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화

감정, 기분에 대한 예화 모음

공 상희 2011. 7. 22. 14:11

# 감정/ 관심, 기분, 너그러움, 느낌, 동정, 뜨거움, 마음, 만족, 분노, 사랑, 애통.

 

## 40년의 열등감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1학년 때였다. 할머니는 내게 목이 긴 양말에 굽이 높은 신발을 신겨서 학교에 보냈는데 그것은 초라한 시골뜨기의 모습이었다. 초라한 시골뜨기와 같은 모습이 내 감정까지도 그런 초라함으로 몰아넣었다. 그 이유는 다른 아이들은 전혀 그런 복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느꼈던 심각한 열등감이 놀랍게도 40년 동안이나 나를 지배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건이 40년 동안이나 나에게 영향을 주도록 내 자신이 허락했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 문제를 가지고 나가서 기도하였으며, 치유해 주실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서 자유를 얻었다.

이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한 일은 죄를 고백하는 일이었다. 그 다음에, 기억을 치유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일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오랜 세월 동안 열등감을 허용했던 것은 하나님의 법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탄에 의해서 주장되어졌던 것이다. 사탄이 하는 일은 우리를 혼미케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법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혼돈을 주고 괴롭게 하면서 같이 존재하고 있다.(신부, 대천덕)

 

## 두 마리의 뱀

 

인간의 모든 성질 중에서 질투는 가장 추한 것이고, 허영심은 가장 위태로운 것이다. 마음속의 이 두 마리의 뱀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은 매우 유쾌한 일이다. 하기는 그것을 쫓아낸 후의 장소를, 인간 경멸과 교만이라는 또 다른 두 마리의 뱀이 차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질투와 허영심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도록 이 점에 대해 조심해야한다.

 

## 감정에 귀를 기울이라

 

겨울 풍경화를 마친 화가가 몇 걸음 물러나 자기의 작품을 감상하였다. 어디 하나 틀린 데가 없었다. 나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아래로 휘어진 듯 유연히 드리워졌고, 오막살이 처마 밑으로 고드름이 우아하게 내려져 있었으며, 또한 땅위에는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신선한 눈송이가 조화있게 화면을 채웠다. 그런데 그 그림은 팔리지 않고 몇 개월 동안 화랑에 그대로 걸려져 있었다. 그 화가의 특징은 겨울 풍경화이었는데도, 아무도 그 그림을 사가는 사람이 없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옆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다른 화가에게 이유를 물어보았다. “붓 가지고 계세요?” 그는 대답 대신 붓을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붓을 받아들고는 몇 가지 색을 혼합하더니 듬뿍 찍어서 오막살이 창문에 붉은 빛을 덧칠하였다. 그리고는 회색을 찍어 오막살이 굴뚝 위로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러자 그 그림은 그 날로 팔려버렸다. 그렇게 춥고 쓸쓸해 보였던 그림이 졸지에 훈훈한 그림으로, 손짓하는 그림으로 바뀐 것이다. 두 번 덧칠을 하자 그 그림의 감정이 살아난 것이다. 인간은 감정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감정이 죽어 있다면 우리는 결코 삶을 체험할 수 없을 것이다. 감정에 귀를 기울이라. 이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 실패를 자초한 감정적 명령

 

많은 경우 감정적이고 일방적인 행동을 취할 때 실패하게 된다.

「후르시쵸프 메모아」란 책이 있다. 소련의 수상이었던 니키타 후르시쵸프가 쓴 회고록인데 그 회고록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치열했을 때 니키타 후르시쵸프는 정치 장교로 전선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독일군이 소련 국경을 넘어서 쳐들어갔으나 워낙 방대한 땅이라 감당을 못하고 후퇴를 하게 되었다. 그때 소련군은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서 전진을 하는데 70만의 대병력을 투입했다. 아무리 전진을 계속해도 독일군과는 접전이 없었다. 소련의 야전 사령관은 더이상 전진하다가는 오히려 작전의 실패를 가져올까봐 정치 장교인 후르시쵸프를 통해서 모스크바에 연락을 했다. 그때 소련의 수상은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빨리 전진을 계속하라고 일방적인 명령을 내렸다. 야전군 사령관의 작전 의사를 무시한 다분히 감정적이요, 일방적인 전진명령이었다. 후르시쵸프 자신도 그 일에 대하여 감정적이고 충격적인 명령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면 그 당시 감정적이고 일방적인 작전명령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그 때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포위를 당해서 70만 가운데 30만의 병력을 잃어버리는 참사를 당했던 것이다.

 

## 주님을 영접한 감정

 

어떤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 말하기를 “나는 어젯밤 모임에서 기쁨에 충만해 있었소.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소. 마치 한밤중처럼 캄캄하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나는 무척 기쁘군요”라고 대답했고 그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목사님을 바라보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라고 되물었다.

“어제 하나님은 당신에게 즐거움을 주셨소. 그런데 오늘 당신이 그리스도를 의지하기보다 당신의 감정에 의지하는 것을 보고는 그 즐거움을 없애버린 것이오. 기쁨을 잃은 대신에 당신은 주님을 얻은 것이오. 기차 터널을 지나가 본 적이 있지요?”

“예”

“그곳이 어둡다고 해서 우울하거나 불안한 적이 있나요?”

“아뇨, 전혀 없었지요.”

“그리고 나서 얼마 후 다시 밝은 빛을 보았지요?”

