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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결단을 합시다(창 25:19-34)-박조준목사

공 상희 2006. 7. 20. 20:35
바른 결단을 합시다(창 25:19-34)-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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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결단을 합시다(창 25:19-34)-박조준목사

아브라함의 향년 175세에 수가 높고 나이가 많아 기운이 진해져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 아내 사라가 묻힌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지난 시간에 생각한 대로 40세에 리브가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없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리브가로 잉태하게 했는데, 그 배 안에서 아이들이 싸우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했습니다.


때가 되어 해산을 했는데 쌍동이였습니다. 먼저 나온 아이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했고, 나중에 나온 아우는 나올 때 손으로 형의 발꿈치를 잡았기 때문에 야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삭이 첫 아이를 얻게 되었을 때가 60세였습니다.

이 쌍동이 아이들은 한 날 한 시에 태어났지만 그 성품은 너무 대조적이었습니다. 에서는 씩씩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집에 붙어 있지 아니하고 들로 나가 다니며 사냥을 좋아해서 들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성품이 조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집안 일을 잘 돌보았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짐승의 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에서를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집안에서 물도 길어다 주고, 불도 때 주고 어머니의 일을 돌봐 주는 야곱을 사랑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한 편애를 했습니다. 이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닙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집안 일을 돕는 야곱이 어머니를 도와서 집에서 팥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들에 사냥을 나가서 온종일 뛰어 다니던 에서가 집에 돌아올 때는 매우 시장했었습니다. 그런데 팥죽 냄새를 맡으니 환장을 할 지경이었습니다.

하여간 에서가 얼마나 시장했던지, 그리고 속에서 식욕이 얼마나 일어났든지 팥죽을 쑤고 있는 동생 야곱에게 팥죽이란 말을 미처 못하고 “그 붉은 것 좀 먹자.”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에서의 별명이 에돔이라고 했는데 에돔이란 말이 ‘붉음’이란 뜻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은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갈급하게 만듭니다.


이때 야곱은 아주 좋은 찬스를 노렸습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파시오. 사실 형이나 나나 생긴 것은 한순간에 생겼는데 세상에 나올 때 둘이 같이 나올 수가 없어서 형이 먼저 나오고 나는 형의 발꿈치를 쥐고 나온 것 아니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얼마나 다투었습니까? 그러다가 결과가 이렇게 되었는데 저는 늘 동생된 것이 마음에 한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형이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판다면 이 솥 안에 있는 팥죽 한 그릇 아니라 몽땅 준다고 해도 좋아요.”

이 말을 듣고 있던 에서는 배가 고픈 김에 깊이 생각할 시간의 여유도 없이 “이 사람아, 내가 지금 배가 고파서 죽게 되었는데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나? 너 가져라, 어서 가져.” 야곱은 기회를 놓칠세라 형에게 다짐을 했습니다. “진정입니까? 오늘 내게 맹세할 수 있습니까?” 에서는 선뜻 대답합니다. “맹세한다. 장자의 명분을 네가 가져라.”


야곱은 팥죽 뿐만 아니라 떡까지 곁들여서 에서에게 넉넉히 주어 배고파 하던 에서가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스스로 결단할 수밖에 없는 때가 옵니다. 바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합니다. 결단을 한번 잘못함으로 인해 평생을 두고두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에서도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고 평생 후회했습니다. 그럴 때 후회는 이미 늦은 때입니다.


