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1
생명!- 그것은 한 뼘의 길이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침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시간!- 그것은 직조기의 베틀과 같은 것입니다.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은 것입니다. 어느 결에 가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 아니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사람은 언제나 시간의 고비 고비를 넘나들면서 생의 파편을 모으지만 결과는 언제나 죽음입니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 서서 우리를 삼키려고 영원한 원수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렇고, 미래를 소망하는 미래에도 죽음은 우리 인생의 영원한 원수입니다.
우리는 슬픈 존재입니다.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여린 살을 가진 생에 비해 죽음의 칼과 창은 얼마나 광대한 대양의 말입니까? 누가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있으며. 누가 감히 그 넓이를 측량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면 뉘라서 능히 이 험한 죽음의 바다를 헤치고 소망의 바다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이 인류 공동의 적인 죽음을 어떻게 이겨나가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거푸 다짐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죽음과 파멸이 우리의 삶에 틈을 내고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슬퍼하고만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단의 승리를 인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랑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하고,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자식들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위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유족에게 위로를 유족은 성도에게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강해집니다. 죽음의 결과를 이깁니다. 죽음의 슬픔을 이기는 것입니다. 사단의 강함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을 다짐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소망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끝입니까? 아닙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죽음이 아무리 강해도 부활의 권세를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부활의 권세에는 죽음을 무릎을 꿇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다 죽을 것이 아니요, 부활의 나팔 소리에 홀연히 변화하여 썩지 아니할 것, 죽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칠흑 같은 어두움일찌라도 빛에는 굴복하듯이, 죽음의 권세는 부활의 권세에 굴복하고 말 것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로 만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보낸 성도를 주님의 영광중에 만날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약속하셨듯이 우리는 모두 주님의 부활로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유족과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험한 세상을 이기는 비결은 믿음 외에는 없는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살아갈 소망을 갖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랑을 굳게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험한 세상을 이길 능력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길 힘도 믿음 밖에는 없습니다. 사단의 악한 계교를 이기는 힘도 믿음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굳게 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가지고, 소망으로 바라보며, 믿음의 흔들리지 않는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족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울 때가 아닙니다. 눈물을 삼키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눈물을 닦고 살아 갈 용기를 다져야 하는 때인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어떻게 여러분을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위로가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입니까? 여기 주님의 위로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줄 수도 없는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일어서려는 여러분의 심령에 가득 차시기를 기원합니다.
설교 2
모든 인생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각기 자신의 독특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을 귀중히 여기며 열심히 자신의 길을 걸어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의 걸어가는 길을 미리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당장 지금 어떤 길에 들어 설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미리 앞서서 꼬불꼬불한 길, 급작스레 도는 길, 지루한 산 길, 깊고 으슥한 두려움의 골자기를 추적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간 우리의 모든 인생들이 시간의 형틀에 어떠한 인상도, 이정표도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연약한 인생들은 한치 앞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건데 아무 누구도 그냥 살다가 죽는 것은 아닙니다. 산자건 죽은 자건, 먼저 간 자는 교훈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고 _______ ___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을 때에 우리는 깜짝 놀랬습니다. 아니 차라리 원망이 앞섰습니다. 왜냐 하면 아직도 그분이 우리 곁에 있어야 할 것만 같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장례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삶의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질병이나, 쇠퇴, 노년의 의식적인 위험으로만 생각합니다. 우리는 젊고 왕성할 때는 죽음을 우리와 동떨어진 원수로만 생각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몽롱한 세계의 어슴푸레 깔려 있는 먼 미래의 사건으로만 생각하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삼킬 자를 찾고자 으르렁거리는 맹수와 같이 우리 가까이에, 아니 우리 가운데 항상 배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위독한 병실이나, 사경을 헤메는 침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인생의 거친 삶의 현장을 걸어 갈 때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우리가 잠자는 시간에나, 쉬고 있는 거리에나, 언제나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인생의 행로에 올무를 두고 걸려 넘어질 자를 찾는 사냥꾼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와 죽음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이다”라고 탄식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듣습니다. “인생은 그 날의 들의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둘째로, 여기가 아니라 저기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죽어가는 것들, 소멸하는 것들, 사라져 가는 것들 뿐입니다. 배움이 그러하고, 명성이 그러하고, 권력도 그러합니다. 여기에는 사라져 가는 것뿐 쉼도 없고, 유업도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안식이 없는 곳에서 안식을 기대하기 쉽고, 부패할 것들로부터 영원을 기대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흙에서 흙으로, 티끌에서 티끌로라는 말을 압니다. 우리는 먼지에서 먼지로, 재에서 재로 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이 땅에 없습니다. 새로운 것은 이 땅에 없습니다. 이 땅에는 애통과 수고와, 눈물과 한숨과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것, 소멸하지 않는 것, 쇠하지 않는 유업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저 하늘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기 이 땅이 아니라, 저기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천국의 안식은 이땅 아닌 저 하늘나라에 간직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이 영원한 끝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입니다. 나비에게 허물이 벗겨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듯이 죽음은 비상이요, 초월입니다. 죽음은 허무요, 암흑이 아닙니다. 죽음은 오히려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는 관문이요, 필사에서 영생으로 가는 통로이며, 멸사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관문입니다.
이제 ______ ____님은 인생의 역중에서 우리보다 먼저 내려가서 하나님의 집에서 안식을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 곧 그 역에서 내릴 것입니다. 그리고 만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다시 만날 것입니다. 영생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먼저 가신 그분과 같이 천국에 들어가서 할렐루야 찬양을 부르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그분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나는 이제 비로소 빛으로 들어 가누나. 저 영광의 세계로 어린 양의 피로 씻긴 문을 통과하노라!!
