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복된 가정
구 절 : 행 10:1-8
오늘은 가정주일입니다. 가정의 달 셋째 주일 그리고 주말인 토요일은(5월21일) 부부의 날에 우리의 가정은 어디에 서있는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정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발견하는 주일이되시길 바랍니다. 인간은 가정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사회의 기본 단위가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만드셨고 만드신 가정이 소중하기에사랑과 행복을 맡기셨습니다. 대검찰청 자료에 위하면 작년 한 해 동안 부모를 살해 폭행 협박 감금등의 패륜사건으로 1496명이 입건되었고 그중 살해로 인한 구속이 37명이나 되며 해가 거듭 될수록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고합니다. 가정의 파괴는 곧 사회의 파괴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사탄은 가정을 총격 목표로 삼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큰 문제가 항상가정과 연관되었음을 보게됩니다. 오늘은 본문에 소개된 고넬료의 가정을통하여 이상적인 복된 가정의 모습을 찾아 보겠습니다.
= 경건이 있는 가정 =
고넬료의 가정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분위기가 있는 가정인데 호주만이 아니라 모든 식구들과 종들(7)까지도 경거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른이 있는가정은 가장을 중심하여 구심점이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가장의 권위를 부여 하셨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아버지는 완전치도 못하고항상 우리와 같이 계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장으로 모시고 사는 경건한 가정은 사랑과 평화가 넘쳐납니다. 한약상 부부가 장남에게 피살되었다는 소식은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집에는 부족한 것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경건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에게 붙잡혀 비참하게 쓰임받게 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가정엔 기도가 있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연결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 가정은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른 일을 하다가 남는 시간에 기도한 것이 아니요 자기의 생활중 가장 중요한 시간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음으로는 말씀을 사모하는 가정이었습니다 (33).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시 119:105) 가정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면어린 자녀들이 말씀대로 바로자라고 어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이끌림을 받습니다. 세번째로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천사가 주의 종을 청해다가 예배를 드리라고 하자 그대로 순종하니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임했습니다. 그린랜드에서는 현관문을 열고 인사할 때 "하나님께서 이 집에 계십니까?"하고 인사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가정에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거기가 천국이 될 것이빈다. 경건이 넘치는 가정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 모든 식구가 하나로 연합된 가정 =
2절에 온집으로 더불어란 표현은 가족이 하나되어 화목을 이루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존경하고 자녀는 부모에 효도하며 부모는 자녀에게 희생적인 사랑을 하고 형제간에는 서로 돕고 아끼며 하인들까지도 서로사랑한다는 끈끈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가정은 밖에서긴장하며 살더라도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요 실패와 좌절을 당했어도용기와 격려를 받을 수 있는 공간식구끼리 사랑과 미소로 대하고 즐겁게 대화하고 기쁨으로 노래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모든 식구가 하나될 때에 만이 가능합니다.
= 이웃을 사랑하는 가정 =
물이 채워지면 밖으로 흘러 내리듯이 가정이 경건이 있고 화목이 넘치니 그것이 이웃에 흘러서 향기가 나고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 하인들에 대한 사랑(22) - 그 당시 종은 주인에게 봉사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쌍히 여겨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종들이 주인의 사랑에 찬
사를 보낸 것을 보면 서로의 관계가 원만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가난한자들에 대한 구제(2) - 일회성의 행사를 위한 구제가 아니라 계속되는 구제로 하나님도 인정하시는 *2,4,31) 구제를 했습니다. 그래서 온 유대족속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을 정도(22) 였습니다.
세계는 지금 한달에 삼만오천명 1년에 천삼백만명이 굶어 죽어 가고 있답니다. 문제는 그들과 나는 관계가 없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시듯 그들도 사랑하십니다. 우리 주위에 도울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계속 벌이고 있는 사랑의 이삭 운동을 더욱 확대시켜 나가야할 것입니다. 식구들 개개인이 모두 참여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 이웃삶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 (24) - 육신적으로만 도운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도왔습니다. 모든 것을 소유했어도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면 허사일 것입니다. 이웃사랑은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 하나님께 인정받고 쓰임받은 가정 =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인정받았고 (4,31) 하나님은 복을 주셨습니다.모든 식구들이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개인도 사랑하시지만 가정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가야할 천국이 소중한 곳이라면 여러분 가정에 사랑하는 식구들이 다 함께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넬료의 가족들이 구원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 가정에서 부터 이방선교가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고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아름다운 빛을 비추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믿음의 가정이 된것을 감사하십시오. 믿음의 가저이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천군천사를 보내셔서 역사하실 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 결론 ]
오늘날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문제의 발단이 가정에서 부터시작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탄의 공격목표인 가정을 파수하기 위하여 깨어서 믿음위에 서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잠시도 피할 수없고 떠날수도 없고 소홀히 할수도 없는 곳입니다. 모든 식구의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는 곳이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아래 작은 천국을 이루며 사는 복된 가정을 이루시길 축원합니다.
선택된 우리 가정
(창7;1-12,)
미국에 16대 大統領이 되였던 <아브라함 링컨>은 어려서 비가 새는 오두막집에서 살았다.,어린 <링컨>은 비가 새는 오두막집에서 獨學을 했습니다.
그는 大統領이 되리라고 生覺하지 못했을 것이며,,,世上 사람들이 苦生하는 이 소년을 거들떠 보지를 아니했습니다..
저를 기억하신은 분은 <하나님>만이 알고 계셨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이 記憶하고 있는 福된 人物이 였다.
그리고 구약에 <노아>는 <하나님>에게 恩惠를 입은 사람으로서 墮落한 人類를 審判할 計劃을 미리알려 주셨다.
<노아>는 墮落한 世代에 물들지 아니한 사람이 였다.--이는 <노아>가 전혀 죄를짓지 아니했다는 말이 아니라,,,<하나님>이 認定해주는 當代에 義人이요,,,完全한 사람이고 評價를 받았습니다.
人間편에서는 <하나님>과 同行을 했기 때문이요,,,<하나님>편에서는 恩惠를 입혀 주셨기때문이다.-이 두가지 要因중에 인간의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義로인하여우리를 罪惡世上에서 건져 주시고 保護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것이다.
우리가 이 世上을 살아가면서 흔히 말을 합니다.
-������이 世上에는 왜 惡이 存在하는가?������
악에 기원에 대하여는 성경에도 明確한 말씀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이 어떻게 始作되었는지 仔細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는 분명합니다.
첫째,<하나님>이 惡의 원인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회도 거룩하라,,,"라는 말씀을 비롯해서 성경 말씀은 분명한 事實은 <하나님>은 결코 惡의 根源이 아니다.
둘째,<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어떤 理由가 계셔서 世上에 악이 存在하도록 許容하셨다는 事實입니다.
우리는 自然히������<하나님>은 왜 惡이 存在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하는 質問하게 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本文에 部分적인 對答을 提示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방주에 生物들을 들어가게 하실 때 淨潔한 짐승 뿐만 아니라 不淨한 짐승을 同時에 들어가도록 許容하셨습니다.淨潔한 짐승만 들어가면 <노아>의 방주는 깨끗하고 쾌적할 텐데 왜 不淨한
짐승이 방주에 들어가도록 許容하셨겠습니까?
(6;19)에는 ������암수 한 쌍씩 들어갔다������고 했고--(7;2)절에는������정결한 짐승은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라고 되어 있다.(6;19)말씀은 방주에 들어가야 할 最小한의 암수 한 쌍을 언급한 것이고 (7;2)말씀은 基本에 특별히 貞潔한 짐승을 첨가하여 암수 일곱씩 취하라고 하신말씀입니다.
淨潔한 짐승은 祭祀와 食用으로 쓰이는 것이므로 여유를 두게 하신 것입니다.-왜 방주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함께 들어가게 하셨는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가지 가지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最善의 禮拜를 드리기 위함이다.
人間이 墮落한 뒤에 반드시 해야 할 高貴한 삶의 義務는 禮拜의 義務입니다.禮拜는 義務이면서 同時에 特權입니다.
罪를 지은 타락한 人間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方法은 禮拜뿐입니다.
<禮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하나님>께서 우리에게 要求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받으시기 위하여 對象의 家庭들을 선택하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禮拜>는 잘못드려도 안되며 소홀히 생각해서 안된다.
오늘날 敎會의 禮拜가 왜곡되어 가고 있는 理由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마음보다 받으려는 마음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본래 禮拜는 創造主 <하나님>께 사랑을 드리고 救援者 되시는 <하나님>께 感謝를 드리는 것입니다.
드리는 순서중에 禮拜시간에 가장 귀하게 生覺해야 할 獻金을 드리는 순서로서 드린다는 意味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정말 나에게 복 주시고 恩惠를 주시는 <하나님>께 感謝의 表示로 정성껏 준비해 온 獻金을 드려야 할것입니다.
<노아>는 地面에 물이 마른 후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께 禮拜]드렸습니다.(8;20)-������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라고 하였다.
<하나님>님께 드려지는 禮物에는 마음과 뜻과 정성으로 때묻지아니 하고 냄새나지 아니한 거룩한것을 드려야 합니다.
舊約時代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祭物에는 때가 묻지아니한 淨潔하고 깨끗한것을 골라서 드렸다.
우리가 드리는 禮拜도 神靈과 眞情으로 거룩해야 합니다.
몸이 깨끗해야 하고,,,입술이 깨끗해야 하고,,,생활이 깨끗해야 합니다.
드려지는 獻金이 깨끗해야 합니다.
<노아>의 모든 祭物의 출처는 방주안에 있는 경결한 짐승들이 였습니다.
지금 방주안에는 淨潔한 짐승과 不淨한 짐승들이 있다.
후일에 <하나님>께서는 祭物用으로 구분하신것이다.
家庭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墮落하기 以前에는 家庭을 區分하신것이 아니다.-모든 家庭을 아릅답게 하셨다.
罪惡이 들어온 후에 家庭을 選別選擇하기 시작하셨다.
<갈대아 우르> 무당촌에서 <아브라함>을 選擇하셨다. 舊約에 模範的인 家庭은 <노아>의 家庭이 였다.-그리고 救援받은 家庭이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太初에 天地를 創造하실때는 표현은 모든것이 "좋아더라"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人間은 墮落하였고,,,부패하여 더럽고 냄새 나는 추한 人生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썩어지면 냄새가 지독합니다.--향기로운 꽃일 수록썩으면 냄새는 더 지독합니다.
짐승도 살아 움직일때 요긴하고 귀엽게 쓰다듬어 줄수 있지만 죽어 보세요,,,죽은 짐승을 앉고 쓰다듬어 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병들고 죽고 나면 썩은 냄새만이 남은 것이다.
萬物의 靈長이라고 하는 人間은 더욱 그렇다.--인간의 냄새는 더욱 지독하다.
우리가 香氣로운 냄새가 나는것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죽어 보세요,,냄새가 납니다.-옆자리에 찾아올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家庭을 選擇하신것은 그의 의로운 生活을 보셨기 때문이다.
