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주일]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녀들 (눅 2:41-52)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매우 소중한 기록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유아시절부터 서른 살 쯤 되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까지, 그 어간에 관한 유일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셨을 때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유대인은 열두 살이 되면 성인으로 대우합니다.
그리고 성인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절기에 성전에 올라가야 합니다. 그 절기는,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을 말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어려운 경제형편에도 불구하고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유월절은 7일 동안 절기를 지냅니다. 그 후에, 사람들은 각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친족과 동리 사람들과 어울려 갈릴리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소년 예수는 혼자 예루살렘에 남았습니다.
그 부모는 예수님이 당연히 일행 중에 섞여서 동행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룻길을 가서 해질녘에 예수님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놀랐을까요? 이튿날 그 부모는 소년 예수를 찾으면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사흘 후에 그들은 성전에서 율법 선생들 중에 앉아서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율법 선생들은 소년 예수의 탁월한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때에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모친 마리아는 말하기를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어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소년 예수님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한가지로 내려가셔서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동시에 육신의 부모에게 아들로서의 도리를 다하셨습니다. 52절에 보면, 소년 예수의 성장과정을 한 마디로 요약합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믿는 모든 자들의 본이 되시는데, 이는 유년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유년시절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본문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로 양육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본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우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의 언행은 믿는 우리에게 소중한 본보기가 되시기에 충분하십니다. 소년 예수가 그 부모를 따라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은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친 마리아가 성전에서 율법 선생들 중에 앉아 있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며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고 하자,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라고 대답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을 일컬어 “내 아버지”라고 하셨고, 자기가 아버지 집 곧 성전에 있어야 될 것을 당연하게 여기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에 대하여 분명하게 천명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녀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가정과 학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어디를 가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뚜렷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소속감을 갖고 살아갈 때 기뻐하십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보세요. 이들은 유다 왕국이 멸망했을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소년들이었는데, 왕립학교 학생으로 뽑혀서 3년 동안 바벨론의 언어와 학문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왕립학교 학생들에게 특혜를 내려 왕이 하사하는 음식을 먹게 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감히 먹어볼 수 없는 진미와 포도주를 매일 같이 먹게 되었으니 이들에 대한 왕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왕이 하사하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음식은 먼저 우상에게 바친 후에 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들로서는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네 소년은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기로 뜻을 정하고 이를 환관장에게 말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환관장이 처음에는 왕의 진노를 살 것을 두려워하여 만류했으나 다니엘이 나서서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라고 하자, 그 말대로 열흘을 시험하기로 했습니다.
열흘 후에 보니, 과연 네 소년의 얼굴이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 윤택하여 보였습니다. 이에 환관장이 네 소년에게 왕의 진미와 포도주 대신에 채식을 주어 먹게 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보여준 결단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다인이라는 소속감이 분명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에는 우리 자녀들의 정신을 병들게 하는 것이 한 둘이 아닙니다. 물질만능주의, 성공지상주의가 어린 자녀들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 가운데 어린 자녀들에게 해로운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인터넷과 피시를 통해서 불량 게임이나 유해 사이트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자정이 넘도록 공부에 시달리다보니 가족 간의 대화를 기대할 수 없고 집은 하숙방과 같은 역할에 머물 뿐입니다.
가정이나 학교나 학원, 어디를 가도 인성교육을 기대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그렇다고 청소년들이 학문을 연마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서 지나친 경쟁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더구나 현재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남들이 하니까 내 자녀도 남들처럼 시켜야 한다는 식입니다. 너무나 교육적이지 못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교육당국과 학부모들이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의 자녀 교육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자녀들의 신앙교육과 인성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다니엘서 1장 17절에 보니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고 했습니다.
삼 년 후에, 느부갓네살 왕이 소년들을 불러서 면접을 보는데,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낫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에 왕이 그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가까이서 왕을 모시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인정을 받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함을 우리 자녀들이 알고 행할 때 하나님께서 저들을 기뻐하시고 다니엘과 그 세 친구처럼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그들의 나아가는 앞길을 형통케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유월절 절기를 지키러 왔던 사람들이 다 집으로 돌아가는데도 소년 예수께서 성전에 남아 계셨다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심정을 대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녀들로 하여금 할 수 있는 대로 교회의 모임에 힘써 참석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이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집에서만 시간을 보낼 수는 없으므로 자연히 유해한 환경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자녀들이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신앙적인 분위기에서 교제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학교에서 주일에도 공부를 시키기 때문에 교회에서 보낼 시간을 별로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자녀들이 주일성수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자녀들을 사랑하시거든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성도님들의 자녀들도 소년 예수처럼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녀로 양육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예루살렘을 떠나 하룻길을 가서 소년 예수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도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부모가 어린 예수님을 만난 곳은 성전의 부속건물로서 율법 선생들이 백성들을 상대로 율법에 대하여 묻고 답하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소년 예수님은 선생들 중에 앉아서 진지한 태도로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서 열심히 배우셨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신성으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인성으로는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배움을 통해서 지식을 더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이 인성을 통해서 발현되어서 온전한 지식에 이르게 되셨을 것이란 점에서 우리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데 누구보다 열심을 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셨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산상수훈을 보면,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 얼마나 탁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의 형식적인 준수에 만족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아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예수님의 교훈을 듣고 놀랐는데,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막 1:22). 여기서, 권세는 무슨 세속 권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격적인 권위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채 가르쳤으므로 그 말에 권위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무지와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가르치면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한 인간의 말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그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디모데후서 3장 15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5)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또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시편 19편에서 이 같이 말했습니다. “7)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8)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10)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방금 인용한 성경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며 우리를 지혜롭게 하며 온전케 하며 바른 길로 인도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학교 공부도 가르쳐야 하겠지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1989년에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된 사람이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순회 교사에게서 읽기와 쓰기와 셈하기를 배운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가 선생님에게서 배운 기간은 통틀어 1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링컨은 당시 캠브리지 대학을 나온 인텔리들보다 더 지혜롭게 정책을 폈습니다.
