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은혜를 입으면 (창 6:8)
이 시간에 “여호와께 은혜를 입으면”이라는 제목입니다. 홍수 심판에서 살아남은 사람 노아가 받은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노아는 어떤 사람인가? 노아에게 담겨 있는 메시지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은혜입니다. 본문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했습니다. 노아에 대해 그 어떤 말씀이 있다 해도 이 한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은혜를 입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다 됩니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으면?
1. 멸망에서 구원함을 받습니다.
창6: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특별히 노아와 가족을 구원해 주시는 장면입니다. 당시 그 많고 많은 사람 가운데 선택 받아 살아남는 사람은 오직 한사람 노아와 그 일곱 식구입니다. 얼마나 크고 큰 은혜입니까?
이처럼 세상에 똑똑한 사람, 권세 있는 사람, 잘사는 사람 많지만 특별히 우리를 창세전부터 선택하여 영생 얻는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 것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래서 엡2:8-9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2. 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창6:9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노아가 의인인 것은 자기 의 때문일까요? 노아도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가 의로운 것은 그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입었더니 죄는 멀리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딛2:11-13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다 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3. 은혜를 끼치게 됩니다.
노아의 이름은 어떤 뜻입니까? ‘위로자 회복자’라는 뜻입니다. 창5:28-29 “라멕은 일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노아를 세상에 나게 하실 때 이미 노아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노아가 삶에 지쳐 허덕이는 인생들에게 사랑과 위로를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 은혜를 충만히 입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추려나가기 어렵고 자기 일도 복잡한 세상에 남을 위로하며 산다는 것은 은혜 받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첫째도 은혜, 둘째도 은혜, 셋째도 은혜라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간직해야하겠습니다. 은혜 받을 시간을 다른 것에 빼앗긴다면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4. 하나님의 뜻이라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창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잣나무로 방주를 짓는데 어떤 파도와 폭풍에도 견딜 수만 톤 되는 배를 그것도 산 위에다 짓는다는 것 노아 개인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계에서 최고의 조선소와 기술을 가진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배는 용접이라든지 첫눈에 제품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조선소에서도 큰 배는 셀 수 없는 인력과 최첨단의 설비를 가지고도 몇 년씩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아 당시 거기 드는 비용이며 기술이나 연장이며 특히 산 위에다 짓는 것이니 어찌 가능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대로 역사해 주셨습니다. 때를 따라 기적으로 그만한 물질을 주셨고 그만한 인력과 기술을 주셨고 힘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 일을 마치기까지 도우시는 기적이 셀 수 없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 받으면 하나님의 뜻이면 불가능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느니라 했습니다.
5.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창7:7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온 가족이 노아의 말에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고 또 모두 함께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방주를 지을 때 노아 나이 480세였는데 산에다 방주를 지을 보통 사람이라면 누가 말을 듣겠습니까? 아들이라고 다 듣습니까? 아버지가 노망하셨다고 아무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어떤 일이 있어도 치매는 걸리지 않아야 합니다. 치매 걸리면 사람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친 사람 같은 어비지 말에 온 가족이 다 순종했습니다. 시집온 자부들까지도 다 힘을 합해 순종했습니다.
그 뿐 입니까? 방주 안에 수많은 짐승들 생각해 보세요. 안은 어둡지 파도는 치지 짐승들이 불안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소도 불안하면 그 튼튼한 소막을 뛰어넘더군요. 사자 같은 짐승은 다른 짐승을 잡아먹으려고 할 것입니다. 날아다니는 놈, 소리 지는 놈, 오줌 싸고 똥 싸고 노아 한 식구가 배 안의 수 만 가지 짐승들을 다 관리하기는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짐승들도 자기 성깔 쓰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죄란 은혜를 받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 모두 본질상 똑 같은 죄인인데 차이가 있다면 은혜를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 얼마나 더 받았느냐? 덜 받았느냐? 그 차이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께서 평안 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칭찬해 주십니다. 아름답다 하십니다. 사랑한다 하십니다. 상을 주십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예수 안에서 새 것이 되게 해주십니다.
살다보면 세상 불공평한 것 같지요? 어떤 사람은 죽도록 수고했어도 형통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핑핑 놀면서도 온갖 존귀와 사랑을 받습니다. 목회도 보면 어떤 사람에게는 나보다 수고하지 않아도 형통의 문이 열립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몇 배로 하고 수고하지만 잘 안 됩니다. 어떤 차이일까요? 은혜의 차이입니다. 배후에 기도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을 누가 당합니까?
그것을 탕자의 비유에서 봅니다. 형은 그토록 수고하고 절약했어도 염소 한 마리 대접 받지 못했지만 동생은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렸으나 살진 짐승을 잡고 잔치했습니다. 형이 크게 시험 들었습니다.
그러나 형이 오해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과 아버지의 은혜를 모른 것입니다.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입니다. 고기 먹고 싶으면 “양 한 마리 잡을래요.” 하면 그래라 할 것이고, "좋은 옷 입겠어요." 하면 그래라 할 텐데 그걸 모른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 이런 율법적 공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
6. 장성한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벧후2:5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의롭게 살아라. 회개하라. 외치는 일 쉬운 일 아닙니다. 치유 형통 평안 천국만 전하면 누구에게 핍박 받겠습니까? 이제는 죄를 버리고 의를 따르는 장성한 성도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영적 사역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불교는 마음공부를 외치는데 기독교는 마음공부에는 관심 없고 천당만 외친다고 비판합니다. 사실 불교 그것 무슨 마음공부랄 게 있습니까? 연탄은 씻어봐야 연탄이죠. 그래서 가장 타락하고 범죄율이 높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 예수 믿고 새 사람 된 사람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에게 마음공부라는 용어가 좋아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우리 기독교도 진짜 마음공부해야 합니다. 불교의 마음공부가 아닙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일을 세례 요한이 했고 예수님이 하셨고 제자들이 했습니다. 우리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노아는 은혜를 입었기에 의를 외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지금도 큰 은혜를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가 했습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 모두 노아처럼 날마다 은혜를 입는 성도 되어 이 죄악 많은 세상을 승리하고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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