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점검 받자 (요 11:38-44)
이 시간에 “믿음을 점검 받자”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믿음은 위대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기 때문입니다. 또 믿음은 불가능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17:20에“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믿음은 우리를 큰 낭패로 인도합니다.
어떤 청년이 기도원에 금식하러 갔다가 성령 충만을 받아 기쁨이 넘쳐 하산하는 길이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시내가 있어 징검다리를 딛고 건너야 하는데 기도원에 있는 동안 비가 많이 와서 불이 불어 강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징검다리도 보이지 않고 물살은 심히 거셉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베드로가 물위로 걸었던 게 생각나서 그래 나도 성령 충만하니 믿음으로 걸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강으로 덥썩 들어갔다 물살에 휘말려 떠내려가다 어렵게. 어렵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청년이 교회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불가능이 없다는 믿음으로 조금도 의심 없이 베드로처럼 강물 위를 걸었는데 강에 빠져 죽을 뻔했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이 말을 들은 목사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물위를 걸었지만 형제님에게는 그런 말씀이 없었지 않습니까?” 하면서 믿음과, 신념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안다 하시면 다행이지만,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신다면,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크나큰 낭패일 것입니다.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7:22-23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런 큰 직분, 큰 능력을 받은 사람도, 잘못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일반 신자라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13:5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했습니다. 바른 믿음만이 예수님을 참된 구세주로 모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오늘 읽은 말씀에,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마르다의 믿음을 점검하시고, 잘못된 믿음을 고쳐주셨습니다. 시간 관계상 11장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오늘 말씀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 된 믿음도 고쳐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믿음으로 고침 받아야 할까요?
1. 아는 믿음보다, 믿는 믿음으로 고침 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어 장사한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누이였던 마르다는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요11:21-22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합니다.
♣이 고백은 참으로 귀한 고백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마르다의 이 고백 중에서, 하나 잘못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22절 끝부분에 ‘아나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아나이다.’라는 말이 ‘믿나이다.’로 고쳐져야 합니다. 우리 믿음이 아는 믿음에 그치지 않고, 믿는 믿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알고, 주님을 알고, 만물의 이치를 아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알아만 가지고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보다 얼마나 믿고, 얼마나 실행하고, 체험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약1:22에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했습니다.
♣예수님 탄생하실 때 당시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탄생 할 곳이 베들레헴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기득권을 빼앗길까봐, 메시아 예수님을 모함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는 것이라. 알기만 하고 행치 않으면. 어디 가나 문제만 일으키고. 모르는 사람보다 더 못합니다. 그러므로 한 말씀이라도 아는데 머물지 마시고, 믿고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2. 나중 믿음보다, 현재의 믿음으로 고쳐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말을 듣고 23절에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마르다는 24절에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마르다가 바로 전에 ‘이제라도 살리실 줄 믿는다.’고 고백해 놓고.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살리라!”고 말씀 하실 때 ‘이제라도’의 그의 고백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로 바꿔지고 맙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나중 믿음보다, 현재 역사하는 믿음을, 더 기뻐하십니다. 나중에 잘 믿겠다는 것은, 안 믿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현재의 믿음 없이 나중의 믿음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 믿음, 현재 회개, 현재 천국, 현재 충성이 중요합니다.
♣지금 믿습니다가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차차 마귀가, 가장 교활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잘해야지, 내일부터, 내년부터, 나이 많이든 후에 차차하겠다고 하는 것은,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6:2에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중믿음이 아니라, 현재의 믿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3. 교리적인 믿음보다, 진실한 믿음으로 고쳐져야 합니다.
♣미래의 부활만 생각하고, 현재의 부활을 믿지 않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25-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 질문에 마르다는 어떻게 대답해야 옳을까요? “주여!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고 생명이니,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금도 살고, 나중도 살고, 영원히 살줄도 믿습니다.”라고 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27절에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의 이 말은 조금도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이 말 자체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위대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질문과는 전혀 다른 대답입니다.