설교 3
시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가 인생을 나그네와 같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한세상 살다 가는 것이 나그네와 같다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정착할 집이 없는 사람을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디 하나 정 둘 데가 없는 사람이 나그네입니다. 이곳 저곳 정 둘 곳을 찾아 헤매지만 우리가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는 정 둘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재물도 만져보고, 명예도 얻어보고, 세도도 부려 보기도 하지만 이곳에는 정둘 곳이 없습니다.
평생을 이 집, 저 집 기웃거려 보지만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는 곳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재물이나, 친구, 권력... 그 어느 것도 정을 둘 곳은 아닙니다. 수고만 있을 뿐입니다. 고통만 있습니다. 얻으려는 갈망만 있을 뿐입니다. 얻었는가 하면 우리는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우리 인생이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으며, 욥은 우리가 주 앞에서 그림자 같다고 말했습니다. 있는가 하면 사라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왔는가 하면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짧은 것이 인생입니다. 어느 결에 갔는지 모르는 게 인생입니다. 시간은 언제나 사망과 한편이 되어 짧은 우리의 인생을 좀먹는 것입니다.
또, 우리 인생은 쇠하여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젊음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바람결에 지나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느절에 비단같은 살결은 삼베같이 거칠어지고, 맷돌같이 단단하던 치아가 빠지고, 해같이 밝던 눈은 저녁안개같이 뿌옇게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방금 친 장막같이 팽팽하던 우리의 피부는 막 입은 헌 옷같이 주름이 잡히고, 시냇물같이 맑던 음성은 조율 풀린 악기같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어느새 어제의 청춘이 오늘의 백발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압니다. 물은 바다로부터 왔기로 바다로 돌아 갑니다. 불은 태양으로부터 왔기로 태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저의 육신은 흙으로부터 왔기로 흙으로 돌아 갈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령을 불어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혼은 하늘나라 하나님 품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꽃은 시들고, 풀은 마릅니다. 그러나 영혼은 하늘나라로 갈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나면 우리는 다 홀연히 변할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죽지 아니할 것으로 살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입을 것입니다.
아담으로 죽음이 시작되었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믿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우리는 이 믿음으로 천국에 갑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가며, 하나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유족 여러분, 성도 여러분! 이 소망으로 성령님이 주시는 위로가 심령에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인생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각지의 독특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의 걸어가는 길을 미리 알지는 못합니다. 어느 누구도 미리 앞서서 꼬불꼬불한 길, 지루한 산 길, 깊고 으슥한 두려움의 골짜기를 추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앞서간 모든 인생들이 시간의 형틀에 어떠한 인상도, 이정표도 만들어 놓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들은 한치 앞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건데 그래도 아무도 그냥 살다가 죽는 것은 아닙니다. 산 자이건, 죽은 자건 먼저 간 사람은 교훈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산자의 웅변이건, 죽은 자의 웅변이건 교훈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고 _______ 성도님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무엇입니까?
산자의 웅변이건 죽은자의 웅변이건 거의 동일 합니다만은 후자의 웅변은 대부분의 경우 여운이 좀더 길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고 _______성도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깜짝 놀랬습니다. 아니 차라리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가 이 세상에서 할일이 많이 남아 있을 것 같은 아쉬움과 안타까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관을 하면서 그의 웅변을 듣습니다.
첫째로,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질병이나 쇠퇴, 노년의 의식적인 위험으로만 생각합니다. 우리는 젊고 패기가 왕성할때, 죽음은 우리와 동떨어진 원수로만 생각합니다. 몰롱한 세계의 어슴프레한 먼 미래의 사건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사경을 헤매는 응급실의 병실이서나, 삶의 거친 들판을 걸어갈 때나, 하루 일을 마치고 평안히 잠드는 침상에서나, 쉬고 있는 거리에서나, 바쁘게 뛰어다니는 삶의 길목 길목을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언제나 삶의 현장 현장에서 으르렁거리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이어가는 순간 순간에 화살을 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듣습니다.“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둘째로, 여기가 아니라 저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땅에 영원히 살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에는 죽어가는 것들 뿐입니다. 소멸하는 것, 늙어가는 것들, 망가지는 것들 뿐입니다. 배움이 그러하고, 쾌락이 그러하고, 능력이 명성이 그렇습니다. 영원한 것은 이 땅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모든 것에 착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얻지 못할 것, 가지지 못할 것, 가지고 가지 못할 것에 착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원하지 않은 것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순간의 것에서 만족을 구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입니까? 부패할 것들로부터 영원의 조각을 찾으려고 헤매는 것입니까? 이땅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이 땅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이 땅에는 영원이 없습니다.