<노아>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섬겼으며,,하나님은 그를 "<하나님>께 恩惠를 입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노아>할아버지는 <하나님>을 보이는 분처럼 진실하게 섬기며 살았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위하여 120년간을 아들 세 兄弟와 子婦 세며누리가 한결같이媤夫의 말씀에 順從하면서 온 家族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왔다.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으나 듣지를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노아> 食口를 조롱을 하고-늙은이의 망년이라고 비웃었을것이다.
善하게 살려고 努力하는 個人나 家庭은 언제나 조롱을 당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惡한 世上의 特徵이다.
이것은 人間의 悲劇이다.
<하나님>의 警告를 無視하고 거슬리는 行爲는 <하나님>은 容納하지 않으신다.
<노아>의 여덟식구는 구원을 받았으나--온 世上은 洪水로 말미암아 滅亡을 받았습니다.
選擇받은 우리의 家庭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祈禱의 本質도 容恕만을 구하는 그런 祈禱가 아니라,,感謝의 祈禱입니다.
容恕를 구하는 기도만이 아니라- 매일 감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子女라면 아버지와 매일 부드러운 대화가--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容恕해 주십시오������라는 말만 날마다 되풀이 한다면 듣는 아버지 얼마나 따분하겠습니까?
<하나님>께 祈禱할 때는 <하나님>의 恩惠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았다고 告白하고 獻身을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引導하심으로 罪惡의 世上에서 勝利하는 삶을 살면서 最善의것을 主께 바쳐야 합니다.
父母들이 子女들에게 하는 말이 -'하라������- 권면보다는--������하지 말라������-는금지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父母의 敎訓이 잔소리처럼 여기도 합니다.
그런데 父母는 子女를 사랑하기 때문에 올바른 길로 가기 원하기 때문에꾸짖고 나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人間에게 ������하라������는 命令보다������하지 말라������는 命令을더 많이 하셨습니다. 그 理由는 우리의 有益을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選擇받은 家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주저해서는 않된다.
둘째로는 식용을 구분하시 위함이라 생각된다.
방주는 淨潔한 짐승이 더 많았던 理由는 첫째가 祭祀를 드리기 위함이었고둘째가 먹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도 제한하셨습니다.(레11;장) 자세한 사항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방주에 不淨한 짐승과 淨潔한 짐승이 함께 있었다.
육식법을 허락된 것은 (9;2-3)절 말씀하셨다.
������땅의 모든 짐승과 空中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 하리니 이들은 너희손에 붙이웠음이라,무릇 산동물은 너희의 食物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淨潔한 짐승과 不淨한 한방주안에 있으나,,이미 먹을수 있는 것과 먹을 없는것을 구분 해 놓은신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害로운가 有益한가에 있습니다.
고기를 구별없이 먹는 것은 성인병에 원인입니다. 성경에 금한 음식물 규정은 現代 成人病에 걸릴 危險이 있는것이다.
우리에겐 飮食物을 選擇해서 먹을 權利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먹지 않는 것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좋습니다.飮食은 우리의 健康 狀態를 左右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靈魂도 肉體와 같습니다.
우리가 육체 위해서 음식을 가려 먹는 것처럼 靈魂을 위해서도 가려 먹어야합니다.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통해서 靈魂이 상하기도 하고 有益을 주는 양식이 되기도 합니다.
텔레비전,잡지,만화 같은 세상의 低質文化는 靈魂을 더럽힙니다.<하나님>의 거룩한 眞理 말씀으로 生命의 말씀으로 靈魂을 먹일 때 靈魂이 힘을 얻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고전10;31)"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선택된 가정>임을 명심하십니다.
제 목: 방주 안에서의 노아의 가정
성 경: 창8:1-4
산들가운데 에베레스트산이나 알프스산 이스라엘북부의 헐몬산, 아프리카의 킬리만
자로산 등은 가장 높은 산들이다. 인물들가운데도 마치 높은 산들처럼 하나님앞에서
뛰어나게 경건하게 살아 그들을 통하여 큰 구원의 대역사를 이루고 그 이름와 삶이
후세에 남아 귀감이 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그 중에 노아는 가장 훌륭한 몇몇 인
물들가운데 한 분임에 틀림없다.
노아는 온 인류에 폭력과 음란과 거짓이 가득할 때 오직 하나님앞에 으롭게 살며 하
나님과 동행한 어른이엇따. 그는 자신만 여호와를 잘 섬긴 것이 아니라, 그의 아내와
세 아들들, 세 자부들까지도 경건하게 가르치고 지도하여 믿음의 경건한 믿음의 가정
을 만들었다. 롯은 소돔고모라가 망할 때 그의 두 딸들밖에 구원하지 못햇지만 노아는
그의 8식구를 다 구원시켰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방주를 만들어 새 인류의 시조가 되
었다. 방주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놚 심판이 내려질 때 방
주안에 탄 이들은 다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방주밖에 잇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수장되고 말았다. 그와같이 심판때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은 안전하지만 그리
스도밖에 있는 자들은 그 누구라도 예외없이 지옥불의 심판을 변할 수 없다.
노아는 방주에서 어떻게 생활했을까? 한정된 생활, 긴 방주생활은 적지 않은 고통이
수반되엇을 것이다. 방주생활을 고찰해 보면서 그리스도안에서 생활하는 성도들의 가
정생활이 어떠해야 할지; 생각해보도록 하자.
1. 하루 하루 하나님의 은헤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였다..
노아가 어떤 사람이엇느냐고 논할 때, 그가 부자였다든지, 그가 자식이 몇이엇다든
지 그의 사회적 지위가 무엇이엇다든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된다. 성경은
그의 생활특징을 요악하여 말하기를 그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하나님과 동
행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의 증조할아버지 에녹처럼 그도 역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
활을 했다. 그의 생활특징은 하나님앞에서 인정받는 생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을 바라보는 하나님 중심의 생활 바로 그것이엇다.
그러므로 그가 방주에서 어떤 생활을 햇느냐 할 때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그가 변
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 중심의 생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햇다는
것을 의심할 수가 없다.
특히 1)감사의 생활이었을 것이다. 온 땅의 인류가 생물들과 함께 홍수로 멸망당할
때 그와 그의 8식구들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방주를 타고 물위로 떠올라 놀라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잇엇겠는가! 그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엇던가. 이제 그 하나님의 구원을 보앗을 때 그
는 말로 다 할 수 없이 감사. 방주생활은 첫째, 날마다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샒
으로 특징지워 졋다고 해도 조금도 틀린 말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무서운 망망대해위
에서 하루 하루 무사히 지낸 것, 수많은 짐승들과 함께 지내면서 전염병에 걸리지 않
고 힘겨운 노동을 하는 가운데도 모두가 건강하게 지낸 사실을 그들은 날마다 감사햇
을 것이다. 감사-----
성도의 가정이 하루 하루 이 험한 세상에서 지캬 주신 은헤를 감사하자. 우연이 아니
라, 하나님의 섭리적 보호의 결과임을 기억하자. 온 가족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함게
모여 하나님앞에 감사하며 찬송하는 가정이 되자.
2)신뢰의 생활이었다.
그들은 방주를 탔다. 일주일 후에 하늘이 검어지더니 비가 땅위에 쏟아졌다. 문을 열
고 박을 내다 볼 수는 없지만 꼭대깅에 잇는 창문을 통하여 무섭도록 쏟아지는 장대같
은 빗줄기소리를 들엇고 보앗다. 낮에도 밤에도 비는 쏟아부어졋다. 하늘에 큰 창이
난 것이다. 간간이 벙쩍번쩍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멀리서 가까이서 들려 왓다. 얼
마나 무서떫을까! 만약 그들이 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볼 수 잇엇다면 얼마나 두려웠을
까! 거기에는 뒤늦게 방주로 기어들어올려고 안감힘을 쓰다가 죽은 수많은 사사람들의
시신들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박을 내다 볼 수 없게
하셨다. 그들은 빗가 감아지는 40일동안 온전히 살아계신 하난미만 철저히 의지했을
것이다. 방주가 물위에 떠오르고 온세상을 집어 삼킨 무서운 파도가 뱃전에 부딛히며
배가 기우뚱거릴 때마다 처음 배를 탔던 그들은 한 편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은 얼마나 간절히 하ㅏ님을 찾고 의지햇겟는가!
그리고 이제 방주는 어디로 떠갈 것인가? 언제까지 방주안에 잇어야 할 것인가? 이
모든 사실에 대해 그들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엇다. 다만 하난미의 소관이엇을 뿐이
다. 하나님만 절대 의지하였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
하나님만 의지하는 가정되자.
2. 질서와 사랑이 있는 가정생활이었다.
노아와 그 아내, 세 아들들과 세 자부들이라고 기록. 이 네 쌍의 부부들은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들의 좋와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던 다른 사람들과같이 결혼한
사람들이 아니다. 노아가 당세에 의인이었다함은 그 자신과 그의 자녀들이 불신결혼
을 하지 않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들은 경건한 가정을 이루었
다. 진정한 사랑은 순결에서 나온다. 두 마음을 품고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
다. 하나님앞에서의 경건함과 순수한 성적 순결가운데 가정의 사랑과 행복은 보장된
다. 방주속에서의 생활을 상상할 때 만약 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지
루했을까! 비록 그들은 달콤한 신혼의 기간은 지났지만 순결과 경건을 바탕으로 서로
신뢰하고 서로 깊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방주안에서의 생활은 결코 지루하거나 갑갑하
지 않앗을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가정 생활이 힘이 들
까요? 가정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원인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월급이 적다거나
고부간의 갈등이거나 자녀문제가 아니라 바로 부부간의 애정이다. 사랑이 잇는 곳에
모든 것을 극복하는 능력이 생긴다. 그러나 사랑이 깨어지고 흔들리게 되면 다른 조건
들은 쉽게 무너지게 된다. 사랑은 지켜져야 한다. 사랑한다라는 달콤한 감정만으로는
사랑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렇게 사랑하던 두 남녀가 사랑이 식으면 증오로 바귀는 경
우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사랑을 지키는 비결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부부간의 의
를 잘 지키는데 있다.
또한 노아의 가정은 질서가 잇는 가정이었다. 방주를 만드는 일은 적어도 50년 이상
이 걸렷다. 그러나 한 번도 자녀들이 노아에게 반항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고 다른 길을
택한적이 없었다. 만약 노아의 3 아들들이 노아의 말을 무시하고 노아를 공경하지 않
았더라면, 노아를 협력하지 않앗더라면, 방주를 만드는 일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세상 사람들은 다 청천하늘에 무슨 비가 내리며 홍수로 세상이 멸망한다는 것을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노아의 아내와 자녀들은 노아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
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했다.
자녀들아 네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 (엡
6: 1- 3)
성도 여러분! 자녀들을 경건하게 양육합시다. 하나님 두려워 하는 법을 가르칩시다.
부모의 신앙모습이 교회에서와 가정에서 다르면 않됩니다. 일치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신앙이 교회에서 기도하고 봉사할 때와 가정에서 자녀들을 대하고 식구끼리 대화할
때, 일체할 때 자녀는 아, 우리 엄마가 정말 예수님을 믿으시는구나 인정하게 됩니다.
