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화

경제에 대한 예화 모음

공 상희 2011. 7. 22. 14:24

경제에 대한 예화 모음

 

경제교육, 가정에서 시작합시다
무분별한 카드 사용,과다한 지출이 불러온 가정경제 파산은 믿음 파산, 가족사랑 파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10명중 한 사람이 파산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실 사회문제 이전에 가정에서 바로잡았어야 할 문제였다.
하나님은 부(富) 자체를 거부하지 않으신다. 크리스천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어야 할 돈과 신용카드가 불행의 원인이 되고 있다. 월마트의 창립자 샘 월튼은 그의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그저 돈을 쓰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가계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는 1달러를 손에 넣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해야 하는가를 깨달았고 그렇게 했을 때만이 어떤 가치를 지닌다는 것도 배울 수 있었다. 혼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준비가 되었을 무렵 나는 이미 1달러의 중요성을 강하고 깊게 인식하고 있었다”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 큰 것을 관리할 능력이 있다. 성경은 작은 것에 충성할 것을 말씀하신다. 적절한 액수의 용돈을 정기적으로 주어 소비욕망 조절 능력을 키워주거나 선한 행실의 결과를 돈으로 지불하여 선한 의도와 성실보다 돈에 가치를 두게 하지 말며 용돈기입장을 사용하여 돈 관리 능력을 키워주고 자신의 용돈 중에서 저축하고 십일조하도록 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녀들의 마음에 사랑이 결핍돼 물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
진정한 부자는 소유에 머무르지 않고 ‘잘 관리하고 잘 사용’하는 데 있다. 가정에서 철모르는 아이들을 ‘내 아이만은 최고로 키우겠다’는 부모의 경쟁의식 때문에 무분별한 소비 습관을 허용한다면 자녀를 망치고 사회의 근심거리로 만들 수 있다. 경제교육도 가족사랑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자녀들이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작은 것을 잘 관리하여 감사하며 누리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가정경제교육부터 시작하자


경제 살리기에 힘을 모읍시다
학생은 나라의 미래입니다. 여러분의 생활이 바르고 건전하면 나라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내어 밝은 앞날을 열어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경제는 헤픈 씀씀이 때문에 매우 어려운 형편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전기 한 등, 물 한 방울이라도 아끼고 소중히 하는 근검 절약 생활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힘을 모으면 우리 경제는 다시 일어나 곧 풍요롭고 살기 좋은 나라가 이룩될 것입니다. 오늘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우리 경제를 살리는 일에 앞장서는 자랑스런 학생이 되기 바랍니다.

우리 경제 살리기 실천 사항
1. 학용품 아껴쓰고 잘 간수하기 (절약생활)
불필요한 학용품 안 사기, 끝까지 알뜰하게 쓰기, 자기 물건에 이름 쓰기
2. 전기,수돗물,물자 아껴쓰기 (절약생활)
안 쓰는 전기 끄기, 수돗물 적게 쓰기, 생활용품 아껴 쓰기
3. 쓰던 물건 바꾸어 쓰고 다시 쓰기 ( 근검생활)
교과서 물려 쓰기, 교복 물려 입기, 생활용품 바꿔 쓰기
4. 용돈 절약하고 적은 돈도 저축하기 (저축생활)
1인 1통장 갖기, 용돈 기입장 쓰기, 동전 모아 저축하기
5. 값싸고 필요한 물건만 사서 쓰기 (건전한 소비생활)
우리 상품 애용하기, 생일은 가족과 함께 하기, 필요한 물건만 사기
6. 먹을 만큼 덜어 먹고 음식 남기지 않기( 바른 식생활)
음식물 고루 먹기, 음식물 덜어 먹고 안 남기기, 외식 줄이기
7. 불법과외 안하고 스스로 공부하기(사교육비 절감)
학교 공부 열심히 하기, 불법과외 하지 않기, 내 할 일 내가 하기

 

나눔의 경제 윤리


1. 인간의 경제적 운영실패와 그 책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물인 인류를 먹이고 키우기 위해 풍부한 자원뿐 아니라 그것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도록 하는 지혜를 주셨다. 경제는 바로 이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이다. 그러나 지금 그 자원이 효율적으로 분배되지 못함으로 인해 일부 국가에서는 먹을 것이 넘쳐 나고, 일부 국가에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제식량전문가들에 따르면 식량만 잘 배분될 경우 적어도 기아사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알맞는 양을 공급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분배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분배문제에 대한 원천적인 책임자는 누구일까? 우리들은 쉽게 정치지도자를 지목한다. 국제적으로든 국내적으로든 정치가들이 정치를 잘못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책임은 정치가에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 화살은 기업경영자에게 돌아간다. 문제가 경제적 비효율성에 있을 경우 그 책임은 기업에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그 책임이 정치가나 기업인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책임은 근본적으로 서로 사랑을 나눌 줄 모르는 인류 모두의 책임이다. 한쪽의 과한 욕심이 다른 한쪽을 가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경제실패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는 어느 누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 모두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2. 경제질서의 왜곡과 인간의 시련
하나님은 인간을 이 땅의 청지기로 세우셨다. 아담은 물론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류는 청지기적 책임을 타고 내어난다. 청지기적 삶의 특징은 삶을 경제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데 있다. 경제적 삶은 수준 높은 절제성, 정의, 사랑, 공평을 요구한다. 절제의 성과는 효율과 생산성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사치, 낭비, 부정, 부패로 이어질 경우 결과는 비효율과 비생산성으로 나타난다. 그런 사회는 경제적으로 파탄될 수밖에 없다. 경제는 우리에게 질서있는 삶의 양식을 요구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청지기로 세웠다는 사실을 망각한채 자신의 생각대로 욕심을 채우려다 에덴으로부터 쫓겨났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삶의 영역에서 청지기적 삶을 살지 못하면 쫓겨난다. 우리가 현재 IMF사태를 맞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청지기적 경제윤리를 저버린 때문이다. 질서있는 경제의 바른 흐름을 왜곡시키면 결국 재난이 따르게 된다. 아담이 에덴 밖에서 고난의 삶을 살았던 것이나 지금 우리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시련을 겪는 것 모두 상통된다.

