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부활절

(부활절 제목 : 의심하느냐?

공 상희 2012. 4. 4. 18:23

제목 : 의심하느냐?
본문 : 요 20:24-31
설교 : 채규현 목사

할렐루야!
주님의 부활하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그 주님의 부활을 믿는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기본은 예수님의 부활에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부활을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끊임없이 전했고, 사도행전에서  복음을 증거 할 때마다 그 복음증거의 핵심은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죽였던 그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함을 입었다. 여기에 소망이 있다. 여기에 진정한 우리의 삶의 새로운 의미가 놓여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사건을 우리는 계속해서 들었기 때문에 당연히 있는가보다 생각하지만, 사실 이 부활은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라서 믿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세상 사람들도 믿지 않을뿐더러 윤회라는 것을 믿는데 이 세상에서 잘못하면 소도 되고 바퀴벌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에게 진정한 진리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부활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이란 단지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육체가 분리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모든 사람이 부활합니다. 모든 사람의 영혼과 육체가 다시 합쳐집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부활하는 것을 아십니까? 그런데 그 부활은 우리가 의미하는 부활은 아닙니다. 부활한 상태에서 심판대 앞에 서죠. 사람이 한번 죽어서 끝이라면 안 믿어도 ‘그냥 없어지면 되니까….’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무서운 사실은 그게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한번 죽어서 끝이 아니고, 죽은 다음에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영혼과 육신이 합해져서 그 다음에 영원히 사는데, 어디에서 사느냐가 문제라고 했습니다. 천국에서 사느냐, 아니면 심판을 당하는 영원한 고통의 지옥 속에서 사느냐,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미하는 부활은 그저 육신과 영혼이 다시 합쳐진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의미하는 부활은 우리 몸이 다시 신령한 몸, 영광의 몸을 입어서 천국생활 하는 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지금처럼 우리가 연약한 몸, 불완전한 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몸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어딘가는 나름대로 우리 몸에 대해서 자격지심이 있습니다. 얼굴이 뭐 좀 어떻게 됐으면, 몸매가 뭐 좀 어떻게 됐으면…. 그런데 천국가면 그럴 염려가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절대로 성형외과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완전한 몸이니까, 만족스러운 몸이니까요.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그러니 부활에 대해서는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라 그 전에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표적으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살렸고 나사로도 살렸지만, 그 부활은 단지 표적적인 면이지 그들도 결국은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사신 것입니다. 이 사실이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사실은 안 본 사람은 믿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0장 처음부터 보면 “안식 후 첫날….” 바로 오늘입니다. 그 부활의 날을 계속해서 “제 삼일에…”라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4복음서 전체에 공통적으로 “안식 후 첫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한 주가 시작하는 그 첫 시작에 예수님이 새롭게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안식 후 첫날”이라고 계속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아마도 바로 그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려고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모이는 때가 바로 안식 후 첫날이었습니다. 왜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날을 주의 날-주일(主日이)라고 이름을 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일이라는 의미는 계시록 1장에도 ‘주의 날’이라고 나오는데, 구약성경에 보면 ‘여호와의 날-두렵고 떨리는 여호와의 날’이라고 나옵니다. 그 날은 심판날입니다. 이 세상이 심판받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입니다. 그것을 여호와의 날,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안식일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이후에는, 모든 이 세상의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월, 화, 수, 목, 금, 토, 주일이 전부 안식일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시간이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주의 날, 안식 후 첫날,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을 고대하는 바로 그 날입니다. 바로 그 날에 주의 백성들이 모이는데, 특별히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에 모이는 이 부활주일이 특별히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에 우리가 흰 옷을 입습니다.  흰 옷을 입는 이유는 마지막 주님 앞에 가는 그 날에 우리가 세마포 흰 옷을 입거든요. 바로 그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의미에서 우리가 흰 옷을 입습니다. 마침 이번이 좋은 기회입니다. 앞으로 우리 부활주일이 되면 웬만하면 흰 옷을 입읍시다. 