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달설교

스승이 필요한 시대(누가복음5:1-7)

공 상희 2012. 5. 4. 16:47

스승이 필요한 시대(누가복음5:1-7)

 

우리는 모두 마음의 한 구석에 영원히 지을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평생 숫한 만남의 사람이 있고, 인연(因緣)으로 얽혀진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들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분은 우리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스승의 주일로 예배를 드리는데, 스승의 역할을 하는 목회자들이나 교사들에게 선물을 드리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나 교사의 사명과 위치 및 그 역할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일깨우며 그들의 수고와 어려움을 성도 여러분이 이해하시고 기도로서 그리고 제자들과 자녀들의 영적, 정서적, 사역적인 각 부분에 있어 협력을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기도하며 적극적으로 돕자는 의미에서 이 스승의 주일을 정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1.먼저 영적 지도자의 중요성을 말씀 드리려합니다.

사람은 세상에 출생하여 죽을 때까지 배우며 가르치며 삽니다.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은 짐승이기를 자처하는 것이며 가르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정신병자입니다. 원하던 원치 않던 우리 인간은 학생 아니면 선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평생 학생의 심정으로 살며 한평생 스승의 정신으로 후배인생들을 대하며 살자' 이것이 성경말씀이 주는 삶의 철학이요 목자로서의 좌우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이라면 자녀의 단계로 시작하여 학생, 친구, 남편이나 아내, 그 다음이 부모의 단계에 이르고 나중에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로서 생을 마치는 것이 보통의 일생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일평생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이요 자녀로서 살아갑니다. 여기서 자녀나 학생은 부모와 선생님에게 배우는 입장입니다.

그렇지만 부모와 학교의 선생님에게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영원한 진리, 구원의 진리, 하나님과 함께 사는 진리, 영성을 포함한 전인적인 인간성 양육의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영적 지도자를 교회를 통하여 세우신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를 통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아름답게 신앙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대하고 놀라운 꿈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지도자란 사람들에게, 특히 자녀와 학생들에게

첫째로 꿈과 환상을 주는 자이며,

둘째로 복음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과 행복하게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터득시켜주는 자이며, 셋째로 본을 보이는 자이며,

넷째로 모든 진리를 가르치는 자이며,

다섯째 사랑으로 양들을 돌보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모든 지도자는 이 범주에 다 속합니다. 이제 목사와 교사들의 중요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합니다. 교사의 위대함과 중요성을 다음의 이야기를 통하여 확실히 하게 됩니다. 한 어린 소년이 농부이신 아버지와 마을에 가보기 전까지 농부가 되려고 했었습니다. 마을에서 그는 엔지니어가 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 후에 변호사 사무실을 가게 되었고 변호사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환자를 돌보는 의사를 보게 되었을 때 그는 또 다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설교를 듣던 그는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농부, 엔지니어, 법률가, 의사, 군인, 항해사, 목사-이들 중 나는 무엇을 위하여 태어났습니까?" 그가 기도 드리는 중에 세미한 음성이 방안에 메아리치는 것 같았습니다. "왜 너는 그 모두가 되어 보지 않겠느냐?" 그 소년은, "네? 어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음성이 대답하기를 "그들의 교사가 되면 되지 않는가? 그러면 어떤 아이는 책을 쓰게 될 것이고, 어떤 아이는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아이는 수술을 잘 하게 되고, 또 어떤 아이는 설교를 잘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모든 것 중에 가장 훌륭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들은 네가 그들의 교사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이 교사나 목자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교육이란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심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교육은 돈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시설이나 교육 기자재의 현대화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이 없이는 교육은 죽은 것입니다. 선생님에 대한 참된 존경과 고마움이 있을 때 비로소 교육은 시작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러분, 스승의 날에 꽃 한 송이 받는 것조차 무슨 큰 죄를 짓는 것처럼 취급받는다면 교육을 위한 모든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요?

