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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송구영신 예배설교20편

공 상희 2014. 12. 27. 17:34

1.송구영신

삼상7:1-17

 

금년도 오늘이 마지막날입니다. 이제 금년 달력을 관심 있게 볼 시간도 몇 시간밖에 남지를 않았습니다. 오늘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시간이며, 새롭게 선교회를 출발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오늘의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지난날을 감사하고 새로운 축복을 대망해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지난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고 이제 새롭게 내려주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며 새 출발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욥기서 8장 5- 7절에 보면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하였습니다.

무조건 시작은 작아도 나중은 잘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정직하고 청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무엇을 시작해도 마침내 잘 된다는 뜻입니다.

해마다 이때쯤이 되면 다사다난했다 하는 소리들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인생사 어느 때 치고 다사다난하지 않은 때가 있습니까

야곱은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자기인생을 되돌아보며 내가 험악한 세월을 살았나이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세상살이는 험악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던지 평안하게 살아간 사람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험악한 세월을 어떻게 이기며 얼마나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얼마나 긍정적으로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따라서 험한 세월이라도 웃으며 사는 사람이 있고 그 험한 세월에서도 보람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험난한 세월을 살면서도 기뻐하며 살고 감사하며 살고 말하길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했습니다.

보통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은혜로 받을 수 없는 것을 그는 은혜로 받았습니다. 그의 삶 전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바라보니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사람 이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365일이라는 시간을 살아왔습니다. 살아온 날들이 지긋지긋한 분 있습니까 아니면 살아온 날들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오늘 성경 본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총결산하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을 떠나 제멋대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리워합니다. 그동안 제멋대로 살아 보았지만 사는 날들이 평안하질 못했습니다. 불레셋 군대의 침략을 수시로 받아서 항상 불안에 빠졌고 급기야는 하나님의 법궤까지 빼앗겼습니다.

이스라엘로서는 수치가운데 수치를 당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구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가는 곳마다 불레셋 마을에 신당의 신들이 자빠지고 독종이 생겨서 사람들이 다 죽는 것입니다.

불레셋 온 마을이 공포에 떨게되고 견디다 못한 불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보내게 되고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옮겨진 후에 불레셋이나 이스라엘이 평안하게된 것입니다. 이때에야 사람들이 하나님을 다시 찾게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사무엘이 미스바에 모이게 하고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회개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였다 하는 소리를 듣고 불레셋 군대가 쳐들어오나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저들을 문제없이 다 쳐부수고 승리의 기념으로 돌을 미스바와 센사이에 세우게 되는데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해서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 받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1. 모여야 합니다

2.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3. 회개해야 합니다

4.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얻은 결과는

1. 여호와 하나님이 도와 승리하게 하십니다

2. 다시는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습니다.

3. 평화가 옵니다 .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또 도우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도울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 그릇이 무엇입니까

1. 모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미스바에 모였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 자주 모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모이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다. 주의 몸된 교회에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성경이 우리에게 권면 하는 것은 모이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바쁘다는 핑계로 모이기를 게을리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하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게을리 하는 사람들을 보면 좀 잘살게되면 모이기를 게을리 합니다. 반대로 살기가 어려워지면 먹고, 사는 일이 바쁘다 해서 모이기를 게을리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잘살게 만들어 주신 분이 누구인가요 하나님이 하루아침에 뒤엎을 수 있습니다. 나를 먹고 살수 있도록 도우실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내게 건강을 주시고 나의 갈 길을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것을 안다면 그분이 하나님인 것을 믿는 다면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모임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모이기를 힘쓸 때 은혜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2.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우상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나의 사랑을 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은 두 번째나 세 번 째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첫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세상과 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은 보이는 우상이 있고 보이지 않는 우상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항상 말썽은 보이는 우상보다 보이지 않는 우상이 문제입니다.

보이는 우상은 많은 사람들이 멀리 합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우상은 끊지를 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우상입니다. 그런데 물질을 끊어 내지 못하고 정욕을 끊어내지 못하고 명예를 끊어내지 못하고 혈육을 끊어내지 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다 끊어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 행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불레셋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끊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으스름 달밤에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려고 노를 저었습니다. 밤새도록 노를 저어도 건너편에 가 닿질 않아서 동틀 때 뒤를 돌아보니 배의 밧줄을 육지에 묶어 둔 채로 노를 저었던 것입니다. 끊지 않고는 한 걸음도 복 받는 자리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우상을 제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참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뿐이시므로 그 분을 잘 섬겨야 그 나라도 그 가정도 다 복을 받습니다. 시편 144편 15절에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하셨고,

시편 145장 20절에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하셨고, 이사야 45장 5-7절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 무리로 알게 하리라…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도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쏟아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장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다른 종교, 다른 사람으로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문도 오직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10장 7-9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이외의 것을 섬기거나, 의지하는 것이 우상임을 알고 우상을 멀리 합니다.

3. 회개해야 합니다.

본문 사무엘상 7장 6절을 보세요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여호와께 범죄 하였나이다 하니라"

우리는 지금 한해를 보내며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뒤돌아 보면 우리의 부족한 것들이 없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회개할 일들이 없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우상들이 없습니까 하나 되라 하신 일들을 내 욕심 때문에 깨버린 적은 없습니까

일흔 번식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는데 용서하지 못하고 아직도 가슴에 못을 박아 놓고 있는 일은 없습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되어 다른 사람을 정죄 하고 심판하지는 않습니까 이외에도 우리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일. 이웃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지 못 한 일, 생각하면 회개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깨끗이 회개하고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향하는 첫 발걸음이요, 회개는 축복과 은혜의 첫 발걸음입니다. 회개가 없이 하나님께 가까이 간 사람이 없고 회개가 없이 큰 은혜와 축복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죄가 우리의 심령을 가로막고 있으면 기도가 막히고 은혜가 막히고 축복이 막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죄는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으니까, "하나님도 이제는 늙으셨나봐.

능력의 팔이 다 약해졌나봐. "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이사야 선지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여호와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이사야 59장 1-2절)"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럼으로 회개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나와 같이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지켜주신 하나님이 2005년에도 나와 우리를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4. 기도해야 합니다

모여서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께 제물을 바쳐 예배하고 쉬지 않고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미스바에 이스라엘이 모였다 하는 소리를 듣고 불레셋 군대가 쳐들어 왔습니다. 위기입니다. 전쟁에서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습니다.

본문 8- 9절을 보겠습니다.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사무엘이 젓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 하셨더라”

기도는 생명줄과도 같습니다. 기도를 놓으면 생명줄을 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으로 기도는 쉬어서는 안됩니다. 기도로 승리한 성경의 사건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삶에 불어닥치는 어떠한 위험도 이길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기게 하십니다

빌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

사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루터는 하루 두 시간씩 기도했는데 바쁜 때는 세 시간씩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곳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불청객이 되시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에서 실패하면 모든 것에서 실패하게 됩니다. 기도능력을 믿고 중요한 일일수록, 바쁠수록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여서 우상을 다 버리고 회개하고 예배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응답해 주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 도와 승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위기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본문 10절에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불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불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복음성가에 나오는 가사 한구절 읽셌습니다.

나는 비록 약하나 주의 힘은 강하다

나를 도와 주시는 주님 곁에 가까이 나 걷겠네

아침 안개와 같이 나의 일생 걷힐 때

나를 인도하시어 주님 곁에 가까이 나 가겠네

주님 곁에 가까이 나 걷게 하소서

주님 곁에 가까이 날마다 더 가까이 가겠네

성도 여러분, 새해에는 내 힘으로 이기려고 하지말고 하나님의 도움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실 때 반드시 이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2. 적들을 막아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본문 13절 에 “이에 불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불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내 생애 전체를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2005년이라는 한해동안을 누가 보호할 수 있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지혜로 막을 수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막아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막아 주셔야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소리 없이 들어옵니다. 어둠의 권세를 가지고 어둠의 세력들을 끌고 들어옵니다.

나를 잘못되게 만들고 나를 억울하게 만들고 나를 죽음으로 끌고 가는 것이 마귀입니다. 그런데 누가 막을 것입니까 하나님이 막아주셔야 안전합니다. 적들을 막아 다시는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3, 평화가 옵니다

본문 14절에 “이스라엘이 그 사방지경을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 사람과 아모리 사람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평화가 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땅에서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하시고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참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찬송가 466장 함께 부르겠습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 맘이 늘 평안해

금년에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도로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안과 근심 속에서 살았습니까 하나님 주시는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에벤에셀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그러므로 땅위에 사는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란 약속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만 의지하며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 영육간에 축복의 2015년 새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한해의 끝에서

마25:1-13

 

1970년대에 초ㆍ중ㆍ고등학교를 다녔던 저와 비슷한 세대들에게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성적표에 얽힌 에피소드입니다. 그 시절,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성적표를 부모님께 보인 후, 도장을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성적이 좋게 나왔을 경우에야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들어가 묻지도 보자고도 않는데 성적표를 떡 하니 어머니 앞에 펼쳤습니다.

그러나 성적이 좋지 않게 나왔을 때는 성적표를 받는 순간부터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쓰지 않던 머리를 쓰느라고 정말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힘이 들었습니다. 칼로 숫자를 긁어서는 다른 숫자로 고쳐 넣는 위조의 달인인 친구, 부모님의 도장을 아예 몰래 찍는 친구, 부모님이 성적표를 보자고 하셔도 아예 모르쇠로 일관하는 친구 , 저는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자녀들의 학기말 성적표를 받아든 부모들은 어떻습니까 아이들 성적이 좋은 부모는 마치 자신의 인생 점수라도 되는 듯 목에 힘을 주었고, 자녀의 성적이 좋지 않은 부모는 자신이 낙제생이라도 된 듯 고개를 떨어뜨렸습니다. 인생이 점수로 환산되는 것이 아니지만, 삶의 마디 하나를 정리하는 시점에 서면 본의 아니게 지난 삶에 대해 성적을 매기게 됩니다. “금년도의 내 삶의 성적은 얼마나 될까” 여러분의 올 한 해 성적은 어떠신지요

2) 하나님 앞에서의 고득점 비결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24장에서 25장에 걸쳐서 언급하신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강론 가운데 나옵니다. 주님께서 이 강론을 하시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을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길을 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막13:1)” 그 당시 성전은 헤롯 대왕이 장장 46년에 걸쳐서 지은 것으로서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24:2). ”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고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다시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24:3)” 이에 예수님께서는 주의 재림과 세상 끝 날에 될 일들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하셨고, 그 가운데서 마태복음 25장은 재림과 세상 끝 날에 있을 일들을 세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세 가지는 1절부터 13절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 14절부터 30절의 달란트 비유, 그리고 31절부터 46절의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비유들이 모두 다 마지막 날 심판의 때에 벌어질 일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이란 옳은 자와 틀린 자를 찾아내는 것이고, 잘한 사람과 못한 사람을 가려내는 것이며, 이긴 자와 진 자를 판가름하는 것입니다. 장차 최후 심판의 날에, 혹은 개인적으로 주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천하 만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살았던 삶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생이 잘 산 인생인지 아니면 못나게 산 인생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5장과 오늘 본문이 중요한 것은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잘 살았다’, ‘못 살았다’를 판단하실 기준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보고 우리 인생을 평가하실까요 여하나님이 잘 살았다고 칭찬하시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이며, 장차 주님 앞에서 인정받고 칭찬받을 모습일까요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2. 지혜로운 사람 vs 어리석은 사람

1) 비유의 내용

오늘 본문에 보면, 열 처녀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는데, 그 중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나갔으나 충분한 기름을 가지지 아니했고, 슬기 있는 처녀들은 등과 충분한 기름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나갔습니다. 신랑이 예상된 시각에 왔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신랑은 예상보다 훨씬 늦게 왔습니다. 비유를 살펴보면, 등을 밝힌 채 적어도 서너 시간은 족히 기다린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신랑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의 꽃을 피웠으나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처녀들은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열 처녀가 다 졸며 자는데, 깊은 밤중에 소리가 나기를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고 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저마다 등을 준비하는데, 다섯 명의 처녀들의 등불은 꺼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신랑과 그 일행을 맞아 집으로 들이기까지는 기름이 모자랄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 있는 처녀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8). ”

그러나 슬기 있는 처녀들은 대답하기를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9)”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기름이 다 떨어진 처녀들은 부랴부랴 기름을 사러 갔고,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도착했습니다. 예비하였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이 닫혔습니다. 그 후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11)”라고 애원했지만, 신랑은 대답하기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12)”고 했습니다.

2) 비유해석

여기 나오는 열 처녀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교회에 속해 있는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이 신부 집으로 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혼인 잔치는 최종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등과 기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일반적으로 등은 성도의 ‘외적인 삶’이라고 봅니다. 즉 열 명의 처녀 모두 다 등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모든 성도들이 다 외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 같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름”이고, 그것도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충분한 양, 즉 넉넉하게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름에 대해 성경은 ‘성령님’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한다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삶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 열 처녀 비유에서는 등이나 기름 그 자체보다는 신랑이 늦게 올 때를 대비하고 준비하는 바로 그 “준비”가 이 비유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등이 뭐냐, 기름이 뭐냐 하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죠. 비유의 핵심은 “준비”입니다. 준비란 다른 말로 “깨어있음”입니다(13). ‘깨어있다’는 말은 헬라어로 그레고레오(γρηγορεω)인데, ‘지켜보다, 망보다, 정신 차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준비한다는 것은 깨어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결론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깨어 준비된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깨어있다는 것은 어떤 자세입니까 깨어있다는 것은 ‘잠을 자지 말라’, 즉 육신적으로 잠을 자지 말고 ‘눈이 충혈 되도록 부릅뜨고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깨어있는 것입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요즘 돈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자나 깨나 “돈”이죠. “돈이 좀 생겼으면!” 모든 생각과 마음이 돈에 집중이 되어서 기도해도 “돈”, 예배드리다가도 “돈” 합니다. 말씀을 듣는데도 마음 한구석에 돈 걱정이 자리 잡고 있으며,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하고 웃어도 마음 한 구석엔 돈 걱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밥을 먹어도 즐겁지가 않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것이 돈에 대해 깨어있는 것입니다. 건강이 문제인 사람은 늘 “건강”이고, 자녀 문제가 고민인 사람은 늘 “자식”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그것들에 대해서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깨어있으라는 것, 언제 주님이 오시든, 내가 언제 주님 앞에 서든, 항상 준비되어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 아이를 기르든, 시장에서 장을 보나, 항상 예수님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지혜로운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즉, 준비가 잘 되어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인생 점수 고득점을 받을 수 있는 성도는 어떤 성도입니까

신랑이 늦게 올 것을 알고 충분한 기름을 준비했던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성도입니다. 지혜는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말세의 상황에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것 중에 하나입니다. 성도들은 재림이 너무 지연되기 때문에 기다리다가 지쳐서 영적으로 잠을 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이 늦어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며, 세상의 밤이 깊어지고, 인생의 어둠이 아무리 깊어가도, 즉 아무리 신앙생활하기가 어려워도, 그때를 미리 알고 충분한 대비를 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사단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고, 영적인 잠을 자지 않기 위해 깨어 있는 성도입니다.

군대에 5분대기조라는 것이 있습니다. 원래는 우리나라 군대에 없던 조직인데,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31명의 청와대 기습 침투 사건 후, 그때 생포된 김신조의 증언을 토대로 북한의 비정규군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5분대기조는 사단 급에서는 수색대대 중 1개 중대, 연대 급에서 1개 소대, 대대 급에서는 1개 분대로 운용합니다. 이 5분대기조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긴급 상황 발생 시 초동 조치하는 것입니다. 즉 상황이 발생 한 후 위병소를 통과까지 5분 이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취지로 만들어진 5분대기조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출동” 명령이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긴장해야 합니다. 화장실에서 일 볼 때도 출동 명령이 떨어지고, 막 잠자리에 들었을 때, 식사할 때, 샤워할 때 등 출동명령이 떨어져 군대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제가 느닷없이 군대 이야기를 하는지 아시겠지요 오늘 본문이 말하는 성도의 삶의 자세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늘, 반대로 자신이 언제 주님 앞에 서게 되든지 항상, 그때를 준비하고 살아가는 성도가 지혜로운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경우는, 주님은 오시지 않고, 세상과 인생의 어두움은 점점 깊어가기만 하고, 산다는 것이 너무나 버겁고 어려워질 때, 그런 지독한 시련의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는 성도가 지혜로운 성도입니다. 여러분이 슬기롭고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슬기롭고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항상 주님 앞에 설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설사 주님이 더디 오실지라도, 때로는 아예 오시지 않을 것처럼, 더 나아가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을 믿음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3) 두 종류의 신자

이러한 의미를 가진 열 처녀 비유는 교회 안에 두 종류의 신자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되 주님 앞에 설 준비를 하지 않는 사람, 삶의 혹독한 시련기를 준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운 사람이요, 인생의 환난기를 만나면 그대로 주저앉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또 다른 사람들은 비록 때로는 사는 것이 힘들어 영적으로 졸며 잘 때가 있기는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영의 탄식을 듣는 사람입니다. 힘들수록 더더욱 기도하고, 더 많이 힘쓰고 애쓰면서 주님 가까이 머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겨울의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떠나려고 모든 준비를 마친 새들은 마지막으로 저녁 파티를 열었습니다. 큰 농장에 모여 갖가지 먹이를 마련하여 배불리 먹으며 다음날부터 펼쳐질 험난한 여행에 대비하여 힘을 비축하였습니다. 다음날이 되어 모두들 출발하려고 하는데 한 마리의 살찐 새가 나서며 말했습니다.

“너희들 먼저 떠나는 것이 좋겠어. 이곳에 아직 맛있는 곡식들이 많이 남았으니 난 조금만 더 있다가 뒤따라갈게. ”

다른 새들이 같이 떠나자고 설득했지만 살찐 새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결국 다른 새들은 모두 떠나갔고, 살찐 새는 하루만 더 머물면서 영양을 섭취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자 생각이 바뀌었고 먹이를 먹을 욕심 때문에 시간만 자꾸 지나갔습니다. 결국 시간이 흘러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되었고, 도저히 남아있을 수 없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제야 살찐 새는 날개를 펴고 떠나려고 했지만 불행하게도 너무 살이 쪘기 때문에 날아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적절한 시기를 놓쳐버린 살찐 새는 남쪽으로 갈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도 철새와 같이 될 것입니다. 철새들이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듯 성도들도 언젠가는 따뜻한 하늘나라로 갈 것입니다. 아니면 주님이 먼저 오시든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라’ 하시면 언제든 떠날 준비, 주님 만날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답게 살지 않으면 동료들과 함께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가지 못했던 불쌍한 철새와 같이, 아니 오늘 본문의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같이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정말 어려운 때입니다. 앞으로 이 세상의 밤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오신다던 주님은 오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것은 고사하고, 기도의 응답이 오는 것, 힘들고 어려운 현실이 해결되는 것 모두 모두 다 늦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여러분은 더욱 철저히 준비하시고 대비하셔야 합니다. 사단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고, 영적인 잠을 자지 않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같이 경고합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롬 13:11~14). ”

여러분은 주님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항상 준비되어 있고 늘 깨어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

설교 잡지를 보다가 제목 하나 만으로 제 심장이 멎을 듯 한 설교 한편을 보았습니다. 그 제목은 “너무 늦었습니다”이었습니다. 설교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소화가 잘 안 돼서 병원에 갔는데 “병원에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혹은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또 얼마나 황당할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들었던 말이 이 말일 것입니다. 뒤늦게 기름을 준비하고 와서는 문을 두드리며 ‘열어 달라’ 했으나 그들이 들은 말이 바로 “늦었다”는 말이었던 것이죠.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 보험설계사가 자기 이웃집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 주택 화재 보험에 가입하라고 계속 설득을 했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우리 집은 잘 지은 집일 뿐만 아니라 관리를 잘하기 때문에 불이 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계속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아끼던 집과 그 안에 있는 가재도구들 하며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이 새까만 연기와 함께 타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던 그 집의 주인이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습니다. 옆집에 사는 보험설계사에게 달려가 “지금 당장 보험을 들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때 그 보험설계사의 얼굴 표정이 어떠했을까 상상해 보십시오. 그도 너무 늦었지 않습니까!

앞으로 이 세상이 더욱 어두워질 것이고, 여러분의 인생도 더욱 깊은 밤으로 빠져들 것입니다. 은혜도, 응답도, 주님의 살아계심의 증거가 될 어떤 역사도 모두 모두 침묵해버린 어두운 밤이 올 것입니다. 그때를 대비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너무 늦었습니다”하는 절망적인 최종 선언이 떨어질지 모르니까요!

이것이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오늘 여러분에게 들려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주님을 맞이하는 길이며, 그렇게 살 때 주님은 여러분을 기뻐하시고 상 주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언제라도 주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인생이 한 걸음 더 주님께 가까이 다가간 여러분이 취할 태도입니다.

 

 

3.내일이 있는 인생

약4:13-17

 

-톨스토이는... “우리는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성경도 ‘인생은 나그네 길’ 이라고 말합니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한해가 한 주간처럼 지나갔습니다.

한 백발의 노인이 어느 날 젊은 청년들을 모아놓고 인생에 대한 훈계를 했습니다. “내가 울고 있던 어린시절에는 시간이 마치 기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지나갔다. /내가 꿈을 꾸고 이야기했던 청년시절에는 시간이 빠른 걸음처럼 지나갔다.

/내가 완전히 성인이 되었을 때는 시간이 마치 뛰어가는 것처럼 지나갔다. /내가 장년이 되어 능력을 과시할 자리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때는 시간이 마치 구름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내 머리가 백발로 변하여 노인이 된 지금엔, 시간은 이미 나에게서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

나이에 따른 세월의 속도감

10대는 기어가는 듯하고 /10km/hr

20대는 걸어가는 듯하고 /20km

30대는 뛰어가는 듯하고 /30km

40대는 수레를 탄듯하고 /40km

50대는 말을 탄듯하고 /50km

60대는 나는 듯하고 /60km

70대는 바람처럼 스쳐가는 듯하고 /70km

80대는 번개처럼 지나간다. /80km

-2009년도가 다 지나가고 2010년이 불가 몇 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탈무드에는 “인간이 쓸 수 있는 자원 중에서 가장 한정(限定) 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 ” -답은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시간이 무한(無限) 한 것으로 여기지만... 인생에 있어서 시간만큼 한정되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성경대로 인생은 70-80년을 평균수명으로 삽니다.

-1년 단위로 환산하면 우리의 일생이 70-80토막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이미 많은 토막을 다 소모하고 이제 남은 것은 불가 몇 토막 밖에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인생론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들에 나갔다가 사자(獅子)에게 쫓겨서 도망치게 됩니다. 도망치다가 실족해서 절벽낭떠러지로 떨어집니다. 떨어지는 순간,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절벽에 걸려 있는 칙 덩굴을 붙잡게 됩니다. 이래서 구사일생으로 추락사는 면했습니다. 그러나 위를 쳐다보니 사자(獅子)는 지금도 으르렁대고 있습니다.

절벽 아래로 내려다보니 밑에는 무서운 뱀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덩굴을 잡은 손에서는 점점 더 힘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달콤한 냄새가 나기에 쳐다보았더니 마침 절벽에 꿀벌집이 있는데 꿀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 꿀을 한 손가락으로 찍어서 입에다 대보니 꿀맛이 꿀맛입니다. 그만 그는 꿀맛에 취하여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바로 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쳐다보니 자신이 매달린 칙 덩굴 위에서 검은 쥐와 흰 쥐가 번갈아가며 쥐구멍에서 나와서 자기가 매달린 칙 덩굴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비유적으로 “이것이 인생이다. ” 고 말합니다. 매달린 칙 덩굴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줄입니다. 흰쥐, 검은 쥐가 번갈아가며 나와서 갉아 먹는다는 것은... 인생은 낮과 밤으로 시간을 갉아 먹히면서 인생의 수명이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낭떠러지 밑에 우글거리는 뱀들은 인생이 끝나면 음부에 들어가게 될 불행한 운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 우리도 2009년 지난1년 동안 검은쥐, 흰 쥐로 상징된... 밤과 낮의 시간의 갈무리로 인하여 우리의 수명이 365일이나 갈가 먹히고 단축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인식하며 사셨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인생을 이렇게 말합니다.

 안개 인생이다.