어디서 그런 지혜를 얻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성경을 사랑해서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한 결과였습니다. 그가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자기가 보던 성경을 링컨에게 물려주면서 “내 아들아! 이 성경책은 나의 부모님께 받은 책이다. 내가 여러 번 읽어 많이 낡았지만 우리 집의 값진 보배다. 내가 너에게 100에이커의 땅을 물려주는 것보다 이 한권의 성경책을 물려주는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너는 성경을 읽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다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다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라고 유언 했다고 합니다.
링컨은 어머니가 물려주신 성경을 열심히 읽은 결과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세상의 지혜보다 탁월한 하늘의 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도님들께서 자녀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기 위해서 매일 같이 가정예배를 드리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의 홈페이지에 가정예배를 위한 공과가 실려 있는데 매일 성경을 한 장씩 읽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한 장 읽는데 드는 시간은 3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돌아가면서 읽고 기도하고 마치는데 15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정예배를 드리는 15분이 가정의 분위기를 은혜롭게 만들고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는데 큰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수백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성경을 한번 읽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자녀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장하시고 할 수 있는 대로 함께 성경을 읽는 시간을 갖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어려서 읽은 하나님의 말씀이 등불이 되어 자녀들의 평생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로 양육해야 합니다.
소년 예수님은 그 모친이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고 했을 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비록 열두 살에 불과하셨지만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의식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양부 요셉과 모친 마리아 앞에서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51절에 보니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했습니다. 소년 예수님은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부모의 말에 순종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 인생들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효도가 무엇이냐 물으면, 부모에게 용돈을 넉넉히 드리는 것, 자주 찾아뵙는 것, 사회에서 성공출세해서 부모의 자랑이 되는 것, 몸 건강히 사는 것, 결혼해서 화목하게 사는 것, 등을 듭니다. 물론, 부모가 자녀들이 이 같이 하는 것을 보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보다 부모의 마음을 가장 기뻐하는 것은 자녀들이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순종할 때 부모의 마음은 가장 기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 공경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에베소서 6장 1절에도 이르기를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자녀 교육은 심각하게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부모가 자녀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한 실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녀를 사랑해도 법도가 있는 법인데 본능적인 사랑에 치중하다보니 자녀들이 부모의 지시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장성하고 맙니다. 그 결과, 자기 본위의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부모의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여서 부모 공경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이 하나 같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심부름을 갔다가 형들에게 붙잡혀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창세기 37장을 보면, 그 형들이 세겜에서 양떼를 칠 때에 야곱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그들에게 다녀 오거라” 하니, 요셉이 대답하기를 “내가 그리하겠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세겜에 가보니 형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찾아 빈들을 방황하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나 묻기를 “네가 무엇을 찾느냐”고 했습니다. “내가 나의 형들을 찾는데 청컨대 그들의 양 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시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에 요셉이 도단까지 그 형들을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얼마나 순종을 잘 하는 요셉입니까!
다윗 역시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역시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으로 전장에 나간 형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순종의 사람 다윗을 들어서 적장 골리앗을 무찌르시고 이스라엘을 구하는데 사용하셨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죠지 와싱톤에 관한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생일을 맞이했는데 많은 하객들이 연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손님 중 한 사람이 와싱톤의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자당께서는 아들을 어떻게 키웠기에 그토록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까?" 그러자 그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예, 나는 아들에게 복종을 가르쳤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는 자녀가 사회에 나가서도 상급자의 인정을 받고 부하들에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지, 순종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인정을 받지 못하고 리더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만민의 구세주가 되신 것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빌 2:5-11).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말씀을 비롯해서 정당한 권위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각자의 개성을 지나치게 존중한 나머지 순종을 구시대의 낡아빠진 도덕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어린 자녀들이 부모의 말에 순종하기보다는 자기주장을 끝까지 관철하려고 듭니다. 자기들은 학교에서 새로운 지식을 배웠는데 부모는 수십 년 전에 배운 낡은 지식을 갖고 무얼 안다고 그러느냐고 부모를 깔봅니다. 우리는 컴퓨터 시대인데 부모는 컴맹인 주제에 이래라 저래라 그러냐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교만한 마음을 갖고 부모를 무시하고 깔보면 안 됩니다. 그래서는 절대로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합니다. 오늘날 학교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선생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존경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니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질 리가 만무합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일차적인 책임은 가정이 져야 합니다. 부모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고, 그 다음에 선생님들을 비롯해서 학교에 이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자녀에게 순종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강압적으로 순종을 요구한다고 자녀들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최선의 방법은 부모가 먼저 권위에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순종하는 부모를 보면서 자녀들이 순종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5월 5일은 어린이날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적지 않은 부모가 어린이날은 어린이들을 기쁘고 신나게 해 주는 날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그것이 이 날을 제정한 목적이라면 어린이날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부모 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성년이 되기까지는 양육 받는 위치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할까요? 그 답은 예수님을 본받는 자녀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예수님처럼 온전하신 본보기가 계신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요.
아무쪼록 사랑하는 자녀들을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로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녀로 양육해야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로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의 지혜와 키가 자라감에 따라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자녀들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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