세계에서 제일 우수한 민족이 바로 유대민족입니다. 노벨수상자의 22%(480명중 93명), 세계 200대 재벌의 15%, 미 의회 정치인의 10%, 미국 변호사의 30%, 법대, 의대교수 중 50%, 언론사, 예술가, 과학자 등 각각의 분야에서 최고의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민족이 바로 유대인입니다.

어떻게 소수민족인 유대인들이 이처럼 많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은 그들의 교육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의 교육 시스템 가운데 어떤 요소가 저들의 후손들을 세계의 어느 종족과도 비교할 수 없는 두각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게 했을까요?

선생님의 한마디 말씀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그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을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두각을 나타내는 민족으로 키운 힘이 되었습니다. 즉 교육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교육의 주체인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는 민족, 그런 사회풍토가 유대인을 가장 강인한 민족으로, 다방면에 걸쳐 세계 최고의 두각을 나타내는 민족으로 키운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교육을 가장 귀하게 여겨온 족속들입니다.

그리고 교육의 주체인 랍비를 존경하였습니다.

"랍비"라는 말은 "위대하신 분" 또는 "존경할 사람"이라는 뜻의 말입니다.

유대사회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들은 정치가도, 재력가도, 사업가도, 군인도, 관료도 아니라 랍비들, 즉 선생님들입니다.

랍비들의 가르침을 묶어놓은 책이 탈무드인데, 탈무드가 유대사회에서 가지는 권위는 어느 정도인가 하면 성경에 버금갈 만큼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교육은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선생님을 존경하면서 자라도록 만들어진 사회적 분위기, 사회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는 선생님에게 가장 성스러운 권위를 부여했던 공동체가 유대인 공동체요 사회였습니다. 이런 것이 유대인을 유대인 되게 하는 교육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현실은 지금 선생님을 모두 죄인으로, 부도덕한 사람들로, 돈만 아는 돈 벌레로 깔아뭉개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풍토에서 무슨 교육이 이루어지겠습니까?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한국교회는 19세기 프로그램으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어린이를 가르친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학교는 청소년들에게 영적인 감동과 감격을 주는 곳입니다.

학교교육은 이성과 경험을 강조하는 머리교육이며 교회학교는 계시와 영성을 강조하는 가슴교육입니다. 그러므로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교회는 지식보다 감동을 심어주는 곳입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부속품이 아닙니다. 그들만의 신앙과 문화와 교제를 인정해주어야 합니다.한국 교회는 정말 어린이를 가슴에 품고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21세기 한국교회가 사막으로 변할 수도 있고 푸른 초원으로 변모할 수도 있습니다.

위대한 스승

한 소년이 ?위대한 스승?을 만나기 위해 오랫동안 방황했습니다.

소년은 깊은 숲과 황량한 사막을 헤맸으나?위대한 스승을 찾지 못했습니다.

소년은 너무 지쳐서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흰 수염과 맑은 눈동자를 지닌 한 노인이 나타나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소년아, 왜 그렇게 방황하고 있느냐? 소년이 대답했다.?위대한 스승을 찾고 있습니다? 노인은 얼굴 가득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네가 찾는 위대한 스승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마. 지금 곧장 너희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한 사람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뛰어나올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네가 찾는 ?위대한 스승?이란다?

소년은 ?위대한 스승?을 빨리 만나고 싶어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소년이 대문을 두드리자 한 여인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뛰어나와 소년을 맞았습니다.

그?위대한 스승‘은 바로 소년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최선의 교육자입니다.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인 것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세운 학교입니다.부모는 그 학교의 교사입니다.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을 말씀 안에서 잘 양육하도록 부모에게 맡기셨습니다.부모는 세상의 가치관에 대항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가치관을 심어줄 책임이 있습니다.그러나 사회가 산업화 분업화되면서 하나님의 학교로서 가정의 기능은 점차 약화되어가기만 합니다.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모든 것은 일반 학교 교육에 맡기고 가정은 단지 쉬는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한국 사회의 비극은 부모가 더 이상 교사이기를 포기한 데 있습니다.