-14절을 읽읍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인간의 일생을 성경은 ‘안개 인생’ 이라고 하십니다.

-안개가 무엇입니까

-태양이 솟아오르기 전에 대지에 피어오르는 운무(雲霧)를 말합니다. 안개가 끼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방향을 잡을 수도 없습니다. 안개는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안개가 끼면 모든 것이 불명확하고 얼마나 마음이 불안해 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태양이 솟아오르면 금방 안개는 사라지고 없어집니다.

-우리 인생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태양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인생의 길을 비춰주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그 사람이 어떤 모양으로 인생을 살던... 인생의 목적도, 방향도, 가치관도 분명하지 않고, 또 날마다 불안한 인생을 살게 되며... 그리고 허무한 인생으로 잠깐 살다가 종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생의 태양으로, 인생의 주인으로... 그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지 아니하면... 아무리 인생의 계획을 훌륭하게 세우고... 또 자기의 꿈 성취를 위해서 동분서주해도, 결국은 인생이 허무한 것으로 끝을 맺고 만다는 것이 야고보사도의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인생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2009년 1년을 살고, 또 지나온 인생을 살아본 결과 오늘 본문의 성경말씀이 진리가 아니던가요

-그렇다면... 오늘 성경은 우리가 그런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내일이 분명한 인생이 되려고 하면... 세상의 빛이 되시고, 우리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그분과 더불어 동업(同業)하고, 그분과 더불어 무슨 일이든 동사(同事) 하면서... 그분과 함께 살면..

-우리에게는 태양이 찬란하게 비취는 대낮과 같은 인생이 펼쳐지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영원한 빛, 태양보다 더 찬란한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 빛 가운데서, 영원한 천국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16절을 읽읍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

-다가오는 새해는 안개 같은 인생길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므로... 인생의 찬란한 태양빛 아래서 행복한 인생,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선을 행하는 삶이 가장 복된 삶이다.

-17절을 읽읍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

-야고보사도는 그 어떤 성공적인 것 보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제일 성공적인 삶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고 하십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의 행한 일을 되돌아봅시다.

-물론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이니까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솔직히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그것을 행하려고 노력을 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선행을 실천하는 일에 힘썼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좋아지고, 더 행복해 지고, 덜 불행해 졌을 터인데... 우리는 그러지 못한 점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실천에 옮기며 살았다면... 지금의 우리의 모습보다 더 큰 축복된 사람이 되었을 것인데... 그렇게 되지 못한 점도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 새해에는 선을 행하는 삶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선행(善行)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보화를 쌓는 것이고, 면류관 얻는 길이고, 바른 믿음의 길이고, 영생에 이르는 길이고, 주님께로부터 칭찬을 받는 길이 됩니다.

-천국은 이렇게 선을 행하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확실히 들어가는 곳입니다. /마태 25:31절

-우리의 신앙생활이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 천국의 백성으로 분명하게 보여 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중세기에 쓰여 진 명작 가운데 단테의 ‘신곡’(神曲) 이 있습니다. 신곡(神曲)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단테가 안내자를 따라서 천상의 한 장소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혈색도 나쁘고, 얼굴에 아주 근심에 가득 차 있는 한 무리의 영혼들을 만나게 됩니다. 안내자는 그들을 가가리키며 말합니다. “이들은 소개할 가치조차도 없는 영혼들입니다. 이들은 천당에서도 거절당하고 지옥에서도 거절당한 영혼들이지요! 그래서 저들의 얼굴이 근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

그들은 천당을 갈 만큼 선한 사람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옥에 보낼 만큼 악한 사람들도 아닌 어정쩡한 군상들입니다. 하나님도 좋아하지 않고, 사탄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그들을 그냥 지나쳐서 단테를 다른 곳으로 안내를 합니다.

-저는 이 신곡을 읽으면서... 그 천국에서도 거절당하고 지옥에서도 거절당하기 쉬운 사람이 누구겠는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믿음이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한 오늘날 교회 교인들의 모습은 아닐까 하고 걱정을 해 보았습니다.

-계시록 3:17절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며, 부(富)의 자만심 때문에 뜨뜨미지근한 신앙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 같이 경제적 풍요시대를 사는 현대 교회와 교인들의 모습이 그러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뜨뜨미지근한 신앙의 모습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2010년도에는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뜨겁고 열정적인 신앙으로 바뀌어 지기를 축원 합니다.

 내일이 있다.

영국 런던에 있는 테이트 미술관에는 ‘왓츠’의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수건으로 눈을 가린 한 젊은 여자가 지구위에 앉아 비파를 타는데 자세히 보면 비파의 줄은 다 끊어 졌고 오직 한 줄만 남았는데 그 줄을 열심히 타면서 그 여인은 한 줄에서 나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한 줄은 소망의 줄이라는 것입니다. 실로 의미심장한 그림입니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때로는 삶의 줄들이 끊어질 수가 있습니다.

-건강이나, 재산이나, 사업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삶의 줄이 다 끊어진다 할지라도 소망의 줄까지 끊으면 안 됩니다. 소망은 마지막 남은 비파의 한 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고린도전서 13:13)라고 하셨습니다. 소망이 무엇입니까 소망은 곧 생명입니다.

-성경은 소망을 가리켜 적의 공격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에 비유하여 기록하기를“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데살로니가전서 5:8)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은 소망을 가리켜 풍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배의 닻에 비유하여...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히브리서 6:19)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소망은 곧 생명과 같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소망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경제적으로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줄을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에 소망을 두고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힘들고 어려웠다고 할지라도... 그 분은 내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새해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축복의 한 해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6·25전쟁 때 일입니다. 전쟁터에서 온 병사들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한 종군기자가 죽음의 공포를 가장 많이 느끼고 있던 한 흑인병사에게 녹음기를 들이대며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전 세계로 타전되어 아주 유명한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대답은 “Give me Tomorrow” 였습니다. 그 병사는 내일을 희망하였고,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도래하는 내일이 있기만을 학수고대하였습니다.

-내일이 없는 사람은 가장 비참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은 내일이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내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현실이 어둡고 힘들지라도 희망찬 내일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새해가 시작되는 이 역사적인 시간에 내일을 소망하면서 이렇게 송구영신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과 함께, 말씀과 함께, 기도와 함께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십시오.

-내일을 우리 모두에게 축복의 해가 될 것입니다.

 

 

4.한 해의 끝

딤후4:6-13

 

해마다 12월이 되면 각 나라들은 한해를 결산하면서 올해의 단어, 혹은 사자성어를 선정하여 발표합니다. 일본은 올해의 단어로 새로울 ‘신(新)’이 선정되었습니다. 50년이 넘는 자민당 지배가 무너지고 새로 출범한 정권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되었고, 세계를 뒤흔든 신종플루 사태에 대한 경각심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했습니다. 중국은 ‘워쥐’라는 말을 선정했습니다. 이 말은 ‘달팽이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달팽이집 정도의 작은 집을 마련하기 위해 고초를 겪는 서민들을 묘사한 것입니다. 올해 중국은 부동산 개발로 인한 부의 편중이 커졌다고 합니다. 급격히 풀린 자금이 부동산 시장에 흘러들면서 졸부들이 속출하고 있지만 서민들은 급등하는 집값에 절망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은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검색한 단어로 올해는 ‘트위터(twitter)’를 선정되었습니다. 트위터는 개인용 컴퓨터나 휴대전화를 통해 짧은 메시지를 전하는데 이용되는 온라인 서비스를 뜻합니다. 우리나라의 휴대폰문자서비스와 비슷합니다. 지난 6월 이란 테헤란의 반정부 시위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 세계로 타전하면서 이름값을 얻었다고 합니다. 특히 50만 정도였던 이용자 수가 1년 만에 1800만 넘어서면서 인터넷 혁명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미국을 대변했다고 전합니다.

우리나라는 올해의 사자성어로 ‘방기곡경(旁岐曲逕)’이 선정되었습니다. 방기곡경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 길이 아닌 샛길과 굽은 길을 이르는 말입니다. 정당하고 순탄하게 일을 하지 않고 그릇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한다는 것을 비유할 때 쓰인다고 합니다. 올해 정치권이 타협과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행태를 빗댄 것으로 풀이했습니다.

 2009년 한국은 모든 부분에서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만 유독 정치는 대립과 갈등으로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치가 먼저 잘되어야 모든 것이 탄탄하게 서는데 여전히 한국정치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무엇보다도 정치의 발전을 기대해 봅니다.

숨 가쁘게 달려왔던 한해, 그것이 샛길이든 굽은 길이든, 큰 길이든 이제 우리는 한해의 끝자락에 섰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개인도 공동체도, 특히 믿음의 길을 걸어온 우리에게도, 흐르는 세월 속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과연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해의 끝자락에서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실까요 오늘 그것을 본문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첫째는 지난세월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디모데후서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디모데서는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전서와 후서로 나누어 목회와 사역의 중요한 원리를 알려줍니다. 디모데서는 바울이 기록한 마지막성경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두 개의 서신중의 나중에 기록한 디모데후서입니다. 그것도 4장으로서 마지막부분입니다. 또한 바울은 이것을 생애 마지막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무엇보다도 바울이 이것을 기록한 때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그러니까 한해의 끝자락이기도 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성경의 끝에서, 기록의결론에서, 인생의 마지막에서, 특히 한해의 끝자락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끝자락에서 바울이 먼저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7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것이 바울의 생애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과거를 회상하며 강조하는 것입니다. 문법적으로도 분명히 과거로 말합니다.

원문성경은 더욱 분명히 과거를 강조합니다. 그렇게 바울은 지금 끝자락에서 지난세월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한싸움을 싸웠습니다. 달려갈 길을 잘 달려왔습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을 잃지 않고 굳건히 지켰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생애요, 바울의 과거요, 바울이 예수를 만난 뒤 한결같이 달려온 신앙과 삶의 여정입니다. 한마디로 주님과 더불어, 하나님과 함께, 여기까지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속에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오늘 우리가 한번 짚고 넘어갈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선한싸움을 싸웠고, 달려갈 길로 갔으며, 무엇보다 믿음을 지키며 달려왔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주님과 함께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축복이며,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오직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변함없이, 신실하게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럴 때 우리 삶을 잘 대변하는 귀한 찬송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가사의 노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모든 세월을 돌아볼 때 주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이 믿음을 고백하며 한해의 끝자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앞을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주의 도움과 함께 달려온 생애를 회상한 바울은 이젠 앞을 바라봅니다. 8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 여기에서는 그는 자기를 위하여 예비된 의의 면류관, 하늘의 상급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자기도 받을것이고, 또 믿음의 길을 잘 달리는 모든 자들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말은 지금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래 앞으로 임할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이란 말을 통해 분명히 알려줍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는 장래를 생각하고 있고, 끝자락에서 앞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과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3:13-14) 그는 과거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집착하거나 머물지도 않았습니다. 지난세월을 회상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했지만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늘 미래지향적으로 살았습니다. 앞을 내다보며 기대하고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늘 희망과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을 향해 앞으로만 전진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성숙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앞을 향해 가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과거에 메이지 않습니다. 날마다 꿈과 소망과 기대감을 가지고 앞을 향해서만 전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아니 믿음이 있다고 해도 성숙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은 앞으로 가지 못한 것입니다. 출애굽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뒤 광야에서 40년의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가나안은 이렇게 오래 걸릴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요 한마디로 그들은 앞으로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계속 전진하고, 앞으로 가야 하는데 가지 못하고 빙빙 돌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불신앙, 불순종, 원망, 불평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약속을 붙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넌 뒤에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툭하면 애굽에서 살 때가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은 분명 더 좋은 곳인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한걸음도 앞으로 가지 못하고 40년을 유리하고 방황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길은 앞으로 가는 길입니다. 뒤로 가는 길이 아니고, 옆으로 새는 길이 아니라 오직 앞으로만 가는 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앞을 내다보고 전망하고 기대하고 나아가는 자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도 자꾸 과거만 붙잡고, 거기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을 가는 자는 아무리 화려한 과거라도 잊어야 합니다. 거기에 메이거나 붙잡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추한 과거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계속 가는 길이 우리의 갈 길입니다.

이제 한해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내년을 바라보아야 하고, 우리의 앞을 소망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내년에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고, 앞으로 나의 생애 큰 축복이 임할 것을 기대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 예비하신 천국에서의 상을 바라보고 앞으로 가야 합니다. 새로운 한해도 벅찬 기대감 속에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하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지금 할 일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뒤를 돌아보며 감사하고, 앞을 내다보며 꿈과 소망을 품어야 하겠지만, 이제지금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모든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바로 지금을 중요하게 알고 행하는 자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믿음의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끝자락에서 그가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가 생각한 지금 할 일은 무엇보다도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에서 두 가지 중요한 관계를 생각합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앞으로도 더 좋은 관계를 결심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13절의 말씀에서 찾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그는 디모데에게 드로아 가보의 집에 있는 겉옷을 가져오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이제 곧 겨울이 되니까 몸이 쇠약한 바울이 추위를 많이 타서 특별히 요청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겉옷과 함께 가죽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강조합니다. 여기 가죽종이에 쓴 것은 바로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져오라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 더 좋은 교제를 갖기 위함입니다. 그는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생각 속에, 자기 손에 주어진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말씀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제 다시 말씀을 통해 깊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고히 다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와 함께 사람과의 관계를 지금 할 일로 강조합니다. 그래서 9절 이하에서 여러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십시오. 데마, 그레스게, 디도, 누가, 마가, 두기고, 알렉산더 등을 언급합니다. 이들은 모두 바울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인물들입니다. 끝자락에서 바울은 이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합니다.

여기 이들은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에게 힘과 위로가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누가, 마가와 같은 사람입니다. 또 하나의 사람은 바울에게 상처와 실망을 준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데마요, 알렉산더입니다. 데마에 대해서 그는 세상을 사랑하여 자기 곁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는 처음 주의 일을 함께 감당하다가 도중하차하고 세상길로 돌아선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실망시킨 사람입니다. 또한 알렉산더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14절에 보면 그는 바울에게 해를 보인 인물입니다. 그것도 단순한 해가 아니라 상처를 주었다고 강조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종종 있어도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적잖은 상처를 준 인물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이들과의 관계를 정립합니다. 그에게 힘과 위로가 되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은혜를 잊지 않고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상처를 주고 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해서 먼저 자신이 상처가 치유되었음을 말하고 용서하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이런 공적인 편지에서 좋지 않은 것을 언급하는 것은 치유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16절에서 바울은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한다면서 용서했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이렇게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지금 이 순간, 한해의 끝자락, 인생의 끝자락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 말씀을 다시 붙잡고, 사람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며 나아갑니다. 먼저 힘과 위로가 되었던 사람들을 잊지 않고, 깊이 감사합니다. 그리고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들까지도 용서하고 품으면서 사람들과 관계를 세워갑니다. 이것이 바울의 귀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이제 우리도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먼저 여호와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다시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나에게 힘과 위로가 되었던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달하고, 카드라도 보내고, 식사라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처와 아픔을 주었던 사람들이라도 이제 용서하고 풀어줘야 합니다. 언제까지 묵은 것이 내 속에 자리를 잡아야 하겠습니까 새해가 되는데도 낡은 것을 버리지 못하면 새해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믿음의 삶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롬12:17-18)

한해의 끝자락에서 이제 우리는 지난세월을 회상해 봅니다. 그래서 주의 손길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음을 알고 감사합니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앞을 내다보며 꿈을 꿉니다. 새해에도 우리를 놀라게 할 은혜와 축복을 기대하며 소망합니다. 그리고 한해의 끝자락에서 이제 지금 내가 할 일을 알고 믿음으로 결단하고 헌신합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를 위해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위해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서하고, 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한해의 끝자락에서 이렇게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5.가야할 길을 가는 사람들

눅13:31-33

 

우리는 새해 맞이하였습니다. 기축년을 보내고 경인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말씀과 기도로, 여호와 하나님의 집에서 새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가 깊습니다. 송구영신예배라는 것이 교회력 가운데는 없지만, 모든 교회들이 이 예배를 소중히 알고, 우리 한국교회의 중요한 예배로 정착되고 있습니다.

먼저 한 해를 회고하고, 돌이켜 보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한해를 마감하면서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며, 이 예배는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주고, 한 단계 끌어올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해를 말씀과 기도 속에서 맞이하는 것은 한 해를 의미 있게 하나님 앞에서 출발하자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는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한 해 동안 잘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일들도 있고,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미흡한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를 격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괜찮아”라고 말해주어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괜찮아”라고 말해봅시다. 지난 해 세상을 떠난 유명 인사 중에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인 장영희 교수님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유작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서 그 분이 평생을 살아오며 자기 인생에서 가장 용기가 된 말이 있다면, ‘괜찮아’라는 말이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몸이 불편하여 친구들과 함께 놀 수 없을 때에, 지나가던 깨엿장수가 미소를 지으면서 ‘괜찮아’라고 말해준 것이 자기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고 합니다.

저는 주일 밤에는 ‘도전 골든벨’을 시청하는데, 그 날에 골든벨을 울린 학생이 나오면 얼마나 흐뭇한지… 마치 내가 골든벨을 울린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도 최후의 1인으로 남아서 48번, 49번 문제 난이도가 아주 높은 문제를 풀다가 그만 정답을 쓰지 못하고 “친구들아 미안해”라고 쓰고 답판을 들고 서 있는 학생을 봅니다. 그 때에 온 학생들이 뛰어나오면서 최후의 1인에게 격려하는 말이 멋이 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라는 말이었습니다. ‘괜찮아’라는 말에는 ‘너는 최선을 다한 거야, 다음에 골든벨을 울리면 되는 거야.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잖아’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는 옆에 앉아 있는 성도들에게 “괜찮아”라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송구영신예배는 성서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예배입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은 해묵은 문제는 새해로 넘기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2009년의 일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든지 해를 넘기지 말고, 연말에 마무리를 짓고 새해를 맞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용산참사의 문제도 연말로 해결하려고 노력한 결과 잘 마무리가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 풍속에 섣달 그믐날을 수세(守歲)라고 하여 집 안팎에 불을 밝히며 새벽까지 자지 않고 밤을 지새우는데, 보통 닭이 울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집안 구석구석에 등촉을 밝히고 밤을 새우며 묵은해를 보냈습니다. 이 수세라는 풍습을 ‘해지킴’이라고 하였고, 수세(守歲), 또는 별세(別歲)를 지킨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에는 어른들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섣달 그믐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 ”고 했습니다. 섣달 그믐날 밤을 ‘눈썹 세는 밤’이라고 불렀습니다. 옛 사람들은 섣달 그믐날 밤을 제야(除夜) 또는 제석(除夕)이라고 하여 한 해를 돌아보면서 묵은해를 의미 있게 보냈습니다.

정월 초하루는 설날이라고 하여 연시제를 지냈으며, 집안과 동네의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리는 풍습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설날에 세배하러 온 사람들에게는 음식을 대접하였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덕담을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수세를 보내던 풍속이 있었기에, 한국교회에는 송구영신 예배가 자연스럽게 들어와 자리 잡았습니다. 서구의 교회에는 별로 없는 예배가 한국 전통사회라는 토양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들어왔습니다.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얼마 되지 않은 1887년부터 송구영신예배를 드린 것을 보면 아주 일찍이 들어온 예배입니다. 1887년 12월 31일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새문안장로교회와 아펜젤러 목사님의 정동감리교회가 연합하여 송구영신예배를 드린 것이 최초의 예배였다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신년절기가 있었는데, 나팔절이라는 명절입니다. 나팔절은 유대력으로 일곱째 달인 티쉬리월 초하루에 지켰는데, 이 날에는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나팔을 불어 신년축제의 기쁨을 알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민간력에는 이 7월 티쉬리월이 한 해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력은 3월의 니산월이 한 해의 시작이었습니다.

나팔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하면서 성회로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날에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포로 후기의 느혜미야 총독 아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나팔절에 학사 에스라를 모셔오고, 온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새롭게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단하였습니다. “일곱째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느8:2)라고 했습니다.

정초는 과거의 허물을 반성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면서 새롭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헌신과 섬김을 결단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월남 이상재선생님은 유머감각이 뛰어났습니다. 유머 감각이 넘치고 기지가 넘치는 선생님은 ‘만년청년’으로 불리었습니다. 당시 보수적인 인사들은 “나이가 지긋한 분이 체통을 지키지 않는다. ”면서 이상재선생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 때에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청년더러 노인이 되라고 할 수 없다. ”라고 하면서 청년들과 교류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청년으로 살아가려고 힘써야 합니다. 노인이 되었다고 하여 노인으로 살아가지 말고, 청년처럼 활발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그가 황성 기독청년회 YMCA에서 연설할 때에 일본의 순사들이 곳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옛날 순사들을 ‘나리’라고 불렀습니다. 이상재선생님이 연설하면서 첫 마디가 “여기에 개나리가 많이 피었습니다. ”라고 하자 실내는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순사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유머감각이 뛰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설교에 나타나는 유머를 보면, 사람들이 아주 쉽고 흥미 있게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의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에게 헤롯왕의 음모를 알려주면서 헤롯의 영지를 벗어나 떠나라고 권고했습니다. 헤롯왕은 세례요한을 죽인 사람이었지만 예수님도 죽일 의사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대하여 아주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헤롯은 예수님이 자기 앞에서 기적을 행해주기를 바란 사람입니다.

그러나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사회적인 안정을 위하여 예수님을 사로잡을 수도 있었습니다. 혹시 종교 계파간의 어떤 마찰이나 소요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압박할 수도 있었습니다. 헤롯왕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음모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전해준 일에 대하여 좋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도 예수님을 좋게 보려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우리 주님은 헤롯을 향하여 “여우”라는 말을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유머 감각이 뛰어났다고 봅니다. 여우라는 짐승은 간교하고 교활하여 고대 랍비들의 문헌에는 간교함의 대명사로 기록되었습니다. 탈무드에는 여우는 가장 게으른 동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했습니다. 헤롯왕은 교활하였고, 간사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의 협박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당신의 길을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헤롯이 협박하는 정도는, 예수님이 가시려고 하는 길에 지극히 하찮은 일이었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오늘과 내일, 그리고 제 삼일”이라는 날짜가 주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내일, 제 삼일은 문자적으로 3일 간, 오늘, 내일 모레를 말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3일 후에 헤롯의 관내를 떠나신다는 뜻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말을 격언적인 표현으로 보고, 3년 공생애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상징적인 해석으로 오늘은 현재를 말하고 내일은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를 말하고, 제 3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역을 완성하실 때까지를 말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당신의 생애를 완성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알듯 모를 듯 상징적이고, 영적이고, 무한한 지혜가 담긴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야 신비하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면서도 진리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33절입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은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강인한 정신과 사명에 충실하려는 자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헤롯이 위협하고 있다고 하여, 예수님이 가시려는 길을 수정하거나 변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상황도 주님이 가시는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모레는 주님이 하시려는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귀신을 내쫓고, 병 고치시고,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최선을 다하여 당신의 가실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대속의 위업을 이루시겠다는 의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 이 말씀은 눈물로 말씀하시는 비통한 예언이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은 당신의 운명을 내다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 갈릴리에서는 위협이 없고, 당신은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마지못해 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은 당신이 원하여 그 길을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요10:18에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확신하셨기에 순전히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신 것이었습니다.

헤롯의 핍박이 있다 하여도 예수님은 자신이 선택하신 길을 가시겠다는 확신에 찬 말입니다. “가야 하리니” 라는 말은 “가야만 한다”는 말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드시 해야만 한다”, 의무와 책임을 담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한번 되돌아보고, 정말 제대로 살아온 길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의 인생길을 잘 걸어오셨습니까 아니면 정말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습니까 그래서 후회가 되십니까

‘길’이란 성경에서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인생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란 하나의 길이며 여호와 하나님은 이 길을 감찰하시고 있습니다. 이 길은 인간의 삶의 방식과 생활 태도를 말합니다.