이 자리에는 젊은이가 많이 계십니다. 청년을 청춘(靑春)이란 말로도 표현합니다. 사실 청년시대는 인생에 있어서 봄과 같은 시대입니다. 봄에는 나뭇가지가 연하여집니다. 새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입니다. 마찬가지로 청년시대는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고 새로운 생명을 사모하는 때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청년의 때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요, 새 생명과 진리를 찾을 만한 때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청년의 때에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청년의 때는 마음의 밭이 옥토와 같은 때입니다. 길가처럼 굳어지지 않았습니다. 좋지 못한 습관이나 편견과 고집으로 돌짝밭이나 가시덤불이 웅켜져 있는 것 같지도 아니합니다. 또는 세상의 명예나 재물 같은 것을 탐하는 것도 비교적 덜합니다. 양심은 비교적 순결하고 높은 이상을 가지고 의리에 살아 보려고 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에 진리의 씨를 받으면 그 마음의 밭이 포근포근한 옥토와 같으므로 그 싹이 자라서 문자 그대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둘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청년시대는 번민과 고뇌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20세가 좀 지나면 대개 그 육체의 성장은 끝이 납니다. 더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계속 자라기를 힘씁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장성은 그치고 영혼의 장성은 그냥 계속되는 이런 때 말하자면 심리적으로 갈등과 번뇌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번뇌는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이 여러 가지 번민 속에서 헤매이다가 하나님을 찾아서 인생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고 바른 우주관과 바른 인생관이 성립되어 자신의 생을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게 될 때 마음에 안정이 생기고 가슴 속에는 큰 기쁨과 만족과 안심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이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읽어보시면 발견하게 되는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는 본래 믿음의 어머니를 가진 형편이었지만 세상에 빠져서 어머니의 충고도 듣지 아니하고, 간절한 기도도 아랑곳하지 않고, 육신의 정욕을 위해서 살고, 명예와 인기에 목이 말라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육신적인 만족만 준다면 장자의 명분도 헌신짝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아 만나고 난 다음에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의 지난날의 삶을 돌아보며 쓴 책이 어거스틴의 참회록입니다. 유명한 책입니다. 읽어보지 못하신 분은 한번 쭉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육신의 향락과 명예를 마음껏 누려 본 체험이 있는 어거스틴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참된 안식과 만족을 얻기까지 다른 데서는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문학이나 예술이나 돈이나 권세나 세상 것에서 참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팥죽 한 그릇으로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을 찾을 때, 참 생명을 얻을 때 거기서 만족을 얻습니다.

사실 사람은 세상의 것을 얻으면 얻을수록 더 얻고 싶고 누리면 누릴수록 더 누리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만족이란 없습니다. 왜요? 사람에겐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이 먹을 음식 없이, 마실 물이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없이 참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일찍이 하나님을 찾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은 옛날 다윗의 고백만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 참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종교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의 대부분이 소년시대와 청년시대에 하나님을 찾게 된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어보아도 하나님을 위해, 사회를 위해서 크게 봉사한 사람들을 보면 일찍이 소년 시절에 혹은 청년시절에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이 그랬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다니엘, 이사야 그 밖에 모든 선지자들이 청년시절에 하나님을 찾아 만나고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바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보아도 대개가 그렇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청년의 때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는 때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청년시대는 결단의 시대입니다. 말하자면 청년의 때는 일생에 있어서 분기점입니다. 이 길로 가느냐? 저 길로 가느냐? 하는 것을 결단할 때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그런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만 미국이나 구라파에 가면 도로가 얼마나 복잡한지 모릅니다. 가령, 미국의 뉴욕 같은 데는 그 도로가 얼마나 복잡한지 처음 가시면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여러 갈림길이 있는데 내가 목적하는 곳에 바로 가려면 미리부터 표시판을 자세히 보고 정신을 차리고 따라 가야지 길을 잘못 들어서면 비슷한 곳으로 가는 것 같아도 결국은 아주 엉뚱하게 다른 곳으로 가서 고생하는 경우를 많이 당합니다. 출발은 같은 곳에서 하지만 결과는 아주 다른 곳이 돼 버리고 맙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엘 가면 어느 분야에서 전공과목을 공부하나 하는 것을 택하게 됩니다. 공학을 공부해서 엔지니어가 되든지, 음악을 공부해서 음악가가 되든지, 미술을 전공해서 미술가가 되나, 법을 공부해서 법률가가 되나, 정치를 공부해서 정치가가 되나, 문학을 공부해서 문학가가 되나 우리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선택은 본인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분야에서 공부를 하고 어떤 직업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본인의 적성에 맞는 분야를 택해야 합니다. 더구나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사명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깨닫고 그 방면에 진력하는 것은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흔히 인기 있는 과목이라고 해서, 남들이 많이 간다고 해서 그 방면을 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나 스스로가 나는 어떤 방면에 달란트를 받았나 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방면으로 정진해야 합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애들에게 이것저것 다 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너무 과중한 부담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사람에게 하나님이 재능을 주실 때 한 두 가지만 주시지, 모든 것 다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어린애는 피아노 학원에 갔다가 암기학원에 가고, 미술학원에 들렸다가 태권도 훈련받고 하는데 아이가 바로 자랄 수 없습니다. 어떤 부모님은 내 아들은 꼭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방면에 소질도 없는 사람을 자꾸만 몰아대면 그 방면의 대학에 입학은 할 수 있고 훈련을 받을 수 있을는지 모르나 그 방면에 대성 할 수는 없습니다.