♣즉 주님은 “네가 부활을 믿느냐?”고 질문할 때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라고 교리적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리적으로도 바로 믿어야 합니다. 교리는 성경을 요약한 것이며 총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이 교리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백성들에게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은 지키라고 강요하면서도,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는 것을 보시고 ♣마23:3에“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저들은 말만 하고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는 자들이라며, 저들의 온당치 못한 행위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교리가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교리를 믿고 실행하고 적용하려는 진실성이 결여된 것입니다.
♣이처럼 교리적인 신앙은, 고정관념만 키우고, 말과 행동을 다르게 만듭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누군가 신앙의 정의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신앙은 가뭄 때에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는 기도회에, 선글라스를 끼고 가지 않고 우산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 비를 주세요!”라고 믿고 기도해야지 “하나님은 비를 주시는 분이야!”라는 교리적인 사실만 내세우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리에만 머물지 말고 진실한 믿음으로, 날마다 그 교리를 교본 삼아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진실한 믿음으로 고침 받아야합니다.
4. 환경적인 믿음보다, 환경을 극복하는 믿음으로 고쳐져야 합니다.
♣주님은 마르다와의 대화에서 믿음이 없는 마르다의 믿음을 보시고, 마르다와 대화를 그만 두시고,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전능하시고 기적의 주인공 예수님이시지만, 무덤의 돌문은 사람에게 옮기라 하셨습니다. 돌문을 옮기는 최소한의 믿음을 보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39절 하반부에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의 이 고백은 ‘환경만 보는 환경적인 믿음’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고, 냄새까지 나니, 안 될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환경에 매인 믿음이어서는 안 됩니다. 환경을 극복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환경만 보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어두워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면 기적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 없는 마르다를 책망하셨습니다. 본문 4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처럼 믿음 없으면 책망 받습니다.
전능하신 우리의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웁니까? 왜 실망합니까? 왜 낙심합니까? 큰 산과 같은 문제가 가로 막아도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내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예수이름으로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처럼 요단강을 밟고 건너가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책망이란 좋은 것입니다. 책망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주님의 책망이 울려 퍼지자 누군가 돌을 옮겨놓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한 후에, 큰소리로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중국 선교하러 간 영국의 허드슨 테일러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그가 탄 배가 바람이 없어서 육지에 상륙하지 못하자 선장이 허드슨 테일러에게 바람 불기를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테일러 선교사가 말했습니다. “선장님! 돛을 세워야 바람 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러자 선장이 난처한 듯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남들이 조롱합니다. 바람이 불면 돛을 세우겠습니다.” 이런 불신 가지고는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습니다.
환경을 보는 믿음에서 환경을 극복하는 믿음으로 고침 받아야 합니다.
5. 결박된 믿음이 아니라, 자유로운 믿음으로 고쳐져야 합니다.
♣43-44절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다음에, 수족을 동인 끈과 얼굴을 덮은 수건을 풀어주어 다니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보이지 않는 결박들이 많습니다. 일이 두려워 밖에 사자가 있다는 게으름의 결박,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결박, 혹은 어떤 잘못된 관습이나 전통이 그것입니다. 거기 얽매여서 활발한 신앙생활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새가 새장에서 벗어나듯이,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전통은 힘들지만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결박을 풀고, 우리가 믿음 지키기에 합당한 더 좋은 전통을 만들어 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에 나와 여러분의 믿음도 점검 받기를 원합니다. 믿음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고, 믿음으로 천국 가고, 믿음으로 응답 받습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믿음이 아는 믿음에서 믿는 믿음으로, 나중 믿음보다 현재 믿음, 교리적 믿음보다는 진실한 믿음, 환경을보는 나약한 믿음보다는 환경을 초월하는 믿음, 행함이 없는 믿음보다 행하는 믿음, 결박된 믿음이 아니라 자유로운 믿음으로 고쳐져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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