도망가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떳떳하지 못하거나 이유없이 억압받고 학대를 당할 때
도망갑니다. 모든 사람들이 문제없이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사회는 서로가 서로에게서 도망가는 사회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피합니다.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행복을 찾을 수 있는데 행복을 눈앞에 두고 자꾸 피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하나님의 실수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도망자의
삶은 끝없이 어디론가 가야하기 때문에 외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피하면 끝없이 방황해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가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죄를 짓고는 정처없이 방황해야했던 최초의 도망자였습니다.
떠나야
할 때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14년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동안 4명의 여자를 통해 11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그 세월동안 야곱이 받았던 고통과
외로움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를 위로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야 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에는 자기가 배신했던 형이 있었기 때문에 안락한 곳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라반이 만류하자 야곱은 라반의 집에 더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면
고통이 따릅니다. 하지만 그가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고 머물 때조차도 하나님이 조건과 이유없이 야곱에게 복을 주시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이럴 때에도 야곱은 하나님의 오묘하고 놀라운 사랑의 섭리를 다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야곱에게 재산이 생기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돈이 많아지기 시작하면 아울러 적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유명하지 않을 때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비난하는 사람이 없지만 유명해지면 적들이 생기고 모함하는 자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야곱은
자기를 비난하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소문의 출처는 라반의 아들들이었습니다. 배신하는 사람과 자신을 욕하는 사람은 주변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들의
야곱을 향한 비난은 두 가지이며 그것들은 진실이 아닙니다. 야곱의 양들은 건강하고 번식을 잘 하는 반면 라반의 양들은 그렇지 못하니까 라반의
아들들은 질투가 나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야곱이 부자가 된 것은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사실과 다른
해석을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은 야곱은 억울했습니다. 더구나 윗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어린 사람에게서 이런 소리를 듣자 그동안 인내하던 것이 폭발하고 맙니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않으면 괴로운 일들이 계속해서 생기는 법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야곱을
대하는 라반의 태도가 달라지고 말에는 가시가 생겼습니다. 야곱은 이런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라반의 아들들이 철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알고보니 그 소문의 진원지는 라반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더 상처를 받습니다. 야곱은 결국‘이제는 떠나자’라고
생각합니다.
라반과
야곱의 관계는 사위와 장인관계로서 사랑과 존경의 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미움과 의심의 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야곱과 라반은 남을 속이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하는 대로 자신이 당하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법칙입니다. 남에게 잘하면 누군가 자기에게 잘하게 되고, 남을 용서하면 누군가 자신을 용서합니다.
그러나 라반이나 야곱은 서로를 원망하며 불행한 관계로 번져갑니다. 겉으로는 친한 척, 서로를 존경하고 아끼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계산적으로
서로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교회에서도 뒤돌아서서 남을 흠집내는 사람을 만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떠나지 않자 하나님이 직접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땅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축복의 땅으로 빨리 돌아오십시오. 세상에 있을수록 더 많은 비극을 보게 됩니다.
사실
야곱은 믿음의 조상이 되기에는 너무나 인격적으로 문제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시각과 하나님의 관점은 다릅니다.이런 사람도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기 자식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이 모범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이미 사랑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잘하고, 주일날 예배에 빠지지 않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선교사로
갔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길고 긴 기다림
하나님은
야곱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에 부족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훈련을 시킵니다. 고난과 역경 가운데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위기에 부딪혔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해달라고 합니다. 응답이 없으면 너무나 속상해 하며 ‘하나님,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다림보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더 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숙한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고통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변하지 않는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이 큽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기다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정신을 차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때까지 야곱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부모의 마음과 비슷합니다. 부모는 고생을 하게 될 아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마음 아파하지만 아들이 군대라는 조직속에서
어른이 되고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야망이
많은 사람은 겁도 많습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 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네가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네 옆에
있어주겠다’.
야곱은
드디어 떠나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라헬과 레아를 불러서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4,
5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 있는 들로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찌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야곱은
그 동안의 자초지종을 부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라반의 두 딸은 쉽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기 아버지가 잘못했어도 아버지를 비난하는 남편이
고울리가 없어 마음이 편치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야곱은 계속해서 그들을 설득합니다.
6,
7절을 보십시오.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야곱이
지난 14년 동안 장인을 섬기며 고생했던 사실과 그의 품삯을 장인라반이 여러번 속여서 갈취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습니다.
8,
9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라반은
야곱에게 주기로 한 품삯을 10번이나 바꾸면서까지 사위를 이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상황가운데에 개입하셔서 라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부유해 질 수 있었습니다.