자녀들에게 먼저 인정받으셔야 합니다.
3. 부지런히 맡은 책임들을 감당하는 생활이엇다.
노아의 여덟식구는 1년 10일동안 방주안에 잇는 동안 매우 분주하게 지내야 했습니
다. 수산대학교의 양재하 교수님은 창 6장에 기록된 노아방주의 규정을 현대조선공학
으로 환산해 볼 때 약 2만 6천톤급배라고 하엿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갈 동물들이
일곱쌍씩 들어갈 정한 짐승이 약 4000종이 되니 약 2만 8천마리, 그리고 부정한 짐승
이 좀 더 잇습니다. 이것들을 합치면 무게가 대략 6천톤, 그들이 1년간 먹을 양식이
14천 톤 가량될 것이라 하엿습니다. 그래서 26,000t급배에 20,000t의 짐승과 화물을
실엇으니 최적규모엿다고 합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계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뭏든
노아의 8식구가 날마다 수천 내지 수만마리의 짐승들을 돌보며 사료를 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엇을 것이다. 노아의 방주는 요나가 다시스로 가기 위해 타서 그 밑창
에서 낮잠을 잦던 것처럼 유유락락 여행하는 배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그가 창조해 내신 동물들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해 일년동
안 노아에게 그들을 먹이고 다스리도록 하는 중요한 사육의 사명을 주셨다. 그 노아의
수고에 대하여 창 9장에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사람들은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하셧다.
원래는 초식만하게 되엇지만, 노아가 방주안에서 인년간 짐승들을 잘 길러 주엇기 때
문에 짐승들을 음식으로 먹을 것을 보너스로 주셧다. 여러분께서 온갖 고기음식을 즐
기실 수 잇는 것도 다 노아의 수고덕분이다.
여러분, 우리는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안에서 각각 맡은 책임이 있어서 부지런히 일햇
다는 점에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노아가 할 일이 있었으며 그 아내가 할 일이 있엇을 것이다. 남자들은 무겁고 힘든
일을 햇을 것이며 부인들은 가볍지만 섬세한 일들을 맡아서 일햇을 것이다. 여러분!
우리 가족들도 다 각기 자기의 역할을 부지런히 감당해야 합니다. 사람이 할 일이 없
는 것만큼 피곤하고 힘든 것도 없다. 행복은 열심히 일하는데서 온다. 할일이 없다면
집안 청소라도 하고 골목청소, 교회청소라고 합시다. 일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렇게
경건하고 부지런히 일하던 노아가 나중에 밖에서 술마시고 실수한 것을 볼 때 사람은
한가할 때 죄짓기 쉽다는 것입니다. 일하는 것, 바쁜 것이 좋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먹자 입자 놀자 자자 이 네가지 잘되는 사람을 팔자 좋다고 하는데, 그것 좋은게 아니
라 망조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 하셧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하셨습니다. 부지런한 가정이 됩시다. 놀고 먹는 사람, 빈둥거리는
사람이 없어야 가정이 화목하고 좋습니다. 남편은 남편의 할 일을 열심히 합시다. 아
내는 아내의 역할을 힘써 합시다.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공부하는 일이나 집안일을 돕
는 일들이 있습니다. 집안일이 있으며 교회일이 잇고 동네일이 잇습니다. 우리는 우리
에게 주어진 일들을 온 집안 식구가 부지런히 일하는 가정되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
기 바랍니다.
4. 소망의 생활을 했습니다.
오나의 방주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문은 창 7: 16에 여호와께
서 그들을 맏아 넣으셧더라 하신대로 하나님께서 닫으신 문이기 때문에 방주에서 나오
기 전에는 열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방주 꼭대기로부터 50cm쯤 떨어져 잇는 창문들
을 통해서만 바같을 볼 수 잇엇는데, 창문은 너무나 높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항상 바
라 보이는 것은 파아란 하늘밖에 없었습니다. 방주는 상중하 3층이엇고, 창문들은 3층
꼭대기에만 있엇습니다. 아마 노아의 가족들의 방은 3층에 있엇을 것입니다. 가벼운
동물들은 3층내지 2층에, 무거운 동물들과 가축사료는 맨 아랫층에 있엇을 것이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창문을 1, 2층엔 만드시지 않고 3층 꼭대기에 만들게 하셨을
까요? 짐승들이 그 창문을 통해서 바같세상을 보면 홍수가 날 때 짐승들이 두려워 움
직이면 위험했기 때문이엇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의 식구들도 밖을 내다보면 이웃과
온 세상 사람들을 집어삼킴 바다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들은 하늘만을 바라보도록 설계하셨습니다. 그 하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을 기억햇습
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게서 그들을 권고하시어 분명히 다시 저
새 세상으로 내보내시어 살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소망의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바라보고 염려근심하고 두려워 하며 낙심하기를 원치 않
으십니다. 비록 이 세상엔 환란의 비바람이 불어치고 핍박의 홍수가 닥쳐 온다 하더라
도 그것 바라보고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저 위에 게신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것입
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백성들이 홍해앞에 도착했을 때 앞에는 시퍼런 홍해의
파도가 출렁거리고 뒤에는 수백대의 전차들을 타고 추격해 온 애굽의 군대가 칼을 빼
고 달려 들려고 했을 때 백성들은 모두 워망하며 이젠 죽었구나 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런 것들을 바라보지 않고 살아게신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엇습니다.
그 때에 홍해가 갈라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 손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방주생활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생활의 모델입니다. 노아는 언제 방주에
서 나갈지 알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하루빨리 방주에서 나가길 소원했겠습니까! 그래
서 270일쯤 되어서는 까마귀를 내어 녣봕 방주밖의 형편을 살펴보도록 햇습니다. 가마
귀가 돌아오지 않자 다음에는 비둘기를 내어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온 지면에 물이 잇
으니까 그냥 돌아왓습니다. 7일 후에 또 비둘기를 내어 보내니 져녁때쯤 비둘기는 감
람새 잎을 물고 돌아왓습니다. 노아는 얼마나 기뻤겟습니까! 아, 이제 물이 말라 드디
어 땅이 나타나기 시작했나보다. 얼마 잇지않아 우리가 밖으로 나갈 수 잇겟구나..
노아의 이런 모습들은 마치 예수님 언제나 오시렵니까 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그리스
도의 신부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감람나무 새 잎을 보고 새 날이 다가온 징조인 줄
알았듯이, 성도들은 세상의 징조들을 보고 말세가 가까이 왔음을 압니다. 곳곳에 기근
과 지진, 전쟁이 일어남을 볼 때, 단 12: 5에 말세가 되면 많은 사람의 오아래가 빨라
지리라 한대로 점점 고속화시대가 되어짐을 볼 때, 시대의 징조를 통해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가왔음을 느끼게 됩니다.
제목: 믿음의 가정을 이루자
「신」 6:1-9
신6:1 이것은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분부해 주신 계명에 딸린 규정이오 법령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너희가 건너 가 차지할 땅에서 이것을 지키도록 너희를 가르치라고 하셨다.
신6:2 이는 너희로 하여금 너희 하나님 야훼를 경외하며 내가 오늘 지시하는 그의 규정과 계명을 지키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너와 네 후손 대대로 평생토록 이를 지켜 오래 살게 하려는 것이다.
신6:3 그러니 너 이스라엘은 들어라. 성심껏 그대로 실천 하여라. 그래야 너의 선조들의 하나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약속해 주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잘 되어 크게 번성하리라.
신6:4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나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 뿐이시다.
신6:5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나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신6:6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신6:7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 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신6:8 네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신6:9 문설주와 대문에 써 붙여라.
흔히 가정을 사회의 기본 단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건전하고 행복할 때 그 사회가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가정이 건저나지 못할 때 자연히 불화하게 되고 여기서부터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고 결국 사회가 혼란까지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소년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도 문제 청소년은 없고 다만 문제 가정만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즉 모든 사회의 문제가 가정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저녁은 ‘가족찬양 경연대회’로 모렸기에 많은 분들이 온 가족이 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가정은 어떤 가정인가 살펴보고 믿음의 가정을 만들어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실패한 가정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탄되는 비극을 초래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40여년 전 미국의 하버드 대학의 사회학자인 Pitirim Sorokin(피티림 소로킨)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인류는 점점 더 이혼과 별거 생활로 사회의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고 불행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 그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1912년에는 평균 12쌍 가운데 평균 한 쌍이 이혼을 했습니다.
1932년에는 평균 6쌍 가운데 한 쌍이 이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에는 평균 3쌍 가운데 두 쌍이 이혼을 하고 한 쌍만이 정상적으로 가정 생활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1990년대에는 그 통계가 더 나아졌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요.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 기억에 5쌍 중에 한 쌍은 이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3년전 친구 목사들과 모인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은 1년은 고사하고, 한 달도 멀고 신혼 여행 다녀와서 그냥 이혼하는 부부도 있다고 그러더군요. 신혼여행을 하면서 서로 무엇이 맞지 않았는지 일평생 고생하느니 빨리 끝내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헤어지더라나요. 이런 일이 교회 밖도 아니고 안에서 생겼다는 것이 저에게는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가정 때문에 문제가 많이 생기게 됩니까? 가정은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축복의 행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믿는 사람은 자기 기분대로 가정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가정을 이루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같습니다.
쉽게 만나서 쉽게 헤어지고, 상대를 마음 내키는대로 바꾸고, 게다가 결혼 결정도 쉽게하고 그러다 파혼 아니면 이혼을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버려지는 아이가 1년에 300명이라고 하던가요? 또한 인공유산으로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생명이 우리 나라만도 100만이 훨씬 넘는 실정으로, 미국의 경우에는 연 150만으로 이 숫자는 심장수술로 살아나는 생명의 10배에 해당하는 숫자라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결혼이란 자기 마음대로 모였다가 헹졌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장난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가정에 뿌리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신앙의 기반을 잃어서 가정이 흔들립니다.
기초없는 집은 아무리 아름답게 겉모양을 단장하고 굉장한 저택을 지었다고 해도 얼마 못가서 흔들리고 기울어지고 금이 가고 그러다가 넘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견고한 집을 지으려면 보이지 않는 부분인 기초공사를 위해서 많은 경비와 시간을 소요합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 흔들리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모두가 변하는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하지 아니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만세 반석이십니다.
그의 말씀은 세상이 다 변한다고 하여도 변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지혜있는 건축자와 같아서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우는 것 같으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부딪쳐도 무너지지 아니 하리니 그 기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라” 그리스도 위에 그 말씀을 기초로 세운 가정은 절대로 흔들리지 아니 합니다.
그리고 많은 가정이 외롭습니다.
이 말씀은 혼자 살아 외롭다는 뜻이 아니라 대화가 없는 가정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숙집 처럼 잠이나 자고, 밥이나 먹고, 밥이나 먹고, 옷이나 갈아 입고 하는 정도의 가정, 서로 사랑스러운 정이 통하는 대화가 없는 가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거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구나 죄악에 사로잡혀 잇는 가정이 많습니다.