우리는‘땅에서 땅으로, 흙에서 흙으로 라는 말을 압니다. 재에서 재로, 티끌에서 티끌로’라는 말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로운 것은 여기 없습니다. 새로운 땅, 새로운 소유는 여기가 아니라 저기입니다. 피곤하지 않고 싱싱한 것, 더럽히지 않고 깨끗한 것, 슬퍼하지 않고 웃음안 있는 곳,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흥하는 것은 이 땅에 있지 않고 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_______성도님은 그것을 소유하러 간 것입니다. 누리러 간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애통이 없습니다. 찬송이 있을 뿐입니다. 그분에게는 눈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이들을 위하여
왕하 2:1-3
우리가 인생이란 말을 할 때 출생, 결혼, 죽음을 동일선상에 놓고 말합니다. 출생이나 죽음 어느 하나도 인생에서 제외 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아도 어느 때는 희극을 보고, 어느 때는 비극을 봅니다. 실패한 인생과 성공한 인생을 봅니다. 그리고 비극은 비극대로 가치를 말하고, 희극은 희극대로 가치를 말합니다. 실패한 인생도 절대로 뜻없는 인생으로 매도할 수 없습니다. 실패한 비극 영화를 볼 때 더욱 큰 인생의 감동을 맛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실패한 자만이 느끼고 깨닫는 인생의 순결과 가치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어떻게 살았던지 그의 출생과 죽음을 인생이라는 축복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삶의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축복의 사건입니다. 출생과 죽음을 포함한 인생의 삶 그것이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여기에서 죽음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영웅이었습니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였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세상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진시왕은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려고 불로장생초를 구했지만 허사였습니다.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죽음은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저주의 수단을 은총의 수단으로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이나 스데반을 보면 진실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원수를 오히려 용서하는 기도를 합니다.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합니다.
또한 다윗은 아들에게 힘써 대장부기 되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진실한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생명이 후손을 통하여 이루어지되 진실하게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생명의 연속선 상에서 메시야의 탄생을 기대합니다.
인간편에서 볼 때 죽음은 모든 것을 무로 만들어 버립니다. 인간이 쌓아 올린 업적, 모든 부귀영화, 그 모든 것을 다 박탈합니다. 인생은 죽음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죽음을 무찌르시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영원한 무덤도 아니며, 인생의 종착역도 아닙니다. 영생에 이르는 관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대장부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행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인은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가족들에게 남기셨습니다. 이 귀한 신앙의 유업을 이어가며 주의 일에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분명 우리도 종착역에 도착할 날이 옵니다. 그때에는 고인과 같이 빈 몸이 아니라 그 속에 성령의 기름을 가득 채워 세상의 빛으로 예수님을 맞이하여야 합니다.
유족 여러분! 이제 눈물을 거두시고, 이 영생의 믿음으로 고인을 하나님의 품으로 보내드립시다. 조객 여러분! 이 희망으로 유족을 위로하며, 고인을 하나님께 보내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고인의 죽음은 죽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사건 속에 합류되는 삶의 사건이라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고 000 은 이 땅에서의 세를 지내시다 주님을 만나 그의 영혼에는 천국의 기쁨이 넘쳤고,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은혜와 성령님의 위로하심을 힘입어 잠자는 것같이 평안하게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우리도 이땅에 살면서 부활 신앙과 영생을 맛보며 살게 하시고, 저 천국을 향하여 힘있게 행진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사랑하는 아버지! 유족들에게 건강을 주시고, 믿음과 지혜를 주시며,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말한 힘써 대장부가 되고, 진실한 인간이 되며,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를 지켜 모든 삶이 형통하는 축복을 베풀어 주옵소서. 형제간에 우애가 있게 하시며, 홀로 남으신 어머니에게 효도하며, 아버지의 아름다운 그 신앙의 유업들이 이 자녀손들을 통하여 이어지게 하옵소서. 또한 사랑하는 이들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교회의 기둥이 되게 하옵시며, 이 나라의 보배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는 자를 위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오신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땅 위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햇빛 밑에서 자라난 곡식을 먹는 동안에 하나님을 잘섬기는 자 되게 하시고, 선한 일에 땀을 흘리는 일꾼이 되게 은혜를 주옵소서. 오늘의 모든 장례 절차를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주관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
히11:13-16 더 231, 405
옛날 궁중에서 왕을 즐겁게 하고 때로 왕이 잘못했을 때 풍자적인 놀이로 왕의 잘못을 깨우치게 했던 직업 가운데 광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광대의 바보같은 익살을 보고 임금님께서 당신의 지팡이를 건네주며
"너보다 더 멍청한 사람을 만나면 이 지팡이를 주라"고 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나 임금님이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유언을 하며 "이제 나는 돌아노지 못할 길을 떠난다"고 말을 하자 광대가 앞으로 나서며, "폐하, 폐하께서는 다른 나라를 방문하실 때 꼭 사신을 보내 준비토록 하셨는데 이번 여행도 충분히 준비를 하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물론 왕은 준비를 못했노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때 광대는 가장 바보같은 사람에게 주라고 했던 그 지팡이를 임금님께 건네 주며 "폐하, 나보다 더 멍청한 사람을 이제야 발견했습니다. 이 지팡이를 받으시지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말씀합니다. 아니 구태여 성경이 아니더라도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을 보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고향이 있으니까 돌아갔겠지요. 때로 누군가 세상을 떠났다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목적지가 잇으니까 떠난 것이요, 출발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그 본향을 알고 계십니까?
인간에겐 귀향 욕구, 즉 고향을 찾고자 하는 욕망이란게 있습니다. 이민 간 사람들 중에 의식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람이란 조상 때부터 살아오던 조상의 얼과 뼈가 묻혀있는 자기의 고향, 내 나라 내 조국을 떠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랍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순전히 엉뚱한 고향을 찾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허무한 고향을 찾는 사림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향해 출발한 신령한 귀성객입니다. 즉 하늘 본향을 향해 가는 순레객들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이 신앙의 길은 피로 얼룩진 길이 아니라 영광의 길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나그네길입니다. 어느 가수는 노래하길 인생은 하숙생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그 나그네의 길이 죽음과 멸망의 길이냐, 아니면 영생과 천국의 길이냐?가 다를 따름입니다.
여러분 어디서 왔습니까? 이 땅에 태어난 존재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까?