“아! 지금 나왔어요.” 그는 목사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외쳤다.

“하나님은 나의 감정에 따라 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A. E. 얀젠)

 

## 분노와 미움을 버리자

 

한 저명한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평소에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은 나를 죽이는 사람이다”라고 말해 왔다. 그가 하루는 의학협회에 나가서 논문을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한참 발표하는 도중 한 의사가 일어나서 그의 논문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평하기 시작했다. 자신만만하게 논문을 발표하던 그는 그 말을 듣고 화가 난 나머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를 비난한 사람을 큰 소리로 공격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분노와 미움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깨끗이 청소해야겠다.

성경에서도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목사. 조다윗)

 

## 향수의 감정

 

미국의 유명한 작가인 윌리암 하우엘즈는 그의 자서전적인 이야기에서, 소년 시절에 그의 형과 함께 근처의 도시에서 직업을 얻기 위해 오하이오에 있는 집을 떠난 일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의 형은 그를 여관에 데려다 주고는 집으로 가는 차를 타려고 역으로 갔다. 그러나 기차가 도착했을 때는 윌리암도 역으로 달려갔으며, 그는 형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마치 먼 나라에서 몇 년 만에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역에 나타난 그때는 겨울 오후였으며 하늘은 푸른 사과빛으로 보였다. 하우엘즈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그 겨울날에 느꼈던 향수와 황량감이 가져다 주었던 하늘 빛깔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고 이야기했다.(C. E. 매카트니)

 

## 끝까지 참는 인내의 감정

 

“…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인내는 보이는 것을 통해서는 참을 수 없는 감정이다. 즉 보이는 사람이나 사건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참을 수 있는 감정이다. 인내는 양면에서 참아야 한다.

첫째, 내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대하여 참아야 한다. 즉 주관적인 인내이다.

둘째, 바깥에서 도전하는 환경과 사건에 대하여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 즉, 객관적인 인내이다.

청지기는 참을 줄 알아야 하되 반드시 끝까지 참아야 한다. 한 두번 참는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참아야 한다. 또 안팎으로 참아야 한다. 젓가락은 반드시 두 쪽이 있어야 유용하다. 혼자서는 이중창이 불가능하듯이 한쪽만 참아서는 언제나 부족하다. 모두가 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훌륭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

 

## 젊은 개종자들을 위해

 

젊은 개종자들이 먼저 배워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감정과 종교의 근본을 구별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옳은 것이기에 그분께 복종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면 나는 이것을 그 근본이라 부른다. 많은 젊은 개종자들은 거의 철저히 의무에 앞서 자신들의 감정 상태에 의지한다. 몇몇은 마치 자신들이 능숙한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지 않으면 예배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 젊은 개종자들은 자신들 앞에 의무가 놓이면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신중히 배워야 한다. 하지도 않고 느낌을 기다리지 말라! 여러분이 기다릴, 가령 그럴듯한 바로 그 느낌은 여러분이 자신의 의무를 시작하는 그 예배 가운데 함께 하게 될 것이다. 젊은 개종자들은 자신들의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된다. 그들은 편협적인 차별을 강조하거나 그러한 문제에 집착하게끔 교육받아서도 안된다. 그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중요도에 따라 각자 적당한 시기에 그리고 적당한 방법으로 고찰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강조하거나 또는 신앙생활의 출발에서 그것들을 중히 여기게 가르쳐선 안된다. 젊은 개종자들에게 내가 이러한 말을 듣게 될 때 나는 슬픔을 느낀다. “당신은 ‘신에 의한 선택’의 교리를 믿습니까?”라거나 “당신은 세례를 믿습니까” 또는 “당신은 침례를 믿습니까?” 나는 이보다 더 나빠진 개종자를 결코 본적이 없다.

 

## 가장 감격적인 순간

 

유명한 흑인 성악가 메리언 앤더슨의 일화이다. 어느 날 한 기자가 세계적으로 성공한 이 성악가에게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 언제였냐고 물었다. 메리언 앤더슨의 가장 감격적인 순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이 기자는 메리언 앤더슨이 루즈벨트 대통령 부처와 영국 여왕 부처를 위한 백악관 음악회 때나, 또는 자기 고향에서 필라델피아를 빛낸 위대한 인물로 선정되었을 때를 상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메리언 앤더슨은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

“처음 음악회를 성공리에 마친 뒤 집에 달려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제 빨래감을 받지 않아도 되요’ 라고 말했을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감격스러웠을 때는 ‘정죄 의식이라는 빨래감’에서 해방되었을 때이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 민족끼리 통하는 언어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 곳곳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 중에는 ‘울밑에 선 봉선화’가 있었다. 이 노래는 그 이후로부터 아직까지도 우리 민족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고 불려지고 있다. 일제시대 때 이 가사는 우리의 독립을 사모하는 한 민족의 마음을 잘 묘사해 주었다.

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이와 같은 노래뿐만 아니라 시를 비롯한 문학을 통하여 이와 같은 민족적인 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노래와 시들을 통하여 서러움을 통감했고, 앞으로의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며 뭉칠 수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런 느낌으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외워도 일본인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같이 민족적인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어느 나라고 그 나라 백성들끼리 통하는 감정어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한국어를 잘 안다고 해서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 나라 언어를 안다고 해서 그 감정까지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는 하늘나라의 백성들만이 알 수 있는 영감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그 나라의 백성이 아니면 감정이 없기에 이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사모, 이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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