이것도 결국 실패한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주신 계명 중에 출애굽기 20:5에 보면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4대까지 이르게 하겠다”하였습니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죄에 대한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매우 중요시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출애굽기 34:7에 똑같은 말씀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5:9에 또다시 반복해서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비에 새기고 돌비에 새겼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시기 바랍니다.
부모대에 죄를 심으면 반드시 자식대에 가서 그 부모가 심은 죄를 거두게 됩니다. “네 죄가 너를 찿아 낼 줄 알라”(민수기 32:23)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오늘 이 세상에 태어난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그 부모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속담에 “깨어진 둥우리에는 온전한 알이 별로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경고하였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허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 7-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정 위에 선(善)을 심어 선을 거두어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공한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행복한 가정의 비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고 하십니다.
성공한 가정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가정입니다.
본분 6:6을 보면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문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믿는 가정이 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함께 기도하며 찬송하는 일은 성공적인 가정을 건설하는 원리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가정은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는 부모에게서부터 옵니다.
잠언 22: 6을 보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하였습니다.
구약 사무엘하에 보면 다윗의 세째 아들 압살롬에 대한 기사가 나옵니다.
압살롬은 어릴 때에 부모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 생각도 없는 부모에게 반항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부하들에게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접해다오”하고 부탁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압살롬은 결국 그 보모가 죄지은 표시였습니다.
여러분 부모가 다른 책임을 다했어도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시키지 못하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믿는 부모는 자녀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백마디 말보다 한 번의 본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은 부모하는 대로 따라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이 생활이 자녀에게 본이 되지 못하면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아니합니다.
어떤 가정에서 부모들 자기는 교회에 잘 출석하지 않으면서 애들은 교회에 잘 보냈습니다.
교회에 가서 좋은 말씀 듣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에서 였습니다. 그런데 그 애들이 10대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교회에 나가는 것을 중지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 요사이는 왜 교회에 나가지 않니? 전에는 그렇게 잘 다니더니”. 이 때 큰 아이가 아버지에게 대답합니다.
“아버지 전에 철없을 때는 아버지가 나가라고 데려다 줘서 다녔지요. 이젠 철이 좀 들어가요. 아버지가 필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교회를 저희는 나가서 뭣하겠어요?”
여러분 부모된 우리가 우리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녀에게 본이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는 대개의 경우 부모가 하는대로 따라갑니다.
끝으로 성공적이고 행복한 믿음의 가정은 교회와 관계를 꼭 맺고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영위해 나가는데 필수적인 조건은 교회입니다.
그 까닭은 교히는 하나님의 기관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예수 잘 믿지 않는 자정치고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한 가정을 본 일이 없습니다.
사람은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그의 믿음을 세워 나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믿음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며 지도하게 됩니다.
성도 사이에 교제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분의 신앙을 위하여 여러 면으로 도와드리고자 합니다.
그러기에 교회와 관계를 잘 맺으면 여러분의 신앙은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바른 관계를 맺고 지도받는 가정은 성공적이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반석에 여러분 가저으이 닻을 걸었습니까?
여러분의 자녀에게 부모로써 본을 보여 주십니까?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십니까?
자녀와 함께 찬송을 부르십니까?
자녀들의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 관심을 가지십니까?
자녀들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서 저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있습니까?
“스스로 속이지 맙시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늘 축복하셔서 동안에 속한 모든 가정이 행복하고 믿음 안에서 성공한 가정이 되기를 축원합니다.-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
제목:믿음으로 사는 가정
성경:사도행전 16:11-15
먹고 입고 사는 것이 넉넉하고 거기다가 건강과 평안까지 겹친 삶이라면 최상의 행복일 것입니다.그러나 그러한 조건을 골고루 다 갖추고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돈은 있는데 건강이 나쁘다든지 돈도 있고 몸도 건강한데 집안 속사정이 편치 않다든지 몸은 건강하고 집안도 평안한데 돈이 없다든지…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살아가는 것은 이상이지 현실일 수는 없습니다.
저는 가끔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곤 합니다.그것은 “부부가 함께 교회 나오는 것이 무엇보다 부럽다”,“가족이 함께 교회를 섬기는 것이 부럽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가족이 함께 예수 믿는 것이 소원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그리고 그것은 소원중의 소원이며 기대중의 가장 큰 기대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한마디로 가족이 함께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축복중의 축복이며 은혜중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신앙의 대상이 하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다시 말하면 아버지,혹은 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대상이 한 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어느 가정에 아들과 딸이 열남매가 있습니다.그런데 그들이 부르는 아버지가 각각 다릅니다.그리고 어머니도 각각 다릅니다.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조화와 화목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들과 딸이 이십명일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그들이 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고 한소리로 “아버지”를 부르게 된다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부처를 부르고 어머니는 하나님을 부르고 아들은 알라를 부르고 딸은 귀신을 부른다면 그 집안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우리 시대는 다양한 종교가 법적으로 그 활동을 보장받고 있습니다.그렇다고 해서 한가족들이 제멋대로 뿔뿔이 다른 종교를 선택하고 신앙한다면 영적인 갈등과 정신적 혼란을 면하기 어럽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가는 곳이 같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는 궁극적 목적이 있고 추구하는 이상이 있습니다.한 가족이라면 가는 곳이 같아야 합니다.
어느 날 가족들이 소풍을 떠나기로 하고 밤새껏 준비를 했습니다.날이 밝자 베낭을 멘 가족들이 대문밖으로 나섰습니다.그런데 떠나는 목적지가 다 다릅니다.한 사람은 도봉산을 고집하고,한 사람은 관악산을,한 사람은 속리산을,한 사람은 한라산을 고집합니다.문제는 한 곳으로 가기로 하고 준비했다는 점입니다.
만일 그런 집이 있다면 이미 그 집은 화해와 일치를 잃어버린 집일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궁극적인 목적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그곳에 가족이 함께 가야 합니다.누구는 지옥가고 누구는 천당가는 것은 가족관계가 아닙니다.가는 곳이 같아야 합니다.
셋째 사는 방법이 같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의 규범은 경건,절제,근면,협동이 그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그러니까 기독교 가정이라면 부정,불법,불의,낭비,사치,불화가 끼어들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은 근검하고 근면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데 아내가 허영에 들뜬 채 살아 간다든지 분수를 지키지 않고 큰 일을 저지른다든지 반대로 아내는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데 남편이 속을 못차리고 못된 짓을 되풀이 한다면 그 가정은 수렁에서 헤어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정당하게 일하고 그 댓가로 벌어 들인 돈으로 바르게 사는 것이 기독교의 생활윤리입니다.그런데 일은 안하면서 잘 먹고 잘 살고 잘논다면 그것은 불한당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루빨리 일하고 먹고사는 사람들이 대접받고 행세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평생을 일해도 내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현실을 제쳐두고 땀 한방울 흘리지 않은 채 소위 투기라는 변칙적 방법으로 천문학적인 부를 누리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사회풍토가 어서 빨리 정착되어야 합니다.
가족은 함께 살고 함께 가는 사람들입니다.그러려면 신앙이 같아야 합니다.바로 여기에 가족 신앙의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빌립보 지방에 살고 있던 한 위대한 신앙 가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그 가정은 자주장사를 하고 있던 루디아라는 소시민,보통사람네 가정입니다.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 마케도냐 지방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마케도냐는 유럽선교의 교두보적 위치였기 때문에 바울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곳이었습니다.그는 거기서 맨 먼저 빌립보 지방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도처에 교회가 세워져 있는 것도 아니고 연고자도 없는 곳에 무조건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썼기 때문에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빌립보에 들어간 바울은 임시 기도처로 쓸만한 곳을 수소문 했습니다.어느날 강가에서 자연스럽게 몇몇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거기서 만난 여자가 루디아였습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라고 했습니다.
루디아와 그 가정은 유럽선교에서 얻은 최초의 신자였습니다.
그의 신앙과 삶의 태도를 통하여 배울 것이 많습니다.몇 가지를 찾아 보겠습니다.
1.하나님을 공경 했습니다.
14절을 보면 직업은 자주 장사였고 집은 두아디라성에 있었습니다.그리고 하나님을 공경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이 있었고 공경하는 경건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공경」이란 글자 그대로 높이고 받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심성이 곱고 아름다울수록 남을 높이고 칭찬하기를 힘씁니다.그러나 심성이 굽은 사람일수록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공격하기를 즐깁니다.하나님을 섬기는 태도도 그 사람의 심성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고운 마음씨가 하나님을 곱게 섬기는 것입니다.루디아는 마음씨가 고운 여자였습니다.그래서 하나님을 공경한 것입니다.
순한 마음,부드러운 마음,너그러운 마음,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깁시다.
2.말씀을 청종했습니다.
14절 끝을 보면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라고 했습니다.이 구절 속에 은혜의 삼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상담가운데 가장 취급하기 어려운 사람은 하고픈 얘기의 본체를 숨기고 외곽을 빙빙도는 사람입니다.전화상담이건 내방상담이건 상담자를 신뢰하고 마음을 열어야 상담이 성립됩니다.
그런데 마음을 두겹 세겹 포장 한 채 변죽만 울리는 사람은 상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마음을 열어야 합니다.마음을 연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를 맡긴다는 것이고 내 속사정과 형편을 모조리 말씀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 중요합니다.
잠언 23:26을 보면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길을 즐거워 할찌어다”라고 했습니다.
둘째 단계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은 입체적으로 들어야 합니다.귀로 듣고 눈으로 듣고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들어야 그 말씀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영화관에 가서 두 눈을 감고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페라 하우스에 가서 오페라를 관람하는 사람이 눈을 감고 귀마개를 끼우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눈도,귀도,마음도,손도,자세도 총동원이 됩니다.말씀을 잘 들어야 은혜를 받습니다.
셋째 단계는 따르는 단계입니다.
본문은 (청․종)했다고 했습니다.
청은 듣고 종은 따르는 것입니다.즉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약점은 듣는 쪽보다는 따르는 것이 약한 데 있습니다.듣는 것은 발달되어 있지만 따르는 것이 약합니다.
가정교육이나 자녀교육의 문제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습니다.그 아들 이삭은 아버지의 뒤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창세기 12:14 이하를 보면 아브라함이 애굽에 갔을때에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고 거짓말을 했습니다.그런데 창세기 26:6 이하를 보면 이삭이 그랄 지방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그러나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이 함께 모리아산으로 올라가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뒤따라가는 전형적 부자관계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딸을 알려면 어머니를 보고 아들을 알려면 아버지를 알면 된다고 합니다.반대로 아버지를 알려면 아들을 보면 되고 어머니를 알려면 그 딸을 보면 됩니다.이유는 닮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닮고 따르는 것입니다.닮고 따라가서 손해되는 경우가 있고 행복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은 영원히 행복해지는 첩경입니다.
3.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0:48을 보면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한날 세례를 받았고 16:33을 보면 빌립보 감옥 간수와 그의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그리고 18:8을 보면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의 집안 식구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루디아의 집 가족들이 한 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가족 신앙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구라파 최초의 세례교인 루디아,그리고 그 가족들,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한국 사람가운데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백홍준과 이응찬 등 4명이었습니다.1879년 1월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이 탄생했습니다.