길이란 목적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가야만 하는 목표점을 향하여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목표를 말하지 않고 길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목표와 길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동의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야하는 길을 가리라고 하시는 것도 당신이 목적하는 바를 성취하겠다, 당신이 살아가시는 방법을 변경하지 않고 고수하리라는 의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든지 그것은 우리의 자유이지만, 그 길의 결국, 마지막은 자기의 몫이요, 자기의 책임입니다. 사도들의 권면하시는 말씀은 주의 일에는 흔들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심을 다하면 누구나 주역입니다. ”라는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심을 다한다면 누구나 주역입니다. 그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세 명의 벽돌공이 부지런히 벽돌을 쌓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첫 번째 벽돌공이 대답했습니다. “벽돌을 쌓고 있어요. ” 두 번째 벽돌공이 대답했습니다. “시간당 9달러 50센트 자리 일을 하고 있어요. ” 세 번째 벽돌공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요 나는 지금 세계 최대의 예배당을 짓고 있어요. ” 라고 했습니다. “이 세 사람의 미래는 어떻게 변했을까요”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데이비드 슈어츠의 ‘크게 생각하면 크게 이룬다’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벽돌을 쌓거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일당을 버는 사람일 지라도 벽돌을 성의 없게 쌓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통하여 세계 최대의 예배당이 지어지고 있다’는 자부심이 깃들어 있는 경우라면 벽돌 한 장 한 장 쌓아 올리는 그 손길에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갈 것입니까 그 결과는 다른 벽돌공들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지라도 혼신의 힘을 다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 회자되고 있는 명언 가운데 감동주는 글이 있습니다. “바보는 천재를 이기지 못하고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기지 못하며,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천재도 아닙니다. 그러나 노력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다른 사람이 결정해줄 수 없습니다. 나의 인생을 다른 사람이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닙니다. 한 해를 살아가는데, 매사에 성심과 성실로 살아간다면 세상의 그 어떤 분야에서도 주역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대한 생애를 살아간 사람들은 오직 한 길, 부르신 소명에 충실한 길을 간 사람들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한 눈 팔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사도행전20:24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하셨습니다. 그는 걸어가는 길이란 말도 싫어하였습니다. 그의 가는 길에서 달려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대통령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의 기도 생활이나 경건생활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수행한 흑인해방을 위한 남북전쟁에서 많은 전문가들이 북군의 패배를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이긴다고 해도 쉽지 않은데, 북군의 패배를 말하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각료들조차 ‘이 전쟁은 하나님의 진노요, 저주이며, 하나님은 우리 편에 계시지 않으니 휴전하자’고 조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그렇게 말하는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신지를 묻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가를 확인합시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기만 하면 전쟁에서 승리한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누구 편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 편에 서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또 어떤 길에 서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달리 생각하실 것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 그분이 길이 되시기에 주님이 살아가신 방법대로,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면 우리도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길이란 방향이 있어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내일과 연관되어 있고, 내일은 모레와 또 연관되어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것으로 내일을 살고, 내일을 살아가는 것으로 계속하여 모레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을 보람 있게 살아야 내일도 보람 있고, 모레도 알차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결단하십시오. “내가 가야할 길을 가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야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시는 그 길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6.껍질을 벗고 갑시다

엡4:25-32

 

오늘은 마지막 주일입니다. 새로운 각오로 새해를 맞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의 끝자락에 섰습니다. 얼마 전에 연세가 많으신 권사님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세월의 빠름을 실감나게 표현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 분이 ‘50대 때의 일은 생각이 나는데 60,70대는 살아보지도 않고 그냥 넘어온 것 같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갔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시편 90편10절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월의 빠름은 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시대가 느끼는 것 같습니다. 시간의 속도는 나이에 따라 다르다고 말합니다. 30대는 30킬로미터의 속도로 가고, 40대는 40킬로미터, 50대는 50킬로미터, 60대는 60킬로미터, 70대는 70킬로미터의 속도로 간다고 합니다. 나이를 더 먹을수록 생각과 행동에 더 여유로움을 가져야 하는데 도리어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도 어느덧 50킬로미터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의 빠름을 느끼면서 누가 한 말인지, 그리고 그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문득문득 생각나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당신이 태어났을 때 당신은 울음을 터뜨렸지만 당신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죽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울겠지만 그때 당신은 기뻐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 글을 읽을 때 이 말이 제 가슴에 와 닿았고 아주 오랫동안 기억이 되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말이었습니다. 특히 기독교인인 우리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게 새겨 볼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죽으면 주변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피 울어줄 것 같습니까 많은 분들이 나의 죽음을 슬퍼할 것 같습니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많은 주변의 사람들이 슬퍼 울 때 나는 기뻐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마지막 순간에 기뻐 웃을 수 있는 삶을 위해 내가 어떤 부분들을 더 점검하고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새해가 다가옵니다.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있습니다. 하지만 달력을 바꿔 걸고, 수첩을 바꾼다고 시간이 새로워지지는 않습니다. 새로움이란 늘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은 미래로부터 흘러와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새롭게 주시는 한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들의 낡은 껍질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합시다.

사도 바울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하면서 우리들이 벗을 옛 사람의 속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리들이 새롭게 되기 위해서 벗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에서 찾아 기록해 보았습니다. 거짓, 분노, 도둑질, 더러운 말,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 악독, 노함, 떠드는 것, 비방하는 것, 악의 등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메모지에 적어 놓고 묵상하는 가운데 이러한 내용들이 크게 세 가지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잘못된 언어 습관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잘못된 감정습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잘못된 행동습관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습관들을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시간을 맞이해도 별 의미가 없고 더 발전적이고 성숙한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시간을 축복의 시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이 긍정적으로 변해야 합니다. 잘못된 옛 습관을 버리고 새롭게 변하지 않으면 주어지는 시간을 축복의 장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시간을 선물로 주시면서 무엇을 어떻게 변화하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잘못된 언어의 습관을 벗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중에 25절과 29절 말씀입니다. 25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9절의 함께 읽어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말은 습관입니다. 말을 할 때 큰 소리로 싸우듯 말하는 사람이 있고, 사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을 할 때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긍정적이고 살리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을 할 때에 예의와 품위가 있으면 더 좋습니다. 사람의 이를 이빨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짐승의 것을 말할 때 이빨이라고 말하고 사람의 것은 이라고 부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치과에 한 환자가 찾아와서 ‘이빨 좀 봐주세요. 윗 이빨도 아프고 아랫 이빨도 아프고 모든 이빨이 신통치 않아 큰일입니다. ’ 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러자 의사가 ‘눈깔은 괜찮고 뱃대기와 대가리는 아프지 않습니까’ 라고 말했답니다. 말은 순화되어진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거칠고 격한 언어는 말하는 자신과 상대방의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입힙니다.

말과 관련해서 우리들은 거짓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십계명 가운데 아홉 번째 계명이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십계명 가운데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매우 큰 죄로 인식하면서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살인과 간음과 동일한 죄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왜 거짓말을 할까요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혹은 자신을 좀 더 돋보이게 하려고 합니다. 인정받고 싶어서, 혹은 잇속을 차리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왜곡합니다. 우리들이 하는 말 가운데 ‘아’하고 ‘어’하고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말인데 말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아’와 ‘어’가 다릅니다. 말하는 사람이 어떤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말하느냐에 따라 사실이 다르게 해석이 됩니다. 거짓말은 사실을 교묘하게 왜곡시킵니다.

거짓말은 너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신뢰의 다리를 허물어뜨립니다. 신뢰의 다리가 허물어지면 서로에게 아픔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말에 신뢰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인의 말, 기업인의 말, 노동자의 말, 선생님의 말, 학생의 말 심지어 종교인의 말까지도 신뢰를 하지 않습니다. 그 원인은 거짓말로 인해 신뢰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말에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야고보서 3장 2절에 보면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 가운데 있는 크고 작은 거짓말의 낡은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기를 원합니다. 혹시 한 해 동안 저의 말의 실수로 상처를 받으신 분들이 있으시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더 긍정적이고 사랑이 담기 말을 할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하겠습니다.

우리들이 벗어야 할 또 하나의 낡은 껍질은 잘못된 감정의 습관입니다. 26,27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화를 아예 내지 말라고 한다면 매우 비현실적인 말로 들릴 겁니다. 하지만 바울은 화가 마구 번져가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화에게 굴레를 씌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궁이 안에서 타오르는 짚단은 밥을 끓게 만듭니다. 하지만 아궁이 밖으로 나온 불길은 집을 다 태우게 마련입니다.

해가 지도록 품고 있는 노여움은 결국 자기와 다른 이들의 마음을 시커먼 잿더미로 만들고 맙니다. 악마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은 우리 마음에 누군가에 대한 적개심이나 분노의 감정이 자라고 있을 때입니다. 그 분노로 인해 관계가 깨지고 상처를 주고 받는 것입니다.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마귀의 특성이기에 마음에 분노의 감정을 가지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반면에 성령은 근심하십니다. 30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화를 내는 것은 자기를 지키기 위한 심리적 방어 기제입니다. 살다보면 화나는 일이 참 많습니다. 짜증, 슬픔, 미움의 감정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이런 감정이 일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문제는 그런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가 나는 것 자체를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평생을 살면서 화를 내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화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화를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화를 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화가 난다는 것은 분명히 화를 나게 만든 상대가 있습니다. 화가 나면 그 상대를 미워하게 됩니다. 상대를 미워하는 시간이 나를 오랫 동안 지배하고 있으면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함의 능력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와 능력의 불꽃이 꺼집니다. 미워하는 사람의 마음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분노, 화는 마귀를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근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2009년도를 보내면서 우리 마음에 있는 잘못된 감정의 습관인 분노, 화의 낡은 껍질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 합시다. 성령님께서 근심하는 삶이 아니라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변화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벗어 버려야 할 낡은 껍질은 잘못된 행동의 습관입니다. 28절의 말씀과 32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8절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도둑질하는 습관을 버리고 구제하는 습관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32절입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용서하지 못하는 습관을 버리고 용서하는 습관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이것을 해소할 방법을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잠을 자서 풉니다. 어떤 사람은 먹으면서 풉니다. 어떤 사람은 술을 마시면서 풉니다. 운동을 해서, 오락을 해서,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도벽, 즉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로 푸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통제하지 못하면 중독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쇼핑을 하면서 충동구매를 해서 가정에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그것을 푸는 습관을 보면 대체적으로 병리적인 현상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정신과 육체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혐오감과 아픔을 주는 쪽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월요일마다 강의를 들을 때 중독성에 대해 한 학기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 가운데서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며, 야동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산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직장에서 실적과 인간관계, 그리고 퇴직 문제들로 인한 고민과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사업장에서 이익과 성과를 위해 불의와 연결되는 고리에서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가 어느 사회단체든지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스트레스가 문제가 아니라 그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의 습관에 거룩함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습관만이 생활 속에서 겪게 되는 아픔과 스트레스를 바르게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들의 행동 습관에 대해 낡은 껍질이 있다면 그것을 벗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 할 준비를 합시다.

한 해를 보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 삶의 습관들을 점검하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낡은 언어의 습관, 감정의 습관, 행동의 습관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원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민수기 6장 24-26절의 축복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아멘

 

 

7.달음질은 계속된다

빌3:7-16

 

오늘 마지막 쉰 두 번째 주일까지 이르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세계 68억 3천만 명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은 나를 단 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나를 빚어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로서 유일합니다.

에베소서2:10말씀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이다. ”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 그 자체를 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창세기1:31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은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 그 자체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여 어떤 결과를 만든데 있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는 우리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상속을 받아 나갔던 탕자는 모든 것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십니다.

그에게서 어떤 것도 더 바라시지 않으셨습니다.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기쁨이었습니다.

탕자의 형은 이것이 못마땅해 하며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

이 때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

지난 1년 동안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께서 주신 그 많은 은혜를 다 탕진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참 볼품없는 모습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험한 파도를 헤치고 바다에서 돌아온 아들을 맞아주시는 어버이의 마음으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아들을 맞아주시는 마음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지난 1년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위로하시고 큰 복 내려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3장 13절과 14절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의 삶의 고백을 통하여 우리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1. 특별한 조건은 없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형제들아”하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고 구원받은 사람들 모두를 향하여 부르는 호칭입니다. “형제들아” 이 부름 속에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은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현실에 대하여 다소간의 불만을 갖는 것은 불평등하다는 것입니다.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출발의 기반에 너무 차이가 많다고 느낍니다. 그러니 그 삶의 현재와 결과는 당연히 격차가 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불공평하고 감사할 이유를 잃어버립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월감을 갖기도 하고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나는 왜 머리가 좋지 않을까

나는 왜 능력이 부족할까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우리는 은근히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부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를 나대로 살게 하셨습니다.

남을 흉내 내어 남들처럼 살라고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누구나 동일한 조건입니다.

받은 달란트의 량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맡기신 역할이 좀 다를 뿐입니다.

그 위치에서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이것을 주님은 몸의 지체로 표현하신 교회론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그처럼 위대하게 산 것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우리를 향하여 “형제들아”하고 부릅니다.

빌립보서3:4-6에는 자신의 삶이 남들 못지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정통 이스라엘 사람, 베냐민 지파의 자손으로 태어나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입니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율법에 열심 있는 바리새파에 속하여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남다른 열정이 있어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

소위 우리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허나 이런 것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가지고 있으면 역겨운 배설물, 똥과 같은 것이라 다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님의 부르심의 순간을 생각합니다.

그 날 주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그 부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날의 주님의 명령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동일선상에서 출발하던 때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이전 것은 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서 출발지점은 누구나 동일합니다.

여러분 마라톤 출발 지점에 선 선수들을 보셨습니까

어느 누구도 advantage(애드밴티지/유리(한 입장)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누구도 시기하고 질투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 이유가 없습니다.

저도 한 때 그런 생각 때문에 힘든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아들로, 장로님의 아들로 태어난 친구들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남들은 다 저만큼 앞서 있는데, 나 혼자 출발지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억울했습니다.

불공평하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슬펐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아라. 우상숭배자의 아들이지만 내가 믿음의 조상이 되지 않았느냐”

특별한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특별한 대처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부릅니다.

“형제들아”

2. 과거는 다만 유산일 뿐입니다.

세상에 누구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만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유산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현재에 투자를 할 수 있는 기반일 뿐입니다. 그러나 누구든 그 유산만 생각한다면 그는 앞으로 뻗어나갈 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아직 내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습니다. ”

“나는 내가 이미 얻었다고도, 온전히 이루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예수께서 나를 부르신 그 날에 주신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달려갑니다. ”

정말 중요한 것은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하여 오늘 내가 어떻게 달리느냐에 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려야합니다. ”

1)좋았던 과거라는 유산도 잊어버려야 겸손하게 앞으로 전진 할 수 있습니다.

제2차대전 이전에는 스위스가 전 세계 시계시장의 90%를 점유했습니다.

스위스의 기술은 정확도와 아름다움 면에서 단연세계최고였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시계개발자들이 전자수정시계를 제시하였습니다. 태엽을 감을 필요가 없이 배터리로 돌아가는 시계입니다. 태엽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유지보수의 필요성도 적었습니다.

하지만 주요 시계제조업체들은 이 혁신을 반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에 얽매인 나머지 시대가 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머지않아 스위스의 시계업계는 세계시장에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스위스시계업계들이 이 변화를 받아들여 “스와치”라는 예쁘고 저렴한 시계를 출시하여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과거가 아무리 좋았어도 새로운 도전 앞에 겸손히 설 수 있어야 합니다.

2)쓰라린 과거라는 유산도 잊어버려야 건강하게 전진할 수 있습니다.

한 목사님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개척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되지 않는 교인 중에 한 사람이 가시와 같아 늘 마음에 괴로웠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꼭 찾아와서 그날의 설교를 비판하였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죄책감 때문에 목회를 그만 둘까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내를 걷다가 공사장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철근과 건축자재들이 어지럽게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공사 중”이라는 팻말이 서 있었습니다.

“공사 중에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공사 책임자 백”

이 팻말을 보는 순간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 공사 중이라잖아. ”

“아하, 그 성도 지금 공사 중이구나. 그래서 내 통행에 방해를 하고 있는 거야. ”

그리고 그 동안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어했던 것도 “공사 중이라서 그랬구나. ”

그러면서 마음이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 후에는 그 사람을 만나면 속으로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성도님, 공사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뒤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잊어버리십시오.

그것이 오늘의 당신의 삶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3.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빌립보서3:14을 다시 읽어보십시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노라. ”

우리의 목표는 언제나 저 앞에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에 너무 집착해서 미래를 놓친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안된 것도 억울한데 그것 때문에 기회까지 놓친다면 안 될 일입니다.

우리는 2003년도에 중국 북경의 한 봉제공장 안에 교회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현지사정을 잘 아시는 선교사님의 추천으로 시작한 일이라 잘못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건축이 끝났다 하여 봉헌식을 하러 간 우리들은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함께 가신 30여명의 교우들은 교회건물을 구경도 못하고 다만 몇 분만 교회 건물 안에 들어가서 기도만 하고 나왔습니다. 북경의 종교당국에서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일행은 한 공원을 찾아가서 봉헌예배와는 관계도 없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끝낼 수는 없었습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중에 우리는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중국을 가신 분들과 함께 북방선교후원회를 조직한 것입니다.

누구를 탓하기보다 북방선교의 길을 적극적으로 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열매로 오늘의 몽골과 중국선교의 길을 계속 열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문을 닫으시면 반드시 다른 문을 열어주십니다.

세상에 그 어떤 일도 우리 스스로 끝이라고 선언하기 전에는 아직 끝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 진전하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계속 전진하기 위하여 몇 가지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1)목표설정입니다.

“푯대를 향하여”-우리는 바라보아야 할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4가지 비전이 있습니다. 다리, 중심, 성장, 선교가 그것입니다. 우리교회의 모든 사역은 이 4가지 주님이원하시는 일을 이루기 위하여 전진할 것입니다. 왜 그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우리교회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희망입니다.

부름의 상을 위하여-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영광스러운 상급입니다. 우리가 힘쓰고 애쓰는 모든 일에는 반드시 기대할만한 결과가 있습니다.

쥐를 가지고 실험한 결과가 있습니다.

쥐들의 태도가 삶의 의지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연구팀은 쥐 한 마리를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큰 물통에 넣고 빛을 완전히 차단하였습니다. 그리고 쥐가 그 속에서 헤엄을 포기하기까지 몇 분이 걸리는지를 쟀습니다. 결과는 3분이었습니다.

이 연구팀은 또 다른 쥐를 같은 물통에 넣고 이번에는 방안에 한 줄기 강한 빛을 비추어주었습니다. 그러지 쥐는 36시간 이상을 헤엄쳤습니다.

빛을 보지 못한 쥐보다 무려 720배나 오래 버틴 샘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희망입니다.

달려가는 자는 반드시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다시 말하면 희망을 바라보고 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희망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희망입니다.

3)열정입니다.

“달려가는 것입니다. ”-걸어가지 않습니다. 누워서 놀며, 쉬어가며 가지 않습니다. 삶의 열정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일도 열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기도의 열정이 있습니다.

헌신의 열정이 있습니다.

모이는 열정이 있습니다.

사랑의 열정이 있습니다.

일에 집중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열정이 희망을 희망으로 만듭니다.

최근에 몽골선교사 김종진 목사님을 서울의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 적지 않은 여건이 꽤 괜찮은 교회였습니다. 사실 파송한 교회 목회자로서 그 교회 담임자로부터 이러한 제안이 들어왔을 때에 적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본인이 들어오겠다고 하면 반대할 수 있는 이장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제가 몽골선교를 위하여 헌신하겠다고 교회에서 파송해주셨는데 제가 좋은 기회가 왔다고 하여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용납될 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몽골선교는 반드시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진 선교사들을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우리의 달음질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시기하지도 원망하지도 맙시다.

과거를 잊어버리고 앞을 향하여 달려갑시다.

목표를 다시 확인하고, 희망을 가지고, 달려갑시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로 우리를 앞서가시며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 닛시!

우리의 영원한 승리의 깃발이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8.하나님의 기대

마25:21-30

 

옥수수의 대가 김순권(金順權) 박사는 가난한 농촌에서 자랐습니다. 너무도 가난하여 미래가 암담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교회에 나가 예수를 믿은 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옥수수 씨앗만으로도 가난한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그는 믿고 옥수수와 함께 잠자고, 날 옥수수로 허기를 때우고, 꿈속에서도 옥수수를 만나는 옥수수에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좋은 옥수수 품종 개발에 성공하자,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옥수수를 잡아먹는 악마의 풀을 이겨내는 신품종을 개발하여 그 곳 국민들에게 '위대한 뜻을 이룬 사람' 이라는 마이에군과 자군몰루라는 명예 추장에 추대되었습니다. 지금 김 박사의 마음은 북한동포에게 가 있습니다. 북한에서 가장 많이 심는 농작물이 옥수수인데, 슈퍼 옥수수가 탄생하여 북한 동포들이 배불리 먹을 때 남북이 하나 되리라 믿으며 북한식량을 위해 옥수수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를 가집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친구에게, 형제에게 기대를 가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를 가지고 계심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각자에게 달란트를 주시고 그 가능성에 맞추어 기대하십니다.

한 해동안 얼마나 성공하였습니까 얼마나 벌었습니까 얼마나 출세했습니까 얼마나 배웠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성공입니까 아닙니다. 성공의 판단 기준은 목적입니다. 얼마나 목적을 향하여 살았는지, 목적에 합당한 일을 했는지,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났는지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즉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얼마나 기쁨을 얻었는지 나로 인해서 내 가정이 얼마나 행복해졌는지

나라는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유익한 존재로, 덕을 끼치는 존재로 성숙했는가 물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남편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나로 인해 아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나로 인해 자녀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나로 인해 교회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나로 인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했으며 그들이 복되다 말하게 되었는지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최선이라는 허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했다(I did my best)'는 말을 양심 앞에서, 또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물어야 합니다. 최선인 줄 알았지만 되돌려 생각해보니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진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기대를 가지고 한 해의 달란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한해동안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오셨습니까 하나님의 기대에 맞는 일을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는 무엇입니까 본문에 그 하나님의 기대가 나타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는,

 첫째로 게으른 종이 아니라 부지런한 종

피어슨(Arthur T. Pierson)박사가 즐겨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분이 은퇴하여 농촌에 들어가 처음으로 젖소를 사서 기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를 산지 얼마 안되어 소의 젖이 마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웃 농부에게 어쩐 일인지 물어 보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농부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당신의 젖소가 젖이 마른 것은 젖을 다 짜주지 않았기 때문이요. " 젖소는 젖을 최대한도로 짜내야 계속 더 많은 신선한 젖을 생산하는 법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자기가 필요 한만큼만 젖을 짰습니다. 한 병이 필요하면 한 병만큼만, 우유생각이 나지 않는 날은 아예 젖을 짜지 않았습니다. 짤 수 있는데 짜지 않은 것이 젖을 마르게 하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다 짜야 합니다. 충성 할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충성해야 합니다. 쓸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사용해야 합니다. 건강과 물질, 능력은 쓰라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안 쓰면 나중까지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본문 26절입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기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충성의 반대는 반역이 아니라 게으름입니다. 여기에 주님의 관점이 있습니다. 종말시대에 삼가야 할 태도는 게으름입니다. 김남준 목사는 '거룩한 삶의 은밀한 대적 게으름' 이란 저서에서 "비전의 사람, 사명의 사람들에게 이 땅의 삶이 유한하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짧다. 시간을 선용하는 것이 충성이다. 그러므로 게으름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성향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불충성이요, 맞서 싸워야 할 내 속의 악이다. 게으름은 충성하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 대표적 악" 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맞서 싸워야 할 대적 중 하나가 바로 게으름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을 비판하기에 바빴습니다. 감사엔 게으르고 불평하기에 바빴습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에 바빴습니다. 열등감을 드러내기에 바빴습니다. 엉뚱한 일에 바쁜 것이 게으름입니다. 자기 일에 바빠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이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을 포기하지 아니하면 영적 거인이 될 수 없습니다. 16절에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달란트를 받고 바로 가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17절에도 두 달란트 받은 종 역시 그같이 했다고 증거합니다. 즉 불충성한 종은 게을렀고 충성한 종들은 부지런했습니다. 묻어두고 있다면 이미 게으른 종입니다. 사용하였다면 부지런한 종입니다. 하나님은 게으른 종이 아닌 부지런한 종으로의 기대를 우리에게 가지고 계십니다.

 둘째로 악한 종이 아니라 착한 종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Bill Gates)나 CNN방송 설립자 테드 터너(Ted Turner)는 갑부입니다. 빌 게이츠는 소아마비 퇴치기금으로 6백억원을 세계보건기구에 쾌척했으며, 테드 터너는 유엔에 매년 1조2천억원씩 기부금을 내고 있습니다. 본래 자선에 관심이 없던 빌 게이츠에게 구제의 기쁨을 가르쳐준 사람이 터너였다고 합니다. 3년전 터너는 사업에만 몰입하던 게이츠를 향해 충고를 던졌습니다. "많은 돈을 은행에 예금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다.