아주 어린 나이로부터 자녀들을 어린이 집으로,유치원으로,학원으로 내몹니다.부모는 이제 학비를 조달하거나 생활편의를 도모해주는 아저씨며 도시락이나 싸주는 아주머니 노릇밖에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칼릴 지브란은 ?부모는 활이요,자녀는 화살이니 하나님께서 궁수가 되어 목표지점을 향해서 멀리 당길 때 그 화살은 과녁을 향해 나아간다?고 했습니다.그렇습니다.부모는 활입니다.부모가 당기는대로 자녀들은 나아갑니다.여러분은 어디를 향하여 화살을 쏘고 있습니까.세상입니. 아니면 하나님을 향해서입니까.또한 당신은 당신의 자녀가 하늘을 향해 날아갈 수 있도록 충분한 힘을 제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맡기신 이 사명을 학교의 선생님이나 학원에 넘겨주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가정에서 이뤄져야 합니다.자기 자식을 제자로 삼아 주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운 학교인 가정은 무엇보다도 자녀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는 곳이 돼야 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기를 살려주어야 합니다.부정적인 말과 꾸중보다는 긍정적이고 칭찬하는 말을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어렸을 적 부모의 말 한마디는 그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아무리 부족해도 ?너는 앞으로 위대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자신이 하나님의 역사를 창조하고 있는 위대한 존재라는 신성한 자존심을 심어주어야 합니다.그럴 때 긍정적인 가치관으로 인격이 형성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원하시는 도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가정이라는 학교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는 그리스도의 가정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본디부터 스승을 부모만큼 공경하는 것을 도리로 여겨왔습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참스승, 참교육을 외치는 소리가 매우 높습니다.

오늘처럼 혼탁한 시대는 참 스승이 필요한 시대이다.

요즈음처럼 소란스러운 시대, 정의가 땅에 떨어진 시대에 참된 스승을 원합니다.

육신은 어버이에게서 받았지만 정신은 그분들에 의해 길러지기에 그림자조차도 밟을 수 없는 제2의 부모로 섬기는 미풍양속이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스승은 스승으로 대접받아야 합니다. 삶의 고비마다 인생의 빛이 되어 마음을 어루만져 줄 스승이 단 한 분도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스승이 필요한 시대이다.

이것은 우리네 현실이 참 스승을 갈구하나 만나보기 어렵고 참 교육을 희망하나 찾아보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불완전한 인간에게서 참과 완전을 기대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요, 무리일 것이나 그래도 사람들은 여기에 근접한 스승을 성직자나 교육자에게서 찾고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정말 가르침을 베풀 수 있는 사람, 모든 것을 따라서 행동할 수 있는 참된 스승이 필요로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면 오늘에 어떤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신가?

어떤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인가?

얼마 전 일간지에서 초등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과 싫어하는 선생님에 대한 조사결과를 일본학생들과 비교하여 실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바라는 선생님의 모습은 우리가 닮아야할 품성이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 4위는 늘 웃는 얼굴로 대하는 선생님, 3위는 순수하고 솔직한 선생님, 2위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선생님, 1위는 재미있는 선생님이고,

일본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 4위는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 3위는 친하기 쉬운 선생님, 2위는 유머가 있는 선생님, 1위는 상냥한 선생님.

반면에 한국 학생들이 싫어하는 선생님으로는 4위는 무뚝뚝한 선생님, 3위는 잘난 체하는 선생님, 2위는 교실에서 담배 피우는 선생님, 1위는 짜증을 많이 부리는 선생님이고,

일본 학생들이 싫어하는 선생님으로는 4위는 잔소리가 심한 선생님, 3위는 완고한 선생님, 2위는 편파적인 선생님, 1위는 화를 잘 내는 선생님.

로엘 하우는 그의 저서 `대화의 기적'에서 인간은 두 가지 대화의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말로 된 언어와 관계로 된 언어가 그것입니다.

인간 사이에서 대화의 장벽을 해소하려면 말로 된 언어보다 관계로 된 언어를 잘 구사해야 합니다.좋은 관계 개념은 대화의 기적을 낳게 됩니다.