충신교회에서 가족 전체가 세례를 받은 가정이 많습니다.그리고 가족이 함께 성가대로,교사로,구역장으로,제직으로 봉사하고 있는 가정들이 많습니다.그런 가정들이 수를 셀 수 없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세례문답 가운데 “충신 교회를 언제까지 다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대답은 각양입니다.
형편 되는 한 다니겠습니다.(50점)
서울에 있는 한 다니겠습니다.(55점)
한국에 있는 한 다니겠습니다.(90점)
죽을 때까지 다니겠습니다.(100점)
“영원히 다니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분도 있습니다.그 대답은 30점입니다.이유는 충신 교회는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 가족이 세례받고 교회 섬기기를 축원합니다.
4.바울을 섬겼습니다.
15절 끝을 보면 “만일 나를 주 믿는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루디아는 자기가 구원받고 난후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려는 신앙표현으로 바울을 모셨습니다.강권하여 있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가정생활이 바울을 모셔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는 증거이며 나아가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가정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목사 심방만 간다고 해도 치우고 감추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은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아무때라도 문 열어 놓고 영접할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가정은 주님이 그곳에 머무시는 가정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그런 가정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 목: 명령과 순종이 있는 가정
성 경: 창22:6-14
이 시대는 기준이 없는 시대라고 하듯이 교만의 시대입니다.
교만이란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않고 오직 자기의 맘대로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사람은 부모를 거역하고 선생을 멸시합니다.
하나님도 필요없다고 말하며 완악한 습성으로 살면서 부끄러운 죄악의 어두운 옷입
고 다닙니다.
얼마전에 어떤 여선생님의 자살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많은 사람이 가슴 아파
던 사건입니다.
자기의 제자중에 꺼덜대는 아이가 있어서 팔뚝을 매질하는데 팔의 뼈가 금이 갔습
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까 학생의 모친이 찾아와서 행패를 하고 고소를 했습니다. 아이
들 기 죽이는 교사는 자격이 없다]]고 공격을 했습니다. 이것이 괴로워서 그 교사가
죽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읽은 성경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았고 아들 이삭은 부친 아브라함에게 명령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 명령은 상상을 초월한 죽음에 이르는 명령이었습니다.
자식이 저 하고 싶은대로 키우는 것이 맘씨좋은 부모인가?
절대명령, 절대순종을 근본으로 키우는 것이 좋은부모인가?
<<아이들을 기 승하고 교만하게 키우는 것이 잘하는 것일까?>>
<<그것에 비해 자기 아이를 결박하고 죽이기 까지하는 권위는 어떤 것인가?>>
<<죽기까지 순종하는 아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
죽기까지 순종하는 자를 통해서 만민이 복을 받지만 교만한 자녀는 부모의 괴로움
이 되고 사회의 근심입니다.
가정의 달 첫번째는 <<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정>을 오늘은 <<명령과 순종>을 설
교합니다.
1.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순종이라는 말입니
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이나 약속을 확실히 믿지 못하여 인간적인 판단으로 어그러진
길을 간때도 있었
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창15:6)
하나님의 명령이 황당하여 보이고 도저히 이해 되지 아니한 때라도 말씀하신 주
님을 신뢰하고 그릇
된 길에서 돌이켜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잘되는 때에도 단을 쌓고 어려운 때에도 단을 쌓으면서 그의 순종의 허리띠를 늦추
지 않았습니다.
그의 75년 신앙은 오직 하나님께 순종이었습니다.
자신도 하나님께 절대순종했고 자식에게도 오직 이것만을 심어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생애에 있어서 가장 마지막이지만 가장 감당키 어려운 명령을 들어 법시
다.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물론 이 말씀은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하는 하나님의 아픔을 예시하는 것
이며, 사람들이 멸망의 심판에 들어가는데 대한 하나님의 슬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자기 손으로 죽여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은 너무 혹독한 명령
입니다.
아브라함은 역시 순종의 사람입니다. 순종에 있어서는 왕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기로 작정한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순종하다
죽으려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했고 명령대로 아들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가서 그 일을
했습니다.
그는 살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순종하다가 죽으려 한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역시 그 순종을
자녀에게 주십시오.
자기생각을 이루기 위해 주님을 부르던 우상숭배적 신앙에서 하나님 명령에 순종
하
는 자가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신앙을 부모가 갖고 자녀에게 물
려 줍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어떻게 하
십니까?
2. 이삭도 순종의 사람입니다.
순종으로 위대하기는 아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아비에 그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던 아버지에게서 역시 위대한 순종을 물려 받았습니
다.
대개의 성경학자들이 이때 이삭의 나이를 약 30세 가량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130세입니다.
논리나 힘으로 얼마던지 그의 아비를 거역하고 반항할 수 있는 나이인데도 순종했
습니다.
[이삭!. 내 말을 들으라. 너도 알다시피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주님이 말씀 하시기를 너를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일을 행
하려고 작정했다.]
<<아버지. 그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만, 하나님이 말씀 하셨고 아버지께서 작
정하셨으면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저도 순종하겠습니다.>>
절대 명령과 잘대 순종이 있는 이 집안을 생각해 보십시오.
훈계가 통하고 책망이 받아 들여지는 가정이 잘될 집안입니다.
부모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위대하게
될 것입니다.
<<엡 6:1-4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
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
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교육
하라.
3.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세상을 맡기십니다.
끝으로 순종이라는 말과 반대의 말인 거역이라는 말의 의미를 잠간 알아봅시다.
순종이란 말은 faithdlau 헬라어로는 인데 아멘과 통하는 말입니다.
거역이란 영어로 demonstration이고 헬라어로는 입니다.
흔히 말하는 데모란 항거 거역을 뜻하는demonstration입니다.
흔히 사탄을 말하는데 이 말은 마귀란 뜻이 아니고 마귀의 별명을 의미하는 것입니
다. 불순종입니다.
우리들이 살면서 부모님에게 대드는 것이 사탄, 영어로는 데모, 한문으로는 거역입
니다. 성경은 부모에게도, 주의 종에게도, 나라 위정자들에게도 대들지 말고 순종하
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거역함으로 다툼과 혼란이 오고 마귀의 율법이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대대로 성도들을 통하여서 순종의 새싻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난다면 이는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도 이삭의 순종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큰나무
가 된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있는곳마다 성경이 전해지는 곳마다 순종의 나무가 심어지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이제 생명의 빛 교회 성도들에게서 하나님은 순종이라는 새 나무의 찾으
십니다.
가정의 달에 우리가 받은 말씀을 마음에 새깁시다. 지금까지 순종하지 못한것을 회
개하십시다.
순종하다가 망한자는 하나님이 보상하시고 죽은자는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명령과 순종, 말하기은 쉬워도 행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나를 따르라 하셨고 죽고자 하는자가 산다고 하셨습
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께 순종이라는 법을 이
루셨습니다.
<< 빌 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 것으로 여기
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
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혀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
늘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
라.>>
마지막으로 어떻게 명령할까?
악한 명령은 악한 결과를 가져 옴으로 명령할 때 조심없이 하면 않됩니다.
성도들은 명령할 사실에 대해서 확신이 서고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할 것을 말하도
록 해야 됩니다.
부모된 자나 어른된 자나 특히 목사들이 훈계하고 명령할 때에는 자기감정이나
즉흥적인 것이 되어서는 못씁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어야 합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명령이
어야합니다.
<<누구든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같이 하라>>는 말씀에 명심하십시오.
제 목 : 내 가정의 진단
구 절 : 엡 6:1-4
하나님은 이 세상에다 당신의 모습(사랑)을 짙게 남겨 두었으니 그곳이 가
정이라는 조직형태입니다. 가정은 혈연관계로 인한 강한 연관성과 애정으로
그리고 서로가 신뢰하는 것으로 또는 섬기고 아끼는 것으로 가정은 사랑의
협동체입니다.
가정은 높은 자도 없고 낮은 자도 없는 곳입니다. 가정은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곳입니다. 쉴 수 있는 곳, 위로를 받으며 살 수 있는 곳이며, 좌절과
낙심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곳이 가정이빈다. 가정이란
'집'이 아니며 '가옥'이 아닙니다. 가정은 부모처자식 형제가 함께 먹고 자
며 깨고 일하고 사는 곳으로 기쁨과 슬픔, 괴롬도 함께 나누는 곳입니다.
이곳은 이 지상에서 제일 좋은 곳입니다. 세상이 버려도 안아주고 돌봐주는
곳 끝까지 살펴주는 곳이 가정입니다.
이렇게 좋은 가정들이 오늘날 너무나 비참 하여졌습니다. 병든 사람은 벼
원에 가서 진단을 하여 그 진단 결과에 따라서 치료를 합니다. 병울 고치지
않으면 병이 깊어져 죽게 됩니다.우리들의 가정은 하나님 말씀으로 진단하
여서 고칠 것은 고쳐야 합니다.
1. 부모와 자식의 관계
부모자식의 관계는 하나님이 인연을 맺게해 주었기 때문에 이 인연은 어느
누구도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피와 살과 뼈를 나누어 가진 관계이기에 이
관계는 너무나 깊으며 단단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어떤 힘으로도 그 관계를 끊을 수 없는 것이 부모자식의 관계입
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신뢰하며 의지하고 존경합니
다. 하나님 다음이 부모라고 알아야 합니다. 또 자식을 하나님 다음으로
살아하는 부모가 될 때에 참 부모가 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자식은 부모님께 대하여 공경하는 것은 인륜
상 가장 첫째이며, 이것이 복을 받는 길이며 참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됩
니다.
오늘날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그렇게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자식
들은 부모님께 대한 공경심, 신뢰심과 존경심, 순종심이 심히 부족한 것 같
습니다. 부모님께 대한 봉양도 하지 않고 노년기에 돌보지 않아서 불쌍한
신세로 화하는 일들은 너무나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부모된 위치에서도 아직도 자식을 위하여 희생을 다하고 있다고 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
라"(본문 4절) 는 말슴에 대하여 바르게 책임지고 부모의 책임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부모자식지간에 관계가 하나님께로부터 맺어진 것이기에 하나님을 믿는 믿
음과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데서 자식은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모님은 자
식을 하나님의 법도대로 양육하면 반드시 좋은 부모자식의 관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불효자식이 되지 않도록 자식의 입장에서는 힘을 써야 할 것입니
다.
2. 부부지간의 진단
에덴동산에서 부부지간의 관계는 하나님이 아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아
서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사 여자를 지으시고 남자와 여자를 결합시켜 한 부
부를 이루었습니다.