그 돈으로 남을 돕는다면 인생이 훨씬 풍요로워 질텐데. " 빌 게이츠는 이 말에 감동을 받아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돈도 중요하고 명예도 중요하고 지식도 건강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를 위해 쓰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좋은 머리로 무기를 만들어 인류를 죽인다면 그 재능은 필요 없는 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여기의 '착하고' 는 '선하다, 유능하다' 는 뜻입니다. 잘했다는 칭찬은 이익을 남겼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이 주신 능력인 달란트를 가지고 순종하는 자세가 좋았다는 의미입니다. 주인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일한 것이 잘했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을 향하여 '착한 종' 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자는 '악한 종' 이라 했습니다. 주인의 의도를 알고 주인이 원하는 대로하면 선한 것이고 주인의 의도대로 하지 않으면 선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는 명예, 돈, 기능, 맡은 직분들입니다. 달란트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사용했을 때 선한 일에 쓰임 받는 착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착한 종은 내 뜻과 의도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맡겨주신 주인의 뜻대로 일하는 종입니다. 악한 일은 주인의 뜻을 무시하고 내 뜻대로 행하였던 모든 일을 뜻합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한 악한 종은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셋째로 불충한 종이 아니라 충성된 종

주인이 두 하인을 불러놓고 말합니다. "오늘이 섣달 그믐날이네. 약속한 대로 자네들은 내일부터 자유의 몸일세.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네. 오늘밤 이 짚으로 새끼를 좀 꼬아 주게. 될 수 있으면 가늘면서 길고 질기게 말일세. 아마 이 일이 우리 집에서 마지막 일이 될 걸세. " 주인이 들어가자 한 하인은 섣달 그믐날 마지막까지 일을 시킨다며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자 다른 하인이 부지런히 새끼를 꼬며 그를 나무랐습니다. "여보게, 불평을 하지 말게. 세상에 우리 주인 같은 분이 또 어디에 있나. 게다가 내일부터 자유의 몸이 되도록 해주셨으니, 주인이 마지막으로 시키는 일을 잘 해 드림세. " 그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가늘고 질긴 기다란 새끼를 꼬았습니다. 그러나 불평이 많은 하인은 대충 굵고 짧게 새끼를 꼬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주인은 두 하인을 불러 놓고 작별 인사를 나누며 말했습니다.

"여러 해동안 내 집에서 고생들 많았네. 자네들이 열심히 일해 준 덕에 우리 집 살림살이가 많이 늘었네. 자네들을 그냥 보내기 섭섭하여 선물을 주려고 하네. 어젯밤에 꼰 새끼를 가져오게나. 그리고 광 문을 열고 엽전을 새끼에 꿸 수 있는 대로 잔뜩 꿰어 가져가게. 그 돈으로 잘 살기 바라네. " 불평 많은 하인의 새끼는 너무 굵어 엽전이 꿰어지지 않았으며, 너무 짧아 많이 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늘고 길게 새끼를 꼰 종은 충성스럽게 한만큼 많은 엽전을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본문 23절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 한자어 충(忠)은 가운데 중(中)에 마음 심(心)입니다. 즉 중심을 바로 잡는 다는 뜻입니다. 주인이 없을 때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은 주인이 없을 때 성실하지 못하며 맡겨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은 사람이 충성된 사람입니다.

처음이나 나중이나 변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잘 될 때나 못될 때나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주인에게 기쁨을 주는 충성된 종입니다. 그러므로 '충성되다' 는 말은 신실성을 나타냅니다. 맡은 바 사명에 충실한 종에 대한 극찬이 바로 충성된 종입니다. 주인은 떠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할 때 충성된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한 해동안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 즉 건강, 지혜, 물질, 재능을 사용치 아니하고 그대로 묻어 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내 뜻대로 내 중심으로 일을 해온 것이 아닙니까 이제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종의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기대를 깨닫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주어지는 새해 달란트 앞에 결단해야 합니다. 게으른 종이 아니라 부지런한 종이 되겠다고. 악한 종이 아니라 착한 종이 되겠다고. 불충한 종이 아니라 충성된 종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새해에는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어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환상을 보는 아침

사6:1-13

 

잠 29:18에 “환상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고 말씀했는데 우리는 새해 원단에 우리의 신령한 영안이 열려서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환상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보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좌정하시고 계신 영광의 보좌는 내가 믿고 의지했던 왕이나 부모, 또는 사랑하는 이가 죽었거나 나라가 큰 난리를 만나 환란을 겪고 있어 세상 쪽으로는 바라볼 수 있는 통로가 모두 막혔을 때 비로소 보입니다.

 유다 왕 웃시야는 주전 789-736년까지 52년간이나 통치하던 왕으로 성군 다윗 왕처럼 태평성대를 누린 왕입니다. 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야 왕은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선지자 스가랴의 보필을 받으면서 신무기를 개발하여 예루살렘 성을 견고하게 하고, 30만이 넘는 국방력으로 강대국을 쳐서 이겨 영토를 넓혔고, 농업을 장려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백성들이 국태민안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웃시야 왕은 말년에 교만하여 대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성전 지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산당제사를 허용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문둥병이 들어 별궁에 거하다가 죽었습니다.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말년에 한 순간 직분자로서 오버하고, 자유신학사상에 물들어 임의로 모이다가 신앙적으로 파산했고 비참하게 인생이 끝나버렸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 다음으로 믿고 의지했던 왕의 죽음으로 백성들의 마음이 공허하고 두려워졌을 때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선지자 다니엘도 자기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노예생활을 하면서 그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를 보여주셨습니다. 단 7:13-14에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는 말씀으로 위로와 소망을 주셨습니다.

영국 Victoria여왕 시대의 서정시인 Robert Browing은 Pippa의 노래를 썼습니다. “때는 봄, 시간은 아침 7시, 이슬은 언덕에서 방울방울 진주처럼 빛나고 종달새 날개치며 오를 때 달팽이는 가시나무 끝에 도사리고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 만사는 태평하구나” 그렇습니다. 세상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하고, 인재와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 보좌 위에 좌정해 계십니다.

우리가 환상 중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공의와 사랑과 자비의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우리를 내려다 보고 계시니 평안을 얻고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시 11:4에 다윗 왕이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할렐루야!

또 누구에게 하늘 보좌를 보여주십니까 주후 96년경 로마제국 도미시안 황제 때 지중해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던 사도 요한에게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계 4:2). 여기 성령에 감동했다는 말은 성령 안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영은 영으로 통합니다. 롬 8:8-9에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계 4:1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라고 말씀했고,

11:16-19에는 “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려 경배하여 감사하고 찬양하니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고 말씀합니다. 언제 하늘 문이 열립니까 감사하고 찬양할 때 성전 문이 열립니다. 성전 안에 있는 우리 마음 문이 열릴 때 응답과 기적의 하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늘의 문, 교회의 문, 마음의 문이 나란히 연결되어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둘째로, 환상 가운데 거룩한 천사들의 예배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2-4절)고 했는데 Serapim 천사들은 셋이 한 조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찬양을 돌리는 여섯 날개를 가진 영물입니다.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었다고 했으니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태도가 어떠해야 함을 잘 보여줍니다. 천사들은 죄를 안 지었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가리었습니다. 세상의 더러운 곳을 가거나 밟아 본 일도 없는 깨끗한 발도 가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옵니까 눅 18:9-14에 나오는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온 두 사람을 봅시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고 교만한 마음으로 얼굴을 치켜들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회개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람이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고 말씀했습니다.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 천사들이 날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세 번 창화한 것은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여호와 하나님께 복 받기에 앞서 온전히 내 몸을 산 제물로 드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제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제일 먼저 자기의 죄를 회개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선포하신 사죄의 확신을 가질 때 비로소 나의 존재와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성탄절을 중심한 송년과 신년은 온통 찬양과 감사로 충만합니다.

눅 1:41-44에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고 기록되었는데 6개월 된 복중의 아이가 주님을 찬양하다니요

엘리사밧과 같이 깊은 심층에서, 존재의 뿌리에서 울어나오는 찬양과 천사들의 찬양이 화합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창화하는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해 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은혜의 표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셋째로, 환상 가운데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절). 환상을 펼쳐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천상의 환상을 보는 예배는 그냥 꿈으로 그치지 않고 생산적인 역사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적하며, 말해도 말하는 이유조차 모르는 완악한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에는 신령한 예배의 환상에 젖어서 사시기 바랍니다. 20C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Dietrich Bonhoeffer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값싼 은혜와 값진 은혜로 구분했습니다. 값싼 은혜가 무엇입니까 아무데서나 마구 남용되는 쉬운 은혜입니다. 회개가 없는 용서의 설교, 훈련이 없는 제자도, 바른 신앙고백이 없는 세례, 십자가의 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성찬, 사명감이 없는 직분 봉사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길을 오히려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값진 은혜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처럼 추하고 더러운 얼굴과 입술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뵙고 두려워할 때 성령의 불화저로 부정한 입술이 정하여지는 체험, 절망적인 세상 속에 살면서도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옷자락이 우리가 예배 드리는 이곳에 가득히 늘어뜨려져 있는 환상을 보는 체험, 하나님 앞에서 Serapim 천사들의 찬양드리는 모습을 보고 그 찬양의 소리에 존재의 바탕으로부터 화합하는 체험,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바쳐 씨앗과 그루터기가 되려는 소명감이 확고해지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교회에서 설교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숨소리로 들려지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롬 10:17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 대신에 하나님의 숨소리가 들린다 하여 레에마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 지식을 전달하는 로고스로 듣지 말고, 하나님의 숨소리가 섞인 생명과 영으로 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들에게 직접 말씀하셨지만 오늘날은 신구약 66권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부모들과 교사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되어 하나님의 숨소리로 들리는 여하나님의 말씀을 아이들에게 들려주어야 하겠습니다. 유대인의 자녀교육에는 쉐마 프로젝트라는 것이 있는데 쉐마란 말은 들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주님께서는 복음서에 교훈을 하신 후에 꼭 덧붙이시기를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고 말씀했습니다. 성도는 육체의 법칙이 아니라 성령의 법칙에 따라 삽니다(롬 8:2). 말씀의 법칙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나를 변화시킨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말씀의 권능을 체험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전 11:1에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했는데 그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애굽의 나일 강은 세계에서 두 번째 긴 강인데 비가 자주 오면 강이 범람하여 주위 땅을 기름지게 합니다. 파종하는 10월 경 흙탕물이 덮여서 내 땅, 네 땅이 잘 구분이 안되지만 내 것, 네 것 가리지 않고 아무 데나 씨를 뿌려놓고 보면, 4월 추수기에 열매를 거둘 때 내 밭에 뿌린 것보다 더 많이 거두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첫째 의미는 무심한 강물에 식물을 던져도 반드시 거두는 것이 있을진대 하물며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에게 베푼 것은 반드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둘째 의미는 사 55:10-11에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를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는 말씀의 성취력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드릴 때마다, 기도드릴 때마다 성령의 호흡을 느끼시는 가운데 말씀에 붙잡히고 말씀과 하나가 되는(행 18:5) 권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저 벳세다 들녘에서 예수님이 장정만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일 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름 모를 소년 하나가 혼자 먹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 앞에 선뜻 내어놓는 데서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약자가 강자를 섬기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강자가 약자를 섬깁니다.

성공의 고지를 점령하고 세상을 정복한 후 세상을 부려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육입니다.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 중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오천 명 분을 혼자 다 먹는 사람인데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성공한 사람,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전직 대통령들 가운데 삼천 억, 오천 억을 꿀꺽 삼켰다가 지금까지 배앓이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하나는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인데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성공자로, 잘 사는 사람으로 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심어서 어떤 탁월한 인격자로, 성공자로 만들어야 하겠습니까 회전의자나 돌리면서 오천 명의 섬김을 받고, 오천 명 분을 다 먹어치우는 사람입니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불로소득하는 불한당을 키워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오천 명을 섬기며 오천 명을 먹이는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으로 키워야 하겠습니다.

오늘 무자년 송구영신의 미명에 이사야 선지자가 본 환상이 저와 여러분의 환상이 되기 바랍니다. 세상은 어지럽고 뒤죽박죽이고 소망이 없어 보이지만 하늘 보좌에는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이 앉아 계십니다. 환상을 보고 힘을 얻읍시다.

올해야말로 모세에게 주신 출애굽의 환상이 여러분과 우리 교회에 주신 환상이 되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출 3:7-8).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이야말로 우리들의 교회와 삶의 현장에서 불평과 원망, 가난과 질고, 오만과 편견, 염려와 근심, 탐욕과 증오, 염병과 테러의 가나안 족속들이 떠나가고 믿음과 부흥, 충성과 헌신, 관용과 순종, 기적과 형통, 건강과 경제의 빛이 비치는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를 상속하시기 바랍니다. 20C 권력형 인간, homo politicus가 21C 공생하는 인간, homo symbius로 변신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성도가 당회원이 되고 제직원이 되어야 합니까 첫째,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성도입니다. 둘째, 화합을 가져올 줄 아는 성도입니다. 셋째, 자기 주장이나 고집대로 하지 않는 성도입니다. 넷째, 주님의 때를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성도입니다. 인화 협동적 인간, 상호 의존하는 인간, homo reciprocus로 변신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의 환상, 다니엘의 환상, 사도 요한의 환상, 벳세다 들녘의 환상, 출애굽의 환상을 보는 아침이 되시기 바랍니다.

 

 

 

10.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한 전략

사43:18-21

 

한 해가 저물어가는 송년주일입니다. 엊그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린 것 같은 데 벌써 한 해가 다갔습니다. 송년주일 예배에 참여한 모든 성지가족 위에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매년 교수신문에서 일 년을 돌이켜 보며 현 시대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는 사자성어를 발표합니다. 작년에는 사회 지도층의 학력 위조와 논문 표절 등 도덕 불감증을 비판하는 ‘자기기인’(自欺欺人·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인다)이 선정됐었습니다. 올 해의 사자성어는 ‘호질기의(護疾忌醫)’ 가 뽑혔습니다.

이 말은 중국 북송시대 유학자 주돈이 통서에서 사용한 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잘못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바로잡아 주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병을 숨기고 의원을 기피해 자신의 몸을 망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병이 있는데도 의사한테 보여 치료받기를 꺼린다면 결국 화를 자초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희망을 안고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지만 촛불시위를 비롯한 세계 경제의 위기 속에서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한해였습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국민의 비판과 충고를 겸허히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부족했습니다. 따라서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얼른 귀를 열고 국민과 전문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정치인은 물론 우리 신앙들도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충고를 하면 그것을 기분 좋게 받아드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충고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 놓고, 겸허하게 충고를 수용하면 그것은 자신을 새롭게 하고, 성숙시키는 좋은 약이 됩니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온다고 해서 삶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의 시간은 동일하게 오고갑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의 각오와 태도를 가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을 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결국 새해를 의미 있게 맞이하려면 마지막 마무리를 잘 해야 합니다.

비행기가 아무리 멋지게 이륙을 해도 착륙을 하지 못하면 큰 일 입니다. 아무리 시작이 멋있어도 끝이 아름답지 못하면 좋은 이미지를 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습니다. 연극을 마친 배우가 관객들이 계속 환호하고 박수를 친다고 해서 무대에 계속 서있으면 안 되죠. 박수 소리가 그치기 전에 무대를 떠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 박수 소리에 도취되어 계속 있으면 관객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바둑을 아무리 잘 두어도 마지막에 마무리를 못하면 대마가 죽습니다. 그러면 지게 됩니다. 결국 우리 인생은 매 순간마다 어떻게 매듭을 잘 짓느냐가 중요합니다.

대나무는 하늘을 향해 쭉쭉 자랍니다. 땅에서 솟아난 죽순은 하루에 약 80Cm씩 자랍니다. 자라는 기간은 약 1달 정도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약 20m 정도의 크기를 유지합니다. 대나무가 1달에 평생 크기로 자라나면서도 부러지지 않고 높이 자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 비밀은 바로 매듭입니다. 대나무에는 약 70개 정도의 매듭이 있습니다. 매듭이 있어서 대나무는 부러지지 않고 한 달 만에 성장을 끝냅니다.

우리 인생도 좋은 마무리를 하려면 매듭을 잘 지어야 합니다. 아무리 빨리 성장해도 매듭을 잘 짓지 못하면 결국 쓰러집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과거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8절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이전 일’과 ‘옛날 일’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제까지 행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긋지긋한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배 한 척도 만들지 않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적적으로 홍해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광야생활 4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과거의 일을 잊으라고 하십니다. 과거에 있었던 홍해의 기적신앙에 매여 있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놀라운 사건을 기억도 하지 말고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거의 신앙은 오늘을 있게 한 밑거름임에 분명합니다. 과거 없이 현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과거로 돌아가려는 자세나,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매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역사가 귀하기는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역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너무 얽매이다 보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옛적에 들었던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그때가 좋았지 한없이 좋았지 그러나 이젠 꿈이야♪ 누가 부른 노랜지는 모르지만 만약 우리가 여전히 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면 한심하지 않습니까

과거는 아무리 추억해도 오늘 나에게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미스 리(Lee)가 좋았어도, 지금의 미스 최와 결혼했으면 미세스 최를 사랑해야지 옛날 첫 사랑의 미스 리를 여전히 그리워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혹시 그런분 있으면 회개하시고, 옆에 있는 아내를, 남편을 죽도록 사랑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과거에 매인 인생, 매일 과거를 그리워하며 ‘그때가 좋았지’를 노래하는 인생은 신기루를 잡는 허망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올 한해를 살면서 성공적인 일도 있고, 실패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성공한 일은 더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문제는 실패한 일입니다. 내가 노력은 했지만 잘 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실패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실패는 잠깐의 연단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실패는 실패의 경험을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일어선다면 오히려 그것은 성공의 열쇠가 됩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실패 앞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좌절하고 낙심할까요 대부분의 경우는 과거의 아픔과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실패라는 상처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배를 말뚝에 묶어 놓고 아무리 노를 저어도 배는 제자리를 맴돌 뿐입니다. 우리는 종종 과거라는 배에 올라타서 묶어 놓은 밧줄을 끊지 못하고 열심히 노를 젓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신세타령을 합니다. 자신을 비하하고, 무능력자로 자책하며 열등감에 빠집니다. 때로는 과거에 지은 죄 때문에 심한 죄책감에 매여서 앞으로 나가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의 죄의 상처와 얼룩 때문에 아직도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내가 너희의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 사랑이 무엇입니까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용서해 버리는 것입니다. 실수와 허물을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의 죄과를 옮겨 주셨습니다. 우리의 과거에 지었던 모든 죄의 문서 보따리를 불에 던져 태우셨습니다. 그래서 코리 텐붐 여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짐을 강물 깊은 곳에 던지시고 낚시금지 라는 푯말을 걸어 두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여전히 주님 앞에 나와서 죄 보따리를 풀어 놓습니다. 그래서 회개와 용서의 기도를 보면 녹음기 테이프를 틀어 놓은 것처럼 동일한 내용일 때가 많습니다. 이전에 새벽기도 갔다 오다가 이웃집 호박 따다 빈대떡 부쳐 먹은 것, 옛날에 사랑하는 사람 가슴 아프게 한 것, 남에게 피해 준 것.. 등등

주님은 이미 기억하지도 않는 죄 보따리를 풀어 놓고 푸념하듯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태도가 아닙니다.

아들이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다 용서하고 받아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아들은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설 필요가 없습니다. 당당하게 더 열심히 공부하면서 살면 아버지의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매일 아침마다 아버지 앞에 엎드려 눈물 흘리면서 ‘아버지 내가 지난 밤에 생각해 보니 죽을 죄를 지었던 것 같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 첫 날은 아버지가 이해하고 아들을 사랑으로 껴안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또 아들이 오더니 ‘아버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가 죽을 죄를 지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용서해 주세요. ’ 만약 매일 이런 일아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중에는 아버지가 화를 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안타깝게도 이런 미련한 아들의 우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찬송가 255장(너희 죄 흉악하나)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죄의 빛 흉악하나 희게 되리라 주홍 빛 같은 네 죄 주홍 빛 같은 네 죄

눈과 같이 희겠네 눈과 같이 희겠네

3절 : 너희 죄 사해주사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아니 하시네 기억아니 하시네♪

주님은 이미 우리의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기억조차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복음은 용서의 복음이요 속죄의 기쁨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 믿습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과거로부터 해방 되었으며,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실패의 쓰라린 경험, 지난 날 내 기쁨과 행복과 평강을 빼앗아 갔던 모든 죄책감, 이 모든 과거의 아픔과 상처들을 십자가에서 다 용서하시고, 불태우셨습니다. 이 자유함과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더 이상 과거의 포로가 되어 살지 마십시오. 내 안에 있는 과거의 부정적인 생각, 부정적인 말,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부정적인 행동을 과감하게 끊어버리십시오. 아직도 과거에 매여 있다면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안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은 떠날지어다. ” 아멘! 그리고 항상 믿음으로 더 잘 되는 나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나는 잘 될 것이다’ 라고 선포하십시오. 그 입술의 열매가 축복의 열매로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 안에서 과거의 모든 아픔과 상처의 기억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 바로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한 중요한 출발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믿음으로 기대하라

다같이 19절을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여호와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서 '새 일'이란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일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그 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은 광야에 길을 만들고, 사막에 강을 뚫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광야에 길을 만들고, 사막에 강을 뚫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슨 이유로, 누구를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러한 엄청난 새 일을 행하시려고 할까요 이사야 36장 8절에 보면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거룩한 길을 반드시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여러분의 삶이 광야의 삶 가운데 모래 바람 부는 언덕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언덕을 넘어서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생명의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게 하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능력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믿음을 위해서는 우리는 마음의 청소를 해야 합니다. 내 마음의 창이 어두우면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쓰레기더미처럼 악취가 나고, 더러운 것으로 채워져 있으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물댄 동산의 축복이 보이지 않습니다. 매일 땅만 바라보고, 문제만 바라보고 신음하면 좌절할 뿐입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 미래를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장차 행하실 열린 미래를 바라보며 날마다 마음의 거울을 닦아 보십시오. 반드시 약속대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광야의 길에 시온의 대로를 여시고, 사막에 생명의 오아시스를 만드실 줄 믿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앵무새를 하나 키웠습니다. 매일 퇴근할 때면 파김치가 돼서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이고, 죽겠다’고 말했습니다. 앵무새가 이 주인의 말을 반복해서 듣더니 하루는 주인을 보고 ‘아이고, 죽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들을 때에야 웃음이 낫지만 자꾸 들으니까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집사님은 장로님 댁의 앵무새한테 뭔가 좋은 것을 배우라고 자기 앵무새를 그 옆에다 갖다 놨습니다. 집사님의 앵무새가 장로님의 앵무새를 보자 ‘아이고, 죽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장로님의 앵무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

사랑하는 여러분! 집사님의 집의 앵무새가 되기를 원하세요 아니면 장로님 집의 앵무새가 되기를 원하세요. 잠언 18장 20-21절을 보면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서는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말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말은 자성적인 예언의 힘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내가 믿음으로 선포하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비록 내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으로 선포하고, 믿음의 그릇을 깨끗하게 준비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선한 것으로, 좋은 것으로 채우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기대하며 나아가는 것이 바로 마무리를 잘 하는 지혜인 줄 믿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깨달으라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 ”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한 세 번째 전략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깨닫지 못하는 인생은 불행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해도 내가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내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 불쌍한 인생입니다.