고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 유프라데스 강 유역에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잇었습니다. 하나님. 아브라함
순례의 길- 이 일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믿음은 곧 천성을 향해 행진하는 것을 의미.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나그네가 지나가는 길에 너무 큰 미련을 둔다면 그는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다리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다리를 건너갈 따름이지 그 위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서 얻은 명성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명예는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만이 나그네를 구원해 주기 때문입니다.
고후4:16-5:7
우리 믿는 사람은 겉사람은 후패하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의 속사람, 그의 심령이 날로 새로워지기 때뭉입니다. 사도바울은 날로 후패해지는 육신 가운데서도 날로 새로워 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먼저 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생명을 연상케 합니다. 산 것은 언제나 새로워 집니다. 산 나무에 새잎이 돋아납니다. 산 풀에 새싹이 납니다. 산 꽃이 더 이름답습니다. 죽은 것이 새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날로 새로워지려면 먼저 죄와 허물의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영적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둘째로 새롭다는 말은 아침을 연상합니다. 아침에는 만물이 새로워집니다. 그것은 아침 햇빛이 비취는 까닭입니다. 주님이 빛이 우리에게 비췰 때 우리의 심령은 새로워집니다.
셋째로 이 새롭다는 말은 샘물을 연상케 합니다. 더운 여름 사막길을 걷던 나그네가 길가의 오아시스를 만나 그 맑은 샘물을 마시게 되면 그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원기를 회복합니다. 수사성 여인-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넷째로 새로워진다는 말은 안식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가 피곤하고 지칠 때 평안히 쉬어야 육체가 새롭습니다. 피곤한 몸이 하룻 저녁 푹 자면 그 이튿날 아침 새로운 건강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스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개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다섯째로 믿음 있는 사람은 겉사람이 후패할수록 그 반비례로 속사람은 더욱 새로워집니다. 연약해지면 인간의 모든 욕심이 사라지게 된다.
이 세상의 소망이 끊어지게 되니 자연히 남을 용서하게 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됩니다. 하늘의 신령한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겉사람은 육체가 아주 무너질 때면 새로워진 그 심령은 옛 집을 버리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 같은 사람을 보면 그가 밧모섬에 유배가 되어 홀로 굴 속에 앉았을 때 그의 겉사람은 늙고 병들어 후패하였지만 그의 속사람은 아주 새로워졌습니다. 그의 신령한 눈은 아주 밝아져서 영원한 장래를 미리 볼 수 있었고 지극히 높은 하늘나라의 영광을 분명히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신령한 귀는 아주 밝아져서 천군 천사들의 노래와 구원받은 수없이 많은 성도들의 화답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보는데 따라서 그 삶에 큰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볼 줄 알아야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볼 수 없는 나라를 바로 볼줄 알아야 우리가 산다. 미리미리 보아야 한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 같이 모든 고난을 참았다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고 박상빈 성도, 박상빈 장군의 제3주기 추도예배를 드리시겠습니다.
다함께 묵도하시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 지금부터 3년 전에 한 시대를 위하여 예비되었으며, 그 시대에 귀중한 일꾼으로 쓰임받은 박상빈 성도님, 장군을 주님의 나라로 부르셨기에 오늘 우리가 추모하며 주님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구원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절망 중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신뢰의 마음을 주옵시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 만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온전케 하시는 주님! 말씀으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열매맺는 삶을 살게 하시며, 소망가운데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이제는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시겠습니다.
찬송가 405장을 부르시겠습니다.
성경 마1:1
아버지와 아들 목욕탕, 만두 7
무엇 때문에 관점의 차이
내가 왜, 이 집, 이 땅에 태어났나? 하필이면 성씨- 가문을 자랑 과거에 우리의 조상은 영의정, 몇 대 손
아브라함이 다윗 지금 무엇이 내 위치에서 주어지고 잇는가?
마1:1 아브라함, 다윗
믿음의 조상, 갈대아 우르 부르심, 짐, 이사 동네 사람들
다윗,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준비됨 없이 사무엘 선지자 만나다. 중심.
유대인 탈무드, 가문이 좋은 여우, 나쁜 여우
르호보암--악악 악선 선선 선악 토마스 풀러 경건 악
부전자전
아브라함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믿음, 섬김, 순종 왕국으로 세웠다.
이 속에 우리의 가정이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동일한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성경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이올린 경매, 1,2 노신사 연주
예수 그리스도 알지 못했을 때 이랬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 가치로는 따질 수 없는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가문이라는 것이다.(주관하실 때 연주하실 때)
1:1 바로 이 속에 우리가 들어갈 때 우리의 이야기가 될 때
중요한 시점에 있다. 바로 여기에서 시작, 새출발, 현재의 우리의 가치를 중요하게 인정해야 한다. 임마누엘. 우리의 가문을 통하여 온전하게 이루어 주심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 야곱, 다윗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우리 가문의 하나님이 된다.