그렇게 해서 정말 그 날을 고대하는 삶으로서 우리가 함께 표시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께서는 전부 다섯 번 나타나셨습니다. 제일 먼저, 새벽 미명에 마리아와 여자 일행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향을 집어넣기 위해서 왔는데 무덤이 열려있고 무덤이 비어있었습니다. 너무나 그들이 놀라서(부활을 믿지 않았죠)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중간에서 예수님을 만났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인 줄을 몰랐습니다. 제자들에게 이야기하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한걸음에 뛰어가서 무덤을 보았습니다. 빈 무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뿐만 아니고, 바로 그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고, 저녁에는 열 명의 제자가 있는 곳(가룟 유다가 빠지고 도마가 없는 가운데)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승천하시기까지 40일 동안 예수님이 다섯 번 나타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 다섯 번만 나타나신 건 아니겠지만, 기록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 예수님이 나타나셨던 제자들 가운데에 없었던 도마는 그럴 리가 없다고 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저는 의심하는 도마에게 초점을 두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도마의 의심이 정당하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다른 열 명의 제자들도 그 자리에 없었다면 누구든지 전부 도마와 똑같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요. 지금 도마가 의심하는 사건은 오히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신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뿐이지 도마의 의심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 자리에 없었다면 다른 제자들도 똑같이 의심했을 만큼 그만큼 부활은 엄청난 사건이었단 말입니다. 사실 도마는 그 열두 명의 제자들 중에서도 상당히 열심이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신 그 때에 예수님의 결심을 보고 도마가 이야기하죠.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는 죽음도 불사할 생각으로 예수님을 끝까지 좇으려 했습니다. 또, 마지막 유월절 밤에 제자들과 식사하시면서 예수님이 여러 가지로 가르치실 때에 도마는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제자들의 마음도 다 같은 마음이었겠지만 도마는 표현을 했단 말입니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디두모”라는 말은 쌍둥이라는 말입니다. 도마도 다른 쌍둥이 형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도마는 강하게 “부활이, 그게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데 그럴 리가 있는가?”하고 이야기할 때에, 여드레 뒤에 도마가 포함된 가운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의 광경을 보면, 26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이 닫혀있다는 것이 사실은 좀 더 강조가 되어 있습니다. 닫혀서 열지 못하고, 완전히 안과 밖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더 표현해서 이야기합니다. 그 때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러니까 이 면에서도 주님이 부활하신 그 몸은 지금 우리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벽도 뚫고 지나갑니다. 아무리 문이 닫혀있어도 관계없습니다. 그런데 벽을 뚫고 지나가는데도 귀신은 아니에요. 만질 수 있는 몸이에요. 도마에게 주님이 이야기하십니다. “내 옆구리 창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라. 내 손의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라.”  우리가 주님 앞에 가는 그날, 우리가 천국 가는 그날에 우리는 영광의 몸(glorified body),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입고 갑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유일하게 예수님만은 완전한 몸이 아닙니다. 창 자국이 있고 못 자국이 있는 몸으로 사십니다. 우리의 완전함을 위해서 예수님은 그 몸의 완전함을 포기하셨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져보라, 손가락을 넣어보라.” 그럴 때 도마가 고백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여…” 여기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oJ qeov" mou(호 데오스 무)”라는 말입니다. “My God” 정확하게 하나님이라고 예수님을 표현합니다. 또 “나의 주”라는 말도 “kuvriov(큐리오스)”라는 말인데 이것은 구약에 “여호와”라는 말이 붙을 때마다 “아도나이(adonay)”라는 말을 했거든요. “주(主)”라는 말인데 그것의 헬라적 표현이 “kuvriov(큐리오스)”에요. 이것은 보통 일반적으로 노예가 주인에게 이렇게 부르기도 했지만, 특별히 예수님에게 “kuvriov(큐리오스), 주여”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아주 적나라하게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지금 도마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그 도마의 의심하는 것을 통해서 확증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을 가지고 의심하는 데에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마음의 동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을 믿지 않기 위해서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그러한 종류가 있고, 다른 종류는 더욱 하나님에 대해서 간절히 알기를 원하면서 의심하는 것이 있습니다. 도마의 의심은 후자의 것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러한 의심은 오히려 더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고 하나님의 하신 일을 더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도마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29절에서 이야기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그런데 사실 이 책망은 도마에게만 가는 것은 너무 부적절하다고 생각해요. 다른 제자들은 그러한 의심이 있기 전에 미리 봤기 때문에 다 믿었단 말입니다. 