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달설교

아버지(부모)의 마음을 갖자 / 누가복음 15:11-32

공 상희 2012. 5. 8. 06:12

아버지(부모)의 마음을 갖자 / 누가복음 15:11-32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어버이 주일은 80여년전 미국의 동부 웨스트 버지니아 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신앙이 독실한 자비스(Jarvis)라는 부인이 26년간을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에게는 안나라는 딸이 있었는데 어머니를 따라 주일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녀는 어릴적 어머니께서 학생들에게 제5계명을 설명하면서 "학생들은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에 마음으로부터 감사의 뜻을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라고 하셨던 말씀을 생각하면서, 신앙을 실천하려고 어머니의 추도일에 오신 손님들에게 카네이션 꽃묶음을 안겨주었는데 여기에서 어머니 주일이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1913년 미국의 의회는 5월 둘째주일을 어머니 주일로 정하고 모성을 존경하며 축하했던 것이 우리나라에도 받아들여졌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버이 주일로 발전되어 지켜지게 된 것입니다.

어버이 주일이라고 해서 몇 안되는 우리 교회학교의 아이들이 정성을 다해 만든 카네이션을 여러분들의 가슴에 달아드렸습니다만 여러분들이 카네이션을 달아드릴 어머님은 어디에 계신지요?

대부분의 농촌교회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도 부모를 공경해야 할 분 보다는 공경받아야 될 분이 더 많은 우리의 현실은 저로 하여금 어버이 주일에 무엇을 어떻게 설교해야 할지 참으로 갈팡질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여덟살 먹은 아이가 아버지를 고소하고, 아버지가 자기의 딸을 사창가에 팔아버리는 시대입니다. 가정에서 효나 사랑이란 단어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84세의 할머니가 항상 폭력을 휘두르는 할아버지와 이혼하기 위해 소송을 내어 결국 법원이 처음에는 기각하였으나 나중에 이혼을 결정하여 늦게 까지 해로한 한 가정이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다만 오늘의 시대적인 상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마을에도 나이드신 할머니들이 혼자 사시는 분들이 여럿 계신데, 그 가정들마다 다른 사정이 있겠지만 그래도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모두 가슴에 꽃을 여러 개씩 달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서울의 막내가 보낸 꽃 하나, 큰 손자가 보낸 꽃 하나, 그 꽃을 보면서 저는 그래도 흐뭇하기만 합니다. 아직 저도 나이가 많지 않아서인지는 모르나 왠지 카네이션을 달기가 쑥스럽거든요!

오늘 저는 거의가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께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함을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시고 이 세상으로 보내시어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는 항상 자식을 생각합니다. 이미 부모가 된 여러분은 자식의 일이라면 끔찍이 생각하십니다. 아마도 오늘 자녀가 여러분을 보러 왔다면 아마도 이 자리에 계시지 않으실 분이 거의 대부분일 것입니다. 교회 오는 것 보다 자녀들과 함께 있기를 더 원하고 자녀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여러분일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큰 믿음은 없다 하더라도 바로 부모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마음은 세상의 부모의 마음보다 더 넓고 큰 마음입니다.

① 먼저 자녀들을 향한 부모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줄 재산의 몫을 미리 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믿고 줍니다. 비록 아들이 그것을 다 탕진한다고 하더라도 아들을 믿고 아무 말도 없이 줍니다. 사회 경험도 부족하고 사업 수완도 없는, 그저 부모 밑에서 용돈이나 받아서 쓸 줄 알았던 아들이지만 부모로서, 아버지로서 이 아들을 새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많은 댓가를 치룬다 하더라도 아들만 다시 돌아와 제자리를 찾기만 한다면, 자기 자신을 깨달아 알고 바로 서 준다면, 재물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마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속담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이 아버지는 아들의 이러한 실패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재물이 없어지더라도 아들을 다시 새롭게 얻으려는 것 때문에 크나 큰 결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부모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② 그 다음은 자녀들을 인정합시다. 잘못하더라도 인격적으로 대해 줍시다. 못한다고 윽박지르거나 야단치거나 때리지 말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내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아들 딸임을 기억하며 사랑해 줍시다. 내 아들이 비록 죄를 짓고 감옥에 가 있더라도 내가 낳은 자식은 내 자식인 것입니다. 호적에서 파 버린다 하더라도, 아들 하나 없는 것으로 생각하더라도 내 자식은 자식입니다.