인간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슬픔과 절망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도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좋은 부모님을 주시고, 아름다운 가정에서 성장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이 가정에 가장이셨던 박상빈 성도님, 장군ㅇ님을 추도하며 이 자리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용서의 하나님 우리가 어른들을 톤한 아버자의 큰 뜻을 헤아릴 수 없어서 그 뜻을 펴지 못한 우리의 부족을 고백합니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고인이 남기신 유업을 이어가지 못한 것과 어머니에게 다하지 못한 모든 정, 효도, 우의, 신의를 생각하며 우리의 부족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자비로운 하나님 아버지 여기의 우리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하늘의 여우언한 복을 내리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고인의 삶을 영원히 이어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위에 널리펴는 새로운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지금까지 이 가정과 가문을 지키시고 앞으로도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이 가문을 이끌어 주시고 형통케 하실 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기도하오니 이 가정이 더욱 더 믿음으로 진실하게 살며, 홀로 남으신 어머니께 효도하며, 형제 우애가 더욱 깊어지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가문이 되게 하옵소서. 날이 갈수록 믿음 안에서 번성하는 가문이 되게 하옵소서. 때마다 모이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서로가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일들이 더욱 넘쳐나게 하옵소서. 이 가문을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보호하여 주옵소서. 이들의 자녀들을 주님께 부탁드립니다. 항상 형통케 하시고, 주의신실한 믿음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으 직장과 기업과 삶의 터전을 주님께 맡깁니다. 인도하시사 풍성한 은혜로 채워 주시고 감사함이 넘쳐나게 하옵소서. 이후에 다시 사랑하는 남편을 아버님을 다시 만날 것을 소망하면서 승리하세 하옵소서.
고후5:1-10
거리감/ 생각의 차이, 관점의 차이
2절, 빨리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하는 마음-간절히 사모한다. 8절,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것은---
1절-텐트와 같다./약하고 흠이 많다. 이 몸이 무너지면 새로운 하늘의 집 곧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새 몸을 입게 된다.-믿음의 기초이다.
믿음이 성숙해지면 생에 대한 애착보다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다는 사모의 열정이 더 강해진다. 언제든지, 어느때든지
믿음이 성숙할수록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는 엄숙한 사실의 하나로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이다.
10절, 예외없이 우리가, 다, 반드시, 각각
믿음이 성숙할수록 이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값없이 받은 구원의 은혜-반드시 하나님의 요구가 따라온다.-구별된삶
결산할 것 준비하는 삶
9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 힘쓴다-간절히 열망한다. 야심을 가진다.
누구를 위하여 건강을 돌보는가?
심판대가 멀리 있지 않다.
19C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28세때 사형선고
영하 50도 기둥 세 개, 한 기둥에 세명씩 9명 시간 5분. 멀리서 자기를 그리워 하는 가족에게 작별인사, 다음에 함께 묶여 잇는 동료에게 작별의 키스 2분, 3분1은 따로 구별해 제일 마지막에 쓰기로 총소리가 나기 전에 파란 하늘을 한 번 더 둘러보고 내가 지금까지 발을 딛고 걸어다니던 이 땅을 한번 더 둘러보는데 쓰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은 2분-여러 가지 생각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황제의 특사 면제, 4년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복무
마지막이 다가온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무엇이냐, 누구를 위해 살았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
이제 우리의 남은 생을 정리하며 살든지 죽든지 거하든지 떠나든지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만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요, 소망.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나누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언제나 함께 하셔서 우리의 영혼 안에 모든 어둠이 주님의 빛앞에서 사라지게 하옵소서. 거룩한 사랑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당신의 지혜의 보화를 우리에게 열어 주옵소서. 우리의 모든 요구를 아시오니 시작한 바를 완전케 하시고, 성령께서 기도하는 중에 깨우쳐 주신 바를 또한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언제나 저희는 주님의 얼굴을 찾습니다. 얼굴을 저희에게 돌리시고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원하는 마음에 만족을 얻게 하시고 우리의 평안이 완전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들을 돌아보시사 은총으로 돌보아 주옵소서. 모든 악에서 그들을 지켜 주시고, 충만한 은혜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옵소서. 모든 가정으로 하여금 순결과 평화와 사랑과 환희의 성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사랑의 안전한 보금자리 안에 우리들의 사랑스런 가정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매일 매일의 생활 석에서 한걸음씩 주님을 따르고자 합니다. 비록 우리의 길들이 다를지라도 결국 주님께 향하게 하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독생자를 통하여 쓸모없고 방황하는 저희들을 주님께서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주시었고, 우리의 생명과 구원을 위하여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영혼에 주님의 사랑을 부어 주셔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대로 우리도 또한 형제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그들을 부드럽고 온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서로 돕게 하여주옵소서. 이같이 주님 때문에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므로 주님의 사랑 속에서 자라게 하시고 또한 동시에 주님 품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기도하옵는 것은 육신의 나약함으로 인하여 고생하는 이들과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이들 위에 자비로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주님의 은혜로우신 뜻에 합당하게 하셔서 육체와 정신을 건강하게 회복시켜 주시어서 거룩한 주의 전에서 주님께 감사드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과 힘과 생각을 북돋아 주셔서 이전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복종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자비로 더 가까이 가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한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요14:1-6
우리 인생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든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 중에 가장 확실한 진리가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불확실한 한 평생의 고독한 길을 죽음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길은 두 갈래의 길입니다. 한 사람은 죽음을 향하야, 한 사람은 생명을 향하여, 한 사람은 낮은 곳을 향하여, 한 사람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바른 길과 굽은 길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굽은 길을 잘못 들어서서 한평생 헤매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이 길이다 하고 찾았는데 세월이 다 갔습니다. 이렇듯 유감스럽게 한평생을 끝내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또 험한길, 평탄한 길이 있습니다. 똑같은 생을 사는 것 같으나 밝게, 평탄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험하게, 험악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행이 없이 사는 사람이 있고, 동행이 있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 늘 외롭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많은 친구를 가지고, 모든 사람과 깊이 사귀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마지막 목표를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은 이것이다. 확실하게 마지막을 보장받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몇 시간 전에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유훈과 같이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길을 가십니다. 좁은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나 분명히 생명의 길입니다. 친히 말씀하시면서 친히 먼저 가시고 계십니다. 주께서 먼저 가셨기에 이 길은 열린 길입니다. 좁은 길이지만 막힌 길이 아닙니다. 고난의 길이지만 죽음의 길이 아닙니다. 먼저 가셨으니 열린 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인생은 셋으로 엄격히 구분이 됩니다. 하나는 생리학적 인생입니다. 