그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부활하셔서 40일 동안에 계신 동안에 본 사람들은 전부 보고 믿은 겁니다. 그런데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고 이야기하시는지 그 이유가 30절,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0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성경에 있는 것이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기적과 이사를 우리 주님께서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을 간추려서 기록한 이유는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바로 이 말씀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하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예수님을 보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직접 본 사람은 성경에 한 사람 나오죠. 바울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봤잖습니까? 보고 눈이 멀고, 예수님의 소리도 듣고…. 그 외에는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지 않고 믿어요. 어떻게 믿습니까? 바로 성경을 통해서 믿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믿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보아서 믿지만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습니다. 성경이 쓰여진 이유가 바로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졌다고 그래요. 그래서 이 성경을 열린 마음으로 읽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전체 성경을 다 이해하진 못하지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그 믿음-구원받는 믿음은 누구나 생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제 주위 사람들 중에서 60세가 넘어서 예수님을 믿고, 글을 모르고도 예수님을 믿으면서 성경 말씀을 줄줄 꿰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분들은 한탄해요. “보다 내가 일찍 믿을걸, 늦게 믿어서 하나님께 더 헌신하지 못하는구나.” 탄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성경을 다는 잘 몰라요. 모르지만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구원받는 진리는 그 분들이 압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지식이 많고 지혜가 많은 사람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또한 아무리 이 세상에서 무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물론 이해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성경 전체의 기록의 목적은 하나님을 믿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에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혹시 오늘 여기에도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 있습니까?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처음에는 성경이 잘 안 읽혀질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는 이 말씀을 저도 이해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하는 마음으로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우리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덧 여러분 마음 깊이에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깨달아질 것입니다. 이 은혜가 성경에 있다는 것입니다.

“벤허(Ben-Hur)”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벤허의 저자가 대단한 무신론자였다는 것을 아십니까? 믿지 않는 두 사람이 기차를 타고 가다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해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작가였던 다른 친구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잘 하면 아주 기가 막힌 로맨스가 나올 것 같은데….”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당신이라면 그것을 소설로 멋있게 쓸 것 같은데. 괜히 그 예수라는 분이 무슨 하나님이라는 둥 그런 뚱딴지같은 말 말고, 거기에서 그 분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인격적이었는가를 당신이 소설로 한번 만들어보라.”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소설이 나왔습니다. 제안을 한 사람은 잉거슬 대령이라는 사람이었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서 소설을 쓴 사람은 루 월러스(Lew Wallace) 장군이라는 분이었습니다. 둘 다 당대에는 아주 소문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월러스 장군이 예수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서 소설을 쓰기 위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다른 책들도 보고, 특히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연구하면 할수록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게 점점 마음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안 믿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예수님이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 마음에 깊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어쩔 수없이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고백을 하고 나온 작품이 “벤허” 입니다. 제가 처음 이 “벤허” 영화를 본 것이 중 ․ 고등학교 때인데 참 멋있더라구요. 로마 병정의 복장도 멋있고, 벤허를 배신한 친구의 복장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멋진 전차 경기, 그래서 벤허가 마침내 통쾌하게 그 친구 메살라에게 복수하는 장면에서 “야, 멋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님을 믿고 나서 다시 “벤허”를 보게 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니까 제가 본 것은 전혀 다른 스토리였어요. 