우리는 대화의 관계 속에서 살지만 너무나 많은 장벽들이 관계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장벽은 심심하여 만들어 놓은 무료의 산물이며 사람이 사라지면 장벽은 절로 붕괴되는 것입니다.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장벽이 많이 있습니다.인종의 장벽,언어의 장벽,종교의 장벽,문화의 장벽,그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장벽들이 있습니다.그러나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는 장벽이 없었습니다.이 지구상에 어디를 가 봐도 하나님이 만드신 본래의 장벽은 없는데 인간이 무료하여 별의 별 장벽을 만들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훌륭한 선생님이 한 분 계셨으며 그 선생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축복을 받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베드로.

베드로는 어부요 예수는 목수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목수인 예수가 평생을 어부로 그리고 자기의 안 동네인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을 어디에다 내리라고 훈수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는 축복이었습니다.

참된 선생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만인이 우러러 숭모하는 인류의 참 스승,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신 최고의 스승입니다.

히브리어로 랍비는 선생님(요20:16)입니다.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랍비라 부르심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랍비라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마 28:8,10).

이같이 말씀하심은 선생과 지도자의 책임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낙심케 하면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물에 빠져 죽게 하는 것이 낫다고 마가복음 9:42절에 말씀했습니다.

참된 선생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에게 많은 육신의 스승들이 있지만, 영원한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인생에게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 모든 스승들의 은혜를 무엇으로 다 감사할 수 있으리요 마는,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만큼 우리에게 위대한 스승은 없다고 봅니다.

그는 자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고 하면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고, 드디어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스승!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인이요, 참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 대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 스승이 진정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 한 중년 부부가 있었는데 아내의 시력이 너무 나빠서 눈 수술을 했어요.

그런데 수술이 잘못되어 실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일 후 남편은 매일 같이 아내의 직장까지 아내를 출근시켜주고

하루 일과가 끝난 후에는 집까지 데려다 주었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서로 직장이 너무 머니,

혼자 출근하라고 하더랍니다. 이 말에 아내는 남편에게 너무나 섭섭해했고 사랑하는 남편이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해 배신감까지 느꼈더랍니다.

그리곤 이를 악물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후, 그 다음 날부터 혼자 출근하기 시작했어요.

지팡이를 집고 버스를 타고, 하면서 많이 넘어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혼자 다니는 훈련을 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어느 정도 익숙해진 2년---.

버스운전 기사가 어느 날 이 부인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아줌마는 복도 많소. 매일 남편이 버스에 함께 앉아 있어 주고 부인이 직장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지켜보다가 등뒤에 손을 흔들어주는 보이지 않는 격려를 해주니까요.'

부인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아내가 버스에서 더듬거리다 넘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그 심정과 일으켜 주고싶었을 순간적인 강한 충동과 사랑하는 아내가 혼자 슬피 울며 자신을 원망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남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때로는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아무 증거가 없다고 여겨 그가 나를 버리신 거라고 생각하며 혼자 괴로워 할 때

그런 나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버스 뒷좌석에 앉아

미어지는 가슴을 쓸어 내리실 하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버스 바닥의 모에 걸려 넘어져 아파 할 때도---.

스승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감동(感動)이 존재해야 합니다.

배우고 싶어 목마른 제자의 뒤통수를 쳐줌으로써 제자는 무릎을 꿇습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에너지가 감동입니다. 감동이 없는 한, 스승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 않는다?는 말은 애초에는 ?스승의 그림자는 밟을 수조차 없다?는 고마움의 절규이지, 자칫 오해되듯 강제적 규범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 스승을 교단에서만 찾을 일이 아닙니다.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은인들도 두루 스승으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스승의 날에는 현재의 분야에 몸담도록 결정적으로 조언해 준 친지라든지,

업무의 핵심을 짚어 준 직장 선배를 찾아 고마움을 표하는 것도 스승의 원래 뜻을 살리는 좋은 방법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자신 앞에서, 교회 앞에서나 학생 앞에서 그 어떤 시각에서 보더라도

오늘 날 '스승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결론이 아닌가 합니다.

참 스승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선생이 되려는 사람은 먼저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입으로 가르치지 말고 행동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