육체는 분명히 흙입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흙에서 나서 영혼이 함께하는 동안 흙에서 나는 음식을 먹고 살다가, 죽어 영이 떠나가면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둘째는 철학적 생명입니다. 의식세계입니다. 역시 사람은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닙니다. 맑은 정신으로 사는 것만 사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영적 생명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사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면 무섭고 모든 것이 저주요, 심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이 근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몸은 살았으나 영이 죽었을때에는 죽은 것이라고. 그러나 몸은 죽었으나 그리스도 안에 죽어서 영이 살았을 때에 성경은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잠자는 것입니다. 잠시 쉬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생명은 영적 생명입니다. 영적 생명이 살았을 때에 정신적 생명이 삽니다. 정신적 생명이 완전하게 살아나 있을 때에 사실은 육체적으로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도마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대답하십니다. 나는 생명이다. 내가 생명의 본질이다 하십니다.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뿐만아니라 생명의 길을 가셨습니다.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생명의 길이 여기 있습니다. 밀알 한 알이 썩지 않으면 그대로 있고,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시면서 친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생명의 길이 여기 잇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히11:13-16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당할 때마다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인도의 어느 산간에서 수도하고 있는 성자에게 한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어린아이를 끌어 안고 이 성자에게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성자가 보니 이 어린 아이는 이미 숨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성자가 부인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살려드리겠으나, 그 대신 저 동네에 내려가서 겨자씨 하나를 구하여 오십시오. 그런데 그 겨자씨는 지금까지 죽음의 고통을 한번도 겪지 않은 집에서 구해 와야만 합니다." 물론 그 부인은 그런 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성자는 다시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죽음의 비애를 겪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고요히 맞이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이란 아무리 길다 하여도 하나님의 영원성 앞에 조명하여 볼 때 안개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인생이 영원히 지속될 것같이 살아갑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삶이 어느 날 반드시 중단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삶의 태도는 현저히 달라질 것입니다.
한 로마의 황제는 인생을 엄숙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얻기 위하여, 그의 신하가 매일 아침 문안을 할 때마다 "폐하시여, 죽음을 기억하십시오"라고 명하였답니다. 그는 이 신하의 인사를 통하여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의 삶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를 떠나 주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정체를 알고 있는 성도들은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절망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과 얼굴을 대하여 만나며, 앞서간 성도들과 만나는 일입니다. 죽음은 부활의 약속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광의 교량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인생을 성찰할 때, 인간은 결국 나그네의 삶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그네입니다.
본문은 "이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고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들은 한번 결단한 믿음을 죽기까지 계속 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죽기 이전까지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생을 결산하는 가장 엄숙한 순간입니다. 믿음의 생활이 없이 믿음의 죽음은 불가능합니다. 믿음의 열조들은 소망을 영원한 천국에 두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아갔습니다.
본문에는 세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보고, 환영하며, 증거하엿음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의미있는 나그네의 삶을 시작하려면 이 세 가지 단어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볼 수 없는 천국을 믿음의 눈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그들의 삶이 전환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환영하였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약속의 메시지와 약속의 주님인 그리스도를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하였습니다. 영원한 빛 아래서 발견한 놀라운 삶을 증거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나그네 생활은 어떻게 출발할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출발하였다고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멀리 볼 수 있는 커다란 눈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보는데 따라서 그 삶에 큰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볼 줄 알아야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볼 수 없는 나라를 바로 볼줄 알아야 우리가 산다. 미리미리 보아야 한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 같이 모든 고난을 참았다고 했습니다.그리고 이 믿음을 소유하려면 멀리 있는 것을 붙잡아 들이는 커다란 팔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믿음을 위해서는 멀리 있는 것을 소유한 감격을 증거하는 입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그네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까? 본향을 확인하며 삽니다.
아브라함은 돌아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는 그의 고향에는 넓은 땅과 가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고생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돌아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보다 더 위대한 본향이 아브라함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딸인 김혜령 성도는 이 땅에서 길지 않은 생을 살았습니다. 많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인간 편에서 볼 때 남편의 지극한 간호도 외면했고, 부모님의 정성도 다 허사가 된 것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형편이기도 합니다. 못다한 일들이 많고, 너무나 안타까운 젊은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분명 하나님의 뜻이 계십니다. 이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잡읍시다. 그래서 본향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주께서 강건하게 하시며, 위로하시며, 함께 하심의 은혜가 넘쳐 나기를 원합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고 김혜령 성도를 떠나 보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슬픔 가운데 있는 유족들을 돌아보시사 하늘의 위로와 은혜를 덧입혀 주시옵소서. 특히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부활의 소망을 안겨 주신 주님께서 이 자리에 임재하셔서 우리가 고인을 다시 만날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위로받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구원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절망 중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신뢰의 마음을 주옵시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 만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옵는 것은 육신의 나약함으로 인하여 고생하는 이들과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이들 위에 자비로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주님의 은혜로우신 뜻에 합당하게 하셔서 육체와 정신을 건강하게 회복시켜 주시어서 거룩한 주의 전에서 주님께 감사드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과 힘과 생각을 북돋아 주셔서 이전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복종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자비로 더 가까이 가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한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전케 하시는 주님! 말씀으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열매맺는 삶을 살게 하시며, 소망가운데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드리옵나이다. 아멘.