3. 기업의 부패와 나눔의 왜곡
1609년에 설립된 암스텔담의 뷔셀은행의 관심은 기업들을 위해 자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과는 반대로 기업들이 거래할 수 있는 조건들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이 은행은 고리대금, 채무불이행, 사기, 부정 등의 돈의 세계와 관련된 가장 나쁜 죄악들을 단죄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따라서 이 은행의 좌우명은 "이윤이 아닌 청렴(Probity, not Profit)"이었다(Schama, 345).
지금 많은 기업들이 청렴성을 잃어가고 있다. 청렴성을 잃어간다는 것은 기업들이 그만큼 부패했다는 뜻이자 나눔의 질서가 깨어졌다는 뜻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사회의 핵이다. 핵이 부패하면 사회는 자연 부패하기 마련이다. 경영은 물론 경제질서를 세우는 일마저 불가능해진다. 공정한 나눔은 더 더욱 기대할 수 없다.
청렴성을 잃기는 국가도 예외가 아니다. IMF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부패가 만연한 나라일수록 군비축소와 교육투자확대 등에 관심이 소홀하다고 한다. 군비확장에 많은 자금을 할애하고 교육투자에 소홀히 한다는 것은 그만큼 바람직한 나눔이 되지못할뿐 아니라 삶의 질이 전반적으로 나빠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삶의 질 향상에 역행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상황을 직시하고 부패에 대해 공격적 자세를 취하는 일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청렴성을 회복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반부패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일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얼마나 실효를 거두고 우리에게 얼마만큼 영향을 줄지 알 수 없지만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땅에 아직 소망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울펀선 세계은행 총재는 최근 세계은행 조직자체를 반부패운동의 중심기구로 만들겠다고 했다. 미주기구(OAS)는 부패추방결의까지 통과시켰다. OECD도 부패문제를 강력히 제기했다. WTO도 뇌물금지를 못박을 기세다. 미국은 1977년 해외부패방지법을 제정했다. 미국은 이 법을 통해 외국을 상대로 한 국제상거래에서 뇌물을 절대 주어서는 안된다고 선을 확실히 그어 놓았다. 미국이 자주 부패추방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은 미국내 부패 정도가 심해서가 아니라 외국을 겨냥하고 있다. 뇌물, 매수 등 불공정한 방법을 동원하는 바람에 해외 수주경쟁에서 미국업체들이 번번히 나가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국제적인 뇌물관행을 뿌리뽑고자 세계여론을 몰아 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 영역에 익숙해 있다. 그것의 대부분은 뇌물 등 부정한 거래에 쓰여져 왔다. 거래의 부정은 경제질서를 그만큼 왜곡시킨다. 기독교인 기업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기독실업인들마저 경제질서사범으로 투옥되었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반부패 운동은 한국의 기업관행이 바뀌지 않으면 안되며 한국기업이 앞으로 더욱 청렴해져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이 일을 위해 정부는 물론 기업, 나아가 한국교회도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나라의 경제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신적 자세, 특히 윤리부터 확립되어야 한다.

4. 기업과 윤리
기업윤리와 사업관행을 연구하는 기업윤리센터(ERC)의 컨설턴트 프랭크 내브런(F. J. Navran)은 한국기업의 구조조정 작업에 있어서 효율성과 품질제고 차원만이 아니라 기업윤리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조조정에서 무엇보다 중시되는 것이 기업윤리라는 것이다. 조직을 개편하고 인원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업을 진정 경쟁력있게 만드는 것은 그 기업이 윤리적으로 건전한가에 달려 있다.
기업윤리는 단지 내규와 같은 소극적인 행위가 아니라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에 윤리적 가치를 결합시켜 기업이 책임있는 사회 구성원이 되게 하는 것이다. 기업윤리가 바로 서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바른 나눔도 불가능해진다. 기업윤리가 바로 서려면 기업의 윤리강령과 실천사항이 보다 구체화되어야 한다. 미국 기업 중에서도 윤리의식 프로그램이 확실한 회사들은 종업원 각자가 분명한 가이드라인을 갖고 일하며 선명한 경영과 예측가능한 사업을 한다. 이 일이 보다 실체화되기 위해 기업은 기업윤리 담당자를 둘 필요가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미국기업들이 종업원의 절도와 횡령으로 회사에 끼치는 손실이 연간 직원 1명당 7백 달러에 달한다. 이에 따라 기업윤리 담당자를 둔 기업만도 600여곳에 달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업윤리 담당자가 있는 기업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사정과 퇴출 차원에서 윤리위원회가 한시적으로 구성될뿐이다.
기업윤리는 단지 규범을 만들고 담당자를 두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경영진이 책임지고 기업윤리를 강화하려는 의식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조직구성원의 끈질긴 노력이 있어야 한다. 아울러 직급의 고하를 따라 달리 적용되는 이중잣대를 없애야 한다. 누구는 해당되고 누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윤리는 윤리가 아니다.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실세든 아니든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중잣대를 적용하는 행위는 기업 및 경제윤리를 파괴하는 지름길이다.

5. 윤리기업의 종류
기업은 윤리도에 따라 여러 형태로 구분된다. 다음의 구분에 따를 경우 아래로 내려갈수록 바람직한 모습을 하고 있다(윤순봉과 장승권, 312-314).