믿고 나서 보니까 바로 그 “벤허”라는 작품이 월러스 장군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 의미를 보니까 제가 완전히 뒤집어서 봤어요. 그 내용이 뭡니까? 그 주인공인 찰턴 헤스턴(Charlton Heston)의 극중 이름이 유다 벤허(Judah Ben-Hur)인데, 그 유다 집안은 유복한 가정이고 유대인의 가정입니다. 그곳의 총독부에 파견된 사람이 옛날에 자기와 놀던 로마인 친구였습니다. 같이 만나서 처음에는 기뻤지만, 그 친구에게 배신을 당해서 전혀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버지는 죽고, 자기 어머니와 여동생은 문둥병에 걸리고, 자기는 노예선에 팔려가게 됩니다. 온갖 고초와 환난 속에서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서 마침내 성공해서 돌아옵니다. 마침내 경기장에서 그는 복수합니다. 이겼고, 자기 친구의 재산을 다 빼앗고, 마지막에 그 친구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속의 복수와 분노의 칼은 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가 언제였냐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던 그때였습니다. 그 예수님을 유다 벤허가 만나고, 그 예수님 앞에 섰을 때,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았을 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예수님의 눈과 마주쳤을 때, 자기 마음속에 있는 미움의 칼이 내려놓아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자기 어머니와 여동생의 문둥병이 낫게 되는 기적도 경험하게 되지만, 결국 그 앞에 유다 벤허라는 사람이 그렇게 배신을 당해서 온갖 고초와 고통을 당하면서 그 속에서 친구에 대한 복수의 칼날이 섰으면 섰을수록, 그것을 놓게 하는 예수님의 능력이 더 빛을 발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안 믿었을 때에는 그게 전혀 안 보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의 어떠한 미움도 일단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아무런 쓸모없이 녹아져버린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미움의 관계, 어떤 적대관계도 전부 녹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바로 그 미움의 관계를 녹이는 능력이 십자가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을 녹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믿는 백성끼리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기는 것이고, 심지어는 안 믿는 백성에게까지, 우리를 배신한 사람들까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거기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바로 성경에서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그러한 예수님이 있다는 사실을 월러스 장군은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함께 적용되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든지 세상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면, 여러분이 누구든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삶 속에 진정한 평강과 안식과 평안이 없다면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 보시고, 거기에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성경에서 다른 것 보려고 하지 마시고, 성경 안에 나오는 이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만 초점을 맞춰서 성경을 보십시오. 그러면 바로 그 가운데에서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예수님,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이것은 단지 그 때 돌아가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앞에도 성찬을 위해서 “나를 기념하라”고 쓰여 있지만, 이것이 기념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가 다시 한번 고백하고 찬송할 때에 우리는 다시 그 부활의 능력 가운데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할 때에도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서 이제는 그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고, 이제 내 뜻대로가 아니고 주님의 능력대로 사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 예수님을 믿을 때 사실은 시험하는 마음으로 믿었습니다. 하도 옆에서 말을 하니까 ‘그래 한번 믿어주자.’ 그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기왕에 믿을 것이니까 항상 내 입장만을 고집하면 상대편의 것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일단 내 입장은 접어두고 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진짜인 것처럼 한 달 동안만 한번 해보자. 그리고 이것이 거짓이고 사기면 안 믿으면 되지.’ 저는 제 지성을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주님께 잡혔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보면 볼수록,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더욱 가슴에 와 닿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특별히 부활절을 맞이해서 우리 모든 주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누구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복음이며,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이며, 먼저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님, 이것이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깊이 새겨지고 그 의미가 여러분에게 임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그 샬롬의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항상 하신 인사말이 무엇입니까? “평안하뇨(샬롬)?” 이미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므로 모든 믿는 백성들에게 샬롬을 주십니다. 부디 앞으로의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러한 평안, 이러한 천국이 우리 모든 부활을 믿는 주의 백성들에게 함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