히11:5-6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가 옳아야만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공로를 주장하며 행위에 너무 얽매여 있기 때문에 늘 죄의식 속에서 나는 죄인이라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봄니다. 그러나 행위가 완전하기 때문에 의인이 아니라 그 사람의 믿음입니다.
창15:6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말씀과 같이 에녹도 그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믿음 때문에 의로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며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라는 믿음은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처음과 나중이 되시며, 지금도 우리 곁에 서서 계시며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으로 믿는 그 믿음이 곧 의인으로 증거를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에녹의 믿음은 구하고 찾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임을 믿는 믿음입니다.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주시며, 그의 나라와 그의의를 구할 때 의식주에 대한 모든 것을 주시며,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 믿는 믿음이 곧 하나님의 증거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창28:10-20
오늘 본문에서 형 에서에게 쫓기어 고향을 떠난 야곱, 유숙할 곳이 없는 나그네의 석양길, 영접해 줄 사람이 없는 광야의 나그네, 동행자가 없는 외로운 나그네, 야곱의 모습에서 우리 인생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인생은 야곱처럼 고향을 상실한 나그네들입니다. 야곱이 고향을 떠난 이유는 장자의 기업을 빼앗기 위해 형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야곱처럼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금단의 열매를 먹은 죄로 인하여 에덴 동산에서 거치른 세상으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인생은 고향 상실의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인간은 누구나 따뜻한 곳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마치 나그네가 정든 고향을 사모하듯이 마음의 안식처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현대인이 평화를 갈망하고, 휴식처를 찾으며 삶을 추구하는 것도 결국 고향 상실증에서 오는 마음의 갈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화가 밀레가 그린 이삭줍는 여인, 만종은 인생의 고향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만종이라는 그림에 보면 석양 노을진 넓은 들판에서 부부가 일을 하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의 종소리를 듣자 일손을 멈축고 마주서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부부의 사랑, 노동의 신성, 자연의 신성, 신의 신성을 나타낸 그림으로서 인간들이 찾고 있는 이상향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와같은 고향 상실증에서 오는 나그네의 망향심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시인 하이네의 싯귀처럼 '인생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황금색 빛나는 별나라 저편에는 누가 누가 사는가'의 질문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쉴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근심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광야의 찬바람 불더라도 앞으로 남은 길 멀지 않네 산넘어 눈보라 재우처 불어도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이것은 영적 실향민의 노래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의 삶이 권태롭고 허무하게 느껴지면 질수록 영혼의 안식처가 그리워지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둘째로, 인생은 야곱처럼 불안하고 괴로운 시간의 소유자입니다. 야곱은 동행자도 유숙할 곳도 없는 고독한 나그네로서 언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습니다. 풍족한 노비도 없었으며, 손에 가진 것이라고는 막대기 하나 뿐이었습니다. 야곱의 시간은 희망의 시간, 평화의 시간이 아니라 무엇엔가 쫓기고 있는 불안한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인생들은 시간에 쫓기면서 살기 위하여 수고하며 애쓰다가 때가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나그네들입니다. 야곱의 광야길은 오늘 인생들의 세상 길과도 같습니다. 마음에 정착지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구원이란 시간의 질적 변화를 말합니다. 오늘의 삶의 괴로움과 불안이 기쁨으로 바뀌어지는 변화가 있어야 되겠는데 문제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으로 인한 변화인가가 문제입니다. 셋째는, 인생은 야곱처럼 하늘문이 열린 곳(벧엘)에 머물러야 합니다. 야곱은 괴로운 인생길을 걷다가 해가 저물어서 더 갈 수 없게 되자 넓은 들판에 돌을 베개하고 잠들게 되었습니다. 꿈에 본 즉 사닥다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똔 본 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했습니다. 야곱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운 후 그곳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했습니다. 벧엘은 하늘 문이 열린 곳입니다. 모든 집, 모든 성은 문으로 통합니다. 문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통하는 관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경우 하늘문은 하나님 편에서 열어 주신 것이지 야곱 자신이 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것이지 야곱이 하나님을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 문이 열림과 동시에 하늘문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고인이 날마다 주님의 전을 사모하며, 말씀을 사모하며, 은혜 가운데 사셧던 것처럼 우리는 항상 벧엘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벧엘은 야곱과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000집사님은 고통과 걱정과 고생과 아픔이나 곡하는 것이나 사망이 없는 주님께서 예비하신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이제 여기를 떠나면 정들었던 모든 것을 떠나게 되고, 육신은 산에 묻히게 됩니다. 분명 그동안 다하지 못한 효가 남아 잇습니다. 불효로 인한 마음이 찢어질 듯한 아픔이 있습니다. 이제는 그 모든 것 다 내려놓읍시다. 주님의 약속이 있는 벧엘에 머물러 하늘문이 열린 곳에서 저 천국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강건하게 하시며, 위로하시며, 함께 하시는 주님의 평안이 날마다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고 000집사님은 세를 지내시다 주님을 만나 그의 영혼에는 천국의 기쁨이 넘쳤고,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은혜와 성령님의 위로하심을 힘입어 잠자는 것같이 평안하게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우리도 이땅에 살면서 부활 신앙과 영생을 맛보며 살게 하시고, 저 천국을 향하여 힘있게 행진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사랑하는 아버지! 유족들에게 건강을 주시고, 믿음과 지혜를 주시며, 하늘문이 열린 벧엘, 주의 약속이 있는 벧엘에 머물러서 주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시며, 주의 위로를 받게 하옵소서. 또한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를 지켜 모든 삶이 형통하는 축복을 베풀어 주옵소서. 형제간에 우애가 있게 하시며, 고인의 아름다운 그 신앙의 유업들이 이 자녀손들을 통하여 이어지게 하옵소서. 또한 사랑하는 이들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교회의 기둥이 되게 하옵시며, 이 나라의 보배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는 자를 위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오신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땅 위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햇빛 밑에서 자라난 곡식을 먹는 동안에 하나님을 잘섬기는 자 되게 하시고, 선한 일에 땀을 흘리는 일꾼이 되게 은혜를 주옵소서. 오늘의 모든 장례 절차를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주관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계21:1-
사람은 누구나 헌 것보다는 새 것을 좋아합니다. 옷을 입어도 새 옷을 입고 싶어하고, 음식을 먹어도 새로 차린 음식을 먹고 싶어합니다. 또 가구나 집, 자동차도 중고품보다는 새 것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이제 읽은 말씀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졋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즉 너무나 영광스럽고 거룩한 것으로 변화되었기에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바다가 다시 잇지 않다고 했을까요? 히브리 사람들은 바다라함은 건너갈 수 없는 곳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다는 나눔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바다는 파도가 흉융하게 치는 곳으로 묘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다는 슬픔의 상징이요 고통의 상징인 것입니다.