1) 비윤리적 기업: 회사의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한다. 종업원을 단순히 경제적인 생산도구로 간주한다. 독극물을 사용해 낡은 엑스레이 필름에서 은을 추출하는 Film Recovery Systems사는 약물중독으로 근로자 한명이 사망하자 1983년 폐쇄되었다. 도시바는 구소련에 잠수함 프로펠러용 공작기계를 불법으로 수출하여 공산국가에 군사기술을 수출하지 않기로 한 국제협약을 위반했다.
2) 준법기업: 대부분의 기업이 이에 속한다. 법률조항을 자구대로 해석하고 지킨다. 그 법률 안에 흐르는 입법정신은 고려하지 않는다.
3) 대응기업: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윤리적인 경영을 시작한다. 기업윤리가 옳다는 생각보다 윤리적으로 경영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다는 임시방편적 생각이 크다. 1980년 미국정부가 약물중독에 대한 보고서가 발표되자 P&G는 자사제품 탐폰에 해당약품이 사용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별도의 표시가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제품을 전부 회수했다.
4) 준윤리기업: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명확히 알고 있다. 이를 경영 전 부문에 철저히 스며들도록 한다. 존슨 앤 존슨은 기업신조에 윤리적인 관점을 명확히 해놓았으며 타이레놀 사건 때 이를 실천했다. 어떤 범죄자가 타이레놀에 독극물을 주입하고 협박하자 이 사건이 해결된 뒤에도 모든 타이레놀을 회수해 폐기했다.
5) 윤리기업: 윤리기업은 회사의 이익측면과 윤리측면의 균형을 맞추고 기업윤리를 실천에 옮긴다.
대부분의 기업은 비윤리적 기업과 준법기업에 머믈러 있으며 대응기업과 준윤리기업이 예외로 취급될 정도로 기업의 윤리의식이 문제로 되어 있다. 기업의 윤리의식이 호전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루탄스 등은 기업의 윤리의식이 호전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Luthanset al., 1990).

1) 기업경영이 비민주적으로 이뤄질 때: 중앙집권적, 수직적, 톱다운 식의 경영에서 종업원들은 경영핵심에서 소외되고 무시되기 쉬우며 윤리적인 문제나 사회적 책임에 둔감해진다.
2) 기업의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 있지 않을 때: 경영자가 소유주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자신의 목표에 의한 경영을 함으로써 잠재적으로 비윤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3) 견제와 균형이 되지 않을 때: 기업내부에 윤리적인 활동을 견제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기능이 결여되어 있거나 있어도 비효과적일 때 기업이 비윤리적일 가능성이 높다.
4) 보상제도가 비효율적일 때: 실적 위주의 경영은 경쟁을 유발하며 종업원의 비윤리적인 행동을 부추긴다. 보상제도가 비효율적일 때 더욱 문제가 된다.
이 주장에 따를 경우 기업이 보다 민주적이고,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야 하며, 견제와 함께 보상제도가 합리적으로 이뤄질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업윤리가 바로 서려면 기업윤리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연구뿐 아니라 기업윤리 네트워크를 설치하여 연구 및 정보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럽에서는 1987년에 기업과 학계 인사들이 유럽기업윤리 네트워크(EBEN: European Business Ethics Network)를 만들어 기업의 윤리에 대해 연구 및 정보교환을 하고 있다.

6.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학자 사이먼 샤마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윤리관과 기업의 가치관 사이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적고 있다. 당시 네덜란드 사회에서는 돈을 번다는 것이 비난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종교적 인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인들은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재산을 모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처럼 원칙과 실제의 괴리는 이상하게도 소비를 조장하게 만들었다. 특히 종교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선적인 기부행위에 과다하게 지출하는 행동들이 만연되었다
(Schama, 334). 사회에 대한 기업의 책임의식보다 눈가림식 자선은 문제가 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 사회에 대해 책임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오랜 논쟁이 되어왔다.
주주의 이익이 우선이지 공중의 이익이 우선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적 책임을 외면한 기업은 공중으로부터 외면당할뿐 아니라 기업의 존립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다. 그렇다고 주주중심의 사고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기업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양분된 주장을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Davis et al., 1980).

기독교 경제 윤리
어느 개인을 중심점으로 하여 사회 관계를 그 중요성에 따라 원(圓)을 그리면 가정 생활이 첫째 원이 될 것이고 그 다음이 경제 생활이 될 것이다. 인간은 경제 생활을 떠나서는 하루도 살수가 없다. 경제 생활은 우리들의 일상 생활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 생활 혹은 경제 질서의 정의에 대하여서는 명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다. 경제란 인간의 영적 생활, 도덕적 생활, 지적 심미적 의식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면서 생활의 전 영역에 골고루 침투되어 있으며 이것은 경제적 생활 규범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제 생활이란 물품의 취득(acquisition), 점유(possession) 사용(use)에 관련된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이것은 노동과 직업의 문제까지로 확장되나 노동 문제는 제3부 개인윤리에서 취급한 바 있고, 직업 문제는 다음 장에서 취급하려고 한다.

I. 신약의 경제 윤리

예수님께서는 어떤 특수한 사회 기구에 대하여 특별히 논평을 가한 일이 없다. 예수님께서 주로 관심을 가지신 문제는 개인 대 개인의 문제이다. 바울 서신에는 경제에 관한 단편적인 교훈들이 보이는데 스스로의 생활 유지 문제(살후 3:6~12), 노예들이 주인을 섬겨야 하는 문제(골 3:22, 엡 6:5)등이 있으나 어떤 사회 제도 자체에 대하여 비판을 가한 적이 없다. 그러나 구약 예언자들의 저서에는 경제적 착취에 대하여 날카로운 공격을 하고 있는데 오늘날에 와서 사회적 경제 정의의 성경적 근거를 찾기 위하여서는 구약의 예언서들을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1. 신약 메시지의 특성

신약에서 경제 문제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는 이유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말할 수 있겠으나 다음의 3가지 이유를 규정할 수 있다

① 믿음과 사랑강조
신약의 메시지가 믿음과 사랑을 강조하기 때문에 사회 정의의 문제가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명령 속에서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예수의 교훈이 초대 교회에 전승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새 생명을 경험하는 그 인격적 기쁨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② 종말 신앙 강조
신약 시대의 제자들은 종말 신앙 속에서 자신들이 살고 잇는 이 세대가 오래 가지 못하고 멸망하여 메시야의 재림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오리라는 소망 속에 살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회 제도나 정의보다도 신자의 신앙 생활에 싶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갔으며 이 문제를 강조하였다.