21절 말씀은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분명한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창조의 목적에 맞게 살 때 아름답습니다.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것이 가장 멋진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넘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원망과 한숨과 탄식의 소리만 울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더 이상 탄식하며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곤고하십니까 힘들고 어렵습니까 그러면 먼저 찬송을 힘차게 불러 보십시오. 물론 즐겁고 신나는 일이 있어서 찬송을 부를 수 있지만 반대의 상황에서도 나를 통해 역사하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기대하면서 찬양을 올려드리십시오. 찬양은 내 마음의 부정적인 생각을 떠나게 합니다. 나를 짓누르는 마귀의 멍에를 꺾을 수 있습니다. 찬양하는 자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고, 찬양하는 입술에 새 노래를 들려주시며, 더 큰 기쁨과 감격으로 채워주십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고, 여호와 하나님의 목적에 이끌리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성공적인 전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년주일입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매이지 마시고, 부정적이고,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태도를 과감하게 끊어버리십시오. 광야에 대로를 만드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창조하신 여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고, 날마다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십시오. 이것이 바로 성공적인 한 해를 마무리하고, 희망찬 2015년을 맞이할 수 성공적인 비결입니다. 아무리 내년이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나는 내년에는 더 잘될 것이다’ 라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1.일어나 함께 약속의 땅으로 가자

창12:1-3

 

새해 첫날 첫 시간에 주 앞에 예배드리는 여러분 모두 위에 인류의 축복자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인류의 어느 누구도 살아보지 못한 2015년을 맞은 이 새해 벽두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음성을 듣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여기에 왜 왔을까요 하늘의 음성을 들으러 왔습니다. 우리가 옷 잘 입는 자를 보러 온 것도 아니고, 잘 생긴 자를 보러온 것도 아닙니다. 신령한 하늘의 음성을 들으러 왔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에게는 결코 밝은 내일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힘과 권능을 힘입고 일어나 도전을 시작하는 그 사람에게 내일은 소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위기를 또 다른 삶의 기회로 붙잡고 창조적인 생각으로 내일을 여는 그 사람에게 내일은 감격과 은혜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 믿음의 사람은 현실의 환경만 바라보면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현실의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현실을 넘어선 그 이상의 꿈과 비전을 품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새해 벽두에 내 영혼에 선언을 해버리십시오. 나는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 내 인생에는 떡보다 더 귀한 것이 있고, 내 인생에는 떡보다도 더 귀한 것을 찾아야 되고, 내 인생에는 떡보다도 더 귀한 것을 만들어야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떡으로만 산다고 하면 불행입니다. 비극입니다. 종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시간(Zeit)에는 2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적인 시간이고, 또 하나는 문화적인 시간입니다. 이 자연적인 시간에는 마디가 없습니다. 2009년이 되었다고 해가 서쪽에서 뜨겠습니까 1초가 더 길어졌습니까 똑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들어 주신 자연적 시간에는 전혀 마디가 없습니다. 그 시간 속에 내가 주님과 함께 늘 삶의 의미의 마디를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 이것이 문화적인 시간입니다.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불꽃놀이가 타올랐습니다. 일본 도교에서 시작된 불꽃놀이가 캄캄한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여기 저기에서 카운트다운이 일어납니다. Ten! Nine! Eight! Ten! Nine! Eight! 놀라운 것은 그렇게 Ten! Nine! Eight! 했던 그 시간이 잠깐 머물러 줍니까 셈하기 쉬우라고 그 시간에 잠깐 스톱했습니까 전혀 멈추지도 않았습니다. 매듭 없이 그대로 흘러갔습니다. 다만 인간만이 Ten! Nine! Eight! Ten! Nine! Eight!을 외쳤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이 무엇입니까 여기 사는 사람의 시간과 저기 사는 사람의 시간이 다 돌아갑니다. 똑 같은 시간을 삽니다. 그런데 시간이 무엇입니까 시간은 사용하기에 따라서 그 시간의 가치는 하루가 천년이 될 수도 있고, 천년이 하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시간의 가치가 의미 있습니다. 사용하는 사람의 시간에 따라서 그 시간의 가치가 얼마든지 커질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서력 기원 후 2014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역사입니다. 그분의 구속의 역사입니다. 그분이 인류를 어떻게 다시 구원할까 하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 구원의 역사가 이제는 지각변동을 일으키면서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어느 날인가 어느 시간인가 어느 때인가 우리 주님께서 역사를 심판하시는 역사의 종말이 오는 날에 대해 카운트 다운하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카운트 다운할 그 날이 올 것입니다. Five! Four! Three! Two! one! 아무쪼록 여러분, 이런 삶의 시간적인 역사를 바라보면서 이런 매듭이 없는 자연적인 시간 위에 주님과 함께 의미 있는 삶의 사건들을 만들어 가는 그런 문화의 시간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회적 약속이라는 단위가 매겨짐으로써 자연의 시간은 문화적 시간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그것이 힘입니다. 이 삶 속에서, 이 시간 속에서 삶의 흔적이 나옵니다. 삶의 의미가 나옵니다. 삶의 자국이 나옵니다. 삶의 보람이 나옵니다. 삶의 변화가 나옵니다. 삶의 사건이 나옵니다. 그 어느 해보다도 2015년에는 많은 삶의 자국을 남기리라. 삶의 의미를 찾으리라! 삶의 보람을 찾으리라! 삶의 감격을 찾아보리라! 이런 한 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 우리가 살고 있는 내 나라 대한민국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우리는 인구가 몇억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땅이 중국처럼 그렇게 광활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는 무슨 자랑할만한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좁은 땅에 이 적은 사람들이 서로 지역간에, 이념간에 분열되고 아웅다웅거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땅에 희망을 걸어도 좋은가 이 민족에 희망은 있는 것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확신하건데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잿더미가 된 폐허 위에 눈물로 얼룩진 기도가 있었습니다. 엄동설한 살을 애는 혹한의 추위 속에도 깊은 산 속에서 이 민족의 부흥을 위해 드렸던 간절한 기도의 씨앗이 있었습니다. 그 기도가 오늘의 이 민족을 세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 우리가 사는 이 땅에 기도가 있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 제2, 제3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기는 분명히 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위기는 또 다른 위대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지금 세계가 글로벌 위기에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다 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세계 속에서 다시 우뚝 일어설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우리 민족에 여호와 하나님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나라, 이 백성 속에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을 딛고 일어선 이 민족이 온 인류를 향해 믿음이 공급될 것입니다. 헐벗고 가난한 세계를 향해 이 나라 속에서 열방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공급될 것입니다. 소망이 공급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이 축복은 오늘 이 성전에서 예배하는 우리 교회와 여러분들을 향한 축복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땅의 모든 상처 입은 영혼들이 교회를 통하여 희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놀라운 비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날들을 우리가 만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첫 날을 맞으면서 사랑하는 여러분! 인류의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붙들고 삶의 모든 무력감으로부터 벗어나 힘있게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이 무력감은 대단히 무섭습니다. 인간은 의욕을 상실할 때 두려움과 편견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니까 의욕이 자꾸 떨어지는 사람일수록 자기 합리화하려는 버릇이 있습니다. 편견을 합리화합니다. 두려움을 합리화합니다. 불평과 원망을 합리화합니다.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환경 때문에, 건강 때문에, 나이 때문에, 지식 때문에, 병이 들어서….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의욕을 대신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를 가진 사람들 속에 무서운 의욕이 불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임할 때에 그들은 모든 무력감을 벗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들 속에 30배, 60배, 100배의 놀라운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3천명이 돌아오는 놀라운 의욕이 왔습니다. 금년 이 한 해, 우리들에게도 성령님이 주시는 놀라운 의욕이 불같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의 열정, 헌신의 열정, 재생산의 열정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로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에게 붙잡힌 사람들은 무기력해집니다. 무기력해지면 의욕상실을 낳고, 의욕상실은 우울증을 낳습니다. 우울증은 좌절을 낳고, 좌절은 절망을 낳습니다. 절망은 패배를 낳고, 패배는 파멸을 낳습니다. 그리고 파멸은 사망을 낳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공식입니다. 그러나 모든 무기력함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이길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을 의지하고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과 능력을 의지하고 나간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만군의 하나님이 나를 돕는다고 하는 선언을 하십시오. 나에게는 전능하신 만군의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세상 속에서 선포하십시오.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 어리석은 자를 들어서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돌아보면 오늘까지의 업적이라고 하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보면 어제까지의 불가능이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이 교회를 개척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한 짓이라고 했습니다. 미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안 된다고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내 아버지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여하나님을 의지하고 선언을 해버리십시오. 삶의 버려진 곳, 삶의 그늘진 곳에 아직도 다른 기회가 있습니다. 사상 문제라고 물러서면 안됩니다. 환경의 문제라고 주저앉으면 안됩니다. 문제는 정지하라는 뜻이 아니라 문제는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방향을 다시 잡으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자기를 자성할 수 있는 기회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믿어야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기도하는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능력을 활용하십시오.

하늘의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사 내게 복을 주시리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사 내 삶의 지경을 넓혀주시리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나로 하여금 모든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시리라. 기도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역대상 4장 10절에 보면 야베스가 그렇게 기도했더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셨다고 했습니다. 야베스가 받은 응답의 역사가 금년 한 해 이 제단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해를 시작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내 영혼을 모욕하는 모든 것을 멀리하십시오.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연습 라운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실습 라운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한 번 살고 끝나는 인생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믿는 사람에게 계속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을 때 그가 행한 일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내 영혼을 모욕하는 저 놈에게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존재를 확인시켜 주시옵소서. " 이런 선언을 하십시오. 내 영혼을 모욕하는 모든 것을 멀리하십시오. 내 영혼을 모욕하는 모든 세력들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고 넘어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캠프를 치고 한 번 야영을 나가 본 적이 있습니까 각자 여러분의 캠프를 치십시오.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캠프를 치십시오. 더 나은 삶에 대한 캠프를 쳐보십시오. 믿음의 캠프를, 소망의 캠프를, 포부의 캠프를 한 번 쳐보십시오. 삶의 기적의 베이스 캠프로 옮겨 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땅, 축복의 땅, 비전의 땅을 향해 앞으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아직 이 땅에 증거 되지 않은 일들을 증명할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어떤 목적을 향해서, 아직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선견지명을 가지고 끝없이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인생의 모든 역경을 이기는 힘입니다. 내 안에 믿음만 일어나면 인생의 역사도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믿음만 일어나면 세상이 불가능이라고 하든 일들이 가능한 일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을 붙잡고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를 강하게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우습게 알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해 무너지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그 해 일어나는 나라도 있습니다. 그 해 무너지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일어나는 기업도 있습니다. 그 해 없어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넓고 좁은 인생 길을 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만큼 귀하고 복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 속에는 다음의 특징들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정확하고 객관적인 이 특징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내가 1년을 살다보면 이 해 여호와 하나님이 인도할거야. " 이러지 마시고, 남들이 그 많은 시간 속에서, 그 많은 삶 속에서 구름 같은 증인들을 통해서 이루어놓은 공통점에다 자꾸 자기를 맞추어 가야 됩니다. 이 특징들을 보면서 내게 무엇이 부족한가를 이제부터 하나씩 체크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폭넓은 교육이 있다고 하는 말을 잊지 마십시오. 내 삶의 전체를 학습조직으로 만들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학문은 사탄의 학문이 따로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학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학문이라도 사탄을 위해 쓰면 사탄의 학문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면 하나님의 학문입니다. 음악도 사탄의 음악이 따로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음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면 여호와 하나님의 음악입니다. 모든 재물도 같습니다. 모든 삶도 같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는 지식이 철 철 넘쳐야 됩니다. 모름지기 오늘은 지식 사회시대입니다. 교회는 새로운 세대에 대한 경험과 다가올 시대에 대한 그런 감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가오는 시대에 대한 변화의 흐름에 눈을 떠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끊임없는 호기심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남다른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역사에는 기회가 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옵니다. "이 고비를 넘고 나면, 이 고난을 넘기고 나면, 이 어려움을 넘기고 나면…" 이라고 하는 남다른 호기심과 기대감이 있어야 합니다.

금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일은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 가정과 우리 교회에는 어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까 기가 막힌 어려운 골리앗을 만나면 "여호와 하나님! 이 사람하고 맞서고 나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이런 호기심과 기대감에 펄펄 끓어보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충만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넘치는 의욕과 열정이 있습니다. 원래 삶의 열정이니 의욕이니 하는 것은 "신이 내렸다"는 그런 말입니다. 신이 내리면 의욕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내 삶에 열정이 불같이 일어납니다.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복음의 열정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꾼은 종교를 배워서 할 수 있습니다. 종교를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물려받아서 하는 사람이나 배워서 하는 사람은 잘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는 의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내리지 않은 여러분 속에 이 정초에 하늘의 의욕이 팍팍 들어가기를 축복합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채움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여러분의 매사에 모든 일들 위에 의욕과 열정이 강물같이 철철 넘쳐흐르기를 축복합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팀웍에 대한 눈을 뜨고 팀웍의 중요성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로운 늑대는 결국 죽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쪼록 최고의 가정의 팀웍을 만드십시오. 최고의 회사의 팀웍을 만드십시오. 최고의 교회의 팀웍을 만드십시오.

어리석은 사람은 조직을 자꾸 분열시킵니다. 사탄이 하는 주된 일도 사람들을 이간질시켜서 분열시킵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 선교회의 일이니까 간섭하지 마라. 내 일이니까 말하지 마라. 끊임없이 자기와 자기 조직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조직에 또 다른 자기 조직을 만들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분열됨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팀웍을 강하게 하십시오.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축구선수라고 할지라도 팀웍이 무너지면 그 선수는 그 팀에서 전혀 필요 없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리고, 팀웍을 헤치는 모든 것들을 거부하시기 바랍니다.

다섯 번째는, 도전정신입니다. 역사는 도전하는 자에게만 문을 열어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전하십시오! 아무쪼록 믿는 사람들 속에는 아직 이 땅의 지도 속에 나타나지 않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도성이 있습니다. 이 심령의 지도에는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허락하신 약속의 땅이 있습니다. 축복의 땅이 있습니다. 도전하십시오! 도전하는 자만이 그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단기적인 이익보다는 장기적인 성장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한 번 실수로 인생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한번 실수로 내 자신을 평가하고 남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기억하십시오. 한 순간의 결과 앞에서 울고 웃는 그런 나약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내 삶의 모든 총결산을 그분 앞에 가서 받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탁월함을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거의 아는 것과 정확히 아는 것은 다릅니다. 대부분의 교회에는 실패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해 놓고 또 실패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99%의 영감만 사모하고 1%의 노력만 좇고 있습니다. 바보 중의 바보입니다. 모든 것에서 탁월함을 이루려는 노력, 1%의 영감에 99%의 노력을 더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가만히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존재의 가치를 상실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살후 3:10)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그 지혜를 배워라. "(잠 6:6)

사랑하는 여러분, 일해야합니다. 노동이 기도입니다. 밤새도록 가서 기도한다면서 그 이튿날 12시까지 잠자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런 집이 어떻게 복을 받습니까 성경 어디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감을 받기 위해서, 99%를 이루기 위해 일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떠나가라!"는 것입니다. 떠나가라! 본토를 떠나가라는 것입니다. 친척집도 떠나가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도 떠나가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옛것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옛것을 뒤에다 두라는 것입니다. 옛것을 그리워하지 말고 앞에서 준비한 하나님의 창조의 대 역사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떠남의 역사입니다. 끝없이 떠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더 크고 놀라운 세계를 향하여 떠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피도 눈물도 고난도 없는 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떠나는 역사!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떠나면 새 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떠나면 후대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땅에서 여러분, 가슴 설레지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라고 받았던 땅은 알지 못하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을 믿고 오직 믿음으로 나갔더니 그곳이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2009년은 아직 아무도 밟지 못한 미지의 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오직 믿음으로 이 한 해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믿음으로 걸어가면 그 걸음에는 하나님이 안내자가 되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인도하실 풍성함이 넘치는 그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에 30배, 60배, 100배의 부흥의 불길을 일으킬 믿음의 헌신자들, 믿음의 꿈쟁이들이 넘쳐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민족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그러나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에게 년이 축복과 약속의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또 다른 기회를 이룰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기회의 때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꿈과 비전을 품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자만이 취할 수가 있습니다. 꿈을 가지십시오. 더 큰 꿈을 가지십시오. 그 땅에서 후대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 땅에서 당신의 이름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 땅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늘의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약속의 땅, 그 땅에서 너와 네 자손들이 복을 받으리라!

 

 

 

12.생명의 길을 택하라

신30:15-20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해를 살아낸 소감이 어떠십니까 어떤 분은 ‘어떻게든 살아냈다’고 말하더군요. 가슴이 짠해졌습니다. 얼마나 힘겨웠기에 그런 말을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불어 숲을 이루며 조금씩 성장해왔습니다. 해가 뜨거운 날에는 서로 그늘이 되어 주고,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이 되어주고, 고독한 날에는 벗이 되어주며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삶을 통해 그린 그림이 아름다운지, 추한지는 주님께서 평가하실 겁니다.

 마지막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 후 우리는 복잡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도 있지만, 착잡한 마음도 숨길 수 없습니다. 며칠 계속되는 추위에 지친 이들이 많지만, 지금 여의도는 사뭇 뜨겁습니다. 어쩌면 나라의 명운을 좌우할지도 모를 법안 제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야의 격돌은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언론 종사자들의 외침도 이 겨울 추위를 무색하게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팔레스타인 땅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지역 가자지구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가 너무나 또렷해 가슴이 미어질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이미 380여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수천 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합니다.

그중에는 전쟁과 무관한 어린이와 여성들, 그리고 시민들이 많습니다. 부상자들은 대개 복합 장기 손상을 입었는데, 마취제도 없이 수술을 받아야 할 지경이랍니다. 치료약도 턱없이 부족한 상태라 가자 지구는 그야말로 생지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오느니 한숨이고, 눈물입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다’는 전도자의 말이 실감납니다.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 해는 여전히 뜨고, 또 여전히 져서, 제자리로 돌아가며, 거기에서 다시 떠오른다. ”(전1:4-5)

어찌 보면 무심한 세상에서 차마 무심할 수 없는 성정을 타고난 인간의 삶이 참 가엾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절망의 어둠이 몰려와도, 전쟁의 폭풍이 불어와도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엄정함입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어느 날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여汝보세요. 평생을 피곤하게 가시는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것이 마음에 있는데 표시가 잘 안 되네요. 오늘 보니까 피나무로 만든 목기가 있어 들고 왔어요. 마음에 드실지. 이 목기가 겉에 수없이 파인 비늘을 통해 목기가 되었듯이 당신 또한 수많은 고통을 넘기며 한 그릇을 이루어가는 것 같아요. ”

그래요. 나무 한 토막이 수없는 끌질로 파인 비늘을 통해 목기가 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께로 데려가는 길 안내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어떠하든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추구하는 사람답게 살아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 해를 갈무리하면서 나는 바울 사도의 경험이 반영된 경구 하나를 마음에 새겨두고 싶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갈6:9)

 울면서라도 가야 할 길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날을 예감하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교훈의 말씀입니다. 그는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생명과 번영’의 길, 그리고 ‘죽음과 파멸’의 길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어느 길로 가시렵니까 물으나마나한 질문입니다. 하지만 선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생명과 번영의 길은 평탄해 보이지만 어떤 때는 가시밭길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죽음과 파멸의 길은 대개 평탄한 길처럼 보입니다. 눈이 밝지 않은 사람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운전자들은 요즘 내비게이션이 참 똑똑하다고 말하더군요. 내비게이션만 있으면 낯선 곳을 찾아가는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생명과 번영의 길로 인도할 내비게이션은 유감스럽지만 없습니다.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우리는 어느 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손에는 지도가 들려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체득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때가 많습니다. 지도를 잘못 볼 때도 있고, 지름길이다 싶어 접어든 길에서 길을 잃는 경우도 있고, 무턱대고 남을 따라가다가 낭패를 만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지향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푯대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지향이 분명하면 삶은 의외로 단순해집니다. 옛 사람은 擇善固執과 主1無適을 아름다운 삶의 비결이라 말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려내 그것을 굳게 지키는 것이 택선고집이고, 내 삶을 관통할 하나의 주인을 정했으면 이리저리 옮기지 않는 것이 주일무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당신의 양식으로 삼으셨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당신 삶의 밑절미로 삼으셨습니다.

모세는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르는 것을 생명의 길이라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길을 걷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전도자는 “사람들은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살다가 결국에는 죽고 만다”(전9:3b)고 말합니다. 참 우울한 진단입니다.

오늘의 현실을 가리켜 팔꿈치사회(Ellenbogengesellschaft)라고 지칭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면서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치열한 경쟁사회라는 말입니다. 몇 해 전 동계올림픽에서 보았던 광경이 떠오르시나요 과장된 몸짓으로 심판들을 속여 승리를 가로챈 미국의 어느 쇼트트랙 선수야말로 팔꿈치사회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 인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누군가의 팔꿈치에 찔려 쓰러진 사람들 곁에 다가가 그들을 위로하고, 회복을 돕고, 기다려주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우심을 상기시키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팔꿈치사회에서 뒤쳐진 이들 곁에 다가가 일으켜 세워주고, 함께 길을 걷는 이들, 곧 이 냉랭한 세상에 우정과 환대의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이야말로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

우리가 가지 말아야 할 길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상의 길입니다. 주님은 일찍이 그의 백성들에게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출20:3)고 하셨습니다. 이 계명을 유일신론에 대한 진술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성서가 기록될 때까지도 유일신 사상은 아직 인류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계명은 다신론적인 상황을 반영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신은 대개 어느 지역을 지배하거나, 어떤 역할을 관장하는 존재로 떠받들려졌습니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섬기는 신들이 달랐던 것이지요.

그리스의 신화를 보더라도 신들은 저마다 주특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혜의 신, 전쟁의 신, 바다의 신, 대장장이 신, 곡물의 신, 출산의 신, 죽음의 신…. 하나님이 당신 백성들에게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질투 때문일까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계명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소개와 관련시켜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출20:2)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내시는 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착취로 신음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고,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말입니다. 그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에 관심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토라의 백성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런데 토라의 핵심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것이 곧 거룩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의 모든 가치를 경제논리로 환원해버리는 살벌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돈벌이’ 귀신이 우리의 의식을 옥죄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도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생명이 파괴되고, 우정이 파괴되고, 공동체가 파괴되어도 주머니만 넉넉하면 된다는 생각은 사탄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갑니까

 생명을 택하라

하나님에게서 온 생각은 행복은 공생공락(conviviality)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탄에게서 온 생각은 행복은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생각은 가엾게 여기고, 기다려 주고, 일으켜주고, 벗이 되어 주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탄에게서 온 생각은 자비심이나 사랑, 우정 따위는 한가한 자들의 말장난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생각은 가장 여린 생명 하나도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사탄에게서 온 생각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니 자연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생각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늘 초월을 향해 자기를 열어놓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사탄에게서 온 생각은 잘 살기 위해서는 쓸데없는 데 한눈팔지 말고 죽기 살기로 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생각은 나눔, 돌봄, 섬김이 가장 아름다운 가치라고 말합니다.

사탄에게서 온 생각은 독점, 무정함, 지배가 가장 귀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생각은 전쟁과 폭력과 학대와 착취를 버리고, 상대방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 참 평화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사탄에게서 온 생각은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 평화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생각은 우리와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탄에게서 온 생각은 우리와 언어와 피부색과 종교가 다른 사람들은 위험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한 해에도 우리는 수시로 이런 두 가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될 것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시렵니까 모세는 ‘생명을 택하라’고 권고합니다. 이때의 생명은 물론 여호와 하나님 혹은 여호와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판단이 쉽지 않을 때는 어느 쪽이 ‘생명’을 살리는 일에 가까울까 생각해보면 가야 할 길이 보일 겁니다.