결혼의 원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둘이 서로 도
와가며 살 수 있도록 짝을 지은 것입니다. 부부는 원래 아담의 말대로 하면
'뼈 중의 뼈요,살 중의 살'이라고 하여 일체이자 영과 마음이 하나로 부부
가 된 것입니다. 신뢰와 사랑과 이해와 동정, 그리고 희망을 함께 한데서
부부가 되어 삶을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부지간의 금이 가고 가
정의 불화 파탄이 생기는 것은 오늘날 부부지간의 윤리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가정파탄이 거의가 성실하지 못한 생활에서 가정이 깨어지고 비극
을 초래하되 자식에게까지 또는 사회적인 문제까지 발생하고 있습니다. 부
부의 원리는 부모를 떠나 둘이 합하는 것으로 둘이가 서로 사랑으로 합쳐진
것이 부부입니다.
바울 사도는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의 몸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
다. 또 아내된 자에게는 자기 남편을 머리와 같이 알고 순종하라고 하였습
니다. 이러한 말씀은 부부가 끝까지 지킬 때에 행복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부부는 항상 말씀에 근거하여 스스로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
은 정상적인가? 또 사랑은 순수하고 참된 것인가? 사랑과 순종, 이해와 존
경은 여전하며 그 도수가 높아져 가는가를 진단해야 합니다. 부부지간의 신
뢰성, 애정,이해와 동정, 희생적인 피차의 아낌이 없으면 그것은 부부지간
의 애정이 식어지는 것으로 원만하지 못한 부부가 될 것입니다. 이러할 때
에는 그 식어진 애정의 회복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여야 합니다.
부족한 사람들이니까 생활의 실수도 있고 허물도 보일 것입니다. 그러한
때면 사랑의 도수를 뜨겁게 높여서 보다 더 이해를 하며 사랑으로 허물을
감싸야 합니다. 부부지간의 생활은 무엇보다 믿고 사랑하고 이해하며 아껴
주는데서만 원만한 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와 요셉의 관게는
모두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육신적인 욕망의 사람들이 되지를 않고 하나
님의 뜻을 이루며 예수님을 낳아서 기르는 위대한 부모이자 좋은 부부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의 파탄이 심히 많아지는 때에 교인들의 가정은 순수하게 믿음
으로 보존되어야 하겠습니다. 가정의 보존만이 나라도 살고 사회와 교회가
재구실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미국인들의 가정 파탄은 50%나 이혼으로 파괴
되고 무너진다고 합니다. 미국교회는 설교를 하지 못할 몇가지 제목이 있다
고 합니다. 미국교회는 설교를 하지 못할 몇가지 제목이 있다고 합니다. 가
정에 대한 성결과 신성에 대하여 (많은 가정이 파탄되어 있기에), 천당에
대하여 (내세를 믿지 않기에), 성적타락에 대하여 (문란한 성윤리)하면 싫
어하기에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3. 고부지간의 진단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어느 시대나 좋지 못한 것이 상례 같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부지간의 관계는 핏줄이 다르다는 것도 있지만 언제나
법적으로 며느리요, 시어머니라는 관계에서 마음과 마음을 깊이 주지 않으
려는데 문제점이 있습니다.
먼저 시어머니들이 연세도 드시고 또 이해할 수 있는 생의 경험도 있으시
고 당신의 아들과 가정의 평화를 생각하여 모든 것을 참고 며느리에게는 사
랑만 쏟아주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문제는 섬김을 받고 어른의
대접을 지나치게 받고자 하는 면과 또는 생의 경험에 의하여 지도 할려는
강한 의지 때문에 며느리를 위해 주거나 사랑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며
느리를 사랑하면 사실 더 존경도 받으시고 위함도 받으시는 것입니다.
시어머니들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김 받으려는 마음이 아니고 섬기는 자
세면 반드시 일등가는 시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나오미와 같은 시어머니는
룻과 같은 효부를 얻었으며 그로 인하여 이방의 여인이지만 예수님의 조상
할머니가 되시는 큰 은혜의 결과를 얻게된 것입니다.
오늘의 시어머니들이 믿음으로 자부를 사랑만 하면 고부간의 문제는 반드
시 해결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가정문제중에서 고부간의 문제만 없다면 아
마도 가정의 평화는 거의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며느리들은 이와 남편을 자기의 생명과 같이 사랑한다면 반드시 시
어머니를 법적인 어머님으로만 간주하지 말고 친정어머님과 같은 마음으로
섬기며 따르고 위해 드린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며느리들의 불
효는 자기도 복을 받지 못하고 자녀들에게도 본이 못되며 자기 자신이 늙어
시어머니가 되는 날에 반드시 억울한 푸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받는 것이
무서워서 잘 하여야 하기 보다는 마당히 할 도리이기에 효부가 되면 축복을
받음과 함께 가장 큰 기쁨의 가정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노인들의 푸대접이 고부간의 갈등에서 빚어지는 것으로 알고 반드
시 가정의 행복을 위해 부부지간의 행복을 위하여 효부들이 되시기를 바랍
니다. 룻은 시어머니가 고국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시겠다고 할 때에 어머
니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를 이별하는 일은 죽어서 할 수 있고 도저
히 이별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효부는 오늘날 모든 며느리들에
게 사표가 되어져 있습니다.
부모자식간과 부부지간, 고부지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단을 받고 병든
것은 모두 말씀으로 고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행복한 가정들이 되시
기를 기원합니다.
제 목: 기독교가정의 신앙교육
성 경: 딤후1:3-5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나의 동역자](롬 16:21), [내 귀하고 신실한 아들](고
전 4:17), [형제](고후 1:1), [믿음 안에서 참 아들](딤전 1:2), [사랑하는 아들]
(딤후 1:2)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사랑과 신뢰를 받았던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로마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후에(히 13:23) 바울의 후임으로 에베소에서 사역
했습니다(딤전 1:3).
디모데의 가정에 대해 살펴보면, 고향은 소아시아의 루스드라였으며 그이 부친
은 헬라인이고, 어머니는 유대인으로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행 16:2). 어머
니의 이름은 유니게이며 외조모는 로이스였는데 이들은 믿음으로 디모데를 교육했습
니다(딤후 1:5). 디모데는 가정의 신앙교육으로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
던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가정교육
가정에서의 교육은 어떤 전문적인 기능훈련이나 지식전달을 위한 교육이라기 보
다는 온전한 하나의 인격체를 형성하기 위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가정의 교육목적, 즉 기독교 가정이 원하는 온전한 인격체는 예수 그
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한 인간의 삶과 그 인격
속에 온전히 새겨질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가정의 교육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러한 기독교 가정의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요?
1) 신앙생활의 훈련: 교육은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기독교 가정의 교육은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의 훈련을 통해 가능하게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그이 신앙이 어머니와 외조모 로이스의 믿음에서 비롯
되었다고 말했습니다(딤후 1:5). 이것은 디모데의 신앙은 가정의 신앙훈련을 통해
서 이루어진 것임을 의미합니다.
신앙이 훈련으로는,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예배드리는 것은 자라나는 자
녀들에게 좋은 경건의 훈련이 됩니다.
자녀들의 교회생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자의식이 발달되 는 청소
년 시기의 자녀들은 교회와 신앙에 대해 회의적이고 비판적이 됩니다. 그리하여 청
년기에 이르면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문제의 책임을
교회에 돌릴 수도 있겠으나 각 가정에서의 교육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는
가정에서, 교회생활에서 얻은 기쁨과 유익을 말하며 긍정적인 자세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자녀의 종교적인 심리를 파악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신앙에 대해서 무
조건 명령하거나 강요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자녀를 이해하며 자연스러운 대
화를 통하여 신앙인의 인격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야 할 것입니다.
2) 사랑의 교육: 가정은 사랑과 혈연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사랑의
공동체는 바로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의 교육은 일반 교육과는 차이가 있
게 마련입니다. 사랑은 어던 목적이나 계획에 의 해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사랑 그
자체가 목적이며 계획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 자녀를 사랑으로 교육한다는 것
은 자녀들에 대해 어떤 목적이나 계획을 가지고 그들을 교육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
니다. 오직 자녀를 사랑라는 그 사랑이 바로 교육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부모의 계획대로가 아니라 자녀의 인격과 자유를 존중하면서
그들의 능력이나 성격에 맞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들에 대해 언
제나 포기하는 일 없이 계속적인 소망을 가지고 교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변함 없으신 사랑에 인가이 응답하게 될 때 그는 변화되어 새로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성장해 가듯이,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에 응답할 때까지 오래
참으며 소망을 가지고 양육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부모의 사랑으로 자라난 자녀들은 그들 자신이 또한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잇는 인격이야말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성숙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부모의 삶을 통한 교육
가정의 교육은 부모의 교육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올
바를 인생관과 가치관 그리고 신앙생활을 통해 자녀들에게 살아 있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존경받는 부모가 되지 못하면 자녀에게 참다운 교육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그들의 삶 전체를 통해서 자녀들에게 좋은 스승이 되어야 합니
다. 낙제생 부모가 있을 뿐이지 낙제생 자녀는 없는 것입니다.
** 맥스래러티는 낙제생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한 몇 가지를 지적하여 충고해 주고
있습니다.
좋은 추억을 남겨 주어야 한다.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거나 잘해 주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
모 자신의 일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자녀이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하여야 한다.
자녀들의 친구와 그들의 부모를 알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 가정의 교육은 가족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이끌어
가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사랑의 인격으로서 가장 성숙한 인간
이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가정에서는 신앙의 훈련과 사랑과 본보기가 되는 부모의 삶을
통해 자녀들을 교육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힘씁시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엡6:1-4)
오늘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 하신 계명을 쫓아 아버지의 고마우심을 되새기고, 그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기로 다짐을 하는 날입니다.
흔히들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아마 5월은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등이 들어 있어서 가정의 달이라 할 것입니다.
어린이들을 잘 기르고 밝게 자라게 하며, 낳으시고 기르시는 부모님의 은혜, 우리를 가르치고 좋은 사회인이 되도록 하시는 선생님의 은혜를 기리는 좋은 계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창조 이후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친히 주례하시고 가정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최초의 가정 제도를 제정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시고 친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 우리의 家庭은 기쁘고 즐거운 가정이어야 합니다.
. 사랑이 있고,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는 집이어야 합니다.
. 하나님이 주신 가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찬송이 있고, 기도가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집이어야 합니다.
. 저녁이 되면 모든 하던 일손을 놓고 가족이 그립고, 보고 싶어 돌아가는 쉼이 있는 가정이어야 합니다.
. 아침이 되면 배웅을 받고 일터로 향해 힘차게 나설 수 있는 가정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가정을 하나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가정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 말씀이 있고, 찬송이 있고, 기도가 있는 가정입니까?
.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 있는 가정입니까?
. 아빠, 엄마가 보고 싶고, 부모는 자녀가 기다려지는 그립고 보고 싶어 저녁이 기다려지는 곳입니까? 쉼이 있는 곳입니까?
. 아침에 일터로 향할 때 힘차고 자신감을 주는 곳입니까?
우리가 집이라고 할 때 House가 있고 Home이 있습니다. House는 돈으로 살 수 있으나, Home은 만들어지는 것이겠습니다.
가정은 하나의 작은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병들면 사회가 병들게 됩니다.