③ 구약 예언자의 강조
구약 예언자들이 강조한 사회적 양심과 초대 교회신자들이 가진 사회적 양심을 대조함으로써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2. 예수님의 경제관

예수님이 강조하신 사랑의 계명은 개인과 개인 사이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재산 문제에 있어서 정당한 원리를 제시하였다.

① 소유욕에 대한 경책
예수님께서는 정신적 선(善)보다도 물질적 부(富)에 집착하여 자신을 맡기려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하여 책망하셨다. 이 교훈은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강조하신 것으로(마 6:24, 눅 12:15, 마 6:19, 눅 12:16~21)인간의 가치는 물질적 풍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셨다.

② 부자의 멸망을 직언
예수님께서는 부자의 멸망에 대하여 날카롭게 지적하셨다. 부자들이 물질의 풍부로 인하여 물질을 잘못 사용하며, 가난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③ 일할 양식 강조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하였다. 이것은 물질적 양식을 말하는 것이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고 하셨는데 이것은 이러한 것이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필요하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다 알고 계신다고 하셨다.

④ 물질의 목적 강조
물질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물질을 목적으로 하는 인간은 그 물질이 망하면 따라서 망할 수밖에 없다

II. 재산(財産)에 대한 윤리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위에서 살아가기 위하여서는 물질적 소유에 대한 기본적 자세가 정립되어야 하는데 이는 재산에 대한 기독교 윤리의 한 측면으로 고찰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위탁물
물질의 소유는 하나의 <소유>가 우리에게 <위탁>된 것이다. 이 위탁 개념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강조되는 것으로서 <땅과 거기 충만한 것, 세계와 그 안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가진 물질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우리가 위탁받았기에 여기에 바른 자세가 필요하다.

① 확장의 노력

이것은 달란트 비유에 명확히 나와 있는데 하나님의 것을 위탁받은 청지기는 열심히 장사하여 이익을 남겨야 한다
이 확장의 노력은 오늘의 신자들이 가져야 할 재산에 대한 기본 태도이다.

② 11조

위탁 개념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11조의 생활에서 구체화된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을 우리에게 모두 주시고 그 중 11조를 바치라고 하셨다. 이것은 감사의 예표이며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기본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11조 문제에 대하여서 <나를 시험하라>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11조를 통해 축복의 방법을 나타내셨다.
2. 사유재산(私有財産)의 정당성

초대 교회 신자들이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경제 생활을 하였고 중세 교회에서 수도원 제도를 통하여 공동 생활을 하였으나 사유 재산 제도가 인정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인격의 충분한 발달을 위하여 필요하다.
경제적 불안정은 인격적 불안정을 낳게 한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사유재산이 없이는 안정된 교육을 할 수가 없다.
현대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국가가 재산권을 장악하고 국민들의 생활을 이끌어 나가려고 하는데 그 결과는 실패이다

② 경제 능률을 위하여 필요하다.
이것은 성경에서 명기된 것이 아니지만 경제 제도의 정상적인 발달을 위하여서 사유재산 제도는 보장되어야 한다. 이 제도는 경제 능률을 향상시키고 보다 풍부한 자료를 생성케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③ 경제적 기업 의욕을 위해 필요하다.
경제적 기업은 수지 여하보다도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소유일 때 기업 의욕은 더욱 많아진다

3. 사유재산 제도의 문제점
이상에서 지적한 것에 의하면 사유재산 제도가 필요한 것이나 잘못하면 몇 가지 문제들이 제기된다.

① 물질 만능 사상
소유욕이 과잉되다 보면 물질 만능 사상이 팽배하는 것이다. 물질이 필요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목적으로 사용될 때 여러 가지 문제들이 따른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점에 대하여 보다 바른 시정책이 나와야 한다.

② 빈부의 격차 심화
사유재산 제도는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킨다. 가진 사람은 더욱 가질 수 있게 되고 없는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계층간의 문제가 대두되고 사회의부조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기에 공산주의가 침투하여 저소득층의 반발 의식을 충동한다
그러므로 사유 재산 제도 사회에서도 자신의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생활급(生活給)은 보장되어야 하며 약간의 저축과 희사를 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되어져야 한다.

③ 경제적 소유와 권력의 결부
권력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활용하여야 하지만 재산의 집중적 소유자와 결탁하여 구조적인 범죄가 생성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이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서 우리 시대에 크게 작용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인데 여기에 대한 바른 대책이 있어야 한다.


III. 경제 정의(經濟 正義)
경제 사회의 두 가지 구성 요소는 자본과 노동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서 소명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1. 경제 정의의 전제
① 현대 사회에서는 완전한 정의가 없다
현대 사회에서는 자본과 노동의 상반된 관계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고 과학의 발달과 자기 이익 추구의 욕심들은 여러 가지 사회악을 낳고 있다.
그러나 이 사회악들에 대한 완전한 경제 정의 즉 절대적 정의가 없다. 이것은 실제 생활과 생활의; 가능한 최선의 조절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다.

② 최악의 상태라도 소망이 있다.
경제 체제에서 여러 사회악이 생성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바진 것 같아도 실제에 있어서 소망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어렵고 나쁜 사회라도 생존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참다운 삶의 길을 찾을 수 있다.

2. 잘못된 개념들
경제 정의에 대하여 잘못된 개념들을 지적한 후에 바른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① 어떤 경제 조직이든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할 수 없다.
과거의 봉건주의와 노예 제도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를 시켰다. 이 제도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찾기에 노력하였고 그 제도의 보수를 위하여 수고하였으나 결국에 가서 그러한 것들은 인간의 상대적 노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어떠한 경제 조직도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시킬 수가 없다.

