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마태복음 21:1-11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오늘부터 시작하여 1주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때는, 유월절 절기 즈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전국과 세계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몰려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느 곳에 살든지 간에 일생에 한 번만이라도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외국 땅에서 유월절을 맞이하게 되면 그들은 “금년에는 여기에서,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사모합니다.
오늘 설교는 종려주일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모든 것의 주인이신 예수님(3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벳바게 맞은편 마을로 가서 매인 나귀를 풀어서 끌고 오려고 했습니다. 그때 나귀 주인이 “왜 남의 나귀를 가져가려느냐?”고 했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이 쓰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귀 주인은 선 듯 나귀를 보냈습니다. 나귀 주인은 예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귀를 예수님에게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두 가지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입니다. ➀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Savior)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 때문에 영생을 얻었습니다. ➁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Lord)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모든 소유의 주인이십니다.
♣신앙생활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축복 자동자판기가 되신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주인이고 예수님이 자신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크게 오해 한 것입니다. 진짜 신앙생활은 자신의 인생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서 예수님이 주인이 되셨다가 자신이 주인이 되었다가 왔다 갔다 합니다. 이런 신앙은 성숙한 신앙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시대는 수많은 사람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서머나교회의 감독 이었던 폴리캅도 순교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체포하러온 병졸들을 정성껏 대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준 뒤, 화형대 앞에 섰습니다. 그때 호민관이 폴리갑에게 지금이라도 배교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나는 86년 동안 그리스도를 섬겨왔고 주님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나의 왕이시요, 나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부인하겠는가?”라고 말하고는, 화형의 장작더미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불타고 있는 장작더미 위에서 아주 평화롭게 찬양을 부르며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한 번만 주인이시거나 가끔 주인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주인이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도마는, 요한복음 20:28에서 이런 신앙 고백을 합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두 가지 고백을 했습니다. ➀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➁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주는 헬라어로 kuvrio"(퀴리오스)입니다. 주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500년대까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자기 이름과 함께 D.V라는 대문자로 사인을 했습니다.
♣라틴어로 데이오 벨린티(Deo Valente)며 우리말로는 ‘주님이 원하시면’입니다. 그들은 모든 계획과 소망을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런 사인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초기 기독교인들이 가졌던 ‘데이오 벨린티’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내려놓아야 하고 주님의 뜻이라며 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진짜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2. 말씀을 이루시는 예수님(4,5절)
♣예수님께서 멋진 백마를 타고 입성하셨으면, 위엄도 있고 폼이 났을 텐데, 볼품없는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4-5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약 5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말씀을 이루며 사셨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구약의 구절이 99번이나 인용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말씀을 사용하시거나 그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구약에 예언되었고, 예언된 말씀대로 사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시고 또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대로 살면 복을 주십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면, 너무 구속받는 것이 아니냐.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성도로써 당연한 일이고 또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시119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분깃이 되어주십니다. 말씀대로 살면, 원수보다 지혜롭게 됩니다. 말씀이 발에 등이 되고, 인생길에 빛이 되어 인도해줍니다. 시편 119:165을 보면.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큰 평안이 있고 인생에 장애물이 없기를 축복합니다.
3. 겸손하신 예수님(5절)
♣5절에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는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입니다. 마태복음 11:29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하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겸손한 마음은 은혜 받는 그릇이 된다.”고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겸손한 사람보다 더 힘이 강한 사람은 없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겸손은 은혜 받는 그릇이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베전5:5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하십니다. 겸손한 사람은 은혜 받을 그릇이 준비 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그릇에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겸손한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을 이길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주장이 강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주장이 강합니다.
♣김장환 목사님께서 목회 초창기 때 성가대 가운을 하얀색으로 할 것인지, 빨간색으로 할 것인지, 파란색으로 할 것인지를, 제직회에 안건으로 내셨답니다. 그런데 2시간이 걸려도 결론이 안 나더랍니다. 결국은 하얀 가운을 만들었는데 빨간 가운을 원하던 사람은 시험 들어서 다른 교회로 가더랍니다. 이런 사람은 교만해서 자기주장을 포기 못한 것입니다.
♣진짜 신앙인은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사수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교만이 숨어 있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우리는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자유하십시다. 성가대 가운이 파란색이면 어떻고, 빨간색이면 어떻습니까? 여유가 있어야지요.
♣사람이 겸손하면 다른 사람 밑에 들어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온유와 겸손한 한 팀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강퍅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것 같지만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합니다. 겸손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하면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눌릴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높여주십니다.
하나님이 겸손한 자를 사용하시고 높여주십니다.
4. 구원자이신 예수님(9절)
♣주님이 나귀타고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찬양의 내용은 9절에 나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여기 보면 사람들은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wJsannav(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당시 군중들은 주님에게 호산나를 외치며 구원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하던 구원은 번지수가 틀렸습니다.
♣유대 역사상 가장 비참한 재난 중의 하나가 B.C. 175년경 헬라의 왕 안티오코스4세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된 일입니다. 안티오코스는 헬라의 사상과 문화에 심취된 자였습니다. 그는 유대주의를 박멸하고, 이스라엘에 헬라의 생활과 문화, 헬라의 사상과 종교를 이식시키는 것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고의적으로 성전을 더럽히고 모독하기 위해 성전 제단에 돼지고기를 헌물로 드리고, 성전에 있는 각 방들은 공인된 매음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사본을 가지고 있거나 어린아이에게 할례를 베풀면 사형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그 때에 마카비 형제들이 일어나서 B.C. 167년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안티오코스를 추방하고, 더럽혀진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마카비 형제들처럼 로마군인들을 쫓아내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정치적인 지도자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원하는 정치적인 지도자였다면, 나귀를 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수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말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력으로 로마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연약한 나귀 새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정치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는 영적인 구원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택한 백성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마태복음 1:21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하십니다. 예수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다른 구원자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행전 4:12에“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하십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신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주신 유일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입니다.
♣구원의 방법은 십자가입니다. 고전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 값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부활의 소망을 주시기 위해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십자가가 미련해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번 주는 고난 주간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고난을 기념하며 경건하게 한 주간을 보내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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