영적인 담대함을 회복하라

유대교 철학자인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은 1963년 6월 16일에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흑백 인종 차별 문제로 내홍을 겪고 있던 미국 사회를 정화해야 할 역사적 책임을 지고 있던 대통령에게 그는 “흑인들을 멸시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자격을 잃는 것”이라면서, 지금은 도덕적 비상사태를 선언할 때라고 말합니다. 그는 영적인 담대함(spiritual audacity)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들입니다. 주눅 들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길을 따라 걷는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그 길을 택할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 것입니다.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당신들이 잘 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또 당신들이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주 당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16)

물론 새해에도 삶은 여전히 힘겨울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을 지키시고, 그들과 동행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으며 우리는 뚜벅뚜벅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신앙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생명을 택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벽을 넘는 담쟁이의 보폭으로 오늘도 내일도 생명의 길을 택하고, 스스로 생명의 길이 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3.착하고 충성된 종아

마25:14-13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흔히들 하는 이야기가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 책의 내용을 보면, 노인이 바다에서 고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합니다. 그러면서 무엇 때문에 이 고기를 잡아야 하며 이 고기가 자신과는 무슨 원수가 있기에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 가만히 생각을 해 봅니다. 고기는 노인 자신을 원수인 줄로 생각하겠지만 노인은 사실 그 고기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노인은 힘도 없고, 고기를 잡아도 노인이 먹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노인은 고기가 걸렸으니까 그 고기를 잡았습니다. 굉장히 큰 고기였습니다. 그것을 끌고 뭍으로 나올 때 상어 떼들이 와서 다 뜯어먹고 노인은 지쳐 쓰러지고 맙니다. 결과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모르면 아무리 부지런히 살고 열심히 살아도 이와 같이 결과는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올 한해를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어떤 때는 꼭 노인과 바다 속의 주인공처럼 그 공허함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서 해야할 영적 결산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영적 결산은 노인의 빈 고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칭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시간 속에서 또 어떤 결산을 주님께 드리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교회의 목사로서 한해 교회의 영적 결산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우리교회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좋은 영적 결실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를 새롭게 믿어서 구원에 이르신 분들이 여러분이 함께 하고 있고, 성도들의 신앙은 다른 어떤 해보다도 더욱 성장하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 신앙의 성장이 즐겁고, 좋은 일들로 인한 성장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어렵고 힘든 일들을 통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교회도 여러 모양으로 성장한 아름다운 열매를 주님께 드리게 되어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바로 이런 결산의 내용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을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맡겨주시는 주인.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14, 15절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뭐라고 하였습니까 "각각 그 재능대로 각각 그 재능대로" 맡겼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은 종들의 재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적절하게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긴 것입니다. 종들이 맡을 수 있을 만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맡긴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차이가 아니고 재능의 차이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봅니다. 남자와 여자는 평등합니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남자가 할 일이 따로 있고 여자가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똑같이 생명은 귀중합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고 어른이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어린아이에게 어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맡긴다면 공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공평한 것입니다. 주인은 종들의 재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종들의 재능에 맞게 일감을 허락한 것입니다.

오늘 여기의 주인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시는 분은 없습니다. 시편139편에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 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4)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고 계신 그분께서 내게 딱 맞는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늘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누구에게는 더 많이, 누구에게는 더 적 게가 아니라, 모든 것에 공평하게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재능을,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음악을 하는 재능을, 또 어떤 이들에게는 물질을 관리하는 재능을 주시기도 하셧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모든 면에서 다재 다능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못하는 것이 없지만 어떤 분야에도 프로이지 않습니다. 모든 면에서 아마추어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하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한가지 일에는 프로이신 분들이 있습니다. 집에서는 못 하나도 못박지만 자기의 일에는 어떤 사람도 따라오지 못하는 프로적인 실력을 가지신분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합니다. 내가 못하는 것을 저 사람은 잘한다고 부러워합니다. 여러분! 상대방이 잘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지 마시고, 내게 없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으로 인하여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상대방이 나를 보고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인하여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공평하게 저와 여러분에게 맞는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오늘 주인이 자신의 종들의 능력에 맞게 달란트를 나누어줬다는 것은 공평한 주인입니다. 잘하는 사람에게는 많이, 서투른 사람에게는 적게, 맡게 주었습니다. 서로 시기할 것이 아니라 문제는 내게 맡겨준 것을 내가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2. 착하고 충성스런 종.

오늘 주인이 3명의 종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서 5 달란트, 2 달란트, 한 달란트를 나누어주었습니다.

먼저 5달란트를 받은 종입니다. 그의 능력이 인정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만한 것을 맡겨주어도 충분히 감당 할 수 있으리라는 주인의 판단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교회에서는 어떤 이에게는 좀 무리하다 할 정도의 일들을 맡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목사님은 저 사람에게만 일을 많이 시킬까 하면서 생각이 들 정도로 일을 많이 하시는 분들이 교회에는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언제나 교회에 오기를 즐겨 하시는 분들입니다.

이제 연초가 되면 교회에는 청지기들을 임명합니다. 재직들을 임명하고, 또 여러 직분들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는 각 전도회의 회장으로, 총무로, 회계로, 또 반주자로, 성가대로, 여러 가지 직분들이 주어집니다. 그 직분들을 맡길 때에 특별히 재직을 세울 때에 목사는 심사숙고를 합니다. 이분이 과연 감당할 수 있는가!. 그만한 믿음이 있는가! 또 믿음만이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는 환경들이 되어져 있는가!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맡깁니다. 오늘 주인이 한 종에게 5달란트를 맡겼을 때에는 그 능력이 인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이 받았다는 것은 인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일과 또 중요한 직분들이 주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인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그 직분을 맡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정받을 때에 충성합니다.

그러므로 그 종은 충성했습니다.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결과로 5달란트를 더 남기는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2달란트 받은 종입니다. 저는 이 두달란트 받은 종이 훌륭하다고 봅니다. 왜요 분명 그는 5달란트 받은 사람보다도 반도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다섯 달란트 받은 동료와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두달란트를 가지고 정말로 열심을 다했습니다. 이 모습이 휼륭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모든 성도들이 바로 이 종처럼, 성실하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 갖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종은 평범한 종입니다. 5달란트를 받은 종은 뛰어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두 달란트 받은 종은 평범한 종입니다.

이 땅에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천재는 어쩌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땅의 대부분의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평범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두들 특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보고, 아이가 뭐 조금이라도 잘하는 것 같으면 금방 착각 속에 들어갑니다. 우리아이 천재 같은데, 어떻게 하나! 하면서 그때부터 아이를 천재 다루듯 합니다. 금방 아이를 영재교육에 보내고,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여러분 천잰데 왜 영재학교에 보냅니까 어렸을 때에 그 천재들이 커서도 천재입니까 그렇게 난리를 친 아이들일수록 아이가 커가면 커갈수록 평범하게 성장해갑니다. 여러분 평범한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평범함이 우리에게는 은혜입니다. 천재아이를 양육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그 뒷바라지하려면! 오늘 여기 있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다 평범하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종은 그 평범함 속에서 성실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평범 속에서의 성실을 주인은 칭찬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라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가장 바라는 모습이 바로 이 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평범함의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이 평범함 속에 성실하시길 바랍니다.

3. 악하고 게으른 종

그런데 오늘 문제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종입니다. 주인은 이 종을 잘 알았습니다. 능력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을 맡긴 것입니다. 비교해서 적게 맡긴 것이 아니라. 능력을 봐서 맡겼습니다. 이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맡겼습니다. 만약에 그를 못 믿었으면 아 에 맡기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금만 마음을 써도 감당할 수 있을 분량을 맡겨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그 주인의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그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편한 대로했습니다. 자기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만약에 장사를 했다가 잘못해서 이것 마져 까먹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위험부담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제일 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것도 그에게는 한낮 핑개에 불과하고 말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땅속에 묻어놨습니다. 그리고는 그 맡겨진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결산 날에 주인이 화를 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순종입니다. 그것은 악입니다. 그것은 게으름입니다.

하다가 실수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조선일보에 이상준이라는 학생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올해 18살의 이상준군은 한국의 민족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올해 미국 하버드대학에 합격했습니다. 이군은 1600점 만점인 SAT(미국 대입수학능력시험)에서 1520점을 획득했습니다.

미국으로 유학 가기엔 집안 형편이 어려운 이군은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에서 향후 4년간 학비와 생활비 전액 지원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는 이건희 재단에 제출한 에세이에서 “집안이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해질 수는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 기자가 "발명와 에디슨에 대한 소감을 물었는데 그에 대한 대답이 감동적입니다.

"그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수천번의 실험을 했을 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에디슨은 수천번의 ‘실패’, 아니 ‘실험’을 한 뒤에도 절망하지 않았는데 아직 젊은 저는 절망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해질 수는 없다. 초가집에서도 알프스산맥을 넘는 비전을 키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했습니다. 이 한번의 실패는 곧 자기주인에게 쫒겨 나는 것이라, 아니, 죽음이라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만약 그랬다면, 주인의 말처럼, 은행에라도 넣어두어서 이자라도 받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최소한의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인의 성격을 볼 때에 만약에 그 종이 한 달란트를 다 까먹었다 해도, 만약 그것이 성실하게 무엇인가 하려고 했다가 망한 것이라면, 주인은 충분히 그의 성실함을 칭찬했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왜야 하면 주인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을 더 남긴 종들에게 한말을 보시길 바랍니다. 주인의 관심은 얼마나 남겼구나! 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충성"에 있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책망은 충성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의 있던 것까지도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이들에게 한 달란트를 맡길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함께 일할 수 있고, 또 그의 능력에 맞게,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마음으로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늘 그런 생각으로 사역을 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저 역시 주님께 이런 칭찬을 듣고 싶습니다.

그 마음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올 한해동안 우리 주님께서 이 결산의 날에 송년주일에 여러분을 향하여 주님의 피묻은 오른손을 내밀어 여러분의 손을 잡아 주시면서, "참,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내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그리고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니라" 이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올해의 충성으로 내년 06년도에는 "내가 많은 것으로 우리 교회에게, 성도들에게, 집사님들에게 맡겨주시는"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14.우리가 버리고 갈 것들

엡4:25-32

 

최근에 마음이 그다지 편하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분노한 일도 있었고, 마땅히 회복되어야 할 것들이 해를 넘기지 않고 모두 회복되었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그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 안색이 어둡기도 했을 것입니다.

웃음도 많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교우들에게 따뜻한 눈길도 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연히 교우들의 마음도 무거웠으리라 생각합니다.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하며 사과드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적 한파로 움츠려들고 시름이 쌓일 교우들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러던 차 아주 최근에 뭔가 억눌려있던 마음을 풀어주고 여유롭게 해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몇 편의 시를 읽다가 문득 제 자신을 돌아보며 새삼 깨달음을 가진 것입니다.

이어령, 김현승, 정지용, 조병화 등 시인들의 주옥같은 시 열한 편이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정기총회에서 시들을 나눈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한나여전도회가 그렇게 멋진 여전도회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그 시 모음집을 제 책상에 놓고 가신 분께 정말 감사를 드리며 한나여전도회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하나같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였지만 특히 제 눈길과 마음을 붙든 시 가운데 두 편을 소개합니다.

그 첫 번째는 김시현 시인의 이라는 시입니다:

낙엽은 미래의 동경도 없고

슬픔과 희열에 넘치는 감정도 없다

그러나 세상을 터득한 철학이 있고

애련을 놓아버린 평화가 있다

이제 어디에 떨어진다 해도 불만이 없다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돌담 밑 그늘진 곳도 좋고

양지 볕 따스한 곳도 좋다

어디인들 쉴 곳이 아니랴

하늘하늘 춤추듯이 내려오는 낙엽에는

그냥 자연이 있을 뿐이다

이 시를 다 읽은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하늘하늘 아무데나 떨어져 앉는 낙엽에서 애련을 놓아버린 평화를 보고 자연을 읽는 그 시인의 감수성과 통찰력이 부러웠습니다. 나도 한 때는 그런 시인의 마음을 품고 다닌다고 자부했었는데 그 마음이 어느새 이렇게 무뎌지고 어두워졌는가 하는 반성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세상을 터득한 철학과 애련을 놓아버린 평화와 자연의 순리를 말없이 보여주는 한 닢의 낙엽보다 못한 하루하루를 쫓기듯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도 했습니다. 한 닢의 낙엽의 초연함과 한 시인의 달관이 나의 것이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낙엽을 만드시고 거기서 인생과 자연을 관조하는 시선을 한 시인에게 허락하시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자기성찰을 하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한 편의 시도 엄청난 위로와 격려를 주었습니다. 이란 시인데 그 저자가 김동익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김동익 목사님이신지 아니면 동명이인의 시인인지 확인을 못했지만 그 시의 저자가 누구라 하더라도 이 시는 목회의 고통을 다 체험하고 달관의 경지에 오른 분의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목회자들이 좌우명처럼 가슴에 새겨야 할 이 시를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오해를 받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지요.

그래도 변명하지 말고 그대로 가세요.

상대가 밉고 악마같이 보이더라도

바보처럼 멍청이처럼 그냥 사세요.

당신이 착한 일을 하고 의로운 일을 할 때

그것을 위선이다. 나쁘다. 고 욕을 해도

그래도 이해하고 용서하세요.

피곤해도 정의의 걸음을 중단하지 마시고

사랑의 실천도 멈추지 마세요.

따질 일이 있더라도

입 막고

눈 막고

귀도 막고 사랑하세요.

말없이 끌어안고 사랑해 주세요.

사랑은 차별하지 않고

사랑은 조건 없이 주는 겁니다.

사랑은 교환조건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미워도 다시 한 번

그런 마음으로 사랑하세요.

사랑을 무슨 열매 따는 것처럼

장사하듯이 생각하지 마시고

나무를 가꾸듯이

멀리보고 인내하며 사랑을 가꾸세요.

이 시들을 읽고 나서 이 시의 제목대로 깊이 있는 사랑을 하지 못했구나 하는 반성을 했습니다.

분노하게 하는 이들에게 보냈던 경멸의 시선이 떠올라 부끄러웠습니다.

이 해가 가기 전에 떨쳐버려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서 부드러운 미소를 받아보지 못하신 모든 분께 사과를 드립니다.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보다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실 어디가나 제 인상을 얘기하는 사람들로부터 해맑은 미소라는 말을 제일 많이 들어왔었는데 다시 그 해맑은 미소를 되찾도록 힘쓰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부임 당시에 비해 머리가 많이 세어서 마음이 여린 교우들에게 무고한 죄책감을 안겨주는데 해맑은 미소까지 빼앗았다는 비난을 받게 할 수는 없다고 다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가 바로 서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일치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첫 절부터 끝 절까지가 하나하나 실질적인 권면들입니다.

다시 귀담아 들어 봅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여기서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고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면 교회 안에서의 평화와 일치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무엇을 버리라 합니까 거짓을 버리라 합니다. 도둑질을 버리라 합니다. 더러운 말을 버리라 합니다.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정말로 교회 안에서 평화를 짓밟고 일치를 깨뜨리는 행동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이런 모습들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 해를 넘기지 말고 다 버리고 갈 수 있기를 빕니다.

사도 바울은 특히 분노를 버릴 것을 반복해서 권면합니다. 26-27절을 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분노를 품고 지내는 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어 우리로 죄를 범하고 말게 하는 일임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아들 가운데 하나인 가인의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 4:1-8에 보면 가인과 그의 아우 아벨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 치는 자였습니다. 어느 날 두 형제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못하고 그의 아우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분노하고 안색이 변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게 됨을 봅니다. 즉 분노에 사로잡히면 자칫하면 죄를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죄 짓게 만드는 좋은 기회와 수단의 하나가 바로 분노라는 사실입니다. 가인의 부모를 유혹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들어 불순종하게 했던 사탄은 그들의 아들에게서는 분노를 사용하여 끔찍한 범죄를 자행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도처에서 분노를 경계하며 분노를 다스릴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잠22:24-25에서는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 하고,

잠29:22에서는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리라. (마5:22) 하셨습니다.

본문 31절에서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함으로써 다시 한 번 노함과 분냄을 언급했습니다. 노함과 분냄은 2009년을 맞기 전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버리고 가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는 버리라고 하는 부정적 권면과 함께 지키라고 하는 긍정적 권면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을 지킬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까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본문 25절).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본문 28절).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는 것입니다(본문 29절).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본문 32절). 그 일을 힘쓰면 모든 교회는 평화로움과 하나 됨을 넘어서서 진실하고 사랑이 넘치며 은혜로운 교회와 개개인의 삶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마지막 주일입니다. 새해로 넘어가기 전에 버릴 것은 다 버리고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킬 것은 더 열심히 지키는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15.야곱의 인생 결산

창47:7-10

 

전순영의《시간을 갉아먹는 누에》중에서란 시가 있습니다. 먹지 않으려고/ 입을 꼭 다물고 손을 내저어도 얼굴을 돌려도/ 어느새 내 입속으로 기어들어와/ 목구멍으로 스르르 넘어가 버리는 시간. / 오늘도 나는 누에가 뽕잎을 먹듯 / 사각사각 시간을 갉아먹고 있다. / 쭉쭉 뻗어나간 열두 가지에/ 너울너울 매달린 삼백예순 이파리 다 먹어치우고/ 이제 다섯 잎이 남아 있다. / 퍼렇게 얼어붙은 하늘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어느덧 한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네 잎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를 애태우며 웃고 울렸던 2008년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주일’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마지막’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끝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완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산의 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마지막 때에 관한 기록이 300번 이상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가 연구하고 보니까 예수님의 보혈에 관한 기록보다도 마지막 때에 관한 기록이 더 많다고 얘기했습니다.

돌아보면 한 해의 끝자락이라는 종착역에 서 있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마음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뜻한 바를 이루어 새해를 기대로 맞는 분도 있겠지만, 웃음보다는 눈물이 많았던 분들이나 힘든 걸음을 사력을 다해서 걸었던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가정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을 지나면서도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말 못한 채 하나님께만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눈물진 교우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해를 정리하면서 매번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때마다 자신을 돌아볼 때 후회도 해보고, 또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도 해보지만, 뭐, 잘 바뀌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며칠 전에 우리나라의 교수들이 해마다 발표하는 사자성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올해 사자성어가 '호질기의(護疾忌醫)'로 의견을 모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병이 있음에도 의사한테 보여 치료받기를 꺼린다'는 뜻으로 과실이 있으면서도 남에게 충고받기 싫어함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잘못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바로잡아주는 것을 기뻐하지 않지 않습니까 마치 자기 몸을 망가지는데도 불구하고 남의 이야기를 들을려 하지도 않고, 깨닫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참 우리는 잘 안 변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인생관을 바꾸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인생관이 처음 어떻게 자리를 잡고 자신의 사고와 감정, 삶의 태도를 결정하게 되었는지는 각각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고정된 자신의 인생관을 어느 순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야곱을 통해 그의 인생관이 바뀌게 되는 대전환을 보게 됩니다. 곧 사고의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생이란 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무언가 있는 것 같지만 없는 것이나 다름없구나. ' '내 손에 있는 재물, 내가 쌓아놓은 부귀와 보화, 사실 이것들이 내 손에 있지만 언제 내 손을 떠날는지 모르는 것들이구나. '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야곱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을 보면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야곱이 애굽 왕 앞에서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나이가 얼마냐" 왜 바로는 처음 만난 야곱에게 나이를 물었을까요 이름이 무엇이냐 어디서 왔느냐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많은 질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애굽 왕 바로는 야곱을 보자마자 대뜸 “네 나이가 얼마냐”라고 묻습니다. 아마도 야곱의 모습이 나이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같습니다. 그의 외모에 산전수전을 겪어온 인생의 자국이 거칠게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네 나이가 얼마냐” 라고 물은 것이죠.

그때 야곱이 대답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험악한 세월'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험악한 세월이란 한 마디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질문과 대답 속에는 야곱의 인생을 총망라하는 함축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제 이 한해의 끝에선 우리에게 주님은 다시 동일한 물음을 던질 수 있지 않습니까 “네 나이가 얼마냐” 이것은 나의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인생의 이력서를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이력서에 어떤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인생의 계획과 뜻을 품고 있습니까 오늘 아침 여러분은 이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어떤 인생의 이력서를 하나님 앞에 펼쳐 보이시겠습니까사랑하는 여러분!

히 11:21절에 보면 야곱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내용이 달랐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었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믿었습니다. 나아가서 믿음의 내용을 보자면 '세상에 내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라는 믿음과 ‘노력해야 모든 것이 얻어지고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 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형 에서의 장자권을 사기를 쳐서 빼앗았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아내를 얻기 위해서 무려 14년간이나 노력해서 이루어 내었습니다. 삼촌 라반으로 부터 많은 재산을 빼돌렸습니다. 한번 목표를 정해놓으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뒤로 물러선 적이 없는 야곱, 그의 삶에 패배와 불가능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목적과 수단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목적을 이루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은 철저하게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얍복강 나루터의 사건입니다. 이제 20년 만에 자신이 도망 나왔던 고향으로 가족과 그 동안 고생해서 모은 물질을 가지고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자기 형 에서가 이를 갈고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큰 고민에 빠집니다. 어떻게든 이 문제를 풀어보고자 해도 풀리지 않습니다. 고독과 번민 가운데 얍복강 강가에 있을 때에 천사와 밤새 씨름합니다. 그때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위골되게 만듭니다. 야곱은 더 이상 자기 힘으로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자기 자신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이 처절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마 이 얍복강 나루터는 그의 생애에 자신을 돌아보는 아주 중요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배고픈 형 에서를 꼬드겨서 떡과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가로챈 것이며, 형이 아버지께 드릴 별미를 만들기 위해서 사냥을 하러간 사이에 어머니와 모의해서 형 에서처럼 꾸며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것이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일들이 생각 났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던 자신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노숙을 하면서 밧단아람에 있는 삼촌의 집에 가서 아내 라헬을 얻기 위해 무려 14년을 보낸 그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을 것입니다. 남을 속이는 일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그 였지만, 그의 삼촌 라반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습니다. 20여년이나 죽도록 고생하고 이제 고향으로 가던 길목에서 천사와 밤새 씨름하다 그가 얻은 것은 평생을 불구자로 살아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얍복강에서 일어섰지만, 그 후에도 야곱은 숙곳이란 곳에서 사랑하는 외동딸 디나가 세겜 추장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그것을 본 아들들이 세겜의 남자들을 죽이는 살인극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는 사실이 야곱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산다는 의미를 상실한 채 인생을 덧없이 보내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흉년을 만나게 되고, 20년 전에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지금 야곱은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안되는 상황 속에서 애굽으로 가족과 함께 이민을 온 상황입니다. 그의 인생 이력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파란만장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바로 왕에게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라고 하고 또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 말은 자신의 삶의 방법에 대한 후회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임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던 후회감입니다. 무엇이 나그네입니까 정처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얼마 동안 살든지 우리는 모두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나그네에게는 '내 것'에 대한 집착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 하더라도 언젠가 훌훌 털고 떠나가야 합니다. 아름다운 경치가 장관을 이루는 곳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천년 만년 살 수 없습니다. 금새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누군가가 비유했던 것처럼, 내가 사는 이땅은 여관방에 불과합니다. 나그네인 우리 인생은 짤막한 인생을 나그네로 살다가 언젠가는 여관방을 비워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야곱이 자신의 삶을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했지만, 그렇게 부끄러운 자기의 생애 속에 보이지 않게 흐르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입니다. 자신은 언제나 부끄럽게 살아왔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신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늘 보호해 주시고 간섭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형 에서의 살기(殺氣)를 피해서 외갓집으로 도망가던 첫날밤에 하나님께서 야곱의 꿈에 나타나셔서 창 28:15절에 보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를 지켜 주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처갓집 식구들이 야곱을 시기해서 도저히 그곳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가 없게 되었을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창 31:13절에 "너는 이제 이곳을 떠나 네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해 주셨습니다.