② 자선을 베푸는 자의 지배권 문제
자선은 사랑으로 베풀어야 하는데 자선을 베푸는 자가 자기의 지배권을 강조하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를 낳게 한다.
이것은 소위 강대국들이 약소 국가에 대하여 경제적 원조를 하면서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③ 사회 개혁에 대한 오해
이것은 사회복음을 통한 사회 구원이나 개인 영혼 구원 중 어느 것을 너무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데서 생기는 것들이다. 균형 있고 순서 있는 적용이 필요하다.

3. 적극적 개념들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유토피아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여건의 사회가 되기 위하여 몇 가지 원칙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① 개인적 자유와 복지 보장
이것은 경제 체제의 양대 요소인 재산과 노동이라는 측면에서 수고한 것에 대한 생활의 보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개인의 복지와 생활 향상이 되어지고 질병, 노쇠, 퇴직, 재난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방안이 있어야 한다. 또 자녀 양육과 교육, 그리고 주택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여건들이 조성되어야 한다.

② 사회적 통제의 필요
개인적 욕구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빈부의 격차가 심하여지고 사회의 여러 가지 불안 요소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삶에 적당한 통제가 있어야 하고 사회의 균형 있는 성장과 복지가 조성되어야 한다

③ 균형 있는 발전의 필요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통제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어느 일방적인 면만 강조되면 그 사회는 정당하게 발전할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이 균형 있게 되어진다면 이 사회는 보다 나은 사회가 될 것이다

④ 세계적 배경에서의 관찰 필요
어느 특정한 지방이나 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세계적 배경에서 보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의식 속에서 각 사람이 세계적 배경을 통하여 이 경제 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경제적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 (요한복음 16 : 24)
 어느 여전도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간신히 생계를 해결하는 그녀의 네 가족에게 툭하면 고장나는 보일러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줬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을 내 배 위에 번갈아 올려놓고 잠을 재웠다.
그래도 아이들은 깊이 잠들지 못하고 추위에 떨며 아침을 맞곤 했다. 그녀에게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나날이었다.
그녀의 고통이야 그녀 하나로 끝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아이드르이 고통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녀는 밤을 새워 기도했다. 아이들을 껴안고서 눈물의 기도를 그린 것이다.
말씁으로 위로받아 힘을 얻으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며 지내던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땔거리도, 연탄도 없이 싸늘한 냉골에서 저녁을 맞았다. 그런데 7명의 친구 전도사와 사모들이 동창회에 가자고 찾아왔다.
형편이 어려워 가지 못하겠다는 말은 하지도 못하고 해서 생각 끝에 우리집에서 예배를 드리자고 했다. 친구들은 그녀의 사정을 알아채지 못한 채 그저 좋아했다.
그녀의 인도로 예배를 시작했다.
예배가 끝난 후 친구들이 주머니의 돈을 다 털어놓으면서 교역자가 쉬는 월요일에 매주 모여 예배를 드리자고 약속했다. 그들이 내놓은 돈으로 쌀 1가마, 연탄 30장을 구할 수 있었다. 그때의 마음으로는 부자가 따로 없는 듯한 기분이었다. 난방을 시작하고 아이들에게 음식을 배불리 먹이고 나니 감사의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경제

 

인간의 삶은 경제적인 구조나 환경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이 사회의 구조 역시 경제적인 연대를 통해서 이루어져 나간다. 이 관계에서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게 마련이고 서로 상부상조하게 된다. 바로 이 관계에서 또한 오류가 발생되고 문제들이 돌출되게 마련이다.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경제적인 인간관계에서 바로 이같은 문제넘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는 빌리는 사람이나 다같이 근실하라는 말씀이다. 서로 이 문제에 대해서 근실하지 못하면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을 것이 말씀한대로 올무가 되고 화근이 되는 것이다. 오늘같은 경제적인 시대에 있어서 이같은 교훈은 더욱 절실하다. 사람과 사람과의 신뢰문제와 거래관계에 대한 근실한 자세,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현실의 문제이고 지혜의 문제이다. 보증하는 것과 사람과 서로 손을 잡는 문제,무리하고 분에 넘치는 약속과 근신치 못한 경제적인 관념, 이것은 자칫 피차간에 커다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무리하고 신중하지 못하게 손을 잡거나 분에 넘치는 보증을 하는 행위는 삼가라는 교훈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근절되지 않고 자주 발생되고 있는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경제생활에 근실해야 한다. 자신을 너무 과신하지 말고 타인을 경솔하게 무조건 신뢰하지 말고 수완이나 요행을 믿고 허황된 꿈이나 무모한 일에 뛰어들거나 분에 넘치는 과욕으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이다.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경제관념도 아니거니와 이것은 근실치 못한 지혜없는 사람의 행동인 것이다.


가난은 극복되야 한다

가난에도 유익과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난은 궁극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가난이 아닌 다음에는 모든 가난은 죄의 소산이다. 가난한 사람  자신의 게으름으로 인한 가난은 그 자신의 죄의 소산이고 의와 선을 추구하다가 당하는 경우의 가난은 그에게 그런 이유로 가난을 강요하는 그 공동체와  체제의 죄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가난은 죄의 소산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풍요롭게 살기 를 원하신다.