가정이 병들면 여기서부터 온갖 불행한 일들이 생겨납니다. (문제아, 버려진 부모, 모두가 가정에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밝고 좋은 사회, 아름답고 평화가 넘치는 사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신 세상을 만들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1. 첫째,
.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가정이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찬송이 있고, 기도가 있는 가정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 서로 믿어 주고, 서로 사랑해 주는 가정이 되게 해야 합니다.
. 소망이 가득하고 가족이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가정으로 가꾸어가야 합니다.
2. 둘째, 오늘 본문을 중심 해서 말씀 위에 서는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출애굽기 20:12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며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신명기 5;16절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했습니다.
1) 우리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부모를 공경하라, 효도하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부모 공경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이요 명령입니다.
10계명 가운데 1-4계명까지는 하나님에 관한 계명, 천륜의 계명이라면 5-10 계명은 사람에 관한 계명으로 인륜에 관한 계명입니다.
이 인륜의 계명 가운데 첫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로서, 또 자녀로서 “마땅한 바니라” “옳으니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십니다.
2) 이렇게 부모 공경 잘하면 오늘 성경의 약속이
① “네가 잘되고” 했습니다. “장수하리라” 했습니다.
② 신명기 5;16절 ‘네가 복을 누리리라“ 했습니다.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면 성경의 약속대로 “잘되고 복을 누리게” 되는 줄을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약속이 중요합니다만, 내 부모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은 의무인 줄로 압니다.
16세기 말 조선 선조 대왕 때 송강 정철 선생(1536-1593)의 詩에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길 다하여라 한 번 가신 뒤에 애닯다 어이하리 생전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해서 부모가 돌아가신 후 불효를 후회하지 않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는 제사하는 풍속이 있어 조상을 숭배하는 제례를 지냅니다. 생전에 부모에게 못 다한 효행을 돌아가신 후에라도 효도하는 뜻으로 융숭한 제수를 차려 놓고 절하며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양반일수록 법을 따라서 거창한 제례를 지킴으로서 가문의 전통으로 삼는 것을 봅니다. 중국의 남송 나라에 유명한 유학자 주자는 제례를 4대까지 하라고 가르쳤습니다만, 우리 기독교에서는 한 번 돌아가신 부모님의 영혼이 이 세상에 배회하거나 구만리 장천에 돌아다니거나 이 세상과 왕래되는 것이 아니고 낙원과 음부로 가 버리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융숭한 제례로 못 다한 효를 대신 하려고 해도 돌아가신 분에게는 전해지지 않는 허례허식이요,
또, 고린도전서 10:20절에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제사를 추도 예배로 드리면서 돌아가신 분의 영혼을 위해서가 아니오 남아 있는 유족의 신앙과 화목된 생활을 다짐하는 은혜로 나눕니다.
서울 서남 교회 서 집사 한 분이 부모님 생전에 삭망 차리기를 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기쁘게 했다는 이야깁니다. 서 집사 내외는 늘 부모님을 집에서 모십니다만, 특별히 초하루와 보름에 별식을 준비해서(삭망에 드는 비용만큼 해서) 상을 차려 드리고 극진히 대접을 했습니다. 서 집사 내외가 그랬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는 돌아가시면 삭망을 차리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살아 계실 때 삭망 차리는 것만큼 해 드릴 것입니다’ 하니까 ‘오냐 오냐’ 하시며 좋아하시더랍니다.
한 번은 TV 가족 오락관에서 부모님들이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좋아하시는 음식의 순서가 소개되었습니다. 불고기, 정식, 전골, 보쌈 등등 1위가 무엇이었을까요? 전국에서 1위를 차지한 음식은 해물 잡탕이었습니다. 시원한 국물이 있는 해물 탕이랍니다. 또, 옷을 사 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구경 시켜 드리고, 여행 시켜 드리는 것들 중 어느 것을 제일 좋아 하실까요? 현찰을 받는 것, 그것이 제일 좋다고 하십니다.
저도 매월 한두 차례 아버님을 찾아 뵙습니다. 또, 연세 80이 넘으신 목사 아버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 분도 찾아 뵙는데 음식을 대접도 해보고, 구경도 시켜 드리지만 현찰 드리니까 가장 좋아하시더군요.
이렇게 부모를 공경하면 잘되고 복되리라 하십니다.
또, 잠언에서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그 법을 떠나지 않으면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참1:8,9) 했습니다.
3) 그러나 부모 공경을 못하거나 효도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 성경 3절에 부모를 공경하기를 잘하면 [잘되어 장수하리라] 했습니다.
잘되는 반대는 무엇입니까? ---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사가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장수하리라의 반대는 ? --- 일찍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로 엘리의 두 아들들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 말을 들지 않았습니다. 불량자였습니다. 그랬을 때, 그 가정에 노인이 없게 하겠다(2:31) 하므로 젊어서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불효하면 일찍 죽습니다. 빨리 죽으려면 불효하시오. 만사가 잘 안되고 복이 싫으면 불효하십시오.
맹자는 세속에 있는 5가지 불효를 지적했습니다.
1. 게을러서 부모를 잘 봉양하지 않는 것이 첫째 불효입니다.
2. 바둑을 두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이 둘째 불효이며,
3. 부모를 천하게 여기는 것이 셋째 불효라고 했습니다.
4. 불효는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싶은 욕망에 방종하여 부모에게 치욕이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5. 남과 잘 다투어 싸워서 부모를 걱정시키는 것이 다섯째 불효입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형벌 제도로서 오형(五刑)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죄가 부모에게 불효하는 죄입니다. 오형은 묵(墨), 의(劓), 비(剕), 궁(宮), 대벽(大辟)입니다.
묵은 - 먹으로 얼굴에 글을 새며 넣는 것이고(문신 새기는 것)
의는 - 코를 베는 것이며,
비는 - 발을 자르는 것이고,
궁은 - 성불구가 되게 하는 것이고,
대벽은 사형에 처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는 죽이라 했습니다.
빨리 죽고, 잘 안되려거든 불효하십시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네 낳은 어미를 공경하며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라 했습니다.
4) 4절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하십니다.
1)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감정으로 대하여 감정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녀들을 자신의 감정대로 내 뜻대로 하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2)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티카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어거스틴은 젊었을 때, 사상적으로는 마니교라는 이단과 프라스톤 철학에 빠져 심취하였고, 도덕적으로는 방종한 탕아였습니다.
이런 아들을 위해 모니카는 기도했습니다. 매질을 하기보다 보여주는 신앙을 했습니다. 때리기보다는 기도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을 어거스틴이 가슴에 담고 있다가 참회하여 성 어거스틴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번은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3가지를 가져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천사는 세상에 두루 다니다가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 3가지를 택했는데,
1. 첫째, 아름답게 핀 꽃,
2. 둘째, 어린 아기의 웃음,
3. 셋째, 어머니 사랑이었습니다. 이 3가지를 가지고 가브리엘은 하늘에 돌아갔는데 가는 길이 너무나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꽃은 이미 시들어 추하게 되었고, 어린 아기는 자라 아름답지 않게 되었으나 어머니의 사랑만은 여전히 아름답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하고 가장 내용 깊은 말은 “어머니” 엄마 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어릴 때 [어매] 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만, 어릴 때나 어른이 되어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고개가 숙여지고, 가슴이 뜨겁고 눈시울이 금새 뜨겁습니다.
좋은 부모가 되시고, 자녀들은 효도하는 5월이 되어, 잘 되고, 복되고, 장수하는 축복과 그리고 소망과 희망과 기쁨이 넘치는 가정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가정은 새로운 시작
(창12:1-4)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최초로 그 통로가 된 것이 가정이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시작된, 보여지는 기록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떠나 새롭게 시작하는 아브라함의 가정은 새로운 신앙의 시작이었으며 역사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위대한 출발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가정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의미를 찾아 우리의 오늘의 삶속에 함께 누릴 수 있는 지혜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아브라함의 결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의 떠남(창12:4)
아브라함은 익숙하고 정든 곳을 이제 떠납니다. 새로운 시작은 익숙한 만남을 포기하게 하는 자연의 질서를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삶을 결단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떠남의 대상이 함께 먹고, 함께 고민하며, 내일을 함께 계획하던 친척들과 형제들이었다면 그 떠남의 결단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제 그 떠남을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의 벽을 넘어 아브라함은 이해하기 어려운 모험의 삶에 자신의 인생을 던졌습니다. 우리의 보편적인 의식은 아브라함의 결단을 동조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시작을 받아 들이는 아브라함의 가치관은 우리에게 불합리한 종교인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의 떠남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떠남의 배경에는 신앙적인 절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떠남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던 것입니다. 12장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을 가정이라는 입장으로 보면 지금까지 함께한 모든 관계를 포기하고 단지 가정의 시작이 되는 부부만이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요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요구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은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말해 많은 자손들을 아브라함의 가정에 주시겠다는 축복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정을 축복하겠다는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가정을 희생해야만 한다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믿음의 순종은 더 큰 가정의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통해 가정의 가치를 중요시 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길들여진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라고 한 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에게 희생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더욱 행복한 가정을 주기 위한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일반역사를 보면 아브라함이 살던 곳은 달신을 우상으로 섬기며 그 우상이 중심이 된 문화가 활성화된 수메르 문명지였다고 말합니다. 다시말해 가정의 질서가 하나님의 도덕성에 지배를 받는 곳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도덕성이 가정의 질서를 지배하는 곳이었다는 말이기도 한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가정의 행복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룸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시작하신 일이 가정의 정화였던 것입니다. 가정이 바로 서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낼 수 없다는 비밀이기도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인정하고 자신이 관계하던 모든 것을 버렸다는데 아브라함의 믿음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떠남의 비밀(창12:1-4)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결단하게된 비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그 모든 것을 버릴 만한 가치를 하나님의 명령을 통해 발견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에 우리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의 상식과 의지를 넘어서 새로운 삶을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림으로 당할 어려움을 스스로 감수하기로 결단하고 이제 자신의 아내 사라와 요구되지 않은 조카 롯을 데리고 정든 곳을 떠나 전혀 낯선 곳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결단의 배경에는 우리가 전부로 고백하며 믿고 있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아브라함에게 떠남의 가장 큰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의 인생에 새로운 시작의 동기가 누구로부터 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환경이라는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음성을 통해 들었습니다. 적어도 오늘날의 성경해석에 근거해서 보아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어떤 매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경험했다는 결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새로운 선택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역으로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면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우리는 우리의 주어진 환경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말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인간적인 힘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정도는 모두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표현을 빌어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아브라함을 새로운 인생으로 결단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손해를 요구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하나님은 그런 경제적인 조건을 하나님의 자녀에게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느냐라는 문제만이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가졌던 관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나타내는 과정에서 때로는 우리의 개념처럼 손해라는 현실도 있을 수 있지만 항상 하나님은 그 이상으로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고백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을 떠나라는 요구는 세상적으로 모든 것의 희생처럼 두려움으로 다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구와 함께 약속도 주셨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가정의 시작을 기대하시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에게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 위한 떠남은 이제 하나의 질서로 우리에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결혼이라는 의미는 지금까지 함께한 모든 것으로부터 전혀 익숙하지 않은 한 남자와 여자에게로 전향되는 생활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을 항상 떠남과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로서 표현합니다. 더 나가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우리의 결혼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가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가정을 통해 무엇을 이루시기 원하시는지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축복이 누려질 수 있도록 우리의 가정을 지켜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의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기를 소망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시작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이 축복한 미래의 약속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도 그 약속을 경험하기 전까지 많은 시험과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도 어떠면 그런 어려움이 우리의 생활에 숨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가정의 질서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볼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가정을 통해 어떻게 이 세상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신가를 보여 주시는지를 우리는 생활 속에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가정을 사단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영적 무장이 필요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불행을 주기 원하며 그 불행을 통해 하나님께 범죄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사단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활용하여 우리의 가정을 파괴 시키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가정을 어떠한 이유에서든 파괴 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을 하나님의 창조의 의미로 회복 시키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가정의 시작이 되는 스스로에 대해 하나님앞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음성으로부터 나의 가정을 순종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내가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도 시작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가정은 결코 행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정 모두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여 이 땅에서 모두 행복한 누림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제 목: 경건한 가정생활
성 경: 행10:2
가정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보호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정의 주인이십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조금도 주저없이 믿고 고백하십니까?
