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아 부모공경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육신의 부모님을 어떻게 공경하셨는지 잠시 살펴보면서 우리 자녀들이 주 안에서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하겠습니다.
1.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이유
1)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구약성경의 율법 중에서 그 근간이 되는 십계명 가운데 제 5계명입니다. 신약성경 여러 곳에도 부모공경은 성도가 계속하여 지켜야 할 계명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권위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부모의 권위를 존중하는 자가 참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습니다.
3) 부모공경은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엡 6:1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효는 인륜이 아니라 천륜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윤리, 변할 수 없는 윤리라는 뜻입니다. 하늘이 변하지 않는 이상 효의 윤리도 변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골 3:20에서도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모공경은 단순히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까지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부모공경은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4)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신약성경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엡 6:2‐3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에베소서에서 말씀한 ‘약속 있는 첫 계명’이란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된 아주 중요한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그 축복의 약속은 형통과 장수입니다. 그 축복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은 내세가 아니라 현세(‘땅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형통의 복, 장수의 복을 누리고자 하는 자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물론 이 땅에서 형통과 장수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자를 모두 불효자라고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약하게 태어나 병고로 시달리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복음 때문에 애매하게 고난을 겪고 생명까지 잃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할 때 부모를 거역하고 제멋대로 사는 자,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는 자는 형통하기가 어렵습니다. 시련을 자초하여 건강도 해치고 결국 자기 수명까지 단축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보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형통과 장수의 복을 누린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성도의 도리입니다.
2. 부모를 어떻게 공경해야 합니까?
1) 우선 부모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2) 마음뿐 아니라 적절하게 사랑과 감사의 표현을 해야 합니다.
3) 무슨 일이 있어도 부모님을 무시하거나 부모님께 화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
4) 부모님의 훈계를 달게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랑의 훈계이기 때문입니다.
5) 부모님의 건강과 평안을 위하여 늘 기도하는 것도 자녀가 해야 할 일입니다.
6) 부모님께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계신다면 하루빨리 신앙을 갖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으뜸가는 부모공경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상반되지 않는 한 최선을 다해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1에서는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부모가 동등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그러나 육신의 부모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의 뜻이나 말씀 모두가 진리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유교의 효도관과 다른 점입니다. 유교에서는 부모가 시키는 일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것만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은 아닙니다. 부모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을 부모가 요구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주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생각하며 주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 안에서 부모님께 순종하는 바른 태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부모공경에 있어서도 가능한 먼저 예수님의 모범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에 육신의 부모님을 공경했습니다. 지혜롭게 순종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육신의 부모님을 어떻게 공경하셨는지 잠시 살펴보면서 우리 자녀들이 주 안에서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하겠습니다.
3. 예수님의 부모공경의 본
1) 예수님께서 공사역을 하시기 전까지 (부모를 떠나기 전까지)
예수님께서 부모를 떠나 공 사역을 시작하신 때는 약 30세쯤 되셨습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한 가정에서 맏아들로 지내셨습니다. 그 30년의 세월을 어떻게 지내셨는지 성경은 대체로 침묵합니다만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유아 시절의 성장과정을 묘사한 구절입니다. 눅 2:40에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그리고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의 성장과정을 묘사한 구절이 뒤이어 나옵니다. 눅 2:52에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 두 구절에서 예수님의 성장과정이 건강하고 원만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가정에서 자기의 본분에 충실했음을 암시합니다. 부모님께는 효도하고 형제들과는 우애 있게 잘 지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친이셨던 요셉의 직업은 목수였는데 예수님도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목수일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모든 면에서 예수님은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가족들에게는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서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금방 보았던 누가복음 2장의 두 구절 사이에 예수님의 소년시절 때 있었던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되었을 때, 부모님을 따라 성전을 방문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들과 일행이 성전방문을 마치고 다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는데도 예수님은 성전에 남아서 율법 선생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토론하고 계셨습니다. 뒤늦게 예수님의 부모님이 아들이 따라오지 않은 것을 아시고 다시 찾으러 오셨습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아들을 찾은 모친 마리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어머님의 말씀에 소년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성경은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눅 2:51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여기에 앉아있는 우리 모두는 청소년시절을 지냈습니다. 그때에는 자의식이 강해집니다. 동시에 신앙도 자랍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부모님이 못마땅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왜 아버지와 어머니는 말씀대로 살지 않으실까?
신앙의 깊은 비밀을 모르실까? 내가 교회생활, 신앙생활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 왜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걸까? 주일에 교회에 좀 늦게까지 있으면 빨리 귀가하여 내일 학교수업 준비하지 않는다고 꾸중하실까? 주간 중에 시험이 있으면 주일 예배 빼먹는 것 은근히 두둔하시는데 정말 참 신앙인이라면 그래도 될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면서 반항심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부모님보다 하나님을 먼저 경외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말다툼을 합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대들기까지 합니다.
물론 부모님들께서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대부분 교회생활, 신앙생활을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참 뜻은 학생으로서의 본분인 공부에 충실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충실하게 공부했다면 왜 자녀들이 열심히 교회생활 하는 것 막으시겠습니까?