가난한자에게 부요함을

인생은 애시당초 가난한 자들입니다. 빈손들고 이 세상에 와서 은혜로 살다가 때가 되면 빈손들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들은 육적으로도 가난하고 영적으로도  가난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가난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그렇게 자처하여 교만에 사로잡혀 있는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심히 가난하고 궁핍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께 간구할 때 비로소 큰 은혜를 받게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 사실을 깨달아야 되겠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주변에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심히 가난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을 알아서 그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여 그 영혼들을 구원해 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할 적에 비로소 우리의 주변에 영적으로 가난한 자리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을 깨닫게 될 것이요, 그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의 영혼을 주앞으로 인도하게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돈과 진실

돈이 만능인 것 같아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서양의 어느 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는 있으나 잠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책은 살 수는 있지만 두뇌를 살 수 없고,
돈으로 음식은 살 수 있으나 입맛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집은 살 수는 있지만 가정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약은 살 수는 있으나 건강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사치품은 살 수는 있지만 교양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오락은 살 수는 있으나 기쁨을 살 수 없고,
돈으로 멋진 옷은 살 수 있지만 미를 살 수 없고,
돈으로 향락은 살 수 있으나 행복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십자가는 살 수 있지만 구세주를 살 수 없고,
돈으로 교회는 살 수 있으나 천국을 살 수 없다.
마음의 평화, 구원, 천국은 돈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돈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돈을 따라다니면 그를 가르켜 돈에 미친사람이라고 부른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돈을 지키기만 하면 그를 가르켜 수전노 또는 자본가라고 부른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돈을 쓰기만 하면 그를  가르켜 노름꾼이라고 부른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돈을 벌지  못하면  그를  가르켜 야심이 부족하다. 또한 일하지 아니하고 돈을 버는자가  있으면 그를 가르켜 기생충이라고 한다. 또 어떤사람이 일생동안 힘든일을  해서 돈을 모으면 사람들이 그를 가르켜 돈외에는 인생의 다른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자라고 비평한다." 이말은 돈은 인생을 해결치  못한다는 전제를 이름이다. 돈을 벌기를 잘해야 하지만 쓰기도  잘해야  함을 일컫는다. 돈을 벌기는 잘하나 쓸줄 모르는 사람을 수전노, 구두쇠라고 하고, 돈을 쓰기는 잘하지만 벌줄을 모르는 사람을 골치덩어리라고  하고 돈을 벌줄도 쓸줄도 모르는 사람을 일컬어 무능자라고 한다. 고로 벌기도 잘하고 쓸데 쓰기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돈에서 얻어진 귀중한 진리는 돈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돈이라는 것이 사람의 수단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돈자체에 마치 인생의 목적인양 착각에 빠질때 돈에 메이게 되며 돈에 농락당하고  돈의 노예로 전락해 버린다.


돈은 인생의 주역 아니다.

돈은 인생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음이다. 5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보에티우스"는 "돈은 만족을 주지 못함은 물론이요, 사람들의 고민에서 해방시키지도 못하며, 죽은이들을 위하지도 못한다"고  노래했다. "황금이 흐르는 강물처럼 인색한 부자의 탐욕을 채우지는 못하고 홍해의 진주로 목을 휘감을지라도 백마리 소를 풀어 기름진 밭을 갈지라도 인생에서 쓰디쓴 고뇌는 떠나지 않으며 허무한 재물은 죽은  이를 따라가지 않는다"고 노래했다.


돈은 전부가 아니다

사람들은 부유한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돈 자체가 이상한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은 공부 못하는 학생을 인류 대학에 들어가게 할 수 있으며, 못생긴 얼굴을 아름답게 할 수도 있는 아주 매력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매력적인 `돈'이라는 존재는 얼마 안 있어 본색을 드러냅니다. 돈은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 위에 신처럼 군림하면서 도적질도 시키고 사람을 죽이게도 하다가 결국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든 적게 갖고 있든 돈이 자신의 우상이 되지 않을 정도만 갖고 있으면 그것이 진정한 부요함이요 축복인 것입니다.“주님, 돈은 날마다 저희의 주변을 배회하면서 틈만 있으면 저희를 노예로 삼으려고 합니다. 제발 돈의 유혹으로부터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돈의 노예

탐욕에 의해서 물질을 섬기는, 즉 황금의 신을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이 먼저인지 돈이 먼저인지 앞뒤를 분간하지 못합니다. 물질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물질을 위해서 있는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물질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립니다.  심지어는 양심도 신앙도 저버리기 일 수입니다. 남이야 나 때문에 피해를 보건 어려움을 당하건 관심이 없습니다. 나에게 물질만 축적될 수 있다면 그만입니다.


돈의 필요성

왜 많은 사람들이 돈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듭니까? 남에게 이익이 된다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신의 생존, 안정, 행복, 번영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물질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필요성을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자리에서 인식하고 있는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물질관인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신앙 생활에 연결되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한눈을 팔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기도 하며 비뚤어진 눈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보며 잘못된 길로 가기도 합니다.

 

돈의 한계

돈으로 음식은 살수 있으나 건강은  살수 없고, 돈으로 책은 살수 있으나 지혜를 살수 없으며, 돈으로  생명보험에 들수 있으나 생명은 살수 없고, 법정에서 판결된 형은 벌금으로 면할 수 있으나 심령상의 죄로 인한 고통은 면할 수 없고, 돈으로 집을 살수 있으나 가정은 살수없다. 돈은 평안을 해결치 못하며 돈은 죽음을 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돈은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돌려 드려야 할 때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재물도, 건강도 생명도 다 거두어 가시는 날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장 2절에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해서 못하리라"고 주인이 명령을 내린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 다 버리고 주님 앞에 서서 일생 행한 일을 셈하고 심판받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원히 세상을 떠나지 않고 영원히 재물을 소유할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알렉산도 대왕이 아버지 필립(Philip) 2세에게는 이상한 종을 두고 있었는데 아침마다 인사할 때 "대왕이여, 당신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높이신다

"나의 모든 삶은 오직 주님의 손에 있나이다. 그리고 물질을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아직 가난한 사람들이 그 예(例)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는 때가 있으며 높이시는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부요하게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 "때"가 임하지 않은 것 때문에 잠시 가난하게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신자들을 꼭 높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는 말씀은 연단 속에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장래를 약속하며 위로를 줍니다.