10∼13절을
보십시오.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었더라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복을 주신 것을 살펴보면 복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야곱은 복을 받을 만한 어떤 선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복이란 복받을 만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복받은 이유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기
위해 결정된 존재
우리는
은혜로 복을 받습니다. 구원은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내가 받을만해서 받은 것은 감동도 없고, 응당 받아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여러분은 사랑받고 복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임을 믿으십시오!
이런
점에서 보면 하나님께 공의가 없어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곬수이시고 편애를 하십니다. 하나님은
한번 우리를 사랑하기로 결정하면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실수하면 그 실수를 이용해서라도 복을 주십니다. 죄가 없어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복을 주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모두 없애 버리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복 받을만한 그릇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런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과 긍휼하심을 어찌 다 말로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녀를
야단치지 마십시오. 야단치지 않으면 버릇이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잘못한 것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주고, 인정해 주고, 사랑하면 사람은 변합니다. 남편의 버릇을 고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남편을 인정하고 격려해 주고 사랑하면
남편은 스스로 알아서 자기의 잘못을 고쳐나갑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야곱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야단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야곱은 야단 맞을 짓을 많이 저질렀는데도 야단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복을 주기 위해서 동물의 마음까지 움직이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양과 염소들이 새끼를 낳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복 주기로 결정하시면 넘어져도, 깨져도, 또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시고 공의가 없으시다’. 그런 반론을 제기하고 싶으십니까? 공의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골백번 죽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공의와 정의로 우리를
대했다면 우리는 아무도 구원받거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럴 가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우리의 허물을 눈감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눈감아 주시고 용납해 주셨듯이 여러분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눈감아 주시고 그 사람을 이해해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가정에 복이
옵니다.
이런
하나님이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다’라고 야곱에게 말하십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있는 야곱은 인생의 가장 절망적이고 어두운 그는 들판에서 배고픈
창자를 움켜쥐고 새우잠을 자야 했습니다.
돌
하나를 뽑아다가 베개를 하고 하늘을 보다가 잠이 들었을 때 그는 꿈을 꿉니다. 하늘의 사닥다리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거기 하나님이 계신
것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서원을
회복하라
이말을
들은 야곱은 놀랐습니다. 그때야 말로 야곱이 야단맞을 잘못을 저질렀을 때인데 하나님이 오셔서 야단을 치시는 대신 위로와 격려를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 살아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자녀를 격려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야곱을 절대로 야단치거나 따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메시지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렇게 무조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날
밤에 야곱은 너무 놀라서 잠에서 깨어나 한밤중에 돌베개를 땅에 박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기도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서원까지 합니다.
‘하나님,
이것이 사실이라면 평생에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 돌기둥이 하나님의 집이 되며, 모든 물질의 십일조를 바치겠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나면 예배드리고 찬양을 합니다. 그리고 서원도 합니다. 야곱은 가슴이 벅차 오르는 감동으로 그런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하나님은 야곱의 서원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신없이 흥분해서 한 기도도 다 기억하십니다. 어린시절 어느날 감격해서 선교사로 헌신한 것을 잊지 마십시오. 위급한 상황에서 헌금하고
가난한 자를 돕겠다고 한 것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직접 부르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은혜받고 성령안에 있을 때, 찬송하고 기도할 때, 자기도 모르게 감당할 수 없는 말을 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는 직접적인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하나님 음성 듣고 싶어서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나서 혼자 방에 앉아서 ‘주여 말씀 하옵소서, 제가 듣겠나이다’라며 가만히 들어보니 옆집의 라디오 소리만 잘 들리더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은혜받고 감동하여 기도하며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이성을 찾고 나면 자기가 한
기도에 대해 다시 생각합니다.
여러분,
복을
회복하고 싶으면 서원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이 가장 어려울 때 하나님께 매달린 것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금년이 지나가기
전에 약속을 회복하십시오. 서원한 것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이
불리하고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지키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14∼16절을
보십시오.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드디어
라헬과 레아는 야곱에게 설득을 당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기로 결정을 합니다.
야곱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항상 떳떳하지 못하게 몰래 떠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도 그렇고 라반의 집으로부터도
그렇습니다.
야곱은
라반이 없을 때 자기가족과 재산을 챙겨가지고 몰래 떠납니다. 그리고 아내 라헬은 아버지가 없을 때 아버지의 물건을 훔쳐가지고 떠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버리지 않고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급할 때는 새벽기도하며 살려달라고 해놓고, 잘 되면 딴 짓하는 그런 사람이
야곱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속인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속아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진짜 믿음을 가질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17∼20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약대들에게 태우고 그 얻은 바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
아비 이삭에게로 가려 할쌔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
가만히
떠나고 싶다고 상대방이 가만히 두겠습니까? 떳떳치 못하게 몰래 떠나는 사람, 어쩌면 이런 모습이 우리의 실상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다지 훌륭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헌신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면서도 우리 안에 이런 인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놓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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