에서가 군사 400명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할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야곱을 얍복강가에서 만나주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모든 일에 간섭하시고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건 야곱이 잘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 창세기를 주의 깊게 읽어보세요. 야곱이 하나님 마음에 들도록 살았던 적이 얼마나 되나 거의 없습니다. 야곱은 언제나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자기 욕심에 이끌려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늘 사랑하셨고, 야곱의 든든한 보호자요 후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130년의 세월을 살았던 지난날들을 가만히 돌이켜보니, 험악한 삶이긴 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한번도 자신을 떠나있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10절에 보면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고대 근동 지방의 팔레스틴 전 지역을 다스리는 애굽 왕을 오히려 보잘 것 없는 늙은이요 외국에서 이민 온 야곱이 축복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축복할 수 있습니까 가진 것이 더 많고 풍성하다고 믿을 때에 남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가난한 사람입니다. 바로에게 땅을 얻어야 하고 양식도 얻어야 살아갈 수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 복의 근원이시며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자신의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일국의 왕을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야곱은 받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빼앗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빼앗고 취하고 모으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야곱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어느틈에 서서히 주는 자로 변신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년에 이르자 그는 모든 것을 베푸는 자, 나누는 삶으로 살아갑니다. 이웃들의 도움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다른 어떤 때보다 긴급하게 요청되고 필요한 그 순간에 오히려 축복을 바꿀 수 있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람은 별 수 없이 모든 것을 놓고 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진실을 야곱은 인생의 황혼에 들어서서 확연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창 49장을 보시면 야곱이 죽음 직전에 최후로 한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녀들을 축복하는 일입니다. 창 49:1절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 마지막 순간까지 자녀들을 축복합니다. 다 주고 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끝까지 움켜쥐고 놓치를 못하는 비극적인 인생을 종종 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태어납니다. 무엇인가를 붙잡아 보려는 욕망 인생의 출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을 떠나 갈 때 두 주먹을 쫙 펴고 빈손으로 떠나갑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는 정복할 땅에 없었다는 알렉산더 대제는 이 세상을 떠나가기 전 유명한 유언을 남깁니다. “내가 들어갈 관에는 양쪽에 구멍을 파서 내 두 팔, 두 손을 관 밖으로 나가게 하라”고 말입니다. 무슨 뜻 입니까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간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평생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움켜쥐고, 무엇인가를 이 땅에 남기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입니까

이 진실을 빨리 깨닫는 자가 얼마나 지혜로운 인생인지요 인생의 말년에 아낌없이 손을 펴서 남을 축복하고, 나누어주고, 그래서 깃털같은 가벼운 심정으로 하나님이 그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를 향해 떠나가는 나그네 야곱. ‘험악한 세월을 보낸다’ 고 고백한 그는 비록 130살을 살아 왔지만, 내 인생, 내 방법, 내 수단으로 이 나이까지 살았지만, 이것이 인생의 참된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이 고백을 지금 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달라졌습니다. 이제 이 한해 마지막 달 마지막 주간에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난 1년 헐떡거리며 달려온 열매가 무엇입니까 부지런히 달려온 것 같은데 주머니를 뒤져보니 있어야 할 열매가 없지는 않습니까 급한 것들 때문에 소중한 것을 놓친 것은 없습니까 현실적인 것들 때문에 영원한 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땅의 것을 얻느라 하늘 상급을 잃지 마십시오. 성공 때문에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이웃을 버리지 마십시오. 세상 때문에 교회와 천국을 상실하며 살지 마십시오. 이젠 주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할 때입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니 내 재주로 산 것만 같습니다. 내가 땀 흘리면 잘 살줄 알았지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오늘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거둬 가시면 쌓아 놓은 것들이 모두 무너져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 인생을 오늘까지 지켜주셨고 내일도 동행하시며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분의 은혜하나로 우리가 살아있습니다. 묻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셨던 그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 여러분의 변화를 위해서 여러분의 삶속에 오늘도 뛰어들어 일하시는 이 모습을 보십니까

시146:5절에 보면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의 축복, 빛나는 인생의 황혼, 이것은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야곱을 복된 인생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야곱을 포기치 아니하시고 끝까지 붙드시고 새롭게 일으켜주셨던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인생, 지렁이처럼 땅을 기어 다니며 미물처럼 의미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던 야곱을 돌아보신 그 하나님이 지금 내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야곱을 통해서 나의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을 부끄러워하지도 싫어버리지도 않으마 말씀하시며 야곱을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이 오늘도 내 안에서 역사하시기에 나의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을 정말 의지합니까 왜 그렇게 변하지 않으시죠 교회출입이 몇 년인데 왜 그렇게 변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성격이, 여러분의 삶의 모습이, 왜 그렇게 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우리는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16.하나님 평강을 어떻게 체험할까?

빌4:4-7

 

한 해가 기울어져 갑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한 해였습니까

새해에는 어떤 점을 더욱 Upgrade 하기 원하십니까

2015년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을 좀더 풍성히 누리는 한 해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을까요

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때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한다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박국3:17-1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이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毬遊기뻐하라 (4)

감옥에 있는 바울 사도가 감옥 밖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쁨을 전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몸은 비록 감옥 안에 있을지라도, 영혼은 여호와 안에 거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처럼 여호와로 인하여 기쁨이 충만함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누리시는 한 새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을까요

2. 관용에 넘칠 때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

금년 한 해를 돌이켜 보면서 혹시 교회에 평강이 흔들렸던 적은 없었습니까 우리들의 마음이 많이 좁아져 있던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관용이 넘칠 때, 교회에 평강이 넘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평강은 관용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한 여론 조사에서 결혼 상대의 가장 이상적인 조건이 무엇이냐 물었는데 71%가 '성격'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어떤 성격을 원하느냐물었는데 너그러운 마음이라 하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 큰 핍박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수근거리고, 고발하고, 괴롭히고, 죽음에까지 넘겨주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을 기독교인들은 위하여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주고 품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몰라서 그 무지한 일을 하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관용이라 하였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소화기관 중 우유 안에 알부민이 있는데 그대로 몸에 주사하면 위험하답니다. 그런데 그것이 위 안에 들어가면 우리 몸 안에서 잘 소화되어 조화를 이룬답니다.

부드럽게 하는 관용의 장치를 위가 가지고 있답니다.

위의 기능과 같이, 자기와 다른 사람을 품는 것이 관용입니다. 자기에게 없는 것에 대한 애정이 관용입니다. 맞지 않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끌어안아주는 것이 관용(tolerance)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관용하는 것 이상으로 가까운 사람일수록 관용이 힘들어 보입니다.

교인간에 관용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관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 한 마디 나누겠습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노년부부가 나와 단어 알아맞추기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할아버지에게 주어진 단어는 '천생연분'이란 단어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설명합니다. "나와 자네 사이!"

그런데 할머니가 즉각적으로 무엇이라고 대답한 줄 아십니까

"웬수!"

할아버지가 다시 말합니다. "아니 두마디"

할머니가 대답합니다. "평생 웬수!"

농담이겠지요. 그렇지만 뼈가 있는 농담입니다.

빌립보 교회에서는 유오디아와 순두개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였습니다. 관용이 부족하였다는 것이지요.

언제 우리는 관용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날이 가깝다는 인식을 가질 때입니다. 그날에 주님 앞에 설 때를 생각하면 우리는 마음을 넓힐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말씀하기를 대선에 나온 후보들을 보니까, 달걀이 날아와도 그것을 씻으면서 웃는데요. 대통령이 되기 위해 관용합니다. 우리는 대통령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입니다.

대사의식을 가지고, 본국에 돌아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가서 관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는 평강을 주십니다.

가정에서 관용하는 자가 되어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십니다.

교회에서 교우간에 관용을 실천해 보세요. 교회에 평강을 주실 줄 믿습니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을까요

3. 좀더 감사함으로 기도할 때입니다.

내 인생에 찾아오셔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해볼 때, 많이 감사합니다. 하지만 금년도 돌이켜 보면, 감사하며 기도하기보다 원망하고 불평하며 사람들 앞에서 투덜거리는 시간이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 고국에 현존하는 슬픈 모습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OECD 국가 중 자살율 1위,

이혼율 2위,

유흥업소 종사자 200만명,

강성노조 1위,

저출산율 1위!"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하십니까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헉슬리는 노년에 시력을 잃었습니다. (우리 최화순 권사님께서 노년에 시력과 청력을 잃으셔서 안타깝습니다만)

어느 추운 겨울 날, 그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배운 점자 실력으로 점자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시력을 잃었지만 그런 따뜻한 곳에서 책을 읽게 되었음을 인하여 감사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6)

아직 우리는 이런 복된 경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 목적을 향해 새해에도 달려갑시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빌립보서 1:6

감사는 점염의 효과가 있습니다.

'나비효과 '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나비효과의 본질은 작은 사물이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란 무엇인가 1961년 미국의 저명한 기상학자인 에드워드 로렌츠(E. Lorentz)는 기상관측 실험을 하던 중에 초기 값의 미세한 차이가 엄청난 기상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수년간의 연구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하나의 이론으로 확립하는데 성공했다.

1972년 12월 29일 워싱턴에서 개최한 미국 과학발전학회에서 로렌츠는 예측 불가성(브라질에서 서식하는 나비의 날개 짓으로 인해 텍사스 주에 회오리 바람이 발생할 수 있는가)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마존 유역의 열대 우림지역에 사는 나비가 날개 짓을 하면, 그로부터 2주 후 텍사스에서 회오리바람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나비의 반복적인 날개 운동은 주변 공기의 움직임에 미세한 변화를 가져오는데 이것이 작고 약한 기류를 형성한다. 이 기류는 대기에 변화를 주며, 대기는 변화에 따라 연속적으로 반응한다.

결국 이러한 반응들이 지구의 기상 현상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최후에는 보다 세력이 확장된 회오리바람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었다. 로렌츠의 이러한 발표는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이때부터 ‘나비효과 이론’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란 초기의 작은 원인이 결국은 커다란 결과로 발전해 갈 수 있음을 나타낸다. 나비효과의 본질은 작은 사물이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나비의 작은 날개 짓은 우리의 두뇌에 사고의 회오리바람을 가져와 엄청난 변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비와 같이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원망하고 불평하면 그 파급효과가 크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할지라도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삶을 살면, 공동체에 좋은 파급효과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어떤 큰 변혁을 일으키고 대개혁을 일으키는 사람, 세상을 뒤집는 사람이 아니라 나비효과를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같지만 사회와 교회와 조직과 단체, 직장과 사람에게 적은 생각 하나와 말 한마디에 용기를 담고, 꿈을 담고, 믿음을 담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성도입니다.

그런 작은 날개 짓이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듯 자신의 작은 역할이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신호를 지키고, 담배꽁초를 찻장 밖으로 버리지 않고, 서로에게 미소를 보내주고, 작은 것에도 ‘감사합니다’라고 말을 하고, 대화를 할 때 사나운 얼굴을 하지 않는 것 등. 이런 작은 것이 결국 좋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며 성공하는 사람이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베드로전서 3:9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막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고 욕을 욕으로 갚는데 오히려 잘되라고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결국 복을 받습니다. 지나가는 말한마디라도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성공적 나비효과를 거둡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이든지 나의 감사와 기도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기억하고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참고:김두현 소장 / 21세기목회연구소(뉴스미션)

마무리하는 말

쉰들러의 리스트란 영화 끝장면이 생각나십니까

"한 사람을 구하는 자가 전 세계를 구하는 것이다. "

1,100명의 유대인의 생명을 나치의 어금니에서 구해낸 쉰들러는 그 광란의 전쟁 중에서 평화의 참 개념을 꽃피웠습니다.

그는 친구가 사준 자동차를 팔았더라면 10명의 생명을

자신의 가슴에 붙어있는 금배찌를 팔았더라면 2-3명의 생명을 구했을텐데 안쓰러워 합니다.

진정한 평강은 상황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감옥이란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를 기뻐하고, 형제의 허물에 대해서 관용하고, 감사함으로 기도할 때 주어지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함으로

형제의 허물에 관용함으로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란 선물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7.기억하고 생각하라(Remember & Consider)!

신32:7-14

 

중국의 양나라에 장승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충성스럽게 일한 관료입니다.

또한 그는 중국의 전설적인 화가로 더 알려졌습니다.

어느 날 그가 남경 근처의 안락사라는 절에서 용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절의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검은 먹구름을 뚫고 하늘로 솟아오르려는 두 마리의 용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그림을 잘 그렸던지 정말 용이 살아있는 것 같은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용의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용의 눈동자를 그려 달라고 졸랐습니다.

결국 장승요는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용의 눈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레 소리와 함께 용이 벽을 박차고 뛰쳐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설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벽에 그린 용이 하늘로 올라갈 수는 있겠습니까

미완성의 그림을 완성시켰을 때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일로 해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겼습니다.

화룡점정의 문자적 의미는 ‘용의 그림에 눈동자를 그려 넣다’는 뜻입니다.

그 의미를 확대하면 ‘어떤 일의 가장 중요한 부분’ 혹은 ‘모든 것의 마지막 마무리’를 의미합니다.

용의 그림에 눈동자를 그려 넣는 마무리가 중요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마지막을 잘 정리하는 마무리가 중요합니다.

이제 2007년의 마지막 주일예배 시간입니다.

우리는 올 한 해 동안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남은 이 시점에서 마지막 한 점을 잘 그려 넣어야 합니다.

마무리를 잘하지 못하면 작품이 완성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화룡점정의 예배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비록 지금까지 부족하고 연약한 것이 많이 있었지만 마무리를 잘 하면, 내년 새해에는 더 놀라운 열매가 맺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올 한해를 마무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하나님께서는 지도자 모세를 통하여 3가지를 기억하고,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모세는 본문 7절에서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과거를 돌이켜보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

이 말씀을 우리 각자에게 적용해 본다면 “2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교회에 적용해 본다면 “올 한해를 돌아보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 ”

사랑하는 여러분! 조용히 지나온 한 해의 발자취를 돌이켜 기억해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우리 가정을, 직장을, 사업을 이끄셨는지를....

우리는 과거에 머물면 안되지만,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내일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잘못과 실수를 교훈삼아 새롭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기억하고 돌이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를 여기까지 보호해주셨음을 기억하라.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뜨거운 사랑으로 보호해 주셨는지를 말씀합니다.

7절의 "옛날을 기억하라!”로 시작하는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 출애굽부터 광야 40년의 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에 이르기 직전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1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

이것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보호해 주셨는가를 보여줍니다. 모래 바람이 부는 메마른 사막, 아무런 수확을 기대할 수 없고, 단지 짐승의 울음소리만이 들리는 바로 그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심한 배려와 극진한 사랑으로 만나주시고, 보호하셨습니다.

어떻게 보호하셨다고 말씀하십니까

당신의 눈동자같이 이스라엘을 지키셨고 말씀합니다.

눈동자는 인간의 신체 부위 중 매우 소중한 부분입니다.

또한 가장 쉽게 다칠 수 있는 약한 부위입니다.

그래서 여하나님께서는 본능적으로 눈에 어떤 물체가 날아오면 눈을 감게 만듭니다.

바로 눈동자를 보호하게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눈동자같이 지켜주셨다”는 말은 ‘최우선적으로 아끼며, 아주 조심스럽게 보호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택하신 모든 백성들을 눈동자같이 소중하게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의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 보십시오.

내가 식생활 조절을 잘 해서 건강을 지켰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믿음생활을 잘 해서 믿음을 남보다 잘 지켰다고 여기십니까

내가 남보다 더 수고하고 땀 흘려서 내 가정과 산업을 지켰다고 보십니까

대답은 No!입니다.

돌이켜보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우리들이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하다못해 숨을 쉬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우리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성인을 기준으로 심장은 하루에 자그마치 10만3천6백89번을 뛴다고 합니다. 내가 식사를 할 때에도, 내가 일을 할 때에도, 운동을 할 때에도, 무의식중에 잠을 잘 때에도 10만3천6백89번을 뛰고 있습니다.

또 하루 동안 폐는 2만3천40번 숨을 쉰다고 합니다.

또 하루에 700만개의 두뇌 세포를 사용하며 산다고 합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내가 심장이 이렇게 많이 뛰도록 무슨 수고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윗은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한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어떤 수고를 해서 나의 폐가 호흡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무슨 노력을 해서 두뇌세포를 700만개씩 사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런 수고를 하지 않는데도, 나는 의식조차도 못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여호와 하나님께는 나의 심장을 움직여 주시고, 폐를 움직여 주시고 두뇌세포를 움직이셔서, 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기에 우리는 지난 1년동안도 안전하게 산 줄로 믿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두 친구가 어느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드디어 약속한 날자가 되어 두 친구가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내가 오다가 중간에 겪은 일을 들어보게! 난 하마터면 여기에 못 올 뻔했네. 갑자기 내 말이 길을 가다가 뭔가에 깜짝 놀라 뛰는 바람에 땅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지. 다행히 다친 데가 없기 망정이지 인적도 드문 그곳에서 다쳤더라면 어떻게 됐겠는가 그런데 더 감사한 것은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기절할 뻔 했지 뭔가. 내가 말에서 떨어진 그곳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이 바로 낭떨어지였네. 나는 즉시 무릎을 꿇고 기적적으로 살려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렸다네. "

그러자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친구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의 말을 들으니 나는 자네보다 훨씬 놀랍고 기적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것 같네. 내가 탄 말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 번도 날 떨어뜨려 본 적이 없다네. 그 녀석은 아주 침착하고 안전하게 아무 사고 없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다 주었다네. 나는 위험스런 상황에 조금도 빠져들지 않았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 ”

우리는 올 한 해 동안 힘든 문제 가운데에서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평탄하게 오늘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더 감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교회를, 이 민족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은 은혜를 깊이 기억하고 감사하는 가족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로, 우리를 연단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올 한 해 동안 여호와 하나님께서 눈동자같이 우리를 보호해 주셨다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목사님! 저희는 한 해 동안 자녀문제로 얼마나 속을 썩었는지 몰라요.

저는 건강문제로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그리고 재정적인 문제로, 직장의 일로, 사업의 일 얼마나 힘들고 지쳤는데요

목사님! 올 한해는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합니다.

빨리 이 해가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하실 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지난 시간들을 보면 기쁘고 좋은 일도 있었지만, 힘들고 고통스런 일도 많았습니다.

언론이 발표한 10대 뉴스처럼 우리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힘들게 한 사건, 사고가 유난히 많은 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신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항상 평화롭고, 기쁜 일 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당신의 백성들을 풀무불에 연단하십니다.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보통 독수리는 높은 절벽 위에 집을 짓습니다.

둥지를 만들 때 밑바닥에는 날카롭고, 뾰족한 것을 깝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깃털로 덮어놓고, 새끼를 기릅니다.

어느 정도 새끼가 자라나면 보금자리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깃털을 제거해 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새끼를 집 밖으로 내어 좇습니다.

그러면 새끼들이 절벽 밑으로 떨어집니다.

힘이 없는 새끼들이 절벽 밑으로 정신없이 떨어질 때 지켜보고 있던 어미 독수리가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낚아채서 다시 위로 올라갑니다.

높이 올라간 어미 독수리는 다시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새끼 독수리는 있는 힘을 다해 날갯짓을 합니다.

이런 과정을 계속반복해서 태양을 향해 솟아오르는 독수리가 됩니다.

어미 독수리는 목숨을 건 가혹한 훈련을 통해 가장 높이 솟아오르는 강한 독수리를 만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때때로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다루는 것처럼 우리를 다루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로 만드시기 위해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을 시킵니다.

물론 광야의 여정 가운데 그들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때로는 전갈을 보내기도 하시고, 불뱀을 보내기도 하십니다.

이방 나라의 왕들을 통해 괴롭힘을 당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마실 물이 없어서 고통 가운데 부르짖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배후에는 백성들의 불순종을 순종으로 바꾸시기 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택하신 자녀들에게 건강을 지켜주시고, 물질도 주시고, 형통케 하시는 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이 내 생각대로, 내 소원대로 만사형통한다면 그것만이 축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잠깐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얼마나 귀한 축복이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그 형통이 자기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독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시온의 대로가 아닌 좁은 가시밭길로 인도하실 때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를 의도적으로 고생시키거나 힘들게 하기 위함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과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하나님은 다양한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십니다.

우리의 인격을 부족함이 없는 성숙한 모습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두 가지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분별하기 위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유없이 우리를 힘든 골짜기로 이끄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모든 상황을 원망 불평하지 않고, 인내하며,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 오히려 그것이 놀라운 축복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의 고백처럼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하려 함이라. ”(벧전1:7)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연단의 불을 통과하셨습니까

아니면 지금도 통과하고 계십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분명한 뜻을 알아야 합니다.

이 연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훈련시키시기 위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장 혹독한 추위를 견딘 히말라야의 장미가 가장 아름다운 향을 풍기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불시험을 받을수록 내게 더 소중한 것을 주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 불 시험을 통해 내 믿음을 부요하게 하십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구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더 놀라운 축복으로 채워주십니다.

올 한 해 동안도 우리를 연단해 주신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하며 나아갈 때 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우리를 인도해주셨음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무려 40년 동안을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광야에서 훈련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광야에서 그들을 고생시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광야는 과정일 뿐 그들의 목적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입니다.

광야 40년의 여정은 그들에게는 때로는 너무 가혹해 보입니다.

가나안은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목표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언제나 신실하게 이루십니다.

믿음이 부족한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심하고, 배반합니다.

그러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한걸음씩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끄십니다.

다같이 12-13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어리석은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리셨다고 여겼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그들을 떠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들 앞에서 인도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셔서 나의 모든 삶을 인도해 주신다는 확신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방황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 인생의 네비게이션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확한 목적지를 정하기만 하면 때로는 돌아가고, 때로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믿음으로 따라가면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모래위의 발자국 이란 시를 기억하시죠.

한 사람이 꿈을 꿉니다.

자기의 지나온 과거의 모습이 해변 모래 위에 발자국으로 선명하게 찍혀 있습니다.

거기에는 자기의 발자국과 주님의 발자국이 사이좋게 찍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발자국이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돌이켜보니 자기 인생 가운데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입니다.

불만스런 목소리로 여호와 하나님께 묻습니다.

“왜 내 인생의 여정 가운데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 주님은 어디가시고, 내 발자국만 찍혀 있습니까”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세히 보아라. 그것은 너의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란다.

네가 힘들고 외로울 때 내가 너를 업고 갔단다. ”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발걸음마다 함께 동행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 힘들고 험난한 여정이 많았지만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한 사람을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사역을 같이 하시는 분 가운데 킴 윅스라는 한국인 맹인이 있습니다.

6. 25 전쟁 때 시력을 잃고,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떤 미군 중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서 인디아나 주립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또 오스트리아에서 성악 공부를 하여 훌륭한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집회를 할 때마다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맹인인 나를 인도할 때, 저 100미터 전방에 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뛰라고 말하고,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놓으라고 말합니다. 내가 나를 인도하시는 분을 믿고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나는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꼭 도착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10년 후를 알지 못합니다. 20년 후도 알지 못합니다. 또 알고자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며 오늘을 살면, 여호와 하나님은 내일을 인도하셔서 마침내 내 생애를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그곳에 도달케 하실 것입니다. ”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오늘 이라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의 발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을 차지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올 한 해 동안 우리를 보호하시고, 연단시키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베풀어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기억하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화룡점정의 마음으로 한 해를 잘 마무리 짓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8.토기장이 관광으로 출발한다

렘18:1-6

 

왜 영적 감각이 무뎌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체의 여호와 하나님은 만나지 못했고, 여호와 하나님이 '개념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배와 기도, 찬양을 통해서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없으니까 자꾸 여호와 하나님이 개념화되는 것입니다. 개념은 실체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개'라는 개념이 있다고 합시다. "저것이 개다"라고 하면, 그 순간 더 이상 쳐다보지 않습니다. 즉, 체험과 관찰을 생략해버리는 것입니다.

그저 개념으로 파악하고 맙니다. 하지만 실제로 개라고 불리는 대상을 관찰해보십시오. 큰 개, 작은 개, 털이 많은 개, 주둥이가 나온 개, 귀가 큰 개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상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개라고 개념화하는 순간 더 이상 보지 않고, 개라는 범주에 모두 집어넣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개념으로 안다"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이러이러하리라고 머릿속으로 정리해 놓은 것을 그냥 하나님이라고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런 개념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에게는 능력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만남도 없습니다. 따라서 개념화된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 드러난 여호와 하나님, 그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서 '만나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십시오. 기도와 찬양, 설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느끼십시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십시오. 그 만남이 진정한 기독교입니다. 그것이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한 살아 있는 성도와 교회의 모습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사회에 역사 앞에 책임적인 존재입니다. 존재 이유에 합당하고 존재적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만원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도 있지만 수 억원이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습니다. 작고 초라한 교회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만 크고 화려해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지난해보다는 더 성숙해져야 합니다. 무엇인가 가치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분명히 달라진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삶의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여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일합시다. 예배, 봉사, 전도, 교육, 가정, 직장, 교회…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의 거룩한 도구가 됩시다. 교육관과 주차장 확장을 위한 계획도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가 되게 합시다. 제자 만드는 계획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합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렇게 살아 봅시다.

1. 남의 유익을 구합시다

본문 24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참된 자유와 사랑의 실천 원리를 제시합니다.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가능하며 모든 이기적인 욕심을 배척하여 구원을 완성하는 삶입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유를 사용하는 것은 공동체를 위하여 지켜야 할 원리이자 그리스도인이 덕을 세우는 방법입니다. 인간에게 귀중한 자유가 타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며 그러한 유익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 사회는 참으로 행복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남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며 그러한 유익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 사회는 참으로 행복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남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은 천사이고 그러한 공동체는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가이드포스트에 실린 단순하지만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파트에 사는 한 부인이 한가한 오후 시간이 되면 응접실로 나와 차를 마시거나 신문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자연히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 응접실에 시선이 자주 멈춰 서곤 했습니다. 건너편에 있는 응접실에서는 고상해 보이는 부인이 가끔 바느질을 하거나 책을 읽었습니다.