 

물질 배척사상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고 물질과 관계된 문제에서 잘못된 자세를 보이는 것은 자신의 욕구를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다른 잘못된 자세는 비성경적인 물질 배척 사상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하여는 물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하지만 하나님을 위하여는 물질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가난하게 살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질은 신발 같다

물질이란 무엇입니까?
물질은 마치 우리의 신발과 같은 것입니다. 신이 너무 적으면 꽉끼어서  활동하는데 매우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신이 너무 크게  되면 헐거워서 역시 힘이 들 것입니다. 신발은 자기의 발에 꼭 맞아야 하는것과 같이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물질은 매우 요긴하고 중요하지만 그 물질 까닭에 불평과 고통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물질은 악한 것이 아니다

물질은 절대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 무용주의자들이나  물질에  대한 혐오가들은 아예 물질과 담을 쌓고 물질을 무시해 버리는 경향도 있습니다.
첫째, 물질은 우리를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물질은 절대로 인간에게 행복과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많은 이들이세상에서 많은 재물을 모으면  거기에서 행복과 만족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아마 지금도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과 만족의 관계는 절대로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소유할 수 없습니다.


물질을 영안으로 보자

진정한 보화를 소유할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의 눈이 좋아야 합니다.
둘째, 가치 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한 보화란 누구에게서 오며, 어떠한 사람에게 주어질 수있습니까? 진정한 보화는 모든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인간으로  하여금그 모든 것을 다스리며 사용할 수 있도록, 인간을 관리자로 채용하신  하나님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의 육안의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영안의 눈을 가지고 물질에 대한  청지기, 관리자로서 주인되신 우리의 주님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정한 보화를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의 사용처

사람은 물질을 많이 가지느냐 적게 가지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물질이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즉, 잠시 후에 없어져 버릴 단지 이 땅의 것만을 위하여 쓰여지고 있느냐, 아니면 그 물질이 하늘에까지 영원하며 신령한 일에  쓰여지고  있느냐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첫째 우리의 물질이 단지 자기의 육체적 필요를 위해 쓰여지느냐,  아니면 물질이 범죄하는데 사용하느냐,남에게 손해가 되는데 사용되느냐  하는  것이 곧 문제입니다.
둘째, 물질을 그사람이 인생의 가치로 두어야 합니다.
셋째, 물질은 참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곳에 사용해야 합니다.

 

미래를 위한 노력

우리가 죽을 때는 재물을 가져 갈 수는 없지만 미리 보내 둘 수는 있다는 말대로, 미래을 투자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눅 16:1-13)반대로 세상에만 재물을 쌓아 두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한 부자가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곡식을 다 쌓아 둘 곳이 없으니까, 곡간을 다시 짓고 곡식을 쌓아두며 말하기를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즐거워하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세상에만 쌓아두고 죽음을 준비할 줄 모르는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위해 세상에만 재물을 쌓아 두는 자를 어릿거은 바로라고 말씀하셨고, 이 청지기와 같이 빼앗길 날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영원한 미래를 위해서 투자하는 사람을 지혜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 이하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해 써둔 물질은 도적맞는 법도 없고 부도나는 법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돈을 지혜롭게 투자할 줄을 모르고, 자기 육신을 위해 세상에만 쌓다고 죽고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물질을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유익을 위해서 쓸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참믿음의 사람입니다.


성도의 돈관리

돈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돈은 노동의 대가를 측정해  주는 기준이요, 거래의 매개체인 동시에 물건의 가치를 정해  주는  수단이다. 돈은 때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와 감정을 표현케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돈자체는 악한 것도 선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사용하는 방법에 있다.
[돈을 주어 보라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는 격언이 있다. 돈은 인격의 시험품이다. 돈에 대한 정당한 자세를 확립해야 한다.

첫째, 정당하게 벌어야 한다.
버는 방법이 중요하다. 같은 돈이라도 어떻게 버느냐에 따라 추할 수도 있고 아름다울 수도 있다. 투기를 통해 돈을 번다든지 땀흘리지 않고 벌어서는 안된다. 우리나라의 경제구조를 절망적으로 만든  몇가지 원인 가운데 하나가는 돈 가진 사람들의 부동산 투기였다. 기독교인들은 돈을 벌어도 정당한 방법으로 버는 사람들이다.

둘째 정당하게 관리해야 한다.
고리대금업을 한다든지 남을 괴롭히는 방법으로 관리해서는  안된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것은 비성서적이다. 생산적인 일에 재투자해야  한다.
셋째, 정당하게 써야 한다.
아무리 땀흘러 벌었더고 깨끗하게 써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는  절약하되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서는 절약하되 이웠과 하나님을 위해  써야 한다. 마르틴 루터는 세가지 회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슴의  회심, 정신의 회심 그리고 돈지갑의 회심이라고 했다.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관리하면 그 사람은 정욕의  함정에 빠진다.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딤전  6:10)고 말했다.
부패 부정 타락 뇌물 상납사치 방조 이 모든 것이 돈에 대한  그릇된 가치관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하는  것은  배금주의다.
배금주의는 이 시대의 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가  맘몬을 섬기든지 하나님을 섬기든지 하나님을 섬기든지 선택하라고  촉구하신다. 영원하신 분 모든 것의 주인되신 분,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신앙인의 물질 정립

돈은 사람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사람을 울고 웃게 만들고, 사람의 성격과 사람됨까지도 변하게 하는 것이 돈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세상과 유리(遊離)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물질의 영향력은 계속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신앙의 새 출발을 할 때 물질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해 놓지않으면,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잘못된 물질관으로 인하여 기형적인 신앙인으로 전락하고 신앙의 대열에서 낙오하는 불행한 순간을
맞게 됩니다.