③ 바로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몇 해전 우리를 경악케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슴아픈 이야기입니다. 요즈음같은 시대에 아들을 생존경쟁에서 뒤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부모가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조기유학을 보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용돈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것도 모자라 고국에 돌아와 부모에게 더 많은 돈을 요구했습니다. 주는 돈마다 탕진하는 것을 알고 있는 부모가 더 이상 돈을 줄 수 없다고 버티자 그 젊은이는 부모를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왜 부모를 죽였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돈이 탐이 나서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박한상 군의 이야기입니다.

자식의 기를 꺽지 않고 키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쟁쟁한 학벌을 지니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 돈의 귀중함도 모르고 부모도 몰라보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애쓰기 전에,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바르게 사는 법을 어려서부터 심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④ 신앙의 자녀로 키워야 합니다. 이 박한상 군도 고등학교 시절에는 참으로 성실하고 신앙심이 깊었던 아들입니다. 그런데 대학입시를 앞두고 부모는 교회보다는 학교에, 공부에 더 치중을 하라고 했습니다. 한상 군을 고등학교때 신앙으로 지도했었던 전도사님은 아직도 그 점이 안타깝다고 하였습니다. 자녀를 바른 신앙과 믿음으로 키우려고 하지 않았던 부모는 너무도 큰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자녀를 인정하고, 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 신앙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⑤ 자녀가 감동되도록 부모의 역할을 다합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기의 몫을 다 주었습니다. 이미 아들은 아버지에게 받을 것을 다 받아 자기 힘대로, 아니 돈의 힘으로 살아 보았지만 실패의 연속입니다. 재물도 떠나갑니다. 친구도 떠나갑니다. 오직 자기를 맞아주는 곳은 더럽고 힘든 돼지 우리였습니다. 여기서 이 아들은 비록 재물은 잃었지만 인생의 귀한 아버지의 품(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아들은 인생이 비록 죽은 자와 같은, 돼지와 같은 인생이었지만 깨닫고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귀중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알고 높이 평가해주는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인 것입니다. 아들은 여기서 아버지에게 감동하고 있습니다. 상거가 먼 데에서 벌써 아들을 알아보고 버선발로 뛰어나와 아들은 부둥켜 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하는 모습에서 부모의 행동에 놀라고 있습니다. 황송해 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눅15:21)."

이제 아들은 더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음에도 "나를 품군의 하나로 써 주십시오"라고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더 좋은 것을 허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릅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15:22)" 누덕 누덕 기웠고 돼지 똥냄새나는 옷을 입은 그는 또 한 번 감동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한 번 더 감동할 일이 있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잔치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아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순종할 수밖에 없는 종의 모습으로 왔으나 아버지는 아버지의 넓은 마음을 다시 깨달은 아들을 무지무지하게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후반부에 보면 맏아들이 돌아와 동생을 비아냥거립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둘째를 감싸안았습니다. 이 사실을 안 둘째는 다시 한번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녀를 감동시킬 수 있는 부모, 자녀에게 떳떳하여 양심에 꺼리낌이 없는 부모가 될 수는 없을까? 이러한 부모를 둔 자녀는 아무리 해도 나쁜 길로 갈 수 없으며 효도를 하지 말라고 해도 효성이 지극한 자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감동받고 자란 아이들은 어디가 달라도 다릅니다. 부모에게 사랑받고 자란 아들은 어디가 달라도 다릅니다. 온실에서 화초처럼 키우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가정에서의 교육이 제대로 안되고 있는 실정이라는 교육보고서가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바르게 사는 부모로서 자녀들을 바르게 가르쳐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신앙 안에서 살도록, 감동받으며 살도록, 바르게 살도록 하여 어디에서든지 인정받는 자녀가 되도록 하여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 광 욱 (목사, 충주 대평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