서로 만나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서로 쳐다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부인은 여느 때와 같이 응접실에 나와서 무심코 건너편에 있는 부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녀의 모습이 전처럼 선명하지 않고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대뜸 '원, 세상에 창문이나 제대로 닦고 책을 읽든지, 바느질을 하든지 할 것이지. 저렇게 게을러서 책만 읽으면 뭐하나' 하고 자기도 모르게 투덜거렸습니다.

한 2주가 지났습니다. 따뜻한 봄을 맞아 유리창을 닦고, 집 안 구석구석에 있는 쓰레기를 치우는 대청소를 했습니다. 마침내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청소를 끝내고 피곤도 풀 겸 차 한 잔을 들고는 응접실의 포근한 의자에 몸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습관처럼 건너편 아파트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그 부인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 부인이 창문을 닦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창문을 제대로 안 닦아서 희미하게 보였구나. ' 그제야 그 부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잘못된 모든 원인과 책임을 나에게 돌려야 합니다. 내가 먼저 회개하고 사과하면 상대방의 마음도 눈 녹듯 녹습니다. 나의 유익만을 구하면 이기적이 되고 반드시 고립됩니다. 사막이 되고 황폐화됩니다. 모든 것이 죽는 사해가 됩니다. 그러나 나의 유익을 포기하고 남의 유익을 먼저 구하면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갈릴리 바다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도리어 자신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때로는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의 열매를 얻게 됩니다. 2007년 새해에 나의 유익을 버리고 남의 유익을 구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비방을 받지 맙시다

본문 30절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바울은 기독교인이 이교도의 집에 초청받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될 때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며 먹는다면 원리적으로는 합당한 것으로 비방받을 일이 못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상처를 받는다면 음식을 먹음에 있어서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유익을 위해 나의 권리와 자유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자유와 권리를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사용한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로 인하여 남을 비방하지도 말고 비방 받아서도 안 됩니다. 비방을 하고 받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면 선교가 안 됩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와 교회가 비방거리가 됩니다. 우리 모든 성도는 모든 성도의 대표이며 교회의 대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독교 대표 선수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Gavriel Garcia Marquez)의 작품 콜레라 시대의 사랑(Love in the Time of Cholera)이라는 소설은 비누 한 장 때문에 깨진 결혼 생활을 그려놓았습니다. 소설에서 집 안을 정돈하는 것은 아내의 일이었습니다. 수건이나 휴지, 비누 등을 욕실에 챙겨 놓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날 아내는 비누를 미처 새것으로 갖다 놓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비누를 갖다 놓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비누 한 장 때문에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그 뒤 7개월 간 두 부부는 각 방을 사용했고 식사 때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비누 한 장이 어떻게 결혼 생활을 망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양쪽 배우자 모두 "그만둡시다. 이렇게 계속해서는 안돼요. 미안해요. 용서해요. "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소한 일로 평생의 관계가 금이 갈 수도 있습니다. 용서만이 점점 벌어지는 틈을 메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용서란 부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하나님께 용서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을 자격이 없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십니다. 나는 비누 한 장의 에피소드를 읽고 웃었지만 이 웃음과 함께 나 역시 사소한 일을 문제삼았다는 내적인 경종을 듣게 됩니다. 이제 문제는 내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용서할까요 아니면 원망을 품고 있을까요

비방에 휘말리게 되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꿈과 용기도 깨지고 선교와 감동도 사라집니다. 2007년 새해에는 모든 사람들을 칭찬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는 성도가 됩시다. 작은 것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 버리는 어리석은 삶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르는 성숙한 성도가 됩시다. 칭찬으로 가득한 영광의 새해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합시다

본문 33절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모든 성도들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실족하게 하는 파괴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이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전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스스로를 순응시키는 겸손함을 통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을 본받아 살면 결코 그릇된 길로 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중심에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본을 보이고 희생하고 섬겨야 합니다. 성도의 목적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의 사명은 죄로 인해 죽어 가는 사람들과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 성도와 교회는 도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이 구원 사역을 위해 바울처럼 미쳐야 합니다.

사탄의 진짜 전쟁은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사탄은 여하나님을 해칠 힘이 없기 때문에 지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합니다. 사탄은 하나님 백성이 불순종과 무관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실망시키도록 부추기는 광적인 갈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탄의 또 다른 특징은 흉내를 잘 내는 모방자란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백성, 족속, 나라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는 계획을 말합니다.

 모방자인 사탄은 '불법의 비밀'로 대응하는 데, 그것은 표적과 거짓 기적으로 거짓 교회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지만 죄 속에 살고, 세상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진정한 영적 능력을 부인합니다. 사탄은 현재 공중 권세를 잡은 지배자입니다. 성경은 사탄이 이 세상 신이라고 말합니다. 또 사탄은 파리의 왕인 바알세불입니다. 파리가 어디에 꼬이는 지 생각해보십시오. 썩은 쓰레기가 있는 곳입니다. 결국 사탄은 무저갱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사탄 나라의 세력은 추락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상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잘못된 나라에 투자하지 마십시오! 마귀는 공중 권세 잡은 지배자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때는 짧고 제한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세상의 교회에게 '인간 권력 배후의 영적 세력'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빛의 자녀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의 모든 제자에게 주신 능력의 비밀한 근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가 밝았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건강, 자녀, 생업, 소원을 형통케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적과 축복의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남의 유익을 구하고 비방을 받지 말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는 성도와 가정과 교회와 민족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9.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사65:17-25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들이 항상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다사다난(多事多難)’입니다. 올 한 해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슬프고 힘든 일도 있었고, 기쁘고 즐거운 일도 있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새해 벽두에 용산 철거민 진압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연쇄적으로 부녀자를 살해한 강호순 사건과 어린 초등생을 성폭행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조두순 사건 등 기억하기 조차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 해는 유난히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 국민을 깜짝 놀라게 한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종교계에서는 바보처럼 산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청년으로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게 하자’고 외치셨던 김준곤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신종 플루(Flue)로 인한 위기의식이 온 나라를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정치권은 여전히 이해관계에 의해 얽혀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4대강 살리기와 세종시 이전 문제로 내년도 예산안조차 심의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기쁜 소식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세계금융위기 속에서 살얼음판을 걷던 경제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회복하는 저력을 보였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일본은 따라잡을 수 없는 나라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올해 삼성전자의 순이익이 일본 7대 전자산업의 총 이익보다 두 배나 많았습니다.

 IT와 조선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달리고 있고, 휴대폰, LCD TV, 냉장고, 에어컨 등 세계 1등 제품이 됐습니다. UN의 경제 원조를 받던 개발 도상국가에서 이제는 다른 나라를 돕는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선진 20개국 정상 모임을 개최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이번 주에는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프랑스를 제치고, 40억 달러에 이르는 아랍에미레이트 원전 공사를 수주했습니다. 이제는 한국의 기술력이 세계적임을 온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나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영국이나 프랑스는 감히 넘보지 못하는 선진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유럽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한민국의 저력이 놀랍습니다. 이 모든 것이 피땀 흘린 숨은 주역들의 노력의 열매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습니다. 불과 60여년 전만해도 국민소득 200불이 되지 않던 후진국이었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 미군이 던져주는 쵸코릿이나 씨레이션을 먹고 살았던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세계를 이끌어 가는 당당한 선진국의 대열에 올랐습니다.

선교 126년 만에 세계에 우뚝 선 대한민국이 됐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는 바벨탑이 아닙니다. 통일 한국과 세계 선교를 위해 쓰시고자 하시는 놀라운 섭리가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짧은 선교 역사 가운데 대한민국을 사랑하셔서 복음의 불길이 들풀처럼 타오르게 하셔서 32만 명의 목회자와 5만 3천여개의 교회와 1천만을 헤아리는 성도를 주셨습니다. 전 세계 168개국에 2만 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해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선교 강국이 됐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대한민국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셔서 세계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만할 때가 결코 아닙니다. 더 열심히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영적으로 더 건강한 성도,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만족한 상태에 머물면 그것은 곧 퇴보가 됩니다.

특별히 기독교 신앙은 끊임없는 전진과 도전을 요구합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여러 가지 유혹을 통해 현실에 안주하게 만듭니다. 여기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아무리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고 좋아도 내일의 비전을 품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절망과 좌절 속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신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그 핵심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입니다. 본문 17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미 여호와 하나님은 6일 동안의 사역을 통하여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벨론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말합니다. 포로 되었던 자들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맞이하게 될 새로운 나라의 모습입니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여호와 하나님이 새롭게 만드신 기쁨의 나라, 평화의 나라입니다. 구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고난의 자리를 기쁨의 자리로 만드십니다.

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온 삶은 고통이요 아픔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조국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완전히 짓밟혔습니다. 남 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체 끌려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던 성전은 불탔습니다. 성벽은 모두 무너져 내리고, 축복의 땅은 황무지처럼 변했습니다.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종살이를 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힘과 노력으로는 도저히 해방될 수 없는 절망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열심은 끝나지 않습니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바사의 고레스 왕을 목자로 삼으셨습니다. 왕이 직접 명령을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에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꿈꾸는 것 같은 일입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살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적같은 일을 베푸신 것입니다.

18-20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 ” 아멘!

하나님이 베푸신 엄청난 역사 앞에서 백성들은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고통의 소리를 들리지 않게 하십니다. 백세에 죽으면 젊은이가 죽었다고 안타깝게 여기고, 백세가 못되서 죽는 자는 저주받은 자로 여길 만큼 생명의 수를 누리는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바로 기쁨의 나라입니다. 영원한 즐거움의 나라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통해서 다시 한번 보여주십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3-4)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셔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우리의 아픔을 그치게 하시고 새로운 기쁨과 감격을 주십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들 가운데 아픔의 질고로 신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남모르는 아픔을 끌어안고 잠 못 이루며 애태운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지금까지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새해에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아픔과 고통의 자리가 기쁨의 자리로 바뀌어 지기를 축복합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눈물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는 할 수 없어도 우리 주님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한 일이 없을 줄로 믿습니다. 새로운 기대와 희망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새해에는 더 잘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 이름으로 선포하십시오. 새롭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손이 수고한 대로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헛손질이 없습니다. 21-23절 말씀을 다함께 읽습니다.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는 주의 백성들은 손이 수고한대로 거두게 하시는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후손들이 잘 되는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내가 수고했는데 열매는 다른 사람이 거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열심히 달렸는데 수고의 상을 얻지 못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열매를 거두었지만 그것을 내가 먹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랑하는여러분! 한 해 동안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두셨습니까 나는 수고했지만 여전히 내 손은 텅 비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마침내 주시는 복입니다. 내가 정말 정직하게 수고의 땀을 흘렸다면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은 열매를 거두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삭을 통해서 그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이삭은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라는 확실한 정체성을 가진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야곱을 축복합니다. 그는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온유와 관용의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그랄에 거주할 때 우물을 파면 다른 사람들이 와서 우물을 매워버립니다.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그래도 이삭은 다투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서 새 우물을 팝니다. 그러자 다시 그랄 사람들이 와서 빼앗습니다.

그래도 이삭은 대적하지 않고, 다시 우물을 팝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 지역의 아비멜렉 왕과 화평의 조약을 맺게 합니다. 다시는 우물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 우물의 이름이 ‘르호봇’입니다. 그 의미는 ‘장소가 넓다’입니다. 비록 쫓겨 다니는 비참한 모습처럼 보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온유한 이삭의 삶에 지경을 넓혀주시는 르흐봇의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창세기 26장12-1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복은 마침내 허락하시는 복입니다.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면 마침내 백배나 얻게 하십니다.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게 하십니다. 새해에는 이삭처럼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백배나 얻는 역사가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침내 모든 어려움을 뚫고 창대케 되고, 거부가 되는 역사가 있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셋째로, 서로 사랑하는 평화의 나라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긍극적으로 평화의 나라입니다. 본문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

평상시에는 이리와 어린 양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으며 온순하게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대립과 불신이 사라집니다. 모든 적대관계가 없어집니다. 자기 이기심의 노예로 살지 않습니다.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합니다. 서로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며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베풀며 나누며 삽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평화가 넘치는 나라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참된 안식과 평화가 없습니다. 전쟁과 테러로 얼룩져 있습니다. 새해에는 먼저 우리의 마음 속에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가정 가운데, 우리가 섬기는교회 가운데 주의 평화가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이 나라와 이 민족 위에도, 저 북녘 땅에도 주의 위로와 평화가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는 참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평화의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좌정하셔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실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스리시도록 우리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 속에 진정한 평화가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일’입니다.

독일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는 여호와 하나님을 '미래의 힘'(the power of future)으로서 정의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찾아 오셔서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미래를 건설할 지혜와 능력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창조된 이래 끝없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오셨습니다. 노아의 방주를 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망했을 때 이스라엘 역사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은 자들(remnants)을 통하여 새 이스라엘을 건설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사람들은 기독교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후에 부활이 시작되었고, 연이어 새로운 기독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 당했을 때 이방 선교의 희망은 무참히 꺾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절망했지만 여하나님은 달랐습니다. 인간의 희망이 끝난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은 폐허가 된 도시를 보면서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새 예루살렘 성의 청사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시작은 곧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절망의 순간에 새로운 소망의 문을 여십니다. 인간의 절망의 자리는 바로 하나님의 새로운 희망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내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가 꿈꾸었던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새롭게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나온 과거의 모든 일들은 던져 버리고, 새해에 새롭게 만들어가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할 새로운 희망이요 꿈입니다. 안 된 것을 생각하지 마시고, 나를 통하여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을 보십시오. 그리고 힘차게 도전하십시오.

땜질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던 한 사람이 감옥에 갇혀 12년 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그의 운명은 끝난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련과 치욕의 순간이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이라고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기도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독교 불멸의 고전인 천로역정, Pilgrim's Progress)을 썼습니다. 바로 존 번연(John Bunyan)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꿈을 꾸십시오. 그리고 다가올 미래의 힘으로 다가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을 잡고 힘차게 도전하십시오. 새 중에 가장 오래 사는 새는 바로 솔개입니다. 솔개의 원래 수명은 40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장수하는 솔개는 30년을 더 삽니다. 그 비결이 놀랍습니다.

40년이 되면 솔개의 모든 기능이 퇴화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됩니다. 이 때 솔개는 새로운 결단을 해야 한답니다. 그냥 죽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도전을 통해 제2의 삶을 살 것인가 새로운 도전을 선택한 솔개는 높은 바위산 꼭대기로 올라갑니다. 무려 6개월 동안의 처절한 갱신의 과정을 거칩니다. 먼저 길게 자란 부리를 바위에 내려칩니다. 입술이 터지고 피가 나는 아픔이 있지만 참고 견딥니다. 그러면 길게 자란 부리는 깨지고 새로운 부리가 나옵니다. 그러면 그 날카로운 부리를 가지고 자신을 덮고 있는 긴 털을 뽑아내기 시작합니다. 완전히 털빠진 솔개로 변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솜털처럼 부드러운 새 털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두꺼워진 발톱을 뽑아냅니다. 이런 6개월의 처절한 갱생의 과정을 통해 솔개는 완전히 새롭게 변신합니다. 그래서 30년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미물인 솔개도 자신의 생명의 연장을 위해서 처절한 도전을 합니다. 하물며 우리들이 새롭게 열려진 새해를 맞이하면서 아무런 변화나 도전이 없다면 새해를 맞이할 준비가 부족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지나온 우리의 시간들을 돌이켜 보며 성찰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삶에 새로운 도전과 변화가 없다면 그 인생은 이미 녹슬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미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힘차게 새해를 향해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 과정이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이 동행하심으로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도 주실 줄 믿습니다. 갱생의 과정을 통하여 제2의 솔개로 거듭나 창공을 날아오르는 솔개처럼 우리도 새 역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하나님 손의 왕관

사62:1-5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매년 우리는 한해를 마무리 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송구영신 예배를 드립니다. 해가 거듭 될수록 송구영신 예배를 대하는 우리의 느낌과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설레임과 기대감 속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들로 인하여 약간은 복잡한 마음으로 참여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흔히 한해를 돌이켜 보며 ‘다사다난(多事多難)’ 이란 표현을 씁니다. 일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지난해에는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개인적으로 많은 아픔의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리더십의 불안정으로 인한 많은 갈등과 혼란이 있었습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박태환이 수영에서 최초로 금메달을 안겨주었고, 이소연 씨가 한국인 최초로 우주선에 오르는 희망적인 소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기 연예인들의 자살이 이어졌고, 중국발 멜라민 공포로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됐습니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경제적으로도 어수선한 한해였습니다.

세계적으로는 자연재앙으로 인한 피해가 큰 한해였습니다. 미얀마에 불어닥친 쓰나미로 13만여명이 죽었고, 중국 쓰촨성의 지진으로 9만명이 죽었습니다. 인도에서 벌어진 테러와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공 등 전쟁과 테러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육신의 질병으로 신음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난 보낸 가족들의 슬픔이 있었습니다. 정든 직장을 떠나야 하는 아픔도 있었습니다. 사업의 어려움으로 곤경에 처한 자도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신음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가운데도 남이 알 수없는 아픔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런 모든 무거운 짐들이 새해를 맞이하여 모두 벗겨지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새해를 맞이한다고 우리 가운데 있는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새해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새해 속으로 주체가 되어 뛰어들어야 합니다. 새해로 새해 되게끔 만들 때에만 새해가 됩니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세월이 흘러 나를 그 자리에 갖다 놓았다면 어제의 시간이나 지금 새해의 시간은 다를 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소망이 현실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가짐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구습을 좇는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대로 행하고자 하는 새로운 마음의 각오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시간의 주체가 되어 새로운 희망을 만드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새해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미 주신 것들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지나간 시간들에서 내가 놓쳐버린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붙잡았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과 미련이 남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미 과거의 사건입니다. 이미 잃어버린 것들, 놓쳐버린 것들을 아쉬워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나에게 남아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아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인공들을 보십시오. 어쩌면 그들은 실패한 인생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래바람 부는 미디안 광야에 서 있는 80세의 노인이었습니다. 양이나 몰고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지팡이를 들고 일어섰을 때에 그는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주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 앞에 서 있는 소년 다윗은 가장 보잘 것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한주먹거리도 되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손 안에 있는 물맷돌을 가지고 나아갔을 때 골리앗이 넘어졌습니다. 그 이후 찬란한 새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벳세다 들녘의 벌판에 해가질 때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빈손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소년이 가지고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주님 앞에 드려졌을 때에 오천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오병이어의 놀라운 역사가 벌어졌습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큰 것을 보고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시기하거나 질투하지도 마십시오.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것,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감사하고, 그 가치를 깨달으십시오. 없는 것을 구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마시고, 지금 있는 것으로부터 다시 시작하십시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지팡이요, 물맷돌, 도시락이라도 주님의 손에 들려지면 놀라운 기적이 임합니다. 새로운 역사가 펼쳐집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정과 이웃과 친구들의 소중함을 새롭게 인식하십시오. 그들에게 서로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의 날들은 새날이 될 것입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황홀한 것인가를 비로소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절망 가운데 새로운 소망을 부어 주시는 비전의 말씀입니다. 당시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무려 포로생활이 시작된 지 70년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힘과 능력으로는 해방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들은 자포자기한 상태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캄캄한 어둠의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아픔과 고난의 터널을 지나 새로운 소망의 메시지를 가지고 다가오십니다. 그들 가운데 다가오셨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도 다스리시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예레미아 33장 2절에서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 일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일을 계획하시고, 그 일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최고 최대의 계획은 무엇일까요 바로 당신의 백성들을 죄와 억압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430년간 종노릇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켰습니다.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품을 떠나 패역한 길로 걸어갈 때에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생활 이라는 아픔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그들 곁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호시탐탐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대책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결국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통해서 그들을 돌아오게 하십니다. 해방의 기쁨과 감격을 맛보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포로생활에서 자유케 하신하나님께서 베푸실 시온의 미래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나는 시온의 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여호와 하나님은 쉬지 않으시고 택하신 시온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일하고 계심을 말씀하십니다. 시온에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가 빛같이 선포되고, 구원의 횃불이 들려질 때까지 하나님은 잠잠하지 아니하시고, 쉼 없이 일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의 품을 떠나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집을 나간 탕자처럼 내 길로 가려고 합니다. 그 결과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이 되어 헤맵니다. 우리는 주님을 잃어버리고 살지만 주님은 한시도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항상 사랑의 배신자가 되어 살지만 주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기다리시고 계시는 영원한 아버지이십니다.

언제라도 돌아서기만 하면 반갑게 뛰어 나와 맞아주시고, 기쁨과 감격의 잔치를 마련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열심히 오늘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쉬고 있고, 엉뚱한 길에서 주님을 외면할 지라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열심히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새해에도 여러분을 향하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 뜻을 이루고자 하는 교만함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깨닫고 겸허하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열심에 동참하게 될 때 새로운 미래가 활짝 열릴 줄로 믿습니다. 내 노력으로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겸허하게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때 일을 지어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의 모든 일을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새 이름으로 불러 주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새 이름으로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어떻게 불러 주십니까 4절을 보십시오.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버리운 자였습니다. 황무지와 같은 인생을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자녀로 택하심으로 말미암아 헵시바가 되었습니다. ‘헵시바’의 뜻은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바로 우리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부모의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사랑하는 자녀에게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기쁨은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신실하신 하나님은 잠잠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쁄라’는 ‘결혼한 여자’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와 결혼을 시켜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행복의 달콤한 꿈을 꾸며 살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우리의 삶이 헵시바로 바꾸어지기를 원합니다. 나의 모든 삶이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송 가사처럼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더불어 달콤한 신혼의 행복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아름답게 단장시켜 주십니다.

우리를 향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열심이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불러주시고, 아름답게 단장시켜 주십니다. 어떻게 우리를 단장시켜 주십니까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여호와 하나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당치 않도록 우리를 단장시켜 주십니다. 어떻게요 마치 신부를 가장 아름답게 단장시키는 신랑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을 삼으시고, 왕관이 될 때까지 우리를 단장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고 단장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화장을 한다고 다 예뻐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10대에 하면 치장, 20대에 하면 화장, 30대에 하면 분장, 40대에 하면 변장, 50대에 하면 무장, 60대에 하면 완전무장, 70대에 하면 포장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아름다운 것 같지만 속이 변하지 않으면 겉으로 드러나는 매력은 곧 사라집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면류관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면류관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내 힘과 능력으로 왕관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내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에 나를 맡겨 드려야 합니다. 내가 하는 단장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단장을 해도 그것은 덧칠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단장은 하나님의 손길이 나의 속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새로워지면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는 모습은 빛이 납니다.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맡겨 드리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새롭게 만드십니다. 거친 곳은 다듬어 주시고, 어두운 곳은 빛나게 하시고, 병든 곳은 치료해 주십니다. 잃어버린 것은 회복하게 하시고, 넘치도록 풍성하게 하십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온전히 자신을 맡겨 드림으로 아름답게 빚어 가시는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캄캄한 밤에 앞을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별이 반짝거립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빛은 더욱 선명합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먹구름 속에도 여전히 태양은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몽고제국을 일으켰던 칭기스칸의 어록이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부끄럽게 합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내가 살던 땅에서는 시든 나무마다 비린내만 났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탓하지 말라. 내가 세계를 정복하는 데 동원한 몽골 병사는 적들의 100분의 1, 200분의 1에 불과했다. 나는 배운 것이 없어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남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 있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스칸이 됐다. ”

새해에도 여전히 환경을 바라보고 어려움만을 바라본다면 어제의 연속선상에 있을 뿐입니다. 새로운 변화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둠을 뚫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진 자는 새로운 소망의 한해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기쁨과 감사와 찬송의 생수가 흘러넘칠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손의 왕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마십시오. 어려울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위로부터 주시는 주님의 위로와 능력을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용기 있게 전진하십시오.

반드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계획하는 것보다 더 놀랍도록 채우실 것입니다. 이런 기대와 감격을 가지고 새해의 문을 활짝 여십시오. 시간에 떠밀려 가는 자가 아니라 시간의 주체가 되어 새해의 주인공으로 힘차게 뛰어 드십시오. 그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이 바로 여러분을 통해서 아름답게 펼쳐질 줄로 믿습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 우리는 시간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살아올 때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소중한 시간들을 소모시키며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