성경에 나오는 경건한 사람들을 보면 역시 그 가정도 경건함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은 오직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으며 언약의 자손을 기다리고 또 그
언약의 자손을 백세가 되어서 받았는데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니까
바쳤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청지기 엘리에셀을 보면 역시 아브라함의 가정의
경건성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24장에 나오는 엘리에셀의 모습과
행동은 그야말로 작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의 경건한 가정생활은
모든 가족까지 경건하게 만들었습니다.
욥이 그 자녀들과 더불어 얼마나 경건한 생활을 했는지도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 역시 경건한 가정의 출신입니다. 사무엘, 디모데가 좋은
신앙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도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구제하며 기도하였는데 그와 그의 가족은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나아가는 동기와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가정과 우리의 가정을 비고해 봅시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 없는데 가정 예배는
가정생활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가정은 작은 교회이며 이상적인
공동체입니다.
가정예배는 가족의 신앙적 일치와 축복의 기회이며 나아가 가족들의
대화와 교제를 통해 모든 기쁨과 고통과 문제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입니다. 가정예배를 계속하시면 신앙의 전통이 이어지고 온 가족이
화목하는 큰 축복을 받습니다.
가정예배의 방법은 가정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으나 우선 일반적인
지침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1) 가정예배의 인도자는 가장인 아버지가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2) 가정예배는 매일 계속해야 합니다. (3) 예배
시간이 길어지지 않도록 15-20분 정도로 하고 어린 자녀들도 기쁘게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좋습니다. (4) 성경은 계속 통독해
나가는 방법도 있으나 좋은 QT 교재를 사용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5) 기도는 대화식 기도와 더불어 부모의 중보기도가 있으면
좋겠고,기도전에 꼭 기도제목을 나누는 것이 좋습니다. (6) 가끔
야외나 특별한 장소로 옮겨 예배를 드리고 가족모임을 즐거운 시간을
가지십시오.,
자녀의 출생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입니다. 부모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자녀 양육의 책임과 사명을 확인하고 다짐하십시오 그리고
기도로 준비하여 유아세례를 받도록 합니다.
유치원이나 학교의 선택에도 가능하면 신앙교육의 기회를 고려하고,
입학 졸업등의 경우에도 언제나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신 은사나 사명을 찾고 그것을 준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결혼은 더욱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한 인생대사입니다. 모든 과정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탁하고 기도하며 이루어야 합니다. 목사의 주례로
교회에서 예식을 올리는 것은 신자의 큰 특권입니다.
부모의 생신이나 수연(회갑)등을 맞이할 때에도 하나님의 계명을
받들어 순종하고 부모공경을 잘하지 못했을 때는 회개하며 효도의
도를 새롭게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혹은 집을 사고 팔며 이사할
때에는 육신생활의 편리와 욕심을 따라 하지 말고 하나님의 중심,
교회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특별히 가족중에 누가 임종을 맞았을 때는 구원의 은혜를 확신케
하고 천국 소망을 바라며 기쁨으로 죽음의 문을 통고할 수 있도록
격려하여야 합니다.
별세한 후에도 장례절차에 모든 미신적이고 이교적인 풍습은 완전히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구원과 내세의 영광스러운
소망이 증거되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하면 자손만대까지 하나님의
복을 누릴 것입니다.
결정되었다. 오늘의 주일 예배를 보면 간혹 형식이나 하나의 방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주일예배의 진실성을
재검토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성서적 의미를 찾아봅시다.
(1)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길로 행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사58:13-14)
이 말슴은 구약시대에 안식일에 대한 엄숙한 수칙을 강조하고 있다.
아식일을 성수하는 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것이요 우상숭배자들과
구별된 삶을 산다는것이다.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여기서 주용한 교훈은 그 시대의 유행에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즉 외형적이며 지나가버리는 이세상의 유행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떠나지 말고 살라는 교훈입니다.
둘째 역사적 교훈입니다.
예배는 예배로서 끝나사는 안됩니다. 예배는 일상생활은 물론 일생에
변화와 가치와 구원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구약의 소돔고모라와 멸망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얼마나 먹고
마시고 향락하여 타락했는지를 이탈리아에 있는 폼페이의 비참한 현장을
목격한 우리들에게 큰 교훈이 되고 있다.
터어키에 가보면 소아시아 7교회에 대한 흔적이 남아있다.
성령께서 사도요한을 통하여 경고한 말씀을 외면하다가 교회는 없어지고
교회자취만 남아있게 되었다. 역사는 우리에게 엄숙한 경고와 교훈을
주고 있다.
오늘 우리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게 지금도 경고를 외면하고 인간의
생각과 방법으로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 사람의 다수가 부패하여도 진정한 예배가 있다면 부패를 막을
수가 있습니다. 올바른 예배 즉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림으로
세상을 사랑하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게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목회자는 오직 예배를 위하여 전심전력하고 생명을 바쳐야 한다. 한시간
하나님게 드리는 예배는 어떤 의미에서는 마귀와의 싸움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아래의 말씀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1) 주일을 성일로 지키자
오늘날 성도의 믿음이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
주일저녁 예배드리는 인원이 줄어들고 수요예배드리는 인원도 적어지고
있다. 이것은 예배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이 세상의 풍조때문이다.
주일은 하루종일 거룩한 날로 지켜야 한다. 이것은 율법적인 신앙이
아니다. 신앙을 올바로 세우고 주일예배가 내 신앙을 지키게 해주는
것이다. 주일을 성일에 대한 의식을 갖게 하고 그 신앙으로 주일을
온종일 성수하게 해야 한다.
(2) 생활의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주일예배가 다른 일 즉 오락 스포츠, 사업 직장 때문에
일찌기 1부예배를 드리고 또한 2시 혹은 3시에 오후예배를 드리고
그것이 주일예배로 대치되었다는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일이
될 수 없다.
예배는 마음과 뜻과 정성과 성품 그리고 힘을 다하여 드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제일 먼저 예배드린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믿음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3) 구별하여야 한다.
우리에게 한가지 위기의 조짐이 있다면 주일을 구별하는 긍지가
희박해지고 있다. 한나절을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꺼리낌없이 주일
예배를 양보해 버리는 좋지 못한 경향이 교회안에 퍼지고 있습니다.
주일은 나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날이요 전교인이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시간마다 예배참석을
방해하는 요인들이 있다면 사전에 방지하는 대책을 세우는 데까지 신경을
써야 합니다.
건강한 가정
성경 본문: 시 128:1-6
5월은 가정의 달로 우리 나라와 교회 그리고 가정에서는 가정의 문제
를 말하게 됩니다. 가정의 제도는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가정은 신
성하여야 합니다. "가정은 행복을 저축하는 곳이요 채굴하는 곳은 아
니다. 얻게 위하여 이루워 진 가정은 무너질 것이요 주기 위하여 이루
워진 가정 만이 행복한 가정이다."(일본의 내촌감사의 말) 오늘의 가
정문제는 자식을 버리는 일,부모들은 버리는 일,이혼률의 급증 (우리
나라는 7쌍 중에 1쌍이 이혼)으로 인한 가정의 파탄으로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1) 표본적인 예수님의 가정
최초의 가정인 아담의 가정은 그들이 사탄의 시험으로 파괴가 되었
습니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도 그의 아들이빈다. 이러한 가정을 회복
케 위하여 예수님의 가정을 주신 것입니다. 요셉이라는 남자와 약혼한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낳게 하실때 신비한 과정을 통과하
였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으로(마 1:19) 말씀을 하셨으며 마리아도 천사의
지시로 잉태한 것을 알고 순종한 자입니다. 믿음으로 결례를 행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 갔으며 율법을 따라 교훈을 하였으며 선지서를 배
워준 것입니다. 노동을 신성시하여 목공의 일을 한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말씀의 배움과 노동의 사랑 도덕과 윤리의 깨끗한 가정이 예수
님의 가정입니다.
2) 건강한 가정의 비결
건강한 가정의 비결은 먼저 영적인 면이 좋아야 합니다. 본문에 "여
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였습
니다. 히브리 말에 경외하는 말은 "키베트"라고 하는데 이말은 사람의
내장 중 간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
다.
신명기 28:1- 이하에는 복을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말씀의 순종하면
자녀, 직업,세계의 민족 중에 뛰어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께서 집을 세울 때 그 집은 건강하다고 말씀합니다 (시 127:1) 마태복
음 19:6- 이하에서 한 부자 청년이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물음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 이때에 네가 있는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하늘이 보화가 있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부자청년 재물의 노예로 영적면을 부정하였습니다. 고
넬료의 가정은 잘 믿음으로 행복한 가정이된 것입니다.
3) 건강한 가정의 삶의 결과
본문 2- 에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으리라" 일을 할 수 있는
건강을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이제 까지 일
하시니 나도 일 한다"고 하셨습니다. 노동을 사랑한 예수님입니다. 바
울은 일 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31:1절 이하에서 행복한 가정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그의 아들을 향한 말씀으로 현숙한 여인에 대하여 말씀
한 것입니다. 노동을 사랑하고, 가정의 일을 잘 살피고, 자녀들을 잘
양육하고, 재산을 늘리고, 남편을 출세 시키는데 힘을 쏟고, 덕을 세
우며 칭찬을 받을때 그 가정은 복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는 행복한 가정은 자식은 감람나무 같다고,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평생의 예루살렘의 복을 누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호
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각 가정 마다 말씀에 의
한 삶에서 행복하십시다.
'▣가정의달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정의 달 설교 6편 (0) | 2012.05.02 |
---|---|
신앙의 대장부가 되라 (왕상 2:1-4) (0) | 2011.05.10 |
제목 : 왜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십니까? (0) | 2011.05.08 |
참된 부모 (0) | 2011.05.08 |
기독교의 가정관! (엡 5:22-25/6:1-4) (0) | 2011.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