 

제목:실패한 혁명

고리키는 세계를 뒤흔든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누구나 고통을 참을 수  밖에 없다고만 역설되는 나라 러시아에서, 아니 이 세상  전체에서 레닌만큼 심각하고 강하게 불행과 슬픔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저주한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고통은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물리쳐야  하고 또 물리칠 수 있는  악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특히 위대한 인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고리키가 평가한대로 레닌은 그가  주도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러시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었습니까? 사회주의 혁명으로 공산주의가 지배했던 지난 80여년의 구 소련은 엄청난 죽음과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한 고통은 오늘날 러시아에게 까지도 말할 수  없는 혼란과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결과 발트 3국의 하나였던 에스토니아에서  시작된 레닌 동상 제거작업은 소련 각국으로 퍼져  나가 이제 그의 동상은 형체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레닌의 혁명은 역사에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레닌은 자신이 죽기 2년 전  "레닌 사상의 가장 탁월한 계승자로" 판단하여 당 서기장으로 스탈린을 임명했습니다. 스탈린은 성직자가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들어갔던 츠빌리시  신학교를 5년만에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츠빌리시 철도 노동자들로 구성된  한 학습 모임을 지도하는  것을 시작으로 직업혁명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스탈린이 당  서기장에 올라서 1934년부터 시작된 대숙청은 당과 군의 최고위 지도자들이 다수 처형된 것을 비롯하여  수천만 명이 체포되고 피의  숙청을 당했습니다. 이 숙청의  피냄새가 채 가시기 전에  터진 2차 대전을 통해서 소련 국민 2천만 ~ 3천만 명이 희생당했습니다. 인간적인 사상이나  정치, 경제의 혁명의  결과는 이처럼 엄청난 인류의 고통과 죽음을 초래했습니다


재물 집착의 경고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죽어 하나님 앞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로마서 14장 10절에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관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 물질에 집착하지 말고,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서 바른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Having 즉 가지는 것보다 Being 즉 존재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재물관리의 훈련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편안히 잘 살게 될 때, 우상숭배에 빠지고 애굽의 종이 되어갈 때, 바로 왕의 마음을 강팍케 하고 그들에게 고통을 주어서 애굽을 떠나 광야로 내 모신 것도 세상 것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광야는 자유의 상징 (Symbol of liberation) 이었습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은 집이나 토지도 없고 도시도 돈을 저축하는 은행도 없는 곳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것입니다. 소유할 것도 없고 소유에는 관심이 없는 곳입니다. 천막은 쉽게 세울 수 있고 쉽게 헐 수 있는 텐트입니다. 어느 곳에 고정된 삶(Fixed life) 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라은 이러 저리 다니며 목축업을 하는 유목민인데, 이것 역시 한 곳에 집착하지 않는 생활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기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심령이 바로 이런 자유의 생활이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언젠가는 없어져야 할 물질에 집착하지 말고 주인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용감히 투자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인과 종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면 돈이 좋은 종이 될 것이고, 우리의 자원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지 않으면 우리가 돈의 종이 될 것이며, 돈은 무서운 주인이 될 것입니다.
헨리 휠딩(Henry Fielding)은 말하기를 "돈을 당신의 신으로 만들라 그러면 그것이 마귀와 같이 너를 괴롭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윌 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린적이 있습니다. "돈이란 전세계 어디나 갈 수 있는 패스포트와 같은 것 천국만 제외하고, 돈이란 행복만 제외하고 무엇이나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내가 아니다.

"청지기"(Steward) 란 말은 "주인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자"란 뜻입니다. 헬라어로 "집" 이란 말과 "관리하다" 란 말이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인데, 경제(Economy) 란 말이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청지기가 가져야 할 첫째 마음의 자세는,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 주인이 따로 있고 나는 그 분의 것을 맡아 관리할 뿐이라는 의식입니다.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벌었다고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므로 주인을 기쁘게 하고 주인의 유익을 위해서 써야지, 내가 소유주인양 내 멋대로 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유의할 점은 내가 청지기로서 내가 맡아 있는 동안 주인의 기쁘신 뜻을 위해서 바르게 사용하면, 그것은 영원히 내 것이 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동안은 내것이 아닙니다. 언제 주인이 거두어 가실지도 모르고 언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실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물질이 영원히 내 것이 될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잘못 사용하기도 하고, 선한 사업에 투자할 때 투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하게 바로 쓰는 것을 보면 주인이 더 큰 것을 맡기실터인데, 바로 쓰지 못하고 움켜 쥐려고만 하기때문에 하나님이 더 큰 것을 맡겨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타인을 해롭게 말라

"네 선조의 세운 지계석(地界石) 을 옮기지 말지니라" 지계석은 인접한 전답이나 지경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세워 놓은 돌을  의미한다. 우리 나라는 전답의 경계를 표시할 때는 뚝을 만들어 피차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근동지방에서는 주로 말뚝을 박아 놓거나 돌기둥을 세워 놓음으므로써 경계를 표시했었다. 이것이 때로 문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돌이나 말뚝은 아주 손쉽게 옮겨 놓거나 이동시킬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상대방의 세워 놓은 지계석을 어느 정도 옮겨 놓으면 상대방에게 손쉽게 재산상의 피해를 줄 수가 있다. 이 말은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지 말라는
말이다. 현대의 생활 가운데서 가장 많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일 것이다. 남의 재산을 탐하거나 피해를 입히는 사례, 남을 침해하고 상대방을 속이고 해를 입히는 사례 등은 모두 타인을 침해하는 행위들이다.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는 뜻은 다른 의미로는 선조가 물려준 소중한  재산을 귀중하게 간직하라는 뜻도 있다. 값없이 다루거나 팔아버리거나 방종하여 폐기하므로 지경을 축소시키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모두 재산권을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남의  재산을 침해하거나 해를 주는 일이나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유산을 값없이 다루는 것 등은 모두 오늘 사람들이 쉽게 범하기 쉬운 일들이다.


하나님의 일에 소용되는 물질

하나님은 부자를 싫어하시고 물질의 풍요를 원치 않으신다는 잘못된 생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지팡이를 잡지 않고 신앙의 길을 떠난 자입니다. "신앙의 길을 가는데 하나님께서 때마다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지 않겠어! 그런데 무슨 물질이 필요해?" 하며 아예 물질에 무관심한 자들입니다. 스스로 빈궁한 자리를 찾아 들어가면서 하나님께서 빈궁한 것을 기뻐하신다고 착각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믿음 있는 자들의 소유물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만 외쳤지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낼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물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물질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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