고인이 가신 천국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고통, 슬픔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눈물이, 즉 슬픔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모든 눈에서 눈물을 씻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죽는 것이 없습니다.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곳에는 아픈 것, 즉 질병이 없습니다. 그곳에는 밤과 죄와 저주가 없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불행은 바로 이 저주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이불행의 근원이 제거되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2.절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의 수도인 새 예루살렘에는 누가 살까요? 그 곳은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 즉 우리 성도들이 신랑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곳입니다. 성경은 '그 에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그곳의 아름다움을 표현햇습니다. 다시말하면 천국이 마치 신랑을 위해서 단장하고 예비한 신부처럼 순결하고, 아름답고,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그 천국은 아름다운 곳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3절. 하나님이 그 곳에서 우리와 함꼐 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곳은 눈물이 없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악의 근원이 되는 사탄 마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입니까? 이 말씀은 고난 당하는 성도들에게, 그리고 순교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곳은 만물이 새롭게 변화되는 곳입니다. 새로워집니다. 그곳에는 갈증이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목마를 때 생수를 마시면 시원해지듯이 우리에게 있는 모든 갈증들을 시원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곳은 사망이나 통곡이나 아픈 것이 없는 곳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준비해 놓으신, 고인이 계신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것만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유족 여러분,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잠시 잠깐이면 없어질 슬픔과 괴로움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바라보면서 위로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겨주시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우리를 단장시켜 주시고 주님을 바라보며 저와 여러분도 고인과 같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는 승리자의 반열에 설 수 있기를 원합니다.
* 본문 : 왕상 2:1-3절 -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 설교자 : 라종렬 전도사
* 찬송 : 294 친애한 이 죽으니 222장 보아라 즐거운 우리집
* 먼저 이시간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어 슬픔에 젖어 있는 유가족들에게 세상이 줄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위로하심과 평강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 이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육신은 땅에 묻고 그리운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 가슴에 묻어야 할 시간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 지금은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우리의 슬픔을 극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 다만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위로를 바랄 뿐입니다.
* 지금은 우리가 어머니가 살아 있을때 잘해 드리지 못한 여러 가지 서운한 것들만 많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더 슬프고, 안타깝고,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가득합니다.
* 그러나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효도는 다 한것입니다.
* 딱 한가지 어머님께 효도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제삿날 음식을 걸게 차려드리거나 꼬박고박 기일을 엄수한다거나, 묘를 잘 써드린다거나 하는 것이 아닌줄로 압니다.
- 그러한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고, 사라져 버릴것들입니다.
*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효도의 길은 바로 어머니의 기도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 지금은 우리가 어머니에게 해줄것이 별로 없습니다. 고작해야 비싼 수의 한 벌에 한평남짓한 관하나 드릴 수밖에 없지요
- 그러나 어머니는 우리에게 너무도 큰 보물을 남겨주고 가셨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귀한 유산입니다.
- 그것은 바로 믿음의 유산입니다. - 이것은 억만금의 돈보다, 땅보다, 재물보다 귀한것입니다.
- 비록 어머니가 노쇠하여서 노년에 우리에게 준 것이 없을지라도
- 어머니가 새벽으로 그리고 시시때때로 밤이슬을 맞으며 하나님의 전에 가서 쌓았던 믿음의 유산들과 하나님께 드린 기도들은 오늘 살아 남은 우리 자손들에게 크나큰 축복인줄로 믿습니다. - 먼저는 여기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 그리고 우리가 슬픔중에라도 마지막으로 일평생 해야 할일은 우리 삶의 순간순간마다에 뿌려진 어머니의 기도의 응답들을 거두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 그것이 우리가 어머니에게 해드릴수 있는 마지막 효도입니다.
-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려도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면 어리석은것입니다. - 어머니는 그것을 아셨고 가장 귀한 것을 아셔서 그렇게 사셨고, 오늘 우리에게는 이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신 것입니다
- 사랑하는 유가족 여러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장례 절차를 마치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의 자리에 돌아가실것입니다
- 하지만 어머니의 모습들이 다 잊혀져 갈지라도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린 어머니의 기도는 끝까지 우리곁을 떠나지 않고 선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곁에 항상 동행할것입니다.
- 슬픔중에라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길 간구하고,
또한 그 슬픔중에라도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하셔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해드릴 수 있는 효도를 다하는 복된 자손들이 되시길 간구합니다
*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유가족과 모든 친지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위로가 함께 하길 간절히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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