어쨌든 부모님이 못마땅하게 생각이 들 때 자녀된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모처럼 맞은 좋은 기회에 성전에서 율법 선생님들과 즐겁게 하나님의 말씀을 토론하셨지만 다시 부모님을 따라 고향으로 올라가 부모님을 잘 받들어 섬겼습니다. 예수님은 소년시절에 자기의 본분에 충실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본을 따르면 지혜롭게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2) 부모를 떠나 독립을 한 다음 (공사역 기간 중에)
30세쯤 되셨을 때 예수님은 이제 가정을 떠나 본격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소명에 충성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가장 좋은 길은 자녀들이 독립하여 의젓하게 사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자기 일에 충실한 것 그래서 좋은 결과를 얻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을 때 부모는 한없이 즐겁습니다. 자녀의 성공에 부모는 행복해 합니다. 예수님은 예외이셨지만 대부분의 자녀들은 때가 되어 가정을 이루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게 이룬 가정을 자녀들이 아름답게 꾸려갈 때 부모의 마음은 뿌듯합니다. 특히 자녀가 하나님의 소명에 충실할 때 크리스찬 부모들은 자녀가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부모님들이 자녀들의 신앙적 헌신을 늘 달갑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같은 경험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친과 형제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말리러 찾아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 12:48‐50).”걱정이 되어서 찾아온 모친과 동생들에게 예수님께서 아주 박절하게 대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제자의 삶에 가족들이 방해가 되기도 한다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마 10:34‐38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곡해해서는 안됩니다. 부모공경을 반대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우선순위의 왜곡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우선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부모와 형제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열흘 후에 성령이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임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120여명의 성도들 가운데 예수님의 모친과 아우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두 아우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예루살렘교회의 담임목사, 야고보서의 저자)와 유다(유다서의 저자)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육신의 부모와 아우들에게 죄를 범했다면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을 구주라고 믿었겠습니까? 부모에게 불손한 행동을 했고 형제들과 불화했다면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을 주라고 칭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을 미루어볼 때 예수님의 33년의 생애 동안 예수님께서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넉넉하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경외와 부모 공경을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예수님께서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유행했던 고르반 제도의 오용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막 7:10‐13에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적지 않은 건축헌금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 작정헌금을 제 때에 완납하려면 뭔가 지출을 줄여야 하는데 그래서 생각한 것이 부모님께 매달 드리던 용돈을 당분간 중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통보 받으신 부모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지만 서운해 하실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경쟁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가나 혼인집에서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첫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모친 마리아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살피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배치가 되지 않는다면 어머님의 청을 기꺼이 들어드리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적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모친을 동시에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도 모친께 효도를 다했습니다. 요 19:26‐27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요한)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사도 요한이 사도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산 것은 (90세 이상) 아마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잘 공경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를 상당한 기간 동안 돌보며 튼튼히 세우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받는 것은 부모공경이 단순히 자기 부모만을 잘 섬기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육신의 부모는 친가 부모는 물론 시가나 처가의 부모를 다 포함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신의 부모를 넘어서 공경해야 할 어른들이 있다고 합니다. 레 19:32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한 번은 부산에 일이 있어서 내려갔다가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 기사께서 예순에 가까우신 분이셨는데 요즘 청년들 버릇이 없어서 큰 일이라고 하시면서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지하철을 탔는데 노인을 보고도 학생들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아서 한 마디 하셨다는 것입니다. “얘들아, 저기 어르신들 보이지 않니!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도리가 아니니?” 그랬는데 학생 중 하나가 하는 말, “할아버지는 지하철 요금도 안 내고 공짜로 타지 않았습니까?” 자기는 요금을 내고 탔으니 자리에 앉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센 머리를 보고도 일어서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교회의 청년들은 달라야 합니다. 성경은 젊은이들이 어른들을 공경해야 마땅하다고 말씀합니다. 학교의 스승이나 직장의 상사나 나라의 지도자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과 어르신들 모두를 부모 같이 생각하고 공경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모두 부모가 있습니다. 육신의 부모가 세상을 떠났어도 우리 주위에는 부모가 남아 있습니다. 공경해야 할 어른들이 있습니다. 어른들을 공경하는 사회, 교회, 가정이 될 때 질서 있는 사회, 건강한 교회, 행복한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딤전 5:1‐2에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누가 우리의 가족입니까? 주 안에서 우리는 새 가족을 만났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새 가족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어르신들께 깍듯이 인사하십시오. 만날 때마다 인사하십시오. 금방 인사했어도 또 인사하십시오! 그리고 어르신들을 마음 깊이 존경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를 지켜오신 것 감사하십시오. 교회를 향하신 어르신들의 변함 없는 사랑과 헌신, 기도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결론
사람에게는 크고 작은 고통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쓰라린 고통은 가정의 불화입니다. 가정이 정상적이지 못할 때 다른 모든 것이 잘 되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가장 큰 고통은 자녀 때문에 받는 고통입니다.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잠 17:25).” 이 말씀은 역으로 부모의 가장 큰 소망이 자녀가 잘되는 데 있다는 뜻입니다.
자녀 여러분, 부모님은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할 수 있는 부모공경은 살아생전에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다음에 성대하게 제사를 지낸다고 효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은 후에는 효도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동안에 잘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분들은 가까운 웃어른들에게 잘하면 됩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들과 어르신들을 잘 섬길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닮으면 됩니다. 혹 이렇게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르시기 때문에,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부모공경을 잘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예수님이니까 더 힘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불완전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공경이 가능했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하게 교제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성령님의 도우심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모를 잘 섬기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부모공경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처럼 하나님도 경외하고 부모님도 잘 공경해야 합니다. 특히 이 한 가지는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부모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축복이 부모를 통하여 온다고 강조합니다. 부모와 어르신들을 잘 공경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내게 주시든지 내 후손들에게 주시든지 주께서 친히 약속하신 복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 일은 좀 미루더라도 부모공경은 뒤로 미루지 마십시오! 그리고 구체적으로 부모공경의 방법을 생각하고 오늘부터 실천하십시오! 이것이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는 길입니다. 그 축복은 이 땅에서 누리는 형통과 건강의 복입니다. 부모와 어르신들을 잘 공경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당대와 후대에 마음껏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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