꼭 일류대학을 졸업해야 모든 방면에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공부하기 원치 않아 하고, 해도 잘 안되는 사람에겐 다른 방면의 은사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댁 한 분은 자녀들 교육문제로 남미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셨는데, 이 아들이 공부를 해도 안 되어서 겨우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장사를 아주 잘해 가지고 지금은 30대의 젊은이인데 미국 LA.와 샌프란시스코에 빌딩을 두개나 장만하고 큰 장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은사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그 은사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보통 청년시대에 평생을 같이할 배우자를 택하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옛날에는 그저 부모님들이 알아서 배우자를 택해 주어서 본인들에게는 실상 선택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생각한 대로 이삭이 배우자를 택한 것도 그 아버지 아브라함이 늙은 종 엘리에셀에게 부탁하여 그의 자부될 사람을 택할 것을 위임해서 그저 이방 사람이 아닌 자기 동족에게서 이삭의 아내를 택해 올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늙은 종 엘리에셀이 주인 아들의 아내될 사람을 택해서 데리고 온 것을 그저 받아들여 아내로 삼은 것뿐입니다.


이런 사회제도 속에서 불행한 일도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대는 본인 자신이 먼저 마음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의 동의하에서 한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아마 이 자리에도 장래를 생각하고 남녀간에 교제하고 계신 분도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요즘 보통으로 배우자를 택하는 조건이 남자편에서는 여성의 미모를, 여자편에서는 남자의 경제력을 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꼭 바른 견해는 아닙니다.

물론 이 말은 외모가 아름다운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겉모양만 보면 실패하기가 쉽습니다. 남자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경제력이 물론 중요합니다. 보통으로 사람들이 고생하기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돈이 사람의 전부는 아닙니다. 바른 사람을 택해야 합니다.


여러분, 결혼 한번 잘못하면 평생을 망칩니다. 그러므로 선택을 바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미모만 보고 따라가고, 돈만 보고 따라가다가 결혼했지만 실패한 사람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청년시대는 인간의 분수령과도 같습니다. 분기점입니다. 어떤 길로 가느냐 하는 것을 정하는 때입니다. 청년시대에 방향을 옳게 잡으면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청년시절에 방향을 잘못 잡으면 일생을 그르치게 되고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시절은 일생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의 분기점이 되는 것입니다.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질 때도 눈에 보이는 푸른 풀과 시원한 물만 보고, 경우도 의리도 버리고 눈에 보이는 것만 택해서 갔다가 그만 소돔성과 함께 그의 아내를 잃어버리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바로 선택하면 인생을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모세를 보세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중히 여겼습니다. 물론 육신편으로 보면 모세는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습니까? 바로의 궁중에 공주의 양자로 있었으면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안일하게 살아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고생은 했지만 의미있고 보람된 삶을 살 수 있었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하는 출애굽의 영도자가 된 것입니다.


다니엘의 결단이 그렇습니다. 그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의 결단이 그렇습니다. 인생의 갈 길이 많다고 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 길밖에는 없습니다. 의의 길과 불의의 길, 선의 길과 악의 길,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복의 길과 저주의 길, 넓은 길과 좁은 길, 천국가는 길과 지옥가는 길, 팥죽 한 그릇과 장자의 이름, 이렇게 인생의 길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길 가운데 바른 길을 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편 1편의 말씀을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복 있는 사람이 가는 길이 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어떻습니까? “악인은 그렇지 아니하니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앞길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가는 길,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악한 자가 가는 길, 이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길은 우리 인생을 갈라놓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가는 길의 방향을 바로 잡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우리 주님을 찾아야 될 것입니다.

역대하 34장 3절에 보면 유명한 요시야 왕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요시야 왕은 8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어렸을 때 곧 위에 있은지 팔년만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고 그 십이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케 하여 그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렸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요시야 왕이 일찍이 얼마나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8세에 왕이 되어 위에 오른지 8년에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니까 16-17세 때 하나님을 온전히 찾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12년, 그러니까 20살 때 유대와 예루살렘에 있는 아세라 목상, 아로새긴 우상, 모든 부어 만든 우상 이런 것들을 다 제해 버리고, 예루살렘과 유다를 깨끗이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고 모든 정치를 개혁하는 큰 공헌을 젊은 왕이 역사상에 남긴 것을 우리가 구약성경을 통해서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그 길을 바로 정했습니다.


봄에 좋은 씨를 뿌려야 가을에 좋은 열매를 거둡니다.

여러분은 일생 동안 갈 길을 다 정하셨습니까? 아직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방황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여러분은 생명길을 택하셨습니까? 바른 길을 택하셨으면 그 길로 힘차게 나아가야 합니다.

윈스턴 처칠 경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적습니다.” 전에 여호수아처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하는 결단의 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